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활하지 못한 마녀에게-11화 (11/18)

#4

동화 사냥꾼

헤스터는 심란한 눈으로 폐허를 훑어보았다. 불타 뼈대만 남은 열차는 푸릇푸릇한 여름의 펜잔스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정경이었다. 얼른 저 흉물을 치워야 펜잔스도 본시의 아름다운 풍광을 되찾고, 손상된 철로도 하루빨리 보수하여 원활한 교통을 회복할 테지만, 아마도 당분간은 어려울 것이었다.

“발푸르기스 평의회에서도 이번 참극을 꽤나 심각하게 여기는 듯합니다.”

거멓게 그을린 열차를 무감하게 보던 휴고 알피어스가 말문을 열었다. 헤스터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인 니올로의 악명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으니까요. 더구나 괄티에로 벨리의 수감자가 탈옥한 것도 전례가 없고요.”

“일단 잉그람 경찰에게 수사를 맡겼지만, 여차하면 평의회에서도 직접 수사관을 파견할 겁니다. 니올로 팔리아치의 공범을 잡기 위해 벌써부터 사냥꾼을 풀었다는 얘기도 들리더군요.”

“공범이라면 잉그람 혁명군을 말합니까? 평의회가 비(非)마법사에게 관여할 리 없는데…….”

발푸르기스 평의회는 마법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수뇌부다. 보수적인 마법 사회에서도 특히 보수적인 집단이므로, 제아무리 잉그람 혁명군이 니올로 팔리아치의 공범이라 하더라도 평범한 인간인 이상 쉽사리 그들을 잡으려 들지는 않을 터였다.

“그들은 잉그람 정부가 처리하겠지요. 평의회가 찾는 것은 다른 사람입니다.”

휴고의 대답에 헤스터가 낯을 찌푸렸다.

“마법사가 니올로 팔리아치에게 협력했다는 건가요?”

“풍문으로는 그렇습니다.”

“디아나는 열차에서 니올로 팔리아치 외의 다른 마법사를 보지 못했다고 하던데요.”

헤스터는 사뭇 가라앉은 어조로 대꾸했다. 며칠 전 울상으로 헤어진 동생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열차 테러는 니올로 팔리아치가 단독으로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만, 홀몸으로 괄티에로 벨리에서 탈출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마법을 부리지 못하는 마법사는 감옥의 장벽을 넘을 수 없을뿐더러 산티그마 교단의 광신도인 교도관들을 사주하기도 어려우니까요.”

한가롭게 외알 안경을 닦아 내던 휴고가 흘끗 한 눈으로 열차를 보았다.

“광인 니올로에게 협력했던 혁명군 일당이 올 초 어느 마법사와 접촉했다는 제보가 있습니다. 니올로 팔리아치가 괄티에로 벨리에서 탈옥한 것은 불과 6월경. 10년 넘게 수감되었던 마법사가 고작 한 달 만에 타국의 무장 단체와 접선했다는 것은 정황상 믿기 힘듭니다. 잉그람 혁명군과 광인 니올로를 연결해 준 제삼자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치에 맞겠지요.”

헤스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메시나의 마법사인 니올로 팔리아치가 우연하게 잉그람 북부 국경의 무장 단체와 협력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괄티에로 벨리에서 니올로 팔리아치를 꺼내 잉그람 혁명군에게 소개한 중개인이 있으리라 짐작하는 것이 타당했다. 더욱이 수많은 마녀?마법사를 제치고 구태여 수감된 니올로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중개인이자 공범인 누군가는 마법 사회에 속한 자가 틀림없었다.

불현듯 헤스터가 휴고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경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

본디 마법사란 족속은 타인의 일에 무관심했다. 괴짜로 소문난 휴고 알피어스라고 특별히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속속들이 정보를 파악한 점과, 헤스터에게 부러 일러 준 것은 일견 납득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그런 의문에 휴고는 별다른 고민 없이 대답했다.

“테렌스 경감이 그러더군요.”

“베로니카 테렌스 경감이요?”

“예. 현장 수사의 총책임자 말입니다.”

휴고는 불탄 열차 내부에서 감식관을 재촉하는 중년 여성을 가리켰다. 헤스터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오킹엄으로 소환장을 보낸 것도, 마녀의 의무 운운하며 그녀의 발을 펜잔스에 묶어 둔 것도 바로 베로니카 테렌스 경감이었다.

그러나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내겐 그런 말이 없었습니다.”

휴고는 알고 있던 사실을 헤스터는 지금 처음으로 들었다. 그렇다고 헤스터와 테렌스 경감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당장 어제 저녁에도 헤스터는 베로니카 테렌스 경감에게 그날의 일에 대해 똑같은 설명을 반복했었다.

“경감이 경을 경계하는 눈치더군요. 정확히는 경의 자매를요.”

휴고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헤스터의 표정이 일순 싸늘하게 식었다. 열차에서 수하에게 지시하기 바쁜 테렌스 경감의 거동을 낱낱이 좇는 시선이 영 곱지 않았다. 자연스레 가시 돋친 말이 나갔다.

“하나뿐인 동생은 살인귀에게 잡혀 모진 고초를 당했고, 나는 동생과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이제는 얼토당토않은 의심까지 받는군요. 그것도 이성과 합리를 신봉한다는 같은 마녀에게서요.”

“아주 몰상식한 의심은 아닙니다. 열차 테러로 수십 명의 군인이 사망했는데, 니올로 팔리아치에게 가장 오래 잡혀 있었던 디아나 솔만은 기적적으로 생환했으니까요.”

“디아나는 엄연히 마녀입니다. 평범한 인간과 비교하기는 무리예요.”

“경의 자매가 니올로 팔리아치에게 대적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이미 스승인 바바라 자일스의 증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게다가 경의 자매는 니올로 팔리아치가 어째서 어떻게 죽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잖습니까? 기실 당국으로선 어느 정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요.”

휴고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묵묵히 입을 다물었던 헤스터가 느지막하게 말문을 열었다.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뭔가요?”

예리하게 뜨인 잿빛 눈이 휴고의 옆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하지만 휴고는 헤스터의 날카로운 시선을 무던히 넘기며 변함없이 한가로운 어조로 말했다.

“수사 초기에는 나도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더군요. 누구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을 리 있겠습니까. 나는 경처럼 자진해서 작전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그저 펜잔스에 사는 마법사란 웃기지도 않은 이유로 동원되었으니까요.”

