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언니도 아시다시피
세드릭은 홀로 설원에 서 있었다.
밤중에야 겨우 그친 눈이 모든 티끌과 잡념을 새하얗게 덮어 버린 새벽녘. 온 세상 사람들 전부 잠든 것처럼 고요하기 이를 데 없으나, 눈밭에는 벌써 누군가 지나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길고 길게 이어지는 발자국. 세드릭은 벌게진 눈으로 발자국을 노려보았지만, 그렇다고 떠나간 이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세드릭은 더디게 고개 들어 탁 트인 설원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지평선까지 평탄하게 이어지는 설원에는 진실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떠나간 이가 눈밭에 남긴 흔적과, 그가 돌아오길 오매불망 기다리는 어린아이뿐.
다시 몰려든 먹구름이 눈을 흩뿌리고, 한겨울 칼바람이 귓가를 벨 듯이 지나갔다. 드러난 살갗이 아프게 달아올랐으나, 세드릭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인정하기 싫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설원에 찍힌 발자국처럼 그도 버려졌다는 사실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
늘 그렇듯 다시 돌아올 것이다.
조금만 더 참으면 언제 떠났냐는 듯 당연하게 돌아올 것이다.
세드릭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어느덧 새벽이 끝나고 밤이 되돌아오는데도, 눈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데도, 얼어붙은 손발에 더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데도. 그는 여전히 홀로였고, 떠나간 이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해 뜨지 않는 눈밭에는 새카만 어둠뿐이었으나, 그럼에도 세드릭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이 어둠이 가실 때는 돌아와 주길.
추위를 몰아낼 따뜻한 봄을 이끌고 돌아와 주길.
세드릭은 그리 간절한 심정으로 눈을 떴다. 암막이 사라지고 어물어물한 시야가 비로소 선명해질 즈음, 눈물 한 줄기가 가늘게 흘러내렸다. 그토록 바라던 이가 눈앞에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며 흐느끼듯 속삭이는 소리가 뒤이었다.
“아버지…….”
* * *
디아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눈앞의 병실을 보았다.
들어갈까, 말까.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는 것도 웃기지만, 막상 들어가자니 어째 내키지가 않았다. 편지에 대놓고 어느 병원, 어느 병실에 입원 중이라고 써 놓은 걸 보면 분명 병문안을 바란 것이겠으나, 살면서 누군가의 병문안을 다녀온 적 없는 디아나는 문 앞에서 자꾸 망설이기만 했다.
도서관에서 그 사달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만약 경찰이 사건을 맡았다면 진즉 공문이 도착했을 시간이지만, 지금까지 디아나는 조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당일 관장에게 사건의 개요를 상세하게 설명한 뒤로 감감무소식이었다. 천년장미관에서 경찰에 사건을 넘겼는지 어쨌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건 병문안이 아니라 정보 탐색전이었다. 대관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해야 나중에 뒤탈이 없지 않겠는가.
디아나는 그리 생각하며 병실 문을 노크했다.
그런데.
“디아나 씨? 여기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
팔자 좋게 침대에 늘어진 루퍼트가 무척이나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세등등하게 병실로 들어오던 디아나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편지 보냈잖아요.”
“아, 그거요. 사실 온종일 병실에만 누워서 지내려니 좀이 슬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안면 있는 사람들에게 전부 편지를 쓰고 있었어요. 여기 보세요. 지금은 패트리샤 씨의 사촌한테 편지를 쓰고 있는데…….”
디아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패트리샤 씨가 도대체 누구고, 그 사촌을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으나, 오래간만에 지인을 만나 신이 난 루퍼트의 입은 도통 멈추질 않았다.
“……래서 칠촌 숙부께도 편지를 보냈는데, 이런 답장이 왔지 뭡니까? 바로 오늘 아침에 온 답장이에요. 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이인데 답장이 와서 너무 신기했어요. 사흘 동안 밤낮으로 편지만 썼지만 답장은 이게 처음이었거든요. 물론 디아나 씨는 이렇게 직접 병문안을 와 주셨지만요! 이렇게나 감사할 수가!”
“병문안 아닌데요. 그저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고요.”
“그래요?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세요.”
루퍼트는 몹시 감격한 얼굴로 양손을 맞잡았다. 절대로 병문안이 아니라는 외침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결국 먼저 포기한 것은 디아나였다.
“그, 동화 사건 있잖아요. 도서관에서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해서요. 천년장미관에 물어보기엔 어쩐지 좀 꺼려져서…….”
그날 만났던 천년장미관의 관장은 지극히 사무적이고 냉담한 인물이었다. 굳이 캐묻는다면 관장보다는 조금이나마 안면이 있고, 마법사답지 않게 수더분한 루퍼트가 낫다는 판단이었다.
“제가 알기로는 관장님께서 그냥 사건을 덮으셨을 거예요. 헤센 그윈티르야 워낙에 저명한 수배범이니 발푸르기스 평의회에 소식을 전했겠지만, 관장님이 워낙 도서관에 경찰을 들이는 걸 안 좋아하시거든요. 예전에 천년장미관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져서 경찰이 떼거지로 입관한 적이 있는데, 그때 경찰들이 사건 수사한답시고 귀중한 책 몇 권을 못 쓰게 만들었다나 뭐라나. 관장님이 잔뜩 뿔나신 게 당연하죠.”
디아나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지난 늦봄, 기차 테러에 휘말리며 경찰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렸기에, 되도록 앞으로는 경찰과 엮이지 않길 바랐다. 이쯤에서 사건이 덮인다면 그녀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기척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만 빼면 관장님도 참 좋은 분이세요. 괜한 사건으로 고생했다며 이렇게 병원 특실에 며칠씩이나 머물게 해 주시잖아요. 병원에서 놀고먹는 동안 월급은 착실하게 나오니 여기가 바로 천국 아니겠어요?”
“어쩐지. 루퍼트 씨가 입원했다는 소식에 좀 놀랐는데. 이거 완전 꾀병이잖아요?”
디아나가 끌끌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는 대개 보금자리를 떠나지 않는 법인데, 단지 유급휴가라는 이유로 병실을 좋아하는 루퍼트의 모습이 다소 괴이했다. 당장 디아나만 하더라도 광인 니올로에게 입은 상처를 치료하느라 입원했을 적, 매일 밤 탈출하는 꿈을 꿀 정도로 병실이 지긋지긋했었다.
“디아나 씨는 직장인의 설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매일매일 출근하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참, 그런데 세드릭 경은 무사하죠?”
“빨리도 물어보네요.”
디아나는 불과 몇 시간 전 받은 편지를 떠올리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뭐,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에요.”
아버지가 어련히 잘 돌보겠느냐만, 아버지의 품에 안겨 사라지던 세드릭의 마지막 모습이 계속 눈에 밟힌 나머지 디아나는 며칠 전 뒤숭숭한 심정으로 편지를 부쳤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세드릭은 잘 있다는 낯선 필체의 답장이 도착했다. 유려하게 답장을 마무리하는 서명의 주인은 다름 아닌 에드윈 베가였다.
자연스레 오만 가지 상상이 떠올랐다. 정말로 괜찮은 걸까. 혹시 편지를 쓸 여력조차 없는 걸까. 그리그 프롬이 대강이나마 치료했어도 세드릭의 부상은 부정할 여지없는 중상이었다. 게다가 총상을 입은 채로 하루가 지나도록 방치되기까지 했다. 아무리 마법사가 쉬이 죽지 못한다지만, 그만한 상처가 고작 며칠 만에 거뜬히 나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편지에는 잘 있다니까…….’
디아나는 은연중에 길어지는 걱정을 애써 잘라 냈다. 모르긴 몰라도, 에드윈 베가 경이 아픈 아들을 대충 돌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어깨너머로 보아 왔던 부자간의 애정을 믿었다.
“어쨌든 아프지 않다니 다행이에요. 언제 퇴원해요?”
“모레쯤에요. 복귀하면 제일 먼저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에 대해 보고서를 써서 제출해야 돼요. 워낙에 귀한 책이라 기록이라도 남겨야 하거든요.”
루퍼트가 아무도 없는 주변을 살피며 속삭였다.
“디아나 씨가 받은 보물은 비밀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네?”
“보물을 잃었으니 지금쯤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도 마법을 잃고 평범한 책으로 돌아갔겠지만, 워낙에 오래된 동화라서 도서관 측에서도 괜히 의심하진 않을 거예요. 애당초 마력으로 만들어진 소세계가 500년 넘게 유지되었다는 자체가 굉장히 대단한 일이거든요.”
디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루퍼트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참, 그때 디아나 씨 정말 대단했어요. 그간 내로라하는 동화 사냥꾼도 맞히지 못했던 문제를 맞힌 거잖아요! 역시 귀한 혈통은 어디 가지 않네요.”
순수하게 감탄하는 목소리였다. 태어나서 저렇게 우러르는 눈빛을 받아 본 적 없는 디아나는 공연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아녜요. 대단하긴 무슨.”
“충분히 대단하죠! 무려 500년이잖아요. 500년 동안 난제였던 문제를 맞혔는데, 그게 대단하지 않으면 뭐가 대단한 건가요?”
“자꾸 그렇게 띄우지 말아요.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니니까.”
디아나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며칠 동안 생각해 봤어요. 헤센 그윈티르와 다른 동화 사냥꾼들은 맞히지 못했던 문제를 나는 어떻게 맞혔을까. 결론은 내가 대단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네? 말도 안 됩니다!”
“들어 봐요.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에선 강력한 마법이 필요하지 않았잖아요. 그리그 프롬이 바라던 동화의 올바른 결말은 잘로모를 포함하여 아무도 죽이지 않는 것이었고, 그의 마지막 질문은 딱히 정해진 정답이 없었어요. 처음부터 강한 마법사에게 유리한 게임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다른 동화에는 흔한 괴물 문지기나, 끝없이 이어지는 미로도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에는 없었다. 단출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지는 동화 속 세상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마치 그리그 프롬이 바라던 현실적인 이상향처럼.
“그리그 프롬은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법 사회에 상처받아 동화를 썼다고 했어요. 아들을 살리는 자에게만 살길을 열어 주고, 울지 못하는 자신을 대신하여 울어 주는 내게만 보물을 주었죠. 어쩌면 그리그 프롬은 그저 공감해 주는 사람을 바랐는지도 몰라요. 평범한 인간인 아들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가문을 배반한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 잘난 가문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나, 강한 마법으로 군림하던 동화 사냥꾼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겠죠. 그러니까 내가 평범해서 가능했던 거예요. 평범한 마녀라 잘로모를 이해했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서 그리그 프롬을 이해할 수 있었죠.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문득 디아나가 루퍼트를 보았다.
“어쩌면 루퍼트 씨도 가능했을지 몰라요.”
“내가요?”
“루퍼트 씨도 그때 울었잖아요. 눈물만 닦으면 모를 줄 알았어요?”
“그, 그게.”
예상치 못하게 정곡을 찔린 루퍼트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디아나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키득거렸다. 그러다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일어났다.
“이만 가 볼게요. 언니랑 만나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럼 가 보셔야죠. 언니가……. 언니라면 설마!”
루퍼트가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디아나가 눈을 둥그렇게 뜨자, 도리어 황망해진 루퍼트가 양손을 마구 내저었다.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잘 살펴 가세요!”
몹시 수상한 언동이지만, 디아나는 딱히 캐물을 마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턱을 넘어 복도를 가로지르던 무렵,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무시무시한 눈으로 병실을 돌아보았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디아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돌아섰다. 아무래도 올리버 펜리 때문에 괜한 경계심이 든 모양이었다. 아무렴, 마녀가 되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이나 하다니.
디아나는 기지개를 펴며 한가롭게 걸음을 옮겼다. 걸음걸이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으나, 부푼 마음은 이미 저 멀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오늘은 언니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펜리 씨랑 무슨 사이야?’ ‘그 사람이 또 언니를 힘들게 할지 어떻게 알아.’ ‘언니가 다른 사람한테 매달리는 것도 싫고 언니가 상처받는 것도 싫어. 언니가 왜 그래야 돼? 어차피 언니의 곁에는…….’
디아나는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린 뒤로 생각의 저편으로 미뤄 놓았던 고민거리가 다시금 자라나고 있었다. 이제 와 생각을 정리하기엔 무리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 없이 언니와 재회할 수도 없었다. 디아나는 당장 몇 분 뒤 언니를 만나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조차 몰랐다.
하릴없이 머리카락이나 쥐어뜯던 디아나가 힘없이 식탁 위로 쓰러졌다. 오래간 닦지 않아 두텁게 쌓인 먼지가 팔삭거리며 일어났다. 먼지 그득한 유리에 뺨을 마구 비벼 대는 모습에서 채 감추지 못한 부끄러움이 묻어났다.
누가 봐도 명백한 질투였다. 당시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던 디아나는 미처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지 못했지만, 분명 헤스터는 한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무례한 언동도 자비롭게 넘어가 주었겠지. 연인에게 언니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동생이 얼마나 측은했으면, 버릇없다 꾸지람해도 모자를 판국에 그리 다정하게 대해 주었을까. 디아나는 끝내 헤어질 때까지 상냥했던 언니가 대단하기도, 미안스럽기도 했다.
‘일단 사과부터 하자.’
디아나는 풀 죽은 자존감을 다독이며 그렇게 다짐했다. 관대한 언니라면 그녀의 사과를 기꺼이 받아 줄 것이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각오도 분명 믿어 줄 것이다.
디아나는 분연히 상체를 일으켰다. 언니가 좋아하는 커피라도 끓여 놓을 심산이었으나, 일어나자마자 그만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언니?”
대체 언제 도착한 것인지, 헤스터가 현관에 서 있었다.
“안녕. 디아나.”
헤스터가 머뭇거리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멀거니 그녀를 지켜보던 디아나도 그제야 황급히 헤스터를 반겼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빨리 여기 앉아. 먼저 씻을래? 아님 뭐라도 먹을까?”
“아니야. 괜찮아.”
헤스터는 옅게 웃으며 디아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엉겁결에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디아나가 쭈뼛거리며 헤스터의 눈치를 보았다. 헤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한 언니의 모습에 안심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긴장되었다.
“잘 지냈니?”
불현듯 헤스터가 말문을 열었다.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나야 당연히 잘 지냈지.”
“별일은 없었고?”
“에이, 별일은 무슨.”
천년장미관에서 아주 해괴한 별일이 있긴 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되도록 언니가 그 일을 모르길 바랐다. 관장이 덮기로 결정한 일에 공연히 불을 붙여서 경찰 쪽에 소식이라도 들어가면, 그땐 정말로 부정할 수 없는 별일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경찰 조사로 골 아픈 언니에게 괜한 걱정을 더해 주기는 싫었다.
“언니야말로 별일 없었어? 경찰이 뭐래?”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으나, 헤스터가 경찰에 불려 간 것은 다름 아닌 열차 사건 때문이었다. 병실에서 수없이 진술했던 뒤로 경찰과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디아나는 조사가 어디까지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재소환하지 않는 걸로 보아 경찰 측에선 그녀를 의심하지 않는 듯했지만, 자꾸만 헤스터를 들들 볶아 대니 마음 한구석 찜찜함이 사라지질 않았다.
알아챘을까?
비밀이 발각되리란 불안감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커멓게 불탄 열차에서 악마 소환의 증거를 잡아내기란 지난할뿐더러, 행여나 증거를 발견했어도 상식적으로 이제 막 정식 마녀가 된 햇병아리보다는 악마 소환으로 이름 높은 니올로 팔리아치를 먼저 의심할 것이었다.
스승인 바바라 자일스마저 디아나의 부족함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마당이었다.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디아나 솔이 광인 니올로를 죽였다는 풍문을 믿지 않았다.
“조사가 지지부진한 모양이야. 그래서 나를 통해서나마 증거를 찾아보려는 것 같은데, 정작 열차가 불타 버렸으니 아무래도 힘들겠지.”
“그렇구나…….”
디아나가 어줍게 시선을 내리며 옷소매를 매만졌다. 엉성하게 내려앉은 침묵이 못내 낯설었다. 늘 편지만 주고받으며 지내다가 간간히 얼굴을 보았을 때도 이만치 서먹한 때가 없었기에, 지금의 침묵이 더욱 숨 막혔다.
헤스터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디아나.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 생각해 봤어.”
시작이구나. 디아나는 처단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언니가 아무리 아프게 말해도 전부 감내할 작정이었다.
그리 결연한 마음가짐이었는데.
“언니가 많이 미안해. 내가 아직 서툴러서 네게 괜한 불안감을 심어 준 것 같아.”
“응?”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에 디아나가 번쩍 눈을 떴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언니가 왜?”
디아나는 진심으로 반문했다. 도리어 말문이 막힌 헤스터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게, 내가 언니한테 사과해야 하잖아. 언니는 나한테 미안할 게 하나도 없는데…….”
“네가?”
“그렇잖아. 공연히 의심한 것도 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 과장해서 상상한 것도 나고. 사실 나는 언니가 누굴 만나든 간섭할 자격도 없는데 염치없게 끼어들기나 하고.”
더듬더듬 자신의 잘못을 읊어 나가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디아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말로 내뱉고 나니 얼마나 몰상식한 짓을 저질렀는지 알겠다.
예로부터 마법 사회는 개인주의 전통이 강했다. 마법 사회의 수뇌부인 발푸르기스 평의회는 무고한 이들에겐 한없이 유했으며, 수장이 왕처럼 군림하는 북부의 마법 가문을 제하면 애당초 가문의 수장이 개별 혈족에게 간섭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좁았다. 가까운 혈연조차 개인의 내밀한 사정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단적인 예로 세드릭과 채스터티가 그러했다. 그들은 모친인 바바라 자일스가 수많은 마법사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걸 꺼렸으며, 간혹 어머니의 연인이 집으로 들어오는 날엔 머리끝까지 역정이 치솟아 저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곤 했다. 그리도 싫어하면서 바바라에게 직접 토로하지는 못했다. 이따금 간을 배 밖으로 내놓은 채스터티가 서슴없이 에드윈 베가의 이야기를 꺼냈으나, 그조차 바바라의 눈초리에 금세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장장 20년 가까이 함께한 가족도 그러했다. 한데 고작 두어 달 같이 살았을 뿐인 디아나가 헤스터에게 그런 말할 자격이나 있을까? 냉정하게 말해 결코 아니었다.
“정말 미안해. 이제 와 생각하니 내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겠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디아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약속했다. 자연스레 울적해진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다만 언니가 사과를 받아 준다면 애써 씩씩한 척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헤스터가 식탁에 가지런히 놓인 디아나의 손을 슬며시 맞잡았다. 디아나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껏 심란하기 그지없던 헤스터의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도 미안해. 올리버에게 미리 주의를 줬어야 했어. 적어도 다른 사람의 입으로 알게 해서는 안 됐는데. 그렇지?”
헤스터가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다만 디아나, 나는 네가 그렇게 다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도 좋아. 다른 이들이 사생활의 선을 확실히 긋는다고 해서 우리도 그러라는 법은 없잖아. 이제야 겨우 함께하게 되었는데, 그리 선부터 그어 버리면 우리 사이는 영원히 평행선이지 않을까?”
디아나는 몹시도 황망한 표정이었다. 굳어 버린 입술 사이로 간신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그래도 돼?”
“물론이지.”
그에 어렵사리 막아 놓았던 마음의 둑이 무너졌다. 채워지지 못한 호기심과 안개처럼 음습하게 퍼져 가던 불안감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무겁고 오래된 질문을 건져 올렸다.
“올리버 펜리를 사랑해?”
열차에서 그와 만났을 때부터 궁금했다. 한때의 연인. 한때는 사랑했을지도 모르는 남자. 이제는 옛일이라기에 모르는 척 묻어 두었으니, 다시 시작된 관계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다시 품을 만큼 그를 사랑하는 걸까. 남에게는 허투루 웃어 주지도 않는 언니가 정말로 가족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까.
“디아나. 나는 아직 사랑이 무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 이 세상에서 확실하게 사랑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하지만 함께 있으면 즐거워. 오래 알고 지내서 편안하고. 며칠 못 본다고 애가 타지는 않지만, 떨어져 있을 때면 종종 생각이 나. 그와 헤어졌던 시간에도 그랬어.”
헤스터가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지금은 다시 만나서 많이 행복해. 만약 지금의 행복이 올리버와 만나고 있기 때문이라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맞겠지.”
그녀의 입가에 난만한 미소가 점점이 번져 갔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디아나가 더디게 입술을 열었다. 가슴속 깊숙한 우물에서 길어 올린 시커먼 불안감이 비로소 형체를 찾았다.
“……그럼 펜리 씨랑 결혼할 거야?”
지긋한 시선이 느껴졌다. 디아나는 차마 이대로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모로 돌려 버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일분일초가 마치 억겁처럼 느껴졌다.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 반, 평생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이었다.
스승인 바바라 자일스는 젊은 시절 에드윈 베가를 열렬히 사랑하여 가문의 반대도 무릅쓰고 결혼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 불같은 사랑조차 10년을 채 넘지 못했다. 그러니 디아나는 모든 사랑이 영원하진 않음을 알았다. 지금 헤스터와 올리버가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더라도, 그것이 내일의 사랑을 담보하지는 못했다.
다만 결혼을 염두에 둘 정도로 사랑한다면?
마법 사회는 결혼을 권장하지 않는다. 결혼은 개인의 사생활일 뿐, 발푸르기스 평의회나 가문의 수장이 간섭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애당초 사생활을 포기할 정도로 결혼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니기에, 결혼하지 않고 관계를 이어 가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마법 사회에서 결혼이란 그저 연인끼리의 자그만 약속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헤스터가 결혼을 결심한다면, 이는 즉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할 정도로 올리버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디아나는 언니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아직 언니의 사랑이 고팠다. 이제 막 함께하기 시작했는데 사이에 누가 끼어드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헤스터가 난처한 기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어.”
“아직은?”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함부로 장담할 수 없잖니.”
디아나는 조용히 수긍했다.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막연한 대답은 바라지도 않았다. 헤스터는 당장을 모면하기 위해 확실치도 않은 말을 약속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디아나도 입에 발린 말을 분간 못 할 정도로 아둔하진 않았다. 헤스터와 올리버가 얼마나 갈지, 훗날 결혼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괜한 걱정이라고 치부하기엔 깨달은 바가 너무도 컸다. 지난 두 달, 그토록 사랑하는 언니와 함께하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던 디아나도 이제는 현실이 보였다.
언제까지고 두 사람뿐일 수는 없었다. 헤스터에겐 이미 올리버가 있었고, 혹 그와 헤어지더라도 언젠가 다른 사람을 만날 것이었다. 그저 언니만 바라보고 사는 건 언니에게도 디아나 자신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디아나는 무관심한 스승에게서 사랑을 갈구하던 어릴 적의 세드릭을 똑똑히 기억했다. 늘 예민하게 날이 서 있던 애가 어머니의 눈길 한 번 받겠다고 몸부림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적어도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언니 말이 맞아.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앞으로는 나도 노심초사하지 않을래. 걱정해 봤자 어차피 답도 나오지 않는걸. 공연히 언니만 신경 쓰이게 하고.”
그러니 의연할 것이다. 세드릭도 이제는 그러지 않는데, 열아홉 먹은 자신이 어린애처럼 굴 수는 없었다.
헤스터가 비로소 안심한 듯이 말했다.
“그래도 궁금한 게 있으면 꼭 물어보렴. 이번처럼 애태우지 말고.”
“응. 약속할게. 대신 언니도 나한테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 혹시라도 궁금한 게 있다면.”
디아나가 키득거리며 대꾸했다. 말없이 웃고만 있던 헤스터가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고프지? 이만 점심 먹을까?”
“내가 사 올게!”
지난 일주일 전혀 장을 보지 않았던 디아나가 얼른 현관으로 달려갔다. 행여나 언니가 엉망으로 텅 빈 주방을 본다면 또다시 동생에 대한 걱정만 키울 게 분명했다.
“디아나.”
문득 헤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는 모자를 쓰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정오의 햇살이 차분히 내리쬐는 그곳에, 헤스터가 상냥히 미소 짓는 모습으로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만사 솔직한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혹시나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해 줘.”
“……”
“나는 언제든 네 편일 거야.”
디아나는 그저 물끄러미 헤스터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막간극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끄트머리에서부터 조금씩. 양떼 몰던 목동도, 추수를 앞둔 황금빛 밀밭도, 촌장의 노란 지붕도 덧없이 사라져 갔다. 소리 없이 찾아든 종말은 모두에게 공평했다. 사자의 마력으로 수백 년간 실존하던 세계에도 이렇듯 최후가 찾아왔다.
속절없이 마을을 쓸어 간 종말이 이제는 늪지를 향해 좁혀 들 무렵, 별안간 세상이 정지했다. 노도처럼 밀려들던 종말도, 마지막으로 아들과 못다 한 이야기 나누던 아버지도 전부 멈추었다. 갑자기 멎은 동화 속 시곗바늘을 피해 간 사람은 오직 낯선 이방인뿐이었다.
겉보기로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여인이었다. 단정하게 땋아 내린 머리는 새카맣고 얼굴은 주름 하나 없이 매끈했다. 다만 유달리 눈빛이 깊고, 행동거지가 고상하여 쉬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걸음 하나, 손짓 하나에도 자연스레 눈길이 모이는 품위는 흘러간 세월로도 통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저 여인도 일평생 그만한 풍파를 겪었노라 짐작할 따름이다.
저물어 가는 검은 숲을 가로질러 음습한 늪지에 이른 여인이 계속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새카맣게 타 죽은 헤센 그윈티르의 머리맡이었다.
여인은 천천히 허리를 굽혀,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울 만치 시커먼 헤센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미동조차 없는 표정은 심경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오래지 않아 허리를 곧추세운 여인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오던 궤짝이 송장 옆으로 쾅 내려앉았다.
궤짝에는 또 다른 헤센 그윈티르가 잠들어 있었다.
별안간 늪지 위로 가느다란 빛이 원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잔물결 이는 늪지를 희롱하듯 연거푸 원을 그리던 빛이 차츰 형태를 찾아 갔다. 별에게 올리는 기도문이 어지러이 새겨지고, 실낱같은 곡선과 직선이 겹쳐지며 마법진을 그려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떠오르는 용의 문장.
얼마간 그대로 빛을 뿜어내던 마법진이 차츰 잦아들었다. 늪지는 다시금 적막을 되찾는 듯했으나, 그조차 오래가지는 못했다.
우둑.
어느새 깨어난 헤센 그윈티르가 낡은 궤짝을 찌그리며 일어섰다.
“왜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세드릭 자일스가 동화에 들어올 거라고.”
치렁치렁하게 긴 금발 사이로 연옥색 눈동자가 음산하게 빛났다. 여인은 무척이나 태연하게 대답했다.
“말해 무엇 할까요. 어차피 미래는 바뀌지 않을 텐데.”
“적어도 낙뢰를 또 맞지는 않았을 겁니다.”
신경질적으로 궤짝을 박차고 일어난 헤센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여인의 앞에 섰다. 후우, 긴 한숨이 뒤따랐다.
“아무리 ‘내 몸’이 아니라지만 고통은 그대로 느낍니다. 낙뢰를 맞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안다면, 당신도 그토록 쉽게 말을 아끼지는 못하겠죠.”
“……내 베가의 낙뢰를 맞아 보지는 못했으나, 맞아 죽은 이는 압니다. 아주 아파했지요. 차라리 내가 대신 죽어 주고 싶을 만큼.”
여인이 기이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헤센이 흠칫 손끝을 떨었다.
“내가 실언했습니다. 용서해 주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여인은 가느스름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약하게 두드렸다. 차게 굳어 있던 헤센의 얼굴이 삽시에 비단처럼 풀어졌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육신에 갇혀 살았을 겁니다. 갑갑하고 갑갑했겠죠. 나를 그런 지옥에 살지 않게 한 이가 바로 당신이고, 또다시 이렇게 나를 구하러 온 이가 당신입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기에 그리 뜸을 들이는 건가요?”
“그저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헤센이 허리를 깊게 굽혔다. 척 보기에도 과장된 몸짓이었다. 여인은 웃음을 참으며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는 바깥에서 듣도록 하지요. 천하의 로치데일 경도 동화를 오래 멈춰 두지는 못한답니다.”
“오, 그 작자가 클럽의 회원이라 다행인 점이 하나 있었군요.”
헤센은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빈정거렸다.
“로치데일 경이 아니었다면 그대는 한낱 동화와 함께 소멸했을 겁니다. 도대체 언제쯤 철이 들 텐가요?”
“마법사란 본디 어린아이 같은 존재지요.”
“그래서 내 앞에서도 그리 어린아이처럼 굴 건가요?”
여인이 자비롭게 웃었다. 그러자 헤센이 불퉁한 표정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 올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용서를 구하듯 간절한 모습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헤센이 속삭였다.
“제노비아 자일스(Jenobia Jiles).”
* * *
천년장미관의 사서 주디 스키너는 오늘 자 도서관 마감을 하고 있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고모가 어렵게 구해 준 노래하는 장미에게 물을 주고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자 마감을 담당하는 루퍼트가 사고에 휘말린 터라 피치 못하게 그녀가 루퍼트를 대신하고 있었다.
주디는 훗날 그에게서 두 배로 받아 내리라 다짐하며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관장님?”
주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퇴근했으리라 여겼던 관장이 사무실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 스키너 씨. 서가 정리는 끝났습니까?”
“네. 이제 방명록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관장님께 있군요. 이만 주시겠어요?”
주디는 관장의 손에 들린 낡은 방명록을 눈짓했다. 관장은 순순히 방명록을 돌려주었다.
“그럼 내일 뵙지요. 지하 서고는 내가 확인하겠습니다.”
관장은 그리 말하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주디가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장은 이상한 데서 불쑥 나타나는 것만 제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상사지만, 부하 직원의 일을 대신해 줄 정도로 상냥한 사람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도 마법사였으므로.
“나야 일이 줄었으니 좋은 거지, 뭐.”
주디는 상념을 가볍게 털어 버리며 자리에 앉았다. 갈증에 시달리고 있을 노래하는 장미를 떠올리니 절로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는 서둘러 방명록을 펼친 뒤 오늘 자 방문객의 이름과 퇴관 여부를 빠르게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제이든 골즈워디 (퇴관) 밀레이 뱅고어 (퇴관) 에비게일 듀어든 (퇴관) 아놀드 호머(헤센 그윈티르) (사망) 루벤 콕크로프트 (퇴관) 디아나 솔 (퇴관) 세드릭 자일스 (퇴관) 메이슨 반데빌트 (퇴관) 에드윈 베가 (퇴관) 케이틀린 리브 (퇴관) 마사 에지워스 (퇴관)
주디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책장 끄트머리에 서명했다.
1879년 8월 23일. 사서, 주디 스키너 확인.
外.
세드릭 자일스
에드윈은 뒤를 돌아보았다. 여섯 살 된 어린 아들이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세드릭. 나와 함께 가겠니?”
진심이었다. 에드윈은 진심으로 아들의 의사를 존중할 생각이었다. 무엇이든 베가에게 빼앗길 수 없다고 여기는 자일스의 늙은이들이 갈가리 날뛰겠으나, 만일 세드릭이 함께 떠나고 싶어 한다면 어떻게든 아들을 데리고 나올 작정이었다. 자일스에 남은 세드릭의 미래란 빤한 것이었다.
세드릭이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모가 날 받아 줄까요?”
에드윈은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세드릭의 표정도 차차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가지 말아요. 아버지.”
“미안하다.”
에드윈은 흐느끼는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별을 직감한 세드릭이 울며 매달렸지만, 무정한 아버지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잠시 머물렀던 온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혹독한 겨울.
