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활하지 못한 마녀에게-12화 (12/18)

#5

그리그 프롬의 유작

칼날 같은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세드릭이 깊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기우뚱했다. 세드릭의 무릎이 힘없이 꺾이자마자 디아나가 황급히 그편으로 달려갔다.

“세드릭!”

쓰러지는 세드릭을 가까스로 받아 낸 디아나가 다급히 그를 바닥에 눕혔다. 머리가 바닥에 닿기 무섭게 세드릭이 돌연 몸을 옹송그리며 검은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총상이 다시금 도졌는지 고통에 겨운 안색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몸으로 마법은 왜 써서…….”

디아나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마법사의 신체는 별의 마력을 담는 그릇. 그러므로 마법사는 무릇 몸이 상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했다. 만에 하나 크게 다쳤다면 상처가 나을 때까지 마법은 삼가는 것이 철칙이었다. 상처 입은 몸은 마력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해서 도리어 내장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난 괜찮으니까, 빨리 가.”

세드릭이 힘겹게 디아나를 밀어 냈다.

“네가 동화의 결말을 맺어야 해.”

디아나는 주먹을 꾹 말아 쥐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생각하기로 잘못된 결말을 향해 가던 동화 사냥꾼은 이제 없었다. 세드릭이 그녀의 선택을 믿고 동화 사냥꾼을 저지해 주었으니, 이제는 그녀가 동화를 끝내야 했다.

디아나는 붉어진 눈가를 소매로 문지르며 말했다.

“현실로 돌아가기 전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해. 알았지?”

세드릭은 잇새로 신음을 참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의 눈짓에 얼른 땅바닥을 기어 온 루퍼트가 디아나를 대신해 세드릭의 머리맡에 앉았다. 고통스러운지 아예 눈을 감아 버린 세드릭을 잠시 바라보던 디아나가 이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늪지의 마법사가 기다렸다는 듯 기절한 잘로모를 안아 들고 늪지의 안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거의 달리듯 늪지의 마법사를 따라갔다. 어떻게든 신속하게 동화의 올바른 결말을 내야 했다. 총상을 입은 채로 낙뢰까지 떨어트린 세드릭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지난 세월의 앙금이 어떻든 디아나는 지금 여기서 세드릭을 잃고 싶지 않았다.

누구든 죽은 것은 싫었다. 하지만 무려 10년을 알아 온 사람이 죽는 것은 더 끔찍했다.

다른 마녀가 그러하듯, 디아나도 대인 관계의 폭이 몹시 좁았다. 스승인 바바라 자일스와 함께 자라 온 자일스 삼 남매, 그리고 사랑하는 언니가 디아나의 전부였다. 사이가 좋든 좋지 않든, 거기서 하나를 잃는 것은 삶을 지탱하던 기둥 하나가 뽑히는 것과 진배없었다. 언젠가 지금의 기둥이 뽑히고 새로운 기둥이 들어설 날이 오겠지만, 디아나는 아직 그런 경험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세상을 잃기에 그녀는 아직 미성숙했다.

그러니 여기서 세드릭을 잃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훌륭한 마법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은 익히 잘 알지만, 세드릭은 여기서 죽으면 안 되었다. 디아나는 어떻게든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고, 세드릭은 그곳에서 쾌차할 것이었다. 이딴 동화 속에서 낯선 도서관 사서와 단둘이서 평생을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끼익.

갈수록 짙어지는 물안개를 익숙하게 헤쳐 나아가던 늪지의 마법사의 정면으로 자그마한 목조건물이 차츰 드러났다. 인적 없는 건물이 자꾸 음산한 소리를 내는 것이 영 불안했으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마법사를 보자니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디아나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마법사가 열어 놓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내부는 허름한 외관과 마찬가지로 몹시 낡았다. 그나마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긴 했으나, 애당초 들여놓은 가구 가짓수가 적은 데다 온기가 전혀 돌지 않아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 곳이나 편히 앉아요.”

잘로모를 침대에 내려놓은 늪지의 마법사가 무심히 말을 건넸다.

“저기, 동화의 결말을―”

“어째서 잘로모를 살려 준 겁니까?”

마법사가 느긋하게 디아나의 말을 끊어 냈다. 순간 말문이 막힌 디아나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네?”

“그간 많은 이들이 동화 속으로 들어왔고, 그들은 대부분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열에 다섯은 악한 늪지의 마법사를 죽이겠다며 덤비다가 도리어 내 손에 죽었고, 나머지는 행여나 잘못된 선택으로 죽을까 봐 늪지엔 얼씬도 하지 않았지요. 물론 그들은 전부 동화 속에서 늙어 죽었습니다만.”

늪지의 마법사가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가끔은 철저하게 준비를 해 온 이들이 있어 아까처럼 잘로모를 죽이려는 마법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오히려 그자를 막으려고 했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선택은 잘로모를 살리는 것입니까?”

대답을 종용하는 마법사의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디아나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지요?”

“그리그 프롬이 아들을 사랑했을지도 모르니까요.”

디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헤센 그윈티르처럼 그리그 프롬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해요. 어쩌면 그의 생각대로 그리그 프롬은 자신의 인생을 망친 아들을 증오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사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자식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 부모가, 부모를 부모로 여기지 않는 자식이 많다는 건 잘 알아요. 나도 부모의 사랑을 모르니까요. 하지만 혈육의 사랑을 부정하지는 않아요. 사랑은 마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가장 비논리적인 감정이고 그렇기에 내 선택을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 내 선택엔 아무런 논리적인 근거도 없으니까요.”

그리그 프롬은 자신의 완전무결함을 지키기 위해 하나뿐인 아들마저 희생했다. 그러니 그리그 프롬이 아들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건 억측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 어디서 피어날지 모르는 잡초 같은 존재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들을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아들을 사랑했을지도 몰랐다.

