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
옛날 옛날, 작은 숲 속 마을에 잘로모란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용에게 물려 죽고 어머니는 요정에 매혹되어 마을을 떠났지만, 혼자서도 꿋꿋이 소와 돼지를 기르며 살아가는 굳센 소년이었지요. 친절한 마을 사람들은 부모 잃은 아이를 가엾게 여겨 친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롭던 마을에 용사 아르놀트가 나타났습니다.
― 오, 용사이시여.
용사 아르놀트는 흉악한 용을 무찔렀기로 이름 높은 영웅이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마음 깊이 용사를 경배했습니다.
― 용맹하신 분께서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 북쪽 늪지에 사악한 마법사가 산다고 들었소이다.
아뿔싸, 늪지의 마법사라니. 마을 사람들은 마법사를 해치우러 왔다는 용사를 말리기 시작했습니다.
― 늪지의 마법사는 본데없이 지독하고 참혹한 악당입니다. 늪지에 발을 들였다가 살아 돌아온 이가 없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만류에도 용사 아르놀트는 끄떡하지 않았지요.
― 내 걱정은 하지 마시오. 다만 늪지까지 날 인도해 줄 안내자가 필요하오. 상처 없이 무사히 돌아올 것을 내 이름을 걸고 약조하지.
마을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습니다. 제아무리 용사 아르놀트가 용을 무찌른 위대한 영웅이라 한들, 수백 년 묵은 늪지의 마법사의 악명은 몹시 지독했기 때문이지요.
그때, 잘로모가 용감하게 손을 들었습니다.
― 제가 가겠습니다.
* * *
디아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장터를 가로지르는 이방인의 모습에 주민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좇았지만, 디아나는 그저 얼굴을 가리기 급급했다. 그러다가 끝내는 쥐색 망토를 깊이 눌러쓴 채 뛸 듯이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자색 구름이 몰려드는 저녁나절이었다. 쌀쌀해진 바람이 망토에 둘러싸인 뺨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디아나는 추위에 몸을 옹송그리며 외진 식당으로 들어섰다. 부서질 듯 닳은 문을 열기 무섭게, 뜨끈한 화로 열기와 술내 나는 왁자지껄한 소란이 밀려들었다.
식당은 하루 일과를 마친 일꾼으로 가득했다. 술과 요리를 겸하는지, 초저녁임에도 손님들의 얼굴이 벌써부터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문가에 엉거주춤 서 있던 디아나는 어쩐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망토로 얼굴을 가리다시피 했다. 그리고 서로 어깨동무하며 시끄럽게 노래를 불러 대는 손님 사이사이를 헤집고 나아가 구석 자리에 겨우 이르렀다.
“왜 하필 이런 데서 만나기로 한 거야.”
디아나가 자리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먼저 도착한 세드릭과 루퍼트가 맥주를 마시며 그녀를 기다렸는지, 툭 치면 쪼개질 것처럼 낡은 나무 컵 두 개가 나란히 탁자에 놓여 있었다.
“여기가 가장 저렴한 식당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시끄러워. 아주 귀청이 떨어지겠, 악!”
노래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추던 일꾼이 술기운에 휘청하며 디아나의 등을 밀쳤다. 화들짝 놀란 디아나가 빽 비명을 질렀지만, 시끄러운 노랫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그래도 식사라도 하게 돈을 마련할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일단 우리 주문부터 할까요? 디아나 씨는 뭘 드시고 싶으세요?”
등을 문지르며 일꾼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 디아나를 달래듯 루퍼트가 애써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 가장 위태로워 보이는 이가 바로 루퍼트였다. 푹 눌러쓴 망토 아래 얼핏 보이는 얼굴이 병자처럼 누렇게 떠 있었다.
“그냥……. 제일 싼 거 먹어요.”
몇 마디 불평하려던 디아나도 루퍼트의 초췌한 몰골을 마주하자 말을 잃은 모양이었다. 디아나는 사환을 불러 가장 저렴한 메뉴를 주문한 뒤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돈은 얼마나 남았어?”
“40그라트 정도.”
“40그라트면……. 앞으로 일주일이면 바닥나겠네.”
“그럼 또 단추를 팔아야지.”
그 전에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세드릭이 맥주를 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 자연히 탁자 위로 암울한 기운이 드리워졌다.
세 사람이 듣도 보도 못한 곳으로 떨어진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처음에는 낯선 오지로 이동한 줄만 알아서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는 데만 전력을 다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괴이한 점이 한둘 늘어갔다. 반제로 추정되는 북방의 작은 마을이면서 말이 잘 통한다는 점, 주민들이 이미 옛적에 멸망한 잘트부르거 왕국을 운운한다는 점, 그리고 마을의 모습이며 옷차림이 아무리 봐도 수백 년 전의 것이라는 점.
만일 추측대로 여기가 반제라면, 북방어를 모르는 디아나와 루퍼트는 주민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들의 말을 잘 알아들었고, 그것은 디아나와 루퍼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말인데도 자연스레 이해되고 있었다.
또한 잘트부르거 왕국은 웬 말인가. 아무리 벽지에 처박힌 오지여도 이미 수백 년 전에 멸망한 왕국을 운운하는 것은 아무래도 괴이쩍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반제란 나라를 알지 못했고, 여기는 잘트부르거 왕국의 영토임을 계속해서 강조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삽화로만 접했던 전통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마을의 모습. 여기에선 전차는커녕 마차도 보기 드물었다. 게다가 주민들은 죄다 촌스러운 전통 의상을 입은 채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데만 전념했다. 디아나는 범인들의 삶에 능통하진 않았으나, 이곳 주민들의 모습이 지금까지 보아 왔던 인간 사회와 많이 다르다는 점은 일찌감치 알아챘다.
자연스레 현실과의 괴리감이 느껴졌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각자 흩어져 마을 외곽을 조사한 결과, 이제 세 사람은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서쪽으로도 나갈 수 없었어. 분명 길은 계속 이어지는데, 마을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다시 마을 안쪽으로 돌아와 있더라.”
디아나가 침울하게 말문을 열었다. 세드릭과 루퍼트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지 열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자 디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게 맞는 거야? 루퍼트 씨 말대로 여기가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 속이라고?”
써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디아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세드릭과 루퍼트를 갈마보았다. 누구든 부정해 주길 바랐건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을 가장한 긍정이었다.
“여기가 정말 동화 속이라면 나가는 방법이 있긴 합니까?”
문득 세드릭이 물었다. 루퍼트가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갈 수야 있죠. 애당초 누군가를 가두기 위해 설계된 마법이 아닌걸요.”
“그럼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만든 건데요? 아니, 그보다 이렇게 위험한 책이 있으면 미리 설명을 해 줬어야죠.”
디아나의 날카로운 힐난에 루퍼트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책장에 꽂혀 있으면 안 되는 책이에요. 지하 철궤에 봉인된 책이 어째서 서고에 있었는지 저도 모르겠다고요.”
루퍼트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당황한 디아나가 머뭇거리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루퍼트는 양손으로 공손히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이건 책이 일종의 금고 역할을 하는 오래된 마법이에요. 반제의 마법사들이 보물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던 건데, 이미 오래전 전승이 끊긴 마법이라 지금까지 현존하는 책도 얼마 없어요. 천년장미관에도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를 포함해서 두세 권밖에 없을 거예요.”
“보물을 숨기다니요?”
“작가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면 숨겨진 보물을 얻는 방식이에요. 미궁에 빠트려서 길을 찾게 하는 책도 있고, 어려운 퀴즈를 풀게 하는 책도 있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보물을 숨기는 것이 목적이기에 맞힐 수 없게끔 어려운 문제를 내는 게 보통이에요. 더구나 동화 속 보물을 노리는 동화 사냥꾼이 나타나면서 문제는 점점 더 어려워졌고요.”
“굳이 동화의 형식을 빌린 이유가 있겠죠.”
세드릭이 나직하게 물었다. 루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는 그리그 프롬이 말년에 저술한 동화예요. 아시다시피 말년의 그리그 프롬은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무슨 의도로 동화를 썼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가 어떤 보물을 숨겼는지, 정말로 동화에 보물을 숨겼는지조차 확실치 않고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는 건데요?”
“제가 알기로는 동화를 완성시켜야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디아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동화의 결말을 지어야 한다는 거예요?”
“정확히는 그리그 프롬이 의도한 ‘올바른 결말’이죠.”
“그게 뭔데요?”
막힘없이 설명을 이어 가던 루퍼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조용히 그를 지켜보던 디아나와 세드릭의 시선이 더듬더듬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설마.
“제발 안다고 말해 줘요.”
“그, 그게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는 판본별로 내용이 너무 달라서, 저도 어떤 게 맞는지 잘…….”
“판본별로 내용이 다르다고요?”
“고아인 잘로모가 용사 아르놀트를 만나 늪지의 마법사를 처단하러 가는 초반부까지는 비슷해요. 문제는 그다음인데 어떤 판본은 잘로모와 아르놀트가 늪지의 마법사를 죽이는 결말이고, 어떤 판본은 아르놀트는 죽고 잘로모만 간신히 늪지에서 도망치면서 끝나요. 심지어는 용사 아르놀트가 잘로모를 배신해서 잘로모만 죽는 결말도 있다니까요?”
“미쳐서 쓴 글이라더니, 정말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네요.”
디아나가 헛헛하게 웃었다. 루퍼트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수그렸다.
“……만약 그리그 프롬이 의도한 방향으로 동화를 완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어찌 되었든 동화 속에서도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지금도 마을 어딘가에 고아 잘로모가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용사 아르놀트가 마을을 찾아와 잘로모를 데리고 늪지로 갈 것이다. 세 사람이 넋 놓고 있더라도 동화는 어떻게든 완성된다는 뜻이었다.
