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마지막 지상낙원
호그스밀은 잉그람 북동부 국경에 자리한 소도시였다. 전국적으로 보자면 그리 눈에 띄는 도시는 아니지만, 시(市)로 승격한 마을을 손에 꼽는 근방에서는 제법 수위권에 드는 도회지였다. 덕분에 이 일대에서는 물자와 사람이 모이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으나, 오킹엄이나 오그 같은 대도시에서 자라난 디아나의 눈엔 그저 평범한 시골 도시에 불과했다.
“대체 여기에 누가 산다는 거야?”
디아나가 의심쩍은 기색으로 물었다. 아무리 저녁이 가까워지는 시간이라지만, 시장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서성이는 사람들조차 늦가을 추위에 어깨를 움츠리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할 뿐. 나름대로 도시에서 가장 번화가에 속하는 중심 거리일 텐데도 전차는커녕 마차조차 보기 드물었다.
세드릭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근처에서 입담배를 질겅이는 노점상 상인에게 다가갔다.
“이 도시에 마법사가 산다고 들었습니다만.”
인심 좋게 웃던 상인의 얼굴이 삽시에 일그러졌다. 늙은 상인은 다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마법사?”
“어디 사는지 압니까?”
“알긴 아는데……. 그건 왜 물으시오? 아니, 그 전에 댁은 누구요?”
상인이 몸을 뒤로 내빼며 세드릭을 아래위로 훑었다. 험악한 국경 도시의 거주민답게 생면부지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억양을 보면 아래 지방에서 오신 분 같소만……. 이런 외진 곳까진 무슨 일이요?”
상인은 좀체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자 물끄러미 상인을 쳐다보던 세드릭이 매대의 상품을 가리켰다.
“전부 사겠습니다.”
“뭐요?”
“얘가 미쳤나 봐, 정말.”
디아나가 황급히 세드릭을 만류했으나, 오래간만에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곱절은 빨라진 상인의 손놀림까지 막지는 못했다. 상인은 상품을 모두 봉투에 쓸어 담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아이고, 이런 건 진작부터 말씀해 주셨어야지. 마법사는 번스타인 거리에 산다오. 여기서 왼쪽으로 15분만 걸으면 돼.”
세드릭은 묵묵히 값을 지불했다. 적잖은 지출에 애꿎은 디아나만 발을 동동 굴렀다.
“한데 손님, 조심하시오. 거기 마법사는 설인(雪人)이라는 소문이 있어.”
“설인이요?”
“그래. 여기 가까이에 설산이 있거든. 거기서 내려온 설인이라고 소문이 아주 파다해. 오죽하면 동네 애들이 그이의 초상화라면서 벽마다 웬 털북숭이 괴물을 그려 대겠어.”
상인이 심각한 얼굴로 속닥거리며 둘을 배웅했다. 의외로 세드릭이 빈정거리지 않고 고개만 기우뚱거렸다. 도리어 콧방귀를 뀐 것은 디아나였다.
“저 아저씨, 사기꾼이 분명해. 요즘 세상에 설인은 무슨 설인이야. 그냥 좀 험상궂게 생긴 마법사겠지.”
“그런가.”
“그렇다니까? 나도 몰랐는데 세상에는 순진한 사람 등쳐 먹는 못된 사람이 너무 많아. 특히 너처럼 세상 물정 모르면서 부유한 애들은 더더욱 조심해야 돼. 아까처럼 괜한 상술에 휘말리면 안 된단 말야.”
디아나는 그러면서 세드릭이 양손에 든 종이봉투를 가리켰다.
“특히 그거! 도대체 네가 그걸 어디다 쓰려고? 그럴 돈이 있으면 차라리 거지에게 적선하는 편이 낫겠다.”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괜찮아. 쓸데가 있거든.”
둘은 오래지 않아 상인이 설명했던 번스타인 거리에 도착했다. 제법 깔끔하고 소박한 건물이 늘어선 가운데, 설인이란 흉흉한 소문에 걸맞게 유독 흉가처럼 보이는 벽돌집이 눈에 띄었다.
“……저기겠지?”
“그런 것 같아.”
디아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아담한 벽돌집을 눈으로 훑었다. 검붉은 벽돌색은 양옆의 건물과 유사하나, 풍기는 냄새부터가 판이했다. 다른 집이 예쁘게 잘 가꾼 화초를 진열했다면, 마법사의 거처로 보이는 벽돌집은 꿉꿉한 냄새를 풍기는 쓰레기 더미로 가득했다. 사람 손길과 멀어진 정원은 잡초로 무성했고, 창문마다 나무판자를 덧대어 얼핏 감옥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째서 설인이란 소문이 파다했는지 충분히 납득되는 대목이었다.
“들어가자.”
디아나가 머뭇거리는 사이, 세드릭이 무덤덤하게 계단을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이 지나도록 안에서는 인기척조차 들려오지 않았으나, 세드릭은 제법 끈질겼다.
“혹시 외출한 거 아닐까?”
“아직 자고 있을걸.”
“……지금 오후 5시인데?”
그럼에도 세드릭은 흔들림 없이 초인종을 계속 눌러 댔다. 디아나는 말릴 생각일랑 깔끔히 접고 난간에 걸터앉았다. 근처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이 유심히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마저 신경 쓰기엔 지나치게 피곤했다.
이윽고 안쪽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머잖아 문이 활짝 열렸다.
“이 시간에 도대체 누구야!”
노기 충만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골목에서 훔쳐보던 아이들이 기겁하여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디아나는 정말로 눈앞의 마법사가 설인은 아닌지, 평소라면 기를 쓰며 기피했을 비합리적인 의심을 시작했다.
몸에서 풍기는 악취까진 그러려니 이해할 수 있다. 자택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열중하는 경우, 샤워를 아주 까맣게 잊어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들었으니까. 하지만 엉망진창으로 길러 낸 곱슬머리나 수염은 도무지 못 본 체 넘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색깔조차 해초처럼 푸르죽죽하다. 이렇듯 시퍼런 머리와 수염을 허리까지 기른 거구의 마법사에게 설인이랑 흉문이 붙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흉측한 사내를 마주하고도 세드릭은 한결같이 차분했다.
“어머니께서 부재하실 때마다 늦잠 자는 건 여전하구나.”
“……세드릭?”
불현듯 마법사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말간 녹안을 끔벅거리며, 세드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래간만이야, 설리번.”
세드릭이 옅게 웃었다.
설인이라고 소문난 국경의 마법사. 바로 설리번 자일스였다.
“이게 다 뭐야?”
“네 선물.”
세드릭은 금방 매대를 쓸어 온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선물이란 말에 설리번의 낯빛이 아이처럼 밝아졌다.
“……이게 뭐야?”
하지만 설리번의 얼굴은 금세 물음표로 가득 찼다.
“인형 옷.”
“이걸 어디에 쓰라고?”
“네 사랑하는 요정에게 주면 되잖아.”
설리번은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면전에서 선물을 내동댕이치면 안 된다는 기본적인 예의범절은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드릭. 못 보던 새 많이 인색해졌구나.”
“너는 여전하네. 특히 샤워에 인색하다는 점에서.”
우아하게 돌려 말하는 비난은 못 들은 척 설리번은 늘어지게 하품하며 돌아섰다. 어기적거리며 복도를 앞장서는 모습은 예전과 변함없었다.
“알고 있겠지만, 괜히 아무거나 건드리지 마. 뭐가 나올지 나도 모르니까.”
그러자 부러 멀찌감치 그를 따라가던 디아나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건드리면 뭐가 나온다는 거야? 대체 여기에 뭐가 있길래?”
“글쎄.”
세드릭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실은 그도 설리번이 독립한 이래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들이라고 바바라는 설리번과 간간히 편지라도 주고받는 듯했지만, 세드릭이나 채스터티는 괴상한 손위 형제에 대해 까맣게 잊고 지낸 지가 한참이었다.
“그 시끄러운 요정은 없는 것 같은데.”
적막하던 저택을 소란에 빠트렸던 녹색 요정 와조스키. 무리지어 다니며 마녀‧마법사들의 심장이나 노리는 이종족을 바바라가 반길 리 없었지만, 다행히도 설리번이 독립하기 직전에 발견되어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무마될 수 있었다. 당시 설리번이 이종족에 보였던 집착적인 애정이나, 저택을 떠나기 전날 와조스키의 가족을 찾아 주고 싶다고 토로했던 걸 보면 요정을 쉬이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터.
세드릭은 점차 추측에 확신이 생겼다.
“여기 아무 데나 앉아.”
설리번은 둘을 응접실로 이끌었다. 중앙에 놓인 소파와 탁자가 아니었다면, 미처 응접실인 줄도 몰랐을 만큼 더럽고 어두운 방이었다.
소파에 두껍게 쌓인 먼지를 몰래 손가락으로 쓸어 본 디아나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난 서 있어도 괜찮아.”
“마음대로 해.”
설리번은 연거푸 하품을 쏟아 내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어둑한 시야에도 뽀얗게 일어나는 먼지가 훤히 보였다.
“세드릭. 너도 서 있게?”
“난 너처럼 비위가 좋지가 않아서.”
“거참. 까다로운 건 여전하네. 한데 같이 온 여자애는 누구야?”
삽시에 디아나의 얼굴이 굳었다. 설리번이 유심히 디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낯이 좀 익은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네가 아직 내 얼굴을 기억한다는 게 너무 놀라워.”
세드릭이 한숨 섞어 말했다. 쌀쌀맞은 눈초리로 설리번을 쏘아보던 디아나가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디아나 솔이에요. 바바라 경의 도제로 마법을 배웠고요.”
“어머니의 도제라고? 다이앤타 말고 다른 도제가 또 있었나?”
“그 다이앤타가 왠지 날 말하는 것 같은데요.”
“아, 그럼 네가 다이앤타야?”
“아뇨. 디아나라고요.”
디아나는 인내심을 시험하듯 차분히 대답했다. 하지만 설리번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거렸다.
“뭐, 알았어. 만나서 반가워, 디아나 솔.”
“정말이지……. 나도 반갑고 싶네요.”
디아나가 으득 이를 갈았다. 세드릭이 재빨리 나섰다.
“어쨌든 설리번, 내가 이렇게 널 찾아온 이유는―”
“잠깐! 나 알아! 나도 네게 연락하려고 했거든.”
설리번이 자신만만하게 말을 가로챘다.
“1519년 가을 대삼각형의 별빛. 그걸 주려고 온 거지?”
“1519년의……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냐니! 만약 수장 선거가 벌어지면 네게 표를 던지는 대신, 1519년 가을 대삼각형의 별빛을 주기로 했잖아!”
세드릭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설리번이 그렇잖아도 산발인 머리를 부여잡으며 절망적으로 외쳤다.
“젠장,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너 내가 계약서 찾아올 때까지 여기 가만히 있어!”
계약서가 어디 있더라. 2층이던가, 3층이던가. 설리번이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가 응접실을 나가기 직전에 세드릭이 말문을 열었다.
“너나 가만히 있어. 기억하니까.”
지금까지와는 달리 낮고 음산한 소리였다. 설리번이 반색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기억한다고?”
“그래. 1519년 가을 대삼각형의 별빛이 아니라, 하일랜드 요정들의 노랫소리를 주기로 했다는 것까지도 아주 잘 기억해.”
느닷없는 침묵이 흘렀다. 설리번이 아주 느리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음, 세드릭. 그게 말이야.”
“내 몫의 계약서는 오킹엄에 있어. 만약 원한다면 지금 가지고 올게. 네 계약서와 비교해 보면,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금방 밝혀지겠지. 네가 계약서에 장난질만 안 했다면 말야.”
설리번은 이제 소파에 파묻히다 못해 땅으로 꺼질 기세였다.
“아냐. 그럴 필요까지는……. 네 말대로 하일랜드 요정들의 노랫소리가 맞는 것 같아. 내가 착각했나 봐.”
비참한 패배였다. 패자는 더 이상 말이 없는 법. 세드릭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비를 베풀었다.
“하일랜드 요정들의 노랫소리는 지금 구하고 있어. 연말에는 네 손에 들어올 거야.”
“고마워…….”
“그리고 오늘 내가 널 만나러 여기까지 온 이유는.”
세드릭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예리한 정적 사이로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너, 거인들이 어디 있는지 알지?”
“아니.”
설리번이 즉답했다. 세드릭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정말?”
“정말로 몰라. 거인은 이미 멸종한 종족인데, 내가 그걸 어찌 알겠어.”
“아, 거인이 멸종했다고. 멸종한 요정을 찾아 엘가 숲을 뒤진 사람이 누구더라?”
“그때는 내가 운이 좋았던 거야. 아주 운 좋게 와조스키를 만났을 뿐, 거인과는 일절 관계없어.”
단호한 대답이다. 하지만 설리번은 저도 모르게 세드릭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은 이들이 잦게 보이는 특징이었다.
세드릭은 설리번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1년쯤 되었나. 네가 호그스밀로 이사한 지가.”
“그, 글쎄. 벌써 그렇게 되었나.”
“아마 그럴 거야. 어머니께서 지나가듯, 네가 호그스밀에 정착했다고 말씀하시는 걸 듣고 의아했던 기억이 나거든. 호그스밀은 엘가 숲과 정반대 방향에 위치했으니까. 그래서 난 네가 요정을 엘가 숲에 도로 풀어 줬거나, 아님 요정의 가족을 찾아 줬다고 생각했어. 지금 요정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대충 맞는 것 같네.”
세드릭이 응접실을 한가롭게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호그스밀은 잉그람 북서부의 국경 도시. 그리고 이 근방에서 가장 최근에 벌어졌던 전쟁은 울마르크 고산 지대의 거인 섬멸전이었지.”
울마르크 고산 지대. 옛 거인들의 서식지.
동시에 거인이 자취를 감춘 곳.
“설리번. 너는 예전부터 요정, 거인 가릴 것 없이 모든 이종족에 관심이 많았어. 그런 네가 고작 ‘멸종했다’는 이유로 거인 찾기를 포기했을까? 이미 멸종했다고 알려진 요정을 만난 적도 있는 네가?”
“아냐. 난 지금 인어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동부 해안가로 갔어야지. 왜 호그스밀에 정착한 건데?”
세드릭이 날카롭게 물었다. 한참 어물거리며 대답을 찾던 설리번이 이내 어깨를 늘어뜨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렇게 적성에도 안 맞는 거짓말을 열심히 하면 좀 봐줄 수도 있잖아.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길래 캐묻는 거야? 갑자기 거인이 보고 싶어졌을 리는 없고.”
“……어머니의 유품을 거인이 갖고 있어요.”
디아나가 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가 누군데?”
“그리젤다 솔이요.”
“아, 그리젤다……. 그리젤다 솔?”
갑자기 설리번이 소파에서 튕겨 나가듯 발딱 일어섰다.
“그리젤다 솔? 위대한 마녀?”
“네에…….”
“잠깐, 그 마녀라면 괜찮을지도……. 아니지. 그 고집불통 생각을 내가 어찌 알아.”
설리번은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디아나가 부러 헛기침하며 그의 관심을 돌렸다.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채스터티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채스터티? 갑자기 걔 이름이 왜 나와?”
너무도 천진한 어투에 디아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디아나와 세드릭이 조용히 시선만 주고받자, 설리번이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걔한테 뭔 일이라도 났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받은 편지가 언제야?”