“당신의 선택은 올바르군요.”

긴장으로 굳어 있던 디아나의 표정이 그제야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러나 마법사는 안도할 잠깐의 겨를조차 주지 않았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으니까요.”

변함없이 잔잔한 음성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생전에 무척이나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너무 궁금해서 죽기 싫었지요. 그래서 결국엔 이런 꼴로나마 이승에 남아 연명하고 있습니다만.”

“그게 무슨…….”

디아나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댔다. 침대 맡에서 얼마간 잘로모를 내려다보던 늪지의 마법사가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느릿하게 벗었다. 실내를 밝히는 희미한 불빛이 그의 핼쑥한 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디아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세월의 더께가 쌓였되, 어딘지 익숙한 모양의 검은 눈.

설마.

“……그리그 프롬?”

스스로 말해 놓고도 기막히다는 듯 디아나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늪지의 마법사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확히는 그리그 프롬의 마력의 일부입니다. 여기는 그가 만든 소세계니까요.”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당신은 그리그 프롬의 의식을 가진……. 이게 말이나 돼요?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가능하지 않다? 누가 그리 말했습니까?”

마법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린 마녀여, 함부로 단정하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방도가 생각보다 아주 많습니다.”

디아나는 하릴없이 말문을 닫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500년이었다. 500년이 넘도록 사자(死者)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소세계가 이렇게나 말짱히 유지되는 것도 믿기 힘든 판국에, 이제는 죽은 그리그 프롬의 의식을 그대로 지닌 인물까지 등장했다.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혼란에 휩싸인 디아나를 지켜보던 마법사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당신의 일행을 치료하러 가지요.”

“네?”

“당장 숨이 멎지 않을 정도의 치료는 가능합니다. 자일스의 후손인지 베가의 후손인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위급해 보이더군요.”

멍하니 수긍하려던 디아나가 문득 의심의 모서리를 세웠다.

“당신이 세드릭을 치료해 주겠다고요? 왜죠?”

“일단은 잘로모를 죽이려던 자를 막아 주었으니 나름의 성의를 표하기 위함이고, 또한…….”

늪지의 마법사, 혹은 그리그 프롬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대꾸했다.

“마지막 문제는 조금 길어질 듯하니까요.”

디아나는 조심스레 세드릭의 코끝에 귀를 갖다 댔다. 고통에 겨워 불규칙하던 호흡이 차츰 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못내 근심스럽던 디아나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당장에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그 프롬이 세드릭의 총상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디아나가 기운 빠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그런 말은 아주 오래간만에 들어 보는군요.”

아주 생경한 소리라는 듯 기묘한 표정을 짓던 그리그 프롬이 힘없이 소파로 향했다. 디아나도 세드릭의 간호를 루퍼트에게 맡기고 슬그머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 그래서 마지막 문제는 뭔가요?”

그리그 프롬은 손짓으로 물을 따라 내며 잠시 뜸을 들였다. 갑자기 갈증을 느낀 디아나도 눈치껏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문제를 알기 전에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꽤 깁니다. 나의, 그러니까 그리그 프롬의 생애를 알아야 하니까요.”

그리그 프롬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방문객들에게 듣자 하니, 요즘 세상에는 나에 대한 이야기가 제법 왜곡되어 돌아다니더군요. 짐작건대 당신이 알고 있는 나의 생애와 지금부터 내가 털어놓을 나의 생애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디아나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던 그리그 프롬이 시선을 틀어 그녀를 보았다.

“그럼 시작할까요?”

*      *      *

그리그 프롬이 태어난 해는 1342년. 아직 통일 왕국이 들어서지 않은 북부가 한창 전란에 휩싸였던 시기다. 평범한 인간에게는 지옥 같은 하루하루였을지 모르나, 인간의 왕국과 척진 마법 사회에는 그보다 호화스러운 시절이 드물었다. 북부의 전란 시대가 바로 북부 마법 가문의 황금시대요, 가장 힘이 왕성하던 시기였다.

시대가 그러하니, 각 마법 가문의 우두머리인 수장은 자연스레 왕처럼 군림하기 시작했다. 북부의 수장 자리는 친족과의 불평등 계약으로 성립되어 계약을 어기지 않는 한 자리를 박탈당할 수 없으므로, 가문의 수장은 자신에게 허락된 범위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감히 공물을 바치지 않는 인간 마을에는 폭풍우를 일으키고,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영주에겐 자손 대대로 단명할 저주를 내렸다. 심지어는 아끼는 친족을 인간 왕국으로 보내 강제로 왕으로 섬기게 하기도 했다.

