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41)화 (41/63)

#41화

귀양 가기 전 날, 왕은 현경의 마지막 면회를 허락해 주었다. 옥사로 들어선 아란은 벽에 기대어 고개를 묻고 웅크려 있는 현경에게 다가갔다.

현경이 가까워질수록 아란은 목이 메여 오고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현경이 저렇게 작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아란은 금방 눈물이 차올랐다.

“서방님.”

아란의 목소리에 현경이 슬쩍 고개를 든다. 아란을 보자 커다래진 눈이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두 손이 눈을 문지르고, 다시 눈을 뜬 후에도 눈앞에 보이는 아란의 모습에 현경은 조심스레 아란에게 다가왔다.

아란이 나무틀 너머로 손을 뻗어 천천히 현경의 얼굴을 매만졌다. 현경은 아란의 손길에 그제야 안심한 듯 숨을 내쉬었다. 감은 눈 밑으로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헛것이 보이는 줄 알았습니다. 부인이 맞네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읊조리는 현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찌 눈을 뜨고 저를 안 보십니까.”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어요.”

아란이 애석해하자 현경은 제 얼굴에 닿은 아란의 손을 찾아 쥐었다. 아란도 그런 현경을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불안정하던 숨소리가 차츰 진정이 되자 현경이 눈을 떴다.

아란과 눈이 마주치자 현경이 슬쩍 웃는다. 거짓말처럼 이 순간만큼은 아란이 앞에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란은 웃고 있는 현경이 괜히 더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다가도 그동안 혼자서 힘들어 했을 생각에 아란은 가슴이 미어졌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은 왜 현경을 붙잡고 묻지를 못 했을까. 무슨 일 있냐고, 나에게 뭘 숨기냐고 다그치기라도 했다면. 아마 현경은 결국 모든 걸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서로 아프지 않았을 텐데.

“근데 부인 얼굴이 많이 야윈 것 같아요.”

“이제야 제 얼굴이 보이십니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던 아란을 보며 현경이 걱정스레 말하자, 아란이 밉지 않게 타박을 놓았다. 아란의 말에 현경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전 늘 부인께 죄스럽기만 합니다.”

“서방님이 제 속 썩이는 일이야 어디 하루 이틀이십니까.”

“곁에 있겠다 약속했는데, 송구합니다.”

“이렇게 또 절 혼자 두고 멀리 가시네요.”

현경은 아란의 손을 살며시 끌어다 제 입술에 대고서 눈을 감았다. 말하지 않아도 아란은 현경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늦지 않게 돌아오겠습니다.”

기다린다는 아란의 말에 현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단한 귀양길에 몸 상하지 않기를, 아란이 마음으로 간절히 바랐다.

다음날 어슴푸레한 새벽녘, 현경과 조내관은 포승줄에 묶인 채로 옥사에서 나왔다. 밖에는 병조의 나장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성문을 지나자마자 나장들은 현경과 조내관의 포승줄을 풀었고 현경과 조내관은 말에 올랐다. 종친과 왕실의 내관이라는 신분 덕분에 유배지까지 말을 타고 내려갈 수 있었다. 나장들도 감히 두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격식을 갖추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미리 말씀 드리긴 어렵습니다. 그저 정해진 시일 안에 압송도사를 만나야 하니 서둘러야지요.”

나장들은 매섭게 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묻는 말에 모든 답을 알려 주지는 않았다. 현경은 도성 밖을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올 기약 없이 점점 멀어지는 도성문을 보니 마음이 서글퍼 현경은 눈시울을 붉혔다.

말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동안 날이 어두워지자, 근처 군의 관아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나장들이 앞서 관아에 들르니 군수가 달려 나와 일행을 모셨다. 아예 술상을 들여놓고서 대접을 하기까지 했다.

나장들은 익숙하게 군수의 접대를 받아들고 술잔을 기울였다. 현경이 어리둥절해 있자, 왕의 곁에서 수많은 이들이 귀양 내려가는 것을 지켜봐온 조내관이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놀라셨습니까.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나 귀양길에 병들어 죽거나 하지 실상은 다 이렇습니다.”

“귀양 내려온 죄인을 이렇게까지 대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제든 전하가 부르면 돌아갈 사람들이니, 지방수령들이 훗날을 위해 연줄을 대느라 이리 극진히 대접을 해두는 것이지요.”

“…….”

“게다가 종친이신데요.”

