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활하지 못한 마녀에게-14화 (14/18)

#1

발푸르기스의 밤

“언니, 빨리 와!”

“지금 나갈게.”

모자를 집어 든 헤스터가 마지막으로 점검하듯 방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족히 일주일은 돌아오지 못할 자그만 집은 변함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았을 때는 물론이요, 침입을 방지하는 마법회로도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으니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미련 없이 방문을 열려던 찰나, 헤스터는 불현듯 문가에 놓인 편지를 발견했다. 오늘 아침 우편함에 꽂혀 있던 편지로 여행 준비에 바빠 아직까지 열어 보지도 못했다.

“디아나. 조금만 기다려 줘.”

헤스터는 밖에서 오매불망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디아나를 안심시키며 얼른 편지를 뜯었다. 관청의 낙인이 찍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납세서는 아닌 듯했지만, 혹 긴급한 소식이라면 늦게 확인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편지는 몹시 짤막했다.

「헤스터 솔 귀하,

귀하를 사교 클럽 몬(Mon)으로 초대합니다.」

✤      ✤      ✤

발푸르기스의 밤.

이제는 마법 사회를 집결하는 대집회이자, 통솔하는 평의회로 자리매김한 이 행사는 아주 오래전에서 기원한다.

때는 아홉 마법 가문을 창설한 아홉 인의 영웅이 이름을 떨치던 시절. 북서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가던 발부르가 볼크하르트는 어느 날 파펜하임산을 지배하는 악룡 타트라스크 파펜하임을 찾아갔다. 악룡 타트라스크 파펜하임은 본디 마녀와 마법사를 수족 삼아 부리길 즐겼으므로, 저명한 마녀가 자신의 본거지를 방문한 것을 몹시 흡족히 여겼다.

[그대는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가.] ‘이 산이 마음에 듭니다. 얼마면 내게 팔겠습니까?’

악룡은 발부르가의 제의가 달갑지 않았다. 높고 험준한 파펜하임산은 용이 기거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억만금을 준대도 팔지 않는다. 하지만 그대가 나의 수족이 된다면 고려해 볼 수는 있겠지.] ‘불가합니다. 내가 제안할 수 있는 선은 서쪽의 나임케산(山)과 일흔일곱의 금궤, 그리고 당신의 양식으로 삼을 백 명의 장정과 백 명의 처녀뿐입니다.’ [나임케 산은 내게는 너무 낮다. 그리고 요 앞 왕국에서 매년 바치는 공물만 치더라도 백 개의 금궤와 수백의 처녀 장정을 훨씬 상회한다. 발부르가 볼크하르트는 마녀로서는 유례없이 대단한 부를 이루었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배포가 너무도 작구나.]

악룡의 빈정거림에도 발부르가는 흔들리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럼 금화 하나로 하지요.’ [금화 하나로 무얼?] ‘악룡 타트라스크 파펜하임이여, 당신은 금화 하나로 내게 산을 넘길 것입니다.’

발부르가 볼크하르트는 본디 최면에 능한 마녀였다. 악룡은 그녀가 이룬 어마어마한 부에만 관심을 보였지만, 그만한 부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그녀의 최면이었다. 그래 봤자 한 입 거리도 되지 않을 마녀의 능력이라 여기며 용 본인에게는 티끌 만큼의 해도 끼치지 못하리라 자신했겠으나, 바로 그러한 자만심이 악룡 타트라스크 파펜하임을 궁지로 내몰았다.

악룡이 다시 정신을 차린 순간, 그는 더 이상 파펜하임산의 주인이 아니었다. 파펜하임산에는 어느새 볼크하르트를 상징하는 매의 깃발이 꽂혔고, 용의 수중에는 고작 금화 하나가 전부였다. 마녀의 최면에 걸려들어 평생에 걸쳐 일군 거처와 재산을 제 손으로 넘긴 것이었다.

악룡은 크게 노했다. 분기에 눈이 멀어 앞뒤 가리지 않고 파펜하임산으로 달려들었으나, 애석하게도 그곳에는 발부르가 볼크하르트를 비롯한 아홉 인의 영웅이 전부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대체로 교만하기 짝이 없는 용조차 두려워 피하는 ‘용 학살자’ 오베론 베가도 있었다.

‘여기 두려움을 모르는 버러지가 있구나.’

오베론 베가는 자비 없이 낙뢰를 내렸다. 샛말간 하늘에서 떨어진 창날은 삽시간에 용의 몸뚱이를 꿰뚫었다. 눈처럼 하얗던 용이 시커멓게 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클레멘틴 자일스여, 아둔한 용이 되돌아올 것이라던 당신의 예언이 맞았군요.’

여름을 불러오는 마법사, 피오트르 그윈티르가 용이 타 죽는 장관을 즐기며 찬탄했다.

‘참, 그대는 눈이 멀어 보지 못하지요?’ ‘이미 꿈에서 보았습니다. 기껍지 않은 광경, 또 보아서 굳이 눈을 어지럽힐 이유는 없지요.’

클레멘틴 자일스가 나직이 대답했다. 발부르가 볼크하르트는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러기에 일찌감치 내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윽고 용의 몸뚱이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어언지간 낙뢰가 멈춘 하늘은 새삼스러운 평화를 되찾았다. 육중한 용이 산기슭에 쓰러진 뒤로는 지상도 별다를 바 없었다.

그러자 마체 팔리아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듯 자리를 마련한 발부르가 볼크하르트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예언으로 이처럼 적당한 장소를 알린 클레멘틴 자일스에게도 마땅한 사의를 보냅니다.’

마녀의 조용한 음성이 이어졌다.

‘우리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전례가 없으니, 이번 회담은 입에서 입으로 오래도록 전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무얼 했는지는 숱한 추측으로만 남아야 합니다. 비밀은 무덤까지. 모두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여덟 명의 영웅은 침묵으로 동조했다. 마체 팔리아치의 눈이 차게 빛났다.

‘그럼 시작하죠.’

숭고한 마체 팔리아치.

가혹한 퀸투스 아스톨포.

교활한 클레멘틴 자일스.

공정한 이즈리얼 알피어스.

고결한 오베론 베가.

냉엄한 발부르가 볼크하르트.

오만한 베르티 오르테가.

잔악한 피오트르 그윈티르.

엄숙한 마그누스 프롬.

삶보다 죽음이 가깝던 시대, 기적 같은 힘으로 가문을 이루어 번성했던 아홉 인의 영웅이 파펜하임산에서 도대체 무얼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영면한 이래로 같은 계절이 수천 번 순환했으니, 이제 와 그런 걸 파헤치기엔 너무 늦었을 터. 그토록 눈부시던 아홉 인의 영웅도 지금은 전설 속 낡은 이름으로만 남았으며, 심지어는 그들의 별칭에서 이름을 제하여 가문으로만 통칭한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그러나 아홉 인의 영웅을 뒤따른 대집회만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다. 발푸르기스의 밤. 마치 아홉 인의 영웅이 한자리에 모였던 그날처럼 파펜하임산은 여전히 마법 사회의 중심이자 으뜸으로 존재했다. 한때 서로 간의 반목으로 약세를 보인 적은 있어도 와해된 적은 없으니, 200년 전 마법 사회에 평화가 깃든 이후 대집회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발푸르기스의 밤은 내로라하는 마녀‧마법사에겐 그간의 대소사를 논하는 대회의요, 크나큰 죄를 저지른 죄인에겐 판결이 내려지는 엄정한 재판장이고, 이제 막 세상으로 나온 햇병아리에겐 이명을 선사받는 성인식이었다.

그야말로 대집회라 불릴 만하다고, 디아나는 생각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디아나 솔이요.”

참석 명부를 확인하던 마법사가 흘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난봄 ‘펜잔스의 참극’이 벌어진 이래 그리젤다 솔의 숨겨진 둘째 딸에 대한 말이 제법 풍성하다 싶더니, 이렇듯 타국에도 소문이 번진 모양이었다. 디아나는 익숙하게 그 시선을 모른 체했다.

다행히 마법사는 금세 무심해진 낯빛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자동으로 펼쳐진 명부 위에서 깃펜이 홀로 춤을 췄다.

“디아나 솔 씨. 대회의에는 참여할 수 없지만, 나흘 뒤부터 열리는 재판은 참관할 수 있습니다. 당신처럼 신참 마녀들을 위한 환영식이 내일부터 예정되어 있습니다만,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고요. 다만 성인식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합니다. 성인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이명을 받지 못하므로, 이명도감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

“성인식은 언제부터 열리는데요?”

“상아탑에서 사자들이 도착하면 바로 시작합니다. 적어도 주말에는 당도한다고 알려 왔지만, 그들이 이제껏 제대로 약속을 지킨 적이 없군요. 하지만 아마 다음 주중으로는 열릴 겁니다. 정확한 일정이 나오면 전갈이 갈 테니, 되도록 파펜하임산 일대를 벗어나지 마십시오.”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스터가 영예로운 대회의에 참여하는 이상, 어차피 대회의가 끝나기 전에는 돌아가지 못할 터였다. 듣기로 대회의는 짧으면 하루, 길면 한 달을 족히 넘는다고 했으니 기간을 가늠하는 것은 공연한 짓이었다.

참석 명부를 확인하는 줄에서 벗어나자, 다시금 쌀쌀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디아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종종걸음 쳤다. 반제의 북부에 위치한 파펜하임산은 겨울이 일찍 도래하는 동토였다. 더구나 오래전부터 마법 사회에선 성지로 이름난 중립 지대인 만큼, 근래 눈부시게 발전한 인간 문명이 닿지 못한 몇 안 되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당연히 허허벌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무 춥잖아.’

디아나는 내심 투덜거렸다. 10월이면 잉그람에서는 슬슬 단풍이 물드는 청명한 계절이건만, 여기는 완전히 초겨울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챙긴 옷가지를 보고 헤스터가 염려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른 저녁에도 흐릿하게 빛을 발하는 가을의 별 캄페소가 유명무실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얇은 코트 깃을 세우며 얼른 숙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문득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

무심코 고개를 돌린 디아나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쟤가 왜 여기에 있담?

“세드릭?”

세드릭은 일행에게 짧게 인사하고 단걸음에 다가왔다. 디아나는 멀뚱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세드릭은 늘 그렇듯 망토에 모자까지 잘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아버지를 닮아 섬세하게 잘난 낯짝은 이제 언급하기도 지겨웠다.

“여긴 웬일이야? 내가 모르는 새 자일스 가문의 수장이 바뀌기라도 했니?”

아홉 마법 가문의 수장은 당연히 대회의에 참여했다. 설마 재판받으러 온 것은 아닐 테니, 아직 어려서 공훈이 마땅치 않은 세드릭이 대회의에 들기 위해선 수장 자리를 물려받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대신해서 수장 대리로 온 거야.”

“왜? 혹시 스승님께서 많이 편찮으셔?”

디아나의 얼굴이 근심으로 물들었다.

“좋진 않으시지.”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편지하셨길래 정말 괜찮으실 줄 알았는데……. 돌아가면 한번 찾아뵈어야겠다.”

시무룩하게 흙길을 밟아 내려가던 디아나가 불현듯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왜 따라와?”

“뭐가?”

“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란 말야. 너도 얼른 네 갈 길 가야지.”

“나도 숙소로 가는 길인데.”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디아나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세드릭이 거짓말까지 해 가며 그녀를 졸졸 따라올 이유도 없었다. 더구나 이런 오지에 숙소가 여러 개일 리도 없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디아나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 근방의 숙소 다들 너무 비싸지 않니? 전에 언니랑 숙소 예약하겠다고 좀 찾아봤는데 어쩜 가격이 그래? 어차피 이런 오지엔 찾아오는 손님도 얼마 없을 텐데. 발푸르기스의 밤이 열릴 때마다 크게 한탕 하려는 속셈이 분명하다니까.”

세드릭은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마 그렇겠지.”

“그나마 나랑 언니는 대집회 날짜가 고시되자마자 예약해서 다행이야. 엊그제 확인해 보니 그사이 금액이 세 배나 올라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너는 어때?”

“나는…….”

세드릭이 그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가문의 저택이 있어서.”

“뭐? 여기에?”

디아나는 깜짝 놀랐다. 파펜하임산이 아무리 중립 지대여도 어쨌든 외국이었다. 반제가 타국의 마법 가문에게 유별나게 배타적인 나라임을 상기하면 좀체 납득하기 힘든 대답이었다.

“실제 저택이 있는 건 아니고. 그래민스터에 있는 저택의 문을 가져왔어.”

그에 디아나는 시들하게 수긍했다. 멀리 여행할 때마다 저택과 이어진 문짝을 들고 다니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 자체로 까다로운 마법인 데다, 문으로 드나들 시 저택의 보안을 담당하는 마법회로가 작동하지 않기에 문짝만 빼앗기면 누구든 저택에 침입할 수 있다는 점이 치명적이긴 했다. 하지만 자일스처럼 오만 데에 저택을 소유한 가문이라면, 한둘 문제가 생겨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었다.

도제 시절에는 체감하지 못했던 자일스의 재력이 이제 와 대단하게 느껴졌다. 디아나는 괜스레 입술을 비쭉였다.

“좋겠네. 그래민스터면 아직 따뜻할 테고.”

“빈방은 많으니, 원한다면 헤스터 경과 함께 들어와도 좋아.”

“친절도 하셔라. 하지만 벌써 숙소에 선금을 내 버려서 안 돼. 예전에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에서처럼 단추 팔아 연명할 정도는 아니니…….”

별안간 디아나의 말소리가 끊겼다. 세드릭이 의아한 표정을 짓던 찰나, 디아나가 돌연 심각한 얼굴로 세드릭의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너 괜찮아?”

디아나는 심지어 세드릭의 망토까지 들추어 댔다.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세드릭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에 편지했잖아. 괜찮다고.”

“네가 어디 아파도 아프다고 할 위인이니? 괜히 자존심 세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 이렇게 추운 날씨에 나와 있어도 돼?”

“……지금 걱정하는 거야?”

디아나는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지 않는 세드릭이 조금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눈을 치뜨며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어쩐지 날 선 말이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드릭의 표정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미묘했기 때문이다.

세드릭이 거듭 물었다.

“날 걱정했어?”

걱정. 걱정뿐일까. 혹여 죽기라도 할까 봐 울 뻔했다.

