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36)화 (36/63)

#36화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린 이 자와 어사를 수행했던 자가 지금도 모여 작당을 하는 게 아닌가, 전하께서 미심쩍어 하십니다.”

얼마 전, 왕이 파견한 어느 암행어사가 지방관 세 명 정도를 강직하고 명석하다며 칭찬하고 후한 포상을 내려야 한다는 서계를 올렸다고 한다. 하여 왕은 그 말대로 그들을 승진시키고 포상을 내렸는데, 그중 나라의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의 관리가 된 지방관 하나가 특히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그 자가 들어온 후로 왕도 호조의 재정 보고에 대해 어딘가 기이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거기에 호조 판서까지 관여되어 있는 것 같아서, 이들이 모이는 곳이 어디이고 그들이 만나는 것이 과연 사실인지 살펴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이제 곧 입궐하시면 돈후부로 가 명단을 올리시고, 임무에 전념하시면 됩니다.”

“저, 근데 조내관.”

“예, 나리 말씀하십시오.”

“은밀한 기별이라더니 너무 집 앞에서 대놓고 떠드는 것 아닙니까.”

“잠시 길을 지나다 담소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의심을 피하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말을 전하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임무를 문서로 남겨서도 안 되어 이럽니다.”

그때 열린 대문 사이로 현경이 보이자 아란이 나와 보았다.

“서방님? 손님이 오셨습니까.”

“아, 아뇨 부인, 들어가 계세요, 저도 이제 막 들어가려던 참입니다.”

아란의 등장에 현경이 당황하여 아란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서방님’이라는 말에 내관이 아란을 보는 눈빛이 조금 변했다. 현경에게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가던 아란이 밖에 있던 낯선 사내를 돌아보았다. 저 자는……. 조내관은 잠시 현경의 집을 훑어보다가 황급히 장터 쪽으로 사라졌고, 아란은 어디서 본 듯한 낯선 사내의 얼굴을 기억 속에서 더듬어 보았다.

“혹시 그 덩치 큰…….”

“그, 글쎄요, 그저 집 앞을 지나던 행인인 듯합니다.”

아직 입궐할 때까지는 시일이 좀 남았지만, 현경은 요즘 들어 사람들이 은밀히 모이는 장소가 어딜까 고민하며 가끔 거리로 나오곤 했다.

시끌벅적한 대로를 지나고 한적한 골목도 지났다. 장터에 나온 김에 아란에게 줄 선물이 뭐 없을까 현경이 구경을 하는데 누군가 ‘나으리!’ 하고 부른다. 현경이 돌아보니 홍옥과 다른 기생들이었다.

“아, 오랜만입니다.”

“나으리, 경사가 있으셨는데 축하주 하러 오시지 않으시구요.”

“혼인하시더니 발길을 뚝 끊으셔서 저희들이 서운합니다.”

서운하다고 앙탈을 부리는 기생들 뒤에서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던 홍옥도 현경을 보니 반가운 기색이었다.

“이제 관직에 나가셨으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려거든 기방만한 곳이 없지요.”

홍옥의 말에 현경은 뭔가 번뜩이는 얼굴로 홍옥을 바라보았다.

“아, 그렇겠군요.”

현경이 대뜸 홍옥에게 고맙다 인사를 하고 서둘러 집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홍옥과 기생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기방으로 돌아갔다.

처음 입궐하는 날이 되자, 아란이 곱게 수놓은 흉배를 단 관복을 입고서 현경은 궁의 뒷문이 아닌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돈후부로 가 인사를 하고 그 명단에 이름을 올리니, 사람이 많지 않은 데다 종친끼리도 서로에게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라 신참례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현경은 잠시 돈후부 건물을 서성이며 언제 퇴궐을 하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처음엔 관복 입고 출입패를 멋들어지게 내보이며 입궐하니 은근히 설렜는데, 하는 일도 없이 궁 안에 있으니 그것도 금방 별 볼 일 없어졌다.

얼른 임무를 끝내고서 부인께 남쪽으로 멀리 유람이나 가자 할까. 현경이 그런 생각을 하며 중문 옆 기둥을 지나는데, 언제 있던 것인지 조내관이 불쑥 나타나 현경을 불렀다.

“열흘 안에 서계를 올리라구요? 너무 촉박한 것 아닙니까.”

“느긋한 비밀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하셨습니다. 나리께서도 일을 빨리 마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왕의 명령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만, 어딘가 전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이라 넘기는 현경의 마음이 조금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현경은 퇴궐하여 집에 돌아오자마자 관복을 벗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입궐 첫날이라 현경이 또 신나서 실컷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을 거라 생각했던 아란은 급한 일이 있다며 눈 깜짝할 새에 나가 버리는 현경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딜 저렇게 급히 나가시는지.”

현경은 일단 무작정 기방으로 가 기다려 보기로 했다. 홍옥의 말대로 은밀히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은 기방만한 곳이 없을 터였다.

