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명은 지고
요물 고양이 데이지는 어디서든 창문을 열며 하루를 시작했다.
주인인 바바라 자일스가 아담한 저택을 선호하기에 그녀를 따라 잉그람을 전전할 때는 하루 이삼십 분이면 모든 창문을 열 수 있었으나, 엑서터의 본성에선 꿈도 못 꾸는 일이었다. 동서남북으로 자그마치 30층짜리 탑이 세워진 자일스 본성은 천년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일족이 전부 모여 살았다는 기록이 남았을 만큼 거대했다. 가히 로엔그렌 궁전에 비할 만한 크기이니, 고양이 혼자서 모든 창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데이지는 본성에서도 꿋꿋하게 창문을 열어 왔다. 물론 손님이 자주 드나드는 아래층과 바바라가 머무는 3층, 그리고 데이지를 비롯한 시종들이 머무는 별채에 한해서였다. 데이지의 노고로 본성의 저층은 늘 산뜻하게 하루를 시작했으나, 단지 하룻밤 묵힌 공기를 환기시키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데이지는 새벽녘 창문을 열었을 때 물씬 풍겨 오는 신선한 공기와, 동트기 직전 서늘한 어둠에 감겨 있는 윈우드 숲의 풍광을 좋아했다. 다리아의 후손을 제외한 나머지 용은 200년 전 모두 사라졌고, 다른 이종족도 인간 왕국의 핍박을 못 견뎌 점차 자취를 감추었으니 이제 세상에 남은 신비란 마법이 전부였으나, 새벽녘 엑서터의 정경은 이제는 잊힌 신화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악룡이 험산을 지배하고, 심술궂은 거인이 툭하면 산사태를 일으키며, 깊은 숲 속에서 요정이 노래하던 시절. 마법이 신처럼 군림하던 고대의 기억을 엑서터는 애틋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착실한 요물 고양이 데이지는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나 바지런히 창문을 열던 참이었다. 아침을 준비해야 하는 요리사조차 아직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 쥐 죽은 듯이 고요한 복도는 고양이의 총총거리는 발소리만 잠시 울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데이지가 지나가는 곳마다 창문이 열리며, 서늘한 새벽 공기가 물밀듯 들어왔다.
근래 본성은 침중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가문의 수장이자, 엑서터의 성주인 바바라 자일스가 앓아누웠기 때문인데, 상당히 호전되었던 병세가 최근 급작스레 악화되어 시종들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바라를 오래도록 보필해 온 데이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맛난 요리를 먹고 어여쁜 꽃을 보아도 금세 걱정이 밀려오니, 요 며칠 데이지의 낯빛이 좋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데이지는 차츰 걸음을 줄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강한 마법으로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법. 위대한 마녀 그리젤다 솔조차 끝내 요절을 면치 못했던 것처럼, 엑서터의 성주도 그다지 길지 않은 생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진찰한 의사가 친지를 불러들이라 조용히 일렀던 것이 불과 어제. 이제는 주인이 가족의 품에서 편안히 눈감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시종의 마지막 소임인지도 몰랐다.
어느덧 동틀 무렵이다. 부옇게 밝아 오는 새벽빛이 창문 틈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내밀며 고양이의 그림자를 희롱했다. 복잡한 눈으로 윈우드 숲을 내다보던 데이지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이만 돌아가서 바바라가 좋아하는 차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다듬는 때였다.
쿵.
시무룩하게 처져 있던 데이지의 꼬리가 바짝 하늘로 치솟았다. 무슨 소린지 가늠하기도 전에 연이어 괴성이 들이닥쳤다.
쿵쿵.
데이지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쿵쾅대는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둑? 강도? 혹 포사티아가 어제 성문을 잠그는 걸 깜빡 잊은 걸까? 그 전에 이렇게나 대놓고 자일스 본성에 침입할 만큼 아둔한 천치가 있던가?
온갖 잡생각이 휘몰아쳤다. 간신히 공황에서 벗어난 데이지가 느리게 뒷걸음질했다. 일단, 일단은 경비를 불러와야겠다. 조잡한 마법이나 부릴 줄 아는 요물 고양이는 결단코 마법사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데이지가 채 달아나기도 전, 멀찍이 층계참에 흉측한 인영이 나타났다. 마치 옛이야기 속 설인처럼 시퍼런 곱슬머리와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사내였다. 어지간히도 야위었는지, 펑퍼짐한 옷 사이로 비쩍 마른 뼈마디가 불거진 모습이 못내 섬뜩했다.
한참 멍하니 복도를 굽어보던 사내가 비척거리며 이편으로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장대처럼 기다란 몸이 위태로이 흔들거렸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침입자를 직면하여 어쩔 줄 몰라 하던 데이지는 도망치려던 생각을 고치고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복도 끄트머리에는 환후가 중한 바바라 자일스의 침실이 있었다. 여기서 데이지가 도망치거든 아무도 바바라를 지킬 사람이 없었다.
어느덧 지척으로 다가온 사내가 느릿하게 허리를 굽혔다. 데이지는 부러 눈에 힘을 주어 코앞으로 닥친 사내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다, 다, 당신 대체 누구예요? 뭘 원하는 겁니까?”
대중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참으로 볼품없었다. 데이지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재차 입을 열려던 찰나, 갑자기 콧등으로 미지근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데이지는 저도 모르게 앞발로 젖은 콧등을 매만지다 쏜살같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을 반쯤 가린 시퍼런 산발 사이로 물기 어린 녹안이 언뜻언뜻 비쳤다. 어쩐지 낯익은 눈매였다.
데이지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설마…….”
“설리번!”
별안간 기다려 마지않던 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데이지가 반색하며 고개를 쭉 뺐다.
“도련님!”
“설리번, 혼자서 그렇게 먼저 가 버리면 어떡……. 데이지?”
급히 달려오던 세드릭이 데이지를 발견하곤 발걸음을 멈추었다. 데이지가 감격하여 황급히 달려갔다.
“도련님! 대체 어디 계셨던 건가요? 파펜하임산에서부터 행방이 묘연해지셔서 이 데이지가 어찌나 노심초사했는데요!”
“사정이 있어서. 미리 알리지 못해서 미안해.”
“아휴, 그럼요. 당연히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도련님께서 어디 다른 분들처럼 책임감이 없으신 것도 아니고. 어떻게 연락을 받고 오셨으니 그걸로 족합니다.”
데이지는 앞발로 눈물을 찍어 내며 안도했다. 한결 마음이 놓이자, 세드릭의 뒤에 쭈뼛거리며 선 디아나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에구머니나, 진저도 왔네?”
“으응. 오랜만이야, 데이지.”
디아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데이지도 얼떨결에 화답했다.
“네가 독립한 지 반년 만인가? 이렇게 보니 반갑다. 때가 때이니만큼 환영식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와 주어서 고마워. 주인님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거야.”
돌연 등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설인처럼 시퍼런 사내가 줄줄 흐르는 눈물을 팔등으로 훔치며 울고 있었다.
데이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세드릭의 다리에 찰싹 붙었다.
“도련님, 저분 말이에요.”
“설리번이야.”
세드릭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형제가 어린애처럼 흐느끼는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던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선 좀 어때?”
“위독하다는 편지는 보셨지요? 말 그대로 좋은 상황은 아니에요.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던 걸 보면.”
설리번이 우는 소리가 차츰 커져 갔다. 혹여 바바라가 깰까 봐 발소리조차 죽이며 걷던 데이지도 차마 그를 말리지는 못했다. 썰렁한 복도 가득 청승맞은 울음이 번져 갔다.
그때, 복도 끄트머리에 자리한 바바라의 침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뒤이어 나온 사람은 아무래도 어수룩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데이지.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시끄러워?”
그는 벌겋게 부어오른 눈을 비비적대다가 처량하게 울고 있는 설리번을 발견했다. 곧이어 냉엄한 판관처럼 차분한 세드릭과 눈이 마주침에 불쌍한 청년은 바짝 얼어붙고 말았다.
해리 듀어든. 바바라가 총애하는 어린 애인이었다.
“저, 도련님. 따뜻한 차라도 드릴까요?”
삭막한 응접실. 이리저리 상황을 재던 데이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행히 세드릭은 무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디아나, 너도 뭐 마실래?”
“나도 그냥 똑같은 걸로 줘.”
“그리고 설리번은…….”
설리번은 방구석에서 아직도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듯 멍한 표정에 세드릭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리번은 따뜻한 우유라도 갖다 줘. 저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데이지는 얼른 방을 빠져나갔다. 솜씨 좋게 침묵을 깨트리던 요물 고양이도 사라지니, 이제 응접실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감돌았다. 디아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탁자에 둘러앉은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세드릭은 깊게 골몰한 듯 조용했고, 해리 듀어든은 맞은편의 세드릭을 살피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참으로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말없이 입술만 매만지던 세드릭이 곧 손을 내려 팔걸이를 규칙적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초조하게 앉아 있던 해리 듀어든이 흠칫 놀랐다. 지켜보는 사람이 철렁할 만큼 소스라친 몸짓이었다.
무릇 강력한 마법사에겐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있기 마련이었다. 세드릭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는지 몰라도, 그의 불편한 심사는 자연스레 상대방의 숨통을 조르고 있었다. 얄팍한 가면으로 덧씌운 차분한 얼굴과 침착하기 그지없는 손짓, 그리고 무지근한 침묵. 겉으로만 본다면 평소의 세드릭 자일스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만일 마력에 색을 덧입힐 수 있다면 현재 세드릭의 마력은 칠흑같이 검으리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방금 나눈 대화가 속 뒤집어지는 내용이긴 했다. 디아나조차 너무도 어안이 벙벙해서 당장이라도 저이의 멱살을 잡고 싶었으니. 그러니 디아나가 뒤늦게나마 세드릭을 말린 것은 해리 듀어든이 안쓰러워서라기보단, 이곳에 환자를 더 늘리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세드릭.”
디아나의 부름에 세드릭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가만히 시선을 마주쳐 오는 모습에 디아나는 말없이 맞은편을 눈짓했다. 해리 듀어든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해쓱했다.
“……아. 미안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느라.”
세드릭이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해리 듀어든은 차마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수그렸다. 그의 갈색 더벅머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세드릭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밤에 창문을 닫는 것을 깜빡 잊었다고요.”
“그, 그게. 실은 바바라가 바깥 공기를 쐬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데 늦게까지 간호하다가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해리의 눈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전부 내 잘못입니다. 의사와 데이지가 교대해서 간호하겠다고 했는데도, 나 혼자서 충분하다고 객기를 부렸어요. 그때는 바바라도 병이 많이 호전되어서 정말로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바바라의 병은 한둘이 아니었다. 살라티에병의 가장 무서운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살라티에병으로 마력이 빠져나가고 노화가 촉진되는 몸은 으레 노인들이 그러하듯 온갖 병마에 노출되었다.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바바라 역시 서너 가지 합병증에 시달렸는데, 개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병은 결핵이었다. 피를 토할 정도로 증상이 심한 결핵 환자에게 늦가을 산중의 차디찬 밤공기는 독이나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니 겨우 나아가던 바바라의 건강을 퇴보시킨, 어쩌면 더 악화시켰을지도 모르는 해리 듀어든은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모자라고 어린 애인을 늘 부드럽게 감싸 주었던 바바라를 기쁘게 해 주지는 못할망정, 날카로운 비수를 꽂아 버린 셈이었으므로.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해리 듀어든이 눈물 흘리며 사죄했다. 복잡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던 디아나는 흘끗 세드릭을 보았다가 그만 혀를 깨물 뻔했다.
세드릭은 지극히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세드릭 자일스가 저토록 노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지옥에서 올라오는 냉기처럼 싸늘한 분노가 서서히 그를 달구고 있었다.
“저기, 세드릭…….”
“사과는 어머니께 직접 하십시오. 내가 들을 말은 아닌 듯합니다.”
세드릭은 냉정한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아나는 커다란 보폭으로 응접실을 가로지르는 그를 차마 붙잡지 못했다. 때마침 다기와 우유를 바리바리 들고 온 데이지가 자신을 쌩하니 비껴가는 세드릭을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도련님을 부르는 소리가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디아나는 휑하니 열린 문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듯 무겁기만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바바라 경은 이제 가망이 없습니다. 결핵도 문제지만, 심장 기능도 옛날 같지 않아요. 기적처럼 결핵이 호전된다면 한두 달은 버틸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무립니다.”
“마법으로도 불가합니까?”
“마법이든 인간의 의학 기술이든 바바라 경의 신체는 이미 손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살라티에병이에요. 에둘러 말해서 노화를 촉진하는 병이지, 실제로는 신체를 죽음으로 이끄는 병입니다. 원인도 치료 방법도 규명되지 않은 불치병에 걸리고도 무려 8년을 버티셨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에요.”
노화를 촉발하는 병. 하지만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점이 있다면, 노화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살라티에병을 달리 말하자면, 죽음을 앞당기는 병과 진배없었다.
“지금 의사로서 바바라 경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진통제뿐입니다. 적어도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느끼실 일은 없을 겁니다.”
의사가 위로하듯 말했으나, 안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리번은 이제 울 기운도 없는지 소파에 멍하니 파묻혔고, 세드릭은 말없이 서재에 틀어박혔다.
데이지를 비롯한 본성의 시종들은 애타는 마음에 발만 동동 굴렀다. 그나마 설리번은 가만히 앉아서 시종의 수발을 받았으니 망정이지, 세드릭은 서재의 문조차 열어 주지 않았다. 그가 염려스러운 것은 디아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차마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서재 앞을 마냥 서성거릴 뿐이었다.
사실상 성주의 죽음을 선고받은 엑서터의 본성은 참담하게 가라앉았다. 곁에 많은 사람을 두길 병적으로 싫어하는 바바라 자일스의 성정으로, 원래도 한산하던 복도에는 지나다니는 이들의 그림자조차 드물었다. 심지어는 전서구를 맞이하기 위해 열어 놓은 창문도 감감무소식이니, 윈우드 숲에 둘러싸인 고성이 외딴섬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스승님께서 저리도 위독하시면, 다른 친족들이 어서 와야 하지 않아? 세드릭이나 설리번은 충격이 커 보이고, 채스터티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며.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거든 수습할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
디아나가 데이지의 귀를 붙들고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의사의 말대로 바바라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 어쩌면 머잖아 장례를 치를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러나 바바라는 자일스 가문의 수장이었다. 이렇게 자식들의 품에서만 조촐히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어제 편지를 보냈으니 웬만해서는 다 소식을 들었을 텐데, 나타난 사람이 도련님들과 너뿐이라는 게 말이 되니? 이럴 때만이라도 재깍재깍 도착하면 얼마나 좋아!”
데이지가 왈칵 성을 냈다.
“망할 마녀, 망할 마법사! 내 이럴 줄 알았어. 편지 하나로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리가 없지.”
