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간택은 보통 열흘 정도의 간격을 두고 진행되는데 이번 간택은 아무래도 세자의 나이 때문인지 작정한 것처럼 무척이나 다급하게 진행되었다. 아란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초간택의 결과가 나왔고, 재간택일이 바로 다음날로 잡혔다. 궁에서 보낸 사자는 감축 드린다는 말과 함께 초간택 통과 소식을 전했다. 제현은 사자가 대문 밖을 나서자마자 궁에서 온 서신을 꺼내어 읽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찢었다. 집안 노복들이 달려와 겨우 제현을 말렸다.
제현은 늦은 밤까지 불이 켜져 있는 별당 앞을 서성였다. 편전까지 나간 그 중압감에 많이 지쳤을 텐데도 아란의 방은 좀처럼 불이 꺼질 줄 몰랐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느냐.”
“예, 아버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마주 앉은 아버지를 보며 아란은 늦은 밤에 어인 일이시냐는 의미 없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방 안의 호롱불이 흔들리는 것만큼이나 위태롭게, 요즘 아란과 마주앉은 이들은 모두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홍치마를 길게 내라 했으니.”
“…….”
“내일 절 올리다가 치맛자락을 밟아도 좋고.”
제현은 농담에 익숙지 않았다. 다정한 어머니는 그런 뻣뻣한 아버지에게 농담하는 법을 일러 주었지만 금방 티가 났다. 아란은 아주 오랜만에 듣는 아비의 그 서툰 농담이 더없이 짠하여 씁쓸하게 웃었다. 제현은 아란의 책상이 비어 있는 것을 보며, 책도 없이 이 늦은 밤까지 아란이 무슨 생각에 빠져 있었을까 마음이 아려왔다.
“피곤하지 않느냐.”
“그냥 이런저런 생각에 밤 깊은 줄을 잊었습니다.”
혼기가 차고도 넘친 나이라 과년한 딸을 아직 품 안에 두고 사는 것을 누군가는 흉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모의 눈에 비친 아란은 여전히 누구에게도 내어주기 아까운 곱고 아름다운 딸아이였다. 다만 그 고운 딸아이를 평생 옆에서 귀하게 여겨줄 사람이 있었으면, 혼자가 아니었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일 뿐이었다.
“궁 안은 입가에 미소조차 함부로 머금지 못하는 곳이지.”
“알고 있습니다.”
“난 너를 그리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현은 그동안 왕의 눈을 피해 아란을 적당한 양반가 자제와 혼인시키려 무던히 애를 썼다. 아란의 고운 자태를 보고 혹하던 이들도 아란의 높은 학식은 꺼려했다. 아란을 품어줄 만한 도량을 가진 사내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처음으로 혼담이 오갔던 상대 집안사람들 앞에서 실수로 책의 구절을 인용한 말 한마디 내뱉었다가, 어디 계집이 감히 문자를 논하여 군자를 업신여기냐는 말에 상처받은 어린 딸아이의 모습을 제현은 잊지 못했다.
“난새가 날면 세상이 다 편안하다 했다. 네 어머니와 내가 너에게 바란 것도 오직 그 뿐이었지. 늘 편안하게 웃고, 마음 편히 살기만을 바랐다.”
아비 앞에서는 다른 여인들처럼 남편과 자식 보필하며 살아가다 보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일이라며, 책을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잔잔히 웃던 딸아이가 어느 날엔가 제 어미 앞에서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했다.
글 깨나 읽는다던 양반가 자제면서도 그저 노리개나 앞에서 흔들어대며 저를 바보 취급을 하니, 그런 한량들을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가 너무 비참하다고. 그 말을 전하던 어미도 하염없이 울었고, 전해들은 아비도 속이 새카맣게 탔다.
모두 수년이 지난 일인데도 제현의 뇌리에 박힌 기억들이었다.
“아버지,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다 아란아.”
“…….”