“한 달 전이던가. 수장 선거를 대신 진행해 줬으면 하시길래 엑서터에 잠시 다녀왔지. 세드릭, 네가 자일스의 차기 수장이라고 공표한 사람이 바로 나란 말이야.”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이후엔 어머니나 다른 친족에게 편지 받은 적 없어?”
“딱히 없는데. 그러고 보니 어머니도 요즘 편지가 뜸하시네. 별일 없으시지?”
설리번이 해맑게 웃었다. 그러자 세드릭과 디아나는 직감했다.
얘 모르는구나.
“설리번.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세드릭이 차근하게 말했다.
“수장 선거가 있던 날, 채스터티는 자택에서 총상을 입은 채로 발견됐어. 한동안 사경을 헤맬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지만, 최근에는 많이 호전되었고. 그리고 우리가 추측하기로 범인은 부활의 마법사, 헤센 그윈티르야. 대도, 혹은 동화 사냥꾼이라고 하면 알겠지?”
설리번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답도 미동도 없는 모양새가 조금 이상했으나, 그래도 차분해 보이기에 디아나는 내심 안도했다.
“다행이다. 많이 놀란 것 같지는 않지?”
“아니. 저건 설리번이 경악했을 때의 표정이야. 저러다 뒤로 넘어가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세드릭의 바람대로 다행히 설리번은 기절하지는 않았다. 다만 뒤늦은 사자후가 터져 나왔을 뿐이다.
“뭐라고!”
“그렇게 크게 말하지 않아도 다 들려.”
“대도가 왜! 채스터티를 왜 쏴!”
“그건 우리한테 물어보면 안 되지.”
세드릭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분명한 건 헤센 그윈티르가 거인과 관련 있다는 거야. 상아탑의 사자가 직접 말했으니, 괜한 의심은 하지 말고.”
“젠장. 채스터티, 걔는 어쩌다 그런 악명 높은 범죄자와 얽힌 거야? 막무가내인 점은 옛날부터 알아봤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설리번은 흡사 머리를 쥐어뜯을 기세로 난리를 피웠다.
“게다가 거인이라니! 이러면 내가 말할 수밖에 없잖아!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라도 와조스키에게 된통 혼날 텐데! 어떻게 여동생을 그리 매정하게 외면할 수 있냐면서!”
“식탐만 대단한 줄 알았더니, 가족을 귀하게 생각하는 착한 요정이구나. 그래서 거인이 어디 사는데? 좌표만 말해 봐.”
“좌표는 안 돼.”
설리번의 표정이 일변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강경한 어조에 자연히 세드릭의 눈매도 매서워졌다.
“그럼 말해 주지 않겠다고?”
“아니, 그건 아닌데…….”
설리번이 우물쭈물했다.
“그게, 내 멋대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야. 거기에 거인들만 사는 것도 아니고…….”
“아하. 요정도 함께인가 보네.”
“뭐? 아니! 절대 아닌데!”
누가 봐도 강하게 부정하는 강한 긍정이었지만, 세드릭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는 어리숙한 형의 실수를 덮어 주는 어진 동생이었다.
“좋아.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함부로 장소를 누설하면 안 된다는 거지?”
“응.”
“그럼 네가 안내하면 되겠네.”
“응?”
“너도 같이 가자고. 이왕이면 용을 타고 가면 좋겠네. 너 예전부터 용을 보고 싶어 했잖아.”
세드릭이 자비롭게 웃었다. 그 모습에 설리번과 디아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매사 비딱하던 세드릭 자일스가 이토록 온화하게 웃다니, 자일스 일족이 보거든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드릭은 변함없이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일단 씻고 와.”
“어?”
“난 윈터의 등에 불결한 건 안 태워. 1시간 줄 테니까 어떻게든 깨끗하게 만들어. 윈터의 장난감이 되기 싫으면 그 머리나 수염도 좀 자르고.”
마치 대단히 추한 것을 본 것처럼 세드릭이 미미하게 낯을 찌푸리며 손짓했다. 조금 전 보여 주었던 자비로운 미소일랑 온데간데없었다. 결국 설리번은 제대로 된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욕실로 쫓겨났다.
멀찍이서 형제를 지켜보던 디아나가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럼 그렇지.
설리번은 장장 2시간에 걸친 샤워 끝에 본래의 희멀건 피부를 되찾았다. 하지만 해초처럼 늘어진 머리와 수염만은 그대로였다. 세드릭은 차마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나름대로 순화하여 말했다.
“수염만이라도 어떻게 안 될까?”
“내가 이걸 기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다면 그런 말 함부로 못 할걸.”
“그럼 잘 간수하는 게 좋을 거야. 윈터가 씹어 먹을지도 모르니까.”
이번에는 디아나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데 머리가 왜 그래요? 원래는 검은색이었잖아요.”
본디 설리번은 자일스 가문 특유의 흑발 녹안을 타고났다. 디아나의 흐릿한 기억 속 설리번 자일스는 검은 곱슬머리에 키만 장대처럼 큰 소년이었으므로, 오늘 설리번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재작년인가 와조스키가 파란 머리카락을 갖고 싶다고 난리를 부리는 통에 실험을 좀 했거든. 근데 실패해서 내 머리색만 바뀌었어. 칙칙한 검은색보다는 낫지 않아?”
“여러모로 낯설긴 하네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서……. 봐요, 얼마나 낯설면 내가 당신한테 경어를 쓰겠어요.”
“그런가?”
설리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무 억울해하진 마. 나도 네가 낯서니까.”
세 사람을 일단 도시를 벗어나기로 했다. 이제 윈터는 옛날처럼 통제 불능이 아니었지만, 용을 전설로만 아는 시민들에겐 그런 사소한 사실 따위 중요하지 않을 터였다. 시민 너덧이 기절하고 비명 소리로 떠들썩한 가운데 비행하고픈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셋은 근방의 군부대 비행장을 빌리기로 합의했다.
“세드릭 자일스 경? 아, 바바라 경의 아드님이시로군요. 반갑습니다. 한데 이 먼 곳까지는 어쩐 일로……. 비행장을 빌리시겠다고요. 하하, 어디 비행기라도 가져오셨나 봅니다. 네? 용이요?”
부대의 사령관, 캠벨 대령은 용을 타고 비행하겠다는 세드릭의 말을 도무지 믿지 못했다.
“자일스 가문이 용을 다룬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경이 최근까지 용을 데리고 동쪽 국경에 주둔했다는 사실도 군에서는 제법 유명하고요. 그런데 용을 탄다니……. 그게 정말 가능한 일입니까?”
“그리 의심스럽거든 멀리서 지켜보십시오.”
그리하여 부대에서 놀고먹는 군인들이 전부 비행장으로 모여들었다. 별생각 없이 비행장에 오르던 디아나는 이편을 지켜보는 인파에 깜짝 놀랐다.
“세상에나, 저 사람들 왜 여기 있는―! 뭐야, 이 바람은!”
돌연 거센 바람이 바닥에서부터 용솟음쳤다. 비행장은 근처에서 가장 지대 높은 곳에 위치하여 특히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었다. 자연 허리까지 늘어졌던 디아나의 머리칼이 마구 휘날리기 시작했다.
“이걸로 묶어.”
세드릭은 급한 대로 옷깃을 묶었던 끈을 풀어 건넸다. 디아나가 얼른 머리를 묶었으나.
퍽.
말총머리가 뭉텅이째로 뺨을 찰싹 갈겼다. 엉겁결에 머리로 얻어맞은 디아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이젠 하다못해 내 머리칼로도 맞는구나.’
디아나는 우울한 기분을 겨우 떨쳐 내며, 사방으로 휘날리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으려 했다. 하지만 자꾸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 몇 가닥이 빠져나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몇 가닥을 쫓아 손이 허공을 유영하던 와중에 불현듯 손끝으로 낯선 온기가 닿았다.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양손을 내렸다. 그러자 매끄러운 손길이 그녀를 대신하여 붉은 머리채를 쓸어 올렸다.
“내가 할게.”
등 뒤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위로 올라가면 바람이 더 거세질 거야. 묶는 것보단 땋는 게 나아.”
세드릭이었다.
디아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구하듯 끝자락만 매만지던 손이 그제야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조금 억센 손가락이 귀 뒤 여린 살을 스칠 때는 저도 모르게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그러고 보니 머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디아나는 대개 머리를 풀고 다녔고, 머리를 자를 때는 거울에 비춰 보며 마법으로 직접 가위를 움직였었다. 이렇듯 뵈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이 머리칼을 매만진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언니 헤스터조차 전적이 없는 일.
어쩐지 디아나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래서 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세드릭에게 말을 걸었다.
“머리 잘 땋네. 누구한테 배웠어?”
“채스터티가 옛날엔 머리가 길었잖아. 땋아 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억지로 배웠어.”
그런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디아나가 그 사실을 알아챘을 무렵엔 이미 대답할 적기를 놓친 뒤였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속으로만 전전긍긍할 무렵, 다행히도 세드릭이 땋은 머리끝에 리본을 묶으며 이 껄끄럽기 그지없는 적막도 끝이 보이는 듯했다.
“다 됐어.”
그에 디아나는 머뭇거리며 뒤를 돌았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고맙다는 인사는 건네야 옳았다. 하지만 세드릭의 얼굴로 올라가는 눈길은 무거운 바위가 매달린 듯 더디기만 했다. 아래턱, 입매, 콧날. 얼굴을 더듬어 오르는 시선이 마침내 신록으로 우거진 눈과 맞닿을 무렵.
“세드릭! 나도 머리 묶어 줘!”
멀리서 설리번이 소리쳤다. 세드릭이 왈칵 얼굴을 구겼다.
“네가 묶어!”
“수염도 묶어 줘!”
세드릭이 이를 갈며 돌아섰다. 그렇잖아도 대중없이 길러 산발이던 머리와 수염이 아주 승천할 기세로 설리번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근처 군인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설리번을 손가락질하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디아나는 가만히 숨만 내쉬었다.
조금 전 몹시 이상했던 기분은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나 재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는지 정체를 추측하기도 어려웠다. 마치 애당초 그런 감정 따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하게 정돈된 마음이 아리송하기만 했다.
디아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찰나의 감정을 마음에 둘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저 멀리서 세드릭은 설리번의 악성 곱슬머리와 힘겹게 사투를 벌이고 있지 않나.
“수염은 내가 묶을게!”
디아나가 황급히 그편으로 달려갔다. 가지런히 땋은 머리가 바람결에 가벼이 나부꼈다.
황홀감이 바람을 타고 솟구쳤다.
디아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아래를 굽어보았다. 비행장을 가득 메운 군인들도, 그들이 내지르는 환호성도, 작별 인사를 대신하여 허공으로 띄워 올리던 군모도 눈 깜짝할 새 멀어졌다.
어느덧 손바닥만큼 작아진 군부대를 뒤로한 채 용은 거침없이 하늘을 유영했다. 날카로운 주둥이로 세찬 바람을 가르며, 휘장처럼 드넓은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적막한 천공을 가로질렀다.
이렇듯 하늘을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각국마다 비행기 개발에 공을 들이는 시대라지만, 디아나는 아직 비행선이니 비행기니 하는 기계에 타 보지 못했다.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까닭에 티켓이 값비쌌을뿐더러, 평소 비행의 당위성을 찾지 못했던 탓이다. 하늘은 춥다. 더구나 언제 돌풍이 불지 몰라 위험했다. 그럼에도 논리적인 이유 없이 하늘을 동경하는 이들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전신을 감싸는 부유감이 무척이나 흔흔하고, 팔을 내뻗을 때마다 손끝을 스치는 바람결이 신기로웠다. 생전 처음으로 거스르는 중력에 가슴이 뛰었다. 일평생 이토록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소소한 짐마저 모두 내던지고, 발걸음마다 따라붙던 과거를 따돌리니 비로소 자유가 보였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허파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파란 숲과 파란 산이 파도처럼 물결쳤다. 메마른 돌산에 버려진 고대의 흔적에 못내 가슴 저몄다. 그리고 하늘. 날개를 위한 가교요,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천장. 바야흐로 누구도 감히 발자국을 남기지 못할 영원한 미개척지.
용의 등에 올라타, 아무도 없는 천공을 누비며 디아나는 환호했다. 마치 옛이야기 속 모험가라도 된 것처럼 자유를 만끽하며 잠시 삶의 궤적을 벗어난 시간은 참으로 달콤했고, 달콤한 만큼 쏜살같이 지나갔다.
꿈결 같은 한때였다.
“우웩.”
땅에 발 디디기 무섭게 설리번은 나무를 붙잡고 속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설리번이 오늘 무얼 먹었는지 지켜보는 것만큼 매스꺼운 일도 없었으므로, 세드릭과 디아나는 자연스레 뒤돌아섰다.
“울마르크 고산 지대에서도 꽤 깊숙하게 들어온 것 같지? 설마 국경을 넘은 거 아냐?”
“그럴지도…….”
깊디깊은 골짜기였다. 빽빽하게 자리 잡은 나무들은 금방이라도 하늘을 꿰뚫을 듯 솟구쳤고, 바닥을 덮은 풀숲은 무성하기 짝이 없었다. 괴괴한 사위에는 지저귀는 새조차 전무하니, 과연 한 번이라도 인적이 닿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연 그대로의 상태였다.
디아나가 마녀다운 호기심을 발휘하여 고목의 밑동을 만지는 동안, 세드릭은 윈터의 투정을 받아 주느라 정신없었다.
“그래. 오랜만이야. 나도 당연히 네가 보고 싶었지.”
바바라를 대신하여 발푸르기스 평의회에 참석했던 내내 세드릭은 안건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평의회에 대참하는 것도 급박하게 결정되었기에 미리 준비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픈 모친에게 하나하나 따져 물어볼 수도 없었다. 생소한 안건은 폭포처럼 쏟아지는데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니, 그간 윈터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디아나와 설리번을 태운 것도 미안해. 네가 다른 사람들 태우기 싫어하는 거 당연히 알지. 그런데 아까 말했잖아.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세드릭은 삐친 윈터를 아주 능란하게 달랬다. 비위 맞추는 소리가 어찌나 막힘없던지, 용에게 썩 좋은 감정이 없는 디아나조차 기가 찬 표정으로 세드릭을 돌아볼 지경이었다.
“사탕을 달라는 거야? 나중에 저택으로 돌아가면 줄게. 지금은 없어.”
“쟤도 참 어지간하다.”
설리번이 핼쑥한 얼굴로 다가왔다. 디아나가 떠름하게 물었다.
“저기,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 당장 들어가서 누워야겠어.”
“들어가다니요? 어딜?”
설리번은 대답할 여력조차 없는지 그대로 디아나를 지나쳤다. 그가 향한 곳은 가까운 바위 더미였다. 커다란 바위가 디아나의 키만큼 높게 쌓인 모양새가 자못 위압적이었다.
설리번은 힘겹게 바위 더미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엘가, 자이거, 소나투레, 주제나.”
뜻을 알 수 없는 단어의 나열이었다. 하지만 바위는 고요했다. 설리번이 관자놀이를 긁으며 재차 속삭였다.
“요엘람의 꿀.”
침묵이 이어졌다. 설리번의 미간에도 차츰 골짜기가 새겨졌다.
“발카라 전설.”
“…….”
“오, 수톨베르크는 영원하라!”
“…….”
“괴링, 괴링, 괴링!”
디아나는 숨죽인 채 설리번의 눈치를 살폈다. 겨우 윈터를 타이른 세드릭이 때마침 이편으로 다가왔다.