어제 부랴부랴 잉그람 각지의 모든 자일스 일족에게로 편지를 부쳤음에도 본성으로 들이치는 답장이 얼마 없었다. 그나마 받은 회답에는 ‘바바라가 얼마나 위독한가’ 혹은 ‘언제쯤 가야 임종을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질문뿐이었으므로, 이미 오래전 마녀‧마법사에 대한 기대를 상당히 내려놓은 데이지조차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안 되겠다. 편지를 다시 보내야겠어. 내가 도와줄게.”
결국 디아나가 직접 손을 걷어붙였다.
노동은 시간을 죽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깃펜 수십 개를 마법으로 동시에 놀리고, 편지를 넣은 전서구를 하늘로 날려 보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으나, 디아나는 그동안 심란한 마음을 어느 정도 다잡을 수 있었다. 10년을 부모 대신 돌보아 준 스승이 영영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직 제대로 실감나지 않기 때문일까. 혹은 의사의 말대로 기적처럼 스승의 병세가 호전될 수도 있기에 침착한지도 모르겠다.
디아나는 마지막 비둘기를 떠나보내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설리번은 물론이요, 매사 차분하던 세드릭까지 정상이 아니니 그녀만이라도 똑 부러지게 자리를 지켜야 했다. 병마와 외로이 투병하고 있을 스승을 생각해서라도 지금 무너지면 안 되었다.
그리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오늘은 별 탈 없이 조용하게 흘러갔다. 내내 바바라의 침실을 지키던 의사도 연거푸 한숨만 내쉴 뿐 별말은 없었고, 설리번도 더는 아이처럼 울지 않았다. 의사의 심부름으로 몇 차례 침실을 들락거렸던 시종 포사티아의 말로는 바바라의 상태는 딱히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러자 디아나는 이제 온종일 서재에만 틀어박힌 세드릭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서재는 지극히 고요했다. 분에 겨워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감정을 못 이겨 포악하게 마법을 부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어쩐지 서재에 감도는 서늘한 정적이 못내 신경 쓰였다. 저 안에서 홀로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행여나 예전의 그녀처럼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그것이 무척이나 두려웠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세드릭은 아침과 전혀 달리지지 않은 모습으로 서재를 나왔다.
“어머니 곁에는 내가 있을게.”
설리번은 지쳐 잠든 지 오래고, 당연하게도 해리 듀어든에겐 더 이상 간병을 맡길 수 없었다. 이제 간병이래 봤자 바바라의 상태를 조용히 지켜보는 것뿐이었기에, 디아나는 데이지를 따라 밤새 스승의 곁을 지킬 작정이었다. 굳이 간병만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하고 싶었다.
“너 많이 피곤해 보여. 오늘은 내가 할 테니까 가서 눈 좀 붙여 봐.”
가까이서 보니 세드릭의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서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서재에서 한가롭게 쉰 모양새는 아니었다. 혹여 저 상태로 간병하다가 일이라도 그르칠까 저어된 디아나가 거듭 그를 말렸지만 세드릭은 단호했다.
“괜찮아. 너야말로 좀 쉬어.”
세드릭은 그리 말하며 바바라의 침실로 들어갔다. 데이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눈을 찡긋거리며 그를 뒤따랐다. 소리 없이 닫히는 문을 가만히 지켜보던 디아나는 끝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세드릭은 해리 듀어든과 달리 야무진 성정이니 별다른 사고를 치진 않을 테지만, 죽어 가는 어머니 곁에서 마음 편할 리 없었다. 가늠할 수조차 없는 상실의 고통이 자꾸만 디아나를 뒤척이게 했다.
파리하다.
그것이 2주 만에 어머니와 재회한 세드릭의 첫 감상이었다.
데이지가 분주하게 차를 준비하는 사이, 세드릭은 시체처럼 잠든 어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굽어보았다. 2주 전에도 나이보다 늙어 보이던 어머니는 이제 초로의 여인처럼 노쇠했다. 병세가 호전되며 간신히 살이 차올랐던 뺨은 전보다도 푹 꺼졌고, 뼈가 도드라지는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심지어 머리는 백 세 노인처럼 하얗게 셌다.
고작 2주 만의 변화라기엔 지나치게 극적이었다. 침상에 앉은 채로 배웅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건만. 정신이 들지 않은 채스터티와, 아픈 어머니를 두고 차마 파펜하임산으로 떠나지 못해 머뭇거리던 그를 독려하던 어머니는 이제 어디도 없었다. 여러 병마와 싸우면서도 늘 의연하던 어머니는 이제 약에 의존해서 겨우 잠들 만큼 나약해졌다. 이토록 늙어 버린 어머니가 낯설었다. 낯설어서 더욱 서글펐다.
세드릭은 뱃속에서 울컥울컥 치솟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조심스레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마르다 못해 한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진 손마디는 그저 미지근했다. 그것이 마치 생명이 빠져나가는 전조 같아 못내 가슴이 저렸다. 세드릭은 어머니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드릴 수 있는 전부를 드리고 싶으나, 내어 드릴 것이 기껏해야 온기뿐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세드릭은 실로 놀랐다.
“어머니?”
금방까지 굳게 닫혀 있던 바바라의 눈이 크게 확장된 채 천장 어드메를 헤매고 있었다.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머니. 정신이 드세요?”
“에구머니나, 주인님!”
데이지는 찻주전자를 내팽개치고 침상으로 달려왔다. 세드릭과 데이지가 연이어 말을 걸어 보았지만, 바바라는 멍하니 눈만 홉뜰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데이지가 황급히 침실을 나섰다.
“의사, 의사를 불러올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주인님!”
이후로도 계속 어머니를 연호하던 세드릭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바바라는 눈만 떴지, 아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듯 몽롱하기만 했다.
갑자기 바바라가 격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세드릭은 얼른 그녀의 입가에 수건을 대자, 새하얗던 수건이 금세 핏물로 젖어 들었다.
“세드릭……?”
간신히 기침을 멈춘 바바라가 힘겹게 눈을 떴다. 세드릭이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침대 맡에 무릎 꿇었다.
“네, 어머니. 세드릭이에요.”
눈물을 억누르는 탓에 초라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다행스럽게도 시야가 흐려 아들의 애처로운 낯을 알아채지 못한 바바라가 가늘게 미소 지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꿈을 꾸었단다.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마지막에나마 앞날을 보는구나.”
“무슨 꿈을 꾸셨나요.”
문득 바바라의 야윈 손이 세드릭의 뺨에 닿았다. 그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가까스로 매달렸다.
“행복해 보이더구나.”
“…….”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하고, 널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했어. 아주 잘 장성했다.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바짝 경직되어 있던 세드릭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바바라는 발갛게 물든 아들의 눈가를 조심히 쓸며 말을 이었다.
“너는 항상 내가 주지 못하는 것을 바랐지. 나는 네가 늘 걱정스러웠단다. 네게 주고 싶어도, 내겐 남은 것이 없었어. 그래서 내가 아닌 다른 이를 통해서나마 네가 행복하길 바랐는데……. 드디어 내 마지막 원이 이루어졌구나.”
“어머니, 그게 대체 무슨…….”
세드릭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 말씀하시지 마세요. 그렇게 곧 떠나실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떠나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내 시간은 이미 다했어.”
“아녜요. 저는 아직 어머니의 품이 필요해요. 어머니 없이 어찌 제가 행복해질 수 있…….”
참다못한 세드릭이 고개를 깊게 수그렸다. 하얀 솜이불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갈기갈기 찢긴 마음처럼 애달픈 자국이었다.
“세드릭. 사랑하는 내 아들.”
바바라가 힘겹게 세드릭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서럽게 젖은 뺨에 죽어 가는 손이 겹쳐졌다.
“세상에 상실을 겪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그건 마법으로도 피할 수 없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진 마려무나. 넌 괜찮을 거야.”
“전 괜찮지 않아요. 괜찮지 않을 거예요.”
“괜찮아. 나는 알고 있단다.”
바바라는 고단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이미 지나간 기억을 더듬듯 확신에 찬 소리가 이어졌다.
“너는 행복할 거야. 내가 보았으니, 분명…….”
스승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디아나는 바람처럼 침실로 달려갔다. 정신없이 뛰다가 슬리퍼가 벗겨졌는지 아님 처음부터 슬리퍼를 깜빡하고 뛰쳐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침실에 당도하고 보니 맨발인 채였다. 하지만 디아나는 슬리퍼 생각일랑 조금도 하지 못했다. 바로 스승의 침실에서 벌어지는, 웃기지만 차마 웃을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디아나?”
문가에 멍하니 서 있는 디아나를 발견한 바바라가 반갑게 웃었다. 한참 숨을 몰아쉬던 디아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다가갔다.
“스승님…….”
“얼굴이 왜 그 모양이니. 너도 울려고?”
바바라가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에 긴장이 풀린 디아나는 평소 바바라 앞에서는 내숭을 부리던 것도 잊고 성질을 부리고 말았다.
“진짜, 스승님!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이런. 걱정하지 않았으면 서운할 뻔했구나.”
막 깨어난 바바라는 옛날처럼 생기가 넘쳤다. 요전번 문틈으로 잠든 모습을 슬쩍 엿보았을 때와는 천지 차이라, 디아나는 혹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서 스승의 병환이 호전된 것인지 헷갈렸다.
침실에는 디아나를 제하고도 세드릭과 설리번, 의사, 데이지가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훑던 바바라가 문득 의아한 기색으로 설리번을 가리켰다.
“한데 누구신가요?”
설리번이 삽시에 돌처럼 굳었다. 마치 혼자만 벼락 맞은 것처럼 소스라친 모습에 도리어 바바라가 당황했다.
“데이지. 여기 이분은 누구시니?”
바바라가 소리 죽여 데이지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설리번은 침상과 매우 가까워서 아무리 소리를 죽인들 듣지 못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 어머니가 어떻게 날…….”
창백하게 질려서 온몸을 부르르 떨던 설리번이 갑자기 침실을 뛰쳐나갔다. 누구도 말릴 새가 없었다. 어머니라는 호칭에 놀라 그에게로 팔을 내뻗던 바바라가 허공에 손을 멈춘 채로 망연히 중얼댔다.
“설리번?”
설리번이 다시 바바라의 침실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10분가량 지나서였다. 금방 벌어졌던 차마 웃지 못할 일을 되새기던 이들은 설리번의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 머리가…….”
디아나는 조금 전에 바바라가 그러했듯 멍하니 설리번을 가리켰다. 세드릭이 그리도 핀잔주었을 때는 꿈쩍도 안 했던 설리번이 머리와 수염을 깨끗하게 자른 채로 나타난 것이다. 급하게 잘라 엉망이긴 했지만, 적어도 얼굴이 훤히 보이기는 했다.
“어머니는?”
설리번이 훌쩍거리며 침대를 흘깃거렸다. 데이지는 심약한 첫째 도련님이 더는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상냥하게 대답했다.
“주인님께서는 방금 다시 잠드셨어요. 아휴, 그나저나 도련님 이렇게 뵈니 얼굴이 아주 훤하시네요! 진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
하지만 데이지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결국 바바라와 말 한마디 주고받지 못한 설리번이 구슬픈 울음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아이고, 도련님. 이렇게나 눈물이 헤프셔서야 어쩌려고 그러세요!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굳게, 윈터의 비늘처럼 굳게 다지셔야지요!”
데이지가 설리번을 토닥이며 옆방으로 이끌었다. 따뜻한 우유를 권하는 말에 울면서도 꼬박꼬박 대꾸하는 설리번이 안쓰럽기보단 어처구니없어서 디아나는 픽 웃고 말았다.
다시금 조용해진 침실에선 의사가 잠든 바바라를 마저 진찰하고 있었다. 의사의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디아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슬그머니 그의 곁에 앉았다.
“스승님은 좀 어떠세요?”
“그게…….”
의사가 흘끗 벽면에 등을 기대선 세드릭의 눈치를 보았다. 디아나는 불안한 예감을 지워 내며 의사를 재촉했다.
“왜 그러는데요. 아까는 괜찮아 보이시던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문제라기보다는 이대로라면 곧…….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의사는 애써 디아나를 외면했다. 잠시간 조용하던 디아나가 양손으로 의사의 어깨를 붙잡고 억지로 몸을 돌렸다. 잿빛 눈이 형형하게 타올랐다.
“이대로라면 곧 뭐요. 뭔지 제대로 말해 줘야 할 거 아녜요.”
“……이만 마음의 준비를.”
“그러니까 무슨 마음의 준비를 하냐고요! 의사란 사람이 제대로 설명도 못 한다는 게 말이나 돼요? 스승님께서 지금 정확히 어떤 상태신지, 많이 위독하시다면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야―”
별안간 디아나의 손등 위로 세드릭이 손을 겹쳤다. 디아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세드릭의 손가락이 손가락 사이를 점차 파고들어 손등 위로 깍지를 꼈다. 의사의 어깨를 꽉 부여잡던 손이 끝내 세드릭의 손길에 이끌려 허공으로 떨어졌다.
“그만해, 디아나.”
세드릭이 조용히 일렀다. 디아나는 비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세드릭에게 잡혀서 대롱대롱 매달린 오른손이 못내 애처로웠다.
“미안해요. 당신의 잘못이 아닌데.”
디아나는 파들파들 떨리는 눈을 감으며 사과했다. 의사는 침묵했다. 여태 그러했듯 그저 묵묵히 환자를 살필 따름이었다.
세드릭은 여전히 손을 붙잡은 채로 디아나를 복도로 데리고 나왔다.
“방으로 데려다줄게.”
그 말에 디아나는 고개 들어 세드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세드릭은 살펴보지도 못했다. 분명 아플 텐데, 설리번처럼 엉엉 울고 싶을 텐데 이상하게 차분한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지금의 심정을 가늠할 수조차 없어서 더욱 심란했다.
그때, 디아나의 왼손이 세드릭의 눈가에 닿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눈가가 살짝 붉었다. 놀란 듯이 얼굴을 굳히는 세드릭을 올려다보며 디아나가 복잡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울었어?”
세드릭은 말없이 디아나의 왼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오른손을 꼭 잡은 채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앞서 걷는 세드릭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디아나가 이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깊은 밤, 유난히 별빛 흐린 하늘이 좁은 유리창 너머로 괴괴하게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어지러운 심중을 대변하는 듯하여 디아나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 ✤ ✤
이튿날.
엑서터로 자일스 일족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게일, 벨린다, 알렌, 모니카, 엘레노어……. 어라, 실비아 님은 아직 안 오셨어?”
“아침에 보니까 전서구가 편지를 그대로 달고 돌아왔더라. 아무래도 집을 비우신 것 같아.”
