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30)화 (30/63)

#30화

“…….”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놀란 듯 두 눈이 커진 아란의 얼굴이었다.

아란은 이부자리 밖으로 비죽 나온 현경의 팔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고는 들고 온 소반을 내려두고 막 현경의 얼굴을 살피던 참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곤히 잠들어 있던 현경이었는데, 일어나면 마실 물을 찾을 것 같아서 아란이 잠시 곁을 비운 동안 꿈을 꾼 모양이었다.

“깨셨어요.”

속삭이는 듯 나긋한 목소리. 현경은 창호지 너머로 스며들어오는 새벽빛을 가늠하며 여전히 혼몽한 정신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아란의 어깨 아래로 기다랗게 땋아 내려진 머리를 멍하니 보고 있던 현경이 혼잣말처럼 아란을 불렀다.

“아가씨.”

잠꼬대를 하는 걸까. 의아한 표정으로 현경을 내려다보던 아란이 손을 뻗어 현경의 이마를 가만 짚었다. 그제야 현경이 꿈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눈을 감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어느새 아침이다. 현경은 무겁게 늘어진 몸을 천천히 비틀며 겨우 일어나 앉았다.

단장을 마치고 비녀 꽂은 머리를 매만지던 아란이 경대 너머로 현경을 비춰 보았다. 잠결에 풀어진 상투끈 때문에 흘러내린 머리 하며, 눈도 제대로 못 뜬 얼굴로 물 사발을 두 손에 쥐고 있는 현경을 보고 있자니 아란은 헛웃음이 났다.

“그거 드시고, 이리 앉으세요.”

사발을 들고 물을 들이키던 현경이 그 말을 듣고 눈썹을 한 번 으쓱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얼레빗이 한 번 지날 때마다 현경의 고개가 휙휙 꺾였다. 아란이 나름 살살 빗는데도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에 어김없이 빗이 턱턱 걸려 버리니, 자꾸만 몸이 기우뚱 거리는 게 저가 생각하기에도 웃긴지 현경의 어깨가 작게 들썩거렸다.

“새벽에 안 좋은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아뇨, 그게, 제가 고향 숲에서 뛰고 있었는데.”

막상 말을 하려니 꿈 내용이 가물가물하여 기억을 더듬던 현경은 자그만 거울 너머로 얼핏 보이는 아란의 얼굴을 보느라 마저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현경은 부은 눈을 한 번 비비고 거울 속에 비친 아란을 더 잘 보기 위해 은근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뛰고 있었는데?”

현경의 머리칼을 한데 모아 틀어 올리던 아란이 되물었지만, 거울 너머로 눈이 마주친 현경은 별다른 말없이 빙긋 웃고만 있었다. 말하기 곤란하여 그러는가 싶어 아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정작 현경은 아란에게 지금이 더 꿈같다 말하면 또 실없다 하려나 싶어 말을 꾹 참았다.

거울 속 아란이 움직일 때마다 살짝 살짝 보이는 비녀를 보던 현경은 이번엔 눈만 도로록 굴려 경대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손을 뻗어 안에 든 흑단비녀를 하나 집어 들고는 쪽머리를 한 번 해볼까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아란이 그 말을 듣고 기꺼이 울려 묶던 머리를 도로 풀었다.

머리카락을 땋아 내리고 다시 그 땋은 머리를 틀어 감아 비녀를 꽂으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현경도 영락없이 참한 규수였다. 참빗으로 정갈하게 가른 머리와 고운 얼굴이 참으로 어여뻐서 세수도 하지 않은 그 반질한 얼굴을 보는 아란의 표정이 묘했다. 낯선 제 모습이 신기해 거울에 비춰 보던 현경은 그런 아란의 시선이 괜히 쑥스러웠다.

둘러앉아 머리 땋으며 놀았던 건 아주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한 기억뿐이라 아란도 까마득했으나, 현경은 그런 기억마저 없었으니 어느덧 동무처럼 붙어 앉은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어린 소녀들 같은 천진한 웃음이 피었다.

“주인나리, 일어나셨으면 아침상을 들일까요.”

“아, 그 전에 세수부터.”

방문 너머에서 들리는 여종의 말에 아란과 마주 앉아 있던 현경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현경을 아란이 다급히 붙잡는데, 잡힌 바지춤을 내려다보는 현경은 아직 그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쪽 찐 머리에 바지저고리 차림의 그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서 아란은 입술을 깨물어가며 겨우 웃음을 참았다.

“잠, 잠깐만 기다리거라.”

“예, 예에.”

당황한 주인나리의 목소리와 안방마님의 웃음 참는 소리, 그리고 다급하게 사부작거리는 소리들이 마루 위에 서 있던 여종에게까지 들려왔다. 그 바람에 두 손을 파닥이며 소란스레 부엌으로 뛰어 내려가는 여종의 얼굴이 신방 훔쳐보다 걸린 사람마냥 발그레져 있었다.

