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책은 됐고, 꽃과 나비에 관한 시나 하나 지어 보거라.”
“세자저하, 곧 시강관이 들것입니다. 오늘 이 부분까지 읽으셔야 합니다.”
“그럼 내가 지어 볼 테니 네가 읽어 보거라.”
“…….”
“여인이라면 글보다는 이런 걸 잘 알아야지.”
세자는 펴지도 않은 책을 옆으로 밀어내고 종이에 시를 써내려갔다. 한참 그렇게 붓을 놀리다 말고도 이따금씩 아란을 보며 뜻 모를 눈짓을 보내기도 했다. 아란의 시선은 세자와 세자가 쓰는 글씨를 벗어나 서책의 끝 모서리에만 머무를 뿐이었다.
“소리 내 읽어 보거라.”
“세자저하.”
“어허, 더 나긋한 목소리를 내지 못할까.”
“세자저하, 책을 읽으셔야지요.”
아란이 조심히 숨을 고르고 정중히 청했다. 세자는 코웃음을 치다가 아란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은지, 이내 흥미를 잃고 종이를 구기듯 쥐었다.
“나와 글벗을 하라는 말이 어디 정말 글만 읽으라는 말인 줄 아느냐.”
“…….”
“말이 좋아 글벗이지, 세자의 배동으로 너 같은 계집이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하의 마음에 차지 않으신다면 소인을 무르시면 됩니다.”
“마음에 차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그대의 소임 아닌가?”
세자는 매번 일부러 음란한 시를 지어 아란을 희롱했다. 고고한 아란을 찌르고 흔들며, 그 난처해하는 기색을 즐기기도 했다. 여느 때처럼 아란이 속으로 화를 가라앉히며 참고 있는데, 때마침 시강관이 기다린다는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자는 던지듯 붓을 내려놓고 내관을 불렀다.
궁 밖을 나서니 그제야 아란은 숨이 트이는 느낌이 든다. 아란은 오늘도 잘 견뎌준 저 자신을 다독이며 지친 몸을 이끌고 가마에 올랐다.
“아란이 왔느냐, 오늘은 좀 늦었구나.”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사랑채 마루에 서서 아란을 기다리던 제현이 아란을 반겼다.
“세자저하는 어떠하시더냐.”
“평소와 같으십니다.”
“그래, 피곤할 테니 어서 들어가 쉬거라.”
“예.”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란은 보료에 몸부터 뉘였다. 궁에 다녀오는 날이면 온몸에 기운이 남아나질 않으니 저녁도 거른 채 까무룩 잠들기 일쑤였다. 궁 안으로 들어설 때의 그 수많은 시선들에 긴장도 되고, 책보다 저를 희롱하는 데에만 관심 있는 세자를 상대하는 것도 너무나 지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자신을 훑어보는 세자의 눈빛도 음흉해서 싫기만 한데, 아버지의 명이니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 세자저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함부로 했다간 아버지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질 테니 꾹 참아야 하지만.
“아가, 옷이라도 갈아입지 않고선.”
“어머니.”
아란은 얼른 몸을 일으켜 어머니에게서 소반을 받아들었다. 소반 위엔 어머니가 손수 만든 정과가 놓여 있었다. 아란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절 부르시지 않구요.”
“너 잠들기 전에 서둘러 오느라 그랬지.”
어머니는 아란의 보료를 마다하고 마주 앉았다. 딸아이를 살뜰히 살피는 어머니의 눈은 애틋하면서도 근심이 어려 있어 마냥 밝지만은 못했다.
“궁 출입이 많이 고되지 않니.”
“아니에요, 다들 잘 대해 주시는 걸요.”
“너무 혼자 속 끓이진 말거라, 아버지도 아란이 너 궁에 다녀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책도 손에서 놓으신단다.”