세드릭은 홀로 설원에 서서 멀어지는 아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머잖아 에드윈은 자취 없이 사라졌으나, 그의 발자국만은 고스란히 눈밭에 남아 있었다. 마치 곧 돌아올 사람처럼 미련만 남기는 자국이 끝없이 이어졌다.
동트고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세드릭은 차디찬 눈밭에 가만히 서 있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 * *
<교활한 자일스> 그리고 <고결한 베가>.
잉그람을 대표하는 두 마법 가문이 오래간 반목하게 된 까닭은 자일스의 전 수장이었던 제노비아 자일스에서 비롯되었다.
제노비아 자일스는 자식이 없다는 사실만 제하면 완전무결한 마녀였다. 선조인 클레멘틴 자일스를 계승하여 훌륭한 예지를 지녔고, 이제는 지상에서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용의 주인이기도 했다. 뛰어난 마녀?마법사들이 으레 그러하듯 괴팍한 성정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수많은 이들이 그녀를 칭송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노비아 자일스가 예언했다.
‘석 달 뒤 공회당에서 피가 낭자할 것입니다.’
예언이 말하는 일자에 공회당에는 정기 마법공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마법공회는 잉그람에서 내로라하는 예순여섯의 마녀?마법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중요한 자리.
당시 공회의 의장이던 도리안 베가는 고심 끝에 일정을 두 달 앞당겼다. 자일스의 예지는 언제나 적중했으므로, 도미닉 베가가 그녀의 예언을 신뢰하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였다.
한 달 뒤, 공회당에서 참사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모두가 예상치 못한 참극이었다. 범인은 산티그마 교단의 극렬한 원리주의자로, 200년 전 교단과 마법 사회가 체결한 협약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마법사의 박멸을 주장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총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채 공회당으로 들이닥쳐 무자비하게 총격했다. 제아무리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한들, 마법공회의 일원은 대다수가 전투에 무지한 학자들이었다. 다행히 동물을 대신으로 보낸 이들은 무사했으나, 직접 공회당으로 행차한 경우에는 불운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도 있었다.
공회의 의장인 도리안 베가도 그런 안타까운 이들 중 하나였다.
1687년 발롬피에 협약을 체결한 이래 마법 사회와 산티그마 교단의 관계가 그만치 위태로웠던 시절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제노비아 자일스를 탓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자일스의 예언가는 예언을 취사선택할 수 없었다. 그저 보고 들리는 것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니, 이번 참극과 예언 속 참극은 애당초 다른 사건으로 분류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도, 세 달이 지나도 공회당은 고요했다. 예언이 말하는 날짜는 이미 지난 지 한참인데도 공회당에서 피가 낭자하는 일은 없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제노비아 자일스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그릇된 예언을 말한 적 없는 마녀. 왜 하필이면 이번에 틀려야 했을까.
사람들의 의문에 제노비아 자일스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본 미래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갈래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당시 베가의 수장이자, 숨진 도리안 베가의 모친이었던 이자벨 베가는 크게 노했다. 제노비아 자일스가 옳은 미래를 보고도 부러 틀리게 예언했다 여긴 것이었다.
선조인 오베론 베가를 계승한 이자벨 베가의 분노는 자연스레 낙뢰로 귀결되었다. 표적은 남편과 자식이 없는 제노비아 자일스가 일평생 가장 귀애하던 것. 바로 유년기부터 함께한 용 페넬로피였다.
예부터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형벌이라 하여 천벌로까지 여겨지던 베가의 낙뢰다. 범인이라면 삽시에 타 죽을 낙뢰를 용 페넬로피는 간신히 견뎌 나갔으나, 그조차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낙뢰를 맞기 시작한 지 하루가 지나자 강철 같던 용의 가죽이 차츰 벗겨졌고, 이틀이 지나자 용의 비명이 천지를 울렸다.
그리고 3일째 되던 날, 용의 육중한 몸뚱이가 마침내 서서히 기울었다.
살벌하고 살벌한 진노였다. 무려 3일 밤낮을 내리친 낙뢰는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산은 평평해지고, 강은 말라 버렸다. 죽어 가는 용의 울음소리에 질겁하여 달아난 새 떼만도 수두룩했다.
눈앞에서 용이 죽어 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봐야 했던 제노비아 자일스는 오열을 거듭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용 페넬로피를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대저 베가의 낙뢰란 한번 내리치면 막을 방도가 없는 마법이었다. 심지어는 금기에까지 손을 대려는 그녀를 친족들이 겨우 뜯어말렸다.
제노비아 자일스는 사랑하는 용을 잃어 몹시 낙담했다.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용을 어처구니없이 잃은 자일스의 마녀?마법사들도 가감 없이 분노를 표했지만, 이자벨 베가는 전혀 용서를 구할 의사가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제노비아 자일스의 사죄를 요구했다.
나날이 사태가 심각해지자 발푸르기스 평의회가 중재에 나섰다. 3일 밤낮으로 낙뢰를 내리친 이자벨 베가는 마법의 후유증으로 쉬이 거동하지 못했으므로, 시종으로 부리던 올빼미가 그녀를 대신하여 재판장에 출두했다. 수척한 낯빛으로 몸소 재판장에 나타난 제노비아 자일스는 이자벨 베가의 정신이 쓰인 올빼미를 지그시 노려볼 뿐이었다.
재판장에서 제노비아 자일스가 남긴 말은 단 한마디였다.
‘이자벨 베가. 그대의 핏줄은 이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녀는 붙잡는 손길을 모두 뿌리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자일스 가문은 현상금까지 내걸며 백방으로 수장을 찾아 헤맸지만, 무릇 작정하고 사라진 마녀를 찾기란 참으로 지난한 일이었다. 그렇게 제노비아 자일스의 행방이 묘연해진 동안, 베가에는 기이한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처음은 이자벨 베가의 막내딸인 펠리시티 베가의 의문사였다. 당시 첫째아이를 임신 중이던 펠리시티 베가는 남부 시골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 안으로 날아든 까마귀를 맞닥뜨리며 불안 증세를 보이더니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태중의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이자벨 베가의 손자인 그리핀 베가의 사고였다. 국왕의 부름을 받아 로엔그렌 궁전으로 향하던 그리핀 베가는 때마침 공사하던 건물 밑을 지나던 중이었다. 그런데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리던 기중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바위가 떨어져 버렸고, 미처 피하지 못한 그리핀 베가는 그대로 압사했다. 급히 불려 온 궁정마법사가 바위를 들어 올렸을 때는 이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짓눌린 피투성이 송장만 남았을 뿐이다.
낙뢰의 후유증으로 몸져누웠던 이자벨 베가는 잇따른 부고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당신의 핏줄이 끊기리라 경고하던 제노비아 자일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붙었다. 결국에 이자벨 베가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후계자인 캐롤라인 베가 일가를 불러들였으나, 도리어 그것이 패착이 되고 말았다.
그날, 캐롤라인 베가 일가는 몰살당했다. 범인은 당대 살인귀로 악명 높던 ‘붉은 손’ 셀레나 아스톨포였다.
수많은 사냥꾼이 쫓던 셀레나 아스톨포는 오필리아 베가가 집필한 아흔일곱 권의 저서를 노리고 베가의 본성으로 잠입했다가, 마침 본성을 찾았던 캐롤라인 베가 일가와 마주치고 말았다. 캐롤라인 베가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세 명의 어린 자식은 셀레나 아스톨포의 손에 처참히 찢겨 죽었다. 이후 셀레나 아스톨포는 이자벨 베가를 겁박하여 저서를 탈취하려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를 추적하던 사냥꾼의 손에 잡혔다.
이제 이자벨 베가의 마지막 남은 직계는 왕래 드물던 손녀 스텔라 베가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자신을 옥죄어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두려워하다가,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제노비아 자일스의 경고대로 이자벨 베가는 모든 직계를 잃은 셈이었다.
그리하여 이자벨 베가는 죽는 순간까지도 제노비아 자일스를 저주했다. 하지만 비할 데 없이 엄중한 베가의 낙뢰도 자취 없이 사라진 마녀를 벌하진 못하므로, 그녀의 분노는 방향을 잃고 덧없이 사그라졌다.
한편, 제노비아 자일스는 오래지 않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최후였다. 강에 몸을 던졌는지 퉁퉁 불어난 송장은 도무지 생전의 제노비아 자일스와 닮지 않았으나, 마법 범죄 부서의 감식 결과 자일스의 수장인 제노비아가 맞았다. 잠적했던 기간 그녀의 종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이야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입에 오랫동안 이름이 오르내렸을 따름이다.
과연 재판장에서 제노비아 자일스의 마지막 발언은 무슨 의미였을까.
누구는 예언이라 하였고, 누구는 저주라 하였다. 당사자가 죽어 이제는 정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지만, 결국 그녀의 경고대로 이루어졌으므로 사뭇 오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자일스와 베가는 여전히 서로를 상종 못 할 원수로 여겼다. 피해는 막중하나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으니 과거의 앙금이 풀릴 리 만무했다.
그리 반목하는 동안 오래도록 비어 있던 자일스의 수장 자리에는 제노비아 자일스의 어린 종질녀인 바바라 자일스가 올랐고, 이자벨 베가의 가까운 친척으로 그녀의 뒤를 이었던 크리스토퍼 베가는 장녀인 아멜리아 베가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두 가문의 불화는 그렇게 대물림되는 듯했다.
하지만 아주 우연한 때, 아주 우연한 곳에서 바바라 자일스와 에드윈 베가가 조우했다.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열여덟 스물, 그것도 아름답기로는 으뜸가는 아리아나 해변에서.
“에드윈과 결혼하겠어요.”
바바라의 일방적인 통보에 자일스 가문이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자일스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베가가 뒤늦게 소식을 접했을 때, 에드윈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자일스와 베가. 당연하게도 양가 모두 두 사람의 결합을 바라지 않았다. 20년의 세월은 그간의 갈등을 봉합하기엔 아직 부족했다. 더구나 바바라 자일스는 가문의 수장이고, 에드윈 베가는 수장의 하나뿐인 형제였다. 아무리 결혼이 개인의 사생활이라 한들, 갑작스러운 결혼 통보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왜 하필이면 베가란 말이오?’
특히나 자일스의 반발이 심했다. 그들은 여전히 용을 태워 죽인 이자벨 베가에 치를 떨었다. 용 페넬로피가 절명한 이후 자일스 본성의 둥지는 아직도 알을 품지 못했으니, 가문의 창날이자 방패인 용 없는 20년을 보낸 그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베가라고 자일스와의 결합을 탐탁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수장인 아멜리아 베가의 반응이 유했다. 제노비아 자일스와 얽힌 이자벨 베가 일가의 죽음은 분명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으나, 아멜리아는 이자벨 베가의 직계가 아니었을뿐더러 그녀와 만난 적도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의 죽음을 되새기기에 아멜리아는 지극히 마녀다웠다.
“마냥 축하해 줄 수는 없겠구나. 너도 알다시피 내 입장이 그렇잖니.”
몰래 누이를 찾아온 에드윈에게 아멜리아는 그리 말했다.
“다만 너의 결혼이고, 너의 선택이니 내가 간섭할 여지는 없겠지. 부디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결국 바바라 자일스와 에드윈 베가는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감행했다. 연인이면 되었지 굳이 결혼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회유가 이어졌지만, 사랑에 심취한 그네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도처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초여름. 어린 신랑 신부는 처음 만났던 해변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하객 없는 결혼식에서 바닷새와 파도가 대신 증인이 되어 주었다.
축복받지 못한 결혼이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았다.
관청에 결혼 신고까지 하고 돌아온 그들을 가문의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 완곡하게 면박 주는 이도 있었지만, 당사자가 저리 완고한 이상 가문의 누구도 결혼을 무를 수는 없었다. 천년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면 몰라도, 지금은 정략혼으로 강한 후손을 낳아야 하는 의무 따위 가문의 수장에게도 없었다. 강하지 않더라도 쉬이 살아갈 수 있는 시대였다.
모든 역경을 물리치고 비로소 함께하게 된 바바라와 에드윈은 더없이 행복했다. 매일 새로운 사랑이 싹트고, 매일 새로운 행복이 꽃피었다. 이제는 서로가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바라가 임신했다.
계획된 임신은 아니었다. 아직 아이를 낳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바바라와 에드윈은 족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낙태할 만큼의 잔인한 결심이 서지도 않았다. 부부는 배 속에 깃든 생명이 신비로웠다. 아직은 판판한 배가 차츰 불러올 날을 고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는 고작 석 달 만에 사산되었다. 배가 눈에 띄게 불러오기도 전 세상으로 나온 아이는 사람의 형체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부부는 슬피 울며 죽은 아이를 고이 묻어 주었다. 이제 막 움텄던 사랑은 그리 주인을 잃고 시들어 버렸다.
부부는 다시 임신을 시도했다. 저번의 유산이 계획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면, 이번에는 철저하게 준비하여 건강한 아이를 품에 안고 싶었다. 그만큼 바바라는 에드윈을 닮은 아이를, 에드윈은 바바라를 닮은 아이를 원했다. 마법으로도 이루어 낼 수 없는 기적을 사랑으로 이루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산이었다.
“어째서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걸까요?”
부부는 크게 낙심했다. 서로를 마주 보며 겨우 마음을 추슬렀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상처가 전부 치유되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나을 수 없는 상처도 있는 법. 바바라와 에드윈은 변함없이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였으나, 지쳐 가는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그즈음 부부는 두 명의 아이를 입양했다. 하나는 산욕열로 어미를 잃은 바바라의 조카 설리번 자일스고, 나머지 하나는 바바라 이후로 예지를 지니고 태어난 채스터티 자일스였다. 부부는 어린아이들을 돌보며 시름을 달랬다. 하지만 죽어 태어난 아이들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바바라는 서재에 틀어박혔고, 에드윈은 바깥으로 나돌았다. 서로를 만난 이래 오로지 사랑이 전부였던 삶이지만, 조금씩 사랑이 식어 가자 자연스레 그간 잊고 지냈던 마법이 떠오른 것이다. 부부는 각자 연구에 열중하며, 불규칙적으로 서로에게 안부를 전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기간은 제각각이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인어를 연구하기 위해 반년이나 저택을 비웠던 에드윈을 반긴 것은 다름 아닌 바바라의 부른 배였다.
“아이를 임신했어요.”
바바라가 말했다.
“급한 연구가 있어서 당장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아이를 죽일 용기는 더더욱 없어요.”
에드윈은 바바라의 결정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부부는 즉시 모든 연구를 중단하고, 이번만큼은 무사히 출산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거듭된 유산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바바라의 자궁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산모와 태아 모두 위험해요.”
의사가 단단히 경고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복통과 하혈로 바바라는 예민하게 날이 섰다. 때로는 이렇게 고통스러울 바에야 차라리 낙태하겠다며 갈가리 날뛰었고, 때로는 부른 배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 냈다. 묵묵히 바바라를 받아 주던 에드윈도 차츰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저택에서 발걸음 하나 내딛기도 조심스러운 시기였다.
그해 겨울.
지독한 난산이었다. 바바라는 비명을 내지르다 혼절하길 반복했고, 두 명의 산파가 번갈아 바바라를 얼러 가며 간신히 아이를 받아 냈다. 난산에 지친 아이는 쉬이 울음을 터트리지 못했다. 산파가 거듭 아이의 엉덩이를 때리고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저택에 울려 퍼지자, 그제야 에드윈은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바라는 꼬박 이틀이 지난 뒤에야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아이지만, 이상하게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입양한 자식들과 다른 특별한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조그만 아이는 유독 어미의 품을 불편해했다. 바바라는 미련 없이 아이를 유모에게 넘겨주었다. 어쩐지 지난 아홉 달의 고통이 무색해졌다. 속이 헛헛했다.
“이름은 정했나요?”
“당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죠.”
아이의 이름은 세드릭 자일스였다. 외조부의 이름과 모친의 성을 이어받은 자일스의 아이였다.
일단은 수장의 하나뿐인 아들이므로, 별다른 이상이 없는 한 바바라의 뒤를 이어 자일스의 수장이 될 것이었다. 바바라가 불임 판정을 받은 뒤로는 특히나 모두가 그리 여겼다.
세드릭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세 아이를 차별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자식에게 공평하게 무관심한 어머니와 저택을 비우는 일이 잦은 아버지의 슬하였지만, 본디 아이란 부모의 부족한 사랑으로도 족히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었다. 그럭저럭 제 몫은 하는 유모와, 어린 동생을 신기하게 여기던 남매의 순진한 관심이 다행히도 부모 찾는 세드릭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세드릭은 조금 예민하지만, 딱히 모난 데 없는 아이로 성장했다.
세드릭이 다섯 살 되던 해. 하루는 가문의 원로인 레오나드 자일스가 저택을 방문했다.
“네 아버지를 많이 닮았구나.”
탐탁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난생처음 접하는 엄중한 시선에 주눅 든 세드릭은 유모의 등 뒤에 숨어 나올 줄을 몰랐다. 바바라는 한숨을 내쉬며 아이들을 물렸다. 유모는 세 아이들을 이끌고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 한구석에는 오래된 아름드리나무가 있었다. 듣기로는 옛적 저택에 살던 어느 미치광이 마법사가 자신이 죽거든 무덤에 나무를 심어 달라 유언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삼 남매는 어느덧 아름드리나무 밑에 미치광이 마법사가 잠들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유모가 깜빡 낮잠에 든 사이, 채스터티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오늘이야말로 저 나무를 쪼개고 말 거야.”
“어디 할 수 있음 해 보시든가.”
설리번이 비웃었다. 신경전을 벌이는 남매 사이로 어린 세드릭이 끼어들었다.
“나도 해 봐도 돼?”
“넌 아직 각성하지 않아서 안 돼.”
“맞아. 마법도 못 부리는 주제에.”
“오늘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미 여러 차례 마법을 실패했던 세드릭이 심통 난 얼굴로 반박했다. 하지만 설리번과 채스터티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글쎄, 먼저 각성을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맞아. 이 바보야.”
“나도 곧 각성할 거야!”
“얼씨구. 무서워라. 그래, 언젠가는 각성하겠지. 그런데 오늘은 아닐걸.”
“잠깐만. 평생 각성 못 할지도 몰라.”
문득 채스터티가 은밀한 목소리로 속닥였다.
“내가 어제 책에서 봤는데 마녀?마법사 부모 사이에서도 평범한 인간이 태어날 수 있대. 인간만 인간을 낳는 게 아닌가 봐.”
“아무리 그래도 세드릭이 각성을 못 하겠어?”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멀고 먼 방계인 내가 예지를 지닐 줄 누가 알았니?”
채스터티는 세드릭의 뺨을 꼬집으며 키득거렸다.
“우리 막내. 혹시나 마법사가 아니면 어쩌나? 집에서 쫓겨날 텐데.”
하얗게 질린 세드릭이 마구 고개를 내저었다. 악을 쓰듯 예민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냐! 난 마법사야!”
“그러니까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니까? 너 마법사 아니면 어떡할래?”
“마법사 맞다고!”
“그럼 증명해 봐.”
채스터티가 진하게 웃으며 아름드리나무를 눈짓했다. 씩씩거리며 그녀를 노려보던 세드릭이 홱 고개 돌려 나무를 보았다.
하루라도 빨리 부모님과 남매들처럼 마법을 부리고 싶어서, 몰래 마법 서적을 읽어 온 것이 벌써 몇 달째였다. 모르는 글자와 어려운 문맥을 일일이 짚어 가며 어떻게든 머릿속에 욱여넣었으나, 정작 마법을 부리지 못하니 쓸모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마법사가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여기서 혀 깨물고 죽는 게 나았다.
세드릭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모든 신경을 아름드리나무에 집중했다. 억울한 마음에 자꾸만 눈에 열이 오르고 맥박이 고르지 않게 올라갔다. 그렇게 오래간 품어 온 어린 소망이 응어리로 맺힌 순간.
쾅!
하늘에서 눈부신 낙뢰가 내리쳤다.
그것이, 세드릭이 기억하는 첫 마법의 유일한 순간이었다.
땅으로 내리꽂히는 낙뢰와 함께 졸도했던 세드릭은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곁에는 부모와 레오나드 자일스가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다. 멍하니 그들을 올려다보던 세드릭이 이내 남매를 찾기 시작했다. 채스터티와 설리번은 멀지 않은 곳에서 유모와 함께 조용히 앉아 있었다.
세드릭과 시선이 마주친 채스터티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너 이제 큰일 났다.’
그에 세드릭이 의문을 표하기도 전, 레오나드 자일스가 별안간 수틀린 목소리로 외쳤다.
“낙뢰라니, 베가의 낙뢰라니! 페넬로피를 죽인 낙뢰를 내 아직도 기억하는데!”
“세드릭이 페넬로피를 죽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자일스의 일이야. 베가는 빠지시게.”
레오나드가 에드윈을 거칠게 밀어 내며 세드릭의 눈앞에 우뚝 섰다. 신상(神像)처럼 거대한 노인을 세드릭은 차마 올려다보지 못했다.
“이제 보니 자일스의 아이가 아니라, 베가의 아이로구나.”
세드릭은 울먹이며 부모를 찾아 손을 뻗었다. 그러나 미처 그들을 잡을 수 없었다. 우연히 마주친 부모의 눈빛이 지독히도 복잡했다. 차마 말로 내뱉지 못하는 힐난의 시선이 세드릭의 발목을 옭아맸다.
그 시선.
마치 우레 같은 비난이었다.
“아버지. 내가 뭘 잘못했어요?”
쭈뼛거리며 서재로 들어온 세드릭이 그리 물었다. 에드윈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세드릭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그게 무슨 말이니?”
“며칠 전에 무서운 할아버지가 찾아왔었잖아요. 그날 내가 뭘 잘못한 거죠? 자꾸 편지가 오는데 어머니 표정이 이상해요. 내게 웃어 주지도 않아요.”
아이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에드윈은 씁쓸한 표정으로 세드릭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넌 아무 잘못도 없단다. 오히려 잘잘못을 가리자면 내 탓이겠지.”
“아버지가요?”
세드릭이 젖은 눈으로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에드윈은 슬프게 미소 지으며,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미안하구나.”
세드릭이 낙뢰를 내린 이후로 자일스 가문이 재차 들끓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은 베가가 수장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영 속이 쓰린 판국에, 그 아들마저 베가의 상징인 낙뢰를 내렸으니 시끄러울 만도 했다. 세드릭이 자일스 특유의 흑발 녹안을 지녔다는 점은 더 이상 옹호할 여지가 되지 못했다. 그만큼 낙뢰가 지니는 함의가 컸다.
‘낙뢰라면 페넬로피를 죽인 끔찍한 마법이 아닙니까?’
예로부터 용은 자일스의 자존심이었다. 다른 이들이 용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자일스만은 용의 비호로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200년 전 용이 사라진 이후에도 세대마다 한 마리씩의 용은 꼭 자일스와 함께했으니, 자일스의 역사란 처음부터 용을 제외하면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데 그런 중요한 용이 사흘 밤낮으로 낙뢰를 맞고 죽었다. 그것만으로도 족히 끔찍스러운데 심지어는 낙뢰를 내린 마녀가 이자벨 베가 혼자였다. 먼 옛날 오베론 베가가 단신으로 악룡 열한 마리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왔지만, 그건 말 그대로 전설이었다. 그 이후로 오직 마녀 한 명이서 용을 죽인 사례는 없었다.
사흘 동안 낙뢰를 내린 후유증으로, 이자벨 베가가 운신하지 못하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용 페넬로피가 절명한 이후로 자일스에서 베가의 낙뢰는 언급조차 꺼려질 만큼 참혹한 마법이 되었다. 지난 20년, 페넬로피를 이을 다음 세대의 용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렇기에 낙뢰를 내리는 자일스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 하필이면 수장의 아들이란 말입니까? 자일스의 차기 수장이 낙뢰를 내리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드릭이 공식적으로 차기 수장이라 낙점된 것도 아니니까요. 바바라에게는 세드릭 말고도 두 명의 자식이 더 있지 않습니까?’ ‘예. 세드릭보다 좋은 수장감이 있지요.’
세드릭의 흠결은 점차 차기 수장 자리를 둘러싼 논쟁으로 번졌다. 원로들은 물론이요, 평소 가문의 일에 무관심하던 치들까지 바바라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이닥치는 전서구에 바바라는 미칠 지경이었다. 천성적으로 떠들썩한 것을 기피하는 그녀에게 작금의 소란은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부를 괴롭히는 것은 자일스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동생에게, 조카가 낙뢰를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결한 우리의 핏줄이 자일스에 머문다면 적어도 그네들이 쓸데없이 용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겠지. 잘만 대접해 준다면 조카가 분개하여 용을 죽이는 일 따위 저지를 리 있겠니? 조카의 존재가 자일스에겐 축복임을 알지 못하는 멍청한 자들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용을 잃고 나서야 후회했던 것처럼, 조카를 잃고 후회할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말이야. 경애를 담아, 아멜리아 베가.」
에드윈은 당장에 편지를 찢어 버리고 베가의 본성으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편지를 보낸 거야? 낙뢰가 세드릭에게로 이어져서 골나기라도 했어?”
에드윈이 이를 갈며 물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자태로 아우를 맞이한 아멜리아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내가 무어 못 할 말이라도 했니?”
“지금 상황이 어떤지 잘 알면서 왜 빈정거리는 건데? 이 편지를 바바라가 먼저 보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요즘 너희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고 들었다. 아직 편지도 공유하는 관계니?”
에드윈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네가 상관할 일 아니야.”
“그래.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다만 네 모습이 참으로 한심스러워 몇 마디 해 주고 싶구나.”
아멜리아는 그리 말하며 느릿하게 에드윈에게로 다가왔다. 고혹적으로 빛나는 자색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에드윈. 사랑하는 내 동생. 진심으로 네 아들을 위한다면 그만 자일스를 떠나려무나. 조카에게 필요한 건 바바라지, 네가 아니야.”
“아멜리아.”
“생각해 보렴. 그렇잖아도 너를 빼닮아 눈총을 받는 아이인데, 옆에서 너까지 싸고돌면 그게 보기 좋겠니? 베가인 네가 자일스의 일에 끼어들어서 좋을 일 하나 없단다. 어차피 조카가 혼자서 이겨 내야 해.”
에드윈은 가만히 입술만 짓씹었다. 아멜리아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바바라가 네 아이를 낳기 위해 몹시 노력했다고 알고 있다. 그만한 사랑이면 적어도 아들을 다치게 하진 않겠지. 아내를 믿으렴.”
“……바바라는 네 생각만큼 세드릭을 사랑하지 않아.”
“그럼 네가 설득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한참 고심하던 에드윈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멜리아. 만약에 내가 세드릭을 데려온다면 받아 주겠어?”
“낙뢰를 내리는 마법사야. 나야 당연히 환영이지.”
아멜리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친족들의 생각이 어떨지는 모르겠구나. 내 후계자인 로렌은 충분히 훌륭한 마녀고, 낙뢰를 내리는 마법사는 너도 있지. 게다가 자일스가 우리에게 조카를 순순히 뺏길 만큼 어수룩한 자들이니? 조카가 아무리 싫어도 우리에게 줄 바에야 일평생 자기네들이 껴안고 살걸.”
“하지만 고작 다섯 살배기 어린 애야. 혼자 놔두고 올 수가…….”
아멜리아는 에드윈의 말을 한숨으로 끊어 냈다. 동생을 쳐다보는 눈빛에 답답한 심정이 담겼다.
“에드윈. 베가에서도 조카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 그럴 바에야 차라리 수장의 아들인 자일스가 낫지 않겠니? 혹시나 바바라의 뒤를 이어 자일스의 수장이라도 된다면, 누가 감히 조카에게 삿된 말을 할까?”
에드윈은 말없이 수긍했다.
자일스 저택으로 돌아온 에드윈은 곧장 바바라의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 앞에는 뜯지 않은 편지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다. 에드윈은 편지를 짓밟고 노크했다.
“누구예요?”
“에드윈입니다, 바바라.”
바바라는 상당히 초췌한 낯이었다. 벌써 몇 달째 지속되는 가문의 난리에 적잖게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무슨 용건인가요?”
바바라는 안경을 벗으며 힘없이 물었다. 에드윈은 조용히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이만 떠나려고 합니다.”
그에 바바라는 말없이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가 금세 가라앉는 눈빛에 어언 회한이 어렸다.
“실은 너무 늦었지요. 우리는 이미 끝났는데, 과거의 사랑에 내가 너무도 목을 걸었나 봅니다.”
“끝이요?”
“당신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에드윈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던 바바라가 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혼장은…….”
“당신만 괜찮다면 당분간은 별거로 끝냈으면 합니다. 명색이나마 당신의 남편으로서 세드릭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나는 이제 불임이에요. 남편을 새로 들인다 한들 자식을 더 가질 수는 없는걸요.”
“내가 떠나는 것만으로도 세드릭에겐 큰 충격일 겁니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더한 충격을 남기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잖아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중충한 분위기에 마음이 뒤숭숭할 세드릭이었다. 원래도 에드윈이 저택을 비우는 일이 잦긴 하지만, 타고나길 예민한 아들은 평소와는 다른 아버지의 ‘외출’을 기민하게 알아차릴 것이었다. 가만히 아버지를 보낼 리 없었다.
에드윈은 울며 자신을 붙잡을 세드릭을 억지로 떼어 놓을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아들을 위한 일이라 한들, 가시밭길이 분명한 앞날에 세드릭만 두고 떠나기엔 그의 마음이 너무도 미어졌다.
“세드릭 때문인가요?”
바바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윈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세드릭 때문에 떠나는 거라면 다시 생각해 봐요. 그 애는 내 아들이기도 해요. 당신만의 잘못이 아닌걸요.”
“잘잘못을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여기 계속 머무르는 것이 세드릭에게 좋지 않을 것은 분명하니까요.”
“그리 세드릭을 아끼면서 떠날 수는 있겠어요?”
에드윈은 쓰게 미소 지었다.
“갓 태어난 세드릭을 처음 안아 들었을 때는 이렇게 마음 쓰게 될 줄 몰랐습니다. 자랄수록 나를 빼닮았지만, 사랑스럽기보다는 신기함이 앞섰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요. 나를 너무 닮아 고초를 겪는 아들이 안쓰럽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이라 해도 좋아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내가 떠나야 세드릭이 편하다는 사실입니다.”
바바라가 점차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숨 같은 속삭임이 뒤이었다.
“여기에 혼자 남을 세드릭도 생각해야죠. 자일스의 누구도 세드릭을 편들지 않는다는 것쯤은 당신도 잘 알잖아요. 만일 세드릭이 당신을 떠나보내지 못하면 어찌할 건가요? 어쩌면 세드릭도 당신을 따라가는 편이 더 나을지 몰라요.”
“그럼 세드릭에게 선택권을 주겠습니다. 나를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여기 남을 것인지. 전자라면 내가 세드릭을 데려가겠습니다. 하지만…….”
에드윈은 바바라의 양손을 붙잡으며 간곡히 부탁했다.
“만일 세드릭이 자일스에 남겠다고 한다면, 당신이 세드릭을 보살펴 줘야 합니다.”
“에드윈…….”
“당신이 세드릭을 특별히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잘 압니다. 당신에게 세 자식은 동등한 존재죠. 그러니 세드릭만을 편애하란 부탁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아이가 날개를 펼치기도 전에 추락하지 않도록, 그만큼만 당신이 보호해 주길 바라요.”
우리의 아들이잖아요.
에드윈이 간절히 속삭였다. 말없이 그를 마주 보던 바바라가 이윽고 손을 뻗어 에드윈을 안았다. 아주 오래간만의 포옹이었다. 마지막 포옹이기도 했다.