“굳이 독자를 동화로 빠트리는 마법이니, 우리가 간섭해야만 그리그 프롬이 원하던 결말이 나오겠죠. 가만히 손 놓고 동화가 저절로 완성되길 기다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이야기에 간섭할 수도 없고. 사실상 정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동화에 간섭하다간 그리그 프롬이 원하는 결말을 맞히지 못할 가능성이 큰데, 만약 그렇게 잘못된 결말이 맺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세드릭이 조용히 물었다. 노래에 악기 연주까지 더해진 소란스러운 사위에 오직 세 사람만이 고요했다.
루퍼트가 내키지 않는 듯 꾸물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만일 잘못된 결말이 나면 책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아마도 영영 여기서 살아야겠죠.”
이튿날.
디아나는 눈 밑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 채 여관 1층으로 내려왔다. 본디 야심한 밤에 잠들어 느지막하게 일어나는 디아나에겐 제법 이례적인 일이지만, 마을 주민들이 새벽녘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바람에 그녀도 일찌감치 기상할 수밖에 없었다. 시계가 없어 정확한 시각을 확인할 수는 없어도, 태양의 위치로 보아 아직 9시도 되지 않은 이른 아침이 분명했다.
다른 투숙객은 모두 부리나케 일어나 나갔는지 식당을 겸하는 1층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디아나는 층계참에서 멍하니 식당을 내려다보았다. 종업원들이 늦은 아침 식사를 즐기는 모습이 아침햇살에 은은히 번지고 있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목도하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여기서 뭐 해?”
문득 뒤에서 세드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념에 젖어 있던 디아나가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으나, 세드릭은 이미 그녀를 지나쳐 유유히 1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디아나는 얼른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왜 너만 내려와? 루퍼트 씨는?”
“점심때쯤에야 일어날 거야.”
“왜? 어디 아파?”
“밤새 악몽을 꾸는 것 같던데.”
디아나는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 루퍼트는 셋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지만, 역으로 가장 심약한 사람이었다. 무심한 스승과 개성 강한 자일스 삼 남매의 틈바구니에서 눈칫밥을 먹었던 디아나나 지난 2년간 국경 수비대로 활약했던 세드릭과 달리, 루퍼트는 아주 평범하게 자라나 최근에는 도서관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영위했기 때문이다.
“그럼 루퍼트 씨가 일어나면 잘로모를 찾으러 가야겠네.”
여기가 동화 속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주인공인 잘로모를 만나는 것이 급선무다.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용사 아르놀트가 잘로모를 데리고 늪지로 향하기 전에 잘로모에게서 최대한 많은 힌트를 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옷도 바꿔 입어야 하잖아. 돈이 모자랄 텐데 노란 집 영감탱이한테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일단 식사부터 하자.”
세드릭은 사환을 불러 요리를 주문했다. 디아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노란 집 영감탱이’에 대해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사흘 전 동화 속 마을로 떨어졌을 때, 당연히 마을에서 유통되는 화폐를 지니지 못했던 세 사람은 부득이하게 소지품을 팔아 돈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가난뱅이 디아나와 루퍼트에게 값진 소지품이란 사지 멀쩡한 육신뿐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부잣집 도련님인 세드릭에게 모두의 명운이 걸린 셈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세드릭의 재킷에는 보석 단추가 여럿 달려 있었다. 세 사람은 단추를 팔기 위해 마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노란 집 영감탱이를 찾았는데, 문제는 그 영감이 돈놀이를 업으로 삼은 사람답게 몹시 상스러웠다는 것이다.
‘너는 얼굴은 괜찮은데 몸이 영……. 자고로 여자라면 잡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말야.’
허연 수염을 염소처럼 기른 노인네는 디아나를 보자마자 그런 망언을 늘어놓았다. 그때는 노인네의 말도, 자신의 전신을 훑는 시선도 그저 기분이 나빴을 뿐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돌이켜 곰곰이 생각할수록 분기가 치솟았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구기며 포크로 감자를 난도질했다. 눈앞의 못생긴 감자가 노란 집 영감탱이라고 생각하니 자연스레 포크질이 험악해졌다.
맞은편에서 조용히 식사하던 세드릭이 문득 입을 열었다.
“노란 집에는 나 혼자 다녀올게. 너는 여기 있어.”
“왜?”
“월시 씨가 언제 깨어날 줄 알고. 한 명은 여관에 남아 있어야지.”
세드릭은 디아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디아나의 접시와 달리, 우아하게 칼질하는 세드릭의 접시는 요리만 조금 줄었을 뿐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물끄러미 세드릭을 쳐다보던 디아나가 시선을 내려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노란 집에는 다시 가야 했다. 언제까지 여기에 머무를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종잣돈을 넉넉히 마련해 두어야 했고, 무엇보다도 이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모두가 전통 의상을 입은 마을에서 전혀 다른 의복을 입은 세 사람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도 이방인에게 호기심을 비치는 주민들이 많은 상황에서 더한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만일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된다면.
듣자 하니 노란 집 영감탱이는 지난해까지 무려 20년 동안이나 촌장 행세를 했다고 한다. 돈놀이를 할 정도로 돈이 넘쳐나니, 마을의 실세로 군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디아나를 비롯한 세 사람은 동화의 올바른 결말을 찾지 못하는 이상 마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기에, 여기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영감탱이와 마주칠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때마다 노란 집 영감을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냐, 나도 갈래. 루퍼트 씨한테는 쪽지를 남기자.”
디아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세드릭의 빤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구태여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대신 다시금 감자를 난도질하는 손짓에서 굳은 결의가 엿보였다.
“꼬마 아가씨가 또 왔네.”
노인이 느물거리며 두 사람을 반겼다. 디아나는 거북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노인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섰다. 올해로 팔십이 넘은 노인은 소파에서 쉬이 일어나지 못했다.
“오늘은 무슨 일인가? 응?”
세드릭이 말없이 다가가 보석 단추 여러 개를 건넸다. 디아나에게 끈덕지게 붙어 있던 노인의 시선이 그제야 세드릭을 향했다.
“한데 두 분은 무슨 관계이신가? 이니지, 그 전에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야?”
노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인은 세드릭만은 비교적 점잖게 대했다. 물론 세드릭이 한눈에도 귀한 댁 도련님처럼 생기긴 했지만, 눈길과 언사로 디아나를 희롱하던 것이나 아예 루퍼트의 존재 자체를 무시했던 것을 떠올리면 자연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노인은 대답 없는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새끼손가락을 흔들었다.
“혹시 이거야? 아니면 그냥 데리고 다니는 건가? 하긴 댁 정도 상판이면 여러 여자 울리고 다닐 법한데.”
“얼마입니까.”
조용히 침묵하던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노인이 단번에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세드릭은 말없이 탁자에 놓인 단추를 눈짓했다.
노인은 그제야 단추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방언인지 무언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시부렁거림이 끊임없이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뭐야. 그때랑 똑같은 단추잖아. 이러면 많이 못 쳐줘.”
“그래서 얼마입니까.”
“개당 50그라트.”
부러 창밖만 내다보던 디아나가 황급히 노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50그라트라니, 말도 안 된다.
“이봐요. 사흘 전에는 100그라트였잖아요. 갑자기 왜 가격이 절반이나 깎이는 건데요?”
“똑같은 게 여러 개잖아. 이러면 희소성이 떨어진다고, 희소성이.”
“아무리 그래도 절반이나 쳐 내는 건 너무하잖아요.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나 돼요?”
디아나의 항의에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노인이 몸을 틀며 손짓했다.
“그럼 다른 데 가 보시든가. 꼬마 아가씨가 어려서 뭐를 잘 모르나 본데 원래 세상은 급한 사람이 지게 되어 있는 법이야. 난 급할 거 하나 없으니까 어디 요 보석 팔아 줄 사람 찾아가 보라고. 이 조그만 마을에 보석을 알아볼 사람이나 있을까 몰라.”
한참을 나불대던 노인이 은근슬쩍 곁눈으로 디아나를 보았다.
“아님 꼬마 아가씨는 나한테 뭐 줄 거 없나?”
이 사기꾼이 뭐라는 거야. 디아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를 높이려던 찰나, 세드릭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됐습니다. 개당 50그라트로 하죠.”
디아나와 노인의 시선이 세드릭에게로 모였다. 당황한 디아나가 연신 팔꿈치로 세드릭을 찔렀지만, 세드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휘둥그렇게 눈을 떴던 노인이 이내 너털웃음을 쳤다.
“그래. 여기 이분은 말이 좀 통하는구먼. 꼬마 아가씨도 보고 배우라고.”
노인은 곧바로 종을 울려 하녀를 불렀다. 노인이 하녀에게 돈주머니를 갖고 오라고 명령하는 사이, 디아나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보석 단추가 네 개. 개당 50그라트면 총 200그라트다. 지금부터 200그라트로 옷을 사고 숙박비를 지불해야 했다. 앞으로 얼마간 동화 속에 머물게 될지도 모르는데, 고작 열흘이면 세 사람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심란해진 디아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새삼 자신의 처지가 가련했다. 불과 두 달 전에 기차에서 광인을 만나 죽을 뻔했는데, 이번에는 동화에서 영영 살아야 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그래도 커다란 곡절 없이 이어지던 열아홉 해의 생애건만, 아무래도 올해는 악운이 낀 모양이었다.
그때, 시야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어?’
차를 따르는 하녀의 가슴을 훔쳐보느라 여념 없는 노인과, 노인의 무릎에 가지런히 놓인 돈주머니.
디아나는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다.
지금, 노인의 돈주머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금화 두어 개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쟤가 웬일이래.’
디아나는 슬쩍 세드릭을 곁눈질했다. 변함없이 차분한 얼굴이지만, 그가 벌이고 있는 작태를 알고 나니 그보다 더 천연덕스러울 수가 없었다. 본디 소유 개념이 명확하여 도둑질만큼은 엄하게 처벌되는 마법 사회에서 엘리트로 나고 자란 세드릭이 남의 돈을 훔치고 있다니. 스승님이 아시거든 놀라 자빠지실 일이고, 채스터티가 알거든 앞으로 30년은 놀려 먹을 일이었다.