디아나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동화 사냥꾼이 정체를 드러낸 그날, 세드릭은 총에 맞아 쓰러졌다. 사경을 헤매는 상태로 며칠을 버티었고, 심지어는 그 몸으로 낙뢰를 내리기까지 했다. 온전한 신체에도 무리가 가는 마법이었다. 그리 엉망진창인 상태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디아나는 차마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니 디아나가 세드릭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둘의 관계가 껄끄러운 건 둘째 치더라도, 알고 지낸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생의 절반을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걱정? 고작 걱정했느냐 묻고 있었다, 세드릭은.

“너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디아나는 그만 울컥했다.

“걱정? 그래, 당연히 걱정했지! 그날 네 아버지가 그렇게 널 데려간 뒤로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어? 잠깐, 너는 그럼 내가 너 죽었는지 살았는지 신경도 안 쓰고 희희낙락할 줄 알았니?”

“딱히 그렇게 말하지는…….”

“그래. 이참에 한번 물어나 보자. 네가 괜찮다고 편지한 게 지난주였지? 너 지금까지 어디서 뭘 했기에 그때까지 감감무소식이었어? 내가 얼마나 많이 편지를 보냈는데! 심지어 채스터티에게도 네 소식을 물었다고! 이렇게 말짱한 줄 알았으면 그런 수고로운 일 절대 안 했을 거야!”

디아나는 끝없이 분노를 쏟아 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세드릭이 더디게 말문을 열었다.

“미안해. 네가 그렇게 걱정할 줄은 몰랐어.”

“……어?”

“사실 지난주까진 아버지랑 있었어. 아마 네가 알고 있던 주소지에는 없었을 거야. 자일스 저택이 아니었으니까.”

세드릭이 솔직하게 사과하자, 디아나는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졌다. 아까는 정당하게 화를 낸다고 생각했지만, 껄끄러운 사이에 과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뭐어, 그래.”

디아나가 겸연쩍게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그, 그런데 사실 그렇게 많이 걱정하진 않았어. 정말이야! 만약 채스터티가 너처럼 다쳤어도 똑같이 걱정했을 테니까.”

한데 세드릭이 이상하게 잠잠했다. 공연히 초조해진 디아나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나저나 채스터티 얘는 왜 이렇게 편지가 뜸하지? 허구한 날 시답잖은 일로 괴롭히더니 새로운 장난거리라도 생긴 건가?”

“……채스터티는 당분간 만날 수 없을 거야.”

세드릭이 어두워진 낯빛으로 말했다.

“왜?”

“다쳤거든. 심하게.”

디아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세드릭이 담담하게 고했다.

“자택에서 총상을 입은 채로 발견됐어. 본성에서 치료를 받고 있기는 한데 깨어날지는 미지수야. 지금도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까.”

✤      ✤      ✤

샹들리에 불빛이 몹시 눈부셨다.

디아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황홀한 천장에서 시선을 내렸다. 실용을 미덕 삼는 마법 사회의 전반적인 기조와는 달리, 200년 전 천년전쟁이 종식한 기념으로 건축되었다는 대회당은 지나치게 화려한 감이 있었다. 발푸르기스 평의회가 열리는 의사당이나 재판장은 아직 가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짐작건대 이곳 평화의 홀이 마법 사회에서 가장 화려한 장소이리라.

‘세상에나. 저게 다 뭐야?’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대리석은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나 천장화도 고개 들어 보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벽면마다 늘어선 석고 조각상은 조금 달랐다. 당최 누굴 표현했는지 몰라 한참 조각상을 들여다보던 디아나는 머잖아 어마어마하게 해괴하기 짝이 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화의 홀에 진열된 조각상은 다름 아닌 영웅시대를 개척한 아홉 인의 영웅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대저 마법 사회는 우상화를 배격했다. 신을 그리고 조각하여 널리 신성을 알리는 산티그마 교단과는 달리, 마법 사회는 신을 숭배하지 않기에 우상을 금했다. 아홉 인의 영웅을 필두로 역사상 수많은 영웅이 뜨고 졌지만, 마치 신을 우러르듯 그들을 경배하는 이는 없었다. 신과 같은 기적을 행했는지 몰라도, 그들은 신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디아나는 질린 얼굴로 반대편의 조각상도 훑어보았다. 초상화 한 점 남기지 않은 고대 마녀‧마법사들의 용모를 알 리 없음에도, 역사학 개론을 한 번이라도 들춰 본 사람이라면 능히 짐작할 만큼 특징을 잘 살린 조각이었다. 예컨대 거대한 폭풍을 일으켜 거인 왕국을 무너뜨린 멸망의 마법사 아벨라르도 아스톨포의 경우, 아스톨포 가문을 상징하는 백사자 깃발을 등에 진 채 한 손으로 바람을 부리는 식이었다.

잘 깎아 만든 조각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굳이 조각상을 제작하여 홀에 진열한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다. 아홉 인의 영웅을 비롯한 조각의 주인들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초상이 몹시 드물었다. 조각상의 대다수는 장인의 상상력에 기초한 용모일 테니, 실존 인물과는 일말의 관련성도 없는 셈이었다.

“만일 시빌라 알피어스가 되살아난다면 아주 볼만하겠습니다. 본인조차 알아보지 못할 조각상이라니요.”

문득 지척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모르는 마녀가 어느새 지척에 있었다.

“네?”

“시빌라 알피어스. 마녀사냥을 일삼던 교단의 잔인한 이단심문국에게 혹한의 단죄를 내린 겨울의 마녀입니다.”

낯선 마녀는 유유히 말을 이어 갔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난쟁이였다고 합니다. 발 받침대가 없으면 침대나 의자에 올라가지 못해서 평생 좌식 생활을 했다더군요. 더구나 어린 시절 조모에게 크게 학대를 당해 오른쪽 얼굴이 짓이겨졌다고 하니, 십중팔구 이 조각상처럼 늘씬한 미녀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건 알피어스 가문에서만 전해지는 이야기인가 보지요?”

디아나는 물끄러미 낯선 마녀를 쳐다보았다. 날갯죽지까지 단정하게 기른 은발과, 보석처럼 선명한 벽안. 한눈에 보더라도 알피어스 가문의 마녀였다.

마녀는 그제야 디아나를 마주 보며 손을 내밀었다.

“소개가 늦었군요. 수리 알피어스입니다.”

“나는 디아나 솔이에요.”

얼음의 마녀, 수리 알피어스. 달리 말하자면 알피어스 가문의 어린 수장.

이즈리얼 알피어스의 후예로 이름 높은 겨울의 마법사 휴고 알피어스를 비롯한 여러 형제자매를 제치고 글로리아 알피어스의 가장 나이 어린 막냇자식이 수장 자리에 올라 몇 해 전 마법 사회가 시끄러웠던 기억이 났다.

디아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수리를 살펴보았다. 연치 어리다는 말만 들어 왔지, 이렇게 또래의 마녀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헤스터 솔 경과 많이 닮았습니다.”

“자매니까요. 언니를 잘 아나요?”

“잉그람 마법 공회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입니다. 다만 그만한 용모라면 쉽게 잊을 수가 없겠죠.”

수리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어쩐지 어색해진 디아나가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음. 언니는 스노든 천체 관측소 소장님을 뵈어 잠시 자리를 비웠어요.”

“그렇습니까?”

수리는 다시금 시빌라 알피어스의 조각상을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연회장에서 홀로 조각상을 관람하는 사람이 나 말고 한 명 더 있기에 말을 걸어 본 것뿐입니다. 부디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발푸르기스의 밤 첫날.

둘째 날부터 평의회가 소집되는 만큼, 첫날에는 평의회에 참석하는 기성세대와 성인식을 앞둔 신출내기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환영식이 열렸다. 디아나가 아득하게 이름으로만 들어 보았던 저명한 이들도 많이 모였지만, 일면식도 없는 관계로 그들과 쉬이 어울릴 수는 노릇이었다. 결국엔 말만 번지레한 환영식이지, 실상은 알음알음 아는 사이끼리 모여 수군대는 사교 모임에 불과했다.

“수리 경은 여기에도 지인이 꽤 있지 않나요? 함께 온 친족도 있을 테고…….”

“이번에는 혼자입니다. 당고모이신 유랑의 마녀 헬렌 알피어스 경은 지난달 겔렝지어로 떠나셨고, 작은종조부이신 해독의 마법사 카메론 알피어스 경은 아내와 사별한 뒤로 두문불출하고 계십니다.”

“그럼 알피어스 가문에선 경밖에 오지 않은 건가요? 휴고 알피어스 경은요?”

현재 <공정한 알피어스>에서 가장 저명한 마법사는 단연 휴고 알피어스였다. 이즈리얼 알피어스를 계승하여 겨울을 불러오는 현존 유일무이한 마법사. 젊은 나이로 백색전당에 이름을 올렸을 만큼 재능이 뛰어나니, 발푸르기스 평의회에서 그를 찾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데 수리의 반응이 이상했다. 여태까지 딱딱하긴 해도 그다지 변치 않던 표정이 대놓고 일그러진 것이었다.

“진정 모르고 묻습니까?”

“무얼요?”

수리는 한참 디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따가운 시선에 디아나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수리는 이내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소문이 여기까지 번졌기에 사정을 다 알면서 농을 치는 줄 알았습니다.”

“곤란하다면 화제를 바꾸어도 괜찮아요.”

“아니요. 어차피 당신도, 참, 디아나 씨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디아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러도 되겠냐니, 마법 사회에서 이처럼 예의 바른 사람을 찾기도 힘들었다.

“디아나 씨도 곧 듣게 될 겁니다. 성인식이 끝날 때까지 여기 머무르든, 당장 내일 잉그람으로 돌아가든 마찬가지겠죠.”

수리가 피곤한 기색으로 읊조렸다.

“이즈리얼 알피어스의 유물에 대해서는 압니까?”

“그건 유명하잖아요. 무슨 반지라고 하던데.”

“맞습니다. 별달리 특별한 구석 없는 평범한 반지지만, 이즈리얼 알피어스가 남긴 유일한 유물이기에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이 귀한 물건입니다. 그래서 다른 가보와는 달리 이즈리얼 알피어스의 유물만은 전통적으로 겨울을 불러오는 후손이 보관해 왔습니다.”

휴고 알피어스가 보관하는 유물.

디아나는 이어질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데 휴고가 그 유물을 잃어버렸더군요.”

역시나. 디아나가 속으로 탄식했다.

“자택에 보관했던 것은 확실한데 얼마나 관리에 소홀했는지, 언제 잃어버린 것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더욱이 도둑이 들었다면 달리 사라진 귀물은 없는지, 연구는 말짱한지부터 살펴야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런데도 쓸모없는 악어만 끌어안고 챙기는 꼴이라니…….”

말할수록 열이 받치는지 무미건조하던 수리의 목소리가 차츰 뜨거워졌다. 눈앞에 휴고가 있다면 당장에 뺨을 후려갈길 기세였다.

“악어요?”

“네. 휴고는 도마뱀이라고 부르지만, 두 눈 말짱한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악어라고 말할 애완동물이 하나 있습니다. 집도 제대로 못 지키는 얼치기지만 말이죠.”

수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근래 친족들이 유물을 찾아내라며 꽤나 들쑤신 모양입니다. 며칠 전 악어를 데리고 자취를 감추었더군요. 사태가 가라앉을 때까진 돌아오지 않을 듯합니다만.”

“그렇게 귀한 유물이 사라졌는데 쉽게 가라앉을까요?”

“아니겠죠. 하지만 휴고는 신경 쓸 위인이 아닙니다. 애당초 가문에 일말의 소속감조차 없으니까요. 다만 이번 세대에서 겨울을 불러오는 사람이 그뿐이니, 결국에는 친족들이 손발을 들 겁니다. 더는 책하지 않을 테니 돌아오라 하겠죠.”

저도 모르게 수리의 한탄을 귀담아듣던 디아나는 어쩐지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알피어스 가문의 전대 수장이던 글로리아 알피어스 슬하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수장 자리를 기피한다더니, 아무래도 막내인 수리도 자진하여 수장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고생이 많겠어요.”

“수장이 될 때부터 각오한 일이기는 합니다. 모든 일족이 가문을 생각하는 건 아니니까요.”

자연스레 디아나는 설리번 자일스를 떠올렸다. 수장을 열망하는 세드릭이나, 흥미 본위로 움직이긴 해도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채스터티와 달리, 설리번은 휴고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개인주의적이었다.

어쨌든 마법사도 사람이었다. 레오나드 자일스처럼 사사건건 가문의 일에 간섭하는 이도 있는 반면, 독립한 뒤로 얼굴도 보이지 않고 나 몰라라 하는 설리번 같은 마법사도 있는 법이었다.

내리 한숨을 쉬던 수리가 시무룩한 얼굴로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내 얘기가 길어졌군요.”

“아니에요.”

디아나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풀 죽은 수리를 위로하려던 찰나.

“디아나 솔?”

한 무리의 마녀‧마법사들이 소란스럽게 이편으로 다가왔다. 죄 자작나무처럼 거대한 것을 보면 북방 반제 태생임이 분명했다.

“그리젤다 솔의 숨겨진 둘째 딸이자, 헤스터 솔의 유일한 자매. 바바라 자일스에게서 독립했다는 말을 듣긴 했으나, 이렇듯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그중 심해처럼 푸른 머리를 지닌 수려한 마법사가 말했다. 북방인임에도 제법 매끄럽게 중앙어를 구사했지만, 묘하게 이죽거리는 어조였다.

“이명을 받으러 온 거예요.”

“올바른 판단입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한 번도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여한 적이 없죠. 일평생 이명을 받지 않아 이명도감에 이름이 오르지도 못했습니다.”

디아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장례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비난하는 소리를 곧이들을 수는 없었다. 자연스레 뾰족한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려던 순간, 수리 알피어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볼프강 오르테가 경. 빌헬미나 경이 겔렝지어로 떠났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상심이 크겠습니다.”

“다행히도 편히 별세하셨습니다. 내년이면 상아탑으로 떠날 수 있었을 테니, 어머니께서도 그 점만을 아쉬워하셨을 따름입니다.”

볼프강 오르테가는 그리 말하며 지팡이를 쥐지 않은 손으로 수리와 악수를 나누었다. 조금 전 디아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아주 잘났다, 그래.’

디아나는 내심으로 투덜거렸다. 볼프강 오르테가는 그녀도 익히 들어 아는 이름이었다. 반년 전 모친인 타라 오르테가의 뒤를 이어 <오만한 오르테가>의 수장이 된 인물로, 실제 보니 성탄의 마법사란 별칭과는 달리 아주 시건방진 마법사였다.

