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27)화 (27/63)

#27화

혼례를 모두 마치고 세자빈을 기쁘게 맞이한 왕실에서는 조정대신들에게 며칠에 걸친 큰 잔치를 베풀었다. 궁궐 행사에는 전국의 기방에서 이름난 기생들이 모여 그 예악과 가무를 선보이곤 했는데, 화려한 자태뿐 아니라 가야금이며 거문고 타는 솜씨로도 이름 난 홍옥은 매번 궁으로 불려가는 기생들 중 하나였다.

가야금 명기야 홍옥보다 뛰어난 이들이 여럿 있었지만, 왕실의 격조에는 중후하고도 고상한 거문고를 더 선호한다는 괴상한 풍토가 있으니, 홍옥은 그 재능이 익을 대로 익은 열다섯 무렵부터 벌써 사 년 째 궁 출입을 하며 가끔은 왕이 보는 앞에서 시도 짓고, 더러는 거문고를 타며 왕실과 고위관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궁 안에서 관복을 차려입고 왕과 제법 가까운 자리에 체면 차리고 앉아있는 관료들 중엔 기방서 옷자락 풀어헤치고 배를 내보이며 가야금 소리가 더 야들야들하다는 둥 헛소리나 지껄이던 노인네들도 없지 않았다. 처음엔 그들의 위선을 보며 속으로 한껏 그들을 비웃던 홍옥이지만, 지금이야 그네들 따위에 신경 쓰지 않은 지도 오래였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현을 놀리는 그 손길과 술대가 짚어내는 음은 결코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저 점점 깊어지는 거문고의 울림에만 집중하며 마음속의 음을 소리로, 글로 풀어내는 것에만 빠져들고 싶은데. 태생이란 것이 천하여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나 요즘 들어 홍옥은 그 연유를 뚜렷이 알 수 없는 헛헛한 마음에 자주 상념에 잠겨 있곤 했는데, 그 속도 모르고 어떤 이들은 날이 갈수록 묘한 기품이 흐른다 하여 홍옥을 찾는 자리가 오히려 더 늘었다.

“언니, 뭔 생각을 그리해?”

“응, 아니다.”

“하늘에 뭐 볼 것이 있어? 날이 꾸물꾸물한데, 비가 오려나.”

높으신 양반네들 앞에서 잔뜩 긴장한 채로 발목이 시큰거리도록 춤사위를 보이느라 발을 저는 아우 무향에게 나귀를 양보하고, 홍옥은 그 뒤를 천천히 따라 걷던 중이었다. 성격이 급하여 유독 걸음도 빠른 기부가 한참 앞서 걷더니, 홍옥 대신 무향이 나귀에 오른 것을 보고 타박하였다. 홍옥의 거문고를 꼭 끌어안은 채 나귀 위에서 빨간 입술을 삐죽이던 무향이 홍옥을 돌아보며 투정하였지만, 홍옥은 그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네 년 타라고 빌린 나귀인 줄 알아?”

“홍옥 언니는 거문고 타느라 종일 앉아 계셨으니, 수고한 내가 좀 타면 어떻다구, 하여간 저 성깔.”

“뭘 잘 했다구? 네 년 동작 흐트러진 것 내 모를 줄 알지?”

“하이고야, 언니 들으셨소? 저 자가 기방서 기부노릇 좀 하더니 이젠 내 춤사위를 다 논하네, 우습소.”

오동통한 볼을 하고선 깔깔 대는 계집아이의 웃음소리는 타고나기를 유독 밝았다. 날렵한 몸짓만큼이나 새들대는 저 소리가 가끔은 근심을 탈탈 털어 내리는 것 같아 홍옥은 잠시 하던 생각을 잊고 미소를 짓는데, 기부가 웃음소리가 요란하다며 무향에게 한껏 눈을 부라린다. 아직 선은교를 다 건너지 않았으니 혹여나 흠이 잡힐까 봐서였다.

