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현경이 도성에 온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안에는 현경에 대한 말이 금방 퍼졌다. 이 선생 댁에 새로 들어 온 강도령의 미모가 어찌나 출중한지 한 번 웃었다 하면 노인이고 어린이고 할 거 없이 도성 안 아낙들이 픽픽 쓰러진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였다.
아란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머니는 장에 나갔다온 여종이 전하는 저잣거리 이야기에 흠뻑 빠져 소녀처럼 웃으셨다. 아란은 집에 돌아온 이후로 현경을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지만, 마치 늘 옆에 있는 듯 현경의 일거수일투족을 전해 듣는 중이었다. 유독 현경을 마음에 들어 하는 어머니 덕분이었다. 아란은 계속해서 저잣거리에 도는 현경에 대한 찬양을 어머니께 전하는 여종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군더더기 없는 손길로 바늘을 놀렸다.
“게다가 기방에 가서도 기생들에겐 손 끝 하나 대지 않으시고도 시 한 편 써주면 그날부로 기생들이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는다고.”
“앗!”
바늘에 찔린 아란의 검지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거의 다 완성되어 가던 자수에는 붉은 핏자국이 묻어 못쓰게 되었다. 여종이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며 의원을 부르겠다는 것을 아란의 어머니가 괜찮다 하고는 아란의 손에 천을 대었다.
“저런, 참으로 곱게 되었는데 못쓰게 되었구나, 많이 아프니?”
어미의 애정 어린 말에도 아란의 머릿속엔 오직 '기방'이라는 단어뿐이었다.
‘미친 건가, 기방엔 왜 가는데?’
현경은 읽던 책을 덮고 잠을 청하려 자리에 누웠지만, 도통 잠이 오질 않아 도포를 대충 걸치고 방문 밖으로 나왔다. 옆방의 불이 모두 꺼져 있는 것을 보니 형님들은 모두 자는 듯했다. 아직 잠자리가 낯설어 그런지, 도성에 온 후로 늘 새벽녘까지 책을 읽다가 밤을 지새우는 적도 많았다. 아무래도 사내들과 방을 나란히 쓰다 보니 가끔 밤중에 옆에서 덜컹거리는 소리라도 날라치면 현경은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어찌됐든 여인임을 들키지 않으려면 스스로가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밖에 나오니 달빛마저도 어둡고 고요했다. 현경은 강연장을 한 바퀴 휘 돌다가 문득 불빛이 보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큰 나무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이 보였다. 저기가 별당인가. 아란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현경은 발소리를 죽여 중문채로 향했다. 잠겨 있지 않은 중문을 슬그머니 밀고는 누가 볼세라 얼른 그 틈으로 들어가니 아담한 별당이 눈앞에 보였다. 현경은 그대로 마당을 가로질러 빛이 새어 나오는 창 아래에 섰다. 방 안에 있는 아란을 어떻게 부를까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창틈으로 아란의 얼굴이 보였다.
창문을 닫으려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본 아란은 어두운 뒤뜰에 웬 허연 얼굴을 보자마자 숨넘어갈 듯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다행인지 아닌지 아란은 너무 놀라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가슴만 쓸어내렸다. 아란이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나 창문 밖을 내다보니 현경이 눈치도 없이 활짝 웃는 얼굴로 잠시 나오라는 듯 손을 휘젓고 있었다.
막 자려고 눕던 차라 소복 차림이었던 아란은 잠시 고민하다 장옷을 어깨에 둘러쓰고 누가 볼세라 조심스레 별당을 나왔다.
“아가씨! 오······.”
“목소리 낮추시오.”
현경이 아란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것을 아란이 그 입을 틀어막고서 별당 뒤 담벼락에 바짝 붙었다.
“여긴 어찌 들어오신 겁니까.”
“아 그게, 잠이 오지 않아 잠시 걷다가, 불빛이 보이길래.”
“제 정신입니까? 담벼락을 넘다니.”