“요사이 수장의 교체가 유독 잦습니다. 모르간 아스톨포 경은 곧 상아탑으로 향할 나이고, 자비네 그윈티르 경은 슬슬 자녀에게 자리를 넘겨줄 심산인 듯합니다. 자일스도 이번 대집회에는 세드릭 자일스 경이 수장 대리로 참석했더군요.”

“듣기로는 바바라 자일스 경도 오늘내일한다고 합니다.”

볼프강 오르테가가 소매를 매만지며 한가롭게 대꾸했다. 부러 그들의 이야기를 흘려듣던 디아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오늘내일한다는 거예요? 스승님은 그리 약한 분이 아니세요.”

“살라티에병은 무서운 병입니다. 죽음의 사막이라 불리던 가네디아 사막을 비옥한 토지로 되살린 가을의 마녀 모네타 팔리아치도 살라티에병에 걸린 지 3년 만에 눈을 감았지요. 노화에 따르는 합병증은 육신의 문제이지, 정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구나 아끼던 수양딸이 어느 날 초주검이 되어 실려 왔는데, 심적으로 공고할 리 있겠습니까?”

디아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바바라에 이어 채스터티까지 건드리는 모습이 몹시 얄미웠다.

그는 이국의 마법 가문 오르테가의 수장. 생판 남이기에 쉽게 말할 수도 있었다. 마법 사회에는 사이가 원만하지 않은 가족도 수두룩하니, 어쩌면 본인의 가족이 둘이나 시름시름 앓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저리 매정한 소리를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바로 즉사했을 치명상이야. 그나마 마녀라서 지금까지도 숨이 붙어 있는 거지.’

어제 세드릭은 비감을 겨우 삼켜 내며 그리 말했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슬픔이 한가득 깃든 눈빛은 채 숨기지 못했다. 병든 어머니와 사경을 헤매는 누이를 두고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온 심정이 어떠할까. 제아무리 원수 같던 남매지간이라도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다른 마법사들은 그럴지 몰라도 세드릭 자일스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교활한 자일스>는 대대로 용과 예지를 기반으로 번영했습니다. 하지만 용과 예지를 동시에 지녔던 마녀는 40년 전에 죽은 제노비아 자일스가 끝입니다. 이후로 용이 없던 세월이 50년. 몇 년 전에 겨우 새로운 용이 탄생한다 싶더니만, 이제는 예지를 지닌 마녀가 둘이나 쓰러졌군요. 본디 번영과 쇠락을 반복하는 것이 역사이니, 어쩌면 자일스는 새로운 용을 기다렸던 세월만큼이나 새로운 예지를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볼프강 오르테가는 비웃듯 디아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를 마주 쏘아보던 디아나가 불현듯 빙긋거리며 웃었다.

“내가 스승님께 배웠기로 자일스의 예지는 대가 끊긴 적이 없어요. 자일스의 예언가가 아닌 이상,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공연히 추측하는 것은 미신을 배척하는 마법사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니죠. 그 대신 도둑맞은 귀물이나 찾아내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겠어요?”

한없이 매끄럽던 볼프강의 표정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디아나가 언급한 것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오르테가의 콧대가 사정없이 꺾였던 30년 전을 일컬었다. 다름 아니라 <잔악한 그윈티르>의 적자인 헤센 그윈티르가 오르테가의 열두 귀물을 훔쳐 달아난 사건.

마녀의 자택에는 연구 자료나 귀중한 가보가 보관되어 있기에, 경비를 위한 엄중한 마법회로가 곳곳에 깔려 있었다. 무릇 평범한 인간은 강제로 창문을 여는 것조차 지난하며, 동족인 마녀조차 쉽사리 침입할 수 없는 곳. 하지만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뛰어난 자질을 지닌 마녀에게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요새처럼 삼엄한 저택에도 숨어들 수 있었다. 그렇기에 휴고 알피어스의 경우처럼 때때로 절도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가택의 이야기였다. 오르테가쯤 되는 마법 가문의 본성은 수천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강화하며 나날이 단단해지기 마련이었다. 요새 하나를 뚫는 것은 가할지 몰라도, 겹겹이 쌓인 요새를 뚫어 내는 것은 거의 불가했다. 헤센 그윈티르 이전에 누구도 아홉 마법 가문의 본성에 침입하지 못한 것이 아주 허황된 사실만은 아니었다.

과거, 오르테가는 본성에 오래도록 꼭꼭 숨겨 두었던 열두 귀물을 도둑맞았다. 범인이 헤센 그윈티르임을 알아내기까지도 제법 오래 걸렸으니, 오르테가로서는 그만한 치욕이 없을 것이다.

“하찮은 계집 주제에…….”

볼프강 오르테가는 부들거리며 지팡이를 꽉 쥐었다. 디아나를 내려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자, 수리가 서둘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분 말씀에 따르자면 알피어스는 수십 년째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군요. 휴고가 겨울을 불러오기까지 겨울의 공백이 장장 30년이었고, 최근에는 이즈리얼 알피어스의 유물까지 잃어버렸으니까요.”

수리는 볼프강의 지팡이 위로 가만히 손을 올렸다. 늘 냉정하던 벽안이 유독 써늘하게 빛났다.

“그리고 경은 앞으로 말을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15년 전 그리젤다 솔이 경을 조롱한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 많아요. 그러다 그리젤다 솔의 딸에게까지 희롱당한다면, 그야말로 망신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고작 저리 보잘것없는 것에게……!”

살벌하게 노기 서린 목소리가 별안간 끊겼다. 건너편을 응시하는 볼프강 오르테가의 표정이 사뭇 괴이하여 디아나도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평화의 홀로 들어오던 헤스터가 추상같은 얼굴로 이편을 쏘아보고 있었다.

“헤스터 경.”

수리가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눈짓으로 인사한 헤스터가 곧장 디아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디아나. 그만 돌아가자.”

헤스터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황급히 언니를 뒤따르던 디아나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볼프강 오르테가야 무시해도 상관없지만, 수리 알피어스는 달랐다. 그녀는 지금까지 디아나가 보아 온 동족 중에서도 인상이 굉장히 좋은 축에 속했다.

수리는 디아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디아나도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촛불로 드문드문 밝힌 의사당.

아스라한 어둠을 어깨에 두른 수십의 마녀‧마법사들이 제자리에 앉아 중앙을 응시하고 있었다. 계단식 원형 의사당의 중심은 가장 낮은 바닥. 뒤편의 가장 높은 단에 오른 발푸르기스 평의회 의장, 시오반 미렐그로가 엄중하게 중앙을 굽어보았다.

“이름은 모건 코트니. 나이는 올해로 스물아홉. 세브럼 의과 대학 중퇴 후 투텔 독립군에 입대했으나, 3년 뒤 잉그람 무장 혁명군으로 소속을 바꾸었고, 이후 화염의 마법사 니올로 팔리아치와 합세하여 펜잔스에서 기차를 점거. 그 과정에서 23명의 잉그람 군인이 사망.”

평의회 서기가 건조하게 말을 이어 갔다.

“본인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전신이 포박되어 의사당 중앙에 꿇어앉혀진 모건 코트니가 바들거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내가 아는 것은 전부 잉그람 군부에 털어놓았습니다. 잉그람 무장 혁명군 수뇌부에 대한 정보를 모두 밝히는 대신, 내 고향 투텔의 차별 정책을 철폐하기로요.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말하지만, 나를 비롯한 잉그람 무장 혁명군은 마법 사회를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었으며…….”

“모건 코트니 본인이나 잉그람 무장 혁명군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은 당신에게 협력했던 마법사입니다.”

의장 시오반 미렐그로가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 모건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니올로 팔리아치라면 이미 죽지 않았습니까?”

“여기에서까지 선문답입니까? 당신과 니올로 팔리아치를 중개한 제삼자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모건 코트니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그자는…….”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얼굴 몇 번 마주한 것이 전부예요.”

모건은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그의 창백한 낯빛을 끈지게 지켜보던 시오반 미렐그로가 구석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촛불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초상화 한 점이 미끄러지듯 의사당 중앙으로 내려왔다.

“이자의 이름은 헤센 그윈티르. 일명 부활의 마법사입니다.”

화려한 금발에 연옥색 눈을 지닌 청년이 고스란히 초상에 담겨 있었다. 척 보기에도 인상 좋은 미남이지만, 어쩐지 초상을 훑는 시선은 편치 않았다. 혈족임에도 초상을 외면하는 그윈티르, 빼앗긴 열두 귀물을 상기하며 다시금 분노하는 오르테가, 본능적으로 죄인을 꺼리는 다른 이들. 그리고 홀로 공포에 몸서리치는 모건 코트니.

“당신은 고향을 위하여 몸담았던 조직을 잉그람 정부에 팔아넘겼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고향을 아끼는지 대강 짐작할 만합니다. 혹시나 입을 잘못 놀렸다가, 그리도 사랑하는 고향이 이자의 손에 쑥대밭이 될까 두렵습니까?”

“나는…….”

“우리는 감히 괄티에로 벨리의 수감자를 탈옥시켜 펜잔스에서 참극을 일으킨 중죄인을 찾고 있습니다. 만일 이자가 맞다면 발푸르기스 평의회 산하 사냥꾼들이 이자를 체포하기 위해 일제히 움직이게 됩니다. 세상은 넓지만, 사냥꾼의 눈과 귀를 피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을 터. 내 장담하건대, 죄인은 머잖아 잡힐 것입니다.”

시오반 미렐그로가 엄숙하게 물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당신에게 협력한 마법사가 바로 이자가 맞습니까?”

모건은 초상화에서 시선을 돌리며 손발을 바르르 떨었다. 오래지 않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오반은 눈을 내리떴다. 밤하늘처럼 어두운 감색 눈동자가 나지막하게 아래를 비추었다.

“모건 코트니. 협력에 감사를 표합니다.”

의장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푸른 군복을 갖춰 입은 잉그람의 군인들이 의사당 중앙으로 내려갔다. 군인들의 손에 끌려가는 모건의 뒷모습이 몹시 처량했지만, 더는 그에게 눈길을 주는 자가 없었다.

7시 방향에 앉은 징벌의 마녀, 루이자 볼크하르트가 침묵 속에 말문을 열었다.

“헤센 그윈티르의 동선이 묘하게 니올로 팔리아치와 겹친다 싶더니, 결국 짐작이 맞았군요. 물건이나 훔치던 좀도둑이 그런 참극을 일으킬 줄 누가 알았겠느냐만, 이참에 불온 분자의 싹을 뽑아 버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텝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이런 변고를 꾀하고 있었을 줄이야.”

<잔악한 그윈티르>의 수장, 자비네 그윈티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헤센 그윈티르의 사촌 누이. 만약 그가 30년 전 오르테가의 열두 귀물을 훔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윈티르를 대표하고 있는 사람은 헤센이었을지도 모른다.

“니올로 팔리아치의 사망에 대해서는 조사가 끝났습니까? 요새 광인 니올로가 기차에서 악마를 소환했었다는 흉흉한 풍문이 돌더군요.”

평의회 서기가 의장의 승인을 얻어 대답했다.

“잉그람 중앙경찰 마법범죄부서와 발푸르기스 평의회 소속 수사관의 합동 조사가 엊그제 끝났습니다. 조사 결과, 니올로 팔리아치의 시신이 발견된 기차 칸에서 악마 소환의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잠잠하던 의사당이 돌연 떠들썩해졌다. 시오반 미렐그로가 의사봉을 마구 두드리며 외쳤다.

“조용! 서기는 발언을 계속하십시오.”

“기차에서 발견된 악마 소환의 증거는 유황입니다. 펜잔스는 황이 재배되지 않는 지역. 승객 중 일부가 유황을 소지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목이 잘린 니올로 팔리아치의 시신에서도 유황이 검출되지는 않았겠지요.”

“광인 니올로의 잘린 머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찾지 못했습니다.”

평의회 의원들의 표정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10여 년 전, 광인 니올로가 악마 소환을 이유로 종신형을 하달받은 이래 의사당에서 악마가 언급된 것은 처음이었다. 본디 악마란 잊을 만하면 음산하게 떠오르는 지긋지긋한 화두지만, 그렇다고 대강 처리할 수도 없었다. 유사 이래 악마는 늘 비운을 몰고 오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럼 악마가 니올로 팔리아치를 죽였다는 겁니까?”

볼프강 오르테가가 날카롭게 물었다. 서기는 보고서를 팔락거리며 대꾸했다.

“정황상 그렇습니다.”

“광인 니올로가 악마를 소환했지만, 도리어 그 악마가 니올로를 죽였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익살스러운 희극입니까?”

볼프강이 빈정거리자, 의장 시오반 미렐그로는 이맛살을 째푸렸다.

“볼프강 오르테가 경. 조사 결과에 동의하지 않습니까?”

“그러는 의장은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납득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표를 던지는 것은 내가 아니니까요.”

시오반에 뒤이어 수확의 마녀, 칼롯타 팔리아치가 더없이 고상한 자태로 말했다.

“악마가 소환자를 죽이는 것이 아주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드물기는 하지요. 볼프강 오르테가 경은 다른 결론을 짐작하는 듯한데 경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5시 방향에 자리한 볼프강 오르테가를 향했다. 볼프강은 변함없이 교만한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당시 기차에는 또 한 명의 마녀가 있지 않았습니까?”

디아나 솔.

의사당이 재차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볼프강에게 모여 있던 시선이 이번에는 9시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늘 그렇듯 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헤스터는 자신에게로 쏠린 관심 따위 개의치 않았다. 다만 의장을 향해 뻗어 있던 잿빛 눈이 볼프강을 향해 비스듬히 미끄러졌을 뿐이다.

볼프강은 도전적인 모습으로 말을 이어 갔다.

“디아나 솔은 펜잔스의 참극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여태 그녀의 말을 의심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디아나 솔이 악마를 소환하여 니올로 팔리아치를 죽였을지 누가 압니까? 광인 니올로가 악마를 소환했다는 확실한 증좌가 없듯, 디아나 솔이 악마를 소환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녀의 스승인 바바라 자일스 경이 이미 증언했습니다. 디아나 솔은 니올로 팔리아치에게 맞서거나, 악마를 소환할 만한 능력이 없다더군요.”

칼롯타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볼프강이 코웃음을 쳤다.

“하나뿐인 도제를 감싸 주려는 스승의 자비인지도 모르지요. 이번 대회의에 바바라 자일스 경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 대단히 아쉽습니다. 듣자 하니 도제를 제법 아꼈다는데, 이와 관련한 추궁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일부러 불참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볼프강 오르테가 경. 지금은 주요 사안에 대해 의논하는 회의지, 동족을 함부로 비난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처신에 주의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의장.”

