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천년장미관
“언니!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방 안에서 디아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이미 옛적에 나갈 준비를 끝마치고 고양이 미라벨에게 이른 저녁을 챙겨 주던 헤스터가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아직 시간 남았어. 천천히 나오렴.”
헤스터는 그리 말하며 아침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우편물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늘 그렇듯 세금 고지서나 잡다한 광고지, 혹은 마법협회에서 부친 자질구레한 안내장이 전부였다.
그러다 문득 편지를 넘기던 헤스터의 손이 멈추었다.
“……경찰?”
붉은 인장이 박힌 마지막 우편물에는 ‘잉그람 중앙경찰 마법범죄부서’라는 서명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 * *
디아나는 땅으로 내려오기 무섭게 불편한 표정으로 치맛단을 매만졌다. 뒤따라 마차에서 내린 헤스터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어디 불편하니?”
“아니. 그냥 치마가 좀 짧아진 것 같아서…….”
“그새 키가 자랐나 보구나. 새로 한 벌 장만해 줄게.”
“에이, 괜찮아. 아직은 입을 만해.”
디아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목을 쓸었다. 키가 자라긴 개뿔. 열다섯 이후로 성장이 멈춘 것이 바로 디아나 솔이었다.
“곧 6시네. 어서 가자, 디아나.”
멀리 보이는 앰브로즈 광장 중앙의 시계탑을 확인한 헤스터가 걸음을 재촉했다. 디아나는 영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언니를 뒤따랐다.
오늘은 세드릭 자일스와 저녁 식사를 약속한 날이었다. 제발 이날만큼은 오지 않았으면, 오더라도 눈 깜짝할 새 지나갔으면 바랐던 것이 무색하게 오늘의 시곗바늘은 어제와 다름없었다. 체감으로는 어제의 두 배 가량 느린 것도 같았다. 그만큼 디아나는 세드릭과 대면하는 것이 불편했고, 그만큼 불편한 상대와 식사해야 한다는 사실에 허한 배 속이 요동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세드릭 자일스라니.
디아나는 구두를 질질 끌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찍이 독립한 뒤로 전혀 왕래 없었던 설리번 자일스를 제한다면, 자일스의 사람 중에서 가장 편치 않은 사람은 단연 세드릭이었다. 채스터티가 아무리 지나친 장난을 친들 세드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편지에 적힌 그의 서명만 봐도 절로 눈썹이 찌푸려지고, 우연찮게 얼굴을 마주하거든 곧바로 시선을 돌리게 되고, 내내 잊고 살다가 불쑥불쑥 머릿속을 침범하는 이름에 마냥 즐겁던 기분이 단숨에 가라앉고 마는. 굳이 이름 붙이자면 불편함이고 어색함이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지난 번 공회당에서 세드릭과 마주친 이후로 디아나는 줄곧 그것을 생각해 왔다. 디아나가 일곱이고, 세드릭이 여섯일 적. 어린 시절의 첫인상은 서로 최악을 달렸으나, 기실 머리가 어느 정도 굵어진 뒤로는 예전만큼 부딪치지도 않았다. 언젠가부터 세드릭이 비아냥거림을 그만두고, 디아나도 온종일 날이 서 있던 신경을 차츰 뭉툭하게 갈아 냈기 때문이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오순도순 화목하게 지냈다기엔 무리여도 제법 잘 어울렸던 것 같은데. 오히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거북하기 짝이 없는 채스터티와는 별다른 문제가 없건만, 이상하게 세드릭과는 엉망진창으로 꼬이고 말았다. 그 이유를 아직도 정확하게 짚어 낼 수 없으니, 이렇듯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디아나는 그게 싫었다. 찜찜해서든 불편해서든, 자꾸만 세드릭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
“헤스터 경.”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상으로 언니를 뒤따르던 디아나는 그만 세드릭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안녕.”
세드릭이 어색한 침묵을 끊어 내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디아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미소 비스름한 것을 지으며 화답하기는 죽도록 싫었다.
“세드릭 경. 오래 기다렸나요?”
“저도 금방 도착했습니다.”
불편했던 분위기도 잠시, 헤스터와 세드릭이 화기애애하게 안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사랑하는 언니가 세드릭과 잘 지내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지금만큼은 몹시 다행이었다. 세드릭과 단둘이서 서먹한 공기를 자아낼 것을 상상하면,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세드릭은 자매를 근방의 식당으로 안내했다. 앰브로즈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오킹엄에서 산 지 고작 두 달째에 접어든 디아나는 당연히 모르는 레스토랑이었다. 원체 부잣집 도련님인 세드릭이 이곳의 단골이든 아니든 그녀의 알 바 아니었으나.
“……언니. 혹시 여기에 와 본 적 있어?”
디아나는 어쩐지 묘하게 익숙해 보이는 헤스터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돌아온 답변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응. 몇 번 와 봤어.”
대체 누구와? 검소하기로는 오킹엄에서 제일가는 언니가 자처해서 이런 고급 레스토랑을 방문할 리 없었다. 디아나는 내심 경악했으나 뒤이은 말에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언젠가 너랑 꼭 한번 와 보고 싶었어. 오늘에라도 오게 되어서 다행이다.”
역시 헤스터는 얼굴만큼이나 말도 예쁜 언니였다. 디아나는 샐샐거리며 웃었다. 기분이 좋아져서 세드릭의 묘한 시선도 못 본 체 넘길 수 있었다.
미리 예약한 것인지, 손님들이 꾸역꾸역 밀려드는 도중에도 편안히 2층 창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디아나는 불그스름한 저녁놀 내리는 앰브로즈 광장에 시선을 두었다. 막상 저기서는 특별한 감상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이렇듯 위에서 내려다보니 느낌이 남달랐다. 황혼을 흩트리는 분수와 거대한 시계탑. 창문을 전부 열어 놓았기에 길거리 악사들이 현을 켜는 소리가 아득하게 전해졌다.
“메뉴는 어떻게 할래?”
헤스터의 질문에 메뉴판으로 고개를 돌린 디아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가, 가, 가격이 왜 이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최선이었다. 그조차 마주 앉은 부잣집 도련님 세드릭을 잔뜩 의식한 결과였다.
“디아나?”
