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한편, 현경이 별당을 나와 동재의 방 문고리를 잡는 순간, 덜그럭 거리는 소리를 내며 옆방에서 형님들이 현경을 반겼다.
“이야, 현경이 이제야 돌아왔구나.”
정형이 자연스레 현경의 왼팔을 잡았다. 그 뒤로 김형이 이번엔 현경의 오른팔을 잡고, 박형이 그 앞에서 씨익 웃고 있으니 무슨 말이 나올지는 안 들어도 뻔했다.
“이 형님들이 특별히 한턱 낼 테니, 가자.”
주막이나 기방에 갈 줄 알았는데, 형님들은 현경을 이끌고 어느 한적한 강가로 향했다. 강 위에는 나룻배가 두어 척 떠다니고 있었고, 강가에는 악공들이 넓게 자리 위에 모여앉아 퉁소며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현경이 넋을 잃고 두리번거리는 사이, 박형이 사공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강가에 서 있으니 도성 양반들이 하나둘 강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중 몇 명은 배 위에 올랐고, 어떤 이들은 강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술상을 벌였다.
“오늘 무슨 날입니까?”
“원래 이맘때쯤 뱃놀이를 나와 줘야 풍류를 안다 하는 것이다.”
박형이 껄껄 웃으며 답했다. 어느새 가야금 소리 위로 기녀들의 노래 소리가 섞여 들었다. 조용했던 강가가 금세 양반네들의 웃음소리로 시끌시끌했다.
그때 술과 안주를 든 사내가 현경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사공이 배 한 척을 강가에 대자 술상을 들고 있던 사내가 배 위에 분주히 화문석을 깔고 볕을 가리기 위한 차일을 세웠다.
“도련님들, 배 위로 오르시지요.”
준비를 마친 사공이 부르는 소리에 현경을 포함한 넷이 배 위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퉁소를 든 악공 한 명이 배에 따라 오르니, 사공이 천천히 강 한가운데로 노를 저었다.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들고, 강가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도 적당히 멀어지는데 강 옆으로 운치 있게 늘어선 산세를 바라보는 현경은 감탄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술은 자고로 배 위에서 마시는 선상주가 제일이지, 자 한 잔 받아라.”
김형이 현경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어떠냐, 신선이 달리 없지 않느냐.”
“와,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습니까.”
“막내가 장가든다고 하니, 형님들이 신경 좀 써봤다.”
정형이 엣헴 하고 헛기침을 하며 생색을 내었다. 현경이 천진한 표정으로 헤헤 웃고는 받은 술을 들이켰다.
“허허, 막내 도련님 장가드십니까.”
“예에.”
노를 젓던 사공이 걸쭉하게 물으니 현경이 쑥스러워 했다. 악공도 감축 드린다며 퉁소 한 가락을 멋들어지게 뽑아내었다. 퉁소 소리가 바람을 타고 물길 위를 스치니 술 맛이 달게 느껴졌다. 좋은 것을 보고 들으니 현경은 문득 아란 생각이 났다. 함께 오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을 하니 이내 또 히죽 웃음이 난다.
날이 어둑해지고 배에서 내린 현경이 강가에 서서 아직 술판을 벌이고 있는 양반들 쪽을 보았다. 그 중 몇 명이 현경을 알아보고는 말을 걸어왔다.
“이선생 댁 미도령도 뱃놀이 나왔는가.”
“예, 좋은 구경하다 갑니다.”
“에휴, 그나저나 그 댁 아가씨 일은, 이제 누가 데려갈 사람도 없고 어쩌나, 쯧.”
“어어, 이 사람, 취했네.”
둘러앉은 양반들 중 코끝이 붉게 취한 한 명이 주정하였다. 옆에 있던 다른 선비들이 말렸지만 취한 사내는 손을 내저으며 혀를 쯧쯧 찼다. 이를 보던 박형이 웃으며 취한 사내에게 말했다.
“이 사람 걱정도 팔자네, 임자 있는 분 걱정을 다하고.”
“임자 있는 분이라니?”
“데려갈 사람이 없긴 왜 없어, 여기 있지!”
“제가 아가씨 모셔갈 사람인데, 어찌 찾으십니까.”
현경이 장난스레 웃으며 갓을 고쳐 쓰니, 김형이 크게 웃으며 현경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양반네들이 에엥? 하고 놀란 얼굴로 일제히 현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도령 올해 나이가 몇인고?”
“열일곱입니다.”
