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19)화 (19/63)

#19화

현경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숨 쉬는 것이 훨씬 수월하여 답답했던 명치가 한결 나았다. 겨우 주위를 살피니 아란이 현경의 팔을 한참 주무르고 있었다.

“…….”

“정신이 드십니까.”

“제가 잠이 들었나요.”

“잠시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금방 깨셨으니 다행이긴 하나.”

현경이 일어나 앉으려는데 몸을 덮고 있던 도포가 흘러내렸다. 늘 가슴을 옥죄던 느낌이 없다 싶더니 풀어진 저고리 아래로 살결이 비쳤다. 현경이 허둥지둥 저고리 앞섶을 여미며 아란의 눈치를 살피는데, 아란의 한숨소리가 크게 울렸다.

“가슴띠로 그렇게 숨을 조이고 있는데, 몸이 버티겠습니까.”

“…….”

현경은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부풀어 오른 속에 숨이 차는 느낌이 껄끄러웠다. 아란은 현경이 정신을 잃자 어찌나 놀랐는지 그만 소리쳐 의원을 부를 뻔했다. 그래도 안절부절 떨리는 손으로 저고리를 풀어헤치고 가슴을 옥죄던 가슴띠를 끄르니 다행히도 현경의 숨소리가 나아졌기에 망정이었다.

“오랜만에…….”

“…….”

“오랜만에 아가씨 얼굴을 뵈니 묵은 체증이 싹 내렸나 봐요.”

“실없는 소릴 하시는 걸 보니 이제 멀쩡하신가 봅니다.”

“의원에게 보였다면 소란이 일었을 텐데, 아가씨 덕분에 살았습니다.”

배시시 웃는 꼴에 아란은 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이 또 다시 없을 거라 장담 못합니다.”

“그럼 그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 그만 두세요, 제가 언제까지 곁에서 살필 순 없습니다.”

“…….”

현경은 그 말을 듣고도 괜히 시선을 피해 방에 걸려 있는 노란저고리와 다홍치마를 바라보았다. 아란이 초간택일 날 입어야 할 옷이었다. 지난번 포목점에서 다홍빛 옷감을 들이밀었던 현경은 아마 정말로 아란이 다홍치마를 입을 날이 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현경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아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말없이 아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현경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분명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데, 아란이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사람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궁에 들어가신다면.”

“…….”

“그 좋아하시는 책도 마음껏 못 보시겠네요.”

“…….”

“그래도 정말 궁에 들어가신다면, 이젠 정말 그 누구도 아가씨를 함부로 대할 수도 감히 뵐 수도 없을 겁니다. 잘된 일이지요.”

“아직 초간택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말이 이르지 않습니까.”

그 빤한 시선이 민망하여 아란이 먼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깟 책이야, 과거를 치를 것도 아닌데 볼 수 없으면 어떨까. 저자에 다니는 무뢰한들이야 마주칠 일도 없을 텐데 아무렴 어떨까. 현경의 말처럼 만약 궁에 들어가게 된다면 감히 볼 수 없을 텐데. 감히 만날 수조차 없을 텐데. 아무렴 어떨까.

“오랜만에 아가씨 노래가 듣고 싶네요.”

대뜸 노래가 듣고 싶다는 현경의 말에 아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다홍치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는 현경의 눈이 일렁였다. 노래를 불러 달라 조르는 그 말에 팔 년의 세월이 거슬러 오른다.

“이제 어디 가서 아가씨 노래를 듣습니까, 이 불쌍한 경이 홀로 버려두고 가시기 전에 한 곡조 들려주시지요.”

아란은 그 말이 어처구니없어 핏 웃는다. 금방 눈망울을 일렁이던 사람이 말은 개구지게도 한다. 능청스레 노래를 청해 놓고도 쓸쓸한 현경의 얼굴에 아란은 괜히 마음이 이상하여 눈을 감았다. 조용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노랫말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심코 부른다는 노랫말이 하필 이별가라 아란의 어깨가 절로 가라앉았다.

“우는 달빛에 마음이 상하여…….”

그 옛날 대나무 숲 사이를 가르던 소녀의 목소리는 맑고도 청아했건만, 지금 듣는 이 목소리는 어찌나 구슬프기만 한지, 이별가의 노랫말이 괜히 현경의 마음에 사무쳐 눈시울이 붉어진다. 오랜만에 아란을 보았으니 분명 기뻐야 하는데, 막상 아란을 보니 왜 이렇게 울적한지 모를 일이다. 현경은 그저 망연히 벽에 걸린 치마저고리를 보며 목 끝엔 ‘가십니까, 정말 가십니까.’ 하는 물음만이 차올랐다.

