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9)화 (9/63)

#9화

감자골에서는 매년 관례를 올린 마을 도령들이 모여 이웃 마을로 행차를 나갔다. 어른이 된 기념으로 좀 더 크고 번화한 마을로 공식적인 외출을 나가는 것인데, 본래는 작은 마을에서 온 도령들이 점잖게 마시고 거닐며 그 마을의 건재함을 자랑하는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네 어른들 눈을 피해 마음껏 마시고 즐기는 일탈의 장이자, 중매쟁이의 눈에 들려는 만남의 장이기도 했다.

“현경아, 너는 옆 마을 가면 뭐부터 할 거냐.”

“글쎄, 마음 같아선 일단 마을 들어서자마자 입구서부터 대로까지 굴러다닐 거야.”

현경의 대답에 도령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 마음 알겠다만 옆 마을 유생들 보는 눈도 있으니, 부디 체통은 지켜라.”

용래가 킬킬대며 현경의 어깨를 다독였다. 용래는 현경보다 앞서 작년에 관례를 올렸기에 이번 신참내기 도령들의 길잡이를 맡게 되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현경이 초행길임에도 용래보다 앞서 쉼 없이 걷는 통에 일행은 예상보다 일찍 옆 마을에 도착하였다. 조용한 감자골과는 달리 마을 입구부터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이 현경의 눈에 들어왔다.

“와, 사람 진짜 많아.”

“현경이 저놈, 넋 빠진 것 좀 보게. 저러다 정말 구르겠는데.”

“용래야, 혹시 여기 기생집도 있냐.”

“석구 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싸움질이랑 기생질은 안 된다. 알았지.”

용래가 다른 도령들에게도 단단히 주의를 주었지만, 다들 마을 구경에 정신이 팔려 듣지 않는 눈치였다. 작년의 용래도 저들과 다를 바 없었겠지만, 그래도 선배랍시고 개중엔 가장 점잖은 게 용래였다.

“술은 이따 이 마을 유생들한테서 거하게 얻어 마실 테니, 유시까지 늦지 말고 서원 앞으로 모이는 걸로 하자.”

“야, 저것 좀 봐라.”

“이 녀석들아, 듣고 있냐?!”

현경은 어느새 장터 골목까지 들어와 시장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감자골에선 구경도 못할 진귀한 것들이 보일 때마다 현경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부터 들이밀었다. 그러니 골목 하나 지나는 데만 해도 하루가 모자랄 듯 발걸음이 굼떴다. 현경이 포목점 앞을 지나다가 고운 분홍빛깔의 옷감을 보고 또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와, 곱기도 해라.”

“고것은 여인네들 옷감이고, 두루마기 옷감은 이쪽이오.”

포목점 주인이 옥색 무명천을 내보이며 하는 말에 현경이 멋쩍게 웃으며 서둘러 포목점을 나왔다.

한참 시장을 구경하던 현경은 골목 한쪽에서 책을 잔뜩 쌓아놓은 채 책방을 꾸린 서적상이 보이자 얼른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산골 마을에선 구하기 어려워 어쩌다 책을 한 권 구하면 다 떨어질 때까지 돌려보곤 했는데 여러 서책들이 눈앞에 가득하니 현경은 신이 났다.

“어린 도령께선 뭘 찾으시오?”

“아, 그냥 좀 둘러보겠소.”

책방 주인인 서적상은 어린 도령이 기웃거리자 과거 준비를 하려거든 사서삼경을 봐야 한다며 실컷 아는 체를 해보였다. 그러나 현경은 이미 다 읽어본 책이기에 별 감흥 없이 들으며 책들을 뒤적이는데, 그때 마침 책방 안으로 장옷을 내리쓴 한 여인이 들어왔다.

아무리 양반집 규수라 해도 여인이 직접 서책을 사러오는 경우는 드문 터라 책방 앞을 지나는 사람들마다 한 번씩 신기한 눈길이 여인의 장옷 뒤로 따라붙었다.

