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활하지 못한 마녀에게-18화 (18/18)

#5

기적의 마녀

모닥불 타오르는 동굴.

깊게 도사린 어둠을 불빛으로 거둬 낸 사위가 추적거리는 빗소리로 가득했다. 종족이 다른 네 사람이 함께 있지만, 오가는 말소리는 전무했다. 세드릭은 모닥불 앞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고, 헤스터는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고 있었다. 둥글게 똬리 튼 윈터만이 세드릭을 힐끔거리며 아무래도 어려운 침묵을 헤아릴 뿐이었다.

결국 정적을 이기지 못한 비엘스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혹시나 오해하면 안 돼. 우리는 악마가 무서워서 동방으로 날아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고. 걔네는 머릿수만 많지 실제로는 내 발톱에 채면 끝이야.]

남이 거들먹대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윈터가 콧방귀를 꼈다.

[웃기시네. 너는 악마를 만난 적도 없잖아. 누가 모를 줄 알고?]

트라이피나가 일족을 이끌고 서방으로 날아온 것은 지하의 시간으로 무려 천 년 전이었다. 용 폰타네의 딸로 무리에서 어린 축에 속하는 비엘스카가 종족 대이동을 겪었을 리 없다.

[넌 뭐든 겪어 봐야 아니? 할머니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해 주셨단 말이야.]

[할머니는 강한 용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너는 아니잖아. 내가 장담하는데 너는 악마랑 마주치자마자 줄행랑을 칠걸?]

[흥. 됐네요. 어차피 마주칠 일도 없을 텐데. 네 친구는 할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없다면서?]

토라진 비엘스카가 홱 고개를 돌렸다. 트라이피나에게 거절당한 이래로 세드릭이 얼마나 애태웠는지 아는 윈터는 그만 속이 상했다.

[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리 가 버려!]

윈터가 사납게 꼬리를 휘둘렀다. 하지만 여유롭게 공격을 피한 비엘스카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세우며 느긋하니 불을 쬐었다. 씩씩거리던 윈터가 공연히 세드릭의 눈치를 살폈다. 차라리 소란함에 짜증이라도 부리길 바랐으나, 창백한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세드릭이 곡기를 거의 끊다시피 한 것이 벌써 며칠째였다. 그간 윈터가 울상으로 온갖 먹을거리를 갖다 바쳤지만, 그다지 소용은 없었다. 세드릭은 그저 디아나를 구할 방도를 찾느라 여념 없었다. 그것은 자연히 마력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내가 동방으로 데려다줄게. 그러니 몸을 귀하게 여겨 줘.]

하지만 별빛 닿지 못하는 세상에서 마력이 돌아올 리 없었다. 윈터는 며칠 전 세드릭이 손수 손목에 상처를 내서 피를 줄줄 흘리는 모습을 보고 기함했었다. 몸이 상한다고 마력이 돌아올 리 없음을 세드릭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별별 해괴한 방법을 다 시도할 만큼 필사적이었다. 용이 돕지 않는 이상, 마법 없이는 디아나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너까지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어.’

세드릭은 훌쩍이는 윈터를 그리 달랬다. 윈터는 자신을 소중히 여겨 주는 세드릭의 마음에 감격한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도대체 디아나 솔이 뭐라고 저토록 절절하게 매달리는 걸까.

[있지,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윈터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디아나가 네게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야? 사실 그 애, 가족도 아니고 네게 살가운 것도 아니잖아.]

어릴 적부터 남매처럼 함께 자라 온 사이라지만 둘은 엄연히 남이었다. 더구나 디아나 고 계집애는 세드릭을 볼 때마다 야멸치기 일쑤였다. 이렇게 본인이 위험에 처했을 때 세드릭이 물불 가리지 않고 구하러 와 줄 줄 알았으면, 양심에 찔려서라도 그리 쌀쌀맞진 못했을 것이다.

하여간에 윈터는 디아나가 싫었다. 악마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도 그렇고, 세드릭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도 그랬다. 세상 누구보다 세드릭이 소중한 윈터는 아무리 보아도 특별한 구석을 찾을 수 없는 여자애한테 목매는 세드릭이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차마 세드릭을 미워할 수는 없기에 대신 디아나를 미워하는 것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대답하지 않아도 돼.]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윈터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자책도 뒤따랐다. 부끄러운 마음에 날개로 얼굴을 가리는 윈터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세드릭이 물었다.

“너는 왜 날 좋아해?”

[으응? 나는 당연히 널 좋아하지.]

“그러니까 어째서?”

느닷없는 질문이지만 윈터는 성실하게 고민했다. 실은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윈터는 알에 들어 있을 때부터 세드릭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늘 따뜻한 불빛을 쬐이며 다정다감하게 속내를 풀어놓던 목소리. 진심으로 용의 존재를 반기던 어린 손길. 그 시절 윈터는 이미 세드릭을 사랑했다. 심지어는 빨리 알을 깨고 나오라는 세드릭의 말 때문에 굳이 무리해서 세상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너는 나한테 항상 다정하고 친절하고 또 맛있는 것도 많이 주고…….]

“그게 전부야?”

윈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윈터가 세드릭을 좋아하는 마음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처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이가 바로 사랑이었다.

세드릭이 가만히 웃었다.

“나도 그래.”

가느스름한 미소에 불빛이 번졌다. 윈터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세드릭이 누군가를 저토록 위하는 모습이 사뭇 낯설었다.

[그럼 그 애가 악마에게 잡혀 있으면 안 되잖아.]

“그래서 방도를 생각하고 있어.”

[내가 데려다줄게.]

“전에 말했지만 너까지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어.”

세드릭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윈터는 저 놀라울 정도의 자제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청하여 돕겠다는 것을 굳이 거절하는 이유를 몰랐다. 마치 너와의 관계는 여기까지라는 듯 일방적으로 선을 긋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윈터는 슬슬 화가 났다. 세드릭은 윈터가 얼마나 극진하게 그를 위하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도 냉정할 리 없었다. 윈터는 디아나가 싫지만, 그 마음을 깨끗하게 접고 디아나를 구하러 갈 정도로 세드릭을 아꼈다. 디아나가 싫은 것보다, 디아나를 잃어 괴로워하는 세드릭이 훨씬 싫었다. 윈터는 세드릭을 아끼는 만큼 세드릭이 행복하길 바랐다. 세드릭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용의도 충분했다. 그토록 사랑하는 마음이 원대했다.

윈터는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사이, 헤스터가 먼저 침묵을 비집고 들어왔다.

“세드릭 경.”

헤스터는 동굴 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불을.”

그러자 세드릭이 횃불을 들고 곁으로 다가갔다. 헤스터는 건네받은 횃불로 천천히 벽을 비추었다. 내리 깜깜하던 벽에 불빛이 드리워지며, 아주 오래된 벽화가 드러났다.

“용과 인어인가요? 아니면 거인?”

벽화는 온통 지하 세상의 주민들로 가득했다.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포효하는 용, 주먹으로 돌산을 뚫는 거인, 호수에서 노래 부르는 인어, 숲 속에서 날개를 퍼드덕거리는 요정, 땅을 기어 다니며 호시탐탐 강한 육신을 노리는 악마……. 이제는 멸종하여 사라진 종족과, 아직도 번창하는 종족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머나먼 하늘이 있었다. 지금처럼 연약한 달빛으로 휑뎅그렁한 밤하늘이 아니라, 수억 개의 빛으로 찬란한 밤하늘.

[누가 그렸는지 몰라도, 아주 옛날 세상은 이러했대.]

비엘스카가 벽화를 기웃거리며 말했다.

[하늘에 꽃이 만개하던 시절. 하늘에 보석이 박혔던 시절. 하늘에 유리알이 산개했던 시절. 참으로 꿈같은 얘기지?]

어린 용이 키득댔다. 하지만 헤스터는 듣지 못한 듯 멍하니 벽화로 손을 올렸다. 손끝으로 수억 개의 꽃송이가, 보석이, 유리알이 스쳤다. 마치 깨진 유리 조각에 스친 것처럼 손끝이 따가웠다. 손끝의 고통이 가슴을 찌르르 울렸다.

헤스터는 불현듯 강한 예감을 느꼈다.

이튿날, 행방이 묘연했던 요정 실피가 나타났다.

[실피!]

평소 실피와 절친하던 비엘스카가 황망히 뛰쳐나왔다. 실피는 온몸에 피가 덕지덕지한 채로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너 그동안 어딜 갔었던 거야? 몸은 또 왜 이렇고!]

[동방에…….]

돌연 실피가 마른기침을 토해 냈다. 비엘스카가 황급히 실피의 입가로 물방울을 떨어트렸다. 실피는 게걸스럽게 물을 받아 마시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동방에 다녀왔어.]

[뭐?]

비엘스카가 깜짝 놀라 물그릇을 엎질렀다. 때마침 서방 군주 트라이피나를 대신하여 산자락으로 내려온 용 오빌로트도 표정을 굳혔다.

[지상의 사람들이 찾던 여자애를 봤어. 이름이 디아나랬지?]

“디아나를 봤다고?”

세드릭이 나섰다. 실피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간 머리에 회색 눈. 너처럼 작은 사람을 찾는 거지?]

“맞아.”

[그 애는 지금 참극성에 붙잡혀 있어. 나랑 탈출하려다가 그만 악마들에게 들켰거든. 나는 그나마 간신히 여기로 도망쳤지만…….]

실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악마에게 들켰던 순간의 아찔함이 다시금 뇌리를 강타하며 그저 몸만 부르르 떨어 댔다.

[그만 둥지로 돌아가서 쉬자.]

비엘스카가 오빌로트의 눈치를 보며 슬며시 날개를 펼쳤다. 하지만 실피가 손짓으로 만류했다. 실피는 다친 날개를 꾸역꾸역 움직이며, 오빌로트의 발치로 구르듯 낙하했다. 펄썩거리며 일어나는 흙먼지 사이로 실피가 죄인처럼 몸을 웅크렸다. 곡하듯 어깨가 들썩거렸다.

[제발 동방으로 가 주세요.]

실피는 흐느끼며 말했다.

[악마 군단이 참극성으로 모여들고 있어요. 생전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수였어요. 필시 회한의 숲으로 향하겠지요. 그럼 우리 가족은 이번에야말로 전부 죽을 거예요. 악마의 잔악한 칼날 아래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오빌로트는 말없이 눈만 내리떴다. 실피가 거듭 간청했다.

[악마들은 통곡의 절벽을 경계하지 않아요. 지난 세월 고요했듯 앞으로도 고요하리라 지레짐작했을 거예요. 그러니 절벽을 건너오는 당신들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어요. 동방은 악마들의 땅. 하지만 등 뒤를 습격하는 용을 당해 내진 못할 거예요.]

[다시는 동방을 넘보지 말라 이르지 않았더냐.]

[하지만 가족이 저기에 있는걸요. 오빌로트 님도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으시잖아요. 정녕 제 마음을 모르시겠어요?]

실피가 훌쩍거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오빌로트는 침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악마를 이겨 내지 못해 서방으로 건너왔다. 그때 구하지 못한 너의 선조들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아직 길이 열려 있어요. 지금 구하시면 되잖아요.]

[어려운 길이다. 지난한 길이야.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럼 당신들이 기적을 일으키세요.]

실피는 눈물로 얼룩진 눈을 치떴다.

[기적이 별건가요? 나처럼 하찮은 미물에게나 별세계 이야기지, 당신처럼 강한 존재는 능히 기적을 이루어 낼 수 있잖아요. 용이 동방에 도래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족히 기적이에요. 천 년 전 군주님을 미처 따르지 못해 핍박받는 우리를 진정으로 가엾게 여긴다면, 부디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우리를 굽어살펴 줘요. 제발 한 번만 뒤를 돌아봐 줘요.]

간절하게 읍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침통하게 실피를 내려다보던 오빌로트가 깊은 한숨을 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모든 결정은 할머니께서 하신다.]

[그럼 군주님을 뵙게 해 주세요! 애걸할 기회라도 주세요!]

오빌로트는 괴로운 시선을 피하듯 날아가 버렸다. 발작적으로 그를 뒤따르려던 실피를 비엘스카가 급히 붙들었다. 실피는 멀어지는 오빌로트의 자취를 좇으며 눈물만 덧없이 흘려 냈다.

[실피. 내가 다음에 할머니한테 말씀드릴게. 응? 울지 마.]

실피를 달래던 비엘스카도 함께 눈물지었다. 실피는 비엘스카의 품에서 길게 오열했다. 애끊는 심정이 마디마디 섧게도 묻어났다.

세드릭은 멀거니 그들을 지켜보았다. 지하에서 처음으로 접한 디아나의 소식에 안색이 밝아진 것도 잠시, 어느새 시퍼런 납빛으로 굳어 버렸다. 파르라니 날 선 눈빛이 가없이 흔들렸다. 그토록 위태로운 모습을 본 적 없는 윈터도 그만 덜컥 겁이 났다.

[저기, 세드릭…….]

그때, 달빛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지하를 외로이 내리비추던 창백한 달빛이 거둬지며 사방에서 어둠이 피어올랐다. 이제는 턱없이 미약해진 빛이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 지평선 언저리에 간신히 걸렸다. 유일하던 달이 존재감을 잃자, 자연히 세상은 암암한 도탄에 빠졌다.

곧이어 무수한 빛이 쏟아졌다.

모두가 영문을 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직 달만이 거닐던 황량한 밤하늘. 그 고독한 폐허에 아름다운 꽃이 한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오래전 여신이 씨앗을 뿌렸되 이제는 지상으로 떠나 버린 수없는 보석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치 빼앗긴 들을 되찾은 것처럼, 버려졌던 하늘이 다시금 무수한 별빛을 품에 안았다. 고된 억겁의 시간이 흘러 비로소 외로운 밤하늘이 황홀하게 물들었다.

기적이었다.

✤      ✤      ✤

마르고트는 황급히 지하 석실로 내려갔다. 서기관과 숱한 호위들이 그를 뒤따랐다.

[군주!]

악마들은 조금 전 하늘에서 벌어진 변고로 몹시 불안했다. 변고를 목도하자마자 지하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참극공의 모습에 두려움이 증폭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참극공은 무언가 아는 듯했지만, 불안에 떠는 악마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한가로이 석문을 지키던 문지기는 갑작스러운 군주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다.

[문을 열어라.]

문지기는 두말없이 석문을 밀었다. 꼼짝도 하지 않던 석문은 호위가 힘을 보태고서야 간신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황한 횃불이 모이며 점차로 암암한 석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문이 반쯤 열렸을 무렵, 악마들이 하나둘 코를 찡긋댔다. 석실에서 익숙한 피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반갑게 맞이할 기척이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폭력과 살육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악마들이 별안간 희게 질린 낯빛으로 물러났다. 횃불로도 쉽사리 몰아내지 못하는 석실의 어둠 속, 가히 짐작하기도 어려운 공포가 똬리 틀고 있었다. 자연히 악마들은 본능적인 공포감에 몸서리쳤다.

쾅.

이윽고 석문이 전부 열렸다.

어렴풋하던 피 냄새가 거세게 밀려들며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악마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누구도 먼저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뒤편에서 무시무시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마르고트가 횃불을 뺏어 들고 성큼성큼 석실로 들어섰다.

석실은 그야말로 피바다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불빛이 닿는 곳마다 피로 짜낸 글씨가 가득했다. 울퉁불퉁한 벽면, 차디찬 바닥, 높은 천장, 모두가 피로 적어 낸 기도문이었다. 지하의 유일한 달이요, 유일한 별에게 바치는 기원은 그토록 처절했다.

마르고트는 아연한 얼굴로 석실을 둘러보았다. 사방에 가득한 피 냄새를 맡으며 하염없이 기도문을 읽어 내리던 차, 문득 구석에 내팽개쳐진 자그만 몸집을 발견하고 말았다.

[디아나!]

마르고트가 헐레벌떡 그편으로 달려갔다. 한 손으로 후닥닥 디아나를 감싸 안는데, 어쩐지 느낌이 불길했다. 마르고트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횃불로 디아나를 비추었다.

실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안색은 푸르죽죽해서 송장과 다를 바 없고 두 눈은 힘겹게 감긴 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양팔이 참혹했다. 마구잡이로 난도질되어 살가죽이 너덜너덜했다. 아직도 피가 멈추질 않았다.

마르고트는 떨리는 손으로 디아나의 야윈 팔을 들어 올렸다. 손끝에 닿는 체온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충격은 끝이 아니었다. 비로소 불빛 아래 드러난 손이 이상하게 뭉뚝했다. 가느다란 손가락마다 물어뜯은 잇자국으로 낭자했으나, 그건 그나마 나은 축이었다. 뼈가 부러져 덜렁거리는 검지. 그리고 절반이 날아간 약지. 희게 드러난 뼈마디가 소름 끼치도록 섬뜩했다.

[맙소사…….]

혼잣말이 석실을 쟁쟁하게 울렸다. 하지만 굳게 감긴 눈은 뜰 줄을 몰랐다.

✤      ✤      ✤

[……이게 대체…….]

[……세상이 망할 징조…….]

서방 군주 트라이피나는 세월에 짓눌린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그녀가 졸 때면 알음알음 조용해지던 사위가 어쩐지 소란스러웠다. 늙어 무뎌진 감각으로도 족히 시끄러울 정도였다.

[할머니!]

용 킬키스가 잠에서 깨어난 트라이피나를 반겼다. 모두의 시선이 삽시에 그녀에게로 모였다.

[할머니가 일어나셨어!]

[큰일 났어요!]

[하늘을 좀 보셔요! 이게 대체 무슨 변고인가요?]

평소 한가롭기 그지없던 정상이 용으로 바글바글했다. 트라이피나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며 내심으로 투덜댔다. 천 년이나 묵은 늙은 용에게 더 이상 놀라운 일은 없었다. 놀라기에 그녀는 세상을 너무 오래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개를 들기 무섭게, 트라이피나는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어두운 시야로 쏟아지는 무수한 빛. 새카맣기로는 통곡의 절벽 너머 구덩이와 진배없던 하늘이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소금처럼 흩뿌려진 보석은 내리 은은한 광채를 뿜어냈지만, 오래도록 지하의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는 그조차 지나치게 시렸다. 마치 외로이 지하를 내리비추던 달이 산산조각 쪼개진 것처럼 온 하늘이 반짝이는 보석투성이었다.

하지만 트라이피나는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그녀는 저런 밤하늘을 본 적이 있었다. 저게 보석이 아니고 저게 달이 쪼개진 조각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저 광채의 이름을 알았다.

[할머니. 하늘에도 황금이 박혀 있나 봐요.]

어린 용이 속닥댔다. 그러나 트라이피나는 감상에 젖은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저건 황금 따위가 아니었다. 황금보다 귀하디귀한 하늘의 보석.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멀리 나는 용조차 닿지 못하는 경지.

[저게 바로 별이란다.]

어느덧 트라이피나의 메마른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화석처럼 산 채로 굳어 가던 용이 아주 오래간만에 감정을 내비쳤다. 그것은 회한이고 그리움이었다.

오래된 상념이 부지불식간 늙은 용을 덮쳤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오랜 벗과 함께하던 시절. 녹음이 우거진 숲을 거닐고, 청명한 하늘에서 노닐던 행복한 과거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아아, 칼라일…….

트라이피나는 그녀의 안전을 바라 스스로를 내던진 벗을 추억했다. 세상이 덧없이 잊어버린 한 마법사를. 다른 이는 잊어도 그녀만큼은 잊어서는 아니 되는, 그럼에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사람을 헤아렸다.

“트라이피나.”

누군가 그녀를 현실로 잡아끌었다.

트라이피나는 혼곤한 눈을 깜박였다. 머나먼 과거를 덧그리던 눈에 불현듯 붉은 머리칼이 스쳤다. 오래된 추억은 온데간데없고, 지상에서 내려온 마녀가 어느덧 시야를 메웠다.

“내가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주겠습니다.”

아스라한 별빛이 넘실대며 정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트라이피나는 멍하니 마녀를 바라보았다.

✤      ✤      ✤

제노비아는 차가운 물수건을 디아나의 이마에 얹었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물수건에 짓눌렸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제노비아가 손을 뻗어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천불처럼 들끓던 열은 많이 가라앉았다. 덕분에 곧 죽을 사람처럼 얕던 숨소리도 한결 나아졌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다 죽은 송장처럼 시퍼런 빛은 가셨다. 아주 위험한 고비는 넘긴 듯싶었다.

그제야 제노비아는 적잖이 안심한 기색으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무수한 별빛이 쏟아지며 어리둥절하던 것도 잠시, 마르고트가 시체처럼 늘어진 디아나를 안고 그녀를 찾았을 때는 정말로 심장이 떨어지는 줄만 알았다. 사흘 뒤 그리젤다의 부활식을 거행하려면 무엇보다도 디아나의 생명이 필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디아나를 막무가내로 석실에 가두던 마르고트를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다.

그나마 마력이 돌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여명의 별 페베가 뜨자 제노비아는 곧바로 지상에서처럼 온전한 힘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에 감사할 겨를도 없이 죽어 가는 디아나를 되살리기에 골몰했다. 너덜너덜한 팔에 새살을 돋우고, 썩어 들어가는 손가락을 치료했다. 마법이 아니었다면 디아나가 죽어 가는 꼴을 넋 놓고 지켜보기만 했을 터.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가정이었다.

그러니 의아할 수밖에 없다.

“……그대는 어째서 우리의 밤하늘을 바란 건가요?”

석실에 다녀온 헤센이 말하길, 벽이며 천장이 온통 피로 적은 기도문이었다니 작금의 밤하늘은 필시 디아나의 작품이 분명했다. 제노비아는 아직 석실을 보지 못했으나, 디아나의 처참한 몰골로 대강 짐작은 했다. 별이 없는 세상으로 별을 불러오려면 웬만한 성심으로는 불가할 터였다.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여길 마법이었다. 목숨을 걸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며, 목숨을 걸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제노비아는 디아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알기로 디아나는 순순히 제물이 되길 거부했다. 아직도 살고픈 욕심이 가득했으므로, 만일 별에게 기도한다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지상의 별을 불러오는 것은 막다른 길이었다.

지하는 암흑의 별 칼리스토가 유일하게 내리비추는 세상. 지상에선 별 볼 일 없는 마녀였던 디아나도 여기서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대단한 마녀로 행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상의 수억 별이 떠 버린 하늘에서 칼리스토는 더 이상 예전처럼 빛나지 못했다. 이제는 디아나도 예전처럼 못난 마녀였다. 역으로 지하에서 무능하던 제노비아와 헤센은 지상에서처럼 강대한 마법사로 돌아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은 약하게, 적은 강하게 만드는 것이 어찌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디아나가 절망으로 미쳤다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유 모르게 심장이 뻑적지근했다. 모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어딘지 불확실한 감이 존재했다.

그때, 갑자기 악마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노비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조금 전부터 어쩐지 성내가 요란스러웠다. 마르고트가 분풀이하러 회한의 숲으로 사냥을 나간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니 아직 돌아왔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예상치 못한 사고라도 발생한 것인가.