휴고가 그답지 않게 투덜거렸다.

“게다가 나는 진척도 없는 수사 때문에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여기에 발이 묶인 상황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뼈대만 남은 열차를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에요. 3년 동안 겨우 길들인 뱀버가 내 얼굴을 잊기라도 하면 아주 큰일이지 않겠습니까?”

달리 말하자면, 속이 상할 대로 상한 휴고 알피어스가 베로니카 테렌스 경감에게 농간을 부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헤스터는 그 기막힌 말에 진심으로 공감했다. 그러자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열차를 향했다. 늘 무섭도록 잔잔히 가라앉았던 마녀와 마법사의 눈이 이상한 열기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즈음 멀리서 그들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 경! 휴고 경! 테렌스 경감께서 찾으십니다!”

열차 앞에서 두 사람을 부르며 팔을 휘젓는 자는 베로니카 테렌스 경감 휘하의 수습 경관이었다. 헤스터와 휴고는 마치 약속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며 꾸물꾸물 걸음을 옮겼다. 오래도록 집을 떠나 고달파진 등 뒤로 그림자가 무겁게 이어졌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뭔가가 발견된 모양입니다. 테렌스 경감님 표정도 되게 무서워 보이죠?”

수습 경관이 시키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헤스터와 휴고는 당연한 듯이 침묵하며, 거멓게 그을린 객실 구석에서 수하와 심각하게 대화 중인 베로니카 테렌스 경감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아, 두 분 오셨군요.”

테렌스 경감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가볍게 목례했다. 그녀는 잉그람 전역의 마법 범죄를 담당하는 중앙경찰 마법범죄부서 소속으로, 왕실과 근로계약을 맺은 궁정마녀였다. 대체로 마법 범죄가 일반적인 범죄보다 위험하다곤 하지만, 이번 참극은 개중에서도 특히 위급한 사건인 만큼 현장 수사를 담당하는 테렌스 경감의 직무는 몹시 막중했다.

“여길 좀 보시겠습니까.”

경감은 지체 없이 객실 바닥의 한 지점을 손짓했다. 하지만 그곳은 다른 데와 마찬가지로 검게 그을렸을 뿐 육안으로는 달리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딱히 수상한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데, 무언가 발견한 겁니까?”

휴고가 물었다. 테렌스 경감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에게 작은 유리병을 건넸다. 유리병에는 검게 불탄 가루가 소량 담겨 있었다.

“냄새를 맡아 보십시오.”

휴고는 눈썹을 까딱하면서도 순순히 유리병을 코 밑으로 갖다 대었다. 단번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유황입니까?”

헤스터의 낯빛도 금세 일변했다. 그녀가 차례로 유리병의 냄새를 맡아 보는 사이, 테렌스 경감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펜잔스는 황이 재배되는 지역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지역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유황은 아니란 건데, 물론 승객이 지녔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유황은 악마의 냄새입니다. 그리고 니올로 팔리아치가 일전에 악마를 소환했다는 것은 익히 유명한 사실이지요. 악마 소환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휴고가 매섭게 말했다. 테렌스 경감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니올로 팔리아치의 시신이 발견된 곳도 바로 이 객실입니다. 확실히 그가 악마를 소환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더군다나 그의 시신에서도…….”

신속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테렌스 경감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누가 보기에도 당황한 기색으로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이, 일단 더 수색해 보겠습니다. 다음에 뵙지요.”

경감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헤스터는 미간을 찌푸리며 경감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방금 휴고의 말을 듣고 나니 경감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젠 하다 하다 악마까지 나오는군요.”

휴고가 질린 얼굴로 넌더리를 냈다. 악마 소환의 증거까지 나왔으니 지금까지 잉그람 당국에게 수사를 맡겨 왔던 발푸르기스 평의회도 더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즉, 사건의 중요 참고인인 휴고 알피어스와 헤스터 솔이 앞으로 더더욱 수사에 시달려야 함을 의미했다.

“한데 솔 경의 자매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요?”

헤스터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디아나는 니올로 팔리아치와 단둘이 남겨진 시점부터 기억이 없었다. 광인 니올로가 정말로 악마를 소환했는지, 복부의 상처는 어쩌다 입었는지, 헤스터가 구하러 오기 전 대관절 기차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했다.

다만, 헤스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오로지 디아나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불타는 열차에 뛰어들었던 그날. 그녀가 마침내 피 흘리는 디아나를 발견했던 객실에는 목이 잘린 시체가 한 구 너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알기로, 니올로 팔리아치의 시신에는 머리가 없었다.

*      *      *

조각달 떠오른 야심한 밤.

암암한 어둠이 숲 곳곳으로 스며든 가운데 난데없이 피어난 모닥불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인적 드문 곳에 수상쩍은 불빛이 등장하니 자연 짐승들의 발걸음이 그편으로 향했으나, 어떤 맹수도 쉽사리 모닥불을 덮치지는 못했다. 뿜어 나오는 흉흉한 마력을 이젠 감출 생각조차 없이 흩뿌리고 다니는 마법사 때문이었다.

디아나는 불빛이 닿는 구석 자리에 누운 채로 동화 사냥꾼을 흘깃거렸다. 그는 변함없이 말간 낯으로 모닥불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선해 보이던 인상이 지금은 소름끼치도록 흉악했다.

‘잘로모는 죽이지 않습니다. 날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진저와 도서관 사서도 해치지 않겠습니다.’

세드릭이 쓰러진 직후, 남자는 그리 말했다.

‘세드릭 자일스 없이 당신들이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의 말은 불편하지만 모두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루퍼트는 초보적인 마법조차 서툴러서 도서관 사서로 겨우 연명하는 마법사고, 디아나는 유별나게 감각만 발달했을 뿐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마녀였다. 세드릭이 혼절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간단한 치료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깨끗한 천으로 환부를 단단히 동여맸을 뿐, 피를 멈추고 상처에 새살을 돋우는 마법은 그들에겐 까마득한 난도의 창조마법이었다.

디아나는 불안한 눈으로 곁에 누운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안색은 점점 창백해지고 숨결은 갈수록 불규칙해지는데, 달리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고작해야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녹여 줄 따름이다.

“제발 여기서는 죽지 마…….”

