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18)화 (18/63)

#18화

이제 겨우 해가 기울었는데 기방에는 벌써부터 사람이 많아 시끌벅적했다. 대문에 들어서는 넷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마당에 나와 있던 기생들이 현경을 보고는 화색이 되어 현경 주위로 모여들었다.

왜 이제야 왔냐며, 도련님 생각에 몸져누울 뻔했다고 앙탈을 부리며 현경의 팔을 잡아끄는 기생도 있었다. 현경이 난처하여 팔을 빼내려 하는데 박형은 그 모습이 우습다며 골렸고, 정형은 부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오죽 사람이 많으면 마당에까지 나와 이러는 게지.”

“주막에나 갑시다, 방도 없는 듯 보이니.”

현경이 지나가는 말로 나가자고 하니, 근처에 서있던 기방 기부가 손사래를 치며 달려 나왔다.

“잠깐 기다리시오 도련님들, 예서 가장 좋은 방이 비어 있으니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가장 좋은 방?”

“갑시다! 어차피 현경이가 사는 거니, 안 되면 이 녀석이라도 묶어놓고 가면 되잖소.”

가장 좋은 방이란 말에 정형과 김형이 솔깃하여 밖으로 나가려는 박형과 현경을 잡아끌었다. 현경은 소매 춤에 넣어둔 쌈지를 만지작거리며 울상이었다.

가장 좋은 방이라던 곳은 손을 받는 방이 아니라 이 기방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일패기생 홍옥의 처소였다. 기생의 방이라 하기엔 수수하고 아담했기에 기부가 귀띔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홍옥의 방인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홍옥의 방이라 그런가, 왠지 홍옥의 향기가 나는 것 같구만.”

홍옥의 방이란 소리에 정형은 입이 귀에 걸린 채로 헤헤 웃고 있었고, 김형은 계속해서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박형도 기생의 처소까지 들어온 적은 처음이라며 어색해했다. 현경은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들어와 술을 마시는 것이 마뜩찮아 기부를 도로 불렀다. 기부는 괜찮다며 한쪽 눈만 찡긋거리며 잠시만 기다리라 할 뿐이었다.

“이거 신기하긴 하다만, 영 불편하여 술이 목구멍으로 들어갈라나 모르겠네.”

“오늘은 술이나 몇 잔 마시고 갑시다.”

“에헤이,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잔말 말고 잔 들거라.”

정형이 아쉬워하며 혀를 차자 박형이 웃으며 아우들에게 각각 술을 따라 주었다. 모두 별시 때까지 학문에 정진하여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잔을 들었다.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는데 방문이 열리며 홍옥이 들어왔다.

“우린 홍옥을 부른 적 없는데, 오늘은 그냥 술만 마시고 가려 하네만.”

“저는 그저 제 방에 쉬러 들어왔을 뿐입니다.”

“아, 이거 참, 방을 차지하고 있어서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강도령께서 계시니 제가 편히 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홍옥이 현경을 보며 요염하게 웃었다. 기생들에게는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 현경을 장난스레 희롱하는 말이었다. 김형이 그 말을 듣고 풋 웃었다. 어디 시골 촌에서 멀끔한 도령 하나가 상경했다 하는데, 조곤조곤한 입담이며 기생들에게도 명랑하여 구김살이 없으니 양반네들 추태 보는 것이 일상인 이곳 기생들은 현경이 있는 방에는 '쉬러 간다.'고 농을 치곤 했다.

“햐, 요 녀석을 데려오니까 얼굴 보기 힘든 천하의 홍옥이 부르지도 않는데 알아서 찾아오고.”

“이곳에 강도령 얼굴 한 번 보려 애 닳는 아이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매번 누가 있을지 모르는 방으로 들어서는 게 이곳 기생들의 권태롭기 그지없는 일과였지만, 현경이 있는 방에 들어서는 기생들은 벌써 그 표정부터가 달랐다. 술 따르고 웃음을 판다 해도 그들 또한 사람일 테니. 희롱하는 농담 대신 멋진 시 지어 읊어 주고, 손목부터 잡아끄는 대신 애써 꾸민 치장 알아봐 주고 곱다 하니 강도령을 반길 수밖에.

