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집 무너지겠소, 아버지.”
“여태 안 자고 있느냐.”
“아버지 한숨 소리에 잠 다 달아났지 뭐.”
밤하늘은 어느새 캄캄하게 어둠이 드리웠다. 평상에 누워 있던 현경은 그리 퉁명스레 말을 하면서도 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애써 멀리 뜬 별을 올려다보았다. 멀다 멀어, 갈 길이 멀다. 그리 생각하다가도, 가지 않을 수 없으니 어여쁘게 뜬 별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함께 있으면 좋다고.”
작게 중얼거리는 강무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왜 덜컥 눈물이 새어나오는지 현경은 영문을 몰랐다. 그 뒤로도 나직이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에 현경이 결국 뒷머리를 받치고 있던 소매로 눈을 가렸다.
“지켜주고 싶다고.”
“…….”
“편지마다 매번 말하던 동무가 그 아가씨였냐.”
“예, 그분이에요.”
울먹이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강무는 그동안 현경이 보내온 서신들을 모아둔 상자를 조용히 꺼내 보았다. 짤막한 현경의 서신들을 하나하나 다시 읽었다. 생각보다 고된 도성 생활에 현경을 살뜰히 보살펴 줬다던 동무의 글은 굳이 찾지 않아도 어디에나 있었다.
서신 속 현경은 동무 때문에 즐거워했고 때론 마음 아파했으며 그리고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모르는 그 동무는 언제나 현경의 하루 속에 있었고, 현경의 마음 안에 있었음을 모를 순 없었다. 현경은 어려서부터 마음을 숨기는 데에 서툴렀기에.
“이름이 아란이라 했느냐.”
“예.”
“아비가 끝까지 안 된다 하면 어쩔 테냐.”
“아버지두, 아직도 날 모릅니까.”
“모르긴, 네 녀석 고집이야 징한 것 내가 모를까봐.”
으이그. 강무의 한숨소리에 현경이 눈물범벅인 얼굴로도 일부러 소리 내 웃었다. 말은 엄해도 결국은 모질지 못한 강무였다.
“함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싶은 마음이 듭니다.”
“…….”
“아버지, 나 욕심 많은 것 알지요.”
“알다마다.”
“이게 혹시 너무 큰 욕심이면 어쩌지.”
울망울망 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현경의 두 눈으로 하늘에 뜬 별이 담긴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렇게 질질 짜고 그럼 못쓴다.”
훌쩍, 울음을 삼킨 현경이 소매로 얼른 눈가를 훔치고는 다시 눈을 깜빡이며 흐려진 별을 올려다보았다.
“울긴, 누가.”
“…….”
“그냥, 두고 온 얼굴 보고 싶어 그러지.”
“허이구.”
강무가 낮게 웃으며 가장 최근에 받았던 현경의 서신을 한동안 읽고 또 읽었다.
‘아버지, 고향에 감자꽃은 많이 피었나요? 도성에선 감자꽃을 보기가 힘들어 가끔씩 고향집 앞 언덕 숲이 그립습니다. 문득 책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은 생애 동안 서로에게 기대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고 웃을 수 있는 이가 곁에 있다면, 그 어떤 권세와 재물보다 값지고 복된 것이 아닐까, 하구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강무는 현경을 따라 도성 길에 올랐다. 지난날 강무가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헤매던 그 길이었다. 십 수 년 만에 처음 오르는 이 길 위엔 어느덧 그때 그 아이가 다 자라 강무와 나란히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삶의 험한 비탈을 지나다 보면, 그 길이 평탄치 못해 앞길을 알 수 없으나, 탁 트인 길 위를 달리는 현경을 보며 강무는 지난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 어느 것 하나 후회되지 않았다.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현경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강무는 그야말로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천천히 가자, 말이 지친다.”
“조금만 더 가면 봉우화를 볼 수 있어요 아버지.”
“봉우화?”
“아가씨와 내가 이름 지어준 꽃인데, 아 저기!”
“그냥 들꽃이 아니냐.”
“봉우화라 이름 지었으니 그냥 들꽃이 아니고 봉우화지요.”
“또 마음대로 우기는 것이지.”
강무가 웃으며 들판에 흔들리는 봉우화를 지나쳤다. 강무가 말을 몰아도 저만치 가 있는 현경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짐 얹은 노새들도 없이 말을 달리니, 도성까지는 금방이었다.
이제 와 기억을 떠올려 보아도, 도성의 길거리를 마음 편히 고개 들어 거닌 적이 없었다.
도성 문을 지나 성문 앞 대로를 흥얼흥얼 신이 난 걸음으로 걷는 현경의 뒷모습을 보며 가만 웃고 있던 강무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 도성은 간만인데 조금 둘러보실 테요?”