왕이 은혜를 베풀어 놓아둔 다리라 하여 이름 붙여진 선은교는 궁궐에서 장터로 곧바로 이어진 다리였다. 지엄하신 궁궐 분들은 그 문을 지나는 데에도 신분을 엄격히 나누니, 감히 문무 대신들이 지나는 정문으로는 천한 기생이 드나들 순 없었다.

하여 궁의 나인들이 심부름을 갈 때 쓰는 작은 쪽문 중 하나를 통해 빙 돌아 오가야 하니, 선은교를 건너는 것이 그나마 기방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도성 상인들이 수탈에 가까운 공물을 은밀히 내다 바치는 길목이기도 해서 말단 병졸들이 종종 시비를 걸어 재물을 뜯어내기도 하는 터라 기부가 이렇듯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얼른 내려와 걷지 못해?”

“내가 괜한 꾀부리나 뭐, 발목이 다 후들후들해서 그러지. 춤추는 기생이 다리병신 되면 어찌 책임지려고 그래?”

무향이 서운하여 기부를 잔뜩 노려보는데, 욕지거리를 뱉으려던 기부는 뒤따르는 홍옥의 눈초리에 입을 꾹 다문다. 무향이 저년, 하며 벼르던 기부도 선은교 다 건넜으니 괜찮겠지 싶어 도로 앞을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장터에 들어서자마자 날벼락 같은 호통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이! 어디 천한 년이! 건방지게 나귀를 타고 길을 가?”

아마 대낮부터 술에 취했는지, 아니면 술을 핑계로 고약한 추태를 푸는 것인지 얼굴이 벌건 양반 하나가 소리를 치며 무향이 타고 있던 나귀를 발로 팍 걷어찼다. 애꿎은 나귀가 쓰러지니 그 위에 앉아 있던 무향도 길바닥에 몸이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어, 송구합니다, 이러지 마십쇼, 나으리.”

“천것들이 어디 고개 빳빳이 들고 돌아다녀, 엉?!”

기부가 몸부림을 치는 양반을 말렸다. 왜소한 양반에 비해 기부의 덩치가 더 컸지만, 감히 세게 붙들었다간 더 난리를 피울까 싶어 기부는 어설피 팔을 잡는 시늉만 하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놀란 홍옥이 얼른 무향에게 다가가 부축하였다.

“괜찮니? 다치지 않았어?”

“난 괜찮은데 언니 거문고 상했으면 어쩌지, 내가 꼭 안고는 있었는데.”

무향이 홍옥의 거문고를 끌어안고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다행히 나귀의 키가 낮은 탓에 무향이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기부가 쓰러진 나귀를 일으키는 동안, 양반은 자신을 노려보는 무향을 한 번 더 밀쳤다. 거문고가 어느 가게 안쪽으로 쓰러졌고, 양반은 무향을 살피던 홍옥의 팔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그러다 홍옥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딸꾹, 숨을 삼켰다.

“오호라, 홍옥이, 홍옥이구만.”

홍옥은 눈짓으로 기부에게 무향을 달래어 나졸들을 불러올 것을 조용히 당부했다. 그리고는 자세를 바르게 하여 양반네 앞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하얗고 단정한 얼굴 위로 당황하거나 분한 기색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홍옥의 나이가 비록 스물이 아직 안 되었음에도 그 자태가 당당한 것은 생각보다 이처럼 더럽고 추악한 자들을 마주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미천하고 우매하여 나리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마땅히 그 죗값을 치러야 하나,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서하신다면 이 홍옥이 그 은혜를 잊지 않겠나이다.”

“그래그래, 내 특별히 너는 용서해 주겠다만, 이 큰 은혜를 갚으려면 응? 밤이 깊어도 모자랄 것이야.”

얼굴을 이죽이며 홍옥에게 다가서는 양반을 선뜻 말리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불과 한 식경 남짓 전만 해도 구중궁궐의 가장 화려한 무대 한가운데서 귀하신 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거문고를 타던 천하의 홍옥도 길바닥에선 그저 천한 기생년에 불과했다. 홍옥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공손히 말을 올렸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기방까지 모실 테니 앞장서시면 따르겠습니다.”

