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마님, 추운데 왜 나오셨어요.”
저녁상 나르는 일을 도맡아 하는 여종 업지가 마루에 앉아 있는 아란을 보고는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허리춤에 매단 행주를 펼쳐 뭔가를 내보이기에 들여다보니, 거뭇거뭇하게 구운 알밤이었다.
“막종이가 낮에 나무하러 나갔다가 한 소쿠리 주워 왔답니다.”
그러고 보니 부엌 쪽 마당 한구석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림막을 쳐놓았기에 뭘 하나 했더니 일하는 아이들이 몰래 군것질을 하느라 그런 모양이었다.
“그랬구나, 어디서 구수한 냄새가 난다 했다.”
“제가 까드릴까요?”
아란이 고개를 저으며 사양하니 업지가 아쉬워하다가도 따끈한 알밤을 내려다보며 꼴깍 침을 삼킨다.
“마님 드리려고 벌레 안 먹고 잘생긴 것만 골라왔는걸요, 알이 좀 작긴 한데 맛이 좋아요.”
“난 괜찮다, 그럼 골라온 김에 업지 너 먹으렴.”
“아유, 괜찮아요 저는.”
“그럼 대신 내가 한 알만 먹어도 되려나.”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에 아란이 돌아보니 안방 문틈으로 현경이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안방마님 몰래 드리려다 주인나리께 들킨 셈이니 여종은 눈치만 살피는데, 그 사이 현경은 마루로 나와 여종의 손에 들린 군밤들 중에서 정말로 딱 한 알만 집어 들었다.
“뒷간 가신다더니, 맛난 거 혼자 드시려고 그러셨어요.”
현경이 여종 듣는 앞에 일부러 뒷간 얘기를 꺼내는 것은 아란을 놀리려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여종에겐 안방마님 뒷간 얘기보다 주인나리의 속저고리 차림이 더 민망할 따름이라. 여종 업지는 행주 채로 마루 위에 군밤을 고스란히 놓아두고는 “따끈할 때 드셔요!” 하고 서둘러 부엌께로 들어가 버렸다.
“어, 한 알만 먹는다고 했는데.”
“방 밖을 나오실 땐 겉옷을 걸치셔야 한다고 매번 말씀 드리지 않습니까.”
“부인께서 하도 안 오시니, 겉옷 걸칠 정신이 어디 있으려구요.”
능청스레 말을 하면서도 현경이 흘끗 제 옷차림을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기어코 흰 옷에 군밤 부스러기를 묻힌다. 에잇, 하면서 손으로 문지르니 숯처럼 묻은 검댕 자국은 더 크게 번지고야 만다. 결국 아란이 마루 위에 놓인 행주로 현경의 손을 끌어다 닦아 주었다.
“어찌 보면 좀 모자란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부인, 이렇게 가까이 앉아 혼잣말 하시면 다 들려요.”
현경이 작게 툴툴대면서도 웃는다. 손을 닦아 주다 말고 아란은 그런 현경을 가만 바라보았다. 현경에 대한 생각을 털어내고자 나온 것인데 어느새 현경이 또 이렇게 곁에 와있다. 아란은 이것이 과연 단지 우연일까 생각한다.
“…….”
“…….”
침묵과 거짓말로는 다른 이들을 속일 수 있겠으나, 스스로를 속여야 할 때 그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자신을 보는 현경에게서 느껴지는 감정과, 자신이 현경을 보며 느끼는 감정들은 소리 내어 말한 적이 없는데도 마음을 소란스럽게 했다. 반대로 설마 그럴 리 없다 아무리 우겨 봐도 마음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분명 제 속에 있는 제 마음인데도.
“그나저나, 다들 저기에 숨어 있나 봐요. 밤 좀 구워 먹는다고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
“이 냄새며 연기며 어차피 가려지지도 않는데 말이에요.”
“…….”
“도란도란 불 쬐며 정겹게 주인 욕 하고, 뭐 그러겠죠? 재밌겠다.”
현경이 아란의 빤한 시선을 피해 고개를 쭉 빼고 마당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영 대답이 없는 아란 쪽으로 차마 시선을 돌리진 못하고, 현경은 괜히 몸을 웅크려 마루에 흩어진 알밤들을 다시 행주 위로 하나하나 집어 올렸다. 아란은 여전히 그런 현경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사람이 대체 뭐라고, 웃으면 가슴이 떨리고 손을 잡으면 위안이 되는 걸까, 왜. 기운 없이 웅크려 있는 저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렇게나 속이 상할까.
아란은 하루에도 수없이 널을 뛰는 마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갑갑해 오는 것 같았다.
“부인께서는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가요.”
“저와 혼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
“혹, 저에게 바라시는 게 있습니까.”
“어찌 그리 물으십니까.”
현경은 가라앉은 아란의 목소리에 덜컥 마음이 불안하였다. 손에 쥐고 있던 알밤들을 놓쳐 두어 개가 마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현경은 굴러가 버린 알밤을 주울 생각도,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피차 서로가 필요하여 혼인한 것 아닙니까.”
“필요…….”