그예 인간들은 그들을 신으로 모시거나 악마로 여겼다. 전자가 공포에서 기인한 경외심이라면, 후자는 복수심에서 비롯된 증오였다. 당시의 마녀?마법사들은 인간을 자신보다 열등한 종족으로 여겼기에, 우연히 마주친 인간을 벌레 짓밟듯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들이 인간을 괴롭히는 데는 아무런 논리적인 이유도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외관으로 그리 열등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더욱 마뜩잖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그 프롬의 부모는 그러한 대부분의 마녀?마법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모친인 카타리나 프롬은 가문의 수장으로 21년간 군림하며 지극한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가까운 소국을 도륙한 전적이 있었고, 부친인 벤야민 프롬은 지하실에 틀어박혀 인간을 포함한 온갖 동물을 산 채로 박제하는 것이 취미였다. 실질적으로 그리그 프롬을 키워 낸 유모도 인간을 하등하게 여기던 평범한 마녀였다. 그런 모습을 일상적으로 보고 들은 그리그 프롬이 당대의 평범한 의식을 갖춘 마법사로 성장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그 프롬은 고작 열다섯의 나이로 모친의 뒤를 이어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 시절 그는 이미 비할 데 없는 천재로 이름나 있었다. 속수무책이던 악룡(惡龍) 지그손 니벨탈리아의 왼쪽 두 번째 날개를 꺾어 멀리 쫓아낸 것도, 그동안 광범하게 사용되었던 갈라트리아 기도문의 약점을 보완한 것도 바로 그였다. 심지어 성인이 되던 해에는 ‘마력은 하늘을 향한다’는 마법역학 제3법칙을 직접 증명하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평생에 걸쳐 이룬다는 업적을 그는 미성년의 나이로 무려 세 개나 이룩했던 것이다.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했다. 상대는 태중에서 약혼한 사촌누이로, 이름은 안토니아 프롬이었다. 그 시절 프롬은 가문의 우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자행했으므로, 사촌 간의 혼인은 달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마법 사회에서 사랑 없는 결합이 흔하듯, 그리그 프롬과 안토니아 프롬도 사랑 없는 결혼에 순응했다. 부부는 서로에게 깍듯했지만 간섭하지는 않았다. 그리그 프롬이 여러 명의 애인을 둔 것처럼 안토니아 역시 그러했다. 다만 자식을 낳기 위해 철저하게 날짜를 계산한 합방일만은 꼭 지켰을 따름이다. 그리해 안토니아 프롬은 일생 동안 다섯의 자식을 낳았으나, 개중에서 그리그 프롬의 자식은 네 번째로 태어난 잘로모 프롬뿐이었다.

잘로모 프롬은 아비인 그리그 프롬을 쏙 빼닮은 아이였다. 비록 부모의 관심은 받지 못했지만, 아이는 나름대로 유모의 손에서 건강하게 성장했다. 아직 정식으로 말이 오가지는 않았으나 잘로모 프롬이 아비의 뒤를 이어 프롬의 수장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으므로, 모두가 그를 차기 프롬의 수장으로 대접했다.

그러나 잘로모 프롬이 다섯 살이 되던 해. 그리그 프롬은 비로소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그 프롬은 본디 자식을 아끼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잘로모 외에도 여러 애인으로부터 서넛의 아이를 얻었지만, 그 아이들이 제각기 다른 이유로 죽었을 때조차 일말의 비통도 내비치지 않았다. 다른 부모들이 그러하듯 그리그 프롬에게 살아남지 못한 자식은 자식이 아니었다. 당시 마법 사회에선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신을 입증하는 것만이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인정받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렇기에 그리그 프롬은 자신의 후계로 여겨지는 자식조차 돌보지 않았다.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바빠 자식은 신경 쓰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리그 프롬은 오랫동안 잘로모 프롬을 잊고 살았다. 그가 잊었던 자식의 존재를 다시금 자각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아내 안토니아 프롬의 장례식이었다.

다소 어처구니없게도, 안토니아 프롬은 오직 막스도르트산에서만 채취되는 물갈퀴쑥을 구하려고 입산했다가 사특한 요정들의 꾐에 빠져 죽었다. 막스도르트의 요정들이 호시탐탐 마녀의 심장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익히 유명한 일화였으므로, 홀몸으로 입산한 안토니아 프롬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래서 프롬의 친족들은 형식적인 애도를 표하면서도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그 프롬 역시 아내의 어이없는 죽음에 조소를 보냈으니, 그들을 책망할 사람은 달리 없었다.

잘로모 프롬은 안토니아의 다섯 아이 중에서 유일하게 장례식에 참석한 자식이었다. 수십의 친족들이 오가는 장례에서 잘로모만은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고, 그가 마지막으로 맞이한 조문객이 바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아버지, 그리그 프롬이었다.

‘처음 뵙습니다, 아버지.’

잘로모의 첫인사는 그러했다. 한눈에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본 그리그 프롬은 무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에게 어린 아들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리그 프롬은 허리춤에도 닿지 못하는 자그마한 아들 대신 유모에게 형식적인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아이는 건강합니까?’ ‘네.’ ‘올해 몇 살이지요?’ ‘다섯입니다.’ ‘탄생성은 무업니까?’ ‘지난달에 검사했을 때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마녀로 마법사로 각성하는 시기는 사람마다 달랐다. 날 적부터 마력을 운용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 열 살이 되어서야 간신히 마력을 뿜어내는 아이도 있었다. 마력을 온전히 운용할 준비만 된다면 언제고 마법을 부릴 수 있으므로, 언제 각성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평균적으로 네댓 살쯤에 각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내가 검사하도록 하지요.’

당시 그리그 프롬은 같은 탄생성에서 비롯된 마력의 차이점을 연구하고 있었다. 대개 자식은 부모의 탄생성을 따르는바, 그리그 프롬은 만일 아들이 자신과 같은 영웅의 별 롱기누스의 축복을 받았다면 당장 연구에 이용할 속셈으로 잘로모를 서재로 데려갔다. 탄생성을 감별하는 검사는 그리 복잡하지도 않았다.

그리그 프롬은 잘로모 앞에 성도(星圖)를 펼치며 말했다.

‘아는 기도문을 읊어 보거라.’

잘로모는 순순히 짤막한 갈라트리아 기도문을 읊었다. 각성한 마법사가 기도문을 읊으면 응당 성도의 별이 응답할 터. 하지만 잘로모의 거듭된 기도에도 성도는 고요했다. 변함없이 잠잠한 성도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리그 프롬이 혀를 찼다.

‘되었다. 다음 달에 다시 오거라.’

잘로모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그 프롬이 미련 없이 서재를 빠져나가려던 찰나, 문득 잘로모가 그를 불러 세웠다.

‘저,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잘로모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실은 저 마력이 느껴지질 않아요.’ ‘각성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게 아니라 내 몸 속에 흐른다는 마력이요. 유모가 심장을 따뜻하게 휘감는 마력을 느껴 보라고 할 때마다 항상 느껴진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면 유모가 날 굶길 것 같아서요.’