“밤새 내린 비가 찬 줄도 모르니…….”

아란이 없다면 이 도성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아란을 더 이상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현경은 난데없이 덜컥 겁이 났다. 혼자 의연하게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만큼이나 마음을 기대고 있었을 줄이야. 그간 영문을 몰랐던 속앓이가 병이 된 것임을, 그리고 그 속병을 덧나게 하는 이, 씻은 듯 낫게 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현경이 뒤늦게 깨달은 것들이 눈물로 들이닥쳤다. 현경은 소매로 얼른 눈물을 훔쳤다.

“알아도 모른다 하여 지나기만을 기다리네.”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는 아란의 마음속은 정리되지 않은 복잡함으로 가득했다. 지난 세월 동안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다녔던, 그저 철없이 즐겁기만 했던 어린 기억들도 있었지만, 좀 더 자랐을 때 깨달았던 주위의 시선들은 자꾸만 자신을 별당 담벼락 안으로 가두었다.

궁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피하고자 했던 지난 수년간의 아버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열다섯 처음 궁 안에 발을 들였을 때는 제 발로 나올 수 있었지만, 이번엔 어찌 될지. 몸져누운 어머니 앞에서는 다 괜찮을 거라 말은 했지만, 부모의 남은 날 동안 하나뿐인 자식이 마음의 짐으로 남게 될까 봐 아란은 늘 속으로 앓았다.

“간 곳 없고 온 데 없어도 꽃은 피더니…….”

그러다가 자신과는 아주 다른 세상에 사는 현경을 만났다. 제 한 몸 추스르지 못해 괴로운 아란에게 현경은 그저 항상 불안하여 손이 많이 가는 귀찮은 존재지만, 만약 궁에 들어가게 된다면 가장 마음에 걸리는 존재 또한 홀로 남겨질 현경이기도 했다.

“그 길에 꽃은 피더니…….”

소리 내 울지도 못하고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분주히 닦아내고 있는 현경을 보며 아란은 마음이 무거웠다.

저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그렇게나 천진한 얼굴로 세상에 안 될 일이 어디 있냐며 웃던 이가 저렇게 눈물 바람인 것도 보기가 싫었다. 아란은 우는 현경을 애써 모르는 척 다른 노래를 이어서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가를 부르는 데도 현경은 소리 없이 계속 울기만 했다.

아란이 탄 가마가 들리자 여종이 뒤를 따랐다. 대문 밖으로 제현 부부와 문하생들, 집안 식구들도 모두 나와 아란의 가마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중에서도 현경은 가장 늦게까지 가마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몰래 속으로 아란이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가마가 부서져 가는 길이 지체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날 별당을 나와 동재로 돌아온 날 밤, 현경은 정말로 심하게 앓았다. 물론 다음날 아침에는 멀쩡히 강연장에 나가 평소처럼 책을 읽었지만, 밤새 눈물 콧물 흘리며 앓고 나니 마음에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지키고 싶다는 것이 무엇인지, 현경이 편지마다 써놓은 동무와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묻는 아버지 강무의 서신을 읽으면서도, 현경은 답장 대신 감자골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도성에 올라 올 땐 큰 꿈에 부풀어 사그라질 줄 몰랐는데도 현경은 한없이 무기력해져만 갔다. 그래도 스승님과 아버지 뵐 낯이 있으니, 별시만 치르고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별시는 세자의 성대한 국혼 뒤에 곧바로 열릴 것이다.

“형님들, 제가 살 테니 같이 술이나 한잔하러 갑시다.”

“웬일이냐, 해가 중천인데 현경이가 먼저 술 산다는 소리를 다 하고.”

“안 그래도 초간택 결과가 금방이라니 저자에 사람이 많다더라, 가자.”

초간택은 원래 각 규수들의 자태와 외관만을 보고 평가를 하기 때문에 아침에 궁에 들어와 간단한 다과상을 받고 정오쯤이면 끝나게 되어 있었다. 하여 초간택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가마 행렬이 궁 앞으로 줄을 선 것도 가히 절경이라, 저자에는 거리의 거렁뱅이부터 양반네들까지 들려오는 소식이 없나 사람 모이는 곳을 기웃거렸다.

대낮부터 유생들이 주막에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은 보기에 썩 좋지 않았으나 오늘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현경은 술 한 잔 따라놓고 고사 지내듯 마시지도 않고 술잔만 노려보고 있었다.

