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아란은 걸음을 늦추지 않고 현경보다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붉으락푸르락할 그 얼굴이 뒷모습만 봐도 선하여 현경은 철없이 웃었다. 현경이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아란의 뒷모습만 보며 겨우 쫓아가고 있는데, 앞서 가던 아란이 누군가와 부딪쳐 휘청했다.
아란은 부딪친 이마가 얼얼했지만 워낙 사람이 많은 통에 그러려니 하고 그냥 지나가려는데, 어쩐지 자신과 부딪친 사내가 계속 아란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아란이 고개를 들어 앞에 선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아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이 선생님 댁 따님 아니십니까, 이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규방에서 학문을 하시는 고귀한 분께서 이렇게 장터까진 어인 일이신지요?”
“…….”
비아냥거리는 사내의 말투에 아란은 질끈 눈을 감았다. 몇 년 전 아란과 혼담이 오갔던 사내 중 하나였다. 아란이 공부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하여 결국 아란 쪽에서도 거절한 상대였다. 이후 다른 집 규수와 바로 혼인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때도 아란이 들고 있던 책을 보며 한껏 비아냥대던 말투며 얼굴표정까지 변하지 않았다.
“혼기도 놓치신 채 학문에 매진하시는 분인데, 이러다 곧 과거라도 급제하시는 거 아니오?”
사내는 옆에 선 다른 사내에게도 아란을 조롱하며 웃었고, 손에 든 합죽선을 아란의 얼굴 앞으로 까닥거리며 힐난하였다.
어느새 그들 주위로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아란은 불쾌함을 내비쳤으나 일을 더 이상 소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자이니, 그저 운수가 사납다 여기며 그들을 지나쳤다. 아란의 등 뒤로 모욕적인 말이 이어졌다.
“이제라도 주제를 알았으면 어디 대감집 소실 자리라도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님 내가 받아줄 수도 있고.”
애써 이를 악물고 길을 가던 아란은 발걸음을 멈칫했다. 그때,
“아주 멋들어진 합죽선이네 그래, 어디 한 번 구경이나 좀 합시다.”
“댁은 뉘시오?”
현경이 모여 있던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와 사내 앞에 섰다.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현경을 훑어보았다. 현경이 사내가 들고 있던 합죽선을 빼앗아 펼쳐들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향해 펴보며 연신 햐, 하며 뜻 모를 감탄사를 내뱉었다. 매끄러운 대나무살에 난이 그려진 합죽선은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난초의 향은 군자의 인품과 고귀함을 나타내는 것인데, 어디서 이렇게 악취가 진동을 하나 했더니.”
현경이 코를 쥐며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주위에 있던 선비들이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사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금수만도 못한 자가 들고 있는 난초의 냄새나 달고 있는 주둥아리나 그 모양 그 꼴이로구나.”
능청스런 그 입담에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저 뒤에선 누군가 “옳거니!” 하고 추임새까지 넣었다.
“이 건방진 놈이 지금 누구 앞에서!”
“귀함을 모르고 예를 모르는 망나니에게 난은 무슨, 네 놈에게는 잡초도 아깝다.”
사내가 현경의 멱살을 잡고 당장이라도 한 대 칠 듯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아란이 소리쳤다.
“그 손 놓으시오!”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이들도 나서서 사내와 현경을 겨우 떨어뜨려 놓았다. 사내는 말리는 사람들 틈에서 몸부림을 치다 주저앉았고, 주름진 도포 자락을 털며 현경은 사내를 힘껏 노려보았다.
“이만 가지, 자네 지금 좀 흉하네.”
옆에 있던 다른 사내가 씩씩대고 있던 사내를 데리고 갔다. 사람들은 구경거리가 끝나자 각자 가던 길로 흩어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선비들 중 몇몇은 현경에게 잘하였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가는 자도 있었다. 아란이 달려와 현경의 옷자락을 잡았다.
“제 정신입니까! 그냥 지나치면 될 것을!”
“어찌 그냥 지나칩니까, 저런 못된 놈은 아주 그냥 혼쭐을 나야 합니다.”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게 문제입니까 지금? 저놈이 지금 아가씨께.”
“아무리 그래도,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현경은 아란의 얼굴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지만 아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침울해 보였다.