“그러니 너무, 안 그러셔도 됩니다.”
다른 말보다도 필요하다는 말이 이렇게나 냉랭했던가. 현경은 손바닥에 거뭇하게 묻은 얼룩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아란 쪽으로 돌아앉았다. 필요, 필요라.
“그야, 필요하지요.”
그래, 그거면. 아란은 현경의 입에서 다른 말 대신 그저 수긍하는 대답만을 기다렸다. 그 다정한 눈길과 애정 어린 행동들이 단지, 그 누가 되었든 곁에 둘 사람이 필요하여 그런 것이라 말해 준다면. 줄곧 이름을 붙여 주지 못한 이 감정은 금방 힘을 잃고 수그러들도록 내버려 둘 수 있을 것이다.
진정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어찌 같은 여인을 마음에 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되고, 이 사람에게로 향하는 애틋한 마음이 혹시나 잘못일까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될 것이며.
“부인께서 안 보이면 저는 불안해져요.”
“…….”
“저를 두고 또 사라지실까봐, 아무리 눈을 맞추어도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현경의 대답을 듣자마자 아란은 답답한 마음에 불쑥 말을 꺼낸 걸 곧바로 후회했다. 덮어 두려던 마음이 순식간에 파도처럼 일렁이며 속을 내리쳤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하여 평생 곁에 있기로 사랑가를 올려도, 여태 제 마음을 모르십니까.”
현경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보니, 아란도 따라 코끝이 아리고 눈물이 차올랐다. 어떠한 생각이 떠오를 틈도 없이 아란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 마음만으로는 안 되나요.”
“…….”
“그래서 저에게 마음 한 칸 내어주시는 것도 그리 주저하십니까.”
현경의 울먹이는 말들이 아란에게 무겁게 닿았다. 그 와중에도 언성이 높아지려 하니 저 마당에까지 그 소리가 들릴까봐 그랬는지, 현경의 울먹이는 그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랬는지. 아란은 저도 모르게 후두둑 쏟아지는 눈물에도 아랑곳 않고 일어나 현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란은 안방에 현경부터 밀어 넣고 들어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눈물을 참느라 숨을 몰아쉬는 아란의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눈에서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잡았던 손을 놓으려 하니 현경이 아란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자신의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아란은 손에 닿은 현경에게서 떨림을 느꼈다. 그 떨림은 지난날 나룻배 위에서 저를 지켜주던 든든함도 아니었고 수줍은 떨림도 아니었다. 아란의 온기를 놓칠까봐 불안에 떠는 간절함이었다.
“부인 마음속에 제가 있을 자리가 진정 없습니까.”
희망의 창을 닫아 마음을 시들게 하는 것, 단념은 아란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별당 안에서의 삶이란, 멀어지는 것을 구태여 붙잡거나 박차고 나가 결국 얻어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본래 제 것이 아니라서 그런 거라 여기며 탐내지도 않았다.
어차피 곁에 둘 수 없는 것이라면 너무 많이 눈길을 주지 말고, 정도 붙이려 하지 말아야 했으니 그렇게 닫아둔 마음이었는데.
현경은 허락도 없이 그 창을 열어 고개를 내밀고는 햇살이 참 좋다며 맑게 웃었다.
그렇게 시든 줄만 알았던 아란의 마음도 뒤늦게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향했다. 어느 하나 모난 곳이 없는 사람이라, 올려다 볼 때면 등에 진 햇살마저 둥글다 생각했다.
“그럼 그 마음속엔 제가 있습니까?”
현경의 얼굴이 도로 일그러진다. 잠잠하던 눈물도 더는 어찌할 수도 없게 터져 나와 답답한 듯 눈을 꼭 감는다.
“전부터 늘 계셨습니다, 제 마음 주인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돌이켜보면 아란에게 현경은 좁고 어두운 가마 안에 나있던 작은 창처럼 그렇게 숨통 같은 사람이었다. 현경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 앞에서 아란이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고 크게 웃거나 울 수 있었을까. 그 감정 고스란히 받아준 사람을 눈물짓게 만들었으니 그 우는 모습을 보는 아란의 마음이 미어졌다.
“그 주인이 미련하여 이 마음을 모르고 쉬이 넘겼나요.”
“단 한 순간도 부인께 허투루 말한 적이 없었는데.”
서글프게 내려앉은 눈썹이 안쓰러워 아란은 현경의 눈가와 볼을 어루만졌다. 아란은 언젠가 한 번 새벽 무렵 잠든 이 얼굴을 보다 무심코 닿아보고 싶다 생각했던 날이 있었다.
“저는, 쉽지가 않습니다. 뭐가 이리도 어렵기만 한지 모르겠습니다.”
“약조하셨잖아요,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그 별나고도 가련한 약조가 다 뭐라고, 좋아도 좋다는 마음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속이려던 자신을 누군가 꾸짖는 것 같았다. 가려지지 않는 것을 덮으려 하다니 부질없다, 하며.
