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아란은 홍옥이 나간 후 지친 몸을 보료에 뉘였다. 며칠간 설쳤던 잠이 이젠 머리만 대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란이 겨우 눈을 붙이고 잠에 들려 할 때,
“아이고, 마님!”
마당에서 노복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제발 어리석은 선비를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시끄럽다, 너희도 함께 죽고 싶으냐.”
구내관과 조내관의 간곡한 청에도 왕의 분노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괘씸한 놈, 괘씸한 놈. 왕은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
“감히 그놈이 뭘 안다고, 감히.”
현경이 하옥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제현이 급히 입궐하여 전하를 뵙길 간곡히 청하였다. 왕은 그 말을 애써 무시하려다 나이 든 스승에 대한 예로 결국 제현을 편전에 들이라 했다.
“전하.”
“스승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돌아가시오.”
제현은 왕 앞에 앉아 납작 엎드려 고했다. 왕은 그 고고하고도 엄한 스승이 자신 앞에 저렇게 자세를 낮추어 비는 모습에 마음이 불편했다.
“사위가 다 죽게 생겼으니 스승의 위엄도 없는 것이오?”
“전하, 어찌 이러십니까.”
비죽거리는 왕의 말투에 제현은 깊이 탄식하였다.
“스승님이 그놈에게 그리 말했소?”
“무엇을 말이십니까.”
“내가 아꼈던 여인 하나 지키지 못했던 비겁한 놈이라고 말이오.”
“전하, 그것은…….”
제현은 왕의 말에 크게 놀랐다. 십 수 년간, 왕이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왕은 그날 침전으로 향하던 자신을 두고 강무가 궁 밖으로 나간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리석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왕은 그 당시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라는 이름 뒤에 자신을 숨겼다.
“그 일은, 맹세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 물러가시오.”
“제발,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전하.”
그렇게 당시의 사건을 아는 이도 거의 남지 않은 지금, 이제 와 갑자기 나타난 강무의 아들이란 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왕은 큰 충격을 받았다. 현경이 했던 말이 왕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왕은 제현의 외침에 눈을 질끈 감았다.
현경이 하옥됐다는 소식에 아란은 몇 번이나 혼절했다. 그러다 겨우 눈을 뜨고 몸을 가눌 정신이 들자마자 현경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방을 나섰다.
아란이 관아의 옥사로 찾아갔지만 부모가 아니면 면회를 할 수 없었다. 가진 것을 다 털어 나졸에게 재물을 쥐어 줘도, 손바닥이 닳도록 빌어도 봤지만 아란은 옥사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망연자실해 있는 아란에게 조내관이 다가갔다. 아란은 집 앞에서 현경과 함께 있던 덩치 큰 사내를 기억하고 있었다.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조내관은 품속에서 현경의 미색 도포를 꺼내 보였다. 아란은 직접 지어준 미색 도포의, 이제는 낡아 버린 옷깃을 매만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통증이 느껴지도록 가슴이 아려왔다. 현경의 도포에 얼굴을 묻으니 금방 도포가 눈물로 젖어들었다.
조내관은 그런 아란을 가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울음을 삼킨 아란이 조내관에게 물었다.
“누구시기에, 이걸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판관 나리와 함께 일했던 조내관이라 합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만,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미처 막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송구하다는 말은 아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란에게만큼은 언제나 숨김없이 마음을 표현하기 좋아하던 현경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입을 다물고 불안에 떨며 끌어안았던 그 비밀이 대체 무엇인지. 그걸 알 수가 없어 아란은 가슴이 아릴 만큼 답답했다.
“내관이라 하셨지요.”
“예.”
“전하를 뵐 수 있게 해주세요.”
아란의 머릿속엔 어떻게든 뭘 하든 현경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왕은 침전에 누워 아주 오래전 가슴에 묻었던 한 여인을 떠올렸다.
하얀 얼굴만큼이나 맑게 웃던 여인이었다. 부모를 갑작스레 여의고 홀로 집 앞 야산에서 약초를 캐어다 팔던 그 여인은 호위무사를 따돌리고 몰래 담을 넘다 다친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었다.
“의원도 아니면서.”
“어린애도 아니면서, 나리는 그러게 담을 왜 넘습니까.”
괜히 민망하여 깐족대던 자신에게 감히 한 마디도 지지 않던 당돌한 소녀였다. 그러면서도 이내 기다랗게 땋은 댕기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싱긋 웃어 버리는 그 상냥함에 푹 빠졌었다.
무섭게 빠져 들었고, 그래서 그 여인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줄도 몰랐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 여인은 벼랑에 매달려 떨고 있었고, 자신은 궁 안의 시선들이 두려워 그 여인의 손을 잡아주지 못 했다. 그날도 강무가 나가는 이유를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여 그냥 보내고 말았다.
흘러간 시간 속에 잊고 있었다. 잊을 수 없었지만 잊었다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왕의 꿈속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 여인이 찾아왔다. 왕 앞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여인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안 됩니다.’
왕이 조심스레 다가가니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뭐가 그리 서럽고 애통한지 앉은 채로 눈물만 펑펑 쏟으며 울고 있었다.
‘뭐가 안 된단 말이냐.’
‘안 됩니다.’
왜 우냐 물어도 그저 안 된다, 안 된다 하기만 하는 여인에게 왕이 손을 뻗으려 하니, 분명 눈앞에 있는데도 닿지 않았다. 눈앞에 있던 여인은 어느새 저만치 멀리서 울고 있었다.