별시를 치른 지 나흘째 되던 날, 정오가 되자 도성 앞 대로엔 합격자 명단이 붙었다. 제현의 집에서 가장 눈 밝고 발이 빠른 노복이 금세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박형은 아쉽게 장원은 놓쳤지만 문하생들 중 가장 높은 곳에 이름을 올렸고, 그 밑으로 김형의 이름과 정형의 이름도 나란히 붙었다. 그러나 눈을 씻고 찾아도 현경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으니,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난 후에 그 소식을 전하는 노복마저도 뒷머리만 긁적이며 눈치를 보았다.

간만에 강연장에 모여 앉은 제현과 형님들도 기대한 바가 있어서인지 현경의 낙방에 다소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하여 그로 인해 이 경사로운 분위기를 흐릴까 싶어 현경은 오히려 더 밝은 모습으로 형님들의 합격을 축하했다.

“저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 막내가 단박에 급제를 해버리면 이 형님들 체면이 말이 아니지.”

“시험장에서 굳어 있기에 어쩐지 요상타 했다, 이번엔 아쉽게 됐으나 다음엔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앞서 현경이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제야 형님들도 현경을 격려하며 각자의 합격 소식을 마음 놓고 기뻐했다. 제현도 아쉬움을 뒤로하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 현경을 다독여 주었다.

“아무렴, 과거라는 게 열 번 만에 붙으면 효자요, 다섯 번 만에 붙으면 군자이니, 세 번 안에 붙으면 현자라 하지 않습니까.”

“우리 셋 다 겨우 불효자는 면했네, 그래.”

제현은 제자들의 농담이 우스웠던지 그것 참 다행이라며 껄껄 웃었다.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안채에 있던 아란이 어머니와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때마침 마당을 가로질러 노복들이 술상을 내오던 차라 현경은 얼른 마당으로 내려가 아란 곁에 섰다.

“현경이 어디 가냐, 한잔하고 가야지.”

“낙방자는 이만 더 공부하러 가야지요.”

“거 참, 합격은 내가 했는데 왜 저 녀석이 부럽지?”

제현 부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다정히 대문 밖을 나서는 현경과 아란을 보며 형님들은 부러움 섞인 탄식을 뱉었다.

“속상하실 텐데, 웬일로 약주도 안 하시구요.”

집으로 향하는 길을 현경과 나란히 걷던 아란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술이야 나흘 전에 죄다 마셨지요, 뭐.”

여태 아란도 딱히 시험에 관한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고, 현경도 줄곧 평소처럼 명랑했다. 아란은 혹시나 현경에게 다른 고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떨쳐지진 않았지만, 선뜻 묻지 못했다. 아무래도 긴장한 탓에 그저 제출한 답안이 성에 차지 않아 속이 상했으리라.

“손 좀 내어 보시겠습니까.”

“손을요?”

조용히 걷던 아란이 난데없이 손을 내달라 하니, 현경이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아란은 민망했는지 앞서 걸어가 버린다. 현경이 얼른 그 뒤를 쫓아가 내심 기대하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현경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것은 아란의 손이 아닌 아란이 내려쓰고 있던 장옷의 끝자락뿐이었다.

“날이 어두워 눈에 띄지 않을 겁니다. 잡으셔도.”

위로를 해주고 싶었던 걸까. 아란의 말에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현경이 웃었다. 그리곤 옷자락을 쥐어주고 멀어지는 그 손을 도로 끌어와 잡았다. 그제야 앞만 보고 걷던 아란이 현경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잡으라 하시기에, 잡은 건데요.”

아란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현경이 먼저 덤덤한 척 말을 했지만 이미 그 입꼬리가 씰룩이고 있었다.

“남들 보면 수군댑니다.”

“부부인데요, 뭘.”

말로는 남들이 본다 하면서 아란도 손을 굳이 빼진 않았다. 좀 전까지는 무겁기만 하던 발걸음을 세며 걸었는데, 이젠 땅에 발이 닿는 감각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손을 꼭 잡고 걸으니 하루 내내 꼭 쥐고 있던 마음이 오히려 풀어지는 듯하다. 도로 위안을 받는 것 같아 아란도 현경의 손을 좀 더 감싸 쥐었다.

“별시 때, 주상전하께서 행차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무슨 정신으로 답안을 써냈는지.”

“큰일 하셨네요.”

산골에서 나고 자라 상경한 지 고작 두어 달 만에 왕을 마주했으니, 얼마나 놀라고 긴장이 되었을까. 그 마음을 짐작할수록 아란은 현경이 짠하면서도 그 순진한 구석을 귀엽게 여겼다. 하지만 대견하다 다독이는 아란의 말에도 현경은 말없이 발끝만 보고 걷는다.

아란의 손을 쥐고 있자니 현경은 무심코 별시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말해도 될까. 어쩌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아도 이 사람은 모두 이해해 줄 것 같은데. 하지만 현경은 금방 그 마음을 덮었다.

아마 터무니없는 소리라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스스로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이야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현경은 아란과 걸음을 맞추다 고개를 들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저 지금처럼만 앞으로 함께 보낼 시간만을 생각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였다.

“어?”