“아닙니다, 중문이 열려 있길래 그리로 온 건데.”
“······.”
아란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현경의 표정을 보고 골이 아파왔다.
“와, 우리 도성에 도착한 날 이후로 처음 보는 것 아닙니까.”
현경은 오랜만에 보는 아란 앞에서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란은 계속해서 주위를 살피다가 철없이 웃고 있는 현경의 팔을 붙잡아 도로 중문 쪽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현경은 그런 아란의 반응이 서운한 듯 발걸음을 미적거렸다.
“얼른 돌아가세요.”
“우리 되게 오랜만에 보는 건데.”
그때 중문 쪽에서 덜그럭 하는 소리가 났다. 밤중에 곳간 자물쇠를 확인하던 노복이 중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문을 잠근 모양이었다. 아란은 깜짝 놀라 일단 현경을 데리고 별당 안으로 몸을 숨겼다.
방에 들어온 아란은 다시 등잔불을 켰다. 현경은 방문 언저리에서 제 가죽신을 두 손에 들고는 얌전히 서있었다. 아란은 생각지도 못한 현경의 치밀함을 보며 이 상황을 체념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현경은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한 번 아란에게 반가움을 전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아가씨 얼굴 잊는 줄 알았습니다.”
아란은 어머니를 통해 계속 현경의 소식을 들었던 탓에 당장 어제도 본 듯 선했지만 그래도 예의상 잘 지냈다 대답했다. 현경이 신기한 듯 아란의 방을 휘 둘러본다. 아란은 그제야 현경의 얼굴을 가만 보며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야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은 좀 편히 주무십니까.”
“예, 잠이야 뭐······.”
현경이 어색하게 웃으며 딴청을 피운다. 아란은 내심 낯선 곳에 홀로 사내들 틈에서 어찌 편히 잤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현경이 여인인 걸 아는 건 자신뿐인데, 현경에게 너무 무신경했던 것 같았다.
“어디 계실까, 가끔 아가씨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불쑥 찾아오시면 안 됩니다.”
“반가운 마음에 무심코 와버렸습니다. 오늘 일은 사과드립니다.”
의외로 금방 현경이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자 아란은 할 말이 없어졌다. 현경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아란에게 물었다.
“낮엔 주로 이 별당에 계십니까?”
“예, 가끔 안채에서 어머니와 함께 있기도 합니다.”
“그럼 낮에 아가씨를 뵈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아란은 대체 내가 널 왜 만나냐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침착하게 답하였다.
“남녀가 유별하니 만날 일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아가씨와 제가 남녀 사이입니까?”
아란의 말이 우스웠던지 싱긋 웃으며 농을 걸어오는 현경의 말투에 아란은 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남들 눈엔 그렇지요.”
“흠.”
현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아가씨가 참 좋습니다.”
뜬금없는 현경의 말에 아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다음에 또 이렇게 찾아와도······.”
“안 됩니다.”
아, 안 통하네. 현경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란은 어물쩍 넘어가려는 현경의 웃음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웃음을 가만 보던 아란은 오늘 낮에 여종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 얼굴로 장안의 여인네들을 홀리고 다닌다는 그 말을.
아란이 보기엔 여전히 몸만 자란 아홉 살짜리 맹랑한 꼬마인지라 상투를 튼 채로 저에게 살랑대는 현경이 가소롭기만 했다. 또 무슨 꿍꿍이를 생각하고 있는지, 현경이 또르르 눈알을 굴린다. 문득 아란은 현경에게 궁금했던 것이 생각나 물었다.
“듣자 하니, 벌써 도성 안에서 꽤 유명하시던데요.”
“제가요? 에이 설마요.”
듣기에 나쁘진 않은지 현경이 손사래를 치면서도 실실 웃는다. 아란이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대체 기방엔 왜 가시는 겁니까?”
그러자 현경이 눈만 끔뻑이다가 이내 뒤늦게 말뜻을 이해하고는 들뜬 얼굴로 대답했다.