잘로모가 천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내 침묵하던 그리그 프롬이 잘로모를 향해 느릿하게 돌아섰다.

모든 마법사는 별의 축복을 받았다. 별의 축복을 받아 신체에 마력을 지니고 마법을 부리는 이들이 바로 마법사였다. 각성하지 못한 마법사는 그저 제 뜻대로 마력을 운용할 수 없을 뿐, 마력을 지니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제 몸에서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마법사는 없었다.

그러니 잘로모 프롬은 별의 축복을 받지 못한 아이였다. 속된 말로 튀기였다.

‘내가 졸작을 낳았구나.’

그리그 프롬은 크게 한탄했다. 마법사로서 튀기를 낳는 것은 큰 수치였다. 마법사가 인간과 다른 점은 오로지 별의 축복을 받았다는 점이기에, 별의 축복을 받지 못한 아이는 평소 그리도 하찮게 여기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인간이 말 못 하는 짐승을 낳으면 끔찍할 것이 빤하듯, 인간을 낳은 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어떤 영감이 뇌리를 번개처럼 스쳤다.

‘만일 튀기가 마법사로 환골탈태한다면?’

마법역사상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마법이며, 누구도 개척하지 못한 연구였다. 성공한다면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할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그리그 프롬은 아주 오래간만에 들끓는 호기심과 지적 욕망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잘로모를 붙들고 말했다.

‘내가 널 마법사로 만들겠다.’

그리그 프롬의 눈이 음산하게 빛났다.

어느덧 열 살이 된 잘로모는 키가 아버지의 허리춤에 닿을 만치 무럭무럭 자랐다.

하지만 그리그 프롬의 연구는 지지부진했다. 매일을 잘로모를 탐구하며 시간을 보냈으나, 잘로모를 마법사로 만드는 길은 요원해 보였다. 연구하는 그리그 프롬이나 연구당하는 잘로모 프롬이나 지치기는 매한가지였다.

‘너는 나와 안토니아의 아들이다. 우리의 조상은 모두 마법사인데 너만 마법사가 아닐 리 없어.’

그리그 프롬은 잘로모 역시 <엄숙한 프롬>의 자손으로서, 아직 발아하지 않은 마력의 씨앗을 지니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지금 당장은 평범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마법을 부릴 수 없으나, 어쨌건 잘로모는 그와 안토니아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그의 부모도, 안토니아의 부모도, 부모의 부모도 전부 마녀?마법사였는데, 잘로모만 인간일 리 없었다. 거듭된 근친혼으로 짙어질 대로 짙어진 프롬의 핏줄이 여기서 그를 배신할 리 없었다.

그래서 그리그 프롬은 오로지 잘로모에게 내재된 마력의 씨앗을 찾는 데만 골몰했다. 잘로모는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마력을 식별하도록 명령했고, 매일 잠들기 전마다 성도를 펼쳐 두고 기도문을 암송하도록 했다. 언젠가는 잘로모를 깊이 재우고 몸을 갈라 본 적도 있으나, 그리그 프롬은 그의 부친처럼 신체 연구를 즐기지 않았기에, 특별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잘로모는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기실 알아챘더라도 싫은 내색은 추호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잘로모는 젖 한 번 물려 주지 않은 매정한 어미의 장례식을 내내 지켰을 만큼이나 태생적으로 선한 아이였다. 돌연 자신을 마법사로 만들겠다며 연구를 시작한 아버지도, 혹시나 튀기라는 사실이 들킬까 저어한 아버지가 성에서 유모를 내친 것도 묵묵하게 감내했다.

타고나길 너무도 여려서 차디찬 마법 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는 자연스레 고독에 시달렸다. 이제 공허함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버지뿐이기에, 잘로모는 아버지의 말이면 응당 순순히 수긍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게 무엇이지?’

잘로모가 그리그 프롬에게 그림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그 프롬이 멀뚱히 잘로모를 쳐다보자, 잘로모가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예요.’ ‘날 그렸다고?’ ‘네.’ ‘왜지?’ ‘아버지밖에 그릴 사람이 없어서요.’

잘로모의 그림은 척 보기에도 서툰 감이 역력했다. 코는 지나치게 오뚝했고, 하관은 비뚤비뚤 엉망이었다. 채색 도구를 찾지 못했는지, 머리카락은 새카만 잉크로 뭉개 버리기까지 했다. 아무리 보아도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으나, 몇 번이고 고치고 덧그린 흔적이 선명했다.

그리그 프롬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 같은 짓을 하는구나.’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잘하지도 못하는 짓을 연습하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속에서 천불이 끓었다. 고작 이런 데 들였을 시간과 노력이 애석했다. 그가 아들에게 바라는 것은 이런 그림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아들이 만인에게 당당한 마법사가 되길 원했다.

‘나는 인간인걸요.’

잘로모가 무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그 프롬은 차게 식은 눈으로 아들을 외면했다.

‘내 무슨 죄가 있어 너 같은 자식을 낳았을까.’

연구는 계속되었다.

그리그 프롬은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잘로모가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법사의 자질을 깨우려기보다는 직접적인 충격을 가하는 쪽으로 연구 방향을 수정했다. 신체에 소량의 마력을 주입하거나, 순수하게 응집된 마력 덩어리를 삼키는 식이었다.

충격적인 만큼 신체에 가해지는 무리도 크기에 그리그 프롬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는 우선적으로 성내를 돌아다니는 쥐를 잡아 잘로모를 대신하여 실험을 해 보았다. 물론 하나같이 죄 실패했다. 미천한 동물과 마법사의 자손인 잘로모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다를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그 프롬은 쉽사리 잘로모의 신체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잘로모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만약에 실험이 잘못되어 잘로모의 신체에 손상이라도 간다면 그때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었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만 갔다.

