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궁이라는 말에 아란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현경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일단은 침착하게 아란과 함께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붉은 철릭을 입은 선전관이 사령 둘과 함께 서 있었다. 현경이 그 앞에 예를 갖추어 앉았다.
“어명이오.”
선전관의 우렁찬 목소리에 집안 노비들이 모두 엎드리고 아란도 뒤로 물러나 몸을 낮추었다.
“이번 세자의 생일을 맞이하여 종친의 우애와 화합을 도모하는 바, 아직 관직에 나가지 않은 종친의 자제들 중 일 인을 선발하여 예우하니.”
종친이란 말에 주위가 술렁였다. 어느새 담장 너머와 열린 대문 틈으로도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어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에 유생 강현경을 돈후부 판관에 제수하고, 청색 비단 두 필과 은 오십 냥을 하사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선전관이 건넨 두루마리를 현경이 받아들자, 선전관 뒤에 서있던 사령들이 비단 상자와 은이 들어 있는 궤를 현경의 집 마루에 들여 놓았다.
궁의 사자가 돌아간 후, 집안 노비들은 경사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담장 너머로 기웃거리던 마을 사람들도 감축 드린다는 인사를 건네 왔다. 정작 현경은 아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종친이셨습니까.”
“부인, 그게…….”
담담하게 묻는 말인데도 현경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란은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어느새 소문이 다 퍼진 것인지 제현에게서 본가로 건너오라는 연락이 왔다며 노복이 말을 전했다.
현경과 아란이 집에 들어서자 제현 부부가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안채에 네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지만 아란은 여전히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고, 현경은 그런 아란의 눈치를 보느라 편히 웃지 못했다. 제현은 현경을 가만 바라보았다.
“현경이에게는 축하한다는 말을 해야 할지,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어째서 그러십니까?”
“장인으로서는 사위가 관직을 제수 받았으니 기쁘기 그지없다만, 스승으로서는 영특한 제자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는 자리에 올랐으니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돈후부는 종친들을 위한 특별 부서이기에 실질적인 집무와 거리가 멀었다. 하여 종친에 대한 예우로 관직을 받은 이상, 평생을 한량으로 살 수밖에 없는 셈이었다.
“현경이의 아버지가 주상전하와 육촌 관계이니, 아비 대신 그 아들에게 관직을 내리신 모양이다.”
“스승님께서는 저희 아버지를 전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현경의 물음에 제현은 잠시 멈칫하여 말을 골라야 했다. 비록 세월이 오래 흘렀지만, 강무에 관한 이야기는 제현에게 쉽게 꺼낼 수 없는 버거움이 남아 있었다.
왕실의 소란을 잠재우고 떠난 강무는 그대로 행방이 묘연했기 때문에 제현 또한 강무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때 자신의 한마디가 강무를 사지로 몰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너무나 괴로웠던 제현이기에, 모든 것을 내려 두고 궁을 떠나 오랜 세월을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나 또한 한때 관직에 나아가 왕을 보필했던 사람이니, 모시는 왕조의 가계 정도는 알고 있지 않겠느냐.”
제현은 옅게 웃으며 깊은 이야기를 꺼렸다. 그보다 아버지마저 현경이 왕가의 종친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에 아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란이에게는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무리 종친이라 해도 너의 시아버지는 왕실과 긴밀하게 살아온 분이 아니라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셨다.”
“…….”
“허나 둘은 부부이니 벌써 이야기를 나눈 줄 알았는데, 그럴 겨를이 없었나 보구나.”
“저 또한 고향마을에서 나고 자라 도성에 온 적이 없었으니 잊은 채 살았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현경이 자책하니 아란이 되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현경은 그런 아란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기쁜 소식인데 이렇게 둘을 불러두고 내가 괜한 말을 꺼냈구나.”
“아닙니다, 학문으로 그 결과를 보여야 했는데 스승님께 송구스럽습니다.”
“그런 말 말거라, 어찌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 오로지 관직을 위해서만 이겠느냐.”
제현이 머쓱해하자 제현의 부인이 현경과 아란이 왔으니 함께 저녁을 먹자며 분위기를 풀었다. 그 말에 사랑채로 자리를 옮기려는 제현과 달리 현경이 아란에게 눈짓을 보내며 미적거렸다. 아란은 그 마음을 알아채고 제현을 은근히 설득했고, 어머니까지 가세하여 결국 안채에서 함께 밥을 먹기로 했다.
현경과 단 둘이 지낼 때처럼 한 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까지는 기대할 수 없지만, 이마저도 제현의 집에선 파격적인 일이라 아란은 현경을 돌아보며 슬쩍 웃었다.
“판관은 종오품 참상관에 해당하니 결코 낮은 관직이 아니다. 더욱이 너의 나이가 아직 어려 사람들의 시샘이 따를 수 있으니, 언제나 행실을 바로 하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너희 둘이 혼인한 후에 집안에 경사가 이어지니 참으로 기쁘구나, 이제 어여쁜 손주만 본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큽!”