“나 참, 평소에는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더니 왜 하필 이럴 때 외출한 거래? 그럼 로레인 님은? 혹시 여기도 편지가 반송된 거야?”
“그건 아닌데 더 심각해. 오늘 밤에 나시마르크 사탑을 관측해야 한다고 내일 중으로 독수리를 대신 보내시겠대.”
“에이, 똥이나 먹어라.”
데이지를 비롯한 본성의 시종들은 일족의 명부에서 성에 도착한 이들을 제외하느라 여념 없었다. 아직 소식이 없는 이들에게 재차 편지를 보내기 위함이었는데, 그 와중에 별 시답잖은 이유로 불참을 선언하는 이들에 대한 악담도 소소하게나마 이어졌다.
“그나저나 레오나드 님이 늦으시네. 제일 먼저 달려오실 줄 알았는데 말야.”
“그러게. 별것도 아닌 일에 속속들이 참견하는 게 그분 취미잖아.”
“것도 이제는 힘들걸. 왜, 저번에 수장 선거를 제안하셨다가 도리어 세드릭 도련님이 확실한 후계자가 되셨잖아. 속이 좀 쓰리셨겠지.”
“하긴. 그러길래 수장 선거는 왜 하신 거야. 어차피 채스터티 아가씨는 후계자 자리에 별 관심도 없으시던데.”
토실토실한 데이지와는 달리 날씬한 여우 시종 포사티아가 길게 하품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디아나 아가씨는 주인님 뵈러 안 가세요? 편지는 우리끼리 써도 충분해요.”
멍하니 명부를 읽어 내리던 디아나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도와줘야지.”
“포사티아 말이 맞아. 편지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렴 주인님보다 중할까. 다시 잠드시기 전에 어서 얼굴이라도 비치고 와.”
데이지가 포사티아를 거들었다. 디아나는 머뭇거리며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도 한참을 미적거리다가 따끔한 야단을 듣고야 말았다.
“진저. 너는 엑서터에 주인님의 제자로 와 있는 거야. 요즘 손이 부족해서 네 도움을 받았다지만, 네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 주인님의 곁이라고. 너를 부려 먹었다고 우리가 주인님께 혼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만 돌아가 줘.”
그런 소리를 듣고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디아나는 낯짝이 두껍지 못했다. 끝내 시종들이 일하는 집무실에서 나와 터덜터덜 2층으로 올라가자,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인적 드물던 복도에 사람 그림자가 여럿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점차로 디아나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디아나는 자일스 일족이 어려웠다. 그녀가 바바라 슬하에서 수학했던 12년 동안 마주쳤던 열댓 명의 일족을 상기하면 조금 의아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을 스승에게 얹혀사는 더부살이 정도로만 여겼던 디아나는 스승과 혈연으로 얽힌 그네들을 지레 겁먹은 채로 대했었다. 주로 그들의 손에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어린아이 특유의 근거 없는 망상 탓이었지만, 바바라를 찾아오던 일족들이 대체로 그녀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던 것도 한몫했다.
어릴 적 디아나는 스승의 친지들이 어째서 자신을 싫어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행여나 못난 제자가 바바라의 위명을 해칠까 저어한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납득했을 뿐이다. 하지만 점차 자라면서 그뿐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들은 디아나에게서 그리젤다 솔을 보았다. 그리젤다의 딸로 불과 열다섯에 스승을 뛰어넘은 헤스터 솔을 보았다. 적당히 출중한 재능은 찬사받지만, 유일무이한 재능은 배척받는 법. 그들은 혹 디아나가 그리젤다처럼, 혹은 헤스터처럼 스승을 짓밟고 세드릭과 채스터티를 꺾어 버릴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터무니없는 기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디아나는 어머니와 자매의 재능에 한참 미달했으며, 세드릭이나 채스터티에 비해서도 보잘것없었다. 도시마다 하나씩은 꼭 있을 법한 흔하디흔한 마녀가 바로 디아나였다. 덕분에 스승의 위명은 여전히 빛나고 세드릭은 날개를 잘 펼치고 있으니, 자일스 일족은 제법 만족스러울 터였다. 그렇다고 디아나의 존재가 달갑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었다.
어느덧 디아나는 바바라의 침실에 다다랐다. 시종들이 자주 드나드는지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자못 한가롭던 침실은 부랴부랴 본성으로 몰려든 일족으로 가득했는데, 죄다 까마귀처럼 새카만 가운데 홀로 푸르죽죽한 설리번이 유독 눈에 띄었다. 혼자만 유달리 키가 껑충 커서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있었다.
어젯밤, 어머니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해서 울음을 터트렸던 설리번은 오늘도 훌쩍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바바라가 아들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문 앞을 지나다니는 일족 사이로 설리번을 토닥이는 바바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편에는 세드릭이 서 있었다. 그는 일전에 발푸르기스의 밤에서도 보았던 중년 사내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며, 중간중간 인사를 건네는 다른 이들에게 여유롭게 화답하기도 했다. 언젠가 어머니의 사랑이 고파 투정 부리던 어린애의 치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차분한 어른의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문밖에서 침실을 들여다보던 중, 불현듯 검은 옷을 차려입은 여자가 시야를 가렸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되, 딱딱한 무표정이 완전히 정착한 아주 낯익은 얼굴이었다. 저이를 어디서 보았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던 디아나는 곧 깨달았다. 무미건조하게 살아온 대다수의 동족이 바로 저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저런 얼굴일까. 디아나가 울적하게 고민하는 사이, 여자는 조용히 침실의 문을 닫았다. 서서히 좁혀드는 문틈으로 또 다시 눈물을 쏟아 내는 설리번과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바바라, 그리고 진중하게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세드릭이 차례차례 모습을 감추었다.
쾅.
디아나는 닫힌 문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는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발을 옮겼다. 그러나 도로 시종들의 집무실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일스 일족이 곳곳에 진을 친 본성을 하염없이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갈 곳 잃은 디아나는 결국 근래 가장 인적이 드문 방으로 향했다. 바로 혼수상태에 빠진 채스터티의 방이었다.
채스터티 자일스가 깊은 잠에 빠진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헤센 그윈티르의 짓이라고 추정되는 총상은 마법의 힘을 빌려 이미 옛적에 나았지만, 대량 출혈로 까마득해진 정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의사도 이제는 그녀가 정신을 차리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며 내내 수액만 주입하고 있었다.
마법은 외상을 치료하는 데만 탁월할 뿐, 이처럼 혼수상태에 빠진 정신까지 불러들이지는 못했다. 마녀의 신체란 별의 마력을 담는 그릇. 섬세하기 짝이 없는 그릇에 타인의 마력을 강제로 주입하다간 아예 산산조각이 나는 수가 있었다.
그러니 내일은 깨어나길, 아니면 모레는 깨어나길 매일같이 바랄 뿐이었다. 의사는 스승의 명줄이 오래 남지 않았다고 말했으며, 스승도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채스터티는 남매와 함께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야 했다. 사경을 헤매는 딸을 두고 눈을 감는 어머니의 심정이나, 훗날 깨어나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들어야 하는 딸의 심정을 디아나는 차마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 바보야.”
디아나는 침대 맡에 앉아 채스터티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이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의 기행조차 그리울 지경이었다. 채스터티라면 작금 침잠된 본성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터. 디아나는 생을 포기한 듯한 스승에게 기쁨을 선사하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설리번의 눈물과 세드릭의 무표정은 스승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튿날도 사흗날도 채스터티는 깨어나지 않았다. 바바라는 약에 취해 잠드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고, 그에 따라 엑서터 본성을 뒤덮은 죽음의 그림자도 나날이 짙어져만 갔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자일스 일족이 대체로 검은 상복을 입은 것도 침울한 분위기에 한몫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바라가 야심한 시각에 깨어나 말했다.
에드윈이 보고 싶다고.
“유언장은 지난달 변호인을 비롯한 증인 두 명의 입회 아래 작성되었습니다. 세드릭 도련님께서 상속인이자 유언 집행자로 손수 주인님의 유언을 행하실 예정입니다.”
시종 데이지가 코를 훌쩍이며 종이를 읽어 내렸다.
“유언은 일전에 주인님께서 구두로 약조하셨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설리번 도련님께는…….”
“잠깐, 데이지. 유언은 내 사후에 밝혀도 되지 않겠니.”
바바라가 데이지의 말을 잘라 냈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로 안온히 웃어 보였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다른 말을 전해 주고 싶구나.”
“물론이지요. 주인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데이지가 공손히 물러났다. 바바라는 깡마른 팔을 들어 올려 오른편에 앉은 설리번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가만히 눈을 마주쳐 오는 것만으로도 설리번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설리번, 내 아들.”
바바라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 직접 너를 낳지는 않았으나, 늘 너를 내 배로 품은 아들이라 여겼단다. 부족한 어미였음에도 이토록 착하게 자라 주어 고맙구나.”
“어머니…….”
설리번이 꾸역꾸역 울음을 눌러 참았다. 그럼에도 채 막지 못한 눈물방울이 바바라의 손등을 점점이 적셔 갔다. 바바라는 몇 번이고 그의 눈가를 닦아 주려 했지만, 노쇠한 팔은 설리번의 턱에도 닿지 못하고 연이어 추락할 뿐이었다.
“울지 말렴. 나를 아들의 눈물조차 닦아 주지 못하는 어미로 만들 셈이니?”
“싫어요, 어머니. 가지 마세요.”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야 내가 어찌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겠어.”
바바라가 쓰게 웃었다.
“설리번. 부디 내가 너에게 좋은 추억이었기를 바란다.”
설리번은 울면서 고개를 마구 주억거렸다. 그를 서글피 보던 바바라가 이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이처럼 흐느끼는 설리번과 달리, 얌전하게 눈을 내리뜬 세드릭이 창백한 안색으로 앉아 있었다.
바바라는 힘겹게 왼손을 들어 세드릭의 손을 부여잡았다.
“네겐 미안한 것이 너무나도 많구나. 그간 내가 많이 원망스러웠지?”
세드릭은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바바라는 어느덧 장성한 막내아들을 따뜻한 눈으로 응시했다.
“너는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자일스란다. 긍지를 가지렴.”
자일스인 어머니와, 베가인 아버지. 자일스의 용과, 베가의 낙뢰. 세드릭의 정체성은 그리도 모호했다. 어디도 속하지 못한 채 외로이 죽어 갈 것을 두려워하던 아들의 심정을 바바라라고 모를 리 없었다. 중립을 지킨다며 아들을 외면했던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밤잠 못 이루던 날이 적잖았다.
그나마 올곧게 자라서 다행이라고 스스로 다독이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섬세하기 그지없던 아이가 바위처럼 단단해지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고통을 속으로 삭여야 했을지, 또한 어머니를 향한 기대와 실망을 한없이 반복하며 얼마나 숱한 원망을 쌓아 왔을지.
작금 차분해진 아들의 모습과, 허리춤에 매달려 사랑을 갈구하던 어린 아들이 겹쳐질 때면 바바라는 꼭 가슴을 할퀴어 내는 듯한 고통에 사로잡혔다.
옳은 선택이었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죄의식은 마땅히 그녀의 몫이었다.
“세드릭, 너는 나보다 나은 수장이 될 거야.”
바바라는 기원을 담아 말했다. 마녀가 간절히 말하면 이루어진다는 속설처럼, 그녀는 부디 자신의 마지막 원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무정한 어머니와 떠나간 아버지에게 매달리지 않고, 홀로 치열하게 여기까지 올라온 아들이 끝내 온당한 영광을 누리길 바랐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해 주는 사람 사이에서 행복하길.
바바라는 간절하게 바랐다.
“디아나, 이리로 가까이 오렴.”
뒤이어 바바라는 세드릭 뒤편에 서 있던 디아나를 불러냈다. 디아나는 발갛게 물든 코를 훌쩍이며 침대 맡으로 다가왔다.
“스승님…….”
디아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려 낼 것처럼 울상이었다. 바바라가 옅게 미소 지었다.
“디아나. 우리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니?”
“당연하죠.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처음으로 뵈었잖아요.”
“그래, 그랬지. 그리젤다의 장례식에서…….”
오래된 과거를 더듬는 바바라의 눈빛이 차츰 흐릿해졌다.
“거기서 너를 처음 보았을 때 실은 무척이나 놀랐단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시절에도 너는 그리젤다를 아주 빼닮았었어.”
바바라는 젊은 시절 벗의 얼굴로 앉아 있는 제자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네가 많이 속상했다는 걸 안다. 그리젤다와 헤스터의 후광은 네게 썩 무거운 짐이었겠지.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널 재단하는 사람들이 밉고 네게만 재능을 물려주지 않은 그리젤다도 미웠겠지만, 아마도 가장 미워했을 사람은 평범하게 태어난 네 자신이었을 거야.”
그리젤다를 닮은 아이. 동시에 그리젤다를 닮지 않은 아이.
“하지만 디아나, 나는 네가 그리젤다를 닮지 않아서 좋았단다.”
내내 시무룩하던 디아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바바라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오른손에 쥔 것이 많으면, 자연히 왼손은 비기 마련이다. 네 어미인 그리젤다도 양손이 가득하진 못했어. 그러니 부디 네 자신을 아껴 주렴. 부족한 면만 보고 탓하기에 너는 너무나도 귀한 존재란다.”
디아나의 잿빛 눈이 크게 일렁였다. 점차로 붉어지는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모습을 지켜보며 바바라는 그새 쉬어 버린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행여나 앞으로 힘든 일이 있거든 널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떠올리려무나. 헤스터와 세드릭과 설리번과 채스터티, 그리고 적어도 나는, 네가 그리젤다 솔의 둘째 딸이 아닌 디아나 솔로 족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렴.”
“스승님…….”
디아나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나왔다. 바바라는 힘겹게 눈을 내리감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마지막으로 채스터티는……. 죽기 전에 그 아이의 목소리를 꼭 한번 듣고 싶었는데, 가할지 모르겠구나.”
사위가 숙연해졌다. 바바라는 눈을 깜박이며 가물가물해지는 시야를 애써 다잡았다.
“채스터티에게 남기는 편지가 있다. 데이지가 보관하고 있으니 훗날 채스터티가 깨어나거든 보여 주렴.”
“알겠습니다, 어머니.”
“그이는 아직 연락이 없니?”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바바라가 힘없이 웃었다.
“해리에게 남길 말이 있다. 다들 자리를 비켜 주렴.”
침실을 지키던 사람들이 해리 듀어든만을 남기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디아나는 연신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내며 문턱을 넘었다. 먼저 복도로 나온 세드릭이 서서히 닫히는 문틈으로 해리 듀어든에게 조곤조곤 속삭이는 바바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디아나가 훌쩍이며 물었다.
“세드릭. 에드윈 경은 안 오시겠대?”
“오실 거야.”
