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25)화 (25/63)

#25화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담도 넘어가며 아란이 있는 별당에 불쑥불쑥 가던 현경이었지만, 이제 와 아란과 단둘이 마주 앉아 있으려니 새삼 긴장이 되었다. 게다가 곱게 단장한 아란을 이렇게 무릎이 맞닿을 만치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 현경은 눈도 못 마주치고 방바닥만 보고 있던 참이었다.

쭈뼛대며 괜히 무릎에 올린 손만 꼼지락대는 현경과 달리 아란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루 종일 일어서라면 일어서고, 절하라면 절하고, 말도 하지 말고 웃지도, 인상을 찌푸리지도 말라. 단단히 주의를 들은 탓에 오히려 이제와 긴장이 풀려 기운이 다 빠진 탓이었다.

마음 같아선 알아서 예복을 벗어 던지고 얼른 쉬고 싶었지만, 족두리와 옷고름은 반드시 신랑이 풀어주어야 액운을 피한다고 어머니가 누누이 말하셨기에, 아란은 하는 수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 어른들이 일러준 혼인의 절차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마 내일까지 죽 이어질 것이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지금 앉아 있는 기력이 전부입니다.”

“어, 그래도 첫날밤인데.”

현경이 장난스레 투덜거리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아란의 작은 한숨 소리에 현경은 아란을 힐끔 보았다. 피곤해서 농담할 기력도 없으니 얼른 족두리나 벗기라는 표정이다. 오늘 하루 종일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다스리느라 용을 쓴 현경과 달리, 아란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비록 남들 보라고 올린 혼례이긴 했어도 현경의 마음으로는 진정이었으나, 아란은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가도 일단 절차는 아직 남았으니, 피곤한 아란부터 좀 재워야겠다는 생각에 현경은 자세를 바로 했다.

“…….”

“…….”

하지만 나이가 어린 현경이나 나이가 찬 아란이나 모르긴 매한가지. 보는 이 하나 없이 단 둘뿐인데도 멈칫하며 동작이 조심스러웠다. 어른들이 일러준 순서에 따라 현경은 아란이 따라준 술 한 잔을 마셨고 아란도 현경이 조금 따라준 술에 입술만 대었다. 술맛이 쓴지 미간을 좁히는 아란의 표정을 보고 현경이 몰래 웃었다.

현경은 쓰고 있던 사모를 벗으려다 말고 슬쩍 아란 눈치를 본다. 현경과 눈이 마주친 아란도 순간 헷갈리는 눈치다. 현경은 잠시 생각하다 도로 사모를 쓰고 아란 곁에 더 붙어 앉아 고개를 내민다. 아란이 손을 뻗어 현경의 사모를 벗기고 조심스레 단령의 옷고름을 풀었다. 풀리는 옷고름을 내려다보면서도 이 순서가 맞는가, 속으로 생각하는 두 사람의 얼굴이 골똘했다.

현경이 단령포를 벗어 옆에 놓아두고 아란 앞에 더 가까이 앉았다. 족두리 끈을 풀어내면서 눈앞에 시선을 내리깐 아란의 속눈썹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아 현경의 마음도 떨렸다. 활옷의 허리띠를 풀어야 하는데 매듭이 등 뒤로 나있어 현경이 아란을 감싸 안아 손을 뒤로하여 풀었다. 아란은 현경이 다가오는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술기운이 금방 오르는지 아란의 얼굴에 열이 다 오른다.

활옷을 벗어내자 아란이 안에 입은 노란저고리의 옷고름이 보였다. 아란은 괜히 뭘 할 것도 아닌데 옷고름에 현경의 손이 닿는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하였다. 살짝 떨리던 현경의 손이 몇 번 헤매다가 서툴게 아란의 옷고름을 풀어냈다. 하얀 소복차림이 된 둘은 아란이 먼저 원앙금침 위에 눕고 현경이 그 옆에가 누웠다.

둘은 얼마간 말없이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러다 현경이 먼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비슷한 생각을 하던 중이었는지 아란도 작게 따라 웃었다. 현경이 아란 쪽으로 돌아누웠다.

“어른들이 일러준 순서대로 했으니, 액운을 피할 만하겠지요?”

“그럼 다행이지요.”

“그럼, 이 다음엔 뭐가 남았는지도 아십니까.”

아란이 감고 있던 눈을 떠 천장을 보았다. 현경은 그런 아란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팔을 들어 턱을 괴었다. 아란을 내려다보고 있는 현경은 역시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다.

“노란저고리 옷고름을 풀거든, 그 후로는 신랑 하는 대로 따르라 들으셨지요?”

“…….”

“바지저고리 입고 향교 다니면, 초야 치르는 법도 가르쳐 준다는 거 아십니까.”

“…….”

“밤을 보내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인데, 사내에게 가르치고 여인은 그저 따르라 하니 우습지만서도.”

아란이 눈을 깜빡이며 당황해 하는 모습이 어두운 방 안에서도 얼핏 보였다. 현경이 웃음을 꾹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이 없던 아란은 못 들은 척이라도 하는지 눈을 도로 꼭 감았다. 그 모습을 좀 더 보고 싶었지만 아란이 아까부터 피곤하다 했던 것은 알고 있었으니, 괜한 농을 걸었나 싶어 이번엔 현경이 순순히 물러났다.

