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귀향
먼 옛날, 별의 소리를 듣는 마법사가 있었다.
아홉 인의 영웅은 악룡 타트라스크 파펜하임을 몰아내고 파펜하임산을 차지했다. 그들은 원탁에 둘러 앉아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열띤 토론을 벌였다. 문제는 단 한 가지, 겔렝지어로 떠난 어느 마법사가 남긴 유산이었다.
마체 팔리아치가 말했다.
‘별은 닿을 수 없기에 별이고, 빛은 몰아낼 수 없기에 빛입니다. 마찬가지로 기적은 일어나지 않기에 기적입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기에 찬양받을 뿐, 일어난 기적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닙니다. 일어난 기적은 세상에 혼란을 초래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적을 쪼개기 위해 모였습니다. 지고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가 남긴 유산은 헛된 욕망에 눈먼 자들을 꾀어낼 것입니다. 유산은 누구도 넘보지 못할 찬란한 기적이되, 세상을 뒤흔들 분란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극적인 미래를 좌시하지 않습니다. 사특한 이들이 기적의 냄새를 맡고 몰려오기 전에 천지에 다시없을 기적을 아홉 갈래로 가릅시다. 그리고 다시는 합쳐지지 않도록, 다시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도록 아무도 모르는 어둠 속에 감추어 둡시다.
자, 기적을 봉인할 기물을 내어놓으시오. 세상이 멸망하는 날까지도 안전하게 기적을 잠재울 그릇을, 삿된 자들의 이목을 피할 단단한 그릇을.’
숭고한 마체 팔리아치는 곡식을 수확하는 낫을 내어놓았다.
가혹한 퀸투스 아스톨포는 폭풍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투구를 내어놓았다.
교활한 클레멘틴 자일스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을 내어놓았다.
공정한 이즈리얼 알피어스는 겨울에 복속한 이들이 입을 맞춘 반지를 내어놓았다.
고결한 오베론 베가는 대지를 가르는 낙뢰처럼 날카로운 창을 내어놓았다.
냉엄한 발부르가 볼크하르트는 칼보다 강하고 꿀보다 달콤한 금화를 내어놓았다.
오만한 베르티 오르테가는 죽어 가는 노인도 걷게 하는 지팡이를 내어놓았다.
잔악한 피오트르 그윈티르는 천 명의 사람을 베어 낸 단검을 내어놓았다.
엄숙한 마그누스 프롬은 부모가 자식에게 전하는 목걸이를 내어놓았다.
아홉 기물이 원탁에 모였다. 기적이 다시 합쳐질 것을 염려한 마그누스 프롬은 목걸이에 강한 기원을 담았다.
‘부디 마법사의 유산이 세상을 도탄에 빠트리지 않기를.’
마법사의 유산은 그리 아홉 갈래로 쪼개졌다. 그리고 교활한 클레멘틴 자일스가 예언했듯 아홉 갈래의 유산이 기적으로 화하는 일은 오래도록 없었다.
✤ ✤ ✤
어두운 지하 세계.
혹한의 땅에서도 드물게 얼어붙지 않은 그라피우스강 기슭에는 피로 물든 돌을 하나씩 쌓아 올린 붉은 성채, 일명 참극성이 우뚝 서 있었다. 겸양을 모르고 염치는 더더욱 모르는 악마들이 유일하게 두려워 피하는 곳이 참극성일지니. 그곳의 주인이 바로 드넓은 동방을 다스리는 동방 군주요, 오래전 열하나의 군주와 예순여섯의 군단을 압도적인 무력으로 무릎 꿇린 참극공인 까닭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시사철 무덤처럼 적막하던 참극성에 자그만 소요가 일어났다. 대전에서 참극공을 알현하던 일곱 번째 군단장이 어떤 광경을 목도하고 까무러쳤다는 풍문이 음지에서 나돌았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었다. 일단 흉악하기로 이름 높은 일곱 번째 군단장 드루카 알마타데마는 놀란 나머지 졸도할 만큼 심성이 여린 자가 아니거니와, 근래 자신을 둘러싼 뜬소문에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기 때문이다.
다만 드루카 알마타데마가 대전에서 ‘지금껏 본 적 없는 존재’를 목격했다는 말만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그렇다면 ‘지금껏 본 적 없는 존재’란 대관절 무엇인가. 악마는 섭식으로 육신을 교체하는 종족이기에, 동방 군주에게 충성하는 예순여섯 군단의 수십만 악마들이 드나드는 참극성은 그야말로 수만 가지 육신이 한데 모이는 전시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숱한 전장에서 악귀처럼 뛰놀던 군단장 드루카 알마타데마가 생경한 육신을 보고 혼절했다는 소문은 아무래도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악마들이 믿든, 믿지 않든 참극성에서 소란이 일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드루카 알마타데마가 입성했던 날, 대전에는 예기치 못한 불청객이 들었고 악마보다 악마 같다던 군단장은 까무러치게 놀라 기절하고 말았다. 엄연한 사실이 빤한 거짓으로 치부될 만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태어난 이래 이토록 자존심에 금 간 일이 없을 군단장에겐 그나마 다행으로, 소문은 대개 우스갯소리로 취급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지금껏 본 적 없는 존재’의 생김새에 대해선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전장의 흡혈귀라 불리는 드루카 알마타데마가 세 명의 인간을 보고 졸도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거의 없었다.
서기관 톨레두스크 군드라흐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아주 적은 수의 호위만을 대동한 참극공은 여느 때처럼 소탈하게 군단장을 환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닥에 괴이쩍은 문양이 그려지더니 세 명의 인간이 나타났다. 군단장이 기절하고 호위들이 첨예하게 긴장한 가운데, 유일하게 참극공만이 여유롭게 불청객을 환영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세 명의 인간은 대전에 나타나자마자 맥없이 쓰러졌다. 시종들은 참극공의 명령에 따라 그네들을 성채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높은 곳으로 날랐다. 충실한 서기관 톨레두스크 군드라흐는 군주의 설명을 고대했으나, 야속하게도 참극공은 회한의 숲에서 마흔세 번째 군단이 패퇴했다는 급보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으로 나아갔다. 군주가 흘리는 무시무시한 노기에 시종과 서기관은 그저 납작 엎드려 승리를 염원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참극성 꼭대기에는 극소수의 악마들만 아는 불청객이 있었다. 시종들은 손님을 친절히 모시라는 군주의 명을 받들어 성심을 다했다. 그러나 악마 시종을 볼 때마다 비명을 질러 대는 빨간 머리 인간만큼은 당최 모시기가 힘들다며 저들끼리 쑥덕대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디아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지불식간에 지하로 끌려온 지도 벌써 사흘째였다. 실은 하늘이 종일 어두워서 사흘째인지 나흘째인지 제대로 가늠하지도 못했다. 다만 체감상으로는 대강 사흘쯤 지난 것 같았다.
처음에는 지하로 끌려온 줄도 몰랐다. 검은 연기가 사방을 뒤덮으며 시야가 뒤집히고 귀가 먹먹해지더니, 갑자기 온몸이 마디마디 아프기 시작했다. 마치 속에서 용암이 끓는 듯한 고통이었다. 저도 모르는 새 까무룩 정신을 놓았고, 이후로는 눈도 뜨지 못하는 열기 속에서 누군가 흘려 주는 물만 간신히 넘겼다. 생전 그토록 아프기는 처음이었다.
그리 만 하루가 지났다. 겨우 정신을 차린 디아나는 눈을 뜨자마자, 송곳니가 날카로운 토끼 머리에 원숭이 몸이 붙은 괴기한 생명체를 마주했다. 터져 나간 비명은 본능이었다. 디아나는 성치 않은 몸으로 비명을 질러대며 주변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처음 보는 종족, 처음 보는 양식, 처음 보는 가구, 그리고 처음 보는 어둡고 황량한 창밖 정경.
‘당신은 악마인가요?’
불현듯 디아나는 그리 물었다.
‘여기는 지하고요?’
지하. 악마들의 세상.
그제야 여기로 끌려오기 직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자일스 본성에서 우연히 마주친 제노비아 자일스와 헤센 그윈티르. 난데없이 땅바닥에 그려지던 소환진은 디아나에게도 낯익은 종류였으나, 응당 나타나야 할 존재는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그녀만 낯선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날 보았던 소환진이 제대로 기억나진 않아도 지금 상황에서는 분명했다.
역소환진. 소환자를 역으로 소환하는 마법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제노비아 자일스가 부른 악마는 필시 마르고트였다. 악마에게 다중 계약을 금하는 법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 마르고트는 충분히 다른 사람과 계약할 수 있었다. 더욱이 디아나와는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으므로, 마르고트는 계약에 한해 자유로웠다.
그러나 제노비아 자일스가 말한 마르고트의 전체 이름.
디아나는 그것만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했다. 과연 자신이 맞게 들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지 자꾸만 의심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무지 마르고트와 연결할 수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여기 있으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기괴한 토끼 머리의 시종이 말하길, 마르고트로 추정되는 ‘군주’는 며칠 전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회한의 숲으로 떠났다고 한다. 회한의 숲이 어딘지는 몰라도 금방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디아나는 마르고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참으로 많았으나, 정작 본인이 없으니 궁금증은 하루가 다르게 비대해져만 갔다.
디아나는 몇 번째일지 모르는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낮 가림 없이 어두운 하늘에는 별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다만 성벽 근처에 걸린 조그만 달만이 휘황하게 빛나며, 지하 세상을 얌전히 내리비출 따름이다.
“무슨 달이 저렇게 작대.”
“―달이 아니니까요.”
별안간 귀에 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느새 활짝 열린 문 앞, 악마 여럿을 대동한 제노비아 자일스가 반듯하게 서 있었다.
“당신…….”
디아나가 황망히 중얼댔다. 제노비아는 조용히 방을 가로질러 침대 맡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디아나가 구경했던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달이 아닙니다. 지하 세계를 유일하게 비추는 별이지요.”
“별이요?”
“어떤 별인지 모르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디아나는 우물쭈물했다.
“지하의 별을 내가 어찌 알아요.”
“다른 이는 몰라도 그대는 알아야지요. 그대에게 축복을 내려 준 별이 아닙니까.”
제노비아가 건조하게 말했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디아나가 창밖으로 더디게 시선을 돌렸다. 성벽 부근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별. 아무리 봐도 디아나가 알던 흐릿한 별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게…….”
암흑의 별 칼리스토.
디아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뜻 모를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제노비아가 혼곤하게 눈을 깜박였다.
“암흑의 별이라기엔 지나치게 밝지요. 그대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지하 세상의 주민들도 저 별을 달이라 여기니까요. 지하는 별빛 닿지 못하는 세상이라던 속설이 마냥 그릇되지도 않습니다.”
제노비아는 그리 말하며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시선은 오래갔다. 얼굴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는 시선에 질린 디아나가 끝내 고개를 돌릴 때까지도, 제노비아 자일스는 제법 끈졌다.
“……정말 그리젤다를 꼭 빼닮았군요.”
마치 꿈꾸듯 몽환적인 음성이었다. 디아나를 파헤치는 시선도 먼 과거를 떠올리듯 혼몽하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디아나는 제노비아가 몹시 불편해졌다. 비록 어머니라 할지라도 자신에게서 타인을 보는 사람이 반가울 리 없었다.
디아나가 망설이며 말문을 열었다.
“저기, 당신이 날 지하로 데려온 거죠?”
그제야 제노비아는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가물가물하던 눈에 어두운 총기가 돌아왔다. 물끄러미 디아나를 보던 제노비아가 습관처럼 미소 지었다.
“정확히는 동방 군주가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었습니다.”
“동방 군주라면 마르고트를 말하는 거예요?”
제노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르고트랑 계약했어요? 그동안 어째서 날 노린 건데요? 지하로 끌고 오려고? 왜요?”
“그대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궁금한 것이 많겠지요. 하지만 동방 군주가 돌아오거든 물으세요. 나는 그대가 의문하는 것을 전부 알지는 못합니다.”
“웃기지 말아요. 당신도 지하로 왔잖아요. 이유도 모르고 왔다는 거예요, 지금?”
“그 질문이라면 나도 답할 수 있겠군요.”
책을 읊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소리였다. 디아나는 떨리는 손에 힘주어 이불을 쥐었다. 그 모습을 본 제노비아가 얼핏 웃었다. 유령처럼 열없던 얼굴이 처음으로 열띠었다. 미물의 부질없는 발악을 지켜보는 것처럼 오연한 태도였다.
“나는 기적을 펼칠 겁니다.”
제노비아가 경외하듯 말했다.
“그리젤다를 되살릴 거예요.”
온몸을 들끓던 신열이 가라앉은 이후, 디아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악마 시종에게 궁금한 점 몇 가지를 물었다. 동방 군주라 불리는 마르고트의 세력과 지하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 그리고 지금 그녀가 머무는 참극성에 대해서였다. 다행스럽게도 시종이 제법 친절하게 대답해 준 덕분에, 육식하는 토끼 머리에 대한 디아나의 인식도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시종의 말에 따르면, 지하 세계는 혹한과 약육강식의 땅이었다. 태양이 뜨지 않는 세상. 지하를 내리비추는 천체는 오직 서쪽 하늘에 걸린 달뿐이었다. 1년 내내 추위가 몰아치는 까닭에 불이 없으면 단 이틀도 버티지 못하며, 풍요로운 곡식은 꿈도 못 꿨다. 도저히 온화한 동물이 태동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서로 죽고 죽이며 사는 약육강식이야말로, 이 무질서한 세계의 유일무이한 질서였다.
그러한 약육강식의 피라미드의 정점에 선 자가 바로 동방 군주 마르고트였다. 옛 동방에 난립하던 열하나의 군주와 예순여섯 군단을 무자비하게 복속시킨 유혈 군주. 별빛 닿지 못하는 지하 세계에서 동방 군주 마르고트와 유일하게 대적할 만한 상대는 통곡의 절벽 너머 머나먼 서방을 지배하는 서방 군주뿐이었으나, 동방의 악마들이 여기길 만일 마르고트에게 날개가 있어 통곡의 절벽을 넘을 수만 있다면 전 세계를 지배할 것이었다.
듣고도 믿기지가 않는 얘기였다. 디아나가 아는 마르고트는 악마답게 잔혹한 구석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친절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를 달래 줄 리 없으며, 디아나가 버릇없이 굴 때마다 마냥 받아 줄 이유도 없었다.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계획적인 행동이었다고 치부하기에 마르고트는 자못 헌신적이었다.
‘너는 날 사랑하지?’
[세상에 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는 없단다.]
고독에 몸서리치던 어린 날, 눈물을 닦아 주던 손과 따스하게 안아 주던 품이 있었다. 그 손길이 어찌나 부드러웠는지, 품이 어찌나 푸근했는지 디아나는 똑똑히 기억했다. 비록 잔악한 성미에 질려 어느 순간부터 꼴도 보지 않았다지만, 그럼에도 마르고트는 디아나의 유년기에서 몇 안 되는 따사로운 추억이었다. 그래서 디아나는 쉽사리 마르고트의 선의를 부정할 수 없었다. 마르고트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유년기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곁에 있다면 붙들어 질문을 쏟아 내고 싶었다. 제노비아 자일스와는 어떤 관계인지, 나를 왜 지하로 불러들였는지. 하지만 마르고트는 멀리 있었고, 돌아올 날은 요원했다. 혼자서 골몰하던 디아나는 속이 갑갑해진 나머지 머리를 산발로 헤집으며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저도 모르게 마력이 방출되어 가구들이 기우뚱 흔들렸다.
“바깥 구경 좀 할래요.”
아프지 않으니 하루가 무료했다. 방은 제법 널찍했으나 ,온종일 갇혀도 괜찮을 만큼 광활하진 않았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마르고트를 이대로 기다리자니 눈앞이 캄캄했다.
[바깥이라면 어디를 이르십니까?]
“어디든 좋아요. 이 방만 아니면 돼요.”
[하지만 군주께선 손님을 안전히 모시라 명하셨습니다.]
악마 시종이 주저하며 말했다. 디아나는 이를 까득 갈았다. 통제할 수 없는 마력을 부러 부추기자, 가구들이 시종을 으르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날 안전히 모시고 싶거든 어디로든 데려가요. 감금되어서 미치는 꼴이 보고 싶어요?”
그러자 시종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당장 준비하겠노라 고했다. 디아나는 악마 시종이 부리나케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씁쓸하게 지켜보며 마력을 가라앉혔다. 본래라면 순식간에 마력을 갈무리했겠으나, 이번에는 삼사 분가량 시간이 소요되었다.
지하로 끌려와서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증폭된 마력일 것이다. 지상에선 그토록 흐릿하던 암흑의 별 칼리스토는 지하에선 달로 추앙받을 만치 휘황했다. 세상을 유일하게 내리비추는 천체로서 존재감이 대단했다. 자연히 그의 축복을 받는 디아나의 체내로 이전의 몇 곱절은 될 법한 마력이 흘러들어 왔다.
다만 디아나는 늘어난 마력을 운용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곧잘 마력이 바깥으로 흘렀고, 가벼운 마법을 부리려 해도 좀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계속 연습하면 언젠가는 이전처럼 수월하게 마력을 운용하겠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성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디가 소란스럽고, 어디가 조용한지. 어디가 경계 심하고, 어디가 이목을 피하는지.
그리고 어디가 출구인지.
디아나는 마르고트를 믿고 싶었다. 지금까지 마르고트가 보여 줬던 헌신을 가짜라고 매도하긴 싫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마르고트가 그녀를 배신한다면, 혼자서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 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나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여기는 언니도 스승님도 하다못해 세드릭도 없는 지하 세계. 함부로 믿어선 안 되며, 함부로 의지해서도 안 되었다. 무사히 살아 돌아가려면 정신 똑바로 차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하로 끌려온 처지를 비관하며 눈물 흘릴 겨를조차 지금은 사치였다.
광인 니올로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은 것처럼, 동화 속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이번에도 그녀는 살아 돌아갈 것이었다. 그리 믿어야 했다.
[일단 이걸 걸치십시오.]
오래지 않아 돌아온 악마 시종이 검은 로브를 내밀었다.
“참극성에서 손님의 존재를 아는 악마는 아주 드뭅니다. 군주께서 인간과 계약하셨다는 걸 아는 악마도 드물지요. 더구나 군주를 제외한 악마들은 인간을 본 적이 없으니, 행여나 손님이 인간임을 알아차린다면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물론 호위가 함께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시종은 콧등의 땀을 닦아 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날 내보내면 당신이 벌을 받나요?”
[아마…… 아닐 겁니다. 손님의 외출을 금하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습니다.]
디아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로브를 걸쳐 모습을 감추고 나가니, 네댓 명의 악마 호위가 조용히 뒤따랐다. 시종이 앞장서서 안내했다. 어떻게든 디아나를 안전히 모시려는 심산인지 인적 드문 길만 속속 골라잡았다.
참극성은 고요했다. 시종의 말로는 마르고트는 주변에 사람을 많이 두는 편이 아니었다. 덕분에 들키지 않고 성내를 구경할 수 있으니, 디아나나 시종이나 만족스러운 외출인 듯했다.
그러나 꽤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무렵, 불현듯 멀리서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다. 디아나는 까치발을 들어 조심스레 창밖을 내다보았다.
횃불로 어둠을 몰아낸 공터. 악마 여남은이 조그만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공놀이하는 모습이 꼭 지상에서 어린아이들이 노는 모습과 비슷했다. 악마가 인간보다 체구가 크고, 힘도 곱절은 세서 그런지 의외로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때, 허공으로 솟구친 공이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디아나는 깜짝 놀라 양팔로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쨍그랑!
별안간 근처의 유리창이 산산조각 깨졌다. 복도로 난입한 공이 데구루루 바닥을 굴렀다. 악마 시종이 위험하게 무슨 짓이냐 창밖으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댔으나, 디아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느라 여념 없었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펄떡댔다.
“……이만 돌아가요.”
