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일정대로라면 오늘 밤엔 어느 군수의 집에서 머물 계획이었다. 제현이 미리 기별을 넣어둔 군수의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 반나절은 더 가야 하는데, 벌써 해가 저무는 중이라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민가가 보이는 가까운 마을을 찾아야 했다.
산기슭에 있는 한적한 마을엔 아이들이 많았다. 낯선 외지인들의 방문이 드문 일인지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호기심 어린 작은 눈망울들이 모여들었다. 특히나 현경과 아란이 함께 탄 말 뒤를 아이들이 졸졸졸 따랐다.
손님 내줄 방이 있는 집들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노복들의 발걸음이 바빴다. 늘어선 민가들 중에 기와 얹은 집 하나 없는 작은 마을이라 일행은 서로 다른 집에 흩어져 따로 묵어야 했다. 그래도 인심 좋은 마을주민들은 기꺼이 방을 내어주고 소박한 저녁상을 정성껏 대접했다.
“참, 어머니가 옆집에 있는 신랑분과는 건넛방에서 주무시면 된다 했습니다.”
“응?”
아란과 여종이 머무는 손님방에 저녁상을 들여왔던 아이가 나가다 말고 다시 돌아와 말했다. 막 수저를 들려던 아란이 아이의 말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갸웃하자, 옆에 앉은 여종이 대신 아이에게 두 분은 부부가 아니라고 짚어 주었다. 아이는 코를 긁적이다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아휴 참, 망측하기두 해라.”
“너 보기에도 부부처럼 보였니?”
“예? 아니 그것이 두 분이 좀 붙어 계시긴 했지만서두.”
그리 찰싹 붙어온 것을 모르는 척하기에도 그렇고, 맞다 하기도 뭐하여 말끝을 흐린 여종이 힐끗 아란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아란은 꼭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마저 수저를 들었다.
아란은 저녁상을 물리고 잠시 머리가 무거워 방문 밖을 나섰다. 한산한 마을 어귀 쪽을 무심코 내다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후다닥, 소리와 함께 웬 토끼 같은 꼬마아이 둘이서 아란이 있는 곳으로 달려 들어왔다. 까르륵 웃으며 아란의 치맛자락을 스치던 아이들은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란의 손끝을 잡아끌었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아이들에게 끌려가는 아란은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여어기, 각시도 데려왔다아.”
“와아, 각시 왔다.”
바로 옆집 마당 안으로 아란을 끌고 온 아이가 개선장군마냥 소리치자 마당에 있던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환대를 했다. 아란이 그제야 바라보니, 마당에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현경도 있었다. 현경의 무릎 위에 또는 발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처럼, 아이들은 현경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갓도 쓰지 않고 맨상투 차림으로 도포만 걸치고 앉은 현경도 아이들과 함께 손을 흔들어가며 아란을 맞이했다.
“이 아이들이 대뜸 신랑각시 놀이를 한다기에, 아가씨께서도 결국 잡혀오셨네요.”
현경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아이들은 아란을 현경 옆에 앉혀두고 저들끼리 역할을 나누고 있었다.
“내가 마을 원님 할래.”
“그럼 나는 주모.”
“나 포졸 시켜줘.”
“나두.”
신랑각시 놀이라더니, 원님이며 포졸까지 등장하니 현경이 의아해했다. 옆에 있던 아란은 아직 어리둥절하기만 한데, 그 와중에 각시 단장을 해주겠다며 아란을 끌고 왔던 여자아이 둘이 꺾어온 꽃가지를 아란의 머리 위에 얹어 주었다. 어디서 본 것은 있는지 조그만 손으로 볼 언저리에 연지 곤지를 찍는 시늉도 하기에 아란은 그 모습이 귀여워 미소를 지었다. 각시가 웃으니, 아이들도 발그레 따라 웃으며 좋아했다.
“각시만 단장해 주는 거야? 나도 단장 좀 해줘라.”
“신랑은 이거 써야 해요!”
한 아이가 속을 파낸 박 껍질을 현경의 머리에 씌웠다. 신랑이 쓰는 사모랍시고 씌운 건데 모양새가 영 우스워 아이들이 깔깔 웃었다. 꼭 오줌싸개 아이마냥 박을 뒤집어 쓴 현경을 보며 아란도 참지 못하고 입을 가린 채 몰래 웃는데, 툴툴대던 현경도 그런 아란을 보며 속없이 따라 웃었다.
그렇게 신랑각시를 곱게 단장시키던 아이들은 현경에게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매번 술만 마시는 철없는 신랑 역할을, 그리고 아란에게는 매일 하염없이 울며 그 신랑만 기다리는 각시 역할을 시켰다. 그래서 그 철없는 신랑에게 벌을 내리려고 한다는 건데, 말이 신랑각시 놀이지 가만 듣고 보면 영락없는 사또 놀이다. 뉘 집 사정인지, 아님 어디선가 전해들은 이야기인지 영 아이들답지 않은 말들에 현경이 경악하였다.
“아니, 뭐 그러냐. 이렇게 고운 각시 두고 도망갈 신랑이 어디 있다구.”
“맞아, 각시가 참말 고와요, 그치.”
“신랑도 고와요!”
“맞아, 기생오라비 같아!”
“야아, 그런 말 쓰는 거 아니야.”
아이들 중 대장 노릇을 하는 아이가 현경더러 기생오라비라 한 아이를 꾸짖었다. 금방 또 저들끼리 투닥거리려 하기에 가만 보던 현경이 쓰고 있던 박 대신 남은 꽃가지를 머리에 올려 능청스레 말했다.