제현의 말에 현경은 침을 삼키다 사레가 들렸고, 아란도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제현의 부인은 그 둘이 수줍어서 저러는가 싶어 그 모습을 어여쁘게 여기고 흐뭇하게 웃었다.
“대감도 참, 아이들이 혼례 올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리 재촉하십니까.”
“단지 바람이 그렇다는 말이지.”
제현이 껄껄 웃었다. 현경과 아란은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상엔 상다리가 휘청거릴 만큼 진수성찬이 올라왔다.
“기운을 북돋우는 찬으로 올리라 했으니, 많이 먹게.”
제현이 현경에게 자꾸 찬을 권하는 바람에 현경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그 옆에서 어머니와 밥을 먹던 아란은 현경의 귀가 붉어진 것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났다.
현경은 너무 과식을 했는지 집으로 오는 내내 불편한 표정으로 배를 쓸었다. 아란은 그런 현경을 걱정스럽게 보다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불을 깔고 현경을 눕혔다. 계속 끙끙대는 현경이 안쓰러워 배를 쓰다듬어 주는데, 아란의 손길에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현경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적당히 거절도 하시지, 주는 대로 그걸 다 드십니까.”
“아이고오.”
아란이 타박하자 현경은 일부러 더 앓는 소리를 내며 어리광을 부렸다. 된장물을 풀어다 줄까 하니 싫다 하고 숭늉을 떠다줄까 해도 싫다 하니, 현경은 그저 아란이 저를 두고 밖으로 나가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결국 현경의 고집에 못 이겨 아란도 그 옆에 누웠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엔 이른 시간이라 둘은 나란히 누워서 말똥말똥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아란은 문득 다른 많은 종친들 중에 왜 하필 현경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선발 기준이 뭐였을까요.”
“제가 된 것으로 보아 인품이나 학문적 소양 아닐까요.”
현경이 남 얘기하듯 태연하게 말하니 아란이 웃었다.
“별시 답안을 망치셨다 하지 않으셨나요.”
“망쳤다고는 안 했어요. 장원을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는 걸요.”
“누가요?”
“어, 음, 누가 그러더라구요.”
아란이 놀리기에 꿍얼거리던 현경은 아차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란의 잔잔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흩어지니 현경은 그 곁에서 마음을 편히 놓지 못하는 게 아쉬워졌다.
“아무튼 제 생각엔 답안을 잘 써서 선발된 것 같아요.”
“답안 내용이 궁금해지네요.”
눈을 감고 나른하게 웃던 아란의 말에 현경은 그 옆얼굴을 가만 바라보다 기억을 더듬어 답안의 내용을 죽 읊었다. 가만히 듣던 아란은 뭔가 이상했는지 감았던 눈을 뜨고 깜빡였다.
“음, 그거 혹시.”
“제가 가장 흠모하는 학자의 말을 인용했지요.”
현경이 써냈다던 답안은 지난날 현경과 한창 시문을 논할 때 아란이 했던 이야기였다. 아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지만, 꽤나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저 듣기 좋으라고 농담하시는 거지요.”
“진짠데.”
당시에 현경은 손이 떨리고 머릿속이 하얘져서 수도 없이 읽은 책의 구절들은 흐릿하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지난날 아란과 나누었던 닷새간의 대담들이었으니. 무슨 마음에서인지 현경은 붓을 들어 그날 아란과 나누었던 말들을 필사하듯 담담히 써 내렸다. 가늘게 떨리던 필체도 아란을 생각할수록 진정되었고 현경의 표정 또한 차분해져 갔다.
글제가 무엇이었는가도 잊은 채, 현경은 온 신경을 몰두하여 준비한 종이를 가득 채웠다. 시험의 당락 보다 오로지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만이 더 중요했던 그 순간, 현경이 의지했던 건 바로 아란이었다.
“허면 벼슬하신 건 제 덕이겠네요?”
아란의 농담에 현경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아란에게 가까이 붙어왔다.
“그러게요, 이 은혜를 어찌 갚으면 좋을까요.”
짓궂게 다가오는 현경의 배를 아란이 꾹 밀었다. 끙, 소리를 내며 아란에게서 떨어진 현경은 돌아누웠다. 많이 아픈지 몸을 웅크린 현경을 보고 아란이 놀라 다가가려는데, 금세 다시 돌아누운 현경의 코끝이 아란과 맞닿을 듯 가까웠다.
장난스레 히죽 웃는 얼굴에 아란이 따라 웃고 말았다. 아란에게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 현경이 눈썹을 축 늘였다.
“아프긴 아팠어요.”
힘없는 목소리에 아란이 손을 뻗어 현경의 배를 살살 쓸어 주었다. 제현의 집에서부터 줄곧 잡아주고 싶었던 다른 한 손도 마저 끌어다 잡고 현경이 눈을 감았다.
“오늘은 깨지 말고 푹 주무세요.”