악마가 초조한 기색으로 속삭였다. 순간 제노비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군주에겐 연락했습니까?”

[금방 회한의 숲으로 파발을 보냈습니다.]

“그럼 내가 나가겠습니다. 성내에 남은 군단을 서쪽 성벽으로 모조리 모으세요.”

제노비아는 신속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젤다의 시신과 아홉 유물은 헤센이 귀물의 방에서 지키고 있으니 안전했다.

문제는.

“일단은 그대가 여길 지키세요. 바로 다른 호위를 보내겠습니다.”

악마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노비아는 흘끗 침대를 보더니 이내 방을 나섰다. 우물쭈물하며 침대를 힐끔거리던 악마도 부리나케 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도로 적요해진 방.

홀로 남은 디아나가 반짝 눈을 떴다. 금방 깨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명료한 눈빛이었다.

디아나는 소리 없이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제노비아가 무슨 신묘한 마법이라도 부렸는지 특별하게 아픈 구석은 없었다. 그저 온몸이 나른하고 힘이 들어가지 않을 뿐. 마력이 제대로 돌지 않는 것은 대규모 마법의 여파라고 친다면 놀라울 정도로 말짱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고작 손가락 두 마디로 별을 불러들인 것은 참으로 남는 장사였다.

디아나는 구슬픈 눈으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기도문을 쓰기 위해 살갗을 깨물고 베어 냈던 상처는 제노비아의 헌신으로 말끔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절단된 손가락은 그녀도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두운 석실 곳곳을 뒤지면 찾아낼 수 있겠지만, 그리 한가할 겨를은 없었다. 어쩌면 기도문으로 엉망인 석실을 청소하던 악마가 발견하여 지금쯤 그의 배 속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괜찮아…….”

디아나는 그리 중얼대며 짤따란 왼손 약지를 매만졌다. 아직은 사라진 손가락 두 마디만큼의 감각이 선명했다. 아마도 점차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터였다. 그렇게 거대한 마법을 부리고도 살아남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고작 손가락 두 마디가 아쉬운 작금의 아둔한 심정도 점차 나아질 것이다. 살아 돌아가기만 한다면 훗날 운 좋았던 오늘을 회상하며 별에게 감사를 올릴 것이었다.

그러니 괜찮다.

디아나는 결연하게 눈을 떴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악마는 초조하게 방문 앞을 거닐었다. 지상의 사람이 보내 준다던 호위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당장이라도 서쪽 성벽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함부로 자리를 벗어났다간 마녀의 요술로 혼쭐이 날 것이었다. 다른 악마들이 듣거든 수치도 모르는 놈이라 욕할 것이 분명한데도, 그는 두려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악마는 고작 석 달 전에 동방 군주 휘하 19군단으로 들어온 신참이었다. 운 좋게 강한 육신을 얻은 덕분에 약자를 괴롭히기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회한의 숲에서 벌레 같은 요정들을 잡아 죽이는 것도 아주 능수능란했다. 하지만 지상의 사람이 부리는 정체 모를 요술은 달랐다.

어젯밤, 상관의 명령으로 지하 석실을 청소하러 내려갔던 그는 지옥 같은 광경을 목도했다. 질리도록 익숙하던 피비린내가 그토록 역겨울 수 있음을 그곳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벽이며 천장, 바닥 가릴 것 없이 손발 닿는 곳이면 어디고 핏물이 낭자했다. 고통으로 짜낸 피가 도무지 읽을 수 없는 글자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즈음엔 저도 모르게 석실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는 생전 그러한 공포를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시체로 산을 쌓아 나아가던 전장에서도 흥분이 끓어올랐을 뿐, 죽음은 악마와 늘 가까웠기에 새삼스럽게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석실은 달랐다. 석실의 어둠 속에는 악마가 모르는 미지가 도사리고 있었다.

악마는 무지해서 두려웠다. 그래서 석실에 갇혀 있었다던 지상의 사람이 무척 두려웠다.

끼익.

난데없이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 뒤이어 지상의 사람이 휘청대며 복도로 나왔다.

“아파…….”

지상의 사람은 붉은 머리채를 커튼처럼 드리운 채 몸을 옹송그렸다. 머리칼 사이로 잿빛 눈이 흐릿하게 빛났다.

“너무 아파요…….”

악마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지상의 사람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아파서……. 제노비아를 불러 줘요.”

악마는 꺼림칙한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목소리가 유난히 가늘긴 했으나, 진실로 아픈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악마의 관점에서 지상의 사람은 너무나 작았다. 그냥 웅크리고만 있어도 적잖이 아파 보일 터였다.

하지만 악마는 곧 스스로를 설득했다. 석실을 뒤덮을 정도로 피를 쏟아 냈으니 아프지 않은 게 이상했다. 게다가 정말로 아픈 걸 놔두었다가 큰일이라도 벌어지면, 모두 그의 책임이 될 것이었다.

[여,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악마가 뒷걸음질하며 경고했다. 점차로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발소리가 유독 흔쾌했다. 악마는 날듯이 달리며 곧 모퉁이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복도는 다시금 고요해졌다. 한껏 몸을 움츠렸던 디아나가 슬그머니 척추를 곧게 폈다.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며 기지개하는 모습에선 고통의 기운일랑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디아나는 악마가 사라진 방향을 힐끗거리며 반대편으로 달음박질했다. 총총거리는 발소리가 돌바닥을 살짝 울렸다.

서쪽 성문이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이 정말인지 성내는 이상할 정도로 괴괴했다. 아무리 마르고트가 군대를 이끌고 회한의 숲으로 떠났다 한들, 남겨 둔 군대만도 상당할 텐데 복도마다 인적 없이 싸늘했다. 길을 모르는 디아나에겐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로처럼 얽힌 참극성에선 어디고 망망대해의 외로운 조각배 신세일 테지만, 눈에 익은 곳에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붙잡힐 일은 적은 듯싶었다.

[……서쪽에 지금…….]

[……회한의 숲으로 파발을 보냈…….]

하지만 그리 안심하려던 찰나, 건너편 복도에서 악마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전해졌다. 자꾸만 꺾이는 무릎에 힘주어 달리던 디아나는 멈칫하며 뒷걸음질했다. 창백하게 질린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마땅히 숨을 곳조차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악마들의 발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하필이면 지금 나타난 거야?]

그 순간, 뒤에서 커다란 손이 나타나 얼굴을 덮쳤다. 디아나는 숨을 내쉴 겨를조차 없이 거센 손길에 질질 끌려갔다. 이제껏 힘겹게 달려왔던 복도가 다시 멀어졌다. 그리고 눈앞으로 허름한 목조 문이 조용히 닫혔다.

디아나는 공황에 휩싸였다. 등 뒤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털북숭이 몸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얼굴을 뒤덮은 거대한 손은 두말없이 악마였다.

[방금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았어?]

문득 복도를 울리던 발소리가 멎었다. 아주 지척인 듯 목소리가 유달리 가까웠다.

[무슨 소리?]

[문 닫히는 소리 비슷하게 들렸는데.]

[바람결에 창문이라도 닫혔나 보지.]

[그런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런거리던 말소리도 차츰 멀어지며 오래지 않아 문밖 복도는 완전히 잠잠해졌다.

정체 모를 악마는 그제야 얼굴에서 손을 뗐다. 디아나는 소스라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뿔이 난 사자 머리에 이족 보행 하는 허연 털북숭이 육신. 일전에 그녀의 호위였던 소제 가네트뤼포였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멍하니 중얼거리던 디아나가 불현듯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참극성을 탈출하겠다고 실피와 작당을 부릴 적, 저이를 속여 기절시킨 전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마르고트에게 붙잡혀 대전으로 끌려갔을 때는…….

[지상의 사람을 죽이겠소.]

디아나는 일순 얼어붙었다. 기회만 주어지다면 자신을 죽이겠노라 선언하던 이와 단둘이 남았으니 족히 그럴 만했다.

하지만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제 가네트뤼포는 지극히 미묘한 표정이었다. 디아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시선이 유난히 예리했다.

[네 짓이냐?]

문득 소제 가네트뤼포가 물었다. 디아나는 흠칫하며 놀랐다.

“뭐, 뭘요?”

[하늘을 저 꼴로 만든 게 네 짓이냐고 물었다.]

척 듣기에도 불편한 감정이 여실한 목소리였다. 디아나는 공연히 치맛자락을 꼭 부여잡으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제 가네트뤼포는 다시금 기나긴 침묵에 잠겼다.

디아나는 공황 속에서도 간신히 기억을 되짚었다. 저이는 그녀를 죽이려 했다. 마르고트처럼 끔찍스러운 음모를 꾸미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법을 두려워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힘이 훗날 막을 수 없는 돌풍을 몰고 올까 봐 못내 두려운 것이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디아나는 단숨에 낮게 엎드렸다.

“제발 살려 주세요.”

디아나가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나는 문제를 일으킬 생각이 전혀 없어요. 애당초 내가 여기에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닌걸요. 마르고트가 날 끌고 왔어요. 그는 날 죽일 생각이에요.”

소제 가네트뤼포는 여전히 잠잠했다. 이제 디아나는 숫제 용서를 구하는 죄인처럼 고개까지 수그렸다.

“날 못 본 척해 준다면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다시는 이 세상에 발걸음도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 그냥 보내 줘요. 당신이 우려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소제 가네트뤼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디아나는 파들거리는 눈꺼풀을 내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문제를 일으킬 생각이었거든, 하늘을 저리 만들진 않았겠죠. 나는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집.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자, 일부러 잊고 지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졸음과 사투를 벌이던 아침 식사,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고소한 빵 냄새가 풍기는 카페, 창밖 화창한 오후, 노을을 지고 돌아오는 언니, 도시의 흐린 밤하늘……. 그때는 무심결에 넘겼던 일상의 조각이 지금은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그토록 일상이 그리운 마음에 여기까지 왔다.

돌아가기 위해 죽음도 무릅썼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루어 냈다. 그렇게 가장 어려운 난관을 넘기고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억울해서라도 그리는 안 된다.

디아나는 분연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날 돌아가게 해 줘요.”

소제 가네트뤼포는 말없이 눈을 내리떴다. 어쩐지 수그러진 기백에서 디아나는 희망을 엿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돌연 눈앞이 캄캄해졌다. 악마가 포대를 뒤집어씌웠다는 사실은 뒤늦게 깨달았다.

[죽기 싫으면 조용히 해라.]

서늘한 목소리가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디아나는 너무 놀라 딸꾹질도 잊었다. 소제 가네트뤼포는 돌처럼 굳은 디아나를 포대째로 어깨에 둘러멨다. 순식간에 거꾸로 매달린 디아나가 밀려드는 어지럼증에 입부터 틀어막았다.

소제 가네트뤼포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아갔다. 그가 돌바닥을 드세게 밀고 나아갈 때마다, 새카만 모포에 가려진 시야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디아나는 떨리는 양손으로 입가를 단단히 봉한 채 겨우 호흡했다. 몰려드는 불안에 자꾸만 숨결이 불규칙했다. 호흡이 불안정해지며 머릿속도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소제 가네트뤼포는 악마 무리가 삼삼오오 모여든 계단으로 접어들었다. 게걸스럽게 고기를 뜯는 소리와 경박한 웃음소리가 아래위로 뚫린 층계를 쟁쟁하게 울렸다.

[이거 군단장님 아닙니까?]

누군가 대놓고 조롱했다. 소제 가네트뤼포는 킬킬대는 소리를 무던히 넘기며 계단 아래쪽을 턱짓했다.

[지나가게 좀 비켜 봐.]

[군단장님이 납시셨으니 당연히 비켜 드려야죠. 참, 이제는 군단장이 아니셨지?]

[이거 어떻게 불러 드려야 하나?]

악마 무리가 그를 에워싸며 비웃었다. 언젠가 동방에 악명이 자자했던 군단장이 한낱 호위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일개 군사가 보기에도 족히 우스꽝스러웠다.

[한데 어깨에 그건 뭐야?]

누군가 포대로 손을 내밀었다. 소제 가네트뤼포는 콧등을 꿈틀거리며 즉시 손을 쳐 냈다.

[저리 꺼져.]

[뭐? 지금 나한테 그랬어?]

[이거 아직도 군단장인 줄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주제를 알아야지. 군주의 심기를 거스르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먼?]

악마 무리가 분개했다. 소제 가네트뤼포는 코웃음 쳤다.

[너희 32군단 소속인가?]

끊임없이 빗발치던 야유가 멈추었다. 느닷없는 정적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만연했다. 소제 가네트뤼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턱을 들어 올렸다.

[66군단이 내일 참극성에 도착한다. 한때 내가 이끌었던 군대는 아직도 날 군단장으로 섬기지. 언젠가 동방을 호령했다는 자존심이 드높아, 짐작건대 나를 향한 모독을 군단을 노린 모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자 악마 무리는 못내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한둘 물러났다. 소제 가네트뤼포는 당당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뒤에서 홧김에 뼈다귀를 내던지는 소리가 층계를 요란하게 울렸다.

이후로는 삭은 적막만이 그득했다. 더는 마주치는 자가 없었고, 무심결에 지나치는 대화도 없었다. 오직 원형 계단을 부단히 내려가는 악마의 규칙적인 발소리만이 기저에 내리깔렸다. 잊을 만하면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함성이 간혹 귓전을 뒤흔들었다.

디아나는 숨죽인 채로 소제 가네트뤼포의 어깨에 인형처럼 내리 매달렸다. 아래로 쏠려 피가 몰린 머리는 그저 멍했고, 축축 처진 사지는 맥없이 흔들리는 대로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토악질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면서도 컴컴한 시야가 더없이 아득했다. 눈꺼풀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야트막한 호흡이 색색대며 입가에서만 맴돌았다.

그즈음 소제 가네트뤼포는 계단에서 벗어나 낡은 문을 열었다. 좀처럼 드나드는 이가 없는지 바닥에도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그는 횃불로 방을 비춰 보더니 이내 무심한 손길로 디아나를 내려놓았다.

삽시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디아나가 가까스로 포대에서 기어 나왔다. 딱딱한 돌바닥에서 구른 어깨며 등이 몹시 아팠지만, 덕분에 몽롱하던 정신이 순식간에 깼다. 디아나는 신음을 목울대로 넘기며 위태롭게 일어났다.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가 몇 번이고 꺾였으나, 양손으로 벽을 짚어 가며 결국에는 스스로 섰다.

그리고 직립하기 무섭게, 무거운 모피가 온몸을 덮쳤다.

[입어라.]

디아나는 끙끙거리며 모피를 끌어 내렸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유달리 찼다. 디아나는 싸늘한 북풍을 맞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찬 바람이 새어 드는 곳. 소제 가네트뤼포가 바깥으로 이어지는 문을 반쯤 열어젖힌 채로 서 있었다.

[너처럼 살갗을 드러내면 얼어 죽기 십상이다. 어서 입어.]

소제 가네트뤼포가 재차 경고했다. 그러나 디아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날 내보내 주는 거예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어조였다. 소제 가네트뤼포는 미미하게 낯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아까 눈빛을 보니, 널 죽이면 꿈자리가 영 흉흉할 것 같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디아나가 흠칫하며 얼른 모피를 껴입기 시작했다. 소제 가네트뤼포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서쪽으로는 가지 마라. 거긴 지금 전쟁터야.]

“하지만 그곳으로 가야 해요.”

[어째서?]

“용이 난입했다면서요.”

디아나가 새파랗게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제노비아를 급히 찾아왔던 악마는 그리 속삭였다. 느닷없이 용이 나타나 서쪽 성문을 공격하고 있다고.

“용은 필시 날 구하러 왔을 거예요. 그곳으로 가야 해요.”

[글쎄. 넌 아마도 용을 만나기 전에 악마와 마주칠 거다. 그보다는 남쪽으로 가는 게 좋아.]

소제 가네트뤼포는 바깥으로 보이는 강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강변을 따라 내려가라. 계속 내려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유난히 높은 언덕이 보일 거야. 그 언덕만 넘으면 통곡의 절벽이다. 차라리 그곳에서 용을 기다리는 편이 나아.]

용은 통곡의 절벽을 넘어 동방으로 날아왔다. 당연히 보금자리인 서방으로 돌아가려면 통곡의 절벽을 다시 넘어야 했다. 소제 가네트뤼포가 일러 준 길은 전쟁터보다 훨씬 안전했다.

그새 모피를 둘러 입은 디아나가 문가로 다가갔다. 지상의 겨울과는 비할 바 없이 싸늘한 바람이 몰아쳤지만, 그나마 두꺼운 모피로 온몸을 감싸 한결 나았다. 디아나는 마지막으로 모피로 얼굴을 감싸며 천천히 소제 가네트뤼포를 돌아보았다.

“고마워요.”

악마에게 순수한 호의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성정이 포악해도 자신을 위하는 마음만큼은 진실하다고 믿었던 마르고트에게 처참히 배신당한 뒤로 다시는 악마를 믿지 못하리라 여겼건만, 설마 죽이겠노라 당당히 외치던 이가 도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처 예상치 못했기에 은혜로운 마음이 더욱 컸다.

하지만 소제 가네트뤼포는 감사를 받지 않았다. 도리어 비웃기만 했다.

[네가 대전에서 난리를 친 덕분에 군주의 칼날이 나를 비켜 갔다. 오직 그뿐이야.]

“그래도 고마워요.”

디아나가 거듭 일렀다. 소제 가네트뤼포는 모피에 가려진 얼굴을 잠시간 쳐다보았다. 무뚝뚝한 말소리가 뒤이었다.

[돌아가라.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마.]

디아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으로 돌아선 등이 유난히 작았다. 어두운 밤을 말없이 응시하던 디아나가 이윽고 차디찬 동토로 발을 내디뎠다. 한숨이 나올 만큼 좁은 보폭으로, 그러나 거침없이 나아갔다.

소제 가네트뤼포는 한동안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드물게 자그마한 몸집은 거센 바람에 마구 흔들리면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밤에 집어삼켜질 것처럼 연약한데 벌써 저만치 멀어졌다. 아마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지상의 사람. 악마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이젠 빼앗긴 군대를 되찾을 시간이었다.

거센 강바람이 몰아쳤다.

디아나는 모피를 여미며 힘겹게 걸었다. 다리에서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당장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강바람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최대한 강변에서 떨어져서 걷는데도 이리 힘겨웠다.

사방은 지극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디아나는 강물에 반사되는 별빛을 횃불 삼아 부단히 나아갔다. 차디찬 삭풍이 모피 틈새로 새어 들어 온몸이 에였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바위를 모래로 깎아 내며 드세게 흘러가는 강물이 그녀를 좨치듯 앞서 나갔다. 귓전을 시끄럽게 울리는 물소리가 마치 등을 떠미는 듯했다.

그리 무수한 별이 내리비추는 황량한 강변을 홀로 거닐었다. 한때 지하의 유일무이한 천체였던 암흑의 별 칼리스토는 외딴 지평선으로 물러갔지만, 대신으로 하늘을 가득 채운 수억 별빛이 그녀의 앞길을 고요히 조망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물줄기를 따라 휘황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디아나는 하얀 숨결을 내뿜으며 머나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알알이 박힌 별빛이 못내 눈물겨웠다. 지하에서 이토록 낯익은 정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똑같은 하늘 아래 이토록 다른 세상이 펼쳐질 줄 누가 알았겠나. 그렇기에 익숙한 밤하늘이 반가우면서도 그리웠다. 정작 당시에는 아끼지 못했던 모든 순간이 그리웠다.

이제는 돌아가고 싶었다. 언제라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겠느냐만, 지금에 이르러선 간절하다 못해 절절한 심정이 죄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얼어붙은 땅에 무릎을 뉘며 통곡할 수 있었다. 지하에서 보낸 하루하루가 모여 눈물이 되고, 설움이 되었다. 냉혹한 삭풍에 옹송그린 슬픔을 전부 흘려보내고 여길 떠나고 싶었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디아나는 끓어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삼켜 냈다. 지하 어딘가에 있다는 언니와 세드릭이 자꾸만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행여나 마음이 약해질까 억지로 기억에서 지웠던 얼굴이 이제야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회한이 뒤따랐다. 함께할 적 잘해 주지 못했던 과거가 안타까웠다. 공연히 매몰찼던 말소리가 몹시도 후회스러웠다.

다시 만나면,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내어 줄 텐데.

나의 가난한 영혼이라도 긁어모아 전부를 내어 줄 텐데.

똑같은 하늘 아래 서 있다는 그들이 보고팠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어렵고 지난하기에 더욱 간절했다. 이제는 끝이 보이기에 더욱 들끓었다. 불가능을 넘어 기적을 이루었기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목숨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디아나는 이제 살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서쪽으로 용이…….]

그즈음 어디선가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는 단번에 땅에 엎드렸다. 사방은 어둡고 물소리로 가득했다. 그러나 악마의 기척은 끊어질 듯 말 듯 계속해서 이어졌다.

[……군주는…….]

[……일단 성으로 가서…….]

목소리가 무척이나 가까웠다. 디아나는 곧바로 엉금엉금 기었다. 마침 근처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디아나는 바위에 몸을 숨기며 떨리는 양손을 맞잡았다. 부디 이대로 마주치지 않길, 이제는 멀어진 그녀의 별에게 간곡히 기도했다.

귓가는 여전히 꽝꽝 진동하는 물소리만이 그득했다. 어두운 시야에는 별빛 반사하는 강물만 언뜻 보일 뿐이었다.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으나, 정말로 악마가 완전히 멀어졌는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디아나는 그저 몸을 웅크린 채로 덜덜 떨었다. 잊었던 추위가 그새 밀려들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녹아내렸던 마음이 다시금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시간은 그리 하염없이 흘러갔다. 멍하니 앉아 있던 디아나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언제까지 여기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앞이 어두웠다.

밤보다 어두운 그림자가 몸뚱이를 뒤덮었다.

[어디서 냄새가 나더라니…….]

별안간 등 뒤에서 악마가 킬킬대며 몸을 굽혀 왔다. 디아나는 소스라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곳곳에서 수많은 악마들이 몰려들었다. 족히 한 군단은 모였는지 강변이 온통 악마 떼로 바글거렸다.

디아나는 허옇게 질린 채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악마로 가득했다. 흉측한 무기를 든 채로 침을 다시는 모습이 더없이 끔찍했다.

[이건 대체 뭐야?]

갑자기 어느 악마가 억세게 모피를 끌어 내렸다. 창백한 별빛 아래, 디아나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악마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지상의 사람이잖아?]

누군가 속삭였다. 충격이 일파만파 퍼져 갔다.

[지상의 사람이라면 군주의 몫이지 않아?]

[건드리면 안 돼.]

[대전에서 분란을 일으켜서 군주께서 노하셨다며.]

[하늘을 저 꼴로 만든 게 지상의 사람이라고 들었어.]

[말로만 들었던 요술쟁이인가?]

악마들이 두려운 기색으로 물러났다. 미지를 겁내는 본능적인 공포가 짙게 내리깔렸다. 어느새 싸늘하게 가라앉은 사위는 거센 물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런데 말이야.]

문득 누군가 입을 열었다.