디아나가 시종에게 겨우 말했다. 그리고 일어서려던 차에 공이 그녀의 발치로 굴러왔다. 디아나는 무심코 공을 들어 올렸다. 진흙으로 뒤범벅인 걸 알아채고 뒤늦게 후회했으나, 오래가진 못했다.
그건, 공이 아니었다.
짓뭉개진 콧대와 이리저리 뒤틀린 입술. 뽑혀 나간 머리카락. 그럼에도 선명한 붉은 눈.
디아나는 멍하니 ‘그것’과 눈을 마주했다. 뚫린 구멍마다 구더기가 징그럽게 꿈틀댔지만, 새빨간 눈알에 못 박힌 시선은 떠나질 못했다. 일전에 본 적 있는 눈이었다. 분명 면식 있는 얼굴이었다. 곧이어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리쳤다.
니올로 팔리아치.
디아나는 까무룩 혼절했다.
그날 이후로 디아나는 방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악마 시종은 이불 속에 파묻힌 디아나를 의아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달갑게 여겼다. 그날의 외출은 누구에게도 새 나가지 않았으므로, 참극성 꼭대기에 인간이 머문다는 사실은 여전히 극소수만이 알고 있었다.
이윽고 수일이 흘러 마르고트가 돌아왔다. 반란군의 피로 진창인 군주를 참극성의 악마들은 소리 높여 맞이했다. 오늘도 마르고트는 승리의 횃불을 들고 돌아왔다. 단 한 번도 패퇴한 적 없는 동방 군주는 지고의 영웅이요, 유례없는 학살자였다.
마르고트는 참극성으로 귀환하자마자, 디아나를 귀물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곳은 군주가 허락한 자만 들 수 있는 내밀한 방이자, 동방의 온갖 금은보화가 가득하다고 전해지는 비밀의 방이었다.
[곧 군주께서 당도하실 겁니다.]
시종은 방문 앞에서 총총히 물러갔다. 물끄러미 시종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디아나가 조심스레 마법으로 문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 없는 자그만 방이었다. 밤처럼 어두운 가운데, 문가에 꽂힌 여린 촛대만이 흐릿하게 눈가에 어른거렸다. 디아나는 촛대를 빼 들고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흔한 가구조차 없었다. 오직 뚜껑 열린 관만이 중앙에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디아나는 촛불로 관을 비추었다. 발간빛이 시체의 창백한 뺨에 닿았다. 잠든 것처럼 감긴 눈과 유려한 콧대, 그리고 다물린 입매가 차례로 밝아졌다. 촛불보다 붉은 머리채가 부드러이 손끝을 스쳤다.
디아나는 오랫동안 시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핏 무감해 뵈는 잿빛 눈은 생각을 읽기 어려웠다.
[기억하느냐?]
심해처럼 깊디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디아나는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잊을 리 없잖아. 어머니의 얼굴인데.”
[그리젤다가 알면 기뻐하겠구나.]
어둠 속에서 검은 털로 뒤덮인 손이 튀어나와 촛대를 채 갔다. 마르고트는 디아나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서는 몹시 그리운 눈으로 관을 굽어보았다.
[네가 이렇게 성장한 모습을 그리젤다가 보지 못해 아쉽구나. 지금이라도 눈을 뜨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돌아가셨는걸.”
[그래. 죽은 자는 눈을 뜰 수 없지. 하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씩 그리젤다의 눈빛이, 나를 부르던 목소리가 그립구나.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마르고트가 열띤 소리로 물었다. 디아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그리젤다와 함께한 시간이 적어 그럴 게다. 어찌 어머니가 그립지 않겠느냐.]
“그럴 수도 있고.”
디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수긍했다.
“한데 말이야. 네 이름을 들었어.”
[훌륭한 이름이지. 예전부터 네게 알려 주고 싶었다만, 행여나 네가 놀랄까 봐 말하지 못했다.]
“많이 놀라긴 했어. 그래도 네가 직접 알려 주면 좋았잖아. 괜히 다른 사람 입으로 듣게 하고.”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사과는 됐어. 그보단 설명을 해 줘야지.”
디아나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마르고트 솔.”
비로소 이름을 불린 악마가 한껏 웃었다. 디아나는 반쯤 고개를 틀었다. 스산한 시야에 입꼬리 쭉 찢어진 염소가 들어찼다.
“내게 할 말 없어?”
그에 마르고트는 오래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상이 모르는 위대한 마녀의 일대기가 굼실거리며 풀어졌다.
그리젤다 솔.
그녀는 별의 소리를 듣는 마녀였다. 어미의 자궁에서부터 별의 축복이 함께였으며, 별의 속삭임이 늘 주위를 맴돌았다. 밤하늘에 소금처럼 흩뿌려진 수억 별 가운데 오직 하나의 축복을 받는 다른 동족과 달리, 그리젤다는 모든 별이 축복하는 마녀였다. 그렇기에 산고에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비명이나 이름을 불러 주는 아버지의 음성보다도 수억 별의 속삭임을 먼저 들었다. 그녀의 생에서 최초의 사랑, 최초의 음성, 최초의 축복은 전부 별이었다.
그리젤다는 일찌감치 부모를 잃었다. 가난을 이기지 못한 부모가 가장 어린 그리젤다를 구빈원에 맡긴 것이었다. 그리젤다는 스무 밤이 지나 데리러 오겠다는 부모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부모도 다시는 어린 딸을 찾지 않았다. 부모를 위시한 가족은 그렇게 그리젤다의 삶에서 영영 지워졌다.
구빈원 생활은 마냥 녹록치만은 않았다. 별의 소리를 듣는 그리젤다가 다른 사람의 눈에 평범하게 비칠 리 없었다. 또래 아이들은 그리젤다를 두려워했고, 구빈원을 관리하던 수녀는 그리젤다를 악령 쓰인 아이로 판단하여 억지로 구마를 행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하늘이 노한 듯 땅이 흔들리고 성물이 산산조각으로 깨지자, 신실한 수녀도 더는 그리젤다에게 손대지 못했다.
그렇게 그리젤다는 고립되어 갔다. 하지만 그리젤다의 세상은 여전히 별빛으로 충만했으므로 고독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상하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가 구빈원을 찾아왔다.
“별의 축복을 받은 아이를 데리러 왔습니다.”
“여기 악령이 씐 아이는 있어도 축복받은 아이는 없습니다.”
“그대는 눈뜬장님이로군요.”
수녀의 방해에도 여자는 한눈에 그리젤다를 알아보았다.
“꿈에서 그대를 보았습니다.”
여자는 자애로운 손길로 그리젤다를 품었다. 그리젤다는 여자가 내미는 손을 순순히 맞잡았다. 여자를 따라 그리젤다가 달한 곳은 구빈원에 비할 바 없이 훌륭한 저택이었다.
“나는 제노비아 자일스. <교활한 자일스>의 수장입니다. 그대의 이름은 무언가요?”
“그리젤다 솔.”
“혹시 내게 궁금한 점이 있습니까?”
“이미 여명이 알려 줬어요.”
수억 별의 속삭임에는 당연히 여명의 별 페베의 소리도 있었다. 페베는 하루도 빛을 잃지 않는 만큼 몹시 수다스러웠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딸에 대해 침묵할 리 없었다.
마법이란 축복을 내려 준 페베를 경외하던 제노비아는 과히 반색했다.
“페베의 소리를 듣습니까?”
“여명뿐만이 아니라 하늘의 별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요. 전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과연 그대는 하늘의 축복을 받은 마녀입니다. 별의 사랑으로 충만한 그대의 세상은 어떤가요? 찬란한 별빛만큼이나 아름답습니까?”
그리젤다는 고개를 기우듬했다.
“내 세상은 언제나 밝고 시끄러워요. 나는 어두운 밤을 모르고 고요를 모른답니다. 이게 아름다운 건가요?”
“별이 보듬는 세상이라면 필시 아름다울 테지요. 그대는 진정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귀히 여기세요.”
제노비아가 말하길, 세상에는 그리젤다처럼 수억 별의 축복을 받고 태어나는 아이가 있었다. 물론 흔하지는 않았다. 기록으로 짐작하건대 짧으면 수백 년, 길면 천 년에 한 번꼴로 그리젤다와 같은 아이가 등장했다. 제노비아도 직접 보기로는 처음이라 했다.
“내 생애 그대를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이 또한 여명께서 안배하신 운명이겠지요.”
제노비아가 흔흔히 말했다.
“그대가 자랄 때까지 내가 돌보겠습니다. 집이 필요하다면 집을 드리고,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드리겠어요. 내겐 주인 없는 집이 많고, 평생을 써도 부족한 금화가 넘쳐 납니다.”
“어째서 날 위하나요?”
“나는 그대가 건강하길 바랍니다. 장수하길 바라요. 그대는 마법의 진화를 이끌 선각자이자,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할 영도자. 부디 오래오래 살아서 감흥 없는 내 세상에 기쁨이란 축복을 내려 주길 고대합니다.”
그리젤다는 제노비아에게 공감하진 못했으나, 그녀의 지원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구빈원의 꾀죄죄한 어린아이는 삽시간에 시골 저택과 금궤의 주인이 되었다. 제노비아는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용의 곁으로 떠나갔다.
저택은 한산한 숲 속에 지어진 조그마한 이층집이었다. 전국에 걸쳐 수많은 저택을 소유한 자일스 가문에선 거의 잊힌 집이나 다름없으나, 그리젤다 혼자서 생활하기엔 넉넉했다. 무엇보다도 서재가 풍족했다. 그리젤다는 그곳에서 책을 벗 삼아 유년기를 보냈는데, 마을에서 저택이 동떨어진 까닭으로 낯선 이와 조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제노비아는 잊을 만하면 찾아왔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별이 들려주는 이야기와는 다르기에 새로웠다.
“훗날 그대도 세상으로 나가게 되겠지요. 만인이 그대를 주목할 겁니다. 어떤 이는 그대가 두려워 찬양할 것이고, 어떤 이는 그대가 두려워 억압할 겁니다. 부디 억압을 좌시하지 마세요. 그대는 유일무이한 마녀. 누구도 그대를 속박하지 못합니다.”
제노비아가 경고했다.
“그러나 단 하나만 주의하세요. 중죄를 지으면 아니 됩니다. 만일 그대가 살인을 저지르거나 마법으로 금화를 위조한다면, 중앙삼국과 발푸르기스 평의회 산하 사냥꾼이 일제히 그대를 쫓을 것입니다. 그대는 누구보다 강하지만, 만인과 맞서지는 못합니다. 나는 그대가 고귀한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길 바라지 않아요.”
그리젤다는 수긍했다. 제노비아는 안도하여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 그리젤다는 어느덧 소녀로 자라났다. 이제는 평화로운 전원생활도 점점 물리던 차에, 그리젤다는 광활한 서재에서 마지막 책을 꺼내 들었다.
마지막 책은 거의 처음으로 그녀의 관심을 이끌어 냈다. 다름 아니라 지하 세계와 악마에 대한 책이었다.
그리젤다는 호기심에 반짝거리는 눈으로 악마를 소환했다. 이빨이 날카로운 돼지 머리에 징그러운 파충류의 몸을 지닌 악마는 본능적으로 그리젤다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너 대단한 마녀로구나.]
악마는 탐욕스러웠다. 어찌나 욕심 많던지, 계약의 대가로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할 정도였다.
[내게 복종하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서 당장 널 죽이겠다.]
바로 그러한 탐욕이 불행의 단초였다. 그리젤다는 악마의 거만한 태도에 수틀린 나머지 악마를 궤짝에 가두고 말았다. 악마는 좁다란 궤짝에서 마구 몸부림쳤으나, 마법으로 봉인된 문은 꼼짝도 안 했다. 욕심 많은 악마는 그리 굶주려 죽을 운명인 듯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리젤다는 여전히 지하 세계가 궁금했다. 그녀에게 수억 가지 이야기를 전해 주는 별들은 대부분 지하에 무지했으며, 유일하게 지하에서 빛나는 암흑의 별 칼리스토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다른 속삭임에 묻히기 일쑤였다. 그리젤다는 악마가 갇힌 궤짝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늘 그렇듯 길은 여럿이었다.
이튿날, 그리젤다는 무리에서 벗어나 숲 속을 헤매는 산양을 데려왔다. 궤짝에 갇힌 악마와는 달리 순하고 실한 놈이었다.
“널 영원히 살게 해 줄게.”
그리젤다는 산양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궤짝을 열었다.
[내게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굶주린 악마가 궤짝에서 기어올라 왔다. 그리젤다는 무심히 대꾸했다.
“너는 위대하게 만들어 줄게.”
바닥에 둥그런 원이 나타났다. 하얀빛이 원을 노닐며 숱한 선분과 도형을 그려 냈다.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최초의 마법이며,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최초의 마법이었다. 하늘의 수억 별이 그리젤다가 걷는 최초의 길을 찬란히 축복했다.
마침내 마법이 완성되었다.
징그러운 파충류의 몸에 산양의 머리를 얹은 악마는 순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그리젤다는 비로소 흡족하게 웃었다.
“마르고트. 네게는 특별히 내 이름의 반쪽을 줄게.”
마르고트 솔.
그녀의 첫 작품이었다.
대도시마다 막 전선과 전차가 깔리던 시대, 그리젤다는 세상으로 나왔다. 도시는 부푼 꿈을 안고 시골에서 상경한 촌뜨기로 붐볐으며, 겉보기로는 그리젤다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제노비아처럼 한눈에 그녀의 위대함을 알아채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그녀는 한동안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았다. 마치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처럼 세상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그리젤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사건이 발발했다. 바로 카스텔리토 화산의 폭발이었다.
당시 그리젤다는 메시나와 국경을 접한 남부의 대도시 피터스트에 머물고 있었다. 도시 근방에 자리한 카스텔리토 화산은 마지막으로 폭발한 지가 어언 400년을 훌쩍 넘겨 사실상 사화산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느 날 갑자기 화산이 폭발했을 때, 피터스트가 아주 무방비하게 용암에 노출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도시는 몹시 혼잡했다. 시민들은 집안 살림도 내던지고 달아나기 급급했으며, 공포에 질린 군중을 통제하는 이도 없었다. 그사이 화산재가 혼탁하게 하늘을 물들이고, 쪼개진 암석이 한둘 도시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화산에 뒤덮여 사라졌다는 고대 도시처럼 피터스트도 영영 용암에 파묻힐 것만 같았다.
그때, 그리젤다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새처럼 유연하게 하늘을 날아오르는 그리젤다를 주목했다. 그녀는 붉은 머리채를 흩날리며 분화구에서 터져 나오는 암석과 용암을 부드럽게 피했다. 그리고 높디높은 하늘에서 시뻘건 용암이 끓어오르는 화산을 굽어보았다. 지옥이 도래한 듯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 그리젤다는 불현듯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명랑한 노랫소리가 바람을 타고 지상으로 전해졌다. 도시를 들끓던 처절한 비명이 일순 쥐 죽은 듯 가라앉으며, 시민들은 자연스레 낯선 곡조에 귀 기울였다. 누구도 들어 본 적 없는 즉흥곡이자, 하늘의 수억 별에게 바치는 찬가. 노래의 불가사의한 힘이 단숨에 그들을 매료시켰다.
그날, 화산은 기적적으로 잦아들었다. 하지만 신의 은총에 감읍하며 십자가에 경배하는 자는 없었다. 피터스트의 시민들은 웬 붉은 머리 소녀가 분노한 화산을 노랫소리로 부드러이 달래던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다. 기적이 아니고서는 달리 표현할 수 없었으므로, 만일 인간을 가엽게 여긴 신이 지상에 강림한 것이라면 무조건 소녀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사람들은 신의 권능을 행한 소녀를 찾아 헤매었다.
곧 어느 일간지에서 그리젤다의 정체를 밝혀 냈다. 산티그마 교단과 그의 신실한 교도들은 한낱 마녀가 구원자로 받들어지는 분위기를 탐탁잖게 여겼지만, 여론을 의식한 잉그람 국왕은 그리젤다에게 기꺼이 명예로운 작위를 내렸다.
하지만 그리젤다는 갑작스레 자신에게로 쏠린 시선이 몹시도 싫증 났다. 매일같이 그리젤다 솔을 신봉하는 피터스트가 꼴도 보기 싫어 한적한 소도시로 거주지를 옮겼고 파리 떼처럼 몰려드는 기자들을 무례하게 쫓아냈다. 그에 반감을 품은 기자들이 득달같이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 냈으나, 그리젤다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게 사회적인 위신이란 쓸모없기로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진배없었다.
그리젤다를 괴롭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피터스트에서 일어난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오히려 그녀와 같은 동족들이 더욱 뼈저리게 체감했으므로, 웬만해서는 심해처럼 잠잠한 마법 사회가 요동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더욱이 마법의 주인공이 대집회에 참여해서 이명을 받긴커녕 승급 시험을 통과한 적조차 없는 무명의 마녀라면. 오래도록 외부 세계에 무관심했던 치들마저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에게 주목했다.
발푸르기스 평의회는 당장 그리젤다에게 편지를 부쳤다. 요지는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석해서 마법 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거듭나라는 것이었다. 평의회를 비롯한 마법 사회는 그리젤다의 불참을 생각지도 않았으나, 그녀는 마지막 날까지도 파펜하임산에 나타나지 않았다.
훗날, 그리젤다는 대집회를 권하는 바바라 자일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가야 하나요? 동굴에서 노인네들이 일러 주는 이명이나 들으러? 하지만 별이 말하는 소리는 지금도 듣고 있는걸요. 나는 대집회에 갈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리젤다는 어느 한 군데에 속하길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것이 조국인 잉그람이든, 동족을 자처하는 마법 사회든 마찬가지였다. 그리젤다는 소속을 속박으로 여겼고, 속박을 억압으로 여겼다. 구빈원에서 풀려난 이래 늘 자유롭게 살았던 그녀에게 소속감을 강제하는 마법 사회는 일방적으로 그녀를 구국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잉그람 정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당신도 마녀잖습니까. 어째서 동족과 함께하길 거부하는 거죠?”
당시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던 볼프강 오르테가가 치기 어린 마음에 그리젤다를 공개적으로 지탄했다. 비난에는 무시로 일관하던 그리젤다가 웬일로 반응을 보였다.
“동족이라고요? 나와 당신이?”
그리젤다는 우스꽝스러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폭소했다.
“당신은 폭발한 화산을 잠재울 수 있나요?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 낼 수 있나요? 그도 아니면 운명을 거스를 용기는 있나요?”
“나는 봄을 불러오는 <오만한 오르테가>의 적자. 당신이 아무리 기적 같은 마법을 부렸다곤 하나, 이렇게 나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가문이 드높인 명예가 아니면 내세울 것이 없는 모양이죠?”
볼프강은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그리젤다는 비꼬듯 종언을 고했다.
“내 세상은 당신과 달라요. 그러니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마요.”
신예를 기대하던 마녀‧마법사들은 크게 실망했다. 볼프강과의 설전에서 그리젤다가 마법 사회에 얽매이지 않겠노라 천명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그녀를 광인으로, 혹자는 괴짜로 평했다. 그리젤다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은 이들조차 그런 평가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리젤다는 부표처럼 내내 떠돌아다녔다. 어제는 이 도시고, 오늘은 저 도시였다. 그녀는 도시의 소음을 질색했으나, 한편으로는 저물지 않는 도시의 환락에 광적으로 빠져들었다. 술과 음악, 그리고 서로의 젊음을 탐하는 손길은 그녀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쾌락을 선사했다. 열락에 젖은 단꿈이 그리젤다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피터스트의 영웅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은행은 무일푼의 그리젤다에게 호의적이었다. 강대한 마녀는 언제고 목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널렸으므로, 은행은 마땅한 집 한 채 없는 그녀의 상환 능력을 비정상적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리젤다는 일반인은 꿈도 못 꿀 저이자로 큰돈을 빌려 하룻밤 도박으로 날리길 거듭했다.