세드릭이 강경하게 대답했다. 굳건하게 닫힌 문을 묵묵히 노려보는 눈빛이 깎아지른 듯 강퍅했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디아나가 서글피 중얼거렸다.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
저토록 절절하게 기다리시는데…….
그날 밤, 에드윈은 암암한 어둠을 몰고 왔다.
자일스 일족은 무표정한 석상처럼 도열하여 그를 맞이했다. 에드윈이 바바라의 곁을 지키던 젊은 시절, 베가 출신인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치들도 대놓고 그를 박대하지는 못했다. 에드윈은 그들을 무심히 외면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지나간 곳마다 스러져 가는 늦가을 밤바람이 묻어났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위독하던 바바라는 에드윈이 도착하자마자 상태가 호전되었다. 의사도 영문을 몰랐다. 시종들은 잠시나마 호흡이 안정된 바바라를 걱정스럽게 뒤로한 채 침실 문을 닫았다.
이윽고 둘만 남은 침실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에드윈은 침대 맡에 앉아 설운 눈으로 바바라를 굽어보았다. 바바라는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곱절은 더 늙고 쇠약해졌다. 처녀 적 발그레하던 뺨은 백지장처럼 창백하고, 두 눈두덩은 움푹 들어갔다. 야위어 거죽만 남은 목은 마치 사신이 옥죄는 것처럼 주름이 선명했다.
오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난 바바라가 파들거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약에 취해 몽롱해진 눈이 한참 허공을 헤집다가 기쁘게 휘어졌다.
“에드윈. 나를 보러 와 주었군요.”
가물가물한 시야에도 어쩐지 그의 형상만은 또렷했다. 진실로 에드윈이 눈에 비치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 속 에드윈의 모습이 허상처럼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상관없다고 바바라는 생각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에드윈이 조심히 바바라의 손을 잡았다.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은 손이 그의 손길을 따라 축 늘어졌다.
“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걸요. 그나저나 바다에서 왔나 보네요.”
“어찌 알았습니까?”
“당신에게서 바다 내음이 나요.”
바바라는 눈을 내리감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쓰디쓴 약품 냄새에 어느덧 비릿하고 짭조름한 냄새가 스며 있었다. 당장이라도 냄새가 묻어 온 곳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싱그럽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오래되어 빛바랜 추억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어디였더라. 약기운이 흩어 놓은 기억을 하염없이 더듬어 올라가던 바바라가 불현듯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에드윈. 우리 첫 만남을 기억하나요?”
“물론입니다. 아리아나 해변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죠.”
“그때 해가 솟고 있었던가요, 아님 지고 있었던가요?”
“새벽이었습니다. 어두운 하늘에 여명의 별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으니까요.”
에드윈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바바라는 고개를 끄덕이듯 노곤히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스무 해도 더 지난 날이 어제처럼 선연하게 떠올랐다.
제노비아 자일스가 그리 덧없이 가 버린 뒤로, 바바라는 어린 나이에 가문의 수장이 되어 하루도 편히 보낸 적이 없었다. 완고한 원로들은 수장의 모자람을 좌시하지 않았으므로, 바바라는 어제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오늘을 고군분투해야 했다. 매일이 새로운 배움과, 새로운 질책과, 새로운 좌절로 진창이 되어 끝났다.
그러던 어느 날, 창밖으로 푸릇푸릇한 봄철의 정경을 멍하니 내다보던 바바라는 충동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저 당연하게만 여겼던 일과에서 벗어난 최초의 일탈이었다. 하지만 성에서만 곱게 자라 온 마녀가 달리 갈 곳이 있을 리 없었다. 고민하던 바바라는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동부의 아리아나 해변으로 향했다. 수장으로 선정된 이래로 늘 숲과 산을 끼고 살았던 그녀에게 바다란 미지의 세계였다.
바바라는 그곳에서 꼬박 하루를 지새웠다.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 글귀가 사실이었던지 해변은 놀러 나온 가족과 연인으로 가득했지만, 난생처음 마주하는 바다의 장엄한 광경에도 바바라는 다소 시큰둥했다.
다만 돌아가기 싫었을 뿐이다. 윈우드 숲 한복판에 자리한 성채는 지독히도 적막하고 쓸쓸했다. 아무리 높은 탑에 올라가 봤자 보이는 것은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삼림밖에 없으니, 그곳에서 외로운 마음 의탁할 곳이란 고작해야 별이 쏟아질 듯 산란한 밤하늘뿐이었다. 고독이 오래도록 좀먹은 그녀의 마음은 무척이나 헛헛했다.
그리 얼마간 상념에 잠겨 있던 사이 밤이 물러나고 새벽이 몰려왔다. 다른 별은 일제히 잠들어 어둑한 하늘에 오직 여명만이 떠오른 고요한 새벽녘. 갓 태어난 태양이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며, 동편에서부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걸음마 하는 아기처럼 더디고 느리게, 어둠에 잠겨 있던 해변을 환히 내리비추었다.
그 순간, 바바라는 그를 보았다.
일출을 보러 해변으로 몰려든 구경꾼도, 그네들이 시끄럽게 내지르는 환호성도 그 순간 바바라의 세상에는 없었다. 떠오르던 태양조차 빛을 잃고, 사시사철 빛나는 여명마저 얼굴을 가렸다. 오직 그만이 빛났다. 모두가 멎어 버린 세상, 오직 그만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바바라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거리는 삽시에 좁혀들었다. 이제 사이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세상에 둘뿐인 것처럼 열렬한 시선이 오갔다. 단둘뿐인 침묵 속에서 언어로 치환할 수 없는 수많은 말소리가 오갔다.
스무 해도 더 지난 언젠가, 둘의 역사는 그리 시작되었다.
“이제 와 믿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처음 보자마자 당신이 누군지 알았어요. 당신은 아멜리아와 참 많이 닮았으니까요.”
어느덧 죽음을 앞둔 바바라가 그리 말했다. 그녀의 곁에는 꼭 지난날처럼 젊고 싱그러운 모습으로, 하지만 속은 바바라만큼이나 늙어 버린 에드윈이 있었다.
“그랬습니까.”
“네. 물론 당신은 날 알아보지 못했었죠. 어렴풋하게 자일스의 마녀임을 알아챘을 뿐.”
더디게 이어지는 말소리마다 잔기침이 그득했다. 에드윈은 서글픈 눈으로 죽어 가는 아내를 보았다. 하지만 바바라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지나간 날들을 하나씩 반추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누군들, 내가 누군들 무엇이 중요했을까요. 그 시절 나는 당신밖에 보지 못했고, 당신은 나밖에 보지 못했으니…….”
온 세상 별빛이 만개하던 나날이었다. 그렇게나 살벌하던 원로들의 호통도 달콤한 밀어로 들릴 만큼 세상 만물이 찬란했다. 어둠은 빛이고 빛은 더한 광명일지니, 그와 함께라면 세상천지 두려울 것이 없었다. 마법으로 이루지 못하는 경지도 사랑이라면 이루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랑. 마법으로도 피워 내지 못하며, 과학으로도 흉내 내지 못하는 신비.
그토록 불가사의한 힘이 온몸을 불살랐던 젊은 날, 둘은 아픈 줄도 모르고 행복했었다.
바바라는 그때가 너무도 그리웠다.
“에드윈. 그 시절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요.”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이토록 늙어 버렸는걸요.”
마냥 젊음이 그립지는 않다. 하지만 젊음의 대담함은 그리웠다. 앞뒤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가는 무모함이, 계산 오가지 않는 순수함이 그리웠다. 오직 사랑에 눈멀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리웠다.
“바바라.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합니다. 마음이 약해지면 병을 이길 수 없어요.”
에드윈이 간절하게 속삭였다. 그러나 바바라는 하릴없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을 버티면 그때처럼 살 수 있나요? 내일을 버티면 그 시절의 내가 돌아오나요?”
“돌아옵니다. 그때처럼 살 수 있어요. 살아만 있다면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내게는 그늘이 너무 많아요. 그리워할 것이 너무 많아요.”
그리움이란 그늘. 간혹 삶에 지칠 때마다 쉴 곳이 되어 주곤 하지만, 그늘진 곳에는 영영 볕 들지 못하는 법이었다.
하루하루 쌓아 온 시간처럼, 하루하루 늘어난 그늘이 어느새 마음을 전부 차지하고 말았다. 더 이상 햇살이 들이치지 않는 그늘 속에서 바바라는 매일매일 어제를 그리며 살아왔다.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지쳐 버렸다.
“그늘 없는 삶이 그립습니다. 그리워할 것이 없던 시절, 우리는 얼마나 용감했던가요. 행복한 줄 모르고 행복했던 그때가 너무도 그리워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이…….”
바바라는 힘겹게 고개 돌려 에드윈을 보았다. 세월의 더께가 쌓인 녹안에 회한이 번져 갔다.
“에드윈. 나는 진실로 당신을 사랑했어요.”
쿵. 쿵. 쿵.
수장의 부고를 알리는 북소리가 성내에 울려 퍼졌다. 밤을 깨트리는 충격이 널리 번져 갔다.
그리고 모든 자일스 일족이 모인 로비. 추적거리는 빗소리 사이로 뼛골에 사무치는 북소리가 가득 울렸다. 누구도 쉬이 입을 뗄 수 없는 스산한 적막 속에서, 가장 먼저 충직한 시종들이 몸을 낮게 엎드리며 곡했다. 자애로운 주인이 망각의 강으로 떠나기 전에 부디 한 번만이라도 돌아보길 바라는 간곡한 마음이었다.
세드릭은 2층으로 향하는 복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욱한 어둠 속에선 계속해서 둔중한 북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드릭은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반듯하게 도열했던 시종들이 서럽게 곡하는 연유를 모를 리 없었다.
빗줄기가 점차로 굵어졌다. 성채를 흠씬 때리는 빗소리가 북소리와 곡소리를 잡아먹을 듯 커져만 갔다. 뒤이을 재앙을 예고하듯 먹구름 군데군데 허연 불빛이 스쳤다. 그때마다 로비가 한낮처럼 환했다 도로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쿵. 쿵. 쿵.
기세 올리는 빗소리에도 북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서로 눈치만 보던 일족들은 이제 한둘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시종들처럼 수장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마법사에게 이미 지나간 것은 무의미했다. 그들은 오로지 새로운 수장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예를 취했다.
다시 한번 로비가 훤해졌다. 쓰러져 곡하는 시종들의 등 위로, 엄숙하게 고개 숙인 일족들의 까만 머리 위로 허연 그림자가 너울졌다. 참으로 기괴한 광경이었다.
쾅!
별안간, 거센 폭풍우 몰아치는 성 밖으로 낙뢰가 내리쳤다. 분노한 신이 세상을 난도질하듯 낙뢰가 연이었다. 일족들은 두려워 떨며 더욱 깊게 조아렸다.
세드릭은 그제야 느릿하게 그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드러난 얼굴 반쪽이 놀랍도록 사늘했다. 그러나 어둠에 잠긴 나머지 반쪽 얼굴에는 한없이 눈물이 흘렀음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 ✤ ✤
벨리엄의 베가 본성.
야트막한 야산을 망토처럼 두른 이 고성은 예로부터 인적 드물기로 유명했다. 바로 성주에 대한 낭설이 인근에 파다한 까닭인데, 소문인즉 성에 홀로 거주하는 아리따운 마녀가 처녀의 피를 마시며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로 천년전쟁이 한창이던 중세에나 통용되었을 법한 터무니없는 소문이지만, 으스스한 고성의 정경을 보고 있노라면 어째서 인근 주민들이 소문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지 알 듯도 했다.
이제는 고성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조차 흐릿해진 때, 아주 오래간만에 성을 찾은 손님이 있었다. 손님은 가꾸지 않아 무성해진 정원을 익숙하게 가로질러 곧장 본채로 들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치솟은 첨탑으로 둘러싸인 본채는 담쟁이넝쿨로 뒤덮여 자못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으나, 손님은 무심히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버려진 성처럼 황폐한 외관과 달리, 성내는 먼지 한 조각 찾아볼 수 없이 깨끗했다. 복도마다 양초 꽂힌 촛대들이 늘어서 객을 맞이했고,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에선 윤기가 줄줄 흘렀다. 사람 사는 흔적일랑 전혀 남아 있지 않음에도 잘 관리된 모습이었다.
촛불은 멀찍이 앞선 복도를 비추며 손님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은 복도와 마찬가지로 두꺼운 커튼에 가려 어둑했지만,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인근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손님은 벽난로 근처에 앉아 장작에서 전해지는 열기를 기꺼이 즐기었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야산에서 이만치 귀한 것도 없었다.
오래지 않아 성주가 인기척도 없이 등장했다.
“내일은 황혼의 별이 동쪽에서 뜨겠구나. 네가 나를 다 찾아오고.”
새가 노래하듯 경쾌한 목소리였다. 성주는 도톰한 숄을 두른 채로 맞은편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 얼마간 손님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나는 잘 지냈다. 보아하니 너도 그럭저럭 지낸 듯한데, 여기까진 어쩐 일이니?”
그에 헤스터는 말없이 얇은 서류를 내밀었다. 턱을 괸 채로 물끄러미 서류를 보던 성주가 가벼이 마법을 부렸다. 헤스터의 손을 떠나 허공으로 떠오른 서류가 성주의 눈앞에서 한 장, 한 장 넘어가기 시작했다. 성주는 금세 서류를 완독했다.
“사실입니까?”
헤스터가 물었다. 성주는 감흥 없는 눈으로 그녀를 건너보았다.
“그걸 물어보려고 온 거니?”
“사실인지 여쭈었습니다.”
“어째서 내 대답이 중요한지 모르겠구나. 어차피 너는 다 알고 왔으면서.”
성주는 마법으로 헤스터에게 서류를 돌려주었다. 그렇잖아도 한 번 구겨졌던 서류가 헤스터의 손아귀에 다시 억세게 잡혔다.
“그렇다면 전부 사실이군요. 도대체 당신들을 무어라고 불러야 합니까? 미오티테타? 알게르 푸르게스크? 타라벨라? 아니면 몬?”
“이름이 무어 중요하겠니. 이름이 어떻든 본질은 동일한 것을.”
권태롭기 그지없는 성주의 태도에 헤스터는 가만히 입술을 짓씹었다. 속에서부터 격렬한 노기가 끓어올랐다.
“살가운 분이 아니심은 일찌감치 알았으나, 옳고 그름조차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긋나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너는 나이가 들더니 교만함만 늘었구나.”
“제가 교만하다면 당신은 어떤 분이십니까? 최소한의 윤리조차 저버린 타락한 마녀십니까, 아니면 질투에 사로잡혀 어린 제자를 내친 고약한 스승이십니까?”
“헤스터 솔.”
“어디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도대체 당신은 어떤 분이십니까, 스승님.”
헤스터는 지독히도 싸늘한 눈으로 스승을 노려보았다.