볼프강은 여유롭게 대답하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못마땅하게 그를 응시하던 시오반 미렐그로가 이번에는 헤스터에게 발언 기회를 주었다.

“헤스터 솔 경. 경의 자매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지요. 볼프강 오르테가 경의 추측에는 명확한 증좌가 부족하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말도 아닙니다. 이에 대해 경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모두가 헤스터를 주목했다. 헤스터는 냉랭한 목소리로 즉시 대답했다.

“우리는 이성과 합리를 신봉하는 마녀입니다. 이런 공적 자리에서조차 증거 없는 추측을 함부로 남발하는 것은 부족한 인간이나 할 짓이지요. 광인 니올로가 일전에 악마를 소환했던 전과가 있음에도 그걸 무시하는 연유가 과연 이성적인 판단에서 근거한 합리적인 의심인지, 아니면 내 모친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경!”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르테가 경. 상대의 발언이 모두 끝나야만 발언할 자격을 얻는 것은 대회의의 기본적인 규율입니다. 수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회의에 익숙지 않은 것은 이해합니다만, 지나친 무례는 삼가세요.”

헤스터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조금 전 볼프강 오르테가 경의 발언에 대해 한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나의 자매, 디아나 솔은 눈이 붉지 않습니다.”

악마를 소환하면 눈이 붉어진다.

역사적으로 광인 니올로를 비롯한 몇몇 선례에서 유래한 속설이었다.

“눈이 붉지 않으니 악마를 소환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그건 세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견해일 뿐 완벽하게 증명된 사실은 아니지 않습니까?”

“단순히 속설로만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어쨌든 마법 사회 전반에서 오래도록 통용되어 왔으니까요.”

“오래 사실로 여겨졌다고 속설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죠.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무턱대고 따르는 것이야말로 마법사로서 지양해야 할 자세입니다.”

여러 마녀‧마법사가 말을 보탰다.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루이자 볼크하르트가 말문을 열었다.

“차라리 이 자리에 디아나 솔을 불러오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리젤다 솔의 둘째 딸이 이명을 받기 위해 대집회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오, 그러고 보니 어제 평화의 홀에서 그녀를 보았습니다. 수리 알피어스 경과 함께 있더군요.”

갑작스레 언급된 수리가 난처한 기색으로 어제 디아나와 말을 나눈 사실을 시인했다. 의사당 곳곳에서 탄식이 잇따랐다. 그리젤다 솔의 숨겨진 둘째 딸에 대한 호기심이 삽시간에 되살아났다.

“그리젤다 솔의 둘째 딸이라. 과연 헤스터 경처럼 자질이 충만한 마녀일까요?”

“아무렴. 그리젤다의 딸이잖습니까.”

“하지만 스승이었던 바바라 자일스 경은 제자가 니올로 팔리아치에게 대항할 수 없다고 증언했다지 않습니까?”

“광인 니올로는 유독 파괴마법에 특화된 마법사입니다. 오베론 베가의 후예가 아니고서야 단독으로 그와 맞서기는 쉽지 않습니다.”

“미렐그로 의장. 디아나 솔이 파펜하임산에 있다면 의사당으로 부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의장에게 물었다. 상당수의 의원들이 디아나 솔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찬동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그리젤다 솔이 일구어 낸 수많은 기적을 잊지 못했다. 헤스터 솔이 그러했듯 둘째 딸인 디아나 솔 역시 그리젤다의 역작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시오반 미렐그로는 외려 그들을 매섭게 질책했다.

“오늘따라 대단히 어수선하군요. 대회의는 결정하는 자리지 조사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디아나 솔에 대한 조사는 이미 수사관이 끝마쳤습니다. 만약 그녀를 더 조사해야 한다면, 그건 수사관의 몫임을 부디 주지했으면 합니다.”

의장의 경고에 의사당은 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말이 대회의 규율과 한 점 어긋나지 않으니 앙버틸 말조차 없었다.

그리 괴괴한 가운데, 이제껏 조용하던 세드릭 자일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결국 헤센 그윈티르를 잡으면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까?”

세드릭은 6시 방향 맨 뒷줄, 어둠과 맞닿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발언자를 찾아 헤매던 의원들의 시선이 차차 그편으로 모여들었다.

“펜잔스 참극은 실질적으로 헤센 그윈티르가 계획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니올로 팔리아치와 잉그람 무장 혁명군은 그의 계획을 실천한 일개 체스 말이었을 뿐이고요.”

평의회 서기가 보고서를 들추며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맞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헤센 그윈티르가 잉그람 무장 혁명군에게 먼저 접근했다고 합니다. 모건 코트니 역시 펜잔스 참극을 실제적으로 기획한 사람은 정체 모를 마법사, 즉 헤센 그윈티르라고 진술했습니다.”

“그의 계획에 애초부터 악마 소환이나 광인 니올로의 죽음이 포함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헤센 그윈티르조차 예측하지 못한 변고였을지도 모릅니다. 악마 소환이란 그만큼 뜬금없으니까요.”

세드릭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악마 소환이 그러하듯 펜잔스 참극 역시 참으로 뜬금없지 않습니까?”

올 초 느닷없이 발발한 참극. 초반 기차를 점거하고 목소리를 낸 집단은 잉그람 무장 혁명군이지만, 낡은 총기로 무장한 혁명군의 전력을 배가한 이는 니올로 팔리아치였다. 그러나 정작 판을 구상한 주모자는 악명 높은 대도(大盜) 헤센 그윈티르.

잉그람 무장 혁명군은 공공연히 아크라이트 왕가를 반대하던 집단이니, 참극에 동참할 여지가 충분했다. 광인 니올로 팔리아치는 예부터 공격성이 남다르던 마법사. 더구나 지옥 같은 괄티에로 벨리에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터였다.

하지만 헤센 그윈티르는 도대체 무얼 위하여 참극을 일으켰는가?

“세드릭 자일스 경.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근방에 앉은 풍랑의 마녀, 로시오 아스톨포가 낯을 일그러뜨렸다.

“헤센 그윈티르는 지난 5년간 죽은 듯이 잠잠했습니다.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도 절도만 일삼았을 뿐 무의미한 살생은 저지르지 않았지요. 그런데 갑자기 등장해서 참극을 일으켰다? 그것도 동족이 아닌 평범한 인간을 상대로?”

“광인의 생각을 우리가 짐작할 수나 있겠습니까? 헤센 그윈티르는 이미 자신을 쫓던 사냥꾼을 넷이나 살해한 전적이 있어요. 갑자기 살인 욕구가 들끓었는지 누가 압니까?”

“그렇다면 펜잔스를 택하지는 않았겠죠.”

세드릭이 차게 웃었다.

“펜잔스에는 겨울의 마법사, 휴고 알피어스 경이 있습니다. 단순한 살육을 원했다면 더 쉬운 장소가 수두룩한데도 헤센 그윈티르는 굳이 펜잔스를 택했습니다. 대신 겨울의 별 발디비아가 가장 잠잠한 시기인 늦봄에, 발디비아와 상성이 좋지 않은 역천의 별 무제타가 가장 강성한 시기인 역천의 날을 기일로 잡았지요.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광인 니올로는 역천의 별 무제타의 축복을 받은 파괴적인 마법사입니다. 겨울이 지나 다소 허약해진 휴고 알피어스 경에게 맞서기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호적수가 아닙니까?”

의장 시오반 미렐그로가 미간을 좁혔다.

“그럼 헤센 그윈티르에게 또 다른 흉계가 있단 말입니까?”

“나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단순히 살육을 꾀했다기엔 지나치게 어려운 길을 택했다고 보이는군요. 아마도 다른 목적이 있어 참극을 일으켰다고 짐작합니다만, 정확한 목적은 헤센 그윈티르 본인만이 알 겁니다.”

평의회 의원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광인 니올로가 화려하게 날뛰었을 뿐이지, 실제 참극의 주모자는 헤센 그윈티르였다. 악마 소환이나 니올로의 변사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헤센 그윈티르가 대도라 불릴 날도 이제는 머지않은 듯싶습니다.”

“그럼요. 사냥꾼들이 죄다 덤비면 도리 없습니다. 도망자 기네비어도 장장 60년의 추격전 끝에 결국 붙잡히지 않았습니까?”

대체로 낙관적인 전망이 평의회의 중론을 이루었다. 하지만 볼프강 오르테가는 지금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디아나 솔과 악마 소환을 연관 지어 어떻게든 그리젤다의 이름을 깎아내리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건만, 세드릭 자일스의 발언으로 화제가 완전히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볼프강은 못마땅한 눈으로 세드릭을 노려보았다.

‘수장 대리로 참석했으면 조용히 있다 갈 것이지.’

때마침 루이자 볼크하르트가 다리를 꼬며 비웃듯 말했다.

“글쎄요. 그리 쉽겠습니까? 일전에 에드윈 베가 경도 그를 한 차례 놓치지 않았던가요?”

“에드윈 베가? 낙뢰를 내리는 섬광의 마법사를 말합니까? 설마 그가 놓쳤을 리가요.”

“아니요. 나도 언젠가 들은 적 있습니다. 에드윈 경이 헤센 그윈티르를 사살했다고 보고한 바로 이튿날, 헤센 그윈티르가 아스톨포 가문의 본성에 침입했었지요.”

의사당이 점차 시끄러워졌다. 오베론 베가를 계승하여 마른하늘에서도 무시무시한 낙뢰를 내리는 에드윈 베가는 수많은 사냥꾼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애당초 베가의 낙뢰는 한번 내리치면 막을 방도가 없으니 당연했다.

세드릭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볼프강은 입매를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사냥꾼의 명성도 예전 같지 않군요. 이래서야 헤센 그윈티르를 잡는 데만도 아주 오래 걸리겠습니다.”

그의 말을 기점으로, 열띠게 말을 주고받던 분위기가 차츰 가라앉았다.

기실 이번 평의회는 펜잔스 참극을 수습하기 위해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200년 전 천년전쟁이 종식한 이래 마법사가 고의로 이만치 많은 민간인을 죽인 사건은 몇 없었던 만큼, 작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선 사태를 신속하게 바로잡아야 했다.

하지만 정작 참극의 주모자가 없으니 평의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냥꾼이 헤센 그윈티르를 일차적인 목표로 추적해도 시일을 확정하진 못하는 법. 단단히 마음먹고 숨은 마법사를 찾기란 참으로 지난하기에, 어쩌면 도망자 기네비어처럼 체포에만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검지로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던 세드릭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헤센 그윈티르의 이명이 어째서 부활인지 압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무릇 이명이란 별이 선사하는 또 하나의 이름. 이명이 뜻하는 바는 성품에서 기인할 때도 있고, 자질에서 기인할 때도 있었다. 때때로 다르기에 이제 와 이명의 진의를 헤아리는 것은 소용없었다.

헤센 그윈티르의 사촌 누이인 자비네 그윈티르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알기로 헤센의 탄생성이 부활의 별 롬입니다. 별의 이름을 이명으로 받는 경우가 아주 드물지는 않지요.”

“맞습니다. 하지만 헤센 그윈티르는 말 그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더군요.”

일순 의사당이 몹시 소란스러워졌다. 이번에는 의장 시오반조차 소요를 잠재우지 못했다.

“나의 아버지, 에드윈 베가 경에게 일전에 물은 적이 있습니다. 어째서 당신께서 사살했다는 죄인이 세상에 활개치고 다니느냐고요.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헤센 그윈티르에게 낙뢰를 내렸다. 그의 송장은 까맣게 타들어 갔으므로 ‘그때’는 죽은 것이 확실하다.”

“에드윈 경이 사람을 착각한 것이겠죠. 베가의 낙뢰를 맞고도 살아난 사람은 전례가 없습니다.”

“나도 최근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헤센 그윈티르를 닮은 사람이 한둘쯤은 있겠지, 그리 여겼지요.”

세드릭은 잠시 말을 끊으며 무의식적으로 총상을 입었던 복부를 짚었다.

“……두어 달, 전 우연히 헤센 그윈티르를 만났습니다. 그가 먼저 총을 쏘았기에 낙뢰를 내렸죠. 당시 나는 총상을 입어 성치 않은 몸이었지만, 그가 직격으로 낙뢰를 맞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분명 헤센 그윈티르는 그때 숨이 끊어졌어요.”

“그가 죽었다는 겁니까?”

“아니요.”

촛불이 크게 일렁였다. 세드릭의 차디찬 얼굴 위로 불길한 그림자가 번져 갔다.

“최근 나의 누이, 채스터티 자일스가 자택에서 괴한에게 총을 맞았습니다. 당시 자택의 마법회로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으므로, 평범한 인간은 침입할 수 없었습니다. 범인은 동족이었죠.”

총기를 사용하는 마법사는 매우 드물었다. 총은 여느 마법보다 손쉽게 살인할 수 있는 도구지만, 본디 살인은 마법사의 덕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법을 다룰 줄 알기에 평범한 인간처럼 자신을 보호할 목적으로 총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살인하지 않으면 총을 지닐 까닭이 없었다.

“검사 결과, 채스터티를 관통한 총알과 나를 맞힌 총알은 동일한 총기에서 발사되었다고 합니다.”

세드릭이 담담하게 고했다.

“헤센 그윈티르의 이명은 부활. 그는 죽지 않습니다.”

헤스터는 느릿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의회는 펜잔스 참극 말고도 여러 안건을 논의했지만, 다른 안건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상에 둘도 없는 기막힌 소리를 들은 탓이다.

죽지 않는 마법사라니. 정말로 그리그 프롬이 되살아날 이야기였다.

헤스터는 제자리에서 골똘히 고민했다. 그녀가 알기로 세드릭 자일스는 충분히 합리적인 마법사. 헤센 그윈티르가 진실로 불사의 몸을 지녔다고는 여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내로라하는 마녀‧마법사만을 집결한 발푸르기스 평의회 의원들이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을 리 없었다.

그러니 무슨 수가 있을 것이다. 용도 죽이는 베가의 낙뢰를 직격으로 맞고도 죽지 않는 비밀스러운 방도가.

“헤스터 경.”

문득 가까이서 호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의사당. 서늘하게 비어 버린 그곳에 어느덧 단 두 명의 마녀만이 남아 있었다.

“……칼롯타 팔리아치 경.”