실로 방탕한 생활이었다. 그녀는 깨어 있는 동안 대체로 술에 취했고, 가끔은 약에 취했다. 밤마다 고급 술집을 드나들며 종업원의 한 달 봉급에 달하는 술을 궤짝째로 사들이니 자연스레 사람이 모였다. 돈을 물 쓰듯 하는 졸부, 낯짝 반반한 배우, 한탕을 노리는 도박꾼. 그리젤다가 어울리는 자들은 제각각이었다.
“당신은 일하지 않아요? 항상 유흥가에만 있는 것 같아.”
누군가 물었을 때 그리젤다는 깔깔 웃고 말았다. 그녀는 마법으로 돈을 벌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세상에는 재미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일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엔 주어진 생이 너무 짧았으므로, 언제나 쾌락을 좇아 살았다. 건설적인 일은 접어 두고 시답잖은 일에만 마법을 써 대는 그녀를 혹자는 타락한 탕아라 손가락질했으나, 그조차 거들떠보지 않았다. 오직 열락만이 그녀를 채웠다.
그렇게 그리젤다는 차츰 별에게서 멀어졌다. 술집에서 흐르는 통속가요, 취객이 내지르는 고성, 약에 젖은 웃음소리가 수억 별의 속삭임을 파묻었다. 마치 먹구름이 별빛을 가리듯 그리젤다의 세상은 어느새 도시의 잿빛 소음으로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리젤다는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으로 깨어났다. 아직 동트지 않은 퍼런 새벽녘. 처음 보는 침대에서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였다.
“나는 네가 살인을 즐기지 않는 게 신기해.”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중얼댔다. 그녀를 잘 아는 투였으나 그리젤다는 남자를 몰랐다.
“너는 흥미로우면 뭐든 하잖아. 아직 살인에는 취미를 붙이지 못한 건가? 미치광이의 말로는 주로 살인자던데.”
“살인은 너무 쉽잖아요. 재미가 없는걸.”
그리젤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했다. 그때 남자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임신입니다.”
예상치 못한 선고였다. 그리젤다는 드물게 당황했으나, 낙태를 권하는 말에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흔히 말하길, 마녀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의 역작은 자식이라 했다. 그리젤다는 이참에 자식이란 역작을 낳아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곱 달 뒤, 그리젤다는 끔찍한 산고를 겪으며 다시는 이딴 짓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진통만 족히 10시간을 넘는 난산이었다.
“예쁜 아기네요.”
마침내 아이가 쩌렁쩌렁 목청을 터트리며 세상으로 나왔다. 산파는 강보에 싼 아이를 그리젤다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리젤다는 아이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곧바로 산파에게 아이를 넘겼다.
“이름은 뭐로 하시게요?”
“글쎄요.”
“어머, 아직 안 정하셨어요? 아이 아빠랑 상의는 하셨고요?”
그리젤다는 녹초가 된 몸으로 멍하니 눈만 깜박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어차피 아이는 그리젤다의 성을 이어받을 그리젤다의 딸이지만, 평범한 산파에게 마법 사회의 풍습을 설명하기에 그리젤다는 너무 지쳤다.
“당신, 이름이 뭐예요?”
아이는 산파의 이름을 땄다. 헤스터 솔. 그럭저럭 괜찮은 이름이었다.
그리젤다는 젖 한 번 물리지 않은 갓난아기를 그대로 위탁 가정에 맡겼다. 그녀는 이제 예전처럼 유흥을 즐기진 않았지만 대신 유랑에 몰두했다.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을 벗어나 바위산, 숲, 바다, 발 닿는 곳이면 어디고 갔다. 도중에 은행에서 압류가 들어오며 아이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도 <가혹한 아스톨포>의 수장 우르바노 아스톨포에게 급전을 빌려 해결했다. 그는 그리젤다의 재능을 귀히 여기는 늙은 마법사였다.
“아이를 돌보십시오. 그대가 돌볼 자신이 없다면 적당한 스승이라도 찾아 주는 것이 도리입니다.”
우르바노 아스톨포가 조언했다. 그리젤다는 그제야 아이를 만나러 갔다. 출산한 지 무려 5년 만이었다.
“어머니.”
아이는 쭈뼛거리면서도 공손히 인사했다. 그리젤다는 영 낯선 기분으로 아이의 조목조목을 살펴보았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던 갓난아기가 이렇게나 조숙한 아이로 자랐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자. 네게 스승을 찾아 주마.”
그리젤다는 아이를 안아 들고 벨리엄으로 향했다. 야트막한 야산이 자리한 시골 도시에는 베가의 본성이 우뚝 서 있었다.
“타락한 탕아, 그리젤다 당신이 여기까진 어쩐 일인가요?”
베가의 수장, 아멜리아 베가가 아리따운 자태로 그들을 맞이했다.
“당신은 성에 차는 재능이 아니면 제자를 들이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내 딸이라면 당신에게도 흡족할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제자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겠군요. 돌아가세요. 나는 제자가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늘 빛나는 재능을 갈구하지 않나요?”
비단처럼 매끄럽던 아멜리아의 낯이 흉하게 어긋났다.
“나는 당신이 미워요.”
“내 재능은 사랑하잖아요.”
“너무 사랑해서 죽여 버릴지도 몰라요.”
“염려 말아요. 내 딸은 결코 나와 같은 경지에 오르지 못합니다.”
아멜리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죽어서도 닿지 못할 지고의 경지를 탐하는 시선이 자꾸만 아이에게로 향했다.
“어째서 나를 찾아왔어요? 바바라 자일스라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당신의 청을 받아들였을 텐데.”
“그녀는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요. 또 유산했다더군요.”
“당신이 그런 사정을 고려할 위인이었던가요?”
아멜리아가 비웃었다.
“좋아요. 내가 당신의 딸을 가르치죠. 다만 많은 것을 바라지 마요. 나는 좋은 스승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젤다는 아이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아이가 불안스러운 눈으로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베가의 가르침은 귀하단다. 좋은 제자가 될 필요는 없다만 스스로에게 좋은 채찍이 되어라.”
“무서워요,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 아멜리아는 냉정하긴 해도 사람을 죽이는 마녀는 아니야.”
아이가 못내 서글픈 표정으로 손가락을 얽었다. 그리젤다는 떠나지 말라는, 혹은 자기도 데려가 달라는 말을 짐작했다. 하지만 아이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사랑해요.”
순간 그리젤다는 말문이 막혔다. 아이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공손히 인사하곤 총총히 성내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젤다는 어린 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헤스터.
아이의 이름을 한 번도 불러 준 적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젤다는 하염없이 세상을 떠돌았다. 주로 인적 드문 산천과 고대의 유적지를 찾아 헤맸는데, 때로는 대도시에 들러 의뢰를 받기도 했다. 그리젤다는 이제 마법으로 간간이 돈을 벌었다. 그간 이자가 불어 어마어마해진 빚을 갚기엔 역부족이었지만, 적어도 매달 이자를 충당하기엔 족했다.
세상은 여전히 따분했다. 다디단 꿈을 선사하던 향락도 이제는 전처럼 환상적이지 않았다. 물처럼 마셔 대던 술은 쓰게만 느껴졌고, 거짓된 밀어를 속삭이던 수많은 연인들은 지나간 추억도 되지 못했다. 그리젤다는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예전처럼 도시의 뒷골목을 찾았지만, 이튿날이면 몽롱한 숙취에 시달렸다. 이제는 도시의 잿빛 소음이 싫증 났다. 인적 드문 곳이면 다시금 되살아나는 별의 소리가 그리웠다.
가끔은 방탕하고, 가끔은 성실했다. 그리젤다는 그저 목적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부리는 마법마다 만인이 경탄했으나, 자신을 칭송하는 외침조차 무의미했다. 그리젤다는 명상적인 우울함에 빠져 무작정 발길을 옮겨 댔다. 잉그람 전역을 돌아다니는 것으로도 모자라 국경을 넘어 머나먼 메시나와 반제로도 향했다. 때로는 그녀를 환영하고, 때로는 그녀를 적대하는 도시를 건너다니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삶은 어쩌면 이토록 지루한가.
그리젤다는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들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간절하게 삶을 이어 가는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죽음은 머나먼 존재가 아니었다. 세상을 떠나는 죽음이 가깝기에 세상을 전전하는 삶이 멀게만 느껴졌다. 삶의 유일한 기쁨이던 쾌락이 시들며 그리젤다는 더는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리젤다는 쓰러져 가는 시골 마을에서 아주 반가운 얼굴을 조우했다. 오래전 부질없이 죽었다던 제노비아 자일스였다.
“무슨 미련이 그리도 많기에 죽어서도 이승을 떠도는 건가요?”
“페넬로피…….”
“술내가 대단하네요. 이제는 나도 못 알아보는 거예요?”
제노비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늘 총기로 반짝이던 눈이 취기로 흐려져 있었다.
“그리젤다 솔. 이게 꿈인가요?”
“설마요.”
“하지만 당신을 꿈에서 보았는데…….”
제노비아는 가물가물한 눈으로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의 장례식이었어요. 하나뿐인 딸이 서럽게 곡하더군요.”
자일스의 예언자가 꾸는 꿈이라면 필시 예지몽이었다. 그리젤다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슬며시 턱을 괴었다.
“내가 죽나요? 언제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외동딸이 아직 어렸으니 그리 멀지만은 않았겠죠.”
제노비아는 차츰 정신을 차렸다. 흐려져 뭉툭하던 눈매가 재차 날카로워졌다.
“한데 당신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
“도리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죽었다던 당신이 어째서 이런 궁상맞은 술집에 쓰러져 있죠?”
“당연할 걸 묻는군요. 죽지 않았으니까요. 나만 못나게 생을 이어 가고 있으니까요.”
제노비아가 헛헛하게 웃었다. 그리젤다는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용이 죽었다고 들었어요.”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죠.”
“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잊지 못했잖아요.”
“당연한 소리. 나는 죽어서도 페넬로피를 잊지 못해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페넬로피가 선한 것을요.”
마치 꿈꾸듯 몽롱한 얼굴이었다. 그리젤다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래서 이자벨 베가의 일가를 모조리 죽였나요?”
제노비아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무언의 수긍이었다.
“아주 놀랐어요. 내게는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금화를 위조하지 마라.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사람이 그리 대범한 짓을 저지를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대가 괜한 착각을 하는군요. 나는 무자비한 살인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준엄한 처형자죠. 이자벨 베가의 죄가 엄중하기에 그만한 형벌을 내려 준 것뿐입니다.”
“이자벨의 죄가 도대체 무엇인데요? 페넬로피를 죽인 죄? 하지만 그전에 당신이 이자벨 베가의 아들을 사지로 내몰았잖아요. 진실한 예언을 왜곡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였죠?”
“어차피 도리안 베가는 죽을 운명이었어요!”
제노비아가 분노했다.
“자일스의 예지는 절대로 비껴가지 않습니다. 내가 사실대로 말해도, 거짓으로 말해도 예언은 어떻게든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도 내 잘못인가요? 그의 운명이 내 탓이에요?”
“하지만 예언을 왜곡한 건 당신의 선택이잖아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나요? 어차피 바뀌지 않을 미래인데 무엇이 그리도 안달 났던가요.”
자일스의 예지는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여명의 별 페베의 기억을 엿보는 것이었다. 사시사철 빛을 잃지 않는 여명의 별은 과거,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모든 일을 굽어보므로 지상에 한해 페베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페베의 기억과 연동된 자일스의 예지도 틀릴 수가 없었다.
“먼 옛날, 수없는 미래를 보았던 클레멘틴 자일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변치 않을 미래라면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낫다. 나는 능숙한 길이 아니라 서투른 길이 걷고 싶다.”
제노비아가 서글피 읊조렸다.
“예지가 얼마나 괴로운 능력인지 그대는 모릅니다. 미래를 선별해서 볼 수도 없을뿐더러, 미래를 알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요. 끔찍한 미래를 볼 때마다 어떻게든 미래를 바꾸기 위해 아등바등하지만 결국엔 그대로 이루어져요. 사람들은 나를 예언자라 불렀지만 틀렸습니다. 나는 예견된 실패자입니다. 세상에 나처럼 비참한 이는 없어요.”
말끝마다 사무친 회한이 묻어났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그리젤다가 불현듯 환하게 웃었다.
“미래를 바꾸고 싶나요?”
“가능하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소원, 내가 이뤄 줄게요.”
내가 미래를 바꿔 줄게요.
제노비아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리젤다는 어느새 흔적 없이 사라졌다. 마치 짧은 꿈이라도 꾸었던 것처럼 마지막 목소리만 환청처럼 울렸다.
해 기우는 저녁.
그리젤다는 인적 드문 갈대밭에서 악마를 불러냈다. 언젠가 버릇없는 악마와 순한 산양을 제물 삼아 만들어 낸 악마로, 그녀의 성을 붙여 마르고트 솔이라 불렀다.
[그리젤다. 오래간만에 불러 주었구나.]
산양의 머리에 붉은 황소의 몸을 붙인 악마 마르고트는 몹시 감격했다. 그리젤다가 조르듯 양팔을 내밀었다.
“날 지하로 데려가 줘.”
[그게 무슨 소리지? 지하는 이곳처럼 따사로운 곳이 아니다. 춥고 냉정한 땅이야.]
“알아. 하지만 여명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해.”
마르고트는 그리젤다의 고집에 못 이겨 영문 모르는 채로 지하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는 마르고트가 열하나의 군주와 예순여섯 군단을 무참히 짓밟아 동방의 유일무이한 군주로 등극한 지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자연스레 악마들은 마르고트가 머무는 참극성을 두려워해 피했으므로 붉은 성채에 인간이 당도했음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윽고 별빛 닿지 않는 곳에 달한 그리젤다는 무척이나 감탄했다.
“여긴 아주 조용하구나.”
별이 소금처럼 흩뿌려진 지상과 달리, 지하는 오로지 별 하나가 내리비추는 세상이었다. 지상에선 어둡기 그지없던 별이 지하에선 달이나 마찬가지였다.
“칼리스토의 목소리가 들려.”
그리젤다는 흥분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늘 다른 별들의 속삭임에 묻혀 들리지 않던 암흑의 별 칼리스토의 목소리가 몹시도 선명했다. 수억 별의 소리가 얽히고설켜 매일같이 산란하던 세상이 비로소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그리젤다의 세상은 이따금 들려오는 칼리스토의 전언을 제하고는 정적에 휩싸였다. 처음 맞이하는 정적이 새롭고 놀라웠다.
마르고트가 근심스러운 기색으로 다가왔다.
[그리젤다. 어찌하여 지하를 청했느냐?]
“여기는 여명이 없으니까.”
[여명을 피해야 하는 일이라도 있느냐?]
그리젤다는 말없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판판한 배에 손을 올리며 속살거렸다.
“나는 기적을 잉태할 거야.”
마르고트는 그녀에게 기꺼이 꼭대기 층을 내주었다. 그리고 직접 시중을 들며 거친 지하 세계로부터 그리젤다를 안전히 보호했다. 마르고트는 자신을 창조한 그리젤다를 마치 신을 우러르듯 모셨으므로, 그녀와 함께하는 나날이 곧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무자비한 참극공도 꼭대기에서는 언제고 순한 산양이었다.
그리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날을 넘길수록 마르고트는 점차 이상함을 깨달았다. 판판하던 그리젤다의 배가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너무 놀라지 말렴. 아이를 가져서 그래.”
그리젤다는 부드럽게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르고트는 대단히 놀랐다.
[아이라고? 설마 임신한 채로 온 것이냐?]
“아니야.”
[그럼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지?]
“없어. 하지만 괜찮아. 나도 부모가 없었는걸.”
한참을 침묵하던 마르고트가 물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글쎄, 왜 그럴까. 재미있잖아.”
그리젤다가 새처럼 웃었다.
“이 아이는 최고의 걸작이 될 거야.”
그리젤다의 배는 나날이 부풀어 갔다. 지하에 당도한 지 고작 열흘 만에 만삭이 되어 진통을 시작했다. 참극성에 달리 산파가 있을 리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마르고트가 아이를 받아 냈다.
지독한 난산이었다. 그리젤다는 첫아이를 낳을 때보다도 곱절은 더 고통스러워했다. 수없이 기절하고, 수없이 비명을 내지른 끝에 아이가 세상으로 나왔다.
여명이 없는 세상. 오직 지하의 달만이 아이를 축복했다.
[이름은 무엇으로 하겠느냐?]
그리젤다는 땀에 젖은 눈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영롱한 달빛이 촛불도 몸을 사리는 암암한 사위를 꿰뚫어 눈가에 드리워졌다. 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고독한 달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정적을 태우며 축복을 속삭이는 소리가 끊임없이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난산으로 탈진한 몸이 점차 달뜨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리젤다가 입을 열었다.
“Diana(달).”
그리젤다는 엉거주춤 갓난아기를 안아 들었다. 아기도 어미의 품이 불편한지 연신 칭얼댔다. 보다 못한 마르고트가 올바른 자세를 잡아 줄 정도였다.
[아이를 데려갈 심산인가?]
“당연하지. 인간을 여기 둘 수는 없잖아.”
그리젤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르고트는 못내 아쉽다는 듯이 조심스레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하고픈 말을 속에만 쌓아 두는 티가 역력했다.
“그새 정이라도 붙었니? 도대체 뭐가 문제야?”
[마법으로 잉태한 아이다. 행여나 너희 종족과 다르게 자랄까 봐 염려되는구나.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거두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이 아이는 마녀야.”
[알고 있다만 아무래도…….]
문득 마르고트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젤다의 빤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딸이야. 내가 죽거든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딸.”
[장례식이라니?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금방 내 말로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마. 그러니 앞으로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거라.]
마르고트가 안절부절못했다. 그리젤다는 소녀처럼 웃으며 몸을 틀었다.
“알았으니 오늘은 그만 헤어지자. 여긴 조용해서 좋지만, 오래 머물기엔 너무 추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리젤다의 발밑으로 새하얀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르고트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으나 차마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하얀빛이 빠르게 마법진을 완성하는 사이, 바닥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이내 장막처럼 둘 사이로 드리워졌다.
그리젤다는 건조한 눈으로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아기는 그새 잠들어 있었다. 아직은 알아보기 힘들지만, 점차 자라면서 이목구비가 또렷해지거든 그녀를 쏙 빼닮을 것이었다. 아기는 오롯한 그리젤다의 딸이기에 다른 핏줄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당신의 장례식이었어요. 하나뿐인 딸이 서럽게 곡하더군요.’
제노비아 자일스는 그리 예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명의 별 페베가 목격한 미래가 바로 그러했다. 지금 품에서 잠든 아기가 어미의 장례식을 보지 못하고 죽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젤다는 어째서 페베가 그런 미래를 보았는지 알았다.
그녀는 불임이었다.
때는 첫째 딸을 출산한 직후. 산통에 질릴 대로 질린 그리젤다는 다시는 임신하지 않을 생각으로 난소를 전부 들어냈다. 더는 임신할 수 없는 몸으로 둘째 딸을 낳을 리 만무하니, 페베가 그리젤다의 장례식에서 ‘외동딸’을 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것이 이치에 맞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리젤다는 여명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기적을 낳았다. 마법으로 잉태한 아이는 어느 한 군데 흠잡을 구석 없는 완벽한 마녀였다. 아마 이대로 지상에 닿거든 수다쟁이 여명은 대경할 것이었다. 홑몸으로 떠났던 마녀가 둘이 되어 나타났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또한 머지않은 미래에서 그리젤다의 둘째 딸을 보지 못했던 스스로의 기억에 얼마나 혼란스럽겠는가.
흔히들 자일스의 예지는 변치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여명이 목격한 미래는 결코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젤다는 대체로 그 말이 옳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세상에 ‘절대’는 없었다. 세간의 착각과는 달리 별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별의 축복을 받은 그녀가 이토록 불완전할 리 없었다.
별은 시야를 과신하며, 기적을 예단했다.
그렇기에 이치만을 따지던 교만한 별은 이번 기회로 절감할 것이었다. 당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당신의 빛이 닿지 못하는 암흑의 땅이 얼마나 드넓은지를. 그리고 기적이 어째서 기적인지를.
“무사히 자라렴. 그래서 내 장례식에서 보자꾸나.”