[저걸 먹으면 요술을 부릴 수 있는 건가?]

멀뚱히 서로를 마주 보던 악마들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공포로 물들었던 분위기는 더 이상 온데간데없었다. 오로지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섬뜩한 시선이 일제히 디아나에게로 몰려들었다. 육신을 탐하는 수십 수백의 징그러운 눈빛이 그녀를 단단히도 옭아맸다.

그저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라라라…….

그 순간,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흘러들었다.

악마들이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비틀었다. 소름 끼치도록 요요한 선율은 시끄러운 물소리를 잠재우며 시시각각 소리를 키워 갔다.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매혹적인 곡조에 자연스레 만인의 시선이 헤매었다. 정체 모를 가희를 찾아, 노래하는 가객을 찾아.

그리고 별빛 반사하는 강물에서 한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거센 물줄기를 부드러이 달래고, 도저히 이 세상 것이라 믿기 어려운 소리를 자아내며.

가없이 완염하게 피어오르는 그것은, 황금의 꽃 둘시네아였다.

[오, 저것은…….]

트라이피나는 긴긴 세월에 짓눌린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렸다. 노환으로 흐릿해진 시야에 황홀한 불티가 어지러이 날렸다. 쏟아지는 별빛보다 더한 광명이 나이 들어 어두워져 가는 눈을 밝혔다.

황량한 지하 세상은 어느덧 눈부신 꽃으로 가득했다. 물이 고인 곳이면 어디고 씨앗 없이 피어나는 황금의 꽃이 저마다 목청을 높였다.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기 힘든 암흑의 땅을 비추며,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만발했다.

하지만 신비는 그에 멈추지 않았다. 트라이피나는 축 늘어진 목을 세우며 세상에 만연한 노랫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마치 아스라한 별세계에서 전해지는 가락처럼 요요한 소리가 귓전을 메웠다. 도무지 사람의 솜씨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선율이었다.

그리고 트라이피나는 이러한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이제는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기도 지난한 아주 오래된 시절. 사랑하는 용을 무사히 떠나보내기 위해 스스로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 낸 어느 마법사가 있었다. 그렇게 잊혀선 안 되는 이가 덧없이 사라졌다. 심지어는 그의 사랑하는 용조차 그의 이름밖에 간직하지 못했다.

하지만 트라이피나는 이제 알았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먼 옛날, 사랑하는 벗이 손수 피워 냈던 황금의 꽃을. 곧 도래할 왕의 앞길을 밝히며 땅의 어둠을 몰아내던 광명의 꽃을. 그리하여 하늘에 오른 별들의 왕이 얼마나 눈부신 빛을 뿜어냈으며, 어버이의 별빛을 온몸으로 받아 내던 벗이 얼마나 휘황했는지를.

[칼라일…….]

늙은 용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오래전 잊었던 벗을 기억해 냈다. 자신을 돌아보던 얼굴과,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비로소 되살아났다. 천 년에 걸쳐 어두운 과거를 하염없이 헤매던 용은 드디어 그토록 간절하던 벗을 찾아냈다.

트라이피나는 소리 없이 오열했다. 나이 어려 미숙한 용들이 헐레벌떡 그녀를 둘러쌌으나, 기나긴 오열은 좀체 멈추지 않았다.

한편, 헤스터는 산정보다 높은 곳에 떠올라 황금빛으로 산란한 정상을 무심히 스쳐보았다. 이제 그녀와 밤하늘 사이를 가로막는 방해물은 없었다. 헤스터는 가림 없이 쏟아지는 별빛을 만끽하며, 황금의 꽃이 밝히는 길을 따라 도래할 왕을 손꼽아 고대했다. 신성한 왕은 당신을 경배하는 노랫소리를 들어 기나긴 잠에서 깨어날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비어 있던 하늘의 권좌가 주인을 찾았다.

별들의 왕 둘시네아.

하늘의 정중앙에서 황금빛이 폭포수처럼 쇄도했다. 주인이 부재하던 들판을 맘껏 뛰놀던 수억 별이 아주 오래간만에 지하로 내려온 왕에게 순종했다. 사계의 별이 왕을 호위하듯 예리한 빛을 내뿜고, 오밀조밀하게 모인 북쪽의 별들은 여신이 둘시네아에게 선사한 왕관을 이루었다. 모두가 자비로운 왕을 경배했다. 여신이 내린 권위가 널리 만천하로 퍼져 나갔다.

헤스터는 벅찬 가슴으로 어버이의 별빛을 즐겼다. 이제 그녀의 몫은 끝났다. 하지만 완전한 종결은 아니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가교였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은 남동쪽에서 번질 터.

남동쪽 하늘에서 천칭의 별 사피겔이 유달리 푸르게 빛났다. 터럭 같은 죄도 용납하지 않으며, 미약한 혼란도 결코 좌시하지 않는 하늘의 엄중한 재판관. 자비로운 왕이 사사한 검이 이윽고 땅을 굽어살피기 시작했다.

✤      ✤      ✤

황금의 꽃은 물줄기를 따라 점차로 번져 갔다. 처음에는 외로이 피어났던 꽃송이가 어느덧 강물을 온통 뒤덮었다. 그저 희미하게만 빛나던 강물이 이제는 찬란한 금빛으로 넘실댔다. 실로 황금빛 물결이었다.

꽃은 하염없이 노래했다. 매혹적인 곡조가 세찬 물소리를 덮으며, 들판 곳곳으로 퍼져 갔다. 그러자 처음에는 노랫소리에 몽롱하게 귀 기울이던 치들도 차츰 경계하는 빛을 띠었다. 지난 수천 년 지하에선 유례없던 일에 흉측한 악마조차 두려움이 앞섰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가 그들의 숨통을 서서히 죄어 왔다.

[도대체 어쩐 일이야?]

악마들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다른 악마라고 사태를 파악했을 리 없었다. 그들은 회한의 숲에서 퇴각하여 이편으로 달려오고 있을 군주를 맥없이 기다리는 한편, 본능적으로 강가에서 점점 뒷걸음질했다. 이미 강물은 수백 송이 꽃을 띄우고 동쪽으로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꽃송이가 제각기 노래하는 소리는 점차 성량을 더해 갔다.

그중 오직 디아나만이 강가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환희와 비감이 뒤섞인 얼굴로 하릴없이 황금의 꽃을 지켜볼 뿐이었다. 거센 물살을 가르며 기어이 망울을 맺는 수백 꽃송이가 눈에 아프게 박혔다. 저 꽃의 정체를 알기에, 언니가 어떤 심정으로 저 꽃을 피워 냈는지 알기에 함부로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어느새 하늘에서도 찬란한 금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왕의 부드러운 손길이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적셔 갔다. 어설프게 벗겨진 모래밭에 별빛이 어리고, 황폐하게 버려진 들판에도 은총이 내렸다. 자비로운 왕은 아무도 돌보지 않은 지하를 다채로운 빛으로 감싸 안았다.

시초는 서쪽이다. 머나먼 서쪽에서 시작된 들불이 사방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디아나는 꽃송이가 내려온 서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물줄기가 급히 남쪽으로 꺾이고, 서쪽으로는 유달리 높은 둔덕이 이어졌다. 일전에 소제 가네트뤼포가 설명했던 언덕이 틀림없었다.

저 둔덕만 넘으면 통곡의 절벽이다.

디아나는 무심코 발걸음을 뗐다. 황금의 꽃에 정신이 팔렸던 악마 몇몇이 그녀의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챘다. 누군가는 그녀에게 손을 내뻗기도 했다. 군주가 아끼는 지상의 사람을 이렇듯 쉽사리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닿지 못했다.

끼아아아악―!

멀리서 기이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마들은 귀를 틀어막으며 황망히 서쪽을 보았다.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기괴한 울음소리는 그곳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망막한 어둠에 휩싸인 둔덕. 일순 거대한 용이 솟구쳤다. 귓속을 파고드는 예리한 쇳소리를 부단히 뿜어내며 한둘 하늘로 날아올랐다. 활짝 펼쳐진 날개가 별빛을 가렸다. 수많은 용이 육중한 몸집에 걸맞지 않은 속도로 눈 깜짝할 새 서쪽 하늘을 뒤덮었다.

그리고 새카만 누군가 둔덕을 넘었다. 거센 돌풍을 몰며 메마른 땅을 박찼다. 검은 옷자락이 바람에 연신 펄럭거렸다. 얼굴을 반쯤 가린 옷 아래, 녹색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디아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세상에 단둘인 것처럼 시선이 그에게 못 박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속에서만 들들 끓었다.

콰르릉!

별안간 새하얀 낙뢰가 내리쳤다. 전조 없이 내리꽂히는 천벌을 감히 피할 자가 없었다. 낙뢰를 맞은 악마들이 삽시에 새카맣게 타 죽었다. 기겁하여 달아나는 악마 떼를 무수한 벼락이 뒤쫓았다.

그리 디아나는 홀로 남겨졌다. 연이어 내리는 낙뢰가 그녀를 감쌌다. 그 와중에도 수많은 용이 강변을 따라 악마들을 추격했다. 용의 거대한 날갯짓에 자꾸만 삭풍이 일었다. 마른 모래가 허공에서 하느작거리며 뺨을 스쳤다. 귓전은 온갖 소음으로 그득했다. 너무 시끄러워서 도리어 고요했다.

어느덧 모든 용이 그녀를 넘었다. 이제 눈앞에는 한 사람뿐이었다.

디아나는 얼어붙은 석상처럼 우두커니 섰다. 달음박질하는 모습이,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모습이 망막에 고스란히 맺혔다. 그럼에도 마치 꿈꾸듯 가물가물했다. 도무지 그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었다. 눈 깜빡이는 순간 덧없이 사라질 환영처럼 위태로웠다.

디아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어느새 목전이었다. 늘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얼굴이 진실로 눈앞에 실재했다. 기억과 한 점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차츰 다가왔다. 달뜬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문득 손에 익숙한 온기가 닿았다.

세드릭은 디아나의 손을 틀어쥐고, 그대로 뒤돌아 내달렸다.

차디찬 북풍에 살갗이 아리게 긁혔다. 디아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제법 멀었던 둔덕이 점차 근접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달리는 감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환상을 거닐 듯 몽롱한 와중에도 바람결에 나부끼는 검은 머리칼만은 선명했다.

[디아나!]

순간, 날카로운 호명에 정신이 깼다.

디아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용으로 뒤덮인 하늘 아래 마르고트가 우뚝 서 있었다. 그녀를 애타게도 부르며 마구 달려오고 있었다.

[안 된다! 가면 안 돼!]

몹시도 애끓는 소리였다. 디아나는 어쩐지 그가 측은했다. 동시에 후련했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거듭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벗어나듯 거세게 달음질했다. 마냥 세드릭에게 끌려가던 몸이 점차 추진력을 얻었다. 손 맞잡은 팔이 어느덧 수평으로 당겨졌다.

디아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해 벅찬 시선이 서로 맞닿았다.

둘은 함께 둔덕을 내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치달을 정도로 다리에 힘주어 달렸다. 그리 둔덕을 넘자, 이윽고 시야가 확 트였다.

통곡의 절벽.

지하를 둘로 양분하는 벼랑 너머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암암한 구렁텅이가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구렁을 넘어야만 용의 거처요, 날개 없는 악마가 닿지 못하는 평화의 땅에 도달했다.

둘은 손 맞잡은 채로 계속해서 달렸다. 광활한 구렁텅이를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깎아지르는 벼랑이 금세 가까웠다. 그리 절벽에 이르러 세차게 땅을 박찼다.

마침내 화려하게 떨어졌다. 아무런 지지대 없는 허공에서 재차 눈이 마주쳤다. 환희로운 미소가 차츰 번져 갔다.

그렇게 낙하하는 둘을 용이 떠받쳐 올랐다.

윈터가 길게 울었다. 퍼드덕거리는 날갯짓이 유독 힘찼다. 용은 어두운 구렁텅이에서 솟구쳐 강강하게 서쪽으로 날았다.

[디아나!]

어느덧 절벽에 이른 마르고트가 슬피 부르짖었다. 디아나는 세드릭의 허리를 꽉 붙든 채로 흘끗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절벽에서 멀어져 그의 얼굴이 분간되지 않았다. 악마는 닿지 못하는 거리가 아득했다.

디아나는 음산한 안개로 뒤덮인 절벽을 향해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안녕, 마르고트.

✤      ✤      ✤

“디아나!”

헤스터가 황급히 달려 나왔다. 윈터의 등에서 내려온 디아나가 제대로 중심을 잡기도 전, 헤스터는 휘청대는 디아나를 얼싸안았다.

“언니…….”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디아나가 이내 울상을 지었다. 헤스터가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흐느끼는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언니. 나 얼굴 좀 보여 줘. 응?”

디아나가 코맹맹이 소리로 애원했다. 헤스터는 눈물로 젖은 얼굴을 겨우 들어 올리며, 양손으로 디아나의 뺨을 감쌌다. 오래간 생이별했던 자매의 안색을 살피는 눈길이 자못 꼼꼼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지?”

이러다간 숫제 머리카락 한 올까지 살펴볼 기세였다. 디아나는 헤스터의 손등 위로 손을 겹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심으로 가득하던 헤스터의 낯빛이 삽시간에 흙빛으로 질렸다.

“너 손가락이…….”

디아나는 아차 했다. 다친 왼손을 서둘러 등 뒤로 감추려 했지만, 잡아채는 손길이 더욱 빨랐다. 밝은 횃불 아래 두 마디 잘려 나간 약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악마가 그랬니?”

하염없이 약지를 내려다보던 헤스터가 불현듯 물었다. 나지막한 소리가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긍정하거든 당장에 동방으로 천벌을 내릴 기세였다.

디아나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밤하늘에 별을 불러오느라 그랬어.”

비록 듣도 보도 못한 거대한 마법을 완성하느라 양팔과 양손이 너덜너덜하도록 피를 뽑아냈으나, 거기까지 자세하게 설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노비아 자일스에게 유일하게 고마운 점이 있다면, 단연코 언니가 보기 전에 상처를 치료해 준 것이었다.

“네가 별을 불러왔다고?”

“응. 언니랑 세드릭이 날 구하러 왔다고 실피가 그랬는데……. 참, 실피는 돌아왔어?”

디아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런데 별안간 차가운 손이 그녀의 이마를 파고들었다. 디아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세드릭이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다.

“뭐, 뭐야?”

세드릭은 늘 그렇듯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곱절은 피로하고 어지러운 표정으로 재차 손을 내밀었다. 디아나는 차마 그 손길까지 뿌리치진 못했다. 다시금 이마를 짚는 손이 무척이나 차가워서 어지럼증은 한결 나아졌다.

“……열이 심해.”

세드릭이 쉰 목소리로 중얼댔다. 놀란 헤스터가 곧바로 디아나의 이마를 짚었다. 재회로 감격했던 얼굴에 다시금 긴장감이 어렸다.

“세드릭 경. 빨리 돌아가야겠습니다.”

“아냐, 나 괜찮아.”

“열이 펄펄 끓는데 어떻게 괜찮아.”

“하지만 실피는…….”

디아나가 고집을 부리며 두리번거렸다. 실피는 그녀에게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일 실피를 두고 왔다면 이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그때, 비엘스카가 삭풍을 일으키며 땅에 내려앉았다.

[실피라면 지금 둥지에서 요양하고 있어. 기력이 많이 쇠했거든.]

디아나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엘스카가 유심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네가 악마에게 끌려갔다던 천치구나? 참으로 아둔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네가 단초가 되어 실피의 가족을 구할 수 있게 되었어. 고마워.]

“실피의 가족을요?”

[네 자매가 할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준 덕분에 어른들이 겸사겸사 회한의 숲으로 향하셨거든. 널 구했으니 지금쯤 회한의 숲에서 실피의 가족을 나르고 계실 거야.]

디아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잘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지금 가려고?]

비엘스카가 물었다. 헤스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께서 섭섭해하실 텐데……. 할머니가 깨어나실 때까지만 기다려 주면 안 돼?]

“디아나가 많이 아파요.”

“나 정말 괜찮다니까?”

디아나가 호기롭게 외쳤다. 하지만 무리해서 소리를 높인 것이 화근이었는지, 갑자기 시야가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휘우듬하게 기울어지는 디아나를 누군가 급히 받쳐 들었다.

“윈터!”

세드릭이 다급히 불렀다. 멀찍이서 맛없는 풀을 뜯던 윈터가 반색하며 날아왔다. 세드릭은 디아나를 안아 윈터의 등에 조심스레 눕혔다.

[진짜 위험해 보이긴 하네.]

비엘스카가 떠름하게 말했다.

[알았어. 할머니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게.]

“고맙습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지.]

비엘스카는 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정경을 목도하며 구슬피 곡하던 트라이피나를 떠올렸다. 조용히 죽어 가는 고목처럼 단단하던 할머니가 그토록 감정을 쏟아 내는 모습은 그녀도 처음 보았다. 노래하는 꽃에서 무슨 감상을 느끼셨는지 알 길 없으나, 비엘스카는 황금의 꽃 한 송이를 품어 잠든 할머니가 새롭고도 반가웠다. 산 채로 굳어 가던 할머니가 처음으로 살아 숨 쉬는 용처럼 보였다.

[할머니를 위로해 줘서 고마워.]

헤스터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오래지 않아 세 사람은 윈터의 등에 올라탔다. 맨 앞에 세드릭이, 맨 뒤에 헤스터가, 가운데는 디아나가 앉았다.

“언니, 나 정말로 괜찮은데…….”

디아나가 힘겹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하지만 헤스터는 디아나의 몸을 끌어당기며 단호하게 고했다.

“출발하세요. 세드릭 경.”

그에 윈터가 거세게 날갯짓했다. 땅을 박차는 진동이 그대로 전해졌다.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몸을 움츠리며 가까스로 신음을 삼키는 사이, 땅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디아나는 실눈을 뜨고 아래를 굽어보았다. 금빛 물결로 출렁이는 황폐한 대지가 발아래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영원히 지하 세상을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듯 어린 용 몇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춤추듯 부드러이 허공을 유영하는 몸짓이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디아나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매단 채로 언니에게 편안히 등을 기대었다. 젖혀진 목으로 차디찬 바람이 감겨들었으나, 마냥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청량한 공기를 들이켜자 도리어 어지럽던 정신이 맑게 개었다.

윈터는 거침없이 하늘을 올랐다. 날갯짓할 때마다 일어나는 돌풍이 게으른 구름을 드세게 흩트렸다. 들뜬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를 때마다 땅으로 내려오던 별빛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하늘을 오르는 길은 갈수록 험난했으나, 맹렬한 용이 맘껏 뛰놀기엔 충분했다. 비좁은 대지로 만족하지 못하던 용은 비로소 오늘 하늘에서 흡족했다.

용은 그렇게 층층이 쌓인 구름을 꿰뚫으며 높디높은 밤하늘로, 수억 별이 떠오른 바다로 날아들었다. 무수한 별빛이 하늘의 손님을 환영했다. 이제는 구름조차 몸을 물리며 길을 비켰다.

쏟아지는 별빛을 만끽하던 디아나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드는 눈부신 빛이 눈가로 드리워졌다. 디아나는 눈을 감았다.

이윽고 광명이 찾아들었다.

✤      ✤      ✤

마르고트는 구렁텅이 너머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절벽 끄트머리에서 부동하는 그를 여러 군사들이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군주. 용들이 전부 회한의 숲으로 몰려갔습니다.]

[66군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속히 성으로 귀환하셔야 합니다.]

비보가 연이어 빗발쳤다. 회한의 숲으로 몰려간 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참극성 인근에 주둔한 66군단은 주의 깊게 살펴야 했다. 옛 군단장 소제 가네트뤼포를 잊지 못한 66군단은 본래의 주인을 되찾을 기회만 틈틈이 엿보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군단의 반란으로 이어지는 수가 있었다.

하지만 마르고트는 여전히 침묵했다. 군사들도 더는 그를 독촉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조바심쳤다. 오랫동안 동방 군주를 모셔 온 그들도 군주의 이런 모습은 낯설었다. 수많은 시체를 짓밟아 왕좌를 차지한 악마에게 절망이란 끔찍이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즈음 제노비아 자일스가 황급히 달려왔다.

“군주!”

제노비아는 아홉 유물을 한 아름 안고 마르고트의 곁으로 다가왔다. 마르고트는 절벽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문을 열었다.

[공들여 기일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데려오자마자 의식을 치러야 했어.]

제노비아와 헤센은 지하로 내려오자마자 그리젤다를 부활시킬 날을 공들여 정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므로 최대한 악운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마르고트는 지금 이제껏 손 놓고 기다렸던 그 시간을 탓하는 것이었다.

제노비아가 싸늘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포기할 겁니까?”

[디아나가 서쪽으로 떠났다.]

“그래서 포기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마르고트는 깊은 침음을 흘리며 하릴없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제노비아도 더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서쪽으로 갑시다. 내겐 마법이 있어요. 당신과 휘하의 군단을 모조리 절벽 너머로 이끌겠습니다.”

[하지만 디아나가 이미 지하를 떠났으면?]

“그럼 내가 다시 끌고 오겠어요.”

제노비아가 마르고트의 팔뚝에 손을 얹었다. 짙은 녹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리젤다는 반드시 부활합니다.”

마르고트는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제노비아는 미소를 띤 채로 가벼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법으로 허공을 걷는 것 정도는 그녀에게 일도 아니었다. 절벽 너머 구렁텅이를 건너가는 모습에 악마들이 놀라 수군거렸다.

기실 제노비아는 아직도 자신이 있었다. 가장 근접했던 기회를 눈앞에서 놓친 것이 분하고 아쉽긴 하지만, 기회는 다시 만들면 그만이었다. 디아나는 살아 있고 무엇보다 아홉 유물이 그녀에게 있었다. 디아나와 유물만 멀쩡하다면, 언제든 그리젤다를 되살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 수십 년을 기다렸다. 좌절만을 맛보았던 세월에 비한다면, 지금의 기다림은 차라리 행복이었다.

바로 그 순간, 품에서 목걸이가 흘러내렸다.

제노비아는 무심결에 아래를 보았다. 떨어지는 목걸이를 잡으려 팔을 내뻗었으나, 미처 닿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마법이 있었다. 떨어지는 물건을 잡아 올리는 것쯤은 숨 쉬는 것보다 쉬웠다.

그런데 마법조차 빗나갔다.

제노비아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재차 마법을 부렸다. 이번에도 빗나갔다. 다시 마법을 부렸다. 마찬가지였다. 마법을 부리는 족족 빗맞았다. 그새 목걸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끝을 모르는 암암한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졌다.

“안 돼…….”

제노비아가 중얼대며 아래로 팔을 뻗었다. 다른 유물은 온전히 품었는데도 목걸이만 빠져나간 것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미친 듯이 품을 살펴보았으나, 목걸이는 여전히 없었다. 진정으로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안 돼. 안 돼. 안 돼!”

제노비아는 실성한 것처럼 절규했다. 절망한 소리가 하늘에도 닿았으나, 그녀의 탄생성인 여명의 별 페베는 늘 그렇듯 냉엄하게 지상을 주시할 따름이었다.

