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34)화 (34/63)

#34화

현경이 집 앞에 도착하여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마루 아래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여종이 현경을 보자마자 아이고 소리를 내며 달려 나왔다.

“아이고, 나으리! 대체 어딜 갔다 이제 오셔요!”

울상을 짓는 여종을 보며 무슨 일이냐 물으려던 현경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급히 신을 벗어던지고 뛰어올라가 안방 문을 여는데, 마침 문 앞에 서있던 아란과 맞닥뜨렸다. 아란은 현경을 보자마자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아란은 놀란 마음에 차마 말이 나오질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 현경이 다가와 아란을 끌어안으니 발발 떠는 게 고스란히 현경에게로 전해진다. 놀란 아란을 보고 더 놀란 현경이 얼빠진 표정으로 아란의 등을 쓸어내렸다.

실은 오전까지만 해도 아란은 어제의 일도 있거니와 아침에 의도하지 않게 속살을 보인 일로 쑥스럽고 민망한 마음이 들어 현경을 은근히 피하던 중이었다.

평소와 달리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현경과 마주앉아 아란은 밥알을 세며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안방에 홀로 앉아 괜히 잘 읽히지도 않는 책을 붙잡고 있는데, 금방이라도 안방 문을 열고 현경이 들어올 것 같아 아란의 신경이 온통 책보다는 문에 가 있었다.

그러다 무슨 용기가 나서인지, 아란은 책을 덮고 먼저 분위기를 풀어볼까 싶어 사랑방 앞에 섰다. 아란이 한참 머뭇거리다 서방님 하고 현경을 불러도 어쩐지 방 안에선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때마침 마당을 지나던 노복이 그런 아란을 보고 다가와서는,

“주인나리께서 밤 따러 가신다고 아까 나가시던데요.”

“밤을?”

지난밤 나란히 누워 함께 밤 주우러 가자 해놓고. 아란은 말도 없이 혼자 가버린 현경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다가도, 금방 돌아오겠지 싶어 도로 안방에 들어와 앉았다. 읽던 책을 다시 펼쳤다 덮고, 반짇고리를 만지작거리다 놓으며 그렇게 시간을 축내고 있다 보니 아란은 문득 현경은 언제 오려나, 그 동그란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점심때도 지나고 해는 기울어 가는데 현경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밤나무가 많은 곳을 안다던 노복 막종이가 현경을 찾아 나가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꼬마 아이들 말로는 산비탈에서 주인나리와 어느 사내가 실랑이를 벌이는 걸 봤답니다.”

“누구와?”

“글쎄요, 짙은 감색 도포를 입은 덩치 큰 사내였다 하던데.”

아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혹 현경이 누군가와 시비가 붙어 해코지라도 당한 게 아닐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아란의 속도 모르고 또 다른 노복 하나가 옆에서 말을 거든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낮에 이 앞을 지나던 선비가 있었습니다.”

“선비?”

“덩치가 크고 짙은 옷이라 하니, 제가 본 그 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노복이 머리를 긁적이며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었다.

“이 댁에 누가 사는지 지나가는 투로 묻기에, 주인나리 함자를 말하긴 했는데.”

“얼굴을 보았느냐?”

“그게, 누굴 찾으시냐 물어도 그저 아무개라 하며 지나가 버려서. 자세히 보진 못했습니다.”

날은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아무 기별도 없이 늦는 게 아란은 이상했다. 짙은 감색 도포를 입은 덩치 큰 남자라. 아란은 지난날 현경과 장터에서 시비가 붙었던 사내가 덩치가 컸었나 생각했지만, 그 자는 아닌 것 같았다.

혹, 현경이 아닌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자라면? 현경이 여인인지라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아란은 더더욱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여종이 그런 아란을 진정시키려 곧 돌아오실 거라 말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찌 해야 하나. 아란이 노복들에게 골목으로 나가 현경을 찾아보라 말하고는, 자신도 따라 나서려는 것을 여종이 기어코 말리며 아란을 방 안에 있도록 했다. 앉아 있지도 못하고 불안에 떠는 아란을 안타깝게 보던 여종이 밖을 좀 살피겠다 하고 마루로 내려오던 그때, 현경이 대문을 열고 돌아온 것이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부인.”

아란을 끌어안은 채로 현경이 중얼거렸다. 아란은 진이 다 빠져 눈을 감은 채 현경에게 안겨 있었다. 그러다 눈을 뜨고는 혹여나 다친 곳은 없나 더듬더듬 현경을 살피는 손길에, 현경이 그런 아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전 괜찮습니다.”

“대체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대답을 재촉하는 아란의 눈을 들여다보며 현경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조내관의 당부도 있었고 일단은 아란을 안심시켜 두는 게 우선인 것 같아 현경은 그저 별일 아니라 말했다. 물론 아란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제가 도망이라도 간 줄 아셨습니까.”

이 와중에 농담을 하는 현경이 야속하여 아란이 속상한 표정을 짓자 현경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저도 모르게 그 앞에 꿇어앉았다.

