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새로운 문하생이 들어온 김에 그날 저녁 셋은 도성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현경을 데리고 나왔다. 제현도 다음날 아침 강연에만 늦지 말라 당부하고는 현경에게 약간의 술값까지 쥐여 보냈다.
이리저리 걷다가 자주 찾는 주막에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문하생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박형이 현경에게 물었다.
“듣자 하니 여기 올 때 아란아가씨와 함께 말을 타고 왔다던데, 사실이냐?”
“중간에 가마가 부서져 잠시 함께 탔었지요.”
그러자 김형과 정형이 현경 옆에 바싹 다가와 앉으며 어떠냐, 어땠냐 묻는다. 현경은 무슨 말인가 얼떨떨했다.
“뭐가 어떻긴 어떻습니까?”
“난 스승님 댁에서 이 년째 공부 중인데 아란 아가씨랑 딱 한 번 인사해 봤다.”
“스승님이 우리들이랑 아란 아가씨랑 웬만하면 절대 마주치지 못하게 하시는데, 같이 말을 타다니! 이게 말이 되냔 말이다.”
“너 아란 아가씨가 어떤 분인 줄은 아느냐? 아무튼 가까이서 보니 어떻더냐, 소상히 얘기해 보거라.”
아예 몸을 현경 쪽으로 틀어 앉은 채 현경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는 사내 셋을 보고 있자니 현경은 헛웃음이 나왔다.
“어떻기는, 뭐 곱더만요.”
“곱기야 곱지, 헌데 말 타고 함께 왔으면 얘기라도 해봤을 거 아니냐.”
“아란 아가씨 목소리는 어떻더냐?”
술잔에 입을 대고 있던 현경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다지 별 얘기를 나눈 것은 없습니다.”
애타는 눈빛으로 침을 꼴깍 삼키던 셋은 심드렁한 현경의 대답에 김이 새어 도로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근데, 아란 아가씨가 왜요?”
“됐다, 별당 밖으론 잘 나오지 않는 분이라 우리도 궁금하여 물은 것이지 뭐.”
“그나저나, 어디 현경이 너 고향 얘기나 좀 해보거라.”
주막에서 왁자지껄 떠들다 방으로 돌아온 현경은 적당히 얼큰한 기분에 창문 밖으로 보이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도성에 있다니. 아직도 설렘이 가시질 않아 현경은 자꾸만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김에 붓을 들어 아버지 강무에게 보낼 서신을 써내려 갔다.
‘아버지, 강녕하신지요.
무사히 도성에 도착하여 이 글을 씁니다. 경황없이 떠난 것을 부디 노여워 마세요. 스승님 집안 분들도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같이 지내는 형님들도 아주 재미있는 분들입니다. 제 걱정은 마세요, 좋은 동무를 만나…….’
현경은 마지막 문구를 쓰면서 문득 아란을 떠올리다가 도로 죽 그어 놓고는,
‘제 걱정은 마세요, 조만간 또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건강하세요.’ 하고는 글을 마쳤다.
현경은 부디 아버지가 걱정 없이 자신을 믿어 주길 바랄 뿐이었다. 현경은 내일 아침 서신을 보내기로 하고 이부자리를 폈다. 낯선 방 안에 누우니 술기운에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잠을 설친 탓에 일찍 눈을 뜬 현경은 의관을 갖춰 입고 제일 먼저 강연장에 나가 앉아 있었다. 문하생들을 깨우러 가던 여종이 현경을 보고 꾸벅 인사를 한다. 무의식중에 현경도 따라 고개를 숙이니 여종이 크게 당황하며 쪼르르 동재 쪽으로 사라진다. 머리로는 알아도 아직 현경에겐 예법은 영 익숙지 않았다.
“양반 노릇하려면 연습 좀 해야겠네.”
현경은 괜히 망건 아래로 이마를 긁적였다.
생각보다 심도 깊은 제현의 강연은 감자골 향교와는 그 수준이 달랐다. 그러니 몇 번이나 읽었던 서책에서도 새로운 것들을 깨우칠 때마다 현경의 눈이 더욱 총명하게 빛났다.
“아 정말, 학문이란 아름답지 않습니까, 정형?”
“네가 진정 아름다운 것을 못 보았으니 하는 소리지.”
“진정 아름다운 것이라니?”
“이 형님이 도성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마, 가자.”
학문도 학문이지만, 현경은 그렇게 도성에 온 후로 또 다른 세상에 눈을 뜬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로만 듣던, 사내들의 유흥 집결지와도 같은 기생집에 들어서는 현경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여인으로서 평생 들어올 일이라곤 없을 줄 알았던 기생집에서 예기들이 선보인 아름다운 춤과 노래는 그야말로 현경에겐 충격이었다. 어쩐지 군자의 길이 힘들고 고된 것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니. 이 좋은 것을 사내들만이 즐긴다 이 말이지. 현경은 고개를 저으며 또 다시 붓을 들었다.
“보기 드문 미도령께서 어쩜 이리 글재주까지 있으십니까.”
현경이 써 내린 짧은 시 한 편을 읽으며 옆에 앉아 있던 기생이 살풋 웃는다. 이 기방 안의 일패기생 중에서도 가장 얼굴 보기 어렵다는 홍옥이었다. 주로 고위 관료들의 술자리에 나가 시화를 지으며 어울리는 홍옥은 한낱 유생들을 상대해 줄 기생이 아니었다. 다만 가끔씩 귀한 손이 없으면 학식 높다는 유생들과도 종종 어울리곤 했는데, 기방에 들어서는 유생들이 저마다 시 한 수씩을 지어 기방에 있는 기부에게 맡기면, 홍옥이 그것들을 읽고 마음에 드는 시를 쓴 유생이 있는 방에 얼굴을 비추는 식이었다.