막 골목을 돌아 들어가던 현경의 눈에 마침 빨랫감을 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서넛의 여인들이 보였다. 이제 해가 넘어갔으니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 먹일 저녁상을 차려야 할 그들의 노곤한 뒷모습을 보며, 현경은 문득 며칠 전 꾸었던 꿈속의 장면 하나가 떠올라 잠시 넋을 놓았다.

“무얼 그리 보십니까?”

“아닙니다, 그냥.”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아란의 눈을 피하며, 현경은 고개를 저었다.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대문 앞에 서서 잠깐을 망설이다 자연스레 손을 놓았다. 노복이 대문을 열기 전까지의 그 잠깐 동안, 두 사람은 서로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고민하며 입술만 달싹였다.

끼이익. 대문 열리는 소리에 꺼내려던 말들을 다시 주워 담고, 각자의 생각에 잠긴 두 사람은 평소보다 말이 없는 조용한 저녁 식사를 했다.

서책을 좀 읽겠다며 사랑방에 들어와 앉은 현경은 붓을 들어 아버지 강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편지의 첫머리는 날씨가 이제 제법 쌀쌀하니 개울에서 빨래를 하기엔 손이 많이 시릴 것 같다는 말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지난 번 치른 별시에서 낙방하였다는 소식도 적었다. 현경은 부끄러운 마음보다는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주상전하를 보았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현경은 생각만으로도 그때의 두려움이 또 다시 스물 스물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 불편한 마음이 아버지에게까지 전해질까 현경은 일부러 명문을 알아보지 못한 시험관들의 눈이 삐었다는 둥의 농담을 덧붙였다. 그러다가도 결국 답답한 속내가 글에 드러나고야 만다.

‘그간 겁 없이 살아오는 데에 거리낄 것이 없었는데,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생긴 후로는 오직 드러내는 것보다 숨기는 것들이 더욱 늘어만 갑니다. 아버지, 전 어쩌면 좋을까요.’

현경은 사랑방 문을 열어두었다. 하지만 건너편 안방의 문은 닫혀 있어 아란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제도 곁에서 함께 잠들고 아침에도 옆에서 눈을 떴는데도, 별시를 치른 후로 이따금씩 혼자 방 안에 있을 때면 현경은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대문 앞에서 쥐었던 아란의 손을 놓는 그 느낌이 어찌나 서글프던지. 현경은 괜히 맨손을 꼭 쥐며 울적해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나마도 안방에서 넘어오는 불빛이 아른아른하여 저 방 안에 아란이 있구나 하는 짐작으로 겨우 위안이 되었다.

‘강서방은 눈이 참 맑아서 볼수록 정감이 가지 않니.’

아란은 책장을 넘기며 낮에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했다. 혼인을 한 후에도 이런저런 일로 본가에 가는 일이 더러 있는데도 어머니는 볼 때마다 딸을 애틋해 했다.

어딜 가도 꼭 붙어 나란히 걷는 두 사람 금슬이야 집 안팎으로 소문이 자자하니 확인할 것도 없다지만, 강서방과 잘 지내느냐 물으면 잘 지낸다 하는 딸아이의 평온한 얼굴빛을 보는 것이 어머니 나름의 즐거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아란은 그런 어머니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 구석이 편치만은 않았다. 분명 현경과 사이좋게 잘 지낸다는 그 말이 틀리지도 않았고, 거짓된 웃음을 짓는 것이 아닌데도. 차마 꺼내지 못할 비밀 하나가 있어 다른 것들마저 거짓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아 씁쓸했다.

부모를 속이는 죄책감이야 혼인 전부터 감내하리라 결심했다 하더라도, 막상 현경과 함께 한 후로 마음 안에서 커가는 이 감정들은 또 어쩌나. 아란이 희미하게 내쉬는 한숨에 등잔불이 휘청거렸다.

“부인, 들어가겠습니다.”

방문 앞에 현경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란은 대답도 잊은 채 그림자를 멍하니 내다보다가, 살며시 열리는 문에 다시 시선을 서책에 두었다. 현경이 눈가를 어루만지며 방으로 들어섰다.

아란이 보료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보고 현경은 조용히 이부자리를 깔고 먼저 자리에 누웠다. 현경은 자는 듯 눈을 감고 있다가도 힐끔거리며 아란을 살피곤 했다.

아란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그 눈길을 알 수 있었기에 읽던 책을 덮었다. 몸을 일으켜 이부자리로 가는가 싶더니 아란은 바람이라도 쐬려는지 그대로 쓰개치마를 집어 들고 문 앞에 섰다.

“어디, 나가십니까?”

아란이 방을 나서려 하니 놀란 현경의 목소리가 아란의 뒤로 금방 따라붙었다. 아란은 그대로 서서 잠시 말을 고르다 현경이 누워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뒷간 갑니다.”

“아, 뒷간.”

황급히 천장으로 도망치는 어색한 시선을 확인하고는 아란이 문 밖으로 나섰다. 밤공기가 쌀쌀하기에 아란은 마루 끝에 앉아 어깨에 두른 쓰개치마를 여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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