여태 디아나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지난 늦봄, 광인 니올로가 벌인 참극에 휘말리며 죽음의 공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으나, 친지의 죽음에서 기인한 비극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었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그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쉽게 죽지는 않을 테니,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불현듯 지척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윗몸을 일으켰다. 구부정한 자세로 잠든 잘로모와 루퍼트를 빠르게 훑어 내린 시선이 이윽고 모닥불 앞에서 꼿꼿하게 앉은 인영에 닿았다. 홀로 잠들지 않은 동화 사냥꾼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으로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애당초 세드릭 자일스 정도의 마법사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사방에 이토록 마력이 가득하니, 그냥 내버려 두어도 며칠은 충분히 버틸 겁니다.”

마치 신문을 읽듯 무감한 어조였다. 그러나 얼마 전 고꾸라진 세드릭을 발로 건드리던 모습을 낱낱이 기억하는 디아나에겐 그조차 등골이 오싹할 뿐이었다.

“왜 세드릭을 살려 주는 거죠?”

동화 사냥꾼이 한쪽 무릎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유가 중요합니까?”

“당신은 세드릭을 싫어하잖아요.”

“설마 세드릭 자일스를 싫어해서 저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동화 사냥꾼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세드릭 자일스만을 노린 것은 그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진저와 도서관 사서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으니 공격할 이유도 없었죠.”

“그래서 세드릭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요? 당신이?”

불신으로 가득한 디아나의 잿빛 눈이 오롯하게 동화 사냥꾼을 향했다. 가만히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던 동화 사냥꾼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군요. 좋습니다, 나는 세드릭 자일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정확히는 그의 아버지 때문이지만.”

동화 사냥꾼은 상체를 내밀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럼에도 내가 세드릭 자일스를 죽이지 않은 이유 또한 그의 아버지 때문이죠.”

디아나는 물끄러미 동화 사냥꾼을 바라보았다. 불그스름한 불빛을 받아 음영 진 얼굴 윤곽이 어제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한낮의 햇볕 아래 꿀처럼 달콤하던 금발도, 봄철 하늘처럼 말간 연옥색 눈동자도, 더없이 우아하던 이목구비도 이제는 악몽 속 니올로 팔리아치와 한 점 다르지 않았다.

“왜 그렇게 보는 겁니까?”

“당신이 누군지 알 것 같아서요.”

그에 처음으로 동화 사냥꾼의 여유가 깨졌다.

인간 사회에 왕명으로 내린 법전이 존재하듯, 마법 사회에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율이 있었다. 그 규율을 어기는 이들은 이유 불문하고 죄인이 되며, 공평한 세 명의 법관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했다. 심판의 갈래는 셋뿐이었다. 무죄로 판명 나거나, 물질적으로 배상하거나, 아니면 지상 최악의 감옥인 괄티에로 벨리에 갇히거나.

하지만 그중에는 심판을 받지 않고 달아난 죄인들이 있었다. 그에 마법 사회의 지도부인 발푸르기스 평의회는 탈주한 죄인을 잡기 위해 전국 각지로 수배 전단을 뿌리고, 한편으로는 뛰어난 마녀?마법사들을 조직하여 그들의 뒤를 쫓게 했다. 세드릭의 아버지는 바로 그러한 ‘사냥꾼’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사였다.

“당신이 세드릭을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두렵기 때문이에요. 만약에라도 세드릭이 죽는다면, 섬광의 마법사는 당신을 잡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테니까.”

디아나는 간간이 자일스 저택으로 전해지던 우편물을 떠올렸다. 스승과 채스터티와 세드릭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전단지. 하지만 디아나는 습관적으로 넘겨보던 흉악범들의 얼굴.

“당신은 그다지 늙지 않았네요. 헤센 그윈티르.”

<잔악한 그윈티르>의 적자이자, 30여 년 전 반제의 유서 깊은 마법 가문인 오르테가의 열두 귀물을 훔쳐 달아난 도둑.

그가 이제는 그리그 프롬의 보물을 노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예상 밖입니다. 누굴 닮아 이다지도 영특한 건지…….”

동화 사냥꾼, 헤센 그윈티르가 나지막하게 웃기 시작했다. 정체를 들켰음에도 한 치의 동요조차 내비치지 않는 괴악한 여유가 몸짓마다 묻어났다.

“아마도 그리젤다를 닮은 것이겠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일순 디아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빛에 반짝이는 헤센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시, 싫어요. 나 안 갈래요.”

잘로모가 잔뜩 겁먹은 기색으로 디아나의 등 뒤에 숨어 버렸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모습에 적잖이 답답해진 헤센 그윈티르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겁먹은 겁니까? 당신은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텐데요.”

“그걸 어떻게 믿어요! 세드릭 형을 다치게 한 것도 다, 당신이잖아요.”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세드릭 자일스가 날 공격했을 겁니다. 난 어쩔 수 없었어요.”

“아뇨! 세드릭 형은 그런 사람이 아녜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는 잘로모 당신은 그들에 대해 얼마나 잘 알죠?”

날카로운 질문에 잘로모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헤센이 빙긋거리며 재차 물었다.

“이쯤 되니 궁금해지네요. 날 이렇게나 배격하면서 거기 있는 진저나 세드릭 자일스를 믿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요?”

“……당신은 나쁜 마법사잖아요.”

잘로모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어제도 마법으로 세드릭 형을 다치게 한 거죠? 아까 루퍼트 형한테 다 들었어요. 당신은 순진한 마을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잖아요. 진짜 용사도 아니면서 검은 숲으로 들어온 의도가 뭐예요? 분명 나쁜 꿍꿍이가 있을 거야.”

가만히 잘로모의 말을 경청하던 헤센이 멀찍이 선 루퍼트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루퍼트가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를 지그시 응시하던 헤센의 시선에 경멸이 깃들었다.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잘로모 당신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군요.”

헤센이 입술을 비틀며 디아나를 손짓했다.

“그들도 나와 같은 마법사입니다.”

멍하니 대답을 곱씹던 잘로모가 일순 뭍으로 올라온 활어처럼 펄떡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루퍼트를 돌아보았지만, 루퍼트는 슬며시 고개 돌리며 따가운 시선을 외면할 뿐이었다. 간절한 시선이 끝내 디아나를 향했다.

