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26)화 (26/63)

#26화

“바람이 좋지 않습니까.”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던 현경이 대뜸 그리 말했다. 그대로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 슬쩍 운을 띄운 말이었다. 아란은 그 속을 모르지 않았으나 응해 줄까 말까 잠시 속으로 고민하였다.

“곧 별시인데, 책 읽을 시간도 모자랄 때가 아닙니까.”

“형님들이 그러는데, 머리는 비울수록 더 많이 채울 수 있다 합니다.”

장터 지나기 전만 하더라도 형님들은 너무 유치하다며 툴툴대던 현경이었다. 하여간 말은. 아란이 피식 웃자 현경은 신이 나서 아란을 재촉했다. 이번엔 아란이 선뜻 따르니 현경의 발걸음이 더 가뿐해졌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골목에 들어서는 아란의 눈에도 약간의 설렘이 스쳤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아주 멋진 곳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골목을 지나 도성 외곽을 따라 걸었다. 그 길목 옆에는 그리 높지 않은 야산 하나가 있는데, 전부터 사람이 죽으면 이 산에 묻는다는 말이 있어 곳곳에 돌무더기들이 많이 보였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 들은 무서운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 아란은 스산한 기분이 들어 자꾸만 야산 쪽을 돌아보았다.

“거의 다 왔습니다.”

“…….”저 말만 벌써 몇 번째인지, 아란은 지름길이랍시고 자꾸만 으슥한 쪽으로 앞서가는 현경의 뒷모습만 야속하게 보았다. 그렇게 발자국만 세며 현경의 뒤만 따라 걷다가, 질펀한 흙 대신 둥그스름한 자갈이 발에 차일 때쯤 아란이 고개를 들었다.

고운 자갈이 깔린 강가는 한적했고 잔잔히 흐르는 강물이 반짝거렸다. 지금껏 평생을 도성에서 살았음에도 이런 곳이 있는 줄조차 몰랐던 아란은 머리 위에 쓰고 있던 장옷을 내려 어깨에 걸치고 눈앞에 펼쳐진 풍광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그 틈에 현경은 강가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는 사공에게 슬쩍 다가가 말을 건넸다.

“지금 배 한 척 띄울 수 있습니까.”

“허허, 지난번에 오셨던 도련님이시네.”

현경을 알아본 사공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하다가 현경 뒤에 있는 아란을 힐끔 보고는, 이제 도련님이 아니라 나으리라 불러 드려야겠다며 껄껄 웃었다. 그러더니 금방 작은 나룻배 한 척을 띄우고는 손수 화문석까지 정성스레 깔아 앞에 대령하니, 현경이 먼발치에 선 아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현경이 먼저 배에 올라 아란에게 손을 내밀자, 아란은 그 손을 잡고 조심스레 흔들리는 나룻배 위로 발을 내딛었다. 아란은 살짝 들뜬 표정이었다. 화문석 위에 아란과 현경이 나란히 앉자 사공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느긋하게 노를 내어 자갈들을 밀어냈다. 뱃머리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경쾌하여 운치가 있었다.

아란은 처음 타보는 배가 신기하면서도, 흔들흔들하는 움직임이 불안한지 두 손을 가만 둘 줄을 몰랐다. 그래서 앉은 바닥을 더듬거리며 헤매는 손을 현경이 슬쩍 끌어다 잡아도 아란은 별말 없이 그대로 두었다. 아란은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겁이 많아서, 뭐든 붙잡고 있는 편이 낫다 여긴 탓이었다. 작은 손바닥이 꼭 맞닿으니 현경은 먼저 끌어다 잡아놓고도 쑥스러워 괜히 명치가 간질거렸다.

“혼자서는 말도 못 타시고, 배도 못 타시니 이를 어쩝니까.”

“처음이라 그럽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줄은 몰랐는데.”

“보아하니 저 두고 도망가시긴 글렀네요.”

“도망이야 마음만 먹으면 가마 타고서라도 못 갈까요.”

“가마는 말 타면 금방인데, 어림없습니다.”

현경이 먼저 약을 올리기에 아란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더니, 지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어림없다 새초롬히 답하는 현경이 아란은 그저 우스웠다. 아란이 웃는 것을 바라보던 현경이 잡고 있던 아란의 손을 좀 더 꼬옥 쥐고는 사공에게 넌지시 말을 돌렸다.

“아내가 배를 처음 타 불안해하는 듯하니, 살살 갑시다.”

“예에, 나으리.”

