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28)화 (28/63)

#28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조용히 마당을 적셨다. 뜨거운 차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다 금방 흩어져 그 모습을 감춘다. 소반 위에 나란히 놓인 찻잔 두 개에 머물던 아란의 시선이 마루 끝에 걸터앉은 현경의 뒷모습으로 옮겨졌다. 현경은 처마 끝을 한참 올려보다 조용히 말했다.

“단비가 내리네요.”

현경의 말에 아란도 흩날리는 빗줄기를 내다보았다. 벼를 쓰러뜨릴 만한 장대비도 아니니, 비가 그치고 해가 뜬다면 물렁이던 논바닥도 금방 말라 일 년 농사를 헛되게 하진 않을 것이다. 벼 수확을 앞둔 농부들은 속이 타겠지만, 촉촉한 가랑비는 밭에 자라는 채소들에겐 생기를 줄 테니. 마침 가을비를 맞은 담장 너머의 단풍들이 더욱 선명하게 고개를 들었다.

“차가 식습니다.”

현경은 얼른 몸을 돌려 좀 더 마루 안쪽으로 들어와 아란과 마주 앉았다. 선홍빛 단풍보다는 옅지만 은은한 붉은 빛이 도는 산수유차는 서늘해진 몸을 덥혀 주었다. 현경은 하얀 찻잔에 담긴 산수유차 빛깔이 곱다며 활짝 웃고는 찻잔을 들고서 한참 향을 맡으며 차를 음미했다. 하지만 이내 시큼한 맛에 금방 입꼬리가 쑥 내려간다. 떫은 뒷맛 때문에 혀를 날름거리는 현경 옆에서 아란은 조용히 차를 마셨다.

잔을 들어 입술에 대고 마시는 그 단순한 동작마저 단아한 기품이 흐르니 현경이 그 모습을 빤히 보았다. 갸름한 뺨 옆으로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칼과 동그란 귀, 장신구라고는 틀어 올린 머리에 꽂은 연한 녹색의 비녀가 전부인데도 눈을 뗄 수 없는 이 사람을, 평생 오롯이 바라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왜 그렇게 보십니까.”

“저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갑자기 생김새를 묻는 말에 아란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반듯한 눈썹이 잘생겼다 대충 말해주려 했더니, 답을 재촉하는 눈썹이 한껏 들썩이기에 그만두었다. 무슨 말을 들으려고 그러는가 싶어 가만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더니 현경은 금방 눈을 피하고 귀를 붉힌다.

“너무 그렇게 뜯어보진 마시구요.”

“자세히 보아야 답을 드리지요.”

“그냥, 부인께서 절 보시기에 오래 볼 만한가 싶어 묻는 말입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이제 평생을 해로하며 살아야 하는데, 미워 보이면 안 되니 그러지요.”

현경은 진지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또 엉뚱한 소릴 하네 싶어서 아란이 찻잔을 치우려 몸을 일으켰다. 다 드셨으면 상을 물리겠다 하니 현경이 시무룩한 얼굴로 아란을 올려다본다. 아란이 부엌에 있는 여종을 부르니, 비를 피해 총총 걸어 나온 여종이 소반을 받아든다.

“이따 저녁상은 전처럼 안방으로 들일까요?”

현경과 아란은 안방에 마주 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특히나 현경은 상을 따로 들이는 것조차 마다하여 늘 아란의 상 위에 밥 한 공기만 더 올려 달라 했으니, 으레 그렇듯 여종이 묻는 것이었다.

“오늘부터 안방과 사랑방 따로 상을 들이거라.”

“예, 마님.”

금슬 좋은 주인부부 덕에 상 차릴 수고를 덜었던 여종은 아란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소반을 들고 다시 총총 부엌께로 돌아갔다. 아란이 뒤를 돌아 현경을 보니 역시나 잔뜩 충격 받은 듯한 표정이다.

“제가 그렇게나, 겸상도 못 할 정도입니까.”

“별시가 코앞입니다. 요즘 학문에 소홀해지셨다는 건 잘 아실 테지요.”

아예 안방에 책상을 가져다 놓았으니 현경은 사랑방보다 안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하루의 전부를 아란 옆에서 보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호한 아란의 태도에 현경은 얼굴 가득 서운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서운해 하셔도 별 수 없습니다. 어차피 내조가 부족하다는 뒷말은 모두 제가 감당할 것들이니.”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현경은 결국 아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푹 쉬고는 뭉그적거리며 사랑방으로 들어가는 현경의 뒷모습을 보다 아란도 안방으로 들어왔다. 아란이 방 안에 들어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등 뒤로 안방 문이 열렸다.

“책상을 좀.”