‘그만 울어라.’
손을 뻗어 봤지만 역시 닿지 않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왕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짐승처럼 울음소리만 뱉었다. 그 순간 잠에서 깼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르게 얼굴이 축축했다. 왕은 마음이 어지러워 이마를 짚었다.
“전하, 죄인 강현경의 처가 뵙기를 청하옵니다.”
“장인에, 처까지. 아비도 곧 오겠구나.”
마음이 어지러워 생각에 잠긴 왕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돌아가라 해라.”
“전하, 부디.”
“시끄럽다.”
“전하.”
“한 번 더 고하면 조내관의 목을 치겠다.”
“…….”
왕은 지난 밤 꿈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 곁에 잠자코 서 있던 구내관이 굳은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부디 전하께서는 지아비를 사경에 둔 가여운 지어미의 말에 귀 기울여 주소서.”
“모두 간악한 것들이다. 과인의 성의를 배반하고 오만하게 굴 땐 언제고.”
구내관이 작게 탄식했다. 평생 왕을 곁에서 모신 내관은 모든 것을 알고도 입을 다무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는 자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째서 소중히 여겨 주는데도 왜 다들 나에게서 도망치지 못해 안달인가.”
“그들은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니.”
“그들은 전하의 곁에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그들을 벼랑 끝에 몰아 손을 놓으시는 것입니다.”
이마를 짚고 있던 왕이 눈을 부릅뜨고 구내관을 노려보았다.
“상선은 죽음이 두렵지 않아 과인을 함부로 비난하는가.”
“노추한 소신의 목을 벤들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닥쳐라, 내가 못 벨 것 같으냐.”
“본래 죽음을 지척에 앞둔 자는 비록 노망이 들지어도 아첨하지 않사옵니다.”
“그만하라, 상선마저 내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느냐.”
노기 어린 표정으로 구내관을 쏘아보던 왕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구내관은 조용히 문 밖에 선 조내관에게 아란을 들이라 말을 전했다.
“조내관은 과인을 섬기는가, 아니면 여기 있는 상선을 섬기는가.”
왕이 경고하자, 문을 열다말고 조내관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결심한 듯 심호흡을 했다.
“그 문을 마저 열면 역모죄를 물을 것이다.”
“전하, 소신은 전하를 모시는 것이 평생의 명예이자 영광이었습니다. 하여, 지엄한 왕명을 받들지 못하고 전하의 신의를 저버린 것에 대한 속죄로 이 가여운 백성의 말이 끝나거든 제 목을 내놓겠습니다.”
조내관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란과 함께 왕 앞으로 나섰다. 왕의 무거운 한숨과 함께,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파리한 얼굴로 아란이 왕 앞에 엎드려 앉았다.
“그래, 그렇게 싫어하던 궁에 제 발로 찾아들어 온 기분은 어떠하냐.”
“전하.”
“네 서방을 살려 달라 말하려 왔거든, 돌아가라.”
“전하,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왕은 고개를 들어 아란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욕심인 걸까, 예전부터 애정을 주고 탐을 냈던 이들은 모두 저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는 것 같았다. 왕은 그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세자빈 간택에서 왕실을 능멸한 것으로 모자랐나.”
“…….”
“네 서방이란 자까지 이제 나를 능멸하는구나.”
아란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지난밤 꿈속에서 울던 여인을 생각나게 해 왕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다.
“울지 마라. 감히 내 앞에서 울지 마.”
여인이 슬퍼했던 것처럼 아란도 슬퍼했다. 울고 있는 아란이 꼭 꿈속의 여인 같았다. 아란의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왕은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제가 어찌하면 전하의 노여움을 풀 수 있겠습니까.”
“그럼, 네 서방 대신 목숨이라도 내놓거라.”
“부디, 절 대신 벌해 주소서. 가여운 분입니다.”
망설임 없는 아란의 대답에 왕은 헛웃음이 났다. 지금 자신의 말 한마디에 목이 달아날 자들이 대체 몇 명인가. 제 목숨 달아날 줄 모르고 누가 누구더러 가엽다 하는 것인가. 왕은 웃고 있었으나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널 죽이고 그 자를 살리면, 그 자도 결국 똑같아질 것이다.”
과거의 나와 같이 말이다. 왕은 멍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된다면 현경은 더 이상 왕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현경도 지난날의 왕처럼 괴로운 기억을 묻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겠지만.
왕은 자신에게 닥쳤던 그 괴로운 일을 반대로 다른 이에게 행하려 하니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왕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젓다가 아란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말없이 아란이 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왕이 내관을 불렀다. 짧은 침묵 뒤에 비장한 표정으로 조내관이 방에 들어섰다.
“내일 해가 뜨기 전에 그놈을 귀양 보낼 것이다, 그리고.”
왕의 말에 아란이 고개를 들었다. 조내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란은 그간 놀랐던 마음이 복받쳐 작은 몸을 떨었다. 조내관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기쁜 표정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전하 성은이 망극…….”
“하나 더.”
“…….”
“어명을 거역한 네 놈도 함께 보내겠다.”
어명으로 참수형 대신 귀양으로 감형이 되자 현경은 다른 옥사로 옮겨졌다. 그래도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며 조내관은 하옥되는 와중에도 아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