“그곳에 홍옥이란 일패기생이 시를 참 잘 짓습니다.”
아란은 황당한 얼굴이었다. 현경은 이어 그 기생의 시를 보면 아란도 분명 좋아할 거라는 둥, 기방엔 혼자보기 아까울 정도로 우스운 일도 많다는 둥 자신이 놀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아란에게 죽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현경이 여인이면서 대체 왜 기방 이야기를 저리도 신나게 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던 아란도 난생 처음 듣는 사내들의 유흥거리와 담벼락 밖 세간의 우스운 이야기에 은근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현경과 아란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벌써 동이 틀 시간이었다. 현경은 급히 별당을 나와 잠긴 중문 대신 곧바로 담벼락을 넘었다. 감자골에서 향교 담을 넘던 실력은 아직 죽지 않았다. 곧 문하생들을 깨우러 여종이 올 즈음이라 현경은 얼른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에 엎드려 누웠다. 문득 지난밤 아란에게 해주었던 농담이 생각나 현경은 혼자 큭큭 웃었다.
문하생들이 머무는 동재 앞에는 유독 키가 땅딸막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담장 밖에서도 우뚝 솟아 집 안으로 성큼 가지를 뻗어오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겨우 처마를 조금 넘는 이 작은 나무는 왜소한 가지를 수줍게 늘이고서도 늘 촘촘히 잎을 채웠다.
가을이 되어 은행잎은 샛노란 옷을 내려 입고서 나비처럼 바람에 살랑였다. 점심을 먹고 동재를 나서던 현경은 노랗게 익은 은행나무 잎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발치에 떨어진 잎들 중에 치마폭을 활짝 펼친 녀석을 골라 서책 사이에 끼워 두었다. 중문 안쪽엔 은행나무가 없으니 아직 아란은 못 보았겠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어서였다.
“현경이 너 전부터 누굴 그렇게 찾냐?”
“아뇨, 찾는 게 아니라 그냥.”
오후 강연을 준비하며 강연장에 모여 앉아 있는데,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현경을 기이하게 보며 김형이 물었다. 현경은 아니라 말은 하면서도 여전히 중문 쪽을 향한 눈길은 거두지 못했다.
아란은 정말로 별당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지, 굳게 닫힌 중문은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아란이 마당에라도 거닐러 나오면 오다가다 말이라도 걸어 볼 텐데, 마냥 없는 사람처럼 코빼기도 보이질 않으니 현경은 괜히 서운했다.
“산책도 안 나가나.”
그날 못 다한 재밌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고운 은행잎도 눈으로 직접 봐야 보배 아닌가. 현경은 괜히 서책 사이에서 눅눅하게 말라가는 은행잎만 아쉽게 내려다보았다. 밤마다 담 넘어가며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간다 한들 아란이 그리 쉽게 만나 줄 것 같지도 않았다. 현경은 괜히 마당을 지나는 여종에게 아란 아가씨의 안부를 물었다가 대답 대신 그걸 왜 묻느냐는 듯, 수상쩍은 눈초리를 받았다.
어영부영 오후 강연이 끝나갈 무렵, 노복 한 명이 마당에 나와 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대감마님 앞으로 이씨 문중 모임이 앞당겨졌다는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갑자기? 무슨 연유로?”
“연유는 소인도 잘 모르옵고, 모임 날을 맞추려면 내일 당장 출발하셔야 합니다.”
“알았다, 가서 얼른 채비하거라.”
모임에 다녀오려면 적어도 닷새는 집을 비워야 하니, 한창 중요한 부분을 강연하던 중이라 제현은 그 흐름이 끊기는 것을 아쉬워했다. 평소보다 일찍 강연을 마치며 제현이 책을 덮었다.
“강연이 없다 하여 학문을 쉬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그동안 배운 것들을 찬찬히 살피고 있거라.”
“스승님, 스승님이 안 계신데 책을 읽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어찌합니까?”