말없이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디아나를 헤스터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디아나는 가까스로 미소를 그려내며 메뉴판 가장 상단의 메뉴를 가리켰다.
“나, 나는 이걸로…….”
“그건 수프잖니.”
“으응. 나는 배가 별로 안 고파서…….”
“뭐?”
헤스터가 드물게 눈을 치떴다. 그녀는 상냥하기 그지없는 언니지만, 스스럼없이 식사를 거르는 디아나의 좋지 않은 습관에 한해 매우 엄격했다. 결국 디아나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주요리에서 그나마 저렴한 메뉴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세드릭 경은 그새 많이 자랐네요.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는 저와 키가 엇비슷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가 벌써 1년 전이니까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국경에 오래 있다가 도시로 나왔으니 감회가 남다르겠어요.”
헤스터와 세드릭이 온화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디아나는 짐작건대 미라벨의 일주일 치 사료값은 될 법한 수프를 깨작거리며 잠자코 대화에 귀 기울였다.
“조금 낯설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윈터를 떼어 놓을 수 있으니 마냥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용은 어디에 두고 오셨나요?”
헤스터의 물음에 디아나도 귀를 바짝 세웠다. 세드릭이 거대한 용을 어찌 처리했는지는 그녀도 내심 궁금하던 차였다. 온갖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신문이 용의 등장을 좌시할 리 없건만, 그럼에도 잠잠한 걸 보면 어찌어찌 숨겨 둔 것은 분명한데.
“윈터는 여기 있습니다.”
세드릭은 자그마한 공을 꺼냈다. 자매의 시선이 식탁 가운데로 꽂혔다.
“이건…….”
투명한 유리 안에 망망대해와 조그만 섬이 있었다. 섬은 적당한 항구조차 갖추어지지 않은 적막한 무인도지만, 갑작스러운 포식자의 침입으로 빽빽한 우림이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짐작대로 집요하게 안을 살피던 자매의 시야에 손톱만 한 용이 들어왔다.
“스노우볼 내부에 소세계(小世界)를 만들었군요.”
헤스터가 경탄했다. 세드릭이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말했다.
“동부 해상에 있는 무인도입니다. 물을 두려워하는 용에겐 더할 나위 없는 감옥이죠.”
“왕도에서 용을 어떻게 기를지 의문이었는데……. 무엇보다 마법이 굉장히 견고해 보입니다. 굉장하네요.”
조심스레 스노우볼을 들어 올린 헤스터가 재차 감탄했다. 학구열에 불타는 마녀답게 심오한 질문을 거듭했고, 세드릭은 친절하게 답변을 내 주었다.
그리고 디아나는 멍하니 스노우볼을 바라보았다.
기실 스노우볼을 이용한 마법이 특별하게 창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물건 내부에 소세계를 만든 뒤 실제 세계와 연결하는 마법은 고난도 마법치고는 제법 정형화되어 있었으므로. 물론 이 정도의 완벽함과 거대한 용을 좌표로 이동시키는 담대함이 놀랍긴 했으나, 그렇다고 헤스터 정도의 마녀가 저리 눈을 빛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장 경탄스러운 것은 세드릭의 나이었다. 세드릭 자일스는 갓 성인이 된 열여덟로, 좌표를 이용한 이동조차 서투른 그 나이 때 마법사와 비교하면 놀랄 만치 대단한 실력이었다. 당장 그보다 한 살이 많은 디아나도 스노우볼을 이용한 마법의 이론은 정확히 꿰뚫고 있을지언정, 저리 완벽하게 마법을 구사하지는 못했다.
디아나는 쓰게 웃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세드릭 자일스는 아직 미숙한 마법사였다.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녔지만, 넘치는 마력을 세밀하게 조절하는 능력이 서툴러 꼭 어딘가에 미진한 부분을 남기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스노우볼에는 그조차 보이지 않았다. 만인이 인정하는 마녀인 언니조차 마법의 견고함을 칭찬하고 있었다.
‘2년 동안 열심히 연습했나 보지.’
미숙하던 마법사가 어느덧 원숙함을 두르고 돌아왔다. 세드릭과 함께한 세월이 족히 10년이니 이제 와 질투나 호승심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허탈할 뿐이었다. 그녀가 일생토록 필사적으로 연습했던 것을 세드릭은 단 2년 만에 뛰어넘었다. 별이 내린 재능은 이토록 전지전능한 것이었다.
“메인 디쉬입니다.”
웨이터가 수프를 거두어 가고 주요리를 차례로 내놓았다. 디아나는 이름도 모르는 해산물 요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입에 대는 것조차 감사히 여겨야 하는 값비싼 요리였지만, 어쩐지 입맛이 돌지 않았다.
그때, 헤스터가 잠시 자리를 비우겠노라 속삭였다. 멀어지는 언니를 멍하니 바라보던 디아나는 이제 세드릭과 단둘이 남았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마치 찬물을 된통 맞은 듯 얼떨떨한 자각이었다.
어색하다. 어색해. 디아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시선이 창가에 앉았다가, 스노우볼을 향했다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언니의 자리에 머물렀다. 정처 없이 헤매던 시선의 종착역은 접시였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맛있게 먹기나 하자. 식당에 왔으면 식사를 해야지. 디아나가 그리 생각하며 호기롭게 조갯살을 포크로 찍는 순간이었다.
건너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해산물 안 좋아하잖아.”
멀뚱거리며 조갯살을 보던 디아나가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드릭은 포크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조용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도무지 생각을 헤아릴 수 없는 기분 나쁜 녹안이었다.
“……내가 싫어하든 말든.”
디아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조갯살을 입에 넣었다. 하지만 해산물 특유의 비린내가 입 안으로 퍼진 즉시 낯이 구겨졌다.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질긴 식감은 덤이었다.
께름한 표정으로 조갯살을 질겅거리는 디아나를 지켜보던 세드릭이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주저 없이 팔을 길게 뻗었다. 대뜸 다가오는 손길에 흠칫한 디아나가 멈칫한 사이, 그들의 메인 요리가 뒤바뀌었다.
디아나는 어느새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머잖아 세드릭의 앞에 놓인, 한때 자신의 요리였던 해산물을 향했다.