“아 저, 그게, 밤을 줍다 누굴 만났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하다 보니.”

“덩치 큰 사내 말입니까? 실랑이를 벌이셨다던?”

“예? 아, 예.”

“무슨 대화였기에 이렇게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셨습니까.”

“그, 그 자가 신기한 비술을 알고 있다 해서요.”

당황하여 아무렇게나 핑계를 대던 현경은 우왕좌왕하는 시선을 들킬세라 아란의 손만 내려다보며 말을 했다.

“혹시나 만약 오늘처럼 제가 갑자기 외출을 하더라도 저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저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일이십니까.”

“…….”

아란은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 현경의 표정은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어서, 믿고 기다려 달라는 그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가시기 전에 잠시 다녀온다는 말은 저에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꼭 그리 하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늦게 돌아오시면 위험하실까 걱정이 됩니다.”

점점 작아지는 아란의 목소리에 현경의 마음도 무거웠다. 아란이 이렇게나 걱정하는데,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알 수 없으니 현경은 애써 웃으며 아란의 손만 꾹 쥐었다.

현경은 이부자리에 누워 잠을 청해 봤지만, 지난 과거를 담담히 말해 주던 강무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밤새 뒤척이는 현경 때문에 덩달아 잠에서 깬 아란은 현경의 어깨를 가만 토닥인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아란의 손길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는 게 마음에 걸려 현경은 아란을 끌어안았다. 아란을 안고 있으면 도리어 안겨있는 듯 마음이 진정되니, 현경은 아란의 숨소리를 들으며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부인, 저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다음날 해가 중천일 즈음, 현경이 조심스레 꺼낸 말에 아란은 현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경이 갓을 쓰고 외출 준비를 하는데, 아란이 다가와 옷 매듭을 바르게 매만져 준다. 잘 다녀오시라는 말을 하는 그 얼굴을 보며 현경은 전에는 쉽게 나오던 농담이 생각나질 않았다.

밤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내관이 건넨 검은 복면을 제 손으로 뒤집어쓴 현경은 익숙하게 산길을 올랐다.

“오늘은 주상전하께서 정무에 바빠 배알이 어려우니, 임무에 관하여 대신 전하라 명하셨소.”

궁에 들어와 견명당이 아닌 내관의 처소로 현경을 안내한 조내관은 관복으로 갈아입은 후, 작은 나무 상자를 현경 앞에 내려두었다.

“전하께서 하명하시길, 궁을 드나들기에는 관직이 있어야 하고, 언제든 사사로이 부리기엔 집무가 바쁘지 않아야 하며, 공식적으로는 별시 낙방자임에도 조정 대신들이 납득할 만한 관직이어야 하니. 숙고한 끝에 이와 같은 교지를 내린다 첨언하셨소.”

조내관은 상자를 열어 두루마리를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루마리를 펼쳐들었다.

“유생 강현경은 예를 갖추어 어명을 받들라.”

현경은 멀뚱히 앉아 있다가 이내 장난스런 분위기가 아님을 인지하고는 꿇어앉아 고개를 숙였다.

“유생 강현경을 돈후부敦厚府 판관判官에 제수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현경의 입에서 망극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조내관은 두루마리를 다시 상자 안에 넣어두고 자리에 앉았다. 전과 달리 정중하고도 곧은 자세였다.

“지금부터 판관 나리께 임무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조내관은 이제부터 존칭을 하겠다며 공손히 말을 하였고, 현경을 나리라 부르며 설명을 이었다.

“최근 지방관으로부터 재물에 미혹되어 거짓 서계를 올리는 것으로 의심되는 어사가 더러 있습니다. 하여 전하께서는 사사로이 비밀 차사를 두어 그 의혹을 파악하고자 하십니다.”

“비밀차사?”

“나리께서는 앞으로 암행어사를 감찰하는 임무를 수행하시게 될 것입니다.”

“암행어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암행어사를 감찰한단 말입니까?”

현경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내관은 전하께서 비밀리에 두시는 특별 차사라 기록에도 남지 않으며 공식적인 권한 또한 없으니, 말 그대로 잠행을 나갈 수 없는 왕의 눈과 귀를 대신하는 임무라 말을 덧붙였다.

“감찰이라고는 하나, 정황과 증거들을 은밀히 수집하여 주상전하를 보필하는 일이옵니다.”

현경은 가만 듣고 있자니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막중한 임무를 조내관처럼 왕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심복이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주상전하의 부름을 갓 받은 아무개가 감당할 일이겠습니까.”

“그건, 전하께서 일전에 이르시기를, 내관들은 나이 십여 세가 채 되지 않았을 때부터 궁에 들어와 견문이 좁으니 마음에 차지 않는다 하셨고, 암행어사와 달리 기록에도 남지 않는 비밀차사라 때로는 그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유사시에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말이 필요한 것이군요.”

“…….”

