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11)화 (11/63)

# 11화

현경은 처음 치고 말을 꽤 잘 탔다. 고삐를 잡아 주던 말꾼도 칭찬하니 현경이 우쭐하여 숨기지 않고 기뻐했다. 뭐든 배우면 곧잘 하는 현경이었다. 아란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읽던 책을 덮었다.

현경이 탄 말은 말꾼의 손길에 따라 어느새 아란이 탄 가마와 나란히 걷게 되었다. 아란은 가마 옆으로 난 창으로 현경을 보았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현경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주위 풍광을 보고 감탄하였다. 계속해서 말꾼에게도 말을 걸었다.

“저기, 도성까진 얼마나 걸립니까?”

“아마 여드레는 족히 걸리지 않을까요.”

“하이고, 멀기도 하다.”

“에이, 도련님 걸음으로 닷새면 충분합니다요.”

“그럼 내가 말 끌고 냉큼 가볼 테니 나랑 자리 바꿔봅시다.”

“아이고 도련님도 참, 농입니다 농.”

동글동글한 생김새며 천역덕스레 하는 행동도 보아 하니 분명 그 옛날 경이가 맞는 것 같은데, 갓을 쓰고 사내 행세를 하고 있으니 아란은 대체 무슨 사연인지 알 수 없었다. 이따금씩 아란을 향해 휘휘 손을 흔드는 행동에도 넉살 부리는 거 하나는 여전하구나 싶어, 아란은 제 눈엔 도무지 사내로 보이지 않는 그 동그란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 여인인데 싶다가도 뭐가 그리 재미난지 말고삐를 쥔 손까지 휘적이며 말꾼과 신나게 떠드는 현경을 보면서는 이내, 저러니 과연 누가 여자 아이인 줄을 알까 싶어 핏 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아란은 가마 안에 웅크려 있느라 저려오는 다리를 주물렀다. 양반댁 규수랍시고 얌전히 가마 안에 담겨 다리 한 번 펴지도 못하는 저보다야 말을 타고 저리 까부는 현경이 더 낫겠다 싶었다. 막연히 마음이 씁쓸해지는 탓에 아란의 표정은 금방 어두워졌다. 그러다 현경과 눈이 마주쳤고, 현경이 방긋 웃으며 건네 오는 눈인사에 아란은 그 눈을 피하며 가마 창을 닫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가마 안은 들어오는 빛 대신 그늘만이 남았다.

평지를 따라 걷는다 해도 갈 길이 멀다보니 몇 번은 산길을 넘어야 했다. 어쩌다 가파른 언덕이라도 만나면 말의 엉덩이도 밀고 올라야 하는 판이니, 그럴 때면 아란도 가마에서 내려 치마를 둘러 잡고 언덕을 올랐다. 말고삐를 당기며 씩씩하게 언덕을 오르던 현경은 제일 먼저 평지까지 다다라 일행을 기다렸다. 가마꾼을 제외하면 단출한 일행이라 금방 넘어올 줄 알았는데, 현경이 기다린 지 한참만에야 가마꾼들이 빈손으로 산을 내려온다. 현경을 뒤따라오던 말꾼 하나가 늦은 연유를 말해 주었다.

“가마꾼들이 발을 헛디뎌 가마를 놓쳤다 합니다.”

“예? 아가씨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다행히 빈 가마를 놓쳐,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마는 바위를 데굴데굴 굴러 계곡에 처박혔고, 다시 건져올 것도 없이 박살이 났으니 가마꾼들은 아연실색하여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렸다. 하지만 정작 아란은 가마 안에 놓아둔 다 읽어가던 서책 한 권이 아쉬울 뿐이었지, 가마꾼들을 탓하지 않았다.

당장 가마를 구할 곳도 없으니 아란은 그냥 걷기로 했다. 허나 그래 봤자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별당 안에 앉아 지내던 규수의 발걸음인지라 일행의 속도를 따르지 못했다. 게다가 남 보기에나 좋은 꽃신은 곱게 마당을 거닐기엔 좋아도 먼 길 떠나기엔 발을 옥죄기만 할 뿐이라, 아란은 결국 얼얼해진 발을 쥐고 몇 걸음 가지 못해 또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하릴없이 일행의 뒤를 따르던 가마꾼들만 아란을 업고서라도 가야 하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제가 걸을 테니 아가씨께서 이 말을 타고 가시지요.”

현경이 말을 양보하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아란이 머뭇거리며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아란을 모시는 여종이 대신 답하였다.

“저, 아가씨께선 말을 겁내 하시어 타지 못 하십니다.”

“그럼, 저와 함께 타시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좀…….”