“괜찮다, 그만큼 내가 곱다 이 말이지?”
“에에, 사내가 머리에 꽃 달았대요.”
“어떠냐, 해사하니 꽃도령 같지?”
“신랑도 각시만큼 고와요! 잘 어울린다.”
처음엔 현경을 놀리려던 아이들도 현경이 꽃 좀 달면 뭐 어떠냐 뻔뻔하게 구니 금방 곱다며 난리다. 상투 튼 사람 중에 기생오라비라느니, 사내가 곱다느니 하는 말을 듣고도 저렇게 싱글벙글할 사람은 오직 현경뿐 일거라 아란은 생각했다. 하기사 현경은 여인이니.
“이 녀석들! 손님 괴롭히지 말고 썩 들어가라!”
별안간 마당으로 마을 주민이 달려와 아이들을 쫓으니, 꺅꺅 소리를 내며 동네 아이들이 도망을 쳤다.
“아이구, 아이들이 짓궂어서는, 귀찮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리 단장도 받아보고, 막 재밌으려던 참에 아쉽게 됐네요.”
현경이 꽃가지를 들어 보이며 넉살을 피웠고, 마을 주민도 밤이 늦었으니 이만 쉬시라며 자리를 떠났다. 아란이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터는데, 현경이 다가와 아란에게로 살며시 손을 뻗는다. 아란이 놀라 한 발 물러서니, 현경이 티 없이 방긋 웃는다.
“머리에 꽃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아.”
현경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에 붙은 꽃잎 하나까지 세심히 떼어준 후에야, 다 됐다며 도로 한 발 물러나 주었다.
“그럼 쉬세요.”
아란은 금방 마당을 지나 맞은 편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현경은 방금 전 꽃가지를 떼어내는 동안 아란의 둥근 이마에서 살짝 내리깐 눈썹까지 무심코 흘러간 시선에, 아주 잠깐이었음에도 자기도 모르게 잠시 숨을 참았다. 현경은 스스로도 그 연유를 몰라 잠시 멍하게 서있다,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다음날 큰 마을을 지나던 중, 오는 내내 좌불안석이던 가마꾼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웬 가마를 기어코 하나 빌려왔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으나, 일도 않고 도저히 제 품삯을 받을 낯이 없다 우기기에 결국 아란은 말에서 내려 다시 가마에 올랐다. 오히려 마음이 편한 듯 표정이 핀 가마꾼들과, 내심 아쉬운 듯한 현경의 표정이 엇갈렸다. 아란은 가만히 가마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후로 현경과 아란은 도성에 다 와 갈 때까지 별다른 말을 나눌 일이 없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도성 앞이었다. 성문 입구에서 집까지의 길목이 혼잡하니 아란이 가마에서 내려 쓰개치마를 둘렀다. 현경도 말에서 내려 갓을 바로 쓰고 심호흡을 하며 도성문을 지났다. 쿵쾅거리는 명치를 부여잡고 선 현경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북적대고, 그 너머로는 가장 높은 곳의 기와지붕도 멀리 보였다.
“도련님!”
잠시 넋을 잃고 서있던 현경이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일행을 쫓아갔다. 화려한 옷차림의 양반들과 여인들이 현경을 스쳐 지났다. 마치 현경의 입성을 환영하는 듯 왁자지껄한 저자의 활기가 마음을 벅차게 했다.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 현경을 보던 제현이 껄껄 웃었다.
“앞으로 매일 보게 될 도성 안 모습이니 차근차근히 구경하거라.”
제현의 집 대문 앞으로 집안 노비들과 제현의 부인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앞으로 함께 지낼 문하생이니, 부인께서도 잘 살펴주시오.”
“강현경이라 합니다.”
“어서 와요,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네.”
제현의 부인은 다정하게 현경을 맞이하였다. 노복들이 짐을 내리는 동안, 아란은 어머니와 함께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현경도 노복의 안내를 받으며 앞으로 자신이 지내게 될 방으로 향했다.
“도련님께서는 이쪽 방을 쓰시면 됩니다.”
옛 서원을 개조한 집이라는 노복의 말처럼 생각보다 내부가 넓은 편이었다. 대문에 들어서자 곧바로 맞은편에 사랑채가 있었다. 오른편으로는 수업을 하는 강연장과 그 뒤로 문하생들이 머무는 동재가 있었다. 안채와 별당은 중문 너머 더 안쪽에 있는 듯했다. 현경은 비어 있던 동재의 가장 안쪽 끝 방을 쓰게 되었다.
“어디서 또 예사 촌뜨기가 오셨나.”
방문 앞에 서있는 현경 쪽으로 웬 선비 셋이 다가왔다. 까만 피부에 서글서글하게 웃던 선비는 덩치가 석구보다 더 컸고, 그 뒤로 나란히 서있는 선비 둘은 키가 고만고만하였다.
“반갑소, 난 강릉 촌뜨기요.”
“나는 청주 촌뜨기.”
“동향이오.”
제현의 집에는 세 명의 문하생이 있었는데, 서른이 다 된 이도 있었고, 나머지 둘은 스물 대여섯 된 선비들이었다. 그들은 아직 열일곱밖에 안 된 어린 현경을 막내 아우마냥 무척 귀여워했고, 현경도 금방 넉살좋게 박형, 김형, 정형하며 잘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