“나는 이렇게 너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눌 날이 더는 없을까 두렵다.”
“아버지.”
“아비에 대한 원망이든 지난날의 설움이든 뭐든 좋으니, 남겨둔 마음이 있느냐.”
기약이 있는 생이란 게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면 어려워지는 것이라, 제멋대로 사는 어떤 이도 그리 쉽게 말하는데. 왜 자신은 한 번도 쉽게 말을 해 본 적이 없나 문득 아쉬웠다. 아란은 텅 빈 책상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깊은 생각 없이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흘리는 헛소리 한 번 한들 그 말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큰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설움도 다 지난 옛일입니다. 그저.”
“…….”
“남겨두고 떠나는 것에 대한 심란함 같은 것뿐이지요.”
“남겨둔 것이라.”
무남독녀 외딸 하나 마음대로 볼 수도 없게 더 높은 담벼락 너머로 생이별을 해야 하니, 남겨진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 평생을 나고 자라온 이 집과 이 방 안의 추억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짓던 철없는 사람 하나.
나머지는 다 품고 가려 해도 그 사람만이 자꾸만 발길에 채여 뒤돌게 만든다. 고향으로 돌아가라 더 단호히 말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고, 세상엔 음험한 자가 많아 사는 것이 그리 말처럼 쉽지 않다 더 분명히 경고하지 못한 것이 걱정되었다.
당장 내일 궁으로 팔려갈지 모르는 자신보다도 더 걱정이 앞서니 그 꼴이 우스워 얽혀도 단단히 잘못 얽혔다는 그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아란은 말없이 눈시울을 붉히던 그 얼굴이 잊히질 않았다.
해가 기울어질 때 즈음 현경은 혼자서 기방을 찾았다. 형님들은 어두운 낯빛의 현경을 걱정하니,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 상대가 필요했다. 재간택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며 주막이나 장터엔 온통 그 얘기뿐이니 귀를 막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었다. 술을 마시다가 문득 기부를 불러 노래를 하는 기녀가 있나 물으니 기부는 곧 현경 나이 또래쯤 되어 보이는 기녀를 데려왔다.
“한 곡 청해도 되겠습니까.”
“사랑가를 올려 드리리까.”
“뭐든 좋습니다.”
정중히 청하니 기녀는 방긋 웃으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내었다. 기녀의 노래는 제법 들을 만하였으나 현경은 어쩐지 별 감흥이 없었다. 그래도 잘 들었다는 말과 함께 감사 인사를 하니 기녀가 까르르 웃는다.
“어디서 노래를 배웠습니까?”
“저는 본래 관비로 있던 의녀입니다.”
“의녀가 왜 여기 있습니까?”
“술자리의 여흥을 돋우는 것도 의녀가 할 일이라 하니, 노래를 청하는 객이 있다기에 잠시 불려왔지요.”
현경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 들던 술잔도 내려놓았다. 현경이 울적한 표정을 지으려 하니, 그리 대단한 사연도 아니라며 오히려 기녀가 쾌활하게 웃는다.
“도련님 얼굴에 수심이 깊습니다, 제가 맥 한 번 짚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맥을 짚으면 병을 압니까?”
“알지요. 다 알지요.”
“사내와 여인의 맥도 다릅니까?”
“가만 짚으면 모르는 게 없지요, 맥이 새옹개처럼 펄펄 뛰는지, 새뱅이처럼 찰찰 뛰는지, 새비마냥 으쓱으쓱 한지.”
기녀가 요염하게 웃으며 눈매를 흘리며 농을 쳐도 현경은 다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니, 기녀가 손뼉까지 치며 웃는다.
“농입니다 농. 도련님 눈만 그리 끔뻑이시니 참으로 아이 같으오.”
“농이오?”
“맥 짚어서 다 알면 의원 아니라 도인이지요.”
