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경이는 매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이 즈음이면 향교 뒤쪽의 대나무 숲을 찾았다. 올해도 울창하게 들어선 대나무 숲 사이로 흐르는 바람은 여전히 아란의 고운 목소리를 어렴풋이 품고 있는 듯 했다. 당시 아란이 줬던 책은 벌써 여러 번 끈을 새로 묶어야 할 정도로 많이 읽었음에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다. 아란을 다시 만나면 이젠 눈 감고도 외울 수 있다 자랑할 참이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거든 찾아가겠다던 경이는 아직 마을 밖을 벗어나지 못했고, 노래가 부르고 싶을 때 다시 온다던 아란도 그후로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어느덧 일곱 번째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경이는 또래 중에서 키가 세 번째로 컸다.
석구는 워낙 거구라 경이와 한 뼘이 넘게 차이가 났고, 그 다음으로 큰 용래와는 손가락 세 마디 정도 차이가 났다. 향교에서 매주 보는 시험에서 통을 받은 횟수로만 따지면 또래 중에서 단연 으뜸일 자신이 있는데,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해도 어쩐지 경이의 답답함은 사라지질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푸는 것은 여인이 되어가는 경이의 몸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마음에 품은 꿈도 함께 부풀어 오르니, 향교만 다닐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던 마음도 이젠 그 자리가 좁다고 아우성이었다. 살이 오르는 가슴이야 붕대로 감아 숨길 수 있어도 마음이란 건 좀처럼 옥죄어지지 않으니 문제였다.
남들에겐 부스럼을 심하게 앓아 명치에 큰 창반이 있다는 핑계로 항시 붕대로 몸을 가리고 있지만, 그보다 경이를 우울하게 하는 건 어쩌면 평생 이 산골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이 산골 마을을 떠나려면 장사꾼이 되거나, 과거를 보러가거나, 아니면 머리 깎고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방법뿐이었으니.
그중에 가장 근사한 방법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도성으로 과거길에 오르는 것인데, 그게 또 경이의 눈에 만만치 않아 보여 영 엄두가 나질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벌써 몇 번이나 과거길에 올랐던 다른 선비들이 전국을 유람하며 다닌 이야기들을 옆에서 듣는 것만이 경이의 소소한 낙이었다.
“김형, 도성에서 파는 술은 쓰지도 않고 달다던데 정말이오?”
“요 어린놈이 어디 술 맛을 안다고 그걸 묻느냐.”
“나도 이제 열여섯인데?”
“허이구 그러냐, 하하하 그럼 어디 한 잔 받거라 요놈!”
선비들이 건네는 잔마다 홀짝홀짝 잘도 받아 마시는 경이가 입맛을 다신다. 씁쓸하면서도 달큰한 것이 처음 느끼는 오묘한 맛이라 경이는 잔 밑바닥에 남은 한 방울까지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나저나 경이가 벌써 열여섯이면 어서 머리 틀고 장가들어야 할 텐데.”
“그러게, 경이 이 녀석 곱살하게 생겨 가지구선, 어디 눈에 들어오는 처자라도 있느냐?”
“요놈 인물이며, 똘똘한 것이 양반가에서만 태어났어도 그 뭣이냐, 판서감이다. 판서! 아깝다 아까워!”
“아무렴, 아마 경이 글 솜씨가 최형보다 한참 위일 테지.”
얼큰히 취한 선비들은 저들끼리 농을 주고받으며 킬킬대며 웃었다.
“헌데 강무 아저씨 아들이면 경이도 양반 아니던가?”
“가만 보니 그러네. 경이 너, 양반 맞지?”
그러고 보니 경이는 한 번도 자신의 신분에 대해 궁금해 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굳이 꺼내지 않는 말이기도 했고. 워낙 가난한 양반들도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상민이든 양반이든 형편이 고만고만하여 크게 반상의 구분이 있지도 않은 마을 분위기 탓도 있었다.
“맞겠지 뭐, 상민이었음 경이 벌써 군역 간 지 오래다.”
“그보다 상민이라기엔 아무래도 강무 아저씨가 예사 사내와는 좀 다르지.”
“암, 결이 다른 분이지. 풍채하며 검은 또 얼마나 예리한지 몰라.”
“경이 너도 아버지처럼 상투도 틀고, 어? 신체 단련도 좀 하고 그래야지. 사내가 그리 호리호리하면 못 쓴다.”
경이 또래의 양반가 사내아이들은 대부분 관례를 올리고 상투를 틀어 제법 사내 티를 내고 다녔으나, 올해 열여섯인 경이는 아직 길게 늘인 머리로 어린 티를 벗지 못했다. 그런 경이를 동네 선비들이 간혹 골리곤 했는데,
“상투도 안 튼 애송이는 과거는커녕 도성문도 못 지난다는 말이 있어.”
“정말이에요?”
“그러엄.”
선비들이 싱글싱글 웃으며 하는 말들이 대부분 농담인 줄 알면서도 경이는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향교를 다니는 것과 과거를 본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과연 허락을 해 줄지도 모르는 일인데 괜히 마음만 급해진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경이는 슬금슬금 강무의 눈치만 보며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느냐? 왜 그리 서있어.”
“저기 아버지 있잖아요.”
하긴 마을 안에 지금처럼 처박혀 있을 거면 애초에 공부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며, 과거를 보러 도성에 가는 길에 겸사겸사 전국 유람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라면 이해해 주실 거야, 경이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경이를 바라보던 강무는 평소와 다른 경이의 진지한 표정에 읽던 책을 덮었다.
“아버지, 노비만 아니면 누구나 과거 볼 수 있대요.”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
“현이 아저씨랑 용이 형님이 나 정도면 판서감이라던데, 해서 말인데요 아버지.”
“경아, 알겠지만 여자아이는 과거 시험을 볼 수 없어.”
“에이, 아버지도 참, 사람들 모두 다 내가 사내인 줄 알아요.”
옷자락을 쥔 채 발을 종종거리는 경이의 얼굴은 기대에 차 있었다. 가능성이 보이자 경이는 아버지의 말은 전혀 문제될 것 없다는 표정으로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강무의 표정이 어두웠다. 강무는 무엇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과거를 보는 건 안 된다.”
“왜요?”
“…….”
“아버지, 우리 혹시 노비예요?”
“그건 아니다.”
“그럼 대체 왜요? 다른 집 애들은 입신양명하라고 부모가 떠민다는데.”
“…….”
“이제 여자아이라서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나 여지껏 아버지 말 잘 들었잖아요.”
예상은 했지만 무작정 안 된다 하는 건 더 이상 경이에게 통하지 않았다. 강무는 전부터 이런 날이 올 것이라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경이가 벌써 열여섯이 되었으니 조심스럽게 이제 말해줄 때가 된 것이 아닐까, 하고 강무는 생각했다.
“십육 년이라.”
“그래 십육 년이에요, 아버지가 이 산골에 날 가둔지.”
“경아.”
강무가 가만히 마당을 내다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비가 너에게 해줄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