연구는 여전히 더디었다. 이젠 그리그 프롬도 잘로모도 연구가 성공하리라는 희망을 차츰 잃어 가고 있었다. 아들을 마법사로 만들고 말겠다는 집념만으로 여기까지 왔으나, 그리그 프롬도 천치는 아니었다. 연구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이미 오래전에 결판이 나 있었다.

‘아버지.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는 걸 아직 친족들은 모르지요?’

어느 날, 잘로모가 물었다. 친족들은 그저 잘로모가 유난히 허약한 줄로만 알았다. 그리그 프롬이 비복도 없이 성을 굳건히 걸어 잠그고 아들과 단둘이 살아가는 행태를, 그저 마법사라면 흔히 부리는 변덕이라고만 여겼다.

‘그럼 만약에 내가 튀기라는 게 알려지면 친족들은 날 죽이려 들겠지요?’ ‘그렇겠지.’ ‘나 같은 애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 봐요. 이렇게 아버지에게 폐나 끼치고.’

잘로모는 그답지 않게 무척이나 시무룩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또한 누군가를 달래 본 적 없기에 그리그 프롬은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잘로모도 대답을 바란 눈치는 아니었다.

그리그 프롬은 이제 아들을 연구하지 않았다. 인간을 마법사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진실을 그는 돌고 돌아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이제 ‘성공할 만한’ 연구에 몰두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다른 연구를 시작했음에도 잘로모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찾아오는 손님 없이 단둘뿐인 성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이따금 바깥소식이 전해졌으나, 딱히 위중한 소식은 없었다. 북부는 여전히 전장이었다. 반년마다 승기를 잡는 나라가 바뀌었고, 어제의 왕으로 군림하던 자가 내일 사형대로 끌려가는 일도 빈번했다.

세상이 어떻든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어느덧 잘로모는 성인이 되는 날을 앞두었다. 지금까지 허약한 몸과 미성년의 나이로 숨어 지내던 잘로모도 더는 세간의 이목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그가 성인이 되는 날, 오래도록 잠겼던 성문이 열리며 <엄숙한 프롬>의 이름을 이은 자들이 성내로 밀려들리라. 그리고 마그누스 프롬의 영리한 후손들은 자신의 앞에 선 자가 과연 마법사인지 아니면 인간인지 쉽게 구분할 것이었다. 그들은 천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18년간 자신을 속였던 그리그 프롬과 잘로모 프롬에게 몹시 분노할 터였다.

잘로모의 성인식을 앞두고 성을 방문하겠다는 친족들의 편지가 빗발쳤다. 하지만 그리그 프롬과 잘로모는 지극히 평온해 보였다. 그들은 절대로 성인식을 화두에 올리지 않았다. 애당초 대화가 많은 부자는 아니었으므로, 서로 동상이몽을 품은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성인식을 며칠 앞둔 날, 그리그 프롬이 아들을 불렀다.

‘성인식에서 넌 마법사가 될 것이다.’

잘로모는 몹시 놀란 기색으로 말을 잃었다. 그리그 프롬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죽을 것이다. 성인식 이후로 나를 찾지 마라.’ ‘저는 인간입니다. 마법사가 되는 건 불가능해요.’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 있다.’ ‘아니요. 그래도 불가능은 불가능합니다. 아버지께서도 이미 포기하신 일이지 않습니까?’

잘로모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금기를 범하려는 요량이신가요?’ ‘네게 대답할 의무는 없다.’ ‘제 일입니다. 어째서 제 의사는 묻지 않으십니까?’ ‘네 의사를 물어 무엇 하느냐. 너는 여기 머물러도 죽고 나가도 죽는다.’

성에 남아 성인식을 치르자니 친족들의 손에 살해당할 것이고, 그렇다고 성에서 내보내자니 바깥세상이 너무 위험했다. 평생을 성내에서 곱게 자란 잘로모는 세상의 잔인한 풍파를 이기지 못할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시대. 살아남기 위해선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가 마법사가 되길 원하시나요?’ ‘당연하다.’

그리그 프롬의 강건한 대답에 잘로모는 고개를 떨구었다. 일생토록 그러했듯 그는 그렇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다. 아니, 순종하는 듯 보였다.

성인식의 날이 밝았다.

장장 10년 만에 성문이 열렸다. 멀리서부터 직접 찾아온 이들과 대신으로 보낸 동물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자신의 안부를 알리는 목소리와, 그간의 연구 성과를 자랑하는 외침이 곳곳에서 빗발쳤다. 모두가 가문의 수장을, 그리고 차기 수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그 프롬은 오늘 등장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완전한 마법사로 거듭난 아들이 그의 뒤를 이을 것이었다. 생에 별다른 미련이 남지 않은 그리그 프롬은 딱히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도리어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죽음이란 경지가 궁금했다.

그리그 프롬은 서재 가장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책을 꺼내었다. <엄숙한 프롬>의 선조인 마그누스 프롬의 숨겨진 저서로, 세상은 존재를 모르는 이 책은 다름 아닌 금기에 관한 것이었다. 마그누스 프롬은 후손에게 경고하기 위해 책을 저술했다지만, 아마도 수많은 후손이 이 책을 읽고 금기를 범했을 터. 그리그 프롬도 그들의 전철을 밟을 예정이었다.

그리그 프롬이 책을 펼쳤다. 선조가 경고하는 금기는 생경한 이름 한 줄이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지금 연회장에서 큰일이 났습니다!’

별안간 그를 찾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그 프롬은 의아한 기색으로 연회장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시선마다 영 수상쩍었으나, 그런 의구심일랑 곧 깨끗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연회장은 피바다였다.