헤스터는 다소 경계하는 눈빛으로 이국의 마녀를 보았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과 영롱한 금안은 첫눈에도 호감을 주기 충분한 인상이나, 헤스터는 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어수룩한 마녀가 아니었다.

“생각이 많으신가 봅니다. 몇 번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큰 소리를 내었어요.”

“내게 용건이 있습니까?”

자신을 살피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칼롯타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붉은 입술은 오히려 더욱 깊은 호선을 그렸다.

“평의회가 끝나면 잠시 시간을 내어 줄 수 있나요? 그대와 나누고픈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죠?”

“글쎄요. 우리의 두 동생들과 관련되었다고 하면 어떨지.”

칼롯타가 자그맣게 소리 내어 웃었다. 헤스터는 더없이 차게 얼어붙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수확의 마녀, 칼롯타 팔리아치.

메시나의 마법 가문 <숭고한 팔리아치>의 수장이자, 난공불락 뮈티레 요새의 성주.

동시에 광인 니올로 팔리아치의 누이였다.

✤      ✤      ✤

발푸르기스의 밤은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환영식이 열리고 평의회가 소집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훌쩍 넘었지만 200여 명의 마녀‧마법사가 운집한 파펜하임산은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이번 대집회를 주최한 아스톨포 가문에겐 참으로 다행이되, 좀 더 굉장한 것을 기대했던 디아나에겐 다소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디아나는 지난 일주일을 빈둥거리며 지냈다. 적어도 이맘때쯤이면 도착하리라던 상아탑의 사자는 아직도 연락이 없는 것인지, 성인식을 시작한다는 전갈은 올 기미조차 없었다. 그나마 흥미가 이는 평의회는 참석할 자격이 안 되므로, 그녀처럼 신출내기가 드나들 수 있는 곳은 고작해야 재판장뿐이었다. 하지만 첫 재판을 참관하러 갔던 날, 몹시 불쾌한 경험을 한 뒤로 재판장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볼프강 오르테가, 그 못된 마법사 같으니!’

디아나는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일전에 환영식에서는 다행히 언니인 헤스터와 수리 알피어스가 있어 어찌어찌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홑몸이었던 재판장에서는 그조차 불가했다. 게다가 볼프강 오르테가는 고상한 용모와는 달리 아주 영악한 구석이 있어, 주변에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없음을 일찌감치 간파한 모양이었다.

‘당신이 아는지 모르겠군요. 그리젤다 솔은 일평생 곤궁했습니다. 하루 벌어먹기 위해 비천한 의뢰도 도맡았지요. 바바라 자일스 경이 연민으로 당신을 거두지 않았다면, 아마도 당신은 그리젤다 솔의 빚 대신으로 팔려 갔을 겁니다.’

볼프강 오르테가는 어머니에게 굉장한 원한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10년도 전에 죽은 사람을 그렇게나 신랄하게 비난할 수는 없었다. 산더미 같은 빚에, 어마어마한 남성 편력에, 일반적인 시선에선 도무지 좋게 보아 줄 수 없는 분방한 성정까지. 볼프강의 혀는 이미 죽고 없는 그리젤다를 아주 도륙 내어 버렸다.

더욱 짜증 나는 건 디아나가 그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볼프강의 말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디아나는 그저 어머니 그리젤다 솔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리젤다 솔. 이제는 전설로 남은 위대한 마녀.

하지만 디아나는 그리 대단하신 어머니에 대해 다른 사람이 아는 정도로만 알았다. 예컨대 가장 큰 업적으로 회자되는 카스텔리토 화산의 분출을 잠재운 일이나, 세간에서도 유명한 로르제 미술관 방화 사건이 대표적이었다. 그 외 자잘한 일화를 제한다면, 디아나에게 가장 체감되는 어머니란 역시 빚쟁이였다. 언니인 헤스터가 어머니의 빚을 갚겠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미의 자질을 그대로 물려받아 강인한 마녀로 성장한 첫째와 달리, 연약하기 그지없게 태어난 자그마한 둘째 딸. 그리젤다는 갓 태어난 둘째를 반편이 노파에게 맡기곤 미련 없이 떠나갔다. 그리해 디아나가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란 관에 조용히 누워 있는 시신이었다.

‘어머니께선 많이 아프셨어. 널 사랑하지 않으신 게 아니란다.’

헤스터는 늘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 가는 길에서조차 약하디약한 막내딸을 걱정하셨다는 어머니. 동생을 잘 돌보겠다는 첫째의 약속을 듣고서야 편히 눈감으셨다는 어머니. 하지만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히는 언니와 달리, 그럴 때마다 디아나는 늘 어색하기만 했다. 목소리 한 번, 손길 한 번 받아 본 적 없는 어머니의 존재란 그리도 까마득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생판 남이 함부로 헐뜯는 건 싫다.

그리젤다에 대한 디아나의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어쨌든 볼프강인지 보풀인지, 다음에 만나면 기죽지 말고 쏘아붙여야겠어. 혹시라도 언니가 듣기라도 하면 불쾌할 테니까.’

디아나는 그리 생각하며 코트 단추를 여몄다.

오늘은 발푸르기스의 밤이 시작된 지 아흐레째 되는 날. 드디어 평의회가 끝나는 날이었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예상했던 추위가 몰아쳤다. 디아나는 구시렁거리며 코트 옷깃을 세웠다. 예전부터 추위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디아나는 특히 재판장에서 볼프강 오르테가와 마주친 이후로 숙소 나서기를 꺼려 했으나, 오늘만은 예외였다.

요사이 헤스터는 여드레간의 평의회 대장정으로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죽어도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피로에 찌든 모습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전 9시에 시작하는 평의회는 툭하면 자정을 넘겨 끝났고, 숙소로 돌아와서도 이튿날 논의해야 하는 안건을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쉴 틈이라곤 전혀 없었다. 강도 높은 노동에 익숙한 헤스터도 간신히 따라가는 강행군이었다.

그래서 디아나는 평의회가 끝난 기념으로 언니를 마중하기로 했다. 그녀만 보면 눈에 쌍심지를 켜는 볼프강 오르테가가 조금 마음에 걸렸으나, 근처에 잘 숨어 있다가 피하면 그만이었다. 그깟 열등감에 사로잡힌 마법사보다는 초주검이 된 언니를 위로하는 게 급선무였다.

디아나는 쌀쌀한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흔쾌히 걸었다. 한때 언니의 사랑을 의심한 적이 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올리버 펜리의 존재가 손톱만큼 마음에 걸리긴 했다. 하지만 여기엔 올리버가 없으므로, 지친 헤스터를 달래 줄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그러니 추위 따위가 앞길을 막을쏘냐. 디아나는 언니를 위해서라면 극북의 얼음산맥도 넘을 용의가 충분했다.

“……다음은 아마도 후년에나…….”

때마침 평의회가 끝난 것인지, 대회당에서 수십의 마녀‧마법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디아나는 얼른 근처 측백나무 뒤에 숨었다. 나무가 얼마나 건장한지, 그녀 하나쯤은 충분히 가리고도 남았다.

“마지막에 의장은 아주 쓰러질 기세더군요. 가만 보면 루이자 볼크하르트 경은 평의회의 흐름을 아주 교묘하게 제멋대로 끌고 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북방 마법 가문 출신은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마흔 명 가까이 되는 그들을 통제해야 하는 의장만 힘들지요.”

“이번에 알피어스나 베가의 출석률이 너무 떨어진 것도 이유일 겁니다. 그나마 자리를 지킨 자일스도 정작 수장이 불참했죠. 아홉 마법 가문 외의 출신은 단합이 힘들고, 팔리아치나 아스톨포가 대적하기엔 수적으로 차이가 너무 심합니다.”

“휴고 알피어스 경이야 절도 사건 이후로 잠적했다지만, 도대체 아멜리아 베가 경은 왜 소식도 없이 불참한 겁니까? 예전에는 겉치레 삼아 독수리라도 보내더니 이제는 그런 것조차 없군요.”

“황혼의 마녀가 언제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까? 본인은 불참하더라도 가문의 일족은 참여하도록 언질 주었어야 하는데, 본인이 가문의 수장이라는 걸 아주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그 여자는 옛날부터 그랬지요. 제자인 헤스터 솔 경은 스승을 닮지 않아 천만다행입니다만.”

흘러가는 이야기가 귓전을 붙들었다. 가만히 대화를 주워듣던 디아나가 별안간 깜짝 놀라 나무 뒤로 옹송그렸다. 간발의 차로 볼프강 오르테가가 나무를 스쳐 지나갔다. 뒤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는 걸 보면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디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깥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뒤늦게 대회당을 빠져나오는 언니가 보여 손을 흔들려는데, 그보다 가까운 세드릭과 먼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세드릭은 자일스 일족으로 보이는 몇몇과 수리 알피어스와 함께였다. 디아나가 주춤거리며 손을 내리는 새, 세드릭이 고개 돌려 헤스터를 불렀다. 낯선 마녀와 대화를 나누던 헤스터가 비로소 디아나를 보았다.

“디아나? 네가 왜 여기에…….”

헤스터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디아나는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오늘 평의회가 끝난다고 해서 마중 나왔어.”

디아나는 오킹엄에서도 곧잘 헤스터를 마중하곤 했다. 그때마다 헤스터가 환히 웃는 모습이 좋았을 뿐인데, 어째 지금은 표정이 심상치 않다.

“미안해.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헤스터는 몹시 미안스러운 기색이었다. 디아나가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으려던 차, 헤스터와 동행한 낯선 마녀가 단걸음에 다가왔다.

“어머나. 당신이 디아나 씨군요?”

마녀는 키가 크고 늘씬한 미인이었다. 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를 보면 남부 메시나인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도 육식 동물처럼 예리한 금안은 <숭고한 팔리아치>의 상징.

디아나는 대강 마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쩜 그리젤다를 이렇게나 쏙 빼닮았을까. 키가 조금 작은 것만 빼면, 그리젤다가 되살아났다 해도 믿겠어요.”

“네에…….”

디아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굴렸다. 그사이 표정을 갈무리한 헤스터가 점잖게 나섰다.

“디아나. 나는 칼롯타 경과 잠시 얘기를 나누기로 했으니 먼저 돌아가렴. 이따가 숙소에서 보자.”

“알았어.”

헤스터는 칼롯타와 반대편 길로 가버렸다. 어지간히도 디아나에게 미련이 남는지, 칼롯타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댔다. 디아나도 예의상 웃어 주긴 했으나, 어줍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법 사회에서 생면부지에게 저리도 살갑게 구는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었다.

멀어지는 헤스터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디아나가 침울한 표정으로 뒤돌았다. 마중하겠다고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으나. 바람맞고도 유쾌할 리 없었다.

그런데 뒤편에는 아직도 세드릭이 있었다. 디아나는 얼결에 인사했다.

“안녕.”

세드릭은 조금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가 망설이며 말문을 열려는 찰나, 곁에서 뚫어지게 회중시계를 보던 마법사가 세드릭을 재촉했다.

“시간이 그다지 여유롭지 않습니다. 벨린다는 주말에는 편지를 읽지 않는 마녀예요. 빨리 전서구를 날려야 합니다.”

그리 말하는 마법사는 흑발 녹안의 중년 사내였다. 생김새를 보면 자일스 일족인 듯한데, 디아나는 얼굴을 모르는 마법사였다.

결국 세드릭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성인식이 끝나면 너와 헤스터 경을 정식으로 초대할게.”

“응.”

디아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은 그녀와 수리 알피어스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일족을 거느리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나니 어느덧 수리와 단둘만 남았다.

서먹한 분위기만 감도는 가운데, 수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 숙소가 근처입니다. 잠시 몸을 녹였다 가겠어요?”

세드릭처럼 저택의 문짝을 가져왔으리라 예측한 것이 무색하게, 수리는 평범한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1인실이기에 오히려 헤스터와 디아나가 사용하는 2인실보다도 좁았다.

“잉그람이었다면 저택으로 초대했을 텐데 상황이 마땅찮군요. 대접이 보잘것없어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녜요. 초대만으로도 감사한걸요.”

아무리 열흘 남짓 사용하는 숙소여도, 기본적으로 마녀는 자신의 공간에 타인을 들이는 것을 꺼렸다. 혹여 연구 자료를 빼앗길까, 귀한 물건을 도둑맞을까 하는 걱정은 부차적이었다. 본디 마녀란 족속이 낯모르는 타인을 몹시 경계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디아나는 수리가 순수한 호의로 초대했음을 알았다. 어쩌면 아예 모르는 관계보다 더 멋쩍은 사이지만, 차마 초대를 거절할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수리는 벽난로에 불을 피운 뒤 찻주전자를 들고 다가왔다. 마법으로 금세 끓어오른 찻물이 향긋한 내음을 풍겼다.

“차향이 좋네요.”

디아나가 어색하게 말문을 열었다.

“차를 좋아합니까?”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좋아해요.”

말을 마친 디아나는 일순 공황에 사로잡혔다.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좋아한다? 누가 들어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로 이해할 말이었다. 물론 평소에 차를 자주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겉치레나마 좋아한다고 답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그러자 잠깐 침묵하던 수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나도 그렇습니다.”

다행이다. 디아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네.”

디아나는 황급히 차를 들이켜다가 혓바닥을 델 뻔했다. 이후로 조심스럽게 한 모금 머금었지만, 뜨거워서인지 긴장해서인지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차가 아주 달다고 성심껏 예의를 차리려던 차에.

“맛이 없군요.”

수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디아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잃었다.

“미안합니다. 코델리아가 선물한 찻잎인데, 그녀의 입맛이 독특하다는 걸 깜빡 잊었습니다.”

“코델리아요?”

“코델리아 알피어스. 내 자매입니다.”

디아나는 멀거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매와 사이가 좋은 모양이에요. 이렇게 선물도 주고받는 걸 보면.”

“다른 형제자매보다는 원만한 축입니다. 어쨌든 코델리아는 아직 연락이 끊기지 않았으니까요.”

“대단히…… 좋은 관계네요.”

역시 휴고 알피어스만 이상한 게 아니다. 저 집안 형제자매는 전부 이상했다.

“별말씀을. 오히려 헤스터 경과 디아나 씨가 아주 각별해 보였습니다. 마법 사회에서 그렇게나 단란한 가족은 아주 오래간만입니다.”

수리는 그리 말하며 찬장에서 쿠키를 꺼내 왔다. 하지만 한입 먹어 본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저것도 입맛이 특이한 코델리아 알피어스가 선물한 모양이었다.

“언니와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거든요. 그래서 더 애틋한 것 같아요.”