“거참, 현경이 덕분에 홍옥의 방에까지 다 들어와 보네 그래.”

“워낙 손이 많아 비어 있는 방이 없어 이런 누추한 곳에 자리를 드려 송구하지요.”

“아니지, 마구간이라 할지라도 홍옥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않나, 하하하.”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왜 이리 손이 많소?”

“조만간 별시가 열린다고 하니 도성 사내들이 결의를 다지고자 다들 기분 좋게 한잔하러 오시는 게지요.”

“크, 벌써 말이 파다하구먼, 우리만 아는 게 아니었어.”

김형이 아깝다는 듯 무릎을 탁 쳤고, 그러게 말이야 하고 정형이 껄껄 웃었다. 박형도 덤덤히 우리도 그 사내들 중 하나지, 하며 술을 따랐다. 현경도 따라 웃다가 문득 홍옥에게 물었다.

“근데 이번 별시는 어떤 연유로 열리는지 혹 아시오?”

“이번에 세자빈 간택이 있을 거라 하더군요.”

“오, 드디어! 과연 나라의 경사로군.”

“하긴, 세자저하의 춘추를 생각하면 하루빨리 세자빈마마를 들이셔야지.”

정형의 말에 박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경은 세자라는 말에 잠시 멈칫했다. 현경은 세자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자신과 닮았을까, 어머니가 다르니 닮지 않았을 테지. 괜한 생각들을 하며 현경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다시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 세자저하는 어떤 분입니까?”

“허허, 그걸 우리가 어찌 알겠느냐, 뵌 적도 없는데.”

“뭐, 떠도는 소문에는 성정이 그리 점잖으시진 않다 하더군.”

“예끼, 이 사람! 큰일 날 소리를.”

“세자저하 성정이야 내 정확히 알 길은 없다만, 조정 대신들 수군대는 소리야 도성 유생들 중엔 모르는 이가 없지 않은가.”

“하하하, 이거 원 이러다 나라님 말까지 나오겠네, 그만들 해라. 여기 듣는 귀가 있지 않느냐.”

박형이 웃으며 홍옥을 바라보자, 말을 듣고 홍옥이 웃는다. 김형이 장난스레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였고, 정형이 그걸 보고 낄낄 웃었다. 현경은 세자에 대한 평판이 그리 좋지 않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히 웃었다. 어느덧 대화의 주제는 과연 누가 세자빈이 될 것인가로 옮겨져 있었다.

“최판윤 댁 둘째 딸이 나이가 몇이던가?”

“아직 어릴걸, 내 생각엔 윤판서 댁 아가씨가 유력하지 않나 싶네.”

정형과 김형이 도성 내 양반집 규수들을 죽 늘어놓으며 누가 될까 이야기하고 있었고, 현경은 흥미 없이 술잔만 뱅글뱅글 돌리고 있었다. 그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홍옥이 한마디 던진다.

“가장 유력하신 분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누구?”

“그야, 이 선생님 댁에 계시는.”

“아란 아가씨 말인가? 에이, 설마.”

“어렸을 때 궐 출입도 하셨고 세자저하의 배동이기도 하셨으니, 가장 유력한 분 아니겠습니까.”

현경은 입에 머금던 술을 풉 하고 뱉을 뻔했다. 방금 누가 세자의 배동이었다고? 현경은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형이 멍한 얼굴의 현경을 보더니 몰랐느냐며 껄껄 웃었다.

“헌데 아가씨는 세자빈이 되시기엔 나이가.”

정형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며 고개를 갸웃하자 홍옥이 이내 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궁에 사주단자를 올려야 할 처자들의 나이가 열다섯에서 스물둘까지라 합니다.”

