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문월서원의 원장에게 있어 자신이 가르친 제자가 아닌 이웃 마을 유생의 손을 들어준 적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것은 꼭 팔을 안으로만 굽히는 심술이라기보다, 늘 누구 앞에서나 빠지지 않는 제자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스승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현경이 보인 낯설고도 미려한 문체에 눈이 번뜩인 원장은 진중하게 다물었던 입가에 미소를 담으며 크게 감탄하였다. 평을 내뱉기도 전에 술상부터 내오라 이르니, 승복하지 못하는 장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원장은 말없이 현경의 글을 내보였다. 하여 글을 돌려보고 난 서원 유생들 모두가 감히 그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래, 강현경이라 했는가.”
“예 그러합니다.”
현경은 허기가 졌지만 한 상 가득한 진미를 눈앞에 두고도 마음 편히 수저를 들지 못했다. 마루에 나가 동무들과 함께 허리끈 풀어 마음껏 먹으려 했건만 이렇게 따로 방 안에 불려와 있다. 게다가 눈앞엔 이웃마을 서원의 원장과 도성에서 왔다던 대학자가 앉아 있으니, 분명 꾸중을 듣는 것도 아닌데 현경은 괜히 긴장이 되어 무릎 위에 얹은 주먹만 꼭 쥔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지난날 감자골에 강연을 나간 적이 있었으나 자네를 본 기억이 없는데, 고향이 다른 곳인가.”
“배움이 늦어 당시엔 향교에 있지 않았습니다. 후에 대학자께서 오셨다는 소식만 들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현경이 적은 시문을 손에서 놓지 않고 들여다보는 제현이 유독 현경에게 관심을 보였다. 조금 전 글을 쓸 때도 원장의 옆에서 참관만 하겠다던 그는 어린 유생의 글에서 영특함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배움이 늦었다 하기엔 글에 깊이가 남다르니, 도랑에 있을 그릇이 아닌데.”
“부족한 글에 과분한 평이옵니다.”
“도성 본가에 훌륭한 문하생들이 여럿 있으니 함께 어울린다면 배움이 깊어질 듯싶은데 어떠한가.”
“예?”
“학자의 길 또한 훌륭하지만 군자로서 남달리 품은 뜻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네.”
현경은 그 말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입을 떡 벌린 채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려 겨우 입을 다물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맨발로라도 따르겠다 하겠지만, 아버지가 늘 어른의 호의는 세 번 정도 겸손하게 무르라 하셨기에 현경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게 미천한 실력이라, 아직 초시도 본 적이 없고 또…….”
“갓 쓰고 도포 두른 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부터 그게 급할 일인가.”
“조금 갑작스럽습니다.”
“자네가 그러하다면야 내 제안이 너무 성급했군 그래.”
아직 두 번밖에 무르지 않았는데 말을 거두려하는 제현의 태도에 현경의 마음이 초조하였다. 마음을 접은 제현이 손에 쥐고 있던 글을 내려놓자 옆에 앉은 원장이 아쉬운 표정으로 현경을 보았다.
“이런 기회를 다 마다하다니 보통 기개가 아니군 자네.”
이게 아닌데. 마다하고 말 게 아니라 현경에게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였다. 정신을 바짝 차린 현경이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제현을 향해 정중히 말을 올렸다. 이 순간만큼 그 누구보다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것이 아니라 실은 어려서부터 도성에 가는 것이 꿈이었는데, 막상 기회가 닥치니 두려운 마음이 들어 그리했습니다. 부디 그 제안 거두지 마시기를 청합니다.”
“내일 일찍 출발할 예정이라 다소 여유롭진 못하나, 한 번 찬찬히 생각해 보고 서원 옆에 있는 이 선생 댁을 찾아오게. 일행 모두 그곳에 머무르고 있으니.”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 묘시까지.”
제현과 원장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현경도 따라 일어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내일 아침 묘시. 도성. 실감이 나질 않아 머릿속이 웅웅 울리는 탓에 현경은 고개를 들 생각도 미처 하지 못했다. 그때 자신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불쑥 용래가 방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상기된 얼굴의 현경은 표정을 좀처럼 가눌 수 없었다. 한바탕 선풍이 일고 지난 것마냥 얼떨떨한 와중에도 방 안에서 가만히 있질 못하니, 술에 취해 먼저 뻗어 버린 동무들의 잠을 깨울까 싶어 석구가 현경을 붙잡아 굳이 앉혔다. 현경은 주저앉아서도 제 손으로 볼을 꼬집었다.
“용래야, 석구야, 이거 꿈 아니지.”
“너 정말 이대로 도성에 갈 생각이냐?”
현경이 어렸을 때부터 도성에 가고 싶어 했던 것은 마을 사람들 중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내일 당장 떠난다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채비도 없이 그 먼 도성에 몸만 가겠다구?”
“마을 가서 짐 꾸리기엔 지금 출발해도 묘시엔 못 돌아와.”
“그래도 아버지께 인사는 드리고 가는 게 좋지 않겠냐.”
“아버지도 이해해 주실 테니, 석구야, 부탁 좀 하자.”
“뭘?”
“내일 마을 돌아가면 나 대신 아버지께 잘 좀 말씀 드려. 도성에 당도하는 대로 꼭 편지한다구.”