디아나가 수줍게 말했다. 말을 경청하던 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디아나 씨는 헤스터 경을 언니라고 부르는군요. 보통은 나이 많은 형제자매도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까?”

“그게, 실은 아주 어릴 적에는 평범한 할머니 밑에서 자랐거든요. 인간들 틈에서 자라다 보니 어느새 언니라는 호칭이 입에 붙었나 봐요.”

수리는 대수롭지 않게 수긍했다. 디아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얼른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스승님 따라 자일스 저택에 와 보니 다들 이름으로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채스터티나 설리번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어요. 내게 언니는 한 명으로 족하니까요.”

“그렇군요.”

잠시간 망설이던 수리가 말을 덧붙였다.

“디아나 씨가 부럽습니다.”

몸을 녹이려 당최 맛도 모르겠는 찻물을 넘기던 디아나는 그만 전부 뿜어낼 뻔했다.

“왜, 왜요?”

“사이좋은 자매가 있잖습니까. 세드릭 경도 디아나 씨를 많이 아끼는 듯하고요.”

수리가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말했다.

“내게는 세 명의 형제와 두 명의 자매가 있습니다. 그중 동복형제가 둘이지만, 헤스터 경과 디아나 씨처럼 사이좋은 형제자매는 한 명도 없어요. 사이가 좋기는커녕 꾸준하게 연락이 닿는 사람은 코델리아뿐입니다. 휴고도 원래는 이런 대소사에 불참하는 일은 없었는데, 망할 악어를 기르면서부터 외출하길 급격히 꺼려 하더군요. 그래도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입니다.”

어쩐지 ‘망할 악어’에 방점이 찍힌 것 같지만 디아나는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휴고 경도 곧 돌아올 거예요.”

“네. 늦어도 올해 안으로는 돌아올 겁니다. 가문을 통하는 휴고의 계좌를 전부 막아 버렸으니까요.”

수리의 말은 다소 섬뜩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것도 애써 무시했다.

“헤스터 경과 디아나 씨처럼 애틋하게 지낸다는 건 애당초 불가하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 동족에게 양심을 기대하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다지만, 그래도 사람으로서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내게 이러면 안 되는 겁니다.”

찻잔을 쥔 수리의 손을 바들바들 떨렸다. 흘끗 본 찻잔 속은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디아나는 차마 얼어붙은 찻물까지는 무시하지 못했다.

“저, 수리 경…….”

“그렇지 않습니까? 막내인 내가 가문의 수장이 된 건 형제자매가 전부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허구한 날 어머니께선 자식을 여섯이나 낳았는데 뒤를 이을 놈 하나 없다며 한탄하시고, 그럴 때마다 나오미는 아직 기저귀도 못 뗀 아들을 들이밀며 후계로 삼으라고 난리를 쳤죠. 휴고는 스스로 겨울을 이었으니 수장은 다른 사람이 이으라는 웃기지도 않은 궤변만 일삼았고, 심지어 재스퍼는 단체로 결투를 벌여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사람을 수장으로 하자는 미친 소리나 해 댔습니다. 집안이 그 꼴인데 나라도 수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만 놔두었다간 정말로 풍비박산하게 생겼는데?”

늘 인형처럼 생기 없던 수리가 처음으로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리 열띠게 털어놓는 걸 보면 모르긴 몰라도 속에 쌓인 것이 아주 많은 듯했다.

“그러게요. 다들 정말 너무하네요!”

그리고 핍박받아 온 동년배의 사연에 디아나는 금세 공감했다.

“세상에나, 결투라니! 늘 못된 장난이나 일삼던 채스터티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재스퍼는 내 형제자매 중에서 가장 엇나간 사람입니다. 투견 대회가 그의 유일한 취미였죠. 내가 수장이 되기도 전에 연락이 끊겨서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모르지만, 어느 날 재스퍼의 사진이 박힌 수배 전단이 날아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형제자매는…….”

수리는 음침하게 이를 갈았다.

“다른 형제자매는 적어도 말은 통하는 작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수장이 되면 적어도 폐는 끼치지 않겠지, 그리 여겼는데 차라리 폐를 끼치는 편이 낫겠습니다. 설마 이렇게나 무책임하게 연락을 끊어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수리 알피어스는 불과 열다섯의 나이로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녀의 모친인 글로리아 알피어스는 당시 예순을 바라보던 나이로, 더는 수장직을 유지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여섯이나 되는 자식은 물론이요, 일가친척까지도 후계자 자리를 마뜩잖게 여겨 불가피하게 수장직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어느 날 수리가 용기 내어 당신의 뒤를 잇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글로리아는 어린 막내딸에게 보관을 물려주고 희희낙락 외진 별장으로 떠나 버렸다.

그러나 열다섯의 수리 알피어스는 지나치게 어렸다. 별다른 교육도 없이 덜컥 물려받은 수장직을 제대로 수행하기에 그녀는 너무 어렸다.

“수장이 일족들과 불평등 계약을 맺어 강제적인 충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북방 마법 가문과 달리, 알피어스를 비롯한 잉그람의 마법 가문은 수장에게 그런 권력이 없습니다. 말이 좋아 가문의 대표이지, 기껏해야 얼굴마담 정도예요. 마법 사회와 잉그람 정부 사이를 조율하거나, 전국에 흩어진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거나, 아니면 일족 간의 다툼을 중재하는 등의 번거로운 일을 수장이란 허울 좋은 직책에게 몰아준 것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수리가 낮게 읊조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어머니께선 더 이상 가문의 대소사에 관심이 없으셨는데, 아마도 다른 형제자매들이 어련히 날 도와주리라 여기셨던 모양입니다. 물론 난 그들이 어떤 작자인지 알기에 그런 기대 따위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어요.”

다만 제자리만은 지켜 줬으면.

다른 책임조차 내게 떠넘기진 말았으면.

“……하지만 그조차 너무 큰 기대였나 봅니다.”

수리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디아나는 홀로 고군분투하는 수리가 안쓰러웠다. 자일스 일족은 사사건건 간섭해서 문제였는데, 알피어스는 너무 무관심해서 문제인 것 같았다.

“내가 위로해 줄 수 있는 말이 얼마 없네요. 하지만 수리 경, 지금 골치 아픈 일들 전부 말끔하게 해결될 거예요. 연락이 두절된 다른 형제자매는 몰라도 휴고 경은 계좌가 막혔으니, 곧 돌아올 거라면서요?”

“그렇긴 합니다만…….”

수리가 괜스레 손가락을 얽으며 디아나를 흘깃거렸다.

“저번에도 이번에도 디아나 씨에겐 항상 미안합니다. 이렇게나 내 말을 귀담아들어 주는 사람은 정말로 오래간만이라 자꾸 속말을 꺼내게 되네요.”

“아녜요. 나는 괜찮아요.”

“남의 말을 들어 주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나도 잘 압니다. 사이 나쁜 일족을 중재할 때마다 서로 고집만 피우는 이야기를 물리도록 들어 왔으니까요.”

수리는 제법 의젓하게 말했다. 그러나 디아나는 자꾸 그녀에게 마음이 쓰였다. 디아나도 스승의 집에서 얹혀살며 꽤나 눈치를 보았다지만, 자일스 일족의 복잡한 신경전만은 남의 일이라고 치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넘길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알피어스도 자일스 못잖게 속사정이 복잡한 듯한데, 그러한 아수라장의 복판에서 20년 가까이 버틴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더구나 디아나에겐 힘들 때마다 기댈 수 있는 언니가 있었다.

하지만 수리에게는 누가 있었나?

“그럼 친구를 사귀어 보는 건 어때요?”

디아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친구요?”

“마음 터놓고 지낼 수 있는 관계는 힘들지 몰라도, 함께 대화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수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혹시 주변에 친구 삼을 만한 사람이 있나요?”

“의절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주 많습니다.”

“음. 그런 사람들은 아무래도 제외하는 게 좋겠죠?”

디아나는 고민에 잠겼다. 친구를 사귀라고 호기롭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그녀도 의식적으로 친구를 사귄 적은 없었다. 세드릭과 채스터티는 스승의 자녀로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고, 올리버 펜리는 친구라기엔 뭔가 부족하다. 오히려 경쟁자라면 경쟁자였지.

“채스터티……는 아녜요. 분명 경에게 악영향만 끼칠 게 분명하니까.”

디아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세드릭은 어떨까요?”

“세드릭 자일스 경이요?”

수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아나는 자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좁다란 인맥에서 수리에게 소개할 만한 동년배는 세드릭이 전부였다.

“걔가 어릴 때는 좀 그랬어도 지금은 많이 차분해졌거든요. 경처럼 가문의 수장이 될 테니까, 어쩌면 말이 통할지도 모르고……. 참, 아까 보니 세드릭이랑 함께 있었잖아요. 혹시 친해요?”

“아뇨. 이번 평의회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평의회 의원 중에서 또래는 세드릭 자일스 경 정도고, 이번에 베가 출신 참석자가 적어서 자일스 쪽과 대화를 조금 나눴을 뿐입니다.”

“대화해 보니 어때요? 친구로 괜찮을 것 같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책임감 있는 분인 것 같기는 한데.”

수리가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디아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몇 마디 나눠 봤다고 다 친구가 되는 건 아니었다.

“저기, 그런데 디아나 씨.”

한참 망설이던 수리가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아까 친구란 함께 대화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이 바로 그런 즐거운 시간이 아닐까요?”

그에 디아나는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수리의 말을 곱씹고 곱씹다가 비로소 말뜻을 이해했는지, 뒤늦게 뺨이 붉어졌다.

“그, 그런가요?”

“나는 그렇습니다. 만약 디아나 씨는 즐겁지 않다면…….”

“아뇨! 나도 즐거워요!”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그녀를 힐끔거리던 수리가 수줍게 웃었다.

“그럼 이제 우리도 친구인가요?”

✤      ✤      ✤

평화의 홀.

200년 전 백년전쟁이 종식한 기념으로 건축된 대회당 유일한 홀로, 발푸르기스의 밤 첫날에 환영식을 열 때가 아니고서야 사시사철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어쨌건 기념관이라는 명목에 맞게 전설로 내려오는 마녀‧마법사들의 석상을 세워 두긴 했으나, 우상의 전통이 없는 마법 사회에선 참으로 생경한 정경이었다.

“어째서 여기에 들어온 건가요?”

헤스터는 앞서 걷는 칼롯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둘은 굳건히 잠겨 있던 문을 마법으로 풀어내고 평화의 홀에 막 들어선 참이었다.

“앞으로 일이 년은 여기 들어올 일도 없을 테니까요. 경도 알다시피 발푸르기스의 밤은 보통 격년으로 열리잖아요?”

칼롯타는 그리 말하며 어느 조각상 앞에 바르게 섰다. 조각상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그녀답지 않게 공순했다.

한 손으로는 사과에서 싹을 피우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시들어 죽어 가는 들꽃을 되살리는 마법사.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빛깔은 알 수 없으나, 유독 곱슬곱슬한 머리와 두툼한 입술로 헤스터는 조각상의 정체를 능히 짐작해 냈다.

“헤를론 팔리아치입니까?”

“네. 자그마치 800년 전의 선조이지요.”

번영의 마법사, 헤를론 팔리아치.

검은 피부는 노예로 천대받던 시기. 노예였던 아버지를 닮아 검은 피부를 타고난 헤를론 팔리아치는 어마어마한 마법 재능을 바탕으로 수십 년간 가문의 수장으로 군림했다. 쟁쟁한 친족들이 검은 피부의 수장을 수긍할 수 있었던 연유는 오직 그만의 고귀한 재능.

성장.

시조인 마체 팔리아치를 비롯하여 역사상 적잖은 팔리아치의 일족이 가을을 불러왔으나, 누구도 헤를론처럼 식물을 성장시키지는 못했다. 갓 발아한 싹도 그의 손길을 거치면 삽시간에 열매를 맺었고, 막 낙엽을 떨어트린 가지도 그의 눈길을 받으면 새로이 푸릇푸릇한 잎사귀를 피워 냈다. 그리하여 헤를론의 생전에 뮈티레 요새는 까마득하게 성장한 풀숲에 가려 어지러운 전란기와 멀어졌다고 한다.

그 시절 <숭고한 팔리아치>는 다시없을 황금기를 맞이했다. 당시는 천년전쟁이 한창이었으나, 어떤 인간 왕국도 감히 헤를론 팔리아치가 돌보는 뮈티레 요새를 공격하지 못했다. 용을 부리는 자일스나 낙뢰를 내리는 베가, 혹은 폭풍을 일으키는 아스톨포를 피하듯 마냥 질겁한 것이 아니었다. 씨앗에서 열매를 수확하는 헤를론 팔리아치를 평범한 인간들은 마치 신을 우러르듯 경외했다. 하늘의 신이 땅에 강림했다 믿었으니, 감히 신의 처소를 공격할 자는 많지 않았다.

“팔리아치는 예로부터 가을과 풍요와 번영의 상징이었습니다.”

칼롯타는 오래전 선조의 석상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오래전 마체 팔리아치가 그러했고, 헤를론 팔리아치가 그러했지요. 우리는 <가혹한 아스톨포>나 <고결한 베가>처럼 공포로 군림하는 폭군이 아니라,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는 현군이었습니다. 피 흘리며 다투느니 난공불락의 요새에 들어앉아 성문을 잠갔고, 끝없는 전란으로 황폐해지는 세상을 보다 못해 스스로 적에게 고개 숙였습니다. 폭풍을 일으켜 도시를 무너뜨리지는 못하지만, 풍족한 미래로 나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팔리아치의 숙명.”

문득 소리가 음산해졌다.

“한데 나의 아우는 그러지 못했지요.”

헤스터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칼롯타가 쓸쓸하게 헤스터를 마주 보았다.

“나는 니올로를 증오합니다. 아우는 태어나길 처음부터 악마였어요. 그래서 10년 전, 니올로가 악마를 소환했고 또한 명망 높은 동족을 여럿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아우의 본성을 알았으니까요.”

칼롯타 팔리아치와 니올로 팔리아치. 두 이부남매의 관계가 원만치 않다는 것은 익히 유명했다. 자세한 속사정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니올로가 악마 소환과 동족 살인으로 종신형을 하달받았을 때도 칼롯타는 매정하게 아우를 외면했었다. 니올로를 탈옥시킨 배후를 밝히는 내내 팔리아치 가문이 함부로 거론되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연유였다.