‘부디 마법사의 유산이 세상을 도탄에 빠트리지 않기를.’

기적이 다시 합쳐질 것을 염려한 마그누스 프롬이 목걸이에 담았던 기원.

최고(最古)의 역사가 페베는 영웅의 묵은 기원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똑똑히 기억했다.

✤      ✤      ✤

파펜하임산에서 열렸던 아홉 영웅의 회합은 그리 끝났다. 그런데 거처로 돌아가려던 클레멘틴 자일스를 마그누스 프롬이 비밀스럽게 붙잡았다.

‘그대가 보기엔 어떻습니까. 진실로 기적이 도래하는 날이 없을까요?’

마그누스 프롬은 별의 소리를 듣는 마법사가 남긴 유산을 진심으로 우려했다. 기적이 일어나 도탄에 빠질 세상이 염려스러웠다. 그리하여 유산을 아홉 갈래로 쪼갰음에도 걱정은 가시질 않았다.

그러자 미래를 보는 클레멘틴 자일스가 은밀히 속삭였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내가 보는 앞날에는 없습니다.’

눈먼 예언가의 입에서 뱀처럼 교활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의 공이 참으로 큽니다.’

6. 마지막 매듭

1880년 겨울. 지상에서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다.

신년을 환영하는 축제도 점차 잦아들던 무렵, 여느 때처럼 강풍이 몰아치던 밤에 별빛이 일제히 사라진 것이다. 마치 정전된 도시처럼 새카맣게 가라앉은 밤하늘에서 오직 달만이 외로이 자리를 지켰다. 남은 별일랑 고작해야 지평선에 간신히 걸린 암흑의 별 칼리스토뿐이었다.

그러자 문제는 마녀와 마법사들이었다. 본디 별의 은총으로 마법을 부리는 그네들은 별이 사라진 세상에서 자연스레 은총을 잃었다. 심한 열병을 앓은 뒤로 그들은 평범한 인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온 세상이 혼란에 휩싸였다. 마법을 잃은 마녀와 마법사들은 어떻게든 밤하늘을 되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하지만 마법을 부리지 못하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빤했다. 암흑의 별 칼리스토의 축복을 받아 유일하게 마법을 잃지 않은 이들도 하늘의 변고를 열심히 연구했으나, 애당초 그들은 일정한 경지에도 오르지 못했으므로 그다지 유의미한 결과는 내지 못했다. 별의 실종은 그렇게 오리무중으로 남는 듯했다.

하지만 일주일 뒤, 무수한 별빛이 돌아왔다.

전조 없이 사라졌을 때처럼 갑작스러운 귀환이었다. 사람들은 영문을 몰랐으나 어쨌건 돌아온 별빛을 열렬히 환영했다. 축복이 돌아온 마녀‧마법사들은 심지어 오열하며 별을 반겼다.

그리 온 세상이 시끄럽던 때, 디아나는 조용히 지상으로 돌아왔다.

✤      ✤      ✤

디아나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난 한철 머무르며 제집처럼 익숙해졌던 창밖 거리도 어느새 낯설게만 느껴졌다. 집을 떠났던 기간이 길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눈 덮인 거리는 처음 보아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부재했던 기간, 집은 놀랍도록 변치 않았다는 점이다.

달력은 차차 추위가 물러가는 2월 말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여름이 유난히 더웠듯 이번 겨울도 유난히 추웠던 모양인지, 엊그제부터 내리 퍼붓던 눈은 이제야 겨우 그쳤다. 이즈음의 폭설은 전례 없다며 떠들썩해야 마땅할 라디오 채널은 이상하게도 잠잠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밤하늘에서 별빛이 사라졌던 것이 불과 3주 전이니 폭설쯤이야 대수롭지도 않았다.

세드릭이 전하는 근자의 소식은 한결같았다. 마법 사회며, 인간 사회 가릴 것 없이 별의 실종과 귀환에 대해 열을 올린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생존과 직결되는 마법 사회가 특히 열중했는데, 최근 가장 유력한 가설은 별들의 세력 다툼이 날로 거세지며 일순간 밤하늘에 악영향이 끼쳤다는 것이다. 내막을 아는 디아나로선 실로 코웃음 나는 주장이었다.

‘내가 저지른 짓이라고는 꿈에도 모르겠지.’

디아나는 뭉툭하게 잘린 약지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신산한 고통을 견뎌 내며 지하로 별을 불러들였던 그날은 아마도 평생에 가장 위태롭되 눈부신 순간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떠벌린다 한들 누구도 믿지 않을 테고, 또 밝혀진다 한들 피곤하기만 할 테지만 그래도 역사상 유례없는 기적을 일으켰음에도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잊힌다는 것이 조금은 서글펐다.

하지만 디아나는 잠깐의 명예를 위해 평범한 일상을 포기할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다. 사람은 늘 잃어버리고서야 진정한 가치를 아는 법. 강제로 지하로 끌려가 말로 다 못 할 고초를 겪었던 디아나는 이제 일상이 간절했다. 예전에는 그저 지겹게만 여겨졌던 순간순간이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그러니 앞으로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된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디아나는 그리 바라며 창문에 고개를 기대었다.

“디아나. 이만 식사해야지.”

헤스터가 문틈으로 고개를 쏙 내밀며 말했다. 디아나는 고개를 돌리며 밝게 웃었다.

“내가 부엌으로 갈게.”

“아냐. 가져다줄게. 침대에서 기다리렴.”

헤스터는 대답도 듣지 않고 서둘러 부엌으로 돌아갔다. 침대에서 나오려던 디아나가 입을 비쭉대며 도로 이불 속에 다리를 묻었다.

지상으로 돌아온 이래, 헤스터는 디아나를 무척이나 싸고돌았다. 처음 며칠은 디아나도 크게 앓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지만, 열이 내린 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열병에 시달리느라 떨어졌던 체력도 웬만큼 회복되어서 마냥 침대에 누워 있기도 지겨운 참이었다. 그래서 디아나는 온몸으로 건강함을 표했지만, 언니의 과보호는 변함없었다. 심지어는 하루 한 번꼴로 찾아오는 세드릭조차 그러했다.

‘세드릭. 네가 언니한테 얘기 좀 해 줘. 나 이제 정말로 괜찮다니까?’

‘당분간 안전하게 지내는 편이 좋아. 아직 제노비아 자일스와 헤센 그윈티르가 잡히지 않았잖아.’

아니, 그럼 제노비아 자일스와 헤센 그윈티르가 잡힐 때까지 침실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둘이 지하에서 언제 돌아올 줄 알고? 또 지난 수십 년 잡히지 않았던 이들이 지상으로 돌아온들 바로 잡히겠는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차마 나가겠다며 떼를 쓰지는 못했다. 헤스터와 세드릭은 오로지 그녀를 구하겠다는 일념만으로 지하로 내려왔었다. 아직 주모자가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를 자유롭게 풀어 주기는 마음이 놓이지 않을 터였다.

디아나는 무릎을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걱정스럽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운 좋게 마르고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지만, 그들에겐 아직 아홉 유물이 있었다. 디아나와 아홉 유물만 건재하다면 언제든 그리젤다 솔을 되살릴 수 있으므로, 그들이 쉽사리 뜻을 포기할 리 없었다. 이만한 실패로 포기하기에 그들의 집념은 지나치게 광적이었다.

‘결국엔 또 어머니야.’

디아나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 내며 머리를 쓸었다. 이래서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기가 싫었다. 게으를수록 잡념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 하지만 잡념은 대체로 그녀는 알지 못하는 지하의 사정으로 흘러갔으며, 종국에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끝났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라 접으려고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상념의 바다는 그녀의 뜻대로 흐르지 않았다. 지하에선 살기 위해 덮어 두었던 문제가 기어이 터져 나온 것이다.

어머니. 디아나는 얼굴만 기억하는 여자를 떠올렸다. 헤스터는 늘 어머니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노라 일렀지만, 이제 와 디아나는 언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모른 척하고 믿기에 너무나 대단한 사실을 알아 버렸다. 아마도 평생토록 이해하지도, 소화해 내지도 못할 진실이었다.

그래서 디아나는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저 마르고트와 제노비아 자일스가 어머니를 되살리려 작당했다는 사실만을 밝혔을 뿐이다. 헤스터와 세드릭은 어머니의 부활에 어째서 디아나가 필요한지 쉬이 납득하지 못했으나, 그건 나도 모른다며 얼버무리는 그녀에게 더는 캐묻지 않았다. 행여나 숨기는 기색을 알아챘어도 상관없다. 디아나는 앞으로도 진실을 밝힐 의사가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무덤까지 간직해야 하는 비밀이었다.

식사가 거의 준비되었는지 바깥에서 향긋한 냄새가 전해졌다. 디아나는 열없이 고개를 들었다. 쓸데없는 상념은 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난데없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디아나는 경계하는 기색으로 창문을 보았다. 땅거미 지는 저녁 하늘에 물들어 가는 까마귀 몇 마리가 창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리에 편지를 매단 것으로 보아 마녀의 시종이 분명했다.

조심스레 창문을 열기 무섭게 까마귀 떼가 실내로 날아들었다. 어수선한 날갯짓에 디아나는 소스라치며 양팔로 얼굴을 가렸다. 깍깍대며 마구잡이로 방을 휘젓던 까마귀들은 금세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란 헤스터가 곧바로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니?”

디아나가 산발이 된 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하려던 찰나, 바닥에 나뒹구는 잡동사니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헤스터도 적잖이 당황한 기색으로 그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건 옛날 투구인데……. 누가 보냈니?”

디아나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투구를 응시했다. 거인의 은신처에 숨겨져 있던 어머니의 유품이자, 먼 옛날 퀸투스 아스톨포가 남긴 유물.

그리고 사자를 되살리는 마법의 조각.

디아나는 아연한 표정으로 바닥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한눈에도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총 여덟 개였다. 지난 여름, 그리그 프롬에게 받은 목걸이를 제한 나머지 유물이 전부 모였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다. 디아나는 눈앞에서 언니가 염려하는 것도 잊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발치에 떨어진 편지를 집어 들었다.

「2월 26일 pm 10:00, 도체스터 천체 관측소」

✤      ✤      ✤

“절대로 안 돼.”

헤스터가 드물게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 작자들이 또 무슨 음모를 꾸몄을지 알고. 아까 세드릭 경도 말했잖니. 거긴 위험해. 정히 만나고 싶다면 사냥꾼이 신병을 확보한 뒤여도 괜찮잖아.”

“그렇긴 하지만…….”

디아나는 우물쭈물했다. 상식적으로도 언니의 말이 맞았기에 함부로 반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정작 본인도 도체스터 천체 관측소로 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니, 남을 설득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천체 관측소에는 사냥꾼이 갈 거야. 만일 제노비아 자일스가 나타난다면 십중팔구 붙잡힐 테고,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시 추적하면 그만이야. 이제 너는 얽힐 필요가 없어.”

헤스터가 간절하게 일렀다. 애써 반박하려던 디아나도 끝내 수긍하고 말았다. 그녀를 위해 지하로 내려오는 것까지 감수한 언니에게 더한 걱정거리를 안겨 줄 수는 없었다.

그날 저녁은 그렇게 지나갔다. 자매는 평소처럼 인사하고, 제각기 방으로 돌아가 취침했다. 야심한 시각이면 간간히 들려오던 취객의 고성방가도 사라진 아주 고요한 밤이었다. 덕분에 자매는 이른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깨지 않고 기나긴 숙면을 즐겼다.

이튿날도 더없이 평화로운 하루였다.

느지막한 아침에 일어난 자매는 늘 그렇듯이 함께 요리하고 식사했다. 소박한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는 일상적인 대화와 웃음소리가 내리 흘렀다. 세상은 완연한 겨울인데도 가느다란 볕이 스미는 식탁은 홀로 봄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헤스터는 서재에서 학술지를 탐독했다. 지상으로 돌아온 이후로 그녀는 최대한 외출을 자제했다. 부득이하게 나갈 일이 생기거든 꼭 세드릭을 집으로 부르곤 했다.

디아나는 까탈스러운 고양이 미라벨의 털을 빗기거나, 침대에서 독서하며 시간을 보냈다. 못 견디게 지루한 오후에는 창가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저녁놀이 만개한 시간이었고, 디아나는 그제야 점심을 걸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군다나 매일같이 얼굴을 내밀던 이도 오늘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언니. 세드릭은 오늘 안 온대?”

“글쎄. 연락이 없네. 바쁜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디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 봬도 자일스의 수장이니 남들은 모르는 잡일이 산적할 만했다. 실은 지난 3주간 하루도 빼먹지 않고 방문했던 것이 별나다면 별난 일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한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매일 저녁 식사를 함께하던 세드릭이 부재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금방 낮잠에서 깨어난 디아나가 몽롱한 잠기운에 시달렸기 때문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흥미로운 이야기와 명랑한 웃음소리로 가득하던 식탁은 오래간만에 적막에 휩싸였다. 오직 식기 부딪치는 소음만이 이따금 들려올 따름이었다.

어느덧 어둑어둑한 밤이었다. 디아나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요새 유행하는 추리소설을 탐독하던 때, 헤스터가 찻잔 두 개를 쟁반에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엊그제 수리 경이 보내 준 찻잎으로 끓여 봤어. 이번에는 입맛에 맞을 거야.”

근래 디아나가 아프다는 소식을 접한 수리 알피어스는 건강에 좋다는 오만 가지 찻잎을 소포로 보내왔다. 안타깝게도 어젯밤에 마셨던 차는 좋은 말로도 달다고 할 수 없었으나, 다행히도 오늘 밤에 마실 차에선 향긋한 내음이 풍겨 났다.

헤스터는 디아나에게 찻잔을 건넸다. 눈을 감고 향기를 즐기던 디아나가 문득 말했다.

“언니. 저번에 세드릭이 선물한 과자 있잖아. 그거랑 마시면 좋을 것 같아.”

“참, 그렇겠구나.”

헤스터가 반색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디아나가 고개를 내려 찻잔 가득 차오른 찻물을 유심히 살폈다. 붉은 찻물에 미세한 물결이 점차로 번져 갔다.

디아나는 지체 없이 언니와 자신의 찻잔을 바꾸었다. 오래지 않아 헤스터가 과자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어머나. 로즈 벨리스톤에서 만든 과자인가 보네. 어서 먹어 보렴.”

“언니도 얼른 먹어.”

자매는 색색의 과자를 가운데 두고 한가로이 차를 즐겼다. 종종 오가는 대화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고작해야 내일의 식단이나, 목욕을 끔찍하게 여기는 미라벨을 어떻게 꾀어낼지에 대한 상의였다.

그리 찻잔을 거의 다 비웠을 무렵, 헤스터가 무척이나 곤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미라벨은 당근으로 구슬려야…….”

헤스터는 그대로 풀썩 침대에 쓰러졌다. 디아나는 조용히 협탁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리를 정리했다. 헤스터를 침대에 바로 눕힌 뒤 이불을 덮어 주는 손길이 자못 꼼꼼했다.

사실 디아나는 도체스터 천체 관측소로 갈 생각이었다.

아마도 헤스터도 그걸 직감해서 찻물에 수면제를 탔을 터. 비록 언니가 오늘 밤을 그냥 넘기지 않으리라는 디아나의 추측으로 실패했으나, 어쨌건 자매가 이대로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헤스터의 예감도 마냥 틀리지만은 않았다. 도리어 너무 들어맞은 탓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자매가 이토록 대립한 까닭은 애당초 대화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도체스터 천체 관측소에는 십중팔구 제노비아 자일스가 있을 것이며, 만일 없더라도 다른 함정이 숨어 있을 터였다. 그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헤스터의 주장이 일견 타당해 보였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걸 알면서도 고집을 부렸다. 논리적인 이유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제노비아 자일스가 보낸 여덟 유물이 그러했다. 어젯밤 헤스터와 세드릭, 그리고 몇몇 사냥꾼까지 달라붙어 대강 감식한 결과 유물은 진짜였다. 마법으로 정교하게 만들어 낸 가짜라면 필히 남았을 마법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디아나는 어느 정도 안심했다. 마그누스 프롬의 목걸이가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아홉 유물이 전부 모여야만 사자를 되살리는 마법이 완성되는 만큼 나머지 유물을 돌려보낸 것 자체로 조심스럽게 제노비아 자일스의 항복을 간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노비아 자일스는 너무나도 분명한 주소와 시간을 적어 보냈다. 그녀는 그 시각, 그 장소에 디아나 혼자만이 나타나리라 예상할 만큼 순진한 마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도체스터 천체 관측소를 염려하기엔 증거가 부족했다. 온종일 천체 관측소를 뒤진 사냥꾼들이 전하길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다. 그러니 사냥꾼이 득시글대며 몰려들 것이 빤한데도 굳이 디아나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디아나는 긴장된 마음을 추스르며 집을 나섰다. 불 꺼진 복도가 마치 헤아릴 수 없는 앞날을 보는 듯했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밤잠 설쳐 가며 고심했던 시간이 그녀에게 확신을 주었다.

안전히 보관한 여덟 유물을 믿었다. 유물이 그녀에게 있는 한 어머니를 되살리는 제물로 생을 마감할 일은 없었다.

또한 도체스터 천체 관측소에 진 쳤을 사냥꾼을 믿었다. 그들은 에드윈 베가의 추천으로 은밀히 모은 정예 중의 정예. 마법 사회를 어지럽히는 두 악인을 두고 볼 리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예전에는 귀한 줄 몰랐어도 이제는 알았다. 위대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몇 안 되는 재능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바로 직감이었다. 수없이 위험을 알리고, 도사린 악을 경고하던 직감이 이번에는 도체스터 천체 관측소로 향할 것을 종용했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이 끈질긴 악연을 끝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디아나는 결연히 아파트 정문을 열었다. 늦겨울 차디찬 밤바람이 밀려드는 가운데, 어디선가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나왔구나.”

디아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정문 가까운 벽에 삐뚜름히 기대어 섰던 세드릭이 느슨하게 몸을 일으켰다.

“네가 왜 여기에…….”

“천체 관측소로 갈 거잖아.”

세드릭은 검은 목도리를 조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법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목도리로 가려지지 않은 귓가가 불그스름했다.

디아나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너도 말리려고?”

만일 세드릭이 작정하고 만류하면 도리 없었다. 실은 헤스터도 직접적으로 막는 대신 우회하는 방식을 택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직도 집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디아나가 주장을 관철하기에 둘은 너무나도 강대했다.

하지만 세드릭은 뜻 모를 눈으로 마주 보기만 했다.

“말리면 들을 거야?”

일순 디아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세드릭이 조그맣게 웃었다.

“내가 말려서 들을 거였으면, 여기까지 나왔을 리도 없지. 그래도 헤스터 경은 어떻게 따돌렸구나.”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마법이라도 부리려고?”

디아나가 속으로 자책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방어적인 소리가 튀어나갔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기다린 사람에게 할 말은 결코 아니었다.

세드릭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도무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시선에 디아나가 애써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대답보다 손이 먼저 다가왔다.

“……같이 가 줄게.”

고요한 사위. 나지막한 음성이 점점이 스며들었다.

“혼자는 무섭잖아.”

천체 관측소에는 사냥꾼들이 몰려 있겠지만. 말을 덧붙인 세드릭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웃었다.

디아나는 내밀어진 손을 멀거니 보았다. 그의 선택이 영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손잡을지 말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는 듯 웃는 듯 묘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던 디아나가 조심스레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상하게도 겨울밤에 얼어 버린 손이 무척이나 따스했다.

도체스터 천체 관측소.

제노비아는 옥상 난간에 기댄 채로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공장이 내뿜는 회색 연기로 밤하늘이 가려진 도심과 달리, 오킹엄 교외는 마치 시골처럼 별빛이 맑았다. 아직은 기세 강강한 겨울의 별 발디비아가 시린 빛을 내뿜는 가운데 수억 별이 제각기 얼굴을 드러내는 면면이 참으로 경이로웠다.

“제노비아. 사냥꾼이 빈틈없이 포진했습니다.”

불현듯 헤센이 말을 걸어왔다. 옥상의 가장자리를 거닐며, 곳곳에 숨은 사냥꾼의 숫자를 헤아리는 기색이라기엔 자못 한가로웠다.

“낯모르는 얼굴이 제법 됩니다만, 그래도 발푸르기스 평의회는 우리를 쉽사리 벌하지는 못할 텝니다. 몬이 우리의 죄를 알듯 우리도 그들의 죄를 속속들이 아니까요.”

마법 사회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발푸르기스 평의회에는 사교 클럽 몬 출신이 꽤나 많았다. 물론 악명이 널리 알려진 헤센 그윈티르야 조금 고초를 겪겠으나,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제노비아 자일스는 별다른 무리 없이 풀려날 것이다. 그리고 헤센은 제노비아만 무사하다면 자진하여 괄티에로 벨리로 입성할 의향도 있었다.

“과연 진저가 올까요?”

헤센이 고개를 기우듬하며 물었다.

“게다가 꼭 대면할 필요가 있나요? 어차피 당신이 볼일 있는 사람은 진저가 아니라 세드릭 자일스잖습니까. 그에게는 전언을 전할 방법이 아주 많은걸요.”

제노비아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자 헤센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대답 듣기를 포기했다. 제노비아의 입이 바위보다 무겁다는 사실은 지난 수십 년 경험으로 알았다.

옥상은 고즈넉하게 가라앉았다. 사냥꾼이 사방에서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데도 유유히 밤하늘을 관측하는 것처럼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다. 그사이 시곗바늘이 힘차게 달려서 어느덧 10시를 앞두었다. 제노비아는 여전히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는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헤센. 축성경을 가져다주겠어요?”

마법으로 일으킨 빛 무리를 가지고 놀던 헤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곧 진저가 올 텐데요?”

“부탁합니다.”

그러자 헤센은 두말없이 옥상을 내려갔다. 이제 옥상에는 제노비아뿐이었다. 그녀는 무수한 별빛을 영접하며 손님을 기다렸다. 그동안 한없이 무념하고 싶었으나, 긴긴 기다림 사이로 자연스레 오래된 소회가 스며들었다.

✤      ✤      ✤

제노비아 자일스.

한때 그녀는 자애로운 마녀였다. 빛나는 재능과 영예로운 가문을 등에 업었으므로 명예와 재화가 마를 날이 없었다. 심지어는 대체로 강퍅하고 음습한 동족과 달리, 못난 자에게 베풀 줄 아는 마음씨를 지녔다. 전부 용 페넬로피의 덕이었다.

제노비아에게 페넬로피는 가족이요, 연인이요, 벗이었다. 지상의 어떤 단어로도 페넬로피를 논하지 못했다. 기억할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기에 말하지 않고도 서로의 마음을 짐작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들 사이는 의혹이 싹트기엔 지나치게 청명했다.