“뭐 하는 거야?”
세드릭은 대답 없이 포크로 슬슬 요리를 가르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미미하게 찌푸려졌던 디아나의 미간이 차츰차츰 주름을 더해 갔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온갖 해산물과 야채에 가려 보이지 않던 랍스터가 이윽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 보라는 듯 세드릭의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디아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가까스로 고개를 틀었다. 그럼에도 죽은 랍스터의 징그러운 눈알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평소에 해산물은 거들떠도 안 보더니……. 헤스터 경 앞에서 내숭 피우는 건 여전하네.”
세드릭이 나이프를 놀리며 말했다. 공연히 창밖을 내다보던 디아나의 눈이 금세 뾰족해졌다.
“내숭?”
“아냐?”
디아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언니 앞에서는 잘도 착한 척하더라. 이렇게나 잘 비꼬는데 입이 근질근질해서 어떡했대?”
“나랑 헤스터 경은 서로 정중한 사이니까.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세드릭이 흘끗 눈을 들어 디아나를 보았다.
“같이 산 지 두어 달은 되었다고 들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가면을 쓰고 있으려고 그래. 독립하거든 헤스터 경과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아주 노래를 부르더니. 영원히 내숭이나 피울 작정이야?”
“난 내숭 안 떨었어.”
“하고 싶은 말 참고 속으로만 아우성치는 게 훤히 보이더만.”
디아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세드릭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 네가 헤스터 경 앞에서 보이는 모습, 꼭 어머니께 순한 제자인 척 연기하던 모습이랑 비슷해.”
입맛이 뚝 떨어졌다. 디아나는 짜증스럽게 식기를 내려놓았다. 접시와 식기가 부딪치는 소음조차 금방 세드릭의 말에 비한다면 천상의 화음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남이 내숭을 피우든 말든.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았어?”
디아나 솔과 세드릭 자일스는 10년 넘게 한집에서 살아왔다. 인정하긴 싫어도 세상천지 디아나 솔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세 손가락에 꼽힐 만했다. 그러니 부인해 봤자 돌아오는 건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는 조롱일 것이다. 디아나는 오랜 경험으로 그걸 알았다.
“그냥 궁금해서.”
세드릭이 눈을 내리뜨며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승급 시험만 합격하면 당장 언니에게로 가겠다. 언니와 영원히 함께하겠다. 언니만 있다면 겔렝지어(마녀들의 낙원) 부럽지 않게 행복할 수 있다. 하도 자신하기에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오늘 보니 별로 달라진 건 없는 모양이야.”
디아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세드릭을 보았다. 차라리 예전처럼 대놓고 비웃는 것이면 대꾸하기 한결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세드릭은 지극히 차분했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토로하는 것처럼.
“내가 어떻게 사는지, 그게 궁금해서 보자고 했던 거야?”
“응.”
“네가?”
세드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멀끔한 낯을 계속 마주하자니 울화만 끓어올랐다. 디아나는 주먹을 말아 쥐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래, 궁금했겠지. 성년을 넘겨서 겨우 도제 신분에서 벗어난 못난이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당연히 궁금했겠지. 그런데 너는 단순히 궁금해서 온 게 아니잖아. 그렇게나 고대하던 언니와 만나서도 여전히 볼품없이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비웃으려고 온 거잖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모양이다, 그 한마디 하려고 온 거 아냐?”
말끝마다 떨림이 느껴졌다. 세드릭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디아나.”
“그래. 네 말대로 난 별로 달라진 게 없어. 그토록 사랑하는 언니와 함께하는데도 여전히 내숭이나 피우면서 초라하게 살고 있어. 그런데 그거 알아? 그래도 난 예전보다 행복해. 너와 채스터티와 살던 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좋아. 다시는 옛날로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앞으로도 영원히 언니와 함께하고 싶어.”
디아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세드릭을 쏘아보았다.
“왜. 이건 네가 원하던 대답이 아냐?”
“아냐.”
“뭐?”
“내가 원하던 대답이라고.”
그에 디아나의 표정이 조금 허물어졌다. 세드릭이 차분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
“예전보다 행복하다니 다행이야.”
“…….”
“……지금 네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되는데.”
디아나는 경악한 표정을 얼른 갈무리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다행이라고.”
“응.”
“진심이야?”
“진심이면 안 돼?”
세드릭이 포크로 요리를 휘저으며 평온하게 대답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디아나가 별안간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아니, 우리가 그런 말을 순순히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잖아.”
“이러면 안 되는 사이던가.”
“장난해?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지 잊었어?”
“설마.”
디아나는 가만히 허공을 쳐다보며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난 정말 이해가 안 돼. 그게 다 없었던 일인 것처럼 구는 네가 전혀…….”
세드릭이 불쑥 물었다.
“그럼 그때는 이해했어?”
“뭐?”
“2년 전에 내가 왜 그랬는지 알겠냐고.”
디아나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세드릭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흐리게 웃었다.
“그때의 나도 이해를 못 하고, 지금의 내가 이러는 이유도 모르고. 이유가 궁금하긴 하니?”
저의를 알 수 없는 말에 디아나가 슬며시 눈을 찌푸렸다. 말을 해 줄 거면 똑바로 하라며 일갈하려던 찰나였다. 저편에서 헤스터가 다가오고 있었다.
디아나는 애써 환한 미소로 언니를 반겼다. 힐끔 살펴본 세드릭도 금방의 대화는 전부 지워 낸 듯 말끔한 얼굴이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했어? 상냥하게 묻는 언니에게 적당히 대답한 디아나는 언니가 돌아와 반가운 기분과, 대화를 제대로 끝내지 못한 찜찜한 기분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 * *
순례의 별 감베리니가 유난히 밝던 어느 여름밤.
혹서로 물들어 가는 종교도시 벤네비스의 저택은 밤늦도록 수런거렸다. 새벽에 잠들어 오후에나 일어나는 보통의 마녀와 달리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취침하는 바바라 자일스의 습관으로 저택은 늘 한밤이면 무덤처럼 적막했기에, 밤공기에 안개 스미듯 퍼져 가는 속닥거림은 이곳에선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으음, 데이지……. 자꾸 그러면 빗자루로 변신시킬 거야…….”