“뭐 하는 거야?”
“암호를 까먹었나 봐.”
“아주 가지가지 하네.”
세드릭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리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암호를 모르면 아예 방법이 없는 거야?”
“말 시키지 마. 지금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 상태라고.”
“대답하는 거 보니, 집중하려면 아직 먼 것 같은데.”
순간 울컥한 설리번이 눈을 부라렸지만 그조차 잠시였다. 어지간히 초조한 듯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고는 있으나 족족 실패였다. 이러다간 산속에서 밤을 맞을 기세였다.
“여기 밤은 무섭단 말야. 빨리 암호를 생각해 내야 하는데…….”
설리번은 안절부절못했다. 디아나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재촉했다. 그렇잖아도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에 오싹하게 소름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에서 보냈던 끔찍한 밤을 기억하는 디아나로선 산속에서 밤을 보내는 것만은 무조건 피하고 싶었다.
세드릭이 조용히 말했다.
“윈터가 있으니 날짐승이 함부로 접근하진 못할 거야.”
아무리 사나운 날짐승도 감히 용에겐 비견하지 못했다. 디아나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윈터를 올려다보았다. 용케 칭찬을 알아들은 윈터가 뻐기듯 턱을 도도하게 들어 올렸다.
“윈터? 용?”
그런 와중에 설리번은 홀로 진중했다. 언젠가의 기억이 실마리가 되어 그의 머릿속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트라이피나! 자일스의 용, 트라이피나를 찾아! 그녀만이 우리를 이끌 수 있어!]
메아리치듯 반복되었다. 미친 거인이 외치던 소리가.
“……트라이피나.”
설리번이 엉겁결에 속살거렸다. 너무 자그마해서 모두가 미처 듣지 못한 소리였다. 하지만 바위 더미는 충실한 문지기답게 암호를 접수했다.
콰르릉.
갑자기 바위 더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르르 무너지듯 두 갈래로 갈라지는 바위에 놀라 세 사람이 얼른 뒤로 물러섰다. 곧이어 바위 더미에 가려져 있던 거대한 땅굴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건 대체…….”
아무도 쉬이 나서지 못하는 상황, 설리번이 먼저 익숙하게 땅굴에 발을 들였다.
“내려가자.”
디아나가 머뭇거리며 땅굴로 내려가고, 세드릭이 뒤따랐다. 마지막으로 고집스레 스노우볼로 들어가지 않은 윈터까지 기세등등 땅굴로 들어가자, 바위 더미가 도로 닫히기 시작했다. 굉음을 내며 닫힌 바위 문에는 가느다란 틈조차 없었다. 빛 한 점 들어올 구석이 없었으나, 기묘하게도 땅굴은 어둡지 않았다.
기나긴 땅굴의 맞은편. 빛은 거기서 쏟아지고 있었다.
“저기예요?”
디아나가 못내 불안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설리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부터는 안전해. 암호를 맞히지 못하면 들어올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암호가 대체 뭐였어요?”
“트라이피나.”
그러자 세드릭이 뜻밖이라는 듯이 물었다.
“트라이피나라면 칼라일 자일스의 용이잖아. 200년 전에 사라지지 않았나?”
“그럴걸.”
“그런데 암호가 트라이피나라니……. 너무 뜬금없는데.”
“여기 암호는 원래 주기적으로 바뀌어. 궁금하면 이따가 거인을 만나 물어보든지.”
설리번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러고는 뒤편을 흘깃거리며 소리 죽여 물었다.
“그런데 너 용은 저대로 데려갈 거야?”
“……영 스노우볼로 들어갈 생각을 안 하네.”
세드릭은 윈터를 설득하길 반쯤 포기한 듯했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 줄은 귀신같이 알아챈 윈터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설리번을 쏘아보았다. 뜨끔한 설리번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뭐어, 다들 좋아하겠네. 용은 오랜만에 만날 테니까.”
세 사람과 용 한 마리는 계속해서 땅굴을 걸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걸을수록 이상함을 느꼈다. 땅굴은 지극히 인위적이었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굴이라기엔 거인이나 용도 쉬이 드나들 만큼 거대했고, 무엇보다도 암호를 말해야 열리는 조금 전의 바위 더미는 마법이 분명했다.
가장 이상한 지점이 바로 거기였다. 그녀가 알기로 거인이나 요정은 마법을 부리지 못했다. 그 말인즉 어떤 마녀가 이종족을 위해 이렇듯 훌륭한 은신처를 마련했다는 것인데, 당최 누군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애당초 마녀란 종족은 핍박받는 타인을 위해 나설 만큼 이타적이지 않을뿐더러, 마법 사회는 이종족을 오래도록 배척해 왔다.
누가 뚫었는지 아리송한 굴도 마침내 끝이 보였다. 초록 잎사귀로 가려진 출구를 헤쳐 앞으로 나아가자, 이윽고 눈부신 햇살이 눈을 찔렀다. 본능적으로 손차양하며 빛을 가리던 디아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여기는 굴. 태양이 보일 리 없었다.
“저건 마법이야.”
설리번이 무성한 나뭇잎을 쳐 내며 말했다. 그에 디아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마법이라고요? 저게?”
“마법으로 만든 가짜 태양이지. 상식적으로 땅속에 태양이 있을 리가 없잖아.”
디아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멸종 위기에 처한 이종족을 위해 지하에 가짜 태양을 선물한 마녀. 역사상 수많은 괴짜가 존재했으나, 이토록 터무니없는 자는 듣도 보도 못했다.
“도대체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네 어머니지.”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설리번은 그녀의 반응은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멀찍이 앞서 나갔다.
“여기 거인들은 대체로 마법사를 배척하지만, 그리젤다 솔의 딸이라면 흔쾌히 맞이할 거야. 아무렴, 그녀의 마법 덕분에 지금까지 연명했는걸.”
밀림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윈터를 다독이던 세드릭이 그즈음 디아나를 따라잡았다. 가만 서 있는 디아나의 뒷모습에 의아하던 찰나,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표정을 마주하고는 세드릭도 절로 심각해졌다.
“무슨 일이야?”
“이 굴을 만든 사람이 어머니래.”
디아나가 울적하게 토로했다. 속에 쌓아 둔 말이 많은지, 입술을 달싹거리며 고민하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본래 디아나라면 애써 속말을 씹어 넘겼겠으나, 세드릭이 마치 이어질 말을 기다리듯 침묵하자 충동적으로 입을 열고 말았다.
“그냥. 어머니는 이종족을 위해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까지 저지르셨는데, 죽기 전에 날 한 번이라도 보러 오는 게 그렇게나 힘드셨나 싶어서…….”
디아나는 낳아 준 어머니를 장례식장에서 처음 보았다. 관에 누워 있는 어머니는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웠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 생기 넘치는 어머니를 디아나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세드릭은 당황했다. 섣부른 위로는 안 하느니만 못하기에 쉬이 말문을 열 수조차 없었다. 갑작스러운 적막 속에서 오직 윈터만이 달큼한 과일에 눈이 멀어 샐샐거렸다.
“너네 거기서 뭐 해! 빨리 와!”
별안간 설리번이 멀리서 외쳤다. 평소 굼뜨던 설리번 자일스는 어디 갔는지 벌써 멀찌감치 달해 있었다. 더구나 곁에는 초록 요정 와조스키도 함께였다.
세드릭과 디아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과일을 삼키기 바쁜 윈터는 뒤에 남겨 둔 채였다. 몇 년 만에 보는데도 조금도 변치 않은 와조스키가 왜인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들을 맞이했다.
[설리. 내가 함부로 외부인을 데리고 오면 안 된다고 그랬지?]
“그, 그렇기는 한데…….”
잔뜩 주눅 든 설리번이 세드릭과 디아나를 열심히 힐끔거렸다. 마치 너희가 항변해 보라는 듯 등을 떠미는 눈빛이다.
“실은 여기 빨간 머리 여자애가 그리젤다 솔의 딸이야. 너도 그리젤다 솔이라면 잘 알잖아.”
[그리젤다?]
“여기 이 굴을 만들어 준 마녀 말이야.”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와조스키가 이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실그너가 항상 얘기하는 그 마녀 말이구나? 아우, 얼마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하던지!]
“실그너라면 그 미친 거인?”
[응. 그런데 조용히 말하는 게 좋을걸. 실그너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와서 방문객을 꼼꼼히 확인하잖아. 분명 이번에도 곧 나타날…….]
갑자기 땅이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나뭇가지가 격하게 꺾이는 소리와 쿵쾅거리며 이편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뒤를 이었다. 실로 위협적인 기척이었다.
와조스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날개를 두어 번 퍼드덕거렸다.
[봐. 금방 왔잖아.]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어둑한 자취가 삽시에 볕을 집어삼켰다. 디아나와 세드릭, 그리고 설리번을 모두 감싸고도 남을 만치 거대한 그림자였다. 디아나는 차마 고개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림자의 무게에 짓눌려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실그너, 실그너. 여기 네가 그리도 좋아하는 그리젤다 솔의 딸이 왔, 으악!]
거인 실그너가 매정하게도 초록 요정 와조스키를 손짓으로 사납게 쫓아냈다. 분노한 와조스키가 실그너의 어깨를 꽉 물어 보았지만, 강철처럼 단단한 거인의 피부를 뚫기란 여간해서 어려운 일이었다. 실그너는 와조스키를 어깨에 매단 채로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이윽고 거인의 얼굴이 세 사람 앞에 놓였다.
[……에드윈 베가.]
그리고 세드릭에게로 모이는 흉흉한 눈빛.
[이번에도 우리를 죽이려고 왔나?]
수십 년에 걸쳐 퀴퀴하게 묵힌 증오의 냄새가 났다. 한시도 잊지 못하여 머릿속으로만 수천, 수만 번 죽여 온 적. 비로소 일생일대의 원수를 마주한 거인 실그너는 끓어오르는 기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시끄럽게 조잘대는 요정은 더 이상 그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저 죽이고픈 욕망으로 가득했다. 먼 옛날 까맣게 타 죽은 동족의 송장에서 풍기던 숯내가 콧잔등에서 비릿하게 올라오는 듯했다.
거인 실그너는 거대한 주먹을 천천히 들었다. 마법사란 본디 끈질긴 존재. 온몸이 짓무를 때까지 무자비하게 때려서 아주 고통스럽게 죽일 작정이었다. 그만 죽여 달라 간청하는 소리를 듣기 전에는 죽일 수조차 없었다.
크르릉!
불현듯 지척에서 독한 살기가 느껴졌다. 실그너는 더디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빼곡한 나무 틈으로 칠흑처럼 어두운 무언가가 그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찢어 죽일 듯 희뜩한 금안.
일순간 실그너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몽롱했다.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원수가 목전에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만치 거센 충격이었다.
[트라이피나! 트라이피나!]
거인 실그너가 돌연 울부짖으며 용에게로 성큼성큼 달려갔다.
[우리를 지하로 데려가 줘! 더는 여기서 살지 못해! 약속을 지켜!]
거인의 느닷없는 돌격에 윈터가 화들짝 놀라 반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간발의 차로 용을 잡지 못한 거인 실그너는 금방 윈터가 있던 자리에서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모든 걸 잃어버린 양 구슬픈 울음소리였다.
그리고 겨우 긴장에서 풀려난 디아나는 떠름한 표정으로 거인을 지켜보았다.
대체 뭐 하자는 거지.
“난 윈터에게 가 볼게.”
세드릭은 창백한 얼굴로 황급히 되돌아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금 전 그리도 흉악하던 거인은 곡하느라 세드릭의 존재를 잊은 모양이었다. 세드릭이 거인을 지나쳐 무사히 땅굴로 들어가고서야 디아나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당면한 문제는 하나뿐이었다.
“참, 세드릭이 에드윈 경을 꼭 빼닮았다는 걸 깜빡했네.”
설리번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잖아도 거센 비행으로 아직 배 속이 울렁거리는데 거인이 우는 소리까지 겹쳐지니 아주 죽을맛이었다.
“와조스키. 혹시 내가 없는 새 쟤가 더 미친 거야?”
[실그너는 원래 미쳤잖아.]
“더 이상해진 것 같은데.”
설리번은 고개를 내저으며 반쯤 뒤돌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디아나를 보았다.
“그만 가자, 진저.”
“거인은요? 그냥 놔뒀다가 세드릭을 뒤쫓기라도 하면…….”
“괜찮아. 실그너는 미쳤거든.”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설리번은 자세히 설명해 줄 의향은 조금도 없는지, 가던 길을 다시 내걸었다. 불안스럽게 뒤편을 흘깃거리던 디아나도 얼른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저기, 그런데 내 이름 또 까먹은 거죠?”
“음…….”
설리번은 정곡이 찔린 사람답지 않게 한가로이 눈동자를 굴려 댔다. 한눈에도 적당한 화젯거리를 찾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디아나는 진심으로 고민에 빠졌다. 관심 없는 것엔 정말 일말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설리번 자일스의 성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쯤 되니 그의 기억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까 윈터가 너무 빨리 날아서 까먹은 것뿐이야.”
게다가 이렇듯 말도 안 되는 변명이나 하는 걸 보면.
디아나는 책망하는 눈빛으로 말없이 설리번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일평생 눈치란 걸 키워 본 적 없는 설리번은 디아나가 자신을 어찌 생각하건 말건,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었다.
“다 왔다!”
동시에 울창하던 수림도 끝났다. 천장을 찌를 듯 훤칠한 나무 대신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야트막한 호수였다. 햇빛이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는 물결이 손님을 환영하듯 잔잔히 일렁거렸다.
호숫가에서 노닥이던 초록 요정 두어 명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날아왔다.
[어머나, 설리잖아. 오랜만이야.]
[옆에 꼬마 아가씨는 누구?]
고작 손바닥만 한 요정이 꼬마 운운하는 것이 참으로 가소로웠다. 하지만 저리 작게만 보여도 무리 지으면 마녀의 심장을 파먹을 정도로 흉악해지는 종족이 바로 요정.
디아나는 애써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디아나라고 해요. 어머니의 유품을 찾으러 왔어요.”
[네 어머니가 누군데?]
“그리젤다 솔이요. 듣기로는 여기 굴을 만드셨다고 하던데요.”
초록 요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으응, 나는 잘 모르겠는걸. 한데 너 토르스텐의 허락을 받은 거야?]
디아나는 어물거리며 대답을 미루었다. 대신 설리번이 사뭇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토르스텐이 많이 화내겠지?”
[어머, 그럼 허락도 없이 데리고 온 거야? 설리, 너 큰일 났구나.]
요정들이 까르륵 웃으며 서로의 손뼉을 쳤다. 디아나는 풀 죽은 설리번을 툭툭 건들며 자그맣게 속살거렸다.
“토르스텐이 대체 누군데요?”
“여기 지도자야. 거인인데 무진장 근엄해.”
“나랑 세드릭이 허락 없이 들어온 걸 알면 큰일 나요?”
“너는 괜찮을걸. 그리젤다 솔의 딸이니까.”
설리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문제는 세드릭이랑 나지. 나야 와조스키랑 다른 요정들이 열심히 변호해 주겠지만 세드릭은……. 뭐, 용이 곁에 있으니 괜찮을 거야.”
대단히 미심쩍은 말이었다. 하지만 설리번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은지 와조스키에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난 그만 잘래. 여기까지 날아오느라 죽을 뻔했어.”