배가 따끈해지니 현경은 금방 잠에 빠져 들었다. 스르륵 풀어지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란이 몰래 속삭여 본다.
“서방님.”
아주 작은 그 목소리에 현경이 잠결에도 슬쩍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외출을 나가지 않는지, 현경은 점심을 먹고 나서도 아란 옆에 얌전히 붙어 있었다. 아마 안방 밖으로도 나갈 생각이 없는지, 아침부터 줄곧 도포도 걸치지 않은 편한 차림이었다.
아란은 아침부터 나무 상자를 열어 비단을 꺼내 보았다. 왕이 하사한 청색 비단을 보니 혼례 때 현경이 입었던 푸른 단령이 생각나 아란이 웃었다.
“어찌 웃으세요.”
“관복이 태가 나야 할 텐데, 관복을 입고도 꼬마 신랑 같으실까 봐서요.”
관복은 도포와 달리 지어 입기가 매우 까다로워서 아란이 선뜻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관복은 솜씨 좋은 침선가에게 맡겨 두기로 하고, 아란은 관복에 들어갈 흉배를 수놓기 시작했다. 현경은 창호지 너머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을 받으며 나른한 얼굴로 아란이 수놓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인께서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으셨나요.”
“양반가 규수라면 다들 이 정도는 하지요.”
흐음, 현경은 턱을 괴고서 아란을 기우뚱 바라본다.
“바느질 해본 적 없다 하셨지요.”
“산 타고 뛰어다니느라 바늘 잡아본 일이 없었어요.”
“그래도 제가 못 했던 거 다 하셨네요.”
“부인만큼 재주가 없어 그러지요.”
“재주야 많으시지요, 시도 잘 지으시고 술도 잘하시고.”
“감자도 잘 굽고.”
현경이 자신 있게 말하니 아란이 후후 웃는다. 그 웃음이 느릿하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늘 제 눈에 고운 여인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현경의 눈에 아란이 참 곱기만 하다.
“부인.”
현경이 부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드는 아란이 좋아서 현경이 또 히죽 웃었다.
“아란.”
현경의 목소리로 제 이름을 듣자니 바느질을 하던 아란의 눈만 곱게 웃는다. 어머니와 아버지 말고는 저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니,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
“아란, 아란, 부인은 이름마저 이리 고와요. 유려하면서도 약하지 않아.”
“현경, 현경도 좋은 이름입니다, 아마 빛 경 자를 쓰시지요?”
아란이 저의 이름을 불러주니 현경의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바느질에 집중하면서도 현경에게 궁금한 것을 묻는 아란의 얼굴이 사랑스럽다. 현경은 아란의 얼굴을 더 가까이 보려고 턱을 괸 채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얀 새가 옥돌을 감싸 품으니 빛이 났다 합니다.”
현경의 중얼거리는 말에 흐트러진 실을 정리하던 아란이 의아한 얼굴로 현경을 바라본다.
“제 태몽이요.”
“아.”
아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어머니가 꿈을 꾸셨으니, 이름도 어머니가 주신 셈이지요.”
현경은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뱉고 있었다. 아란에겐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아란은 괜찮다, 괜찮다 저를 다독여줄 텐데. 그러다 다시 또 이래선 안 되지, 하며 현경은 정신을 차린다.
가끔씩 존재해선 안 되는 사람이라는 그 공허함이 곁에 있는 아란에게까지 전해질까 두려웠다. 고운 이 사람의 미소를 볼 수 없을 바엔, 아주 괜찮은 거짓말들로 한 겹 또 한 겹 공허함 위로 덮는다면, 그 구멍은 가릴 수 있지 않을까.
“또 무슨 생각에 빠지셨어요.”
아란은 말없이 생각에 잠긴 현경의 눈썹이 축 쳐진 것을 알아챘다.
“그럼, 옥돌 현 자를 쓰시겠네요?”
“부인께선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현경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때, 현경은 팔을 기대고 있는 책상이 조금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책상을 옆으로 치우자, 아란과 현경 사이를 가로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참으로 신기하네요, 제 이름은 하얀 난새…….”
바느질을 하며 작게 움직이는 그 입술에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놀랐나 봐. 아란이 흠칫하는 게 느껴져 손을 잡아주려고 현경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앗.”
바늘에 손을 찔리고도 현경은 순간 움찔할 뿐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아란이 번쩍 눈을 떴다. 입술이 떨어질 법도 한데, 현경은 가만히 아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란의 눈이 다시 스르륵 감기고, 현경은 더 깊이 아란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아란아.”
입술을 맞대고 그 이름을 부르니, 아란이 웃는다. 따뜻한 숨이 현경의 입술에 닿았다.
“아란아.”
“…….”
“서방님 소리는, 나 잠결에만 듣니.”
“현경아, 이리 까불면 혼쭐나지?”
현경이 어깨를 들썩이며 큭큭 웃었다. 아, 너무 좋다. 현경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니 아란이 쥐고 있던 바늘을 툭,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