선선한 밤바람이 드나드는 창가. 달빛을 피해 구석진 소파에 길게 뻗은 채스터티가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주정에 맞은편에 자리한 세드릭과 디아나는 연신 헛웃음만 들이켤 따름이었다.
“그러니 적당히 좀 마시라니까. 꼭 저렇게 고주망태가 되어선.”
세드릭이 채스터티를 하찮게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떨떠름한 것은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채스터티는 가문에서도 인정받는 술고래지만, 술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만취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잦았다. 그들이 보아 온 채스터티의 술주정만도 열 손가락을 넘었으나, 다행히도 오늘의 주정은 아주 얌전한 축에 속했다.
“그래도 조용하니 좀 낫네. 조금 전엔 스승님이 깨실까 봐 정말 조마조마했어.”
디아나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불과 30분 전, 채스터티는 거실을 쏘다니며 고래고래 통속가요를 불러댔다. 비록 바바라의 잠귀가 심히 어둡다고는 해도 우려되지 않을 수 없는 소란이었다.
바바라 자일스는 대체로 상냥한 스승이지만, 자다 깼을 때만큼은 오필리아 베가 못지않게 무시무시한 마녀였다. 언젠가 뭣도 모르고 잠든 스승을 깨웠다가 지옥을 겪었던 디아나는 다신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넌 어때?”
디아나가 주스를 홀짝거리며 물었다. 멍하니 술잔을 흔들던 세드릭이 그제야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가?”
“넌 안 취했어?”
“아직은 괜찮은 것 같은데.”
흐음. 심드렁한 소리를 낸 디아나가 탁자에 놓인 술병을 흘깃거렸다. 채스터티가 저리 빠져 사는 걸 보면 되게 맛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세드릭이 술병을 채 갔다.
“또 헛생각하지?”
“내, 내가 언제!”
디아나가 뜨끔하여 괜스레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세드릭은 들은 체도 않고, 술잔에 술을 모조리 따라 냈다. 이로써 채스터티의 애장품은 전부 빈병이 되었다.
“솔직히 이건 불공평해. 너도 마시는 술을 왜 나는 못 마셔? 심지어 넌 나보다 한 살이나 어리잖아.”
“네가 네 술주정을 기억했으면 그런 말 함부로 못 할걸.”
“내가 대체 어쨌길래?”
반년 전, 채스터티가 웬일로 디아나에게 초콜릿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채스터티 자일스의 선물이라기엔 심히 정상적인 모양새라 방심한 것이 실수였다. 선물은 다름 아닌 위스키봉봉이었고, 아무런 의심 없이 초콜릿 한 박스를 전부 비운 디아나는 이튿날 머리가 깨지는 아픔과 동시에 세드릭의 심란한 눈총을 받아야 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지 세드릭의 표정이 조금 심란해졌다. 디아나가 울컥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추태였다는 거야, 아님 내가 너한테 무슨 이상한 짓이라도 했다는 거야?”
“둘 다인 것 같은데.”
“정말?”
늘 고고하던 세드릭 자일스가 저리 진저리 치는 걸 보면 추태도 보통 추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디아나는 떠름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필이면 추태를 부려도 쟤 앞에서 부릴 건 또 뭐람.
“어쨌든 적당히 마셔. 넌 내일 비행도 해야 하잖아. 여기서 북쪽 국경은 꽤 멀다던데…….”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던 디아나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어째 내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꼭 세드릭 자일스를 걱정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나.
디아나는 소름이 돋는 기분에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아니다, 그냥 그거 다 마셔. 내일 숙취로 앓아누우면 그건 그것대로 볼만하겠네.”
“……넌 꼭 말을 해도.”
“새삼스럽긴. 너한테 배운 거잖아.”
“내일이면 헤어지는데 이러고 싶어?”
세드릭이 조금 불퉁하게 대꾸했다. 만날 어른스러운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저리 애처럼 불평하는 걸 보면 술기운이 제법 도는 모양이었다. 홀로 말짱한 디아나는 오래간만에 자비를 베풀기로 결심했다.
“하긴. 너랑도 이제 마지막이네.”
내일 세드릭은 북쪽 국경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덩치가 비대해지는 용을 교련할 겸, 스승의 건강이 악화될수록 참견을 더해 가는 친족의 간섭을 피할 겸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에 선택된 곳이 바로 인적 드문 국경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국경을 방비하기 위함이므로, 예상치도 않게 무려 자일스의 후계자를 국경에 배치할 수 있게 된 국왕은 만면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이제 마지막이다. 세드릭은 계약에 따라 앞으로 국경에서 열심히 구를 테니, 지난 10년의 악연은 이렇게 끝나는 셈이었다. 날아갈 듯 기쁘리란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미운 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그때, 불현듯 세드릭과 시선이 마주쳤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녹안이 어쩐지 휘영청한 달빛을 받아 차게 빛났다. 디아나는 영문 모르게 조금 불안해졌다.
“왜?”
한참 침묵하던 세드릭이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마지막이라고?”
“……네가 돌아올 즈음이면 나도 승급 시험에 합격해서 독립할 거 아냐. 앞으로는 너랑 만날 일도 없을 건데. 그럼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디아나가 제법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세드릭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며 술잔에 입술을 붙였다.
“독립하면 헤스터 경과 함께 살 거라고 그랬나.”
“응.”
“경도 동의한 일이야?”
디아나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 취조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연하지. 언니는 항상 내가 독립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단 말야.”
“아하. 그래서 지금까지 편지만 몇 번 주고받은 상대랑 같이 살 거라고. 그것 참 대단한 신뢰네.”
“……너 왜 그래?”
어느새 디아나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금방 세드릭의 말은 누가 듣기에도 조롱이었다.
“그냥. 매사 의심부터 하는 네가 헤스터 경에 한해 그리 풀어지는 게 신기해서.”
“당연하지. 자매잖아.”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자매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하나뿐인 언니까지 의심해야 돼?”
“너 어머니의 도제로 들어오기 직전에 헤스터 경을 처음 봤다고 그랬잖아. 여태 직접 만난 적은 열 손가락에 꼽고, 편지라고 자주 왕래하는 사이도 아닌데 고작 자매라는 이유만으로 그리 신뢰한다고? 내가 알기로 너는 그렇게 허술한 마녀가 아니었는데.”