어찌나 멱살을 세게 잡혔는지, 아란이 지어준 현경의 도포는 깃이며 어깨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아란은 손을 들어 현경의 도포를 매만졌다. 맹랑한 줄이야 진즉에 알았지만 덩치 큰 사내에게도 저렇게 거침없이 덤빌 줄은 몰랐다. 조롱 섞인 말들은 전부터 늘 그랬으니 눈 질끈 감고 견디면 될 것이었다. 그보다는 아까 그 자가 정말로 현경을 치기라도 할까봐 아란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다시 그 느낌이 떠오르자 아란이 겨우 심호흡을 했다.
현경은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채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아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 장난 하나에도 발끈하던 아란이 저렇게 눈을 질끈 감고 견디는 걸 보면, 아란에게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 아닌 듯했다.
“개차반 같은 놈, 버러지만도 못한 놈.”
“…….”
“그 합죽선을 주둥아리에 꽂아 버렸어야 했는데.”
“학문 하는 분이 입이 그리 거칠어서야 되겠습니까.”
장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앞서 걷던 현경은 계속해서 욕을 해댔다. 뒤에서 가만히 듣던 아란도 이제 그만하라며 되레 현경을 달랠 정도였다.
“입이 더러운 건 그놈이지요, 제가 아니라.”
“이 나이 되도록 지아비도 없는 여인네 보는 눈초리야 다들 저렇지 않겠습니까,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하! 그게 무슨!”
현경은 그 말을 듣고 기가 차서 길 위에 우뚝 섰다. 대체 저런 식으로 아란에게 상처를 준 자들이 얼마나 더 있었던 걸까.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처연한 아란의 표정에 현경은 괜히 또 마음이 울컥하였다. 분한 마음에 현경이 주먹을 꽈악 쥐었다가, 소맷자락 위로 보이는 하얗고 가는 손목에 한숨을 뱉었다.
“그러니 도련님도 사내 놀이 적당히 하고 끝내시는 게 좋습니다. 혼기 놓치시면 저처럼 됩니다.”
“무슨 말을! 아가씨가 어때서요, 그런 말 마세요.”
지켜줄 수 있다면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경은 몸 안 가득 쿵쾅거리는 그 말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까봐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어느새 거리가 벌어진 아란의 뒷모습을 보며 망설이던 현경은 빠른 걸음으로 금방 그 거리를 좁혔다.
“저는 평생 이대로 살 것 같으니, 뭣하면 그냥 저랑 사시지요, 뭐.”
“혼인이 뭐 그때 했던 신랑각시 놀이인 줄 아시나 봅니다.”
“함께 있으면 여러모로 좋지 않겠습니까, 아가씨나 저나 걱정도 덜고.”
“…….”
“딱히 정인이라도 두신 게 아니라면.”
“그러는 도련님은 정인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덜컥 저랑 혼인하시면 어쩝니까.”
“그건…….”
일부러 밝게 아란을 바라보며 말을 잇던 현경이 아란의 눈을 피한 것은 그때뿐이었다. 지켜주고 싶다는 그 요란한 마음이 잠잠해진 것도 그 찰나의 순간뿐이었다. 우물쭈물 다시 말을 고르는 현경을 아란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그보다 저라도 옆에 있으면 아무도 아가씨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테니, 이런 곤란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도련님이 올해 열일곱이시지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스물둘 됩니다.”
“그게 뭐 어떻습니까?”
“도련님은 여인이시지요.”
“…….”
“저도 여인입니다.”
아란의 말에 현경이 입술을 숨기듯 다물고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금방 입꼬리를 올려 답했다.
“그게 뭐 어떻습니까.”
“도련님은 제가 가엽습니까?”
“아닙니다.”
“…….”
“아가씨는 제가 그렇게나 싫습니까?”
현경이 정말 궁금한 표정으로 아란을 빤히 보았다. 아란은 현경이 들이민 얼굴을 보다 그만 어이가 없어 핏 웃었다. 귀찮은 건 싫다고 보아야 하나, 생각에 잠긴 아란은 이번엔 앞서 걷지 않고 어느새 현경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고향에 다녀온 박형과 김형이 도착해 있었다. 아란과 나란히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현경을 의아한 눈으로 보던 김형이 박형을 툭툭 치며 자기들끼리 수군댔다.
“뭡니까, 형님.”
“글쎄다, 뭘까.”
박형도 그저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현경이 김형과 박형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고 옆에 있던 아란도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곧바로 중문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김형이 현경에게 대뜸 뭐냐, 하고 물었고 현경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다. 현경의 표정을 살피던 김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형님 없는 동안 뭔가 있었구나.”
“있긴 뭐가 있습니까, 김형도 참. 고향엔 잘들 다녀오셨소?”