“알다시피 나는 자식보다 내가 더 중요한 사람이에요. 아마 세드릭이 원하는 만큼 사랑을 주지는 못하겠죠. 하지만 아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정도로 무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자질이 어떻든 간에 내가 낳은 아이인걸요.”
바바라는 에드윈에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없느니만 못한 어미는 되지 않을 테니.”
무릇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더욱 애틋한 법이었다.
바바라 자일스와 에드윈 베가는 서로를 열렬하게 사랑했으나, 변치 않을 듯 보였던 그들의 사랑도 10년을 간신히 넘겨 종막을 고했다. 보석보다 값지던 사랑은 이제 과거의 영광이었다. 사랑이 죄 불태우고 가 버린 숲에 남은 것은 오직 잿더미가 된 가시나무뿐.
에드윈은 그렇게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떠났다. 이제는 추억이 된 사랑과, 평생의 책임으로 남을 아들을 가슴 깊이 묻어 둔 채.
새하얀 설원 위로 하늘하늘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에드윈은 세드릭이 그를 오래 기다리지 않길 바랐다.
* * *
“아버지는 언제 돌아와요?”
세드릭은 틈만 나면 바바라를 붙잡고 그렇게 물었다. 아들을 대하기 곤욕스러워진 바바라가 한동안 세드릭을 피해 다니자, 이번에는 유모의 차례였다. 유모는 차마 사실대로 고할 수 없어 줄곧 머뭇거렸다. 그러자 결국에는 여태껏 관망하던 설리번이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는 떠났어.”
“그럼 언제 돌아와?”
“안 돌아와. 그냥 떠난 거야.”
세드릭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왜? 왜 안 돌아오는 건데?”
“그게 너한테 좋으니까.”
세드릭은 설리번의 대답을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수장의 유일한 친자로 남을 수 있는 자일스가 베가보다 낫다는 사실은 이해했지만, 어째서 아버지가 떠나는 게 자신에게 유리한지는 도무지 몰랐다. 그래서 계속해 설리번에게 매달렸으나, 설리버는 그저 딱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세드릭의 이마를 두드릴 뿐 적당한 답을 내어 주지 않았다.
“네가 더 자라면 알게 될 거다.”
그즈음 공식적으로 바바라의 후계를 정하자는 목소리가 가문을 휩쓸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레오나드 자일스를 필두로 한 가문의 원로들로, 에드윈 베가를 빼닮은 세드릭보다는 이번 세대 유일하게 예지를 물려받은 채스터티가 낫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기본적으로 마법 사회가 모계를 따른다는 점도 주장을 뒷받침했다.
‘아무렴 선조를 닮아 예지를 지닌 채스터티가 있는데, 굳이 베가의 아이를 후계로 삼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비록 세드릭이 바바라의 유일한 친자라고는 하지만, 채스터티도 엄연히 바바라의 양녀입니다. 수장의 친자가 가문을 잇는 것은 그저 관습일 뿐 법전에 명시된 사항도 아니지 않습니까?’
매일같이 그런 투서가 잇따르는데, 아이들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오래지 않아 바바라가 골치 썩는 이유를 알게 된 채스터티가 어느 날 식사 중에 말을 꺼냈다.
“어머니. 정말로 내가 가문의 다음 수장이에요?”
바바라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내내 풀 죽은 얼굴로 요리를 깨작거리던 세드릭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네가 다음 수장이야?”
“너는 베가의 낙뢰를 내리잖아. 자일스의 수장으로는 내가 더 적합하다고 하던걸.”
“채스터티.”
설리번이 조용히 눈치를 주었다. 채스터티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왜? 설리번 너도 아까 편지 읽었잖아.”
“그냥 입 다물고 식사나 해.”
“얘는, 자기도 읽었으면서 왜 나한테 역정이야? 어머니한테 여쭙는 것도 안 돼?”
채스터티가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남매가 옥신각신 다투는 사이, 가만히 숨만 몰아쉬던 세드릭이 겨우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의 후계자는 나야.”
“아이참. 너 요즘 저택으로 쏟아지는 편지 읽어 보지도 않았니? 지금까지는 네가 후계자였지.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죄다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
“내가 후계자라고!”
세드릭이 일갈했다. 갑작스레 식당에 내려앉은 정적이 써늘했다. 세드릭은 분기를 못 참고 씩씩거리며 채스터티를 쏘아보았다.
“넌 어머니의 딸도 아니잖아.”
“세드릭!”
바바라가 경악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스터티는 어머니의 딸이 아니잖아요. 한데 어째서 저 애가 어머니의 후계자예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채스터티도 내 딸이야!”
세드릭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내가,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에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들은 나뿐이잖아요!”
“세드릭 자일스!”
바바라가 노성을 질렀다. 마녀의 분노에 가지런하던 식기들이 한바탕 요동을 쳤다. 채스터티가 식겁하여 포크를 떨어뜨리고, 설리번은 바바라의 표정을 살피며 슬며시 자신의 그릇을 들어 올렸다. 세드릭만은 하염없이 서러운 눈으로 어미를 올려다볼 따름이었다.
간신히 화를 가라앉힌 바바라가 명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드릭. 네 방으로 돌아가라.”
세드릭은 잠시 발끝만 내려다보더니 이내 고개 숙인 채로 식당을 나갔다. 우물쭈물 눈치를 보던 유모가 곧 세드릭을 뒤따랐다.
도로 의자에 주저앉은 바바라가 깊디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식당에는 설리번의 칼질 소리만 유유히 울렸다.
어두운 방.
세드릭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 구석에 박혀 있었다. 어떻게든 달래서 마저 식사하게 하려던 유모도 포기하고 돌아간 지 오래였다. 야심히 깊어 가는 밤, 저택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생쥐처럼 복도를 건너온 누군가 방문을 열기 전까지는.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에 세드릭이 돌아보지도 않고 마법으로 베개를 던졌다. 간발의 차로 베개를 피한 채스터티가 입을 비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저 성질머리는 도대체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니까.”
“꺼져.”
“안 그래도 곧 꺼질 거거든?”
채스터티는 그리 말하며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건드리면 곧장 가시 세울 세드릭이 두렵긴 했는지, 침대에 바로 앉지는 못하고 의자를 침대 맡으로 끌고 왔다.
“다른 게 아니라 설리번 말을 듣자 하니, 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채스터티가 속닥거렸다.
“있지. 난 딱히 수장이 되고 싶지 않아.”
이불을 뒤집어쓴 세드릭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채스터티는 흘끗 그편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난 정말로 어머니의 후계자가 되고 싶은 생각 요만큼도 없다니까? 너도 알다시피 난 가문의 영광이나 가문의 이익에 콩알만큼도 관심 없어. 그러니 하고 싶으면 네가 해.”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냐. 게다가 넌 시키면 거절하지도 않을 거잖아.”
이불 속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스터티는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다소 제멋대로긴 해도 기본적으로 채스터티는 분란을 기피하는 성정이었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가문의 수장이 되길 권하고 강요한다면, 오가는 설전이 골 아파서라도 수장직을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다.
“넌 왜 그렇게 수장이 되고 싶어?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
“수장이라도 되지 않는다면 나를 자일스로 인정해 주겠어?”
“남한테 인정받는 게 그렇게 중요해? 누가 뭐래도 넌 어머니의 아들인걸.”
“넌 몰라.”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세드릭이 몸을 둥글게 말았다. 공처럼 말린 이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채스터티가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에서 챙겨 온 우유와 빵을 협탁에 올려 둔 뒤 방을 나서려는 찰나,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참, 아까 같은 말은 되도록 하지 마.”
채스터티가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어머니의 딸이 아니고, 설리번이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라는 거. 나나 설리번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아무렇지도 않지만, 어머니는 아닐걸. 그렇잖아도 너를 편애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늘 노심초사하는 분이잖아. 실은 어머니에게 우리 모두 별다르게 특별한 존재가 아닌데도.”
복도를 향해 열렸던 문틈이 다시금 좁아졌다. 어두운 방 안에 길게 그림자를 그리던 빛도 점차 빠듯해졌다.
“어머니께 그런 식으로 말하면 너만 피곤해질 거야. 아직 독립하려면 멀었는데, 괜히 벌써부터 어머니의 미움을 살 필요는 없잖니?”
이윽고 문이 닫혔다.
세드릭은 계속해서 아버지를 찾았다.
바바라는 떠나간 남편만 찾는 어린 아들이 몹시 어려웠다. 내내 함께 살긴 했으나, 기실 세드릭을 키운 것은 팔 할이 유모고, 나머지는 에드윈이었다. 아들과 별다른 추억조차 쌓지 못했던 바바라에게 심리적으로 불안한 아들은 갈라피우고스의 일곱 가지 난제보다 더한 난제였다.
하루는 바바라가 드물게 외출하는 날이었다. 소녀 적 제법 친밀했던 그리젤다 솔의 부고를 접한 당일이었다.
“꼭 아버지를 데려오셔야 해요.”
세드릭은 바바라를 마중하며 그리 말했다. 바바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쫓기듯 저택을 나섰다. 오래간만에 맞는 칼바람이 유독 아렸다.
장례식은 초라했다. 그리젤다 솔의 어마어마한 위명에 걸맞지 않은 규모였으나, 생전에 돈을 버는 족족 탕진하던 벗의 모습을 떠올리면 대강 이해되었다. 한때 어울렸다고 하지만, 근 10년은 연락조차 하지 않았던 애매한 관계였다. 바바라는 장례에 참석한 것만으로 언젠가 벗이었던 관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바라는 그리젤다 솔의 둘째 딸을 만났다.
“지금까지 반편이 노파 밑에서 자랐답니다. 한데 그리젤다가 죽어 다달이 나오던 양육비도 끊길 테니, 이젠 맡아 줄 사람이 없지요.”
“아멜리아 베가는 무어라고 합니까? 헤스터를 도제 삼았으니, 자매를 전부 받아들일 만도 한데요.”
“장례에도 참석하지 않은 사람이 저런 어린아이를 또 맡겠습니까? 그리젤다의 빚 대신으로 팔려 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죠.”
바바라는 유심히 아이를 살펴보았다. 그리젤다를 닮은 얼굴에 왜소한 체격을 지닌 어린 소녀. 주변의 수군거림이 들리지도 않는지 어미의 관만 내려다보는 표정이 사뭇 울적했다.
바바라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몇 살입니까?”
“일곱 살이라던데요.”
일곱이면 세드릭보다 한 살이 많았다. 또래나 다름없었다.
바바라는 지체 없이 확언했다.
“내가 맡겠습니다, 저 아이.”
요사이 세드릭은 돌아오지 않을 아버지만 찾고 있었다. 에드윈의 자리를 대신할 자신이 없던 바바라는 세드릭에게 더욱 단단한 유대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위로 두 명의 남매가 있어 괜찮으리라 여겼으나 아니었다. 저 아이, 눈치는 빠르지만 자기 자신에게만 심취하는 설리번이나, 최근 들어 급격히 사이가 냉랭해진 채스터티보다는 훨씬 벗으로서 알맞을 것이다.
적어도, 당시의 바바라는 그렇게 확신했다.
* * *
세드릭이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바바라를 응시했다. 고작 여섯 살 된 아이의 눈빛이라기엔 지나치게 써늘했다.
“아버지는요?”
바바라는 차마 어린 아들을 마주하지 못했다.
“이 아이는 나의 벗이었던 그리젤다 솔의 둘째 딸이란다. 앞으로 함께 지낼 테니 친하게 지내렴. 이름은…….”
바바라는 그제야 도제로 데려온 아이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감한 기색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어색한 침묵만 감도는 가운데, 아이가 조그맣게 말했다.
“디아나 솔이에요.”
“그래, 디아나. 이름은 디아나야. 알았지?”
바바라가 애써 명랑하게 꾸며 낸 얼굴로 삼 남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예상했듯 누구도 고분고분 아이를 반기지는 않았다. 비딱한 시선으로 디아나를 쳐다보는 설리번이나, 호기심 그득한 표정으로 연신 얼굴을 들이대는 채스터티는 그나마 나았다. 바바라는 금방이라도 눈앞의 아이를 해칠 듯 흉흉한 기색의 세드릭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리젤다 솔이라면 피터스트의 위대한 마녀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럼 얘도 그리젤다 솔처럼 위대한 마녀가 되는 건가요?”
채스터티가 들뜬 얼굴로 물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란다.”
“제가 이 아이의 미래를 보면 알 수도 있죠.”
“보고 싶은 미래만 볼 수는 없다고 내가 이르지 않았니? 그리고 우리가 보는 미래는 몹시 단편적이기 때문에 함부로 미래를 재단할 수는 없단다.”
바바라는 상냥히 대꾸하며 세드릭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는 올해로 일곱 살이야. 세드릭보다 한 살이 많지? 앞으로 세드릭은 디아나와 함께 수업할 테니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구나.”
세드릭은 말없이 등을 돌렸다. 제 방으로 돌아가는 걸음걸이가 자못 신경질적이었다. 염려하는 눈으로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바바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리번. 채스터티. 디아나에게 빈방을 내어 주겠니? 식사하기 전에 저택도 구경시켜 주면 좋겠구나.”
“네. 어머니.”
채스터티가 쾌활하게 말했다. 바바라는 곧 지친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오래간만의 외출이 달고 온 피로가 주렁주렁 그림자마다 매달리는 듯했다.
그렇게 바바라가 시야에서 멀어졌을 무렵, 설리번이 한가롭게 손톱이나 매만지며 물었다.
“혹시 내 소포 못 봤어?”
디아나는 슬며시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으며 눈치만 살폈다. 채스터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무슨 소포인데?”
“모르면 됐어.”
설리번은 무심히 디아나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갔다. ‘모르면 됐어.’ 금방 설리번의 말을 과장되게 흉내 내던 채스터티가 별안간 디아나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여태껏 움츠려 있던 디아나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자. 방으로 안내해 줄게.”
채스터티가 씩 웃었다.
“아니, 디아나. 그게 아니라…….”
바바라가 곤란한 얼굴로 마법을 부렸다. 그러자 여태 한 글자도 적지 못했던 디아나의 만년필이 저절로 움직이며 수려한 필체를 그려 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디아나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송해요.”
“아직 아바도어를 배우지 못했니?”
디아나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바라는 헛기침으로 당혹스러운 기색을 애써 감추었다. 디아나를 이해했다기보다는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자일스를 비롯한 정상적인 마법 가문이라면 여섯 살이 되기 전에 아바도어를 완벽하게 익히게 하므로, 그녀의 당황은 일견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 일단은 아바도어부터 익히는 것이 좋겠구나. 아바도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통용되던 마법 언어라서 이걸 모르면 마법을 배울 수가 없어.”
바바라는 서재를 뒤져 마법 언어 기본서를 찾아냈다. 다행히도 세드릭이 2년 전에 익힌 책이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디아나는 눈을 반짝이며, 이어지는 스승의 설명을 귀담아들었다.
한편, 세드릭은 조용히 두 사람의 모습을 관망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갈라트리아 수정 기도문을 전부 떼고도 남았을 시간이지만, 바바라는 기본적인 지식조차 갖추지 못한 디아나를 돌보느라 세드릭의 진도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실제로 세드릭이 펴 놓은 책은 수업이 시작된 이후로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다.
세드릭은 입 안 여린 살을 깨물며 짜증을 내리눌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짢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대신으로 데려온 웬 여자애는 소심한 성격만큼이나 마법 실력도 엉망진창이었다. 자신보다 한 살이나 많으면서,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서 무얼 했는지 모르겠다. 바바라가 불러 주는 기도문을 한 자도 적지 못하고 벌벌 떨어 대는 디아나를 목격했을 때, 세드릭은 한심함에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똑똑.
그때, 전서구가 부리로 유리창을 두드렸다. 즉시 수업을 중단한 바바라가 과히 반색하며 창문을 열었다. 전서구가 전하는 편지를 읽는 내내, 그녀의 낯에도 환한 미소가 점점이 피어났다.
최근 바바라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옆자리는 언제나 아버지의 몫이라고 여겨 왔던 세드릭에겐 지극한 충격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리란 설리번의 말이 그제야 뼛속까지 와 닿았으나, 이제 와 세드릭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돌아오게 할 수도 없고, 어머니의 연애를 방해할 수도 없었다. 고작해야 아버지 아닌 사람과 연애하지 말라며 난동 부리는 수밖에 없었지만, 세드릭은 자신의 난동이 바바라에겐 그저 골치 아픈 말썽거리 정도라는 걸 경험으로 알았다.
그러니 낯선 남자의 편지에 일희일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조용히 감내할 뿐이었다. 어머니의 마음이 자연스레 식기만을 기다리며.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세드릭, 네가 디아나에게 간단히 아바도어를 설명해 주겠니? 어떻게 발음하는지만 알려 주면 충분하단다.”
바바라가 묘하게 들뜬 어조로 말했다. 세드릭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턱을 넘기 전 마지막으로 서재를 돌아보았을 때, 바바라는 입가에 미소를 건 채로 누군가에게 열심히 답장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세드릭의 눈에 아프게 박혔다.
“저기…….”
불현듯 디아나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바바라가 빌려준 기본서를 품에 안고서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겨우 말을 건넬 용기가 생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소리는 채 이어지지 못했다.
세드릭은 냉랭하게 디아나를 지나쳤다. 시선조차 주지 않는 철저한 무시였다. 뒤편에 덩그러니 남겨진 디아나는 책만 꼭 껴안은 채 고개를 떨구었다.
며칠 뒤, 세드릭은 2층 응접실에서 독서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사위가 유독 소란스럽기에 눈을 떠 보니 난장도 그런 난장이 아니었다.
“꺄악!”
디아나라는 여자애는 빨간 머리채에 불티를 붙인 채로 어쩔 줄 몰라 했고, 채스터티는 그 뒤에서 배꼽을 부여잡고 있었다. 한눈에도 채스터티의 장난임이 분명했다.
“세드릭! 얘 좀 봐! 너무 웃기지 않니?”
채스터티가 깔깔대며 웃었다. 세드릭은 얼굴을 찡그리며 진절머리를 냈다. 바바라가 이런 소란을 용납할 리 없으니, 그녀가 외출한 틈을 타서 이런 유치한 장난을 치는 게 틀림없었다.
“퍽이나 재밌네.”
세드릭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릴 생각도 없거니와, 채스터티는 본디 말릴수록 불타는 인물이었다. 채스터티의 장난에는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편이 가장 좋았다. 저렇듯 휘말려 버리면 답이 없었다. 그러니 저 여자애는 탓하려거든, 불티를 잠재우는 간단한 마법조차 부리지 못하는 스스로를 원망하는 편이 나았다.
아직 잠이 덜 깬 세드릭이 비틀거리며 책을 찾는 도중이었다. 울먹거리며 머리에 붙은 불씨를 떼어 내려 안간힘을 쓰던 디아나가 불현듯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허우적대며 뻗은 팔이 탁자를 넘어뜨리자, 탁자에 놓여 있던 책이 그만 벽난로 속으로 빠져 버렸다.
“어머나.”
채스터티가 양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세드릭이 기함하며 벽난로에서 건져 올린 책은 이미 반절이 새카맣게 타 버렸다. 나머지 절반조차 까맣게 그을려서 활자를 제대로 식별할 수조차 없었다. 서적을 귀히 여기는 바바라가 안다면 크게 노할 일이었다.
“그거 복원하려면 꽤 힘들겠는데? 어머니한테 가져가면 혼날 테니 설리번한테 부탁해 봐.”
채스터티가 마치 남 일 얘기하듯 말했다. 일순 욱한 세드릭이 신경질적으로 그녀에게 꽃병을 던졌다. 물론 마법이었다. 마찬가지로 마법으로 응수한 채스터티가 이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기세로 웃어 대기 시작했다.
세드릭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완전히 돌았어.”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자라났지만, 세드릭은 도무지 채스터티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런 머리에 클레멘틴 자일스의 예지가 깃들었단 사실이 통탄스러울 따름이었다.
세드릭은 그리 생각하며 뒤돌아섰다. 그곳에는 잠시 잊혔던 디아나가 울상으로 책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저기, 내가 정말로 미안해…….”
한참을 머뭇거리며 내놓은 말이란 그게 전부였다. 세드릭은 너무도 한심스러운 나머지 신랄하게 비꼬고 말았다.
“세상에 너처럼 쓸모없는 마녀는 처음 본다.”
그것이, 세드릭 자일스가 디아나 솔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세드릭 자일스는 디아나 솔이 싫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저택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사실이었다. 세드릭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엔 아직 미숙한 나이였고, 설사 감출 줄 알더라도 굳이 감춰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었다. 대저 마법사란 족속은 순간순간 욕망에 충실한 이들이었으므로.
그러니 세드릭이 디아나를 싫어한다고 그를 타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디아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바바라 자일스뿐이었다. 가족 아닌 사람에겐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는 설리번은 역시나 디아나에게 무관심했고, 생전 처음으로 장난다운 장난을 칠 수 있게 된 채스터티만이 디아나를 웃으며 대했으나 기실 정상적인 호감이라기엔 여러모로 무리였다.
디아나가 자신을 대놓고 싫어하는 세드릭과, 허구한 날 이상한 희롱이나 해 대는 채스터티를 피해 바바라에게 매달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스승님. 밤이 무서워요. 어둠 속에서 절름발이 괴물이 나오지는 않을까요?”
바바라는 품을 파고드는 디아나가 마냥 가여웠다. 디아나를 저택으로 데려온 것이 오로지 아들만을 위한 선택이었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디아나에게 얼마간의 부채감을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리젤다를 전혀 닮지 않은 연약한 아이였다.
부모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던 설리번이나 채스터티, 혹은 만성적인 결핍으로 몸부림치는 세드릭보다는 훨씬 쉬운 상대였다. 디아나는 아주 조금의 애정으로도 만족했다. 늘 편지를 주고받는 언니의 존재가 어린 디아나를 단단히 받쳐 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한 번 더 웃어 주고, 한 번 더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다. 바바라는 디아나가 세드릭의 냉대로 힘겨워하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세드릭을 야단치지도 못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너무도 어려워한 나머지, 자꾸만 비뚤어지는 세드릭을 어쩌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했다.
혹여 싫은 소리 했다가 아주 엇나가 버리면 어쩌나. 괜한 말을 했다가 헛된 기대만 품게 하면 어쩌나. 그런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며 간간히 지나가듯 말을 흘리는 것이 전부였다.
“디아나에게 친절히 대해 주렴.”
하지만 짐작했듯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채스터티가 그녀의 말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면, 세드릭은 디아나를 두둔하는 바바라 때문에 도리어 미워하는 마음만 더욱 키워 갔다. 바바라는 세드릭이 늘 애정을 갈구하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또래의 여자아이만 챙기는 것만으로도 세드릭의 눈에 디아나는 족히 눈엣가시였다.
그렇게 미워하는 마음이 자라나다 못해, 어느 날은 식사 자리에서 대놓고 표독스러운 말을 내뱉기까지 했다.
“디아나 솔. 너는 양심도 없구나. 어머니께서 동정으로 널 거두셨음을 안다면, 적어도 한 사람 몫은 해야지. 지금 너는 오히려 자일스의 이름에 먹칠하고 있다는 걸 몰라?”
그날은 디아나가 마법을 연습하다가, 실수로 스승의 머리끝을 태운 날이었다. 그럼에도 제자를 탓하지 않는 바바라의 자비로운 태도로 조금 기분이 나아지려던 찰나, 세드릭의 말소리가 칼날처럼 디아나의 마음을 찌르고 들어왔다. 차게 가라앉은 식당에는 홀로 식사에 열중하는 설리번의 포크 소리만이 조용히 울릴 뿐이었다.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채스터티가 짓궂게 말했다.
“베가의 낙뢰를 내리는 네가 할 말은 아니잖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세드릭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채스터티는 어깨만 으쓱했다.
“어머,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어? 할아버지들이 항상 너한테 그러잖아. 넌 자일스의 아이가 아니라, 베가의 아이라고. 어머니가 계시니 더한 말을 못 할 뿐이지, 실제로는 방금 네가 한 말을 너한테 하고 싶어 할걸?”
“방금 내가 한 말이 뭔데.”
“어…….”
채스터티는 바바라의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그렇잖아도 싸늘하던 분위기가 한층 더 얼어붙은 걸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세드릭. 잠깐 나 좀 보자꾸나.”
바바라가 나직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 대던 세드릭이 말없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세드릭은 문턱을 넘는 중에 채스터티를 날카롭게 흘겨보았지만, 어머니에게 야단맞지 않아 신이 난 채스터티는 혀를 비죽 내밀며 되레 세드릭의 약을 올렸다.
모자가 향한 곳은 식당에서 멀리 떨어진 응접실이었다. 아들을 반대편 소파에 앉히고도 한참을 고뇌하던 바바라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세드릭. 도대체 디아나에게 왜 그러는 거니?”
“제가 왜요?”
세드릭이 눈을 내리뜨며 반문했다.
“일부러 디아나에게 못된 말만 골라 하잖아. 대체 디아나가 무얼 잘못했길래 그래.”
“마법을 연습한다면서 사고만 친 게 벌써 일곱 번이에요. 그러면서 마법은 하나도 늘지 않았다는 건 어머니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디아나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잖니.”
“일부러 그러는 줄도 모르죠. 어머니께선 한 번도 그 애를 탓하신 적이 없잖아요.”
오히려 감싸 주면 감싸 주었지.
세드릭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말을 삼켜 냈다. 당황하여 입술만 벙긋거리던 바바라가 이내 관자놀이를 누르며 토로했다.
“왜 그렇게 비뚤게만 생각해. 디아나는 가엾은 아이야.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 주면 큰일이라도 나니?”
“……그러는 어머니께선 언제부터 그렇게 베푸는 분이셨어요?”
“뭐?”
세드릭은 피가 밸 정도로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 내뱉는 말소리가 도리어 자신을 해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제가 울 때는 항상 자리를 피하셨잖아요.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할 때마다 유모를 부르셨잖아요. 제게는 그렇게 박하신 분이 어째서 그 애에겐 그토록 자비로우세요?”
바바라는 황망히 아들을 바라보았다. 세드릭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입에서만 맴도는 아우성이 소리 없는 외침이 되어 바바라를 난도질했다. 그녀는 아들의 절규가 너무도 버거웠다. 늘 그랬듯 아들의 서러운 시선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세드릭. 왜 에드윈을 따라가지 않았니?”
바바라가 사뭇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라면 네가 원하는 걸 전부 들어줬을 텐데. 나는 네가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줄 수가 없어.”
세드릭은 끝없는 애정을 갈구했으나, 바바라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사랑을 퍼붓는 대상은 자식이 아니기에, 영원토록 아들의 원을 들어주지 못할 것이었다.
바바라는 아들이 외롭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바바라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마주하며 세드릭은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참담했다.
촛불 하나 켜 놓은 방이 자못 어두웠다.
세드릭은 침대에 얌전히 누운 채로 유모를 올려다보았다. 유모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자장가가 오늘따라 유독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 아직 안 졸린데.”
“그래도 주무셔야지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셔야 한다면서요.”
유모가 세드릭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세드릭이 도리질했다.
“하지만 진짜 안 졸리단 말야.”
“도련님도 참. 제가 어떻게 하면 착하게 잠드시겠어요?”
“조금만 더 공부하다가 잘래.”
“안 돼요. 지금 주무셔야 얼른 자라시지요. 대신 따뜻한 우유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그럼 잠이 잘 오실 거예요.”
“아냐. 됐어.”
토라진 세드릭이 반대편으로 누웠다. 유모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아이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 드릴까요?”
“……안아 줘.”
“네?”
조용히 일어나 앉은 세드릭이 양팔을 벌렸다.
“안아 줘, 유모.”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던 유모가 조심스럽게 세드릭을 끌어안았다. 넉넉한 유모의 품에 세드릭의 작은 몸이 따뜻하게 묻혔다. 세드릭은 계속해서 유모의 품을 파고들었다.
“여태껏 많은 아이들을 돌봤지만, 도련님처럼 어리광이 많은 분은 처음이에요.”
“그래서 싫어?”
“에이. 그럴 리가요.”
유모는 세드릭의 등을 토닥이며 자장가를 읊조렸다. 세드릭의 눈이 차츰차츰 감겼다.
유모의 품은 늘 따뜻하다. 아버지의 품도 그랬다. 어머니의 품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유모의 품이 따뜻하고 아버지의 품도 그러했으니, 어머니의 품도 따뜻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렇듯 눈을 감으면 유모의 품이 아버지의 품이 되고, 또 어머니의 품도 되었다.
세드릭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혼몽한 가운데 남몰래 간직했던 부끄러운 소원이 잠결에 샘솟았다.
언젠가.
언젠가는 말하지 않아도 날 안아 주는 사람이 나타났으면…….
* * *
세드릭이 여덟 살 되던 해.
디아나가 바바라의 도제로 들어온 지도 어언 2년이 지났지만, 둘의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세드릭뿐만 아니라 채스터티나 설리번도 마찬가지였다. 채스터티는 여전히 고약한 장난을 즐겼고, 설리번은 변함없이 디아나의 존재에 무관심했다. 삼 남매와 디아나의 관계를 개선시키려 무던히 애쓰던 바바라는 오래지 않아 새로운 사랑에 빠져 아이들을 잊고 지냈다.
채스터티가 디아나의 이상스러운 징후를 발견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얘. 디아나 수상하지 않니?”
“뭐가.”
“요즘 툭하면 다락에 처박혀 있어. 거기서 뭘 하는지 당최 모르겠다니까?”
채스터티는 디아나의 일탈이 퍽 궁금한 모양이지만, 세드릭은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세드릭은 매일같이 디아나와 같은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족히 짜증스러웠다.
근 2년간 디아나가 나름대로 열심히 매진한 덕분에 진도를 많이 따라잡았으나, 기본적인 자질의 차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했다. 세드릭이 숨 쉬는 것처럼 쉽게 부리는 마법을 디아나는 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바바라는 몹시 난감해했고, 디아나는 죄인처럼 고개만 숙였다. 그리고 늘 반복되는 자책과 연민의 쳇바퀴가 세드릭은 소름 끼치도록 지겨웠다.
‘난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익히고 싶은데.’
세드릭은 하루빨리 훌륭한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항상 놀 궁리만 하며 공부를 게을리하는 채스터티는 예지를 지녔다는 점을 제하면 그다지 훌륭한 마녀가 아니었다. 디아나처럼 기본적인 마법도 버벅대는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만 어렵고 복잡한 이론으로 들어가면 금세 배움의 깊이가 바닥났다. 그러니 세드릭이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훌륭한 마법사가 된다면, 그가 바바라의 뒤를 잇는 것에 이견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러나 바바라는 수업 시간 내내 디아나의 잘못된 마법을 교정하느라 바빴다. 더구나 수업 시간 외에 유일하게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식사 시간에도 수업에서 끝내지 못했던 디아나의 질문에 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드릭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알고 싶었지만, 바바라에겐 그런 여유가 없었다. 전부가 디아나의 몫이었다.
그래서 세드릭은 여전히 디아나가 싫었다. 눈에 보이는 격차가 빤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능력 본위의 마법 사회에서 아직도 저런 모자란 도제를 끼고 사는 어머니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젤다 솔은 1년간 헛짓한 모양이야. 어쩌다 그런 위대한 마녀가 너 같은 실수를 낳은 거지?”
돌아봐 주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애증, 혹은 어머니의 관심을 독차지한 디아나를 향해 모난 감정은 그렇게 표출되었다. 천성적으로 예민한 세드릭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상처 입는지 잘 알았다. 그를 향해 쏟아지던 원로들의 비난, 바바라의 무감한 눈총, 채스터티의 수많은 실언. 세드릭은 그대로 디아나에게 반복했다.
디아나가 상처 입길 바랐다. 그래서 영영 자일스를 떠나길 바랐다.