“스물두울? 보통 많아야 열아홉까지 아니오.”

“그 말은 곧 스물둘 정도의 처자 중 왕실이 눈여겨보는 분이 있다는 말이겠지요.”

“양반가에서 그 나이까지 혼인 안 한 규수라면.”

“하여 항간에는 왕실에서 내정한 세자빈이 이 선생님 댁 아가씨가 아니냐 하는 말도 떠돈답니다.”

“허, 이거 참.”

김형은 술잔을 들어 급히 목을 축였다.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특히나 현경은 아까부터 이게 지금 무슨 소리들인지 벙찐 얼굴이었다.

“만약 사실이면, 이거 엄청난 경사인데.”

“그러게 말이오, 스승님은 전혀 일언반구 없으셨는데 말이지?”

“이거 좋은 소식이 있을 듯하니 오늘 제대로 마셔야겠구만, 자 다들 술잔 듭시다!”

정형의 말에 김형과 박형이 껄껄껄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현경도 얼떨결에 술잔을 들긴 했으나 표정이 밝지 않았다. 현경을 제외한 셋은 그때부터 신나게 술을 부어라 마셔라 취하기 시작했다. 결국 하나둘 픽픽 술상에 고개를 박고 곯아떨어져 버렸고, 술잔만 내려다보고 있는 현경과 홍옥만이 곧게 앉아 있었다. 홍옥이 가만히 현경을 보며 물었다.

“도련님께서는 아가씨가 세자빈이 되실지도 모르는데, 기쁘지 않으신가 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란 아가씨가 세자빈이…….”

현경도 술을 적잖이 마신 터라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하고 자꾸만 앞으로 흔들흔들했다. 술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현경이 되물었다.

“홍옥은 왕실의 여인들이 어찌 지내는지에 대해서도 듣는 말이 있습니까.”

“한낱 기생이 지엄한 궁궐 생활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럼 왕실의 여인 정도가 되면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나요?”

“글쎄요, 방문턱을 넘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은 곳이 궁이라지요.”

“별당 담벼락도 답답하실 텐데.”

알 수 없는 중얼거림에 홍옥은 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작은 턱엔 수염 하나 나지 않았고 매끈한 이마와 눈매가 마치 여인처럼 어여쁜 소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엔 농도 잘 던지고 쾌활한 사람인데, 오늘따라 말수도 없고 멍한 것이 조금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혹시 초간택일이 언제인지도 아십니까.”

“금혼령이 얼마 전이었으니, 아마 금방일 겁니다.”

“그렇군요.”

“왠지 쓸쓸해 보이십니다.”

현경은 잠시 홍옥을 바라보다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턱을 괴고 비스듬히 앉은 현경을 보며 홍옥은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도포자락을 찬찬히 훑었다. 곁에 두는 이가 있는 걸까. 홍옥의 눈에 들어오는 건 주로 그런 것들이었다.

“홍옥은 아란 아가씨를 아나요.”

“직접 뵌 적은 없으나 학식이 높으신 분이라 알고는 있습니다.”

“아란 아가씨는…….”

누구보다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분이지요. 현경이 눈을 끔뻑이며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현경은 그 옛날 대나무 숲을 거닐며 아란이 불렀었던 노래 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홍옥은 이곳이 답답하지 않나요?”

뜬금없이 기방이 답답하지 않냐 묻는 현경의 눈가가 얼핏 붉었다. 취한 듯 보이나 맑은 두 눈은 또렷이 빛나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흐뭇한 마음이 들게 했다. 홍옥은 그렇다 아니다 대답도 없이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일전에 도련님께 술 한 잔 기약하였건만, 어째 발걸음이 더디셨습니다.”

그 말에 이번엔 현경이 빙긋 웃었다. 홍옥이 보냈던 서신은 정형의 성화에 이미 현경의 손을 떠난 지 오래였다. 사내를 홀리는 눈매만큼이나 홍옥의 글씨 또한 사람을 홀리듯 요염한 탓이었다.