하녀에게 정신 팔린 노인을 희롱하듯, 허공을 매끄럽게 떠다니던 금화는 곧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도 지금쯤 세드릭의 주머니로 안전히 이동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야 가까스로 하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노인은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세드릭에게 200그라트를 지불했다. 물론 세드릭은 고고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돈을 챙겼다.
“꼬마 아가씨. 나중에 또 보자고.”
노인은 끝까지 느물거리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디아나는 코웃음을 치며 응접실을 박차고 나왔다. 노인은 100그라트짜리 금화 세 개를 누구에게 도둑맞았는지 꿈에도 모를 터였다. 그걸 생각하니 조금은 분기가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디아나는 노란 집을 나오자마자 마법을 부렸다. 목표는 정원에 세워진 노인의 동상이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자신의 동상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리 천박한 노인네는 세상에 단 하나로 족했다. 디아나는 오직 그 하나만을 바라며 꾸역꾸역 세드릭의 제안까지 뿌리치고 여기에 온 것이었다.
동상을 노려보는 디아나의 눈에 희열이 서렸다. 오래지 않아 동상이 돌연 한쪽으로 기울더니 쾅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충격을 받은 동상은 멀쩡한 구석이 없었다. 특히 처참하게 깨진 머리 부분이 그러했다.
디아나는 후련해진 기분으로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동상을 기울이느라 제법 많은 마력을 소진했지만, 그래도 이마에 배어 나오는 땀방울이 이토록 반가운 적이 없었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으나, 만약 다음에도 무례하게 군다면 그때는 동상이 아니라 영감탱이를 저렇게 만들어 주리라 다짐했다.
그리 기쁘게 대문을 넘는 순간.
쾅―!
온몸을 울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디아나는 대경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밝은 햇살 아래, 제법 멋들어졌던 노란 지붕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안 가고 뭐 해.”
문득 세드릭이 황망히 멈춰 선 디아나를 스쳐 지나갔다. 디아나는 넋 나간 표정으로 세드릭의 뒷모습과 노란 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희뿌연 연기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노란 집. 그리고 점점이 멀어지는 까만 뒷모습.
디아나는 어쩐지 노인의 고함 소리가 들리는 듯한 노란 집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저건 내가 한 게 아닌데.
다시 여관으로 돌아온 디아나와 세드릭을 맞이한 것은 초췌한 낯빛의 루퍼트였다. 요즘 밤마다 악몽을 꾼다더니, 늦은 시간까지 깨우지 않은 보람이 있는 듯 어제보다는 혈색이 좋아 보였다. 노란 집 영감을 만나고 왔다는 말에, 루퍼트는 별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대신 종업원에게서 알아낸 잘로모의 집에 대해 설명했다.
“동쪽 외곽의 농장 부근에서 사는 모양이더라고요. 부모 없이 꿋꿋하게 사는 고아라고 마을 내에서는 꽤 유명한가 봅니다.”
계획대로 잘로모의 집으로 떠나기 전, 디아나는 여관 주인과 치열하게 흥정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헌옷 세 벌을 구했다. 세드릭과 루퍼트의 옷은 여관 주인의 남편이 젊을 적 입던 것이고, 디아나의 옷은 여관 주인의 딸이 어릴 적 입던 것이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거저 구입한 헌옷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얀 셔츠에 짙은 색 바지, 기껏해야 긴 장화가 끝인 남성복과 달리, 여성복은 나풀나풀한 소매며 발끝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치맛자락이 아주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
디아나는 우스운 차림을 가리고자 애써 망토를 둘러멨지만, 루퍼트의 눈치 없는 말 한마디 때문에 기분은 더더욱 구렁텅이에 빠졌다.
“디아나 씨. 꼭 옛날 동화책 속에 나오는 삽화 같네요.”
“그걸 누가 몰라요?”
“네?”
“아니요. 루퍼트 씨 옷이 참 잘 어울린다고요.”
그렇게 세 사람은 옥신각신 잘로모의 집으로 향했다. 듣기로는 여관이 위치한 마을 중심에서 1시간가량 걸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루퍼트는 그 1시간을 전부 수다로 채울 요량인지 묻지도 않은 정보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잘로모는 이야기 속 잘로모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왜, 동화 속 잘로모도 고아잖아요. 아버지는 용에게 물려 죽고, 어머니는 요정에게 홀려 마을을 떠난 뒤로 혼자 남은 고아. 아까 두 분이 노란 집에 가셨을 때 종업원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실제로도 그렇더라고요.”
“정말로 부모가 용에게 물려 죽고 요정에게 홀렸다고요?”
디아나가 영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용이나 요정이 어디 흔한 종족이던가.
“뭐 요즘에야 굉장히 보기 드물기는 하죠. 200년 전 용이 전부 지상을 떠난 뒤로는 자일스 가문에서나 종종 용을 볼 수 있을 뿐이고, 요정들도 점점 숲이 사라지면서 숫자가 급격히 줄었다고 하니까요.”
루퍼트가 말했다.
“그런데 여기는 500년 전의 반제잖아요. 볼크하르트나 프롬처럼 반제에 정착한 마법 가문은 하나같이 용과 척진 가문이라, 옛날부터 북쪽은 용 때문에 굉장히 골머리를 앓았다고 해요. 마녀들이 용과 한 번 싸우면 주변에 남아나는 게 없어서, 심지어 북쪽 어느 지방에선 용을 악마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니까요. 오죽하면 그랬겠어요?”
“네에…….”
“그리고 북쪽은 원래부터 숲이 우거진 지역이에요. 아마 잉그람이나 메시나보다는 요정이 훨씬 많이 살았을걸요?”
그래도 이름만 사서는 아니었는지 루퍼트는 제법 유창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하던 세드릭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 동화가 생각처럼 그리 허황된 세계는 아닌 모양입니다.”
“네. 사실이야 어쨌든, 마을 주민들이 말하는 잘트부르거 왕국도 500년 전에는 분명 실존하던 왕국이니까요.”
동화는 실존했던 왕국을 배경으로 당시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했다.
천년전쟁이 한창이던 500년 전, 마법 사회는 인간을 자신보다 하등한 종족으로 멸시했고 마법사와 인간을 당연하게도 ‘다른 종족’으로 구분했다. 마법 사회와 인간 사회가 지속적으로 교류했을 리 없으며, 마법사가 평범한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가질 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에는 놀라울 만치 인간의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잘로모란 평범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았으니, 저자의 숨은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디아나는 곰곰이 동화의 저자를 떠올렸다.
그리그 프롬.
<엄숙한 프롬>이 낳은 세기의 마법사이자, 시대를 앞서간 천재. 하지만 그는 능력을 채 피우지 못하고 미쳐버렸으며, 결국에는 친족들에 의해 성에 갇혀서 비운의 말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프롬의 역작. 만인에게 칭송받던 마법사는 고립된 성내에서 오로지 불사(不死)를 꿈꾸며 온갖 해괴한 연구를 자행했으나, 종내엔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란 동화책 하나만을 남겼을 뿐이다.
“미쳐서 쓴 책이니 뭐가 나와도 놀랍지 않겠어요. 지금 같아서는 용이 나와도 정말로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니까요?”
루퍼트가 투덜거렸다. 디아나도 그의 말에 반쯤은 공감했다. 당대의 왕국을 배경으로 삼고 잘로모라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그저 미친 마법사의 객기일 수 있었다. 어쩌면 저자의 의도를 찾는답시고 골몰하는 것이 시간 낭비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디아나는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그녀가 발 디딘 땅, 내리쬐는 볕, 귀를 스치는 바람. 이 모든 것이 500년 전 미친 남자가 마법으로 이루어 낸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마법으로 이렇게까지 구현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이 으레 믿듯, 정녕 마법은 기적인지도 몰랐다.
* * *
디아나는 목을 쭉 빼서 울타리 안을 살펴보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허름한 단층 건물과 드문드문 풀이 난 마당.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조용한 정경이었다.
“디아나 씨. 거기서는 뭐가 좀 보여요?”
“아뇨. 거기는요?”
“마구간밖에 안 보여요.”
디아나와 루퍼트는 서로를 마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드릭도 소득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별말 없이 돌아왔다.
“그냥 당당하게 들어가 보면 안 될까요? 어차피 주변에 다른 집도 없는데…….”
“그러다 잘로모랑 만나면 어떡해요. 당장 만나서 할 얘기도 없잖아요.”
디아나는 루퍼트에게 뾰족하게 핀잔을 주었다. 용사 아르놀트가 나타날 때까지 여관에 가만히 죽치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이렇게 잘로모를 찾아오긴 했지만, 곧바로 잘로모와 대면하기에는 여러모로 부담이 컸다. 자칫 잘못하다간 동화 속에 영영 갇혀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근처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는 게 나을…….”
조용히 의견을 표명하던 세드릭이 별안간 눈을 치떴다. 돌연 뒤편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까, 깜짝이야!”
꼭 벼락이 치듯 커다란 소리에 디아나가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커다란 사냥개 한 마리가 울타리 사이로 앞발을 들이밀며 위협적으로 짖고 있었다. 어찌나 살기등등한지 오금이 다 저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개를 조용히 시키는 마법 따위 알 리가 없었다. 사냥개를 진정시킬 방법을 찾다 못해 일단은 도망가는 척하려던 세 사람은, 뒤이어 문을 쾅 열고 등장한 소년의 모습에 그만 말을 잃었다.
“겡클라! 너 자꾸 짖으면 밥 안 준다고 그랬지!”
개를 마구 꾸짖던 소년의 시선이 이윽고 울타리 너머 세 사람에게 닿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멀뚱히 세 사람을 지켜보던 소년의 눈매가 차츰 가늘어졌다.
“도둑?”
“…….”
“……은 아닌 것 같은데.”