“너 지금 되게 추한 거 아니? 나한테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하지만 원로들이 바라듯 세드릭이 순순하게 고개 숙이지 않은 것처럼, 디아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뭐?”
“너 스승님이 날 예뻐하니까 질투하는 거잖아. 그럼 나한테 이러지 말고 가서 스승님께 말해. 제발 널 사랑해 달라고.”
디아나는 더 이상 밤마다 눈물짓던 아이가 아니었다. 마녀들이 습관처럼 짓는 조소가 어느덧 그녀의 입가에도 자리 잡았다.
“맞다. 스승님은 널 부담스러워하시지?”
세드릭은 디아나가 더욱 싫어졌다.
하루는 디아나가 세드릭에게 말을 걸었다.
“설리번 어디 있는지 알아?”
세드릭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 채로 묵묵부답했다. 얼마간 그를 지켜보던 디아나가 성큼성큼 다가와 책을 빼앗았다. 세드릭의 날 선 시선이 곧바로 디아나를 향했다.
“설리번 어디 있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세드릭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며 마법으로 책을 도로 가져왔다. 하지만 디아나는 오늘따라 완고했다.
“1시간 전에 너랑 설리번이 얘기하는 거 봤다고 유모가 그랬어. 괜히 나한테 알려 주기 싫어서 모르는 척하는 거라면 관둬. 나는 스승님 명령으로 설리번에게 과제를 채점받아야 하고, 만약 네가 이렇게 계속 방해하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가만있지 않으면.”
“스승님께 그대로 말할 거야. 네가 설리번이 어디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고.”
디아나가 냉정하게 말했다. 세드릭은 말없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분하게도 바바라는 디아나의 말을 믿을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저택의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때, 문이 급하게 열렸다. 휘적거리며 이편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설리번 자일스였다.
“세드릭. 내 택배 봤어?”
“왜 다들 자꾸 나한테 이래? 가서 유모한테 물어보든가!”
세드릭의 역정을 익숙하게 받아넘긴 설리번이 재차 물었다.
“다른 사람들한텐 다 물어봤어. 너 하나 남았단 말야.”
“얘한테도 물어본 거야?”
세드릭이 디아나를 턱짓했다. 그제야 디아나를 알아본 설리번이 자그맣게 탄식했다.
“너 혹시 내 택배 봤어?”
“아니…….”
“세드릭. 너는?”
“못 봤다고!”
설리번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택배가 있을 만한 장소를 머릿속으로 물색하는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고민은 얼마 가지 못했다.
“저기…….”
디아나가 그의 눈치를 보며 얇은 공책을 내밀었다. 얼결에 공책을 받아 든 설리번이 디아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디아나는 고개를 숙이며 자그맣게 말했다.
“스승님께서 채점받으라고 하셨는데…….”
“나한테?”
설리번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공책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가 채점하는 동안 세드릭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디아나에게 물었다.
“너 뭐 해?”
“……내가 뭐.”
“얘가 너 잡아먹어? 어머니 앞에서도 내숭이더니, 이젠 설리번한테도 그래?”
분위기가 애매해졌다. 슬그머니 고개를 든 설리번이 세드릭과 디아나를 갈마보았다.
“너네도 참 징그럽다. 지금 이렇게 싫어하다가 나중에 눈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세드릭이 얼굴을 구겼다. 설리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래 사랑과 미움은 한 끗 차이랬어.”
“누가 그딴 망언을 했는데?”
“누구긴 누구야. 이번엔 제레미 몰드와 사랑에 빠진 어머니께서 남기신 명언이지.”
바바라의 새로운 연인인 제레미 몰드는 본디 그녀와 앙숙지간이었다. 마법공회에서 만날 때마다 설전을 벌이던 상대와 어쩌다 사랑을 나누게 되었는지, 세드릭을 포함한 삼 남매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랑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는 하지만, 세드릭의 눈에 사랑이란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제는 삿대질하던 사람에게 오늘은 사랑을 속삭일 수 없었다.
세드릭이 복잡한 표정으로 침묵하는 사이, 설리번은 디아나에게 공책을 돌려주었다.
“마지막 문제가 틀렸어. 나시마르크 사탑의 기울기를 잘못 계산한 것 같은데.”
“아, 기울기를……. 고마워.”
“됐어.”
스치듯 지나가던 설리번의 시선이 다시금 디아나에게로 돌아왔다. 잠시간 그녀를 쳐다보던 설리번이 물었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였지?”
일순 디아나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입술만 벙긋거리던 디아나가 이내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설리번이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나 귀한 이름인가? 알려 주기 싫을 정도로? 놀랍네.”
“나는 아직까지도 이름을 못 외운 네가 더 놀라워.”
세드릭은 혀를 끌끌 차며 다시 책을 펼쳤다.
“그래서 쟤 이름이 뭔데?”
“디아나 솔.”
“아. 다이앤인지 디아나인지 헷갈렸는데. 그래도 반은 맞혔네.”
“그건 그냥 못 맞힌 거야.”
세드릭이 뚱하게 대꾸했다. 설리번이 피식거리며 세드릭의 머리를 흩트렸다.
“걱정 마라. 네 이름은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
“손 떼.”
“혹시나 내 택배 발견하면 말해 주고.”
설리번은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세드릭이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좀 씻어. 냄새나.”
물론 설리번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지만.
세드릭은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활자는 그저 눈앞에서만 맴돌 뿐 도통 머릿속으로 들어올 생각을 안 했다. 결국에는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어 버렸다.
근래 설리번이 수상했다. 원래부터 수상했지만, 요즘은 더 수상해졌다. 보통 이런 기미는 채스터티가 귀신같이 알아챘는데, 요새 디아나의 뒤를 쫓느라 바쁜 것인지 세드릭이 먼저 알아 버렸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아 버렸으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저택으로 배달되는 정체 모를 택배와, 야심한 시각마다 정원으로 산책을 나가는 설리번. 툭하면 끼니도 거를 정도로 방에만 처박혀 있는 설리번과 산책은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도대체 뭘까. 무얼 꾸미고 있는 걸까.
머릿속으로 상상을 이어 가던 세드릭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물어본다고 알려 줄 사람도 아니거니와, 관심을 가져서 좋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세드릭은 공연한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남의 일에 참견했다가 좋은 꼴 못 본다는 건 마법 사회의 오래된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며칠 뒤, 설리번의 비밀이 낱낱이 밝혀졌다.
“안 돼! 와조스키!”
설리번이 부재하는 아주 평범한 점심 식사였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뒤이어 식당의 문이 벌컥 열리기에 모두의 시선이 그편으로 향했다.
그리고 모두가 돌처럼 굳어 버렸다.
[맛있는 냄새!]
문 앞에 황망히 선 설리번과, 공중에서 제비처럼 날아다니는 손바닥만 한 초록 생명체.
“요정?”
디아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설리번이 초록색 요정을 황급히 틀어쥐고, 바바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설리번. 너 그거……!”
“아녜요, 어머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너 지금 손에 든 게.”
바바라가 다가가는 만큼 설리번도 뒷걸음질했다. 하지만 대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설리번의 손아귀에 꽉 붙들려 숨이 막혔던 요정이 죽기 살기로 그의 손을 꽉 깨물어 버린 것이다.
“악!”
그새 허공으로 포르르 날아오른 요정이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잖아!]
“아, 안 돼…….”
설리번의 낯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모두가 말을 잃은 사이, 이상하게 조용했던 채스터티가 부들거리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부르짖었다.
“요정, 요정이잖아! 세상에! 진짜 요정이야, 어머! 너 잠깐 이리 와 볼래? 착하지? 응?”
좌절하는 설리번, 다그치는 어머니, 식탁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채스터티, 그리고 흉악한 마녀의 손길을 피해 다급히 날갯짓하는 초록색 요정까지.
세드릭은 한숨을 내쉬며 냅킨을 대강 접어 식탁 모퉁이에 올려 두었다. 오래간만에 저택이 시끄러워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와조스키는 엘가 숲의 요정이에요.”
바바라가 호통을 치고 난 뒤에야 설리번은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때는 석 달 전,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홀연히 저택에서 사라졌던 설리번이 향한 곳은 북서쪽 국경 지대였다. 원래는 얌전히 국경 마을에만 머물 계획이었지만, 계획은 본디 틀어지고서야 가치를 발하는 법이므로 설리번도 뒤늦게 계획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호기심에 마을을 벗어났다가 엘가 숲에 잘못 든 것이었다.
엘가 숲은 잉그람과 반제의 국경에 걸친 드넓은 삼림으로 고대부터 요정의 주된 거주지였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것도 전부 옛날이야기. 인간 왕국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 기술에 힘입어 차츰 영향력을 넓혀갈수록 요정들의 터전인 숲도 점점 좁아졌고, 종내 멸종 위기에 이른 요정들은 어느 날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들은 요정들이 어딘가 존재하리라 여겼지만, 그 어디가 어디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므로 설리번이 엘가 숲에서 초록 요정 와조스키와 맞닥뜨린 것은 굉장한 우연이었다. 더구나 그는 행운까지 따랐다. 일대다수로 마녀, 마법사를 꾀어내어 그네들의 심장을 노리는 것이 보통 요정이 부리는 사특한 술수지만, 다행스럽게도 와조스키는 무리에서 낙오된 요정이었다. 요정 한 명쯤은 설리번처럼 경험이 일천한 마법사에게도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당시 와조스키는 날짐승의 공격을 받아 부상당한 상태였다. 다친 희귀종을 보니 없던 정의감도 불타오른 모양인지, 설리번은 와조스키를 몰래 저택으로 데려와 치료하기 시작했다. 여행을 다녀온 뒤로 방에서 식사하고, 또 밤마다 갑작스러운 산책을 시작한 것도 모두 와조스키를 위한 것이었다.
“설리번. 너 제정신이니?”
그리고 설명을 들은 바바라의 감상은 이러했다.
“어떻게 요정을 데려오고도 일언반구 귀띔조차 없을 수가 있어? 나는 내 집에 요정을 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어머니. 와조스키는 나쁜 요정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얌전했던 걸 보면 아시잖아요.”
[그런데 말이야, 설리. 난 이제 얌전하게 못 있겠어. 네 더럽고 조그만 방에서만 갇혀 지내려니까 내 아름다운 날개에 먼지가 쌓이는 것만 같아.]
와조스키가 날개를 털어 내며 새침하게 말했다. 설리번이 재빨리 첨언했다.
“딱 2주만 허락해 주세요. 2주 뒤에 승급 시험이 예정되어 있으니, 시험에 합격해서 와조스키를 데리고 저택을 나갈게요.”
“설리번.”
“정말이에요. 맹세코 어머니께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을게요.”
설리번이 확언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못마땅한 바바라의 시선이 와조스키를 향했다.
와조스키는 요정을 처음 보는 세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호기심이 가장 왕성한 채스터티가 자석처럼 붙어 있었고, 조금 겁이 많은 디아나가 그 뒤에, 그리고 관심 없는 척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세드릭이 멀찍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거기까지는 제법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와조스키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던 채스터티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탕을 내밀었다. 어린아이들의 영원한 우상인 랜돌프사(社)의 스물세 번째 한정판으로, 채스터티가 환장하도록 좋아하는 사탕이었다.
하지만 와조스키의 심기는 그리 편치만은 않아 보였다. 물끄러미 사탕을 쳐다보던 와조스키가 돌연 채스터티의 검지를 꽉 깨물었다. 엄살쟁이 채스터티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악! 아파!”
설리번이 황급히 와조스키를 데려갔으나, 이미 채스터티의 검지에선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놀고먹는 데만 일생을 바쳐 왔던 채스터티는 고통에 익숙하지 않았다. 돌도 씹어 먹을 만큼 억세다는 요정의 이빨에 물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피, 피! 피가 나잖아! 이거 어떡해! 누가 마법 좀 부려 봐!”
채스터티가 흡사 울 기세로 요란을 떨자, 보다 못한 바바라가 간단한 치료 마법으로 지혈을 해 주었다. 채스터티는 코를 훌쩍이며 아픈 검지를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관자놀이를 짚은 채로 어린 딸을 지켜보던 바바라가 드물게 냉정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딱 2주만이야. 그 이상은 나도 요정을 집에 둘 수가 없구나.”
바바라는 대체로 온화하지만, 한번 결정한 일은 번복하지 않았다. 그것을 잘 아는 설리번은 배가 고프다며 난리를 치는 와조스키를 한 손에, 그리고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를 나머지 손에 들고 재빨리 식당을 빠져나갔다. 설리번이 꽁꽁 숨겨 왔던 석 달간의 동거인과는 그렇게 이별하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밤이 깊은 시각. 만성적인 불면증으로 잠에 들지 못한 세드릭은 정처 없이 정원을 떠돌다가 우연히 요정과 재회하고 말았다.
“세드릭? 여기서 뭐 해?”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등장을 반긴 적 없는 설리번도 함께였다. 세드릭은 폭력적인 요정과 단둘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남몰래 안도하며 괜스레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나야 와조스키랑 산책하지. 와조스키는 평생을 엘가 숲에서만 살던 요정이라 늘 수풀과 나무를 그리워하거든.”
그러는 와조스키는 죄 없는 나뭇잎을 질겅거리느라 바빴다. 세드릭은 요정이 저토록 식탐이 강하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저러다 정원의 나무들이 죄 벌거숭이가 될지도 몰랐다.
“와조스키. 최대한 많이 먹어 놔. 2주 뒤엔 여길 떠야 되니까.”
세드릭은 금방 설리번의 말을 못 들은 체 넘기며 그의 곁에 앉았다.
“곧 승급 시험이라며.”
설리번은 곧 열여덟이 되었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하는 것이 관례이므로, 설리번이 승급 시험을 치고 독립하는 것이 별달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세드릭은 설리번이 당장 2주 뒤에 승급 시험을 치른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떨어지면 어머니께서 저 요정을 내치실 거야.”
“설마 떨어지겠어? 반편이나 떨어질 법한 시험인데.”
설리번이 키득거리며 마법으로 와조스키의 눈앞에 사과를 대령했다. 무념무상으로 비어 있던 와조스키의 눈이 금세 왕방울만 해졌다.
“독립하면 어디로 갈 건데?”
와조스키는 사과를 껴안은 채로 이빨부터 들이밀었다. 파먹는 속도가 역시 남달랐다.
“국경 쪽으로 갈 생각이야.”
“국경이라면 엘가 숲?”
“응. 와조스키를 동족들과 만나게 해 주고 싶어.”
설리번은 곰살궂게 웃으며 와조스키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제법 흐뭇한 광경이겠으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그를 10년 가까이 보아 왔던 세드릭이었다.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 당연했다.
“네가 퍽이나. 그냥 요정을 보고 싶은 거겠지.”
세드릭이 소매에 올라탄 개미를 털어 내며 빈정거렸다. 자식에게 그다지 관심 없는 바바라는 모르겠지만, 설리번은 옛날부터 요정이나 인어, 거인, 혹은 용 같은 이종족에 관심이 많았다. 다른 책과는 담을 쌓은 주제에 허구한 날 이종족 설화만 붙들고 사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뭐, 그것도 맞고.”
설리번이 순순히 인정했다.
“사실 지금까지 가문에 남아 있던 것도 혹시나 용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어. 그런데 영 가망이 없는 것 같아. 본성의 둥지는 아직도 차갑다며.”
천 년이 넘도록 용과 함께였던 자일스의 역사는 이제 종막을 맞이하는 듯했다. 제노비아 자일스의 용이었던 페넬로피가 베가의 낙뢰를 맞고 비명에 죽은 뒤로 갑작스레 맞이한, 용 없는 시대. 자일스의 방패이자 창이었던 용이 부재한 나날은 생각보다는 평화로웠으나, 본성의 둥지는 새로운 용알을 품기엔 아직 지나치게 차가웠으므로 가문의 일원들은 이대로 영영 용과 이별하는 것은 아닌지 차츰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다만 마법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그저 새로운 용을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마지막 용을 잔인하게 죽인 이자벨 베가를 원망하고 또 원망하면서.
“그래서 나는 아직도 네가 이해가 안 돼. 너는 자일스면서 베가지. 양쪽 모두 널 반기진 않겠지만, 적어도 선택할 수는 있잖아.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자일스를 선택한 거야? 그저 가문의 수장이 되기 위해서? 도대체 용이 없는 자일스에게 무슨 미래가 있다고?”
설리번이 진심으로 궁금한 듯이 물었다. 말없이 발끝만 내려다보던 세드릭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너는 요정이 왜 좋아?”
“글쎄다.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어? 내 심정을 설명해 봤자 너는 이해도 못 할 텐데.”
“나도 마찬가지야.”
그에 물끄러미 세드릭을 쳐다보던 설리번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사과의 씨앗까지 씹어 먹던 와조스키가 웃음소리에 놀라 포르르 날아왔다.
[설리. 뭐가 그렇게 웃겨?]
“아냐. 아무것도.”
설리번은 와조스키를 어깨 위로 올리고는 세드릭의 머리를 흩트렸다.
“너라면 채스터티보단 훨씬 나은 수장이 되겠지. 그 앤 내가 보기에도 정말 제멋대로라서, 채스터티가 수장이 되거든 그날이 바로 자일스의 마지막이 아닐까 싶거든.”
미약한 웃음기가 말끝마다 묻어났다. 설리번은 마지막으로 그다운 말을 덧붙였다.
“물론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지만.”
* * *
2주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반편이나 떨어진다던 승급 시험을 당당하게 합격한 설리번은 쉴 틈 없이 짐을 꾸려 떠날 채비를 했다. 바바라는 하루 정도 더 머물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자신이 확언한 2주가 있어 차마 붙잡지 못하는 듯했다.
떠나기 직전, 와조스키를 배불리 먹일 요량으로 식당에 들른 설리번은 계속해서 종이비행기를 마법으로 날려 보내 세드릭을 찾았다. 서재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세드릭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식당으로 달려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격분한 세드릭에게 설리번은 몹시 태평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1519년 가을 대삼각형의 별빛.”
“뭐?”
“1519년에 가을 대삼각형을 이루었던 가을의 별 캄페소와 처단의 별 시나폴리, 목자의 별 단돌보의 별빛이라고.”
“가을 대삼각형을 이루는 별이 무언지는 나도 알아.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세드릭은 간신히 노기를 눌러 참으며 씹어 먹듯 말했다. 설리번은 한가로이 토마토를 한입 베어 물었다.
“혹시나 나중에 수장 선거를 할지도 모르잖아. 그때 나는 1519년 가을 대삼각형의 별빛이면 된다고.”
가문의 수장 될 자가 정해지지 않을 시 마지막 수단이 선거였다. 물론 투표권자는 가문의 일원이었다. 한마디로 설리번은 훗날 선거를 하게 된다면 자신의 표를 1519년 가을 대삼각형의 별빛으로 사라며 회유하는 것이었다.
세드릭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채스터티한테도 그랬어?”
“아니. 걔는 그다지 수장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이던데.”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잖아.”
“그렇긴 한데 300년 전의 별빛은 꽤 비싸거든. 생각해 보렴. 꼭 이상한 데서 공평하신 어머니께선 재산을 정확히 삼분해서 우리에게 나눠 주시겠지만, 네 아버지는 상황이 다르잖아. 어쨌든 지금까지는 자식이 너뿐이니까.”
설리번은 남은 토마토를 한입에 삼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연히 네가 채스터티보다 훨씬 부유하겠지.”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마법사답게 아주 논리적인 귀결이었다. 이런 데 골몰하느라 허비했을 시간이 아깝긴 했지만.
잠시간 고심하던 세드릭이 진지하게 물었다.
“300년 전의 별빛은 꽤 비싸다고?”
“응.”
“누굴 머저리로 알아?”
세드릭은 헛숨을 내뱉으며 조소를 지었다.
“1519년 가을이면 대홍수가 일어난 해잖아. 그해 대홍수가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데 설마 그것도 모를까 봐?”
“……음. 세드릭, 나는 널 무시하려 했던 게 아니라.”
“그래. 행여나 모르면 이참에 크게 뜯어먹을 요량이었겠지.”
1519년 가을은 역사적으로도 의미 깊은 대홍수가 발생한 해였다. 여름의 홍수도 아니고 가을의 홍수가 얼마나 컸겠느냐 비웃는 자들이 있겠으나, 역사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밤낮 가림 없이 장대비만 쏟아짐에 가을 내내 볕 들이친 날을 손꼽았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멸망한 소국이 열 손가락을 채우고도 남았으니, 그 위용을 족히 짐작할 만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밤낮 가림 없이 장대비만 쏟아졌다’는 구절이었다. 비 쏟아붓는 하늘에 별빛이 맑을 리 없었다. 즉, 1519년 가을의 별빛은 하나같이 귀했다. 그냥 비싼 게 아니라 손에 꼽을 만큼 비쌀 것이었다.
단번에 속셈을 간파당한 설리번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 수톨베르크 거인의 유골.”
“장난해?”
“하일랜드 요정들의 노랫소리는? 이건 흔하잖아!”
설리번이 절망스럽게 외쳤다. 하지만 세드릭은 냉정했다.
“흔하다고? 이미 멸종한 요정의 노랫소리가 흔해?”
“……아니, 앞서 말한 것보다는 비교적 흔하단 말이지.”
시무룩해진 설리번을 잠시 지켜보던 세드릭이 이내 고개를 틀었다.
“좋아.”
“응?”
“좋다고.”
“뭐가? 비교적 흔하다는 내 말? 아니면 하일랜드 요정들의 노랫소리?”
“그걸로 하겠다고, 멍청아!”
참다못한 세드릭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영문 모르는 와조스키를 붙들고 이상한 춤이나 춰 대는 설리번에겐 미처 닿지 못했다. 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투표로 귀하디귀한 노랫소리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만치 행복해진 모양이었다.
“부디 수장 선거가 이루어지길!”
설리번은 그렇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퍼부으며 바삐 계약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세드릭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계약서에 서명하기 위해 펜을 집어 들었다. 작별하는 날조차 설리번 자일스는 참으로 그다웠다.
그날 저녁, 설리번은 와조스키와 함께 바바라 자일스를 떠났다.
세드릭은 이후로 오랫동안 설리번을 보지 못했다.
* * *
바바라는 이사를 결심했다.
느닷없는 결정이었으나, 굳이 반대할 만큼 몬트 켈리아의 저택에 애정을 품은 사람은 없었다. 바바라가 이사를 통보한 당일 유모와 디아나를 포함한 다섯 사람은 에든게일의 저택으로 이동했다. 천년전쟁 시기의 가문이 전국 각지 수많은 거점을 마련해 둔 덕분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저택은 무궁무진했다. 외출을 즐기지 않는 마녀의 특성상 저택의 위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점도 신속한 이사의 원인이었다.
“제레미 몰드와 대판 다투셨나 봐. 얼마나 치가 떨리시기에 이사까지 감행하시는 걸까?”
채스터티는 바바라의 연애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요정 와조스키가 떠난 이후로 한참 시무룩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
어찌 되었든 세드릭은 새로운 저택에 쉬이 적응했다. 인적 드물던 몬트 켈리아와 달리, 에든게일시(市)는 활기차되 그다지 소란스럽지 않은 교외의 주거지역이었다. 온 도시민이 교회로 몰려드는 주일만 제하면 그럭저럭 조용하게 살 수 있었다.
주일만 제한다면.
“언젠가 저 미친 종을 반드시 불태워 버릴 거야.”
세드릭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교회의 종탑을 노려보았다. 대관절 신실한 신앙과 종소리 사이에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지는 몰라도, 산티그마 교단의 교회들은 꼭 주일만 되면 미친 듯이 종을 울려 댔다. 공부에 열중하던 세드릭에겐 참으로 청천벽력 같은 소음이었다.
“잠시만 다락에 계시는 건 어떨까요? 엊그제 확인해 보니 다락의 창문이 유독 작더라고요. 창문이 작으니 종소리도 작게 들릴 거예요.”
조금이나마 덜 시끄러운 곳을 찾아 방황하는 세드릭이 안쓰러웠는지 유모가 그렇게 귀띔했다. 세드릭은 유모의 충고를 곧이들어 다락으로 향했다. 삐걱거리는 원형 계단을 수없이 밟아 올라가니 곧 칠이 벗겨진 다락문이 보였다. 숨을 몰아쉬는 세드릭의 얼굴에 곧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세드릭은 의아한 표정으로 계속 문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잠긴 문쯤이야 어떻게든 마법으로 열 수 있을 테지만, 그는 마법을 부리는 대신 귀를 문가에 갖다 대었다. 역시나, 안쪽에서 희미하게 두런대는 말소리가 들렸다.
정원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유모는 아니었다. 점심나절에 외출한 바바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채스터티나 디아나 중에 하나였다. 평소 행실로 미루어 보자면 채스터티라고 확신하겠으나, 문득 언젠가 흘려들었던 채스터티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얘. 디아나 수상하지 않니?’
‘뭐가.’
‘요즘 툭하면 다락에 처박혀 있어. 거기서 뭘 하는지 당최 모르겠다니까?’
세드릭은 문손잡이에서 천천히 손을 떼며 속삭였다.
“디아나 솔?”
그러자 안쪽에서 들려오던 말소리도 귀신같이 멈추었다. 잠시간의 침묵은 이내 우당탕거리는 커다란 소음으로 이어졌으나, 세드릭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문을 잠그고 다락에 숨어 있는 사람은 디아나였다.
“안에서 뭐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문 열어.”
세드릭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갖은 소란만 흘러나올 뿐, 당최 문이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세드릭은 마음속으로 열을 세기 시작했다. 열을 다 셀 때까지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문짝을 넘어뜨려서라도 다락에 들어갈 심산이었다.
그러나 숫자를 모두 세었을 무렵, 거의 동시에 디아나가 문을 열어젖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도대체 안에서 무얼 했는지 땀으로 범벅된 디아나는 어깻숨만 몰아쉬었고, 세드릭은 싸늘한 눈으로 그녀의 행색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대리석처럼 차던 그의 표정도 코를 찌르는 악취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냄새야?”
세드릭이 표정을 구기며 다락을 힐끔거렸다. 한낮에도 어두운 다락에는 종류가 다른 향초 열댓 개가 동시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하나만 밝혀도 족할 향초를 저렇게나 많이 밝혔으니, 독한 향기가 악취로 변질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의심이 덕지덕지 묻은 눈초리가 디아나를 향했다.
“너 여기서 뭐 했어?”
“……내가 뭘 하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세드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디아나가 방어적으로 구는 것은 예삿일이지만 오늘은 유독 더 예민하게 가시를 세웠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채스터티가 요즘 널 수상하게 여기던데. 지금 여기로 불러오면 볼만하겠어.”
요즘의 채스터티는 바바라의 연애를 캐느라 정신없었지만, 일단 채스터티는 피하고 보는 디아나가 그런 걸 알 턱이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세드릭을 노려보던 디아나가 결국 사실대로 토로했다.
“지난주에 새롭게 배웠던 마법을 연습하고 있었어.”
“지난주?”
잠시 기억을 더듬던 세드릭이 이내 감흥 없는 탄성을 내뱉었다. 지난주 디아나는 죽어 가는 불씨를 살리는 마법을 새로이 익혔다. 세드릭은 숨 쉬는 것처럼 간단히 부릴 수 있는 마법이지만, 디아나에겐 꽤 까다로웠던 모양이다. 저렇게나 향초 여러 개를 두고 연습할 정도면.
디아나는 수치심에 붉게 물든 얼굴로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다락으로 들어온 세드릭이 마법으로 향초의 불을 전부 꺼 버렸다. 창문은 이미 열려 있었으나, 이 지독한 악취가 모두 빠지려면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 터였다.
세드릭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느덧 써늘해진 갈바람이 좨치듯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종소리 멈춘 에든게일은 어느덧 고요했고, 늘 그렇듯 평화로운 정경만 내내 이어졌다.
에든게일로 이사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정말 이상하다니까요. 오늘도 정원에서 너구리 시체가 발견되었지 뭐예요?”
유모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한 번이면 우연이라 여기겠지만, 며칠 간격으로 짐승 사체가 연이어 발견되니 바바라도 비로소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관리하지 않은 지 오래된 정원에서 날짐승이 나오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야. 하지만 육식동물이 사냥한 흔적이 남았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구나. 만일 정원에 위험한 짐승이 숨어들었다면 빨리 잡아야 할 텐데…….”
바바라는 아예 날을 잡아 정원을 샅샅이 뒤졌지만, 위험한 육식동물은 발견하지 못했다. 너구리나 토끼의 몸에 날카로운 발톱 자국을 남길 만한 동물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고작해야 이빨이며 발톱이 다 빠져 죽어 가는 사냥개가 전부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밤에 창문을 꼭 잠그고 자라는 바바라의 말을 세드릭은 새겨들었다. 새로운 사건에 기세가 오른 채스터티와 달리, 세드릭은 혹 숨어들었을지도 모르는 육식동물의 존재를 단단히 견제했다. 그는 출중한 재능을 갖추었지만. 아직은 어린 마법사였다. 생명을 해치는 위험에는 단 한 차례도 노출된 적이 없을뿐더러, 누군가를 해하는 마법은 익힌 적도 부린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드릭을 둘러싼 환경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로도 꾸준히 발견되는 짐승 사체는 바바라의 근심과 채스터티의 흥미만을 돋울 뿐이었다. 세드릭은 여전히 서재와 다락을 전전하며 공부에만 몰두했다. 가끔씩 지칠 때면 멀리 국경에 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은 겨우 서너 통에 한 번꼴로 전해질 뿐이었다.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리던 답장에서조차 아버지는 몹시 말을 아꼈다.
「……아직은 돌아갈 때가 아니구나. 나는 아직 국왕과의 계약에 묶여 국경에 주둔해야…….」
세드릭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가, 돌아오겠다는 약속조차 하지 않는 아버지가 미웠다. 미우면서도 너무나 보고 싶었다. 답장을 기다리고 답장을 읽을 때마다 실망하는 것이 매번 반복되었으나, 혹시나 이번에는 돌아오겠다는 말이 있을까 봐 기대하는 것을 그만두지도 못했다.
그즈음 디아나가 이상스럽게 창백했다. 채스터티가 하도 호들갑을 떨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어제는 나를 찾아와서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혹시 도와줄 수 있냐는 거야. 그래서 무얼 도와주면 되느냐고 캐물었더니, 금세 겁먹어서 도망가는 거 있지.”
채스터티는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디아나에 대한 원망을 세드릭에게 줄줄이 토로했다. 그때, 세드릭은 거의 처음으로 디아나의 심정에 공감했다. 세상에서 채스터티 자일스를 가장 불신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디아나의 고민이 궁금한 채스터티와 달리, 세드릭은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디아나 솔이 싫었지만, 예전만큼 극렬한 감정은 적잖이 잦아든 상태였다. 에든게일에서 새로이 연애를 시작한 바바라에겐 이제 기대하는 바조차 드물었으므로, 부딪히지만 않는다면 디아나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자력으로 바꿀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도 없다는 걸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러던 어느 밤, 디아나가 세드릭을 찾아왔다. 막 잠들려던 세드릭은 건조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무래도 이번에 도움을 청할 상대는 그인 모양이었다.
“세드릭. 나를 좀 도와줄 수 있어?”
우물쭈물하던 디아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세드릭은 느지막이 대꾸했다.
“뭘.”
“먼저 약속해 줘.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내가 왜?”
세드릭의 반문에 디아나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세드릭은 짧게 조소했다.
“그리고 나보다는 어머니께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겠어? 넌 예쁨받는 도제잖아.”
“……스승님은 안 돼.”
“그럼 나는 된다는 소리야?”