그 도도한 홍옥이 이리 고분고분하게 나오니 양반은 잔뜩 기세등등해서는 군말 없이 앞장서 걸었다. 홍옥은 기방까지만 무사히 가면 술을 진탕 먹여 재우든, 다른 기부들을 시켜 제압하든 다른 방도를 찾을 참이었다. 기부와 무향에게 나졸들을 불러오라 이르긴 했다만, 나졸들은 웬만한 칼부림이 나지 않고서야 양반과 기생 사이 얽힌 일에는 나서길 꺼려 하니 크게 기대할 바가 못 되었다.

그렇게 홍옥이 속으로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양반을 따라 걷는데, 나졸들 셋이 장터 골목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장터 안의 사람들 틈에서 얼굴이 시뻘겋고 술 냄새를 풍기는 양반을 바로 알아보고 붙잡아 끌고 갔다. 이런 적이 보통 없는데 어찌 된 일인가 싶어 홍옥이 주위를 살피니, 거문고를 끌어안고 있던 무향이 어느 여인과 함께 서있다.

“어찌 된 거야, 나졸들이 웬일로.”

홍옥이 얼른 그 곁에 다가서 무향에게 물으니, 연신 고맙다며 여인에게 고개를 조아리던 무향이 그 연유를 설명해 주었다. 사정을 듣고 난 홍옥도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올렸다. 여인은 한사코 별것 아니라며 고개만 저었다.

아란은 포목점에서 옥색 천을 고르던 중이었다. 좀 더 푸른빛이 도는 것이 나을까, 은은한 빛이 도는 것이 좋을까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데, 바로 뒤쪽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보아하니 고약한 양반네가 추태를 부리는 모양이었다. 가는 장날마다 소란이니 아란도 진절머리가 나 한숨이 폭 나오는데,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란의 옆으로 거문고가 넘어들어 왔다.

“아이고, 저런 우라질 놈을 봤나! 남 장사하는데!”

포목점 주인이 욕을 하며 얼른 거문고를 치우는데, 이미 선반은 부서져 떨어졌고, 아란이 방금 전까지 고민하던 옥색 천 하나도 그 바람에 북 찢겨졌다. 아란이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보는데, 이 난리의 주인공이 기생들에게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는 데다, 넘어진 기생 옆에 선 사내도 누굴 불러올 생각은 않고 가만있으니 보다 못한 아란이 그 사내를 불렀다.

“왜, 나졸들을 불러오지 않구요.”

“그 자들은 기생이 얻어맞고 있다 해도 안 옵니다. 그보다 제가 가서 말려야 하니 이 아이를 좀.”

“나졸들더러 웬 건달이 술에 취해 가게를 부수고 어느 대감집 아녀자를 희롱하고 있다 전하세요, 나중에라도 제가 보았다 할 테니.”

그 말에 사내가 머뭇거리다 얼른 사람들 틈으로 뛰쳐나간다. 아란은 넘어진 기생을 부축해 일으켰다. “어떡해, 우리 언니 어떡해요.” 앳된 기생이 울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추태를 부리고 있는 양반과 마주 서 있는 또 다른 기생은 짙은 남색 저고리가 하얀 얼굴과 대비되어 이목구비가 더욱 선명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절세미인이란 말이 어울리는 여인인데, 저리 험한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얼굴에 미소까지 짓는다.

그리곤 얼빠진 양반을 살살 달래어 장터를 빠져나가려 하는데, 다행히도 조금 전에 나간 사내가 제법 발이 빨랐는지 나졸들이 금방 들이닥쳐 그 자를 끌고 갔다. 상황은 대충 일단락되었으니 아란은 내심 안도했다. 여전히 꿍얼대고 있는 포목점 주인에게서 고민하던 옥색 천 두 종류 모두 값을 치렀다. 찢어진 쪽이 좀 더 아란의 마음에 들었던 빛깔이라 아란의 얼굴 위로 약간의 아쉬움이 스쳤다.

“괜한 일에 얽혀 옷감이 상하였으니 사죄드립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값을 치르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거문고가…….”