외간 남녀가 함께 말에 오르는 것에 다들 곤란한 표정이었으나, 이를 지켜보던 제현은 의외로 선뜻 허락해 주었다.

“아란을 계속 걷게 할 수는 없으니 달리 방도가 없지 않느냐, 현경의 말대로 하거라.”

풍채가 좋은 제현이 아란과 함께 타기엔 말에게 무리가 될 것 같았고, 자꾸만 시간이 지체되니 아란도 버티고 서있을 수만은 없었다. 현경이 먼저 말 위에 올라 아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의 작은 고갯짓에도 아란이 기겁을 하며 말 가까이에도 가지 못하는 것을 어르고 달래어 겨우 아란이 말에 올랐다. 아란의 어깨가 바르르 떨리는 게 현경의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란이 불안해할수록 아란을 태운 말도 불안해했기에 현경은 아란을 진정시킬 방법을 고민했다.

“여길 잡으세요.”

“으아.”

“아니, 말의 갈기를 쥐지 마시고, 제 팔을…….”

아란이 실수로 말갈기를 움켜쥐자 말이 푸드덕 고개를 털었다. 현경은 허우적거리고 있는 아란의 팔 아래로 말고삐를 잡으며 아란을 당겨 안았다. 등 뒤로 닿아오는 온기 덕분인지 아란은 한층 진정이 되었고, 어디든 붙들려 있으니 두려움이 덜했다. 그렇게 서로 밀착한 상태로 한참을 가다가 조금씩 이 상황이 어색해지기 시작한 아란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잔뜩 굳어 있는 아란을 보며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현경이었다.

“좀 괜찮으십니까.”

“예.”

“도성 갈 때까지 말 한마디 못할 줄 알았는데, 가마꾼 덕분에 아가씨 대답을 다 듣네요.”

“그걸 지금 농이라고 치십니까.”

“예?”

“저들은 업을 잃었으니 다음 마을에서 돌아가야 할 텐데.”

현경은 아란의 일침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농담이랍시고 괜한 말을 꺼냈다 혼쭐이 나니 현경이 슬쩍 아란의 눈치를 보았다.

“송구합니다.”

“제가 들을 말이 아닙니다.”

아란도 말 위에 있다 보니 예민하여 애먼 현경에게 날카롭게 말이 나간 것을 알고 있었다. 조용해진 현경은 아란이 괜히 신경 쓰여 잠시 고민하다 말이 과했던 것을 사과하려던 참이었다.

“저어, 이제야 둘만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현경은 듣는 이가 있는지 살짝 주위를 살피다가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어갔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아란은 괜히 긴장이 되었다.

“그때 주셨던 책, 끈이 떨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아.”

“읽을 수 있게 된다면 도성에 오라고 하셨었지요.”

아란이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상심하기는커녕 딴생각을 하는 현경이었지만, 그래도 그 말에 잊고 있던 기억이 선명히 떠오르니 아란이 잠시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해마다 어느 계절이 돌아올 때면 누군지도 모를 손님이 찾아올 것 같다는 그 느낌은 아마 이 약속 때문이었는지도.

“기억납니다.”

“저는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

“참 신기하지요?”

“무엇이 말입니까.”

“지금, 그때 꿈꾸었던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어서요. 설렙니다, 너무.”

한껏 들뜬 목소리에 아란은 문득 현경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아마 그 옛날 도성 얘기를 해달라며 조르던 그때처럼 꿈 많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그리 살기로 한 겁니다. 감자골 경이가 강현경이라는 사내로 살아가기로 했으니, 이젠 강현경 이지요.”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겁니까.”

“안 될 것도 없지요.”

“…….”

“공부도 하고 세상 구경도 하려면, 이편이 더 수월하니까요.”

여전히 철이 덜 든 사람이구나, 아란은 그리 생각했다. 이어진 침묵 속에도 현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현경은 길가에 핀 꽃 한 송이도 그냥 지나칠 줄을 몰랐다.

“와, 아가씨 저 꽃 보이십니까? 저기 저 밑에요!”

“…….”

“처음 보는 꽃인데, 저 꽃은 이름이 뭘까요?”

“…….”

“아 너무 궁금한데, 이보시오, 혹시 저 꽃 이름을 압니까?”

현경은 저만치 앞서가던 말꾼에게까지 꽃 이름을 물었다. 아무도 지천에 널린 들꽃 이름을 궁금해 한 적 없으니, 다들 모른다 고개만 저었다.

“그렇담, 이름을 지어 줘야지.”

음. 현경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란은 어느새 현경이 이름을 지어주겠다던 그 꽃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름 없는 들꽃들은 눈 돌려 찾을 필요도 없이 그저 눈길이 닿는 곳 어디에나 있었다.