디아나는 끓어오르는 노기를 다스리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언니는 믿을 수 있어.”
“믿고 싶은 게 아니라?”
세드릭이 단정한 입매를 뒤틀며 이죽거렸다. 디아나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언니는 달라. 네가 도대체 언니에 대해 뭘 아는지 모르겠지만, 언니는 다른 사람이랑 다르다고!”
“글쎄. 그렇게 속고 있는 건 아니고?”
“야!”
“흥분하지 마. 어머니도 널 그저 순진한 제자라고만 여기시잖아. 거의 10년을 함께 살았는데도 그리 깜빡 속고 계신데 하물며 편지로만 왕래하는 자매지간이라면.”
세드릭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그쪽에서 널 착각하는지도 모르지. 마냥 착한 동생, 마냥 순한 동생. 그런 연기 잘하잖아, 너.”
디아나는 손끝을 바들바들 떨었다. 너무 격분해서 당장이라도 사자후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불안했던 어린 시절 이후로 말을 아껴 왔던 세드릭이 갑자기 저러는 이유가 무얼까. 저리 빈정대는 저의를 알아내려 꿋꿋하게 분기를 참다가도, 언니를 깎아내리는 말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디아나는 자신이 욕되는 말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언니를 모욕하는 말에는 익숙지 않았다. 누구도 ‘현명한 헤스터’를 감히 모멸한 적 없으며, 누구도 언니를 멸시해선 아니 된다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너랑 달라.”
디아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착한 척, 순한 척하는 게 뭐 어때서? 미안한데, 언니는 너처럼 남을 깔보고 조롱하는 사람이 아니라 괜찮아. 너처럼 그렇게 속이 꼬이지 않아서 괜찮다고.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아니?”
“그래서 네 언니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그래. 난 언니랑 영원히 함께할 거야. 나도 언니를 사랑하고, 언니도 나를 사랑하는데 뭐가 문제야? 아무런 문제도 없어. 그저 문제가 생기길 네가 바랄 뿐이지.”
문득 세드릭이 나지막이 웃기 시작했다.
“영원히? 사랑? 그런 게 언제까지 갈 것 같아?”
“……봐. 나랑 언니 사이에 문제가 있길, 네가 바라고 있잖아.”
디아나가 넌더리 내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세드릭 자일스. 도대체 뭐가 문제야? 또 뭐가 네 심기를 거슬렀길래? 내가 언니랑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게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들어? 내가 행복을 말하는 게 그리도 싫으니? 내가 앞으로도 불행했으면 좋겠어?”
난 지금까지도 충분히 불행했는데.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속으로만 가라앉았다.
“그런데 어쩌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반드시 언니에게 갈 거야. 너 보란 듯이 잘 살 거야. 나는 언니를 영원히 사랑하고, 언니도 날 영원히 사랑하니 아무런 문제도 없어. 네 부모님처럼 갈라서지 않을 테니까 제발 나한테 관심 좀 끊어. 지겹지도 않니?”
별거한 부모는 세드릭의 역린이었다. 지금까지 세드릭이 헤스터만은 건드리지 않은 것처럼 디아나도 그의 부모에 대해 말을 아껴 왔으나, 이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디아나는 그의 부모를 들어 경고한 셈이었다.
끔찍한 정적이 이어졌다. 한참을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디아나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난히 밝은 달빛 아래 핼쑥한 낯이 드러났다.
“먼저 들어갈게.”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디아나가 바바라 자일스의 도제로 들어와 세드릭과 한집에서 산 지도 벌써 10년째였다. 남매처럼 자라 친구처럼 어울렸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서름한 관계지만, 그래도 냉랭하기 그지없던 유년기의 관계를 떠올리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고 웃고 떠들며 그래도 제법 괜찮은 사이가 되었다고 내심 여겨 왔다. 모르긴 몰라도, 친구라면 이런 관계가 아닐까 짐작했었다.
그러니 마지막은 잘 매듭짓자, 그리 다짐했는데.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문득 세드릭이 속삭였다.
“그런데 나는 널 그렇게 생각 안 해.”
디아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2년 전, 둘은 그렇게 헤어졌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 헤스터가 디아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세드릭 경이랑 오래간만에 어땠니?”
디아나는 말없이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헤스터가 조금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있으면 대화하기 불편할까 봐 잠시 자리를 비켜 준 건데……. 혹시 괜한 짓이었니?”
디아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언니는 그녀와 세드릭이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몰랐다. 기껏해야 함께 자란 친구 정도로만 여길 터. 그러니 둘의 관계를 착각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 세드릭이랑 그렇게 안 친해.”
입술을 달싹거리며 고민하던 디아나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러지 마.”
디아나는 헤스터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목구멍에 가시가 돋친 기분이었다.
근래 오킹엄은 유례없는 폭염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시사철 서늘한 자일스 저택에서 자라 더위에 취약한 디아나로선 차마 견뎌 내기 힘든 나날이었다.
그래서 큰맘 먹고 마법협회를 방문하기로 결심한 날. 디아나는 놀랍게도 새벽 나절에 기상하여 아침 일찍 집을 나왔으나, 용무를 마치고 협회를 나왔을 때는 작열하는 태양이 이미 중천에 오른 뒤였다. 채스터티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수전노 소리를 듣던 디아나가 무려 마차를 타고 귀가할 만치 어마어마한 불볕이었다.
그리해 집 앞에서 내린 디아나는 곧장 1층 카페로 들어갔다. 무슨 재주인지 몰라도 카페는 꼭 가을처럼 선선했다. 수다쟁이 종업원이 있는데도 굳이 이 카페를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오늘도 커피죠?”
때마침 손님이 몰리는 점심시간이었다. 평소 디아나를 붙잡고 10분 넘게 수다를 늘어놓던 종업원은 웬일로 주문만 받고 바삐 물러났다. 찜통 같은 마차에서 장장 30분을 견디며 정신이 몽롱해진 디아나에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금방은 의뢰를 받기 위해 마법협회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최근 언니가 노벨리엄 천문대와 장기 계약을 맺으면서 당분간 수입이 끊기리란 계산이었다. 물론 계약의 선금으로 받은 액수가 제법 두둑하며, 언니는 생활비가 부족해지거든 단기 계약을 맺으려는 속셈인 듯했으나, 천문대가 요구한 골 아픈 문제를 해결하려면 밤낮으로 연구해도 시간이 모자를 터였다.