그리젤다는 가느스름하게 웃으며 아기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아기 이름이 뭐죠?”
“디아나. 디아나 솔.”
주로 마법 사회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반편이 노파가 갓난아기를 받아 들었다. 육아에 지친 눈이 빠르게 아기의 몰골을 훑었다.
“아기는 건강하군요. 오히려 그쪽이 병원에 가 봐야겠는데요.”
“신경 쓰지 마요.”
그리젤다는 강파른 손길로 선금을 지불했다. 노파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탁자를 턱짓했다.
“자주 오지 않을 거면 아기에게 편지라도 남겨요. 그래도 꼴에 부모라고 그리워하는 애들이 종종 있으니까.”
“보통 뭐라고 써요?”
“보통은 안 쓰죠. 알잖아요. 댁들이 얼마나 무심한지.”
때마침 요람에 누워 있던 다른 아이가 빽빽 울어 댔다. 노파가 그편으로 달려간 사이 우연찮게 혼자 남겨진 그리젤다는 펜을 만지작대며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기에게 딱히 남길 말이 없었다. 어째서 다른 마녀들이 편지를 남기지 않는지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사라지자니 어째 마음 한구석이 뻑적지근했다.
‘사랑해요.’
첫째 딸은 그리 말했었다. 얼마 보지도 못했던 무심한 어머니의 어디가 그리도 좋은지 알 수 없으나, 거짓으로 사랑을 고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쓸데없는 기억은 쉽사리 잊는 그리젤다가 아직도 기억할 정도면, 어디서 주워들었는진 몰라도 어린 나이에 제법 깜찍한 말을 하는 아이였다.
기실 그리젤다는 사랑을 몰랐다. 어미의 자궁에서부터 수억 별의 속삭임이 함께였으므로 고독을 몰랐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누구도 필요하다고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과 고독을 모르고도 충분히 잘 살아왔기에 후회하지 않았다. 이제 와 그런 걸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아기는 달랐다. 아기는 완벽한 마녀로 태어나, 평범한 마녀로 자랄 것이었다. 심지어는 첫째 딸처럼 재능이 충만하지도 않았다. 아기는 지하에서 태어난 탓에 지하의 유일한 별 칼리스토의 축복을 받았다. 칼리스토가 달처럼 빛나는 지하가 아니고서는 마녀로서 사뭇 불운한 운명이라 평해도 좋았다.
그러니 아기는 그녀처럼 자라면 안 되었다. 평범하게 성장할 테니, 평범한 사람처럼 자라야 했다. 그리젤다는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의 질서를 따르며 무던히 살아가야 했다.
그저 재미로 낳은 아기에게 한순간 품은 유감이나 연민이라 책해도 좋았다. 이유는 몰라도 그리젤다는 지금의 심정이 영 탐탁잖지만도 않았다. 오히려 조금 기꺼운 마음으로 글씨를 휘갈겼다.
「사랑한다.」
오래지 않아 노파가 돌아왔다. 그녀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쪽지를 보았지만,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양육비는 매달 보내 줘야 해요. 며칠 늦는 것쯤이야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석 달을 넘어가면 나도 곤란해요. 그럼 애는 바로 고아원으로 보낼 거니까, 나중에 군말하지 말고요.”
노파는 그리 주절거리며 아기를 요람에 뉘었다. 아기는 잠자리가 바뀐 줄도 모르고 새근새근 잘만 잤다. 그리젤다는 노파의 말은 대강 흘려들으며 멀거니 아이만 보았다.
“잠시만요. 아기에게 전할 말이 있어요.”
그리젤다는 황급히 쪽지에 무어라 적었다.
“이건 나중에 내가 죽거든 아기에게 전해 줘요.”
“이게 대체 뭐길래……. 뭐라고 읽는 거예요, 이건?”
노파가 해괴한 표정으로 쪽지를 펼쳐 들었다. 그리젤다는 한 손으로 쪽지를 덮으며 엄숙하게 속삭였다.
“누구에게도 보여 주면 안 돼요. 알았죠?”
노파는 떠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젤다는 안심한 기색으로 집을 떠났다. 아기를 안쓰럽게 여기던 마음일랑 여름밤의 미몽처럼 덧없이 흩어졌다.
본디 그리젤다는 위탁 가정에 아기를 맡기고 한동안 쉴 생각이었다. 고작 열흘간 마법을 품어 만삭으로 부풀린 것은 그녀로서도 쉽지만은 않았다. 자연히 기력이 쇠하고, 육신이 망가졌다. 지하는 지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데다, 지루한 마법을 무려 열 달이나 품을 자신이 없었기에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피를 토하는 고통이 마냥 달갑지도 않았다.
그때, <가혹한 아스톨포>의 수장 우르바노 아스톨포가 운명처럼 나타났다.
“그대에게 청이 있습니다.”
우르바노는 아주 오래되어 녹이 슨 투구를 내밀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유물이었으나, 그리젤다는 한눈에 투구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이게 전부가 아닐 텐데요.”
“맞습니다. 이것은 일부에 불과하지요. 나머지는 조각조각 흩어져 있습니다. 조각은 아무런 힘이 없지만, 만일 전부 모인다면 재앙이 일어날 겁니다. 한데 근래에 재앙을 기원하는 이들이 있어요. 나는 그들이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요컨대 학술 단체를 표방하는 사교 클럽 몬의 일원인 헤센 그윈티르가 수년 전부터 다른 조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젤다는 우르바노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도대체 무슨 마법이기에 아홉 갈래씩이나 나눈 건가요?”
“전해지는 말로는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이라 합니다.”
우르바노 아스톨포가 속삭거렸다.
“사자(死者)를 되살린다고 하더군요.”
그리젤다는 드물게 놀랐다.
그녀도 두 명의 목숨을 제물 삼아 악마를 창조한 전적이 있고, 또 최근에는 육신의 건강을 포기하면서까지 낳을 수 없는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마법의 결이 달랐다. 육신을 되살리기는 쉬워도, 이미 떠나간 넋을 불러오기는 어려웠다. 생전의 기억과 성격, 품었던 모든 감정을 그대로 살려 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기적이었다. 이미 한 차례 기적을 잉태했던 그리젤다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애초에 시도하지도 않을 마법이었다.
그리젤다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려는 심정을 추호도 이해하지 못했다. 일단 무수한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되살리고 싶은 사람이 없었고, 그만치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다. 죽음은 그녀에게 머나먼 존재가 아니었다.
“내게 이걸 보여 주는 저의가 뭔가요.”
그리젤다는 물끄러미 투구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흥미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오만한 오르테가>와 <잔악한 그윈티르>는 이미 헤센의 손을 거쳤습니다. 칼롯타 팔리아치와 루이자 볼크하르트가 헤센 그윈티르에게 협조적이라고 하니, 어쩌면 팔리아치와 볼크하르트의 유물도 그에게 넘어갔을지 모르지요. 그는 머잖아 아스톨포를 노릴 겁니다.”
“그래서요?”
“이 유물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주십시오.”
그리젤다는 침묵했다. 우르바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숨길 만한 곳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내겠지요. 믿을 만한 사람은 오직 그대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판단이 틀렸군요. 유물이 모여 죽은 자가 되살아난들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굳이 상관하고 싶지도 않고요.”
냉정한 거절에도 우르바노는 빙긋 웃었다.
“그대에게 정의를 바라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내게 빚이 있지요. 지금까지 한 푼도 갚지 않아 제법 액수가 불어났습니다. 그대가 이토록 방탕하게 살다 죽는다면 가엾은 딸이 전부 갚아야겠지요. 죽어서까지 원망만 듣고 싶습니까?”
“이제 보니 진정 교활한 사람은 당신이었군요.”
“그리 여기지만은 마십시오. 나는 그저 제안할 뿐입니다. 내 청을 받아들인다면 빚을 전부 탕감하겠노라.”
그리젤다는 씩씩거리며 투구를 뺏어 들었다.
“도대체 얼마만큼 단단한 금고를 원하나요? 지금 당장 심해에 빠트릴까요? 아니면 가네디아 사막 한복판에 묻기를 바라요?”
“그 정도로는 안 됩니다. 외딴곳에 비밀 금고를 만들고, 강한 문지기를 두십시오. 적어도 동족이 두려워 피할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우르바노가 숙연하게 말했다.
“헤센 그윈티르가 지나가도 언젠가는 또 다시 유물을 노리는 자가 나타날 겁니다. 더는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아요. 재앙의 불씨는 이쯤에서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그리젤다는 퀸투스 아스톨포의 유물을 품고 세상을 헤매었다. 우르바노가 원하는 만큼의 금고와 문지기를 찾기란 몹시 지난했다. 가끔은 차라리 돈을 벌어 우르바노에게 빚을 갚는 편이 나으리란 생각도 들었지만, 쉽사리 투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젤다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이게 내 마지막 업이로구나.’
육신은 날이 갈수록 무너지고, 진즉 노화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아마 오래 살지 못할 터였다. 기적을 잉태한 대가는 이토록 거대했다. 기적을 낳은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적어도 마지막에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업적을 세우고 싶었다.
까다로운 선별 끝에 유물을 보호할 문지기로 거인을 선정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용이 떠나간 세상에서 단신으로 마녀를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거인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리젤다는 거인을 찾아 북쪽 국경으로 향했다. 때마침 거인들은 인간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한눈에도 승패가 명확했으나, 오로지 거인만이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당신들은 곧 멸망할 거예요. 마법은 여전하고 인간 왕국은 번영하고 있어요. 당신들은 강하지만 구심점이 없죠. 서로를 믿지 못하면서 어찌 살아남기를 바라나요?”
거인들은 그녀를 괄시하며 믿지 않았다. 하지만 강력한 낙뢰를 내리는 베가의 마법사가 전장에 나타나자, 그녀를 신뢰하는 거인이 한둘 나타났다.
[그동안 너를 믿지 못해 미안하다. 염치없다고 욕해도 좋아. 우리를 도와 다오.]
거인 토르스텐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젤다는 기쁘게 웃었다.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은신처를 만들어 줄게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그리젤다는 인적 드문 산속에 토굴을 만들기 시작했다. 거인들이 숨어 살기에 넉넉했고, 숲과 연못과 하늘이 있어 건강하게 유물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지상에선 흔적조차 찾지 못하는 천혜의 은신처였다.
하루하루 그리젤다는 녹초가 되었다. 기적에 비할 바는 아니나, 무너지는 육신으로는 그조차 힘겨웠다. 거인들은 대부분 그녀를 욕하며 손가락질하거나 재촉하기 급급했지만, 오직 실그너만은 그러지 않았다.
[마나가 그랬어. 뻐꾸기가 마흔두 번 울면 다음 날 비가 올 거랬어. 그러니까 내일은 비가 올 거야.]
실그너는 전쟁에서 가족을 잃고 미친 거인이었다. 그리젤다는 늘 엉뚱한 말을 떠들어서 동족조차 기피하는 거인을 편안히 여겼다. 어쩌면 그가 미쳤기에 가한지도 몰랐다.
토굴이 완성되자, 그리젤다는 실그너와 토르스텐에게 유물을 맡겼다.
“누구에게도 건네면 안 됩니다. 염탐하는 자가 있거든 쫓아내고, 빼앗으려는 자가 있거든 죽이십시오.”
[약조는 지키겠다.]
토르스텐이 다짐했다. 홀연히 떠나려는 그리젤다를 실그너가 붙잡았다.
[어디 가?]
“이만 떠나야 해요.”
[왜?]
“내가 많이 아파요.”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
그리젤다는 말없이 실그너를 올려다보았다. 거인은 가족을 잃었던 것처럼 영영 그리젤다를 잃을까 봐 근심하고 있었다. 그리젤다는 문득 거인이 가엾었다.
“반드시 돌아올게요.”
실그너는 약속을 믿었다.
[굴에서 처음 피어나는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줄게. 그때까지는 꼭 돌아와야 해.]
그리젤다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숱하게 겪어 왔던 이별이 난생처음으로 기껍지가 않았다.
기적을 행한 뒤로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던 육신은 반작용을 톡톡히 내보이기 시작했다. 건강을 회복하긴커녕 거대한 마법까지 부려 댔으니, 육신이 조각나는 것은 당연했다. 마녀의 육신이란 곧 마력을 담는 그릇. 그릇이 깨지자 심지어는 마법조차 완벽하지 못했다.
그리젤다는 조용한 시골 도시에서 몸을 돌보았다. 그녀의 육신은 이미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으므로, 힘들여 의사를 찾지도 않았다. 그대로 죽을 날만을 기다렸다. 내내 무료하던 인생에서 가장 무료한 시간이 내리 흘러갔다.
죽음은 이르게 찾아왔다. 계절을 잊은 그리젤다는 창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때마침 별들의 왕 둘시네아가 하늘에 떴는지 왕의 도래를 축복하는 소리가 간간이 거리에서 흘러들었다. 몹시 소란한 가운데, 왕의 근엄한 음성이 수억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짓누르며 울렸다.
그리젤다는 마지막으로 마르고트를 소환했다.
“안녕.”
마르고트는 그리젤다의 창백한 안색을 보자마자 울상을 지었다. 곧장 눈물을 떨굴 것처럼 가련한 얼굴이었다.
[그리젤다, 네 어찌…….]
“나는 곧 죽어.”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너처럼 위대한 마녀가 벌써 세상을 등질 리 없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나는 이제 망각의 강을 건널 거야. 그리고 무(無)로 흩어지겠지.”
그리젤다가 가늘게 웃었다.
“다른 이들을 죽어 겔렝지어로 가길 원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더는 살고 싶지 않은걸. 나는 지쳤어. 생은 지루하고 허무할 뿐이야.”
끝내 마르고트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리젤다는 가만히 천장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네게 부탁이 있어.”
[무엇이든 말해라.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테니.]
“지하에서 낳았던 둘째 딸에게 네 이름을 남겼어. 만일 그 아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면 기꺼이 도와주겠니?”
[그리하겠다.]
마르고트가 망설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한데 네 시신을 내가 가져가도 되겠느냐? 네가 죽더라도 널 잊고 싶지 않구나.]
“마음대로 하렴. 죽은 뒤에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겠니.”
그리젤다는 고단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마르고트가 미련스럽게 매달리려던 차에, 갑자기 문이 발칵 열렸다.
“어머니!”
어린 헤스터가 눈물을 흩뿌리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마르고트는 곧장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어째서 미리 연락을 주지 않으셨어요. 제가 너무 늦은 건 아니지요? 그렇지요?”
헤스터가 흐느끼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젤다는 힘겹게 눈을 떴다.
“헤스터.”
“어머니, 아직은 가시면 안 돼요. 건강하셨잖아요. 어머니처럼 위대하신 분이 어째서 지금 세상을 떠나려 하세요.”
“사람은 각자 때가 있는 법이야.”
“하지만…….”
헤스터가 목 놓아 울었다.
“제겐 어머니밖에 없는걸요. 어머니마저 떠나시면 저는 정말로 혼자 남을 거예요.”
아이는 고독이 두려워 눈물지었다. 그리젤다는 그제야 헤스터가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를 알았다. 얼굴 몇 번 보이지 않은 매정한 어머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딸의 심경을 처음으로 짐작했다.
“너무 외로워요, 어머니.”
“너는 혼자가 아니야.”
그래서 그리젤다는 무심결에 말했다.
“아가. 네게 동생이 있단다.”
눈물로 흠뻑 젖은 헤스터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그리젤다는 이불을 더듬어 딸의 손을 쥐었다.
“어미를 모르는 아이에게 네가 가족이 되어 주렴.”
이것으로나마 네게 위안이 된다면.
그리젤다는 아이를 낳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아이를 외롭게 하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다만 낳아서 책임지지 않은 일말의 죄책감은 있었다. 절절하게도 어머니만을 그렸던 아이가 이제는 고독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기만이라 해도 좋다. 염치없다 욕해도 좋다.
다만 거짓이나마 아이를 위로하고 싶었다.
“사랑한다.”
그리젤다는 평생토록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평범하게 사랑하기에 그녀의 세상은 너무도 특별했다. 세상 사람들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외로운 나머지 무정한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딸을 이해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언제나 수억 별의 속삭임이 함께였던 그녀는 고독을 몰랐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과 맞서 진을 빼는 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그리젤다는 죽음을 강하게 예감했다. 코끝을 맴도는 악취가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제발 어머니를 데려가지 말라며 끊임없이 별에게 기도하는 목소리가 점점이 들려왔다. 아마도 헤스터일 것이다. 부질없는 짓이라 말해 주고 싶었으나,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헤스터가 누구인지도 곧 까맣게 잊을 테니.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전부터 귓가를 맴돌던 수억 별의 속삭임도 차차 멀어져 갔다. 그리젤다는 밀려드는 정적이 반가웠다. 그만 고요한 곳에서 쉬고 싶었다. 이제는 생각조차 지겨웠다.
그리하여 영원한 안식을―
마침내 종막이었다.
마르고트는 언약대로 장례가 끝난 그리젤다의 시신을 지하로 들여왔다. 그리고 아무도 들지 못하는 귀물의 방에 고스란히 보관하여 종종 그리울 때마다 들여다보았다. 북극의 차디찬 얼음으로 감싼 시신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으나, 덕분에 그리움만 나날이 늘어 갔다. 이윽고 동방의 군주는 쓸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지상에서 그의 이름을 끈지게 불러 댔다. 마르고트는 시끄러운 벌레를 털어 내듯 소환에 응했다. 소환자는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땋아 내린 마녀였다.
“그대, 그리젤다 솔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마녀가 성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마르고트는 권태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너는 누구지?]
“나는 예언의 마녀, 제노비아 자일스입니다. 그러니 어서 대답해요. 어째서 그리젤다의 이름을 지닌 겁니까?”
[그리젤다가 날 만들었으니까.]
제노비아는 멍하니 마르고트를 올려다보았다. 초점 없는 눈에 차츰 광기가 서렸다. 곧이어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가 얇은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설마 진짜였을 줄이야! 정말로 생명을 창조했을 줄이야!”
마르고트는 광적으로 웃어 대는 마녀가 몹시 거북했다. 광인과는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법. 다시 지하로 돌아가려던 찰나, 심상찮은 말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리젤다가 그립지 않습니까?”
새빨간 혀가 요사스럽게 악마를 꾀어냈다.
“내게 그녀를 살려 낼 방도가 있습니다.”
제노비아는 아주 오래전 아홉 인의 영웅이 아홉 조각으로 갈라낸 마법에 대해 들려주었다. 지금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천재적인 마법사가 남긴 유산으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지고의 마법이라 하였다.
“그리젤다를 되살려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아홉 조각이 모여 완벽해진 마법, 그리고 그리젤다의 시신.”
[시신은 지하에 있다.]
제노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간 녹안이 위험하게 빛났다.
“마지막으로 사자가 강한 기원을 불어넣은 마법.”
사자는 생전의 기원을 따라 이승으로 돌아올 것이고, 기원이 깃든 마법을 제물 삼아 부활하리라.
오래전 신의 경지에 이르렀던 마법사는 그리 유언했다.
“나는 그리젤다가 강하게 기원했던 마법을 둘이나 압니다. 하나는 그대이니, 나머지를 제물로 준비하면 되겠지요.”
제노비아가 입술을 뒤틀어 웃었다. 마르고트는 말없이 입꼬리만 덜덜 떨었다. 소리 없는 환희가 뱃속에서 마구 솟구쳐 올랐다.
이후로 마르고트는 하루를 1년처럼 살았다. 아홉 유물을 모으기가 쉽지만은 않던지 제노비아는 자꾸만 시일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지상의 시간보다 다섯 곱절은 빠른 지하에서 마르고트는 벌써 수십 년을 시신만 들여다보며 허송세월했다. 그럼에도 그리젤다를 되살릴 수 있다는 희망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리 지난한 세월이 흘러 비로소 유물이 완성되었다. 시신은 안전하고 제물도 있었다. 이제는 별의 주기를 계산하여 마땅한 기일을 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디아나. 네가 건강히 자라 주어 다행이다. 행여나 유물을 모으기도 전에 네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전전긍긍했단다.]