“초야 치르는 법이 뭐라던가요.”

현경이 눈을 감고 어설피 잠에 들려던 때에, 작은 숨소리처럼 아란이 말했다. 아란은 눈을 감은 채 잠이 든 사람처럼 고요하니, 현경이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바라보려다 말고 도로 몸을 뉘였다.

“음, 말로 하기엔 좀 그렇지요?”

“집안 대를 이을 아이를 생산하는 행위 말고도 더 있습니까.”

건조한 그 목소리에 현경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거두었다. 농담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아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모일 모시에 어느 방향을 향해 공을 들여 품에 안아야 건강한 사내아이를 생산할 수 있다는 내용의 서책을 읽고, 여인의 몸을 표현한 시를 지어 외우게 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책에서 읽고 향교에서 배운 것만으론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 책의 내용들이 얼마나 우습고도 망측한지, 더러는 터무니없는 내용에 얼마나 기가 차기도 했는지 아란에게 털어 놓으려다가도 현경은 가라앉은 아란의 분위기에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어둠에 가려 어렴풋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 누워 아란을 바라보고 있자니, 현경은 가슴이 떨렸다. 자신은 이러한데 아란의 마음은 어떠한지. 아마도 묻지 못할 또 다른 의문이 불쑥 현경의 목 끝에 걸렸다. 지금 아란의 마음은 괜찮은지.

“초야는 평생 곁에 있기를 처음으로 약조하는 밤 아닙니까.”

현경의 차분한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아란은 평생이라는 그 말이 아주 아득하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아예 모르는 이로 만났더라면, 현경이 여인인 것을 몰랐더라면. 자신은 저 말에 가슴 떨려 했을까. 아란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애초에 이렇게 만날 일도 없었겠지.

허울뿐인 이 혼인으로 자신은 사람들의 불편한 눈총을 피하겠지만, 현경은 얻는 것이 무엇일까. 정인으로 만나 이 밤을 보내는 것도 아닌데, 현경은 뭐가 그리 신이 날까. 평생 함께한다는 약조를 왜 자신과 하려 할까. 현경의 그 마음은 과연 무엇일까. 아란은 줄곧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내기 어려워 눈을 꼭 감고 잠들기 위해 애썼다.

“그러니 약조의 의미로 제가 사랑가 한 곡 올릴 테니 잘 들으세요.”

“…….”

“흠, 흠.”

그러더니 별안간 소리를 내어 노래를 부르는데. 아란은 뜬금없는 그 음성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경을 돌아보았다. 떨리는 목소리에 제멋대로 흉내 내는 사랑가는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고개까지 까닥이며 흥얼흥얼 부르는 그 모습에 아란은 웃음이 터졌고, 한참을 그렇게 웃느라 아란은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채우던 텁텁한 생각들을 모두 잊었다.

“사랑가를 들으셨으니, 아가씨도 약조 하나 하셔야죠.”

기어이 아는 노랫말을 전부 읊고 나서야 현경은 아란을 향해 돌아누워 말했다. 웃다 지친 아란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방금 전까지 노래한 현경의 숨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이제부턴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겁니다.”

문틈에 들어오는 달빛을 등지고 누웠음에도 아란의 대답을 기다리는 현경의 눈이 반짝였다. 아란은 그 뒤엣말이 더 이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현경은 오직 그 말뿐이었다.

“약조할 것은 그게 전부입니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현경처럼 근심과는 거리가 멀게 살 자신은 없지만, 아란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는 것 또한 별나다는 생각과 함께. 현경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란을 보며 히죽 웃고는 돌아누운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럼, 편히 주무세요.”

현경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감으며 오늘은 아주 쉽게 잠에 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이 따뜻한 기분을 아란에게 설명해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 평온함이 흩어질까 현경은 입을 꼭 다물었다.

잠잠해진 현경 쪽을 아란이 힐끔 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현경의 입꼬리가 한 번 더 위로 솟았다. 얼른 시선을 돌린 아란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콩콩콩 뛰는 것이 누군가와 나란히 누워 자는 것이 처음이라서 그런가, 아란은 기분이 이상했다.

아주 어렸을 땐 혼인을 하게 되면 이렇게 곁에 함께 잠드는 이가 사랑하는 정인이기를 꿈꾸었고, 당연한 줄 알았다. 실은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아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제 옆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경은 잠에 빠져드는 중인지 금세 얼굴이 풀어져 있었다.

다음날, 현경은 깊은 잠을 잔 탓에 생각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옆에는 아직 아란이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혹여나 옆에 누가 있는 것이 잠을 방해할까 걱정했는데, 아란도 생각보다 잘 자니 다행이었다. 현경은 눈을 뜬 후에도 아란이 덮고 있는 이불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이제 아란이 언제 어디로 사라질지 몰라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현경은 안도했다. 천장을 보며 그리워하지 않아도 고개를 돌리면 이 사람이 보일 것이고, 손을 뻗으면 닿겠지. 현경은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레 일어난다고는 했는데, 스르륵 흘러내리는 이불 소리에 아란이 깼는지 슬며시 눈을 뜬다.