“니올로는 팔리아치의 계보에 이름을 올렸되, 천성적으로 가문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닙니다. 나의 아우는 파괴와 살육에서 기쁨을 찾는 광인. 그렇기에 나는 열차에서 악마를 소환한 이도 니올로라고 믿습니다. 이미 한 번 범했던 금기, 두 번 범하는 것이 어렵겠어요?”

“칼롯타 경.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헤스터가 차분히 물었다. 양손을 감싸 쥐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칼롯타가 이내 결심한 듯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부활의 마법사, 헤센 그윈티르가 아우를 탈옥시켜 펜잔스에서 살육의 장을 열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헤센 그윈티르의 배후에는 숨겨진 단체가 있어요.”

당혹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헤스터는 뒤늦게 말문을 열었다.

“왜 평의회에서 밝히지 않았습니까?”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요? 헤스터 경, 물론 그들이 10년 전 자신을 외면한 내게 원한을 품은 니올로를 이용해서 혹시라도 팔리아치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스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건 어중이떠중이들이나 모인 단체가 아니에요. 워낙에 쟁쟁한 이들이 이름을 올린 단체라 쉽사리 밝힐 수가 없더군요.”

“팔리아치의 수장이 저어할 정도로요?”

칼롯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짤막한 고민 끝에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자 여태 조각상처럼 굳건하던 헤스터의 무표정이 산산조각 깨졌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분이 설마…….”

“여기서 내가 단체에 소속된 명단을 읊는다 한들, 경이 곧이곧대로 믿을까요? 증거는 모두 뮈티레 요새의 기록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경도 알다시피, 기록 보관소는 자료를 외부로 유출하는 행위를 철저하게 금하고 있지요.”

칼롯타가 속살거렸다.

“내가 이 사실을 굳이 헤스터 경에게만 밝히는 이유는 경의 자매 때문입니다. 디아나 씨가 기차 사건에 연루되어 큰 고초를 겪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디아나 씨는 본인의 재능이 어떻건 간에 그리젤다의 딸. 그들은 니올로를 이용한 것처럼 디아나 씨를 노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디아나 씨의 절친한 자매로서 경은 내 불안한 심정을 이해하겠지요.”

헤스터는 그녀답지 않게 착잡한 표정이었다. 한숨조차 나오지 않는 막막한 상황에서 고민에 골몰하는 사이, 별안간 얇은 종이 한 장이 미끄러지듯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칼롯타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상아탑의 사자들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내일부터 성인식이 열린다고 하네요.”

칼롯타는 마법으로 가볍게 종이를 불태웠다. 잠시 엿보였던 근심과 처연함을 곱게 갈무리한 그녀는 어느덧 팔리아치의 오연한 수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늘 내가 한 말, 한번 잘 생각해 봐요. 발푸르기스의 밤이 끝날 때까지 혹 결심이 서거든 내게 연락을 주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칼롯타가 우아하게 인사했다.

“뮈티레 요새는 당신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파펜하임산의 기슭.

짙푸른 수풀이 울창한 가운데, 반드러운 돌계단을 얹어 놓은 좁다란 산길이 끝없이 위로 이어졌다. 마법으로 올라갈 수는 있되, 되도록 경건한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공들여 오르길 옛 선조들이 기원하던 곳. 수정의 관으로 향하는 길은 그리도 질박했다.

“계단을 쭉 올라가면 큼직한 동굴이 나올 거야. 그리로 계속 들어가면 된단다. 성인식이 치러지는 호숫가에는 이미 상아탑의 사자가 대기하고 있을 테니, 그들의 말을 따르기만 하면 돼.”

헤스터는 디아나의 왼손을 부여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디아가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그녀의 오른손을 붙잡은 수리가 점잖게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상아탑의 사자들은 변덕스럽기로는 어린아이와 맞먹지만, 그다지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혹시나 그네들이 큰소리를 내더라도 겁먹지 마십시오. 시키는 대로만 따르면 오래지 않아 이명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비슷한 말을 어제부터 열댓 번은 들은 것 같지만 어쨌든 고마워요, 수리 경. 언니도 고마워.”

디아나는 일부러 활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헤스터와 수리는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두 사람은 괜히 샛길로 새지 말라는, 어제부터 골백번 반복했던 말을 재차 장황하게 늘어놓은 다음에야 디아나를 놓아주었다. 디아나의 뒷모습이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녀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이어졌다.

비로소 두 사람이 사서 하는 걱정에서 해방된 디아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뿐인 자매가 염려되는 것도, 하나뿐인 친구가 염려되는 것도 전부 이해했다. 그래서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낯부끄러운 장면을 연출한 것도 이해했다. 하지만 도대체 두 사람이 언제 저렇게 의기투합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데면데면했는데, 어째서 갑자기 저토록 죽이 잘 맞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잘 찾아갈까.’

디아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돌계단 위로 떨어진 낙엽을 가볍게 찼다. 열아홉이나 먹어서 성인식을 치르는 게 어디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떠들썩하게 이명을 받고 싶은 마음 따위 전혀 없었으나, 두 사람이 기어이 소란을 피워 댔으니, 모르긴 몰라도 파펜하임산 일대에는 그리젤다 솔의 둘째 딸이 이명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불처럼 번질 터였다. 그렇잖아도 요사이 원치 않은 관심을 받아 왔던 디아나에겐 무척이나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러니 이명을 받고 일전에 차마 거절하지 못한 세드릭의 초대에 응한 직후, 잉그람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재 디아나의 목표였다. 일평생 애국심이란 걸 가져 본 적이 없으나, 이렇듯 이국에 머무르다 보니 자연스레 고국이 그리워졌다. 물론 집에 들러서 행색을 제대로 갖춘 뒤에는 바로 스승님과 채스터티를 보러 엑서터로 가야겠지만.

하지만 그것도 모두 무사히 성인식을 치르고 나서의 이야기였다.

어느덧 디아나는 마지막 돌계단을 밟고 올랐다. 시푸른 녹음이 도처에서 잡풀처럼 일어난 험산. 그 가운데 제법 커다란 동굴이 어둠을 내두르며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물끄러미 동굴을 올려다보던 디아나가 이내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또각또각. 촛불도 그녀의 걸음을 따라 동굴 안쪽으로 전진했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과 디아나의 자그마한 뒤태가 차츰차츰 멀어지고, 마지막까지 전해지던 신발 소리조차 새벽안개처럼 아스라해질 무렵.

이윽고 동굴은 침묵에 잠겼다.

성전(星殿). 즉, 별의 신전.

오래전 파펜하임산이 대집회의 장소로 자리매김한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아홉 인의 영웅을 계승한 것이지만, 실상 성전이라 부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종교의 전통이 없는 마법 사회에서 실제로 별을 숭상하는 전각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신전이란 그저 비유적인 의미일 뿐, 정확히 말하자면 파펜하임산 중턱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암굴을 뜻했다.

그러니까 영웅시대가 막 종식했을 무렵, 발부르가 볼크하르트의 손녀 레기나 볼크하르트는 조모의 유언을 받들어 파펜하임산을 올랐다. 파펜하임산은 용이 기거했을 만큼 험준한 산. <냉엄한 볼크하르트>를 상징하는 매의 깃발이 꽂힌 뒤로는 모두가 두려워 피하는 곳이었던 데다, 당시의 보잘것없는 측량술로는 지도조차 완전치 못했으므로 좌표를 통한 순간이동조차 불가했다. 대체로 육체가 강건하지 못한 일개 마녀가 홑몸으로 인적조차 끊긴 험산을 등반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많지만, 어쨌든 전해지는 말로는 그러했다.

가파른 산길과 수많은 날짐승, 무엇보다도 허약한 육신. 레기나 볼크하르트에겐 생사를 넘나드는 일이었을지도 모르는 온갖 역경을 생략하면, 그녀가 산머리에서 목도한 장엄한 경관이 펼쳐진다.

파펜하임산 정상을 가득 메운 못. 비할 데 없이 거룩한 호수는 소금 흩뿌려진 듯 황홀한 밤하늘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레기나, 나의 후계자여. 악룡 타트라스크 파펜하임이 머물던 파펜하임산 정상에는 세상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보배가 숨겨져 있다.’

레기나는 그제야 조모의 유언을 이해할 수 있었다.

‘클레멘틴 자일스가 꿈속에서 파펜하임 산정에 서 있는 너를 보았다더구나. 그 여자의 예언은 백발백중. 그러니 보배를 발견하는 자는 무조건 너다.’

그날, 레기나 볼크하르트가 찾아낸 것은 이른바 파펜하임 정수(淨水)라 불리는 호수였다. 오래도록 인적이 닿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상태로 한없이 밤하늘을 담아낸 물. 잔잔하던 호수는 어느덧 만년설로 얼어붙었지만, 기후가 변했다고 태생적인 순수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만년설을 녹여낸 정수는 아득한 어둠 속에서라면 늘 밤하늘을 그려 냈다. 억겁의 세월이 흐르도록 하늘과 가장 가까이서 별빛을 간직했던 호수는 너무나도 분명히 밤하늘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고로 마법이란 축복을 내려 준 별에게 기원을 전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세간강(江)의 거친 물결로 양분되는 서부 협곡의 까마득한 지층에서만 채굴되는 요르그 규석이나, 메시나 남부 해안가에서 간간히 발견되는 푸른 진주, 혹은 인어가 슬피 흘리는 눈물도 귀하지만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고작해야 별에게 바칠 공물일 뿐, 그 무엇도 밤하늘을 재현하진 못했다. 오로지 파펜하임 정수만이 가한 일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땅으로.

무수한 별을 당신의 아들딸에게로.

그리하여 지상에 강림한 별은 미욱한 자식이 성심으로 올리는 기도에 귀 기울이고, 전하고픈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이었다.

어언지간 다다른 암굴의 호숫가. 더는 촛불이 진전하지 못하는 암암한 어둠 속에서 수면 위로 떠오른 밤하늘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호수를 지키듯 세 귀퉁이를 에워싼 세 명의 노인.

그중 오른편에 앉은 노인이 흐느끼며 말했다.

“네가 그리젤다의 딸이구나.”

뒤이어 왼편에 앉은 노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입구를 가리키고.

“정말이지 그리젤다를 쏙 빼닮았어. 네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마지막으로 정면에 앉은 노인이 무표정으로 고했다.

“디아나 솔.”

차마 호숫가로 다가가지 못하던 디아나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겁먹은 표정에 왼편의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리로 오지 않아?”

“여기 이상해요. 마력이 너무 넘쳐 나서…….”

“하늘이 내려오고 별이 뜨는 호수, 수정의 관은 원래 그러해. 산정은 얼어붙었으니, 이제 만년설이 자연적으로 녹아 형성된 호수는 여기뿐이야. 밤낮으로 어두워 밤낮으로 별이 뜨는 곳인데, 당연히 마력으로 충만하지 않겠니?”

까르르 웃는 소리가 뒤섞인다. 하지만 디아나는 여전히 울상이었다.

“이상한 속삭임도 들려요. 대체 누가 말하는 거예요? 여기 우리 말고 또 누가 있나요?”

“별이 있잖아. 이렇게나 많이.”

노인은 밤하늘이 펼쳐진 호수를 가리켰다. 디아나는 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거렸지만, 아무리 귀를 털어 내도 좀체 멀어지지 않았다. 수정의 관은 언제나 별이 속삭이는 소리로 가득하다는 책의 글귀가 단순한 비유가 아닌 사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서 오렴. 그리젤다의 딸아.”

노인이 명랑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디아나는 머뭇거리며 비어 있는 호숫가 귀퉁이에 앉았다. 그리고 움츠렸던 고개를 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 명의 노인이 고개를 길게 빼서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고 있었다.

“그리젤다와 닮았어.”

“너무 닮았지.”

“꼭 그리젤다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아.”

디아나는 어쩐지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는 한 번도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여하신 적 없다고 들었어요. 그런데도 어머니를 잘 아나 봐요?”

“당연히 잘 알지. 상아탑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도 너처럼 평범한 마녀였으니까.”

오른편의 노인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왼편의 노인이 방긋거리며 동의했다.

“그리젤다는 훌륭한 마녀였어. 가히 아홉 인의 영웅에 필적할 만한 재능이었지.”

“무슨 소리야. 그리젤다는 아홉 인의 영웅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어. 너도 알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야. 결국에는―”

정면에 앉은 노인이 숱 많은 눈썹을 찡그리며 대화를 잘라 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우리는 상아탑의 사자. 별의 소리를 듣고 전하기만 하면 돼.”

정면의 노인은 그러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헛기침했다. 나머지 두 노인은 조용히 납득했다. 기묘한 예감을 느낀 디아나가 그게 무슨 말이냐며 물어보려던 찰나, 갑자기 호수가 찬란한 별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잠잠하던 밤하늘이 비로소 열렸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별들의 왕 둘시네아와, 왕을 지척에서 호위하는 사계의 별. 남동쪽 하늘에 우뚝 서 있는 나시마르크 사탑과 오스브롬 삼각형을 지나 남서쪽으로 계속 향하다 보면, 별빛 닿지 못하는 어둠이 하늘 끝자락에 아스라하게 걸려 있었다. 왕의 영토와 어둠 사이에서 빛나는 경계의 별 아시엘. 그리고 아시엘을 건너 무지(無知)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유일무이한 별.

암흑의 별 칼리스토.

수억의 별빛이 점차 빛을 더해 갔다. 백색, 청색, 녹색, 적색, 수많은 별빛이 뒤섞여 눈앞을 하얗게 물들였다. 그리고 소리를 더해 가는 별의 속삭임, 외침, 아우성. 별빛에 눈이 멀고, 소리에 귀가 멀었다. 그리하여 하얀 어둠과 하얀 소음이 정신을 까맣게 물들일 무렵.

《……적》

노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다.

《기적》

마치 운명을 선고하듯.

재차.

《기적의 마녀》

그리고 삽시에 사라졌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던 백색이 일순 자취를 감추었다. 동굴의 어둠을 몰아냈던 찬란한 별빛이 도로 잠들었으며, 자그마한 소음까지도 죄 짓밟았던 아우성은 다시 속삭임으로 잦아들었다. 금방 일어났던 일이 전부 착각인 것처럼 평화롭기 그지없는 정경.

디아나는 그제야 숨을 토해 냈다.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더디게 반추하다가, 노인들의 입을 빌려 암흑의 별 칼리스토가 쏟아 낸 이명을 뒤늦게 주워 담았다. 이명에 담긴 뜻을 헤아리기엔 아직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꿈결 같다. 디아나는 그리 생각하며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들은 이제 그녀에겐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들은 별의 전언을 대언하는 상아탑의 사자. 이명을 전했으니 더는 볼일도 없을 터였다.