현경도 책을 둘러보는 척하며 갓 끝 너머로 여인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뭔가를 찾는 듯 책장 사이를 지나는 여인은 장옷을 내려 어깨에 걸쳤다. 가는 어깨에 책을 쥔 뒷모습이 꼭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것 같아 현경은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슬그머니 걸음을 옮겨 여인이 들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곁눈질로 보아도 영 현경이 모르는 책이었다. 언뜻 봐도 어렵고 구하기 힘들어 보이는 책인데, 여인은 몇 자 읽더니 그대로 책방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서적상은 여인과 책을 몇 번 번갈아 보더니 여인의 손에 들린 책을 뺏어들고는 수염을 쓸며 거드름을 피웠다.

“저어, 이것은 아직 도성에도 올라가지 않은 진귀한 책인지라, 아녀자가 읽기엔 다소…….”

“서원 원장님의 소개로 왔습니다.”

“아이고, 이 선생님 댁에서 오셨습니까?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서적상은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이 마을 서원의 원장 이 선생은 일대에서도 이름 있는 책 수집가였다. 서적상이 쩔쩔매며 눈치를 보는 데도 여인은 별 개의치 않은지 덤덤히 책을 도로 받아들었다.

“값은 미리 치렀다 들었습니다.”

“예예, 실례가 많았습니다, 살펴가십쇼 아가씨.”

책방을 홀연히 나서는 여인을 흥미롭게 보던 현경이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여인을 쫓아나갔다. 북적대는 사람들 틈 사이로 그 자그마한 여인을 놓칠세라 현경은 여인의 뒤통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길모퉁이로 쏙 사라지기에 얼른 따라붙으려 하는 순간, 여인이 홱 뒤를 돈다. 현경은 깜짝 놀라 얼른 고개부터 숙였다.

다행히 현경을 보지 못한 듯 묘령의 여인은 다시 장옷을 추스르며 골목으로 사라졌다. 현경은 방금 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크게 숨을 쉬어 보고는 여인이 사라진 골목 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해마다 대나무 숲에서 바람이 일 때마다 떠올리던 그 얼굴을 현경이 쉽게 잊을 리 없었다. 골목으로 사라진 여인은 분명…….

현경이 눈앞에서 여인을 놓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무거운 걸음으로 마을 서원 쪽으로 향했다. 서원 앞에 있는 주막을 막 지나는데 서원 앞에 서있던 석구와 용래가 현경을 보고는 얼른 오라며 손짓한다. 서원 안에 들어서자 유생들의 장이 문 앞까지 나와 감자골에서 온 유생들을 맞이하였다.

“반갑소, 문월마을 서원 유생들의 장을 맡고 있는 장호요.”

“감자골 이용래요, 작년에 뵈었소만.”

“아, 그렇소? 지난번 겨룸이 너무 짧게 끝나 미처 못 뵌 듯하니, 올해는 살살 해드리지요.”

“이번엔 술상이나 거하게 준비해 두시오.”

감자골은 학자의 마을이다 보니 예로부터 이웃마을의 큰 향교나 서원의 유생들과 시문을 겨루는 전통이 있었다. 이곳 문월마을의 서원 또한 감자골에서 관례를 올린 유생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서원으로 찾아온 유생들이 승을 거두면 술상을 떡 벌어지게 차려 극진히 대접하였고, 패할 경우 탁주 한 사발에 조청엿 한 조각씩을 주고 돌려보냈다. 그러니 그 치욕이야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적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서원의 규모와 작은 마을 향교는 비할 바가 못 되니, 지난 몇 해 동안이나 승을 내어준 지 오래되던 참이었다.

“살벌하구만.”

“난 그저 술 얻어먹으러 온 것인 줄 알았더니만.”

석구를 비롯한 감자골 유생들이 사뭇 긴장된 분위기에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용래만이 작년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현경이 넌 모를 것이다, 장호 저자의 말과 글은 비수와 같지. 아직도 그때 치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뭐 이리 비장해, 진정해라 용래야.”

마루에 각 유생들이 마주 앉았다. 유생들 앞에는 심사를 맡기로 한 문월서원 원장의 자리가 비여 있었다. 원장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지체되자 서원 유생 장호가 나와 상황을 전하였다.

“오늘 도성에서 원장님의 친지이자 큰 어른께서 강연을 오셨기에, 두 분이 회포를 나누시느라 시간이 지체되는 듯합니다. 지금 사람을 보내 모셔오도록 하였으니, 먼 길 오신 감자골 유생들께선 부디 양해 바라오.”