마르고트는 무릎 꿇고 앉아 디아나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작은 몸이 안쓰러웠으나, 그보다는 그리젤다와 재회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희열이 세차게 끓어 올랐다.
수십 년을 기다렸다. 며칠 더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렇듯 무사히 내게 와 주었구나.]
디아나는 황망히 마르고트를 보았다. 잿빛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날 사랑한다고 그랬잖아…….”
끝내 왈칵 울음이 터졌다. 마르고트는 그조차 어여쁘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사랑한다. 그리젤다와 이렇게나 닮았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고 배기겠느냐.]
잔인한 고백이었다. 목전에 닥친 파국이 두려워 흐느끼는 소리가 점차 높아졌으나, 마르고트는 그조차 환희의 찬가로 들었다. 사방에서 기쁨의 선율이 울렸다.
오래전 어린 마녀의 손길로 새로이 태어난 악마는 무척 행복했다.
✤ ✤ ✤
통곡의 절벽 너머 머나먼 서방 세계.
별빛 닿지 못하는 암암한 사위는 그대로되, 깎아지르는 절벽으로 갈라진 서방과 동방은 참으로 다른 세상이었다. 일단 동방에선 개미처럼 들끓는 악마가 서방에는 하나도 없었으며, 오래전 악마들이 짓밟아 초목이라곤 반란 세력이 숨어든 회한의 숲밖에 없는 동방과 달리 서방은 나름대로 달빛 머금어 살아가는 풀숲과 나무가 잔존했다.
서방 세계 역시도 지하의 일부로서 약육강식의 질서를 존중했으나, 악마가 없다는 점에서 결단코 동방처럼 무자비한 세상은 아니었다. 남의 육신을 탐내어 죽이는 종족은 감히 서방에 발붙이지 못했다.
다만, 그럼에도 서방을 지배하는 종족이 있었다. 수십만에 달하는 악마에 비하면 극히 소수지만, 적은 머릿수로도 능히 다른 이를 굴복시키는 강대한 힘을 지녔다. 하늘을 찢는 날개와 별을 꿰는 발톱, 그리고 땅을 으깨는 이빨은 악마들이 가장 욕심내는 육신이기도 했다.
서방 신민은 그들의 강함에 기꺼이 고개 숙였다. 그들은 강대한 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변덕스럽고 잔인하며 이기적이었지만, 악마의 잔악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강한 육신을 타고난 그들은 스스로 머리 조아리는 이들에게 제법 인자했다. 그리하여 천 년 전에는 악마에게 핍박받는 그네들을 모두 등에 태우고 아득한 통곡의 절벽을 넘어오기도 했다.
악마가 없는 서방 세계는 지극히 평화로웠다. 지난 세월, 서방의 신민은 오랜 평화에 젖어 태만해졌다. 오래도록 변하지 않은 평화의 땅에는 자연스레 나태가 팽배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걸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평화로우면 게을러지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이제 옛이야기로만 전해지는 흉악한 악마란 종족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까마득한 옛날, 동방에선 날개 있는 종족의 씨가 말랐으므로, 감히 통곡의 절벽을 넘어올 악마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지상의 사람이 나타났을 때, 서방에는 익숙지 않은 자그만 소란이 일어났다.
윈터는 시무룩하게 날개를 늘어뜨렸다. 오늘로 지하 세계로 내려온 지 이틀째. 하지만 세드릭은 아직도 깨어날 생각을 안 했다. 깨어나긴커녕 온몸을 들들 끓는 열은 한 치도 내려가질 않았다.
역시 지하로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 보석처럼 예쁜 눈으로 더없이 간절하게 바라봐도, 사탕처럼 다디단 말로 꾀어내도 코웃음 치며 모른 체했어야 했다. 윈터는 늘 세드릭의 감언이설에 속아 왔지만, 이토록 후회한 적은 없었다. 똑똑한 세드릭은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내려 왔고 그에 윈터도 영특한 주인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이번만은 아니었다.
세드릭은 틀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타고나길 강골인 몸으로 저리 앓을 수는 없었다.
[어머나, 걔 아직도 안 죽었네?]
보랏빛 용 비엘스카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윈터는 반사적으로 그르렁거리며 날개로 세드릭을 감쌌다.
[저리 안 가?]
[뭘 그렇게 경계하고 그래. 내가 걜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너 따위가 어떻게 세드릭을 잡아먹는단 말야? 세드릭은 아주아주 강한 마법사라서 너 정도는 단번에 숨통을 끊어 놓을걸?]
윈터가 뻐기듯 말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겁박에도 비엘스카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 숨통을 끊어 놓으려면 일단 살아나는 게 먼저잖아. 아무리 봐도 오늘내일하는 모양샌데.]
[아니야! 세드릭은 귀신같이 살아날 거거든? 씨, 너 자꾸 불길한 말만 하려거든 저리 가 버려!]
윈터가 흉흉한 기색으로 날개를 휘둘러 댔다. 가볍게 공격을 피한 비엘스카가 깔깔대며 웃었다.
[나라면 걔가 영영 일어나지 않길 바랄 거야. 지금은 걔네가 아파서 가만히 있는 거지, 네가 금기를 어겼다고 어르신들이 얼마나 노하셨는지 몰라. 모르긴 몰라도 네 날개 하나쯤은 당연히 찢어발기실걸?]
비엘스카는 끝까지 조롱을 잊지 않았다. 윈터는 분한 눈으로 멀리 날아가는 비엘스카의 자취를 좇았다. 당장이라도 따라가 저 못된 주둥아리를 콱 물어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세드릭의 곁이 비었다. 그렇잖아도 지상의 사람을 둘씩이나 지하로 데려온 윈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치들이 수두룩한 상황에서 쉽사리 세드릭을 떠날 수야 없었다.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
윈터는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어냈다. 행여나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쁜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벌써 이틀째 먹지도 마시지도 잠들지도 못했다. 평소 졸음이건 허기건 갈증이건 육체적인 결핍은 조금도 이겨 내지 못했던 윈터에겐 자못 고통스러운 하루하루였다. 만일 세드릭이 알거든, 예쁜 목소리로 칭찬해 주었을 텐데. 윈터의 꼬리가 울적해진 기분을 따라 축 늘어졌다.
[어?]
문득 꼬리에 이상한 게 닿았다. 윈터는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고기며 물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윈터의 눈이 대접만 하게 커졌다. 조금 전에 속을 뒤집어 놓았던 비엘스카가 가져온 게 틀림없었다. 이런 걸 가져왔으면 가져왔다고 말을 해야지, 왜 공연한 말만 잔뜩 늘어놓고 갔담. 또래의 쑥스러움은 추호도 이해하지 못하는 둔감한 용 윈터는 어쨌든 감사한 마음으로 배를 채우기로 했다.
하지만 허기가 얼마간 가시자 더는 고기도 과일도 물도 들어가질 않았다. 세드릭이 눈앞에서 사경을 헤매는데 혼자서 맛있는 걸 독점하자니 없던 입맛도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나는 네가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러.’
불현듯 떠오르는 세드릭의 말에 윈터는 찔끔찔끔 울기 시작했다. 윈터가 그동안 식탐을 자제하지 않았던 건 그리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도 흐뭇하게 지켜보던 세드릭 때문이었다. 윈터는 세드릭이 웃는 얼굴이 좋았고, 세드릭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좋았다. 그냥 세드릭이 좋으면 윈터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니 평소 식탐으로는 세계 제일이라 으쓱대던 윈터도 세드릭이 이유 모를 열병으로 쓰러지자 도무지 예전처럼 즐겁게 식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드릭, 빨리 일어나…….]
윈터는 먹던 고기도 내려놓고 크게 울기 시작했다. 멀리 숨어서 지켜보던 비엘스카가 혹시 지하의 음식은 입에 맞지 않는 걸까, 하면서 초조해하는 것도 모르고.
그리고 윈터의 간곡한 원이 이루어져, 이튿날 세드릭이 눈을 떴다.
“……윈터?”
세드릭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간신히 윗몸을 일으켰다. 아직 낯빛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열은 많이 내렸다. 세드릭이 곧 깨어나리라 굳게 믿으면서도 한편으론 의심을 키워 가던 윈터는 황망히 세드릭이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커다란 금안에 눈물이 아롱아롱 차올랐다.
[세, 세드릭. 나는 네가 정말로 잘못되는 줄만 알고…….]
그러나 윈터가 입을 떼기 무섭게 세드릭이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윈터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 그래?]
“……방금 네가 말한 거야?”
[여기에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의아하게 대꾸하던 윈터가 곧 감을 잡았다.
[참, 내 목소리를 너는 처음 듣겠구나!]
“말을…… 할 줄 알았다고?”
[물론이지! 요정도 말하고 거인도 말하는데 설마 나처럼 위대한 용이 말을 못 하겠어?]
윈터가 으스댔다. 세드릭이 께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금까진 왜 말을 안 했어?”
[안 한 게 아냐. 못 한 거지.]
“지금은 하잖아.”
[여기니까 할 수 있는 거야. 지상에서는 못 해. 금기거든.]
세드릭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렇게나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용이 지상에서만 말을 못 한다니. 세드릭이 알기로 그건 오직 강력한 마법으로만 가한 금기였다.
“누가 네게 마법을 걸었어?”
[나한테? 음, 그걸 나한테 걸었다고 해야 하나? 옛날에 칼라일 자일스가 더 이상 용이 지상에서 말하지 못하도록 마법을 부렸다고 들었어.]
칼라일 자일스라면 200년 전 자일스의 수장이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임에도 이상하리만치 기록이 전무한 마법사. 그에 대해 알려진 점이라곤 고작 용 트라이피나의 주인이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칼라일 자일스가 왜? 어째서 용에게 그런 마법을 건 거야?”
[혹시라도 비밀을 말하면 안 되잖아.]
“비밀? 용이 지하로 통한다는 거?”
[그것도 그렇고…….]
윈터가 드물게 말을 흐렸다. 세드릭은 기민하게 질문을 바꾸었다.
“혹시 200년 전에 용이 지상에서 사라진 것과 관련됐어?”
[음, 아마…….]
세드릭의 추궁에 저도 모르게 대답하던 윈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이참, 그거야 나도 모르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알에 담긴 채로 지상에 왔는걸. 나도 얼마 들은 게 없어.]
“그럼 누구에게 물어야 해?”
[누구긴 누구야. 우리 할머니지.]
별안간 비엘스카가 땅에 착지하며 끼어들었다. 윈터가 눈을 부라리며 세드릭을 날개로 감쌌다. 어제 귀중한 식량을 받은 은혜는 까맣게 잊은 듯했다.
비엘스카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할머니가 부르셔. 다른 인간도 마저 깨어나면 산 정상으로 올라오렴.]
가운데 돌산.
실제로는 북동쪽으로 치우친 이 야트막한 돌산이 ‘가운데’란 이름을 하사받은 이유는 오직 서방 군주가 기거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천 년, 수없이 세력이 갈려 무의미한 쟁투를 벌여 온 동방과 달리 서방은 한 명의 군주가 오래도록 통치를 이어 가고 있었는데, 이 서방 군주란 그저 명예로운 직함일 뿐 실상 크게 간섭하는 바가 없었다. 다만 서방에서 가장 연로한 자로서,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깊은 연륜에서 비롯된 조언을 건네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서방 신민은 천 년째 군림하는 군주를 마음 깊이 존경했다. 먼 옛날 군주가 핍박받는 종족을 등에 태우고 통곡의 절벽을 쉰일곱 번이나 횡단한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종족 대이동 시대를 기억하는 자는 이제 온 세상을 뒤져도 서방 군주뿐이지만, 현존하는 서방 신민은 군주의 은덕으로 목숨을 부지한 선조의 후손으로서 마땅히 군주를 존중했다. 물론 서방 군주와 혈연으로 얽힌 용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할머니. 그만 일어나셔요. 손님이 왔습니다.]
용 오빌로트가 껌벅껌벅 조는 용을 깨웠다. 넓적한 바위에 드러누워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이 늙은 용이 바로 서방 군주 트라이피나였다.
[칼라일 자일스의 후손이 왔어요.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하셨잖아요.]
[으응? 누구의 후손이라고?]
[칼라일 자일스요. 할머니의 오랜 벗이요.]
용 폰타네까지 가세하고서야 트라이피나는 겨우 눈을 떴다. 늘 단조롭기 그지없던 노구가 아주 오래간만에 활기찼다.
[칼라일의 후손?]
트라이피나는 나이 들어 혼탁해진 눈을 껌벅거렸다. 오빌로트가 멀찍이 떨어진 세드릭을 기민하게 불러들였다. 세드릭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틀거리는 헤스터를 부축하여 늙은 용 가까이로 다가왔다.
“……세드릭 자일스입니다.”
세드릭이 머뭇거리며 인사했다. 트라이피나는 흐릿한 눈으로 오랫동안 세드릭을 응시했다. 마치 기억을 더듬는 듯 아스라한 눈빛이었다.
[자일스, 자일스라.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로구나.]
멍하니 추억을 뒤좇던 트라이피나가 머잖아 현실로 돌아왔다.
[한데 닮지가 않았어. 칼라일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세드릭은 칼라일 자일스의 먼 후손이니까 당연히 다르게 생겼지. 할머니의 주인이 죽은 지도 지상의 시간으로 벌써 200년이라고요.]
윈터가 호기롭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직후 쏟아지는 원로 용들의 따가운 시선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칼라일 경의 직계 후손이 아닙니다. 칼라일 경은 자식을 남기지 않았기에 오래전 대가 끊겼어요.”
세드릭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트라이피나는 아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랬던 것 같아. 칼라일은 결혼하지 않았어.]
[어머? 전에 칼라일 자일스는 아리따운 공주와 결혼했다고 하셨잖아요.]
[비엘스카. 조용히 하렴.]
폰타네가 어린 딸에게 주의를 주었다. 비엘스카는 입을 비쭉이며 뒤로 빠졌다. 다행스럽게도 추억에 잠겨 있느라 비엘스카의 말을 듣지 못한 트라이피나가 불현듯 세드릭에게 물었다.
[너는 칼라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실은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칼라일 경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이상할 정도로.”
[역시 그렇게 되었구나.]
트라이피나가 울적하게 꼬리를 늘어뜨렸다. 세드릭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용이 그동안 자일스에게 베푼 은혜가 얼마나 깊은지 압니다. 먼 옛날, 자비로운 선조 에리얼 자일스가 용 다리아에게 베풀었던 사랑은 이미 오래전 대갚음하고도 남았지요. 다른 이들이 용과 사투를 벌일 때 자일스만은 다리아의 비호를 받으며 번성했고, 이렇듯 용이 모두 떠나간 지금도 꼭 한 마리의 용이 지상에 남아 자일스를 수호합니다. 에리얼 자일스의 후손을 수호하리란 다리아의 맹세를 잊지 않은 그대들에게 몹시 감읍하지만―”
[다리아의 맹세라니? 고릿적 얘기는 왜 꺼내는 것이야?]
“예?”
세드릭이 당황했다. 멀뚱히 그를 내려다보던 트라이피나가 느리게 웃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꼬마가 착각한 모양이구나. 아니, 아니지. 칼라일을 모르니 아직도 다리아의 맹세를 운운할 수밖에 없겠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쩜 지상의 시간으로도 천 년을 훌쩍 넘긴 다리아의 맹세가 아직도 유효하다고 여길까. 꼬마야, 어린 다리아를 성체로 길러 낸 에리얼 자일스의 은혜가 그토록 값지다고 생각하니?]
용 지칼파가 짓궂게 물었다. 세드릭이 머뭇대는 사이에 트라이피나가 인자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다. 모르면 새로이 알면 되지. 칼라일의 후손에게 칼라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지난 세월 누리지 못한 기쁨. 아주 오래간만에 심장이 뛰는구나.]
트라이피나는 그리 오래된 이야기를 풀어냈다. 시기는 지상의 시간으로도, 지하의 시간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아주 오래전이었다.
[용이란 본디 지하에서 탄생한 생명이란다. 궂은 날씨와 척박한 땅으로 강해질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도 유달리 강대했지. 하지만 타인의 육신을 빼앗아 힘을 축적하는 뱀이 어느 순간부터 급증했다. 그것이 바로 악마야. 지상에서 부르는 명칭이 그대로 굳어져서 지금은 악마라 부르지만, 본래 그들의 원천은 땅을 기는 하찮은 뱀이었다.]
악마는 생명을 취할수록 강해졌다. 요정, 인어, 거인 가릴 것 없이 전부 그네들의 먹잇감이었다. 그러더니 하늘을 나는 위대한 존재를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던 뱀이 언젠가부터 용의 견고한 육신을 탐하기 시작했다.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악마를 용조차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용은 몇몇 따르는 종족을 품어 지상으로 향했다. 커다란 날개로 하늘을 찢어 날아간 그곳은 낮이면 태양이, 밤이면 별이 빛나는 찬란한 세상이었다.
그들은 악마가 없는 평화로운 세계에서 오래도록 번성했다. 마법이란 신묘한 힘을 부리는 족속이 눈엣가시였으나, 오직 성내에만 틀어박히는 그네들은 이종족의 박멸을 꾀할 만큼 활동적이지 못했다. 머릿수 많기로는 제일인 인간은 심지어 우스울 정도로 약했다. 그리하여 변덕스러운 용을, 탐욕적인 거인을, 잔혹한 요정을, 사특한 인어를 제어할 자가 없었다. 악마가 들끓는 지하에 비한다면 그곳은 진정 낙원이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강해졌던 이들은 천적이 없는 따사로운 낙원에서 차츰 나태해졌다. 요정은 칼날처럼 날카롭던 날개를 잃었고, 거인은 쇠도 뚫어 내던 힘을 잃었으며, 인어는 고래도 단번에 물어뜯던 송곳니를 잃었다. 오직 지하와 통하는 용만이 본래의 강강함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다. 척박한 고향과 악마란 천적을 잊어버릴 만큼 까마득한 세월이었다.
그리고 그 세월, 세상이 뒤집히기엔 충분했다.
‘숭고한 팔리아치는 이제부터 산티그마 교황을 성심으로 섬기겠습니다.’
어느 날, 팔리아치 가문이 난공불락의 뮈티레 요새를 자진하여 열었다. 유사 이래 인간이 마법과 대등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자못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이후 마법 사회는 팔리아치를 필두로 중앙삼국과 발롬피에 협약을 체결하여 공식적으로 천년전쟁을 종식했다. 겉으로는 화해였으나, 실제로는 마법의 패배나 다름없었다.
[바야흐로 인간의 시대다.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용은 마법의 쇠퇴를 지켜보며 긴장했다. 인구는 해마다 빠르게 늘어났으며, 나뭇가지와 돌로 시작한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마법이 그러했듯 발전이 정체되면 꼬리가 잡히기 마련이었다. 이대로라면 용은 필시 몰락할 것이었다.
[한때 강대했던 이들이여, 돌아갑시다. 돌아가서 우리의 용맹을 되찾읍시다.]
본디 용이란 하늘을 찢고, 별을 꿰며, 땅을 으깨는 자. 그들은 낡은 게으름을 벗어던지고 본연의 용맹을 되찾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귀향.
언젠가 달아났던 곳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돌아가지 못합니다. 너무 나약해졌어요. 살벌한 고향을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함께 지상으로 올라왔던 종족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도래하는 인간의 시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평화로우리라 지레짐작하며, 이렇듯 따사로운 땅을 떠나려는 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용은 그네들을 아둔하고 가엾게 여겼다. 하지만 선택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몫이었다. 무겁게 지상으로 올라왔던 용은 가벼이 지하로 내려갈 것이었다. 귀향의 날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용이 지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용을 연구할 기회는 영영 사라집니다. 어떻게든 몇 마리라도 붙잡아서 살을 가르고, 내장을 살펴야 합니다. 그들의 강함에는 분명 이유가 있어요.’
