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환한 그 빛에 강무는 잠에서 깼다. 언제 동이 텄는지 햇볕이 마당을 지나 강무의 얼굴까지 비추고 있었다. 강무가 꿈의 여운처럼 어렴풋한 기억 속에 한 여인의 슬픈 옆얼굴을 떠올렸다. 아직은 서늘한 아침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고는 경이의 방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때마침 방문이 열리며 경이가 나왔다.
“아버지, 아침 상 내올게.”
아무렇지 않은 듯 씩씩하게 아궁이로 폴짝 내려가는 경이를 강무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평소의 경이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도와주랴.”
“아니, 오늘은 내가 할래.”
경이는 가마솥에 물을 붙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따닥 따닥 불티가 튀는 소리와 아침부터 우는 새소리가 섞였다. 강무는 잠시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가도 아궁이를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긴 경이를 걱정스런 눈으로 내다보았다.
경이가 들고 온 소반을 강무가 받아들고는 둘은 마루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잠은 좀 잤느냐.”
강무가 먼저 물었다. 경이는 그저 말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는 꾸역꾸역 밥을 넘겼다. 밥그릇을 거의 비울 때쯤에서야 경이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있잖아 내가 생각해봤는데.”
“그래.”
“아버지가 그날 나를 도성 밖으로 데리고 나온 순간부터 나는 아버지 자식이고 감자골 경이야."
입 안 가득 밥알을 우물거리는 경이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수저질을 기어코 멈춘 쪽은 강무였다.
“밥 식어요.”
“…….”
지난밤 경이는 왜 아버지는 그토록 동네 사람들이 무서워할 만큼 과묵하고 비밀이 많은 사람이어야 했는지,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별것 아닌 일에도 왜 그리 엄하게 혼을 냈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왜 그토록 자신을 이 깊은 산골에 꽁꽁 숨겨 키웠는지도.
자신은 애초부터 이 세상에 없어야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렇게 살아 있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이 감자골 사는 경이라 부르고 동무도 많이 생겼다. 감자도 맛있게 찔 줄도 알고, 산 타고 담장 넘는 것엔 누구보다 자신이 있다. 누가 뭐래도 십 수 년간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도 있다. 단 한 번도 의심해 마지않은 가장 든든한 자신의 아버지가.
“그래도 아버지랑 나는 같은 핏줄인거네. 완전히 남은 아닌 거잖아.”
경이가 활짝 웃었다. 강무는 마음이 울컥하여 목울대가 아려왔다. 과연 이름 모를 그 여인의 말처럼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아버지가 내 아버지인건 변함없는 걸.”
“…….”
경이는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 난 그냥 많은 것을 보고 싶어. 이 세상이 너무나 궁금해. 그냥 그런 것뿐인데.”
지난밤 경이가 생각했던 건 그런 것들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다른 세상의 일이 나의 이야기임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멀고도 낯선 느낌. 그것은 분노라던가 복수심 같은 것과는 달랐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 끝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그때 물에 떠내려갔어야 할 목숨인데 이렇게 살아 있으니, 그래서 내가 이리 겁이 없나 봐요.”
“…….”
“그러니 쭈욱 겁 없이 한 번 살아 볼라고, 아버지.”
“…….”
“응? 그렇게 살지 뭐, 내가 누구든.”
경이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의 끝이 씁쓸했던 것은 아마 얼굴을 떠올릴 수조차 없는 그 불쌍하고 가여운 여인을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
“어머니는 어떻게 생겼어? 이름은?”
“…….”
“그렇구나. 그럼 나, 어머니랑은 닮았어?”
“그래, 그 얼굴이 있다.”
“많이 괴로웠겠소, 아버지.”
처음엔 무조건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세상 밖에 드러내선 안 된다고, 드러나면 아이가 위험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경이는 강무가 꽁꽁 끌어안고 살기엔 너무나 세상을 궁금해 하는 아이였다. 단지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 호기심 강하고 총명한 아이는 어차피 갇힌 삶을 살아갈 터였다. 불행히도.
강무는 뿌연 달무리 지던 그날 밤이 생각났다. 그때 쉼 없이 움직이던 아이의 몸짓은 자신이 짊어진 운명을 온몸으로 떨쳐내는 듯한 몸부림 같았다. 어미를 묻고 온 낯선 사내의 흙 묻은 그 까만 손 위에서 꼼지락대던 작은 손을, 그 어두운 방 안에서도 뿌연 달빛 아래에서도 빛났던 까만 눈망울을 보면서, 강무는 이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이든 해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켜 주마 아가야, 그러니 넌 슬퍼하지 말거라. 불안해하지도 말거라.’
십육 년 전의 강무는 아이에게 그렇게 약속했었다.
“빈 재계, 가 유건.”