“디아나 솔.”

그대로 수정의 관을 떠나려던 디아나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정면과 왼편에 앉은 노인은 여전히 부동하는 가운데, 오른편의 노인만이 홀로 눈 뜬 채로 디아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거인을 찾아가. 그리젤다의 유품이 거기 있어.”

디아나는 멍하니 노인을 보았다. 혼란한 중에 더한 혼란이 밀려들었다.

“어머니의 유품이요?”

“그래.”

“하지만 거인은 이미 멸종했는데…….”

노인이 반달처럼 눈을 접으며 웃었다.

“누가 채스터티 자일스를 그리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디아나는 삽시에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노인은 흔흔히 웃으며 그 말을 끝으로 눈과 입을 닫았다.

별빛만이 오롯하게 빛나는 암굴.

아무도 해답을 주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별의 속삭임만 끝없이 흐를 뿐…….

“기적?”

세드릭이 멈칫대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디아나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그런 이명을 받았는지 도통 모르겠어.”

“좋은 이명입니다. 흔하지도 않고요. 지금은 돌아가신 이모께서 나와 이명이 같아서, 한동안 ‘얼음의 마녀’라고 소개할 때마다 이모께서 어쩌다 돌아가셨는지 매번 설명해야 했습니다. 참 곤혹스러운 일이었죠.”

어쩐지 풀 죽어 보이는 디아나를 위해 수리가 열심히 위로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여전히 낯빛이 어두웠다.

“그런가요? 사실 나는 어둠이나 암흑이란 이명도 각오했거든요. 탄생성의 이름을 딴 이명이 그다지 진귀하진 않으니까요. 다만 이렇게나 생뚱맞은 이명이 나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확실히 기적이란 이명이 흔치는 않습니다.”

수리는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이명이란 별이 내려 주는 또 다른 이름. 이명의 속뜻은 미래일 수도, 잠재된 재능일 수도, 혹은 운명일 수도 있었다. 어떤 이명은 누가 봐도 명확한 뜻을 담고 있는 반면, 죽을 때까지 이명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세드릭이 말했다.

“내 이명인 ‘심판’은 낙뢰를 내리는 베가의 선조들이 숱하게 쓰던 이명이야. 그리고 수리 경의 이명은 알피어스 가문에서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이명이지. 이명은 그저 별이 지어 주는 이름일 뿐, 너무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역사적으로 기적이란 이명을 사용했던 이들은 모두 범상치 않았습니다. 예컨대 600년 전의 마녀 카산드라 말레는 교단 이단심문국에게 붙잡혀 화형당해 거의 죽어 가던 아들을 살려 냈죠. 비록 본인의 목숨과 맞바꾼 마법이긴 하나 가히, 기적이란 이명에 걸맞은 희생이 아닙니까?”

“그리고 100년 전의 마법사 클라우드 비숍은 일평생 사이비 교주로 행세했지요.”

여태 조용하던 헤스터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스스로 마법사임을 숨기고 기적을 부리는 신의 아들이라 자칭했습니다. 기적으로 분한 그의 마법에 홀려 수많은 인간들이 금은보화를 자진해 헌납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별은 그를 조롱하기 위해 기적이란 이명을 내린 것이 아닐까요?”

나머지 세 사람은 조용히 수긍했다. 헤스터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나의 이명은 ‘성좌’입니다. 드문 이명이죠. 별의 축복을 받아 겨우 마법을 부리는 마녀에겐 무거운 이름입니다. 하늘의 성좌를 다스리는 건 별들의 왕 둘시네아의 몫이지,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까요.”

“상징적인 의미 아닐까? 드물지만 성좌의 이명을 받은 사람들은 전부 둘시네아의 축복을 받았잖아.”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마냥 확신할 수도 없잖니.”

헤스터가 가늘게 웃었다.

“내게 왜 성좌란 이명이 내려졌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나 역시 평생토록 깨닫지 못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나에게 마법이란 축복을 내려 준 별이 그렇게 무의미한 이름을 사했다고 여기기엔 속이 조금 쓰립니다. 흔히 말하길 탄생성은 어버이요, 그의 축복받은 마녀는 자식이라 합니다. 적어도 나는 별에게 무의미한 자식이고 싶지는 않아요.”

어지간한 마녀‧마법사들은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상아탑에서 혹독한 수련을 거친 사자들도 순수한 마력과 파펜하임 정수로 가득 차오른 수정의 관에서나 겨우 별의 소리를 알아들을 뿐. 그러니 별이 내려 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세드릭 경은 베가의 낙뢰를 내리기에 심판이란 이명을 받았다고 했죠. 수리 경은 알피어스 가문의 직계이기에 얼음이란 이명을 받았다고 했고요. 하지만 그보다 더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낙뢰를 내리는 마녀‧마법사들의 이명이 전부 심판이 아니고, 알피어스 가문의 이명이 전부 얼음이 아닌 데는 분명 까닭이 있을 테니까요.”

헤스터는 그리 말하며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디아나. 네가 어째서 기적이란 희귀한 이명을 받았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지금까지 기적의 이명을 받았던 이들의 삶은 너무도 제각각이지. 그러니 이명에 너무 구애받을 필요는 없지만, 암흑의 별 칼리스토가 네게 기적이란 이름을 선물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칼리스토는 네게 마법이란 축복을 내렸을 만큼 너를 사랑하는 별. 언젠가 너도 별의 진의를 이해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그러자 디아나는 몹시 감명한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수리도 감격하여 양손을 맞잡았다.

“멋진 말입니다. 마법학 개론 서문에 꼭 들어가야 하는 말이에요.”

수리의 벽안이 전에 없이 반짝였다. 실은 그녀가 이토록 헤스터의 발언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몇 년 전, 흔한 이명을 받아 침울해진 수리에게 동복자매 세레나 알피어스가 위로랍시고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게 다 미란다 이모와 네가 너무 닮아서 그런 거야. 겨울의 별 발디비아조차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유전이라니! 후년에 머리를 염색하고 다시 수정의 관에 들어가 보면, 분명 발디비아는 네게 다른 이명을 줄 거란다.’

실제로 미란다 알피어스와 수리 알피어스는 모녀간이래도 믿을 만큼 똑 닮았다. 수리는 여태껏 그 사실이 불만스러웠던 적은 없지만, 그래도 세레나는 그리 말하면 안 되었다. 그건 위로가 아니라 조롱이었다.

“세상에, 그런 말을 하다니!”

디아나는 수리의 뒷사정을 듣고 격분했다. 어릴 적부터 자일스 삼 남매와 함께 자라 온 그녀조차 가만히 넘길 수 없는 언사였다.

“정말이지 너무하네요. 수리 경, 자매에게 제대로 사과는 들은 거죠?”

“아뇨. 직후 세레나와 연락이 끊겨서 화낼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디아나는 수리를 위로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수리는 분노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보다 오래도록 자매와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욱 서글픈 모양이었다. 다섯 중 무려 네 명의 형제자매와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제법 심정이 답답할 터다.

그리고 자연스레 디아나는 자매처럼 지내 온 채스터티가 떠올랐다.

“세드릭. 채스터티는 어떻다니? 좀 차도가 있대?”

채스터티, 변덕맞지만 내심으론 정이 깊은 채스터티.

디아나는 지금까지 채스터티의 죽음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다 죽더라도 혼자 아득바득 살아남을 위인이 바로 채스터티 자일스였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입술만은 동동 떠서 못된 말을 이어 가리라 여겼건만, 이렇듯 난데없이 변고를 당할 줄 누가 알았겠나.

‘누구든 죽는 건 싫어.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채스터티가 숨을 거두는 장면을 상상하면 당장이라도 눈물 흘릴 수 있었다. 어릴 적 그녀를 미워했던 시절이 길지만, 채스터티와 벌써 작별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애의 치기라고 손가락질해도 상관없었다. 디아나는 채스터티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영영 헤어지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 고비는 넘겼대. 아직 의식 불명이지만, 계속 치료하면 올해 안으로 깨어날 거야.”

세드릭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디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수정의 관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누가 채스터티 자일스를 그리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디아나는 사실 어머니의 유품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어마어마한 빚만 물려받은 전례를 떠올리면, 지금 거인에게 있다는 유품도 혹 차용증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머니를 늘 그리는 언니를 위해서라도 언젠가 유품을 찾아야 하겠지만, 아주 급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채스터티를 총격한 범인은 달랐다.

“저기, 채스터티를 공격한 사람 말이야. 내가 실마리를 찾은 것 같은데…….”

일순 세 사람의 시선이 디아나에게로 모여들었다. 세드릭이 드물게도 성마르게 되물었다.

“뭐?”

“실은 상아탑의 사자가 그랬거든. 어머니의 유품이 거인에게 있다고.”

“어머니의 유품?”

이번에는 헤스터였다. 디아나는 진땀을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갑자기 채스터티 얘기까지 나온 거 보면 조금 관련이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전혀 상관없는 일에 채스터티 운운할 리가 없잖아.”

“거인이라면 이미 멸종하지 않았습니까?”

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그게 마음에 걸리긴 해요. 하지만 설마 상아탑의 사자가 허튼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거 아녜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디아나 씨는 앞으로 거인을 찾아볼 생각입니까?”

“네. 어머니의 유품도 그렇지만, 채스터티를 그렇게 만든 범인을 잡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디아나는 굳세게 대꾸했다. 그러자 헤스터가 사뭇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디아나. 나는 당장 오늘 저녁에 뮈티레 요새로 떠나야 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디아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의 유품이 달린 문제기에, 당연히 헤스터가 의욕적으로 나설 줄 알았기 때문이다.

“뮈티레 요새의 기록 보관소를 급히 확인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칼롯타 경과 동행하기로 했어. 혹시나 네가 신경 쓸까 봐 이명을 받은 뒤에 말하려고 했는데…….”

헤스터가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인은 자취를 감춘 지 이미 10년 가까이 된 이종족. 변방에 숨어 살고 있다 한들 추적하기도 험난할뿐더러, 예로부터 거인과 마법 사회는 사이가 좋지 못했기에 디아나를 혼자 보낼 수도 없었다.

수리도 시무룩하게 토로했다.

“나도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휴고도 잠적한 마당에 가문을 오래 비울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거든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였을 겁니다.”

내심 어릴 적 들어 왔던 모험가처럼 거인을 찾아다니고 싶었던 수리는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아쉽기로는 졸지에 혼자서 거인을 찾게 된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거인을 혼자서 만나는 건 둘째 치고. 도대체 어디서 찾는담?’

디아나가 알기로 거인은 반제와 잉그람 북부 산악 지대에서 주로 거주하던 이종족이었다. 비록 지루한 섬멸전 끝에 자취를 감추었다지만, 한때 번성하여 악명을 떨쳤던 이들이 고작 수십 년 만에 멸종했다기엔 다소 수상쩍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살아 있겠지 지레짐작하는 것과, 그 ‘어딘가’를 특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천년장미관의 장서를 전부 뒤져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과연 천년장미관에 기록이 남아 있을까? 기록이 남을 정도라면 거인이 멸종했다고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직접 발로 뛰며 수소문해야 한다는 건데.

“디아나. 지금 범인은 사냥꾼들이 쫓고 있고, 어머니의 유품은 급하지 않으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떠니?”

헤스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마침 디아나의 마음도 그 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어차피 혼자서는 불가한 일. 차라리 헤스터가 돌아올 때까지, 천년장미관에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거인의 기록을 뒤지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때,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내가 같이 갈게.”

디아나는 순간 당황하여 말을 잃었다.

“채스터티는 내 남매야. 범인이 활개치고 다니는 꼴을 더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범인과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그냥 어머니의 유품만 찾고 끝날지도 모르는걸.”

“하지만 연관이 있다면?”

세드릭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상아탑의 사자가 어째서 네게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공연히 채스터티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겠지. 어떻게든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게 맞아.”

잠시간의 머뭇거림 뒤로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혼자서는 위험할지도 모르고. 범인은 헤센 그윈티르니까.”

헤센 그윈티르. 동화 사냥꾼.

“뭐? 하지만 그 사람은.”

네 낙뢰를 맞고 죽었는걸.

디아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헤스터는 아직 그 일을 몰랐다. 언니가 괜한 신경 쓸까 봐 비밀로 붙였다.

헤스터와 수리는 돌연 입을 다문 디아나를 의문스럽게 보았다. 디아나가 난처하게 눈을 굴리는 사이, 세드릭이 헛기침으로 공백을 무마했다.

“어쨌든 위험한 사람이니까,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거야. 그럼 동의한 거지?”

헤스터는 뮈티레 요새로, 수리는 솔즈베리의 알피어스 본성으로 떠났다. 디아나는 그렇게 둘만 남자마자 세드릭을 붙들었다.

“헤센 그윈티르가 살아 있다고?”

세드릭은 말없이 디아나의 손을 떼어 내며 복도를 걸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뒤이었다.

“몇 년 전에 아버지의 낙뢰를 맞고서도 살아난 전적이 있나 봐. 정말로 죽었다가 되살아난 건지, 아니면 다른 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헤센 그윈티르는 분명히 죽었어.”

디아나는 차게 식은 손끝을 그러쥐며 중얼거렸다. 세드릭의 낙뢰를 맞고 새카맣게 타 죽은 동화 사냥꾼의 송장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숨이 끊어진 것까지 똑똑히 확인했으니, 되살아났을 리 없었다. 부활은 생명 창조와 마찬가지로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어쨌든 지금 확실한 건 헤센 그윈티르가 살아 있다는 거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채스터티까지 공격한 걸 보면 무언가 흉계를 꾸미는 게 분명해.”

세드릭은 기민하게 서재의 문을 열어젖혔다. 뒤따라 서재로 들어온 디아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웬 지도야?”

하지만 세드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마법으로 긁어모은 지도를 하나하나 뒤져 가며 지명을 확인하더니, 오래지 않아 유독 낡은 지도를 꺼내 들었다.

“가자.”

“뭐?”

디아나가 황망히 되물었다.

“너 설마 거인이 어디 있는지 알아?”

“아니.”

“그런데 어딜 가자는 거야. 거인이 정말 멸종하지 않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판국에.”

“대신 알 만한 사람을 알아.”

세드릭이 그리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디아나는 영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지도를 흘깃거렸다.

호그스밀. 잉그람 북부의 국경 도시.

“……좌표나 잘 확인해.”

디아나는 세드릭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곧 흔적 없이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