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33)화 (33/63)

#33화

어렴풋이 먼 데서 웅웅 들리던 소 울음소리마저도 한참 멀어지고 바스락 대는 낙엽소리만이 현경의 귀에 들려왔다. 자신을 잡아끄는 사내의 발걸음이 전보다 느려지려 하기에 현경은 이때다 싶어 뛰쳐나가려던 참이었다. 왼쪽? 오른쪽? 아니면 뒤? 그렇게 종아리에 힘을 막 주려는데.

“다 왔소.”

쑥, 하고 복면이 벗겨지고 현경은 갑자기 들어오는 빛에 눈을 꽉 감았다. 그나마 겹겹이 엇갈린 나뭇가지들이 햇빛을 막아 눈부심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그 말은 곧 빛이 들어오지 않을 만큼 깊은 숲 속까지 들어 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가는 길을 가늠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니, 유생께서는 양해해 주시기를.”

검은 복면을 소매 안에 주섬주섬 챙기던 사내가 멍한 얼굴로 선 현경에게 담담히 말했다. 현경이 사내를 따라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한 사람만이 지날 정도의 작은 일각문이 보였다. 문이 없었더라면 우거진 수풀에 덮인 탓에 그 옆으로 이어진 성벽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가려진 장소였다.

사내는 자물쇠를 열어 문 안으로 들어섰고, 현경도 그 뒤를 따랐다. 문을 통과해 들어간 궁의 뒤편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스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내와 현경이 궁으로 들어온 후에 중문을 두어 개쯤 더 지나자, 한 건물 앞에 나이가 지긋한 내관이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함께 온 사내는 내관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는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다. 내관이 주름진 눈가를 좁히며 현경을 슥 훑어보았다.

“의관을 바로 하고 따라 오시오.”

궁 안 사람들의 말투는 본래가 다 저러한가. 현경은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날이 아직 환하고 여태 마주친 두 사람에게서 살의를 느끼지 않아서인지, 현경은 숲길을 걸어오는 동안 제법 마음이 차분해져 있었다.

현경은 내관을 따라 견명당見明堂이라 쓰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환한 낮인데도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건물 내부는 어두웠다. 눈이 침침해지는 것 같아 현경은 눈을 깜빡였다. 내관은 작은 방 안에 현경을 들여놓고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들어온 문으로 조용히 나간다.

아무것도 없는 좁은 방 안에 현경이 엉거주춤 서있는데, 벽 너머로 내관이 작게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라 하라.”

근엄한 목소리와 함께 현경의 등 뒤로 다른 문이 열렸다. 현경은 깜짝 놀라 얼른 몸을 돌려 꿇어앉았다. 낮게 내리깐 시선 끝으로 얼핏 왕의 붉은 용포가 보였던 것 같아, 현경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개를 들거라.”

지난번 시험장에서 현경이 제대로 듣지 못했던 왕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방 안을 울렸다. 현경은 고개를 조금 들었으나 차마 왕의 얼굴은 볼 수 없어 눈은 그대로 내리깔고 있었다. 낮은 웃음소리에 현경의 시선이 멀리 떨어진 왕의 턱 언저리를 바라보다 도로 내려앉았다.

“이름을 말해 보라.”

“강, 현경이라 하옵니다.”

현경은 대답을 하고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마른 입술을 축였다. 긴장은 되었지만 시험장에서 느꼈던 불안함보다는 덜했다. 이렇게 마주한 이상 자신을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만이 현경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별시 때의 답안은 잘 읽어 보았다. 꽤나 발칙한 글이기에 젊은 유생일 것이라 짐작은 했다만, 생각보다 더 어린 소년이구나.”

“송구하옵니다.”

“아니, 지난 별시는 답안이 모두 천편일률이라 다들 지루하기 짝이 없던 차에, 어린 유생의 글이 과인을 즐겁게 했다.”

왕은 옆에 서있던 내관을 돌아보았다.

“구내관, 답안지를 가져오라 하였는가.”

“예, 전하. 바로 들이라 하겠습니다.”

구부정한 허리로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구내관이 방문을 나서자 대신 다른 누군가 현경의 답안지를 들고 들어왔다. 현경이 흘끗 눈을 돌려 보니, 아까 현경을 끌고 왔던 그 사내였다.

언제 관복으로 갈아입고 온 것인지, 왕에게 답안을 올린 사내가 뒷걸음으로 현경의 옆쪽에 섰다. 현경은 사내와 잠시 눈이 마주쳤으나 둘 모두 금방 시선을 피했다.