디아나는 어느새 잘로모에게로 돌아서 있었다. 변함없이 말간 얼굴이지만, 어쩐지 그 모습조차 낯설어진 잘로모는 불안감을 고이 간직한 채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잘로모. 저자를 따라가고 싶니?”

디아나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잘로모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도리질했다. 가짜 용사를 따라가기는 죽도록 싫었다. 그를 따라갔다간 무시무시한 늪지의 마법사와 마주칠지도 몰랐다.

“저 사람은 어떻게든 싫다는 널 데려갈 거야. 미안해, 난 저 사람을 막지 못해. 나는 너무나도 약한 마녀라서 널 구해 줄 수가 없어.”

잠시 입을 다물었던 디아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함께 가 줄게.”

체념 어린 얼굴로 발끝만 내려다보던 잘로모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결같은 디아나의 표정에 순간 환청을 들었나 싶었지만, 헤센의 얼굴이 점차로 구겨지는 걸 보면 온전히 잘못 듣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디아나는 다시금 헤센 그윈티르를 마주했다. 마냥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역정이라도 치밀었는지 사뭇 찌푸려진 얼굴이 조금은 고소했다.

“들었죠? 우리도 갈 거예요.”

“싫습니다.”

“우리가 함께하지 않으면 잘로모도 순순히 따라가지 않을 텐데요.”

“평범한 어린아이 하나 내 뜻대로 못 하겠습니까?”

헤센이 차게 웃었다.

“더군다나 당신들이 세드릭 자일스 없이 도대체 무얼 할 수 있다고? 하나는 재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뜨기에, 나머지 하나는 고작해야 책의 시중이나 드는 도서관 사서. 내가 잘로모만 데리고 가겠다 한들 당신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에게 대적할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알아요. 그래서 지금 당신을 설득하려는 거고요.”

“설득?”

디아나가 긴장한 얼굴로 대꾸했다.

“당신이 데려가지 않더라도 어차피 우리는 늪지로 향할 거예요. 물안개가 퍼져 있는 쪽으로 길을 잡으면 늪지가 나온다는 설명은 당신만 들은 게 아니라서요. 만약 당신이 그토록 우리를 떨어트리고 싶다면 여기서 우리를 죽여야 할걸요?”

헤센이 싸늘하게 식어 버린 얼굴로 지그시 루퍼트를 쳐다보았다. 그가 입을 떼려는 찰나에 디아나가 얼른 말을 채 갔다.

“혹시라도 루퍼트 씨를 해칠 생각은 하지 마요. 반제는 어떨지 몰라도 잉그람은 궁정마법사를 아주 안전히 보호하고 있거든요. 만약 당신이 루퍼트 씨를 해한다면, 국왕은 발롬피에 협약에 의거하여 당신을 최고 등급의 수배자로 올릴 거예요. 그럼 현상금은 억만금으로 뛸 테고, 수없이 날고 기는 사냥꾼들이 당신을 잡으려 들겠죠. 당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세드릭의 아버지라고 다를까요?”

“……그래요. 덕분에 사서를 죽일 생각은 싹 사라지는군요.”

헤센이 느긋하게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디아나는 바들거리는 입술을 꾹 사리물었다.

“내 언니가 누군지 알잖아요.”

“…….”

“우리 언니, 나 없으면 못 살아요. 이렇게 모자란 동생도 하나 남은 가족이라고 굳이 데리고 살고 있거든요. 그만큼 날 사랑하고 아껴요. 만약 내가 손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걸요.”

이후로 헤센은 한참이 지나도록 대답이 없었다. 깊이 골몰하는 표정만이 남아 침묵을 유도할 뿐이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헤센이 뒤늦게 말문을 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함께 가려는 거죠? 진저 당신의 입장에선 여기 남아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내가 동화의 올바른 결말을 내면 어차피 당신도 무사히 현실 세계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요. 그런데도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날 따라오겠다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군요.”

“그러는 당신은 왜 그렇게 나를 떼어 놓으려는 건데요?”

디아나가 도리어 반문했다. 그러자 헤센이 소리 죽여 웃으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좋습니다. 좋아요. 내가 졌습니다. 사실 난 당신들을 데려가도 별문제는 없거든요. 조금 귀찮아질 뿐이니까.”

헤센은 그리 말하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세드릭을 가리켰다.

“그런데 세드릭 자일스는 어떻게 할 겁니까?”

그에 디아나는 마법으로 답을 대신했다. 가벼운 손짓을 따라 허공으로 떠오른 세드릭은 땅에 누워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작은 뒤척임조차 없었다. 조심스럽게 세드릭의 상태를 살펴보던 디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모두를 데려가겠다는 굳은 결의가 엿보였다.

헤센은 하릴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돌아섰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마음대로.”

차츰 멀어지는 헤센의 뒷모습을 흘깃거리던 루퍼트가 서둘러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디아나도 기진맥진한 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잘로모에게 소매를 붙들렸다.

“누나…….”

잘로모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디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이 어린아이는 대관절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지 제대로 감조차 잡히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디아나는 찬찬히 설명해 주는 대신 말을 아끼기로 했다.

갑자기 나타나 세드릭을 쏜 동화 사냥꾼은 밝히지도 않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그녀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그러므로 혼란스러운 건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가자.”

디아나는 잘로모의 손을 붙잡았다. 왼쪽에는 잘로모가, 오른쪽에는 세드릭이, 그리고 눈앞에는 제 발로 어둠으로 기어들어 가는 도둑이 있었다. 책임은 늘되,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 사방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헤센 그윈티르와 잘로모만 보내서는 안 된다는 직감.

디아나는 그 막연한 직감에 모든 것을 내걸기로 했다.

*      *      *

언젠가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미친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단다. 연약한 네가 감당할 수 없으니 되도록 그들과 관계하지 말려무나.’

기차에서 생환한 이래 악몽에 시달리는 디아나에게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를 이해하려 하지 말렴. 그는 광인이야. 네가 이해할 수 있는 자가 아니란다.’

디아나를 염려하는 사람들은 전부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위험하다. 혹시라도 마주치면 맞서지 말고 최대한 멀리 달아나라. 그들은 네가 이해할 수 있는 족속이 아니며, 한낱 네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하지만 디아나는 도리어 되묻고 싶었다.

만일 달아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해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어찌해야 하느냐고.