그 시절, 용이 지하에서 올라왔음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용이 숨기지 않았고, 함께 올라온 이종족도 거리낌 없이 떠들어 댔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용이 지하로 영영 떠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용의 힘을 본뜨려는 인간들과 아직 밝혀지지 않은 용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마녀들이 합심하여 용을 노렸다. 대포와 마법의 합공을 버티지 못하는 용이 점차 늘어 갔다.
그러자 칼라일 자일스가 개탄했다.
‘탐욕이 들끓는구나. 세상이 용의 비명으로 가득하다.’
그는 동족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용 트라이피나를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를 보낼 것이다. 네가 그토록 고향으로 돌아가길 기원한다면, 나 또한 그리 기원하겠다.’
칼라일 자일스는 목숨을 걸어 마법을 부렸다. 벗이자 형제이자 연인이자 자식인 트라이피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지상에 드러난 용의 자취가 사라지기를. 지상에 드러난 사실이 비밀로 돌아가기를. 그리하여 트라이피나가 안전하게 지상을 떠나기를.
그렇게 지상은 용을 잊었다. 용이 지하에서 올라왔다는 기록이 지워지고, 용이 곧 지상을 떠난다는 사실이 잊혔다. 칼라일의 인도로 용이 일제히 지상을 떠났을 때, 세상은 영문을 몰랐다. 고작 마법사 하나의 희생만으로 전부 지워지지 않은 비밀이 간간히 수면 위로 떠올랐으나, 대체로 증거 없는 헛소리라 치부되었다.
칼라일 자일스는 죽었다. 그토록 많은 업적을 남겼던 마법사가 세상에서 까마득하게 잊혔다.
[거대한 마법에는 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지.]
트라이피나는 슬프게 중얼거렸다.
칼라일 자일스.
200년 전 <교활한 자일스>의 수장이자, 사라진 용 트라이피나의 주인. 특히 성도학 분야에서 특출한 업적을 남겼던 마법사치고 전해지는 기록이 전무하기에 평소 수상하게 여기긴 했다. 물론 이만한 뒷이야기가 숨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으나, 그만한 마법사가 어찌해 역사에서 도려졌는지 족히 납득할 만했다.
마법의 반동. 여태 고려하지 않았던 게 이상할 정도로 아퀴가 들어맞는 사유였다.
“세상이 잊은 선조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맙습니다. 잊혀서는 안 될 이가 잊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세드릭은 초조한 기색을 애써 감추었다. 웅대한 용 수십 마리가 둘러싼 상황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흔들리면 지하로 내려온 의미가 없었다. 지금도 이 드넓은 지하 세계 어디선가 고초를 겪고 있을 디아나를 떠올리면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하릴없이 어머니를 잃었다. 디아나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칼라일 경의 자취를 쫓아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세드릭이 또렷하게 읊조렸다. 매섭게 벼린 눈에 의기가 묻어났다. 달콤한 말로 꾀어도, 차디찬 손길로 아무리 내쳐도 물러나지 않으리란 굳건한 결심. 수십의 원로 용들이 엄중한 눈빛으로 은인의 머나먼 후손을 굽어보았다. 그들은 나름대로 세드릭 자일스의 내심을 재단하고 있었다.
어린 용이 금기를 어겨 가며 지하로 내려온 이유.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를 감행한 까닭은 대체 무엇인가.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 악마의 사특한 농간에 걸려 지하로 끌려갔습니다.”
세드릭은 제자리에서 단정히 무릎 꿇었다. 찰나의 굴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두 눈이 얌전하게 내리깔렸다.
“나는 지하에 무지합니다. 악마를 모릅니다. 나 혼자서는 구할 수가 없어요.”
지하에 달하자마자 이유 모를 열병에 시달렸다. 그리고 열이 가신 직후에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디아나를 구할 수 없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용이라면. 용이 돕는다면.
기회가 목전에 어른거리는 상황에서, 짧은 생애에 공들여 다듬었던 자존심은 일말의 가치도 없었다. 누구에게도 꿇어 본 적 없는 무릎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등 뒤에서 윈터가 안절부절못하며 주둥이를 비벼 댔으나, 세드릭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디아나만 구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한 굴욕도 감내할 뜻이 충분했다.
[허튼소리! 우리는 칼라일 자일스의 후손을 수호할 뿐 너희의 종이 아니야!]
예상했듯 용들의 분노가 거센 불길처럼 몰아쳤다.
[도와 달라는 말 한마디로 우리가 흔쾌히 나설 것 같나? 우리는 무려 천 년 전에 악마를 피해 이곳으로 달아났다. 널 위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란 말인가!]
[어쩜 저리도 교만할까. 천 년 전에 우리를 도운 마법사는 네가 아니라 칼라일 자일스건만, 어쩜 저리도 뻔뻔하게 우리를 사지로 내몰려는 걸까. 갓 태어난 알을 외로운 지상으로 보내어 너흴 수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칼라일 자일스의 은혜를 갚고 있어.]
[애당초 저들을 지하로 데려오면 아니 되었다.]
오빌로트가 차디찬 눈으로 윈터를 응시했다.
[용은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마주친 이를 부모로 섬기지. 동족이 없는 세상에서 네가 얼마나 저이를 소중히 여겼을지 능히 짐작한다.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저이를 아꼈다면 금기를 어겨서는 아니 되었다. 너를 지상으로 보내기 전 우리가 그토록 경고했건만, 지상에서 용의 목소리를 금하는 칼라일 자일스의 마법도 네 아둔함을 막지는 못했구나.]
나머지 용들도 깊이 공감했다. 실은 윈터가 지상의 사람을 태우고 지하로 내려왔을 때부터 금기를 어긴 용에 대한 처벌이 논의되던 참이었다. 날개 하나쯤은 가볍게 찢어 버리고도 남으리란 비엘스카의 말이 정녕 허언이 아니었다.
[금기를 어기고도 무사할 수는 없는 법.]
[일단 징계부터 결정하는 것이 어떠한가?]
화살이 단숨에 윈터를 향했다. 어리어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윈터가 날개를 접으며 오들오들 떨었다. 지상에선 거칠 것 없던 어린 용도 원로들은 두려운 모양인지 겁먹은 기색이 완연했다.
세드릭이 분연히 나섰다.
“윈터를 탓하지 마십시오. 내가 윈터를 강제했습니다. 나를 지하로 데려가지 않으면 다른 악마를 소환해서라도,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지하로 내려가리라 단언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사달이 났지. 너희가 오기까지 서방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그리고 우리는 혼란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야.]
용 킬키스가 엄정하게 고했다. 세드릭은 입술을 너덜너덜하게 짓씹으며 그를 쏘아보았다. 갑갑한 마음에 눈가로 열이 몰렸다.
[자, 진정들 해라. 어찌 이리들 흥분했어.]
한가로이 사태를 관망하던 트라이피나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열띠게 의견을 주고받던 용들이 금세 조용해졌다. 갑작스러운 적막 속에서 트라이피나의 노쇠한 목소리가 울렸다.
[칼라일의 어린 후손아, 이름이 세드릭이라고 했나? 내 너에게 궁금한 것이 있느니. 조금 전에 말했기로 네 소중한 사람이 악마에게 끌려갔다고 하였는데 그 악마의 이름을 아느냐?]
“마르고트입니다.”
토론으로 타오르던 정상이 삽시에 찬물을 맞았다. 세드릭은 의아한 얼굴로 쨍하게 얼어붙은 용들을 돌아보았다. 이상하리만치 싸해진 분위기가 영 심상찮았다.
[마르고트라…….]
트라이피나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세드릭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어떤 악마인지 아십니까?”
[알다마다. 모를 리가 없지.]
트라이피나는 자조했다.
[마르고트, 그자의 본명은 마르고트 솔이다. 동방에서 난립하던 열하나의 군주와 예순여섯의 군단을 징벌하고 스스로 옥좌에 오른 유일무이한 동방 군주. 수십만 병사를 거느린 악마들의 왕이자, 뜻에 반하는 세력은 반드시 학살로 보답하는 잔인한 인물이지.]
세드릭은 그저 아연했다. 돌덩이를 삼킨 듯 말문이 막힌 그를 트라이피나가 안타까이 위로했다.
[딱하지만 그자에게 끌려갔다는 아이는 포기하는 편이 낫겠구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우리를 무사히 지하로 이끌어 준 칼라일을 생각해서라도 내 너를 도와주고 싶으나, 안타깝게도 그만한 역량이 되질 않아. 이조차 야속하게 들리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해해 주렴. 네게 그 아이가 소중하듯, 나는 내 후손이 소중하단다.]
완곡하게 돌려 말하긴 했으나, 분명한 거절이었다. 세드릭은 망연자실 시선을 떨구었다. 눈앞이 암담했다.
낑낑거리며 세드릭의 눈치를 보던 윈터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세드릭, 세드릭. 내가 가 줄게. 나랑 가자.]
[아가, 너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방금 할머니께서 안 된다고 하신 거 못 들었니?]
용 폰타네가 혀를 찼다. 윈터가 뿔난 얼굴을 들었으나, 비 오듯 쏟아지는 매몰찬 시선에는 도리 없었다. 허공을 마구 헤집던 꼬리가 시무룩하게 땅으로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칼라일의 후손이라면 너도 마법사겠구나.]
트라이피나가 혼곤한 눈을 깜박이며 세드릭을 보았다. 세드릭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트라이피나의 눈빛에 은근한 기대가 서렸다.
[만약 너희가 내 생애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면, 재고할 용의도 있는데…….]
“말하십시오.”
[아주 오래전 지상에서 보았던 것이다. 칼라일이 마법을 부려 주었지.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직 마법으로만 가한 소원이란다.]
애틋한 추억에 잠긴 목소리였다. 그러나 행복한 과거에 도취된 트라이피나와 달리, 세드릭은 일순간 품었던 희망을 모조리 빼앗기고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하에선 마법을 쓰지 못합니다.”
세드릭이 바들거리며 눈을 치떴다. 참담하게 일그러진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열병이 가신 뒤로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육신에 마력이 흐르질 않았다. 황망히 올려다본 지하의 하늘은 그저 새카말 뿐 별이 온데간데없었다. 단순히 뜨지 않은 게 아니다. 이 세상에는 별이 없었다.
여신이 버린 땅. 별이 사라진 땅. 그리하여 별빛 닿지 않는 암암한 세계.
별이 없는 세상에서 마법이란 축복이 거둬진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래? 그것 참 안타깝구나.]
트라이피나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용들이 그녀를 달랬으나, 낙심한 마음은 좀체 풀리지 않았다.
그때, 헤스터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소원이 무업니까?”
그러자 모두가 여태껏 침묵하던 헤스터를 보았다. 아직도 열에 시달리느라 안색이 몹시 나빴지만, 형형한 안광만은 누구 못지않았다. 도리어 광기가 흐르는 눈빛이었다.
트라이피나는 찬찬히 눈을 내리감았다. 세상이 잊어버려 이제는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칼라일 자일스를 더듬고 더듬으며 늙은 용이 조용하게 뇌까렸다.
[아름다운 선율. 아름다운 곡조. 생애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소리야말로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
비엘스카는 심심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조금 전 공연히 나섰다가 어미에게 꾸중을 들어 뒤편으로 내쫓긴 참이었다. 다행히 뒤쪽에서도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는 전부 들렸지만, 조그만 사람과 윈터라는 또래 용을 보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실피. 방금 들었지? 쟤네가 원래 마법사인데 여기서는 마법을 못 쓰나 봐. 마법이란 걸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
비엘스카가 주둥이를 비쭉였다. 오래간만에 재미난 일이 벌어지는 줄 알았는데, 영 글러 먹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쟤네도 참 멍청하다. 동쪽에 악마가 얼마나 많은데 거길 가 달라고 부탁하다니. 거기 갔다가 몸을 빼앗기면 어떡해? 그렇지 않……. 어라, 실피?]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비엘스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 여기 있었는데. 얘가 어딜 갔담?]
✤ ✤ ✤
“악마란 몰지각한 종족입니다.”
헤센 그윈티르가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적당한 기호 식품조차 없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악마들은 그저 배 불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입에 넣고 보더군요. 그것이 응당 끓여 마셔야 하는 찻잎이든, 먹으면 탈이 나는 독초든, 부모 형제의 살점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요. 발전한 문명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 그저 다행일 뿐입니다.”
문가를 지키는 악마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언변이었다. 몇몇 악마들이 울컥하여 도끼눈을 떴으나, 헤센은 그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집요하게 침대만을 보고 있었다.
“이제는 시종에게도 괜한 횡포를 부리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마법으로 공연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고요. 잘 생각했습니다. 포기할 때를 아는 것도 현명한 마녀의 덕목이지요.”
침대는 미동도 없었다. 그러나 불룩한 이불 속에서 디아나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음을 헤센은 모르지 않았다.
“몸이 이상하게 좋지요? 아마 기력이 샘솟을 겁니다. 지하에선 암흑의 별 칼리스토가 달처럼 빛나니, 암흑의 축복을 받은 당신은 지상에서와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마녀입니다. 그러나 마력이 넘쳐 난들 분명한 한계가 있어요.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 부르지만, 장담컨대 당신은 한계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진저는 그리젤다 솔이 아니니까요.”
마법을 잃은 마법사는 한가로이 다리를 꼬았다. 지하에 도착하자마자 장장 이틀간 온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는 열병을 앓았으나, 병색 없이 말끔한 얼굴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그러니 탈출을 단념한 것은 참으로 장한 선택입니다. 이곳 참극성에만도 수천의 악마가 상존하며, 드넓은 동방에 걸쳐 수십만의 악마 군단이 흩어져 있습니다. 자고로 지하의 동방은 악마의 땅이지요. 당신이 아무리 대단한 마법을 부린대도 인산인해로 덤비는 악마 군단을 막진 못할 텝니다. 설령 참극공의 시야를 피하더라도 지하에서 당신이 갈 곳은 없어요. 운 좋게 참극성을 빠져나간들 십중팔구 악마에게 잡아먹힐 겁니다. 그런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위대한 마법의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가 열기를 띠었다. 마치 신을 우러르는 사제처럼, 그는 마음 깊이 신봉하는 사실을 설파하고 있었다.
“진저, 부디 내 말을 믿으세요. 당신의 희생은 값질 것입니다.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벌어진 적 없는 기적을 받치는 최초의 주춧돌로서 모두가 당신의 이름을 기억할 거예요.”
헤센은 벅찬 가슴을 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매끈하게 휘며 인사를 전하는 모습은 북부의 신사답게 절도 있었다.
“그럼 열흘 뒤에 보지요.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경쾌한 발소리가 점점이 멀어져 갔다. 이윽고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끝맺고서야 내내 잠잠하던 침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내 신경질적으로 이불이 걷히며 디아나가 산발로 등장했다.
“……나쁜 놈.”
디아나는 거칠게 씩씩거리며 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얄미운 헤센 그윈티르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설사 돌아오더라도 맘껏 그를 해코지할 수도 없었다. 혼자만 마법을 부릴 수 있다고 날뛰다간 작금 누리는 호화스러운 생활일랑 전부 끝이었다.
해소하지 못한 울분은 자연히 주변을 향했다. 돌연 커다란 베개가 문가에 굳건히 버티고 선 악마의 안면을 강타했다.
“나가.”
뿔이 난 사자 머리에 이족 보행 하는 허연 털북숭이 몸을 지닌 악마가 자못 불편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악마의 이름은 소제 가네트뤼포. 마르고트가 그녀에게 붙인 호위 겸 감시였다.
“나가라고.”
디아나가 재차 쏘아붙였다. 그럼에도 악마가 미동하지 않자 기어이 잿빛 눈에 불똥이 튀었다.
“안 나가? 이번엔 샹들리에로 맞아 볼래? 아님 내가 내보내 줘?”
마녀의 분노를 대변하듯 가구들이 위협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문가로 칼날을 겨눌 것처럼 난폭한 겁박이었다. 그러자 악마는 몹시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방을 나서는 걸음마다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문이 닫히자, 방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숨소리조차 까맣게 묻히는 정적 속에서 디아나가 불현듯 고개를 쳐들었다. 조금 전 폭풍처럼 일렁이던 분노는 죄 잊은 듯 무서울 정도로 차분한 얼굴이었다. 이제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혼자였다.
디아나는 소리 없이 신속하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마법으로 헤센이 앉았던 의자를 치우고, 바닥에 깔린 두터운 러그를 거둬 냈다. 맨낯이 드러난 돌바닥은 온갖 수식과 기도문, 마법진으로 빼곡했다.
“하여간 고집은 세요.”
디아나는 지나치게 완고한 악마 호위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실은 누군가를 협박하는 데 일말의 재주도 없지만, 지하로 내려와 충만해진 마력이야말로 살벌한 무기가 되었다. 디아나는 남부럽지 않게 늘어난 마력이 기껍다가도, 예전처럼 못난 마녀여도 좋으니 집으로 돌아가고픈 일념이 간절했다. 어차피 열흘 뒤면 제물로 바쳐질 운명. 이대로는 대단한 마녀든 아니든 소용없었다.
그러니 돌아가야 한다.
디아나는 쓸데없는 잡념은 모두 접어 두고 오직 그 생각만을 반복했다. 마르고트의 배신에 치를 떨고, 코앞으로 닥친 이른바 운명에 절망하는 건 하루로 족했다. 남은 열흘 동안은 어떻게든 지상으로 돌아갈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디아나는 악마 소환진과 역소환진을 바탕으로 여러 방안을 짜냈는데, 산출되는 결과마다 영 마땅치가 않았다. 악마학에 문외한인지라 이제 와 연구 방향을 바꾸지도 못했다. 여러모로 갑갑한 상황이었다.
디아나는 한숨을 삼키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리스토만이 환하게 빛나는 하늘은 오늘도 변함없이 어두웠다. 낮인지 밤인지도 구분되지 않는 암흑의 세상. 따지자면 이곳이 그녀의 고향이었으나, 디아나는 좀처럼 지하에 마음 붙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뿐더러 본능적인 불쾌감이 앞섰다.
마법으로 잉태한 아이.
원래부터 없던 아버지, 진짜로 그런 존재가 없다 한들 엄청난 충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심으로 믿었던 어머니가 그저 호기심만으로 열흘 품어 낳았다는 사실은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따스한 목소리조차 들어 보지 못한 어머니지만, 널 사랑하셨노라 장담하던 언니의 말을 무심코 믿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실제로는 배신한 적조차 없는 어머니에게 쓰디쓴 배신감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눈앞에 어머니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묻고 싶다.
어째서 나를 낳았느냐. 기어이 낳았으면 비밀은 잘 숨겼어야지, 왜 그리도 허술해서 이런 사달을 냈느냐. 어쩌다 마르고트 같은 악마를 믿어 나를 이런 절망으로 밀어 넣었느냐. 기적을 이루어 놓고 왜 그리 덧없이 죽었느냐.
가슴이 답답했다. 난데없이 직면한 진실과 열흘 앞으로 다가온 종말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보고픈 사람들과 꿈꿨던 미래가 산산이 흩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속이 뒤틀리는 건 그녀의 죽음으로 원수 같은 이들이 행복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죽음으로 되살아나는 자가 그토록 무책임한 어머니란 사실이 미치도록 싫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돌아가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훼방할 것이었다. 끝내 돌아갈 방도를 찾지 못한다면 제단에 누워 혀라도 깨물 작정이었다. 아니면 마침 꼭대기 층이니 창문에서 떨어져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죽어도 그네들의 원이 이루어지는 꼴은 못 보았다. 디아나는 세상 무엇보다도 죽음이 두려웠지만,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마르고트와 제노비아 자일스의 오랜 계획을 파탄 내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여겼다.
디아나는 바닥에 빼곡히 적힌 흔적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독기 그득한 두 눈에 하릴없이 눈물이 맺혔다. 디아나는 소매로 눈가를 박박 문대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약해지면 안 된다. 그러니 마음 약해지는 생각일랑 전부 기억 언저리에 묻어 두어야 했다.
그때, 갑자기 창가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똑똑.
처음에는 지나가는 바람 소리인 줄만 알았다. 상식적으로 누가 꼭대기 층 창문을 두드린다고 여기겠나.