사공이 웃으며 좀 더 부드럽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의 요령에 배의 흔들림이 금방 잠잠해졌다. 삼십여 년이 넘도록 이 강에서 노를 저어 왔지만 기생을 옆에 끼고 노는 양반네들이야 수두룩하게 봤어도 자기 부인을 데려와 뱃놀이를 온 사내는 기억에 없으니. 사공은 흐뭇하게 웃으며 흥얼흥얼 저 먼 산자락을 내다보며 유유히 노를 젓는다. 좋을시고, 좋을시고.

아란은 아직 낯선 호칭에 귀가 다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사공에게 일부러 이르는 걸 보니 저 들으라고 한 소리 같긴 한데. 차마 서방님 소리는 입이 떨어지질 않고, 그동안 도련님 소리 해온 입버릇이 쉽게 고쳐질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왠지 자신을 부르는 그 단어가 싫지 않아 새삼스러웠다. 현경은 그 후로도 은근슬쩍 부인 부인하며 잘도 부르는데, 아란은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애를 쓴다.

“어떻습니까, 나오니 좋지요, 부인?”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불어드는 바람과 산등성이를 보고 있자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지요.”

“이것도 전에 말씀하신 사내들만의 풍류라 합니까.”

현경은 그저 미소만 지으니, “보여주고픈 세상이 많아요.” 하는 말 대신이었다. 함께 보내고 싶은 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로 다 할 수 없는데, 이 사람이 그 마음을 다 알까 싶어서.

말은 않고 싱긋 웃기만 하는 현경을 보다 시선을 돌리는데, 아란은 그제야 꼭 잡은 두 손이 눈에 들어온다. 배도 잠잠해졌으니 뒤늦게 쑥스러워 손을 슬그머니 빼내려 하니, 갑자기 배가 크게 기우뚱한다. 아란이 놀라 앗 소리를 내며 도로 그 손을 잡고, 현경도 휘청하여 아란을 바짝 끌어안았다.

“어이쿠우, 저런, 배가 바윗돌에 잠깐 걸렸나. 괜찮으십니까요.”

느릿한 사공의 목소리에 현경이 고개를 들어 사공을 바라보니, 사공이 웃고 있다. 금방 눈치를 챈 현경이 그만 소리 내 웃고 마는데, 현경에게 기댄 채 아란은 놀란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사공의 노 젓는 솜씨가 일품 아닙니까.”

아란은 그 뜬금없는 말에 황당한 표정인데, 둘이서 히죽 웃고 있는 사공과 현경을 번갈아 보다 순간 열 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린다. 전보다 더 바싹 붙어 앉은 현경은 아란의 손을 놓지 않고 단단히 쥐었다.

“사공이 그러는데, 이 강바닥에 바윗돌이 참 많대요.”

“…….”

아직도 놀란 마음이 진정되질 않아 그런가. 아란은 이 떨림이 맞닿아 있는 현경의 어깨에까지 전해질 것만 같아 부끄러워졌다. 아직 화창한 대낮이라 붉어진 아란의 얼굴을 숨겨줄 그늘이 없으니, 얄밉게도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 놓으라는 말에도 꿈쩍 않으니 맞닿은 손바닥이 다 쿵쿵 뛰는데 그 떨림이 둘 중 누구의 것인지 몰랐다.

집으로 오는 내내 현경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함께 향할 곳도 돌아갈 곳도 같으니, 함께 걷는 것이 즐거워서였다. 본래 남녀가 일행이더라도 앞뒤로 조금 떨어져 걷는 것이 당연하지만, 부부라면 나란히 붙어 걸어도 딱히 눈총 받을 일이 덜하니 현경의 발걸음이 절로 씩씩해졌다.

맨 장난만 치고 사람 얼굴 붉히게 만드는 재주만 있는 현경의 뒤통수를 얄밉게 보면서도 영 밉지만은 않으니, 고새 미운 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여태 마음 트고 지낸 동무 하나 제대로 사귀어본 적 없는 아란은 남들보다 좀 더 개구지고 특히 더 유별난 동무를 보며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감정들이 낯설었다.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눈길을 돌리다가도, 현경의 걸음걸이를 보고 저러니 치마 입기는 글렀다며 아란이 속으로 비웃는데, 결국 그마저도 현경에 대한 생각인 걸 미처 몰랐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현경은 곧바로 사랑방에 들어가 책을 폈다. 갑자기 공부에 의욕을 보이는 현경의 모습을 아란은 잠시 대견한 눈으로 보다가 안방으로 들어왔다. 함께 있을 땐 잘 몰랐는데, 안방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방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아직은 낯선 방에서 아란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책을 읽고 싶었으나 친정에서 가져온 자신의 서책들은 잘 모르는 짐꾼들이 죄다 현경의 사랑방에 옮겨둔 모양이었다. 책을 가지러 사랑방에 들어가기도 무엇하니, 자수라도 놓을까 싶어 아란은 바느질함을 찾았다.