‘웬 인간이 2층에서 투신했습니다. 발을 헛디딘 건지 부러 연회를 망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데 얼굴이 당신을 꼭 빼닮았더군요.’

친족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리그 프롬을 향했다. 그리그 프롬은 더디게 피 웅덩이로 다가갔다. 인간의 피를 기껍지 않게 여겨 모두가 피하는 그곳에 잘로모가 누워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아는 자입니까?’

그리그 프롬은 말없이 피바다에 무릎을 굽히며 우그러진 잘로모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대답은 뒤늦었다.

‘내 아들입니다.’

친족들은 크게 분개했다. 감히 인간이 가문의 수장이 되려던 것도, 감히 인간을 가문의 수장으로 세우려던 것도 전부 기만이었다. 역사상 <엄숙한 프롬>에 이만한 수치가 없었다. 이까짓 사기극으로 가문 전체를 속이려 했다는 것에 모두가 실망감을 표했다.

만인이 칭송하던 천재 마법사, 그리그 프롬은 삽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그 프롬은 수장 자리를 박탈당하고 성에 갇혔다. 세상에는 그가 미쳤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으나, 바깥세상은 이미 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성에 감금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저 아들을 살리고 싶었다.

다행히도 잘로모는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을 뜨지는 못했다. 마법이 없으면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해서 그리그 프롬은 아들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또다시 세월은 무상하게 흘러갔다.

이제 그리그 프롬은 백발노인이 되었다. 마법사보다 적게 사는 인간인 잘로모도 겉보기로는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자는 죽을 날만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그 프롬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금기를 범하기로 했다. 그는 잘로모를 살리기 위해 수없이 금해진 이름을 불렀으나, 마법으로 억지로 생을 이어 가는 잘로모는 금기로도 살려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 그리그 프롬이 매달릴 수 있는 것도 금기뿐이었다.

‘아들을 살려 주시오.’ [예전에도 말했듯이 불가능하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네가 무얼 지불하든 불가능하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금기가 아닙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이 아니다. 불가능은 진정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절망에 빠진 그리그 프롬은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남은 마력을 깡그리 모아 소세계를 창조하고, 거기에 어린 아들과 젊은 자신을 심었다. 그리고 부모에게서 전해 받은 귀한 보물을 넣어 후세의 마녀?마법사들을 꾀기로 했다. 동화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와, 자신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와, 마법사로 태어나지 아니한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친족처럼 차디찬 이를 벌하기로 했다. 오직 아들을 살려 주는 따사로운 이에게만 살 길을 열어 주기로 했다.

그것만이 그리그 프롬이 세상에 남기는 처절한 복수요, 단죄의 칼날이었다.

‘아들아. 너는 왜 죽어야 했을까.’

그리그 프롬은 마지막 숨을 내쉬며, 일생토록 풀지 못한 난제를 속삭였다.

‘그때 내가 어찌했어야 네가 죽지 않았을까.’

자신의 마법으로 숨을 연명하는 아들을 앞에 두고 그리그 프롬은 긴 생을 마감했다. 죽음과 함께 아버지의 마법이 거두어졌으며, 아들은 영영 눈을 뜨지 못했다.

가지런하던 촛불이 크게 일렁였다.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그리그 프롬의 표정을 살폈다. 수백 년이 지난 과거를 되짚는 것이 자못 힘겨웠을까. 그리그 프롬은 이야기를 끝마치고도 한참을 침묵했다. 텅 비어 버린 듯하면서도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검은 눈이 뒤늦게 바로 뜨였다.

“……내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500년이요.”

“아직도 세상은 나를 미친 마법사로 기억합니까?”

디아나는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침묵에서 답을 찾은 그리그 프롬이 가늘게 미소 지었다.

“일전에 나를 찾아온 동화 사냥꾼의 말을 듣자 하니, 어처구니없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게 빗댄다고 하더군요. 그리그 프롬이 되살아날 소리라고.”

“그건 관용구일 뿐이에요. 당신이 불사를 연구했다는 소문이 있어서…….”

“잘로모를 살려 달라 금기를 범한 것이 그렇게 와전된 것이겠지요. 압니다. 당신을 탓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리그 프롬이 씁쓸하게 말했다.

“다만 가끔은 의문스럽습니다. 내가, 내 아들이 무얼 그리 잘못했기에 비극을 맞이했으며, 죽어서도 그런 오명을 써야 했는지 말입니다.”

그리그 프롬.

프롬이 배출한 최고의 역작이자, 마법 역사에 길이 남을 천재적인 마법사. 그럼에도 그리그 프롬에 대해 남겨진 일화는 거의 없었다. 그조차 미친 말년에 집중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리그 프롬을 외경하는 동시에 업신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상 그는 미치지 않았음에도.

“당신은 알려 줄 수 있습니까? 그때 내가 어찌했어야 잘로모가 죽지 않았을까요?”

깊디깊은 회한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죽는 순간까지 놓지 못한 후회의 자락은 죽어서도 이어져서 이렇듯 500년을 건너왔다. 간간이 그를 찾아오는 손님은 대부분 어긋난 선택을 하였으므로, 홀로 고독히 지내며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건 진즉에 지나간 과거잖아요. 설령 내가 대답하더라도 그 답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당신의 아들은 이미…….”

죽었으니까.

그 말에 동의하듯 그리그 프롬이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나와 잘로모는 500년 전에 죽었으니, 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알고 싶습니다. 혹시나 잘로모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까. 혹시나 내가 생각지 못한 방법은 없었을까……. 혹시나 당신은 말해 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알지 못하는 방법을.”

마치 타이르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디아나는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대답 여하에 따라 현실 세계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끈질기게 답을 기다리던 그리그 프롬이 야트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나도 정답을 모르는 질문입니다. 나는 그저 당신의……. 그러고 보니 이름이 무엇이지요?”