현경이 홀로 기방에 나타나자 잠시 기방이 들썩였으나, 현경은 기방의 입구가 가장 잘 보이는 작은 방을 하나 잡고 앉아 예의 대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난날 형님들과 함께 술 마시러 왔을 때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는데 이렇게 앉아 눈여겨보니 과연, 입구로 들어서는 자들 중엔 현경이 오늘 궐 안에서 봤던 낯익은 얼굴들이 꽤나 보였다.

첫날인데도 어쩐지 촉이 오니, 일에 연관된 자들의 얼굴만 익혀 둔다면 크게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어갈 무렵 집으로 돌아오니, 아란이 안방에 앉아 현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경은 괜히 도포 자락을 털어내며 그 앞에 가 앉았다.

“부인,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말도 없이 나가시거든 믿고 기다려 달라 하셨으니, 그리 해보려 노력 중입니다.”

“…….”

그 말이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져 현경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럴수록 현경은 조내관의 말을 되새겼다. 아란 앞에서는 거짓말도 침묵도 괴로우니, 빨리 증거를 잡아 이 고비만 넘기고 털어내 버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판관은 그 품계가 조회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 현경은 아침 일찍 입궐하면 조회가 열리는 편전에 끼어들어가 그곳에 모인 관료들의 얼굴을 익혔다.

조회가 끝나면 궁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며 호조 판서와 그 호조 관리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가끔 튀어나오는 조내관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조내관이 왜 여기에.”

“세자저하의 탄신 연회에 돈후부 종친들은 반드시 참여해야 합니다, 나리께서도 너무 그리 두리번거리지 마시고 연회장으로 가시지요.”

그러고 보니 궐 안은 세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 때문에 분주했다. 궁의 행사를 담당하는 예조와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의 관리들이 그 중에서도 특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내관은 말을 전한 후 공손히 인사를 올리는 척하며 슬쩍 현경의 소매 쪽으로 무엇인가를 건네고 사라졌다. 현경이 잠시 주위를 살피다 뒷간에 몰래 들어가 소매 춤을 확인했다.

조내관이 꼬깃하게 접어 넣어둔 것은 암행어사 직을 수행했다던 자의 용모파기였다. 이렇듯 기한이 촉박한 것이 미안하여 그러는지 가끔씩 건네받는 정보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어째 한편으로는 궁 안에서 조내관의 감시를 받는 것 같아 현경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세자저하, 지극한 복을 누리소서.”

궁의 뜰 앞에 모인 문무백관들이 올리는 하례에 세자는 왕이 내린 술을 받아 마셨다. 왕실의 큰 행사답게 오전 내내 예를 갖춘 의식이 끝나고 생일을 맞은 세자를 위한 연회가 열렸다.

어찌 됐든 종친의 신분이 되다 보니 현경도 세자가 앉은 자리에서 제법 가까운 곳에 앉아 꼼짝없이 연회를 지켜보게 되었다. 현경은 슬쩍 고개를 돌려 단 위에 앉은 왕을 바라보았다. 가장 높은 곳에 왕과 왕비가 앉아 있고, 그 앞으로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두 명의 후궁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현경은 마음이 괴상하여 금방 눈길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괜히 마음이 어지러웠다.

시간이 조금 지나 왕과 왕비가 자리를 떠나자, 세자는 지루하고 엄숙하게 이어지던 연회를 멈추었다. 세자는 축시를 읊던 나이 든 신하를 물리고 기생들을 뜰에 올렸다. 그 중에서도 홍옥이 무대 가운데에 앉아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그제야 세자의 입가에 비죽 웃음이 걸렸다.

홍옥의 거문고 가락에 현경도 내심 감탄하였다. 홍옥이 거문고를 잘 탄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그 모습을 보는 것은 현경도 처음이었다. 거문고만 내려다보던 홍옥의 눈길은 간혹 이 자리의 주인공인 세자 대신 현경 쪽을 향했다.

그 후로도 오후가 되면 퇴궐하여 곧장 기방으로 달려가 사람들을 지켜보는 현경의 하루가 계속되었다.

처음엔 방만 잡고 앉아 대문 쪽을 노려보고 있으니 오히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의심을 하는 듯하여, 현경은 좀 더 요령을 부리기로 했다.

형님들께 기별을 보내 보아도 관직에 나간 후로 세 형님들은 기방 출입을 자제하는 모양이었다. 형님들은 오히려 갑자기 기방 출입을 자주 하는 현경을 우려하여 충고하기도 했지만 현경은 그저 어색하게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현경이 홀로 기방에 찾아가 술을 마시고 기생들과 어울린 지 며칠이 지났을까, 매번 하루를 허탕을 치는 것 같아 작전을 바꿔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드디어 현경의 눈에 용모파기로 확인했던 자가 기방 입구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남루한 차림의 사내는 두리번거리며, 기방 입구 옆에 늘어선 행랑채 같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현경은 깜짝 놀라 마시던 술잔까지 놓치며 눈을 부릅떴다. 곁에 있던 기생들은 현경이 술주정을 부리는 줄 알고 까르르 웃었다.