“우연히 만나 좋으니, 봉우화라, 어때요, 봉우화.”

“…….”

“아셨지요? 이제 저 꽃은 봉우화예요.”

현경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란은 그 웃음소리가 거슬려 눈을 감았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눈을 감아도 귀를 막지 않았으니 소리가 안 들릴 리는 없었고, 이름을 지어준들 사람들은 들꽃이라 할 테니 그저 들꽃일 뿐이었다. 그냥 그러기로 했다는 건 고작 그 정도라고, 아란은 생각했다.

현경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저어기 산등성이가 참으로 유려합니다. 보이십니까?”

“저 마을에는 들르지 않습니까?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니 잔치라도 하나 봅니다.”

“어, 방금 뭐가 움직였는데, 토끼였나.”

뭐가 그리 신기한 게 많은지 현경은 정신없이 즐거워 보였다. 아란은 그런 현경이 무척이나 성가셨다. 하필이면 가마는 왜 부서져서. 종국엔 그런 생각까지 들자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아란은 이렇게 오랜 시간 말을 타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긴장을 하다 보니 몸도 지치고, 떠드는 현경 때문에 골이 다 아프니 정신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힘들어 하는 아란을 눈치 챈 현경이 고삐를 쥐었던 손으로 아란을 살짝 당겨 안았다. 아란이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뭐하시는…….”

“많이 지쳐 보이십니다. 다음 마을까지 한참인 듯하니, 기대는 게 좋겠어요.”

“손 치우세요, 누가 봅니다.”

“뭐 어때요, 같은…….”

현경은 살짝 말끝을 흐리더니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양 흐흐 웃었다. 아란은 아무리 그래도 누가 볼까 싶어 현경의 팔을 끌어 내리려다가, 말이 들썩이며 걷는 통에 붙잡은 현경의 팔을 놓지 못했다. 지금 아란에게는 체면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그래, 진짜 사내도 아니고. 결국 아란은 버티는 것을 관두고 현경에게 기대었다. 확실히 전보다 어지러움이 덜했다. 일행의 선두에서 가는 아버지가 뒤를 돌아볼 일은 없을 것이고, 다른 이들도 모두 땅바닥만 보며 걷고 있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지요? 저 아니었음 말도 혼자 타셨을 텐데.”

“…….”

“우연히 만나 좋은 일이 이렇게 또 있네요.”

기분이 좀 나아진 아란이 눈을 감았다. 몸을 기대고 있으니 눈을 감아도 불안하지 않았다. 다만 현경이 중얼중얼 떠들 때마다 닿아 있는 몸으로까지 전해져 오니 귀를 막아도 별 수 없을 것 같았다. 현경은 또 다시 그 들꽃 얘기다.

“아님, 반드시 만날 인연일지도 모르지요. 허면 봉우화 대신 필우화라고 지을 걸 그랬나?”

팔 년이 지나 우연히 다시 만났다. 도성도 감자골도 아닌 또 다른 마을에서. 그것이 인연이든 우연이든 어찌됐건 연이 닿긴 한 것인데. 아란의 지난 팔 년은 그저 앉은 자리에서 어, 하다 흘러가 버린 세월이라면 현경에게는 조금 다르게 흐른 세월인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아란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또 누가 알고 있습니까.”

“아가씨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 이제 앞으로 어쩔 생각이십니까.”

“하고픈 일이 태산이라 걱정할 틈도 없습니다.”

현경이 또 능청스레 말했다. 아란은 어쩌다보니 현경의 일에 잘못 얽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능글맞고 맹랑한 꼬마였다. 이 사람은 대체 뭘 믿고 자신을 온전히 믿고 있는 걸까,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단지 꿈 때문에 운명을 바꾸는 무모한 이가 세상에 어디 있답니까.”

“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이도 있답니다.”

아란은 그 방실방실 웃는 모양으로 한 마디도 지지 않는 현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참 쉽기도 하지.”

아란은 피곤이 몰려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혼잣말인 줄을 알면서도 기어코 현경은 대답을 하고 만다.

“아가씨야 말로, 생각이 많으면 어려워지는 겁니다.”

“계속 떠드시면 머리가 울립니다.”

그제야 현경이 합, 입을 다물었다. 현경의 가슴팍이 더 넓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아란만큼이나 가느다란 품으로는 아란을 끌어안아야 고삐 잡기가 수월했다. 눈을 감고 기대어 있는 아란의 얼굴이 현경의 턱에 닿을 듯 가깝다. 한참을 떠들 땐 모르다가 조용히 말을 않고 그 숨소리만 들리니 현경은 서먹하여 괜히 턱을 치켜들어 먼 산등성이만 내다보았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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