“옆에 있는 형들에게 묻거라. 스승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현경이가 모르는 것은 저희도 모릅니다, 스승님.”
박형의 농담에 강연장 위의 모두가 웃었다. 그럼 별 수 없으니 참고 기다리라는 제현의 말에 현경이 울상이다. 현경이 궁금한 것은 잠시도 참지 못한다는 것을 제현은 잘 알고 있었다. 역시나 현경은 그러면 이틀 만에 앓아누울 것이라 능청을 부린다. 제현이 껄껄 웃으며 그럼 대체 어찌하란 말이냐 묻자, 현경이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했다.
“혹시 스승님께서 자리 비우시는 동안, 아란 아가씨께 모르는 것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제현은 놀란 얼굴로 현경을 바라보았다. 현경을 제외한 나머지 셋도 크게 당황해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란 아가씨께서는 워낙 학식이 높기로 유명하시고 또······.”
“구, 군자된 자는 쉼 없이 생각을 단련하는 것이니, 제가 잘 이끌겠습니다, 스승님!”
“현경이가 마음이 급하여 실언이 나왔나 봅니다.”
“저희가 머리를 맞대면 안 될 것이 없으니, 스승님께선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정형과 김형, 박형이 다급하게 침까지 튀겨가며 현경의 말을 막았다. 제현 앞에서 아란의 높은 학식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금기에 가까웠다. 눈치 없는 현경이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한 셋은 제현이 그냥 넘어가 주기만을 바라며 눈치만 살폈다. 한참 말이 없던 제현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제현이 강연장을 나가자 정형이 현경의 어깨를 치며 눈을 사납게 굴렸다.
“이 녀석아, 갑자기 아가씨 얘기가 왜 튀어나와!”
“아니, 아가씨께 가르침을 받아도 되냐 묻는 게 그리 잘못입니까?”
“사내놈이 체면도 없이 스승님 앞에서 여인에게 학문을 묻는단 소리나 하고 있느냐.”
“대체 학문에 사내고 여인이고가 어디 있습니까, 박형도 그리 생각하시오?”
“어찌 사내와 여인이 같을 수 있느냐.”
믿었던 박형마저 그리 말하니, 순간 현경이 섭섭하여 자리를 박차고 강연장을 나갔다. 그동안 여인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했던 말도, 아란에 대해서도 대단한 분이라 했던 형님들의 말도 전부 그 저의에 깔린 뜻은 달랐다는 것에 현경의 속이 상한 것이었다.
현경은 사랑채로 향하던 제현을 쫓아가 아직 풀리지 않은 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실언이 아닙니다.”
“······.”
“감히 말하옵건대, 제가 본 그 어떤 선현의 책에도 학문에 있어 남녀를 가린다 하지 않았습니다.”
제현은 현경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몸을 돌려 현경을 마주 보았다. 생각이 많은 눈이었다.
“군자라는 사내가 한낱 여인에게 학문을 묻는다, 너는 이것에 조금의 부끄러움이나 거리낌도 없다 이 말이냐.”
“저보다 학식 높고 고귀한 분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어찌 부끄럽거나 거리낄 일입니까.”
“군자는 천한 자에게도 질문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는 말로, 그저 너의 겸손함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늘과 땅은 함께 어우러져 세상이 되는 것이니 그 각각은 높고 낮음이 아니듯이, 귀하고 천한 것은 사람의 심성이지 사내와 여인의 기준이 아닙니다, 제가 틀렸습니까?”
현경은 말을 하면서도 올라오는 분을 삭이느라 주먹을 꾹 쥐었다.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뭐 그리 열을 올리냐며 흘려보낼 이야기였겠지만, 두 사람에게는 달랐다.
“틀리다 하지 않았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
“틀리지 않았으니, 스스로가 한 말을 명심하거라.”
제현은 분명하게 말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사랑채로 향하던 발걸음은 현경을 지나쳐 중문을 지났다. 제현이 지난날 현경의 글 속에서 보았던 것은 단지 영특함만이 아니었음을 새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