‘그럼 내가 일하면 되지.’
국왕과 서약도 했겠다, 디아나는 이제 잉그람 마법협회로부터 정식으로 의뢰를 받을 수 있는 신분이었다. 어차피 정식 마녀가 되거든 닥치는 대로 의뢰를 수행하며 경력을 쌓을 예정이었기에, 난생처음 의뢰에 임하는 디아나는 제법 의욕이 넘쳤다.
어째 하나같이 조잡하고 저렴한 의뢰뿐이었지만 말이다.
8월 12일 오스브롬 삼각형 내각의 각도
여름의 별 프라가의 별빛(100ml 다섯 병)
『그리그 프롬의 유산에 대하여; 불사를 꿈꾼 마법사와 불멸하는 유산, 그리고 전해지지 않은 여생을 고찰하다』 중앙어로 번역
오늘 체결한 세 장의 계약서를 꼼꼼히 읽던 디아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세 번째만 조금 시간이 걸리지, 나머지는 당장 이번 주 내로 완수할 수 있었다. 문제는 세 가지 모두 선금조차 주지 않는 난이도 낮은 의뢰이며, 계약을 완수해 봤자 들어오는 수당이 쥐꼬리만 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경력이 전무한 마녀에게 어렵고 값비싼 의뢰가 들어올 리 없었다. 만일 무기명의 개인에게서 의뢰를 받는다면 이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테지만, 헤스터는 오직 국가 의뢰만을 고집했다. 디아나도 개인 의뢰와 관련된 흉흉한 소문을 들어 온 까닭에 아직까지는 개인 의뢰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다음에는 차라리 번역 의뢰만 받아 볼까.’
번역은 고되고 지루한 작업이지만, 다른 조잡한 의뢰에 비하면 수당이 꽤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비대하여 의뢰를 따기 위한 경쟁도 그리 치열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조잡한 의뢰만 받을 거라면, 차라리 번역 의뢰만 파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별안간 누군가 탁자를 똑똑 두드렸다.
“펜리 씨?”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사내는 다름 아닌 올리버 펜리였다. 디아나가 느닷없는 만남에 놀라는 사이, 올리버는 자연스레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간만이야. 잘 지냈어?”
“나야 당연히 잘 지냈죠.”
초여름 올리버가 병문안을 왔던 뒤로는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디아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살펴보았다.
“펜리 씨. 얼굴이 되게 빨개요.”
“날이 너무 더워서 그래. 이제는 더위가 좀 가신 줄 알았는데.”
올리버는 열심히 손부채질하며 냉차를 주문했다.
“어디 다녀왔어요?”
“일이 있어서 잠깐 바텐바흐에 다녀왔어.”
“어, 바텐바흐면 반제의 수도잖아요.”
“그렇지.”
놀란 기색으로 되묻던 디아나가 금세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올리버는 반제인이다. 반제 사람이 고국에 다녀온 건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거긴 여기보다 시원하죠?”
“여기보다는 낫지. 이건 아가씨 선물.”
올리버가 품속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얼떨결에 상자를 건네받은 디아나가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이게 뭐예요? 시계?”
디아나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선물을 꺼내 들었다. 금화 크기의 시계 양쪽으로 가죽 끈이 매달려 있었다. 디아나는 이렇게 작은 시계를 처음 보았다.
“손목에 매는 거야.”
올리버는 디아나의 손목에 직접 시계를 매어 주었다. 아직은 손목에 시계를 차는 것이 익숙지 않은 듯 디아나가 어색하게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느낌이 이상해요.”
“곧 익숙해질 거야. 최근 바텐바흐의 시계공이 발명한 물건인데 머잖아 잉그람에서도 유행할걸.”
“흐음. 어쨌든 고마워요. 잘 쓸게요.”
인간 사회의 유행에 관심 없는 디아나는 이번에도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올리버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시계가 얼마인지 듣는다면 디아나는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듣자 하니 날 찾았다면서?”
“……정확히 말하자면 펜리 씨가 아니라 파울 리버만 씨를 찾은 거죠.”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화제로 오르자, 디아나는 공연히 커피를 마시는 체하며 고개를 돌렸다. 물끄러미 그녀를 살피던 올리버가 무던하게 대화의 방향을 바꿨다.
“난 또 아가씨가 나한테 볼일이 있는 줄 알았지.”
“내가 펜리 씨한테 무슨 용건이 있겠어요?”
“용건이 없더라도 만날 수는 있잖아. 그냥 내가 보고 싶었다든지.”
“펜리 씨가 이렇게 날 찾아온 것처럼요?”
그에 올리버가 소리 내어 웃었다.
“뭐, 아가씨를 만나러 온 것도 맞긴 한데……. 헤스터는 지금 자?”
“네?”
디아나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올리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요즘 밤하늘을 관측하느라 바쁘다며. 아직 자고 있는 거 아냐?”
“네에…….”
“그럼 대신 선물 좀 전해 줄래? 아가씨랑 같은 거야.”
올리버는 똑같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얼결에 상자를 받아 든 디아나가 멀거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펜리 씨가 왜 언니한테 선물을 줘요?”
“응?”
“언니랑 헤어졌다면서요.”
일순 올리버의 표정에 금이 갔다. 노련한 사업가답게 금세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았지만, 마주 앉은 디아나가 그런 변화를 놓칠 리 없었다.
“……둘이 뭐예요?”
디아나가 미미하게 낯을 일그러뜨렸다. 올리버는 그답지 않게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헤스터가 아직 말 안 했구나.”
디아나는 남몰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기차에서 자신이 언니의 연인이라는 둥 연인이었다는 둥, 미처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다시금 되풀이되려 하고 있었다.
“됐어요. 언니한테 물어볼게요.”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그때는 언니가 멀리 있었지만, 지금은 언니가 지척이었다. 당장 언니에게 사실을 물어 이 끔찍한 기분을 지워 낼 수 있었다.