소년의 눈이 겁을 집어먹고 바들바들 떠는 루퍼트와 놀라서 얼어붙은 디아나, 그리고 여전히 차분한 세드릭을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그러고도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소년은 이내 답을 찾은 듯 명쾌하게 말했다.
“아하, 당신들이 그 여행객이죠? 사흘 전인가 나흘 전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네, 네에.”
디아나가 얼결에 대답했다. 이제 소년은 울타리 앞으로 다가와 아주 대놓고 그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우와. 나 이렇게 얼굴이 하얀 사람들 처음 봐요. 설마 태어나서 햇빛 본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죠?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렇게 하얄 리가 없는데.”
루퍼트와 디아나의 얼굴을 보며 차례로 감탄하던 소년은 뒤이은 세드릭의 얼굴에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나. 형은 되게 잘생겼다. 혹시 귀족 나리예요? 마르틴 아저씨가 귀족 나리들은 꼭 형처럼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했거든요.”
세 사람은 침묵했다. 그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소년은 신이 나서 세 사람을 마구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귀족 나리! 맞죠! 저기 갈색 머리 형은 나리를 모시는 하인이고! 그런데 영 미련스러워 보이는 게 일은 되게 못할 것 같네요. 봐요, 내가 지금 욕하는 것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거.”
“저기, 설마 지금 나 말하는 거…….”
“그런데 여기 빨간 머리 누나는 누구예요? 아무래도 하녀는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막 그런 거예요? 여기 계시는 귀족 나리랑 서로 한눈에 반해서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거, 그런 거 맞죠!”
소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디아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틀렸다고 짚어 줘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다행히도 여기서 가장 침착한 세드릭이 소년의 착각을 정정해 주었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여행객입니다. 귀족도 아니고요.”
“에이. 마을 사람들은 순수해서 그런 말 믿을지 몰라도 내 눈은 못 속여요. 지금까지 눈칫밥 먹고 산 게 몇 년인데. 그래도 뭐,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까 속아 주는 척은 해 줄게요. 그러니까 이것만 답해 줘요. 사랑의 도피 맞죠?”
세드릭은 침묵했다. 이번에도 침묵을 제멋대로 알아들은 소년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마르틴 아저씨가 얘기해 줄 때는 되게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까 나름대로 멋있네요.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사랑의 힘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수상한 사람들이 형이랑 누나 찾아도 모르는 척 발뺌할 테니까.”
헛기침까지 해 가며 젠체하던 소년이 불현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 집 앞에서 뭐 하세요?”
참 빨리도 묻는다. 세 사람은 동시에 생각했다.
짐작했듯 소년은 잘로모였다.
“이름이 특이하죠? 마을에서 잘로모란 이름은 저밖에 없어요. 대장간 토비는 자기랑 같은 이름이 다섯이나 되어서 항상 절 부러워한다니까요?”
이렇게 흔하지 않은 이름을 뽐내던 잘로모는 세 사람의 간단한 소개를 듣고선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우와. 여기 빨간 머리 누나 이름 말고는 전부 처음 들어 봐요. 네? 에이, 디아나란 이름은 흔하죠. 저어기 마르틴 아저씨네 막내딸 이름도 디아나라고요. 작년에 돌아가신 파란 지붕 집 할머니 이름도 디아나였는데……. 네에? 남쪽 나라에서 오셨다고요? 정말요? 어쩐지 생긴 게 마을 사람들이랑 다르다 했어요. 왜, 형이랑 누나들은 키도 작고 좀 약해 보이잖아요.”
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해 보이는 외관은 아무래도 육체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는 마법사의 공통점인 것 같지만.
“아무래도 북방인이 체격은 좋으니까요.”
“그래요? 그런데 형은 왜 나한테 존댓말 써요? 나한테 이렇게 정중하게 말하는 사람 처음 봐요.”
“그런가요.”
“어른 대접 받는 것 같아서 좋기는 한데 어째 좀 어색하네요. 우리 그냥 서로 반말하면 안 돼요?”
잘로모는 간절한 눈으로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세 사람은 난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삭막한 마법 사회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금방 안면을 튼 사람과 격의 없이 지낸다는 것은 퍽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열서넛쯤 먹은 어린아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 잘로모.”
하지만 잘로모는 동화의 주인공이었다. 좋은 인상만 주어도 모자랄 판국에 굴러 들어온 호의를 거절할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어쩐 이유에선지 자신들을 반기는 잘로모를 조금 서름하게 지켜볼 따름이었다.
때마침 마을을 스쳐 지나가는 먹구름에 세 사람을 집으로 불러들인 잘로모는 그래도 손님 대접을 해야지 않겠냐면서 먹을거리를 내놓기 시작했다. 분주한 손길이 오갈 때마다 탁자를 채우는 식기가 늘어 갔다. 하나같이 초라한 음식이었으나, 적어도 지난 며칠간 허름한 식사에 익숙해진 세 사람이 불평 없이 포크를 들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누나랑 형들은 어쩌다 길을 잃었기에 여기까지 온 거야? 이 주변엔 온통 농장뿐이라 아무것도 없는데.”
잘로모가 삶은 감자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그에 일행들과 몰래 시선을 주고받은 디아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검은 숲을 찾고 있었어.”
“뭐? 검은 숲?”
잘로모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누나. 검은 숲이 뭔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거기엔 나쁜 마법사가 산다고!”
“그럼 뭔지도 모르는 곳을 찾았겠니.”
디아나는 입을 비쭉이며 중얼거렸다. 그제야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아챈 잘로모가 심히 경악했다.
“저, 정말?”
검은 숲.
마을 북쪽에 자리한 드넓은 숲을 오래전부터 주민들은 그렇게 불렀다. 워낙에 나무가 높고 수풀이 우거져서 햇빛이 드나들지 못하는 탓에, 한낮의 숲 속도 밤처럼 어둡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검은 숲에서 유일하게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곳이 있다. 이제는 숲길조차 희미해진 오지. 사람은 물론이요, 짐승도 쉬이 드나들지 못하는 검은 숲의 심장부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지가 펼쳐져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수백 년 전 검은 숲으로 몰래 숨어든 사악한 마법사가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올가미라 하였다.
“검은 숲은 안 돼! 거기는 정말로 위험하단 말야. 늪지의 마법사가 얼마나 무서운지 누나가 몰라서 그래. 언젠가 그 마법사를 토벌하러 왔던 기사단도 아직까지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잘로모의 낯이 시허옇다. 검은 숲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삽시에 창백해지던 마을 주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마을을 뒤덮은 검은 숲의 악명. 수백 년간 늪지의 마법사가 뿌려 둔 공포. 외지인인 디아나도 쉽사리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진득한 두려움이다.
그러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검은 숲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렇게 진저리 치는 아이가 어찌하여 용사 아르놀트의 길잡이를 자처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설마 우리가 숲에 들어갈 생각이겠어? 그냥 하도 악명이 자자하기에 호기심이 들었던 것뿐이야.”
눅눅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루퍼트가 얼른 끼어들었다. 하지만 잘로모는 여전히 울상이었다.
“그럼 먼발치에서 보는 걸로 만족해야 해. 절대 들어가면 안 돼. 알았지?”
“당연히 그래야지. 어휴, 생각만 해도 무섭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지만, 잘로모는 그것만으로도 족히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금세 얼굴이 활짝 피더니 손수 삶은 감자를 나눠 주기 시작했다.
“하긴 우락부락한 기사단도 손도 못 쓴 곳인데 누나랑 형들처럼 야리야리한 남부인이 뭘 어쩌겠어. 괜히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바깥세상 이야기나 들려줘. 응?”
잘로모의 눈이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바깥에는 정말로 산처럼 높은 탑이 있어? 용감한 용사랑 못된 마법사가 싸우고 그래? 남부는 어떤 곳이야?”
500년 전 사람들에게 고향이란 곧 무덤이었다. 부모가 태어나고 죽은 곳에서 자식도 태어나고 죽기 마련이니, 바깥세상이 어떤 곳인지 전해 들을 기회도 많지 않았다. 이제 고작 열서넛 된 고아가 바깥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행과 난감한 시선을 주고받은 디아나가 마지못해 말문을 열었다. 책에서만 보아 왔던 옛날의 성과 탑에 대하여. 동화로만 들어 왔던 영웅에 대하여. 여기와 다름없되 조금 더 낮이 긴 남부에 대하여. 어린 소년은 디아나의 어눌한 표현을 무한한 상상력으로 채색했고, 그렇게 이야기 타래는 굽이굽이 이어졌다.
불그스름한 노을이 차차 번져 갔다.
목장에는 양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고, 잠시 자리를 비운 목동을 대신해 양 떼를 지켜야 하는 개는 꾸벅거리며 졸기 바빴다. 이제는 선뜻 봄기운이 느껴지는 바람이 유유히 수풀을 헤치는 가운데,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타종 소리가 선잠이 든 목장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디아나는 홀로 목장에 앉아 있었다. 마을 외곽에 자리한 목장은 이렇듯 날이 저무는 시간에는 오가는 사람조차 드문 곳이었다. 더욱이 오늘처럼 정기 예배가 있는 주일에는 마을 주민들이 전부 교회에 모여서 온종일 신앙을 공고히 하는 바람에 거리에서조차 인적을 찾기 힘들었다.
놀랍게도 디아나도 주일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든 동화에 대한 힌트를 찾고자 마을 주민이 전부 모인다는 주일을 공략하려는 시도였지만, 안타깝게도 별 소득은 없었다. 외려 어디서 왔냐는 둥, 여기는 얼마나 머물 거냐는 둥, 도대체 셋이 무슨 사이냐는 둥 쓸데없는 질문만 잔뜩 받는 통에 정신만 산란했다.
그래서 오늘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무사히 예배를 빠져나왔다. 아직도 주민에게 잡혀 고생하고 있을 세드릭과 루퍼트가 조금 안되었긴 해도, 적어도 루퍼트는 이번에야말로 늪지의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찾겠다는 사명에 불타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는 자업자득이었다.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뭐 해. 다들 무섭다는 말뿐인데.’