“그 댁 아가씨는 나이도 훨씬 많은데?”
“허허이, 강도령 아직 창창한데, 아깝고만.”
“소문에 워낙 박색이라 별당 밖으로 나서는 일이 거의 없다던데.”
“아냐, 얼굴은 고운데 말을 못하는 벙어리라더만, 그래서 이선생이 그렇게 감춘다며.”
나이가 많네, 얼굴이 어쩌네 하며 저들끼리 주절대는 선비들을 보며 현경은 기가 차 말문이 다 막혔다. 워낙 바깥출입을 안 하는 탓에 떠도는 말이 많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니는 지방마다 서방이 있다던데, 그 소문은 사실이던가?”
“이 봐 강도령, 괜찮겠어?”
술이 들어가니 얼큰히 취한 자들의 말하는 정도가 지나치자, 옆에 있던 김형이 호통을 쳤다.
“거, 아가씨를 본 적도 없는 놈들이 헛소리 하는 꼴 좀 보게.”
“아, 본 적이 없으니, 들리는 말 하는 것이지!”
“들리는 대로 다 내뱉을 거면, 똥 누는 소리나 들어라, 옛다!”
정형이 도포자락을 걷어 엉덩이를 들이밀자 그 앞에 있던 선비가 까무러치게 놀랐다. 그 꼴을 보더니 배를 잡고 웃는 자도 있고, 취해서 말이 과했다며 대신 사과해 오는 선비도 있었다. 박형이 현경을 토닥이며 흘려들어라 위로했지만, 현경은 옆에서 듣기에도 터무니없는 저 말들을 혹여나 아란도 들었을까 싶어 그게 더 속이 상했다.
그 날 후로, 도성에는 현경과 아란의 혼사 이야기가 은연중에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현경이 들뜬 마음에 자랑삼아 은근슬쩍 여기저기 소식을 흘리고 다닌 탓도 있었지만, 이렇게 확실히 말을 해두고 아란에 대한 무성한 소문들을 퍼뜨린 자들을 다 불러다 제대로 일갈해 줄 셈이었다.
“혼례일을 좀 더 앞당겨 달라고 말씀드릴까 봐요.”
아란이 붓을 든 손을 멈칫하고 혼자 심각한 표정으로 앉은 현경을 보았다. 또 무슨 억지를 부리나 싶어 대꾸하지 않고 자수 놓을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왜 아가씨는 제가 올 때마다 늘 바쁘십니까.”
“도련님이야 말로 불쑥불쑥 아무 때나 찾아오지 마세요.”
현경이 볼멘소리로 투덜대봤자 아란은 듣는 둥 마는 둥 차분히 하던 일을 마저 할 뿐이었다.
“제가 방에 들어 왔을 때 좀 반갑게 맞이해 주시면 좋을 텐데.”
현경은 어떻게든 아란과 눈을 맞춰보려고 허리를 숙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경의 갓 끝이 아란의 눈앞에서 요란히 지나다니자 아란이 인상을 찌푸리며 귀찮아했다. 현경은 그런 아란의 표정마저도 마음에 들어 하니 화를 내도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고운 사람인데. 현경은 실컷 자랑하고 싶다가도 금세 아란을 다른 이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닳을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턱을 괴었다. 그래도 나가라는 말은 좀처럼 하지 않으니 아란만 보면 히죽거리게 되는 현경이었다.
혼례를 올릴 날이 코앞에 다가오니 집안이 부쩍 분주해졌다. 노복들이 마당을 바쁘게 오가는 틈에 현경은 얼마 전부터 엉거주춤 중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강무가 결국 현경을 동재로 불렀다.
“아가씨가 절 만나주지 않아요.”
동재 앞마루에 걸터앉으며 현경은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아란을 만나려고 별당에 기별을 보내도 답이 없고, 아란의 여종은 현경만 보면 쪼르르 도망가는 것도 사나흘이 다 지났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지,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이러는 게 꼭 얼마 전의 간택날 같아 현경은 더 속이 탔다. 시무룩한 표정의 현경 옆에서 강무는 팔짱을 낀 채 동재 앞에 있는 강연장을 유유히 내다보고 있었다.
“원래 혼례날 전까지 신랑 신부는 얼굴을 못 보는 것이다.”
“그런 게 어딨습니까.”