“현경이 요놈은 아침엔 아가씨 가마를 그리 노려보더니 이번엔 술잔이냐? 왜 이래?”

“…….”

“참 별나기는. 그나저나 박형은 별시 준비 잘 되어 갑니까. 아, 나는 가슴이 떨려서 책이 손에 안 잡히오.”

“거 녀석 유난 떨기도 한다, 아가씨 일로 스승님께서도 심란하신데 정신 바짝 차리지 않고.”

“그것이 아니라 이 자는 자기가 장원급제를 할까봐 가슴이 떨린다는 말입디다, 내 이 말 듣고는 얼척이 다 없어서.”

별시라면 따 놓은 당상이라니, 곧 금의환향할 생각에 들뜬 형님들 셋은 낄낄대며 떠들기 바빴다. 현경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정오가 좀 지났을 즈음 주막에 오가는 사람들 중 누군가 방금 전 초간택이 끝났다는 말을 전해왔다. 주막에 있던 이들은 과연 누가 초간택 안에 들었는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말을 전해온 이는 짐짓 수염을 씰룩이며 거드름을 피웠다.

“거, 술 한 잔 들어가야 깔깔하니 목구멍이 탁 트이겠고만.”

“어디 웬 헛소리 지껄이나 들어나 보자!”

수염이 희끗한 노인이 껄껄 웃으며 탁주 한 사발을 건네주었다. 시원하게 목을 축인 사내가 오른손을 힘주어 쫙 펼치면서 이번 초간택을 통해 총 다섯 규수가 재간택에 올라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다섯이 어느 댁 규수요?”

“허어, 궁 앞에서부터 뛰어왔더니 목이 타네, 목이 타.”

이어지는 사내의 능청에 주막에 있던 이들이 깔깔 웃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이번엔 탁주에 전 부침 한쪽을 입에 물렸다. 오물오물 씹던 사내가 손가락 하나를 피더니 걸걸하게 외친다.

“윤판서 댁 규수!”

“거봐, 내 말 맞지!”

김형이 무릎을 탁 치며 웃었다. 다음 규수가 누구냐 아우성인 사람들 틈에서 사내는 입을 열듯 말듯 약을 올렸다.

“하이고, 감질나서 못 듣겠네. 여기, 주모! 그냥 여기 한 상 내주쇼!”

누군가 감질나서 못 듣겠다며 탁주보다 값나가는 방문주를 병째로 사내 앞에 내밀었다. 고급술을 본 사내가 휘둥그레 눈을 뜨며 다섯 명의 규수를 술술 불러내려 갔다. 그러다가 사내의 입에서 '이선생 댁 규수!' 하는 소리가 나오는 순간 현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재간택은 내일 곧바로 다시 열리고, 재간택을 통해 세 명이 다시 선발된다 했다. 재간택 세 명 안에 들면 최종 삼간택에서 마침내 왕세자빈이 간택되는 것이고, 간택되지 않은 나머지 둘도 왕의 후궁으로 들일 수도 있다 했으니 결국 내일 재간택에서 아란이 세 명 안에 들게 된다면 아란은 궁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된다.

선발된 다섯 규수들에 관한 이야기로 주막 안이 시끌벅적 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현경은 쳐다만 보고 있던 술잔을 들어 쓰게 삼키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뵐 낯이고 뭐고 별시고 뭐고. 방으로 돌아가 짐부터 싸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열다섯, 열여섯 즈음의 어린 규수들 사이에 서있는 스물둘의 아란은 민망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시선들 탓에 긴장을 늦출 수도 없었다. 궁 안 편전에 스무 명 정도의 도성 규수들이 노란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입은 채로 각자의 아버지 이름이 쓰인 명패 뒤에 앉아 있었다.

편전 앞으로는 왕과 왕세자가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좌의정과 우의정, 도승지를 비롯한 여섯 명의 주요 관료들이 규수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있었다. 세자빈을 간택하는데 왕실의 여인은 얼굴도 비추지 못했다. 강씨 왕조에서 왕실의 여인이란, 대를 이을 왕손을 생산하는 것 외에는 왕실의 그 어떤 일에도 간섭할 수 없는 존재였다.

상궁의 안내에 따라 노란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맞춰 입은 규수들이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였다. 열다섯 때 궁 출입을 했던 아란은 격식 있는 행동이 익숙했다. 아란의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에 왕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왕세자의 진득한 눈길도 따라붙었지만, 아란은 숨이 막힐 듯 갑갑한 궁 안의 공기에 어서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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