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42)화 (42/63)

#42화

현경이 아란의 서신이 구겨질세라 방바닥에 곱게 펴놓고 있는데, 밖에서 조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 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술병 하나를 들어 보이고 조내관이 서있었다.

“이 마을에서 제일 가는 가양주라 합니다. 잠도 안 오는데 나리도 한잔하시지요.”

조내관은 앞서 걸어 관아 뒤편의 누각에 올랐다. 사방으로 트인 누각에 걸터앉으니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제법 서늘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조촐하게 술병 하나와 술잔 하나씩을 나누어 들고 앉아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술잔 속에 달빛이 찰랑였다.

“일찍 들어가시더니 여태 안 주무셨군요.”

“부인의 서신을 읽고 있었습니다.”

“서신이야 이미 앉은자리에서도 몇 번이나 읽지 않으셨습니까.”

현경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 와중에 또 현경이 품안에 고이 챙겨온 서신을 꺼내들자 조내관이 그 모습을 보고 어련하시겠냐며 크게 웃었다. 한바탕 웃다가 술잔을 비운 조내관이 현경에게 물었다.

“헌데, 판관나리께 한 가지 여쭈어도 됩니까.”

“말씀하세요.”

“그때 궁에서 하셨던 얘기 말입니다.”

“예.”

“어떻게 아셨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냥, 어쩌다 알게 된 이야기였습니다.”

“아 그저, 십 수 년도 더 된 이야기를 어린 나리께서 알고 계신 것이 궁금하여 여쭤본 것입니다. 문득 생각이 나서요.”

현경은 조내관이 갑자기 꺼낸 말에 놀랐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얼굴 표정을 가다듬었다. 조내관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아마 제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지요.”

조내관은 옛 일을 떠올리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세자저하의 아이를 잉태한 여인이 있다는 소문이 궁 안에 돌았습니다. 다들 헛소문이라고 쉬쉬했지만, 저는 알고 있었지요.”

“조내관이 알고 있다구요?”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궐내의 자물쇠를 담당했던 문지기 내관입니다. 그때 제가 야간 수문 담당이었는데, 지금 전하께서 세자셨을 때 잠행 가시는 날마다 제가 문을 열어 드리곤 했지요.”

“아.”

“언제부터였나 잠행 횟수가 잦아지신 걸 보고 아, 궁 밖에서 뭔가를 보셨구나 싶었습니다.”

“…….”

“해서 당시 상선 영감께 혼도 많이 났지요. 헌데 그때 전하께서도 어찌나 고집이 강하신지, 젊으셨을 땐 지금보다 곱절은 더하셨습니다. 안 된다, 안 된다 해도 결국엔 열어 드릴 수밖에 없었거든요.”

조내관은 그때가 생각나는 듯 허허 하고 얕게 웃었다. 현경은 내심 조내관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긴장이 되어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날엔가 전하의 호위무사에게 문을 열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지요. 궁 안에 소문은 사라졌고 그 무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

“문지기 내관은 문을 지나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 얼굴들을 보다 보면 알 수 있는 게 있지요. 이 사람이 이 문을 나선 후에 다시 돌아올 사람인지, 아닌지.”

“…….”

“왕실의 권위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다행히 조내관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긴 누가 왕과 현경의 관계를 상상이나 하겠느냐마는. 한참 조용히 잔을 비우던 두 사람은 시커멓게 넘실대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참, 그러고 보니 아란 아가씨께서 저를 기억 못 하시더군요.”

“부인을 아십니까?”

“그럼요, 옛날에 제가 동궁전까지 몇 번 모신 적이 있었습니다.”

현경은 문득 어린 시절 아란이 잠시 궁 출입을 했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세자저하의 배동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잠깐이지만 그러셨지요.”

“전 그때의 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어떠셨나요, 그땐.”

현경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반짝 빛이 났다. 조내관은 아란 이야기에 금세 얼굴이 풀어진 현경을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어린 시절의 아란을 떠올려 본다.