[그래서 아까부터 죽상이었구나? 그래, 어서 자.]
와조스키를 비롯한 요정들이 눈을 반짝이며 힘껏 설리번의 어깨를 밀었다. 설리번은 요정의 손짓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풀밭에 누웠다. 곤한 눈을 몇 차례 깜박이더니 금세 수마에 빠져들었다.
[설리. 자?]
요정들은 한동안 설리번의 눈을 까뒤집거나 장난삼아 콧구멍을 벌려 댔다. 그러고는 오래지 않아 고불고불한 머리카락이나 수염에 몸을 뉘며, 제각기 편안한 자리를 마련했다. 한둘 하품하며 잠에 빠지고, 한둘 설리번의 머리카락을 여러 갈래로 땋으며 소일거리 삼았다. 오가는 말소리마저 잦아든 지극히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디아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더는 여기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설리번과 요정 사이에는 쉽사리 간섭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가 어려 있었다. 너무 친밀해서 본의 아니게 남을 배척하는 분위기였다.
디아나는 걸어온 길을 차차 되짚어 나갔다. 어느덧 거인이 우는 소리마저 사라진 굴은 한없이 고요했다. 곡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통곡하던 거인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땅굴로 도로 들어가기 전에 디아나는 나무에서 탐스럽게 익어 가는 과일 여럿을 미리 챙겼다. 행여 나중에 굴의 재산을 함부로 갈취했다며 요정이나 거인이 날뛸지도 모르지만, 워낙에 나무가 무성해서 열매 몇 개쯤 사라진 건 흔적도 남지 않을 터였다.
과일은 모두 용을 위한 것이었다. 대경하여 땅굴로 날아가 버리기 전까지, 윈터는 어지간히도 배가 고픈지 과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려 셋이나 등에 태우고 날았으니 굶주릴 만도 했다. 그러니 용이 만약 허기를 못 이겨 날뛰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큰일이었다. 몇 해 전, 저택에서 종종 목격했던 용의 흉포한 모습을 디아나는 생생하게 기억했다. 국경에서 훈련을 거쳤다곤 하지만, 아직까지 용에 대한 믿음은 굳건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땅굴로 오르며 심지어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
‘혹시 용이 너무 배고파서 세드릭을 잡아먹지는 않았겠지?’
팔에 오소소 소름이 올라올 정도로 끔찍하며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불안해진 디아나는 걸음에 점차 속도를 붙였다. 역광을 받아 앞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빠르게 전진했다.
디아나는 머잖아 땅굴의 중간 지점에서 거대한 용을 발견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온갖 열대과실이 성벽처럼 주변에 낭자한 가운데, 밤처럼 검은 용은 세드릭을 품에 안으며 경외와 사랑으로 가득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치 연모하는 연인을 바라보듯, 혹은 존경하는 주군을 우러르듯 열렬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세드릭. 용에게 몸을 기댄 채로 무어라 속삭이는 하얀 옆얼굴이 유독 눈에 박혔다. 누구보다 익숙한 얼굴인데 어째서 새삼스러울까.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디아나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세드릭은 편안히 웃고 있었다. 가시를 세우지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지도 않았다. 가족 앞에서조차 늘 단정하던 세드릭 자일스가 이토록 풀어진 모습을 디아나는 처음 보았다.
크르렁.
디아나를 발견한 윈터가 갑자기 이편을 무섭게 경계했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하던 디아나는 문득 세드릭과 눈이 마주쳤다.
“디아나?”
세드릭이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반쯤 일으켰다. 디아나는 윈터의 눈치를 살피며 몇 걸음 내디뎠다.
“그냥…… 별일 있나 싶어서.”
윈터와 시선을 맞대며 조심스레 다가오던 디아나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휘청하고 말았다. 세드릭이 황급히 튀어나가 그녀를 붙들었다. 덕분에 넘어지진 않았으나, 균형이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품 안 가득하던 과일이 죄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 고마워.”
디아나가 놀라 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세드릭은 디아나를 놓아주고선 말없이 떨어진 과일을 줍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른 과일들도 많은데 왜 주워.”
“윈터가 좋아해.”
그러자 디아나도 사방으로 굴러가는 과일을 함께 주워 담았다. 이거로나마 용의 호의를 사면 좋겠다만, 세드릭과 계속 붙어 있는 탓인지 이편을 노려보는 윈터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디아나는 까닭 모르게 자신을 싫어하는 용을 도통 좋아할 수 없었으나,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의 미움을 받아 고생하긴 싫었으므로 눈치껏 세드릭을 윈터의 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하여 세드릭은 윈터의 품에, 디아나는 멀찍이 그 맞은편에 자리한 아주 이상한 형국이 되었다. 디아나는 눈치 없기로는 제일인 설리번 자일스를 흉내 내어 윈터의 사나운 시선을 못 본 체 외면했다. 그리고 세드릭은 윈터의 주둥이에 과일을 들이밀며 애써 관심을 돌리려 했는데, 다행히도 윈터는 아직껏 식욕에 충실한 어린 용이었다.
윈터가 달콤한 과일을 맛보는 동안, 디아나와 세드릭은 소곤소곤 대화를 주고받았다.
“설리번은 어때? 적성에도 맞지 않는 비행하느라 꽤 고단해 보이던데.”
“그렇잖아도 지금 풀숲에서 자고 있어.”
“별다른 말은 없고?”
“물어볼 새도 없었는걸.”
디아나가 출구 쪽을 살피며 목소리를 죽였다.
“저기, 그런데 넌 웬만하면 여기서 윈터랑 같이 있는 편이 낫겠어. 여기 지도자가 토르스텐이라는 거인인데, 설리번이 말하는 걸로 보면 아무래도 네게 호의적일 것 같지가 않아.”
“그렇겠지.”
세드릭은 담담히 수긍했다. 마치 예상했다는 태도에 공연히 디아나만 마음이 불편해졌다.
“억울하지 않아? 네 잘못도 아닌데…….”
세드릭의 아버지, 에드윈 베가는 수년 동안 국경에서 복무하며 거인을 학살했다. 지지부진했던 거인 토벌전은 그의 공적에 힘입어 울마르크 고산 지대에서 거인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남은 거인들은 이렇듯 깊은 골짜기에 숨어 살고 있었으나,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그러했다.
“아버지도 원하신 일은 아니었어.”
세드릭이 묘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대꾸했다.
에드윈 베가는 천성적으로 살육을 꺼리는 마법사. 어딘지 잔혹한 구석이 있는 아멜리아와 달리 온화한 성품을 지녔기에, 오베론 베가의 강대한 낙뢰가 아멜리아가 아닌 그에게로 전해진 것이 다행이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10년 전, 로렌 베가의 죽음으로 상황은 돌변했다.
당시는 잉그람과 반제가 연합한 거인 토벌전이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시기였다. 인간 군대는 흩어져 살던 거인들을 한군데로 몰아넣는 데는 성공했지만, 인간의 무기는 아직 그들을 떼로 죽일 만한 위력은 못 되었다. 자연히 거인의 역습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인들은 평소처럼 국경의 어느 산간 마을을 덮쳤다. 거주민이 적어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그중 로렌 베가가 포함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로렌 베가는 일찍이 아멜리아 베가가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한 마녀. 거인 토벌엔 일말의 관심도 없던 베가가 공분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에드윈. 네가 가렴.’
수장인 아멜리아를 비롯한 일족의 뜻이 그러했다. 하지만 에드윈은 주저했다. 파괴보다 창조를 높게 치는 마법 사회에서 올곧게 성장한 마법사답게, 그는 마법으로 생명을 앗아 가는 행위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내가 가면 낙뢰로 거인을 학살하게 될 거야.’
‘그러니 네가 가야지.’
아끼던 후계자를 잃어 시름에 잠긴 아멜리아는 아우의 항변을 철없게 치부했다.
‘너는 오베론 베가를 계승한 마법사. 국경으로 가서 감히 나의 후계자를 죽인 거인에게 단죄를 내리려무나. 그것이 너의 책무야.’
‘나의 책무라고? 그저 낙뢰를 계승했다는 이유만으로 죄를 강요당하는 게 아니라?’
‘어찌 생각하든 네 자유란다. 다만 내 입으로 마법사의 의무 운운하는 일은 없길 바라.’
마녀‧마법사들은 1687년 체결된 발롬피에 협약에 따라 각국의 의무에 속박되었다. 그리고 잉그람 정부는 <잉그람 마법사의 의무>에 마법사를 강제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었다. 전쟁도 그중에 하나였다.
누이가 그런 강제적인 수단까지 운운할 줄 미처 몰랐던 에드윈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좋아, 국경으로 갈게. 대신 다시는 날 찾지 마.’
에드윈은 그렇게 거인 토벌에 참전했다. 그가 국경에서 복무했던 동안 내리친 낙뢰만도 수백이며, 낙뢰를 맞고 사망한 거인은 무려 이백에 달했다. 세간에 에드윈 베가가 거인 학살자로 악명 높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에드윈이 곧잘 그 시절 후회하던 모습을 기억했다. 그는 마법으로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국경에서의 시간은 여전히 비참한 악몽이었다.
‘세드릭. 너는 내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원해서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죄가 덜어지진 않았다. 간혹 학살의 기억에서 몸서리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세드릭은 그런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원하신 일은 아니었지만, 그건 여전히 아버지의 죄야.”
그래서 세드릭은 아버지를 변호하지 않았다. 그건 아버지조차 원하지 않을 터.
“하지만 에드윈 경의 죄가 네게로 대물림하는 건 아니잖아. 물론 거인들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네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죄책감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야. 거인들은 당연히 아버지를 닮은 내가 꼴 보기 싫겠지. 억울한 마음이 아주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가족과 친구를 끔찍하게 잃은 그들의 상처에 어찌 비하겠어.”
세드릭은 차분히 눈을 내리떴다.
“……만일 네가 내 입장이었어도 이렇게 했겠지.”
디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만일 언니의 씻을 수 없는 죄로 억울하게 배척받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분명 자신도 세드릭처럼 행동할 것이었다. 상대방의 아픈 처지에 심정적으로 공감한 나머지 가족의 죗값을 얼마간 대신 치르려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보통의 마녀‧마법사들은 납득하지 못하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가족이 가까워도 결국은 남. 오히려 혈연의 죄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대방의 무분별을 탓할지도 몰랐다. 마법 사회에서 통용되는 예의란 그저 상대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한다는 표현일 뿐, 상대의 처지에 공감하여 나를 깎아 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디아나는 세드릭의 선택이 놀라웠다. 그녀가 아는 세드릭 자일스란 가족에게도 지극히 냉정하며, 어딘지 독살스러운 구석이 있는 마법사. 비록 자라면서 제법 차분해졌다지만 어린 시절 반목하던 기억이 깊게 각인되어, 그런다고 차디찬 본성이 어디 가겠느냐 여겼다.
좌우지간 그는 <교활한 자일스>. 디아나 솔과 세드릭 자일스는 평행선을 걷기에 일평생 마주칠 일 없으리라 장담했던 나날이 선명했다.
늘 그녀에게 송곳처럼 아린 말만 내뱉던 세드릭. 부모의 사랑에 목말라 몸부림치던 세드릭. 제 상처만 아프고 다른 사람 아픈 줄은 조금도 모르던 세드릭.
한데 그러던 세드릭이 한순간에 성장했다. 독하게 저를 노려보던 어린 모습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타인의 쓰라린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어른의 얼굴로 시선을 마주쳐 왔다. 오랜 편견이 환영처럼 깨져 나간 현실 속 그의 얼굴은 제법 낯설었다.
이쯤 되면 디아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드릭 자일스는 변했다.
✤ ✤ ✤
저녁놀이 굴속을 발갛게 물들였다. 마법으로 띄워 올린 가짜 태양도 이제는 쇠퇴할 시간인지, 그토록 눈부시던 볕이 어스레했다.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천장의 동편으로 손톱만 한 조각달이 아무도 모르게 떠올랐다.
그리 천지 만물이 잠들 시간이건만, 어쩐 일로 굴속은 한낮보다 소란스러웠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든 거인들이 그림자 진 흉흉한 얼굴로 무리 지었고, 그 맞은편엔 설리번 자일스를 보호하듯 서너 겹으로 둘러싼 요정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긴박한 대치 국면. 하지만 거인들 틈을 비집고 나온 굴의 지도자, 거인 토르스텐의 말 한마디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좋다. 설리번 자일스는 처벌하지 않겠다.]
[야호!]
속없이 환호성을 내지른 어린 요정은 주변의 눈총을 받고 쪼그라들었다. 사납던 기세는 한풀 꺾였되,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으로 와조스키가 말했다.
[설리는 처벌하지 않겠다고? 멍청아, 그건 당연한 거야. 설리는 우리 요정들의 은인! 요정이 여기서 함께 살아가는 한 너희 거인들이 멋대로 설리를 괴롭히는 건 절대로 용납하지 않아!]
다른 요정들도 와조스키의 말에 동감하는 것처럼 드세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리번이 몹시 감명 깊은 얼굴로 속삭였다.
“너희들, 날 그렇게나 소중하게 생각―”
[설리는 우리만 괴롭힐 수 있다고!]
요정 칼란다가 어지간히 분통 터지는지 꽥 소리 질렀다. 예상치 못한 말에 습격받은 설리번이 울상을 지었다.
“은인이라면서 괴롭히는 게 어디 있냐!”
물론 요정들은 설리번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와조스키랑 칼란다의 말이 맞아! 네가 뭔데 설리를 처벌하고 말고를 결정해? 네가 지도자면 다야! 그런 지도자, 나는 용납 못 해!]
[그냥 이참에 지도자를 다시 뽑는 건 어때? 우리가 머릿수는 더 많으니, 투표하면 십중팔구 요정 중에서 지도자가 나올 텐데.]
[지도자엔 역시 내가 가장 알맞지!]
[쉬미카가 또 아픈가 봐. 저러다 페파처럼 사레 걸려서 죽으면 어쩌지?]
똘똘 뭉쳐서 거인에게 대항하던 요정들의 형세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저마다 반목하며 삿대질과 고함이 마구 오가자, 상대가 잠잠해지길 끈지게 기다리던 거인들도 더는 도리가 없었다.
[그만!]
끝내 토르스텐이 일갈했다. 요정의 새된 고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렁찬 소리에 그만 요정들은 기가 눌렸다.
[너희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설리번 자일스는 어떻든 좋아. 우리는 그의 솜털 하나도 건드리지 않겠다. 하지만 설리번 자일스가 멋대로 데려온 일행은 얘기가 달라.]
[그건 그래. 도대체 설리는 왜 다른 사람을 데려온 거지? 여기가 비밀 장소란 것도 다 알면서.]
[맞아. 지금까지는 약속 잘 지켰잖아.]
요정들의 시선이 설리번에게로 모였다. 설리번이 난감한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실은 내 동생인 채스터티가―”
[한데 용도 데려왔다며? 정말이야?]
어린 요정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설리번의 말을 끊었다. 설리번이 대답할 틈도 없이 공황이 일어났다.
[용? 내가 아는 그 용?]
[용은 200년 전에 전부 사라졌잖아!]
[전부 사라진 건 아니지. 자일스에는 용이 남아 있는걸.]
용.
이야기로만 들어 왔던 아득한 존재가 화두로 오르자, 요정이며 거인 할 것 없이 저마다 소리 낮춰 수군대기 시작했다. 마치 근방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용이 듣기라도 할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사위를 쭉 돌아본 와조스키가 냉담하게 말을 건넸다.