“아니, 인사부터 올려야 하니 곧장 가자.”
강무는 내렸던 갓을 조금 들어 올리고 고개를 들어 저 멀리까지 내다보았다. 이 도성 안에서 가장 크고 높은 기와지붕이 있는 곳에 남겨둔 마음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현경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댓돌 위에서 신을 신던 제현은 그 옆에 선 강무를 보고 놀라 달려 나왔다. 미처 신지 못한 가죽신이 마당에 나뒹군 것도 개의치 않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옛 스승 앞에서 강무는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다. 제현은 감격하여 나이 든 옛 제자의 절을 꿇어앉아 공손히 받았다.
“…….”
이십 년이 가까운 세월을 지나 사랑채에 마주 앉은 제현은 그 지난날을 어디서부터 더듬어야할지 까마득했다.
“그간, 잘 지냈는가.”
제현은 애정 어린 눈으로 강무를 바라보았다. 왕세자를 모시던 시절, 강무의 눈 속에 가득했던 불안과 두려움은 이제 흘러간 세월에 흐려져 보이지 않았다. 제현은 문득 총명했지만 싫증을 잘 내던 왕세자 옆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들었던 청년 강무를 떠올렸다.
“자네와 다시 마주하니 그저 반갑기만 하여, 염치가 없는 것을 용서해 주게.”
“당치 않습니다, 살아 있음에도 찾아뵙지 못한 저를 부끄럽게 만드십니까.”
지금은 수수한 옷차림에 가려 있지만 강무도 제법 왕실의 기품이 묻어나는 사내였다. 궁에서도 아는 이가 거의 없던 강무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땐 왕세자의 경솔한 판단을 우려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야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성정을 알아본 후에 유독 강무에게 마음이 쓰였다. 서슬 퍼런 칼을 쥐고서도 어딘가 두려움이 어린 들짐승의 눈을 하고 있던 강무는 연민이 느껴지는 사내였기에.
강무는 스승의 회한 서린 표정에 마음이 복잡하면서도, 그간 잊고 살았던 과거의 일들이 물밀 듯 밀려옴에도 제법 마음이 덤덤했다. 그 무디어진 마음으로 흐른 세월을 용서하고, 또 용서받는 것이라 생각하며.
“귀한 아들을 우리 딸의 배필로 허락해 주어 고맙네.”
제현이 고개를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 강무도 자세를 공손히 하여 제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귀한 따님을 제 아들의 배필로 허락해 주시니 예를 올려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제현은 옛 제자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로 다시 만난 강무를 보며 감히 대견한 마음이 들어 새삼 깊이 감동하였다.
현경은 아란에게 대뜸 장터 구경이나 함께 나가자고 보채는 중이었다. 궁에서 나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당장 밖에 나섰다간 사람들의 시선이 어떨지 아란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졌다. 그것을 현경도 모르지 않을 텐데 저리 조르는 것을 보니 자신을 골리려는 게 분명했다.
“오늘은 먼 길 오느라 피곤하실 테니, 다음에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현경이 용케 허락을 받아 왔으니 아란은 말이라도 곱게 해주려고 돌려 거절하였다. 안 그래도 현경이 고향에 내려간 그 며칠 동안 뚜쟁이들이 두 번이나 찾아왔다는 여종의 말을 듣고 간담이 다 서늘했던 아란이었다. 게다가 그 뚜쟁이를 보낸 이가 예전에 아란과 혼담이 오갔던 사내도 아니고, 그 아비 되는 자여서 더 치를 떨었다.
처음엔 모르고 들였다가 뚜쟁이 말을 듣고는 제현이 크게 노하여 쫓아냈고, 두 번째 찾아왔을 땐 대문도 열어 주지 않았다 했다. 그러니 현경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란이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지, 혹시나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가슴 졸였던 지난 며칠간의 제 모습은 현경에겐 죽어도 말 못할 비밀로 남겨둘 참이었다.
“그나저나 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으셨지요?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눈 깜짝할 새에 달려온 것인데.”
눈 깜짝할 새는 무슨. 제현이 유독 짐을 많이 챙겨준 탓에 뒤따르는 노새와 말꾼들만 해도 몇이더라 하는 얘기는 전해 들어, 시일이 조금 지체될 것이라 짐작하기는 했었다만. 속이 타던 아란의 마음도 모르고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현경을 쏘아보며 아란은 결국 욱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것 치고는 하도 안 오시길래, 도망이라도 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현경이 마구 웃었다. 뭐가 그리 우스운가 싶어 아란이 기이하다는 얼굴로 현경을 바라보니, 한참 웃던 현경이 슬그머니 몸을 앞으로 기울여 아란과 눈을 맞추었다.