500년 전의 마법사가 만들어 낸 동화는 늪지가 아니면 갈 곳이 없고, 달아난다고 달아날 수가 없는 세상이었다. 어떻게든 그리그 프롬의 의중을 파악하여 그가 원하는 결말을 맞혀야 했지만, 늪지가 코앞인 지금도 그리그 프롬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초상화 한 점 본 적 없는 중세의 마법사를 이해하기에 500년의 간극이 너무나도 깊었다.

디아나는 불안스러운 심정을 애써 감추며 헤센 그윈티르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래, 어쩌면 저이와 조우한 것이 좋게 작용할지도 몰랐다. 명색이 동화 사냥꾼이라는 작자가 그리그 프롬에 대해 무지한 채로 동화 속에 들어왔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만일 그가 저자가 바라는 올바른 결말을 내어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세드릭도 곧바로 치료를 받을 것이고, 그러면 결과적으로 그럭저럭 해피엔딩이다. 헤센 그윈티르는 그의 목적임이 분명한 동화 속 보물을 챙겨 달아날 테지만, 그를 잡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냥꾼의 몫이었다.

“그렇게나 두려워할 거면서 대체 왜 따라온 겁니까?”

갑자기 헤센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속을 꿰뚫는 질문에 디아나는 족히 당황했다. 그녀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헤센은 뒤를 돌아보며 나긋나긋한 표정을 지었다.

“궁금한 점이 있다면 물어도 좋습니다.”

늘 웃는 얼굴이기는 했으나, 지금의 헤센 그윈티르는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늪지가 지척임을 알리는 물안개가 점차로 짙어지기 때문일까. 디아나는 뜻 모를 그의 심중을 헤아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리그 프롬이 바라는 결말을 알고 있나요?”

“그럼 설마 그것도 모르고 여기 들어왔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다간 평생을 이곳에 갇혀 살아야 하는데?”

노골적인 비웃음에 디아나는 우물쭈물했다.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녀를 훑어본 헤센이 슬며시 미소를 그렸다.

“보아하니 그쪽 일행은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온 모양이군요. 참으로 불운합니다, 당신들은. 아니, 어쩌면 불운하기 때문에 하필이면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 속으로 들어왔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그 프롬도 대단히 불운한 마법사였으니까요.”

미처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헤센이 선심 쓴다는 듯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소곤거렸다.

“어차피 동화도 끝이 보이는데, 어린 양의 궁금증을 채워 주지 못할 것도 없지요. 진저는 그리그 프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저 <엄숙한 프롬>이 배출해 낸 저명한 마법사라고만…….”

“그리고?”

“말년에는 단단히 미쳐서 성에 갇혀 살았다고 알고 있어요. 루퍼트 씨가 말하기로는 불사를 꿈꿨다고 하던데요.”

헤센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지요. 프롬이 유독 폐쇄적인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그럼에도 그리그 프롬 정도의 전설적인 마법사가 이리도 베일에 감춰져 있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디아나가 머뭇거리며 수긍했다. 헤센이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에게로 얼굴을 붙였다.

“진저는 이유가 무어라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나는 잘…….”

“당신이라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텐데요.”

곧이듣기엔 사뭇 괴이쩍은 말이었다. 디아나는 가까스로 경직된 고개를 돌렸다. 왼쪽 뺨으로 헤센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도저히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좋습니다. 당신이 말할 수 없다면 내가 말하죠. <엄숙한 프롬>은 수백 년 전부터 조직적으로 그리그 프롬에 대한 사실을 지우고 있습니다. 그리그 프롬이 마법 사회에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아주 수치스러운 짓을 저질렀거든요.”

“수치스러운 짓이요?”

“예.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보다 불운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의 잘못만은 아니니까요.”

디아나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마법 사회가 용납하지 못하는 죄는 여럿이지만, 그렇다고 가문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위대한 마법사를 지워 낼 만큼 수치스러운 죄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위인들의 면면에서도 어렵지 않게 죄목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악마 소환을 비롯한 온갖 금기를 저질렀다는 중세의 비밀 조직 알게르 푸르게스크에는 북부의 저명한 마녀·마법사들이 수두룩하게 소속되어 있었다.

“진저. 마녀와 마법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역작이 무언지 압니까?”

“…….”

“바로 자식입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얼어붙은 디아나의 귓가로 헤센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많은 마녀·마법사들이 간과하는 사실이지요. 역사상 어떤 마법사도 마법으로 생명을 창조해 내지는 못했으니까요. 그야말로 마법이 닿지 못하는 경지요, 평생 갈구해야 하는 이상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러했듯 그리그 프롬도 사랑 없는 결실을 맺었으나…….”

헤센은 말을 끊어 내며 고개를 돌렸다. 홀린 듯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디아나는 그만 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동화 사냥꾼의 시선은 다름 아닌 잘로모에게 꽂혀 있었다.

“하지만 그리그 프롬의 역작은 무참히 실패했습니다. 또한 세상에 알려졌다면, 영원토록 프롬의 수치가 되었을 법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지요.”

헤센은 도로 정면을 바라보며 가볍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세상에 떠도는 그리그 프롬에 대한 이야기란, 고작해야 저서 몇 권과 진실을 가릴 수 없는 허황된 풍설뿐입니다. 그를 지워 내려던 치밀하고 끈질긴 노력이 아니었다면 벌써 한참 전에 진실이 폭로되었을 터. 프롬 가문의 노력이 참으로 눈물겹지 않습니까?”

말을 끝마친 헤센이 명랑한 웃음소리만 남기며 앞서 나갔다. 홀로 남겨진 디아나는 그저 황망히 금방 들었던 말소리를 곱씹을 뿐이었다. 하지만 곱씹고 곱씹어도 쉬이 납득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걸음이 멈춘 줄도 모르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누나. 무슨 일 있어?”

불현듯 잘로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는 화들짝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냐. 어서 가자.”

“얼굴이 창백한데…….”

“괜찮아. 걱정하지 마.”

잘로모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금세 디아나의 손을 맞잡았다. 차게 식었던 디아나의 손가에 따스한 온기가 퍼져 갔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다사로운 손이었다.

짙은 물안개가 스멀거리며 올라와 시야를 가렸다. 사방이 안개로 가로막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상황. 신중히 전진하던 헤센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도착했습니다.”