바싹 붙어오며 은근히 골리는 김형을 밀어내고 현경은 방 안에 들어와 앉았다. 현경은 습관처럼 붓을 들었다. 어느새 현경은 하루의 일기를 쓰듯 강무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아버지, 뭔가를 지키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아버지께 무예를 배워둘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붓을 내려놓고 현경은 방바닥에 벌렁 누웠다. 그나저나 이제 제현이 돌아오면 아란과 만날 명분이 없으니 현경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여기서 오랫동안 문하생을 했던 형님들의 이야기만 들어도, 아란은 찾아가지 않으면 좀처럼 얼굴 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별당 안이 답답하지 않을까, 현경은 아란의 고요한 얼굴을 떠올렸다. 희망의 창을 닫아 마음을 시들게 하는 것, 단념은 딱 아란의 그 표정처럼 조용한 것이었다. 현경 또한 아주 어렸을 때 잠시 그런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아란에 대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찰 즈음, 밖에서 스승님이 도착하셨다는 노복의 말이 들려왔다.
문중 모임에서 돌아온 다음날에도 제현은 어김없이 아침 강연을 하였다. 여독을 풀 새도 없었을 텐데 제현은 강연시간이 되자 강연장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제현의 성격을 아는지라 현경과 박형, 김형은 강연장에 나와 앉아 있었으나, 정형은 늦잠을 자느라 아침 강연에 뒤늦게 나타났다. 말없이 정좌를 하고 앉은 제현은 정형이 허둥지둥 강연장 위로 올라오자 곧바로 아침 강연을 시작하였다. 사뭇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오전 강연이 끝난 후에도 제현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저, 스승님?”
“아, 그래.”
“괜찮으십니까?”
“몸이 좋지 않아 오후 강연은 내일로 미루어야겠다.”
제현의 말에 강연장 위의 제자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던 제현은 댓돌 위를 내려가다 말고 멈춰 섰다.
“조만간 별시가 있을 것이다.”
별시라는 말에 모두들 눈이 반짝였다. 제현은 먼발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식년시가 내후년에 있긴 하지만, 이번 별시에서도 충분히 실력을 발휘한다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니 남은 시일 동안 더욱 학문에 정진하거라.”
공부를 오래하여 제법 나이가 있는 유생들에게 별시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지방 유생들은 별시가 열린다는 소식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여 아는 사람만 아는 특별시험인 셈이었다. 하여 경쟁자가 적으니 삼 년마다 한 번 있는 식년시보다 아주 드물게나마 별시만을 바라보며 입신의 기회를 엿보는 이들도 있었다. 제현은 그 말만 전하고는 조용히 사랑채로 향했다. 강연장 위에 들뜬 제자들의 얼굴과 달리 제현의 얼굴빛이 유독 어두웠다.
“이야, 박형 이제 기회가 온 거요?”
“글쎄다, 일단 열심히 준비해 봐야 되지 않겠냐.”
“이거 오늘은 술 한잔해야겠네, 하하하!”
“현경아 오늘은 빼지 말고 군말 없이 가기다, 엉?”
정형은 기방에 가기 위해 현경을 또 살살 구슬렸다가 이번엔 으름장까지 놓는다.
“혼자 기방에 잘도 드나드는 놈이 왜 이리 현경일 못 데려가 안달이냐.”
“아 요새 통 이 녀석을 데려오지 않는다고 나한테 난리요, 형님.”
쯧쯧. 김형은 혀를 차며 읽던 책을 덮었다.
“제자라는 놈이 허구한 날 기생질이니 스승님 얼굴빛이 저리 어두우시지.”
“허, 그러는 자네가 나한테 할 말은 아닐 텐데?”
“그러고 보니 아까 스승님이 좀 이상하긴 했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피곤하여 그러신가.”
넷은 제현이 문중 모임에 다녀온 후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제자들이 술 마시고 노는 것에 대해서는 그나마 관대한 편이었지만 강연시간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엄한 제현이었는데, 아침 강연에 늦은 정형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강연 중에도 간간이 한숨을 쉬거나 제자들의 질문을 놓치는 등 평소 제현의 모습과 달라 오늘은 현경도 입을 다물고 최대한 질문을 자제했을 정도였다.
“스승님께서 기운이 없으시니 우리라도 기운을 내야 하지 않겠느냐, 한숨 자고 저녁에 나가자.”
“스승님과 두 형님의 무사귀환을 축하할 겸, 오늘은 현경이가 내는 게 좋겠구나.”
“치사하게, 아우 쌈짓돈을 노리십니까.”
“혹시 아냐, 널 데려 가면 공짜 술이 나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