현경은 이미 도성에 간다는 생각에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마음만은 벌써 도성에 가있는 현경을 이제와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이 방 안에 아무도 없었다.
“어르신, 유생 강현경이라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제현이 서원에서 돌아온 지 한 식경도 채 지나지 않았다. 방에 앉아 아란과 잠시 얘기를 나누던 제현이 놀란 얼굴로 일단 안으로 들이라 노복에게 일렀다. 아란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이 늦은 시각에 손이 계셨습니까.”
“아, 내일 함께 도성에 가기로 한 유생이다. 아마 마음이 급하여 서둘러 온 모양이구나.”
곧이어 문이 열리고 현경이 방 안에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문을 닫자마자 꾸벅 허리부터 숙여 인사를 올리고는 가까이 들어오지도 못하고 멀찍이 앉는 현경의 모습에 제현이 웃었다.
“방 안이 어두우니 가까이 와 앉게. 얼굴이 보이질 않으니.”
“늦은 시간에 실례인줄 아오나.”
“도성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니 그 마음 오죽하겠는가, 이해하네.”
멋쩍게 웃으며 현경이 일어서자, 제현 앞에 앉아 있던 아란도 일어나 한 발 물러나 있었다. 제현의 앞쪽으로 걸어 들어온 현경은 먼저 자리에 앉아야 할지 기다려야 할지 몰라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순간, 옆에 서 있는 여인이 낮에 책방에서 본 그 여인임을 알아본 현경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저는 이만 물러날…….”
“어?”
현경이 갑작스레 놀란 소리를 뱉자 조용히 물러나던 아란이 멈칫하였다. 제현도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가?”
현경은 설마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여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분명 아란이 맞았다. 신기하기도 하고 반가운 마음에 씨익 웃음이 나오려던 현경은 이내 황급히 그 표정을 거두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럼, 말씀들 나누세요.”
아란이 뒤돌아 방을 나서려 하자 현경이 얼른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어수룩한 모습을 보며 제현이 웃었지만, 정작 현경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나간 아란 때문에 금방 시무룩해진 얼굴이었다.
초롱불을 든 몸종을 따라 건넛방으로 걸음을 옮기던 아란은, 방금 전 어두운 방 안이었음에도 어쩐지 낯설지 않았던 인상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핏 환하게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스쳤지만, 낯선 사내와 마주보고 웃은 적이 있었을 리 만무하니 이내 착각이라 여겼다. 그러나 자꾸만 자신을 보던 그 표정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어서, 아란은 복잡한 표정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날 아침, 현경은 손님방에서 한숨도 자지 않고 동이 트길 기다리다 밤을 꼬박 새웠지만 피곤한 줄을 몰랐다. 문지방에 바짝 붙어 무슨 소리라도 날라치면 빼꼼히 문을 열어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묘시 즈음, 집안 노비들이 일어나 하나둘 길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부작거리는 그 발자국 소리에 현경이 일찌감치 나와 마당을 서성이는 바람에 괜한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현경의 머릿속엔 온통 도성뿐이라 알아채지 못했다.
준비가 얼추 되자, 안쪽에서 아란이 몸종과 함께 나왔다. 새벽 공기가 서늘한지 쓰개치마를 어깨에 걸친 아란은 마당에 먼저 나와 있는 현경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였다. 현경은 활짝 웃으며 아란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
환하게 웃는 얼굴. 아란은 대답하는 것도 잊고 밝은 곳에서 온전히 드러난 현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래전 대나무 숲에서 만났던……. 그저 닮은 사람인 걸까, 아란은 분명 아는 얼굴임에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저 경이입니다, 이제야 제대로 인사를 드리네요.”
“아, 저는 아란이라 합니다.”
“어라, 꼭 모르는 사람처럼 그러십니다, 말씀 편히 하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란이 일단은 모르는 척 말을 내뱉고도 이내 마음이 복잡하였다.
“혹 감자골에 경이를 기억 못하십니까?”
그래, 감자골 경이. 거지처럼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도 책을 또박또박 읽던 아이였다. 동그스름한 얼굴과 웃을 때 눈썹이 순하게 내려앉던,
“감자골 경이는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아는 경이는 분명…….”
“아, 다행입니다,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누구시기에, 어찌 스스로를 경이라 하십니까?”
“아 그게, 사정이 좀 있어서…….”
현경이 헤헤 웃으며 어물쩍 말을 넘기자 아란이 의심스런 눈으로 현경을 보았다. 난데없는 웬 사내가 자신을 경이라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얼굴로 경이라고 하니 아란의 눈엔 또 영락없는 경이기도 했다. 현경은 어리둥절해하는 아란의 반응에 그제야 아차 싶은 마음이었다. 강무를 제외하고 현경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데, 사내 차림을 하고 있으니 아란이 의심할 만했다. 현경은 그저 반가운 마음에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아는 체를 해버렸지만.
“다들 일찍 나와 있었구나.”
마지막으로 제현이 방에서 나왔다. 현경이 대충 아란에게 나중에 차차 이야기를 하잔 식으로 눈짓을 해보였고 아란은 여전히 황당한 표정이었다.
별다른 채비도 없이 드디어 도성으로 향하는 길에 오른 현경은 가슴이 설레어 난생 처음 말 위에 오르고도 겁내지 않았다. 아란도 가마에 오르고, 가장 앞머리에 선 제현이 말에 오르자 일행은 천천히 마을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