“무얼 보시고 그리 놀라십니까, 나으리.”

“저어기 저 방은 못 보던 곳인데, 저기 뭐 좋은 게 있소?”

한참 술을 마시다 보니 현경도 혀가 굳어 말이 어눌하게 나왔다. 현경은 지나가는 말 하나라도 더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일부러 기생 두 명을 불렀는데, 아까부터 하나를 물으면 두세 잔씩 술을 마시게 해서 알딸딸하던 차였다.

“요즘 나으리께서 궁금한 게 많으시네.”

“한 번 당겨 보셔요, 옷고름 푸르듯 쇤네가 이야기를 술술 풀어 드릴 테니.”

한 기생이 제 옷고름을 현경의 손에 쥐어 주며 요염하게 웃었다. 기생들의 희롱에 현경이 곤란해 하고 있는데, 때마침 방문이 열리고 홍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리는 내가 모실 테니, 이만 나가 보거라.”

홍옥의 말에 기생들이 옷을 추스르며 조용히 방을 나갔다. 홍옥은 널브러져 있는 술병들과 눈이 풀린 현경을 내려다보며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현경은 홍옥을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휘적휘적 손을 흔들었다.

“아, 홍옥. 내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저어기 저 방 말입니다, 대체 뭐하는 곳이오?”

“나리께서 궁금해 하실 만한 곳이 아닙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좀 말해 주세요, 왜 다들 아무리 물어도 답을 안 해주나.”

“저기 있는 작은 방들은 선금을 내고 며칠간 방을 빌려 노는 곳이옵니다.”

“오 그렇담, 내일이나 모레 와도 저 방엔 같은 사람들이 있겠군요.”

“아마 그렇겠지요.”

옳거니, 저 옆방을 빌려야겠다. 현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여기 이렇게 계셔도 괜찮으십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어쩐 일로 이렇게 매일 기방을 찾으시는지요.”

“그야, 홍옥의 말대로 세상 돌아가는 일을 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관직에 나간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데다 혼인까지 한 현경이 전과 달리 방탕한 모습을 보이니 홍옥은 걱정이 되었다. 기방에 발길을 끊은 현경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농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막상 매일같이 기방에서 현경이 놀다 간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홍옥은 이상하게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댁 마님께서, 걱정은 안 하십니까.”

홍옥이 눈을 내리깔고 슬쩍 물으니, 현경은 대답을 피하며 어깨만 으쓱였다.

“참, 연회 때 거문고 연주는 잘 들었습니다. 소리가 아주 훌륭하더군요.”

“…….”

취기 어린 얼굴로 현경이 히죽 웃었다. 혹 현경과 아란의 사이가 좋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불쑥 떠오르니, 홍옥은 기쁨도 걱정도 아닌 불온한 생각들을 황급히 숨겼다.

기부에게 전해 듣기론, 현경이 지난 며칠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방에서 죽을 치고 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게다가 올 때마다 꼭 방 안에 기생들 여럿을 들인다고 하니, 홍옥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휴, 오늘은 너무 많이 마셨네.”

홍옥은 이만 가봐야겠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현경을 따라 기방 입구를 지나서까지 배웅을 나갔다. 한사코 괜찮다는 현경의 옆에서 그 팔을 부축할까 말까 망설이던 홍옥이 결국 기부의 부름에 그 이상 현경을 따르지 못했다.

“다음에 오시거든 다른 아이들 말고 이 홍옥을 부르세요.”

그 말을 듣고도 현경은 이렇다 할 대답 없이 그저 한 번 머쓱하게 웃고는, 코를 훌쩍이며 어두운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현경은 조용히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에 서서 술 냄새를 풍기는 도포 자락을 한 번 털고 숨을 무겁게 뱉었다. 아란은 먼저 자고 있는지 안방에 불이 없었다.

살며시 안방 문을 열어보니 이부자리 위에 아란이 곧게 누워 있었다. 현경이 조심조심 겉옷을 벗고 그 곁에 누우니, 아란의 한숨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약주 하셨습니까.”

“아, 오랜만에 형님들을 만나서, 안 주무셨어요.”

“…….”

자꾸만 거짓말이 늘어가니 현경은 마음이 무거웠다. 아란과의 대화가 확연히 줄고, 입을 열면 할 수 있는 말이 거짓뿐이니 도무지 오래할 짓이 못 되었다. 그래도 이제 꼬리를 잡았으니 금방 결판을 낼 수 있겠지. 현경이 한숨을 뱉으려다 아란의 눈치를 보았다.

“술 냄새가 많이 나지요?”

현경은 괜히 마음에 찔려 아란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슬금슬금 몸을 멀리하고 눕는 현경의 등에 아란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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