그래서 제노비아는 가진 것을 넉넉하게 베풀었다. 굶주린 동족을 후원하고, 고통에 신음하는 자를 치유했다. 태생부터 다정한 페넬로피가 고아와 병자를 두고 보지 못했기에 제노비아가 대신하여 그들을 돌본 것이다. 혹자는 그녀를 괴짜라 칭했으나, 제노비아에겐 세상 무엇보다 페넬로피의 기쁨이 귀했다. 용이 눈물이라도 흘리는 날엔 세상이 무너지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제노비아는 강대한 마녀. 강자에겐 언제고 찾아드는 권태가 하릴없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의 권태는 예지였다.

제노비아는 클레멘틴 자일스를 계승한 마녀로 일찌감치 미래를 보았다. 만인이 찬탄하는 능력이 그녀에겐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천년전쟁이 종식한 평화의 시대에는 예지가 귀하게 쓰일 날이 드물었으므로 제노비아의 예지는 때깔 고운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능력에 어느 날 의문이 생겼다.

어차피 바뀌지 않을 미래. 예언한들 무슨 소용인가?

제노비아는 이제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예지가 몹시 싫증 났다. 스스로 선별하지도 조절하지도 못하는 능력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꿈을 급습하여 바꾸지도 못하는 미래를 보여 주는 여명의 별 페베가 원망스러웠다. 마법이란 축복을 내려 주어 마땅히 존숭해야 하는 탄생성에게 그리도 무례했다.

하지만 제노비아는 그만치 삶이 지겨웠다. 강대한 마녀로 추앙받는 그녀도 예지 앞에서는 무력한 개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무력감이 분했다. 동시에 한계를 뛰어넘고픈 호승심이 발했다.

그리해 예지한 미래를 뒤바꾸려는 일련의 시도가 이어졌다. 모조리 실패하면서도 좀처럼 포기하지 못했다. 페넬로피가 근심하는 줄 알면서도 예지를 깨 버리겠다는 집념은 나날이 부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노비아가 예언했다.

“석 달 뒤 공회당에서 피가 낭자할 것입니다.”

석 달 뒤로 예정되었던 마법 공회는 긴급하게 두 달 앞당겨졌다. 자일스의 예지는 불변하므로, 석 달 뒤 공회당에서 참극이 벌어질지언정 일자가 변경된 마법 공회는 안전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모두 계략이었다. 제노비아는 일부러 거짓으로 예언했다. 이래도 과연 미래가 바뀌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으나, 지금껏 그러했듯 이번에도 미래는 불변했다.

그렇게 예언은 실현되었다. 다만 제노비아가 간과한 것은 피해자의 절규였다.

“내 거짓된 예언자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당시 베가의 수장이던 이자벨 베가는 공회당에서 벌어진 참사로 아들을 잃었다. 그녀의 진노는 제노비아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용을 향했다. 상실의 슬픔을 똑같이 대갚음하겠다는 일념이었다.

“페넬로피!”

페넬로피는 무려 사흘이나 벼락을 맞아 죽었다.

제노비아의 세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용을 잃은 자일스는 크게 분노했다. 일족은 이자벨 베가를 벌하기 위해 재판을 열었으나, 재판장에서는 도리어 제노비아의 예언을 의심하는 소리가 드높았다. 여명의 별 페베의 기억을 엿보는 자일스의 예지는 잘못 해석할 여지는 있어도 이렇게 틀릴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제노비아가 어떠한 억하심정으로 거짓 예언을 고했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제노비아는 재판장에서 다른 예언을 했다.

“이자벨 베가. 그대의 핏줄은 이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수많은 추측이 있었다. 혹자는 저주라 했고, 혹자는 예언이라 했다. 하지만 모두 틀렸다. 제노비아는 손수 이자벨 베가의 핏줄을 멸할 작정이었다.

그리 죄 없는 피가 흘렀다. 독사한 펠리시티 베가. 압사한 그리핀 베가. 그리고 살인귀에 손에 참혹하게 살해당한 캐롤라인 베가 일가. 이자벨 베가의 후계자였던 캐롤라인 베가를 위해서는 특별히 미치광이로 이름난 ‘붉은 손’ 셀레나 아스톨포를 베가의 본성으로 유인하기도 했다. 눈앞에서 모든 직계를 잃은 이자벨 베가마저 덧없이 절명했으니, 감히 페넬로피를 해한 대가로는 충분했다. 그러나 제노비아의 상실감은 여전했다.

제노비아는 이제 자살을 생각했다. 그녀에게 페넬로피 없는 삶은 무가치했으므로, 더는 살아갈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생을 끊어 내기 직전, 헤센 그윈티르가 예상치 못한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었다.

“사자를 되살리는 마법이 있습니다. 부디 생을 포기하지 마세요.”

다시는 페넬로피를 만나지 못하리라 짐작했던 제노비아는 새로운 길목에서 눈을 떴다. 바로 사랑하는 용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먼 옛날, 별의 소리를 듣는 마법사가 남긴 유산은 아홉 영웅의 손에 아홉 갈래로 나뉘었다. 마법 역사에 통달했던 제노비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전해져 내려온 아홉 유물의 진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극소수였다. 일전에 은덕을 베풀었던 헤센이 그중 하나라는 사실은 제노비아에게 더없는 축복이었다.

“그대에게 진심으로 감읍합니다.”

“당신이 살아갈 수만 있다면 족합니다. 당신이 내게 새로운 생을 선사했던 것처럼 나도 당신에게 살아갈 의미를 주고 싶어요.”

둘은 세상을 누비며 아홉 유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래도 명색이 아홉 영웅이 남긴 유물이라고 몰래 훔쳐 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법회로를 풀어내는 데 비상한 헤센의 능력으로, 또한 부활에 관심을 보이는 사교 클럽 몬의 몇몇 회원 덕분으로 무사히 유물의 절반을 모았다.

그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기쁨에 도취된 제노비아는 진실로 페넬로피와 재회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겼다. 페넬로피의 다정한 음성이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용을 되살리겠다고?”

퀸투스 아스톨포의 유물을 훔치러 베니그노의 지하성으로 숨어든 날, 둘은 백발이 성성한 우르바노 아스톨포와 마주쳤다. 제노비아는 협조를 구할 셈으로 차분히 설명했으나, 우르바노는 폭소할 뿐이었다.

“유물은 이곳에 없습니다. 원체 시절이 불안하여 외딴곳에 숨겼지요.”

“어디 있습니까?”

“찾지 마십시오. 유물로는 그대의 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제노비아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딱하여라. 그토록 총명했던 예언의 마녀가 어찌 이리도 순진해졌답니까? 진정으로 모르겠습니까?”

우르바노가 노환으로 죽어 가는 눈을 탁하게 빛냈다.

“아홉 유물은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마법입니다. 영웅시대에 사람이란 도대체 누굴 말하겠습니까?”

순간 벼락이 치는 듯했다.

영웅시대.

악룡이 산정을 지배하고, 거인이 돌산을 거처 삼으며, 요정이 숲을 가득 메우던 머나먼 옛날. 수많은 종족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세력을 불려 가던 시절에 다른 종족을 사람으로 칠 리 없었다. 그 시절, 마녀에게 용은 더없이 강대한 괴물이고, 다른 종족은 버러지에 불과했다. 인간을 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했던 것이 불과 수백 년 전이다.

“위대한 마법사는 괴물을 되살리는 마법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되살리는 마법을 남겼지요. 한데 그대의 용이 사람이던가요?”

노인의 웃음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제노비아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내가 다른 방도를 찾아내겠습니다.”

헤센이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제노비아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 크게 부풀었던 희망인 만큼 삽시에 꺼져 버린 충격이 더했다.

이제 제노비아는 술과 약으로 시간을 죽였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나, 강대한 마력이 깃든 몸은 쉽사리 죽지도 못했다. 겨우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즈음에는 헤센이 나타나 도로 살려 내곤 했다.

“사는 의미가 없어요. 날 그냥 죽게 둬요.”

“죽겠다는 나를 굳이 살려 낸 게 당신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이대로 떠나 버리면 안 돼요. 나는 어찌하라고요?”

헤센은 그녀의 죽음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노비아는 자살조차 포기했다. 무언가에 절절히 매달리기에 그녀는 너무나 약했다.

시간은 흘러갔다. 제노비아는 모래알처럼 덧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페넬로피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이란 그리도 무가치했다.

“그리젤다 솔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몰래 장례식을 다녀온 헤센이 말했다.

“어린 딸이 어미를 빼닮았더군요.”

제노비아는 평소처럼 침대에 흐트러진 채로 누워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았다.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광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인물은 그리젤다보다 낫던걸요.”

“첫째는 그렇죠. 하지만 둘째는 꼭 어린 그리젤다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둘째라니요?”

돌연 제노비아가 황망히 윗몸을 일으켰다. 헤센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지로 보지 못했습니까? 장례식에 어린 둘째 딸이 참석했습니다. 누가 봐도 그리젤다의 딸이던데요.”

제노비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술과 약으로 기억이 희미해졌다기엔 언제나 예지만은 또렷했다. 그리고 꿈에서 보았던 그리젤다의 장례식에는 오직 외동딸뿐이었다.

그 순간, 오래전 잊어버렸던 만남이 떠올랐다.

‘미래를 바꾸고 싶나요?’

‘가능하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소원, 내가 이뤄 줄게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제노비아는 당장에 그리젤다의 둘째 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바바라 자일스가 이미 장례식에서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인 뒤였다. 아무리 제노비아여도 함부로 명망 높은 마녀를 건들 수는 없었다.

하릴없이 그리젤다가 둘째 딸을 맡겼던 위탁 가정으로 향했다. 아이를 돌보았던 반편이 노파는 다행히 그 나이에도 제법 기억이 온전했다.

“맞아요. 붉은 머리 마녀였어요.”

“따로 아이에게 남긴 것은 없습니까?”

헤센은 노파에게 금화를 쥐여 주며 은근히 속삭였다. 노파는 얼른 금화를 받아 챙기며 그들을 안으로 이끌었다.

“메모 두 개를 남겼어요. 실은 장례식 당일에 급보가 와서 아이가 짐을 전혀 챙기지 못했거든요. 아마 메모도 두고 갔을 거예요.”

침대를 뒤적거리던 노파가 이내 베개 밑에서 색이 바랜 종이를 두 장 꺼냈다. 제노비아는 첫 번째 메모를 열어 보았다.

「사랑한다.」

물끄러미 메모를 바라보던 제노비아가 픽 웃었다. 아무래도 그리젤다는 통속소설을 무척이나 감명 깊게 읽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범한 인간 흉내를 낼 리가 없었다.

제노비아는 미련 없이 다음 종이를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악마의 이름인가요?”

헤센이 종이를 힐끔거리며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제노비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체 이름이 아닙니다.”

그날부터 둘은 악마학에 관련된 서적을 최대한 쓸어 모았다. 대개 악마학 서적에는 악마의 이름이 꼭 하나씩은 적혀 있었다. 그들을 차례로 소환하며 불완전한 악마의 이름에 대해 물었다.

[마르고트 솔. 우리의 위대하신 동방 군주시다.]

마침내 어느 악마가 답을 주었다. 그러나 제노비아는 예상보다 대단한 악마의 정체보다 이름에 더욱 놀랐다. 그리젤다와 악마의 이름이 겹치는 것을 마냥 우연이라 치부할 수 없었다.

제노비아는 마르고트 솔을 소환했다. 산양의 머리에 사람과 유사한 육신을 지닌 악마는 지금까지 소환했던 무지렁이 악마와는 판이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으로 살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제노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그리젤다의 이름을 지닌 겁니까?”

[그리젤다가 날 만들었으니까.]

악마는 권태롭게 대답했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던 제노비아가 문득 흐느끼기 시작했다. 슬피 우는 소리가 아니었다. 광증이 도진 웃음소리였다.

“설마, 진짜였을 줄이야! 정말로 생명을 창조했을 줄이야!”

제노비아는 아주 오래간만에 환희로웠다. 아홉 유물을 모아 페넬로피를 되살리겠다는 계획이 무너진 이래 이토록 기뻤던 적이 없다. 숨 막히는 삶에 얼핏 탈출구가 보이는 듯했다.

“그리젤다가 그립지 않습니까?”

악마의 눈이 처음으로 일렁였다. 제노비아는 그것으로 악마에게 내재된 깊은 그리움을 알아챘다.

“내게 그녀를 살려 낼 방도가 있습니다.”

악마와 마녀는 그리 결탁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한 가지, 그리젤다의 부활이었다.

그제야 심각성을 알아차린 헤센이 근심하며 물었다.

“제노비아. 어찌해서 그리젤다를 부활시키려는 겁니까? 아무리 그리젤다가 생명을 둘이나 창조했다 한들 오래전에 죽은 페넬로피를 되살릴 수 있을까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것.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 모두 불가능의 영역입니다. 모두 기적이에요. 이미 기적을 이룬 마녀라면 다른 기적도 충분히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 낙관할 수만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전자보다 후자가 어렵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잖아요.”

“헤센. 누가 뭐래도 나는 그리젤다를 되살릴 겁니다.”

제노비아가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 내게는 이것밖에 남지 않았어요. 올바른 선택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당장에 동아줄이라도 잡지 않으면 내가 어찌 되겠습니까? 진정으로 날 살리고 싶다면 말리지 마십시오.”

그에 헤센은 말문을 닫았다.

계획은 이러했다. 디아나 솔이 바바라에게서 독립할 때까지 아홉 유물을 모은다. 그리고 하늘의 질서가 단순한 지하로 디아나를 납치하여 그곳에서 그리젤다를 부활시킨다.

지극히 단조로운 계획이지만, 세상사 뜻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일전에 모으지 못했던 나머지 절반의 유물을 훔쳐 내기가 무척이나 지난했다. 특히 이즈리얼 알피어스의 유물을 물려받은 휴고 알피어스를 자택에서 쫓아내기 위해 니올로 팔리아치와 잉그람 무장 혁명군을 이용했을 적, 설마 그네들이 점거한 기차에 디아나 솔이 탑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지막에 악마를 소환했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객사했다면 모든 계획이 좌초될 뻔했다.

문제는 이후로도 산적했다. 동화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쳤던 헤센 그윈티르는 마그누스 프롬의 유물을 찾으러 동화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디아나 솔과 세드릭 자일스를 마주쳤다. 디아나가 그리그 프롬의 동화책으로 들어온 경위는 모르겠으나 세드릭 자일스의 사정은 대강 알 만했다. 그의 아버지, 에드윈 베가는 오래전부터 헤센을 뒤쫓는 사냥꾼이었다. 필시 그와 연관된 게 틀림없었다.

헤센은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낙뢰를 맞아 유물을 빼앗겼다. 하지만 제노비아는 괘념치 않았다.

“그나마 디아나에게 유물이 있어 다행입니다.”

제노비아는 아예 마지막 남은 퀸투스 아스톨포의 유물까지 디아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우르바노 아스톨포는 그리젤다에게 유물을 맡겼고, 그리젤다는 그걸 거인에게 맡겼다. 여기까지 알아내는 데만도 몇 년이 걸렸지만, 거인이 가득한 은신처로 숨어들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은인의 딸이라면 거인도 받아들여 주겠지요.”

일리 있는 생각이었다. 제노비아는 아홉 유물과 관련된 연구를 조력하던 사교 클럽 몬 덕분으로 상아탑의 사자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오직 진리만을 탐구하는 그들은 ‘그리젤다의 부활’이란 불가능한 목표에 흔쾌히 찬동했다.

그리고 디아나는 퀸투스 아스톨포의 유물을 찾아냈다. 마침내 부활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한데 이렇게 무참히 실패할 줄이야…….”

제노비아는 쓰게 웃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디아나를 무사히 지하로 데려왔던 날, 암흑의 별 칼리스토만이 빛나는 지하에서 공들여 날짜를 정하던 나날, 갑작스러운 용의 침공과 사라진 디아나, 그리고 끝을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목걸이. 모두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기적에 가까이 다가섰는데,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젤다는 두 번이나 이루었던 기적이 어째서 제겐 이다지도 어려운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릇의 차이일 터.

제노비아는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점차 명료해지는 시야로 두 명의 손님이 들어왔다. 제노비아는 습관처럼 미소 지었다.

“오래간만입니다, 디아나. 그리고 처음 뵙는군요, 세드릭.”

디아나는 남몰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수십의 사냥꾼이 어둠에 숨어 주위를 에워쌌는데도, 제노비아 자일스는 손짓으로 악마를 부리던 지하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변함없이 단단하고, 변함없이 위엄 있었다. 마치 작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도가 있는 듯 숫제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무사히 지상으로 돌아와 다행입니다. 행여나 그곳에 발이 묶일까 봐 걱정했어요.”

제노비아가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디아나는 기가 막혔다.

“애당초 지하로 끌려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이에요?”

“걱정했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이제 나는 그대를 해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제노비아는 양팔을 난간에 올리며 한가롭게 등을 기대었다.

“어젯밤 여덟 유물을 받지 않았던가요? 그대도 알다시피 유물이 없으면 그리젤다를 되살리지 못합니다. 그 정도면 그리젤다의 부활을 포기했다는 의사를 확실히 전한 듯한데요.”

“아하. 그런데요, 이왕 포기할 거였으면 나머지 하나도 내놓지 그랬어요. 아무리 찾아도 마그누스 프롬의 목걸이가 없어서 이번엔 어떤 계략을 꾸미는 건지 한참을 고민했잖아요.”

“목걸이는 이제 내 손에 없습니다.”

무력한 음성이었다. 순간 디아나는 놀라 말을 잃었다.

“……없다고요?”

“네.”

“어째서요?”

“잃어버렸습니다.”

제노비아는 시름없이 읊조렸다.

“통곡의 절벽 너머 끝을 모르는 구렁텅이로 떨어졌습니다. 몇 날 며칠 목걸이를 찾아 헤맸지만, 어디도 보이지 않더군요. 의심하지 않아도 좋아요. 이제 아홉 유물이 한데 모이는 일은 없을 테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잃어버렸다니. 구렁텅이로 떨어졌다니. 모든 여건이 갖춰진 상황에서 부활의 날을 공들여 잡을 정도로 신중했던 마녀가 그리 귀중한 유물을 함부로 다룰 리 없다. 설령 떨어트렸어도 곧장 마법으로 주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오래지 않아 기억해 냈다. 목걸이를 건네주던 그리그 프롬의 말소리를.

‘마그누스 프롬의 기원이 당신을 지켜 줄 겁니다.’

과연 그는 앞날을 꿰뚫었던 걸까. 그러나 예지는 오직 <교활한 자일스>만의 전유물이었다. 무려 500년 전의 마법사가 작금의 현실을 헤아렸을 리 없다. 심지어 늪지의 마법사는 오래전에 죽은 그리그 프롬의 아주 자그만 일부분일 뿐, 살아 있는 마법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저 우연이란 걸 알면서도 어쩐지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래서 무슨 용건입니까?”

여태 잠잠하던 세드릭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제노비아는 그제야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초면임에도 제법 따스한 눈길이었다.

“우리는 꽤 가까운 친족이죠. 바바라가 나의 종질이니, 그대는 내 손자뻘이겠군요.”

“이제 와 혈육 타령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저런,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요. 가족 운운하며 살 길을 마련해 달라 매달리진 않을 겁니다. 어차피 그럴 사이도 아니잖습니까.”

제노비아가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그대에게 부탁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실은 그대에게 용건이 있으니까요.”

세드릭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제노비아는 개의치 않았다.

“프레스턴 은행 본점에 소피 필립스란 이름으로 금고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 페넬로피의 유골이 있어요.”

잠시 말이 끊어졌다. 제노비아는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을 완성했다.

“부탁이니 페넬로피의 유골을 동족에게 전해 주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역소환진으로 지하에 내려간들, 마법을 부릴 수 없으니 통곡의 절벽을 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페넬로피의 유골을 동족에게 전하는 방법은 지상의 유일한 용 윈터를 통하는 길뿐이었다.

세드릭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참으로 뻔뻔하군요. 감히 디아나를 납치해 놓고 그런 말이 나옵니까?”

“종국에는 모두가 무사하지 않나요.”

“그건, 적어도 당신이 할 말은 아닙니다.”

세드릭이 이를 갈며 말했다. 제노비아를 쏘아보는 눈빛이 자못 선득했다.

“저기,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갑자기 디아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노비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애써 꼿꼿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도대체 어머니를 되살려서 뭘 하고 싶었던 건가요?”

마르고트는 그리젤다가 그립다고 했다. 하지만 제노비아는 딱히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젤다의 부활에 무척이나 집착하면서도 그리젤다 자체에는 무관심했다. 그렇다고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라기엔 지나치게 절절했으니, 무언가 감정적인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페넬로피를 살려 달라 청할 생각이었습니다.”

제노비아는 쓸쓸한 얼굴로 읊조렸다. 디아나는 잠시 침묵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속내가 음산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럼 유물로 되살리면 됐잖아요.”

“유물은 오직 동족만을 되살립니다. 용은 살려 내지 못해요.”

“그래서 날 제물로 바치려 했다고요?”

“네.”

디아나의 얼굴이 허탈하게 일그러졌다. 차라리 학문적 호기심이었다면, 속이라도 풀리게 마구 욕을 퍼부었을 테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감정적인 이유라면 별다르지 않으리라 짐작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사람이 이토록 이기적일 수는 없었다.

“당신은 자기에게 소중한 것밖에 모르죠. 죽은 용이 아니면 세상에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긴 하나요?”

“내게 소중한 것을 아끼며 살아가는 데도 벅찹니다. 어째서 다른 무가치한 것까지 귀하게 여겨야 합니까?”

“당신에게 소중하지 않다고 무가치한 건 아니잖아요.”

디아나가 간절하게 속삭였다.

“당신에게 용이 소중하듯 나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용을 아끼듯 날 아껴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그런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날 희생시키려 들어요?”

“내겐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까요.”

제노비아가 단조롭게 대꾸했다. 디아나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구 솟구치던 분노가 맥없이 사그라졌다.

“……내게 미안하긴 해요?”

사과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만한 인물이라면, 애당초 다른 사람을 억지로 희생시키면서 원을 이루려 들지는 않았을 테니. 다만 아주 조금의 가책이라도 느끼길 바랐다. 훗날 사냥꾼에게 잡혀 벌을 받더라도 스스로 잘못한 줄은 알길 바랐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조차 불가능한 사람이 있었다.

“당신은 정말 구제불능이야.”

디아나가 질린 목소리로 못 박았다.

“그런다고 죽은 용이 기뻐할 것 같아요? 남을 죽이면서 얻어 낸 부활이 만족스러울 것 같냐고요! 페넬로피가 정상적인 용이라면 절대로 아닐걸요. 제발 정신 차려요.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역겨운 집착이고 독단이지!”

“그리 성낼 필요가 있나요. 어차피 페넬로피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 그 아이의 심중은 헤아릴 길이 없는 것을요.”

지극히 무기력한 대답이 이어졌다. 디아나는 끝내 진력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페넬로피가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에요. 이토록 끔찍한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을 텐데.”

“……페넬로피가 가엾습니까?”

제노비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내 부탁을 들어줘요. 나마저 없다면 이 넓은 지상에서 그 아이의 유골을 돌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죽어서나마 동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해 줘요.”