궁 안에서는 늘 어딘가 불편한 얼굴로 표정을 풀지 않던 소녀였다. 작은 체구에도 늘 긴장을 하고 있어 흐트러짐 없는 행동은 얼굴 표정만큼이나 늘 딱딱했다.

“그땐, 선비 같은 분이셨지요.”

누가 그 이제현 대감의 여식이 아니랄까봐 대쪽 같은 기운이 느껴지는 어린 소녀였다. 그 도도한 자태며 높은 학식에 과연 어떤 사내가 아란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두가 고개를 가로젓곤 했었는데.

“부인께서는 지혜롭고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운 분입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고운 자태야 말이 자자했지만 굳은 표정 탓에 대하기가 쉽지 않았던 규수였다. 그런 여인이 곱상한 어린 소년과 혼인을 하고 이리도 서로를 그리는 애틋한 부부가 되어 있을 줄이야 누가 상상을 했었을까. 아란 얘기만 꺼내도 수줍게 웃는 현경의 앳된 얼굴이 조내관은 재밌었다.

“그리도 좋으십니까.”

“좋다는 말로는 너무 박합니다.”

“나리, 거 표정 좀. 남들이 보면 사내가 채신머리없다 합니다.”

“조내관도 어서, 아.”

“어흠, 흠, 전 이만 들어가 봐야. 나리는 더 계실 겁니까?”

조내관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부산스레 술잔을 챙겨들자 현경이 소매로 입을 가리며 간신히 무안한 웃음을 감춘다.

“저는 좀 더 있다 들어 갈 테니 먼저 들어가 쉬십시오.”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조내관이 방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던 현경은 숨을 고르며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었다. 조용해진 누각 위에 파도소리가 바람처럼 지나다녔다.

저 바닷물 위로 아란의 서신 속 글자 하나 하나가 일렁이는 착각이 든다. 앞으로는 불어오는 바람에서라도 아란을 떠올려야 할지도 모르니 그 마음이 또 적적해 온다.

이 바람처럼 아란이 있는 곳에 금방이라도 가 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서 집으로 돌아가 그 작은 몸을 꼭 안고 편히 잠들고 싶은 마음뿐이다. 현경은 눈을 감고 지난 며칠간 지나온 길을 더듬었다.

숲길을 지났고 큰 산도 단숨에 넘는다. 말도 가마도 없이 삼백여 리를 바람처럼 가뿐히 걷는다. 도성 문을 지나고, 골목을 지나고, 집 대문을 넘어선다. 마루 위에 올라 안방 문을 열면 웃고 있을 그 사람 얼굴이.

덜그럭.

번쩍 눈을 떴다. 텅 빈 누각 위엔 저 혼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손에서 놓친 술잔이 바닥을 굴렀다. 술 한잔할 때는 좋은 벗 같던 달빛이 이젠 쓸쓸한 마음을 더 파고드는 것 같았다. 현경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오늘 따라 바람이 쉴 새 없이 설레는 것은

아마 그대를 새로이 깨닫고 있음을,

바람도 아시는가.

험하디 험한 비탈길도 구름처럼 쉬이 오르는 것은

아마 그대에게 가는 길이기 때문임을,

그대도 아시는가.’

현경은 방에 돌아온 후에도 그대로 끌어안고 잠들기엔 버거운 마음들이 있어 붓을 들어 종이 위에 조금 덜어 두었다.

왕은 책상 귀퉁이에 쌓여 있는 상소들을 한쪽으로 치워두었다.

그럴 듯하게 써놓았지만 모두가 비슷한 내용뿐이었다. 모두 종친의 방탕함을 징벌하여 왕실의 지엄함을 보여주었다고 아첨하는 자이거나, 사사로운 일로 유배를 보내는 것은 왕의 아집이라 익명으로 비난하는 교활한 자들이었다.

왕은 그날 후로 애써 모른 척하려 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받은 압송도사의 장계 보고에도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려 하고 있었다. 왕은 조용히 내관을 불렀다.

“궁 밖 날씨가 어떠한가.”

왕이 묻는 말에 구내관이 잠시 왕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서릿바람이 불었다 하니 서늘함보다 따뜻함이 그리울 무렵입니다.”