“아.”

아란은 옆에 있는 현경을 보고 흠칫 놀라다가 이내 생각이 난 듯 다시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현경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문 밖으로 이른 아침부터 마당을 쓰는 빗질 소리가 들려왔다.

현경이 먼저 의관을 갖춰 입고 마당에서 아란을 기다렸다. 그리 크지 않은 신혼집이라 안방과 사랑방이 곧바로 마루로 이어져 있었다. 굳이 작은 집을 고집한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제 집안 어디에 있어도 아란과 같은 지붕 아래에 있을 테니. 얼마 후, 안방에서 아란이 장옷을 들고 나왔다. 아란의 길게 땋았던 머리가 곱게 쪽이 진 것을 보며 현경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양가 어른들께 혼인 후 첫 인사를 드리려 제현의 집에 도착하니, 강무는 집을 오래 비워둘 수 없다며 이른 새벽 감자골로 먼저 내려갔다고 했다. 언제는 도성에 홀로 보낸 자식 걱정에 잠을 설쳤다던 아버지가 혼인하자마자 인사도 없이 가버린 것이 현경은 섭섭했다. 그래도 아침 인사만이라도 받고 가시지.

제현 부부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난 후에 현경과 아란은 각각 사랑채와 안채에서 따로 아침을 먹었다. 혼인을 했는데도 밥 먹을 때 내외를 해야 하나. 현경은 중문 안으로 멀어지는 아란을 보며 괜히 입이 쑥 나왔다.

아침을 다 먹고 마당에 먼저 나온 현경은 안채에서 어머니와 이야기 중인 아란을 기다리며 잠시 동재 쪽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들이닥친 형님들에게 붙잡혀 막무가내로 신발이 벗겨지는데, 신랑다루기를 해야 한다며 회초리를 들고 온 김형과 냅다 발목을 잡는 정형 때문에 현경이 기겁했다.

“새신랑 발바닥 좀 보자!”

“으앗! 잠깐!”

“새신랑 발바닥 대령하랍신다!”

때마침 중문을 나오던 아란은 현경의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동재 쪽으로 바삐 향했다. 아란의 등장에 킬킬대며 웃던 형님들은 현경의 남은 한쪽 버선을 당기다 말고 멈칫했다. 그 틈에 현경이 얼른 도망쳐 아란의 등 뒤로 숨어든다.

신랑이 색시 뒤에 숨는다며 형님들이 놀리는데도 현경은 아란에게 꼭 붙어서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아란이 앞에 있어 형님들도 금방 옷을 털고 뒤늦게 멋쩍어 체면을 차리는데, 하는 수 없이 울망울망한 얼굴의 신랑 대신 새색시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할 수밖에.

“…….”

“설마, 우시는 건….”

“아닙니다.”

아란의 말에 대꾸하는 현경의 목소리가 여전히 뚱했다. 대문 밖을 나선 후에도 현경의 손은 아란의 장옷 끝자락을 꼬옥 쥐고 있었다.

“계속, 이러고 가실 겁니까.”

“예.”

아란은 잡힌 옷자락을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짓궂은 장난인 줄은 알지만 얼마나 놀랐으면 맨발로 달려와 숨을까 싶어서 괜히 마음이 짠하니, 아란은 찰싹 달라붙은 현경에게 차마 좀 떨어져 걷자는 말을 못했다.

“장터 쪽으로 돌아서 가요.”

“필요하신 거라도 있습니까.”

“아뇨, 좀 걷고 싶어서.”

대문을 나온 후로 줄곧 시무룩한 분위기를 잡고 있는 현경이라, 그 앞에서 싫다 할 수는 없었다. 아란은 잠자코 장터로 이어진 골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박사박 조용한 아침골목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만의 발자국 소리가 점차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에 스며들었다.

아침부터 장터엔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골목을 지나 나란히 걸으니 지나던 사람들이 아란과 현경을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해왔다. 현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뚱한 표정 대신 금방 웃는 낯을 하고는 인사를 꾸벅 받아 주었고, 아란은 반갑게 인사를 해오는 그 눈길들이 익숙지 않아 괜히 장옷을 좀 더 추려 잡았다.

사람들의 시선에 아란의 발걸음이 무심코 빨라지려 할 때마다, 현경은 잡은 옷자락을 쭉 당겨 장난하듯 아란과 어깨를 맞댔다. 이 사람 왜 이리 치대나 싶어 아란이 홱 돌아봐도 현경은 모른 체하며 앞만 보고 걷는데, 그러다 보면 아란은 어느새 현경과 발을 맞추어 나란히 걷게 되곤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란이 외간사내와 정을 통하여 간택에서 탈락했다던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어느새 간택이라는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연을 맺은 가슴 절절하고도 아름다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거리를 지나는 젊은 도령과 규수들의 눈길이 유독 남달랐는데, 영문을 모르는 아란은 미심쩍은 마음에 고개만 갸웃거렸고 현경은 그 시선을 한껏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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