낮에 한참 마을을 쏘다니다가 가만히 마루에 앉아 있으려니 현경은 슬슬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석구도 허기진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고, 용래는 여전히 장호라는 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탁주 한 사발과 조청엿이 앞에 놓인다면, 그것은 치욕보다 고통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경은 지고 싶지 않았다.

“헌데, 심사를 이곳 서원의 원장님께서 보신다니 공정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

“오직 글로만 판단하시는 분이니 공정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빈약한 시문은 누가 보아도 빈약할 것이니. 군자는 술수를 쓰지 않는 법이오.”

“그렇군요, 저는 그저 부엌 굴뚝에 연기가 보이지 않아 술상 준비는 어찌 되어가고 있나 궁금해서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석구가 나직이 웃었다. 현경의 농담에 감자골 유생들이 피식대며 웃는 동안, 마주 앉은 서원의 유생들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었다. 장호는 가느다란 눈으로 그런 현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유생께서 속이 허하신 듯하니 조청을 진하게 달여 놓으라 이르지요.”

“글쎄요, 오직 글로만 판단하신다니, 술상 기대하겠습니다.”

때마침, 정자관을 쓴 서원 원장이 웃으며 마루 위로 들어섰다.

깨끗이 비운 상을 무르고, 벌써 세 번째 상을 들이는 원지기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애초에 유생 장호가 별다른 말이 없기에 조청 엿이나 톡톡 쪼개고 있던 문월서원의 원지기들은 별안간 술상을 내오라는 말에 부랴부랴 잔칫상을 준비하느라 서원 유생들 전부가 이틀은 먹을 식재료를 털어내야 했다.

나무 냄새와 묵향만이 돌던 낡은 마루 위에선 고소한 기름 냄새며 술지게미 냄새가 진동을 했다. 제를 올리기 위해 담근 청주는 첫 상 무르기도 전에 동이 난 지 오래였고, 청주를 거르고 남은 탁주마저도 바닥을 드러낼 판이었다. 상을 내려놓는 족족 사라지는 술과 음식들을 보며 서원 유생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석구는 입가심으로 나온 조청 엿을 오물거리며 잔뜩 부른 배를 두드리다가, 통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현경이 걱정되어 닫힌 방문을 자꾸만 돌아보았다.

“현경이 녀석 제대로 먹고는 있나, 나라면 체할 것 같아.”

“그래도 저리 따로 앉아 각상 받는 걸 보니 부럽지 않냐, 헌데 뭔 얘기를 저리도 오래할까?”

용래는 슬그머니 문 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여보았다. 그러는 찰나에 문이 열리고 서원 원장과 그의 사촌 아우인 이제현이 마루로 나왔다. 앉아 있던 서원 유생들이 벌떡 일어났고, 늘어져 있던 감자골 유생들도 일어나 예를 갖추어 섰다. 원장의 옆에 선 제현은 감자골 유생들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극진히 대접하라 일렀는데, 술과 음식이 모자라진 않던가.”

“아닙니다, 후한 대접을 받아 감사할 뿐입니다.”

“다행이군, 그럼 편히 쉬도록 하게.”

서원 원장이 껄껄 웃으며 마루를 지나 대문 밖까지 제현의 배웅을 나갔다. 큰 어른들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마루 위에 서있던 유생들은 찌뿌둥한 몸을 움직이며 뒤늦게 밀려오는 포만감과 노곤함에 하품을 쩍 한다.

내일 오전에는 마을로 돌아가야 하기에 이만 눈이라도 붙여야 할 시간이었다. 감자골 유생들이 머물 숙소로 안내할 원지기가 초롱불을 들고서 마루 아래에 나와 있었다.

“현경아, 안 나오고 게서 뭐하냐.”

용래가 열린 방문으로 다가서 고개를 들이미니, 현경이 고개만 푹 숙인 채 미동도 없이 서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현경은 약간 얼이 빠진 듯 멍한 표정으로 용래를 내다보았다.

“왜 그래? 취한 것이냐?”

“용래야.”

“그래, 무슨 일이야.”

“나 도성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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