황혼의 마녀, 아멜리아 베가.
미에 둔감한 마법 사회에서조차 세월에 퇴색되지 않는 미색으로 이름 높지만, 변덕스러운 성정을 제하면 외부에 알려진 바가 극히 적은 베일 속의 마녀. 베가의 수장이자, 벨리엄 본성의 성주인 그녀가 바로 헤스터의 옛 스승이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녔다고 으레 착각하듯 어릴 적 헤스터 역시도 인어처럼 아리따운 스승의 외양에 깜빡 속고 말았으나, 실제 아멜리아 베가는 선량함과는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모든 것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세간에서 여기길 벗이요, 본인이 여기길 적수로 여기던 그리젤다의 딸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도, 그리 받아들인 제자를 방치한 것도, 방치하다 못해 성인도 되지 못한 아이를 내친 것도 전부 아멜리아가 내키는 대로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제자인 헤스터가 심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강대한 마녀 아멜리아는 자기 멋대로 선택한 결과를 전혀 책임지지 않았다. 책임을 지긴커녕 일말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헤스터는 아멜리아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구하는 것은 답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
아멜리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진정 그리 물었니? 네가 궁금한 건 내가 아닐 텐데. 언제까지 변죽만 울릴 작정이야.”
“답은 주실 겁니까?”
“글쎄. 그건 내 마음에 달렸겠지.”
피처럼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아멜리아는 창백한 백금발을 손가락으로 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다만, 사교 클럽 몬은 네 생각처럼 극단적인 집단은 아니다. 물론 아주 예전에는 그러했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요즘에는 그저 학술 모임일 뿐이야. 악마 소환이니 인간 몰살이니 하는 것들은 이제 관심도 없단다. 그건 진즉에 사장된 주제야.”
“그런 집단이 악마 소환자인 니올로 팔리아치를 탈옥시켰습니까?”
“니올로 팔리아치? 광인 니올로? 여기서 그자의 이름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구나.”
아멜리아가 짐짓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진무구한 얼굴에 헤스터는 구역질이 났다.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헤센 그윈티르의 배후라고 이미 칼롯타 팔리아치에게서 들었습니다.”
“부활의 마법사라면……. 네 지금 제노비아 자일스의 심복을 일컫는 게로구나.”
“전대 예언의 마녀는 수십 년 전에 죽었습니다.”
“죽었다고 알려졌지.”
성에 들어온 이래 헤스터는 처음으로 당황을 내비쳤다.
“제노비아 자일스가 살아 있다고요?”
아멜리아는 빙긋 웃기만 했다. 그리고 대답 대신으로 뜬금없는 말을 풀어놓았다.
“충고 하나 할까? 네 어린 자매 말이다, 그 아이에게 너무 정 붙이지 말렴.”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디아나는 제 유일한 가족이에요.”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리젤다가 넌지시 알려 주지 않던?”
놀리는 어조에 헤스터는 말없이 미간만 찌푸렸다. 아멜리아는 입술을 비틀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가련한 제자에게 한마디 선사하자면, 실은 그 아이 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란다.”
“…….”
“그리고 곧 죽을 거야.”
헤스터는 고요했다. 무표정한 제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멜리아가 배부른 사자처럼 느른하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가족이래 봤자 특별하게 가치 있는 존재는 아니잖니. 이미 그리젤다를 떠나보낸 적 있으니, 너도 잘 알겠지만―”
“스승님도 관여하실 겁니까?”
돌연 헤스터가 아멜리아의 말을 잘라 냈다. 아멜리아는 조금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낯을 찡그렸다.
“뭐?”
“스승님도 제 자매에게 손대실 작정이시냐고 여쭈었습니다.”
“아둔하구나. 내가 그럴 작정이었으면 이렇듯 네게 귀띔해 주었겠니? 더구나 내가 디아나 솔을 죽여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아멜리아가 말했다.
“먼젓번에 밝혔듯이 클럽은 일종의 학술 단체다. 제노비아 자일스가 아주 흥미로운 연구 주제를 내놓았기에 클럽은 그녀가 연구를 완성할 수 있도록 조금씩 보조할 뿐 직접적으로 연구에 관여하진 않아.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래. 제노비아 자일스가 광인 니올로를 끌어들였다는 것도 나는 이번에 처음 듣는구나.”
“제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네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다. 어차피 너도 클럽에 가입하면 곧 알게 되겠지만, 클럽의 회원이라고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꿰뚫지는 못해. 각자 관심 있는 연구에 집중하기도 바쁘다.”
“어째서…… 제가 클럽에 가입한다고 단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헤스터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지금 심정으로는 당신들 전부 죽여 버리고 싶은데.”
아멜리아는 말없이 헤스터를 쳐다보았다. 어느덧 미소 가신 얼굴이 빙하처럼 차가웠다.
“이곳이 내 성임을 잊지 마라. 제자를 죽인 스승이란 오명을 쓰기는 싫으니.”
“저를 해할 수는 있으신가요?”
“헤스터.”
“누가 들으면 스승님께서 아량을 베푸시는 줄 알겠습니다. 실은 저를 죽이지 않는 게 아니라 죽이지 못하시는 거잖아요.”
헤스터가 사근사근 속삭였다. 아멜리아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를 감싸던 숄이 스산하게 떨어졌다.
“……나가.”
삽시에 성내가 뒤틀리듯 죄이기 시작했다. 어언지간 벽난로 불빛이 잦아들며 사위에 어둠이 자욱해졌다. 그럼에도 아멜리아의 창백한 얼굴만은 또렷했다.
“내 성에서 당장 나가!”
그토록 아리땁던 얼굴이 야수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성주의 분노를 따르듯 성이 불안스럽게 박동했으나, 헤스터는 지극히 여유로운 몸짓으로 스승에게 작별을 고할 뿐이었다.
“부디 속내의 괴물은 잘 감추세요. 아름다운 용모마저 망가진다면, 세상천지 누가 당신을 칭송하겠습니까?”
헤스터는 그리 고성을 떠났다. 그녀가 지나는 길목마다 문이 차례로 닫혀 갔다. 마지막으로 대문이 괴성을 울리며 다물리자, 멀리서 여인네의 비명처럼 날카로운 까마귀 울음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지하 묘지에 드물게 횃불이 들었다. 횃불이 일렁이며 주위의 어둠을 몰아내자, 천 년이 넘도록 볕 든 적 없는 암암한 지하도 잠시간 밝아졌다.
오늘은 바바라 자일스가 숨을 거둔 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엿새가 되도록 되살아날 기미가 없는 시신은 완전히 이 세상을 떠났다고 판단하여 관에 묻는 것이 마법 사회의 마지막 장례 절차였다. 친지들은 그 엿새간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하지만, 아직까지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온 전례는 없었다. 그리고 지난 세월 그러했듯 이번에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바바라는 묘지에서 유일하게 열린 석관에 누워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는 단정하게 풀어 내리고, 흰 수의보다 더욱 창백한 손등은 가슴팍에 얌전히 자리했다. 도화지처럼 시허연 얼굴에 횃불 그림자가 끊임없이 현세의 흔적을 남겼으나, 굳게 닫힌 눈꺼풀은 열릴 줄 몰랐다. 일족들은 전부 검은 상복 차림으로 암흑과 동화되어 오로지 죽은 그녀만이 희게 빛났다.
일족들은 횃불 너머에 반듯이 도열했다. 이제 바바라는 영원한 어둠에 묻힐 터였다. 지하 묘지란 시간이 무의미하며, 기억은 더더욱 무의미한 곳. 그들은 수십 년간 가문을 이끌어 온 수장을 떠나보내며 마지막으로 비감한 곡조를 읊조렸다.
떠나소서. 떠나소서.
그대여, 차가운 땅을 떠나소서.
건너소서. 건너소서.
그대여, 망각의 강을 건너소서.
따르소서. 따르소서.
그대여, 황금의 종을 따르소서.
그리하여 별빛 저물지 않는 낙원으로.
그리하여 별빛 가득 고이는 낙원으로.
여명이시여,
그대의 딸이 당신에게로 가나이다.
여명이시여,
그대의 딸을 기쁘게 반겨 주소서.
디아나는 멀찍이서 세드릭을 지켜보았다.
가문의 수장은 그렇게나 할 일이 많은지 아니면 자일스만 이토록 유난인지 모르겠으나, 세드릭은 지하 묘지에서 올라오자마자 일족에게 붙잡혀 요르그 규석의 대량 매입 건을 의논 중이었다. 게다가 지나가는 이들이 한마디씩 덧붙이는 바바라의 유산 문제에도 대답해야 했고, 무엇보다도 엉엉 울면서 계단을 올라오는 설리번을 달래야 했다.
“데이지. 설리번을 방으로 안내해 줘.”
설리번은 지난 엿새간 끊임없이 울어 댔다. 달래 봤자 그치지 않을 눈물임을 알아, 세드릭은 건조한 위로 몇 마디만 건네며 데이지에게 설리번을 떠넘겼다. 엉겁결에 키만 멀쑥한 첫째 도련님을 떠맡은 데이지가 자못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도련님은 괜찮으세요?”
“나는 걱정하지 말고, 가서 설리번이나 챙겨 줘.”
세드릭이 피로한 미소를 지어 올리며 대꾸했다. 데이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침통하게 설리번을 데려갔다. 멀리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디아나가 속으로 빈정거렸다.
‘괜찮기는 무슨.’
지하 묘지에서 석관을 닫는 것으로 엿새의 장례는 모두 끝났다. 애초부터 바바라와 사적인 연이 깊지 않았던 다른 일족들은 그걸로 말끔하게 전대 수장을 잊었는지 몰라도, 세드릭이 고작 엿새로 어머니 잃은 슬픔을 지워 냈을 리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드릭 자일스는 절대 아니라는 걸 디아나는 확신했다.
그럼에도 장례를 치르는 동안 세드릭은 눈물 한 점 비치지 않았다. 평소보다도 차분하고 가라앉은 모습으로 장례를 주도하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중간중간 설리번의 넋두리를 들어 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설리번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 얘기하면서 꼭 눈물로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조차 세드릭은 묵묵하게 듣기만 할 뿐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자제력이었다.
“……프레스턴 은행에 문의하겠습니다. 우리 가문과는 오래 교류했으니, 긍정적인 답변을 내 줄 겁니다.”
“알겠습니다.”
얼마간 세드릭과 신중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남자가 바삐 자리를 떴다. 텅 비어 버린 로비에서 세드릭은 겨우 혼자가 되었다. 엿새 만에 느껴 보는 적막이 영 낯설어 멍하니 서 있던 그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디아나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내리 침착하던 얼굴에 야트막한 파란이 일었다.
디아나는 조용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허겁지겁 차분함을 가장한 표정을 덧씌우는 모습이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울분이 일었다. 지난 엿새 동안 참아 왔던 분기가 다시금 들끓고 있었다. 화난 이유는 명확한데, 화를 풀어낼 대상이 마땅찮아 더욱 화가 났다.
디아나는 세드릭의 코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지척에서 보니 생각보다도 낯빛이 더 해쓱했다. 그새 살이 내렸는지 미려하던 얼굴선이 가냘파졌고, 눈 밑 그늘도 짙었다. 그런데도 꼿꼿하게 버티고 선 모습에 기가 찼다. 저 담담하기 짝이 없는 낯짝을 당장이라도 뜯어내고 싶었다.
그리 디아나가 무섭게 쏘아보는데도 세드릭은 지극히 평온했다. 혹은 평온해 보였다. 그는 도무지 속내를 모르겠는 얼굴로 손을 올려 디아나의 눈가를 매만졌다. 지하 묘지에서 번졌던 눈물 자국이 못내 거슬렸던 모양이다. 아무렴, 슬픔을 완벽하게 속으로 삭여 내는 이가 보기에 얼마나 칠칠맞았을까.
디아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세드릭의 손을 차갑게 쳐 냈다. 성마른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너 왜 그래?”
“……뭐가.”
“너 하나도 괜찮지 않잖아. 그런데 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세드릭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피곤해 보인다. 들어가 쉬어.”
“쉬라고? 너 지금 그런 말이 나오니?”
디아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세드릭은 깊은 한숨을 토해 내며 몸을 틀었다. 어떻게든 지금을 모면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디아나는 황급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왜, 나한테도 아까처럼 괜찮다고 해 봐. 네 빤한 거짓말에 나도 속는지 한번 보자고.”
장례를 치르는 내내 세드릭은 대체로 괜찮아 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진짜로 말짱해 보였다. 목 놓아 우는 설리번을 달래던 시종들이 가끔씩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세드릭을 살폈지만, 그때마다 괜찮다는 말로 시종들의 근심을 지워 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이지, 지난 엿새 동안 골백번도 들어 왔던 소리다.
“나중에 하자. 피곤해.”
“나중에 언제? 이러다 네 속이 문드러질 때까지? 너 이렇게 계속 참아 내면 언젠가 괜찮아질 것 같니? 그래서 이래?”
세드릭은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정말로 잘 이겨 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네가 괜찮을 리가 없잖아.”
“…….”
“네가 어떻게 괜찮아.”
어린 시절, 세드릭은 맹목적으로 어머니만을 좇았다. 돌아보지 않는 어머니를, 바라는 만큼 사랑해 주지 않는 어머니를 늘 찾아 헤매었다. 심지어는 어머니가 연민으로 보살피는 또래 아이를 미워할 정도로 애타게 사랑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디아나만은 저 세드릭 자일스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는지 알았다.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이 어찌나 드넓은지 세상천지 그녀보다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다. 어릴 적, 디아나는 세드릭이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 괴로웠으므로. 세드릭이 그녀를 미워했던 만큼 어머니를 그렸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러니까 괜찮은 척 좀 그만하란 말이야. 누가 너보고 죽도록 힘들어도 참으라디? 스승님이 네게 그런 걸 바라셨어? 아니잖아!”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참다못한 세드릭이 일갈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누가 날 돌봐 줄 건데? 이제 내 뒤에는 아무도 없어. 멋모르는 어린애 행세도 이젠 끝이야!”
“아니, 넌 그냥 무서운 거야. 한번 무너지면 어디까지 무너질지 몰라서 지레 겁먹은 거잖아!”
“그게 잘못된 거야? 나는 이제 무너지면 안 돼. 내가 무너지면 가문은 어쩌라고!”
“이 멍청아! 너 진짜 이럴래?”
디아나가 성난 나머지 세드릭의 어깨를 세게 밀었다. 어느덧 뺨이 눈물로 축축했다. 흐느끼는 와중에도 노기 가득한 소리가 고래고래 이어졌다.
“그리 무서우면 에드윈 경이든 설리번이든 데이지든 아님 아직도 잠들어 있는 채스터티든! 누구 하나든 붙잡고 울란 말이야! 그 사람들이 네가 무너지도록 마냥 내버려 두겠니? 네 가족을 그렇게나 못 믿겠어?”
