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마음은 온통 아란에게로 가 있는 채로 현경이 설렁설렁 밤 줍는 시늉만 하면서 밤나무 밑을 서성이고 있는데, 웬 짙은 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건다.
“성함이 강현경 되시오?”
난데없이 이름을 불러오는 사내를 보고 현경이 얼떨결에 그렇다 대답했다. 뒤늦게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로 사내를 훑으니, 제법 커다란 체구에 비해 추위를 타는 듯 사내는 소매에 양 손을 넣어두고 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급히 가야 할 곳이 있으니, 조용히 따르시오.”
“다짜고짜 따르라니, 날 아십니까?”
현경이 어이가 없이 인상을 찌푸리니 사내는 영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는 그저 어서 가자는 말만 되풀이 했다.
“가면서 말해줄 테니, 잔말 말고 일단 오시오.”
“아니, 어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따라갑니까, 어디서 온 누구시오?”
“궁에서 나온 사람이오.”
궁에서 왔다는 사내의 말에 잠시 멈칫한 현경은 저도 모르게 나뭇가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궁에서 왔든 절에서 왔든. 가자는 이유는 알고 가야 할 것 아니오.”
“얼마 전 별시에 응시하셨던 유생이 맞소?”
“그렇소.”
“그 일로 지금 주상전하께서 유생을 은밀히 부르셨소.”
주상전하? 현경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사내는 그런 표정을 보는 것이 익숙한 듯 현경을 붙잡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잠, 잠깐, 주상전하라니, 그것을 어찌 믿소.”
현경이 나뭇가지로 땅을 짚고 버티자, 사내는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돌려 잠시 주위를 살폈다.
“설명은 차차 듣게 될 것이오, 남들 눈에 띄어선 안 되니 유생께선 의심을 거두고 어서 따르시오.”
의심을 거두라는 사내의 말을 듣자마자, 현경의 머릿속엔 온갖 의심과 생각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이 자는 누구인가. 이 자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왕은 왜 자신을 은밀히 부르는가. 정체를 들켰나, 어째서? 이대로 끌려가면 어찌 되는 거지? 가만, 부인께는 뭐라고 말을?
그 순간, 현경의 머리 위로 검은 천이 씌워지고 꼼짝할 수 없이 사내에게 두 팔이 잡혔다. 갓이 흘러내리고 눈앞이 캄캄해지자, 비명을 지를 생각조차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버린 현경은 손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마저 허망하게 빼앗겼다.
“왜, 왜 이러는 겁니까, 대체 무슨 일로.”
“입 다물고 조용히 갑시다.”
현경의 팔뚝을 움켜쥔 사내는 그대로 현경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현경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일단 사내를 따라 비틀비틀 겨우 발걸음을 떼었다. 발소리로 겨우 짐작을 해보니 사내는 길이 아닌 산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외곽 숲까지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현경은 뒤늦은 후회를 하며 도망칠 기회만 가늠하기 시작했다.
홍옥의 처소로 들어서는 문 앞엔 갈대로 엮은 발이 내려져 있었다.
그 문 앞에서 한숨을 푹 쉬던 기방의 행수는 갈대발을 걷어내고 문을 열었다. 아침부터 줄곧 일어나지 않았던 건지 홍옥이 등만 내보인 채 누워 있었다.
“해 기울어진 지 한참인데, 여태 단장 안 하고 누워만 있는 게냐.”
“…….”
“요새 들어 하루걸러 발을 내려놓으니 그 속을 모르겠다.”
“몸이 좋지 않아 그럽니다.”
“허면 오전에 보낸 의녀는 왜 들이지 않고 문전박대를 해.”
쯧, 행수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비스듬히 앉은 자세에도 어깨가 곧은 것이 그 나이가 마흔인데도 노쇠하였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행수는 잠시 생각하듯 무릎 위에 얹어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에 끼워진 묵직한 비취반지는 이 기방의 행수 기생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증표였다.
“얻어맞은 무향이도 이젠 잘만 웃고 춤추는데, 어찌 홍옥이 네가 마음을 못 추슬러.”
“…….”
“그런 추태야, 무엇이 그리 새삼스럽다고.”
“그런 것 아니니, 그쯤하세요.”
홍옥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이불만 어깨 위로 추켜올렸다. 이불을 쥔 손끝엔 붕대가 감아져 있다. 어제 저녁부터 뭣에 홀린 사람처럼 쉬지 않고 가야금을 타기에 저러다 탈나지 했더니만, 기어코 손에서 피를 본 모양이었다.
“연회 앞두고 이러는 연유가 그럼 무어냐.”
“…….”
“무엇이 네 속을 태우고 있길래, 이리도 감당을 못하고 있느냔 말이야.”