조내관은 현경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마냥 곱상하게 생긴 애송이라 생각했던 현경을 보며 역시 왕이 선택한 자라 그 예사롭지 않음을 새삼스럽게 여겼다.

“도사리는 위험이 없다 할 순 없으나, 그리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차사의 임무를 수행한 후에 저는 어찌 되는 겁니까.”

“일의 성격상 차사 직은 한시적입니다. 임무 완료 후 비밀 엄수만 유의하신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며, 주상전하께서도 특별히 섭섭지 않을 포상이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현경은 그 섭섭지 않을 포상보다 과연 왕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고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을지가 더 걱정이었다. 그렇게나 비밀 엄수를 강조하니 혹여나 목숨이 위태로운 임무가 아닐까 하는 불안도 지울 수 없었다.

어명이니 이제와 무를 수도 없는 일이고, 결국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고 가능한 빨리 궁에서 멀어지는 것이 최선이라. 정신만 바짝 차린다면 별일이야 있겠는가 싶어 현경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임무에 관한 것은 절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되며 이는 판관 나리뿐만 아니라 나리 주변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건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거라 믿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후 궁을 나오면서 현경은 하루아침에 달라진 조내관의 태도가 영 어색하기만 했다. 어제만 해도 다짜고짜 복면을 씌우고 납치하듯 잡아끌던 사람이 공손히 복면을 내밀며 쓰고 내려 가실건지를 물어오니, 현경은 새삼 감투가 무섭다 생각했다.

“조만간 궁에서 사자를 보낼 것이니, 다음 기별이 있을 때까지 댁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조내관은 현경에게 고개를 조아려 인사를 올리고 어제처럼 골목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오늘은 날이 저물기 전에 집으로 갈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에서 현경은 소쿠리에 감자를 담아가는 여인을 발견하고는 다가가 말을 걸었다. 도성에서는 감자밭을 거의 본 적이 없고, 더구나 지금은 수확철도 아니라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였다.

도성 밖 화전민에게서 얻어온 감자라 했다. 수확할 때가 지난 늙은 감자라 생김새는 예쁘지 않았지만 현경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값은 치를 테니, 그 감자 저한테 파시겠습니까?”

현경이 신이 나서 한 소쿠리째 사려 하니, 여인이 부른 값은 현경의 예상보다 세 배는 더 비쌌다. 쌈짓돈을 털어도 감자 몇 알 못 사는 도성 물가에 경악스러워 하며, 결국 현경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감자 두 알만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감자를 양손에 들고서 부엌으로 향하는 현경을 보며 여종 업지가 놀라 다가왔다.

“나으리, 웬 감자를. 제가 금방 쪄드릴게요, 들어가 계셔요.”

현경은 괜찮다며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감자 두 알을 정성스레 구웠다. 노릇하게 잘 구워진 감자 두 알을 그릇에 담아 마루에 오르던 현경은 문득 장난기가 발동하여 조용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마님, 끼니하실 참 가져왔습니다.”

책을 읽고 있던 아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들었다. 참을 들이라 말한 적도 없지만, 그것은 둘째 치더라도 저렇게 간드러지게 말을 하는 사람이 이 집안에 있었던가? 아란은 낯선 목소리를 수상쩍게 여겼다.

“밖에 누구, 십니까?”

누군가 싶어 아란이 문 쪽을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슬그머니 안방 문이 열리고 현경이 헤헤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제가 감자도 진짜 잘 굽는다고 말을 했던가요?”

아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현경과 감자를 번갈아 보았다. 오늘은 현경이 언제 오려나, 조금은 울적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연습을 하고 있던 아란이었다.

실은 현경에게 서운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는데, 뜬금없이 감자를 들고 나타난 현경의 엉뚱함에 아란은 그만 웃어 버리고 만다.

“제가 부인 말씀은 또 잘 들으니, 오늘은 늦지 않게 얼른 왔습니다.”

“오늘은 감자 캐는 비술이라도 배우셨습니까.”

농담하며 웃고 있는 아란을 보고 있으니, 현경은 찜찜했던 기분이 전부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 미소를 계속 볼 수 있다면야 무엇이 두려울까. 현경이 감자 그릇을 내려두고 아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앉으니 아란이 눈을 맞춰온다.

“왜 갑자기 눈물이 그렁하십니까.”

“감자 굽느라, 아궁이 연기가 매워서요.”

아란이 웃으며 현경의 볼을 쓸었다. 현경이 밖에서 무얼 하다 오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오늘처럼 웃으면서 돌아온다면 기쁘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란은 현경이 밝은 얼굴빛으로 들어왔으니 오늘은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랐다.

다정스레 얼굴을 감싸는 아란의 손길이 괜찮다, 괜찮다 하는 것 같아 현경은 배시시 웃으며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식기 전에 얼른 먹으라며 감자 한 알을 아란에게 내미는데, 밖에서 노복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으리, 궁에서 사자가 왔습니다요.”

벌써?

이렇게 곧바로 올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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