아란의 아버지인 이제현은 지금의 왕이 세자였을 때 시강을 담당했던 학자였다. 세자가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벼슬길에서 물러났고, 이후로도 왕은 자신의 스승에게 수차례나 관직을 내렸지만 제현은 이를 모두 고사하였다. 지금은 그저 집에서 학문을 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주상전하의 명이라 아버지도 어쩔 도리가 없으셨지만, 아닌 척해도 마음이 편치 않으신 게지.”
“알아요, 그러니 어머니께서도 제가 걱정되어 이렇게 매번 저를 살피러 오시지 않으십니까.”
제현은 본래 성질이 외골수로 뻗어 뼛속까지 유학자인 사람이었지만,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외동딸 아란에게만큼은 마음이 너그러웠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딸아이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강연장에서 강독을 할 때에는 아란도 함께 들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물론, 다른 문하생들과 동석할 수는 없기에 강연장 뒤켠에 딸린 작은 방 안이 바로 아란의 자리였다.
아란이 궁에 출입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왕은 이제현의 딸이 사서삼경을 읽는다는 소문을 듣고 매우 흥미로워하여 궐 안으로 제현 부부를 초대했고, 아란을 세자의 글벗으로 두고자 했다. 생각지도 못한 딸 이야기가 왕의 입에서 나오자 제현은 당황하여 한사코 사양하려 했으나 왕의 뜻은 완강했다.
“별일이야 있겠어요, 너무 심려치 마세요.”
“아란아.”
“예, 어머니.”
“이 어미가 바라는 건 너의 행복뿐이다, 알고 있지?”
서른을 넘어 얻은 귀한 아이는 두 부부의 보물이었다. 늦은 만큼 내심 아들을 기대하긴 했으나, 아란이 자라면서 부부에게 준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니 충분한 행복을 누렸다 여겼다. 다만 그럼에도, 책을 가까이하는 아란의 차분한 성정과 높은 학식은 사내였다면 능히 이름을 널리 떨칠 만한 자랑이 되었을 것이다. 사서삼경을 읽는 계집아이도 있다더라 하는 저자의 흥미 거리가 아니라.
여자아이가 유독 총명하면 박복하다는 말은 사람들의 입에서 쉽게 흘러나왔지만, 때로는 음험한 주술처럼 당사자를 옭아매 가곤 했다. 첫째는 길을 지나도 사람들이 신기하여 수군대니 행동거지가 편할 날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한낱 계집이 혹여 얄팍한 학식을 얕잡아 볼까 두려워한 사내들이 더러 있어 혼사가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남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비아냥거림과 조롱이며 이 모든 상황들이 숨만 쉬어도 눈과 귀에 들어오니 웃어도 웃는 게 아닌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럼 잘 알지요, 저 또한 두 분의 기쁨이 제 기쁨인걸요.”
“그래.”
“그러니 눈물 거두세요, 어머니. 제 마음이 상합니다.”
“나도 참, 괜한 일에 눈물 바람이구나, 그럼 어서 쉬거라.”
어머니는 아란이 일어서려는 걸 굳이 도로 앉혔다. 배웅도 안 받고 바삐 안채로 건너가는 어머니를 보며 아란은 뒤늦게 얼굴의 미소를 풀었다. 아란의 나이 이제 겨우 열다섯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아란은 부모 앞에서도 표정을 지어내고 있었다.
지금의 세자는 성정이 점잖지 못하고 학문보다는 어린 나이에도 여색을 밝힌다는 말이 돌았다. 그러니 왕은 학문을 멀리하는 세자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일부러 아란을 궁에 들였다. 안타깝게도 자극을 받은 세자는 책 대신 아란을 괴롭혔지만.