“……설리번은 제 감정 추스르기도 바쁘고, 아버지는 너도 아까 봤잖아. 아직도 지하 묘지에 홀로 계시는 거. 그런 분께 어떻게 나까지 짐이 되겠어.”
“그럼 나는.”
디아나가 어깨를 달싹거리며 울었다.
“그럼 나라도 붙잡고 울어. 너 힘들잖아. 내가 이렇게 힘든데 너는 얼마나 힘들겠어.”
세드릭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디아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겨우 말을 이어 갔다.
“나도 너무 힘들어. 다시는 스승님을 뵙지 못한다는 것도 너무 슬픈데 네가 자꾸 괜찮은 척하니까 더 짜증 나. 내가 언제까지 널 대신해 울어야겠어? 응?”
디아나가 젖은 눈으로 세드릭을 쏘아보았다. 세드릭은 황망히 입술만 달싹거렸다.
“나는…….”
하지만 대답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내리 이어지는 침묵에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오래지 않아 디아나의 얼굴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디아나는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감쳐물며 뒤돌아섰다.
“됐어. 이젠 네가 알아서 해. 나도 더는 신경 쓰기 싫으니까.”
상심한 마음을 대변하듯 걸음이 자꾸만 바닥에 끌렸다. 디아나는 남몰래 치맛자락을 사납게 움켜쥐었다. 말도 못 하게 속이 상했다. 가슴속에 무거운 바위가 들어앉은 것처럼 무진 답답했다.
어째서 마음 편히 울지 못할까. 어릴 적엔 누구보다도 감정에 솔직했으면서 왜 저리도 감춰 대는 걸까. 디아나는 어느 순간부터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길 꺼려 하는 세드릭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를 잃은 순간조차 결벽적으로 스스로를 꽁꽁 싸매는 행태를 어찌 이해한단 말인가. 세드릭은 자존심은 강해도 눈물이 메마른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아이였다.
화가 났다. 화난 이유는 알지만, 풀어낼 대상이 마땅치 않아 더욱 화가 났다. 그래서 당최 뜻을 따라 주지 않는 세드릭이 미웠다.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학대하는 모습이 꼴 보기도 싫었다.
불현듯 누군가 조심스럽게 손목을 감아 왔다.
“가지 마. 내가 잘못했어.”
잔뜩 억눌린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세드릭이 어린 짐승처럼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애끊는 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파…….”
세드릭은 목메어 흐느꼈다.
“너무 아파…….”
간신히 토해 내는 소리가 듣기조차 못내 고통스러웠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버텨 내던 디아나는 끝내 눈물을 쏟아 내고 말았다.
눈물 마르지 않는 나날, 남겨진 사람들은 이토록 괴로웠다.
✤ ✤ ✤
며칠 뒤, 헤스터가 엑서터로 찾아왔다.
“언니!”
디아나는 쏜살같이 달려가 헤스터의 품에 안겼다. 파펜하임산에서 헤어진 지 고작해야 3주 정도 지났을 뿐인데도, 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핑그르르 눈물이 돌았다. 반갑기는 마찬가지였는지 헤스터도 디아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잘 지냈지?”
“그럼. 언니는 별일 없었어?”
“……나도 괜찮았어.”
디아나가 꼼지락거리며 헤스터의 품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잠시간의 침묵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헤스터는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가늘게 웃어 보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성내는 고요했다. 장례가 끝난 직후 대부분의 일족은 썰물처럼 본성을 빠져나갔고, 그나마 남아 있던 이들도 며칠 사이 안녕을 고했다. 이제 본성에 남은 사람이라곤 자일스 삼 남매와 에드윈, 그리고 디아나뿐이었다.
“바바라 경이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어. 너도 임종을 지켰니?”
헤스터가 휑한 복도를 거닐며 물었다. 언니를 만나 한창 들떴던 디아나가 도로 울적해졌다.
“아니. 에드윈 경만 임종을 지키셨어. 그래도 스승님의 유언은 들어서 다행이지만…….”
“내가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구나.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감사 인사라니?”
디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알기로 헤스터와 바바라는 별다른 친분이 없었다. 자매의 안위를 걱정한 헤스터가 디아나 몰래 1년에 너덧 번 정도 서신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그동안 너를 잘 돌보아 주셨잖니. 수백 번 감사를 드려도 모자란 일이야.”
헤스터가 지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는 어렸을 때라 잘 기억나지 않겠지만,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네 거취가 상당히 시급한 문제였어. 어머니는 재산을 물려주지 않으셨고, 당시의 나는 도제 신세라 일을 구할 수도 없었지. 누군가에게 돈을 주어 너를 맡길 수도 없었던 상황에서 바바라 경이 흔쾌히 널 맡아 주겠다고 나서신 거야.”
“스승님께서?”
헤스터의 말대로 디아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이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하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장례식장으로 데려다주고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건네던 아흔 살 노파와, 하얀 수의를 입은 어머니의 시신, 그리고 그날 처음 만났던 언니뿐이었다. 스승님은 장례식이 거의 끝나 갈 즈음에야 다정하게 손을 내밀며 등장했었다.
‘앞으로는 내가 널 돌봐 주마.’
어린 디아나는 순순히 바바라의 손을 잡았다. 호기심과 악의로 가득한 군중 사이에서 바바라 자일스는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짐작건대 헤스터도 그걸 알아 바바라에게 디아나를 맡겼을 것이다.
“……살아 계실 적에 더 잘해 드릴걸.”
돌이켜 보면 바바라는 늘 인자한 스승이었다. 세드릭이나 채스터티에게 종종 엄격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 달리, 디아나만은 칭찬과 갈채로 길러 왔다. 디아나는 스승의 그런 면모를 그저 부족한 제자를 북돋아 주려는 것으로만 이해했지만, 어쩌면 바바라 나름대로 애정의 표현이었는지도 몰랐다. 그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이제 와 속 쓰리게 애석했다.
“바바라 경이라면 네 이런 마음도 다 알고 계셨을 거야.”
헤스터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디아나는 풀 죽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그들은 세드릭의 방 앞에 도착했다. 헤스터가 방문했다는 소식은 시종이 이미 전했겠지만, 헤스터는 성을 찾은 손님으로서 성주인 세드릭에게 인사를 전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실내에는 선객이 들어 있었다.
“에드윈 경이네.”
디아나는 슬며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가운데, 불빛 가까이로 모여 앉은 부자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따스한 광경이었다. 세드릭이 환하게 웃는 옆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디아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언니. 세드릭이랑은 나중에 인사하는 게 좋겠다. 일단 내 방에서 쉴래?”
“그러자.”
디아나는 헤스터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새 불이 꺼진 방 안은 늦가을 추위가 스며들어 사뭇 싸늘했다. 헤스터가 마법으로 손쉽게 불을 붙였다. 그리고 조금 전 에드윈과 세드릭 부자가 그러했듯 벽난로 앞에 러그를 깔고 앉아 사이좋게 담요를 나눠 덮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꼭 집에 돌아온 것 같다.”
난로의 따뜻한 온기를 쬐며 디아나가 즐거이 말했다.
“집이 그립니?”
“딱히 그런 건 아니야. 내겐 언니가 있는 곳이 집인걸.”
“그럼 지금은 집에 있는 거네?”
자매는 마주 보며 까르르 웃었다. 오래간만에 둘만 남으니 자연스레 이야기꽃이 피었다.
“그런데 언니는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문득 디아나가 물었다. 불쏘시개로 장작을 들쑤시던 헤스터가 멈칫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아버지는 왜?”
“그냥 아까 에드윈 경을 보니까 생각나서. 세드릭은 에드윈 경을 아주 끔찍하게 생각하거든. 걔는 스승님도 끔찍하게 여겼지만.”
디아나는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고, 아버지는 아예 모르니까, 세드릭이 그리 부모님을 위할 때마다 잘 이해가 안 돼. 아마도 내가 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랑 비슷하겠지?”
“그렇지 않을까? 그리고 아버지는……. 실은 나도 아버지를 뵌 적은 한 번밖에 없어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
유유히 말을 경청하던 디아나가 느닷없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하얀 얼굴에 경악이 가득했다.
“뭐?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다고?”
“내가 말한 적 없니?”
“그런 말 한 번도 못 들었어!”
이번엔 헤스터가 당황했다.
“달리 특별한 이야기도 아냐.”
“그게 어떻게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야! 어서 말해 봐!”
디아나가 재촉했다. 헤스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오래된 기억을 반추했다.
“음, 그러니까……. 몇 년 전에 어떤 남자가 아버지라면서 날 찾아왔었어. 신문에서 내 사진을 봤다고 했나. 내가 태어날 당시 어머니의 연인이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었는데, 워낙에 나랑 비슷하게 생겨서 그러려니 했지.”
“그래서?”
“그게 끝인데?”
헤스터가 의아한 기색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아나는 기가 막힌 나머지 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그게 끝이야? 그리고 바로 연락이 끊겼어?”
“나중에 연락이 오긴 했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장례식엔 갔고?”
“아니. 내가 연락을 받았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라서 무덤에만 한 차례 다녀왔어.”
마치 남의 얘기하듯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디아나는 무릎을 끌어안으며 괜스레 헤스터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말처럼 정말 특별한 구석은 조금도 없는 이야기였다.
“언니랑 비슷하다면 미남이셨겠다.”
“젊을 적엔 배우셨대. 그때 어머니를 잠깐 만나셨나 봐.”
“잠깐 만난 것치고는 언니를 용케 알아보셨네.”
“아니면 말고 식으로 한번 찔러보신 것 같아. 차림으로 봐선 그다지 부유해 보이지 않으셨거든. 그때는 나도 어머니의 빚을 갚느라 빈털터리 신세였지만 말야. 아마도 그래서 이후로 연락이 없으셨던 게 아닐까?”
어쩐지 갈수록 환상이 깨어지고 있었다. 디아나는 차마 얼굴도 모르는 언니의 아버지를 욕하진 못하고 애꿎은 담요만 쥐어뜯었다.
헤스터가 온화하게 웃으며 물었다.
“너도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싶니?”
“아니. 평생 몰랐으면 좋겠어. 무지가 축복이란 말도 있잖아.”
세상에는 수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개중에는 밝혀져야 하는 비밀도 있지만, 외려 밝혀지지 않는 편이 나은 비밀도 있었다. 디아나가 여기기에 아버지란 존재는 후자에 속했다.
“지금까지 아버지 없이도 잘 살아왔는걸.”
디아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 ✤ ✤
디아나는 내심 며칠 새로 엑서터를 떠날 생각이었다. 스승의 장례식도 끝난 마당에 계속 성에서 지내기도 불편했을뿐더러, 가족 간의 화목한 시간을 방해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침 헤스터도 볼일을 마쳤겠다, 이대로 오킹엄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이라 여겼다.
하지만 돌아갈 날은 영영 요원해졌다. 다름 아니라 채스터티가 깨어난 것이었다.
“채스터티!”
디아나가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갔을 때는 이미 바바라의 죽음이 전해진 뒤였다. 방의 분위기는 장례가 한창이던 암울한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얌전히 침대에 기댄 채로 설명을 듣는 채스터티는 시체보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세드릭은 말없이 편지를 건넸다. 죽기 전 바바라가 끝내 얼굴을 보지 못한 딸에게 남기는 마지막 전언이었다. 멀거니 편지를 바라보던 채스터티가 겨우 손을 내밀었다. 곱게 접힌 편지지를 펴내는 손길이 꼭 사시나무 떠는 듯했다.
채스터티는 하염없이 편지를 읽었다. 마치 편지에는 바바라가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이 떠나질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파르라니 질려 있던 얼굴이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작고했다는 소식에 차마 되묻지도 못했던 입에선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마디마디 끊겨 나왔다. 곧이어 눈물이 빗방울처럼 투둑투둑 떨어져 내렸다.
채스터티는 오래도록 울었다. 편지가 다 젖도록 서글프게.
“맞아. 이 사람이 날 쐈어.”
채스터티는 대번에 헤센 그윈티르의 사진을 짚었다.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낯을 구겼다.
“못된 놈. 이젠 아주 막 나가는구나. 가는 곳마다 사고인데 도대체 언제쯤 잡히는 거야?”
“사냥꾼들이 이자만 노리고 있으니 곧 단서가 잡히겠지.”
세드릭이 단조롭게 대꾸했다. 그리고 무심결에 채스터티를 스쳐보던 찰나, 사진을 쥔 채로 가늘게 떨리는 손을 발견하고 말았다.
“채스터티?”
“……이 사람이 문제가 아니야. 한 명 더 있었어.”
채스터티가 음산하게 말했다.
“제노비아 자일스.”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가 침묵하는 와중에 설리번이 코를 풀어 내며 어물거렸다.
“제노비아 자일스라면 어머니 전대의 수장 아냐? 옛날에 죽었잖아.”
“안 죽었어. 밤중에 날 찾아왔다고.”
채스터티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흘러내리는 담요를 다시 옥죄는 손길이 자못 신경질적이었다.
“그날, 제노비아 자일스의 꿈을 꾸었어. 당연히 예지였으니까 괜히 말 끊지 마, 설리번. 그 여자도 내가 자신의 꿈을 꾸리라는 걸 예지했는지, 날 찾아와서 무슨 꿈을 꾸었느냐 겁박했어. 내가 털어놓지 않으니 헤센인지 뭔지가 날 이 지경으로 만들었지만.”
“뭐야. 정말 살아 있다고?”
설리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세드릭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어떤 꿈이었는데?”
“글쎄……. 어두운 밤이었어. 제노비아 자일스가 뭘 놓쳤는지 아래로 손을 내뻗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무슨 상황인지 감도 안 잡혀.”
자일스의 예지는 미래의 단편적인 장면만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미래를 보고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지로 봤다면 제노비아 자일스가 진짜로 살아 있다는 거잖아!”
설리번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골난 채스터티가 힘껏 베개를 던졌다.
“그럼 내가 헛것을 봤게? 지금까지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죽은 사람이 어떻게 되살아나!”
“멍청아, 되살아나긴 누가 되살아났대? 애초에 죽질 않은 거잖아!”
세드릭이 동감했다.
“채스터티의 말이 일리가 있어. 내 기억으로 제노비아 자일스는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다가, 강물에서 시체로 발견됐으니까. 그만한 마녀라면 시체를 만들어서 죽음으로 위장하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하지만 왜? 그럴 이유가 있어? 생전 본 적도 없는 자기 핏줄인 채스터티를 공격할 이유도 마땅히 없잖아.”
디아나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모두가 의문스럽되, 오직 제노비아 자일스만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채스터티는 울적한 얼굴로 헤센 그윈티르의 사진일랑 내던지고 축축하게 젖은 바바라의 편지를 쥐었다. 하도 울어서 울긋불긋 짓무른 눈가에 다시금 슬픔이 어렸다.