[너희는 설리가 단순히 ‘아무에게도 굴의 존재를 알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이렇게 난리를 치는 게 아냐. 설리가 데려온 사람이 하필이면 세드릭 자일스이기 때문인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세드릭 자일스.
그 이름에 거인들의 기세가 다시금 거세게 흉악해졌다. 하지만 와조스키는 변함없이 의연했다.
[안심해. 세드릭 자일스는 우리가 알 바 아니야. 우리는 설리만 무사하다면, 너희가 그를 어떻게 벌하든 상관하지 않을 거니까. 듣기로 세드릭 자일스의 곁에는 용이 버티고 있는 모양이지만, 겁 없이 용에게 덤비다 죽든 말든 우리와 무슨 상관이겠어?]
[저 쥐방울만한 게 진짜!]
와조스키에게 덤비려던 거인을 토르스텐이 막아섰다. 그는 다른 거인들처럼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저 깊디깊은 슬픔의 구렁에 한없이 잠긴 얼굴이었다.
[세드릭 자일스는 아비를 닮아 낙뢰를 내린다지.]
거인 수백을 죽인 낙뢰. 한번 내리치면 막을 방도가 없는 하늘의 재앙.
수없이 지켜보았던 끔찍한 광경을 애써 뇌리에서 흩트리며 토르스텐이 침중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낙뢰에 용까지 지녔으니 여기 모인 거인 수십 명쯤은 일도 아니겠지. 가서 세드릭 자일스에게 전해라. 당신 아버지의 손으로 멸종에 다다른 우리의 비극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부디 우리의 마지막 은거지에서 나가 달라고 말이야.]
정중하기 그지없는 부탁이었다. 비교적 어린 거인들이 토르스텐의 결정에 반발했으나, 세상에는 젊은 혈기로도 맞서지 못하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다행히도 토르스텐은 지금까지 현명하게 굴속에 숨은 생존자들을 이끌어 온 지도자. 살면서 수많은 역경에 봉착했던 거인들은 끝내 토르스텐의 선택에 수긍했다.
그렇게 세드릭 자일스에 대한 건이 일단락되자, 이제는 미처 해결하지 못한 곁다리 문제가 남았다.
[설리번 자일스의 일행은 사람 둘과 용 하나라고 했지. 남은 일행은 누구인가.]
토르스텐이 물었다. 서로를 마주 보며 조잘대던 요정들은 이내 구석으로 밀려 나 있던 디아나를 앞으로 떠밀었다.
[얘야. 이름은 디아나래.]
[그리젤다 솔의 딸이라는데 알아보겠어? 너는 그 여자랑 친했잖아.]
디아나는 긴장이 역력한 기색으로 까마득하게 높은 토르스텐을 올려다보았다. 토르스텐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젤다의 딸?]
토르스텐은 느리게 허리를 수그렸다. 거인의 얼굴이 지면과 맞닿을 지경까지 내려왔을 무렵, 심해에서 길어 올린 듯 깊은 침음이 그의 목울대를 울렸다.
[그리젤다와 아주 닮았어. 조금 어리긴 하지만…… 마치 그리젤다가 살아 돌아온 것 같군.]
토르스텐과 마찬가지로 디아나를 유심히 살펴보던 다른 거인들이 말을 보탰다.
[정말이야. 누가 봐도 그리젤다의 딸이라고 하겠어.]
[내 생전에 저 빨간 머리를 다시 볼 날이 있을 줄이야. 조금 작긴 하지만 그리젤다를 꼭 빼닮았는걸.]
[맞아. 키가 작은 것만 빼면 그리젤다와 아주 비슷해.]
거인 주변을 부산스럽게 날아다니던 요정 칼란다가 머리카락을 꼬며 물었다.
[얘는 어쩔 거야? 세드릭 자일스처럼 쫓아낼래?]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아이는 은인의 딸이야. 세드릭 자일스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리젤다의 딸이라고 그리젤다와 동일시할 수는 없어. 이 굴은 우리의 마지막 은신처. 세상에 알려지도록 놔둘 수는 없지.]
[여길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그리젤다잖아. 세상의 이목을 피해 우리를 숨겨 주었으니, 마땅히 그녀의 딸은 극진하게 대접해야 해.]
[힐손의 말이 옳아. 침입자는 내치는 것이 규칙이지만, 그리젤다의 딸이라면 사정이 다르지.]
조금 전 세드릭에 대한 처우를 논할 때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인간 군대와 마법에 쫓기고 쫓겨 멸망만을 목전에 두었던 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안전한 은신처를 마련해 준 그리젤다 솔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거인들은 그녀의 딸인 디아나도 온화한 시선으로 보았다.
당연히 그리젤다의 딸을 받아들이리라는 기대에 찬 거인들의 시선이 토르스텐에게로 모였다. 물끄러미 디아나를 응시하던 토르스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리젤다는 우리 거인들의 은인. 응당 환대로 보답해야 한다.]
디아나는 딱딱하게 굳은 채로 앉아 있었다. 3m는 족히 넘을 거인의 어깨에 앉아 이동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그리젤다의 유품을 찾아왔다고?]
문득 토르스텐이 물었다. 디아나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네, 네에.”
[긴장은 풀어도 된다. 널 해칠 생각이 있었으면 진즉 그리했겠지.]
옳지만 어쩐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디아나가 더 긴장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 토르스텐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유품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리젤다가 비밀리에 우리에게 맡긴 물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상하군. 이 일을 비밀로 하라 신신당부한 사람은 그리젤다 본인이니 바깥으로 새어 나갈 수가 없는 사실인데……. 누구에게 들었지?]
“상아탑의 사자에게서요. 참, 상아탑이 뭐냐면―”
[상아탑이 무언지는 알고 있다.]
토르스텐이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그들을 별의 소리를 듣기 위해 수련하는 자들이지. 나는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네들이라면 그리젤다와 우리의 비밀을 알 만한 방도가 있겠지.]
토르스텐은 잠시 말을 멈추고, 시야를 가리는 넓은 나뭇잎들을 손으로 쳐 내기 시작했다. 디아나를 왼쪽 어깨에 앉히고 있어서 왼팔을 쓰지 못하는 모습이 자못 불편해 보였다.
“저기, 역시 나는 걸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기는 거인의 서식지다. 사람이 지나다니기엔 여러모로 불편한 곳이야.]
그의 말대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흙길은 험하기 짝이 없었다. 디아나의 키보다도 큰 바위가 여럿인 데다 나무는 거인의 몸집 정도로 거대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영영 길을 잃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다. 거인이 마녀의 집에서 지낼 수 없듯, 모든 것이 지나치게 거대한 이곳이 거인에겐 편안한 쉼터였다. 깊은 산간 마을에서조차 보지 못했던 울창한 수림과 바위산. 다시 말해, 그리젤다 솔은 단순한 은신처를 마련해 준 것이 아니라, 거인들이 숨어 살면서도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둥지를 선사한 것이었다.
“어머니를 잘 안다면서요?”
불현듯 디아나가 물었다.
[여기 거인 중에서는 그래도 잘 아는 편이지.]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그에 토르스텐은 잠시 디아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짤막한 침묵 뒤로 대답이 이어졌다.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겠나.]
“나는 어머니를 뵌 적이 없어요. 정확히는 살아 계신 어머니를요.”
[……그리젤다의 죽음은 늦게나마 전해 들었다. 조의를 표하지.]
디아나는 무감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은 모친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상은 쉬이 찾아낼 수 없는 표정이었다.
토르스텐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내가 그리젤다를 만난 것은 15년 전쯤이다. 그 당시는 거인의 세가 이렇게 약해지기 전이었지. 에드윈 베가가 전선으로 나오기 전이라, 인간 왕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남아 있었어.]
아직은 거인의 멸종을 말하기 시기상조였던 시기. 그리젤다 솔은 거인들이 임시로 머물던 돌산에 홀연히 나타났다.
[원래도 우리는 마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어. 너도 알다시피 예전부터 잦은 분쟁이 있었으니까. 한데 쭉정이라고는 해도 몇몇 마녀‧마법사가 인간 군대와 함께 우리를 공격하던 중이니, 당연하게도 그리젤다는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토르스텐은 덤덤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붉은 머리 마녀는 살기등등한 거인 수백 명을 마주하고서도 참으로 침착했었다.
아니, 돌이켜 보면 그건 침착했던 것이 아니라.
[미친 마녀였어.]
저도 모르게 심중의 말을 꺼내고 만 토르스텐이 당혹을 금치 못했다.
[방금은 실언이었다. 미안하다.]
“괜찮아요. 그런 말 많이 들었으니까.”
디아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토르스텐은 내심 안심하면서도 더욱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어, 어쨌든 우리는 그리젤다를 상대도 하지 않았어. 그도 그럴 것이, 당시로서는 도무지 믿지 못할 얘기만 늘어놓았으니까.]
그리젤다 솔은 매일같이 돌산에 홀연히 나타났다. 쫓아내고 쫓아내도 끈지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돌산을 찾아 하는 말이라곤 악마의 저주를 받았음이 분명한 사특한 이야기뿐이니, 거인들이 그녀의 말을 곧이들을 리가 없었다.
‘당신들은 곧 멸망할 거예요.’
[헛소리 마라, 마녀. 용이 자취를 감춘 세상에서 우리보다 강한 이는 없다.]
‘마법은 여전하고, 인간 왕국은 점차 번영하고 있어요. 당신들은 강하지만 구심점이 없죠. 서로를 믿지 못하면서 어찌 살아남기를 바라나요?’
그리젤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기로는 토르스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뜬구름 잡듯 불명확하던 그리젤다의 말은 어느 순간부터 점차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분열은 멸망의 전조. 이런 상황에서조차 대의가 아닌 사사로운 욕망을 좇는 이들이 있군요.’
‘인간은 약합니다. 하지만 약하기에 강합니다. 자신이 약하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뭉쳤고, 뭉쳐서도 약하다는 걸 알기에 아주 집요하게 연구하죠. 결국 어찌 되었습니까? 지금 세상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건 거인도 마녀도 아닌 인간이 아니던가요?’
‘당신들의 말처럼 대부분의 마녀는 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파괴보다 창조를 높이 사기에 전사보다는 학자에 가깝지요. 그러나 확신할 수 있나요? 진정 당신들을 죽이는 마법이 없을까요?’
거인이 쉬이 승기를 잡으리란 예상과는 달리, 인간 왕국과의 전쟁은 지지부진했다. 그사이 그리젤다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이루어졌다. 줄기찬 경고를 무시했던 대가를 치르듯 거인의 세는 좀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의 벌이 내릴 겁니다. 거인이 아무리 강해도 재앙을 피할 수는 없어요.’
낙뢰를 내리는 마법사가 나타났다.
모두가 공분하여 그를 죽이겠다 난리를 치던 때, 토르스텐은 홀로 경악했다.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던 그리젤다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미친 마녀의 말이라 흘려들었던 말이 어언지간 사실처럼 못 박혀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너무 강해서 역사상 통일된 적조차 얼마 없던 거인들은 전쟁이란 위기를 앞에 두고서도 분열했고, 인간은 더 이상 예전처럼 약하지만도 않았다. 더구나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용을 죽이는 마법’이 이제는 그들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삿된 말을 한다며 모든 거인들이 진저리 치게 혐오하던 그리젤다 솔. 매일같이 돌산에 나타나는 그녀를 죽이자는 목소리는 드높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의 머리털 하나 건드린 전적이 없다.
바로, 거인 수백이 모여도 마녀 하나를 죽이지 못하리란 소름 끼치는 깨달음이었다.
[우리가 그리젤다를 봐주고 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젤다가 우리의 오만을 봐주던 거였어.]
그래서 토르스텐은 그리젤다를 붙들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멸망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리도 배척받으면서 기어코 우리를 찾아 경고하던 너라면 무슨 방도가 있지 않겠느냐. 수년간 그리젤다를 무시하던 것을 떠올리면 참으로 면피 두꺼운 짓이었지만, 당시의 토르스텐은 그토록 절박했다.
그러나 그리젤다는 토르스텐을 탓하지 않았다. 대신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은신처를 만들어 줄게요.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수년을 허비하면서까지 그리젤다가 거인의 곁을 맴돌아야 했던 이유.
[그게 바로 네가 말하는 유품이었다.]
디아나는 물끄러미 토르스텐을 바라보았다. 석상처럼 단단한 거인의 표정에선 아무 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물으려던 찰나, 별안간 가까이서 꽝꽝 굴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르스텐은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를 망설임 없이 쳐 냈다. 울창한 수림이 끝나며, 시야가 확 트였다. 동시에 이전까지는 콧등을 간질이던 물비린내가 억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부연 안개가 비산하는 폭포였다. 물줄기는 강강한 기세를 자랑하듯 바위를 난타했고, 우림에 가려져 있던 소리는 귀를 찢을 듯이 요란했다. 지극히 조용하고 평화로운 굴에서 유일하게 드센 생명력을 내보이고 있었다.
[여길 보아라.]
토르스텐은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굴이 단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지금까지 토르스텐이 올랐던 우거진 숲이 융단처럼 매끄럽게 사선을 이루고, 그 아래로 요정이 뛰노는 호숫가가 자리했다. 그리고 굴 전체를 감싸 안는 천구(天球). 실제로는 가까울지 모르나, 위대한 마녀의 손길이 스쳐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하늘에는 섬섬하게 굴을 내리비추는 조각달이 홀로 떠 있었다. 별이 뜨지 않는 하늘은 외롭기만 했다.
[그리젤다가 어떤 사람이었느냐 물었지.]
나지막한 속삭임이 귓가를 스쳤다.
[네 어미, 그리젤다는 혼자서 이곳을 만들었다.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무색할 만큼, 곳곳에 그녀의 마법이 깃들었다. 어찌하여 그녀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까지 헌신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멸망을 앞둔 이종족을 가엾게 여긴 것인지, 아니면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처럼 그저 귀한 물건을 숨기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분명해. 그리젤다는 거인의 은인이다.]
토르스텐은 조심히 디아나를 땅에 내려놓았다. 정중하기 그지없는 손길이었다.
[귀물은 실그너에게 있다. 그리젤다는 은신처를 만들어 주는 조건으로 귀물을 숨겨 달라 청했으나, 딸이 찾아와 귀물을 청하거든 어찌해야 하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 귀물을 네게 건네주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겠다만, 어미의 유품을 찾는 딸에게 거짓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야.]
“……고마워요.”
[네가 감사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그리젤다의 조건을 충실히 이행해 왔을 뿐.]
디아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호젓한 숲과 호수가, 뒤로는 험난한 돌산이 자리한 동굴. 누군가의 입을 빌어 들은 이야기였다면 조금도 믿지 못했을 테지만, 이렇듯 눈앞에 펼쳐진 진실까지 외면하지는 못했다.
여기는 위대한 마녀 그리젤다 솔이 귀물을 숨겨 놓은 금고.
또한 거인과 요정을 위한 마지막 지상낙원이었다.
✤ ✤ ✤
굴 바깥 골짝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드릭은 후드를 뒤집어쓰며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랑의 별 일라리아가 유난히 밝아. 곧 지나갈 비인가 봐.”
잉그람에는 세기의 방랑자 일라리아가 지나는 곳마다 가는 빗줄기가 내린다는 속설이 있었다. 물론 산중의 변덕스러운 날씨야 함부로 재단할 수 없으므로, 단순히 디아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에 지나지 않았다.