디아나는 한숨을 삼켰다. 수백 년간 늪지의 마법사를 등 뒤에 지고 살아온 마을의 주민이라기에, 그들은 늪지의 마법사 대해 아는 점이 이상할 정도로 적었다. 용을 부린다는 말도 있고, 사람을 먹는다는 말도 있었다. 공통된 의견이란 고작해야 검은 숲 중앙에 산다는 점과, 무시무시하게 잔인한 인물이라는 점뿐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무서우면 전부 그렇게 말하는 걸까. 물론 천년전쟁이 한창이던 이곳의 사람들에게 마법사란 응당 공포의 존재일 수 있었다. 당시 마법 사회와 인간, 특히 산티그마 교단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났었으니 족히 그럴 만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늪지의 마법사가 무시무시한 존재라면?
만약 그가 니올로 팔리아치 못지않은 잔혹한 마법사라면?
디아나는 울적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때가 되면 그녀는 동화를 끝내기 위해 늪지로 향해야 했다. 아마도 그곳에서 소문만 무성한 마법사를 만나게 될 터. 디아나는 아직 늪지의 마법사를 모르지만, 그는 이미 디아나의 상상 속에서 일정한 형체를 갖추어 갔다. 디아나는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 형체는 니올로 팔리아치와 아주 닮아 있었다.
“누나!”
불현듯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천지 그녀를 누나라 칭하는 사람은 동화 안팎을 따져서라도 단 한 명뿐이었다.
“잘로모.”
디아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며 애써 웃어 보였다.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우울한 기분을 알아채지 못한 잘로모가 얼른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아팠다면서.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디아나는 열없이 웃기만 했다. 갸웃거리며 디아나의 낯빛을 살피던 잘로모가 이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형들은 조금 늦을 거야. 아저씨 아줌마 들이 지금 술판을 벌였는데 누구 하나 만취할 때까진 놓아주지 않을걸.”
“그래.”
“형들 걱정 안 돼?”
“별로……. 알아서들 잘하겠지.”
“아하. 형들도 술을 되게 잘 마시는구나?”
금세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잘로모가 조잘조잘 말을 늘어놓았다. 자기도 술을 잘 마시고 싶은데 맥주 한 잔이면 얼굴이 빨개진다는 둥, 그래서 별명이 홍당무라는 둥. 디아나는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마을 주민들의 주사까지 술술 흘러나왔다.
“평소에는 말 한 마디 붙이기 어려운 뮐러 아저씨도 술만 들어가면 어린애처럼 변한다니까? 그런 걸 보면 못된 마법사들이 술을 발명한 게 틀림없어. 사람들을 술로 방심시켜서 못살게 굴려는 거야.”
“퍽이나 그러겠다.”
디아나의 비딱한 대꾸에 잘로모가 몹시 흥분했다.
“정말이야! 목사님이 그러셨어!”
“거짓말인가 보지.”
“목사님이 어떻게 거짓말을 해! 세상에 거짓말하는 목사가 어디 있어!”
“아, 알았어. 거짓말 아냐.”
디아나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잘로모는 그런 디아나를 흘겨보며 불퉁하게 말했다.
“가끔 보면 누나는 되게 못됐어. 꼭 심술쟁이 같아.”
의외로 디아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물끄러미 디아나를 바라보던 잘로모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고요한 침묵이 불어왔다. 디아나는 마냥 치맛자락이나 만지작거리고, 잘로모는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기에 여념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불현듯 잘로모가 디아나의 팔뚝을 잡으며 소리쳤다.
“누나! 저기, 저기 좀 봐!”
갑작스러운 큰소리에 놀란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잘로모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보랏빛 하늘 어드메, 하얀 별이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행운의 별 릴라야! 저 별을 보면 행운이 깃든대!”
그리 말하는 잘로모의 목소리는 숨길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디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하늘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의심으로 가득하던 표정이 금세 심드렁해졌다.
“저건 순수의 별 아담이야. 릴라는 더 동쪽에서 뜬단 말야.”
“뭐? 진짜?”
잘로모가 멍하니 하늘과 디아나를 갈마보았다.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 누나 목동이었어?”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별 조금 알면 다 목동이니?”
“그건 아니지만…….”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잘로모가 소금처럼 박힌 별을 가리키며 묻기 시작했다.
“그럼 저건 무슨 별이야?”
“비상의 별 몬티.”
“저거는?”
“시간의 별 아르젠토.”
“저기, 저건?”
“심미의 별 베아트리체.”
“그 옆에는?”
“사냥의 별 잔탈로스.”
“저기, 저쪽에 환한 별은?”
“봄의 별 오르페델레. 넌 사계의 별도 몰라?”
“저, 저건 당연히 알지! 누나가 정말 잘 아는지 시험해 본 거야!”
그러자 디아나가 콧방귀를 꼈다. 슬그머니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잘로모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있지, 난 원래 목동이 되고 싶었어. 누나처럼 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싶었거든.”
“난 목동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어쨌든. 목동은 다들 별에 대해서 잘 알잖아.”
잘로모는 그리 말하며 풀밭 위에 누웠다. 흘끔 그를 쳐다본 디아나가 선심 쓰듯 물었다.
“왜 그렇게 별이 궁금한데?”
“별은 어디든 똑같잖아. 여기서 보는 별이든, 누나가 태어난 남쪽에서 보는 별이든. 그래서 별을 볼 때마다 상상할 수 있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나를.”
어느덧 하늘은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총총히 박힌 별이 잘로모의 말을 조용히 재촉했다.
“나는 아마도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평생 이곳을 떠나지 못할 거야. 사실 떠날 생각도 없어. 나처럼 부모도 없는 고아를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 착한 사람들이 또 어디 있겠어. 하지만 상상은 할 수 있는 거잖아. 나이가 어려서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지금도,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서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될 때도, 너무 늙어서 집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될 때도.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나를 상상할 수는 있잖아.”
잘로모가 고개를 틀어 디아나를 보았다. 말똥말똥한 눈은 특별히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디아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초면에 이상할 정도로 호의를 표하던 잘로모. 고작 열흘 안 잘로모. 동화 속 주인공 잘로모. 디아나는 이제야 겨우 잘로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디아나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려는 찰나, 별안간 멀리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디아나 씨!”
“엇, 루퍼트 형이다.”
잘로모가 의아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저편,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황급히 이편으로 달려오는 루퍼트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디아나 양! 용사가 나타났어요!”
석양을 등진 목소리가 점점이 전해졌다.
“용사 아르놀트가 나타났다고요!”
디아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동화 속으로 들어온 지 15일째. 비로소 동화의 시곗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뒤였다.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간간히 광장을 내리비추는 가운데, 심각한 표정으로 두런거리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 한눈에도 심상찮았다.
“마르틴 아저씨. 용사가 나타났다는 게 정말이에요?”
용케 틈을 파고든 잘로모가 배불뚝이 중년 사내의 옷자락을 붙잡고 물었다.
“뭐야, 잘로모냐? 너 이제 곧 잘 시간 아니니?”
“아이참. 용사가 나타났다는데 어떻게 자요!”
“그새 소문을 들은 게냐? 아휴. 애 앞에서는 다들 조용히 좀 할 것이지…….”
“그러니까 용사가 나타났다는 게 정말이군요?”
사내가 대답하려던 찰나, 앞쪽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광장의 소란을 잠재우기 시작했다.
“자자. 다들 조용히들 하세요. 용사님께서 나오십니다!”
삽시에 광장에는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을 주민들은 긴장한 얼굴로 광장 맞은편의 노란 집을 주시했다. 그리고 영악한 잘로모는 주민들이 모두 정지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에구머니나, 잘로모!”
“죄송해요, 한나 아줌마! 잠시 지나갈게요.”
잘로모는 넉살 좋게 웃으며 마을 주민 사이를 헤집어 앞으로 나아갔다. 체구가 작은 디아나는 잘로모의 뒤에 등딱지처럼 달라붙어 앞으로 나올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루퍼트는 그러지 못했다. 삽시간에 뒷줄에 도태된 루퍼트가 당황하여 디아나의 이름을 계속 속삭여 댔다. 비록 대답한 사람은 그리젤다 솔의 딸인 디아나가 아니라 마르틴네 막내딸 디아나였지만.
끼이익.
이윽고 용사 아르놀트가 노란 집 대문을 열고 등장했다. 주민들은 생각보다 평범한 용사의 체구에 조금 실망한 듯 얼굴을 찌푸렸으나, 환한 횃불 아래 드러난 민낯에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일평생 밭일과는 인연이 없었던 것 같은 새하얀 얼굴과 우아한 이목구비. 마을 주민들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용사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저런 고귀한 얼굴이라면 가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용사라 할 만하다고 여겼다.
“오, 용사이시어…….”
누군가 자그맣게 내뱉은 속삭임을 시작으로 주민들은 너도나도 용사에게 허리를 굽실거리기 시작했다. 다시금 광장이 소란스러워지자, 용사를 뒤따라 나온 땅딸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조용히 좀 하시오! 당신들이 이러니 내 용사님 뵙기가 영 난처하지 않소!”
주민들이 재차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잘로모가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흥. 그러는 지가 더 시끄럽구먼.”
“저 남자가 누군데?”
“노란 집 영감탱이의 아들이야. 영감이 이젠 죽을 때가 다 되었는지 집에서 통 나오질 못하거든. 그래서 요새 촌장 업무는 다 저치가 도맡고 있어.”
그러자 땅딸보를 바라보는 디아나의 눈빛이 한층 더 매서워졌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는 격언이 옳다면, 저 땅딸보는 노란 집 영감탱이 못지않은 악질이 분명했다.