그리하여 기방에 들어설 때 현경을 비롯한 네 명 모두가 시 한 수씩을 지어 기부에게 전했다. 홍옥의 얼굴 한 번 보겠다며 시 한 수를 며칠이나 고친 정형의 것인지, 이유도 모르고 시를 쓰라니 그저 신나서 써내려간 현경의 것인지, 아니면 대충 휘갈겨 쓴 박형과 김형의 것인지. 홍옥의 마음에 든 시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날 홍옥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현경 일행이 둘러앉은 방이었다.
“그거 알아? 홍옥이 이제 유생들의 시를 안 받겠다 했대.”
하루가 멀다 하고 기생집을 찾던 정형은 어느 날, 강연이 끝난 후 마루에 앉아 뜬금없이 홍옥의 이야기를 꺼냈다.
“왜?”
“말로는 맞이할 손이 늘어서라고는 하는데, 요즘 통 안 보이긴 했지. 헌데 이상하게 다른 기생들이 나더러 현경이 녀석을 데려오면 혹시나 또 모른다고 은근히 그러더라고?”
“그래서 뭐, 천하의 홍옥이 현경일 기다리느라 다른 손을 무른다 그 말이야? 이 사람 참.”
김형이 서책을 정리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연 때 읽었던 구절을 두고서 박형과 이야기를 나누던 현경은 제 이름이 귀에 들어오자 서책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제가 뭘요, 형님?”
“어 아니다, 현경아 오늘 한 잔 하러 갈 건데, 너도 갈 테냐?”
“또요? 정형은 어째 맨날 갑니까.”
“학문에 정진하려거든 머리도 자주 식혀 주어야 하는 것이라 누누이 말하잖느냐.”
“아이고, 예, 그러지요.”
그날 저녁, 기방에 앞장서 들어가는 정형은 기부를 불러다 홍옥이 지금 어느 손님방에 들었는지부터 물었다.
“홍옥이야 언제든 찾는 손님이 많으니 소인이 다 말씀 드리긴 어렵지요.”
늘 그렇듯 비슷한 말로 둘러대던 기부는 정형 뒤로 들어오는 현경을 보고는, 홍옥이 어디 있나 찾아보고 금방 일러 드리겠다며 기방 뒤편으로 들어갔다. 기방 안엔 오늘따라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현경 일행이 방을 잡고 앉아 술상을 들인 후에도 뒤늦게야 기생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오늘따라 왜 이리 더디 오는 것이야, 이 오라비가 그립지도 않던?”
“아유, 오라비 오셨단 소식에 물 한 사발 들이킬 새도 없이 이리 달려왔는데두 그러신다아.”
들어오기 무섭게 제 옆자리에 앉히고 보는 정형이 괜한 투정을 부리자, 노란빛 저고리를 입은 기생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그런 정형을 달래었다. 늘 보던 정형의 행태인데도 볼 때마다 현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도련님, 홍옥이 서신을 하나 보내왔습니다.”
문 밖에서 기방 기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홍옥으로부터의 서신이라니, 다들 의아해하던 중에 기부가 들어와 현경에게 서신을 건넸다.
“도련님께 전해 드리라 했습니다.”
“저한테요?”
“이거 봐, 뭐 있다니까 그러네.”
정형이 술잔을 달그락 거리며 투덜댄다. 홍옥이 보낸 서신은 단 두 줄의 시구만이 적힌 기다란 종이였다.
花間期一盞 꽃들 사이에 술 한 잔 기약하니
誰知困孤花 외로운 꽃의 노곤함을 누가 알까
“홍옥이 뭐라더냐, 정말로 아닌 밤중에 홍옥이 연서라도 쓴 게야?”
“연서는 무슨, 밤이 늦었으니 이만 갑시다, 형님들.”
김형이 갸우뚱한 얼굴로 물으니 현경이 그저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옆에 앉은 기생의 손목을 잡고 놓을 줄 모르던 정형이 벌써 가냐며 아쉬워했다. 마침 하품을 쩍 하던 박형이 일어서니, 김형도 기생이 따라준 술잔을 비우고 따라 일어섰다.
“이만 쉬시오.”
현경이 방에 남은 기생들에게 말하니, 평소처럼 더 있다 가라는 교태도 부리지 않고 조용히 고개 숙여 배웅하는 기생들의 미소가 잔잔했다.
기방을 나오면서 정형이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시며 볼멘소리로 현경에게 말했다.
“넌 무슨 기방엘 겨우 술 몇 잔 마시고, 고작 농 몇 번 주고받으러 비싼 돈 주고 오는 줄 아느냐?”
“그럼 자넨 뭘 하러 오는데?”
옆에서 김형이 낄낄대며 정형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웃던 현경이 정형에게,
“오늘은 손이 많았는지 다들 노곤하다 하여 일찍 나왔습니다.”
“뭐? 저들이 그러더냐?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음, 홍옥이 그럽디다.”
“홍옥이? 그럼 그 서신에 우리더러 나가라고 써 있더냐?”
정형과 김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현경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인들은 때로 농담 한 마디로 속엣말 열 마디를 하기도 하지요.”
“흥이다 요놈아, 어린 게 얼마나 여인을 안다고 허풍은.”
현경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김형과 정형은 현경의 갓을 툭툭 치며 장난을 걸었다.
“너희 둘은 어찌 그 나이 되도록 현경이보다 여인네 마음을 모르느냐.”
앞서 걷던 박형이 셋을 돌아보며 비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