왕은 그 자리에서 현경의 답안을 다시 한 번 읽는 듯하더니, 이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현경은 왕이 웃는 연유를 모르니 크지 않은 웃음소리에도 몸을 움츠렸다.

“글 속에 두 사람의 대화가 참으로 미묘하다. 연서를 보는 듯 망측하기도 하고, 현자의 말은 경이로우며, 현자를 흠모하는 선비의 마음이 아름답기도 하다.”

“망극하옵니다.”

왕은 그렇게 얼마간 답안을 더 읽으며 웃다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과인은 본래 진부한 것을 싫어한다. 허나 조정 대신들은 고루한 것을 선호하지.”

“…….”

“때문에 대신들은 가장 고루한 자들을 뽑고, 과인은 가장 발칙한 자에게 관심을 갖는다.”

“…….”

“과인이 시험관이었더라면 장원을 주었을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여, 오늘 이렇게 은밀히 부른 것은.”

“…….”

“이제부터 어린 선비가 과인의 눈과 귀가 되어 주어야겠다.”

말을 듣고도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 현경이 벙벙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사내가 현경에게 눈치를 준다.

“화, 황공하옵니다?”

궁 안에서 주상전하와 마주하게 될 일이 있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마는, 격식 있는 말 중에 아는 것이라곤 망극하고 황공한 말뿐이라 현경은 얼떨결에 말이 튀어나왔다. 왕은 당황해하는 현경을 보며 즐거워했다.

“그나저나 이제 보니 강가의 사람이구나. 아마 과인의 먼 친척일 수도 있을 터, 아비가 어느 관직에 있느냐.”

현경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바닥에 짚은 손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아 현경은 주먹을 꼭 쥐었다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소인의 아버지는 관직에 나가지 않은 무사로, 강가 무자 쓰십니다.”

강무라는 이름을 듣자 왕은 순간 얼굴에 미소를 거두었다. 그러더니 생각에 잠긴 듯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현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관은 잠시 나가 있고, 유생은 가까이 앉으라.”

갑작스런 왕의 말에 사내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현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왕은 거의 책상 앞까지 현경을 불러다 앉혔다.

왕과 마주앉은 현경은 눈만 바닥에 내리 깔고 있었고, 왕은 그런 현경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어쩐지 어린 유생을 처음 봄에도 그 얼굴이 낯설지 않다 싶었다. 그럼 강무 형님, 아버지도 도성에 계시냐.”

“저만 도성에 올라와 머무르고 있습니다.”

“아비로부터 나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느냐.”

현경의 대답을 기다리는 왕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정체를 밝힐 생각도 없고 들켜서도 안 될 일이라는 생각에 현경은 오히려 마음이 침착해졌다. 왕에게 있어 자신은 존재해서도 안 되며, 존재 자체를 몰라야 하는 사람이 아닌가. 들은 바를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 현경은 잠시 말을 골랐다.

“무관으로 잠시 전하를 곁에서 모셨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왕은 작게 숨을 뱉었다. 그것이 안도의 한숨인지 탄식인지 현경은 알 길이 없었으나, 다만 왕이 십여 년 전의 그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왕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이려 할까. 현경은 잠깐 무서운 상상을 하다가 아주 티끌만큼이나마 반가워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았다. 곧바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너의 아비는 나의 육촌 형님이자, 외사촌 형님이기도 하다. 이를 알고 있느냐.”

“왕가에 먼 친척의 연이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멀지 않다, 과인은 그대의 아비를 형님처럼 여겼다.”

강무도 과연 그리 생각했을까. 강무는 당시의 왕세자를 진정 아우로 생각했는가에 대해서 현경에게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강태조의 친손자가 아닌, 강태조 아우의 손자로 호적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럼에도 강무는 왕가의 핏줄로 살지 못했다. 지금의 왕은 그런 강무를 안타까워했을까 두려워했을까. 어쩌면 조금은 그리워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경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했다.

“이름이 현경이라 하였는가.”

“예.”

“좋은 이름이다, 아버지가 지어 주었느냐.”

“어머니가 주신 이름이옵니다.”

그저 아버지가 지어 주셨다고 하면 될 것을, 현경은 저도 모르게 어머니 얘기를 꺼내놓고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영문을 모르게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바로 뜨거라, 눈빛을 보고자 함이니.”