“강무는 아직 도성에 있는가.”

“이제현 영감에게 다시 기별을 보내겠습니다.”

“견명당으로 모셔라.”

며칠 전, 제현의 서신을 받고 급히 도성에 올라온 강무가 뵙기를 청했지만 냉정하게 거절한 왕이었다. 이제 강무를 만날 용기가 생겼나 싶어 내관은 곧바로 모셔오겠다는 말을 하고 편전을 나섰다.

소식이 늦어 현경이 귀양을 간 후에야 겨우 도성에 도착한 강무였다. 제현의 집에 머물며 몇 번이나 왕을 만나려 했던 강무는 이제 단념하고 다시 감자골로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왕의 부름을 받고 강무가 대문 앞에 나섰을 때, 강무를 마중하러 온 사람이 있었다.

“신 모암,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구내관은 강무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강무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주름이 늘고 그 몸집도 왜소해졌지만, 늘 또 다른 그림자처럼 왕의 곁에 있던 내관이라 강무도 금방 알아보았다. 강무는 그가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처음이었다.

숲길을 올라 궁의 뒤편으로 향했다. 지친 숨을 고르는 내관이 문을 열고 강무가 그 뒤를 따랐다. 궁 안으로 들어서며, 강무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어두운 견명당 안에 왕과 강무가 마주 앉았다. 한동안 흐르던 침묵에 왕이 먼저 입을 떼었다.

“꿈에 그 여인이 나왔습니다.”

왕은 자신이 꿨던 꿈 이야기를 강무에게 들려주었다. 강무는 가만히 왕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울고 있었는데.”

강무도 이젠 기억 속에 흐려진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강무가 아는 여인의 얼굴 또한 우는 모습뿐이었다. 현경이가 걱정되어 찾아 왔었으리라. 강무는 눈을 감았다.

“꿈에서도 아이의 얼굴은 보여주지 않더군요.”

“…….”

“태어나자마자 그리 갔으니, 눈을 제대로 떴으려나.”

강무의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손이 살짝 떨렸다. 말을 꺼내는 왕의 눈은 강무를 향했으나 공허할 뿐이었다.

“여자아이였다 들었습니다, 형님은 아이의 얼굴을 봤습니까?”

“…….”

“살아 있었더라면 아마 형님 아들과 또래 아니겠소.”

“전하.”

“그 여인을 닮아 하얗고 고왔을 테지, 살아 있었으면.”

“저를 원망하십니까.”

왕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강무를 바라보았다.

“예, 형님을 원망했습니다.”

“…….”

“그러는 형님이야말로 나를 원망하십니까.”

“…….”

“형님도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강무는 왕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 딸을 눈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는 왕이, 심지어 죽이려 까지 했던 어리석은 이 아비란 자가 가여웠다.

현경이 자신의 딸인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그 마음에 더 가혹해질 것인가. 이제 와 밝혀진들 허망한 한탄만으로 남은 지난 세월을 되물어 줄 수 없으니, 더 이상 모두가 아프지 않도록 자신이 침묵하는 게 맞지 않을까. 강무는 생각했다.

“형님의 아들이 뭐라는지 아십니까, 두 번 다시 궁에 발을 들일 수 없게 해달라 합니다, 더 이상 나를 보필하기 싫답니다.”

“…….”

“형님도 그리 생각했습니까.”

“전하.”

깊은 한숨을 뱉는 왕의 어깨가 가라앉았다.

“잘 알겠소, 놓아 드리지. 왕의 자리란 게 참 부질없소.”

“…….”

“강녕하시오, 형님.”

“전하도 강녕하십시오.”

왕에게 예를 갖추고 강무가 방을 나섰다. 서로가 건넨 말은 마지막 작별인사와 같았다. 궁을 나서는 강무를 따라 구내관이 배웅을 나섰지만 그 문턱을 넘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분께는 여기까지만 배웅을 하겠습니다.”

“상선께서는 계속 전하의 곁에 계시길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강무는 궁을 빠져나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다시는 돌아올 리 없는 이곳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듯.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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