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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있음에 (6)화 (6/63)

#6화

지금과는 달리 혼란의 시기였다. 백 년을 넘게 이어오던 이웃 왕조가 무너지면서 그 틈을 타 이 나라에도 지방 세력들 간의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컸던 김씨, 강씨, 이씨 세 가문이 특히 팽팽하게 맞서며 혼란의 중심에 있었다.

문관 출신이 많았던 두 집안에 비해 비교적 무장 출신의 군사력이 강했던 강씨 집안이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했고 결국에는 강씨 왕조가 세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두 집안이었기에 왕조가 세워진 이후 주요 관직은 김씨와 이씨에게 돌아갔고, 왕실과의 혼인정책을 통해 차츰 세 집안의 세력 균형을 맞춰갔다. 그러나 왕실의 권한은 유일한 것이기에 안정된 세습이 이어질 때까지 세 집안 간의 긴장은 여전히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강씨 왕조를 세운 태조는 슬하에 외아들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외아들에게 왕위가 승계되기까지도 수많은 강씨 왕족들 내부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치러지기도 했다. 그 틈에 자칫 왕권이 불안하게 될 위기가 몇 차례 있었으나 왕위를 이어받은 외아들은 다행히 정국을 주도하며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수년이 지나도록 왕비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했고, 다음에 들인 후궁에게서 딸을 얻었으나 병약하여 일찍 보내야 했다. 마지막으로 들인 후궁에게서 드디어 아들을 보았는데, 그가 바로 강무였다.

하지만 강무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에게 태기가 있었고 이윽고 건강한 원자가 태어났다. 왕은 적장자의 탄생에 크게 기뻐했고, 아이가 걸음마를 채 떼기도 전에 세자로 책봉하였다. 강무는 노골적으로 왕실에서 소외당하기 시작했다. 강무는 단 한 번도 왕에게 문안인사를 드려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와 함께 궁 안에서는 숨 쉬는 소리조차 죽여 가며 살아야 했다. 총애를 받았던 강무의 어머니는 마음이 돌아선 왕의 따가운 눈총에 병을 얻어 급기야 강무와 함께 쫓기듯 궁 밖으로 나와 살게 되었다. 적장자가 있는 이상 그 이외의 아들은 걸림돌이 될 뿐이기에 강무는 왕의 사촌 호적으로 옮겨졌다. 정통성이 중요했던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다.

본래 타고난 성정 자체가 왕권을 차지하려는 야망과 거리가 멀었다. 유순하고 겁이 많아 늘 어머니 품을 떠나지 않던 강무였다.

늘 귀한 핏줄임에도 괄시받는 강무를 애처로워하던 강무의 어머니는 어느 날엔가 새벽녘 이슬이 맺히기도 전에 눈을 감았다. 궁에서 보내오는 조의는 마치 경고와 같았다. 강무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하는 그 눈빛들은 강무 스스로가 눈에 띄지 않게 얌전히 살겠다고 한들 순순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떤 날은 김씨 집안의 누군가 찾아와 지금의 왕세자만 없으면 왕위를 이을 사람이 강무 말고 또 누가 있겠냐며 농담이라 건넨 말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적도 있었다. 다른 집안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원한다면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말은 강무에게는 결코 달콤한 유혹이 아니었다. 강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 위협을 견디기 위해 더욱 무예에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궁에서 왕세자가 자신을 찾는다는 은밀한 기별을 받았다. 궁에 들어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 불안도 더 이상 잃을 것도 이룰 것도 없으리라는 체념으로 강무는 마음을 비우고 담담히 왕세자와 마주했다.

“강무 형님 되십니까.”

왕세자가 처음으로 건넸던 말은 강무의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무예가 출중하시다 들었습니다. 하나뿐인 이 아우를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

강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강무를 바라보는 왕세자는 웃고 있었다.

“날 때부터 검보다는 책을 쥐는 시간이 길다 보니 이 아우의 기체 미령함을 경계하는 이들이 많아 늘 궁금했습니다.”

“…….”

“아바마마께서 늘 형 만한 아우가 없음을 탄식하시기에 그 연유를 알지 못했는데, 과연 이렇게 직접 뵙고 나니 대장부의 풍채에 제가 감히 미치지 못 합니다.”

“황공합니다, 세자저하.”

“형님.”

“부디 말씀을 낮추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형제간의 우애와 존경도 궁의 담벼락을 넘어야 합니까, 이 아우는 서운합니다.”

왕세자는 다시 한 번 호탕히 웃고는 내관을 불러 강무에게 칼 한 자루를 건넸다. 검게 옻칠된 칼집에는 왕실을 상징하는 용무늬와 강무라는 자신의 이름이 은으로 새겨져 있었다.

“아바마마를 호위하는 운검들이 드는 칼을 조금 변형시킨 것입니다."

왕세자는 말을 이었다.

“이 아우를 위해 그림자조차도 모르는 어둠이 되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궁에서 나온 후로 줄곧 어둠으로 살았다.

왕세자의 탄생은 곧 강무에게 있어서는 사형선고와 같았기에, 원망한 적도 있었다.

궁 밖에서 아무리 몸을 숨기며 조용히 살고자 해도 언제 누군가에게서 받을 잔혹한 습격도, 위험한 유혹도 두려웠다. 그런 자신을 오히려 곁에 두려는 왕세자의 진심을 강무는 선뜻 헤아릴 수 없었다.

“평생을 어둠으로 살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숨을 끊은들 아까울 것 없는 생이니. 감히 연유를 여쭙겠습니다.”

“그런 말 마십시오, 형님. 이 하늘 아래 제가 형님이라 부를 분은 또 없으니.”