디아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마냥 답문을 기다리던 세드릭은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온종일 책을 읽느라 눈이 뻑뻑하고 어깨도 저렸다. 빨리 마무리하고 그만 자고 싶은데, 저런 간단한 질문조차 대답하지 못할 만큼 무턱대고 찾아온 디아나가 몹시 짜증스러웠다.
“디아나 솔. 내가 어째서 널 도와야 하는데? 설마하니 어머니께 가르침 좀 받았다고 날 같은 동기로 여기는 건 아니지? 만약에 그렇다면 넌 정말로 분수도 모르는 거야.”
세드릭이 가시처럼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멀거니 그를 바라보던 디아나는 아무 말도 없이 비틀거리며 돌아갔다. 세드릭은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며 애써 잠을 청했다. 디아나는 예나 지금이나 거슬리는 존재였다.
이튿날. 모두 모여 아침 식사하던 도중 세드릭이 유모에게 속삭였다.
“유모. 이따가 같이 우체국에 가자.”
“에드윈 경에게 편지하시게요?”
“응.”
세드릭은 대체로 유모의 손길을 편히 여겼지만, 아버지에게 부치는 편지만은 꼭 제 손으로 해야 직성이 풀렸다. 유모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고 싶다는 둥, 언제 돌아오냐는 둥 철없는 어린애 같은 투정을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싫었을 뿐이다.
“아휴. 전서구가 가는 곳이면 참말 좋을 텐데요.”
“어쩔 수 없지. 국경은 감시가 철저하니까. 특히 아버지가 계시는 곳은 최전선이라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전서구는 다 쏘아 맞힌댔어.”
그때, 묵묵히 식사하던 바바라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디아나, 너도 헤스터에게 답장을 보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니?”
열없이 깨작거리던 디아나가 화들짝 고개를 끄덕였다. 바바라는 유모를 돌아보며 말했다.
“디아나도 데려가요.”
유모는 바바라의 명령에 복종했다. 지난밤의 앙금이 아직 가시지 않은 세드릭은 못내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굳이 불평을 쏟아 내진 않았다. 어차피 우체국은 근방이었다. 사소한 일로 아침부터 어머니와 날을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저택을 나섰다. 출근 시간이 지난 에든게일의 거리는 사뭇 한산했다. 앞장서 인도를 걷던 유모는 두 아이를 데리고 좁다란 골목으로 꺾어들었다.
“우체국은 대로에 있지 않아?”
“여기가 지름길이에요. 넉넉히 10분은 단축된답니다.”
유모가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세드릭과 디아나는 의심 없이 그녀를 따랐다. 하지만 재차 꺾어 든 길이 막다르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세드릭이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유모. 이 길이 아닌 것 같―”
일순, 뒷목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째지는 비명과 유모의 웃음소리가 차례로 귓가를 스쳤다. 몸이 천천히 기울었다. 땅이 가까웠다.
쿵.
머잖아 눈앞이 암전되었다.
“저 계집애는 뭐야? 계획에 없었잖아.”
“바바라 자일스의 도제예요. 그다지 재능 있는 애는 아니니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고요. 그보다는 세드릭 자일스가 깨어나는지나 잘 살펴봐요.”
익숙한 목소리,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뒤섞여 뜨문뜨문 들려왔다. 겨우 눈뜬 세드릭이 힘겹게 고개를 가누었다. 깜박일수록 선명해지는 시야에 차츰 낯선 풍광이 자리 잡았다.
“……누구야?”
세드릭이 가느다랗게 속삭였다. 소란하던 주위가 돌연 적막해지더니, 뒤늦은 발소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젠장, 깨어났잖아!”
“괜찮아. 저 정도면 못 움직여. 아직 어린애잖아.”
“마법을 몸으로 부려? 너는 그럴지 몰라도 얘는 의지만으로도 마법을 쓸 수 있을걸.”
생전 처음 듣는 남녀의 목소리가 난하게 엇갈렸다. 그들이 옥신각신 다투는 동안, 세드릭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간신히 움직여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더라니 아니나 다를까, 손발이 철근으로 꽁꽁 묶여 있었다.
“너희 마법사야?”
세드릭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 두께의 철근을 인간의 힘으로 구부릴 수는 없었다. 마법이 아니면 불가했다.
“그래. 마법사다.”
오른뺨에 기다란 흉터를 지닌 중년 남자가 세드릭의 눈앞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흉악하게 찢어지는 입술 사이로 누런 이빨이 드러났다.
“그러니까 허튼짓할 생각이라면 관둬. 우린 줄곧 밑바닥만 굴러온 인생이라, 너처럼 곱게 자란 도련님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거든. 물론 지금은 마법을 부리긴커녕 눈뜨고 있기도 버거울 테지만.”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냥 독한 가스를 좀 마시게 했지.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군용 가스라서 어린애 몸에는 제법 어지러울 거다.”
세드릭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까맣게 닫힌 시야가 어지럽고, 호흡조차 힘겨웠다. 어떻게든 제정신을 찾으려 생각을 가다듬었으나, 난데없이 들려오는 째진 목소리에 그조차 중단되었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만 있으면 별일 없을 테니까.”
빼빼 마른 여자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
“만약 수상한 짓하면 저 계집애부터 목을 분질러 버릴 거야. 조심해.”
“듣자 하니 저 애는 자일스 출신도 아니라며. 인질로서 가치가 있겠어?”
“그럼 지금이라도 죽여 버리든지! 어차피 필요 없잖아.”
남녀가 재차 대거리를 벌이는 사이, 세드릭은 멍하니 창가를 응시했다. 노을 지는 저녁, 유일하게 빛 들이치는 삭막한 실내에 마찬가지로 꽁꽁 묶여 있는 디아나가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입까지 틀어막혔는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몸부림을 치는 모양새가 자못 안쓰러웠다.
“너네…… 원하는 게 뭐야?”
분명 아버지께 보낼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으로 가던 길이었다. 저택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니 지금쯤 해지는 풍경을 벗 삼아 따뜻한 차라도 즐길 법하건만, 대관절 이게 무슨 사달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누구이며, 어째서 날 납치한 것인지.
또한…….
“이젠 내가 얘기할 테니까 물러서요.”
불현듯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드릭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낯선 남녀가 멋쩍게 양옆으로 갈라지고, 역광을 등에 진 사람이 차츰 다가왔다. 친숙한 목소리, 친숙한 풍채, 친숙한 체취.
어느덧 발아래 무릎 꿇은 유모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도련님. 괜찮으시지요?”
세드릭은 차마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돌처럼 굳은 세드릭을 빤히 쳐다보던 유모가 평소처럼 나긋한 손길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가만히 계세요. 가만히만 계시면 아무도 다치지 않아요.”
“……유모?”
“네. 저예요. 제가 곁에 있으니 안심하셔요.”
세드릭이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흘깃거렸다.
“저 사람들은 대체 누구야? 여긴 어디고?”
“도련님은 모르셔도 되어요. 마님께서 적절한 대가만 지불하시면, 도련님께서도 안전하게 돌아가실 수 있답니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황망하여 입을 다문 세드릭을 굽어보며 유모가 실낱같이 웃었다.
“물론 마님께서는 그리하시겠지요. 도련님은 마님의 유일한 친자이시잖아요.”
우두커니 유모를 올려다보던 세드릭이 그제야 고개를 더디 끄덕였다. 긴장인지 불안감인지 모를 감정이 온통 뒤섞여 뱃속이 곪아 드는 듯했으나, 유모가 곁에 있어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럼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다 함께 돌아가는 거지?”
몹시도 간절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유모는 줄곧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저는 마님께 도련님의 몸값을 받고 멀리 떠날 거예요.”
“돈이 필요한 거야? 어머니께서 매달 품삯을 주시잖아.”
“저의 봉급을 어찌 도련님의 몸값에 비할까요. 도련님께선 자일스의 귀한 아드님이시니, 당연히 몸값으로 억만금이 들어오지 않겠어요?”
유모는 당연한 사실을 읊듯 너무나도 범상한 표정이었다. 세드릭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뒤잇는 목소리도 자연스레 흔들렸다.
“그럼 돈 때문에 이러는 거야?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자애롭던 유모의 얼굴에서 어느새 미소가 지워졌다. 그녀는 무감한 눈으로 세드릭을 내려다보며 그의 양손을 쥐었다. 밤마다 잠 못 이루는 세드릭을 재워 주던 따스한 체온이 변함없이 전해졌다. 늘 기껍게 여겼던 체온이 어쩐지 오싹했다.
“도련님. 도련님께선 절 이해해 주셔야 해요. 지금까지 변치 않고 도련님 곁을 지킨 사람이 저 말고 또 누가 있나요? 마님께선 도련님께 관심이 없으시고, 에드윈 베가 경은 이미 옛적에 도련님을 떠나셨지요. 부모 형제도 돌보지 않는 도련님을 오직 저만이 돌보았잖아요. 진정 모르시나요?”
“아, 알아. 하지만…….”
유모는 애써 시선을 피하려는 세드릭을 억지로 붙들었다.
“도련님께서도 아셔야 해요. 세상에 사랑스럽지 않은 아이를 돌보는 것만큼 지긋지긋한 일도 없답니다.”
일순, 바르작거리던 세드릭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유모는 여전히 나긋나긋한 손길로 차갑게 굳어 버린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저처럼 배워 먹지 못한 반편이가 큰돈을 벌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어요. 이런 기회가 아니면 도대체 언제 돈을 모아서 풍요롭게 살아 보겠어요? 비록 잉그람은 떠나야겠지만, 그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지요. 어때요. 이제는 도련님께서도 절 이해하시겠지요?”
유모가 답을 재촉하듯 거듭 물었다. 그러나 세드릭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유모를 이해한다고 대답하면 다시 나를 사랑해 줄지, 다시 예전처럼 다정한 유모로 돌아올지, 그럼 지금의 치 떨리는 배신감이 사라질지. 그런 생각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었다.
“그런 헛소리가 어디 있어!”
입 막은 손수건을 마법으로 겨우 풀어낸 디아나가 별안간 일갈했다.
“결국엔 유모가 돈 몇 푼을 위해 나랑 세드릭을 납치했다는 거잖아!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해를 바라는 거야? 어쩜 그리 뻔뻔할 수 있어?”
“젠장, 저 계집애가!”
여자가 새된 목소리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개의치 않고 이번에는 세드릭을 직시했다.
“그리고 넌 바보야? 나한테는 별별 못된 말 다 했으면서, 왜 유모한테는 한 마디도 못 해? 넌 자일스잖아! 베가잖아! 나처럼 마법으로 손수건 하나 푸는 데 오래 걸리는 그런 마법사가 아니잖아! 이 사람들처럼 마법 하나 부리자고 줄줄이 주문을 외워야 하는 그런 나약한 마법사가 아니잖아! 뭐라고 해 보란 말, 꺄악!”
여태 잠자코 있던 남자가 돌연 튀어나와 디아나의 얼굴을 붙들고 뒤로 밀어뜨렸다. 의자에 묶인 채 바닥을 구른 디아나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남자는 여자에게 다른 한 손을 내밀며 무감히 말했다.
“거기 칼 좀 가져와.”
“뭐? 아, 제길! 너 때문에 주문이 끊어졌잖아!”
“입 닥치고 가져와 봐. 이 계집애 손모가지라도 하나 잘라 놔야 조용해질 것 같으니까.”
남자의 말에 디아나의 낯빛이 허옇게 질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었지만, 남자의 악력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구시렁거리면서도 순순히 칼을 건네는 여자의 손길에 더욱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하, 하지 마…….”
디아나가 바들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애끓는 시선이 남자를 지나 멀리 세드릭에게 닿았다.
‘도와줘.’
몽롱한 채로 지켜보던 세드릭은 그제야 소스라치게 놀랐다. 꿈처럼 나른하던 정경이 삽시에 차가운 현실로 자각되었다. 세드릭은 당장 마법을 부리려고 했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지만, 칼을 빼앗는 정도로 간단한 마법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순간, 유모가 세드릭을 품에 안았다. 넉넉한 품에 자그만 몸뚱이가 파묻히고, 시야가 차단되었다.
“유, 유모! 이거 놔!”
“별일이네요. 도련님께서 디아나의 편을 다 드시고.”
노래하듯 지극히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세드릭은 한가롭게 말이나 주고받을 겨를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움직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칼을 빼앗을 수도 없다.
숙련되지 못한 어린 마법사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몸을 옥죄는 철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마법으로 이어졌지만, 산란한 정신은 불완전한 마법을 맺기 마련이었다. 철근이 좀체 움직이지 않는 와중에도 디아나의 비명 소리는 높아져만 갔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나중에 돌아가면 스승에게 붙여 달라고 해라. 그때까지 출혈 과다로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만.”
남자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종내 그가 칼을 높이 휘두르는 순간, 디아나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마르고트!”
그건,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인간의 말로 옮겨 쓸 수는 있겠으나, 태생적으로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세드릭은 마법사로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끄아아악!”
갑작스러운 남자의 비명에 유모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자연스레 시야가 열린 세드릭도 그 장면을 목도했다.
‘그것’을 목도했다.
세드릭은 훗날에도 ‘그것’을 지칭할 때면 늘 망설였다. ‘그녀’라고 칭하기에는 숫양의 뿔이 마음에 걸렸고, ‘그’라고 칭하기엔 그네들에게도 성별의 구분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연히 ‘그것’에게도 지상에서 통용되는 명칭이 존재하긴 했으나, 세드릭은 언제나 정확한 명칭을 입에 담길 주저했다. 기실 세드릭뿐만 아니라 다른 마녀,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악마.
만인이 저주하고, 만인이 두려움에 숭상하는 간악한 존재.
‘그것’은 불그스름한 저녁놀을 쬐며 석상처럼 가만 서 있었다. 직립 보행하는 모습이나 검은 털로 뒤덮인 몸에는 팔이 네 개였고, 숫양의 머리와 이어지는 목 부근에는 크기 다른 두 쌍의 눈알이 박혀 있었다. 도무지 지상 생명체의 모습이 아니었다.
“끄악, 내 팔!”
그 밑에서 반쯤 잘린 팔을 끌어안고 나뒹구는 남자의 모습 따위 더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드릭은 멀거니 악마의 움직임만을 눈으로 좇았다. 뒤잇는 음성에 본능적으로 귀 기울였다.
[디아나. 이건 무엇이냐?]
그러나 디아나가 말문을 열기도 전, 악마는 몹시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몸이 묶여 있구나.]
악마는 손수 디아나의 몸을 풀어 주었다. 금세 자유로워진 디아나가 악마의 품으로 뛰어들며 흐느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한데 어찌 그리 묶여 있었느냐? 이것들은 다 무엇이고?]
“저, 저 남자가 내 손을 자르려고 했어. 돈 때문에 유모가 날 납치했는데…….”
디아나가 울먹거리며 말을 이어 나가던 찰나, 악마가 느닷없이 팔을 세게 휘둘렀다. 부지불식간에 남자의 몸이 두 동강으로 잘려 나갔다.
“……어?”
정면에서 남자의 피를 흠뻑 맞은 디아나가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악마는 귀물을 어루만지듯 소중하게 디아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날 불러서 다행이구나.]
“자, 잠깐만……. 마르고트, 이게 아니라.”
[앞으로는 걱정하지 마라.]
숫양의 얼굴이 스산하게 돌아갔다. 곧장 시선이 마주친 여자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며 뒷걸음질했다. 마법 주문을 외고 손에 잡히는 걸 모두 던져 보았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아, 악마. 악마가 왜 여기에…….”
여자는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혔다. 마지막으로 손에 집힌 촛대를 마구 휘두르는 그녀를 딱하게 응시하던 악마가 단걸음에 다가가 목을 움켜쥐었다. 악마는 쉬이 여자를 들어 올려 머리부터 아가리에 처넣었다. 속절없이 촛대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무 바닥에 금세 불씨가 옮겨 붙었다.
씹지도 않고 여자를 꾸역꾸역 삼켜 낸 악마가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디아나는 사시나무 떨듯 한없이 바들거릴 뿐이었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연신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악마는 그대로 디아나를 지나쳤다. 그가 향하는 이는 유모였다.
“아, 아냐! 오지 마! 저리 가란 말이야!”
유모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겁먹어 차마 피하지도 못하고 손만 맞잡은 채 산티그마 교단의 신을 찾았지만, 그녀를 찾은 것은 신이 아닌 악마였다. 코앞에서 악마를 마주한 유모는 그새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안 돼. 아냐. 아니야.”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하던 유모의 손에 문득 세드릭의 발목이 잡혔다. 유모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세드릭에게 매달렸다. 눈물과 애원으로 매달렸다.
“도련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제발, 제가 도련님을 얼마나 아꼈는지 잘 아시잖아요. 이대로 죽도록 내버려 두지 마세요.”
하지만 유모의 말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악마는 그녀의 발끝부터 잡아먹기 시작했다. 아가리를 쫙 벌린 채 엉금엉금 기어서 유모의 몸뚱어리를 배 속으로 쑤셔 넣었다. 발, 다리, 허리를 지나 그녀의 머리까지 죄 집어삼켰다.
길고 긴 비명이 이어졌다. 세드릭은 눈앞에서 유모가 산 채로 잡아먹히는 모습을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귓전을 메우고, 공포에 질린 눈빛에 시선이 사로잡혔다. 그리고 손.
발목을 잡은.
흰 손.
문득 토기가 올라왔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네가 그 세드릭 자일스로구나.]
악마가 속삭였다.
[디아나를 괴롭힌 너에게도 마땅한 벌을 내려야지.]
세드릭은 아직도 제 발목을 붙들고 있는 유모의 흰 손을 굽어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거듭 이해를 바라던 유모는 이제 왼손밖에 남지 않았다. 나머지는 죄 먹혀 버렸다. 악마가 무딘 이빨로 잘라 낸 손목에서 치솟는 핏물이 황혼보다 선명했다. 아직까지도 발목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오한이 들었다.
세드릭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악마는 커다란 몸으로 그를 내리누른 채 천천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선혈이 흘러내리는 이빨과 두꺼운 혓바닥이 차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지옥에서 길어오는 듯 뼛속까지 냉한 숨결.
코앞에 벌려진 악마의 아가리에서 유모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저 시커먼 배 속에 아직도 유모가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머리부터 삼키려는 듯 다가오는 입속에서 유모의 핏물이 뚝뚝 뺨으로 떨어졌다.
순간 소름이.
“그만해, 마르고트!”
갑작스레 달려온 디아나가 애써 악마의 몸을 밀어 냈다. 세드릭의 머리를 반쯤 입에 넣었던 악마가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디아나?]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디아나는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악마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대체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내가 언제 이런 짓 하랬어! 내가 언제 살인하라 그랬냐고!”
[하지만 널 납치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내가 언제 죽여 달라고 그랬어? 죽이면 안 된단 말이야! 예전부터 몇 번이고 말했잖아! 왜 내 말은 도무지 듣질 않아!”
간절한 절규였다. 디아나는 흡사 곡할 기세로 주저앉아 서럽게 울어 댔다. 황급히 세드릭에게서 떨어진 악마가 당혹스러운 손길로 디아나의 어깨를 붙들었지만, 디아나는 좀체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죽이지 않아도 됐잖아. 죽이지 않아도 날 구해 줄 수 있었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잔인하게 죽인 거야. 나쁜 사람들이지만 죽을 만큼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디아나가 몸을 웅크린 채 흐느꼈다.
“이러려고 널 부른 게 아니야. 내가, 내가 죽인 셈이잖아. 난 절대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널 부르는 게 아니었어.
설운 울음소리가 면면히 이어졌다.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선 악마와, 자책으로 괴로워하는 소녀. 그들의 뒤편에서 목조 건물을 활활 태워 가는 흉측한 불길이 기세를 더해 갔다.
멍하니 둘을 지켜보던 세드릭은 느릿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부연 연기는 그렇잖아도 어지러운 정신을 혼몽하게 이끌었다. 그리 까무룩 쓰러졌다.
세드릭이 다시금 정신을 차린 때는 야심한 밤이었다. 가만히 눈만 깜박이는 것을 채스터티가 발견하여 난리를 피우자, 바바라가 대번에 아들의 침실로 달려왔다.
“세드릭! 괜찮니? 어디 아픈 곳은 없고?”
그렇게 묻는 바바라가 되레 병자처럼 핼쑥한 안색이었다. 물끄러미 그녀를 보던 세드릭이 더디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천치야! 악당이 있으면 네 잘난 낙뢰로 천벌을 내려 줬어야지! 그건 대체 어디다 써먹을래?”
채스터티가 분한 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바바라는 흥분한 채스터티를 진정시키며 재차 진중히 물었다.
“네가 납치당했던 건 기억나니?”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바라가 얼른 세드릭을 부축하여 몸을 일으켜 주었다.
“여긴 집이야. 안심하렴. 널 납치했던 사람들은 모두 달아난 듯하구나.”
“하나는 불에 타 죽었다면서요. 게다가 유모도 죽었고!”
“채스터티.”
바바라가 채스터티에게 경고했다. 채스터티가 입을 비쭉이며 불평하는 사이, 세드릭은 조용히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리도 절절하게 매달리던 흰 손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발목을 붙들던 것은 사라졌는데, 이상하게도 유모의 체온이 잔존하는 것만 같았다.
“자세한 것은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유모는…… 아마도 살아남지 못한 것 같구나. 너희들을 많이 아껴 주었는데 참으로 미안할 따름이야. 그리고 너도 충격이 크겠지.”
바바라는 그리 말하며 사뭇 어색한 손길로 세드릭을 안아 주었다. 뜻하지 않게 어머니의 품에 안긴 세드릭이 가만히 숨만 몰아쉬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얼굴도 모르는 납치 일당을 비난하는 채스터티의 목소리는 익숙하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냈다.
그즈음 문가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불현듯 시야에 들어왔다. 한참 주춤거리며 문가를 배회하던 그림자는 다름 아닌 디아나였다. 아직 창백한 낯으로 조심스레 침실을 들여다보던 디아나는 세드릭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숨어 버렸다.
“세드릭.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말해 줄 수 있겠니?”
바바라가 신중하게 물었다. 세드릭은 그때까지도 디아나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아마도 문밖에 숨어 그의 대답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터.
“그래, 기억나는 게 있으면 좀 말해 봐. 도대체 유모는 어쩌다 그리된 거야? 그 못된 악당들이 유모를 죽인 거지? 그렇지?”
채스터티의 재촉에 세드릭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아니다. 아니었다.
유모는 악마가 먹었다. 그를 납치했던 일당도 마찬가지로 악마의 손에 죽었다.
세드릭은 눈을 감자마자 그 광경을 되살릴 수 있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한 기억. 어째서 발푸르기스 평의회가 악마 소환을 금기로 규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나 ‘그것’은 끔찍스러웠다.
그러니 여기서 사건의 진상을 말하면 디아나 솔은 필히 엄벌에 처하리라. 위대한 마녀 그리젤다 솔의 딸이라는 점도, 자일스 수장의 도제라는 점도 그녀를 보호하지는 못할 터. 당장 어제의 세드릭이라면 고민 없이 사실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귀애하는 또래의 도제는 몇 년이 지나도록 기껍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의 세드릭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죄송해요. 기억이 잘 안 나요.”
세드릭이 조용히 대답했다. 채스터티가 기억을 더듬어 보라며 재촉했지만, 바바라는 아들의 등을 토닥이며 연신 괜찮다고 속삭일 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길에 얼마간 몸을 맡기던 세드릭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문가의 그림자는 자취를 감춘 뒤였다.
자일스는 이번 납치 사건을 경찰국에 신고하지 않았다.
수장의 친자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은 분명 가문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킬 것이었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애먼 유모까지 죽어 버렸으니, 알려진다면 두고두고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일이었다. 그것은 바바라를 포함한 가문의 누구도 원치 않는 결과였다.
그예 자일스는 사건을 덮기로 결정했다. 혹시 달아났을지도 모르는 일당을 얼마간 추적했으나, 흔적조차 찾지 못한 것도 일조했다. 유모에게 가족이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렇게 유모도 납치도 차차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그들에겐 별나지 않은 해프닝이었으므로.
다만, 사건의 진상을 똑똑히 기억하는 어린아이 둘만이 악몽으로 내내 그날을 되새겼을 따름이다. 배반한 유모와 버러지 같은 일당, 그리고 음습한 데서 올라온 악마를…….
* * *
바바라 자일스 일가는 세 가지 변화를 맞이했다.
첫째는 이사였다. 바바라는 세드릭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무섭게 오그로 이사했다. 오그는 서부의 주도(主都)로 오래전부터 자일스 가문의 일원들이 상당수 거주하는 대도시였다. 지금까지 바바라는 되도록 친족들이 기거하는 곳을 피해 왔으나, 지난번 납치 사건이 그녀에게도 제법 큰 충격을 미친 듯했다.
둘째는 새로운 시종이었다. 바바라는 죽은 유모를 대신할 사람으로 본성에서 오래도록 가문을 위해 헌신해 온 고양이 데이지를 불러들였다. 데이지는 30년 넘게 살아온 요물 고양이답게 간단한 마법도 부릴 줄 알았다. 가장 어린 세드릭도 이제는 유모의 돌봄이 필요 없는 나이기에 가한 일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낯선 동거인의 등장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바바라의 새로운 애인.
“마음에 안 들어.”
채스터티가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초목이 헐벗은 한겨울,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뭐가 그리 기쁜지 싱글벙글거리는 웬 낯선 사내가 바바라와 반갑게 포옹하고 있었다.
“저 음흉한 눈빛 좀 봐. 분명 어머니의 재산을 노리고 온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덥석 들어올 리가 없잖아?”
세드릭은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그 역시 채스터티의 말에 대놓고 동조하지 않을 뿐, 어머니가 달갑게 사내를 반기는 모습이 영 마땅찮았다.
바바라가 연애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이렇듯 집에 들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 자식들이 자신의 연애에 크게 충격받지 않을 만큼 자랐다고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자식들의 반대도 감수할 만큼 사랑하는 마음이 깊은 것인지 세드릭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세드릭. 네 아버지는 아직도 돌아올 생각이 없으시다니? 이혼은 안 하셨다며.”
“아직은 안 했지.”
“그럼 법적으로는 부부인데! 아내가 외간 남자와 동거하는데도 진정 괜찮으신 거야? 그런 거니?”
채스터티가 무진 열을 냈다. 하지만 세드릭은 과연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알고 있다 한들 크게 신경 쓸 것 같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세드릭은 어머니와 낯선 사내가 입 맞추려는 몸짓에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채스터티는 아직도 저이는 곧 대머리로 변할 거라는 둥, 아니면 자기가 그렇게 만들겠다는 둥 예언인지 저주인지 모를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그런 말일랑 평소처럼 흘려들으며 짐짓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맞은편에서 차를 홀짝거리던 디아나가 뒤늦게 반문했다.
“……나한테 묻는 거야?”
“너 아니면 누가 있는데.”
“웬일로 네가 나한테 그런 걸 묻니?”
디아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세드릭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싫음 대답하지 말든가.”
납치 사건이 벌어진 지도 벌써 2주가 지났다. 디아나는 세드릭이 사건의 진상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안도했는지, 얼마간 그를 의식하여 슬슬 피하던 것도 관두었다. 물론 여전히 세드릭을 꺼리고 경계했으므로, 두 사람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세드릭은 달랐다. 디아나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세드릭은 그날의 진상을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안정을 취하라며 호들갑 떨던 바바라 덕분에 침상에서 누워 보낸 몇 날 며칠간 웬만큼 고민도 끝냈다. 처음에는 그저 어리벙벙하던 세드릭도 이제는 과거 이상함을 느꼈던 퍼즐 조각을 하나로 짜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몇 달 전부터 다락에만 처박혀 있는 디아나가 수상하다며 열변을 토하던 채스터티. 묘하게 친밀해 보이던 악마와 디아나.
그리고 일전에 다락을 열었을 때 풍기던 악취와, 악마를 소환했을 때 퍼지던 유황 냄새.
세드릭의 짐작으로 디아나는 악마를 소환한 지 제법 오래되었다. 사이가 그리 친밀했던 것으로 보아 자주 소환했으리라 추측되고, 그 장소는 아마도 다락이었다. 그날 유독 다락에 독한 향초를 많이 피워 둔 것도 아직 빠지지 않은 유황 냄새를 감추고자 그리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더군다나 에든게일 저택의 정원에서 종종 발견되던 찢겨 죽은 동물의 사체. 그즈음 디아나는 꼭 아픈 사람처럼 창백했다. 악마가 잔인한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살육을 저질렀다면, 나름대로 고민이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악마 소환을 단번에 끊지 못한 것을 보면, 악마와의 유대감이 생각보다 훨씬 깊었을 테고.
물론 세드릭은 정도(正道)만을 익힌 마법사답게 악마 소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진 못했다. 하지만 그토록 다정한 악마라면, 악마와의 관계를 지지부진하게 이어 온 디아나의 심정을 알 것 같기도 했다.
떠나간 아버지,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언니를 대신하여 무심한 어머니, 혹은 스승에게서 사랑을 갈구하던 두 사람. 둘은 경쟁적으로 바바라의 애정을 바랐지만, 바바라는 늘 메말라 죽지 않을 만큼의 관심만 나눠 줄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실수로든 고의로든 소환한 악마가 그리 살갑게 대해 준다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쉬이 악마를 놓아주진 못할 터였다. 목말라 갈라지는 땅을 악마의 손길로 아주 기껍게 채워 나갈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닿았을 무렵, 세드릭은 디아나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토록 밉던 여자애가 비로소 안쓰럽게 보였다. 그가 헐떡이는 고독과 결핍을 디아나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바바라나 채스터티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갈급한 감정을, 세드릭은 아주 오래전부터 디아나와 공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디아나를 향한 미움은 자연스레 잦아들었다. 습관처럼 주고받던 독설이 사라지고, 줄곧 무시와 조롱으로만 일관하던 태도도 차차 변했다. 살갑지는 못해도 예전처럼 차갑지는 않았다. 디아나가 이를 수상쩍게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세드릭은 그저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납치 사건은 그만치 세드릭의 뇌리에 깊게 남았다.
하루는 서재로 향하는 길이었다. 묘하게 감이 좋질 않아 응접실을 들여다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채스터티가 못된 장난을 꾸미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쉿!’
불현듯 눈이 마주친 채스터티가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경고했다. 세드릭은 코웃음을 치며 문가에 기대어 섰다. 얼마나 질 낮은 장난을 치려는지 한눈에도 훤히 보였다.
촛불로만 밝힌 어두운 응접실. 채스터티는 소파에 앉아 독서하는 디아나를 노리며, 살금살금 살쾡이처럼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의 목적은 마법으로 둥둥 띄워 낸 물동이였다. 하나에 집중하면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디아나를 노려 급작스레 물을 끼얹는 장난은 이미 채스터티가 여러 차례 성공한 바 있었다.
평소라면 무심히 지나쳤을 광경이다. 하지만 세드릭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온종일 쓸데없는 장난이나 계획하는 채스터티도, 숱하게 당했으면서도 저렇게 무방비한 디아나도 못마땅했다. 무엇보다도 장난에 성공해서 기고만장할 채스터티가 가장 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세드릭은 충동적으로 마법을 부렸다. 금방이라도 넘칠 듯 아슬아슬하던 물동이를 뒤쪽으로 밀어 버린 것이다.
“아악!”
부지불식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채스터티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안이 벙벙한지 바짝 굳어 버린 얼굴이 아주 꼴좋았다. 화들짝 놀라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는 디아나의 표정도 마음에 들었다.
세드릭은 피식거리며 다시 복도로 들었다. 마침 채스터티를 곯려 줄 좋은 생각이 났다.