아침 내내 학자의 아내로서 살아온 어머니의 잔소리를 잔뜩 듣고 온 터라, 아주 내키진 않더라도 남들 하는 만큼의 시험 뒷바라지는 해야겠다 생각은 하고 있었다. 문득, 현경이 시험 치를 때 입을 옥색 도포를 하나 지어줄까 싶어 반닫이에 막 손을 뻗는 참이었다. 안방의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현경이 들어왔다.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못 보던 유건까지 챙겨 쓰고, 책상을 들고 온 현경은 자유롭지 않은 두 손 대신에 슬쩍 발로 문을 밀어 닫았다. 손에 든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서책들이 쌓여 있었고, 아란의 보료 앞에 책상을 내려놓고서 현경이 그대로 앉았다. 책상과 현경을 번갈아보던 아란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니, 현경은 묻지도 않은 말을 사뭇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아, 집이 북향이라 그런가, 낮인데도 사랑방이 어둡네요.”

그러더니 가지고 온 서책더미 속에서 냉큼 한 권을 찾아 아란 쪽으로 둔다. 아란이 뭔가 싶어 자리에 앉아 책을 살피니, 현경은 용케도 본가에 있을 때 아란이 읽다만 책을 골라 왔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책을 펴고 자세를 잡는다. 현경은 웃음기 없는 심각한 얼굴로 일부러 중얼중얼 염불을 외우듯 책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아란은 책장을 넘기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이 집은 남향입니다.”

아. 중얼거리며 책장을 넘기던 현경이 멈칫 한다. 민망한지 괜히 헛기침 한 번 하고는, 뒤늦게 새어 나오는 현경의 웃음소리에 아란도 따라 웃었다. 유건을 쓴 현경의 동그란 얼굴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볕이 누군가의 미소처럼 따뜻하게 방 안을 덮어왔다.

나라에 경사가 있으니 저잣거리는 며칠째 사람들로 북적였다. 세자의 성대한 국혼을 마친 후에도 그 여흥으로 며칠간 거리에는 크고 작은 잔치가 이어지곤 했는데, 그 동안 별시를 앞둔 선비들은 마냥 즐길 수가 없으니 어수선한 마음으로 책상머리 앞에 앉아 골머리를 앓았다.

물론 보통의 선비들이야 이렇지만, 어딜 가나 간혹 보통이 아닌 선비들도 있기 마련이니. 현경은 기어이 고집을 부려 잠시 장터에 다녀오겠다는 아란을 따라 나섰다. 말로는 별시 때 답안을 쓸 종이를 사러 가야 한다고는 하나, 그 사람 많은 곳에 아란을 혼자 보내려니 마음이 놓이지 않은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도 잠시, 이미 장터에 들어서자마자 책방에 들어가 시험과는 상관없는 잡다한 책들을 뒤적이며 기웃거리고 있다. 본래 시험을 앞둔 선비일수록 눈에 박히도록 읽은 사서삼경보다야 남들 쉬쉬하는 잡서들에 눈길이 가기 마련이었다.

뱃놀이를 다녀온 후로 현경의 책상은 여전히 안방에 놓여 있었다. 학문에 집중해야 할 사람이 책 한 번 보다 농담하고, 책 한 번 보다 장난을 거니 시험 준비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아란이 이를 우려하여 단단히 일렀음에도 현경은 눈을 반짝이며 듣는 체만 하지, 그다지 귀담아 듣는 것 같진 않았다.

“저는 포목점에 다녀올 테니, 그것만 읽고 종이 사러 가세요.”

“어어, 잠시 잊은 것이 있습니다.”

쪼그려 앉아 책을 뒤적이는 현경을 두고 아란이 책방을 나가니 현경이 급히 아란을 쫓아 나와 불러 세웠다. 별안간 소매 춤을 뒤적거리며 전할 것이 있다하여, 손을 내어 보라기에 아란이 손바닥을 내보였다. 뭘 주려나 싶어 아란이 잠자코 기다리는데, 현경이 소매 자락에서 쑥 꺼낸 것은 뽀얀 손이 전부였으니.

“조금 이따 함께 돌아가려 하니, 먼저 가시면 안 됩니다?”

아란이 내민 고운 손을 꼭 쥐었다 놓는 현경의 손바닥이 따끈했다. 살짝 시렸던 손끝에 그 온기가 사라지는 것을 아란이 아쉬워할 틈도 없이, 현경은 웃으며 도로 책방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남들 보기에 부부라 하더라도,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시장 통에서 손을 잡아올 생각을 하니 참으로 대책 없는 사람이라, 아란은 고개를 가만 저으면서도 슬쩍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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