광기 어린 소리였다. 디아나는 숫제 창백해진 안색으로 뒷걸음질했다. 자신을 비난하는 말조차 저이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다. 마지막까지 제 하고 싶은 말만 쏟아 내는 행태가 너무나도 지독했다.

세드릭이 몹시 질색하는 얼굴로 확언했다.

“당신이 아니라 페넬로피를 위해 하겠습니다. 대신 마땅한 벌을 받으십시오.”

“벌?”

“이자벨 베가 일가의 몰살과 관련하여 죄가 있다면 낱낱이 밝히고, 금기를 저지른 죄와 디아나를 납치한 죄를 받으란 말입니다. 설마 사냥꾼들이 헤센 그윈티르만 노린다고 생각하진 않겠죠?”

갑자기 제노비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고요한 밤중에 낭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드릭이 슬며시 낯을 찌푸릴 무렵에야, 제노비아는 가까스로 웃음을 갈무리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죄라니요. 이제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누구도 그녀의 말을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노비아는 자세히 설명할 기력조차 없었다. 극심한 피로가 사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듯했다.

제노비아는 고개를 한껏 꺾었다. 쏟아질 듯 많은 별들이 하염없이 펼쳐진 하늘. 이렇게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면, 세상사 모두가 무의미하게 느껴지곤 했다. 지상의 역사가 헤아릴 수 없이 오래 흘러가는 동안 오직 별빛만은 그대로였으니, 저 망막한 하늘에 비하면 사람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그러니 지금의 시련도 고통도 슬픔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을.

“이만 떠나고 싶어…….”

제노비아의 몸뚱이가 기우뚱 뒤로 기울었다. 중심을 잃은 몸이 순식간에 난간을 넘었다. 그리 덧없이 추락하는 도중에도 별빛이 무수하게 쏟아져 내렸다. 언제나 지상을 굽어보는 여명의 별 페베도 딸의 마지막을 놓치지 않았다.

사랑하는 별, 동시에 증오하는 별.

도대체 내게 무력한 앞날을 보여 주는 까닭이 무언가요?

어쩌면 이렇듯 삶이 권태로운 것도, 하나에 집착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나약한 정신도 전부 별을 미워했기 때문인지 몰랐다. 일평생 감사해도 모자란 별을 감히 증오한 죄로 이토록 끔찍한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끝이다.

제노비아는 눈을 감았다.

✤      ✤      ✤

헤센은 축성경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던 참이었다. 지금쯤 제노비아는 디아나 솔과 세드릭 자일스를 대면하고 있을 터. 과연 세드릭 자일스가 제노비아의 부탁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으나, 페넬로피의 유골 따위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제노비아를 무사히 살려 내는 걸로 족했다.

그때, 창문 너머로 추락하는 제노비아가 눈을 스쳤다.

멀거니 창가를 응시하던 헤센이 축성경을 내던지며 달려갔다. 잠긴 창문을 어찌어찌 깨부수고 고개를 내미니, 머리가 깨진 채로 죽어 가는 제노비아가 보였다. 일순 심장이 덜커덕 흔들렸다.

제노비아. 그녀는 일찍이 낫지 않는 부상으로 죽음을 바라던 헤센에게 고통스럽지 않은 생을 선사했다. 중세에 횡행했던 인형술을 접목하여, 건강한 인형의 몸에 정신만 이식한 것이었다. 종종 본체와 연결이 약해질 때면 마법이 뜻대로 이루지지 않았으나, 고통스럽지만 않다면 그쯤은 능히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노비아는 새로운 생을 열어 준 사람이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치료해 줄게요.”

아프지 않은 삶은 값지다.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통에 몸부림쳤던 헤센은 건강한 삶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알았다. 그래서 늘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제노비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했듯, 그도 그녀에게 똑같이 베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헤센의 몸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졌다. 남은 것은 차갑게 식어 가는 인형뿐이었다.

콰르릉!

평화로운 줄리모어 군도에 별안간 낙뢰가 떨어졌다. 해변에서 한가로이 헤엄치던 인어들이 깜짝 놀라 물속으로 숨어들었다. 새 우짖는 소리조차 멈춘 바닷가는 무척이나 적요했다.

설리번은 그답지 않게 경악한 얼굴로 에드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세드릭이 내리던 낙뢰를 본 적 있지만, 금방에 비한다면 그건 애들 장난이었다. 한번 내리치면 막을 방도가 없다던 베가의 낙뢰. 저토록 위압적인 줄은 미처 몰랐다.

끼이익.

낙뢰를 된통 맞은 벽면이 점차 갈라지기 시작했다. 설리번은 다리가 풀린 나머지, 엉금엉금 기어서 에드윈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자 발아래, 바위 더미에 교묘하게 감춰져 있던 조그만 건물이 선명하게 보였다.

기실 건물이라기엔 사방이 막힌 네모난 방에 가까웠다. 마법사들이 문짝만 보관하며 흔하게 사용하는 창고와 비슷했지만, 저건 단순한 창고가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비밀스럽고 음습한 존재가 숨어 있었다.

이윽고 벽면이 완전히 쪼개졌다. 그리고 붕괴된 벽돌 사이로 새카맣게 타 죽은 사체가 언뜻 보였다.

“저게 헤센 그윈티르예요?”

설리번이 코를 움켜쥐며 물었다. 에드윈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사냥의 종결이었다.

✤      ✤      ✤

사냥꾼들이 조용하게 화단으로 모여들었다. 정원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잔디밭에 제노비아가 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즉사했을 출혈이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대한 마녀는 이 정도 상처로는 죽지 못했다. 당장 의사를 붙인다면, 살아서 재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제노비아가 난간 너머로 추락한 뒤 서둘러 아래로 내려온 디아나는 멀찍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아직 그녀의 숨이 붙어 있는 걸 알면서도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여기부터는 사냥꾼의 소관이었다. 저들이 제노비아 자일스의 죄를 낱낱이 밝혀, 재판관이 중형을 선고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사교 클럽 몬 출신이 대거 포진한 발푸르기스 평의회에서 얼마나 공정한 판결을 내릴지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디아나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직감을 믿어 여기까지 오긴 했어도, 이런 결말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바라던 것은 제노비아 자일스가 처참한 몰골로 사냥꾼에게 끌려가는 모습이지, 결단코 자살은 아니었다. 제노비아는 여생으로 죗값을 치러야 했다. 미약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때, 여러 사냥꾼이 다급히 곁을 스쳐 지나갔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던 디아나는 뜻밖의 사람을 마주했다. 눈을 흐리멍덩하게 뜬 채로 허공에 실려 가는 이는 다름 아닌 헤센 그윈티르였다.

“그는 죽었어.”

세드릭이 천천히 다가왔다. 디아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헤센을 바라보았다.

“……죽었다고?”

“아버지가 그의 본체를 파괴하신 모양이야. 저건 본체와 연결되었던 인형일 뿐이고.”

디아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죽음이 아직은 실감 나지 않는 듯, 한때나마 헤센 그윈티르였던 인형에서 도무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물끄러미 그녀의 옆얼굴을 응시하던 세드릭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노비아 자일스는 마땅한 벌을 받을 거야.”

디아나가 느리게 그를 돌아보았다. 세드릭이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며 단단히 새기듯 말했다.

“내가 그리 만들게.”

그는 자일스의 새로운 수장이자, 발푸르기스 평의회에 소속된 마법사. 또한 제노비아의 혈족이기에 이번 사건에서 제법 중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힘겨운 투쟁이 될 것이다. 사교 클럽 몬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제노비아를 지원했던 이가 무려 칼롯타 팔리아치와 루이자 볼크하르트며, 그들에게 찬동하는 이가 얼만지도 정확히 몰랐다. 게다가 자일스 가문 내부에서도 명성 높은 수장이었던 제노비아를 동정하는 목소리가 높을 터였다. 절반은 베가의 피를 타고난 세드릭을 늘 못마땅하게 여기던 가문의 원로들이 이만한 사건을 두고 볼 리 없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결연했다. 마치 앞으로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디아나는 그게 이상했다. 굳이 따지자면, 본인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일이 아닌데도 이렇게나 힘든 길을 자처하는 이유를 도무지 몰랐다. 가까운 혈육도 아니면서, 자진하여 지하로 내려왔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어디 마법사가 그토록 남을 위하는 존재던가.

아니다, 실은 디아나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언젠가 예감했으나, 낯설어 지금까지 외면해 왔던 이유. 디아나는 그걸 알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이율배반적이지만, 진실한 속내가 그러했다. 그녀는 겨우 돌아온 일상에 갑작스러운 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여태껏 피해 왔던 그의 감정을 마주하기가 무척이나 겁났다.

다만, 지금은 건네야 하는 말이 있었다.

“……고마워.”

세드릭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조금 놀란 눈치였다. 디아나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고마워.”

언니를 잠재우고 집을 나서기까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사냥꾼이 있으니 괜찮으리라 스스로 다독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든 가야 하는데도, 혼자서 제노비아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찔했다. 행여나 다시 지하로 끌려가는 것은 아닐지, 어머니를 되살리는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아닐지. 이루어질 수 없는 미래가 자꾸만 발목을 잡아챘다.

그래서 세드릭을 만났을 때 내심 안도했다. 붙잡지 않고, 뜻을 강제하지 않고, 여기까지 동행해 주어서, 실은 눈물겹게 고마웠다.

어느덧 지척으로 다가온 디아나가 힘겹게 팔을 뻗었다. 떨리는 손으로 세드릭을 꼭 끌어안았다.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간신히 넘쳤다.

“……그때, 구하러 와 줘서 정말 고마워.”

암암한 세상에 나타난 단 하나의 구원자.

둔덕을 넘어 달려오던 세드릭은 그다지도 기적적인 존재였다. 살아 돌아가리라 애쓰면서도 한편으로는 덧없이 꺾여 가던 희망이 만개하는 순간.

디아나는 그날을 생각하며 조금 울었다. 너무 급박하여 그날엔 미처 쏟아 내지 못했던 상흔이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가만히 숨만 내쉬던 세드릭이 아주 더디게 손을 올렸다. 여윈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제법 다정했다.

✤      ✤      ✤

이튿날.

디아나는 해 저무는 저녁에 어머니의 묘비를 찾았다. 불그스름한 노을로 물들어 가는 공동묘지는 평일답게 아주 한산했다. 묘지를 찾은 조문객도 일찌감치 자리를 떴는지, 세월에 무뎌진 묘비마다 간간히 꽃다발이며 사진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리젤다의 묘비만은 텅 비어 있었다. 홀로 묘비를 돌보던 헤스터도 요사이 정신이 없어서 미처 이곳에는 들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장례식 이래 처음으로 어머니를 찾은 디아나는 서름한 얼굴로 가만히 묘비를 내려다보았다.

Griselda Sol

1830 ― 1866

아무래도 서먹한 이름이었다. 디아나에게 어머니란 아홉 영웅만큼이나 머나먼 존재였다. 만인이 위대하다고 찬양하지만, 정작 그녀는 어머니의 목소리 한번 들어 보지 못했다. 그래서 디아나가 아는 어머니는 눈을 감은 채로 관에 가지런히 누운 송장에 불과했다.

디아나는 슬며시 한 손으로 묘비를 쓸었다. 공동묘지에 묻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어머니는 묘비 아래 잠들어 있지 않았다. 위대한 마녀의 시신은 오래전 사악한 악마가 지하로 데려갔으므로, 여긴 쓸모없는 묘지고 비어 버린 관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흔적이 남은 곳이 여기뿐이었다. 광활한 지상에서 어머니가 보고파 갈 곳이란 고작해야 가짜 묘지밖에 없었다.

“……날 조금이라도 사랑하긴 했나요?”

아주 어릴 적, 디아나는 항상 두 개의 쪽지를 품어야만 잠들었다. 하나는 사랑한다는 쪽지고, 다른 하나는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 고작 그뿐인데도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전언이라기에 그리도 소중히 여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급보에 황급히 위탁 가정을 떠나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던 빛바랜 쪽지가 그 시절엔 그토록 애석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이제 어머니의 사랑을 믿지 못했다. 어린 시절 사랑을 속삭이던 전언도, 어머니의 사랑을 확신하는 언니의 말도 더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나 커다란 비밀을 알아 버렸다. 고작 자일스의 예지를 깨트리고자, 여명의 별 페베의 시선을 피하고자 탄생한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리해 기적이지만, 기적에 꼭 사랑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언니는 몰라요. 언니는 아직 어머니를 사랑하니까. 아마도 평생 그리워할 테니까 말하지 못하겠어요.”

그렇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건 그녀로 족했다. 디아나는 언니까지 구렁텅이로 끌어들이긴 싫었다. 이건 그녀만의 숙명이었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기에, 혼자 짊어지고 무덤까지 이고 들어가야 하는 비밀이었다.

“언니가 그렇게나 어머니의 사랑을 확신하는 이유가 궁금해요. 사실 내겐 잘 와닿지가 않거든요. 그렇잖아요. 어머니 같은 분이 자식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아꼈을 리가 없는데…….”

디아나는 담담하게 읊조렸다. 내리뜬 잿빛 눈이 어슴푸레하게 빛났다.

“하지만 말예요. 실은 어머니가 날 사랑하지 않았어도 괜찮아요.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았어도 상관없어요. 어머니가 날 사랑했든 사랑하지 않았든, 아버지가 있든 없든 나란 존재는 변함없으니까요.”

그런 건 실재하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어머니가 사랑했다고 디아나 솔이 귀중한 존재가 되고,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찮은 존재가 되진 않으므로. 그러니까 디아나에게 그런 건 하등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나예요.”

디아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자그만 음성이 무척이나 단단했다.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 고요하게 늘어선 묘비가 차츰 어스레한 황혼으로 잠겨 갔다. 인적 없는 공동묘지에는 한적한 적막만이 감돌 뿐. 언젠가 유족들이 남긴 꽃다발과 사진, 여러 자질구레한 소품이 외로운 묘비를 극진하게 위로했다.

그중 끄트머리 묘비에는 시들어 가는 화관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공들여 만든 기색이 다분한데도 이상하게 매듭이 엉성한 화관이었다. 이걸로 주인 잃은 묘비를 달래진 못하겠으나, 적어도 외로운 거인에겐 위로가 될 터. 따뜻한 손길로 피어난 화관은 그만큼이나 따뜻하게 이울어 갔다.

문득 바람이 불어왔다. 말라붙은 꽃잎이 섧게 흔들렸다.

에드윈이 말했다.

“고대어로 악마는 뱀입니다. 그 시절 마법 사회에는 악마란 개념이 없었어요. 은연중 뱀이라 불리던 종족에 악마란 이름이 붙은 것은 사실상 고대 말기입니다.”

악마는 산티그마 교단이 주창하는 신이 버린 종족이며, 어둠을 모시는 악의 무리다. 하지만 오늘날 악마라 불리는 종족은 경전 속 악마와는 전혀 달랐다. 오래전 그들의 흉측한 외형에 질겁한 인간이 멋대로 악마란 이름을 붙였을 뿐, 실제로는 용이나 거인 같은 지하 종족에 불과했다.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천년전쟁이 벌어진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마법 사회가 악마와 결탁했다는 의심이었지만, 실상 인간이 배척하는 악마는 상상 속의 존재니까요. 자기네들이 멋대로 악마라 명명한 존재에게 경전이 가르치는 삿된 편견을 씌우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죠.”

“악마의 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곰곰이 고심하던 디아나가 물었다.

“왜, 세상에는 여러 유언비어가 있잖아요. 악마가 심심풀이로 도시를 멸망시킨 일화, 악마의 손이 닿아 불임이 된 마녀의 이야기, 악마에 홀려 동족을 배반한 마법사의 전설. 그런 건 스승님께서도 가르쳐 주셨는걸요.”

“디아나 양이 생각하기엔 어떻습니까? 악마가 진정으로 무시무시한 존재일까요?”

그에 디아나는 말문이 막혔다. 지하에서 보았기로, 악마는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무지막지하진 않았다. 무척이나 잔인하고 끈질기지만, 눈 깜짝할 새 도시를 멸망시킬 만큼 강대하진 못했다.

“악마가 그렇게나 강력한 존재였다면, 지금처럼 악마학이 경시될 리 없지요. 악마의 진정한 강함은 머리가 파괴되지 않는 이상 끊임없이 육신을 재생시키는 놀라운 생명력과, 어마어마한 개체 수입니다. 하지만 그런 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죠. 실제로 사교 클럽 몬에서 악마학은 진즉 사장된 주제입니다.”

“그럼 어째서 악마 소환이 금해진 건가요?”

“악마 소환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지나치게 위험하니까요. 악마는 생각만큼 위험하지 않지만, 마녀와 악마가 결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예컨대 악마가 심심풀이로 도시를 멸망시켰다는 일화가 마냥 헛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도시를 멸망시킨 주체가 실은 악마가 아니라 마녀일 뿐이죠.”

에드윈은 한가로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악마와 계약하기 위해선 대가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신체의 일부고, 때로는 목숨이 되기도 하지요. 물론 대가는 악마가 가져갑니다만, 대가의 진정한 쓰임새는 마법에 있습니다. 내가 마법을 이루기 위해 무려 이러이러한 값을 희생했다, 그렇게 별에게 정성을 보이는 겁니다. 백발백중 성공한다 말하기는 힘들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마법을 부리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성공할 확률이 높겠지요.”

그러자 세드릭이 예리하게 질문했다.

“일종의 헌신인가요?”

“그래. 거대한 마법을 이루려면 그에 걸맞은 헌신을 별에게 보여야 하잖니. 요즘에야 헌신하는 방법이 체계적으로 정형화됐지만,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지역별로 다양한 방법이 있었단다. 대부분 너무 어려워서 사장되었거나 너무 위험해서 금지되었다만. 악마 소환도 그중 하나일 뿐이야.”

악마가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 것치고는 다소 맥 빠지는 뒷사정이었다. 하지만 조용히 대화를 경청하던 헤스터는 영 낯빛이 좋지 못했다. 근심 어린 시선이 곧 디아나를 향했다.

“너는 무얼 대가로 주었니?”

세 사람의 눈길이 디아나에게로 모였다. 디아나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죽으면 시체를 가져가겠다고 했어.”

“정식으로 계약했습니까?”

“아니요. 구두계약이었어요.”

“구두계약이어도 효력은 비슷할 겁니다. 흔히들 마녀의 말에는 마법이 깃들었다고 하죠. 언약은 때때로 서명보다 더한 구속이 되기도 합니다.”

에드윈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설명했다. 디아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약은 형체가 없기에 일방적으로 잘라 낼 수도 없었다. 미꾸라지처럼 계약에서 빠져나올 기대는 애당초 품지도 않았다.

마녀는 말을 조심하라.

공연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소리가 아니었다.

“일단 내가 다른 방도가 없는지 찾아볼게.”

헤스터가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짐짓 쾌활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괜찮아. 어차피 죽은 뒤인걸.”

나머지 세 사람은 여전히 불안스러운 기색이었지만, 디아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영혼은 육신을 떠나 저 멀리 망각의 강을 건너게 된다. 망각의 강을 건너면 어차피 이번 생은 모조리 잊힐 터. 영혼이 떠나간 육신이 어찌 되든 알 게 뭔가. 죽은 뒤를 염려하기엔 현실을 살아가는 것도 충분히 고달팠다.

그러니 마르고트는 정말로 안녕이다.

디아나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      ✤      ✤

동부의 어느 무인도.

연이은 소요로 들짐승이 자취를 감춘 숲 속에 꺼림칙한 기운이 재차 일렁이기 시작했다. 한낮의 눈부신 볕조차 밀어 내지 못하는 미지의 기운이었다. 세드릭은 숲 속 한복판에서 눈을 감은 채로 서서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윽고 부르튼 입술이 뒤틀리며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르고트 솔.”

새카맣게 타 버린 흙바닥에 다시금 소환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세상을 뜻하는 거대한 원과 악마를 상징하는 뱀 한 마리, 이리저리 뒤얽히는 직선과 곡선, 그리고 해독할 수 없는 문자가 연이어 나타났다. 그리 빠르게 완성되는 마법진을 으스스한 검은 연기가 뒤덮자, 비로소 이형의 생물체가 지상으로 기어올라 왔다.

[디아나…….]

산양의 머리를 얹은 악마, 마르고트 솔이 흉흉한 안광을 뿜어내며 날카로운 앞발로 땅을 짚었다.

[디아나는 어디 있느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청명한 하늘에서 백색 낙뢰가 내리쳤다.

콰르릉!

낙뢰는 전조 없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삽시에 땅이 갈라질 듯 진동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우렛소리로 귀가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끄아아아악!]

마르고트는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힘겹게 땅을 기었다.

[디아나, 디아나는 어디에…….]

“그 애는 여기 없어.”

세드릭이 눈을 내리뜨며 낮게 읊조렸다. 악마의 시커먼 눈알이 그를 향해 치솟았다.

[너는, 세드릭 자일스.]

“용케 내 얼굴을 기억하는구나.”

세드릭의 입가에 가느스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르고트는 몹시 분개했다. 노한 음성이 거대한 우렛소리를 비집고 들려왔다.

[네놈이 결국……. 당장 디아나를 데려와…….]

“너는 여기서 죽을 거야.”

그러자 마르고트는 고통에 겨운 와중에도 폭소했다.

[나는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

“그래. 다른 악마에게 물어보니, 네 육신은 유독 단단하다더군.”

세드릭이 가볍게 뒤쪽을 턱짓했다. 뒤편에는 새까맣게 타 죽은 악마들이 자그만 동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괜찮아. 낙뢰는 네가 죽을 때까지 내리칠 거니까.”

[그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용 페넬로피를 죽이기 위해 사흘 밤낮 낙뢰를 내리쳤던 이자벨 베가는 그로부터 1년을 넘지 못하고 죽었다.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마법조차 제대로 부리지 못할 만큼 몸이 크게 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드릭은 요동치지 않았다.

“무사할 거야.”

낙뢰가 한 차례 더 내리쳤다.

“나는 혼자가 아니거든.”

마법진의 건너편으로 에드윈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마르고트는 무려 두 개의 낙뢰를 맞으며 짓눌릴 대로 짓눌렸다. 땅에 납작 엎드린 채로 하염없이 낙뢰를 받아 내는 순간순간이 못 견디게 고통스러웠다. 극심한 괴로움에 금방이라도 정신이 나가 버릴 지경이었다.

[디아나가, 이를 용납할 것 같으냐…….]

끝내 마르고트는 눈을 까뒤집으며 허연 거품을 토해 냈다. 악마의 놀라운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신체를 재생하고는 있으나, 그조차 영원하진 못할 것이었다. 용도 견뎌 내지 못하는 낙뢰를 한낱 악마가 이겨 낼 리 없었다.

“그 애는 너무 다정해서, 자신을 해하려던 악마의 죽음도 슬퍼하겠지.”

세드릭이 가만히 악마를 굽어보았다. 짙은 녹안이 음산하게 빛났다.

“그러니 영영 모르게 할 거야.”

종막

아리아나 해변에서

봄꽃이 싹을 틔우는 3월의 오킹엄.