나지막한 소리였으나 일행에게 전해지는 파문은 컸다. 하나같이 석상처럼 얼어붙은 얼굴로 더디 다가온 이들은 헤센이 살짝 거둬 낸 수풀 틈새로 보이는 정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죽음의 늪지였다.

녹음이 우거진 주변과는 달리, 시들어 버린 들풀과 잎을 모두 떨어뜨린 가시나무만 간신히 숨을 이어 가는 곳. 수심을 헤아릴 수 없는 물가는 빛을 잃어 어둑했고, 늪지에 엉겨 붙은 적막은 벌레소리조차 전부 잠재워 버렸다. 이곳에서 새로이 피어나는 것은 오로지 물안개뿐이었다.

망연히 늪지를 내다보던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살갗에 와 닿는 안개조차 새삼스레 소름끼쳤다. 헤센은 다시 수풀로 늪지를 가리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여기부터는 나와 잘로모만 가겠습니다.”

그에 잘로모가 황급히 디아나의 등 뒤에 숨어 버렸다. 디아나가 침을 꼴깍 삼키며 헤센을 올려다보았지만, 처음 마주하는 그의 냉엄한 눈빛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진저. 아까 내 말을 기억한다면 순순히 내 뜻에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더 꾸물대다간 세드릭 자일스에게 큰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건 분명 당신도 바라지 않는 일이겠지요.”

디아나는 치맛자락을 붙들며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세드릭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러니 올바른 결말을 알고 있는 동화 사냥꾼을 도와 어떻게든 현실로 돌아가는 편이 옳았다.

하지만.

‘불안해.’

용사 아르놀트로 분했던 헤센 그윈티르와 동행했을 때 느껴지던 조마조마한 느낌이 이번에도 찾아들었다. 정체 모를 불안감에 심장이 자꾸만 두방망이질했다. 거듭 치미는 불안감을 애써 짓누르며 디아나가 잘로모를 돌아보았다.

“잘로모. 나랑 루퍼트 씨는 여기 있어야 해. 대신 네가 늪지에 다녀오겠니?”

“누나…….”

잘로모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디아나와 루퍼트를 갈마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 디아나는 잘로모의 손을 잡고 괜찮다, 괜찮을 거다 말해 주었으나 기실 본인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토록 불안감이 치솟았다.

잘로모를 데리고 늪지로 나가기 직전, 헤센이 단걸음에 디아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물을 것이 있었군요.”

그가 몸을 기울여 귓가에 입술을 붙여 왔다.

“디아나 솔. 도대체 광인 니올로는 어떻게 죽인 겁니까?”

일순 디아나의 숨이 멎었다. 창백하게 질린 디아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헤센이 피식거리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렇게 놀라면 안 되지요. 누구든 의심할 것이 아닙니까?”

헤센은 그리 말하며 한 손으로 수풀을 거두었다. 잘로모가 주춤거리며 먼저 늪지로 나가고, 그 뒤를 헤센이 따랐다.

가엾게도 덜덜 떠는 잘로모와 미소 짓는 동화 사냥꾼을 차례로 떠나보낸 뒤, 디아나는 그만 온몸에 맥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깜짝 놀란 루퍼트가 무어라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저 헤센 그윈티르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귓가를 맴돌 뿐이었다.

“괘, 괜찮아요.”

디아나가 넋 나간 꼴로 겨우 대답했다. 하지만 심란한 마음은 끝내 추스르지 못했다. 그사이 루퍼트는 자꾸만 수풀을 들추며 늪지의 동태를 살피기 급급했으나, 디아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알고 있을까.

오로지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상관없었다. 니올로 팔리아치가 어떻게 죽었는지, 과연 저 동화 사냥꾼이 정확히 알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스승에게도, 함께 자란 자일스 삼 남매에게도, 그리고 사랑하는 언니에게조차 꼭꼭 숨겨 왔던 비밀.

만일 헤센 그윈티르가 비밀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그를 입막음해야 할까. 내 힘으로 저자의 입을 막을 수 있을까. 나는 너무나도 약해서 저이에겐 상대도 되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밀을 지켜야만 한다면.

“마르…….”

그렇다면 비밀로 비밀을 지켜야 하는 걸까.

그때, 미약한 온기가 손을 감쌌다. 공황에서 발작하듯 깨어난 디아나가 발밑으로 황망한 눈길을 주었다. 하루가 넘도록 혼절했던 세드릭이 힘겹게 그녀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잔뜩 갈라지고 쉰 목소리였다. 금방이라도 다시 혼절할 듯 고단하게 뜨인 녹안이 엄중한 빛을 발했다. 디아나는 차마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망연히 세드릭을 쳐다보기만 했다.

“디아나 양! 저기, 저기에!”

별안간 루퍼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수풀 너머를 가리켰다.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헤센과 잘로모 단둘뿐이던 늪지에 어느덧 낯선 형체가 들어서 있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써서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죽음의 늪지에서 등장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늪지의 마법사.

“당신이 이 동화의 심판관입니까?”

헤센의 목소리가 적막한 사위를 또렷하게 꿰뚫었다. 낯선 이를 마주하고도 변함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래서인지 늪지의 마법사가 침묵하는데도 헤센은 별다른 당황의 기미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럼 내 선택을 보여 드리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헤센의 겉옷에서 새하얀 권총이 미끄러지듯 등장했다. 그리고 세드릭을 쏘았던 것처럼 허공으로 떠오른 총구가 이번에는 잘로모를 겨누었다. 우물쭈물 서 있던 잘로모의 얼굴이 금세 핏기가 가셨다.

“그리그 프롬. 모두가 선망하던 대단한 마법사에게도 한 가지 밝힐 수 없는 결점이 있었습니다.”

헤센이 우아하게 앞으로 걸어 나오며 잘로모를 눈짓했다.

“바로 외동아들인 잘로모 프롬이 별의 축복을 받지 못한 튀기였다는 것이죠. 근친혼으로 혈통을 지켜 온 프롬 가문에겐 더없이 불운한 일이며, 인생의 역작이 졸지에 실패작이 된 그리그 프롬에겐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 튀기란 사실을 비밀에 붙였습니다.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마땅히 쥐도 새도 모르는 새 죽어야 했던 튀기가 프롬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고, 그리그 프롬은 완전무결한 마법사가 되어 만인의 칭송을 받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헤센이 목소리를 낮추며 빠르게 속삭였다.