“그 여자만 아니었어도 어머니 곁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덧없는 속삭임이었다.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로 채스터티만을 침실에 남겨 둔 채, 나머지는 응접실로 향했다. 도중에 디아나는 헤스터를 데리고 와선 금방 들었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30년 전에 죽었다던 마녀가 살아 있다니 정말 말도 안 되지 않아? 채스터티가 자일스의 예언자라지만 솔직히 덥석 믿기는 힘들어.”
“제노비아 자일스라면 확실히 살아 있어.”
하지만 디아나의 예상과는 달리 헤스터는 지극히 담담했다. 심지어는 제노비아 자일스의 생존을 확신하기까지 했다.
“혹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세드릭이 진지하게 물었다. 헤스터는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얇은 서류를 꺼냈다.
“뮈티레 요새의 기록 보관소에서 가져온 문헌입니다. 한번 읽어 보세요.”
디아나와 세드릭, 그리고 설리번은 옹기종기 모여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그다지 길지는 않지만,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종이를 넘길 때마다 세 사람의 낯빛이 점점 시퍼렇게 굳어 갔다.
설리번이 충격에 휩싸인 채로 말했다.
“말도 안 돼. 미오테티타가 아직도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고?”
“그게 문제가 아냐. 미오테티타랑 알게르 푸르게스크가 실은 똑같은 조직이었단 거잖아! 어떻게, 미오테티타처럼 순수한 학술 단체가 어떻게 알게르 푸르게스크 따위의 미치광이 모임으로 변질된 거야? 파란의 아르테미시아, 신속의 발터하임, 몽환의 카야. 이 사람들이 실제로는 알게르 푸르게스크의 미치광이들과 마찬가지였다는 거야?”
고대의 비밀결사 미오테티타와 그 일원을 남모르게 흠모했던 디아나는 크게 경악했다. 원탁에 둘러앉아 마법의 경지를 논하던 이들이 훗날 북부에서 악마 소환이나 해 대던 미치광이로 변모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힘들었다.
“제일 놀라운 건 회원 명부야. 루이자 볼크하르트, 볼프강 오르테가, 모르간 아스톨포, 칼롯타 팔리아치, 아멜리아 베가. 아홉 마법 가문의 수장 절반 이상이 명부에 이름을 올렸어. 심지어 레오나드 자일스 경도 있네.”
세드릭이 서류를 팔락거리며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명부는 그만치 익숙한 이름으로 가득했다. 대충 가늠해도 발푸르기스 평의회 의원의 삼분지 일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노비아 자일스.”
세 사람은 명부의 끄트머리를 노려보았다. 그곳에 제노비아 자일스의 이름이 당당하게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동명이인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면 명부를 오랫동안 갱신하지 않았든가요. 하지만 제노비아 자일스는 확실하게 살아 있습니다. 내 스승인 아멜리아 베가가 그리 단언했어요.”
“어, 아멜리아 베가라면…….”
디아나가 명부와 헤스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헤스터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실은 나도 최근에 사교 클럽 몬에서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알고 보니 칼롯타 팔리아치가 보낸 것이더군요. 그녀는 광인 니올로와 헤센 그윈티르를 운운하며 나를 뮈티레 요새로 끌어들였는데, 다행히도 요새로 들기 전 미리 사냥꾼들과 접선한 덕분에 무사히 요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에드윈이 양해를 구하듯 노크하고 있었다.
“문이 열려 있길래 그만.”
농롱한 자색 눈이 자상하게 휘어졌다. 세드릭이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그 사냥꾼이 설마…….”
“나는 아니야. 헤스터 솔 경이 내게 연락한 것은 맞지만, 당시 나는 동부에 있었거든. 그래서 메시나를 헤집고 다니던 다른 사냥꾼을 연결해 주었을 뿐이란다.”
에드윈은 엉거주춤 일어서는 디아나를 손짓으로 만류하며 소파에 배슥하게 기대어 섰다.
“그때는 헤센 그윈티르와 관련된 단서를 조금이나마 얻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대어가 잡혔구나.”
“아버지도 사교 클럽 몬에 대해서 아시나요?”
“물론이지. 나도 한때 몬의 회원이었으니까.”
나머지 네 사람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에드윈이 웃음을 터트리며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리들 놀랄 건 없습니다. 10년 전에 가입만 해 두고 전혀 활동하지 않았으니 지금쯤 제명되었겠지요.”
“맞다, 명부에 에드윈 경의 이름은 없었어요. 제명되신 걸 축하해요.”
“고맙구나, 설리번.”
에드윈은 장난스럽게 팔을 내저어 예를 취했다.
“뮈티레 요새의 기록 보관소에서 가지고 나온 명부라면 십중팔구 정확하겠지만, 그렇다고 명부에 적힌 사람을 모두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작금의 사교 클럽 몬은 이름 그대로 사교 단체를 표방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서로 친분을 다지는 과정에선 필연적으로 마법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겠지만요.”
“스승님도 그리 말씀하시더군요. 사교 클럽 몬은 순수한 학술 단체에 불과하다고. 악마학이나 저주술은 이미 사장된 연구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악마학은 중세에나 활발하던 연구였죠. 다만 몬의 전신인 알게르 푸르게스크가 북부에서 공공연히 악마 소환을 자행했으니, 아마도 그와 관련된 수많은 연구가 몬에 남아 있을 겁니다. 기실 악마학뿐만이 아니에요. 미오테티타, 알게르 푸르게스크, 타라벨라, 그 외에도 명칭만 다른 비밀결사가 역사상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존재했습니다. 그중 어디까지가 사교 클럽 몬의 전신인지는 모르겠으나, 짐작건대 몬에는 상상 이상의 연구가 축적되어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상아탑도 몬과 연결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어요.”
사교 클럽 몬의 원류로 추측되는 미오테티타는 무려 4000년 전에 존재했던 학술 단체다. 이후로 명맥이 끊임없이 유지되었다면, 사실상 몬에는 장장 4000년에 달하는 마법 연구가 집적된 셈이었다. 게다가 에드윈의 추측대로 베일에 싸인 상아탑과도 관계되었다면,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몬의 지적 자산이 얼마인지는 가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지식의 보고네요.”
디아나가 멍하니 혼잣말했다. 에드윈은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할 수도 있겠군요.”
“그럼 제노비아 자일스는 몬과 어떤 관계인가요? 헤센 그윈티르는 또 뭐고요? 대체 그 사람들이 채스터티는 왜 공격한 건지…….”
디아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광인 니올로와 대도 헤센 그윈티르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하지만 옛날에 죽었다던 제노비아 자일스나, 4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비밀결사는 결단코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그려 본 적조차 없는 일들이 자꾸만 주변을 맴도는 것에 디아나는 숫제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제노비아 자일스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헤센 그윈티르를 추적해 왔는데, 그는 종종 제노비아 자일스로 추정되는 여자와 함께였으니까요. 하지만 최근까지도 그들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줄만 알았습니다. 배후에 사교 클럽 몬이 있는지는 미처 몰랐어요.”
에드윈은 그리 말하며 헤스터를 돌아보았다.
“아까 들으니 아멜리아와 만났다고요. 누이가 뭐라던가요?”
“제노비아 자일스가 아주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했습니다. 몬은 그녀가 연구를 완성할 수 있도록 보조할 뿐 직접적으로 관여하진 않는다더군요.”
“아마도 아홉 인의 영웅이 남긴 유물과 관련 있을 겁니다. 헤센 그윈티르는 유독 유물에 집착했어요. 세간에는 오르테가의 본성에 침입하여 베르티 오르테가가 남긴 열두 귀물을 훔쳤던 일화만 알려졌지만, 그 외에도 다른 마법 가문 본성에 수두룩하게 침입한 전적이 있습니다.”
“유물이요?”
디아나가 깜짝 놀랐다. 석연찮은 반응에 에드윈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세드릭이 얼른 입을 열었다.
“디아나에게 두 개의 유물이 있습니다. 마그누스 프롬이 남긴 펜던트와, 퀸투스 아스톨포가 남긴 투구요.”
“그게 사실이니?”
헤스터가 표정을 싸하게 굳히며 디아나를 응시했다. 디아나는 처음 보는 언니의 차가운 눈빛에 주눅 들어 말없이 펜던트를 끌렀다.
“왜, 여름에 언니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도서관에 갔었거든. 거기서 우연히 그리그 프롬이 집필한 동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었어, 세드릭이랑 같이. 헤센 그윈티르도 거기서 만났는데…… 난 하나도 안 다쳤어! 정말 말짱한데 언니가 괜히 걱정할까 봐 말 안 했던 거야.”
디아나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세드릭이 크게 다치긴 했지만 그녀는 아주 멀쩡했으므로,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디아나는 부디 헤스터가 잠잠히 넘어가 주기만을 바랐다.
그러자 이번에는 에드윈이 물었다.
“퀸투스 아스톨포의 투구는 어디서 구했습니까?”
“아, 그게.”
디아나는 에드윈의 눈치를 보았다. 거인이 숨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노라 토르스텐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에드윈은 거인의 원수였기에, 사정이 이렇다 한들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토르스텐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꼴이었다.
“디아나의 어머니가 투구를 유품으로 남기셨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두셨어요.”
세드릭이 디아나를 대신하여 답했다. 에드윈은 별다른 의심 없이 수긍했다.
“헤센 그윈티르는 베니그노 지하성에 침입한 전적이 있습니다. 퀸투스 아스톨포의 유물도 그때 훔친 줄 알았는데, 누군가 미리 빼돌린 모양이군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런데 제노비아 자일스와 헤센 그윈티르는 아홉 인의 영웅이 남긴 유물로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요?”
불현듯 설리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아홉 인의 영웅은 전설적인 존재. 위명이 오래도록 회자된 것과는 별개로 그들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았다.
그때, 헤스터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디아나. 너는 당분간 이곳에 숨어 있으렴.”
“뭐?”
디아나는 반박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마주한 헤스터의 얼굴이 전에 없이 간절했다. 언제나 견고했던 언니가 이토록 위태로운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제노비아 자일스가 너를 노리고 있어.”
✤ ✤ ✤
이튿날, 에드윈은 성을 떠났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생명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역사상 수많은 선조들이 증명했으니까요. 그러니 헤센 그윈티르가 여러 차례 죽음을 경험하고도 멀쩡히 살아 있는 까닭은 따로 있을 겁니다.”
“까닭이라면…….”
“추측건대 헤센 그윈티르의 본체는 숨겨져 있을 거예요.”
헤센 그윈티르는 에드윈과 세드릭에게 낙뢰를 맞고서도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 모두 낙뢰를 내린 직후 헤센의 숨이 멎은 것을 똑똑히 확인했으니, 낙뢰를 맞았을 당시 그는 죽은 것이 맞았다.
사자가 이승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인형술이었다.
“중세 북부에선 수많은 금기가 행해졌다고 합니다. 공공연히 악마 소환을 자행했던 알게르 푸르게스크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아요. 저주술, 강령술, 인형술, 사술 등 지금은 엄격하게 통제되는 술법이 북부 마법 가문을 중심으로 깊게 연구되었습니다. 천년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인 만큼 인간에 대적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사사로이 원한을 쌓은 이를 해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잔악한 그윈티르> 역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고요.”
인형술이란 기본적으로 타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마법이었다. 의식을 지배하면 자연스레 육신을 지배할 수 있으므로, 인산인해로 덤비는 인간 군대에 맞설 수 있는 가장 좋은 대비책이었다. 다만 천년전쟁이 종식한 이후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발푸르기스 평의회는 일찍이 인형술을 금한 바 있었다.
하지만 금기로 지정되었다고 옛날의 연구가 일제히 사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북부 마법 가문에는 여전히 중세의 연구 자료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윈티르의 촉망받는 적자였던 헤센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인형술에는 여러 갈래가 있는데, 그중 무생물체인 인형에 의식을 옮겨 심는 술법도 있습니다. 인형을 마치 자신의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지만, 생명은 어디까지나 본체에 깃드는 만큼 인형이 망가진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헤센 그윈티르도 그런 원리로 끊임없이 부활하는 것이겠죠.”
“그럼 본체를 찾아내야 하는군요.”
“20년 전, 헤센 그윈티르가 오랫동안 잠적했던 시기가 있습니다. 사냥꾼의 끈질긴 추적으로 위험천만한 부상을 입었었죠. 아마도 그때 인형술을 부렸으리라 추정됩니다. 나는 지금까지 20년 전 헤센의 흔적을 찾아 헤맸는데, 그가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줄리모어 군도에 오래 머물렀음을 최근 알아냈습니다. 헤센 그윈티르의 본체는 아마도 그곳에 숨겨져 있을 겁니다.”
줄리모어 군도에서 헤센의 흔적을 뒤지던 에드윈은 바바라가 위독하다는 급보에 엑서터로 달려왔다. 장례도 끝났고 세드릭도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를 했으니, 이제 군도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다만 이번에는 설리번이 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붙었다.
“줄리모어 군도라면 인어의 서식지잖아! 에드윈 경, 절대 폐 끼치지 않을 테니 나도 데려가 줘요!”
설리번은 대체로 만사에 무심하지만, 이종족에 한해서라면 광적인 집착증을 자랑했다. 요정과 거인을 섭렵한 그가 인어에게로 눈길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으므로, 에드윈조차 감히 그를 만류하지 못했다.
설리번이라는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성은 무척이나 적요했다. 남은 세 사람은 궁리 끝에 마그누스 프롬과 퀸투스 아스톨포의 유물을 지하 금고에 보관하기로 했다.
세드릭이 말했다.
“세상에 아홉 마법 가문의 본성보다 방비가 단단한 곳은 없어. 유물을 보관하기에도, 네가 숨어 있기에도 일반 저택보다는 여기가 나을 거야.”
헤센 그윈티르는 무려 오르테가의 본성에 침입했던 대도. 마법회로가 깔린 채스터티의 저택도 손쉽게 뚫었을 정도로 내침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당연히 천 년에 걸쳐 보안을 겹겹이 쌓아 온 본성에 머무르는 편이 안전했다.
“그럼 조금만 신세 질게.”
디아나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제노비아 자일스와 헤센 그윈티르가 자신을 노린다는 말을 듣고도 고집부릴 만큼 겁 없지는 않았다. 외려 그들을 피해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있어 다행이라 여길 판국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디아나는 어째서 제노비아 자일스가 자신을 노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위대한 마녀 그리젤다 솔의 딸임에도 모두가 인정하는 평범한 마녀였다. 어머니의 빛나는 재능은 조금도 이어받질 못했으며, 많고 많은 별 중에서 하필이면 암흑의 별 칼리스토의 축복을 받은 비운의 마녀가 바로 디아나 솔이다.