“저도요, 저도 아가씨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아란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 발끈했으나, 붉어진 얼굴로 연신 손부채질을 하는 아란을 보며 현경은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열이 오르시면 의원을 부를까요. 아님, 냉수라도 떠오라 할까요.”
“그만 하세요.”
“아이고, 내 정신을, 형님들께 돌아왔다는 인사를 안 드렸네.”
매서운 눈길에 현경이 슬그머니 발을 뺐다. 현경이 키득거리며 쪼르르 별당을 나간 후에도 아란은 한참 약이 올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대감마님께서 잠시 사랑채로 들라 하셨다는 여종의 말이 들려오기에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일어서는데, 아무리 그래도 한시름을 놓아 그런가, 아란은 금방 표정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아란이 사랑채에 들어와 강무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아란을 바라보는 제현과 강무의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강무가 제현에게 잠시 아란과의 대화를 청하니 제현은 흔쾌히 허락하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강무는 제 앞에 곱게 앉아 있는 아란을 바라보았다.
“우리 현경이 마음속에 사는 분을 이제야 뵙는군요.”
“……?”
아란이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들자 강무는 그저 빙긋 웃었다.
“현경이가 많이 귀찮게 굴진 않던가요.”
부드럽게 묻는 말에 아란은 대답 대신 말씀을 낮추시라며 슬쩍 웃었다. 과연 현경의 말대로 웃는 모습이 고운 여인이었다. 이렇게 고운 딸을 두고도 그 오랜 시간 속앓이를 하며 서신을 써 내렸던 제현의 마음이 어땠을까 또 다시 짠하기도 하고, 그간 현경을 보살펴 주었던 이라 생각하니 그 고마운 마음을 가눌 길 없어 강무는 선뜻 말을 낮추지 못했다.
“현경이가 겉보기엔 뼈마디도 잘고 여리하나, 산에서 자란 아이라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 없이 건강했으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마 감자골이라는 곳이었지요.”
“아가씨께서 감자골을 아십니까.”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도련님도 처음 뵈었지요.”
“…….”
강무는 난생처음 동무가 생겼다며 자랑하던 어린 경이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혹시 그때의 동무가 아란은 아니겠지. 강무는 아무리 그래도, 그만한 인연이 설마 있을까 싶어 엉뚱한 생각이라 혼자 조용히 웃었다.
“게다가 도련님은 여인 치고는 키도 크고 술도 잘하시니, 저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들어 알고는 있었다만, 그래도 아란의 입으로 그 사실을 직접 들으니 강무는 새삼 놀라웠다.
“혹시 다른 이가 또 알고 있습니까.”
“사실을 아는 건 저뿐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혼사가 오가는데도 어찌 홀로 떠안으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어찌 그랬을까, 아란이 강무의 말을 듣고 뒤늦은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해괴한 자가 다 있다며 도성으로 오기 전에 아버지께 진작 일렀더라면, 애초에 얽힐 일도 없었을 텐데. 숨기지 않고 먼저 다가와 자기 이야기를 꺼낸 현경이었다. 대뜸 뻔뻔스레 믿어 오니 아란도 얼떨결에 응해 버렸던가.
“그야, 제가 입을 열면 도련님께서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혼인은 인륜지대사인데. 어찌 자신보다 다른 이의 곤란함을 우선으로 둘까 강무가 탄식했지만, 아란은 그리 참된 마음만은 아니라며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부모를 속이는 죄는 죽어서라도 갚아야 할 것이나, 더 이상의 혼사 문제로 근심을 끼치는 것 또한 깊은 불효이니 다른 도리가 있겠습니까.”
“…….”
제현은 아란이 속이 깊은 아이라 했지만, 어쩌면 그 깊은 속을 파고들기까지 얼마나 희생하고 감내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일까 강무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저 자그마한 체구에 가려진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상처와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 있을지, 제현의 편지만으로도 아득했는데 직접 마주하니 더욱 가늠할 수 없었다.
“도련님께서 도성에 계시는 동안은 제가 필요하실 테니, 탈이 없도록 돕겠습니다.”
뭐 대단히 의로운 일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제 멋대로 살겠다며 촐랑거리는 아이에게 이 여인이 헌신할 필요는 없었다. 강무는 담담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초연한 아란의 그 얼굴이 애처로웠다. 현경이 함께 있고 싶다, 지켜주고 싶다 했던 말은 그래서였을까. 강무는 눈물짓던 현경의 마음이 아란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만을 바랐다.
“천방지축일 겁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아이라 자라면서 여인의 손길을 타지 못했으니, 아가씨께서 버거우실까 걱정입니다.”
“저도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저 동무처럼 서로 기대어 산다면 감사할 일이지요.”
부디 그럴 수 있기를. 강무는 고개를 숙여 아란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아란이 부담스러워하여 어쩔 줄 몰라 했으나, 강무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아란에게 거듭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