“정 못 버티겠다 싶으면 먼저 돌아가도 돼. 나는 설리번을 따라가면 되니까.”
“괜찮아. 야외 취침은 국경에서도 많이 해 봤어.”
덤덤하게 대꾸하는 세드릭과는 반대로 윈터는 야외 취침이 끔찍한 모양이었다. 살가죽에 닿는 차가운 빗방울이 영 달갑지 않은지 윈터가 꼬리를 마구 휘둘러댔다. 제발 어디로든 들어가자는 무언의 시위였지만, 세드릭은 칼같이 무시했다.
“그보다 어머니의 유품이 실그너란 거인에게 있다면서. 너야말로 괜찮겠어? 그 거인, 전에 마주쳤을 때 조금 위험해 보이던데…….”
세드릭이 말을 흐렸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 역시 실그너의 살기에 제법 놀랐던 모양이다.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 봐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포기할 수도 없고.”
“혹시 모르니 설리번이라도 데려가.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보단 나을 거야.”
디아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늦가을. 깊은 산중에서 비 맞으며 밤을 지새우는 것이 쉬울 리 없지만, 거인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럼에도 세드릭과 윈터만 춥고 어두운 바깥에 내버려 두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땅굴로 내려가던 디아나가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 검은 사람과 검은 용이 보였다. 마법으로 지핀 불씨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윈터와, 커다란 몸집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윈터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세드릭. 젖은 장작이 타오르며 피어오르는 잿빛 연기가 그들의 주변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그때, 세드릭이 시선을 느낀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불현듯 눈이 마주쳤다. 멀뚱히 자신을 보는 디아나를 마찬가지로 마주 보던 세드릭이 조용히 옅은 미소를 띠었다. 마치 그녀의 심란한 마음을 꿰뚫어 보듯, 그답지 않게도 무척이나 다정한 미소였다.
이튿날 아침.
디아나는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돌산을 올랐다. 목적지는 거인 실그너가 주로 거주하는 스물네 번 째 바위로, 요정들이 이르길 폭포수 근처라고 했다. 어젯밤 토르스텐의 어깨에 앉아 힘든 줄도 모르고 올랐던 폭포는 작달막한 소녀가 오르기엔 자못 험난한 곳이었지만, 디아나는 요령껏 마법을 부려 가며 간신히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리해 홀로 거인 실그너와 마주 섰다.
산중에는 흔한 벌레 우는 소리마저 잠잠한 사위. 어쩐지 집요한 구석이 있는 실그너의 묵묵한 시선을 감내하며 디아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이럴 거였으면 어떻게든 설리번을 깨우는 거였는데!’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하루를 시작하는 버릇이 몸에 밴 설리번 자일스는 역시나 오늘이라고 특별하진 않았다. 새벽부터 디아나는 요정에게 물어 가며 겨우 호숫가에서 잠든 설리번을 찾아냈지만, 아무리 흔들고 소리쳐도 설리번은 당최 깨어날 생각을 안 했다. 오죽하면 곁을 기웃거리던 요정들이 설리는 깊게 잠들면 발치에 불이 나도 깨지 않는다며 말렸을까.
하지만 어떻게든 깨워야 했다. 어떻게든 깨워서 데리고 왔어야 했다. 세드릭의 말대로 큰 도움이 되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거인이 미쳐 날뛰거든 마법으로 모면할 시간을 조금이나마 벌어 주었을지 몰랐다.
실그너의 눈길이 이어질수록 디아나는 그리 후회만 거듭했다. 다행히 실그너는 세드릭과 마주쳤을 때처럼 무시무시한 살기를 흘리진 않았으나, 어째 그녀를 살펴보는 표정이 수상쩍었다. 마치 품평하듯 얼굴 구석구석 뜯어보는 눈빛이었다.
문득 실그너가 말문을 열었다.
[그리젤다가 아니야. 많이 닮았는데 아니야.]
디아나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젤다는 내 어머니예요.”
[어머니라고?]
“네. 나는 그리젤다 솔의 둘째 딸, 디아나라고 해요.”
[딸? 디아나?]
실그너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럼 그리젤다는 어디 있어?]
디아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젯밤 실그너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던 토르스텐의 말이 비로소 실감났다.
미친 거인. 미친 실그너.
그리젤다가 한창 굴을 만들던 때, 모두가 의심으로 기피하던 그녀를 유독 따스하게 대했던 거인이 바로 실그너라고 했다. 일가친척을 전부 낙뢰로 잃었기에 낯선 마녀에게까지 기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실그너는 그리젤다를 마치 죽은 가족 대하듯 위했고, 그리젤다도 유난히 살갑게 구는 거인을 거부하지 않았다. 실로 종족을 뛰어넘은 우정이었다고 토르스텐은 회상했다.
[그 시절부터 실그너는 정신이 불안정했다. 조금만 깊게 잠들어도 부모 형제가 타 죽는 악몽을 꾸었지. 가끔씩은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채 죽고 없는 가족을 찾아 울면서 헤매었고, 가끔씩은 가족의 원수를 갚겠다며 잉그람 진영을 덮치려고 했어. 그때마다 실그너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말리다 못한 다른 거인들이 그를 뿌리 깊은 고목에 죄인처럼 묶어 둔 적도 많아.]
가족들이 죽음을 자처한 덕분에 실그너는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지만, 가족들의 참혹한 죽음을 내내 지켜봐야만 했던 그의 마음은 점차 병들었다. 병든 육신이 마음까지 좀먹는 것처럼, 병든 마음은 건강한 육신도 아프게 했다. 마음이 병들어 육신까지 병든 실그너는 해갈되지 않는 고통에 신음했다. 하지만 제 몸 지키기에 급급했던 거인들은 실그너의 상처를 돌보지 않았다. 아픈 실그너의 곁에는 오로지 그리젤다뿐이었다.
돌산에 홀연히 나타나 거인을 위한 은신처를 짓겠다던 그리젤다. 유구한 마법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대단한 마녀라는 위명답게, 그녀는 미친 거인도 금세 얌전한 아이로 돌려놓았다. 당시 둘을 유심하게 지켜보는 이가 없었기에, 도대체 그리젤다가 어떻게 실그너를 다루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확실한 것은 광포하게 날뛰는 실그너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젤다 솔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아마 마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법으로 이런 굴도 만들어 내는 마녀에게 미친 거인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것 정도는 아주 쉬운 일이었겠지.]
하지만 돈독한 우정에도 이별의 순간은 찾아왔다. 은신처를 완성한 그리젤다가 홀연히 나타났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진 것이었다. 떠나기 직전 실그너에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다지만, 수년이 흘러 돌아온 것은 그리젤다 솔의 부고 소식이었다.
[우리는 침묵했다. 실그너를 제한 모두가 그리젤다의 죽음을 알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어. 실그너가 그리젤다의 죽음에 어떻게 반응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으니까. 아직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요즘 다른 일로 몹시 바쁘다, 이런 어쭙잖은 거짓말로 조바심치는 실그너를 잠재웠다.]
실그너가 미쳤기에 가한 거짓말이었다.
가족을 잃은 뒤로 반쯤 미쳤던 실그너는 굴이 완성되어 그리젤다가 떠난 이후에는 완전히 미쳐 버렸다. 일단 잠들면 지난 하루의 기억은 모조리 잊었다. 은신처에 들어오기 전의 기억은 또렷하면서, 은신처에 든 이래로 그가 기억하는 날은 고작 하루뿐이었다.
그리해 실그너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그리젤다 솔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하루하루를 전부 셈하면 10년을 훌쩍 넘는 세월이나, 그에겐 고작 하루뿐일 시간이기에 돌아오겠다는 그리젤다의 약속을 그리도 굳건히 믿고 있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면서도, 그리젤다의 죽음이 그에게만은 전해지지 않은 까닭으로.
디아나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며칠 전, 가족의 원수를 떠올리며 극렬하게 분노를 표했던 것도 전부 잊어버린 거인은 오늘도 떠나간 벗을 그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많이 바쁘세요. 그래서 내가 대신 온 거예요.”
그리젤다의 부고를 알리지 않는 자신을 기만자라 욕해도 상관없다던 토르스텐. 하지만 디아나는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이렇듯 실그너를 마주하자니 토르스텐이 어떤 심정으로 침묵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많이 바빠?]
실그너의 어깨가 눈에 띄게 처졌다. 디아나는 주먹을 꼭 말아 쥐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아마도 당분간은 여기 오시지 못할 거예요.”
[그럼 언제 오는데?]
“바쁜 일이 끝나면 바로 오겠다고 하셨어요. 어머니께선 당신을 잊지 않으셨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뾰로통하던 실그너가 금세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부정적인 대답이 아니라 마음이 놓인 모양이었다. 그에 용기를 얻은 디아나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섰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물건이 있다면서요?”
[있지. 그리젤다가 비밀로 간직하라고 그랬어.]
“어머니께서 그 물건을 찾아오라면서 저를 보내셨어요. 돌려주실 수 있나요?”
[너한테?]
실그너가 순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하지만 그리젤다가 아무에게도 주면 안 된다고 했는걸.]
“원래는 어머니께서 직접 가지러 오려고 하셨는데, 불가피하게 나를 보내신 거예요. 정말 안 될까요?”
디아나의 목소리가 자신감을 잃고 점점 기어들어 갔다. 빤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실그너가 이내 결심한 듯이 돌아섰다. 그러고는 뒤편의 커다란 바위를 힘껏 옆으로 밀어 버렸다.
그대로 거절당한 줄 알고 의기소침해졌던 디아나가 깜짝 놀랐다. 실그너는 그녀의 반응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바위가 자리했던 곳을 파내기 시작했다. 삽보다 몇 곱절은 거대한 손으로 얼마간 땅을 헤집으니, 금세 깊숙한 구멍이 생겼다.
실그너는 구멍 속으로 팔을 길게 뻗었다. 다시 지면으로 나온 손에는 디아나의 머리통만 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자, 여기.]
얼결에 상자를 건네받은 디아나가 연신 실그너와 상자를 갈마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이렇게 그냥 나한테 줘도 괜찮아요?”
[넌 그리젤다의 딸이라며. 아니야?]
“아, 아뇨. 딸이에요. 딸은 맞는데…….”
어떻게 실그너를 설득해야 할지 몰라 골머리를 앓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디아나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상자에 쌓인 흙먼지를 살살 쓸어내렸다. 품에 들어온 유품이 영 믿기지 않았다.
[너는 괜찮아. 그리젤다랑 아주 똑같으니까.]
“음. 어머니랑 닮았다는 거죠? 그런 말 자주 들어요.”
디아나는 이젠 아무런 감흥도 없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상자 뚜껑을 열어 보았다. 어마어마한 빚만 남겼다는 어머니가 이리도 비밀스럽게 감추어 둔 유품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온몸을 울렸다.
“……투구?”
하지만 설레던 것도 잠시, 디아나는 몹시 미심쩍은 눈으로 유품을 들어 올렸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투구였다. 그것도 당장 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할 법한 아주 옛날의 투구.
[그건 아스톨포의 유물이야.]
귀가 번뜩 뜨이는 소리였다. 디아나는 황급히 실그너를 쳐다보았다.
“누구의 유물이라고요?”
[아스톨포. 퀸투스 아스톨포의 유물이라고 그랬어.]
퀸투스 아스톨포.
거대한 폭풍으로 모딜리아니 해협을 뒤집어엎은 전설적인 마법사. 동시에 먼 옛날 <가혹한 아스톨포>를 개창한 아홉 인의 영웅.
“이런 귀한 걸 왜 어머니께서…….”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쇄골 부근을 매만졌다. 옷에 감추어진 오래된 목걸이가 손끝으로 느껴졌다. 몇 달 전, 동화 속에서 그리그 프롬이 선사한 마그누스 프롬의 유물이었다.
[있잖아.]
불현듯 실그너가 말을 걸어왔다. 상념에서 깨어난 디아나가 멍하니 고개를 들자, 실그너는 묵묵히 어여쁜 화관을 내밀었다.
[그리젤다에게 전해 줘.]
디아나는 말없이 화관을 응시했다. 실그너의 거대한 손에 비하면 볼품없이 작지만, 사람이 쓰기엔 적당한 크기였다.
“이거…… 혹시 당신이 만든 거예요?”
특별한 구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화관이었다. 꺾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들꽃으로 장식하여 싱그러운 맛이 있지만, 군데군데 어설픈 매듭이 눈에 띄었다. 심지어 개중에는 못나게 짓눌린 꽃잎도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 거인인 실그너가 만들었다면 절로 감탄이 나오는 솜씨였다. 사람의 팔뚝만 한 손가락으로 어찌 들꽃을 온전히 꺾었으며, 어찌 들꽃을 엮어 화관을 완성했을까. 기껏 하루 이틀로 갈고 닦을 수 있는 손놀림이 아니었다.
[그리젤다에게 약속했어. 굴에서 처음 피어나는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주겠다고.]
순간 디아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실그너, 그는 10년을 잃어버린 거인이다. 다른 이에겐 10년이었을 세월이 그에겐 고작 하루에 지나지 않았다. 매일같이 새로운 기분으로 일어나, 몇억 번째 피어나는 꽃일지도 모르는 들꽃을 조심히 꺾어 몇천 번째일지도 모르는 화관을 완성했다. 처음인데도 제법 잘 만들었네, 매번 이렇게 감탄할지도 몰랐다.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제를 몸은 기억하고 있으나, 이겨 낼 수 없는 상실로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린 거인은 그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니 실그너는 영영 모를 것이었다. 작년 이맘때의 화관은 토르스텐의 발아래 짓밟혔고, 지난달의 화관은 불에 태워졌으며, 어제의 화관은 깊은 호수로 가라앉았음을. 요정이 뛰노는 저 아름다운 호수 바닥은, 실그너가 만들었되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수백 수천의 화관으로 뒤덮였음을 오직 그만이 모를 것이다.
디아나는 떠오르는 비감을 모두 끌어안으며 화관을 받아 들었다. 우는 듯, 웃는 듯 기묘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꼭 어머니께 전해 드릴게요.”
끝내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말하며.
횃불로 밤을 몰아낸 호숫가.
너도나도 소리를 보탠 흥겨운 가락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서로 손을 맞잡은 춤사위가 그림자를 늘려갔다. 비밀 낙원은 오래간만의 손님을 맞아 흔흔히 부유하고 있으나, 매사 그러하듯 대다수의 기쁨엔 누군가의 고단함이 짓눌리기 마련이었다.
[저기 설리 좀 봐! 어쩜 저리도 뻣뻣할까? 나무토막도 저보단 유연할 거야.]
[박자도 못 맞춰, 동작도 흐트러져. 설리, 제대로 좀 해!]
[다음 노래는 내가 설리랑 춤추고 싶어.]
[얘가 뭐라니? 다음은 칼란다, 그다음은 키르곤, 그다음은 나야. 제대로 순서 안 지킬래?]