디아나는 지체 없이 일어났다. 올리버의 시선이 계속해서 따라붙었지만, 디아나는 개의치 않고 그를 쌀쌀맞게 지나쳤다.
집은 고요했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든 언니가 행여나 잠에서 깰까 마냥 조심스럽던 걸음이 별안간 멈추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식탁에 가만히 앉아 있는 헤스터의 옆태가 언뜻 보였다.
정오의 햇살이 자그마한 창을 넘어 부엌을 환히 비추었다. 기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헤스터는 머리를 간단히 틀어 올린 채 단출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어 표정은 확인할 수 없지만, 다른 한 손에 쥔 종이는 아무래도 편지인 듯했다.
‘지금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디아나는 조금 울적한 고민을 품었다. 늘 웃어 주는 언니. 늘 곱고 예쁜 말만 들려주는 언니. 하지만 혼자일 때 언니는 저렇게나 고단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무슨 편지인지,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그리도 심각한지 아마도 그녀는 영영 모를 것이었다. 스스로 눈치채지 못하는 이상 언니가 그런 고달픈 일에 대해 먼저 입을 열지는 않으리라, 디아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녀가 그러하듯, 언니도 착하고 순한 면만 보여 주는지도 몰랐다. 구태여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 하나뿐인 동생에게조차 보이고 싶지 않은 내밀한 치부는 죄 숨기고서 헤스터 솔의 아주 자그만 파편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디아나는 늘 스스로 언니에게 안식처가 되길 바랐지만, 어쩌면 전부 지독한 오만이었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쩌면 그녀도 언니가 감내해야 하는 가혹한 현실의 일부일 수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디아나는 몹시 울적해졌다. 왜 나를 믿지 않느냐, 왜 내게 모든 걸 보이지 않느냐며 언니를 몰아붙일 수도 없었다. 그녀도 오래도록 언니에게 자신을 숨겨 왔으므로. 다만 디아나는 행여나 언니가 실망할까 순한 동생을 가장했던 것이라면, 언니의 심중은 도통 알 길이 없는 것이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하나뿐인 자매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지대하여 자신을 억누르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믿지 못해 그런 것인지.
“디아나?”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던 디아나를 문득 발견한 헤스터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니까 집에 없어서 걱정했는데……. 어디 다녀왔니?”
“잠깐 마법협회에 다녀왔어.”
“그럼 깨우지 그랬니. 협회에 처음 갈 때는 내가 같이 가 준다고 했잖아.”
헤스터가 조금 서운한 듯이 표정을 흐렸다. 디아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에이, 괜찮아. 의뢰도 잘 받아 왔는걸. 언니 조언대로 개인 의뢰는 전부 거절했어.”
“다행이다. 식사는 했니?”
“아직 생각이 없어서…….”
“그래도 식사는 제때 해야지. 아침은 먹었고?”
디아나가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헤스터의 눈이 금세 세모꼴이 되었다.
“디아나. 내가 다른 걸로 이렇게 잔소리하지 않는 건 너도 잘 알지?”
“으응…….”
“그럼 같이 식사하는 거다?”
결국 디아나가 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스터는 그제야 엄한 표정을 풀고 바삐 부엌으로 들어갔다. 멀거니 언니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디아나가 불현듯 말문을 열었다.
“방금 펜리 씨를 만났어.”
“펜리 씨? 올리버를 말하는 거니?”
헤스터는 선반에서 계란 두 알을 꺼내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 사람은 어쩌다가 만났어?”
“그냥, 아까 아래층 카페에 들렀는데 펜리 씨가 내 앞에 앉더라고.”
“……올리버가 여기에 왔었니?”
그제야 헤스터가 요리하던 손짓을 멈추며 뒤돌아보았다. 디아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원래는 언니를 만나러 왔는데, 자고 있을까 봐 집까지 찾아오진 못한 모양이야. 나한테 대신 선물을 전해 달라고 했어.”
디아나는 올리버의 선물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사이, 헤스터는 의아한 얼굴로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녀도 처음 보는 손목시계가 신기로운 모양이었지만, 오래지 않아 감흥 없는 손길로 상자를 닫았다.
“다음 주에나 돌아온다더니…….”
헤스터가 스치듯 중얼거렸다. 어쩐지 머쓱해진 기분에 옷이나 갈아입자는 생각으로 방으로 들어가려던 디아나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계란 프라이를 하려는지 화덕에 불을 피우는 헤스터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디아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언니. 펜리 씨랑 무슨 사이야?”
프라이팬을 꺼내느라 선반이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그 바람에 말소리를 듣지 못한 헤스터가 반문했다.
“방금 뭐라고 했니?”
오래간만에 사람 손길이 닿은 부엌이 연신 소란스러웠다. 디아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귓가가 어지러운 만큼 머릿속도 복잡했다.
“요즘 펜리 씨랑 다시 만나지?”
“……뭐?”
헤스터가 멈칫하며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저도 모르게 불안해진 디아나가 손가락을 얽으며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언니랑 펜리 씨랑 옛날에 사귀었다며. 나도 알아.”
“그걸 어떻게……. 올리버가 그랬니?”
“응. 지난번에 기차에서 들었어.”
그랬구나. 헤스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담담한 어조에 디아나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디아나가 언니에게 올리버와의 관계를 묻지 않은 것은 이미 끝난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둘은 헤어졌고 앞으로도 만날 일은 없을 테니, 구태여 과거의 상처를 헤집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 왔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면? 언니가 올리버에게 예전과 같은 애정을 품었다면?
생각만으로도 디아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껏 자신에게 언니가 가장 절대적인 존재이듯, 언니에게도 자신이 가장 절대적인 존재임을 의심치 않았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로는 세상에 오직 둘뿐이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언니에겐 제법 절절하던 연인이 있었다. 오래전에 끝난 사이라기에 안심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둘은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예전처럼 언니와 멀리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닌데 이제야 알았다. 드디어 언니와 함께한다는 기쁨에 도취되어 눈 뜬 장님처럼 멀어지는 언니를 모르고 있었다.
“네게는 나중에 말하려고 했어. 많이 놀랐지?”