목청 좋은 주례자의 말에 대자리에 꿇어앉은 경이의 머리 위로 촘촘한 유건이 씌워졌다. 옆에 나란히 앉은 석구도 평소와 달리 의젓한 자세로 곧게 앉아 있었다. 이른 아침, 마을 향교 마당에는 경이를 포함한 대여섯의 사내아이들이 늘였던 머리를 틀어 올려 성인이 되는 예를 올리고 있었다.
“관자 복위, 빈 재계 가 관.”
하얀 도포로 갈아입고 나온 도령들에게 향교 스승들이 탕건과 갓을 씌워주었다. 세 번의 옷을 갈아입고, 마지막 하얀 도포와 갓을 씀으로써 어른의 의관을 갖추고 성인이 되었음을 보이는 것이었다.
관례를 올리기 전부터 점잖게 있으라 강무가 그리 일렀음에도, 예를 올리는 내내 경이는 나란히 선 동무들과 자꾸만 입꼬리를 씰룩이며 장난기를 감추지 못했다. 늠름하게 서 있다가도 이따금씩 슬쩍 뒤를 돌아 아비를 찾는 모습에, 강무는 엄한 표정을 해보이려다가도 생각과는 다르게 체통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해 곤란하였다.
“행 초, 자 관자 축지.”
관례의 마지막 순서에 이르러, 마을의 큰 어른이 성인이 된 사내에게 술을 따라주고 어릴 때 쓰던 아명 대신 새로운 이름과 함께 앞날을 축복해 주는 차례였다. 경이 앞에 앉아 있던 스승은 말없이 웃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경이가 의아하여 힐끔 고개를 드니 그 자리에 강무가 와 대신 앉는다.
“아버지?”
“아비가 생각해 둔 좋은 이름이 있어 따로 청을 드렸다.”
“귀띔이라도 해주시지, 아버지두.”
“웃을 때 이는 보이지 말고, 이제 너도 어른이니.”
헤헤 웃던 경이가 얼른 입술을 앙다물어 웃음을 참았다. 그 모습을 인자한 미소로 내려다보던 강무가 경이가 든 술잔에 술을 따랐다. 평소 술을 잘 하지 않는 강무가 처음으로 경이에게 주는 잔이었다.
“술이란 분수에 맞게 마시는 것이다. 그윽한 향을 잊지 말되, 맑은 정신으로 그 향기로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공손히 술잔을 받아든 경이가 술을 한입 머금고 잔을 내려놓자, 강무가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오늘 아침, 강무는 동이 틀 때를 기다려 몸가짐을 정갈히 하고 글씨를 써 내렸다. 경이는 조심스럽게 강무가 건네는 글을 받아들었다.
“강현경姜玹耿. 옥돌 현에 빛날 경 자를 쓴다.”
“…….”
경이가 강무를 바라보았다. 강무는 길게 말하지 않고 잔잔한 눈으로 경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얀 새가 옥돌을 감싸 품으니 빛이 나더이다.’
현경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기셨다던 말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주신 이름. 경이는 한동안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을 마주했다.
“현경아.”
“예 아버지.”
“날이 참으로 쾌청하지 않느냐.”
“예 더없이 좋은 날입니다.”
세상에 없던 아이가 어느새 자라 이름 석 자를 얻고 어른이 되었다. 이날, 현경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다녀올게요, 아버지.”
“아비가 했던 말 잊지 않았겠지.”
“태어나 가장 맑은 정신으로 다녀올 테니, 심려 마옵소서.”
“발이 땅바닥에 도통 붙어 있질 않는구나, 그리 좋으냐.”
강무가 현경의 흐트러진 갓을 정리해 주었지만, 들뜬 마음을 숨길 줄 모르는 현경이 종종 거리는 탓에 갓은 또 금방 기울어졌다. 강무는 들뜬 현경을 보며 웃음이 났지만 앞으로 현경이 견디고 마주해야 할 현실을 떠올리며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현경아, 가자!”
마을 입구에 모여 있던 도령들이 현경을 불렀다. 지체 없이 동무들에게로 뛰어가는 현경을 보며 강무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으나, 그 마음 알기라도 한 듯 금방 뒤돌아 손을 흔드는 현경을 보며 괜한 마음이라 여겼다. 강무가 뛰지 말라고 한 소리를 막 하려는 참에, 그보다 먼저 현경의 신난 목소리가 골목을 쩌렁쩌렁 울렸다.
“마을 밖은 재밌는 일이 훨씬 더 많을 거야 아버지!”
‘궁 밖엔 참 재미난 게 많소, 형님.’
강무는 문득, 개구진 표정으로 활짝 웃는 현경의 얼굴에서 그 옛날의 왕세자 얼굴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