앰브로즈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페 뤼미에르의 2층 테라스는 평일 오후를 맞아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평범한 시민이라면 한창 근무할 시간대인 만큼 따스한 봄볕을 즐기러 나온 노부부나 외국인 관광객이 손님의 대부분이었지만, 난간 가까이에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 세 사람은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듯했다. 열띠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다른 손님들과 달리, 내내 어색한 기류를 자아내는 것도 그런 판단에 일조했다.

아니나 다를까, 건너편에 앉은 알피어스 남매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하던 디아나가 슬그머니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걸 드리려고 두 분을 뵙길 청한 거예요.”

휴고는 한가로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상자를 흘끗 보았다.

“그게 뭡니까?”

“음, 직접 열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째서죠?”

아무래도 친족들의 성화를 피해 은거했던 지난 반년, 휴고 알피어스는 나태와 권태만 잔뜩 짊어지고 돌아온 듯싶었다. 디아나가 말문이 막힌 사이, 도끼눈으로 형제를 쏘아보던 수리가 등등하게 상자를 채 갔다.

“내가 열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상자를 열기 무섭게 수리의 표정이 일변했다.

“이건…… 이즈리얼 알피어스의 반지가 아닙니까? 대체 이걸 어디서 찾은 겁니까?”

유물이란 말에 휴고도 흠칫하며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디아나가 애매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실은 지난달에 에드윈 베가 경과 다른 사냥꾼들이 대도 헤센을 붙잡았거든요. 그때 찾았다고 들었어요.”

“헤센 그윈티르가 잡혔단 말입니까? 살아 돌아온 제노비아 자일스만 잡힌 줄 알았는데, 정작 중요한 소식이 묻혔군요.”

“잡혔다고 해야 할지……. 헤센 그윈티르는 죽었다고 알고 있어요.”

근래 마법 사회는 죽었다던 제노비아 자일스가 난데없이 살아 돌아온 것으로 시끌벅적했다. 제노비아의 장례가 치러진 지 무려 30년이나 흘렀으니, 웬만한 사건에는 콧방귀만 뀌는 마녀‧마법사들이 대경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한때 명성이 자자했던 예언의 마녀가 실은 이자벨 베가 일가를 몰살시킨 주범이며, 대도 헤센의 공범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공분을 표하고 있었다. 오직 옛 수장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자일스의 원로들만이 그녀를 안타까워할 뿐이다.

“그런 파렴치한은 일평생 괄티에로 벨리에서 썩어야 마땅합니다. 한데 재판도 받지 않고 죽은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군요.”

평소 무심하기 짝이 없던 휴고가 드물게도 헤센 그윈티르에게 반감을 내비쳤다. 순수하게 유물을 아끼는 마음이라기보단, 유물을 잃어버린 탓에 친족들의 등쌀에 시달렸던 기간이 진저리 나는 듯했지만 말이다.

“그나마 유물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사냥꾼에게 듣기로 대도 헤센에게 도둑맞은 오르테가의 열두 귀물은 대다수가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만일 반지도 그리되었다면 참으로 볼만했겠습니다. <공정한 알피어스>의 역사에 경솔하고 아둔한 휴고 알피어스의 이름이 남았다면 아주 재미있었을 텐데.”

수리의 말끝마다 차디찬 냉기가 묻어났다. 유물을 잃어버린 것으로 모자라 일언반구도 없이 반년씩이나 은둔했던 형제에게 아직도 악감정이 남은 듯싶었다. 정작 악감정의 표적인 휴고는 변함없이 유유한 상황에서 홀로 안절부절못하던 디아나가 얼른 상자를 가리켰다.

“원래는 에드윈 경이 전해 드려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아서 대신 전해 드리는 거예요.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확인해 보세요.”

그에 알피어스 남매는 머리를 맞대고 반지를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미 사냥꾼들이 감정을 마쳤지만, 알피어스의 혈족만이 알아보는 흔적이 있는지도 몰랐다. 여태 옥신각신하던 것도 잊고 남매가 합심하여 반지를 이리저리 돌려 보는 사이, 디아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애써 긴장을 풀어냈다.

제노비아가 붙잡힌 지 오래지 않아, 디아나는 이번 사건의 공을 에드윈에게 돌리기로 했다. 만일 아홉 유물을 이용해서 그리젤다 솔을 되살리려던 제노비아의 계략이 세상에 완전히 드러나거든 상상할 수조차 없는 파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내로라하는 마녀‧마법사들이 포진한 사교 클럽 몬과 악마 마르고트가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디아나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 두려웠다. 사자를 되살리는 마법은 유구한 마법 역사에서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적. 비단 지식욕에 눈먼 동족이 아니더라도 죽음을 초월하려는 인간들마저 눈에 불을 켜고 연구할 것이 빤했다. 그러거든 악마에게 붙잡혀 지하 세계로 끌려갔던 디아나의 정체를 의심하며 끈지게 파고드는 자가 생겨날지도 몰랐다.

‘나는 고작해야 헤센 그윈티르의 본체를 찾았을 뿐입니다.’

에드윈은 연신 손사래를 쳤지만, 헤스터나 세드릭이 여기기에도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죽었다던 제노비아 자일스가 살아 돌아온 것으로 이미 마법 사회는 떠들썩했고, 드높은 관심은 자연히 제노비아를 잡은 수훈자에게로 몰렸다. 세상에 알려지길, 제노비아 자일스는 죽음을 위장하여 대도 헤센과 각지를 떠돌아다닌 중범죄자. 게다가 이자벨 베가 일가를 몰살시킨 장본인이라 스스로 증언했으니, 저명한 사냥꾼인 에드윈 베가가 나서는 것이 여러모로 이치에 맞았다.

‘경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압니다. 사건을 이쯤에서 마무리하려면, 내가 전면에 나서야겠지요.’

의식을 회복한 뒤로, 제노비아 자일스는 내내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다. 온종일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대답은 많아야 두서넛뿐. 육신은 살아 있되, 정신은 일찍이 망각의 강을 건너 버린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더는 당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에드윈은 그리 디아나와 헤스터를 안심시키며 돌아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디아나는 여전히 불안감을 지워 내지 못했다. 어두운 밤이면 종종 제노비아가 언제고 수틀려서 전부를 토로할지도 모른다는 근심으로 잠 못 이루었다. 그럴 리 없다는 논리적인 귀결이나 주위에서 위로하는 말도 근거 없이 부풀어 오르는 불안감을 완전히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건은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나갔다. 당분간은 잠자코 엎드려 있는 것이 에드윈을 돕는 길이었다.

“……디아나 씨?”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디아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맞은편에서 수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잠깐 딴생각하느라.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혹 이번 주에 시간이 되는지 물었습니다.”

수리가 그녀답지 않게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귀한 반지를 찾아 주었으니, 그만한 대접을 해야죠. 솔즈베리의 본성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언제든 편한 날짜를 일러 주세요.”

버릇처럼 거절을 말하려던 찰나, 디아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리를 보았다. 저도 모르게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 나갔다.

“그럼 이번 주말은 어떨까요?”

“주말, 나는 좋습니다. 휴고도 괜찮을 거예요.”

“내가?”

그리 되묻는 휴고를 사뿐히 무시하며 수리가 말을 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었군요. 디아나 씨, 가문의 소중한 보물을 돌려주어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아녜요. 어차피 에드윈 경이 다 하신걸요. 전 그저 전해 드린 것밖에 없어요.”

“그래도요. 에드윈 경에게는 따로 감사를 전할 테니 부디 인사를 받아 주세요.”

디아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중에 갑자기 수리가 팔꿈치로 휴고의 옆구리를 찔렀다. 지루한 얼굴로 광장을 내다보던 휴고가 느리게 고개를 돌리자, 수리는 가시눈으로 디아나를 흘깃거렸다. 휴고는 그제야 무언갈 깨달은 것처럼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고맙습니다.”

이어지는 감사에 디아나는 조금 겸연쩍게 웃었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인사지만, 마냥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알피어스 남매와 헤어질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었다. 한가롭던 거리도 어느새 퇴근하는 인파와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디아나는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을 헤치며 익숙하게 전차에 올라탔다. 처음에는 상종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거듭하던 전차지만, 익숙해지니 이처럼 값싸고 편리한 교통수단도 없었다.

그리 집으로 돌아온 디아나를 반긴 것은 고소한 스프 냄새였다.

“언니?”

디아나가 실내화로 갈아 신으며 목청을 높였다. 멀찍이 부엌에서 달그락대는 소리와 함께 헤스터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디아나 왔니?”

“응. 뭐 해?”

“요리하고 있어. 이제 식사해야지.”

그에 디아나의 안색이 푸르죽죽해졌다. 대체로 만사에 능통한 헤스터가 유일하게 낙제점을 받는 것이 있다면 단연코 요리였다. 조금만 조리 과정이 복잡하거든,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요리가 나왔다. 그쯤 되면 깔끔히 포기하고 외식하는 편이 나을 텐데도, 어릴 적부터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밴 헤스터는 그리 쉽사리 주머니를 여는 성격이 못 되었다.

“이것 좀 보렴. 새로 나온 제품인데 끓는 물에 가루를 풀기만 하면 스프가 완성돼.”

부엌에서 쪼르르 달려 나온 헤스터가 밀봉된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디아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봉투를 열어 보았다. 그러나 무언가 신기한 게 들어 있으리란 기대와 달리, 봉투에는 누런 가루만 가득했다.

“이거 밀가루 아냐?”

“아니라니까. 이리로 한번 와 봐.”

헤스터는 디아나를 끌고 부엌으로 갔다. 펄펄 끓는 냄비에 놀란 디아나가 얼른 마법으로 불부터 줄였다.

“언니, 스프는 이렇게 펄펄 끓이면 안…….”

“봐. 정말 스프잖니. 물에 가루를 풀었을 뿐인데 맛도 괜찮아. 신기하지 않니?”

아무래도 헤스터는 신제품의 위력에 놀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신기하긴 하네.”

“그렇지? 이런 걸 인간의 기술로 만들었다는 게 너무 놀라워. 왜 우리는 진즉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굳이 시간을 들여서 스프를 연구하고 싶은 사람은 없지 않을까…….”

디아나가 지독히도 회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만 하더라도 웬만큼 보상이 높지 않은 한 구태여 스프를 연구하고 싶진 않았다. 스프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마법과 전혀 관계없는 분야기 때문이었다.

“그건 내가 할게.”

이제 헤스터는 마법으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있었다. 옆에 베이컨과 계란을 잔뜩 꺼내어 놓을 걸 보면 신기로운 가루 스프 덕분에 요리할 의욕이 넘치는 듯싶었다. 디아나로선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으나.

“아냐. 너는 식탁에서 빵을 좀 잘라 주겠니?”

헤스터는 식탁 구석에 놓인 바게트 빵을 눈짓했다. 디아나는 유달리 강한 불을 힐끔거리며 식탁으로 향했다. 저토록 강대한 마녀도 부엌에서는 꼭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하기만 했다.

마법으로 떠오른 칼이 고르게 빵을 썰기 시작했다. 식탁에 앉아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디아나가 길게 하품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저녁만 먹고 일찌감치 잠들어야 했다.

“언니. 나 내일 새벽에 나가.”

“참, 세드릭 경이랑 약속이 있댔지?”

디아나는 의자에 몸을 깊이 묻으며 곤한 눈을 깜박였다. 며칠 전, 세드릭에게서 편지가 왔었다. 거두절미하고 보여 줄 게 있으니 내일 새벽 만나자는 것이었다. 요즘 제노비아 자일스와 얽혀서 정신없이 바쁠 텐데 무슨 일로 보자는 건지 모르겠다.

‘시간이 남으면 쉬든가.’

그렇잖아도 세드릭은 얼마 전에 쓰러진 전적도 있어 염려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며칠 심하게 앓은 이유가 낙뢰 마법을 과도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하에서 악마 군단을 멀리 내쫓던 수많은 낙뢰를 기억하는 디아나로선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디아나는 울적한 얼굴로 식탁에 엎드렸다. 이상하게 가슴이 갑갑했다. 그래서 허공에서 떨어진 칼이 식탁을 나뒹구는 줄도 모르고 몸을 들썩거리기만 했다.

똑똑.

그때, 창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볼게.”

디아나는 요리하는 헤스터 대신 창가로 향했다. 다리에 편지를 매단 비둘기가 계속해서 부리로 창문을 쪼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 편지를 받기 무섭게 비둘기는 쏜살같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열없이 편지를 펼치려던 디아나가 멈칫했다.

“언니…….”

아스라한 목소리에 헤스터가 고개만 빼서 물었다.

“왜 그러니?”

“공모전 결과 나왔나 봐.”

갑자기 부엌에서 식기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뒤이어 헤스터가 바람처럼 달려 나왔다.

“뭐라고 쓰여 있어?”

“떨려서 못 열겠어…….”

디아나가 울상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헤스터는 굳은 표정으로 동생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별것도 아닌데, 응?”

“하지만 부랴부랴 개요 짠다고 일주일은 잠도 제대로 못 잤는걸.”

“그렇게 급하게 제출한 거잖아. 결과가 어떻든 실망하지 않는 거야. 알았지?”

열흘 전, 디아나는 잉그람 마법 협회에서 주최하는 소규모 공모전에 참가했다. 무명의 마녀‧마법사를 대상으로 한 공모전으로, 연구 주제와 개요를 작성해서 제출하거든 그중에서 특출한 이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릴 바에야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자는 일념으로 지원했으나, 막상 결과가 손에 들어오니 가슴이 마구 두방망이질했다.

‘그래. 어차피 경험 삼아 지원한 거잖아.’

디아나는 그런 생각으로 조심스레 편지를 펼쳤다. 하지만 글씨가 보이기 무섭게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말이 보조금이지 액수가 제법 되었다. 만일 떨어진다면 적잖이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디아나!”

별안간 기쁨에 찬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놀란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귀하는 이번 공모전에 선정되어…….」

딱, 그 문장만 눈에 들어왔다.

“언니! 나 됐어!”

디아나는 편지를 쥔 채로 헤스터의 목에 매달렸다. 헤스터도 환한 미소를 내건 채로 디아나를 끌어안았다. 고소한 냄새로 가득한 식탁에 자매의 웃음소리가 화사하게 흐드러졌다.

이튿날 새벽녘.

디아나는 오래간만에 일찍 일어나 단장을 마쳤다. 행여나 늦게 잠든 언니가 깨기라도 할까 화장실도 살금살금, 부엌도 살금살금 다녀왔다. 거리에서 맨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청소부조차 소식 없는 이른 시간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또렷한 눈빛에선 졸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어느 이름 없는 고서(高書)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리 죽인 발걸음이 좁은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모자를 눌러쓴 디아나가 고요한 집안을 훑어보았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고양이가 예민한 귀를 쫑긋거렸지만, 오래지 않아 도로 잠들었다. 디아나는 어두운 실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느릿하게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새어 들던 복도의 불빛이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3월 말, 잉그람 중부의 오킹엄은 아직 쌀쌀한 초봄이었다.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기에도, 얇은 봄철 외투를 입기에도 마땅찮은 어중간한 날씨기도 하다. 새벽녘 추위가 두려워 최대한 꽁꽁 싸맸지만, 여전히 문밖의 한기는 두려운 법이었다.

아파트 현관에서 한참을 미적거리던 디아나가 끝내 문을 밀어젖혔다. 두려워 마지않던 찬 바람이 칼날처럼 뺨을 스쳐 지나갔다.

“……왔으면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디아나가 옷깃을 세우며 조그맣게 속닥였다. 외로이 불 켜진 가로등 아래 서 있던 세드릭이 흐리게 웃었다.

“헤스터 경에게 실례잖아.”

“그래도 추운걸. 또 앓으면 어쩌려고 그래.”

환한 불빛 아래 드러난 얼굴이 파리했다. 예전보다 조금 마른 듯싶기도 했다. 하긴 낙뢰의 후유증으로 심하게 앓고서, 제대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실무에 시달렸으니 건강이 상할 법했다.

근래 마법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화제란 단연 제노비아 자일스였다. 외부에선 제노비아에게 종신형을 내리라는 목소리가 드높은 반면, 가문 내부에선 한때 영광스러운 수장이었던 이를 동정하는 의견이 적잖을 테니 자일스의 수장인 그는 참으로 난처한 상황일 터였다. 원로들을 짓누르고 제노비아를 벌하겠다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거든 더더욱.

‘제노비아 자일스는 마땅한 벌을 받을 거야. 내가 그리 만들게.’

디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연히 제노비아가 처벌받길 원했다. 그건 지금도 변치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얼 포기하면서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저토록 건강을 해쳐 가며 제노비아를 벌한들 마냥 달갑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그새 여윈 얼굴에 속이 상했다.

“무얼 그리 생각해.”

세드릭이 조용히 물었다. 디아나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홀로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이 시간에 어딜 간다는 거야?”

“좋은 곳.”

“……지금 장난해?”

세드릭이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텐데.”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다.

“가자.”

디아나는 물끄러미 손을 바라보았다. 좀처럼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눈빛으로,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의 손을 맞잡았다.

유일하게 빛을 뿜어내는 가로등 아래. 소년 소녀는 곧 자취를 감추었다.

디아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살갗으로 느껴지는 온도가 어느덧 완연한 봄이었다. 게다가 도시에선 접하기 어려운 습기 찬 공기와 짭조름한 냄새, 그리고 끼룩끼룩 울어 대는…….

“바다?”

시야를 채운 것은 두말없이 바다였다. 아직 동트지 않아 어둡지만, 수평선 인근에선 발간 기운이 벌써부터 일렁이고 있었다. 점차로 밝아 오는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물결이 끊임없이 뭍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귓전을 메웠다. 바닷새가 연이어 목청을 틔우며 이른 새벽녘을 깨우고, 철썩대는 파도가 잔잔하게 흘러오는 따뜻한 남쪽 바다.

“아리아나 해변이야.”

세드릭은 그리 말하며 앞장섰다. 멀거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디아나도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아리아나 해변이라면 유명한 관광지 아냐?”

“맞아.”

디아나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그녀가 알 만한 관광지라면 아마 세상에선 으뜸가는 명승지가 틀림없었다. 듣기로는 어느 시인이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해변은 없으리라 감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디아나는 시인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이곳이 아름답지 않다는 게 아니라, 바다를 난생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실은 바다는 처음이야.”

그리 속삭이는 소리에 세드릭이 무던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바다를 기피하셨으니까. 여기에 앉자.”

세드릭은 떠오르는 태양이 가장 잘 보일 법한 위치에 앉았다. 디아나도 세드릭을 따라 조심스레 모래사장에 주저앉았다.

“그러게. 스승님은 주기적으로 이사하시면서 한 번도 해안 도시로 집을 옮긴 적은 없으시네. 왜 그러신지 알아?”

“아버지랑 여기서 만나셨거든.”

그에 디아나는 말없이 수긍했다. 스승과 에드윈 경의 관계는 실로 복잡했다. 오래도록 별거하기에 어릴 적엔 그저 사이가 나쁘다고 생각했으나, 자라서 보니 단순히 그렇게만 여길 수는 없었다. 둘 사이에는 타인이 모르는 깊디깊은 감정이 있었다. 곧 바스러질 듯 섬약하면서도 쉬이 버리지 못하는 철 지난 낙엽처럼, 그들은 지나간 사랑을 품지도 내치지도 못하며 내내 전전긍긍했다.

어쩌면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디아나는 쓸쓸한 눈으로 해변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그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걸 깨달으니, 어두운 해변 곳곳이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그런데 아무도 없네?”

아름답기로는 손에 꼽는 해변이 이리도 잠잠할 리 없었다. 방방곡곡에서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붐벼야 정상일 텐데, 이상하게도 해변에는 인적조차 없었다. 드넓은 모래사장에 오직 둘뿐이었다.

“앞으로 석 달은 내 사유지라서 그래.”

“뭐?”

“작년 초까지 윈터랑 국경에 주둔했잖아. 그 대가로 받은 거야.”

디아나는 황망히 그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아무리 마녀‧마법사가 대체로 물욕이 없다지만, 명색이 한 나라의 국왕과 단독으로 맺는 계약이었다. 적어도 잉그람의 국왕쯤 되면 제법 매력적인 제안이 많았을 텐데도 굳이 해변을 택한 것은 좀체 납득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일평생 소유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석 달이라면.

“원래는 부모님을 모시고 오고 싶었어.”

세드릭이 수평선을 가만히 응시하며 말을 꺼냈다.

“예전에 아버지가 그러셨거든. 어머니를 처음 만나 결혼했던 아리아나 해변은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풍광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고. 그래서 두 분께 한적한 해변을 선물로 드리고 싶었는데…….”

세드릭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디아나는 이어질 말을 족히 짐작했다. 함께 공유하는 슬픔이기에 더욱 가슴이 저몄다.

“……스승님께서도 좋아하셨을 텐데. 아쉽다.”

“그러게.”

“너도 스승님이랑 왔으면 더 좋았을 테고.”

세드릭이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시선이 맞부딪쳤다.

“나는 괜찮아. 너랑 와서 기뻐.”

디아나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말을 끝내고서 먼저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복잡한 눈으로 하릴없이 바다를 응시하는 모습이 지근거리였다. 이제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었다.

“……세드릭.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거야?”

더는 피하면 안 되었다.

세드릭은 한참 침묵했다. 그사이에도 점점 날이 밝아 오며 불그스름한 빛이 그의 얼굴까지 번졌다. 빛을 받아 투명하게 보이는 녹안이 스르르 눈꺼풀 아래로 가라앉았다.

“……네게 할 말이 있어서.”

디아나는 끈지게 답을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대답이 들려왔다.

“미안해.”

겨우 토해 낸 소리였다.

“어릴 적 내가 저질렀던 수많은 잘못……. 고작 사과 한마디로 네가 견뎌 내야 했던 고통을 보상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전하고 싶었어. 전해야 했어. 그런 일을 없었던 것처럼 덮어 두고서 이대로 지내면, 안 되는 거니까.”

세드릭은 눈을 내리뜨며 담담히 말을 이어 갔다.

“용서를 바라는 게 아냐. 애초부터 내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잘못이 아닌걸. 그 어떤 마법으로도 네가 고통스러웠던 세월을 갚지 못하는데, 어떻게 용서를 청하겠어. 다만 네가 아직도 그 시절의 기억으로 아플까 봐, 그래서 전하고 싶었어.”

“…….”

“넌 잘못하지 않았어. 전부 내가 못난 탓이야.”

혹시나 재능이 일천해서, 어머니와 언니처럼 대단치 못해서. 그리 죄의 화살을 자기에게로 돌려 버릴까 봐.

“너는 지하로 별을 불러들인 마녀. 그만한 기적을 또 누가 이뤄 낼 수 있겠어.”

세드릭이 조용히 읊조렸다. 차마 마주치지 못하는 눈은 모래밭으로 떨군 채 하염없이 바닥만 헤매었다.

파도 소리가 면면이 들려왔다.

오래도록 묵묵하던 디아나가 뒤늦게 말문을 열었다.