“잘로모 프롬이 성인이 되던 날. 아들의 병약함을 이유로 친족의 방문을 거절해 왔던 그리그 프롬도 이제는 모두에게 아들을 내보여야 하는 날이 도래했습니다. 물론 그는 훌륭한 마법사답게 튀기인 아들을 훌륭한 마법사로 둔갑하는 연극을 준비했지요. 철저하게 준비하여 실패는 생각할 수도 없는 계획이었습니다. 잘로모 프롬이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결국 연극은 실패했습니다. 잘로모 프롬이 별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친족들은 장장 18년간 자신들을 속인 그리그 프롬을 맹비난했습니다. 가문을 속인 가주가 말짱할 리 없지요. 그리그 프롬은 아무도 없는 고성에 갇혀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세상에는 그리그 프롬이 미쳤다는 소문이 떠돌았지요.”

헤센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끝마쳤다. 다시금 늪지에 익숙한 적막이 감돌자, 지금까지 침묵하던 늪지의 마법사가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잘로모는 어떻게 되었지?”

“당연히 죽었겠지요. 그 시절 프롬 가문에서 태어난 튀기가, 그것도 18년간 가문을 속였던 튀기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헤센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므로 그리그 프롬이 바라는 동화의 결말이란 잘로모의 죽음입니다. 실패작으로 태어나 아비의 명예와 가문의 영광을 무너뜨린 어처구니없는 불운의 아이. 마땅히 죽음으로써 죄를 갚아야겠지요.”

늪지의 마법사는 도로 침묵의 늪에 빠졌다. 결말을 확신하듯 헤센의 입가에 점점이 기다란 미소가 번져 갔다.

그리고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는 디아나는 혼란에 잠겨 있었다.

‘정말로 잘로모의 죽음이 올바른 결말일까?’

500년 전 마법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다. 평범한 마녀?마법사조차 튀기로 태어난 자식을 외면하던 판국에 프롬 가문에서 별의 축복을 받지 못한 불운한 아이를 용납했을 리 없다. 요즘에도 별의 축복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부모의 따스한 손길을 받지 못하고 자라고 있었다. 튀기로 태어난 파울 리버만도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신의 완전무결함을 지키기 위해 자식마저 희생한 아버지도, 자식의 부족함으로 고독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가 이런 동화까지 만들어 아들을 벌하고자 하는 분노도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논리적으로 헤아리면 그게 맞았다.

하지만 만사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올바를까. 디아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리 이성을 신봉하는 마녀라 한들 그녀도 비논리적으로 행동하는 때가 잦았고 그것은 언니인 헤스터도, 스승도, 세드릭도 마찬가지였다. 마녀도 사람인 이상 감정에 좌우되는 때가 있었다.

게다가.

‘언니는 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단다.’

그것이 혈육지친의 사랑이라면.

‘너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무릅쓸 수 있어.’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비논리적인 감정이다. 어떤 마법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기에 수많은 마녀?마법사들이 사랑이란 감정을 미워하고 멀리하고 배척한다지만, 그럼에도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사랑 없는 결실이 있는 것처럼, 사랑으로 피워 낸 기적도 존재하기에.

그렇기에 어쩌면 그리그 프롬도 오직 사랑만으로 이 동화를 만들었을지 모른다.

생각이 거기에 이른 순간, 디아나는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졌지만, 미처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멀리 웃고 있는 헤센 그윈티르와, 허공에서 잘로모를 겨누고 있는 권총.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이젠 죽고 없는 부모를 그리는 가엾은 고아 아이가 눈에 아프게 박혔다.

“제발 그만둬요!”

디아나가 간절히 외쳤다.

“잘로모를 죽이지 말아요! 제발!”

울퉁불퉁한 나무뿌리에 발이 차이고, 음습한 늪지에 자꾸만 발목이 꺾였다. 하지만 디아나는 멈추지 않았다. 형편없이 구르고 넘어지면서도 시선만은 잘로모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외침을 들은 체도 하지 않는 동화 사냥꾼을 향해 그저 목이 쉬도록 소리칠 뿐이었다. 부디 그가 멈추기만을 바라며.

“잘로모를 죽이면 안 돼요!”

그러나 동화 사냥꾼은 잔혹했다.

문득 디아나를 돌아본 헤센 그윈티르가 화사하게 웃으며 잘로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동시에 총구가 잘로모의 심장 부근을 겨누었다. 총기의 안전장치가 덧없이 풀려 나갔다.

디아나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안 돼!”

그 순간, 하늘에서 새하얀 낙뢰가 내리쳤다.

콰르릉!

지상으로 내리꽂힌 섬광에 눈이 멀고, 천지를 울리는 우렛소리에 귀가 멀었다. 낙뢰를 맞은 동화 사냥꾼은 온몸이 찢어지도록 비명을 내질렀으나, 그마저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 무자비한 형벌의 순간이었다. 모두가 하늘의 분노 아래 고개 숙였다.

그리 경각의 시간이 흘렀다. 제자리에 주저앉아 양팔로 얼굴을 가렸던 디아나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부신 벼락은 온데간데없이 본래의 어둠을 되찾은 검은 숲. 저 멀리로 변함없이 허리를 곧추세운 늪지의 마법사와 그새 기절한 잘로모가 보였다.

그리고 시커멓게 타 버린 채 너부러진 동화 사냥꾼의 시체. 디아나의 시선이 그곳에 못 박혔다.

“주, 죽었…….”

황망히 동화 사냥꾼의 시체를 응시하던 디아나가 불현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숨어 있었던 수풀에 세드릭이 간신히 기대어 서 있었다. 시체처럼 파르라니 질린 얼굴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디아나의 예민한 눈은 그보다 더 위급한 것을 발견해 냈다.

세드릭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대량의 마력.

그것은 고등마법의 잔재였다.

크럼프턴 왕립 도서관.

천년장미관의 관장인 빈센트 로치데일이 드물게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관장은 한산한 로비를 급히 가로지르며 귀객(貴客)에게로 다가갔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귀객은 바스러지는 햇빛처럼 찬란한 백금발과 영롱한 자색 눈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관장은 묵묵히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에드윈 베가.