홍옥이 다가와 아란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옷감을 물으려 하니 아란이 사양했다. 거문고는 비단에 감싸여 있었지만 몇 번이나 바닥에 곤두박질을 쳤으니 괘가 떨어져 나가고 복판에 금이 갔다. 괘야 아교를 끓여 붙이면 어떻게든 되겠으나 복판이 쪼개진 것은 조금 아까웠다. 꽤나 값을 준 거문고라 홍옥이 아끼던 것이었는데.

“분신과 다름없는 악기가 상했으니 예인께서 상심이 크겠습니다.”

안타까워하는 그 말에 홍옥이 가만히 아란을 바라보았다. 남들이 일패기생이라 대접해 주는 것보다 스스로 예인이라는 자부심이 더 컸던 홍옥이었다. 비록 겉치레 말이라도 이렇듯 존중받는 말을 들으니 홍옥은 상냥한 성품의 여인을 남다르게 보았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존함을 일러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니 당치 않습니다.”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에 아란은 조금 전 그 추잡한 양반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미소 짓던 기생의 그 당당한 말투가 떠올랐다. 물론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정중하게 물어왔지만. 아란은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저었다.

“곤란한 상황에 마음이 좋지 않으실 테니, 오늘 일은 그저 잊으시길 바랍니다.”

“…….”

아란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서니 홍옥이 흠칫 놀라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아란은 그저 신분을 떠나 저와 달리 불의에 의연하던 여인에게 존중을 표하는 의미로 건넨 인사였으나, 홍옥에게는 그런 아란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이름을 듣지도 전하지도 않고 홀연히 멀어지니, 어느새 홍옥은 눈앞에 가느다란 빗줄기가 흩날리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란은 빗방울이 조금씩 거리를 적시자 장옷을 머리 위로 둘러썼다. 함께 돌아가자 했으니 현경을 찾아야 할 텐데, 어디에 있을까 아란이 잠시 방향을 가늠하는 사이, 저 멀리서 누가 봐도 싱글벙글 웃으며 별나게 뛰어오는 얼굴이 보인다.

“으아아, 비 와요!”

그러더니 그대로 멈추지 않고 아란을 끌어안아 마저 달리니, 막무가내로 밀려진 아란도 덩달아 걸음이 빨라졌다. 현경이 머리 위로 펼쳐들며 뛰어온 것은 별시 때 쓴다던 종이 뭉치였다.

“종이가 젖지 않습니까!”

“말리면 되지요!”

아란이 황당해하며 소리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현경은 헤헤 웃으며 아란을 끌어안은 채 집까지 달렸다.

그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보던 홍옥은 뒤늦게 방금 전의 그 여인이 아란이었음을 깨달았다. 현경이 아란 아가씨와 혼인하였다는 얘기만 들었지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으니 몰라본 것은 당연함에도, 홍옥은 그 자리에 박힌 듯 서서 다소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가채 젖는데, 뭘 하고 있소?”

기부가 얼른 종이우산을 펼쳐들고 홍옥의 머리 위로 받쳐 주었다. 매끈한 대나무살에 기름먹인 종이가 반들반들한 종이우산은 홍옥을 흠모하던 어느 선비가 기부에게 전하고 간 것이었다.

“천것이 우산 쓴다고 또 화를 당하는 거 아닌가 몰라.”

“잘나가는 기생이라 양반네가 준 것이니 걱정 말고 얼른 갑시다, 감기 들면 내일 연회 어쩌려고.”

홍옥이 작게 중얼거리니 기부가 심드렁한 말투로 대꾸한다. 얼른 가자 재촉해도 홍옥은 천천히 손을 뻗어 내리는 비에 손을 적셨다. 이 정도 흩날리는 가랑비 정도야, 홍옥은 옷이 젖는 줄도 모른 채 비를 맞아본 적이 언제였는가 까마득해했다.

“무향이 우산 써라, 감기 든다.”

“언니는?”

“나는…….”

홍옥은 문득 이 비를 맞으며 걷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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