툴툴대는 목소리에 강무가 작게 웃었다.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하는 그 모습을 보아하니 마냥 철부지 같은데, 한편으론 언제 이렇게 다 커서 혼인을 하나 새삼스럽기도 했다. 현경을 잔잔히 바라보던 강무가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슬쩍 주위를 살피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 시집갈 때, 나무 비녀 하나 곱게 깎아줄까, 생각은 했었다만.”
“아버지가 그런 생각도 다 하십니까?”
“헌 치마 주워다 입혀놔도 어여쁘기만 했던 딸인데, 아무렴.”
강무는 그 말을 하면서도 쑥스러운지 먼 산만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현경은 웬일로 안하던 소리까지 다 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가만 보다 피시시 웃었다.
“그 어여쁜 딸이 아버지보다 먼저 장가가서 어째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아버지도.”
“일없다.”
단칼에 긋는 말에 현경이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강무를 흠모하던 여인들이야 감자골 있을 적부터 여럿보긴 했다만 어쩐지 연이 닿진 않았으니, 곁을 내줄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현경이라도 그 속을 전부 알 수는 없었다.
“동무와 사이좋게 지내고.”
강무의 말에 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처럼 물려줄 가보도 가풍도 없지만 혼인을 앞둔 자식에게 강무는 해주고픈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말들을 모두 꺼내면 걱정과 우려가 전부일 테니, 강무는 고르고 골라 고작 한마디를 꺼낼 뿐이었다.
“좋은 분입니다.”
현경의 말에 강무가 현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이 아이에게서 제현은 무엇을 보았기에 딸의 손을 잡아줄 도량이 있다 여겼을까. 말을 꺼내놓고서도 수줍은 듯 아비 눈치를 슬쩍 보기에 강무가 현경의 갓을 툭 건드렸다.
“너에게 너무 과분한 분인 것 같다.”
“하긴, 그렇지요?”
흐트러진 갓을 매만지던 현경은 강무를 보며 헤헤 웃었다. 현경의 이렇게 맑은 눈과 티 없는 마음이 아란을 보듬을 수 있으리라, 다정한 마음은 고운 마음을 분명 알아볼 것이라. 강무가 잔잔히 웃었다.
“아가씨께 잘 해드려야 한다.”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화창하게 부서지는 햇빛과 맑은 바람이 마당을 지나며 차일을 펄럭였다. 병풍과 휘장으로 둘러진 혼례상을 두고 아란과 현경이 마주섰다. 혼례는 조용히 소박하게 치를 예정이었으나 현경과 아란의 혼례를 보고자 몰려온 사람들로 마당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주례를 보는 이의 구령에 따라 마주보고 서로에게 예를 갖추어 절을 했다. 양 옆으로 수모들의 도움을 받으며 절을 하는 아란의 얼굴이 한삼자락 너머로 살짝 보일 때만을 기다리며 현경의 시선이 늘 닿았다.
푸른색 단령을 입고 사모관대를 한 현경의 얼굴이 유난히 밝았다. 거기에 붉은 활옷을 입고 곱게 예를 올리는 아란의 모습은 구경꾼들이 넋을 놓고 바라보기에 충분했으니, 소문으로만 듣던 아란을 실제로 본 이들은 전부터 돌던 해괴한 소문의 내용은 새하얗게 잊은 채 선녀가 따로 없다고 난리였다. 동네 아이들은 곱고 아담한 두 사람의 혼례를 보며 인형놀이 같다며 즐거워했다. 아란은 가마에 오르고 현경은 말에 올라 짧은 신행길로 마을을 한 바퀴 도니, 놀이패의 흥겨운 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두 사람의 앞날을 기쁘게 축원하였다.
신방은 제현의 집에서 골목을 사이에 두고 멀지 않은 곳에 꾸려졌다. 본래 제현의 집에서 얼마간 신방을 꾸려 머무르려 했으나, 제현의 집에는 계속 문하생을 들여야 하기에 따로 살림을 내주게 되었다. 방에 먼저 들어온 아란은 정신없이 지나간 하루가 노곤하여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여종이 방 안에 술상을 들여놓으며 곧 신랑이 오실 거라 일러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사초롱을 든 노복을 따라 현경이 마당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왔다. 문 앞에 아른거리던 청사초롱이 멀어지자, 현경은 아란 앞에 마주 앉았다. 어느덧 밤이 깊었고 낮에 그 시끌벅적했던 사람들도 없이 방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신방을 기웃거리는 이들은 제현이 미리 사람을 시켜 얼씬도 못하게 내쫓아 버렸으니 이젠 정말 단 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