“자.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여기 이분은 올라퓌르 산맥의 악룡(惡龍)을 무찌른 용사님이십니다. 국왕 전하께 직접 기사 작위도 받은 대단한 분이시니 환영의 박수로 맞이해 드립시다.”
“그런 대단하신 분께서 이런 벽지까지는 어쩐 일이신데요?”
어느 주민의 눈치 없는 질문에 땅딸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이제 설명하려고 하지 않소! 도대체가 이 사람들은 말이야, 하나같이 기다릴 줄을 몰라. 가만히 있으면 내가 어련히 설명해 주겠지!”
“아니, 나는 그냥 너무 궁금해서…….”
“또, 또! 당신들이 그렇게 격의 없이 굴수록 마을을 대표하는 내 아버지의 위신이 깎일 거란 생각은 안 합니까? 어찌 그리들 생각이 없어!”
계속되는 땅딸보의 폭언에 주민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러자 이때껏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용사 아르놀트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괜찮습니다. 지금부터는 내가 설명하죠.”
나지막하지만 광장 전체를 관통하는 울림 있는 목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문 땅딸보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인 용사 아르놀트가 이내 광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이름은 아르놀트입니다. 7년 전 올라퓌르 산맥의 악룡을 무찌른 뒤로는 용사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지요. 하지만 여러분은 내가 악룡을 어떻게 무찔렀는지보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궁금할 테죠.”
주민들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 아르놀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듣기로는 이 마을의 북쪽에 꽤나 광대한 숲이 있다고요. 또 그 숲의 중심에는 200년 묵은 마법사가 살고 있고요. 나는 그 늪지의 마법사를 죽이러 왔습니다.”
일순 싸늘한 정적이 몰려들었다. 용사 아르놀트는 대경한 주민들의 낯을 면밀히 살폈다.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늪지의 마법사는 나 혼자 상대할 거니까요. 기실 실패는 생각하고 있지도 않고, 만에 하나 내가 실패하더라도 여러분에겐 별다른 피해가 없을 겁니다.”
“어째서죠? 용사님이 실패하거든 늪지의 마법사가 우리에게 복수하려 들 텐데…….”
“늪지의 마법사는 벌써 이백 살을 훨씬 넘겼습니다. 대단한 마법사일수록 오래 산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예전에 슐뢴도르프 수도원에서 400명의 수도사를 학살한 마녀 앙겔라 오르테가도 고작해야 백여든세 살을 살았을 뿐이죠. 이백 살을 넘긴 늪지의 마법사는 아마 지금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옛날에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는지도 모르지요.”
주민들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여러분의 도움이 조금 필요한데…….”
용사가 난감한 듯이 말을 흐렸다. 뒤에서 호시탐탐 말할 기회만 엿보던 땅딸보가 얼른 입을 열었다.
“늪지까지 용사님을 안내할 사람이 필요하오. 알다시피 검은 숲은 워낙에 길이 복잡하고 일조량이 적어서 초행자가 혼자 들어가기엔 무리니까.”
“우리라고 늪지까지 가는 길을 알겠습니까? 고작해야 나무를 베러 검은 숲 초입에서만 얼쩡거리는 정도구만.”
“어허. 그래도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정도는 다들 알잖소. 그리고 용사님께서 친히 여기까지 와 주셨는데 혼자만 보내자는 거요?”
땅딸보의 호통에 마을 주민들은 공연히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용을 무찌른 용사가 동행한다 한들, 무시무시한 늪지의 마법사가 사는 곳까지 길을 안내하기란 여간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를 늪지까지 안내한 뒤에는 먼저 마을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늪지의 마법사와 마주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 약속하죠.”
결국 용사 아르놀트까지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여전히 지원자는 없었다. 마을 주민 모두 슬슬 눈치만 보며 서로에게 짐을 떠넘기기 바빴다.
그러자 땅딸보가 은근하게 입을 열었다.
“어음. 내 생각에는 말이오. 처자식이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빠지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가장이 죽으면 남은 처자식이 몹시 고달파지니까 말이오.”
처자식 딸린 사람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자신감을 얻은 땅딸보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왕이면 몸이 건강하고 날쌘 사람이 좋겠지. 그래야 검은 숲에서 무난하게 용사님을 보필할 것이 아니오?”
“옳소!”
“또 굳이 덧붙이자면 가족이 없는 사람이 가장 좋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결혼하지 않아 처자식이 없고, 몸이 날쌔며 가족이 없는 사람.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던 마을 주민들의 시선이 우뚝 한군데에 멈추었다. 이상스러운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불현듯 따끔거리는 시선을 느낀 디아나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잘로모?”
잘로모는 흡사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디아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뜨끔하여 얼른 시선을 돌리는 주민들의 모습에 참으로 기가 찼다.
“모두 마을을 위한 거요.”
땅딸보가 느글느글하게 미소 지었다.
“여러분은 전부 마을의 공동체가 아니오? 여러분이 마을을 위해 노력한 면도 없잖아 있겠지만, 마을이 여러분에게 베푼 것도 많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러니 마을의 일원이라면 응당 마을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지. 진정, 마을의 일원이라면 말이오.”
‘진짜’ 마을의 일원이라면.
잘로모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나도 이것이 한 사람이 지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라는 것엔 공감하오. 그래서 자비로운 아버지께선 마을의 촌장으로서, 용사님을 인도할 안내자에게 100그라트를 선뜻 내주실 요량이라 밝히셨지.”
100그라트라는 말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쏟아졌다. 물론 그럼에도 안내자로 자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천히 마을 사람들을 훑어보던 땅딸보의 시선이 이윽고 잘로모에게 닿았다. 불쌍할 정도로 바들바들 떨던 잘로모는 이제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만 있었다.
땅딸보가 흐뭇하게 웃었다.
“자. 누가 자원하겠소?”
광장에 구름처럼 몰려 있던 주민들이 두런거리며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디아나는 쉽사리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땅딸보와 용사를 따라 노란 집으로 들어가는 잘로모의 뒷모습이 어쩐지 조금 안쓰러웠다.
“대단한 의리야. 아주 감동하겠어.”
불쑥 곁으로 다가온 세드릭이 신랄하게 빈정거렸다. 디아나는 대문 너머로 사라지는 잘로모의 조그만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저 남자. 정말 용사 아르놀트가 맞아?”
“노란 집 영감이 국왕의 인장을 확인했어. 아무리 무지몽매한 사람들이어도 그 정도는 알겠지.”
디아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동화가 이어지기 위해선 잘로모가 용사 아르놀트와 동행해야 했다. 그 과정이 영 메스껍긴 했어도 결과적으로 그들에겐 잘된 일이었다.
어느덧 광장은 한산해졌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그만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디아나가 불현듯 물었다.
“그런데 인간이 용을 죽일 수 있어?”
용과 사투를 벌인 마녀?마법사의 일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디아나는 이제껏 용을 죽인 인간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세드릭이 기른 윈터만 하더라도 한낱 인간이 대항하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존재가 아니던가.
이맛살을 찌푸린 채 한참 침묵하던 세드릭이 대답했다.
“아니.”
* * *
흥겨운 피리 소리가 바람결에 전해졌다.
아직은 조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들판. 디아나는 그곳에 앉아 축제가 한창인 광장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색색의 깃발이 하늘을 수놓고 괴상망측한 인형 탈들이 쉼 없이 광장을 누비는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족히 흥겨웠으나, 정작 그녀의 표정은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허황되기 짝이 없는 산티그마 교단의 경전을 억지로 읽어야 해도 저만치 열없지는 않을 터였다.
문득 디아나가 얕은 한숨을 뱉어 냈다. 고집스레 광장에만 꽂혀 있던 시선을 슬쩍 사선으로 옮겨 보았지만, 외려 답답한 마음만 커질 뿐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멍하니 축제를 지켜보는 조그만 등짝. 엄연히 자신을 위한 축제임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는 저 모습이 갑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축제의 주인공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즐기기에 한창인 마을 주민들이 짜증스러웠다.
‘세드릭이랑 루퍼트 씨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세드릭은 용사 아르놀트를 감시하느라, 루퍼트는 마을 아가씨의 손에 붙잡혀 벌써 2시간째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춤을 추고 있었지만, 그런 사실을 디아나가 알 턱이 없다. 디아나는 괜스레 이 자리에 없는 두 사람을 원망하며 슬그머니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혼자라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리지만 말을 걸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잘로모.”
조용한 부름에 잘로모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디아나는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피며 옆자리에 앉았다.
“축제인데 넌 여기서 뭐 해.”
“나야 뭐……. 그러는 누나는 여기서 뭐 해?”
“난 원래 시끄러운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럼 나도 그렇다고 치지 뭐.”
잘로모는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린 채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평상시의 잘로모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보기에도 이상스럽다 여길 만큼 낙담한 모습이었다. 디아나는 이리저리 위로의 말을 궁리해 보았지만, 여태 안 했던 짓을 갑작스레 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위로를 포기하고 솔직하게 나가기로 했다.
“내일 떠난다며?”
잘로모는 대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하고 싶은 화제라는 것은 척 보기에도 알겠으나, 디아나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괜찮겠어?”
“다 정해진 마당에 내가 괜찮지 않으면 어쩔 거야.”
“그렇긴 하지만…….”
디아나는 슬며시 잘로모의 표정을 살폈다. 의외로 잘로모는 담담해 보였다. 반강제로 자신을 떠미는 주민들에게 분개하거나, 아니면 두려워서 덜덜 떨고 있으리라 짐작했던 것이 아주 틀렸다.
“안 무섭니?”
“뭐가. 늪지의 마법사가? 당연히 무섭지.”
잘로모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디아나를 흘겨보았다. 디아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그런데 왜 가는 거야?”
“무슨 소리야?”
“그렇게 무서우면 가지 않으면 되잖아. 아무리 마을 주민들이 너한테 눈치를 줘도 네가 못 가겠다고 사정하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잖아. 주민들이 그래도 너를 꽤 귀여워한다며.”