“만약 내가 널 용서한다면……. 넌 그걸로 충분해?”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세드릭이 더디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디아나는 좀체 심중을 파악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표정이 말끔히 지워진 듯하면서도 아주 많았다. 그예 아득한 안개 속을 헤집는 것처럼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제대로 생각하고 말해. 정말 용서로 충분해?”

디아나가 드물게 성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진심으로 하고픈 말이 그게 전부야?”

세드릭은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꽁꽁 숨기면서도 내심 알아주길 바랐던 마음이 마침내 드러났다. 그럼에도 마치 바닷속처럼 갑갑했다. 숨이 모자랐다. 맘껏 터져 나가지 못해 속으로만 곪았던 마음이 아래로만 줄줄 흘러내렸다.

“미안해.”

엄중하게 옭아매는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대로 털어놓는 수밖에…….

“내가, 널 좋아해서 미안해.”

둑이 터지듯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데……. 잘 아는데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 그냥 언젠가부터 네가 좋았어. 네가 날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멈춰지지가 않았어.”

뺨을 타고 연이어 눈물이 흘러내렸다. 턱 끝에서 아롱진 마음이 덧없이 낙하했다.

“언제는 네가 알아주길 바랐고, 언제는 네가 영영 모르길 바랐어. 내 마음인데 나도 갈피를 못 잡겠어. 그런데 지금은 겁이 나. 네가 날 미워할까 봐 너무 무서워서……”

세드릭이 서럽게 흐느꼈다.

“좋아해 달라고 하지 않아. 다만 미워하지만 말아 줘. 네가 부담스럽다면 다시는 말하지 않을게. 네가 신경 쓰지 않도록 할게, 그러니까.”

“…….”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지내면 안 될까…….”

끔찍한 적막이 찾아들었다.

세드릭은 여전히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감정을 숨기고, 표정을 숨기고, 눈물을 숨겼던 것이 무색하도록 전부를 흘려 내고 있었다. 행여 저러다 모래사장이 다 젖을까 봐 저어될 정도로 슬피 울어 댔다.

그래서 외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세드릭이 저러했기에.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어머니에게 애정을 갈구하며, 스승이 부담스럽게 느낄 정도로 원대한 사랑을 고스란히 내비치던 모습이 그대로 겹쳐졌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으로 늘 목말라 갈증에 허덕이던 기억 속 어린애의 모습으로. 이제는 감쪽같이 어른 흉내를 내면서도 정작 자라지 못한 아이가…….

아직도 그 시절을 홀로 헤매는 것처럼.

디아나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수그린 세드릭의 얼굴을 들어 눈물로 젖은 뺨을 조심스레 닦아 냈다. 짙은 녹안이 의아한 빛을 띠는 걸 알면서도 묵묵히 뺨을 문지르는 데만 열중했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미약하게 떨리는 턱을 매만졌다.

“네가 미웠어.”

“…….”

“정말 미웠는데…….”

디아나는 흔들리는 숨을 삼키며 속눈썹을 파르르 내렸다. 닫힌 눈 안으로 금세 어둠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어둡거든, 십중팔구 그날이 악몽처럼 밀려들곤 했다.

암암한 사위. 머나먼 밤하늘. 뒤쫓는 악마.

악몽의 시작은 늘 그러했다. 질리도록 반복되는 상황인데도, 놀랍도록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대체로 꿈인 줄 모르지만, 가끔은 꿈인 줄 알았다. 그럼에도 무시무시한 공포가 속절없이 목을 옥죄었다. 지하 세계에서 눈 시퍼렇게 뜨고 군림하고 있을 마르고트가 남몰래 흉계를 꾸미는 것만 같아, 도무지 맘 편히 지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언제고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황폐한 들판에서 씨앗 없이 피어오르는 황금의 꽃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리고 악마들이 영문 몰라 허둥지둥하는 사이, 저편에서 횃불을 들고 나타나는 한 사람.

실로 만천하를 밝히는 불빛이었다.

어둠을 몰아내고, 악마를 내쫓는 빛. 악몽은 그렇게야 끝이 났다.

디아나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점차 밝아 오는 아침에 눈이 부셨다.

“매번, 네가 날 지옥에서 건져 내.”

그래서 못내 어설프게 웃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널 미워하겠어.”

세드릭은 황망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뺨에 후드득 눈물이 쏟아졌다. 입술 사이로 볼품없이 흔들리는 목소리가 새 나갔다.

“나는…….”

“알아.”

디아나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이제는 너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

“내가 곁에 있으면 될까?”

결국 세드릭은 참고 참았던 울음을 다시 터트리고 말았다. 어쩔 줄 몰라 난감하던 디아나는 헤스터가 곧잘 그러하듯 세드릭을 한껏 끌어안았다. 좀처럼 멈추지 못하는 흐느낌이 품에서만 내리 흘렀다.

이윽고 태양이 떴다.

둘을 감싸듯 밝은 빛이 쏟아졌다.

후일담

“……뭐요?”

쨍그랑. 디아나가 포크를 떨어트리며 되물었다. 몹시 충격적인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경악한 얼굴이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그러자 맞은편에서 하릴없이 커피 잔을 매만지던 올리버가 대꾸했다.

“헤스터랑 결혼하고 싶다고.”

“결혼…….”

디아나는 우울하게 중얼댔다. 전 재산이 든 통장이라도 잃어버린 것처럼 단숨에 해쓱해졌지만, 평소라면 기민하게 그녀의 기분을 알아챘을 올리버도 오늘은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적잖이 목이 타는지 벌써 커피를 넉 잔이나 마셨다.

“그래서 아가씨가 보기엔 어때?”

“내 의견이 중요해요?”

디아나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어차피 결혼은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일. 아무리 가까운 친지여도 목소리를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잠시 영문을 모르던 올리버가 곧 오해를 짚어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헤스터가 결혼에 뜻이 있어 보이냐는 질문이었어.”

디아나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뭐예요, 그럼 언니도 동의한 건 아녜요?”

“아직 말도 못 꺼냈는데 동의는 무슨.”

디아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심하게 앓는 사람처럼 죽상이던 얼굴이 도로 피었다. 금방 몰아쳤던 내심의 풍랑이 단숨에 가라앉자 도래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 오해가 걷힌 머릿속에선 연신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런 기쁨을 알 턱이 없는 올리버는 여전히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헤스터가 결혼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 같아?”

“글쎄요. 그건 언니만 알겠죠.”

“그러지 말고. 자매로서의 감이란 게 있잖아.”

올리버의 채근에 디아나는 하는 수 없이 지난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결혼이란 그다지 일상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화두가 아니었다. 헤스터와 진지하게 결혼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도 고작 한 번뿐이었다.

‘아직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어.’

미래는 함부로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이긴 했으나, 어쨌든 지금은 결혼할 의향이 없다고 그랬다. 지난 몇 달 사이 생각이 바뀌었다면 몰라도.

“딱히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요.”

“역시 그런가…….”

올리버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내내 심드렁하던 디아나도 그답지 않게 우울한 모습에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힘내요. 언니가 언제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잖아요.”

디아나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헤스터가 결혼한다면 누구보다 슬퍼할 그녀이기에, 모두 마음의 여유에서 우러나는 미소였다.

올리버와 헤어진 뒤, 디아나는 곧장 앰브로즈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이 멀지 않은 데다 약속한 시간까지 제법 남아서 걸음걸이가 느긋했다.

‘결혼이라니. 너무 갑작스럽잖아.’

디아나는 조금 전 올리버와 나눴던 대화를 상기하며 한숨을 지었다. 언니가 결혼에 동의한 게 아니라는 걸 알자마자 기쁨에 도취되긴 했지만, 기실 올리버가 진지하게 결혼을 고려한다는 것 자체로 둘 사이가 깊다는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언니와 올리버가 잘 사귀고 있는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했다.

하지만 언니는 그럴 생각이 없다니까.

그러니 벌써부터 근심할 필요는 없었다. 마냥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은 일찌감치 깨달았으므로, 지금은 그저 지금을 즐기는 걸로 충분했다. 공연히 속을 태우다간, 정작 나중에 지금을 즐기지 못한 걸 후회할지도 몰랐다.

디아나는 그리 생각하며 당차게 걸었다. 내리 무겁던 발걸음이 점차 가벼워졌다. 마침 화창한 봄날, 나날이 얇아지는 치맛자락이 다리에 부드럽게 휘감겼다. 건널목을 지나 대로로 접어드니, 어느덧 앰브로즈 광장이었다.

주말의 느지막한 오후. 오킹엄에서 단연 제일가는 번화가인 앰브로즈 광장에는 따사로운 봄볕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부가 가장 많지만, 여럿이서 몰려다니는 동갑내기 무리나 연인들도 적잖았다. 디아나는 그들 사이로 익숙하게 광장을 가로지르며 중심의 시계탑으로 향했다.

만인에게 약속의 장소라는 별칭에 걸맞게, 갈색 시계탑 아래는 약속 상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근처 벤치에서 기다리려던 디아나는 문득 저만치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말았다.

“세드릭?”

디아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시계탑 아래를 지긋이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세드릭이 분명했다. 저토록 희귀한 생김새가 지상에 둘 있지 않고서야.

때마침 고개를 돌리던 세드릭과 눈이 마주쳤다. 디아나가 멀뚱거리는 사이, 세드릭이 빠르게 다가왔다.

“왔어?”

“응. 그런데 너는 언제 온 거야?”

디아나가 어리둥절하여 시계를 보았다.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20분이나 남았다. 그녀야 인근에서 올리버를 만나고 왔다지만, 세드릭은 이렇게 일찍 나올 이유가 없었다.

세드릭은 흘러내린 디아나의 귀밑머리를 넘겨 주며 말했다.

“날씨가 좋아서 조금 일찍 나왔어.”

하긴 오늘따라 유달리 날이 맑았다. 디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수긍했다.

“아직 식사하기엔 이르지? 산책이나 할까?”

“그러자.”

둘은 그렇게 광장을 거닐기 시작했다. 4월에 접어든 오킹엄은 완연한 봄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곳곳마다 연두색 새싹이 움트고, 봄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했다. 어두운 집에서 은거하길 즐기는 마녀조차 저도 모르게 꽃향기에 이끌려 밖으로 나올 만치 달콤한 계절이었다.

시청에서 공들여 관리하는 앰브로즈 광장은 그중에서도 최고로 아름다운 산책로였다. 수도라는 이점이 크지만, 사실상 로엔그렌 궁정을 제하면 도무지 볼만한 곳이 없는 오킹엄에서 이만하면 아주 잘 가꿔진 정원이었다.

“논문은 어때? 잘되어 가?”

불현듯 세드릭이 물었다. 설레는 얼굴로 화단을 구경하던 디아나가 바로 표정을 구겼다.

“아니. 망했어.”

“엄살은…….”

“엄살이라니! 이번엔 진짜야. 완전히 구제불능이라고.”

디아나가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주제를 잘못 잡은 것 같아. 사료도 부족하고, 유적도 드물고. 자료 조사할 때는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어. 왜 지금까지 사람들이 고대를 연구하지 않았는지 알겠다니까?”

이번에 디아나가 잉그람 마법 협회에서 보조금을 받으며 진행하는 연구는 영웅시대 이전에 존재하던 고대의 선조들을 조망하는 것이었다. 파란의 아르테미시아, 신속의 발터하임, 몽환의 카야 등 명성 높은 마녀‧마법사들이 상당수 소속되었던 비밀결사 미오테티타를 중심으로 하되, 기존 연구에서 외면받았던 다른 인물을 양지로 끌어올리려는 의도였다. 처음에 예상하기로는 현존하는 사료로도 족했지만, 정작 연구를 시작하고 보니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내가 역사학에 소질이 없는 건 아닐까?”

디아나는 의기소침하게 중얼댔다. 마법적으로 얼마나 탁월한지가 연구의 성패를 좌우하는 다른 분야와 달리, 역사학은 마법적인 능력보다는 학문적인 통찰력이 더욱 중요했다. 변변찮은 의뢰로 입에 풀칠하며 살고 싶진 않았던 디아나가 마법 역사학으로 관심을 돌린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벌써부터 그렇게 부정적으로 여기진 마.”

“하지만…….”

“난 네가 잘해 낼 거라고 믿어. 넌 어머니의 서재를 전부 통독한 유일한 사람이잖아. 그만한 노력으로 무얼 못 하겠어.”

세드릭이 조곤조곤 말했다. 그제야 기분이 나아진 디아나가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울적하게 가라앉았던 눈빛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내일 엑서터로 가지? 짐은 다 챙겼어?”

세드릭은 내일 제노비아 자일스와 관련된 문헌을 수집하러 엑서터로 향한다. 웬만한 문서는 시종들이 모아 뒀을 테지만, 본성에는 오직 가문의 수장만이 드나들 수 있는 밀실이 있었다. 세드릭은 행여나 밀실에 있을지도 모르는 증거를 찾기 위해 몸소 본성을 찾는 것이었다.

“어차피 하루면 돌아올 텐데.”

“혹시 이번에도 이상한 늙은이들이 와서 괜히 설치는 거 아냐?”

“레오나드 경을 말하는 거야?”

겨우 웃음을 참는 목소리였다. 디아나는 입술을 비쭉였다.

“레오나드 자일스, 실비아 자일스, 알렌 자일스……. 왜 있잖아, 툭하면 스승님을 찾아와서 저택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던 사람들. 어찌나 참견을 해 대는지, 그 사람들만 다녀가면 꼭 스승님께서 짜증을 부리셨어. 그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니까.”

일명 가문의 원로라 불리는 그들은 아직까지도 사사건건 세드릭에게 반기를 들고 나섰다. 원로들이 베가의 낙뢰를 내리는 세드릭을 배척하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번은 더욱 심각했다. 젊은 시절 우러러 따랐던 제노비아 자일스가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그들의 눈먼 숭배는 변치 않았으므로, 도리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노비아를 벌하라는 의견을 표명한 세드릭에게 삿된 저주를 퍼부어 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하루 이틀 그런 것도 아니고. 신경 쓰지 마.”

태어날 적부터 그들의 눈 밖에 났던 세드릭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로들의 반대에는 아주 이골이 났는지, 진심으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보다 저거 먹지 않을래?”

세드릭이 길가의 노점상을 가리켰다. 아이스크림과 주스를 판매하는 장사였는데, 맛이 괜찮은지 줄이 제법 길었다. 둘은 호기심에 줄을 섰다.

“난 아이스크림.”

오래지 않아 그들의 차례가 다가왔다. 디아나는 눈을 반짝이며 곧장 아이스크림을 짚었다. 원래 달콤한 음식을 즐기지 않는데도, 먼젓번 손님이 사 간 탐스러운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제법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메뉴를 훑어본 세드릭이 주문했다.

“아이스크림이랑 깔루아 커피로 주세요.”

“깔루아 커피?”

낯선 이름에 디아나가 의아한 빛을 띠었다.

“칵테일이야.”

“칵테일이면 술이잖아.”

세드릭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던 디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도 그거 마셔 볼래.”

디아나는 살면서 제대로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었다. 고작해야 채스터티가 일전에 선물했던 위스키 봉봉이 전부이니, 술에 호기심을 품을 법도 했다.

그런데 세드릭의 표정이 어째 심상찮았다.

“그냥 아이스크림 두 개로 할게요.”

“왜!”

디아나의 만류에도 세드릭은 꿈쩍도 안 했다. 난처한 얼굴로 둘을 갈마보던 상인은 결국 세드릭의 뜻에 따라 아이스크림을 내주었다. 디아나가 부산스럽게 지갑을 꺼내는 사이, 세드릭이 먼저 계산을 마쳤기 때문이다.

둘은 그리 노점상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아이스크림이 수중에 들어왔는데도 디아나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때,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그렇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세드릭은 아이스크림을 베어 먹으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조금 전까지는 관심도 없던 꽃을 부러 구경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골난 디아나가 그의 옷자락을 붙들며 얼굴을 드밀었다.

“몇 년 전에 채스터티가 술이 든 초콜릿을 선물한 적 있잖아. 그때, 내가 무슨 사달을 낸 거지. 그래서 지금 이러는 거지?”

“아무 일도 없었어.”

“거짓말.”

“정말 별일 없었다는데도.”

디아나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세드릭은 천연덕스럽게 근처 벤치에 앉을 뿐이었다. 얼른 곁에 붙어 앉은 디아나가 끈질기게 캐물었다.

“진짜로 궁금해서 그래. 다른 사람들이랑 술 마시다가 폐 끼치면 안 되잖아. 이유를 알아야 자제하든 말든 하지. 응?”

그건 세드릭도 공감하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궁리하던 세드릭이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그럼 토요일에 우리 집으로 올래?”

예상치 못한 말에 디아나는 조금 놀랐다.

“너희 집?”

“지금까지 와 본 적 없잖아.”

“그렇긴 한데…….”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세드릭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없었다. 세드릭이 툭하면 아파트로 찾아와 헤스터까지 셋이서 식사하던 것을 떠올리면 사뭇 억울한 일이었다.

“그럼 말해 줄 거야?”

“응.”

세드릭은 드물게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디아나가 멀뚱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나 토요일에는 언니랑 애쉬포드 호수에 놀러 가기로 했어. 너도 같이 갈래?”

금세 세드릭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재차 물었다.

“일요일은?”

“일요일에는…….”

별생각 없이 대꾸하려던 디아나가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세드릭의 눈치를 살피는지 어물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수리 경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세드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보기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지만, 10년 넘게 그를 보아 온 디아나에겐 실망한 기색이 너무나도 확연했다.

“저기, 평일에는 바빠? 다음 주 주말은 어때?”

“…….”

“아, 아님 다음 주 평일? 다다음 주 주말? 그냥 이번 토요일에 언니랑 호수 다녀와서 만날까?”

디아나는 몹시 진땀을 뺐다. 그러자 고개를 모로 꺾은 채 느릿하게 어깨를 주무르던 세드릭이 남몰래 웃었다.

“평일에는 너도 바쁘잖아. 논문은 언제 쓰려고.”

“하루쯤 너랑 논다고 잘 써지는 것도 아닌데…….”

“난 다음 주 주말에도 괜찮아. 대신 다음 주말에는 다른 사람이랑 약속 잡으면 안 돼. 알았지?”

세드릭이 짐짓 엄격하게 말했다. 디아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민한 감이 일러 주길, 여기서는 세드릭의 장단에 맞춰 줘야 했다.

둘은 그러고도 한참을 떠들며 시시덕거렸다. 인어의 서식지인 줄리모어 군도에 아주 터를 잡은 설리번 자일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는데, 특히 설리번을 그리다 못한 요정 여럿이 어찌어찌 군도로 날아왔다는 최근의 소식에 디아나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울마르크 고산 지대에서 줄리모어 군도까지는 중간에 기차를 타고도 넉넉잡아 닷새는 걸리는 먼 거리였기 때문이다.

‘설리번이 얼마나 좋으면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를까.’

경악하는 마음 반, 감탄하는 마음 반으로 혀를 내두르던 디아나는 자연스레 조금 전 올리버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사랑을 결혼으로 이어 가려는 올리버의 마음이 조금 이해될 것 같기도 했다. 결혼이 사랑의 결실이라는 인간 사회의 맹목적인 믿음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결혼이란 제도로 상대와 분명한 관계를 맺는다면 적어도 덧없이 헤어질 일은 줄어들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펜리 씨가 언니랑 결혼하고 싶다고 그랬어.”

“펜리 씨라면 헤스터 경의…….”

“응.”

세드릭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그럼 헤스터 경은 어때?”

“언니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미래는 모르지, 뭐.”

디아나는 입을 불퉁하게 내밀며 공연히 돌멩이를 찼다.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던 세드릭이 물었다.

“……너는 괜찮아?”

가만히 눈을 깜박이던 디아나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괜찮지. 언니만 행복하다면 나는 다 좋아. 그런데 음, 언니가 결혼하는 게 상상이 안 되긴 해.”

디아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스승인 바바라 자일스는 죽을 때까지 법적으로 결혼을 유지하긴 했으나, 사실상 온전한 결혼이라 칭하기엔 무리였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살면서 결혼식을 본 적도 없고, 결혼한 부부가 어찌 사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니 상상하기 어려울 만도 했다.

그러자 이제는 ‘결혼’ 그 자체가 궁금해졌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중시하는 마법 사회에서 이처럼 천성과 어긋나는 제도도 드물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이 깊더라도 내밀한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터. 단순히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로 가늠해서 성사될 일이 아니기에 평생을 독신으로 사는 마녀‧마법사들이 많은 것이었다.

결혼하는 언니는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결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마찬가지였다.

“세드릭. 너도 결혼하고 싶니?”

“글쎄. 그보다는 결혼할 상대가 중요하지 않을까.”

세드릭의 대답에 디아나는 조금 놀랐다. 내내 별거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라서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괜찮은 상대가 있으면 결혼할 생각은 있고?”

“왜. 너는 결혼하기 싫어?”

세드릭이 넌지시 디아나를 떠보았다. 그런 의뭉스러운 기색일랑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디아나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토로했다.

“애초에 그런 생각을 전혀 안 해 봤어. 내가 결혼한다니, 너무 이상하지 않아?”

“이상한가?”

“아니, 굳이 결혼할 필요가 없잖아. 결혼하지 않고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데.”

“그렇기야 하지만…….”

묘하게 속내를 삼키는 어조였다. 디아나는 기민한 감으로 그걸 알아챘다. 잿빛 눈이 대번에 탐정처럼 가느다래졌다.

“뭐야. 너 또 뭔가 숨기고 있지.”

“숨기긴 뭘.”

“숨기고 있잖아. 빨리 말해 봐.”

드센 채근에 세드릭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채스터티가…….”

채스터티. 그 이름만으로 불안감이 용솟음쳤다.

“채스터티가 왜.”

“……아냐. 그냥 잊어 줘.”

“시작했으면 끝을 맺어야지! 채스터티가 왜, 뭐라고 했어?”

세드릭이 그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물끄러미 그를 살펴보던 디아나가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봤대?”

괜히 말했다. 세드릭은 그리 쓰여 있는 얼굴로 더디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진짜?”

“그래도 누구랑 결혼하는지는 못 봤다고…….”

“말도 안 돼! 내가 결혼한다고?”

디아나는 양손으로 뺨을 감싸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몸을 옹송그린 채로 미동하지 않는 모습에 세드릭이 슬며시 어깨를 짚으려던 찰나, 디아나가 갑작스레 머리를 쳐들었다. 그러고는 경황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 안 되겠어. 나 채스터티 좀 만나고 올게.”

“디아나?”

세드릭이 황망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디아나는 세드릭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당황이 역력한 부름이 이어지는데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같이 가! 채스터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

결국 세드릭이 다급히 그녀를 쫓아갔다.

꽃 피는 봄, 오킹엄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 The end

* 설리번 자일스와 요정 와조스키는 픽사의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의 두 주인공, 설리와 와조스키를 패러디했습니다.

* 3부에서 설리번이 토굴의 암호를 외는 장면은 ‘반지의 제왕’에서 마법사 간달프가 모리아 광산의 문을 여는 장면을 오마주했습니다.

* 디아나 솔의 출생은 ‘스타워즈’의 주인공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출생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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