그제야 현경이 안심한 듯 선뜻 팔을 걷어 손목을 내보였다. 기녀가 수줍어하며 현경의 손목에 맥을 짚는 시늉을 하였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홍옥이 들어왔다. 기녀는 홍옥을 보자 잠시 당황하더니 저는 이만 나가보겠다며 서둘러 방을 나가버렸다. 홍옥이 서둘러 나가는 기녀 쪽으로 눈을 잠시 흘기다 현경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저리 도망치듯 방을 나가버리니 홍옥도 매서운 면이 있나 봅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도련님의 몸에 손을 댄 기생은 저 아이가 처음이로군요.”
“아, 의녀라 하기에 그저 잠시 맥을 짚은 것입니다.”
홍옥이 살풋 웃으며 현경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현경이 얼른 두 손으로 잔을 받으니 홍옥이 이번엔 소리 내어 웃는다.
“홀로 발길을 하셨는데 이 홍옥도 찾지 않으시고.”
“바쁜 홍옥과 시간을 보낼 정도의 돈은 없는데 말이지요.”
현경이 장난스레 말하니 홍옥은 금방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술을 넘치게 따라 심술을 부리니 술에 손이 흠뻑 젖는데도 현경은 그냥 멋쩍게 웃어넘긴다.
“아이고, 아까워라.”
“도련님 같은 분은 처음 보오.”
홍옥은 샐쭉한 얼굴이다가도 금방 웃으며 현경의 손을 닦아 주었다. 홍옥은 빈 술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현경은 말없이 있다 요새 들은 것 중에 재미난 얘기는 없냐 물었다.
“마침, 방금 건너온 방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세자빈 간택 이야기가 장안의 화제이니.”
간택 이야기를 꺼내자 현경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현경은 하루 종일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주제가 나오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좀 전에 있던 방에서 결과를 듣고 왔다는 홍옥의 말에 현경은 화제를 돌릴까 하는 마음과, 결과가 궁금한 마음이 엎치락뒤치락하여 저도 모르게 술잔을 든 손을 덜덜 떨었다.
“도련님께는 나쁜 소식인지 기쁜 소식인지 모르겠으나.”
꿀꺽. 현경의 귀에 술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기방에서부터 집 대문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현경은 마치 심장이 온몸에서 뛰는 것처럼 숨을 가쁘게 내쉬며 마당에 들어섰다. 마당에 서 있는 아란을 본 순간 현경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려는 것을 겨우 버티어 섰다. 아란의 어머니가 아란의 손에 얼굴을 묻고 눈물 흘리고 있었고, 제현도 그 뒤에 안타까이 선 채로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다.
아란은 가만히 뒤를 돌아 현경을 보았다. 그리고 현경과 눈이 마주치자, 묘한 표정으로 한동안 현경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전 시강원 학자 이제현의 여식 이아란은 앞으로 나오라.”
재간택의 절차 중 마지막 하문의下問儀가 시작되었다. 주위 평판과 소문들을 모아 그동안 행한 악행과 덕행에 대해 왕과 관료들이 질문을 했다. 아란의 차례가 되어 왕과 세자, 그리고 여섯 명의 대신들이 둘러앉은 자리 앞에 나아갔다.
“오랜만이구나.”
아란이 세자의 배동으로 인사를 왔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긴 하나, 개중에서는 나름 안면이 있는 아이라고 지금껏 표정 없이 앉아 있던 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수년을 궁의 부름에서 도망 다닌 아란을 비아냥거리는 말인지 그저 반가움의 인사인지 가늠할 수 없어 아란은 말없이 고개를 더 조아렸다.
“전 시강원 학자를 지낸 이제현이 아버지가 맞는가.”
“예.”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는가.”
“예.”
확인 차 형식적인 질문들이 이어졌다. 앞서 하문의를 거친 규수들 또한 마찬가지로 별다른 질문은 없었다. 외출을 삼가고 규방 안에서만 지내는 규수들의 삶이란 단조롭기 그지없어 구설에 오를 만한 일을 찾기 어려운 탓이었다.