하지만 불규칙적인 노크 소리는 계속되었다.
똑똑.
디아나는 그제야 조심스레 창가로 다가갔다. 자연히 창밖을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지하 세상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했으므로, 집으로 돌아가는 방도를 찾기 전에는 최대한 몸을 사리는 편이 나았다.
[빨리 열어 줘!]
그러나 창밖에는 정말로 예상치 못한 손님이 있었다.
디아나가 황급히 창문을 열었다. 틈이 벌어지자마자 손바닥만 한 요정이 쏜살같이 안으로 날아들었다. 멍하니 낯선 요정을 바라보던 디아나는 머리칼을 흩트리는 찬 바람에 놀라 창문부터 잠갔다.
[아휴, 들키는 줄 알았네.]
초록색 요정이 초록색 머리칼을 매만지며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디아나가 아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세요?”
[내가 누군지는 알 거 없고. 네가 악마에게 붙잡혀 끌려왔다는 맹추니?]
디아나가 낯을 와락 구겼다.
“너 뭐야? 뭔데 날 알아?”
[널 구해 주러 왔어.]
“웃기시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그러자 요정이 대놓고 한숨을 토해 냈다.
[너 아주 의심쟁이구나? 알았어, 알려 주면 되잖아. 나는 실피야. 보다시피 요정이고.]
“그래서 난 어떻게 안 건데? 구해 주러 왔다는 건 또 뭐고.”
[말 끊지 말고 귀담아들어 봐. 이제부터 설명할 거니까.]
요정 실피가 시건방진 태도로 말했다.
[나는 통곡의 절벽 너머 서방에서 날아왔어. 내가 다른 요정보다 날개가 컸으니 망정이지, 아님 중간에 힘들어서 날갯짓도 못 했을 거야. 게다가 참극성에 몰래 숨어드느라 무지 힘들었다고. 넌 나한테 백번 감사해도 모자란데 이렇게 박대하다니……. 어쨌든 네 존재를 알게 된 건 며칠 전 가운데 돌산에 나타난 지상의 사람들 때문이야. 한 명은…… 옳지, 너랑 되게 닮았고 나머지 한 명은 까만 머리였어. 군주님의 벗이었던 칼라일 자일스의 머나먼 후손이라던데?]
그에 디아나는 아연하게 질렸다. 언니와 세드릭이었다. 어찌 지하로 내려왔는지는 몰라도 같은 세상에 있었다.
“나, 날 구하러 온 거야? 다들 어디 있는데? 왜 너만 왔어?”
[말 끊지 말라니까 그러네. 하여튼 갑자기 나타나선 악마에게 잡혀간 애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군주님도 그렇고 다른 용들도 그렇고 썩 달가워하지 않던걸. 너, 다른 악마도 아니고 하필이면 동방 군주에게 붙잡혔잖아. 아무리 참극성이 통곡의 절벽에서 가까워도 악마가 무진장한 궁전에 오고 싶겠니? 차라리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편이 낫겠다.]
“하지만 언니랑 세드릭은 훌륭한 마법사란 말야. 마법을 쓰면 어떻게 될…….”
다급히 말을 이어 가던 디아나가 입을 다물었다. 지하에선 암흑의 별 칼리스토만이 빛났다. 제노비아 자일스와 헤센 그윈티르가 마법을 잃은 것처럼, 헤스터와 세드릭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래서 내가 왔잖아. 넌 나한테 백번 감사해도 모자르다고.]
실피가 디아나를 아래위로 훑으며 말했다.
[근데 너도 좀 많이 크구나? 지상의 사람들은 다들 너만 하니? 나처럼 조그마하면 그럭저럭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넌 좀 어렵겠다.]
요정이 조잘대는 소리가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전부 흘려들으며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오로지 지상으로 돌아갈 방법만을 강구했다. 참극성에서 달아나더라도 갈 곳이 없으며, 외려 멋모르는 악마에게 붙잡혀 잡아먹힐 가능성만 농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극성을 탈출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차라리 제물로 바쳐지는 그날까지 이곳에서 호의호식하며 남몰래 집으로 돌아갈 방도를 찾는 게 안전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헤스터와 세드릭이 지하로 내려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이제는 다른 길이 있었다. 답도 안 나오는 문제로 몇 날 며칠 골머리를 썩는 대신, 참극성에서 빠져나가 어떻게든 그들이 있는 곳에 달하면 되었다. 성 밖에 안전한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수확이었다.
“정말 고마워!”
디아나가 난데없이 실피를 꽉 껴안았다. 실피가 소리 죽인 비명을 내질렀지만, 역동하는 기쁨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음 약해질까 부러 떠올리지 않았던 이들이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것이 놀랍고도 고마웠으며, 이렇듯 반가운 소식을 전해 준 조그만 요정에게 무척이나 감사했다. 결국에 지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거든, 제단에서 죽을 각오로 매일 밤 지새우던 하루하루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이제야 겨우 살 길이 보였다.
디아나는 죽어도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았다.
요정 실피는 회한의 숲에 숨은 가족을 구하러 왔다고 한다.
[동방이 악마의 땅이라고들 하지만, 나 같은 요정이나 다른 종족도 소수지만 살고 있어. 뭐, 다들 회한의 숲에 숨어 있지만 말야.]
“아까는 서방에서 왔다면서.”
[원래는 나도 회한의 숲에서 태어났어. 악마를 피해 거기서 쭉 숨어 살았지. 그런데 어느 날 악마 군단이 숲을 공격하는 바람에 가족이랑 떨어졌지 뭐야. 악마에게 쫓기고 쫓기다가 하는 수 없이 통곡의 절벽으로 날아갔어. 용이 아니고서야 통곡의 절벽을 넘을 수 없다고 엄마가 늘 신신당부했는데, 다행히도 나는 다른 요정보다 날개가 커서 겨우 서방에 닿았지.]
실피가 자랑하듯 날개를 펼쳤다. 예전에 보았던 와조스키의 날개보다 확실히 컸는데, 그보다는 날개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점에 눈길이 갔다. 분명 와조스키는 저러지 않았다.
‘지하는 뭐든지 흉흉한 모양이야.’
디아나는 쉬이 납득했다. 이렇게 어둡고 싸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보통 마음가짐으로는 어림도 없을 터였다.
[나는 아직도 회한의 숲에서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가족을 구하고 싶어. 우리 가족은 날개도 나보다 작은 데다 악마에게 날개가 뜯긴 경우도 많아서, 용이 돕지 않으면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거든. 그런데 게으름뱅이 용들은 어찌나 엉덩이가 무거운지 평화로운 서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단 말야. 그런 와중에 널 구하러 지상의 사람이 둘이나 나타난 거지.]
한마디로 디아나를 회한의 숲에 숨겨 놓은 뒤, 실피가 얼른 서방으로 날아가 용을 불러오는 계책이었다.
[군주님이 칼라일 자일스의 후손을 꽤나 아끼시던걸. 네가 동방 군주의 손아귀에서만 벗어난다면, 필시 널 구하러 오실 거야.]
실피가 당당하게 말했다. 200년 전의 마법사 칼라일 자일스가 서방 군주 트라이피나에게 베푼 은혜를 들은 디아나도 꽤나 일리 있는 추측이라 생각했다. 그의 은혜를 잊지 못해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용알을 지상으로 올려 보내는 정성이라면, 참극성에서 빠져나온 디아나를 구하러 올 가능성이 높았다. 겸사겸사 회한의 숲에 숨어 있는 실피의 가족도 구하고 말이다.
사실 디아나는 회한의 숲에서 굳이 용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실피의 말로는 통곡의 절벽 너머 서방에 닿기까지 바닥을 알 수 없는 구렁텅이가 망막하게 펼쳐졌다지만, 디아나는 지하에서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출중한 마녀였다. 서방이 얼마나 먼지는 몰라도 실피가 건널 수 있는 거리라면 족히 마법으로 가할 터였다.
“알았어. 참극성을 빠져나가면 회한의 숲에서 얌전히 기다릴게.”
그러나 디아나는 실피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실피가 가족을 구할 기회는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인지도 몰랐다. 악마에게 쫓겨 죽음을 각오하고 통곡의 절벽을 넘은 실피가 악마의 본거지인 참극성으로 숨어들기까지 얼마나 두려웠을지 차마 상상조차 불가했다. 비록 가족을 구하려는 선택이었으나, 덕분에 헤스터와 세드릭이 지하로 내려왔다는 소식을 접한 디아나로선 섣불리 실피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마법을 부릴 거야. 너랑 내 모습이 가려지는 마법이니까 괜히 놀라지 마.”
실피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디아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오래 유지하기엔 마력이 지나치게 소모되지만, 쓸데없이 마력이 넘치는 지금은 몹시 유용한 마법이었다.
[내 몸이 안 보여!]
“조용히 좀 해. 밖에서 다 듣겠다.”
디아나가 핀잔했다. 실피는 급히 양손으로 입을 막더니 작은 목소리로 소곤댔다.
[이제 보니 너 제법이구나? 그 마법이란 걸로 못된 악마들 깡그리 죽이고 달아나면 안 돼?]
“마법이 만능인 줄 아니? 난 누굴 죽여 본 적도 없고, 죽이는 방법도 몰라. 게다가 괜히 악마를 해하겠다고 설치다가 들키면? 성내에만 악마가 수천이라면서. 걔네를 다 뚫고 도망가자고?”
디아나는 냉정하게 자신의 능력을 판단했다. 아무리 마력이 배로 늘어났어도 그녀의 본질은 같았다.
다른 마녀들이 그러하듯 디아나도 학문으로서의 마법을 갈고 닦았을 뿐, 광인 니올로처럼 마법으로 누굴 해하는 데 능숙하지 않았다. 더욱이 <가혹한 아스톨포>처럼 거대한 폭풍을 일으키거나 <고결한 베가>처럼 낙뢰를 내리지도 못하며, 당연하게도 스승인 바바라조차 생명을 쉬이 거두는 방법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런 끔찍한 마법 따위 바바라도 모를 터였다.
그러니 들키지 않고 조용히 성을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갑자기 늘어난 마력에 도취되어 악마를 벌하겠노라 객기를 부리다간 아주 골로 가는 수가 있었다. 디아나는 악마 수천에 맞설 용기도 능력도 없었다. 죽음이 일상인 악마와 송장만 봐도 덜덜 떠는 그녀는 시작부터 달랐다.
“일단 아래층으로 내려갈 거야. 여기는 창문이 좁아서 내가 나갈 수 없지만 아래층은 창문이 꽤 컸거든.”
[네 마법으로 나만큼 작아질 수는 없어?]
“마녀의 육신은 함부로 다루는 게 아냐. 육신이란 마력을 담는 그릇. 만일 그릇이 잘못되거든 영영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지도 몰라.”
디아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며칠 전에 내려갔을 때 복도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설령 누군가 있어도 우릴 보지 못하니까 괜찮을 거야.”
[으음, 그러니까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창문을 열고 탈출하겠다는 거지? 너 제대로 날 수 있어?]
“모르긴 몰라도 내가 너보단 빠를걸?”
실피가 입을 비쭉댔다. 디아나는 소리 죽여 웃는 와중에도 내심 불안했다.
사실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탈출하는 길은 따로 있었다. 이동마법을 사용해서 바깥으로 나간 뒤, 하늘을 날아 성채를 빠져나가는 방법이었다. 그녀가 감금된 탑은 겹겹이 쌓인 성벽으로 시야가 차단되었으나 다행히도 아래에 공터가 있었다. 좌표가 없는 상황에서 이동마법은 육안에만 의존하므로, 며칠 전이었다면 당장 그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터는 며칠 전부터 악마 군단으로 득시글거렸다. 어디서 소집 명령이라도 떨어졌는지 줄어들긴커녕 매일같이 수가 불어나고 있었다. 비록 마법으로 모습을 가렸다곤 하나, 디아나는 차마 악마가 저리도 빼곡한 곳으로 이동하지 못했다. 기회는 단 한 번뿐. 들키면 끝이었다.
[정말 복도에는 악마들이 없는 거 맞지?]
“어제 감시인한테 물어봤어. 저런 졸병들은 성으로 들어올 수 없대.”
그러니 최대한 조용하고 안전한 길을 택해야 한다. 그녀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끔. 사라졌다는 소식조차 뒤늦게 알려져서 성채가 온통 혼란에 휩싸이길 바랐다. 실피가 용을 데려올 때까지 회한의 숲에 숨어야 하는 디아나로선 그것만이 최선이었다.
디아나와 실피는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작이었다.
“저기요!”
처음은 호위 겸 감시, 소제 가네트뤼포였다.
조금 전 디아나의 억지로 방을 나갔던 악마가 곧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지만 문을 열기 무섭게 커튼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실피가 바위도 씹어 먹는 이빨로 당황한 악마의 뒷목을 콱 깨물었다.
소제 가네트뤼포는 즉시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디아나는 마법을 부려서 이불과 커튼으로 그의 온몸을 칭칭 동여맸다.
[악마는 머리가 본체라서 머리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죽어. 그래도 급소를 당했으니 당분간은 깨어나지 않을 거야.]
실피가 피를 퉤 뱉어 내며 말했다. 디아나는 긴장한 얼굴로 말없이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인적 없는 복도가 몹시 냉랭했다.
디아나는 발소리를 죽이기 위해 신발까지 벗어 두고 복도를 걸었다. 방에서 쉼 없이 조잘대던 실피도 복도로 나오자마자 입을 단단히 잠갔다. 둘은 계단에 이를 때까지 누구와 마주치지 않았으며, 원형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낯선 인기척을 듣지 못했다. 그저 바깥에서 들려오는 악마 군단의 함성만이 아스라하게 전해질 따름이었다.
그들은 며칠 전 악마 시종을 따라 내려왔던 길을 그대로 걸었다. 훗날 탈출할 기회를 엿보며 시종을 닦달해 방을 나왔던 것이 이토록 도움이 될 줄 그날은 꿈에도 몰랐었다. 역시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법. 디아나는 정확히 그날만큼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는 거대한 회랑을 가로지르기만 하면, 유난히 창문이 넓은 복도에 다다랐다.
회랑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서 실피가 재촉하듯 바삐 날갯짓했다. 디아나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문을 밀었다. 점점 벌어지는 문틈으로 밝은 불빛이 새어 들었다. 눈부신 빛에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회랑으로 들어선 순간.
[……그러더군. 66군단은 내일 도착한다고.]
유독 째진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렸다.
[거기 군단장은 아직도 공석인가?]
[군주께서 새로이 임명하셔야 하는데, 영 마땅한 인물이 없나 봐.]
[하긴 소제 가네트뤼포만 한 악마가 또 어디 있겠어. 참극성이 세워지고 나서야 겨우 군주께 복속한 군단이잖아, 거긴. 원래부터 소제 가네트뤼포에게 충성스럽기로 유난인데, 다른 악마를 군단장으로 모시기가 쉽겠어?]
디아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회랑에는 열 명 남짓한 악마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게 소제 가네트뤼포는 왜 군주의 심기를 거슬러선……. 잠깐, 저기 문이 원래 열려 있었나?]
별안간 여우 머리 악마가 이편을 돌아보았다. 다른 악마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말을 보탰다.
[저긴 위층으로 이어지는 문이잖아.]
[시종이 깜빡 잊고 열어 뒀나 보지.]
[여기로 시종이 들어왔었나?]
한가로운 대화가 이어지는 도중에, 여우 악마가 문가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디아나는 숨 막히는 긴장으로 굳어 버린 몸을 겨우 움직였다. 아주 찰나로 곁을 스쳐 지나간 악마가 단숨에 문을 닫았다. 간신히 비켜섰던 디아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젠 돌아갈 수 없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소제 가네트뤼포가 군주에게 회한의 숲에 대해 직언했다던데. 무의미한 사냥은 그만하라고.]
[뭐? 그딴 멍청한 소리가 어디 있어?]
[멍청한 소리라니, 그럼 너도 회한의 숲에 숨은 연놈들을 멸종시켜야 마음이 놓이겠어?]
[당연하지! 벌레만도 못한 놈들이 코앞에 숨어 있는 꼴을 어떻게 두고 봐!]
[그래 봤자 거기 숨은 요정들은 너무 조그매서 육신으로 취하지도 않잖아.]
[지금 그 잡것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말이냐?]
악어 머리 악마가 위협하듯 그르렁댔다. 그러나 늑대 악마도 만만치 않았다.
[자비를 베풀라는 게 아니라 무의미한 짓은 그만하라는 소리다. 그리 회한의 숲을 짓밟으면 다음은 어딜 향할 거지? 그다음은? 그렇게 깡그리 멸족시키면 다음에는 군단끼리 전쟁인가?]
[그래, 차라리 내전이라도 벌어지면 좋겠어! 그럼 너처럼 약한 소리 하는 놈들은 무참히 밟아 버릴 텐데!]
[뭐라고?]
어쩐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디아나는 악마들을 계속 주시하는 한편, 벽에 달라붙어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저들은 저렇게 싸우게 두고 조용히 회랑만 빠져나가면 되었다. 맨발이라 발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적당히 해. 그러다가 들키면 이번에는 국물도 없어.]
[국물도 없는 건 저 자식이지! 감히 군주를 능멸한 죄로 군단장 직위를 빼앗긴 소제 가네트뤼포에게 동조하다니, 군주께서 아시거든 대경하실 거다!]
[하여간 48군단 놈들은 다 똑같아. 미련스러워서 도무지 말을 섞을 수가 없군.]
[저 새끼가 진짜!]
악어 머리 악마가 느닷없이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시큰둥하게 말리던 이들은 도리어 몸싸움을 반겼다. 마치 경기를 관전하는 것처럼 바닥을 세게 구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무슨 일이야?]
난데없는 소란에 다른 악마들도 속속들이 몰려들었다. 싸움이 벌어졌다는 말이 물밀듯 번지며 복도에서 뛰어드는 이도 있었다. 한산하던 회랑은 금세 난장판이 되었다. 오직 벽에 달라붙은 디아나만이 아연한 표정으로 몰려드는 악마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어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실피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복도로 이어지는 문을 손짓했다. 활짝 열린 문. 저기만 통과하면 거의 탈출한 셈이었다.
디아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으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두렵고 무서워도 견뎌야 했다.
그리 디아나가 벽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채로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는 동안, 싸움은 점점 규모를 키워 갔다. 그저 심심하다는 이유로 참전한 이들만도 여럿이었다. 게다가 구경하다가 우연히 맞아 분노한 이들도 여럿, 멀찍이서 관전하다가 서로 시비가 붙어 새로운 싸움을 시작한 이들도 여럿, 심지어는 싸움을 말리다가 휘말린 이들도 여럿이었다. 더는 악마 두 명의 싸움이 아니었다. 여지없는 난전이었다.
사방에서 욕설과 비명이 낭자했다. 광적으로 웃어 대며 주먹질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디아나는 정신없이 내달렸다. 맞아서 나가떨어진 악마들이 곁을 스칠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올라왔다.
그때.
[이 드루카의 핫바지가!]
눈앞에서 피가 튀었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온몸을 덮친 핏물이 금방이라도 화상 입을 듯 뜨거웠다. 속눈썹마다 핏물이 엉겨 붙어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했고, 파르르 숨을 들이쉴 때마다 뼛속으로 역겨운 피 냄새가 스몄다. 마치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디아나는 끈적거리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속눈썹에 엉킨 핏물 사이로 붉디붉은 세상이 보였다. 시야를 가로막은 거대한 곰의 육신이 새빨간 핏물로 젖어 들고 있었다. 깔끔하게 목이 베인 상흔에선 아직도 피가 솟구쳤다. 디아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래지 않아 목 없는 시체가 눈앞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저, 저게 대체…….]
흉측한 곡도로 동족을 베어 넘긴 악마가 부들거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내내 광소를 터트리던 이가 처음으로 소스라쳤다.
디아나는 황망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족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던 이들이 이편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수십 명의 표정이 전부 같았다. 눈앞의 악마가 그러하듯 일제히 경악을 금치 못하는 얼굴이었다.