이튿날, 세드릭은 바바라에게 슬쩍 채스터티의 장난에 대해 말을 흘렸다. 아이들에게 별 관심이 없던 바바라는 채스터티의 장난이 그 정도로 심한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다. 바바라는 당장에 채스터티를 불러들여 단단히 주의를 주었고, 디아나란 좋은 장난거리를 잃은 채스터티는 한동안 풀 죽은 채로 다음 타깃인 데이지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열 살 남짓한 디아나와 달리 산전수전 겪은 요물 고양이는 절대로 만만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세드릭은 제 뜻대로 상황을 종결하여 몹시 만족스러웠다. 비록 디아나는 이 모두 자비로운 스승의 은덕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세드릭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애당초 감사를 받기 위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그러고 싶었을 뿐이다.
“디아나. 식사 후에 축성경 사용법을 알려 줄 테니 다락으로 오렴.”
“저, 스승님. 오늘은 언니랑 만나기로 했어요. 전에 말씀드렸는데…….”
여느 때처럼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스승에겐 늘 순순히 복종하던 디아나가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바바라는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래. 그랬었지. 헤스터가 이쪽으로 오는 거니?”
“네. 이번에 휴가를 받았대요.”
“헤스터는 작년에 독립했다고 그랬지. 어린 나이에 참 대단하구나.”
스승의 칭찬에 디아나가 더없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 자신이 칭찬받았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언니시길래 디아나가 저리 따른다니? 실제로 만난 적은 손에 꼽으면서. 쟤 우리랑은 아직도 데면데면하잖아.”
채스터티가 소리 죽여 불평했다. 세드릭은 내심 그녀를 비웃으며 조용히 식사에 열중했다. 만날 못된 장난만 치면서 사이가 좋길 바라는 채스터티가 참으로 우스웠다. 남매지간임에도 늘 원수처럼 으르렁대는 세드릭과의 관계는 생각도 못 하는 듯했다.
디아나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날듯이 저택을 뛰쳐나갔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자매를 만난다고, 평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흰색 원피스까지 차려입으며 제법 공들여 치장한 모습이었다. 디아나가 저리 들뜬 모습을 세드릭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은 궁금해졌다. 도대체 얼마나 의좋은 자매기에 만나는 것만으로도 저리 기쁠까. 나도 아버지와 재회하면 저런 바보 같은 얼굴을 할까. 곰곰이 상상해 보았지만 도무지 그림이 떠오르질 않았다.
디아나가 부재한 저택은 늘 그렇듯 평범했다. 바바라는 애인과 연애하기 바빴고, 채스터티는 요물 고양이 데이지가 방심한 틈을 찾느라 정신없었다. 평소처럼 공부에 열중하던 세드릭에게 그날은 아주 쏜살같이 지나간 하루였다. 학업에 바빠 점심도 혼자서 따로 먹었더니 해질녘도 금방이었다.
황혼이 저물어 갈 무렵,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던 세드릭이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외출한 지가 벌써 3주를 훌쩍 넘어갔다. 불현듯 산책하고 싶어졌다.
세드릭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지난번 납치 사건 이후로 바바라는 한동안 아들을 몹시 싸고돌았다. 그것이 포근한 사랑으로 이어졌다면, 참 기꺼운 일이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반강제의 감금이나 다름없었다. 세드릭은 지난 겨울 내내 외출이 금지되었다. 심지어는 아버지에게 부치는 편지조차 부득불 어머니에게 맡겨야만 했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가듯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었다. 최근 바바라가 연애에 몰두하기 시작한 이래 아들은 도로 뒷전이 되었다. 세드릭은 별다른 투정 없이 익숙한 무관심 속에 다시금 꿋꿋하게 자리 잡았다. 이제는 괜찮았다. 낯선 이에게 애정을 퍼붓는 어머니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도 이제는 그의 일상에 단단히 뿌리내렸으므로. 이제는 정말로 괜찮았다.
세드릭은 초봄의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거닐었다. 간만에 겨울 가신 날씨가 흔쾌한지 공원마다 나들이 나온 가족들의 모습이 더러 눈에 띄었다. 세드릭의 눈길이 행복하게 웃는 또래 아이들, 자식을 소중하게 품어 주는 부모에게 잠시 머물렀다. 예전 같으면 질시하는 마음에 그만 채스터티처럼 못된 장난을 쳤겠으나,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부러운 눈으로 조금 쳐다보다 힘없이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러니 세드릭이 공원에서 디아나를 발견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래서 내가 어떻게 했냐면…….”
새처럼 흔흔히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세드릭은 멍하니 그편을 바라보았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와 달리, 디아나는 표정이며 몸짓이 훤히 내다보였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입가에서 마를 새 없는 웃음소리, 자매가 이야기할 때마다 무결한 애정으로 반짝이는 두 눈, 상기된 두 뺨과 마치 새벽처럼 밝아 오는 미소.
그 모두가 참으로 낯설었다.
디아나가 저렇게도 웃을 수 있다는 걸, 세드릭은 오늘 처음 알았다.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독립하거든 꼭 언니한테 갈게. 그럼 우리는 영원히 함께하는 거야.”
세상에 영원한 사랑은 없다. 하지만.
“내가 많이 사랑해, 언니.”
저리도 확신에 찬 다짐 앞에선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태 세드릭은 디아나에게서 동질감을 느껴 왔다. 그가 사랑받지 못하고 외로운 것처럼 디아나도 마찬가지리라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아니다. 아니었다. 오갈 데 없는 세드릭과 달리, 디아나에겐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는 품이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언제든 안아 주는 따뜻한 품이 있었다.
디아나는 사랑받는 아이였다.
문득 세드릭은 울고 싶어졌다.
* * *
분꽃이 난만히 피어나는 시기, 바바라는 연인과 이별했다.
지난 겨울 극진히 사랑하여 집까지 불러들인 것이 무색할 정도로 빠른 이별이었다. 남매는 어머니의 정확한 이별 사유를 알지 못했지만 아마 남자가 결혼 운운했기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예전부터 바바라는 이상스럽게 결혼 이야기에 민감했다.
채스터티는 어머니의 이별을 대놓고 반겼다. 세드릭도 기꺼운 기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남몰래 의구심을 키우고 있었다. 세드릭은 이제 부모가 재결합하리란 기대는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부모의 사랑은 이미 옛적에 끝났으므로, 당장 오늘 법원에 이혼장을 제출한다고 해도 크게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부모가 아직까지 결혼을 지지부진하게 끌어오는 이유를 마땅히 떠올릴 수 없었다.
“어머니가 새로운 애인을 만드시기 전에 네 아버지가 돌아와야 해. 세드릭, 네 아버지는 아직도 연락이 뜸하시니?”
그러니 세드릭으로선 채스터티의 이런 말이 지겨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그 소리야?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편지하든가.”
“나는 네 아버지와 그다지 친하지가 않잖아. 아무렴 아들의 편지가 기꺼우시겠지.”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왜 그리 재결합을 바라?”
“그거야 낯선 사람이 어머니 곁에 있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 너도 그렇지 않니?”
참으로 그녀다운 이유였다. 세드릭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까지나 부모님의 일이야. 내가 간섭할 여지가 어디 있어.”
부모 자식 간에도 철저하게 선을 긋는 이들이 바로 마법사였다. 가끔은 채스터티처럼 이기적일 정도로 자기만을 위하는 부류도 있으나, 마법 사회의 전반적인 관점에서는 족히 지탄받을 사고방식이었다. 물론 그만치 이기적인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겠느냐만 말이다.
세드릭은 느른하게 턱을 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배웅하는 사람 없이 가방을 끌고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어째 쓸쓸하게 비쳤다. 특히나 뒤통수까지 휑하게 벗겨진 머리가 그러했다.
“그러고 보니, 너 예언한 거였어?”
“응?”
“예전에 저 사람 곧 머리가 벗겨질 거라고, 아니면 네가 그렇게 만들겠다고 그랬잖아.”
그러자 채스터티는 여태 괴롭히던 요물 고양이의 꼬리를 놓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표정이 점차 묘해졌다.
“……지금이었네.”
“뭐?”
“꿈에서 지금을 본 거였어.”
채스터티가 몽롱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개꿈인지 예지몽인지 헷갈렸는데 이거였구나.”
세드릭은 말없이 그녀를 건너보았다. 최근 들어 채스터티가 예언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예지몽을 꿀 때마다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니 모를 수가 없었다.
선조인 클레멘틴 자일스가 지녔다고 전해지는 예지. 그녀 이래로 <교활한 자일스>를 대표하는 것은 용과 예지였다. 학업을 게을리하여 조금이라도 복잡한 마법엔 손도 못 대는 채스터티가 아직까지도 유력한 수장 후보로 거론되는 것도 모두 예지 덕분이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세드릭은 시기심을 억누르며 서재로 향했다. 다시 공부할 시간이었다.
“아이참, 그게 아니라니까?”
디아나가 소리를 높였다. 울컥한 세드릭이 재차 마법을 부렸지만 역시나 실패였다.
“그게 아니라 조금 더 섬세하게, 세심하게 해야 한단 말이야.”
“지금 그렇게 하고 있잖아.”
“그렇게 안 하니까 실패하지!”
어지간히도 답답한 모양인지 디아나가 양팔을 퍼드덕거리며 외쳤다. 세드릭은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실타래를 쏘아보았지만, 그런다고 성공할 마법이 아니었다.
둘은 바바라가 내 준 숙제를 하고 있었다. 얇은 실을 오직 마법으로만 매듭짓는, 이른바 마법 운용력을 기르는 연습이었다. 바바라의 말에 따르면, 마력을 섬세하게 운용하는 것이야말로 노력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최고점이었다. 선천적으로 쉬이 해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각고의 노력으로 닿을 수 있는 경지였다. 배움에 목마른 세드릭과 디아나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세드릭이었다. 반나절 넘게 연습한 끝에 매듭짓기에 성공한 디아나와 달리, 세드릭은 벌써 수십 수백 번째 실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던 지금까지의 모습을 상기하면 제법 놀라운 일이었다.
“실을 좀 더 부드럽게 다뤄 봐. 아기를 안는 것처럼.”
“……난 아기를 안아 본 적이 없는데.”
“누군 안아 봤는 줄 알아?”
“안아 보지도 못했으면서 ‘아기를 안는 것처럼’은 또 뭐야? 설명해 주려면 똑바로 해.”
세드릭이 투덜거렸다. 디아나가 그를 째려보았다.
“그러는 너는 언제 제대로 설명해 준 적 있는 줄 알아? 그저께 감자에서 싹을 틔우는 마법을 가르쳐 줄 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니?”
그날, 세드릭은 따뜻한 스프를 먹는 느낌을 떠올리라고 조언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조언이지만, 실제 마법을 부릴 때의 느낌이 저러했다. 애당초 마법은 타인의 조언으로 완성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또 실패야.”
엉성하게 맺어진 매듭이 금세 풀려 버리자, 세드릭은 제풀에 지쳐 소파에 누워 버렸다. 디아나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너 이대로 자는 건 아니지?”
제법 근심스러운 목소리였으나.
“조금 이따가 일어나서 연습해야 해? 성공 못 하면 내일 진도를 못 나가잖아.”
물론 세드릭이 아닌 진도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세드릭이 툴툴거리며 도로 일어났다.
“여태 너 때문에 진도 못 나간 적은 생각 안 나지?”
“아무렴, 너무 잦아서 특정하질 못하겠네. 그때마다 네가 얼마나 나를 볶아 댔는데 설마 기억이 안 나겠어?”
디아나가 콧등을 찡그리며 빈정거렸다. 세드릭이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기색 역력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미안해.”
비단 아주 어렸을 때의 폭언이 아니더라도, 세드릭은 심심찮게 디아나를 비꼬고 무시했었다. 어머니의 관심을 나눠 가지는 게 싫었고, 분수에도 맞지 않는 수업을 따라가겠노라 바득바득 우겨 대는 모습이 같잖았다. 그러면서도 기죽지 않고 그의 치부를 찔러 오는 것이 너무나도 얄미웠다.
결국에 이렇게나 사이를 꼬아 놓은 것은 자신이었다. 어릴 적 사납게 굴지 않았다면, 디아나도 지금처럼 예민하게 대처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최근에는 독설을 자제해 왔다지만, 그렇다고 지난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디아나가 아연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미안하다고? 뭐가?”
“……지금까지 너한테 해 왔던 심한 말들. 나한텐 너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잖아.”
세드릭이 입술을 깨물며 초조하게 대꾸했다. 그냥 해 보는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나름대로 진실한 사과였지만, 말로 표현하자니 작금의 심정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덧붙이고 싶은 마음이 자꾸 언어로 치환되질 않았다.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던 디아나가 뒤늦게 말문을 열었다.
“너 오늘 뭐 잘못 먹었니?”
세드릭은 잠잠했다. 외려 당황한 디아나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래도 알고 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디아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먼저 들어가 볼게. 너도 적당히 연습하다가 들어가.”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멀어지는 발소리가 갈수록 빨라졌다. 세드릭은 조금 울적한 표정으로 빈 문가를 응시했다. 어느새 혼자 남은 응접실이 평소보다 더 황량하게 느껴졌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과거가 청산되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디아나가 벌컥 화내더라도 그녀에겐 분노할 자격이 있으니, 묵묵히 감수하자는 다짐도 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의 뒤틀린 관계는 그가 먼저 시작한 것이었다. 어쩌면 디아나가 오래도록 악마를 놓지 못했던 이유도 근본적으로 그의 잘못인지 몰랐다.
차라리 화를 내 주면 좋았을 텐데.
사과가 갑작스럽다고 했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가 버렸다. 사과를 듣고서 디아나가 내비친 감정은 당혹스러움이 전부였다. 미안하다는 말에 분노할 여력도 따질 여지도 없었던 것이다. 세드릭의 사과는 그녀에게 채 닿지도 못했다.
어쩌면 사과할 시기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심 어린 표현이 부족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드릭은 어렴풋이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나에게는 천 근만큼 무거운 한마디가 남에게는 깃털보다 가벼울 수 있다.
마치 과거, 그가 고민 없이 퍼부었던 독설이 디아나를 낭떠러지로 내몰았던 것처럼. 그예 악마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게 몰아낸 것처럼.
세드릭은 그런 자명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방으로 돌아온 세드릭이 서랍에서 쓰다만 편지를 꺼냈다. 마치 일기를 쓰듯 미주알고주알 적힌 편지는 아버지에게 보내려는 것이었다. 세드릭은 서너 장 되는 편지를 꼼꼼히 재독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어머니께 새롭게 배운 마법, 채스터티의 실없는 장난, 요물 고양이 데이지를 은근히 무서워하는 디아나. 당시에는 즐겁게 썼던 일화들이 지금 보니 이보다 더 시답잖을 수 없었다. 만일 아버지가 읽는다면, 아직도 아들을 철없게 여길 만큼 유치했다.
세드릭은 미련 없이 편지지 끄트머리에 불씨를 피웠다. 거멓게 타들어 가는 편지를 지긋이 응시하는 눈빛이 못내 쓸쓸했다.
사랑받고 싶었다. 돌아봐 주고 아껴 주길 바랐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그러다 유모에게까지 매달렸다. 그리 울며 매달렸건만, 이제 와 주변을 살펴보니 아무도 남지 않았다. 어째서 나는 언제나 외로운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해 보았으나, 답은 애먼 데서 들려왔다.
‘세상에 사랑스럽지 않은 아이를 돌보는 것만큼 지긋지긋한 일도 없답니다.’
그날의 참담함을 잊지 못한다. 처음 악마를 보았고, 처음 살육을 목격했으나, 그보다 세드릭을 오래도록 아프게 한 말이었다. 적어도 유모만은 자신을 애지중지하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를 부담스러워하고 아버지가 그를 떠난 것처럼 유모는 그를 지겨워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사랑스럽지 못한 제 잘못이었다. 유모의 말처럼, 사랑스럽지 않은 아이는 부모조차 돌보지 않는 법이므로.
그러니 아버지만큼은 저를 미워하지 않길 바랐다. 당신의 아들이 여기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매일같이 편지를 쓰고 번거롭게 우체국을 드나들었으나, 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드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자간 어느 정도의 간격을 원하기에 답장이 드문지도 몰랐다. 어쩌면 세드릭이 미처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마음이 떠나기는 쉬워도 다시 사랑받기는 힘들다.
어느덧 까만 재가 수북하게 쌓였다. 타들어 간 편지만큼 마음도 재가 되었다.
* * *
‘둥지가 용알을 품었다.’
본성의 시종을 놀라 고꾸라지게 만든 소식은 곧 잉그람 전역의 자일스 일족에게로 퍼져 나갔다. 그간 용이 없던 세월을 근심하며 보냈던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오래지 않아 가문의 수장인 바바라가 기거하는 오그로 전서구 수십 마리가 몰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머니. 곧 용이 태어나는 거예요?”
채스터티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세드릭이나 디아나도 말을 아낄 뿐이지, 설레는 표정은 마찬가지였다. 바바라는 웃음을 터트리며, 드물게 따뜻한 손길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려 30년 만의 용이었다. 페넬로피가 그리 덧없이 절명한 이래로 늘 써늘하여 다시는 용알을 품지 못하리란 비관적인 예측까지 나왔던 둥지가 이렇게나 갑작스레 용알을 품을 줄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터. 일족은 오랫동안 왕래 없던 친척과도 편지하며 기쁨을 나누었다. 그만치 자일스에게 용의 존재는 축복이었다.
<교활한 자일스>의 영광이 다시 도래하리라.
모두가 그리 확신했다.
“그럼 용과는 누가 계약하나요?”
“내가 생각해 둔 것이 있다. 조금만 기다리렴.”
이제는 누가 용의 주인이 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바바라는 빗발치는 친족들의 편지도, 무궁무진한 채스터티의 호기심도 모두 부드럽게 쳐 냈다. 그저 용알이 도착하길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오그의 저택으로 용알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자일스 본성이 위치한 엑서터는 북동쪽의 고산지대로 서부 주도인 오그와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엑서터 부근까지 기찻길이 뚫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족히 일주일은 걸렸을 터다. 행여나 이제 막 태동하는 용알에게 나쁜 영향이라도 미칠까 싶어,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고 둥지째 옮기는 용알에 본성 시종들이 아주 성심을 다했다.
용알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아이들은 단걸음에 현관으로 달려갔다. 커다란 상자에는 솜이불로 겹겹이 쌓인 황적색 용알이 빼꼼 드러나 있었다.
“생각보다 큰걸.”
“생각보다 작은 거지. 용은 집채만 하다는 거 모르니?”
“설마 새끼가 그렇게나 크겠어.”
세드릭은 채스터티의 어리석은 핀잔에 적당히 대꾸하며 용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바바라가 용알을 저택에서 가장 따뜻한 응접실 벽난로 부근으로 옮길 때도 뒤만 졸졸 따랐다.
“자. 오늘부터 용알은 여기 있을 거란다.”
바바라가 세 아이들을 돌아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만지는 건 괜찮지만, 안아 들거나 둥지에서 빼내면 안 된다. 용알은 따뜻한 곳에서 편안히 있지 않으면 부화하지 못해.”
“언제쯤 부화하는데요?”
“글쎄. 워낙에 제각각이라서 단정 지을 수가 없구나. 빠르면 석 달, 늦어도 1년이면 부화할 거야.”
“1년씩이나!”
채스터티가 탄성을 질렀다. 세드릭이 조금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럼 알이 부화한 뒤에 용의 주인이 결정되나요?”
용은 한 명의 주인만을 따른다. 알에서 부화하자마자, 최초로 동조한 인간과 최초의 계약을 맺어 그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용의 직무. 따라서 지금까지 자일스의 수장은 대체로 용의 주인이었다. 자일스에서 용이 지니는 함의를 생각하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래. 주인은 용이 결정한다.”
바바라가 엄숙하게 말했다.
“아직은 알에서 부화하지 않은 용도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단다. 그렇다면 용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도 당연히 보다 익숙한 목소리, 보다 사랑을 속삭여 주던 목소리를 따라가겠지. 마치 부모를 찾는 아이처럼 말이야.”
용에겐 부모가 없다. 바바라는 그 점을 명확히 했다.
“어찌 보면 세상에 외따로 떨어진 가엾은 아이란다. 너희가 용의 부모가 되어 주렴. 너희가 용알에게 들인 사랑과 노력만큼 용도 보답할 거란다.”
멍하니 어머니를 바라보던 세드릭과 채스터티가 문득 시선을 마주했다. 요약하자면 바바라는 용의 주인 될 사람을 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모든 걸 용의 선택에 맡긴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잠시 입술을 깨물며 침묵하던 바바라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난 너희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 싶어.”
용의 선택을 받는 사람이 곧 가문을 이끌 차기 수장이 될지니.
열세 살 되던 해, 세드릭은 본격적으로 수장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경쟁을 시작했다.
“디아나! 오늘 저녁 트리스탄 광장에서 불꽃놀이 한다는데 같이 구경 갈래?”
“난 그렇게 시끌벅적한 곳은 딱 질색이야. 게다가 너 용은 어떡하고.”
“용이야 세드릭이 잘 돌보겠지. 응접실에서 말 못 하는 용알한테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난 더는 못 하겠어.”
예상대로 채스터티는 오래지 않아 용알에게서 흥미를 잃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부화하지 못한 용알에게 정성을 들이는 시간을 못 견뎌 했다. 다만 엉덩이를 지그시 붙이고 있는 것을 가장 힘겨워하는 채스터티의 성정을 감안할 때, 무려 열흘이나 용알의 곁을 지켰다는 것만으로도 족히 놀라운 일이었다.
자연히 용알을 지키는 사람은 이제 세드릭 혼자였다. 세드릭은 바바라의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응접실로 돌아가 그곳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아예 생활을 응접실에서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온종일 용알 앞에서 수다를 떨기 보다는, 곁에서 가만히 독서하거나 종종 용알을 쓰다듬는 게 전부였다.
디아나는 세드릭의 그런 모습이 사뭇 새로웠다. 요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얌전해지긴 했어도 늘 어딘가 불안하고 불안정해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용알 곁에서는 더없이 평화롭게 보였다.
차기 수장 자리를 공공연히 욕심내던 것을 떠올리면 외려 지금 더 불안스러워야 정상일 터. 하지만 지금의 세드릭은 후계자 자리든 채스터티와의 경쟁이든 전부 초탈한 것 같았다. 모든 관심과 시선이 용에게 못 박힌 것이 그녀의 눈에도 빤할 정도였다.
자일스에게 용이란 본디 그런 존재일까?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니 채스터티가 걸렸다. 엄연히 클레멘틴 자일스의 예지를 계승한 채스터티는 늘 그렇듯이 장난과 진귀한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다시 용알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날은 용이 부화하는 날일 것이었다.
바바라는 남매에게 용알을 맡긴 이후로 다시는 용을 입에 담지 않았다. 용알은 잘 돌보고 있느냐 지나가듯 묻는 일도 없었고, 응접실에 들러 확인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자연히 말을 아끼게 되었다. 세상 유일무이한 용알이 잠든 저택은 그리도 평화로워 보였다.
그렇듯 침묵으로 침묵을 종용하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디아나는 용알에 대한 관심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호기심 많은 마녀였다. 유일무이한 용알이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응접실에서 아주 거주하는 듯한 세드릭은 어째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고, 바바라는 용알을 둘러싼 저택 내외의 관심이 폭발하는 것을 병적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이제나저제나 모두 무릅쓰고 용알을 가까이 하기에는 베짱이 부족했다.
* * *
용알이 오그의 저택으로 달한 지도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그간을 유야무야 보냈던 디아나에게도 우연한 기회가 생겼다.
때는 이슥한 시간으로 접어드는 한밤이었다. 서재에서 방으로 돌아가는 길, 디아나는 우연히 좁다랗게 열린 응접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발견했다. 평소라면 애써 고개를 돌렸겠으나, 그날따라 용기가 솟은 모양인지 디아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응접실은 웬일로 비어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인기척을 살피던 디아나가 흐뭇한 표정으로 살금살금 벽난로 쪽으로 다가갔다. 용알은 초가을엔 영 어울리지 않는 벽난로의 온기를 쬐며 둥지 속에서 가만히 잠들어 있었다.
“넌 아직 변한 게 없구나.”
디아나는 검지로 용알을 콕콕 찌르며 속삭였다.
“언제쯤 나올래? 다들 말은 안 해도 널 기다리고 있어.”
근래 오그의 저택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누가 보면 상중이라 착각할 법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 기저에 깔린 긴장감을 어렴풋이 읽어 냈다. 용을 둘러싼 이런저런 풍문에 휩쓸리지 않도록 스스로 자중하는 것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한참 용알에게 넋두리를 늘어놓던 디아나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심코 창가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만 심장이 쿵 떨어지는 줄만 알았다.
소파에 세드릭이 누워 있었다. 등받이에 가려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이었다.
디아나의 얼굴이 금세 백지장처럼 질렸다. 설마 방금 했던 이야기를 전부 들은 걸까. 언니에게도 차마 부끄러워 편지하지 못했던 말인데. 세상에 이럴 수는 없었다. 너무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그리 소리 없는 아우성만 지르길 한참, 디아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세드릭은 잠들어 있다는 걸.
“……세드릭. 진짜로 자?”
조심히 물어보았지만 역시나 답이 없었다. 안도하며 응접실을 나가려던 디아나가 주저하며 다시 돌아섰다. 그러고는 근처의 담요를 들고 세드릭에게로 다가갔다.
세드릭은 쥐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유심히 얼굴을 보는 것이 오랜만이라 그런지 예전보다 피로해 보였다. 최근에는 그다지 어려운 마법을 배우지 않았으니, 아마도 용알을 돌보느라 그런 모양이었다.
디아나는 잠든 세드릭에게 조심스레 담요를 덮어 주었다. 어쩐지 꼼꼼히 살피기는 낯부끄러워서 대강 담요를 펴 주고 돌아서려던 찰나, 갑자기 담요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불쑥 고개를 든 세드릭이 맹한 눈으로 디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아, 나는…….”
당황한 디아나가 어물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저 추워 보이기에…….”
유난히 멍한 얼굴로 디아나를 보던 세드릭이 고개를 얕게 흔들며 똑바로 앉았다. 담요는 그대로 어깨에 두른 채였다.
“벽난로는 어때?”
낯설도록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디아나가 흠칫하며 반문했다.
“뭐?”
“벽난로는 어떠냐고. 혹시 불 꺼졌어?”
“아, 아니. 아직 괜찮은데.”
세드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리서 머뭇거리던 디아나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살그머니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아직 잠결인지 세드릭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 예리할 정도로 날이 서 있던 눈빛이 드물게 흐리멍덩했다.
디아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금 세드릭은 묻는 족족 솔직하게 대답할 것이다.
“저기, 있잖아. 넌 왜 그렇게 가문의 수장이 되고 싶은 거야?”
그래서 디아나는 여태 가장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몰라도 상관은 없지만, 까맣게 잊어버릴 때쯤 되살아나 호기심을 건들던 의문점.
세드릭 자일스는 어째서 후계자 자리에 집작할까.
천년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면 몰라도,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대에 가문의 수장이란 그저 귀찮은 일을 도맡는 직책이었다.
수장으로서 결정해야 하는 사항은 하찮기 그지없는 데다, 딱히 주어지는 보상도 없었다. 그저 전국적인 유명세와 얼마간의 명예, 그리고 조금의 특혜뿐. 고작 그 정도를 위해 수장의 직무를 감수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았다. 오죽하면 알피어스 가문의 수장인 글로리아 알피어스 슬하의 다섯 자식이 죄 후계자 자리를 거부하고 있을까.
세드릭은 한동안 조용했다. 주눅 든 디아나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수장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자일스의 일원이 되고 싶은 거야.”
세드릭이 디아나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디아나가 어리벙벙한 사이, 세드릭이 눈을 치뜨며 재차 물었다.
“그런데 네가 그런 걸 왜 물어?”
“응? 아니, 난 그냥 궁금해서…….”
디아나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애써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간에 입이 방정이었다. 세드릭이 아직 잠결일 때 조용히 나갔어야 했는데, 꼭 이렇게 틀어지고 말았다.
바삐 눈을 굴리며 적당한 화젯거리를 찾던 도중에 때마침 용알이 들어왔다. 디아나가 서둘러 말했다.
“그나저나 빨리 용이 부화하면 좋겠다. 벌써 두 달이나 지났는데 언제쯤 나올까?”
짐짓 명랑한 목소리였다. 영 잠잠한 세드릭을 흘깃거리던 디아나가 무심결에 물었다.
“너도 용이 보고 싶지?”
당연히 긍정적인 대답을 예상했다. 매일같이 용알을 곁에 끼고 사는데, 보고 싶지 않을 리 없었다. 이 저택에서 가장 용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당당히 세드릭 자일스를 지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잘 모르겠어. 빨리 나왔으면 하는 마음 반, 영원히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반이야.”
디아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어째서?”
“바깥세상은 차가우니까.”
세드릭이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용이 불행할까 봐 겁나.”
디아나는 가만히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지금의 세드릭은 나이보다도 어려 보였다. 마치 처음 만났을 적,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던 그때처럼.
“……네가 잘 보살펴 주면 되잖아.”
“나는 진짜로 용의 부모는 아니니까 한계가 있을 수밖에. 무엇보다도 저 용은 원해서 여기에 있는 게 아니잖아.”
용알을 이곳으로 이끈 것은 천 년 전의 맹세다.
수백 마리 용이 악명을 떨치던 머나먼 시대. 위대한 마법사 에리얼 자일스는 버려져 죽어 가던 새끼 용 다리아를 우연히 거두어 사랑으로 키워 냈다. 성장하여 그를 해칠 것이라던 주변의 예상과는 달리, 용은 죽을 때까지 에리얼 자일스와 그 후손들을 지켰다. 심지어 숨을 거두기 직전에는 자신의 후손으로 하여금 영원히 자일스를 지키겠노라 맹세하기까지 했다.
용이 지키는 가문. 그리하여 자일스만은 수백 년간 악룡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했다.
시간이 흘러 용은 모두 떠나갔으나, 천 년 전의 맹세는 여전히 유효했다. 본성의 둥지는 한없이 싸늘하다가도, 수십 년에 한 번씩은 꼭 용알을 품었다. 아마도 어딘가에 존재할 다리아의 후손이 잊지 않고, 자식을 머나먼 타향으로 보내는 것일 터.
부모 없는 용의 무게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영영 안전한 알 속에 있길 바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세드릭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애써 졸음을 몰아냈다.
“그만 돌아가. 시간이 많이 늦었어.”
“으응.”
할 말이 있는지 한참 머뭇대던 디아나도 결국엔 말없이 돌아갔다. 세드릭은 휘청거리며 일어나 벽난로 쪽으로 다가갔다. 장작을 몇 개 더 집어넣고 마법으로 불씨를 키운 뒤에야 용알을 돌아볼 수 있었다.
황적색 용알은 한결같이 그대로였다. 알을 뚫고 나올 기색도, 말을 귀담아듣는 기색도 없었다. 껍데기 안에 살아 있는 용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세드릭은 느릿하게 손을 뻗어 용알을 짚었다. 꺼칠한 표면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그리 쓰다듬기를 한참, 망설이는 목소리가 드문드문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주는 사랑이 과연 너에겐 충분할지, 너는 과연 내 사랑이 기꺼울지……. 잘 모르겠어.”
세드릭의 표정이 울적하게 일그러졌다. 부러 참아 내듯 억누르는 소리가 뒤이었다.
“아까 영원히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은 거짓이야. 실은 네가 빨리 보고 싶어. 네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아.”
가문의 수장인 어머니, 낙뢰를 내리며 거인과 맞서는 아버지, 요정을 따라간 설리번, 미래를 보는 채스터티, 언젠가 다시 사과해야 하는 디아나.
그리고 아무래도 어설픈 나.
“영영 그곳에서 날 외롭게 두지 마.”