현경이 들어와 안방에 놓인 책상을 들고 나갔다. 현경이 방을 나서며 다시 한 번 아란에게 야속한 눈길을 보냈지만 아란은 받아 주지 않았다. 현경은 아란이 제현을 닮아 다소 엄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안방 문이 닫히자 아란도 자리에 앉아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책을 펴고 이제 막 두어 줄 읽어 내리는데 다시 안방 문이 열렸다.

“읽던 책을 두고 갔네요.”

현경은 아란의 서책 함 사이에서 책을 뒤적이다 한 권을 골라 가져갔다. 아란은 현경이 나갈 때까지 말이 없었다. 안방 문이 닫히고, 아란은 책을 마저 읽었다. 다시 서너 줄 정도를 읽었을까,

“아, 이 책이 아니었네.”

혼잣말 치고는 조금 크게 중얼거리며 안방에 들어온 현경은 다시 책함을 뒤적이다 다른 책을 골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란의 콧바람이 전보다 약간 거세어졌지만 여전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현경은 아란의 눈치를 보며 이번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간다.

아란은 다시 숨을 가다듬고 책을 읽었다. 이번엔 한 줄도 아닌 고작 다섯 자를 읽는데 또 안방 문이 스르륵 열렸다.

“…….”

“하하.”

문을 열자마자 아란과 눈이 마주치니 현경이 흠칫 놀라 멋쩍게 웃었다. 그러다 뭘 계속 찾는 척하며 은근슬쩍 아란 앞에 와 이젠 아예 앉아 버리는 현경이다. 아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번엔 또 뭘 두고 가셨습니까.”

“아, 그게.”

현경은 일부러 부산스레 두리번거리더니 슬그머니 아란과 눈을 맞춰왔다. 그리고는 목을 가다듬고 뭔가를 결심한 듯 눈을 반짝였다. 아란이 알기론 그 눈은, 현경이 농담하기 전에 보이는 장난기 어린 눈망울이었다.

“안방에 부인을 두고 온 것이 자꾸 마음 쓰여서요.”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현경의 말은 아란을 당황스럽게 했다. 아란은 문득 한때 도성 여인들을 홀렸다던 능구렁이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굳은 표정과는 달리 두 볼은 홧홧해져 오니, 아란은 이마를 짚으며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중한 일을 앞두고는 언사를 주의하고 몸가짐을 정갈히 해야 하니 부부 간에도 동침을 금한다 했습니다. 별시 마칠 때까지는 계속 따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부부간 동침을 금한다는 것은 우리처럼 나란히 잠드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언사를, 주의하라고, 방금,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란이 단어마다 힘주어 말을 하니 현경이 입술을 얼른 오므렸다. 그러나 금방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니, 그나마도 고르고 골라 아란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정말로, 이 대답만큼은 꼭 들어야 글이 눈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말씀하세요.”

“조금 전 마루에서도 답을 피하셨으니 다시 여쭙겠습니다, 제 얼굴 어디가 마음에 안 차십니까?”

아란이 그만 기침하듯 하, 웃고 말았다. 줄곧 마음에 담아둔 말이 그거였나. 이번엔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한 눈망울이 아란의 대답을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전처럼 대답을 재촉하지도 않고, 제법 기대하는 눈치라, 기가 차던 아란도 덩달아 조금 진지해졌다.

굳이 꼽자면, 사내라 하기엔 너무나 어여쁘다는 것 정도였다. 맑은 얼굴빛에 크고 유순한 눈은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늘 다정함이 배어 있어서, 아란은 그 눈망울에 차마 시선을 오래 두지 못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처럼,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줄도 모를 게 뻔했으니. 아란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현경이 얼굴을 들이민 만큼 고개를 살짝 뒤로 빼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웃으시면 그나마 좀 낫습니다.”

그 한 마디에 곧바로 현경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현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법 의젓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조하였으니, 아쉽지만.”

그리곤 안방 문이 닫힐 때까지 문틈 사이로 일부러 울상을 지으니, 아란이 못 이기는 척 슬쩍 웃어 준다. 닫힌 방문 너머로 어른어른한 그림자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아란은 괜히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러다 불현듯 아란은 손을 들어 아직 열이 가라앉지 않은 볼을 매만지다 애써 책으로 시선을 둔다. 몇 자 읽다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안방 문 쪽으로 자꾸만 무심코 시선이 가니, 사람 마음이 참으로 간사했다.

얼마 후, 여종이 방으로 저녁상을 들여왔다. 마주 앉은 현경 없이 홀로 수저를 뜨려니 아란은 그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양반 법도엔 아무리 부부라도 한 상에 마주앉아 밥을 먹는 법이 없고, 밥상머리 앞에서 웃으며 떠드는 법도 없다고, 매번 아란은 현경에게 주의를 주었다. 비록 소용은 없었지만, 현경은 아란과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을 유독 즐거워했는데.