대답 없는 마른 등을 보며, 행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아눕는 아이들의 사연이란 거의 빤한 것이었다.
그래도 여태 행수가 봐온 홍옥은 기생으로 머리 얹은 후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결국엔 그 마음에도 부질없는 불꽃 하나가 튀었구나 싶어 행수는 마음이 착잡하였다.
“산조 한 가락 찾으시는 손이 계시니, 일어나 준비해라.”
“거문고가 없어 못 나갑니다.”
“밤새 가야금은 잘만 타더니.”
“가야금 산조면 난향 언니를 부르셔야지요.”
홍옥의 한숨 소리와 함께 그 어깨도 함께 푹 꺼졌다. 무겁고도 지친 숨이었다.
“손께서 구태여 너를 찾으신다지 않니.”
“어머니가 찾아와 이러실 정도면, 대체 어느 댁 대감입니까.”
“말을 전해온 기부가 하도 간곡하여 내가 온 것이다. 어디 먼 데서 온 강도령이라던데 너에게 줄 것이 있다고.”
강도령이라는 말에 홍옥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설마 하는 생각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홍옥을 보며 행수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았다.
“강도령이라 하셨습니까.”
“아는 분이냐.”
“아닙니다. 그저, 먼 데서 오셨다 하니.”
행수는 이상하리만치 부산스레 흩어지는 홍옥의 시선을 가만 내다보다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준비하라는 말만 남기고 방을 나온 행수는 마당 아래서 초조한 듯 발발거리고 있는 기부와 마주쳤다.
“어째, 홍옥이 나온답니까? 나오죠?”
“그나저나 네 놈은 왜 이리 부산을 떠는 것이야.”
“아효, 말도 마세요, 말을 전해온 자가 대뜸 칼부터 뽑아들고 은밀히 대령하라 하는데, 제가 안 이럽니까.”
“칼을 뽑아? 혹 금군의 사내였더냐.”
“몰라요, 몰라. 홍옥이가 안 나오면 내 목부터 칠 기센데, 그런 생각할 틈이 어딨소.”
“하, 이런 방종한 놈을 보았나.”
행수는 기가 막혀 기부를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주춤하다가도 기부는 거듭 홍옥이 나오는 것이 맞냐며 되물었다. 대꾸 없이 기부를 그대로 지나쳐 방으로 들어온 행수는 보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혹여나 어느 미치광이가 홍옥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행수 어른, 접니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으로 폭이 좁은 갓을 쓴 사내가 들어왔다. 행수의 기방 운영을 옆에서 도우며 기부들 중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사내였다.
“오늘 안 나오나 했더니, 홍옥이 방으로 매분구 하나 들어가던데요.”
“찾는 손이 있으면 나가야지 저가 별 수 있나.”
행수는 퉁명스레 말하고는 장침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다 별안간 사내를 매서운 눈길로 쳐다보니, 찔리는 게 있는지 마주 앉은 사내가 턱 끝까지 수북한 수염을 긁적이며 슬쩍 눈치를 보았다.
“그 놈이 그게, 기부 노릇 한 지 얼마 안 된 놈이라.”
“나랏님 아니고서야 내 기방 안에서 칼 빼들고 설치는 꼴도 못 보지만, 홍옥이를 찾는 자들은 내 특히 신경 쓰라 일렀을 텐데.”
“암요, 신경 쓰지요. 이번 일은 저도 몰랐던 일입니다. 애들 시켜 고놈 족쳐 놓으라 했으니 행수 어른 화 푸십시오.”
실실 웃으며 넉살을 부리는 사내의 얼굴이 못마땅했지만 행수는 이쯤 했으니 알아들었으리라 여겼다.
“그나저나 기생어미도 어미라고, 홍옥이가 지 어미 말은 또 듣네요.”
“어미는 무슨, 저것은 유아독존이라 속엔 어미고 뭐고 없을 걸.”
“그래도 행수 어른 딸 같은 아이 아닙니까.”
행수는 사내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딸 같은 아이라. 문득 행수는 홍옥을 처음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홍옥의 나이가 한 열둘, 셋 되었으려나. 다른 계집들은 어디 기구한 사연이나 한 보따리씩 안고서 울며불며 팔려오던 기방에 홍옥은 담담히 제 발로 걸어 들어왔었다.
처음 보는 여인에게도 뻔뻔스레 어머니라 부르며 평온한 표정으로 이곳에 거처하겠다 말하는 아이를 굳이 내칠 이유는 없었다. 전부터 기방 부엌데기와 나무꾼 사이에서 난 딸이 보통 얼굴이 아니라 소문이 자자해서 기부들이 내심 탐을 냈던 아이였다.