세드릭은 자그맣게 속삭였다. 변함없는 침묵 속에 고개를 묻으며.
그로부터 넉 달이 지났다.
새하얀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겨울이었다. 바바라 자일스는 연인과의 약속으로, 채스터티 자일스는 눈을 맞이하러 저택을 비운 때. 최초로 세상에 발 디딘 용이 최초로 마주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세드릭이었다.
용은 그를 주인으로 선택했다.
용의 이름은 윈터(winter)였다.
⚡ ⚡ ⚡
불에 그슬린 것처럼 새카맣다.
부화한 용을 마주한 세드릭의 첫 감상이었다. 꼭 재로 빚은 것처럼 시커먼 덩어리가 꼼지락대며 움직이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알을 깨고 나오느라 힘에 겨웠는지 한참 숨을 몰아쉬는 것도, 낯선 세상을 두리번거리는 것도 그저 놀랍기만 했다. 눈앞에서 용이 살아 움직인다는 게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그때, 불현듯이 눈이 마주쳤다. 세드릭이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물러서자, 용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툰 걸음을 내디뎠다.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연신 목청에서 터져 나왔다.
“……세드릭 자일스.”
그는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세드릭 자일스야.”
길고 길었던 반년. 오직 그만이 곁을 지켰던 오랜 시간을 과연 용은 기억할까.
매일 네게 속삭이던 목소리를 기억할까.
용이 힘겹게 세드릭의 손등 위로 발을 올렸다. 갓 부화하여 이상스럽게 높은 체온이 손등에서부터 차차 퍼져 나갔다. 그리고 곧게 직시해 오는 금안. 지극한 신뢰와 사랑과 숭배로 가득한 눈빛을 세드릭은 생전 처음 받아 보았다. 너울지는 환희, 그리고 폭발하듯 치솟는 애정이 그의 마음을 집어삼켰다.
오래도록 염원했던 순간.
세드릭은 눈물겹게 웃었다.
“겨울에 태어나서 이름이 윈터라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성의가 없는 거 아니니?”
채스터티가 식빵에 잼을 바르며 종알거렸다. 윈터에게 손수 날고기를 먹여 주던 세드릭이 골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미 그렇게 지은 걸 어떡해, 그럼.”
“그러니까 처음부터 잘 지었어야지!”
“그러는 넌 얼마나 작명에 능하다고.”
세드릭이 투덜거리며 식빵을 입에 물었다. 먹성 좋은 윈터에게 식사를 대령하느라, 그는 요 며칠 느긋하게 끼니를 챙긴 적이 없었다. 마법으로 대강 챙겨 주면 될 것을 저렇게나 정성 들이는 이유를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워낙에 세드릭의 태도가 강경하여 말을 아끼고 있었다.
빵을 우물거리며 한참 윈터를 응시하던 채스터티가 갑자기 히죽 웃었다.
“블랙은 어때? 훨씬 멋있는 이름이잖아.”
“……설마 까매서 블랙은 아니겠지? 만약에 그렇다면 넌 날 비난할 자격 없어.”
“얘가 뭘 모르네. 얘는 장차 흉포하고 잔인한 용으로 자랄 거야. 그런 훌륭한 용에게는 응당 훌륭한 이름이 붙어야지!”
채스터티는 그리 말하며 의자를 박차고 윈터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주변이 시끄럽거나 말거나 고기에만 열중하는 용을 억지로 제 편을 보게 만들었다.
“응? 아기 용아. 너는 어떠니? 블랙이 좋지? 그렇지?”
하지만 윈터는 새로운 이름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아직도 배가 고픈지 윈터가 낑낑거리며 고기를 달라 아우성쳤으나, 채스터티의 고집스러운 손아귀에 가로막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채스터티는 성난 용의 송곳니에 손가락을 깨물리고 말았다.
“악! 아파!”
채스터티가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검지를 치켜들며 수선을 떨었다. 세드릭이 한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윈터를 달랬다. 다시금 고기를 날름 받아먹는 용의 표정이 그리 밝을 수가 없었다.
그즈음 디아나가 식당에 들었다. 서재에서 공부하다 졸기라도 했는지, 왼뺨에 발갛게 눌린 자국이 선명했다.
“어라, 스승님은?”
“약속 있으시대.”
디아나는 금세 납득하며 자리에 앉았다. 요물 고양이 데이지가 곧바로 접시를 대령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눈앞의 진수성찬보다 갓 태어난 용에 더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얘는 생고기를 먹는구나. 비리지 않을까?”
그리 말하며 윈터에게로 손을 내뻗는 순간이었다. 돌연 사납게 돌변한 윈터가 여린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디아나에게 달려들었다. 세드릭이 깜짝 놀라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윈터!”
그의 고함에 윈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세드릭은 황급히 맞은편으로 건너가, 디아나의 얼굴에 붙은 윈터를 강제로 떼어 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씨근덕거리는 윈터와 달리, 디아나는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괜찮아?”
세드릭의 물음에 디아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새 빨간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지만,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던 세드릭이 이내 윈터를 안고 식당을 나갔다. 얼결에 뒤에 남겨진 채스터티가 울상으로 웅얼거렸다.
“내가 물렸을 때는 가만있었으면서…….”
세드릭이 향한 곳은 침실이었다. 요람에 윈터를 앉히고 촛불을 밝히자, 윈터가 자꾸 안아 달라며 치근덕거렸다. 며칠 새 어리광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단호했다.
“윈터. 왜 디아나에게 달려든 거야?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윈터가 괜스레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세드릭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내 말 알아듣는 거 다 알아.”
이제는 하품까지.
“계속 못 듣는 척해 봐. 내일은 사탕 안 줄 거니까.”
사탕. 그 말에 윈터의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왔다. 사죄하듯 애절한 눈빛은 덤이었다.
“좋아. 내 말 이해하는 거 맞지?”
끄덕끄덕.
“그럼 앞으로는 디아나한테 그러면 안 돼?”
도리도리.
“싫다고? 어째서?”
윈터가 곤란한 기색으로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몸짓을 보였다. 세드릭이 좀체 알아듣지 못하자 답답한 듯 목청을 울리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트일 말문이 아니었다.
“그래. 너도 이유가 있으니 그랬겠지. 하지만 그래도 안 돼. 지금은 네가 아직 어려서 괜찮다지만, 조금만 더 크면 넌 아주 위협적인 존재가 될 거야. 그때도 지금처럼 굴면 다른 사람들을 해치게 돼.”
용이란 본디 지상 최강의 포식자였다. 용의 숨결에 초목이 뿌리 뽑히고, 용의 발짓에 집채가 주저앉았다. 무의식적인 행동조차 다른 이들에겐 재난이 될지니, 성체의 용이란 그다지도 위협적인 존재였다. 자칫 잘못하다간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본능을 억누를 줄 알아야 했다. 아직 어린 용에겐 가혹한 일이나, 야속하게도 지금은 용이 득세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이제 지상에 남은 용은 윈터 하나뿐. 세상에 빌붙어 살려면 다른 종족과 조화롭게 어울려 사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많이 힘들다는 거 알아. 어떻게 힘들지 않겠어.”
세드릭이 조심스레 윈터의 날개를 쓰다듬었다. 풀 죽은 윈터가 울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힘겨우면 언제든 날 의지해. 난 언제든 네 곁에 있을 테니까.”
윈터는 앞발로 세드릭의 손을 꼭 쥐며 품에 안았다. 파충류 특유의 낮은 체온이 느껴졌다. 여전히 낯선 감각이나 마냥 껄끄럽지는 않았다.
세드릭은 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윈터를 훌륭한 용으로 길러 내겠다고. 그리해 공포로 군림하는 외로운 생을 살지 않게 하겠노라고.
윈터가 부화하자, 바바라는 이사할 장소를 찾아 헤맸다. 용은 빨리 성장하는 종족이었다. 아직은 어려 괜찮을지 몰라도, 오래지 않아 오그처럼 대도시에서 기르기엔 여러모로 문제가 많을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어릴 때 이사하는 편이 백번 나았다.
그리하여 선택된 곳이 바로 네틀턴이었다. 네틀턴은 잉그람 남서쪽의 산간 지방으로, 평균적으로 이웃 간격이 두세 시간가량 떨어진 아주 외진 시골이었다. 인적 드물고 물가가 멀다는 점에서 용을 기르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윈터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깜짝할 새 머리가 세드릭의 무릎께에 닿았고, 뚱뚱한 요물 고양이 데이지를 쉬이 깔아뭉갤 정도로 무거워졌다. 자랄수록 통제하기도 어려워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윈터는 세드릭의 말만은 아주 잘 들었다. 다른 사람의 고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면서, 세드릭의 한마디에 얌전해지는 꼴이 그보다 얄미울 수 없었다.
윈터의 성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를 뿐, 실은 아이들도 꾸준히 자라나고 있었다. 이제 키가 자라지 않는 것 같다며 투덜거리는 채스터티는 완연한 여성의 몸을 갖춰 나갔고, 세드릭은 어느새 디아나의 신장을 넘어섰다. 사실 세드릭이 평균 신장이고, 디아나는 옛날부터 키가 콤플렉스일 만큼 작달막했으나.
“언니는 큰데 어째서 나만 작은 거야?”
“위대한 마녀 그리젤다 솔이 너희 언니에게만 좋은 자질을 전부 물려줬나 보지. 마법 실력에 미모에 키에……. 디, 디아나? 잠깐! 잠깐만! 진정해!”
그날, 채스터티는 불타는 장작도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식당에서의 일방적인 난투극 이래 누구도 감히 디아나에게 키를 언급하지 못했다. 적어도 바바라 앞에서는 늘 얌전한 척 내숭을 떨던 디아나가 그리 돌변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 ⚡ ⚡
후미진 시골에서는 시간도 느릿하게 흘러갔다. 네틀턴에서 보낸 반년간 벌어진 사건이란, 고작 바바라가 새로운 연인을 저택으로 들인 것뿐이었다. 그는 바바라보다 예닐곱 살은 어려 보이는 낯선 사내였다. 첫 만남부터 빙글거리는 모습이 영 객쩍다 여겼더니, 역시나 속이 시커먼 사람이 분명했다.
“어머니의 재산을 노리는 게 틀림없어.”
채스터티는 그렇게 확신했다.
“차라리 저번 남자가 낫지. 그 사람은 적어도 어머니를 사랑하는 게 느껴졌잖아?”
“혹시 알아. 저 남자도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할지.”
“절대! 전혀 아냐!”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하였지만, 이번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세드릭이나 디아나도 말을 아꼈을 뿐이지, 채스터티의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다만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사생활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걸 알기에 침묵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언니를 만나러 간다며 노래를 부르던 디아나가 부산스럽게 저택을 떠난 아침. 평소처럼 윈터에게 식사를 챙겨 주며 하루를 시작하던 세드릭은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에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어머니와 채스터티, 게다가 데면데면한 어머니의 연인까지 전부 모여든 문가. 함부로 운을 떼지 못할 정도로 어색한 분위기만 감도는 가운데, 헐레벌떡 달려온 세드릭이 우두커니 멈춰 섰다.
세드릭은 가만히 숨만 몰아쉬었다.
훤하게 열린 대문 앞에 어쩐지 아주 낯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세드릭.”
아버지가 돌아왔다.
세드릭은 말없이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천진하게 다가온 윈터가 그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았으나, 평소처럼 재롱을 받아 줄 겨를도 없었다. 당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네 편지를 받은 것이 불과 반년 전인데 그새 용이 많이 성장했구나.”
문득 에드윈이 다가와 곁에 앉았다. 눈초리를 세우며 낯선 사람을 경계하던 윈터가 돌연 두 사람을 갈마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드릭은 나이를 먹을수록 아버지를 빼닮고 있으니, 용의 눈에도 부자간의 닮은 모습이 신기로운 모양이었다.
“네 이름이 윈터라고?”
에드윈이 가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며 경계를 세우던 윈터는 오래지 않아 의심을 허물고 에드윈의 손등에 주둥이를 마구 비벼 댔다. 낯선 사람은 물론이요,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가족들조차 무시하기 일쑤인 윈터가 이다지도 살갑게 구는 모습을 세드릭도 처음 보았다.
“……신기하네요.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낯을 많이 가리는 모양이구나. 예전에 너도 그랬지.”
기실 낯가리는 건 지금도 여전했다. 하지만 거의 8년을 떨어져 지낸 아버지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기에 세드릭은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8년. 짧다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나, 고작 열네 살 먹은 세드릭에겐 천금보다 값진 시간이었다. 그리 귀중한 시기에 부재했던 아버지가 미울 법도 하건만, 세드릭은 어쩐지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었다.
물론 한때는 그리움이 쌓이고 쌓여 아버지가 원망스럽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듯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족했다.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예감에 시달렸던 시절이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많이 자랐구나.”
에드윈이 차분하게 말했다. 세드릭은 애써 눈물을 참아 냈다.
“아버지는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어요.”
“그럴 리가.”
“정말이에요. 제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예요.”
이제 얼굴에서 세월이 보이는 바바라와 달리, 에드윈은 여전히 싱그러운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 전 현관에서 보았던 첫 모습이 기억 속 작별 인사하던 모습과 한 점 다르지 않아, 세드릭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변하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혹시나 거리에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그럼 내가 널 알아보았겠지.”
“전 많이 자랐잖아요.”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면 되겠니. 아까도 바로 널 알아보았단다.”
에드윈은 그리 말하며 세드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실은 용이 부화했다는 편지를 받자마자 오고 싶었는데, 그사이 죄인이 달아나는 바람에.”
2년 전부터 에드윈은 잉그람의 군복을 벗고, 발푸르기스 평의회 소속 사냥꾼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편지에 대놓고 밝히지 않았을 뿐, 군인으로서 거인 죽이는 일을 탐탁잖게 여기던 걸 생각하면 좋은 변화였다.
“이번에는 어디에 다녀오신 거예요?”
“메시나 남부를 순회하고 왔다. 팔리아치 가문이 통치하는 뮈티레 요새에도 잠시 들렀는데, 영 대접이 좋지 못하더구나. 새로운 수장이 상당히 경계심이 많은 것 같아.”
“베가의 낙뢰를 내리시잖아요. 낙뢰의 위력을 아는 사람이면 경계하지 않을 수 없겠죠.”
“누가 들으면 나만 낙뢰를 내리는 줄 알겠구나.”
세드릭이 자그맣게 웃으며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즐거워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그에 에드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여 무어라 덧붙이려던 세드릭도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보기 좋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진심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언제고 어려운 일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는 늘 바깥을 떠도는 사람이었다. 일평생 한곳에서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보통의 마법사와는 달리 천성적으로 방랑벽이 심했다. 그런 사람이 국경에 처박혀 거인을 학살하는 게 편할 리 없었다. 그에겐 군인으로 복무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으나, 그렇다고 학살에 취미가 붙는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에드윈은 무의미한 살육을 꺼리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동안 너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구나. 편지조차 뜸했으니 미안하다는 말도 턱없이 부족하겠지.”
“저는 괜찮아요. 이렇게 보러 와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걸요.”
“내게 기대하는 건 이제 그 정도뿐이구나.”
에드윈이 쓰게 웃었다. 세드릭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국경에서는 우편물이 잘 분실된다고 들었어요. 당연히 편지가 뜸할 수밖에요. 더구나 사냥꾼이 되시면서는 편지할 주소가 마땅찮아졌으니…….”
“세드릭. 너는 내게 화내도 돼. 왜 지금까지 보러 오지도 않았는지, 왜 이제야 온 건지 물어볼 자격이 있어. 그렇게나 내 입장을 이해하려 애쓸 필요 없다.”
다정하게 달래는 목소리였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던 세드릭이 무심코 입을 열었다.
“……왜 오신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오리라는 기대는 버린 지 오래였다. 그저 독립하거든 한 번쯤 찾아가 얼굴이라도 뵈어야겠다는 가마득한 다짐만 심었을 뿐. 느리나마 잊지 않고 답장을 보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니 용이 부화했다고, 용의 주인이 되었다고 영영 떠나갔던 사람이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나.
“8년 전에 자일스를 떠난 건 내가 베가이기 때문이었다.”
에드윈이 눈을 내리뜨며 조용히 말했다.
“너도 잘 알다시피 낙뢰를 향한 자일스의 증오는 상상을 초월한단다. 당시 자일스 일족은 다시는 용을 보지 못하리라 지레짐작하고 있었어. 그러니 마지막 용 페넬로피를 처참하게 죽인 베가를, 베가의 낙뢰를 어찌 곱게 볼 수 있었겠니. 그래서 난 네가 바바라를 닮길 바랐다. 자일스의 이름을 이어받을 네가 자일스의 증오를 받길 원하지 않았어.”
세드릭은 말없이 양손을 꼭 맞잡았다. 원로들의 비난하는 눈빛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릴 적 아득한 신상처럼 자신을 굽어보던 레오나드 자일스는 악몽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너는 나를 너무 빼닮았어. 아버지로서는 흐뭇한 일이지만, 네가 일족에게 배척받는 이유가 그것이니 어찌 흐뭇하기만 하겠니. 자일스도 베가도 널 받아들여 주지 않겠다면 차라리 너를 데리고 멀리 떠나고 싶었지만, 그건 네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지. 그래서 자일스를 떠났다. 네가 자일스이길 원한다면, 네가 자일스로 인정받길 원한다면 내가 곁에 있어 좋을 것이 없으니까.”
에드윈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떨리는 숨결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너는 내가 없이도 잘 자라 주었어. 용을 거느리게 되었다면 이제 누구도 너를 부정하지 못할 거다. 자일스에게 용이란 본디 그런 존재야.”
세드릭은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에드윈의 옆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는 사랑을 잃은 남편이자, 아버지를 너무 닮은 죄로 배척받는 아들의 아버지였다. 혼자 남겨질 아들을 생각하며 자책으로 스스로 난도질했을 세월은 또 얼마일까. 이미 흘러간 세월의 비탄을 애써 억누르는 낯빛이 어쩐지 서글펐다. 늘 뒷모습으로만 남았던 아버지가 이토록 무너지는 모습을 세드릭은 난생처음 보았다.
“제가 성장하길 기다리셨군요.”
세드릭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제가 자일스의 마법사로 인정받는 날만을 기다리신 거예요.”
에드윈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성숙한 어른답게 비애의 흔적을 얼굴에서 빠르게 지워 냈다. 이제는 익숙해진 무덤덤한 표정이 가면처럼 덧씌워졌다.
“그간 외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많이 외로웠어요. 그때 그냥 여기 남지 말고 아버지를 따라갈 걸 싶기도 했고. 저는 옛날부터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잘 따랐잖아요.”
“나는 저택에 붙어 있는 때가 얼마 없었으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그때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절 힘겨워하신다는 걸.”
세드릭이 과거를 회상하며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말끄러미 아들을 쳐다보던 에드윈이 물었다.
“세드릭. 나를 원망하니?”
“아니요.”
“그럼 바바라는?”
세드릭은 침묵했다. 지금은 많이 무뎌졌다지만, 따뜻한 말소리조차 박했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까지 죄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지난 날 고독했던 상처가 너무 깊었다.
에드윈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때, 너와 바바라를 떠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아마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게 죄가 없는 건 아니야. 나는 바바라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고, 어린 네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어.”
“하지만 아버지는 절 위해 그러셨잖아요.”
“이유가 있다고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란다. 더구나 바바라에겐 힘겨운 결정이었어. 너를 위해 날 보내 주긴 했지만, 그녀에겐 함께 책임을 나눌 동반자가 필요했으니까.”
에드윈이 말했다.
“바바라를 원망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겠다. 너와 그녀 사이에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니까. 지난 8년의 세월을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해.”
“…….”
“다만 바바라를 향한 원망을 내게도 나눠 주지 않겠니.”
세드릭은 망연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가 이런 말을 꺼낼 줄은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바바라가 네가 원했던 어머니가 되지 못한 데는 나의 책임도 분명하단다. 내가 아버지로서의 몫을 다하지 못했기에 바바라의 몫이 늘어난 거야. 그러니 너의 원망을 나에게도 나누어 다오. 원망하는 마음이 널 좀먹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걸 바라며 널 떠난 게 아니야.”
간절한 호소였다. 세드릭은 잘게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뗐다.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을 말하기가 이다지도 어려웠다.
“……알아요. 어머니도 많이 힘드셨겠죠.”
바바라는 늘 가문과 아들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표 나게 한쪽의 편을 들 수가 없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바라는 아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자 노력했다. 가문의 원로들이 바라던 대로 용알을 채스터티에게 줄 수도 있었는데, 구태여 경쟁을 시킨 것도 그랬다. 변덕스러운 채스터티가 끈질기게 용알을 돌보지 못하리란 것을 바바라가 모를 리 없었다. 애초부터 세드릭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저는 너무 많은 걸 바랐어요. 어머니에게 저만이 유일한 존재이길 바랐지만 그렇지가 못했죠. 이기적인 소원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 버렸어요.”
멀어졌을 때 더욱 애틋한 관계도 있는 법. 어쩌면 모자(母子)는 너무 가까웠기에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절 사랑하세요?”
에드윈은 지그시 아들을 응시했다. 다물린 입술은 도무지 열릴 줄을 몰랐다. 바위처럼 단단하던 표정이 조금 어긋난 것도 같았다.
어색한 침묵을 잠자코 버텨 내던 세드릭이 조금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곤란하시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아니다. 지금 너무 당황해서……. 아, 네 질문이 당황스러웠다는 거다. 네가 그런 질문을 할 만큼 내가 확신을 주지 못했나 싶어서.”
에드윈은 한 손으로 입가를 감싸며 그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기나긴 고민 끝에 대답이 이어졌다.
“당연히 널 사랑해. 편지마다 그렇게 썼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니?”
“모든 편지에 쓰지는 않으셨어요.”
“……미안하다. 전부 내 탓이야.”
에드윈이 묘하게 풀 죽었다.
“살면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바바라와 너란다. 물론 지금은 널 가장 사랑해.”
“저도요.”
“고맙다만 세드릭, 바바라에겐 그리 말하면 안 된다.”
“물론 어머니도 사랑하죠. 그만한 사랑에 순서를 따질 수가 있나요.”
그때, 윈터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리 잘 따르던 에드윈을 대놓고 적대시하며, 세드릭의 다리를 꼭 부여잡는 폼이 누가 봐도 질투의 표상이었다.
세드릭은 피식거리며 윈터의 날개를 쓰다듬었다.
“당연히 너도 사랑하지.”
하지만 윈터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다. 꼬리로 연신 에드윈과 스스로를 가리키며 분한 표정을 짓는 용을 물끄러미 관찰하던 세드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버지랑 너 중에서 누굴 더 사랑하냐고?”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윈터를 바라보던 세드릭이 고개 들어 에드윈을 보았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부자의 표정이 일치했다.
곧이어 명랑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드윈은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급히 오느라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있는지 장장 8년 만에 보는 바바라나 채스터티와도 길게 담소를 나누지 못했다.
“바바라. 의사의 진찰을 받아 봐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떠나기 전, 에드윈은 머뭇거리며 그런 말을 건넸다. 바바라는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남편을 오래간만에 만났기 때문일까, 그녀의 표정은 내내 기묘했다.
세드릭은 아버지를 배웅하고서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다.
사랑.
어쩐지 가슴이 간질거렸다. 사랑한다는 말을 이렇게나 많이 표현했던 날이 또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 그가 과거 어머니에게 그러했듯 버거울 정도의 사랑을 보내는 어린 용과, 변함없이 자신을 위해 주는 아버지. 꿈처럼 찬란한 존재가 둘이나 있었다.
세드릭은 오가는 사랑이 전해 주는 행복을 만끽했다.
이제는 정말로 유모의 말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에드윈이 네틀턴에 들른 지도 벌써 넉 달이 지났다.
네틀턴은 구석진 시골이기에 여기로 이사 와 맞이한 손님은 그가 전부였다. 바빠서 자주 들르지는 못했지만, 정기적으로 꼭 편지나 선물을 한 아름씩 보내왔다. 그때마다 세드릭의 낯빛이 환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바바라와 에드윈의 재결합을 바라 마지않던 채스터티는 지금의 미묘한 상황이 자못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바바라는 에드윈의 방문에 대놓고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으나, 딱히 환영하지도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세드릭의 손님이라고 분명히 선을 긋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재결합할 날은 몹시 요원해 보였다.
“어젯밤에 어머니께서 망나니랑 다투시는 소리를 들었어. 그 망나니가 이번에는 어머니의 보석을 몰래 팔아먹은 것 같아. 이대로라면 그놈이 쫓겨나는 것도 머지않았어!”
채스터티가 스테이크를 자르며 흔흔히 말했다. 어머니의 젊고 날티 나는 연인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대담하기도 하지. 어떻게 보석을 훔쳐 갈 생각을 했을까?”
“그러게나 말이야. 디아나, 너는 7년이 넘도록 촛대 하나 팔아먹을 생각을 못했는데.”
디아나가 울컥하여 채스터티를 쏘아보았다.
“꼭 너는 그런 경험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으음. 글쎄, 어떨까?”
“나한테 들키기만 해 봐. 스승님께 바로 말씀드릴 거야.”
“어머나. 무서워라. 막내, 방금 디아나가 하는 말 들었니?”
채스터티가 키득거리며 옆에서 얌전히 식사하는 세드릭을 툭툭 건드렸다. 세드릭은 우물거리던 음식을 모두 넘긴 뒤에야 느긋하게 대꾸했다.
“이제 너도 적당히 해. 골동품 몰래 팔아넘긴 전적이 한두 번이 아니잖아. 그만하면 어머니도 꽤나 야단치실걸.”
“뭐야. 너 알고 있었니?”
“그럼, 그렇게 허술한 도둑질을 아무도 모를 줄 알았어?”
세드릭이 혀를 차며 말했다.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던 채스터티가 포크로 감자를 푹 찍었다.
“우리 막내, 윈터가 부화한 뒤로는 정말로 성격 많이 죽었나 봐. 옛날 같았으면 옳다구나 하고 어머니께 조르르 달려가 일러바쳤을 텐데. 그렇지 않니, 디아나?”
맞은편에서 샐러드를 뒤적거리던 디아나가 흘끗 세드릭을 보았다.
“확실히 옛날보단 얌전해진 것 같네.”
디아나는 그리 말하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대체로 음식은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디아나가 유일하게 싫어하는 것이 치커리였다. 그러니 치커리만 가득인 샐러드가 기꺼울 리 없었다.
결국 디아나가 다음으로 집어 든 것은 식빵이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을 한 손에 들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세드릭이 무심하게 물었다.
“뭐 찾아?”
“딸기 잼.”
세드릭은 생선 살을 입에 넣으며 한편으로 마법을 부렸다. 식탁 구석에 처박혀 보이지 않던 잼이 미끄러지듯 디아나의 앞으로 날아왔다.
디아나가 형식적으로 감사 인사를 하고, 세드릭이 묵묵히 식사만 계속하는 광경.
곁에서 둘을 지켜보던 채스터티가 남몰래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하여 식사가 모두 끝난 뒤, 채스터티는 서재로 돌아가려는 세드릭의 팔을 붙들었다. 무슨 용건이냐는 듯한 세드릭의 시선은 일단 무시하고, 계단을 올라가는 디아나의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즈음에야 그녀가 은밀히 속삭였다.
“막내. 너 디아나 좋아하지?”
그 즉시, 세드릭의 표정이 일변했다.
“너 미쳤어?”
“아니. 나는 완전히 정상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미친 소리를 지껄일 리가 없는데.”
세드릭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그리 말했다. 억울해진 채스터티가 의자 팔걸이를 팡팡 내리치며 토로했다.
“정말이야! 확실하다니까? 언제 내 말이 틀린 적 있니?”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어.”
채스터티는 말없이 팔짱을 끼고 세드릭을 훑어보았다. 네 설익은 감정 따윈 전부 이해한다는 듯 자비로운 표정은 덤이었다. 세드릭은 몹시 어처구니없어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불현듯 떠오른 불길한 예감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 설마 미래를 본 거야?”
“응? 아니. 그냥 내 직감인데.”
그럼 그렇지. 세드릭은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졸리면 남 귀찮게 하지 말고 가서 자든가.”
“너 지금 내 직감 무시하니?”
“더는 들어 줄 수가 없네.”
세드릭은 미련 없이 식당을 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등에 대고 채스터티가 소리 죽여 외쳤다.
“자기 마음 모르는 것처럼 바보 같은 짓도 없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빨리 인정하렴.”
이처럼 채스터티가 흰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원수 같은 누이와 평생을 함께였던 세드릭은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녀의 예지가 확실하게 들어맞는 것과는 별개로 채스터티는 만사에 지나친 의심을 품었다. 직감이란 말로 포장한 이번 헛소리도 크게 다르진 않을 터였다.
그래야 하는데.
“세드릭.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멍하니?”
불쑥 들려오는 소리에 세드릭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서 디아나가 의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드릭은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아무것도 아냐.”
“정말?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거기 망원경은 높이를 좀 조절하는 게 낫지 않을까?”
디아나는 세드릭이 멍하니 조작하고 있던 망원경을 가리켰다. 좋게 돌려 말하긴 했어도 거꾸로 바닥에 처박혀 돌바닥이나 비추는 렌즈가 마땅찮을 리 없다. 세드릭은 말없이 나사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근자에 세드릭은 마음이 몹시 심란했다. 요는 직감 운운하던 채스터티의 발언 탓인데, 당시는 물론이요 지금도 헛소리 치부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상스럽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심지어 어젯밤 잠을 설치면서는 채스터티가 사특한 저주라도 부린 건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할 정도였다. 물론 그녀에게 이런 저주를 내릴 만한 능력이 없다는 걸 곧 깨달았지만 말이다.
고민 끝에 세드릭은 평소 디아나와 자주 붙어 있기 때문이리라 결론지었다. 이전에는 그런 걸 의식한 적조차 없으니, 이 쓸데없는 번민은 전부 채스터티의 탓이었다. 괜한 벌집 들쑤시는 게 그녀의 악독한 취미긴 했어도, 이 정도로 휘둘려 본 적 없던 세드릭은 제법 짜증이 났다. 공연히 건드리는 채스터티도 짜증스럽지만, 이렇듯 끌려가는 자신도 짜증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야! 잠깐! 그걸 그렇게 다루면 어떡해!”
별안간 디아나가 황급히 손을 내뻗었다. 세드릭이 흠칫하며 물러나자, 디아나는 얼른 망원경을 붙들며 재차 나사를 만지기 시작했다.
“여기 이 나사를 풀어야지, 애먼 데를 풀었잖아! 너 오늘 정말 이상하다.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디아나가 핀잔을 주었다. 세드릭이 머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평소에 안 하던 실수를……. 됐으니까 넌 별 뜰 때까지 저기 소파에 앉아 있어. 불안해서 못 맡기겠네.”
세드릭은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소파로 향했다. 독설을 자제한 뒤로는 자연스레 디아나도 유해졌지만, 아직까지도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인지 바바라를 대하듯 상냥한 태도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어릴 적 새겨진 인식이란 그리도 바꾸기 힘든 것이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은 채로 세드릭은 물끄러미 디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달빛이 내리쬐는 유리천장 아래. 작달막한 키로 제 몸집만 한 망원경을 이리저리 조절하는 모습이 딱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디아나는 재능만 믿고 노력은 일절 하지 않는 채스터티와는 정반대의 부류였다. 암흑의 별 칼리스토를 탄생성으로 타고났을 만큼 재능은 바닥이면서, 마법에 들이는 공은 저택의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세드릭도 그녀의 성실함에는 일찍이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인지 디아나는 유독 이론에 밝았다. 깨친 지식을 마법으로 구현하지 못할 뿐이지, 서재의 웬만한 서적은 전부 독파했을 만큼 박학다식했다. 한때 악마까지 소환했던 걸 보면 정말로 서재에 숨겨진 책까지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굳이 호오를 가리자면 세드릭은 디아나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일단 채스터티와 반대되는 부류기에 그러했다. 노력하는 독종이란 점에서 둘은 유사한 부분이 있었고, 어쩌면 비슷하기에 그토록 부딪쳤는지도 몰랐다. 꼬일 대로 꼬였던 어린 세드릭과, 독이 오를 대로 올랐던 어린 디아나는 참으로 진득하게도 싸워 댔다.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서로에게 갖은 모욕과 상처를 주었다.