잉그람의 저명한 마법 가문 <고결한 베가>의 수장인 아멜리아 베가의 유일한 동기이자, 선조인 오베론 베가를 계승하여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낙뢰를 내리는 마법사. 뛰어난 재능과 공명정대한 성품으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지만, 바바라 자일스와 별거한 뒤 사냥꾼으로서 타국을 전전했으므로 정작 고국인 잉그람에서 그를 만나기란 몹시 지난한 일이었다.

“공문으로 미리 전한 것처럼, 일급 수배범 헤센 그윈티르가 천년장미관으로 잠입한 것 같습니다.”

에드윈이 본관 복도를 빠르게 엇지르며 말했다.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잡던 관장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방명록을 살펴보았지만, 그자의 이름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헤센 그윈티르에겐 가명만 수십 개입니다. 설마 본명을 사용했겠습니까?”

냉담하게 대꾸한 에드윈이 곧바로 천년장미관의 문을 열어젖혔다. 눈부신 여름 햇빛이 쏟아지는 유리 천장 아래 드러난 천년장미관의 모습은 변함없이 정적이었다. 어딜 보아도 흉악한 수배범이 잠입했다 여길 수 없는 평화로운 정경이나, 관장을 돌아보는 에드윈은 엄격하기로는 한결같았다.

“방명록을 보여 주십시오.”

대저, 발푸르기스 평의회의 권위를 등에 업은 사냥꾼은 잉그람에 한하여 국왕보다 더 강력한 위신을 지니기 마련이었다. 크럼프턴 왕립 도서관의 규칙상 방명록은 영장을 발급받은 국가기관만이 조회할 수 있으나, 1687년 체결된 발롬피에 협약에 따라 정당한 자격을 가진 사냥꾼은 천년장미관의 방명록을 영장 없이 조회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천년장미관의 관장인 빈센트 로치데일 경은 하릴없이 에드윈 베가에게 방명록을 내보여야 했다.

관장이 몇 마디 주문을 외자, 허공에 두 뼘 남짓한 금고의 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관장이 열쇠 구멍에 소량의 마력을 흘려 넣은 직후 소리 없이 금고의 문이 열렸다. 자그마한 금고 안에는 손때 묻은 방명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주섬주섬 돋보기안경을 쓴 관장이 방명록의 맨 뒷장을 펼쳤다.

“이 페이지가 오늘 자 방명록입니다.”

에드윈은 관장에게서 방명록을 넘겨받았다. 빠르게 명부를 훑던 그의 시선이 불현듯 몹시 낯익은 이름에 고정되었다.

세드릭 자일스. 그의 아들이었다.

“헤센 그윈티르의 가명이 적혀 있습니까?”

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에드윈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페이지의 상단을 가리켰다.

“아놀드 호머. 석 달 전 그가 새롭게 매입한 거짓 신원입니다.”

“어디 보자……. 퇴실했다는 표시가 없으니, 아직 이곳에 머물고 있는 모양입니다.”

방명록을 유심히 살펴보던 관장이 슬며시 책장에서 손을 떼며 물러섰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명록을 덮으려던 찰나,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에드윈이 미간을 찌푸리며 오늘 처음으로 천년장미관에 입실한 이름을 가리켰다.

“J. J.라니. 방명록에 약자가 기입되는 것이 가한 일입니까?”

다른 별관과 마찬가지로, 천년장미관은 귀한 저서를 다량 보유한 만큼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분이 확실한 자만 입실이 허락되고, 방문객의 본명을 전부 방명록에 기입하는 것도 전부 엄격한 보안 철칙의 일환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관장이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방명록과 에드윈을 갈마보았다.

“아무래도 방명록을 관장하는 마법회로에 오류가 생긴 것 같습니다만……. 자세한 것은 정확히 확인해 봐야 알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에드윈이 이내 방명록을 덮으며 말했다.

“일단 헤센 그윈티르부터 찾아보지요. 관내에서 추적마법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관장은 금고를 소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몇 마디 주문만으로 관내의 추적마법을 발동시켰다. 천년장미관의 시스템을 이루는 마법회로는 이곳이 개장한 200년 전부터 오늘까지 모든 방문객의 동선을 기억했다. 그리고 천년장미관의 관장은 어느 때고 마법회로에 저장된 기록을 불러올 수 있었다.

오늘 자 방문객을 추적하는 발자국이 곧 바닥에 어지럽게 펼쳐졌다. 개중 헤센 그윈티르의 발자국을 가려내던 관장이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이 발자국이 헤센 그윈티르입니다. 이걸 계속 따라가면 그와 마주칠 수 있을……. 한데 옆에 이 발자국은 세드릭 경이 아닙니까?”

“방명록에 적히기로는 서너 시간 전에 왔더군요. 무슨 일로 천년장미관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으나.”

“헤센 그윈티르와 세드릭 경의 동선이 겹치는 듯합니다만, 지하 서고는 굉장히 광활하니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일단 내려가시죠.”

관장은 그리 말하며 지하 서고로 향하는 석문을 열었다. 이어지는 돌계단은 새카만 어둠으로 가려져 있었으나, 관장의 손짓 한 번으로 말라 있던 촛불 심지에 불이 붙었다. 은은한 불빛 아래 드러난 돌바닥에는 아놀드 호머로 가장한 헤센 그윈티르의 발자국과 세드릭 자일스, 그리고 세드릭의 편지에서 종종 이름을 보았던 디아나 솔의 발자국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에드윈은 주저 없이 돌계단으로 발을 디뎠다. 뱀이 똬리를 틀듯 지하로,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엇갈려 울리기 시작했다.

“에드윈 경.”

관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에드윈의 안색을 살폈다. 한참이 지나도록 잠잠하던 에드윈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로치데일 경. 금고마법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서가 있습니까?”

“세바스찬 씨요. 지금 당장 호출하겠습니다.”

관장이 바쁘게 호출을 넣는 사이, 에드윈은 현장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헤센 그윈티르, 디아나 솔, 세드릭 자일스의 발걸음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바닥.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증발이라도 한 듯이 발걸음은 이곳에서 멎어 있었다. 책 한 권만을 남겨 둔 채로.

에드윈은 말없이 책을 집어 들었다. 표지는 잔뜩 낡았으나, 제목을 분간 못 할 지경은 아니었다.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

무려 500년이 넘도록 어떤 동화 사냥꾼도 풀어내지 못한 난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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