현경의 눈가를 쓸던 아란이 용기를 내어 현경에게 먼저 다가섰다. 이내 입술이 닿아 뜨거운 숨이 짧게 스쳤다. 입술이 떨어지려다가도 눈물 진 서로의 얼굴이 보일세라 다시 서툴게 숨을 나눈다.
어느새 귓가엔 서로의 숨소리만이 들리고, 볼을 쓸어내리던 아란의 손은 현경의 체온에 덮였다. 아란은 눈을 뜨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진 찰나에 참았던 숨을 뜨겁게 뱉어냈는데도 마음이 식지 않았다.
열 오른 그 마음을 감당하지 못한 아란이 현경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천지가 뒤바뀌지도 않고 벼락이 치지도 않았다. 대신에 꼭 맞는 작은 품이 몸을 감싸와 제자리를 찾은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함께 있으면 그저 좋아서, 평생을 같이 있고 싶어서 혼인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면서요.”
“…….”
“부인께서는요?”
실은 현경과 함께 있을 때 좋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고, 비록 여태 그 마음이 더뎠지만 이젠 다 괜찮을 것 같다고. 함께 있다면 다 괜찮을 것 같다고. 긴 말을 풀어내는 대신에 아란은 현경의 등을 가만 쓸었다.
그러다 이 다정한 마음을 올곧이 받을 줄도 모르는 미련한 스스로가 불쌍해서, 아란은 또 다시 왈칵 울음이 터졌다. 현경은 그 속을 모르고 아란이 우니 왜 우냐며 따라 울었다.
“가을이니까 날 좋으면 이제라도 단풍 구경 가요. 가서 밤도 줍고.”
마주보고 누운 두 사람 모두 푹 젖은 눈가가 군데군데 붉었다. 현경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도 조근조근 말을 이었고, 가끔씩 그 목소리 사이로 코를 훌쩍이는 아란의 숨소리가 끼어들었다.
“눈 오면 같이 눈 밟으러 나가요, 겨울엔 청어가 별미인데, 제가 맛있게 구워요.”
봄에 꽃 예쁘게 피면 꽃구경도 가고. 여름엔 개울 가서 발도 담그고 놀아요, 새뱅이 잡는 거 보여줄게요. 저 뒷산에 살구도 누렇게 잘 익은 것 따면 떫지 않고 참 달아요.
“그러다 또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저랑 같이 해요, 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아란을 조용조용 토닥였다. 현경이 말하면 아란이 고개만 작게 끄덕여도 곧 둘만의 약속이 되었다.
아란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있던 현경은 아란의 손을 끌어와 그 손끝에도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 또 아란이 추스르지 못한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면 아란이 아플까봐 현경이 다시 입술을 맞닿아 왔다.
그만 울어요, 응? 다정한 그 목소리가 안심이 되어서 아란이 현경의 목을 끌어안고 그 품을 찾았다. 아란의 등을 토닥이던 현경도 어느새 눈물이 그렁해져서는 아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마주치는 시선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부은 눈을 보고 웃음이 터진 것도 아주 잠시였다.
문득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새삼스러워지는 바람에, 두 사람은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도 애써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서로의 몸 위에 올려둔 팔을 내리자, 밤새 닿았던 온기가 흩어져 허전하다 못해 서늘한 느낌마저 들었다.
“엇.”
아란이 먼저 몸을 일으키려다, 현경의 팔꿈치 아래에 깔렸던 옷고름이 풀어져 옷이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드러난 아란의 맨 어깨에 절반만 뜨고 있던 현경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아란도 깜짝 놀라 얼른 옷을 끌어올렸다. 팔 아래로 팽팽해진 옷고름을 그제야 알아챈 현경이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켜 이부자리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 세수, 세수하러.”
당황한 현경이 혼자 중얼거리며 속저고리 차림 그대로 마루로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 아란은 분명 새빨개졌을 얼굴을 뒤늦게 가렸다. 아, 어쩌면 좋아.
“아, 어쩌지.”
현경은 들고 있던 나뭇가지로 빈 밤송이 하나를 한참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근처에 수북이 쌓였던 낙엽들이 사그락 거리며 밀려나 어느새 밤송이 주위로 흙이 드러났다.
지난밤 부둥켜안은 채로 울고불고 했던 후로 애틋한 마음이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으나, 어쩐지 그 결이 조금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전과 달리 묘하게 흘렀다.
조금 전 아침에도 마주 앉은 밥상 위엔 수저 부딪치는 소리만이 오갔다. 괜히 작은 행동 하나도 더 신경이 쓰이고, 표정이나 숨소리까지 의식하게 되니 현경도 평소와 다르게 말 한마디 없이 입 안으로 밥만 우겨넣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란이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손을 보면 두 손에 꼭 쥐었던 그 온기가 생각나고, 오물거리는 입술을 보면 닿았던 감촉이 떠오르는 데다, 심지어는 저고리 옷깃만 봐도 맨살이 비쳐 보이는 듯하니. 온통 불순한 생각들만 가득하여 현경은 속으로 어제 너무 울어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나 싶었다.
그리하여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지난 밤 업지가 준 알밤을 갚아야 한다는 핑계로 부랴부랴 집을 뛰쳐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