그렇기에 세드릭은 쉽게 판별할 수 없었다. 그가 시작한 관계였다. 처음에 단추를 잘못 꿴 것은 그가 먼저였다. 그가 이성적인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만일 채스터티의 말이 맞다면 당연히 들 수밖에 없는 의문이다.
내게 디아나를 좋아할 자격이 있을까?
“어? 세드릭, 이리 와 봐. 아폴리네르가 뜬 것 같아!”
불현듯 디아나가 손짓했다. 세드릭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편으로 향했다. 망원경 렌즈에 눈을 갖다 대니, 실제 관측하기로는 익숙지 않은 별이 망막에 맺혔다.
“그 옆에 있는 별이 순수의 별 아담과 처단의 별 시나폴리야. 겔록의 사다리가 맞는 것 같지?”
“응.”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
역천의 별 무제타와 가장 근접한 별이자, 겔록의 사다리를 이루는 천체. 날씨가 쾌청한 날에도 웬만해서 관측하기 힘든 별로, 요즘처럼 날이 쌀쌀해지는 초가을에나 하루 이틀 겨우 볼 수 있었다. 작년에는 아예 관측하지 못했으니 장장 2년 만에야 겨우 육안으로 보게 된 귀한 별이었다.
“지금 시간이…… 새벽 1시 23분. 스승님께서 언제까지 관측하라고 하셨지?”
“겔록의 사다리는 다 관측하라고 하셨을걸. 심미의 별 베아트리체가 가장 늦게 뜨니 동틀 때쯤에야 끝나겠네.”
디아나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앞으로 장장 서너 시간 여기서 대기해야 한다면 오늘 밤은 꼬박 새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본채에서 책이라도 몇 권 챙겨 올 걸 그랬다.
한참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기록하던 세드릭도 오래지 않아 디아나의 곁에 앉았다. 오랜만에 관측하는 별이지만,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에 대한 기록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어마어마하게 쌓여 왔다. 아주 가끔씩은 변화하는 별도 있기에 마법사라면 응당 망원경을 가까이해야 하지만, 행운인지 불행인지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는 지금까지 단 한 차례의 변화도 기록된 적 없는 불변의 별이었다.
문득 정적이 내려앉았다. 세드릭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지만, 평소 어색한 적막을 못 견뎌 하는 디아나는 달랐다.
“혹시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에 대한 이야기 알아?”
참다못한 디아나가 말문을 열었다. 흘끗 한눈으로 그녀를 본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별에 얽힌 설화 정도는 옛적에 들어 알았지만,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나가고자 하는 디아나의 눈물겨운 노력을 가상하게 여긴 것이었다.
“되게 신기한 얘기야. 한번 들어 볼래?”
디아나는 신나게 말을 풀어냈다.
요컨대 이런 이야기였다.
옛날 옛적 아폴리네르라는 이름의 청년이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청년에게 구애하는 여인이 많았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순애보였다. 그녀는 바로 별들의 왕 둘시네아였다.
여신의 사랑으로 망각의 강을 건너지 않은 둘시네아는 그 당시 이미 하늘의 질서를 확립하여 별들의 경애를 독차지하는 왕이었다. 사계의 별이 항상 그녀의 곁을 지켰고, 여왕이 내려 준 왕관이 그녀에게 영광을 더했다. 한낱 인간이 마음에 담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한데 그즈음 서쪽 하늘에서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본디 여신의 주적(主敵)으로 감히 여신의 허락도 없이 하늘에 오른 역천의 별 무제타가 바로 그것이었다. 무제타는 변덕스러운 여신을 비난하며, 여신이 왕으로 내세운 시골 처녀 둘시네아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무제타의 목적은 다름 아닌 둘시네아의 왕좌였다.
하늘은 다시금 분란에 휩싸였다. 여신은 휘하의 별들로 하여금 역천의 별 무제타에게 맞설 것을 명했으나, 별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두려워했다. 역천의 별 무제타가 이미 별 하나를 집어삼킨 전적이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개탄하는 여신의 앞으로 아폴리네르가 용감히 나아갔다.
― 제가 무제타를 무찌르겠습니다.
하지만 여신은 그를 믿지 않았다. 전능한 여신은 아폴리네르가 둘시네아를 척애한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챘다.
― 둘시네아는 나의 여인이다. 감히 네게 보여 줄 성싶으냐?
― 그분의 곁에 제가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발치에서라도 지키게 해 주십시오.
결국 여신은 아폴리네르를 하늘로 올렸다. 별들의 왕 둘시네아와 가장 먼 곳으로, 역천의 별 무제타와 가장 가까이 맞닿은 곳으로.
당시 서쪽 하늘은 지키던 별들이 모두 달아나 황량해진 곳이었다. 아폴리네르는 연기 사이로 숨어 때를 기다렸다. 별 하나를 삼키고 기고만장했던 무제타는 주변 감시가 소홀했다. 그리고 아폴리네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열흘 밤낮 겨누어져 있던 화살이 비로소 무제타의 허리에 박혔다.
역천의 별 무제타의 비명 소리가 온 하늘을 진동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나머지 별들이 진군하여 무제타를 멀리 변방으로 몰아냈다. 아폴리네르가 아니었다면 불가한 승리였다.
그예 여신은 약속대로 아폴리네르에게 무제타의 감시를 맡겼다. 아폴리네르는 비로소 하늘의 별이 되었으나, 호시탐탐 침략할 기회만 노리는 무제타를 경계하느라 사랑하는 둘시네아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별들의 왕 둘시네아는 그의 연심을 눈치채지 못했다.
역천의 별 무제타는 아직도 1년에 한 번씩은 꼭 기세를 펼쳤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때를 위해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는 매일을 서쪽 하늘만 경계하며 보낼 터. 애당초 그의 원으로 오른 하늘이긴 하나, 과연 아폴리네르는 아직도 둘시네아를 사랑할까. 아니면 이미 옛적에 잊었을까.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를 전한 목동들은 항상 아폴리네르의 마음을 두고 내기를 했다고 전해지지만, 기실 답은 별이 보여 주고 있었다.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는 아직까지도 충직하게 변경을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이야기를 끝마친 디아나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뭐를?”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 말야. 어떻게 생각하냐고.”
디아나의 질문은 어쩐지 오래된 기억을 되살렸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키가 절반은 작았을 무렵, 아직 독립하지 않았던 설리번이 아폴리네르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어떻게 생각해?’
‘뭐를?’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 말야.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때 뭐라고 했더라. 가만히 추억에 잠겨 있던 세드릭이 무심코 입을 열었다.
“슬픈 이야기네.”
당시도 지금도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에 얽힌 이야기에 대한 감상은 같았다. 슬프다. 슬픈 이야기다. 하지만 설리번과 채스터티는 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도리어 비웃기 바빴다.
‘슬프다고? 대체 어디가?’
‘막내야, 이건 멍청한 얘기지! 세상에 수천 년이 넘도록 한 여자만 사랑한다는 게 말이나 되니? 게다가 사랑을 쟁취할 생각은 못 할망정, 만나지도 못하는 곳에서 내내 무제타만 경계한다고? 세상에, 나는 이렇게나 멍청한 이야기는 처음 들어!’
영원한 사랑은 없다. 그것이 척애라면 더더욱.
그야말로 수많은 마녀‧마법사들이 진리처럼 여기는 말이었다. 마법 사회에서 사랑이란 그보다 비논리적인 감정이 없으리라 공공연히 낮잡아 보는 것이었으며, 애끓는 척애는 더욱 그러했다. 합리와 논리를 신봉하는 그들에게 척애만큼 비생산적인 감정도 없었다.
마음에 들면 고백하여 쟁취하고, 만일 상대가 거부하면 포기하거나 강제로라도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사랑을 몰래 품고만 있는 것처럼 바보 같은 짓도 없었다.
그러니 사수의 별 아폴리네르는 세상에 둘도 없는 천치였다. 그는 애정을 말하지도 않았고,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을 오랜 시간 돌아보지도 않았다. 둘시네아는 영영 몰라줄 마음만 품고서 그녀를 지키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소유하지 않는 사랑에 도대체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슬프다고?”
예상대로 디아나 역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드릭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온전한 사랑을 내어 주지 않는 부모의 뒷모습만 따르며 사랑을 구걸하던 심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아마 그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마치 설리번과 채스터티가 그러했듯이.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디아나는 쉬이 수긍했다.
“나는 슬프기보단 대단하다고 느꼈어. 수천 년 동안 변치 않는 사랑은 얼마나 위대할까? 세상에 영원한 사랑은 없다지만, 이만한 사랑이면 영원을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세드릭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둘시네아는 영영 사랑을 몰라주는데도?”
“아폴리네르는 그조차 감내한 거잖아. 여신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을 다 알면서도 사랑하는 둘시네아를 지키고자 하늘에 오른 거고. 다른 사람들은 바보 같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폴리네르가 너무 대단해 보여. 그만한 사랑과 그만한 희생을 대체 누가 할 수 있겠어.”
디아나가 가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나는 아폴리네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이니, 여신도 그 정도는 허락해 주지 않을까?”
디아나는 그리 말하며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고요한 미소가 피어났다.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타인의 행복을 기원하며 마치 별처럼 만개했다.
그때서야 세드릭은 서글피 깨달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 ⚡ ⚡
이듬해, 바바라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오래전 살라티에병(病)에 걸렸단다. 지금까지는 거동에 불편함이 없어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다만, 이제는 조금 힘들 것 같구나.”
살라티에병은 오직 마법을 부리는 이만이 걸리는 위험한 병이었다. 본디 마녀의 육체는 별의 마력을 담는 그릇이기에 평범한 인간보다 노화가 느렸으나, 살라티에병이 들면 노화가 빨라지고 육신이 약해졌다. 운이 좋다면 평범하게 늙어 죽지만, 불운한 경우 쇠약해진 육신이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일찌감치 망각의 강을 건너는 수가 있었다.
“너희 셋을 모두 돌보기에 내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 채스터티는 이제 곧 성인이니 승급 시험을 치르도록 하고…….”
바바라의 지친 눈이 느리게 세드릭을 향했다.
“세드릭. 넌 아직 열여섯이지만, 승급 시험을 치르기엔 충분할 자질이야. 무리없이 합격할 수 있을 거다.”
세드릭과 채스터티는 차마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매일같이 보는 얼굴이기에 남들보다 노화가 빠르다는 점조차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병환을 알게 된 지금에서야 10년은 더 늙어 버린 바바라의 주름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바라가 오래도록 비밀로 간직했던 먹구름이 저택을 온통 뒤덮었다. 평소 그녀를 잘 따르던 세드릭과 디아나는 물론이요, 장난을 업으로 삼던 채스터티조차 시름에 잠겼다.
뒤늦게 수장의 병환을 접한 자일스 일족도 뾰족한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살라티에병은 원인도 치료 방법도 밝혀지지 않은 희소병이었다. 바바라처럼 병마가 오래된 경우에는 최대한 스트레스를 피해 편안하게 은거하는 것만이 그나마 오래 살 수 있는 길이었다.
“대체 언제 아신 걸까. 왜 지금까지 말씀 안 하시고.”
채스터티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디아나도 마찬가지로 우울한 얼굴이었다.
“우리가 스승님을 너무 힘드시게 한 건 아니겠지?”
“설마…….”
채스터티는 수상쩍게 조용한 세드릭을 건드렸다.
“막내. 너 정말 독립할 거니? 나야 이제 성인이라지만, 넌 아직 어리잖아. 괜찮겠어?”
“괜찮지 않아도 어쩔 수 없잖아. 어머니께서 두 사람 돌보기는 힘겨우신 것 같으니.”
디아나는 슬그머니 세드릭의 눈치를 보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격이라고, 스승의 친아들을 내보내고 자기만 남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저기, 세드릭……”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윈터를 저택에서 키우기도 슬슬 힘에 부쳤으니까. 이참에 제대로 교육할 장소를 찾아야지.”
요사이 눈에 띄게 몸집이 불어난 윈터는 식욕을 비롯한 잔인한 본성에 쉽사리 휘둘리고 있었다. 그나마 세드릭의 말은 들었으나, 다른 사람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자꾸 제멋대로 구는 것을 방치하다간 정말로 큰 사달이 일어나는 수가 있었다.
디아나는 조용히 납득했다. 하지만 울적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세드릭과 윈터, 그리고 채스터티까지 모두 떠나간 저택을 상상하니 제법 허전한 모양이었다. 그토록 징글맞다고 여기던 관계도 막상 이별을 앞에 두면 섭섭한 마음부터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기에.
오래지 않아 세드릭과 채스터티는 승급 시험을 치렀다. 세드릭은 당연스럽게도 필기와 실기 전부 만점으로 통과했고, 채스터티는 필기는 과락을 겨우 면했으나 실기에서 얼렁뚱땅 점수를 메웠다. 이번 달 실기시험에서 그녀가 곧잘 하는 비행마법이 문제로 나온 게 주효했다.
그리고 한 달이 흘러, 발푸르기스의 밤이 부쩍 가까워졌다.
“발푸르기스의 밤이 올해 열리는 게 다행이네. 아니었으면 몇 년을 이명도 없이 살 뻔했어.”
“넌 발푸르기스의 밤이 문제가 아니라 왕궁부터 들러야지. 국왕과 서약하지 않으면 의뢰도 못 받는 거 알잖아.”
“그런 걸 받아서 뭐 해. 어차피 매달 가문에서 보조해 줄 텐데.”
채스터티가 입을 비쭉이며 말했다. 세드릭은 갑갑한 마음에 한숨만 삼켜 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나, 어쩜 철이 없어도 저렇게나 철이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난주에 세드릭은 왕궁에 다녀오지 않았어? 그때 같이 가지.”
문득 디아나가 물었다. 채스터티는 기함했다.
“싫다, 얘. 막내는 서약 겸 국왕과 계약하러 간 거잖니. 옆에 있다가 내가 무슨 말을 들을 줄 알고. 나는 죽어도 얘처럼 국경에는 안 갈 거야.”
“누군 너랑 같이 가고 싶은 줄 알아?”
지난주 세드릭은 국왕과 장기 계약을 맺고 왔다. 윈터를 교련할 장소를 물색하다가 결정한 곳이 바로 국경이었기 때문이다.
거인 서식지와 맞닿은 북서쪽의 국경은 아직도 쉴 틈 없이 총탄이 오간다지만, 세드릭이 목적지는 비교적 평화로운 북동쪽이었다. 해안가에 위치하여 물을 두려워하는 용을 제압하기도 손쉬웠을뿐더러, 어쨌든 반제와 맞닿은 국경이니만큼 도시에선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는 지역이었다. 아닌 체해도 주변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윈터의 군기를 잡기엔 가장 적합했다.
“그런데 계약의 대가로 뭘 받기로 한 거야?”
둘의 시선이 곧장 세드릭에게로 모였다. 세드릭은 부러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별거 아냐.”
“별게 아니긴! 별거니까 그리 숨기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네가 알아서 뭐 할 건데?”
“물론 호기심을 충족시켜야지.”
세드릭이 고개만 내저었다. 조용히 소매를 만지작대던 디아나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는 못 볼지도 모르겠네.”
“그게 무슨 소리야?”
채스터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디아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채스터티 너야 독립해도 부근에서 살 테니 종종 보겠지만, 세드릭은 2년 뒤에나 돌아온다며.”
“그런데?”
“2년 뒤엔 나도 독립했을 거 아냐. 그럼 앞으로 볼 일은 없겠지.”
지나치게 명쾌한 대답이었다. 세드릭은 침묵했다. 곁에서 채스터티가 공연히 그를 흘깃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 입을 열거든 무슨 말이 나갈지 몰랐다.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디, 디아나 너는 독립하면 언니한테 갈 거랬지?”
채스터티가 과장해 웃으며 물었다. 디아나가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언니랑 같이 살기로 약속했어. 지금도 너무 기대돼.”
언니와 함께하는 것은 디아나의 오랜 꿈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주 입에 달고 살던 말이기에 세드릭도 채스터티도 당연하게 여기던 차였다. 하지만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디아나가 저리 매몰차게 언니만 바라는 것은 달랐다.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이라곤 해도 고작해야 1년에 하루 이틀 만나는 사이였다. 세드릭은 디아나가 도대체 무얼 믿고 저렇게나 자매를 믿고 따르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뒷모습만 보았던 자매가 마법 사회에선 드물게도 대단히 훌륭한 인품을 지녔는지도 모르지만, 저희와는 10년을 함께하고도 저렇듯 미련조차 보이지 않는 디아나의 태도가 기꺼울 리 없었다. 속으로만 삭히다가도 가끔은 울컥 치솟는 날이 있었다.
그래도 조금쯤은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좋을 텐데.
하릴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네.”
하지만 세드릭은 오늘도 말을 아꼈다. 채스터티는 항상 바보 같은 짓이라 매도하긴 했어도, 마지막에는 되도록 좋은 모습만 남겨 주고 싶었다. 머잖아 헤어질 그로서는 2년 뒤에 좋은 재회를 바라는 것만이 현실적으로 바랄 수 있는 원이었다.
남매는 그렇게 발푸르기스의 밤이 열리는 파펜하임산(山)으로 향했다.
“……저기, 용과 계약한…….”
“……과연 자일스의 차기 수장으로…….”
“……베가의 낙뢰를 내린다고…….”
세드릭은 낯선 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빠르게 걸었다. 이국의 낯선 풍광도, 이국의 낯선 얼굴도 이제는 물리도록 익숙해진 참이었다. 만류를 무릅쓰고 남매와 동행한 바바라가 어젯밤 쓰러진 뒤로 저도 모르게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도 같았다.
어째서 격년제로 개최되는지 전적으로 이해가 가는 대집회였다. 주요 마법 가문의 수장을 비롯하여 중앙삼국의 내로라하는 마녀‧마법사들이 모인 평의회는 물론이요, 새로운 세대를 기성세대에게 소개하는 자리조차 너절하기 짝이 없었다. 외부 세계에 무관심한 마녀의 성향상 응집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지만, 이럴 거면 왜 모여서 회의를 하고 집회를 여는지 당최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다른 중요한 사안은 제쳐 두고, 용에게만 눈을 반짝이는 추태라니. 덕분에 기고만장해진 윈터를 자제시키느라 요 며칠 세드릭만 힘겨웠다.
‘하여간 콧대만 높아져서는.’
세드릭이 투덜거리며 옷깃을 세웠다. 날짜로는 늦봄이지만, 반제의 북부 중립지대에 위치한 파펜하임산은 마치 잉그람의 초봄처럼 쌀쌀했다. 그나마 이번 대집회는 겨울에 열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세드릭! 여기야!”
멀리서 채스터티가 팔을 마구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세드릭은 얼른 그편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채스터티의 뺨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 아까 수정의 관에 다녀왔어. 내 이명이 뭐냐면―”
“예언의 마녀라며.”
“너 어떻게 알았어!”
소개할 기회를 빼앗긴 채스터티가 분개했다. 세드릭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던데. 네가 제노비아 자일스의 이명을 이어받았다고.”
이명(異名)이란 마녀‧마법사들에게 내려지는 별칭이다. 자질이나 미래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별이 내려 주는 이름으로, 채스터티나 세드릭처럼 강력한 마법을 계승한 경우에는 선조들의 이명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 너는 무슨 이명을 받을까? 섬광은 네 아버지의 이명이니까 아닐 테고.”
“대강 비슷하게 받겠지.”
세드릭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못마땅하게 그를 흘겨보던 채스터티가 문득 소리 죽여 말했다.
“있지, 그런데 수정의 관 느낌이 되게 이상해.”
“어떤데?”
“으음, 너도 들어가 보면 알 거야.”
“마력의 농도가 짙다는 건 나도 들어 알아.”
“것도 그런데……. 하여간 들어가 보면 알아! 그러고 보니 넌 차례가 어떻게 되길래 아직도 기다리고 있니? 빨리 가 봐!”
세드릭은 채스터티의 등살에 밀려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 중턱 어드메까지 올라야 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는지, 대관절 돌계단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법으로 이동하면 참으로 편하겠으나, 아쉽게도 수정의 관은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전통이었다.
수정의 관(The Coffin of Crystal).
그것은 파펜하임산 중턱 깊디깊은 동굴에 위치한 조그만 호수를 칭하는 명칭이었다. 산 정상의 청정한 만년설을 녹여 호수로 채운 그곳은 종교 없는 마녀의 성지요, 일생에 단 한 번 경험할 수 있는 성인식의 무대였다.
세드릭은 조용히 동굴 안쪽으로 들었다. 촛불로 겨우 밝힌 길을 계속 내려가니, 머잖아 마력으로 충만한 곳에 닿았다.
동그랗게 차오른 호수. 수면으로 떠오른 찬란한 밤하늘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그보다 경이로운 것은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수만 가지 속삭임이었다.
도대체 무어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멀어졌는가 하면 가까이 다가오고, 귓가에서 속삭이는가 싶으면 멀리 아득해졌다. 어린아이의 장난스러운 웃음소리 같기도, 노인이 한탄하는 곡소리 같기도 했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세드릭 자일스.”
그때, 지척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드릭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보니 수정의 관에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호수의 세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은 세 명의 노인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누군지는 알지?”
왼쪽에 앉은 노인이 방긋거리며 물었다. 세드릭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아탑에서 내려오신…….”
“응. 맞아. 네가 바바라 자일스의 아들이로구나.”
오른쪽에 앉은 노인이 이유 없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에드윈 베가의 아들이기도 하지.”
이번에는 가운데 앉은 노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겉은 자일스인데, 알맹이는 베가야. 한데 용의 주인이라고?”
“네…….”
“별일이군.”
세드릭은 머뭇거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수정의 관에서 성인식을 집행하며 이명을 전달하는 존재들.
바로 상아탑의 사자였다.
“뭐 해? 앉지 않고.”
왼쪽의 노인이 변함없이 방긋거리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세드릭은 머뭇거리며 비어 있는 호숫가 귀퉁이에 앉았다. 느낌이 이상하다던 채스터티의 말이 맞았다. 상아탑에서 내려온 노인들은 가까이서 보니 더더욱 기묘했다.
상아탑이란 백세가 넘은 몇몇 마녀‧마법사들이 부름을 받는 남쪽의 탑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라 봤자 별이 속삭이는 진리를 전해 듣기 위해 수행한다는 것뿐이었다. 일단 들어가면 나오는 일이 없기에 아직까지도 신비를 유지하는 드문 곳이지만, 마법의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마녀‧마법사들에겐 그보다 더한 선망의 대상이 없었다. 오죽하면 상아탑에 들기 위해 장수하는 것이 인생의 바람일까.
하지만 정작 대면하니 이들이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 당최 믿기지 않았다. 왼쪽에서 내내 방긋거리는 노인도, 오른쪽에서 내내 훌쩍이는 노인도, 가운데서 내내 퉁명스러운 노인도 굳이 따지자면 현자보다는 어린아이에 가까웠다. 특히나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점이 그러했다.
“집중해. 이제 시작할 거야.”
가운데 앉은 노인이 주의를 주었다. 세드릭이 자세를 바로 하자, 수면 위에 소금처럼 뿌려진 별들이 별안간 황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별들의 왕 둘시네아와 지척에서 여왕을 지키는 사계의 별들. 그 외에도 영광과 부활, 전쟁, 자유, 방랑, 낙원, 시간, 순례, 사수, 영웅, 순수 등 수백 가지의 별이 빛을 뽐내며 소리쳤으나 세드릭의 시선은 오로지 한곳에만 머물렀다. 동쪽 하늘에서 고고하게 나시마르크 사탑의 정상을 차지한 푸른 별.
그의 탄생성, 천칭의 별 사피겔.
별빛이 달뜰수록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도 점차 소리를 더해 갔다. 그리하여 웃음소리 곡소리 노랫소리 혼잣소리가 귓가를 그득 메운 때, 일순 노인들이 입을 크게 벌렸다.
《……판》
들어 본 적 없는 엄숙한 음성이 내리꽂혔다.
《심판》
마치 진노하는 신처럼, 혹은 준엄한 판관처럼.
《심판의 마법사》
세드릭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천지를 들끓는 우레처럼 운명이 떨어졌다.
대집회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세드릭 자일스는 그로부터 열흘 뒤 국경으로 향했다.
그가 돌아온 것은 2년이 지난 늦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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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not cunning witch
제3권
두 명의 예언자
별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자일스의 예지를 설명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말이다. 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두 존재하기에, 별빛 닿는 곳이면 어디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전부 알고 있다. 그중에서도 클레멘틴 자일스를 비롯한 자일스의 예언가들은 사시사철 빛을 잃지 않는 여명의 별 페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 그러므로 자일스의 예지란, 정확히 말해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탄생성 페베의 기억을 엿보는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자일스의 예지는 틀리지 않았다. 1년에 한 번씩은 꼭 잠드는 시기가 있는 다른 별들과 달리, 여명의 별 페베는 입때껏 지상에서 시선을 돌려 본 적 없는 최고(最古)의 역사가였다. 페베가 보지 못한 지상은 없고, 페베가 보지 못할 지상은 없었다. 그러니 페베의 기억과 연동된 자일스의 예지란 틀릴 수가 없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날 것이고, 일어났던 일은 언제든 일어나기 마련이므로.
하지만 자일스의 예언가라고 언제나 미래에 능통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미래 불확실한 시점의 어느 장면만을 스치듯 엿볼 뿐, 앞뒤 맥락까지 읽어 내지는 못했다. 예컨대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려는 장면만을 보았다고 해서, 그이를 살인자라고 매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핏 빤해 보이는 상황조차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므로, 자일스의 예언가들은 예로부터 침묵을 미덕으로 삼아 왔다. 자신이 본 미래를 온 세상에 떠벌려도 어차피 바뀌지 않을 미래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하여 먼 옛날, 클레멘틴 자일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변치 않을 미래라면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어쩌면 모든 자일스의 예언가들이 비슷한 생각을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 ✤ ✤
채스터티는 잠에서 깨어났다.
삽시에 졸음기 달아난 두 눈이 크게 확장된 채 암암한 어둠 속을 헤매었다. 거듭 몰아쉬는 숨이 맥동을 거칠게 몰아냈다. 아득할 만치 고요한 어둠 속을 한참 노려보던 채스터티가 일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옷가지조차 제대로 챙겨 입지 않아 일견 제정신 아닌 모습으로 달려간 곳은 다름 아닌 서재였다.
채스터티는 산만한 책장에서 미친 듯이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거세게 지나간 곳곳마다 책들이 기우뚱 쏟아져 내렸다. 그러다가 구석에서 겨우 발견한 앨범을 들고서 마법으로 촛대를 끌고 왔다.
미약한 불빛이 앨범을 내리비추었다. 끄트머리가 변색된 아주 오래된 앨범. 채스터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표지를 넘겼다.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조금씩 안도감이 깃들었으나 그것도 잠시, 어언지간 멈춘 손이 덧없이 앨범에서 떨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고정된 페이지에는 지금까지도 명성을 이어 가는 아주 고명한 선조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제노비아 자일스
거의 40년 전 자살하여 겔렝지어로 돌아간 마녀. 헛되이 죽은 용 페넬로피의 주인이자, 바바라 이전 세대에서 유일하게 미래를 보았던 자일스의 예언자.
또한 채스터티가 금방 꿈에서 보았던 얼굴이 바로 이러했다.
“꿈에서 나를 보았나요?”
별안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스터티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불빛이 간신히 닿는 경계에 불청객이 들어와 있었다. 여기는 채스터티 자일스의 이름이 새겨진 자택. 지난 이레 집을 비웠다곤 하나, 평범한 인간이 감히 마녀의 저택을 침범하지는 못할 터였다.
불청객은 느릿하게 다가왔다. 이윽고 암암하던 얼굴이 명확해졌다. 채스터티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다, 당신이 어째서!”
“채스터티, 그대가 본 미래에 내가 있던가요?”
“죽었잖아! 왜 여기 있는 거야!”
“미래의 나는 어떻던가요? 무얼 하고 있었죠?”
황망한 채스터티와는 대조적으로 침착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채스터티는 양팔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외쳤다.
“제노비아 자일스. 당신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불청객, 제노비아 자일스는 물끄러미 어린 후손을 굽어보았다. 충격에 빠진 채스터티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하는 듯했다. 제노비아의 눈빛에 얼핏 안쓰러움이 맺혔다.
“미안해요. 그대에겐 아무런 원한도 없으나.”
제노비아의 옆으로 미끄러지듯 권총이 나타났다.
“내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답니다.”
그리고 소리 죽인 총성이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채스터티는 덧없이 쓰러졌다. 꿰뚫린 가슴팍에서 끝없이 선혈이 흘러나왔다. 그 광경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제노비아의 곁으로 헤센이 다가왔다.
“아직 숨이 끊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그럼 끊어야죠.”
냉정한 말에 응하듯 총구가 이번에는 채스터티의 머리를 향했다. 헤센이 무감하게 마법을 부리려던 찰나.
“이봐, 채스터티!”
갑자기 누군가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제노비아와 헤센의 시선이 그편으로 향했다.
“돌아왔으면 돌아왔다고 얘기를 해야지! 오늘은 너희 집에서 파티 열기로 했잖아!”
“얘 자는 거 아냐?”
“채스터티 자일스가? 이 시간에 잘도 자겠다.”
꽤 여럿인지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이 심상치 않았다. 헤센은 차게 굳어 버린 눈으로 죽어 가는 채스터티를 흘깃거렸다.
“우리 들어간다? 열쇠를 준 건 너니까 나중에 헛말하지 마라!”
뒤이어 열쇠 구멍 돌아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제노비아는 그제야 헤센의 팔뚝을 짚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순간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가깝게 붙었다.
직후 저택으로 쏟아져 들어온 무리는 시끄럽게 바닥을 울리며 집주인의 이름을 불러 댔다. 빈방을 대강 한두 개 열어 본 뒤 마찬가지로 기대 없이 열어젖힌 서재의 문. 정면으로 보이는 참상에 잠시 말을 잃었던 이들이 삽시에 비명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채스터티!”
수많은 발소리가 서재를 덮치듯 달려들었다. 긴급히 의사를 연호하는 목소리와 황망히 환부를 동여매는 손아귀가 겹치는 가운데, 제노비아와 헤센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꺼진 촛불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시각, 자일스 본성에선 수장의 후계자를 둘러싼 투표가 진행 중이었다. 비록 절반은 베가의 핏줄이나 바바라의 유일한 친자이고 무엇보다도 용 윈터의 주인임을 감안하여 세드릭 자일스가 가장 유력했지만, 일부 원로들은 끝까지 반대했다. 결국 궁지에 몰린 레오나드 자일스가 모든 일족이 참여하는 선거를 제안했으나, 마지막으로 강구해 낸 수조차 그의 염원을 이루어 주지는 못했다.
“세드릭 자일스 27표. 채스터티 자일스 12표. 무효 3표. 기권 9표.”
수장 대리 설리번 자일스가 결과를 발표했다.
“차기 수장은 세드릭 자일스입니다.”
촛불로만 밝힌 캄캄한 성내, 선거의 종식을 알리는 무거운 북소리가 멀리 퍼져 나갔다.
<교활한 자일스>는 그렇게 새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