현경은 상 위에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음식을 무던하게 보며 아란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그 야윈 얼굴을 하고서 저에게 되레 몸 상하지 말고 조심하라고 걱정하던 아란을 떠올리면 이렇게 대접 받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현경은 입맛이 없다며 음식을 입에 거의 대지 않았다. 그런 현경의 모습에 초조해하는 것은 그 지방의 군수였다.

“판관 나리, 혹시 따로 드시고 싶은 음식이라도.”

관직의 품계로는 판관보다 군수가 더 높았으나 돈후부 종친이라는 이유로 수염이 덥수룩한 군수는 현경의 눈치를 보았다.

“음식보다는 지필묵을 좀 쓸 수 있습니까.”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군수가 사람을 시켜 지필묵을 가져오라 일렀다. 현경은 얼큰히 취한 나장들에게서 슬쩍 물었다.

“혹시 서신 한 통 보내도 됩니까.”

“귀양길에 기생질 하는 양반들도 널렸는데요, 상관없습니다.”

내일은 늦지 않게 목적지에 당도해야 한다며 나장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조내관도 먼저 들어가 쉬겠다 했다. 현경도 관비의 안내를 받아 잘 방에 들어왔다. 얼마 후, 현경의 방으로 관비가 지필묵을 들여왔다. 현경은 붓을 들어 아란에게 서신을 썼다.

‘한낮의 더위가 여전하니

부인과 멀어지는 제 마음만큼이나 말의 걸음도 느린가 봅니다.

이 서신을 받으실 즈음에는 제대로 밥술은 드시는지,

잠은 잘 주무시고 계신지요.

지난밤 보았던 부인 얼굴이 꿈이었는 듯 벌써 그립습니다.

저는 분에 넘치게 잘 지내고 있으니 제 걱정은 마시길 바랍니다.

아직 어디로 가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머무르게 될 곳이 정해지거든 또 안부를 여쭙겠습니다.’

서신을 봉하여 관비에게 전하고는 현경도 자리에 누웠다. 낯선 곳이라 현경은 잠을 설쳤다. 아란 없이 잠들어야 하는 앞으로가 더 걱정이었다. 몸은 노곤하였으나 현경은 쉽게 잠들지 못 했다.

다음날 현경 일행은 한참을 또 남쪽으로 내려가다 역참에 들러 말을 먹이고 다시 길을 떠났다.

“곧 있으면 마을이 보일 것입니다.”

나장의 말에 현경은 제 고향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몸으로 느꼈다. 현경은 문득 봉우화를 찾아 주위를 살폈으나, 날이 추워 시들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음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압송도사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판관 나리는 고향이 어디십니까.”

“감자꽃이 많이 피는 작은 산골마을입니다.”

“그럼 바다를 본 적이 없겠군요.”

“예, 가까이서 본 적은 없습니다.”

압송도사는 맡은 직책에 비하여 서글서글하고 말 걸기를 좋아했다. 엄중한 귀양길이 아닌 만큼 압송도사가 부리는 말도 걸음이 빠르지 않고 여유가 있었다.

“그럼 이 마을에서 며칠간 머물기로 하지요, 관아 누각에 오르면 바다가 보입니다.”

압송도사의 말처럼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 관아로 향하니, 그 길목부터 바다 내음이 가득했다. 역시나 이곳에서도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현경은 편히 잠드는 날이 거의 없었다.

현경이 벽에 기대어 밤을 지새우고 있으면,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와 함께 아란에 대한 생각들도 끝없이 밀려 들어왔다.

마을에 머무른 지 여러 날이 지났다. 압송도사는 길을 재촉할 생각은 않고 매일같이 장계를 쓰느라 바쁜 와중에, 현경은 겨우 아란에게서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낯선 곳에서 쉬이 잠들지 못하실 분 생각에 저 또한 어찌 편히 잠을 이루겠습니까.

사내들뿐인 곳에서 지내시기에 혹 어려움은 없는지, 곁에서 살피지 못해 애석할 뿐입니다.

서신을 받고서 기쁜 마음을 어찌 다 표할까 했으나,

서방님 계신 곳을 모르니 답답한 마음만 더합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야, 말로 다하기 힘듭니다.’

현경은 아란의 서신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이렇게나 오래 떨어져 있던 적이 없었으니, 서로 서신을 주고받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란의 필체도 현경의 눈에 새삼스러웠다. 간혹 아란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때 잠깐 곁눈으로 본 것이 전부였기에, 현경은 아란의 모습을 닮은 정갈한 글씨를 따라 눈을 굴렸다. 이 편지를 써내렸을 아란의 작은 손과 평온한 얼굴로 방 안에서 책을 읽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란의 짧은 서신에도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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