현경은 그제야 비로소 생부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 보았다. 왕은 어딘지 모르게 강무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무보다 좀 더 희고 동그스름한 얼굴형을 가진 왕은 단정한 수염 아래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궁 안에서 탐욕과 계산이 없는 눈을 들여다보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왕은 현경의 맑은 눈이 마음에 들었다. 예상보다 어린 나이가 우려되었지만 그 눈에 담은 세상이 보고 싶었다. 왕위에 올라 전처럼 직접 잠행을 다닐 수도 없게 되니, 왕은 세간에 때 묻지 않은 젊은이의 시선으로 본 궁 밖의 모습이 궁금했다.

체구가 건장했던 강무와는 달리 현경은 사내답지 않게 가녀려 보였지만, 왕은 현경의 총명한 눈빛을 믿어 보기로 했다.

“저녁 정무가 바쁘니,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지.”

왕은 현경을 내려다보며 문 밖에 있던 조내관을 불렀다. 현경은 예를 갖추고 조심스레 방문을 나왔다. 조내관이라 불리는 사내를 따라 견명당 밖으로 나오니, 밖은 어느덧 건물 안 만큼이나 어두워져 있었다.

겨우 어찌 한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현경은 그제야 긴장이 탁 풀렸다. 꿇어앉아 굳었던 다리가 휘청이는 바람에 현경은 잠시 멈춰 서서 깊은 숨을 뱉었다. 앞서 걷던 사내는 견명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또 다른 작은 건물 안으로 현경을 안내했다.

“여기는 주상전하의 명을 받들어 은밀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내관들이 임시로 기거하는 처소이자, 결과 보고를 위한 서계를 작성하는 곳이오.”

“…….”

“유생께서 궁 안을 사사로이 돌아다닐 수 없으니, 앞으로 이곳에서 결과 보고를 정리하게 될 것이며…….”

관복을 입은 사내의 턱은 터럭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분명 궁 안에 오기 전 도포 차림일 때 수염을 보았는데, 현경은 기이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덩치가 산만하여 틀림없는 무관이라 생각했는데 내관이었다니.

“오늘은 주상전하께서 유생의 얼굴을 확인하시고자 부른 것이고, 아직 하명하신 것은 없으니 내일 다시 뵙는 것으로 하겠소.”

사내는 엄중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는 금방 방으로 들어가 낮에 입은 도포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와 함께 사라졌던 수염이 다시 생기니, 현경이 신기하여 눈을 떼지 못했다.

“오늘 주상전하를 뵌 것, 그리고 앞으로 있을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함구해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명심하시오, 절대 그 누구에게라도 발설해서는 아니 되오.”

일각문 밖으로 나온 후로도 사내는 몇 번이나 함구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현경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다시 머리 위로 검은 천이 씌워졌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터덜터덜 잘도 산을 내려가던 현경은 문득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어.”

“앞으로 얼굴 볼 일이 많으니, 조내관이라 부르시오.”

“조내관, 혹시 그 수염은 어찌 하는 겁니까?”

그 말에 조내관이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현경은 조내관에게 붙잡힌 팔 때문에 그대로 몸이 휘청였다.

“이것은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내관들에게만 전해지는 비술이라 알려드리기 어렵소.”

“아.”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하니, 현경도 뭐라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다시 말없이 산길을 좀 더 내려가니, 낮에 밤을 줍던 곳에 다다라서야 현경은 복면을 벗을 수 있었다.

“내일 오시에 이 밤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늦지 마시오.”

조내관은 돌아서는 순간까지 현경에게 비밀을 거듭 강조하며 골목 너머로 멀어졌다.

눈앞에서 조내관이 사라지자 현경은 꿈을 꾸다 깬 것마냥 머리가 멍해졌다. 그렇게 비탈길에 홀로 한참 선 채로, 해가 넘어간 하늘을 올려다보던 현경은 복면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손에 든 갓을 바르게 고쳐 쓰니,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 안 그래도 캄캄한 길목이 더 어둡게 보였다.

“나도 모르겠다. 이제.”

급제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낙방의 실망보다 궁에 들어갈 일이 없겠다 싶어 다행이라 여겼던 게 바로 어제였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그 생각이 하루를 채 넘기기도 전에 궁에 들어가 왕과 마주한 것도, 왕을 제대로 보기 전까지 마음속에 막연히 일었던 두려움이 막상 왕의 얼굴을 마주하자 오히려 덜해진 것도, 모두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왕실의 녹을 먹는 관리가 되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자신이 왕의 곁에서 왕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한다니. 현경은 생각할수록 믿기지 않아 한숨 같은 헛웃음이 나왔다.

모르고 살고자 했지만 어떻게든 그 얼굴을 보게 만드니, 세상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기묘한 것이라. 현경은 생각에 잠기느라 느려진 발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향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