요정들은 한데 모여 와조스키와 춤추는 설리번을 구경하고 있었다. 말이 춤이지, 실상은 허우적대는 몸짓에 가까웠다. 대체로 책상머리 지키기를 미덕으로 삼는 마법사답게 설리번은 육체파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짓궂은 요정들이 그런 사정을 봐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손바닥만 한 와조스키에게 질질 끌려가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나날이 실력이 나아지긴커녕 어째 갈수록 생존을 위한 몸짓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설리번으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요정은 언제나 그를 은인이라 칭하면서도, 당최 은인다운 대접을 해 주지 않았다. 요정들이 은인을 위해 벌인 일이라곤, 굴이 닳도록 드나드는 설리번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몇몇 거인들과 설전을 벌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의 사정이 어떻든, 설리번 자일스와 요정의 괴상망측한 춤은 시종일관 고요하던 낙원에 웃음소리를 불러들였다. 어쩌면 설리번이 매번 몸을 빼면서도, 결국엔 요정과 함께 스텝을 밟아 나가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나 힘들어. 이제 더는 못 해.”
[뭐어?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랑 추기로 약속했잖아!]
“그건 그냥 너희끼리 순서 정한 거잖아. 내가 언제 약속했어?”
[와, 설리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야? 정말 못됐다.]
[그러게. 설리가 이런 거짓말쟁이인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디아나는 설리번과 요정들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았다. 굴에 든 지 고작 사흘째인데도 묘하게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래 봤자 진심으로 다투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말릴 생각일랑 추호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 나랑 춤을 안 출 수가 있어? 와조스키랑은 췄잖아! 내가 뭐가 문제인데!]
[어쩜, 칼란다. 어떻게 너랑 나를 비교하니? 나는 무려 설리의 첫 번째 친구라고.]
[너 지금 말 다 했어?]
[다했다, 왜! 한번 싸우자 이거야?]
……진심으로 다투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디아나는 짐짓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근처의 토르스텐을 돌아보았다. 갈수록 소리가 격해지는 요정들은 철저히 외면한 채였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지?]
토르스텐도 요정들의 실랑이는 익숙하게 무시했다. 디아나는 그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가서 소곤거렸다.
“도대체 설리번이 뭘 했길래 요정의 은인이라는 거예요? 요정들이 저렇게나 좋아하는 걸 보면 단순한 관계가 아닌 것 같은데.”
[엘가 숲에서 여기로 옮겨올 당시 요정들은 도착하는 데만 급급했기 때문에 낙오자가 많았다. 그렇게 무리에서 떨어진 요정들을 하나둘 챙겨서 이리로 데려온 사람이 바로 설리번 자일스야.]
와.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가족에게조차 일말의 관심도 없던 설리번 자일스가 그토록 남을 위하는 사람인 줄 그녀는 미처 몰랐다. 물론 그가 위할 줄 아는 남이란 이종족에 국한되는 것 같지만 말이다.
[굴이 완성되었을 무렵, 서쪽 엘가 숲에서도 요정들이 내몰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우리는 고민 끝에 그리젤다에게 엘가 숲 요정들에게 이곳의 위치를 알려 달라고 부탁했지. 요정은 우리처럼 대대적인 섬멸전을 겪진 않았지만, 인간들이 자꾸만 숲을 개발하는 통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모양이야. 지금은 저리 수가 불어났어도, 처음 요정 무리가 여기 당도했을 때는 저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토르스텐이 침중하게 답했다. 확실히 거인에 비해 개체 수가 많긴 했으나, 요정의 대표적인 거주지로 알려졌던 엘가 숲의 요정이 전부 모였다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난개발에 집을 잃고, 잉그람 서부에서 동부로 가로지르며 수많은 요정들이 희생되었을 터.
디아나는 울적한 표정으로 요정들을 보았다. 머리채를 잡고 드세게 싸우던 와조스키와 칼란다는 어느새 눈물겨운 화해를 이루고 있었다. 중간에서 설리번이 두 요정을 악수시키는 걸로 보아, 보다 못한 그가 나선 모양이었다.
[그리젤다의 유품은 잘 받았다고 들었다.]
“네. 혹시 어머니의 유품에 대해 더 아는 게 있나요?”
[글쎄. 그리젤다는 늘 농지거리와 진담을 섞어 말했지. 그녀의 말에서 진실로 뜻깊은 것을 찾아내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었어.]
토르스텐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오래된 과거를 더듬는 듯 턱이 단단해졌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우르바노 아스톨포를 평했던 적이 있다. 눈치 하나는 잽싼 늙은이라고 했었나. 몇 마디 덧붙였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군.]
“어머니가요?”
디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르바노 아스톨포라면 오래전에 병사한 아스톨포 가문의 전대 수장이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우르바노 아스톨포와 알고 지내셨던 걸까? 유품으로 퀸투스 아스톨포의 유물을 남겼으니 그쪽과 무슨 관계라도 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아무래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뇨. 아무것도 아녜요.”
그렇게 입을 다무는 듯싶었던 디아나가 별안간 토르스텐에게로 몸을 바짝 붙였다. 토르스텐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허리를 굽혀 주었다. 디아나는 까치발을 들어 간신히 그의 귓가에만 소리를 흘려 넣었다.
“저, 혹시 헤센 그윈티르라는 마법사를 알아요?”
이곳을 찾은 또 다른 이유. 채스터티를 총격한 범인과 거인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헤센 그윈티르? 그윈티르의 마법사인가?]
처음 듣는 이름인 듯 도리어 토르스텐이 되물었다.
“네. 혹시 알아요?”
[아니. 잘 모르겠군. 유명한 마법사인가 보지?]
“유명하다고 해야 할지……. 네, 유명한 것 같기는 해요.”
디아나가 난처하게 대꾸했다. 참과 거짓을 완벽하게 분간하는 재주는 없지만, 지금 토르스텐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길 아는 사람도 설리번뿐인 거죠?”
[이제는 너와 세드릭 자일스도 알고 있지.]
토르스텐은 담담한 얼굴로 호숫가에 가벼이 돌멩이를 던졌다. 물론 거인의 입장에서 돌멩이지, 디아나의 눈에는 충분히 바위라 칭할 만했다. 풍덩, 제법 커다란 소리를 내며 빠진 바위는 그들의 발치까지 물보라를 뿜어냈다. 디아나는 젖은 풀잎을 내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곳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세드릭한테도 단단히 주의를 줄게요.”
[고맙다.]
무덤덤한 목소리와는 달리 표정은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비밀 약속을 하지 않는다면, 비록 은인의 딸이어도 어쩔 수가 없다는 투였다.
“차, 참. 난 잠시 저쪽에 볼일이 있어서.”
[그래. 내일 떠나기 전에 배웅하겠다.]
디아나는 토르스텐이 마음을 바꾸어 붙잡기 전에 황급히 자리를 떴다. 술잔을 부딪치며 고래고래 노래를 불러 대는 거인들과 아직도 춤추기에 바쁜 요정들을 지나쳐 횃불 닿지 않는 숲 속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불현듯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저? 어디 가?”
설리번이 양손에 버섯 꼬치를 든 채 멀뚱거리고 있었다.
“아……. 잠깐 바깥에 나갔다 오려고요.”
“바깥? 세드릭 보려고?”
“굳이 따지자면 그렇죠.”
디아나는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드릭 자일스가 보고 싶다기보다는 지금 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둔하기 짝이 없는 설리번이라면 결과적으로 세드릭을 보러 나간다는 건 똑같지 않느냐 반문할 테지만, 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적어도 디아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걔도 참 사서 고생이야. 그냥 먼저 돌아가 있음 되지, 뭘 또 밖에서 기다리겠……. 근데 너 지금 뭐 해?”
“맛있게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디아나는 자연스럽게 설리번에 손에서 버섯 꼬치를 가져갔다. 눈 깜짝할 새 꼬치를 두 개나 빼앗긴 설리번이 어리둥절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사이 디아나는 이미 캄캄한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여기저기서 벌레 우는 소리 들려오는 산중 이슥한 밤.
하루 만에 굴에서 올라온 디아나를 맞이한 것은 비 그치고서 풍겨 오는 촉촉한 풀 냄새였다. 향긋한 내음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 디아나가 세드릭과 윈터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빛 말고는 새카맣기 그지없는 산속에서 검은 용과 검은 후드 뒤집어쓴 세드릭을 맨눈으로 찾기란 참으로 지난한 일이었다.
‘이럴 거면 횃불이라도 가지고 나올걸.’
디아나는 울상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다행히 늑대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멀리 나갔다가 아주 돌아오지 못하는 수가 있으니, 일단 바위 주변만 둘러보고 그래도 발견하지 못하면 굴속으로 돌아가야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그리 다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뭐, 뭐야.”
돌연 물컹한 것이 밟혔다. 숨죽인 채로 뒷걸음질할까 고민하던 순간, 갑자기 무언가 종아리를 스르르 쓸고 지나갔다. 그쯤 되면 놀라 펄떡거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으악! 악!”
“디아나?”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암암하던 눈앞이 밝아졌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디아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얼핏 보이는 인영을 가늠했다.
“……세드릭?”
눈부시던 빛이 차차 잠잠해졌다. 디아나는 그제야 눈앞을 제대로 분간할 수 있었다. 빛나는 구체를 마법으로 띄운 세드릭도 세드릭이지만, 눈을 바로 뜨자마자 마주친 것은 자다 깼는지 둥글게 똬리 튼 채로 이편을 형형하게 쏘아보는 윈터였다.
“윈터.”
칼날처럼 떨어지는 세드릭의 경고에 윈터가 불만을 표하듯 꼬리를 마구 뒤틀었다. 발치에서 꿈틀거리는 새카만 꼬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디아나는 조금 전에 밟았던 물컹한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음, 아냐. 세드릭 이번에는 내가 잘못했어. 무심코 윈터의 꼬리를 밟은 것 같아.”
그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윈터가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졸음이 한가득인 눈빛이며 표정에서 억울한 기색이 만연했다. 그제야 진상을 파악한 세드릭이 삐친 윈터의 턱을 쓸며 따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해해서 미안해.”
“……나도 꼬리 밟아서 미안.”
디아나가 윈터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보탰다. 윈터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금세 수마에 잠겼다. 용의 꼬리를 밟은 죄로 저 거대한 발에 짓밟히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던 디아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밤늦게 어쩐 일이야? 추운데 들어가서 쉬지 않고.”
“토르스텐에게 헤센 그윈티르에 대해 물어보고 오는 길이야. 우리 아무래도 상아탑의 사자에게 단단히 속은 것 같아. 헤센 그윈티르의 이름조차 모르던걸.”
디아나가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풀밭에 느른하게 앉은 채로 그녀를 지켜보던 세드릭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발밑이 어두워. 조심해.”
물끄러미 세드릭의 손을 응시하던 디아나가 고개 돌려 양손에 쥔 버섯 꼬치를 보았다. 결국 세드릭의 손에 잡힌 것은 디아나의 보드라운 손이 아니라, 반쯤 식어 버린 버섯 꼬치였다.
“설리번이 들고 있던 거니까 맛있을 거야.”
세드릭은 어쩐지 심란한 얼굴로 손에 들린 버섯 꼬치를 내려다보았다. 그새 곁으로 다가온 디아나가 풀밭에 엉덩이를 붙였다.
“한데 뭐 하고 있었어? 너도 자고 있었는데, 내가 깨운 건 아니지?”
“아냐.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었어.”
“하늘을?”
디아나는 고개를 높이 꺾었다. 짙은 남빛으로 물든 천공. 반달이 휘영청 밝고, 하얗게 흩뿌려진 별빛이 찬란했다. 비록 북쪽 하늘은 우뚝 솟아난 침엽수림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나머지는 탁 트여 한눈에 들어왔다.
“그냥. 이렇게 맑은 밤하늘은 오랜만이라서.”
세드릭은 그리 말하며 도로 풀밭에 누웠다. 디아나도 뒤따라 옆에 누웠다.
“……그러게. 정말 맑네.”
근래 오킹엄 같은 대도시에서는 보기 드물게 말간 밤하늘이었다. 흉측한 굴뚝을 세우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 나간 요 몇 년, 덕분에 잉그람의 어느 도시를 가든 지평선을 어그러뜨리는 굴뚝을 꼭 하나씩은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디아나가 진정으로 굴뚝을 혐오하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바로 굴뚝이 토해 내는 시커먼 매연이었다.
“도시는 매연 때문에 하늘이 흐리잖아. 칼리스토처럼 어두운 별은 보이지 않는 날이 태반이고.”
“사람이 적게 사는 시골은 그래도 아직 괜찮아. 이렇게나 맑은 별빛은 날씨도 좋아야겠지만.”
“나도 언니를 졸라서 시골로 이사하자고 해 볼까.”
디아나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언니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뮈티레 요새에는 잘 도착했을까. 며칠 잊고 지냈던 헤스터의 안부가 느닷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재능으로는 현존하는 마녀‧마법사 중에서도 당당히 수위에 들 자매지만, 아예 걱정을 지우지는 못했다. 몇 개월 함께 살아 본 결과, 디아나는 언니 헤스터가 이상한 구석에서 은근히 순진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불현듯 세드릭이 손을 들어 동쪽 하늘 어드메를 가리켰다.
“저기 목자의 별 단돌보네.”
“응? 잠깐, 그러면 가을 대삼각형이 완성되잖아.”
디아나가 눈을 빛내며, 가을 대삼각형의 나머지 꼭짓점을 얼른 손가락으로 이었다.
“중간에 가을의 별 캄페소랑, 서쪽에 처단의 별 시나폴리. 그리고 동쪽에 목자의 별 단돌보. 와, 이렇게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옛날에 스승님 밑에서 공부할 때는 매일같이 성도 일지를 그려서 제출했잖아, 우리.”
“그랬지.”
“아, 저기. 네 탄생성인 천칭의 별 사피겔도 옅지만 보이네. 원래 이맘때 뜨는 별은 아니지 않아?”
“여기 하늘이 맑아서 보이는 것 같아. 다른 데선 연말은 되어야 보일 거야.”
정식 마녀로 발돋움한 이래 병원에 입원해서, 정신없이 바빠서, 오킹엄 밤하늘이 흐려서, 아주 다양한 이유로 별과 멀어졌던 디아나는 새삼 즐거웠다. 이토록 별빛이 맑은 밤하늘을 만나려면 행운이 따라야 했을뿐더러, 한창 공부에 매진하던 도제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다.
“역시 칼리스토는 안 보이네.”
신이 나서 탄생성을 찾아 헤매던 디아나가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녀를 따라 남서쪽 하늘을 헤아리던 세드릭이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나뭇가지에 가려서 그래. 암흑의 별 칼리스토는 원체 지평선 가까이서 뜨잖아.”
“것도 그렇지만…….”
하긴, 지금은 칼리스토가 빛나는 시기도 아니고. 디아나는 씁쓰레한 마음을 갈무리하며, 드넓은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수많은 별빛이 시야를 스치는 가운데, 아주 귀하디귀한 별빛이 돌연 눈에 들어왔다.
“어, 세드릭! 저기!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 아냐?”
서쪽 하늘 변경에서 역천의 별 무제타를 감시하는 궁수(弓手)이자, 별들의 왕 둘시네아를 지키는 사수(射手). 육안으로 관측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별의 등장에 세드릭도 무척이나 놀랐다.
“맞는 것 같아. 아무리 하늘이 맑아도 아폴리네르까지 볼 줄이야.”
“난 생전에 저걸 망원경 없이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소년 소녀는 소리 없는 탄성만 내질렀다. 아무리 눈을 깜박여도 서쪽에서 흐릿하게나마 빛을 발하는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는 변치 않았다. 진정 환상이 아니었다.