“혼기가 지났음에도 여태 혼인을 못한 연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세자는 보는 눈이 많으니 그나마도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비죽 올라간 입꼬리를 숨길 수는 없었다. 아란은 고개를 들어 보지 않아도 자신을 조롱하는 자의 표정 같은 건 알 수 있었다.
세자에게 있어 간택이라는 일련의 과정은 고고한 아란에게 한껏 치욕을 줄 수 있는 놀이 정도였다. 왕의 욕심으로 세자의 혼인이 계속 늦어졌기에 세자는 그 방자한 마음을 어떻게 해서라도 풀어야 했으니.
대답을 하지 못하는 아란을 보며 세자는 조용히 웃음을 참았다. 아무도 세자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았지만, 편전 안에서 아란을 보며 웃고 있는 이는 세자뿐이었다. 대신들은 진지한 얼굴로 아란에 대해서 적힌 글들을 꼼꼼히 읽어 내리고 있었다.
초간택을 거친 규수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데다, 잠잠하던 이씨 가문이 슬그머니 움직이려 하는 분위기에 아란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대신들이 있었다. 흠을 잡기 위해 아란의 행실에 대해 적힌 글들을 살폈으나 딱히 언급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는 왕과 세자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데, 때 마침 집안과 왕실의 연계를 주도했던 이씨 집안사람인 도승지가 나섰다.
“이아란은 여인치고는 학식이 높은 편이긴 하나 엄격한 유학자 집안의 여식으로서 정숙함이 이를 데 없다는 평이옵니다.”
도승지가 아란의 평판에 대해 적힌 두루마리를 소리 내 읽고는 주위 대신들에게 동의를 구하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보던 김씨 집안사람 우의정이 내관을 불러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오라 했다. 뭔가를 준비한 듯한 우의정의 행동에 왕이 우의정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허나, 통하는 사내가 있다 합니다.”
우의정의 발언에 순간, 편전에 있던 모두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란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어리둥절했다. 날카로운 눈으로 아란을 내려다보던 우의정이 두루마리를 마저 읽었다.
“충북 현감 김현이 아뢰길, 지난날 이아란은 아버지 이제현과 관할 마을에서 머무른 적이 있는데 한 사내와 함께 말을 타고 오가니,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분명 신행길이라 하여.”
편전 내부가 술렁였다. 예상치 못한 우의정의 발언에 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우의정이 말하는 그 사내라는 자는 분명 현경이었다. 그는 그저 집에 머무르는 문하생일 뿐이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아란은 당황하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변명하지 않는 게 나으려나, 어떡해야 하지. 아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헤맸다.
“도성에서도 그 사내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이가 있습니다.”
“사실이냐.”
왕의 언짢은 목소리에 아란은 마치 정말 정인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굳었다.
“사실이냐 물었다.”
“…….”
대답을 못하는 아란을 왕이 다시 한 번 다그쳤다. 아란은 갑작스런 이 상황이 당혹스러웠으나 침착하게 편전의 분위기를 살폈다.
“이는 왕실을 기만하는 일이옵니다.”
좌찬성이 단호한 어투로 왕에게 말했다. 그 또한 김씨 집안사람이었다. 도승지가 초조한 얼굴로 반박하였다.
“확인되지 않은 말이옵니다. 사실 확인을 명하소서.”
“사실 확인은 여기 명확합니다, 그 자의 이름은…….”
“그만.”
편전이 어수선해졌다. 구설수에 오르면 왕이라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은 왕이 고개를 저었다. 세자 또한 심기가 불편한 듯 입을 비죽였다. 좌의정이 눈짓을 주자 상궁 둘이 다가와 아란을 편전 밖으로 물렸다. 재간택이 아직 끝날 시간이 아닌데 아란이 먼저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여종이 놀라서 아란에게 달려왔다. 아란은 순간 긴장이 탁 풀려 가마에 오르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