“홍옥은 늘 찾는 손이 많으니 노곤할 텐데, 저까지 귀찮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노곤함을 알아주는 분이 있어 위로가 되니 괜찮습니다.”

홍옥이 수줍게 웃었다. 현경은 이마를 긁적이다 술상 위에 널브러진 형님들을 둘러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옆에 앉은 박형을 흔들어 깨우니, 우렁찬 기침 소리에 김형과 정형도 고개를 들었다.

“오늘 도련님께 술 한 잔 따라드리지 못했으니 또 다음을 기약합니다.”

홍옥은 그리 말하고는 밖에 있던 기부를 불러 배웅을 맡겼다. 현경이 그럴 필요 없다 사양했지만, 홍옥은 또 대답 없이 웃는 얼굴이었다. 그 미소에는 어딘가 아쉬움과 완강함이 엿보였다.

“다음을 약속 받아두지 않으면, 발길을 끊으실 것 같아 그럽니다.”

애초에 홍옥은 술을 따르는 기생이 아니라는 걸, 현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도성 안은 세자빈 간택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시끌했다. 제현의 집에도 궁에서 나온 사람이 다녀갔다. 아란의 사주단자가 들어 있는 작은 함이 대문 밖을 나갈 때 제현은 한동안 멍하니 마당에 서 있었다.

‘이제 우리 이씨 가문도 왕실과의 연계가 필요할 때가 온 것 같지 않습니까?’

문중 모임에서 말을 먼저 꺼낸 건 제현의 먼 친척이었다. 혼기를 놓친 딸아이를 더 이상 어찌할 것이냐는 말이 나왔을 땐 제현은 귀를 의심했다. 모임에서 아란의 얘기가 나온 것은 그 옛날 세자의 배동으로 들일 때 말고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문중 모임이 급히 앞당겨진 이유를 제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란을 두고 저울질이나 하고 있던 문중 사람들은 노기 어린 제현의 얼굴을 보며 이곳에 오는 동안 이미 도성엔 금혼령이 내려졌을 거라 점잖게 말했다. 그동안 운 좋게 잘 피해 다녔겠지만, 이번엔 늦었다는 뜻이었다.

모임에서 돌아와 아란에게 말을 꺼냈을 땐, 아란의 어머니는 옆에서 눈물만 흘렸고 아란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알았다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현경은 벌써 보름이 넘게 아란을 만나지 못했다. 별당으로 가는 중문 근처를 지키는 노복들이 늘어났다. 이젠 밤이 어두워도 더 이상 담을 넘어 별당으로 갈 수가 없었다. 지나가던 여종에게 아가씨의 안부를 물어도 대답을 주저하던 여종은 그저 안방마님이 몸져누워 있어 아란은 그 곁에서 간호할 때 말고는 별당 밖을 나오지 않는다고만 답했다.

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초간택 날짜는 다가오고 아란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괜찮은 건지 도무지 알 길도 없었다. 현경은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을 방 안에 누워 아란에 대한 생각으로 채우고 있었다.

화려한 당의를 입고 궁궐 안에서 웃고 있는 아란의 모습을 상상하려 했지만 도저히 아란의 웃는 얼굴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눈을 감으면 장터에서 자신의 장난에 눈을 흘기던 얼굴이 떠올랐다. 별당에서 저와 함께 열띤 토론에 집중하던 얼굴이, 느릿한 손길로 바느질을 하던 모습이 스쳤다. 다시 힘없이 눈을 뜨면 뻗은 손끝에 벗어놓은 미색 도포가 만져졌다.

현경은 요 며칠 속이 일렁이던 것 대신, 명치가 꽈악 조이는 것 같은 통증이 잦았다. 무심코 숨을 참는다곤 해도 시간이 멈추진 않으니, 하루하루 시간은 잘만 흘렀다.