신기한 마음에 한참 서쪽 하늘만 올려다보던 디아나는 불현듯 밀려드는 추억에 잠겼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삼사 년 전, 오늘처럼 세드릭과 단둘이서 아폴리네르를 관측했던 때가 있었다. 망막하게 펼쳐진 밤하늘, 지극히 투명하던 유리 천장, 거대한 망원경, 유난히 얌전했던 세드릭과 조곤조곤 흘러가던 오래된 이야기.
디아나는 그날 들려주었던 아폴리네르의 이야기를 세드릭이 기억하는지 궁금해졌다.
“있잖아. 옛날에 내가 해 줬던 얘기 기억나?”
“아폴리네르에 얽힌 전설?”
세드릭이 별다른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초장부터 바로 정답이 나오자 디아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건 줄 어떻게 알았어?”
“이렇게 아폴리네르를 보고 있으니까 그날이 떠올라서.”
디아나가 회상하던 그날을 세드릭도 기억 속에서 들춰 본 모양이었다. 디아나는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레 둘 사이에는 그윽한 정적만이 흘렀다.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에 오래도록 머물던 디아나의 시선이 비로소 동쪽으로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폴리네르와 함께 겔록의 사다리를 이루는 심미의 별 베아트리체와 처단의 별 시나폴리, 그 외에 수많은 별을 열없이 훑어 내리던 잿빛 눈이 슬금슬금 땅으로 내려왔다. 디아나는 시커먼 그림자로만 뵈는 뾰족한 수림의 가장자리를 공연히 가늠하다가, 종내에는 고개 돌려 옆자리를 보았다.
잠든 세상을 내리비추는 조요한 달빛. 하지만 산중 깊숙한 어둠에 달빛이 함부로 들지 못하듯, 유난히 달빛 머금는 존재도 있는 법이었다. 바로 지금의 세드릭처럼.
단정한 옆모습이 유난히 하얗게 빛났다. 잠이 깃들어 반쯤 감긴 눈두덩 아래로 속눈썹이 길게 그림자 졌고, 깎아지른 듯 말끔한 뺨 위로는 무수한 별빛이 노닐었다. 어제의 어린 티를 점차 벗어 가는 내일의 얼굴. 가장 익숙한 얼굴이되, 가장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기도 했다.
디아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한때 대화가 끊기고 정적이 찾아오는 것이 싫어 괜한 말로 억지로 이야기를 끌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에 얽힌 서글픈 전설도 적막이 싫어 풀어놓은 이야기였다. 지금처럼 평화로운 정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단둘이서는 그리도 싫고 어색하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침묵 속에서도 편히 숨 쉴 수 있었다. 스승이 내준 과제가 아니고서도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헤아릴 수 있었다. 함께 별을 관측하던 시절은 지났지만, 가끔씩은 별 하나에 얽힌 이야기를 두런두런 주고받으며 이렇듯 밤을 지새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었다.
너를 싫어했던 시절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렇지만 이제는 네가 마냥 싫지만도 않다.
네가 변했듯 나도 변한 걸까.
수억의 별이 노래하고, 수억의 빛이 쏟아지는 밤. 쌀쌀한 늦가을 추위를 잠재우듯 포근히 덮이는 별빛을 이불 삼아 디아나도 느리게 눈꺼풀을 덮었다. 오늘은 밤하늘에서 별과 노니는 꿈을 꾸리라는 아주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별 헤는 밤은 그리 지나갔다.
✤ ✤ ✤
뮈티레 요새.
메시나 남부 험준한 지롤라모산맥에 자리한 이 요새는 아주 오래전부터 난공불락으로 이름났다. 가파른 협곡을 방패 삼아 배후를 지키고, 매해 보수하여 한 치의 틈도 용납하지 않는 성벽은 예나 지금이나 굳건했다. 그리고 뮈티레 요새라는 둥지에서 수천 년간 번영했던 이들이 바로 마체 팔리아치의 후손들이었다.
숭고한 팔리아치. 가을을 불러들여 풍요를 전하는 그들은 깎아지르는 협곡과 성벽 내부에서 가문의 역사를 안전하게 지켜 왔다. 한때 지롤라모산맥을 지배하던 흉포한 악룡 로기올 티사베르체에게 무릎 꿇은 전적이 있으나, 그것을 제하고는 스스로 요새를 개방한 적이 없었다. 거인의 침입조차 거뜬히 이겨 낸 뮈티레 요새를 세간에선 통곡의 벽이라 불렀다. 또한 바깥세상의 통곡과 단절된 채 가을의 풍요를 독점하는 팔리아치는 영원토록 번영하리라 여겨졌다.
하지만 200년 전, 팔리아치가 산티그마 교단에게 무릎 꿇으며 그리 굳건하던 믿음도 깨졌다.
마법 사회와 산티그마 교단 사이의 천년전쟁이 막을 내린 1687년. 평화를 약속하며 체결된 발롬피에 협약은 겉으로는 협상의 형태를 띠었으나, 내막은 불평등조약에 가까웠다. 협약에 따라 마녀들은 이제 왕국민으로서 일정한 의무를 담보해야 했지만, 왕국과 교단이 그네들에게 내준 것은 고작해야 알량한 국적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법 사회는 어째서 불평등한 조약을 감내했는가. 바로 팔리아치의 항복 아닌 항복이 기폭제 역할을 했음이다.
교단과의 전쟁이 천 년에 다다르며 마법 사회는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생존을 위해 가문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왔지만, 기본적으로 마녀들은 배타적인 성향이 강해서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다른 집단과 힘을 합치기는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그들의 눈에 인간이란 숫자만 많은 버러지에 불과했다. 먼저 습격당하지 않는 이상, 구태여 인간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협공해야 하는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마법 사회가 그리 정체된 사이, 인간 사회는 무섭도록 발전했다. 신처럼 아득한 존재를 적으로 두었던 천 년, 인간은 공포를 원동력 삼아 무궁한 무기를 양산해 냈다. 마법은 아니지만, 마법에 필적할 만큼 정교한 기술이었다. 기술이 발전하며 식량이 늘어났고, 늘어난 식량만큼 먹을 입도 늘어났다. 마녀‧마법사들은 예나 지금이나 고만고만한 숫자였지만, 그사이 인구는 몇 곱절이나 증가했다.
그러한 인간 왕국의 발전에 가장 먼저 위협을 느낀 이들이 바로 팔리아치였다. 때는 17세기 초, 지금은 메시나에 합병된 기스파니아 왕국이 기세 좋게 뮈티레 요새를 공격한 적이 있었다. 난공불락의 명성답게 뮈티레 요새는 굳건했지만, 요새에 숨은 팔리아치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그 시절 새로이 개발된 대포와 총구가 첫 선을 보이며 예상 밖의 파괴력을 펼치자, 인간을 늘 개미보다 못한 존재로 치부하던 마녀‧마법사들은 그제야 인간이 자신의 턱밑까지 추격했음을 깨달았다.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는 인간과, 오래도록 정체된 마법 사회. 지지부진한 전쟁의 승자는 자명했다. 그나마 다행으로 마법 사회는 아집이 적었다. 아직 마법이 강성할 때 화해해야 최대한 몫을 챙길 수 있는 법이므로, 팔리아치가 고개 숙인 이후 발푸르기스 평의회는 마법 사회를 대표하여 산티그마 교단과 발롬피에 협약을 체결했다. 참으로 영악한 계산속이었다.
그리 계산대로 평화로운 200년이 흘렀다.
“헤스터 경. 이쪽으로.”
팔리아치의 현 수장이자 뮈티레 요새의 주인, 칼롯타 팔리아치는 흠잡을 구석 없는 우아한 자태로 헤스터를 안내했다. 그녀의 등 뒤로, 11월 늦가을에도 녹음이 드리워진 요새에서 유일하게 볕들지 않는 건물이 차츰 품을 열고 있었다.
뮈티레 기록 보관소. 팔리아치 가문에서 가장 귀한 문서들을 모아 둔 그곳이 바로 헤스터의 목적지였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여기는 화재의 위험이 있어 촛불을 켜지 않습니다.”
칼롯타는 빛나는 구체를 마법으로 띄웠다. 헤스터는 검은 덮개로 가려진 책장을 둘러보며 천천히 그녀를 뒤따랐다.
“팔리아치는 역사가 깊으니, 외부에선 찾을 수 없는 귀한 문서들이 많겠군요.”
“물론입니다. 영웅시대 이전의 문서도 여럿 있으니까요. 물론 그리 오래된 문서들은 빛에 취약해서 지하에 보관하고 있답니다.”
“그렇습니까.”
대화가 끊기자, 자연스레 적막이 차올랐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끊임없던 바깥과는 완전히 단절된 듯, 기록 보관소는 몹시 적요했다. 너무나 오래 잠들어 시간을 망각해버린 문서들은 적막을 벗 삼아 지나간 과거를 추억하고 있었다.
칼롯타는 미로처럼 얽힌 길을 대범하게 나아갔다. 점잖은 손님답게 기록 보관소의 침묵을 존중하던 헤스터는 불현듯 금방 지나왔던 요새의 길목을 떠올렸다. 보드라운 오후의 볕이 내리쬐는 남부의 가을. 푸른 녹음이 흐드러지고, 색색으로 물들어 가는 단풍이 알알이 박혀 있던 요새의 정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또한 괴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에서 아무도 뵙지 못했군요. 혹 내가 때를 잘못 맞추어 온 겁니까?”
팔리아치는 머릿수만 따지자면, 자일스와 비등할 정도로 커다란 가문이었다. 요새의 성문을 넘어 기록 보관소까지 가로지르는 데만도 족히 40분이 걸렸으니, 그사이 길가에서 팔리아치의 일족과 마주친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도리어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아마도 날씨가 좋아 다들 야유회를 나간 모양입니다. 이제 곧 남부에도 겨울이 몰려올 테니, 올해의 마지막 야유회가 되겠지요.”
칼롯타가 뒤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도착했군요. 문서를 꺼낼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들이 멈춘 곳은 뒷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어느 책장이었다. 칼롯타는 검은 덮개를 걷어 낸 뒤, 책장에 놓인 자그만 금고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헤스터는 기록 보관소의 문을 기꺼이 열어 준 칼롯타 팔리아치에게 예의를 표할 겸 정중하게 뒤돌아섰다.
끼익 끼익. 칼롯타의 마력을 인식한 금고가 잠금장치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헤스터는 뒷문 틈새로 가늘게 들이치는 볕을 무료하게 응시했다. 볕이 자꾸만 일렁이는 걸 보면, 문밖에서 들고양이라도 한 마리 노니는 모양이었다.
“헤스터 경. 미오테티타(Miotetita)를 아나요?”
문득 칼롯타가 물었다. 헤스터는 순순히 대꾸했다.
“영웅시대 이전에 존재했다는 비밀 단체가 아닙니까. 순수하게 마법 연구를 목적으로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다면 알게르 푸르게스크(Alger Furgesk)도 알겠군요.”
헤스터는 미간을 좁혔다. 알게르 푸르게스크라면 천년전쟁이 한창이던 중세, 북방의 내로라하는 마녀‧마법사들이 모여 비밀 연구를 자행했던 집단이다. 북방에서 악마 소환이 빈번하게 벌어졌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들이기에, 해체된 지 오래된 지금까지도 악명이 자자했다.
“미오테티타. 알게르 푸르게스크. 타라벨라. 이들이 전부 같은 단체였다면 어떨까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지.”
“이들이 이름을 바꾸어 아직도 존속한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입술을 짓씹던 헤스터가 참지 못하고 돌아섰다. 칼롯타는 새빨간 입술을 고상하게 뒤틀며 책장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 어느덧 활짝 열린 금고가 헤스터를 반기고 있었다.
“헤센 그윈티르의 배후에서 니올로 팔리아치를 탈옥시키고, 경의 자매를 위험에 빠트린 비밀스러운 집단. 여기 진실이 있습니다. 읽어 보세요.”
헤스터는 칼롯타를 경계하면서도 조심히 책장으로 다가갔다. 훤히 입을 벌린 금고에는 빳빳한 문서가 담겨 있었다. 몹시 수상쩍으면서도, 몹시 유혹적이었다.
헤스터는 금고로 손을 뻗었다.
미오테티타, 알게르 푸르게스크, 타라벨라, ……혹은 몬(Mon).
그리고 문서를 펼치자마자, 그녀는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몬. 어딘지 낯익은 이름.
헤스터는 벼락같은 깨달음에 황급히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그토록 긴박하게 찾던 것은 구겨진 편지였다.
「헤스터 솔 귀하,
귀하를 사교 클럽 몬(Mon)으로 초대합니다.」
파펜하임산으로 떠나기 위해 수선을 떨던 당일, 오킹엄의 집으로 배달되었던 의문의 편지. 한참 편지를 노려보던 헤스터가 다시금 문서로 시선을 옮겼다.
문서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고대에는 미오테티타였고, 중세에는 알게르 푸르게스크였으며, 한때는 타라벨라였던 비밀 단체는 오늘날 사교 클럽 몬으로 둔갑하여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현존하는 회원들의 목록.
“보아하니 내가 보낸 초대장은 잘 받은 것 같군요.”
칼롯타가 변함없이 녹녹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헤스터는 느릿하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언지간 열린 뒷문 너머로 팔리아치의 일족들이 가득 길목을 메우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태양이 그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헤스터 솔. 우리와 함께하겠어요?”
칼롯타 팔리아치가 진하게 웃었다.
유일하게 볕 닿지 않는 곳에 서 있던 헤스터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금빛으로 물든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으, 속이 안 좋아.”
설리번이 핼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째 윈터의 등에서 내린 직후와 비교해도 한 점 나아지지 않은 혈색이었다.
“집에 다 왔잖아요. 조금만 버텨 봐요.”
“아냐. 난 이제 끝났……. 우욱.”
“아, 진짜! 여기선 토하면 안 된다니까요!”
디아나가 성질을 부리건 말건, 설리번은 한 손으로 대문을 짚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이미 한차례 속을 게워 냈던 터라 한없이 노란 위액만 고일 뿐이었다. 디아나는 시큼하게 올라오는 냄새에 기겁하며 황급히 대문을 넘었다.
멀찍이서 걸어오던 세드릭이 현관에 널린 쓰레기 더미를 마법으로 대강 치우며 비웃었다.
“용이 보고 싶다며 그렇게나 난리 치더니.”
“내가…… 다시는…….”
“다시는 비행하지 않겠다고? 알았으니까 적당히 하고 들어와.”
안타깝게도 세드릭 자일스는 구토하는 형제의 등을 두드려 줄 만큼 다정하진 못했다. 세드릭은 매정하게 설리번을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현관에는 디아나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저기 있잖아, 세드릭.”
디아나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창가를 가리켰다. 나무판자로 덧댄 창가에 비둘기 한 마리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전서구인가?”
“아니, 그렇긴 한데 비둘기 발목을 봐. 검은 용이면 자일스의 상징이잖아.”
비둘기는 자일스의 전서구였다. 세드릭은 얼굴을 찌푸리며 흘끗 설리번을 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위액을 토해 내기 바쁜 모습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세드릭은 거리낌 없이 전서구로 손을 뻗었다. 다리에서 살살 편지를 꺼내니 소임을 다한 비둘기가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 전서구를 보낼 정도면 제법 긴급한 소식일 터, 가문의 중대사를 한둘 머릿속으로 헤아리던 세드릭이 별안간 싸하게 굳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얼어붙은 세드릭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디아나가 까치발을 했다.
「바바라 자일스 위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