행수는 처음 들어온 아이에게 가야금을 가르쳤지만, 아이는 가르쳐 주지 않은 거문고를 더 잘 탔다. 배우는 아이들 중에서도 단연 재주가 돋보이고 그 생김새부터가 화려한 아이라, 홍옥이란 기명도 행수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행수 어른도 홍옥이를 각별히 챙기지 않으십니까.”
“고것은 도통 속을 알 수가 없어.”
수년간 홍옥을 옆에서 지켜봐 왔음에도, 행수는 언제나 저 말을 한숨처럼 뱉곤 했다.
홍옥은 단장을 하고 나서도 몇 번이나 경대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한 번 더 머리를 매만지고 한 번 더 옷매무새를 다듬던 홍옥은 상기된 얼굴로 문 앞에 내려둔 발을 걷어내고 뒷마당으로 나섰다.
어두운 달빛 아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기방 뒷마당엔 좀 전의 그 기부가 초롱불을 들고 서 있었다. 불빛을 내려둔 길을 따라 발걸음을 서두르는 홍옥의 눈엔 곤죽이 된 기부의 얼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기부는 기방 안에서도 제일 깊숙이 위치한 방으로 홍옥을 안내했다. 그곳은 가장 은밀한 방이기도 해서 주로 지체 높은 대감들이 밀담을 나누는 방이었다. 보통의 기생들은 들어갈 일이 없을 뿐더러, 홍옥도 두어 번 정도 거문고 연주를 하러 들어왔던 게 전부였다.
“도련님, 홍옥이 들이겠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머뭇거리던 기부가 살며시 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발을 들이던 홍옥은 좀 전까지의 설렘 대신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을 느꼈다.
컴컴한 방 한가운데에 병풍이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는 보란 듯이 허리에 칼을 찬 사내가 귀신처럼 서 있었다.
그 순간 홍옥은 병풍 너머를 보지 않고도 저 안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신이 기대했던 이가 아님을 알았다. 홍옥은 실망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병풍 너머로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탁 울렸다.
“몸이 좋지 않아 시간이 지체될지 모른다 하더니.”
“…….”
“그리도 사뿐하게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예까지 들리는 건 또 무엇이지?”
“인사 올립니다, 홍옥이라 하옵니다.”
“저 문 밖에 선 자가 나를 업신여기고 거짓을 고한 것인가?”
웃음기가 섞여 있지만 말투가 서늘하여 그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병풍 옆에 귀신처럼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홍옥은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올렸다.
“곧바로 가야금을 들이라 하겠습니다.”
“가야금이라니, 네년 장기는 거문고가 아니더냐.”
그리고는 병풍 너머의 목소리가 사내를 불렀다. 병풍을 치우라 명하니, 이윽고 홍옥의 눈앞에 서늘한 목소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롱불 하나만을 켜둔 컴컴한 방 안에 드러난 그 얼굴을 홍옥은 곧바로 알아보았다.
“나의 생일에 너를 불러다 그 가락 좀 들을까 했더니, 듣기론 거문고가 부서져 손을 놓고 있다고.”
“예, 늘 지니고 있던 거문고가 상하여 연회에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입으로라도 거문고 소리 내며 옆에 앉아 술시중을 들어야지, 기생년이 악사 행세를 하며 건방을 떠느냐.”
말을 하고도 큭큭 거리며 웃느라 들고 있던 술잔 속 술이 찰랑였다. 주변마저 고요한 방 안에 웃는 사람은 서늘한 목소리뿐이었지만, 당사자는 전혀 개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송구합니다, 조만간 새 거문고를 준비하겠습니다.”
“됐다, 그깟 하품의 시원찮은 소리를 듣자고 감히 내게 기다리라 하느냐.”
“…….”
“나는 오래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니, 내가 주는 것으로 착실히 준비하고 있거라.”
곧바로 옆에 서 있던 사내가 홍옥의 앞에 내놓은 것은 한눈에 보아도 최상품의 나무로 만든 거문고였다.
“천한 신분으로는 구경도 못할 악기일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궁중 악사들 중에서도 그 수장만이 다룰 수 있을 만한 물건이었다. 아무리 돈을 산처럼 쌓아 준들 천민은 구할 수 없을 악기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어쩐지 홍옥은 그런 거문고를 보고도 그 표정이 무덤덤했다.
“과분하여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나의 원대한 은혜를 깊이 새기고 보답을 하라. 내 주안상에 오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말을 마친 목소리의 주인이 일어서자, 칼을 찬 사내가 앞서 문을 열고 길을 텄다. 홍옥도 일어나 한 발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만 시선이 머물던 홍옥의 앞에 새하얀 버선발이 멈춰 섰으나, 이내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홍옥은 손님 배웅을 따라 나서지 않고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