잘로모는 고아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아인 디아나는 바바라 자일스의 도제로 들어가 그녀의 자식들과 함께 자랐지만, 잘로모는 부모를 잃은 뒤로 계속 혼자 살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여태 별 탈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마을 주민들의 관심 덕분이었다.
“그래, 귀여워하지. 귀여워서 음식도 가져다주고, 옷도 챙겨 주고. 하지만 목숨이 달린 일은 조금 다르잖아.”
잘로모가 턱을 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누나. 난 마을 사람들이 밉지 않아. 물론 그 땅딸보는 좀 얄밉지만, 그 사람은 옛날부터 그렇게 막돼먹은 사람이었는걸. 다른 사람들은 그저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 했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연고 없는 내가 뽑힌 것도 이해해. 그 사람들이라고 나처럼 어린애를 검은 숲으로 들여보내는 게 마음 편할 리는 없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제까지는 되게 원망스러웠는데, 오늘은 괜찮아졌어.”
디아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로모는 전부 이해한다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근 며칠 뱃속을 홧홧하게 덥히던 분노를 얼마나 삭이고 삭였으면 저런 초연한 표정이 나오는 걸까. 디아나는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별일이야 있겠어? 용사님도 함께 가잖아. 게다가 나는 늪지의 마법사랑 마주칠 일도 없고. 그냥 소풍 가는 기분으로 눈 딱 감고 며칠 다녀오면 되겠지.”
잘로모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디아나는 물끄러미 잘로모를 보던 시선을 돌려 여전히 축제가 한창인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공동체 운운하며 연고 없는 아이를 벼랑으로 내몬 촌장. 용사와 잘로모의 성공적인 귀환을 기원한다면서 저들 놀기에 바쁜 주민들. 그리고 속절없이 맹수의 아가리에 스스로 머리를 집어넣어야 하는 어린 고아.
그리그 프롬이 대관절 무슨 연유로 이런 동화를 집필했는지 전혀 모르겠으나, 만약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면전에다 이런 말을 던지고 싶었다.
그리그 프롬.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마법사라고.
“같이 가 줄까?”
디아나가 조용히 물었다. 턱을 괸 채로 멍하니 축제를 지켜보던 잘로모가 뒤늦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
“네가 원한다면 같이 가 줄 수도 있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누나가 왜?”
잘로모의 눈빛이 흔들렸다. 디아나는 담담하게 잘로모를 마주 보았다.
“이유는 묻지 말고. 내가 같이 가 줬으면 좋겠어?”
용사 아르놀트의 걸음이 차차 느려졌다. 잘로모가 잔뜩 위축되어 그의 눈치를 살폈으나, 아르놀트는 그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당신들은 분명 마을에서 봤던…….”
“세드릭입니다.”
세드릭이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 아르놀트는 인심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구태여 궁금증을 숨기지 않았다.
“옆에는 일행인가요?”
“네.”
“아가씨는 축제에서 뵙지 못했던 분이군요. 한데 여기에는 어쩐 일입니까?”
디아나는 말없이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지금 그들은 검은 숲 입구에 서 있었다. 의도적으로 용사의 앞길을 막는 모양새였다.
그때, 잘로모가 나섰다.
“저, 용사님. 여기 형들이랑 누나도 동행해도 될까요? 아시다시피 제가 너무 어려서 혼자 보내기는 안심이 되지 않나 봐요.”
“혼자 가다니요? 나도 함께 가지 않습니까.”
“만약 당신이 잘못되면 잘로모 혼자서 돌아와야 합니다.”
세드릭의 말에 아르놀트가 눈썹을 비딱하게 올렸다.
“꼭 내가 잘못되길 바라는 투군요.”
“서, 설마요! 형은 그냥 제가 너무 걱정되어서 그런 거예요! 그렇지, 형?”
잘로모가 채근하듯 묻자, 세드릭은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놀트는 영 못마땅한 눈초리로 세드릭을 아래위로 훑었다.
“내가 거절해도 따라오겠지요?”
“그걸 안다면 거절하지 않으시겠죠.”
아르놀트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잘로모의 낯빛이 조금 밝아졌다. 지금까지 겁나는 마음을 꽁꽁 숨겼어도 내심 불안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잘로모는 숲의 초입에서 일행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검은 숲은 햇빛이 잘 들어오지 못해서 한낮에도 저녁처럼 어두운 곳이에요. 사나운 들짐승이 많아서 쉽사리 등불을 켤 수도 없고요. 일단은 그나마 밝은 낮에 움직이고 밤에는 쉬도록 할게요.”
“숲에서 길은 어떻게 찾죠?”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껍질에 여러 가지 표식이 새겨져 있어요. 마을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인데, 늪지로 가는 길을 알려 주는 표식은 딱히 없어요. 늪지에 마법사가 살고 있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라 굳이 거기로 갈 일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여러 가지 표식을 순서대로 조합하면서 길을 잡아야 해요. 워낙에 복잡하고 경험에 의존하는 부분이 커서 설명하기가 복잡해요. 다만 늪지에 다다르면 땅바닥에서 습한 안개가 스멀스멀 올라온다고 하니, 혹시나 누구든 안개를 발견하거든 꼭 제게 알려 주셔야 해요.”
잘로모의 말에 따르면 늪지까지는 걸어서 사나흘이 걸렸다. 물론 도중에 다치거나, 길을 잘못 들기라도 하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걸릴 수도 있었다. 잘로모는 검은 숲에 새겨진 표식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는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자신감이 많이 부족해 보였다.
“게다가 마르틴 아저씨 말로는 최근 몇 년 동안 깊숙한 숲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없었대요. 중간중간 표식이 사라졌거나 길이 끊겼을 수도 있다는데…….”
“그건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죠. 길이 말짱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르놀트가 잘로모를 안심시키며 길을 재촉했다. 잘로모는 여전히 불안이 가시지 않은 기색으로 머뭇거리며 앞장섰다. 그 뒤를 차례로 루퍼트와 디아나, 세드릭이 따르고 아르놀트가 가장 후미에서 걸었다. 언제 어디서 위험한 짐승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잘로모의 경고대로 검은 숲은 대단히 어두웠다. 분명 지금은 아침을 막 넘긴 오전임에도 숲 속은 꼭 저녁처럼 어둑어둑했다. 벌써부터 이렇게 어두우면, 밤에는 얼마나 어둡다는 걸까. 아무것도 뵈지 않는 어둠을 상상하던 디아나는 문득 어깨를 바르르 떨며 상념을 떨쳐 냈다. 지금은 괜한 걸 상상할 때가 아니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이며, 썩은 가지가 낭자한 땅바닥을 골라 걷기에도 벅찼다.
“디아나 씨. 숲에 들어온 이후로 마력이 더 짙어지지 않았어요?”
루퍼트가 불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사방을 훑어보았다. 키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검은 숲.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숲 속은 이상할 정도로 마력이 충만했다. 마법으로 만든 세계인 만큼 동화로 들어온 이래 항상 마력이 느껴지긴 했어도, 마을에선 분명 이만한 농도가 아니었다.
도대체 그리그 프롬은 무얼 원하는 걸까. 하지만 나름대로 의문점을 해결하기에, 애당초 세 사람은 그리그 프롬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빈약했다. 그리그 프롬이 동화를 집필한 의도를 유추할 수 있는 기반조차 마련되지 않았으므로, 과연 늪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디아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숨을 깊게 들이켰다. 햇살이 잘 들지 못한다는 이 숲은 공기마저 정체된 것인지 호흡조차 간단하지 않았다. 눅눅하고 습한 공기는 그저 신경만 날카롭게 갈아 낼 뿐이었다.
“여기 표식이 있네요.”
잘로모가 첫 번째 갈림길에서 멈춰 섰다. 잘로모가 유심히 살펴보는 나무에는 투박한 검 모양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검이라면 아마 서쪽으로 빠지는 길일 거예요. 서쪽으로 가면 왕이 계시는 궁전이 나온다고 하는데 정말일까요? 칼 할아버지는 예전부터 허풍이 너무 심해서 항상 의심부터 들어요.”
잘로모가 한껏 투덜거리며 표식이 가리키는 길을 등졌다. 갈림길에서 길 하나를 제외하니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그럼 이쪽이 늪지로 향하는 길이야?”
“저쪽은 아니니까 이쪽이 맞겠지.”
잘로모를 뒤따르던 네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표식을 눈에 새겼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표식이 나올지는 몰라도 궁전으로 향하는 검 모양의 표식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자, 그럼 얼른 가자고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야…….”
잘로모의 말이 난데없이 뚝 끊겼다. 인적 드문 숲길에 별안간 야생 늑대가 기척 없이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크르릉―
갑작스러운 불청객에게 영역을 침범당한 늑대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잘로모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으나, 늑대는 쉽사리 적의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오히려 상대방의 공포를 본능적으로 읽어 내고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듯 발을 세게 구르기 시작했다.
“비키십시오! 저런 늑대쯤이야 내가……!”
갑자기 아르놀트가 기세등등하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는 자신의 돌발행동이 늑대를 더 자극하는 줄도 모르고 거추장스러운 망토 사이로 검을 꺼내기 바빴다. 그조차 몇 번이고 검집에 걸려 제대로 검을 빼 들지도 못했다.
그때, 늑대가 땅을 박찼다. 디아나가 양팔로 얼굴을 가리며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이, 이봐요! 위험해요!”
하지만 예상치 못한 굉음이 뒤이었다. 고막을 찢어 버릴 듯 거대한 소음이 울린 뒤로는 한참이나 고요했다. 늑대 울음소리도, 무모하게 늑대를 가로막은 용사의 비명 소리도 없이 그저 적막한 침묵뿐이었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디아나가 머뭇거리며 양팔을 내렸다. 뿌옇게 일어난 먼지가 차츰 내려앉으며 아주 잔인하고 끔찍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괴하게 쓰러진 고목 줄기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목에 깔려 죽은 늑대. 시뻘건 피가 흥건한 가운데, 죽은 늑대의 눈알은 아직도 살기가 채 가시질 않아 무섭도록 형형했다.