“디아나요. 디아나 솔.”

“그래요, 디아나 양. 나는 그저 디아나 양의 생각이 궁금할 뿐입니다. 혹여 잘못된 대답을 할까 저어되는 것이라면 내 말을 바꾸겠습니다. 당신이 어떤 대답을 들려주든 본래의 세상으로 돌려보내 줄게요. 어차피 당신은 잘로모를 살림으로써 올바른 선택을 했으니까요.”

그리그 프롬이 단언했다. 그에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은 디아나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는…….”

망설이는 음성이 적막한 사위를 꿰뚫었다.

“나는 당신이 어찌했든 아들을 살리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디아나는 슬쩍 마법사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잘로모의 성인식을 며칠 앞둔 당신에게 남은 선택의 가짓수는 얼마 없었어요. 금기를 범해서라도 아들을 마법사로 만들든지, 값비싼 패물을 챙겨 먼 곳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친족들에게 사실대로 말하면서 용서를 구하든지. 물론 마지막 선택은 할 수 없었겠죠. 아무리 진실하게 토로해도 20년 가까이 가문을 속였던 당신에 대한 분노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디아나는 혀를 내어 메마른 입술을 쓸었다. 어쩐지 목이 말랐다.

“두 번째 선택도 할 수 없었어요. 바깥세상은 평범한 인간에겐 너무나 위험했으니까요. 성내에서 곱게만 자란 잘로모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건, 토끼를 육식동물의 우리로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였겠죠. 그러니 당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첫 번째뿐이었어요. 당신만 대가를 치르면 잘로모와 친족들 모두 만족스럽게 살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잘로모는 내 선택에 불복했습니다.”

“나는 잘로모 프롬이 아니기 때문에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잘은 모르겠어요. 자신의 부족함으로 당신이 죽는 게 싫었을 수도 있고, 마법사가 아닌 평범한 인간 잘로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당신이 싫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짐작일 뿐이에요. 잘로모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영영 알 수 없을 거예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던 그리그 프롬이 무감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잘로모를 살릴 수 없었다고 말하는 거로군요.”

“아뇨. 그게 그러니까…….”

디아나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손을 내저었다.

“물론 그렇지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에요.”

그리그 프롬이 어서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디아나는 파들거리는 눈을 꼭 감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잘로모를 죽인 게 아녜요. 시대가 잘로모를 죽인 거죠.”

전란의 시대에 인간으로 태어난 아들을 품고 산 아버지에게 죄는 없었다. 어린 아들을 지키고자 가문을 속인 아버지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아들은 아버지의 잘못으로 죽지 않았다.

그저, 그런 시대였을 뿐이다.

“동화 속에서 잘로모와 만난 적은 있나요? 이렇게 기절한 잘로모가 아니라, 멀쩡한 잘로모와 얘기라도 나눠 본 적은 있어요?”

그리그 프롬은 대답이 없었다. 디아나는 치맛자락을 부여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늪지의 마법사가 당신이란 걸 알고부터 내내 궁금했어요. 당신은 어째서 늪지의 마법사가 되었을까. 당신은 어째서 늪지의 마법사를 악당으로 만들었을까. 당신은 어째서 동화 속 악당이 되었을까.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혹 당신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당신이 아들을 죽였다고 여기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잘로모가 죽지 않았을까, 이렇게 죽어서까지 고민하는 거잖아요. 실은, 그게 아닌데.”

디아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리그 프롬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온몸으로 부인하는 몸짓에서 처절한 속죄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내가 잘로모를 죽인 겁니다. 내가 부족해서 잘로모가 죽었어요.”

“아뇨. 그게 아녜요. 설령 잘로모를 살릴 수 있는 방책이 있었다 한들, 잘로모가 죽은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게 어떻게 당신 잘못이에요?”

“어찌 그리 단정합니까! 나는 분명 잘로모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살리지 못했어요. 내가 천수를 누리는 동안 내 아들은 긴긴 세월 깨어나질 못했는데, 그게 어찌 내 잘못이 아닙니까!”

“악마가 그랬다면서요! 불가능은 진정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디아나가 울며 외쳤다.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당신은 아들을 위해 가문을 배반했고, 수없이 목숨을 내놓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무얼 더 어떻게 하나요? 달리 생각해 보면, 당신의 선택에 불복하고 자살을 시도한 잘로모의 잘못이잖아요. 잘로모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당신만 죽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었는데. 어쩌면 아버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랬는지도 모르죠. 그럼 잘로모가 죽은 이유는 아버지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인가요? 그게 말이나 돼요?”

디아나는 흐느끼면서도 아주 간곡히 속삭였다.

“벌써 500년이 지났어요. 이제 그만 자신을 용서해 줄 때잖아요.”

서러운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디아나는 이유도 모르고 펑펑 울었다. 고작 500년 전 밀담에 속이 들끓고, 가슴이 저몄다. 어쩌면 그리그 프롬이 눈물 한 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몹시 애달픈 표정을 하고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삭막한 눈이 도리어 그녀를 슬프게 했다.

흐느낌이 잦아들 즈음, 그리그 프롬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동화를 찾아왔지만, 그중에서 아주 적은 수만이 올바른 결말을 맞혔습니다. 그들만이 내 생애를 들을 수 있었지요. 나름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주긴 했으나, 썩 마음에 차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본래의 세계로 돌려보내 주긴 했습니다. 원래부터 동화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동화의 올바른 결말을 내는 것이었으니까요.”

“…….”

“하지만 이렇게 우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군요.”

그리그 프롬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일어섰다. 그는 훌쩍이는 디아나에게 일어나라는 듯 손짓했다.

“이만 돌아가야지 않겠습니까.”