아무리 엄하게 예절 교육을 받고 자라온 아란이라 할지라도, 그렇게나 즐거운 얼굴로 밥숟갈 움푹 떠 복스럽게 먹는 현경을 보고 있으면 도통 그 모습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하여 그럴 때마다 아란은 마주 보고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이, 한 이불을 덮고 잠드는 것만큼이나 남다른 일처럼 느껴지곤 했다.

아란은 조금 열어둔 창 너머를 내다보았다. 그새 흩날리던 가랑비가 멎었다. 저녁상을 물리러 들어온 여종은 평소보다 거의 줄지 않은 아란의 밥상을 보며 걱정하였다. 찬이 입에 안 맞으셨나 묻기에, 아란은 그저 점심 먹은 것이 소화가 덜 되어 그렇다고 답했다. 여종이 저녁상을 들고 나가면서 안방 문을 여니, 사랑방에 앉아 있는 현경의 옆모습이 보였다. 사랑방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굶으시면 몸 상합니다.”

“비 온 뒤에 저녁공기가 찬데, 어찌 문을 열어두셨습니까.”

“시문을 읽다 막히는 것이 있으니 부인께 뜻풀이를 청합니다.”

“안방에 건너 올 핑계 대시려거든 어림없습니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넌지시 오가는 말에 안방 문을 닫으려던 여종이 눈치껏 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여종은 밥상을 들고 부엌께로 내려가며 작게 키득거렸다.

“그럼 제가 여기서 읊어 드릴 테니, 답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지요.”

시문은 아란보다 현경이 더 좋아하여 아는 것이 많았다. 현경이 모르는 시문이라 하니 아란도 조금 자신이 없었지만, 가만히 보료 위에 앉아 현경의 말을 기다렸다.

“처마 아래 누가 계시네,

눈이 마주쳐 나도 모르게 마음을 떨어뜨렸네.”

아란은 첫 구절부터 생소한 시에 고개를 갸웃 거리다 책함에서 시문에 관한 책을 꺼내어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 발치에 굴러간 내 마음 주우러 가면,

실수로 마음 한 점 더 얹어 돌려주려나.”

“…….”

“내 마음 가지고 벌써 자리 비우셨나, 아님,

두고 온 마음만 홀로 있는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러다 문틈 사이로 시구를 읊는 현경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드니, 그제야 아란은 현경이 읊는 시는 책에 쓰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란이 책장을 넘기다 말고 그만 웃어 버린다.

“그 처마 아래 누구 계시네,

처마 아래 내 마음 주인 웃으시네.”

아란은 보던 책을 덮었다. 곰곰이 생각하여 답을 고민하는 얼굴이다.

“약통입니다.”

“대통이 아닙니까?”

“시어가 적나라하여 은근한 멋이 덜합니다.”

“이거 참, 여태 시문으로는 통 이하로 받아본 적이 없는데, 약통이라니.”

현경이 크게 탄식하자, 그 소리를 듣던 아란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투덜대는 현경의 얼굴이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그럼 제가 좀 더 은근한 목소리로 읊을 테니, 다시 잘 들어보세요.”

목소리를 가다듬고 현경이 한 번 더 시를 읊었다. 아란은 가만히 눈을 감고 마루를 건너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현경의 은근한 목소리를 감상하였다.

지아비가 될 사람과 함께 마주 앉아 책을 읽거나 밥을 먹기도 하고, 실없이 농담하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웃다가 잠들 수 있으리라 아란은 단 한 번도 기대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현경이 사는 세상은 별난 주인을 닮아 안 되는 것이 없고 복잡한 것도 없으니, 아란이 잠시 발끝만 내디뎠을 뿐인데도 짓궂게 잡아끄는 그 손길에 발목까지 흠뻑 젖어드는 건 금방이었다.

비록 여인이라 해도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것 같아, 평생 동무처럼 기대어 사는 것만으로 족하다 여겼던 이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다정한 사람이었기에. 기댈 수나 있을까 싶던 가녀린 그 품은 편안했고, 손바닥을 꼭 감싸오는 그 손은 제법 든든했다.

거기다 오늘은 목소리마저 은근히 내어 준다 하니. 정말 다른 여인들처럼 이 능구렁이 같은 이에게 홀리기라도 했나, 아니면 그새 정이 쌓이기라도 했나.

아란은 요란한 풀벌레 소리를 핑계로 한 번 더 시를 청하였다. 현경은 기꺼이 목소리를 내었다. 사랑가보다는 시문 읊는 재주라도 있으니 그 목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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