“느, 늑대가…….”
세드릭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루퍼트가 멍하니 중얼댔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아르놀트가 몹시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이건 천운입니다! 신께서 우리의 여정을 돌보아 주시는 것이 틀림없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늑대가 달려드는 시점에 우연히도 고목이 쓰러질 리 있겠습니까?”
용사는 그렇게 한참이나 신을 경배하더니 막무가내로 앞서기 시작했다. 잘로모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고목을 껑충 뛰어넘었고, 루퍼트도 마찬가지로.
“역시 세드릭 경은 대단하네요. 경만 있다면 늪지의 마법사도 두렵지 않겠습니다.”
그런 말을 남기며 슬슬 잘로모를 뒤따랐다. 하지만 정작 세드릭은 유난히 날 선 얼굴로 쓰러진 고목을 노려볼 뿐이었다. 마치 아주 기괴한 광경을 목도한 것처럼 살벌하기 그지없는 눈빛이었다.
문득 디아나가 머뭇거리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꼭 죽일 필요는 없었잖아.”
디아나는 매스꺼운 기색으로 고목을 흘겼다.
“너라면 죽이지 않고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왜…….”
“내가 한 거 아니야.”
세드릭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디아나가 멈칫하며 세드릭을 보았다. 두 사람의 불안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 사서도 아니고. 용사의 말처럼 정말로 천운이 따른 걸까?”
쉽사리 말문을 열 수 없는 긴장감 속, 불현듯 멀리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그들의 대화를 비웃듯 음산하게, 음산하게…….
다행히도 날짐승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아르놀트의 말대로 진정 신이 그들의 앞길을 보우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인지 알 길은 없었다. 다만 잘로모는 한결 부담감을 덜었으며, 늑대와 마주친 뒤로 세드릭만 종종 따라다니던 루퍼트도 차츰 평정을 되찾았다. 오직 디아나와 세드릭만이 어두운 숲 속을 이따금 살피며 형체 없는 불안감을 경계할 뿐이었다.
“늪지에 가까워질수록 마력이 진해지고 있어. 마력 농도가 이 정도라면 누군가 코앞에서 마법을 부려도 마력을 느끼지 못할걸.”
디아나가 세드릭과 나란히 걸으며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온종일 쉼 없이 걸어야 하는 일과가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방이 마력으로 충만하여 평소보다 피로도가 덜했다.
문제는 마력이 너무 짙어서 디아나 특유의 예민한 감각이 무뎌지는 점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행여나 늪지의 마법사가 어둠에 몸을 숨기고 사악한 마법을 부린다 하더라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당할 것이 분명했다.
“수정의 관 정도는 되어야 이만한 마력 농도가 나올 텐데. 여기가 아무리 마법으로 만든 동화 속 세상이라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정도가 지나치긴 해.”
“나도 그게 이상해. 그리그 프롬이 암만 천재적인 마법사였어도 이정도로 현실적인 세상을 창조했다는 게 의심스러워. 고작 마법사 한 명이서 어떻게 이런 마법을 완성한 걸까?”
디아나는 그리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500년 전 북부를 빼닮은 마을의 정경과, 정말로 실존하는 듯 생동감 넘치는 주민들. 게다가 호흡이 벅찰 만치 빽빽하게 들어찬 마력은 기실 디아나의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경지였다. 그녀가 알기로 역사상 어떤 전설적인 마법사도 이토록 실감나는 이세계를 창조하지는 못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못 하지. 금기를 어겼다면 또 모를까.”
세드릭이 지나가듯 말했다. 금기, 두 글자에 본능적으로 어깨를 굳혔던 디아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다. 금기는 마법의 한계를 무한하게 넓혀 주므로, 세드릭의 말대로 금기를 범했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리그 프롬이 그 대가로 무얼 지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 디아나는 멀찍한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까마귀를 발견했다. 동물에게 붙이기는 조금 우스운 표현이지만,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디아나는 어쩐지 불안한 마음에 경계하듯 까마귀를 계속 주시했다. 다른 새도 아니고 유독 그 까마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아가씨, 무슨 일이라도?”
뒤편에서 걸어오던 아르놀트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디아나가 대강 얼버무리는 사이 까마귀는 푸드덕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가 뒤늦게 까마귀를 좇았을 때엔 자취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뒤였다.
이후로 디아나는 더더욱 경계심을 놓지 못했다. 그녀의 핏발 선 눈을 잘로모가 내심 걱정하는 걸 모르지 않았으나, 불안감이 자꾸만 심장을 옥죄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질 않았다.
“세드릭. 우리가 잘로모를 따라가는 게 맞는 걸까?”
이틀째 되는 밤, 디아나는 세드릭에게만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방을 가득 채운 마력, 갈수록 무뎌지는 감각, 끊임없이 주변을 맴도는 날짐승……. 여러 예시로 돌려 말하긴 했어도 결국 디아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아. 내가 단순히 겁먹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느낌이 이상해.”
세드릭도 순순히 동의했다.
“네 직감이 잘 들어맞는 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설사 늪지에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더라도 지금 우리로선 계속 잘로모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어. 이제 와 마을로 돌아가도 동화를 빠져나갈 수 있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니까. 일단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늪지에 접근하는 걸로 하자. 늪지에 다다르면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힐 거야.”
그렇게 숲에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났다.
계산대로라면 내일 늪지에 이르러야 하지만, 이렇게 숲 깊숙이 들어와 보지 못했던 잘로모는 자신이 제대로 길잡이 역할을 수행했는지에 대해 몹시 회의적이었다. 정오가 지나도록 안개는커녕 습한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아 더욱 그러했다.
디아나는 움츠러든 잘로모가 안쓰러워 몇 마디 위로를 건넸다.
“괜찮아. 꼭 오늘이 아니어도 내일쯤엔 안개를 볼 수 있을 거야.”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오래지 않아 루퍼트가 발밑을 가리키며 오두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여기 좀 보세요! 안개, 안개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루퍼트의 발밑만이 아니었다. 지표면을 자세히 살펴보니 스멀스멀 땅에서 올라오는 습한 안개가 육안으로도 보였다. 이제 늪지가 멀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갈림길이 나오지 않은 지도 꽤 되었어요. 만약 앞으로도 갈림길이 없다면, 이대로 쭉 직진해서 늪지에 도착할 거예요.”
잘로모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기어이 임무를 완수했다는 보람과, 늪지에 가까워졌다는 공포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아르놀트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 먼저 마을로 돌아가라는 말이나 근처에 숨어 있으라는 말을 고대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잘로모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로 턱을 쓸어내리던 아르놀트가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곧 늪지에 달한다는 겁니까?”
“네. 안개가 짙어지는 쪽으로 길을 잡으면 늦어도 내일엔 도착할 거예요.”
“그럼 이쯤에서 정리해야겠군요.”
뜬금없는 말에 잘로모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의문도 잠시.
탕―!
갑작스레 총성이 울려 퍼졌다. 숲의 깊은 정적이 깨지며, 나뭇가지에 앉아 졸던 새들이 화들짝 하늘로 내몰렸다. 메아리치듯 연이어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총성은 경악과 충격, 그리고 땅을 적시는 핏물만을 남겼다.
디아나는 시체처럼 창백히 질린 얼굴로 세드릭을 보았다. 정확히는 선혈이 쏟아지는 그의 복부였다. 외마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천천히 스러지는 모습이 동화책 삽화처럼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세드릭이 고꾸라지고서야 눈에 들어오는 새하얀 권총은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마치 꿈꾸듯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현실감은 삽시에 찾아들었다. 오롯이 허공에 자리한 총구를 멍하니 바라보던 디아나는 불현듯 찬물을 맞은 듯이 깨어났다.
총.
여기는 500년 전의 세상. 근대화의 산물이 존재할 리 없었다.
“브라보. 브라보.”
가벼운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딱딱하게 얼어붙은 사이를 경쾌하게 가로지른 용사 아르놀트가 빙그레 웃으며 세드릭의 머리맡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순진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아무리 동화 속이어도 그렇게 본명을 당당하게 밝히는 경우는 또 어디 있답니까? 무어, 이름을 속였어도 이 얼굴이라면 한눈에 알아봤을 테지만요.”
아르놀트는 모로 누운 세드릭의 머리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홉뜬 녹안이 언뜻 보였다. 고통에 겨운 듯 헐떡이는 얼굴을 잠시간 쳐다보던 아르놀트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히죽 웃었다.
“세드릭 자일스. 정말이지 아비를 꼭 빼닮았군요.”
연신 입을 벙긋거리던 세드릭은 금세 혼절하고 말았다. 아르놀트는 흥미가 가신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나머지 일행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때까지 허공에 얌전히 떠 있던 권총이 빙그르르 미끄러지듯 회전하며 디아나와 루퍼트를 겨누었다.
“다, 다, 당신 서, 설마……!”
돌연 루퍼트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아르놀트는 말없이 웃기만 할 뿐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진 않았다. 그리고 혼절한 세드릭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디아나는 서서히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작가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면 숨겨진 보물을 얻는 방식이에요. 미궁에 빠트려서 길을 찾게 하는 책도 있고, 어려운 퀴즈를 풀게 하는 책도 있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보물을 숨기는 것이 목적이기에 맞힐 수 없게끔 어려운 문제를 내는 게 보통이에요. 더구나 동화 속 보물을 노리는 동화 사냥꾼이 나타나면서 문제는 점점 더 어려워졌고요.’
스쳐 들었던 루퍼트의 목소리가 문득 귓가를 울렸다.
“동화 사냥꾼?”
디아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이 양팔을 좌우로 벌리며 과장스럽게 허리를 굽혔다.
“언젠가 만나리라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자가 입을 죽 찢으며 웃었다.
“진저, 당신의 불운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