그리그 프롬은 손가락으로 세드릭과 루퍼트를 가리켰다. 디아나는 뺨에 흥건한 눈물 자국을 소매로 닦아 내며 영문도 모르고 그쪽으로 향했다. 남몰래 울었는지 코끝이 조금 붉어진 루퍼트가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이건 선물입니다.”

몇 걸음 뒤에서 디아나를 따라온 그리그 프롬이 수수한 목걸이를 건넸다. 얼결에 목걸이를 받아 든 디아나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뭔가요?”

“프롬 가문의 가보입니다. 잊힌 가보라는 것이 맞겠군요.”

“네?”

디아나는 경악한 나머지 목걸이를 떨어트릴 뻔했다. <엄숙한 프롬>의 가보라면 동화에 숨겨진 보물이 틀림없었다. 덥석 받기엔 너무 무거운 물건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디아나가 펜던트를 도로 내밀었다.

“이걸 내가 어떻게 가져요.”

“괜찮습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잘못이던가요?”

“하지만…….”

그리그 프롬은 디아나의 손에 억지로 펜던트를 쥐여 주었다.

“당신의 대답이 정답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일찍이 말했듯 정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나도 많이 지쳤나 봅니다. 당신의 말이 정답이었으면 하는군요.”

수백 년 묵은 마법사가 지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만 쉬고 싶습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간절한 부탁에 디아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비로소 안심한 듯 그리그 프롬이 평온한 얼굴로 고했다.

“마그누스 프롬의 기원이 당신을 지켜 줄 겁니다.”

마치 주문처럼 바닥에 희미한 원형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디아나가 경악하여 물었다.

“자, 잠시만요! 보물이 없는 동화는 어찌 되나요?”

“글쎄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으나, 보물을 잃은 금고는 응당 가치를 잃겠지요.”

“네? 그럼 설마…….”

마법진에서 뿜어 나오는 빛이 차츰차츰 강해졌다. 다급해진 디아나가 재차 펜던트를 내밀었지만, 그리그 프롬은 담담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모든 동화에는 끝이 있는 법입니다. 이제 그만 결말을 맺어야지요.”

디아나는 당혹스러운 나머지 울상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와중에도 마법진은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500년 전 북부에서 통용되던 고어와 사어가 춤추듯 허공으로 떠오르고, 프롬을 상징하는 검은 엘크가 이윽고 낯을 드러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예 단념한 디아나가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그리그 프롬. 당신은 충분히 멋진 아버지예요.”

그리그 프롬이 웃으며 화답했다.

“디아나 솔. 별의 축복이 늘 당신과 함께하기를.”

마법으로 되살아난 고대의 검은 엘크가 파도처럼 세 사람을 덮쳤다. 뒤이어 눈부신 광명이 찾아들었다.

주변이 무진장 시끄러웠다. 간신히 눈을 뜬 디아나의 시야에 익숙하되, 익숙하지 않은 전경이 들어왔다.

“관장님! 여기, 여기! 돌아왔습니다!”

누군가는 몹시 소란을 떨었고.

“이봐요, 루퍼트 씨! 정신 차려요!”

누군가는 기절한 루퍼트 월시의 뺨을 가차 없이 올려붙였으며.

“에드윈 경! 세드릭 경이 당최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황급히 세드릭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디아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보기 드물게 매끄러운 낯짝은 세드릭의 아버지가 분명했다. 비록 지금까지 대면한 적은 없으나, 저토록 아들과 소름 끼치게 닮았으니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세드릭의 부친, 에드윈 베가는 얼마간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아들을 안아 들었다. 디아나가 붙잡을 틈도 없었다. 멀어지는 부자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던 디아나는 뒤늦게 납득했다. 잘은 몰라도 매달 아들에게 편지며 선물을 한 아름씩 보내던 아버지니, 다친 세드릭은 어련히 잘 알아서 보살필 것이다. 언제나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세드릭에게도 그 편이 좋을 테고.

“저기, 디아나 솔 양? 맞으신가요?”

불현듯 들리는 목소리에 디아나가 화들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경을 쓴 낯선 사서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디아나 솔 양. 맞습니까?”

“네? 네. 맞아요.”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나요? 다친 곳은요?”

“아뇨. 없어요.”

“다행이군요. 그럼 지금 제정신인 사람이 디아나 양뿐이니, 위층으로 올라가서 관장님께 상황을 설명해 주셔야겠어요. 디아나 양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네에…….”

디아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서는 더 이상 용건이 없는지 바삐 책장 사이로 사라졌다. 어느새 휑한 주변을 둘러보던 디아나는 불현듯 그런 생각을 했다.

언니가 몹시 보고 싶다고.

*      *      *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그 프롬은 끄트머리부터 침몰하는 세상을 잠시 지켜보다가 침대 맡으로 돌아왔다. 동화는 보물을 지키는 미로 겸 금고이므로, 보물을 잃은 동화가 앞으로도 유지될 리 없었다. 동화는 본분을 다했다. 그리그 프롬은 담담하게 동화의 마지막을 수긍했다.

기실 500년을 버텨 온 것치고는 별다르지 않은 결말이었다. 동화를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만 하더라도, 결말에 이르면 누구나 납득할 만한 정답을 알아 가리라 믿었건만. 실상은 아직도 질문의 답을 찾지 못했으며, 아마도 영원토록 답을 알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그 프롬은 평온했다. 그는 정답 대신 다른 것을 얻었다. 한낱 질문의 답보다 훨씬 귀하고 소중한 것.

그는 슬며시 아들의 손을 쥐었다. 이렇게 손을 잡는 것도 무려 500년 만이었다.

“누구세요?”

이윽고 잘로모가 가늘게 눈을 떴다. 아직도 잠에 겨운 듯 몽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몸짓이 기억과 한 점 다르지 않았다.

그리그 프롬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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