“현경이 너 오늘따라 얼굴빛이 좀, 창백한 거 같다.”

“예, 속이 좀.”

강연장에 앉아 책을 읽던 박형이 걱정스레 현경을 바라보았다. 현경은 요새 입맛이 없어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는데도, 그나마 먹는 족족 체한 듯이 가슴이 답답했다. 식은땀을 소매로 훔치며 현경이 먼저 동재로 돌아가 보겠다 말했다. 강연을 마치고 책을 정리하던 제현은 그리하라 이르면서도 휘청거리는 현경을 그냥 보내지 못했다.

“안채에 의원이 와 있으니, 맥이라도 한 번 짚어보는 게 어떻겠느냐.”

“아, 아닙니다, 그냥 좀 쉬면 괜찮을 겁니다.”

“아니다, 잠시 앉아 있거라.”

제현은 굳이 노복을 불러 안채에 있는 의원에게 현경의 상태도 봐줄 것을 청하도록 했다. 현경은 혹여나 진맥을 하다 여인인 것을 들키는 게 아닐까 두려워 애써 괜찮은 척 웃는데도 손끝이 다 떨렸다. 현경이 어쩔 줄 몰라 동재로 가지도 못하고 도로 강연장에 오르는데, 의원을 모시러 갔던 노복이 급히 중문 쪽에서 달려왔다.

“의원은? 안채 상황은 어떠하더냐.”

“안방마님께서 두통에 차도가 있으셔서 지금 마저 약을 달이는 중이라 합니다. 저, 헌데 그보다.”

“무슨 일이냐.”

“아가씨께서 급히 현경 도련님을 찾으셨습니다.”

“아란이가?”

“예, 중히 할 말이 있으니 당장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현이 의아하여 현경을 돌아보았다. 현경도 영문을 몰랐으나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아 얼른 일어나는데 제현이 말렸다.

“중히 할 말이 무엇이기에 몸도 좋지 않은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느냐, 아란에게 그리 전하거라.”

“아닙니다, 스승님. 제가 잠시 체기가 있어 그랬는지 지금은 멀쩡합니다.”

“정말 괜찮느냐, 아직 얼굴이 파리한데.”

“저는 정말로 괜찮으니, 그보다 의원에게는 안방마님의 병세가 호전되는 데에만 전념하라 이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현은 여전히 창백한 현경의 얼굴을 미심쩍어 했지만, 현경의 말대로 노복에게 전했다. 제현이 그래도 마음에 걸려 오후 강연 때 나오지 말고 동재에서 쉬라고 하니 현경이 넙죽 그러겠다 한다. 현경은 일부러 활짝 웃으며 씩씩하게 걸어 중문 쪽으로 향했다. 다리가 휘청일까 힘주어 걷는 통에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을 정신도 없었다.

“아가씨, 현경 도련님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해라.”

오랜만에 듣는 아란의 목소리에 현경은 내심 마음이 설렜다. 가죽신을 벗으면서도 명치가 아려와 잠시 멈춰 심호흡을 해야 하긴 했지만, 마루에 오르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늘 앉아 있던 보료 위에서 아란이 초조하게 서있었다.

현경이 성큼 아란 앞에 다가서는데, 아란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아란은 못 본 사이에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아란 또한 창백한 현경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금방 얼굴을 찌푸렸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시기에 의원을 찾으셨습니까.”

“그게, 속이 좀.”

아란의 얼굴을 다시 본다면 하고 싶은 말이 가득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순간 아란과 마주 서있던 현경의 눈앞이 핑 돌았다. 휘청하여 주저앉는 현경의 팔뚝을 아란이 겨우 잡았다. 꿇어앉은 채로 숨을 잘게 쉬는 모습이 불안하여 아란은 현경의 갓 끈부터 풀었다.

“괜찮으십니까?”

“잠시만…….”

아란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서 숨을 고르던 현경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아란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이 팔 아래로 스르륵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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