그렇다면 과연 왕은 아란을 세자빈의 자리에 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 그에 대해선 누구도 선뜻 확신할 수 없었다. 왕실은 양반가에서조차 꺼리는 박복한 여인을 굳이 세자빈으로 들일 만큼 관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란의 아버지 이제현은 누구보다 영민한 지금의 왕을 세자 때부터 지켜봐온 사람이었다. 권세는 미미하나 명망 높은 학자 출신이 많은 이씨 집안은 지방 유생들의 존경을 받고 있어 그들 세력을 모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왕실의 혼인은 곧 왕의 전략이기도 했다. 제현이 왕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궁 안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 싶을 적에는 아란이 병약하여 요양을 간다는 핑계로 도성 밖을 벗어났다. 제현이 아란을 데리고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향교와 서원을 돌며 강연을 다니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귀한 딸을 왕권 세력 유지의 볼모로 내줄 수는 없었다.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으나,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하루 빨리 아란이 좋은 배필을 만나길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이 컸다.
아란이 다시 보료에 누워 가만 눈을 감고 있으니,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머리칼을 간질이는 기분 좋은 바람에 아란은 문득 작년에 거닐던 어느 대나무 숲속의 바람을 생각한다.
“경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대나무 숲과 함께 떠오른 동그란 얼굴. 아란은 바람을 통해 그때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기억 속 어렴풋이 경이라는 아이와 나눈 약속이 있었던 것 같아 찬찬히 그날을 떠올리며, 아란은 누군가 밖에서 들을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씩씩하게 언덕을 오르는 경이의 걷는 폼이 가뿐해 보였다. 이젠 담 넘을 필요 없이 당당히 향교에 들어서도 아무도 경이를 내쫓지 않고, 남몰래 읽던 책도 목청 높여 외우니 모두가 감탄을 한다.
바뀐 거라곤 바지저고리 입은 것뿐인데도, 경이는 웃음이 많아지고 얼굴빛도 밝아졌다.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걱정했던 것도 기우였다. 애초에 경이의 존재 자체를 아는 이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강무의 아들인데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집에서 누워만 지냈다는 핑계만으로도 충분했다. 사실 마을 사람들 보기엔 그런 부연설명도 필요 없이 그저 강무와 함께 다니니 강무 아들이구나, 그 뿐이지만.
평소 행동이야 사내고 계집이고 분별없이 살아왔으니 ‘사내아이인 척’하는 것도 경이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무가 걱정스런 마음에 항상 조마조마해 하곤 했는데,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환한 얼굴의 경이를 보고 나면 그런 걱정들도 사라지곤 했다. 경이로 인해 강무도 차츰 웃는 날이 많아졌고, 딱딱하던 인상이 무뎌지니 마을 사람들과도 차츰 동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불원호기외(不願乎其外)니, 군자가 바라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
“분수에 맞지 않는 헛된 욕심이옵니다.”
점심을 먹고 난 늦은 오후, 향교 안에 있는 생도들은 성큼 다가온 여름 날씨에 대부분 졸거나 늘어져 있었다. 눈에 흰자위만 내보이며 졸던 생도들도 경이의 목소리에 겨우 힘주어 눈을 떴다.
“어허, 어찌 또 경이 목소리만 들리느냐. 군자를 논하는 유생이란 자들이 어찌 이리 인내를 몰라.”
말은 그래도 호통을 치는 스승 또한 땀으로 이마가 흥건했다. 정신을 못 차리는 생도들 중 누군가 우물가에서 세수라도 하고 오겠다 말했고, 그러자 아예 개울가에 나가 수업을 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결국 수업을 파하고, 어쩌다보니 함께 수업을 듣던 양반 상민 할 것 없이 개울가에 물놀이 가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으, 경아 우리도 시원하게 등목이나 하러 가자.”
“어, 나는 됐어, 여기보단 대숲이 훨씬 시원할 테니 책이나 읽지 뭐.”
“왜, 창반 때문에 그래? 너도 참 고생이다 그거, 꽁꽁 싸매고 있으니 보는 내가 다 덥다야.”
“익숙해서 괜찮아, 그럼 내일 보자.”
“어,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