어느덧 사위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목이 베인 시체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핏물이 계속해서 번져 갔다. 디아나는 맨발이 젖는 것을 느꼈다. 턱 끝에서 핏방울이 점점이 뭉쳐 떨어지는 감각이 끔찍하리만치 선명했다.
돌연 디아나가 바닥을 박찼다. 악마들이 대경하여 몸을 틀었다. 디아나는 그 틈으로 마구 내달렸다. 새하얀 돌바닥에 붉은 발자국이 꽃잎처럼 내려앉았다. 자국은 복도로 향했다.
어느 악마가 외쳤다.
[침입자! 침입자다!]
그러자 다른 악마들도 한둘 소리를 보태기 시작했다. 수많은 목소리가 섞여 기괴한 불협화음을 자아냈다. 그들은 여전히 소스라친 채로 붉은 발자국을 따라 달려 나갔다. 드넓은 회랑에 우르르 둔탁한 발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경보를 알리는 북소리가 빠르게 뒤따랐다. 자격이 못 되어 성내에 들어오지 못했던 졸병도, 저층에서 군주의 명을 기다리던 군관도 게걸스럽게 회랑으로 몰려들었다. 복도에서 들이닥친 악마들이 해일처럼 눈앞을 메우고, 천장에서 기둥을 타고 내려온 악마들이 샛길을 막았다. 사방으로 열린 문마다 가지각색의 악마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회랑 전체가 마치 개미 떼처럼 오글거렸다.
숨이 턱에 받치도록 달리던 디아나도 그예 멈추었다. 등을 떠밀듯 닥치던 북소리는 어느새 완전히 멎었다. 사방이 악마 떼로 가득했다. 핏물 맞은 허공을 두려워하면서도 틈을 노려 살점을 뜯으려는 이들이 주변을 둥글게 에워쌌다.
그때, 멀리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우성은 점차 가까워졌다. 두려워 피하는 역병처럼, 혹은 우러러 모시는 군신처럼 황급히 길을 비켜섰다. 살육으로 생을 증명하는 이들이 외경하며 탄식하며 숭배하며 목을 조아렸다. 그들을 짓밟아 왕위에 오른 단 하나의 지배자를 증명이라도 하듯 온몸을 내던졌다.
마치 숨통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디아나.]
경쾌하고도 거만한 걸음걸이가 어느새 그쳤다. 마르고트는 몹시도 한가로운 작태로 핏물 흐르는 허공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지나간 곳마다 붉은 핏물이 얼룩졌다. 섬약한 보물을 매만지듯 제법 다정한 손길이었으나.
[아주 깜찍한 장난을 쳤더구나.]
목소리에는 채 숨기지 못한 노기가 차올랐다. 마르고트는 싸늘한 눈으로 아래를 굽어보았다.
[내가 어찌해야 모습을 보이겠느냐?]
핏물만 뚝뚝 떨어지던 허공이 차츰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악마들은 숨죽인 채로 집중했다. 시야를 가리던 마법이 거둬지며 이윽고 디아나가 엉망진창으로 드러났다. 여기저기 할퀸 상처로 가득했지만, 온통 피를 뒤집어쓴 와중에도 마르고트를 죽일 듯이 쏘아보는 눈만은 여전했다.
그러나 손끝으로 전해지는 떨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마르고트는 그녀의 공포가 무척이나 흡족했다.
[착하구나.]
산양이 징그럽게 웃었다.
디아나는 대전으로 끌려갔다. 악마 호위들이 마르고트의 명을 받들어 정중하게 모셨지만, 사실상 연행이나 다름없었다. 대전으로 향하는 내내 호기심과 탐욕으로 뒤섞인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디아나는 굳어 가는 핏물을 털어 내며 애써 꼿꼿하게 걸었으나, 군데군데 찢어진 옷자락과 피 묻은 맨발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대전은 실로 엄숙했다. 잉그람의 로엔그렌 궁전처럼 미려하진 않아도, 드높은 천장을 수많은 촛불로 장식하여 장엄한 분위기가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높은 단에 자리한 황금 옥좌가 그러했다. 저 옥좌가 주인을 찾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는지 동방의 악마치고 모르는 자가 없었으므로, 악마들은 대전에 들어서자마자 겸손히 고개 숙이며 옥좌와 그 주인에게 충정을 표했다. 그것이 바로 악마들이 내보이는 최선의 순종이었다.
마르고트는 느긋이 옥좌에 앉았다. 그는 손잡이에 팔을 걸친 사뭇 방만한 자세로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구석에서 대기하던 악마들이 뿔 달린 사자 머리 악마를 질질 끌고 나왔다. 사자 머리 악마, 소제 가네트뤼포는 강제적인 손길에 여전히 반항했다.
[아둔하고 아둔하도다. 소제 가네트뤼포여.]
마르고트는 오만하게 아래를 굽어보았다.
[반년 전 감히 나를 모욕했음에도, 내 너를 아끼어 목숨을 거두지 않고 호위 삼아 네 명예를 지켜 주었다. 한데도 오늘 이렇게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어린아이 하나 지키는 일이 무어 그리도 어렵더냐? 한때 지옥귀라 불리며 최고의 군단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과거도 이제는 옛일이 되었구나.]
곳곳에서 비웃는 소리가 빗발쳤다. 마르고트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소를 머금은 채로 언젠가 대적자였으며, 한때는 용맹한 장군이었던 자를 야유할 뿐이었다.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주겠다. 잘못을 고하면, 잘못을 사하겠노라. 어디 한번 뚫린 입으로 맘껏 떠들어 보아라.]
소제 가네트뤼포는 피 섞인 가래침을 뱉어 내며 흘끗 옥좌를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마르고트 솔에게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았다.
[내 군대를 돌려주시오.]
[너에겐 군대가 없다.]
[군주는 내게서 군단장의 이름을 앗아 갔으나, 내게는 아직도 충성하는 군대가 남았소.]
무릇 악마란 무조건적인 강함에 복종했다. 마르고트는 열하나의 군주와 예순여섯의 군단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짓밟았으나, 그럼에도 마지막 군단은 여전히 옛 군단장에게 충성했다. 소제 가네트뤼포가 마르고트의 심기를 그르쳐 한낱 호위로 강등된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마르고트는 그것이 탐탁잖으면서도 동시에 만족스러웠다. 그 역시 악마로서 강한 동족을 반겼다.
[만일 네게 군대를 돌려준다면 무얼 하겠느냐?]
[지상의 사람을 죽이겠소.]
소제 가네트뤼포는 형형한 눈으로 디아나를 쏘아보았다. 마르고트가 의문을 표했다.
[디아나를 어찌? 저 아이에게 속아 혼절한 것이 그리도 수치스러운가?]
[내 명예 따위 이젠 하잘것없소. 한낱 호위가 그만한 명예를 가지기도 우스운 일이 아니겠소?]
[한낱 호위가 참으로 방자하구나.]
[내 이런 줄 모르고 거두시었소?]
일순 악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다만 지상의 사람은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소이다. 저런 힘은 듣도 보도 못했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니, 만일 저이가 흑심을 품으면 돌이키지 못할 것이외다.]
[일리 있는 말이군.]
마르고트는 턱을 쓰다듬으며 옥좌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단을 내려오는 걸음이 못내 한가로웠다.
[하지만 너에게 명한 것은 디아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라는 것이지, 멋대로 판단하여 디아나를 해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호위는 그저 주군의 명을 받들면 그만이지. 그렇기에 네가 참으로 방자하다는 것이다.]
마르고트는 어느덧 소제 가네트뤼포 앞에 섰다. 소제 가네트뤼포는 강제로 무릎 꿇은 자세로 꿋꿋하게 고개를 쳐들어 그를 마주했다. 마르고트가 피식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 이리 가까이 오거라.]
미동하지 않는 디아나를 악마가 떠밀었다. 디아나는 엉거주춤 마르고트에게로 다가갔다. 군데군데 핏물로 얼룩진 얼굴이 몹시 창백했다.
마르고트는 양팔로 그녀의 여린 어깨를 감싸며 몸소 허리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디아나가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물렸다. 가없이 흔들리는 시야에 부드럽게 웃는 산양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디아나. 나는 지금부터 널 안전히 지키지 못한 호위를 벌할 것이다. 하지만 네게도 기회를 줘야지. 감히 너를 죽이겠다는 버러지가 여기 있다. 어때, 네 손으로 직접 벌하겠느냐?]
마르고트는 그리 말하며 슬그머니 예리한 단검을 내밀었다. 직접 벌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투였다. 하지만 디아나는 검에는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마르고트만을 직시할 뿐이었다.
“……미쳤구나.”
끔찍한 정적 속, 디아나가 파들거리며 속삭였다.
“넌 정말 미쳤어.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네 뜻을 당최 모르겠구나. 무엇이 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날 죽이려는 건 너잖아!”
디아나가 진저리 치듯 마르고트를 힘껏 밀어 냈다. 하지만 마르고트는 바위처럼 굳건했다. 디아나는 이를 앙다물며 거세게 마법을 부렸다. 순식간에 뒤로 밀쳐진 마르고트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네가 지금 날 죽이려고 들잖아! 그런데 뭐? 내 손으로 직접 벌하겠냐고? 그럼 너는? 날 죽이려는 너는!”
[나는 너를 덧없이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모두 그리젤다를 위한 희생일 뿐이야. 나의 순수한 마음을 어찌 그리도 곡해하느냐?]
마르고트가 몹시도 억울한 기색으로 항변했다. 그러나 디아나는 더욱 아연했다. 희생. 그는 디아나의 죽음을 희생이라 불렀다.
“내가 왜……? 대체, 내가 왜 희생해야 하는데?”
디아나는 죽어서 간다는 낙원을 믿지 않았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완전한 종말이기에 두렵고 허무했다. 아직 삶에 미련이 덕지덕지 남은 디아나는 오래오래 살아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이제야 겨우 함께하는 언니와, 이제야 겨우 가까워진 세드릭과, 이제야 겨우 만난 사람들과 오래도록 어울리고 싶었다. 그들과 수많은 이야기를 이어 가고 싶었다.
그래서 희생이란 어불성설이었다. 자고로 희생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그저 개죽음이었다. 본인에게 아무런 가치 없는 존재에게 전부를 내어놓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젤다는 네 어머니이지 않으냐.]
“날 사랑하지도 않은 어머니야.”
[하지만 널 낳아 주었지.]
“그래서 사랑하지도 않는 어머니에게 내 목숨을 바치라고?”
디아나가 눈물 고인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마르고트는 천천히 다가와 디아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릴 적 고독에 몸서리치는 디아나를 달래던 것처럼 숫양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리젤다가 다시 너를 낳아 줄 것이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디아나는 소스라치듯 뒤로 물러섰다. 흡사 백지장처럼 허옇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머니가 다시 낳는다고 그게 나야? 웃기지 마, 나는 지금의 나밖에 없어.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
[디아나. 그러지 말고 내 말을 좀 들어 보아라.]
“헛소리 작작해!”
디아나가 다시금 뻗어 오는 마르고트의 팔을 매섭게 뿌리쳤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제발! 네가 이런다고 내가 기꺼이 제물이 될 것 같아? 스스럼없이 내 목숨을 바칠 것 같냐고! 싫다고, 이렇게는 못 죽는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누군가에겐 삶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타인의 삶이 한낱 도구로 전락했다. 디아나는 그것이 비참했다. 그녀의 숨통을 쥐고 뒤흔드는 이들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난 죽어도 이렇게는 안 죽을 거야. 설령 네 손에 이끌려 제단으로 향한대도 그렇게 덧없이 가지는 않아. 차라리 혀 깨물고 죽고 말지!”
디아나가 눈물 흩뿌리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넌 절대로 소원을 이루지 못할 거야! 내가 죽어서도 방해할 거니까! 내가 죽어도 어머니는 되살아나지 않을 테니까!”
[그만.]
소름 끼치게 낮은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가만히 발끝만 내려다보던 마르고트가 일렁이는 불빛 아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역광 드리워진 산양의 얼굴이 엄숙하게 가라앉았다.
[그간 보지 못한 새에 버릇이 없어졌구나.]
마르고트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머다랗던 거리가 대번에 좁혀 들었다. 악마의 짙은 그림자가 디아나의 몸뚱어리를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나쁜 아이에겐 합당한 벌을 내려야겠지.]
마법으로 참극성을 벗어나려던 디아나는 마르고트의 말 한마디로 좌초되었다.
[회랑에서 피를 맞고 날아가는 무언가를 목격한 이가 많더구나.]
디아나가 흠칫했다. 마르고트는 집요하게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지하의 동방에서 날개를 단 종족이란 요정이 유일하지. 머잖아 회한의 숲을 몸소 토벌할 예정이었는데, 이참에 다시는 회생하지 못하도록 짓밟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마치 조롱하는 것처럼 말끝마다 웃음기가 번졌다. 디아나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눈앞이 시뻘겠다.
“네가 저주스러워.”
[안타깝구나.]
“한때나마 너를 믿었던 내가 어리석었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너란 존재를 만든 어머니가 가장 원망스러워.”
디아나는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어머니는 어째서 너를 만드신 걸까? 왜 하필이면 너처럼 사악한 악마를 만드신 거지?”
[글쎄. 나 같은 미물이 어찌 그리젤다의 원대한 뜻을 헤아리겠느냐. 다만 훗날에 물어볼 기회가 있겠지.]
마르고트가 히죽 웃으며 디아나의 팔뚝을 쥐었다. 디아나는 절망에 얼룩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나쁜 자식…….”
마음이 동요하면 자연히 마력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정처 없이 나부끼는 마력에 이끌려 대전에도 써늘한 바람이 맴돌았다. 칼날처럼 에는 삭풍이 천장의 수백 촛불을 단숨에 꺼트렸다. 대전은 삽시에 시커먼 어둠으로 휩싸였다.
마르고트는 디아나를 지하로 끌고 내려갔다. 별빛 닿지 못하는 암암한 세상에서 태어난 악마들은 빛보다 어둠이 친숙했다. 한 치 앞도 가릴 수 없는 암흑 속을 거침없이 나아가는 악마들 틈바구니에서 디아나는 이리저리 채였다. 돌바닥에 짓이겨지고 짓눌린 맨발에서 핏기가 배어 나왔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육중한 석문 앞에 다다랐다. 마르고트의 손짓으로 여러 악마들이 힘겹게 문을 열어젖혔다. 내부는 눈앞이 암담할 정도로 캄캄했다. 금방이라도 무서운 괴물이 튀어나올 듯 미지의 어둠이 똬리 튼 공간이었다.
마르고트는 미련 없이 그 속으로 디아나를 내팽개쳤다. 부지불식간에 어둠에 먹힌 디아나가 정신없이 사지로 기었다. 유일하게 빛이 들이치는 출구로.
하지만 이미 석문은 닫히고 있었고, 빠르게 좁아지는 문틈으로 마르고트의 웃는 낯만이 또렷하게 비쳤다.
[열흘 뒤에 보자꾸나.]
이윽고 문이 닫혔다.
사방이 캄캄했다. 멍하니 어둠 속을 바라보던 디아나가 느리게 양손을 들었다. 손끝으로 석문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단단했다. 디아나는 이제 주먹으로 천천히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열어 줘…….”
처음에는 노크하듯 조심스레 두들기는 손짓이었다. 하지만 문밖은 내리 고요했다. 아무도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조급해진 디아나가 주먹에 힘을 더했다. 점점 손뼈가 조각날 정도로 거세졌다.
“열어 달라고! 열어 줘! 내 말 안 들려? 당장 열어!”
목이 찢길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디아나는 손톱을 깨물며 불안스럽게 주변을 흘깃거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여기서 열흘을 버티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나 매한가지였다. 기실 열흘을 버텨 봤자, 어차피 제단으로 끌려갈 운명이었다. 버티든 버티지 못하든 결국엔 죽음으로 이어졌다. 디아나의 목숨에만 관심 있는 마르고트는 그녀가 공포에 미쳐 버려도 전혀 개의치 않을 터였다.
디아나는 흐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옹송그렸으나, 여전히 무서웠다.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 무섭고, 여기서 견뎌야 하는 열흘이 무서웠다. 견디지 못해 미쳐 버릴 미래가 무서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난한 열흘이 지나 닥쳐올 죽음이 무서웠다. 디아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도사린지도 모르는 어둠이 미친 듯이 무서우면서도, 차마 자진할 용기는 없었다. 마르고트도 그걸 알아 독방에 감금시킨 것이었다.
“아, 아냐. 마법이면 문을 열 수 있을 거야.”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디아나가 더듬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 생각을 미처 못 했을까. 지하에서 그녀는 누구 못지않은 마녀였다. 온몸에 별의 축복이 흐르고 마력이 넘쳐 났다. 악마 여럿이 달라붙어 겨우 여는 문도 마법이면 쉬이 열릴 터였다.
하지만 문을 열면? 그다음에는?
마르고트는 실피의 존재를 알았다. 그래서 회한의 숲을 운운하며 겁박한 것이다. 그녀가 이곳에 얌전히 갇혀 있지 않으면, 필시 실피를 비롯한 요정들을 전부 도륙할 심산이었다. 평소에도 심심찮게 회한의 숲에서 사냥을 일삼던 악마 군단이 본격적으로 요정을 멸족할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할 목숨을 무자비하게 거두면서도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터. 결국에 그 죄책감은 전부 디아나의 몫이었다.
내가 죽였다. 나 혼자 살아남겠다고 그들을 저버렸다. 일평생 그런 죄악감에 시달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생각이 싹텄다. 어차피 실피를 제하면 얼굴도 모르는 타인. 지금 그녀가 달아나지 않더라도 마르고트는 언젠가 회한의 숲을 짓밟을 것이다. 그는 동족의 목숨이 가볍듯, 이종족의 목숨은 깃털보다 가볍게 여겼다. 애당초 악마들은 살육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자들이었다. 시기의 문제일 뿐, 숲의 비극적인 운명이 온전한 그녀의 탓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니 문을 열고 나가자. 눈앞을 막는 이가 있거든 전부 쓸어버리자.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고, 충분히 분노할 이유가 있었다.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본능이었다. 모두가 추구하는 일생의 목표였다. 억압에 순응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충분할까. 정녕 다른 길은 없는 걸까. 정말로 외길인가.
디아나는 양손으로 눈을 덮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행여나 고난을 피하려는 이기적인 마음이 눈앞을 가려 다른 길을 미처 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그저 하루빨리 언니와 세드릭을 만나고픈 마음에, 그저 하루빨리 안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에 쉬운 길만 주시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새삼 다른 길이 있었음을 깨닫는다면 평생토록 죄악감에 몸서리칠 것이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약했다. 악마처럼 나를 위해 거리낌 없이 나머지를 희생할 수가 없었다.
악마의 희생양으로 잡혀 왔다. 그래서 마르고트를 욕하고 악마를 비난했다. 그렇기에 차마 그들처럼 될 수는 없었다.
디아나는 헤스터를 떠올렸다. 세드릭을 떠올렸다. 그녀를 아껴 여기까지 내려온 이들을 떠올렸다. 만일 여기서 악마들이 들끓는 지옥으로 추락한다면, 그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무사히 살아 돌아간들 그녀의 영혼은 이미 그들이 그토록 구하길 바랐던 순수를 잃어버렸을 테다. 적어도 그들에게 고민 없이 타락한 영혼을 내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함부로 쉬운 길을 택하지 않겠다. 가시덤불로 가득한 고난의 길이어도, 그것이 옳다면 그 길을 걷겠다.
디아나는 눈물로 젖은 뺨을 깨끗이 닦아 냈다. 양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 섰다. 암흑을 똑바로 쏘아보는 눈빛이 비로소 올곧았다.
그녀를 위하는 헤스터와 세드릭의 진심을 믿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들의 마법을 믿었다. 올곧게 살고픈 스스로의 신념을 믿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축복을 내려 준 암흑의 별 칼리스토의 사랑을 믿었다.
그러니 기적이 이루어지리라.
디아나는 허공에 불을 지폈다. 불꽃이 타오르며 단숨에 어둠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