강무는 그때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했다.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사는 삶을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되니까. 그 어떤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지켜달라는 왕세자의 말이 도리어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아우의 구원처럼 들리기도 했다. 강무도 이 하늘 아래 피를 나눈 아우가 유일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강무는 실질적으로 왕세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키는 호위무사가 되었다. 그리고 후에 다시 궁으로 돌아온 이 순간을, 강무는 평생 동안 후회하며 살았다.

경우가 많진 않았지만 왕세자는 보통 이름으로 강무를 불렀고, 강무와 단 둘이 있을 때만큼은 줄곧 형님이라 불렀다. 강무는 그저 동궁전의 호위무사로 있는, 왕세자의 먼 친척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강무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왕세자의 곁을 지켰고, 동궁전 밖으로 나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강무가 강태조의 또 다른 친손자라는 걸 아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왕세자는 매우 호기심이 많고 총명했다. 세자의 시강을 담당했던 유학자 이제현은 당시 세자보다 열댓 살 남짓 위였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엄하여 세자에게도 거침없이 직언을 했다. 왕세자도 그런 호랑이 같은 스승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궁금한 것을 참지 못했다.

“꽃을 사랑하여 그 가지를 꺾어 곁에 두고 늘 바라보고 아낀다면, 그것은 꽃을 위한 것인가, 자신을 위한 것인가. 스승님의 생각은 어떠하오?”

“스승님이 보기에 능금나무에 꽃이 피었는데 그 열매는 담장 안으로 떨어지고 꽃잎은 담장 밖으로 날아갔다면, 손에 들린 열매보다 날아가 버린 꽃잎을 가여워할 이가 이 궁 안에 몇이나 되겠소?”

특히 실없는 농담을 즐겨하여 시강 시간을 넘기거나 진도를 놓치기 일쑤였는데, 그때마다 제현은 그 호랑이 같은 눈을 부릅뜨고서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 왕세자는 금방 흥미를 잃고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리곤 했다.

왕세자는 다른 시강원 학자들이 있을 때와 달리 이제현이 시강하러 올 때에는 모두를 물리고 내관과 강무만을 들여 함께 강연을 들었다. 이제현은 강무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요인 중 하나였으나 특별히 강무를 의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왕세자에게는 없는 진중하고도 과묵한 강무의 성정을 높게 평가하여 왕세자의 철없음을 한탄하기도 했다.

이처럼 왕세자는 강무와 달리 기질이 호탕하고 늘 새로운 것을 좋아하였으니, 다만 지루한 것을 싫어하여 궁 안의 생활을 답답해해 잠행을 자주 즐기는 것이 문제였다. 잦은 잠행이 형님 보기에도 떳떳하진 않은지 왕세자는 일부러 강무를 대동하지 않고 다른 호위무사를 데리고 나갔다. 강무가 이를 우려하여 늘 간청을 올려도 왕세자는 늘 능청스레 웃는 얼굴로 매번 돌아서서 흘려들었기에 소용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까. 잦은 잠행 도중에 결국 귀한 옥체에 생채기를 달고 돌아왔던 날, 궁 안엔 거의 보이지도 않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는 애먼 핑계로 의원을 불러 치료를 받고 난 후에, 왕세자가 지나가는 말로 얼핏 중얼거렸던 적이 있었다.

“형님, 궁 안의 꽃보다 아리따운 여인이 있소.”

그리곤 천으로 가려진 상처를 어루만지며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데, 그때의 강무는 왕세자의 그 표정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궁 안에 괴상한 소문이 돌더군.”

시강을 마치고 세자의 방을 나서던 이제현이 슬쩍 강무를 불러 세웠다. 강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세자저하가 요새도 잠행을 자주 나가시는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강무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답했다. 이제현은 전보다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궁궐 밖 민가에 세자저하의 아이를 잉태한 이가 있다는 말이 있던데.”

강무의 눈이 커졌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세자 책봉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흠 잡을 기회만 엿보는 세력들이 세자의 행실을 문제 삼아 끌어내릴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때였다. 더구나 왕세자는 이미 세자빈을 맞이하여 왕손까지 둔 상태였으니 결코 사사로운 사건이 아니었다.

어쩐지 얼마 전 궁녀들 사이에서는 다음 왕은 이씨가 될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궁 안에 돈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이제현은 비록 이씨 집안사람이지만 집안의 이익이 되는 권력 다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녹을 받는 현재 왕조를 보필하는 것 이외에는 오직 학문에만 뜻이 있고 그 강직한 학자로서의 면모를 높이 사 왕이 세자를 맡긴 인물인 것이다. 그런 이제현이 강무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은 그저 소문에 불과한 예삿일이 아니라는 뜻과도 같았다.

“강무 자네가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을 아끼던 이제현은 강무를 지나치며 혼잣말처럼 무언가를 전하고는 동궁전 밖을 나섰다. 강무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선택의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얼마 후 누군가 궁벽 너머로 투서한 것을 왕세자가 알게 된 모양이었다. 도성 외곽에 혼자 사는 처녀가 계집아이를 낳았다는데 높으신 강씨 어른의 아이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아직 왕의 귀에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소수의 조정 신료들 사이에서는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냐며 반발이 거셌다. 익명의 투서 따위를 어찌 믿을 수 있냐는 왕실 측 신료들의 반박으로 궁 안이 시끄러워지려 하자, 강무는 더는 일을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날 밤, 강무는 침전으로 향하는 왕세자를 모시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

“편히 주무시옵소서.”

강무가 어디를 가는지 왕세자는 묻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침전에 들어섰고, 방문은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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