‘대체 날 어쩌려는 걸까.’
디아나는 시무룩하게 서재에 틀어박혔다. 평소라면 기꺼워했을 어마어마한 서적도 불안으로 일렁이는 마음을 위로하진 못했다. 누군가와 대화라도 나누며 실마리를 찾고 싶었지만 헤스터는 전서구를 날리고 자료를 뒤지느라, 세드릭은 본성의 설계도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헤스터가 에드윈처럼 바로 성을 떠나지 않은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반나절 동안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던 디아나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머릿속을 잠식한 우중충한 불안감을 하루빨리 몰아내야 했다. 책으로도 안 된다면 나가서 상쾌한 공기라도 쐬는 편이 나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본성의 정원은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다. 시종들을 제하면 과연 1년에 몇 명이나 정원의 경치를 감상할까 싶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정원사의 성실함에 감사하기로 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졌질 않은가.
디아나는 훤칠한 정원수 사이를 거닐었다. 윈우드 숲을 그대로 옮긴 정원은 겨울을 맞이하여 벌거숭이가 되었으나, 의외로 녹음이 저버린 경치도 제법 운치 있었다. 군데군데 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는 침엽수가 자리했기 때문인지 마냥 삭막하지만도 않다.
별일 없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디아나는 한가로이 걸으며 그리 뇌까렸다. 이렇게라도 불안감을 억누르지 않으면 정체 모를 공포에 사로잡힐 것만 같았다. 이유도 모른 채 적의 표적이 되어 버린 무지의 공포, 자꾸만 최악의 상황만을 상정하는 상념의 공포, 그리고 본능적으로 생겨나는 섬뜩한 예감이 서서히 기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앞일을 경고하는 것처럼 내딛는 걸음 하나에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때, 낙엽을 지르밟는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참, 회로도를 어디까지 확인하시려고요? 정말 이걸 다 보실 거예요?”
시종 포사티아가 바닥에 산더미처럼 쌓인 회로도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척 듣기에도 질린 기색 다분한 목소리였으나, 세드릭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게 전부인 건 확실하지?”
“그럼요. 전부이긴 한데 정말로 다 보시려고요?”
“응.”
“어제오늘 틀어박히셔서 겨우 3층까지 보셨다면서요. 본채만도 10층이 넘는데 별채 열두 관이랑 첨탑 네 개는 언제 다 확인하시려고요.”
“정원도 봐야 해.”
세드릭이 건성으로 대꾸했다. 포사티아는 노련한 시종답게 삽시간에 경악을 갈무리했다.
“도련, 아니 주인님. 수장이 되신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잖아요. 벌써부터 이러실 필요 없어요. 그간 장례를 치르느라 힘드셨을 텐데 조금이라도 쉬셔야죠.”
“난 괜찮아.”
“혹시 성의 보안이 걱정되어 그러세요? 하지만 여기는 천 년 넘게 마법회로를 쌓고 또 쌓은 곳이에요. 아스톨포의 폭풍이나, 베가의 낙뢰가 아니면 무너질 일이 없다는 건 주인님도 잘 아시잖아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언젠가 헤센 그윈티르가 오르테가의 본성에 침입해서 열두 귀물을 훔쳐 가기도 했고.”
“오르테가는 사정이 다르죠. 거기는 미치광이 선조가 성을 홀딱 태워 먹어서 새로운 성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이곳에 비하면 당연히 보안이 취약해요.”
그러나 세드릭은 더 이상 포사티아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지러운 마법회로를 따라 바삐 움직이는 눈을 보다 못한 포사티아가 공연히 한마디 던졌다.
“정말이지, 제노비아 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 손보셨을까. 바바라 님도 보안에는 손대지 않으셨는데.”
일순 세드릭의 움직임이 멎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네? 아이고, 들으셨어요? 그게, 바바라 님이 일전에 회로도를 보시고는 보안이 완벽하다면서 마법회로는 건들지 않으셨거든요.”
“아니. 그 전에.”
이상하리만치 긴장한 소리였다. 포사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제노비아 님이요? 전전대 수장이시잖아요. 그분이 옛날에 본성의 마법회로를 전체적으로 손보셨다고 들었는데요.”
디아나는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바싹 마른 낙엽을 밟으며 나타난 사람은 낯선 여자였다. 단정하게 땋아 내린 머리는 검고 온화하게 뜨인 눈은 녹색이니, 한눈에도 자일스 일족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바바라의 장례를 치르는 내내 마주친 적 없는 얼굴이라 좀처럼 경계를 늦추지 못했다.
“누구세요?”
디아나가 물었다. 하지만 여자는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 답이 없었다. 조급해진 디아나가 재차 입을 열었다.
“스승님의 장례라면 이미 끝났어요.”
“바바라 자일스의 장례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을 보러 왔죠.”
별안간 등 뒤에서 올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간만입니다. 진저.”
헤센 그윈티르였다. 디아나는 입술을 덜덜 떨며 겨우 말을 꺼냈다.
“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정말 그게 궁금합니까? 내 생각으로는 별반 중요하지 않을 듯합니다만.”
헤센은 그리 말하며 투구와 펜던트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보다는 본인 걱정이나 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얀빛이 땅을 가로질렀다. 세 사람을 감싸 안는 원이 그려지고, 무수한 선과 도형과 기호들이 오갔다. 디아나는 황망히 마법진을 굽어보았다. 원으로 기어드는 뱀과 해독할 수 없는 언어, 이건 평범한 마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내내 침묵하던 여자, 제노비아 자일스가 말문을 열었다.
“마르고트…….”
익숙하되 익숙하지 않은 이름. 디아나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불려선 아니 되는 기억이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유황 냄새가 스멀스멀 지하에서 기어오르고, 검은 연기가 음습하게 마법진을 타고 흘렀다. 기억과는 다른 광경에 디아나는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지만, 미처 대처할 겨를이 없었다. 꺼멓게 피어오른 연기가 기민하게 세 사람을 감싸 안았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 ✤ ✤
디아나가 사라졌다.
본성의 시종까지 죄다 동원되어 성내를 샅샅이 뒤졌지만, 날이 어두워지도록 그녀의 머리털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성내에 치밀하게 깔린 마법회로는 침입자 알리는 경보를 울리지 않았으나, 제노비아 자일스가 일전에 마법회로에 손댄 적 있기에 마냥 믿을 수만도 없었다.
이윽고 윈우드 숲에도 밤이 찾아들었다. 한밤의 암막을 몰아내는 횃불이 성벽에 오르고 복도마다 촛불이 길을 밝혔다. 시종들이 저마다 디아나를 불러 대는 소리가 곳곳에서 빗발쳤지만, 서재에서 끊긴 디아나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돌아오리란 낙관적인 기대도 시들었으므로, 이제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원에서 의심쩍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마법진인 것 같은데 도저히 무슨 마법인지 모르겠어요.”
데이지는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세드릭은 말없이 횃불로 흙바닥을 비춰 보았다. 마법진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 자국이 고른 바닥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보통은 이렇게 자국이 남지 않죠?”
데이지가 세드릭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세드릭이 싸늘하게 날이 선 얼굴로 침묵하는 사이, 헤스터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세드릭 경. 마법진이 발견되었다고요?”
“오셨군요.”
간략하게 헤스터를 맞이한 세드릭이 곧바로 데이지에게 명했다.
“서재에서 책 한 권만 가져와 줘. 제목은 『고대의 암호와 상징』, 저자는 바실리오 콘살비야.”
“지금 당장 가져다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충직한 시종 데이지는 명을 받들어 잽싸게 본채로 달려갔다. 헤스터는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였다.『고대의 암호와 상징』은 대부분 도제 시절에 통째 암기하는 기본서 중의 기본서. 지금 상황에서 세드릭에게 필요한 참고 서적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러나 헤스터의 의문을 풀어 줄 생각이 없는지, 세드릭은 데이지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시커멓게 타들어 간 흙을 한 줌 쥐어 냄새를 맡았다.
“유황 냄새입니다.”
헤스터의 낯빛이 일변했다. 서둘러 마법진을 횃불에 비춰 보는 기색이 심상찮았다.
“헤스터 경도 잘 아시겠지만, 마법진의 흔적이 남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조차 대체로 불길을 일으키거나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는 경우예요. 하지만 이렇게 유황 냄새가 진하게 남지는 않습니다.”
세드릭이 흙 묻은 손을 털어 내며 팔짱을 꼈다. 헤스터는 말없이 마법진 위로 한쪽 무릎을 굽혔다. 자세를 낮추자 부정할 수 없이 짙은 유황 냄새가 풍겼다. 그들은 유황이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헤스터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경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디아나가 실은.”
“악마를 소환한다고요?”
세드릭이 건조하게 말을 끊어냈다. 헤스터가 당황하여 그를 돌아보았다.
“알고 있었습니까?”
“오래전에 알았습니다. 나는 오히려 경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군요. 디아나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에게는 무조건 숨기려고 했을 텐데.”
가만히 눈만 깜박이던 헤스터가 오래지 않아 마법진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축 처진 어깨가 어쩐지 시무룩해 보였다.
“디아나가 악마를 소환했을까요?”
“아니요. 악마 소환진과는 조금 다릅니다.”
세드릭은 그리 말하며 마법진의 중앙에서 둥글게 똬리 튼 뱀을 가리켰다.
“예전에 보았던 소환진에선 뱀이 마법진을 완전히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오히려 원 안으로 들어와 있어요.”
“악마 소환진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까?”
“어릴 적 디아나가 악마를 소환하는 걸 목격했습니다. 디아나는 내가 그때를 기억한다는 걸 모릅니다만.”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던 헤스터가 말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경뿐이라 다행이에요.”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 쌍의 눈은 도로 미련 없이 제 갈 길을 향했다. 횃불 두 개가 나란히 땅을 훑으며 마법진의 문양을 비추었다.
“역시 별에게 올리는 기도문은 없군요.”
“소환은 별에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 청하는 것이니까요. 별에게 기도한다고 악마가 소환되지는 않겠죠.”
세드릭은 왼쪽 가장자리에 그려진 모래시계를 짚었다.
“이건 악마 소환진에도 있었습니다. 모래시계는 시간의 상징. 아마도 여기와 악마가 사는 세상의 시간대가 다르기 때문에 필요한 것 같습니다.”
“흔히들 악마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라고 하죠. 하지만 악마 설화가 구전된 지역에 따라, 혹은 악마학을 서술하는 판본에 따라 지옥은 종종 지하 세상으로 대체되기도 합니다. 이제 와 악마학의 원전을 찾을 수는 없으니 지하 세상이 뜻하는 바를 알아내기는 힘들겠으나, 지층 아래에 악마의 세상이 존재한다기보단 지하처럼 어두운 세상을 은유한다고 보는 편이 맞겠죠. 짐작건대 여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일 겁니다.”
헤스터는 그리 말하며 마법진의 원을 따라 빼곡하게 적힌 문자를 살폈다.
“아바도어는 아닙니다. 생전 처음 보는 글자예요.”
“악마의 문자일까요?”
“가능성은 높습니다.”
당최 용도를 알 수 없는 마법진은 문자와 선, 각종 도형과 기호로 빼곡했다. 하지만 해석이 불가한 문자와 군데군데 흔적이 희미해진 부분을 제하면,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해야 모래시계와 지하 세상을 암시하는 기호, 그리고 원 안에서 둥글게 똬리 튼 뱀 문양뿐이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역시 뱀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악마 소환진과 가장 다른 부분이에요.”
세드릭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뱀을 굽어보았다.
자고로 마법학에서 뱀이란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때로는 독을, 때로는 탐욕을, 때로는 탈피를 은유했다. 속되게는 용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악마학에 국한한다면.
“악마.”
뱀이란 곧 악마의 상징이었다.
“마법진을 감싸는 원은 보통 마법사 개인을 뜻하지만, 어떤 마법의 경우는 세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악마 소환진에서 원을 통과하는 뱀이란 즉, 악마가 세계를 뛰어넘었다는 것을 말하겠지요. 본래의 세상을 넘어 지상에 강림한 이단자, 이계인, 혹은 피소환자. 하지만 이 마법진에서 뱀은 세계를 뛰어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본래의 세상에서 가만히 몸을 움츠리고 있어요. 마치 무언가를 보호하듯.”
세드릭이 낮게 읊조렸다.
“악마는 소환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제 세상에 있어요. 도리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디아나입니다.”
뜻하지 않은 변고.
결국 마법진이 뜻하는 것은 명확했다.
“……역(逆)소환진.”
헤스터가 황망히 중얼댔다. 세드릭은 피로에 젖은 눈을 가만히 내리감았다.
“아마도 디아나는 지하 세상으로 끌려갔을 겁니다.”
괴괴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사실에 두 사람 모두 넋이 빠져나간 모양으로 숨만 몰아쉬었다. 주변을 어른거리는 음습한 그림자의 실체가 차차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수만 가지 미래를 예상하고 덧그렸으나, 그중에도 이런 무지막지한 상황은 없었다. 예상은 모조리 비껴갔다. 마치 제 뜻대로 미래를 이룩하려던 교만을 깔깔 비웃듯이.
망연자실 발끝만 내려다보던 헤스터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끌려갔다면 되찾아 오면 그만이었다. 그곳이 땅끝이든 별세상이든 아님 지하 세상이든 관계없었다. 앞이 막막한 상황에도 실은 방도가 아주 많았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모두를 내걸 수 있는 절박함이었으므로.
덧없이 꺾였던 잿빛 눈에 다시금 이채가 돌았다. 방도는 적은 수나마 분명 있었다. 그리고 헤스터는 그 모든 방도를 행해서라도 지하 세상으로 갈 작정이었다. 디아나가 간 곳에 그녀가 가지 못할 리 없었다.
한편, 세드릭은 기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헤스터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공황에서 벗어나 지하 세상으로 갈 방도를 찾고 있었는데, 역시 가장 처음으로 떠오른 방도는 악마 소환이었다. 악마를 소환해서 성공적으로 계약한다면 지하 세상으로 갈 수도 있었다. 물론 대가가 따르겠지만, 그는 물론이요 자매를 끔찍하게 아끼는 헤스터 솔이라면 제 몸뚱이를 다 내주어서라도 디아나를 구하려 들 것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 수밖에는 없는가.
깊이 골몰하던 중에 근자의 일이 부옇게 떠올랐다.
[트라이피나! 트라이피나!]
광적으로 울부짖던 미친 거인. 그리고 거인의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 달아나던 용.
그때, 거인이 뭐라고 했더라.
하염없이 입술을 매만지던 손이 별안간 툭 떨어졌다. 아득한 충격에 휩싸인 그를 좨치듯 미친 거인의 외침이 머릿속에서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우리를 지하로 데려가 줘! 더는 여기서 살지 못해! 약속을 지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