마치 노크하듯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하지만 디아나는 도리어 그 대답이 충격적이었다. 자매는 이번 문제의 경중을 완전히 다르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럼 펜리 씨랑 계속 사귈 거야?”
어느새 창백해진 디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올리버가 싫으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싫은 게 아니라면 뭐가 문제야?”
헤스터가 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순간 디아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뭐가 문제냐니……. 펜리 씨랑 옛날에 헤어진 거 아녔어? 펜리 씨가 잘못했다며.”
“이제 괜찮아.”
“하지만 또 그러면 어떡해. 펜리 씨가 어떤 사람인지 언니는 잘 알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그걸 어떻게 확신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말 슬프겠지.”
헤스터의 표정이 사뭇 흐려졌다.
“그런 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네. 어쨌든 지금은 잘 지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
곧 헤스터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화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리를 재개할 생각인지 식기며 선반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디아나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 언니. 그 사람이 또 언니를 힘들게 할지 어떻게 알아. 지금 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언제 식을지 어떻게 알아. 그런 거, 오래 못 간단 말야.”
어느덧 부엌에서 들려오던 소음도 완전히 멎었다. 디아나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스승님도 그랬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세드릭도, 나도, 채스터티도 내팽개치고 항상 그 사람만 보셨어. 늘 사랑하는 사람을 우선하고, 그 사람이 원하면 무엇이든 들어주시고. 그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사랑하시더니 죄다 얼마 못 갔단 말야.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이 발치에 매달려도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그리도 절절하게 사랑하던 게 한갓 꿈이었던 것처럼 잔인해지셨어.”
“……디아나.”
헤스터가 한숨을 내쉬며 벽시계를 흘끗 보았다.
“언니도 그렇게 될지 누가 알아. 아니, 펜리 씨가 그렇게 될지 누가 알아?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해서 사랑이 식을지도 모르잖아. 그럼 언니도 스승님의 옛 연인처럼 처절하게 매달리려고?”
“디아나.”
“난 그런 거 싫어. 언니가 다른 사람한테 매달리는 것도 싫고, 언니가 상처받는 것도 싫어. 언니가 왜 그래야 돼? 어차피 언니의 곁에는…….”
내가 있는데. 나는 언니를 영원히 사랑할 건데.
너무도 구차해서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혀끝에서 감돌았다. 디아나는 이를 꽉 물었다. 도대체 언니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짐작조차 불가했다.
그때, 따뜻한 손길이 팔목을 감싸 왔다. 디아나는 화들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헤스터가 염려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무얼 걱정하는지 알아.”
디아나는 멍하니 헤스터를 마주 보았다. 헤스터가 망설이며 입술을 떼려던 찰나, 고요하던 벽시계가 요란하게 정시를 알리기 시작했다.
댕―
시곗바늘은 어느덧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연스레 벽시계를 향했던 자매의 시선이 도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계가 소리를 삼키고 다시금 조용해진 사위. 입술을 달싹거리던 헤스터가 흐리게 미소 지었다.
“같이 식사하고 싶었는데…….”
“…….”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헤스터는 디아나의 손에 편지를 쥐여 주었다. 작은 손을 감싸던 온기가 곧 떨어져 나갔다. 디아나는 욕실로 들어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편지로 시선을 내렸다.
「헤스터 솔 귀하, 지난 5월에 발생한 ‘펜잔스의 참극’으로 재차 연락드립니다. 귀하의 설명이 수사에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나 서신으로 주고받기에 적절치 못한 내용으로 사료되는 바, 현장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수사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는 귀하가 서명한 <잉그람 마녀의 의무> 제1조항에 귀속되는 의무로써, 만일 이에 응하지 않을 시 서약에 따른 처벌이 내려질 것을 고지합니다. 8월 14일 오후 3시까지 사건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요청에 불응한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잉그람 중앙경찰 마법범죄부서 소속 베로니카 테렌스 경감.」
새카만 어둠이 가득했다.
눈을 떠도 감아도 암암한 세상. 자신의 숨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오는 이곳은 적요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눈을 도려내고, 귀를 잘라 낸 듯 아무것도 와 닿지 않았다. 그래서 막연히 깨닫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 혼자라고.
언제부터 혼자였는지, 여긴 도대체 어딘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뚜렷하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언제부턴지 시야는 가물가물했고, 복부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피가 줄줄이 빠져나간 것처럼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고 있지만, 손끝 하나 까딱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렇게 죽어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혼자서, 외롭게.
혼자라는 것이, 외롭다는 것이 그다지 슬프지는 않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많은 것을 잊었듯 그런 감정도 자연히 잊힌 것일지 몰랐다. 잊었기에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죽으면 누군가 슬퍼해 주길 바라는 마음은 있었다. 누군가는 날 기억해 주었으면 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까마득하게 잊힌다면 조금은 서글플 것 같았다.
그 순간 시야가 뒤틀렸다.
어둠이 옅어지고 귓가로 소음이 새어 들기 시작했다. 무감각하던 복부에선 칼로 쑤시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호흡조차 곤혹스러울 만치 괴로웠다.
누군가 발목을 부여잡았다. 시체처럼 써늘한 손길에 소름이 끼쳤다.
“고작 여기로 도망친 건가?”
쇠로 쇠를 갈아 내듯 선득한 목소리. 어두운 장막을 꿰뚫고 기어 온 이는 사자(死者)였다. 기괴하게 뒤틀린 팔다리가 거미처럼 흉측하고, 모진 고문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대면하는 것조차 아팠다. 하지만 도리어 기쁨으로 충만한 사자는 히죽 웃을 뿐이었다. 잔인하게 부어 오른 붉은 눈이 광증으로 타올랐다.
하지만 그는 두렵지 않았다. 정작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사냥감을 움켜쥔 사자의 뒤로 소리 없이 다가오는 음습한 그림자. 지하의 유황 냄새를 풍기며 서서히 다가오는 이형의 생명체.
눈물이 흘렀다. 두려움에 말문이 막혔다. 공포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도망가.
도망가.
난 죽이고 싶지 않아.
디아나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낯익은 어둠이 목전으로 펼쳐져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던 디아나가 비척거리며 윗몸을 일으키고는 익숙한 손길로 눈물 젖은 뺨을 닦아 냈다.
아스라한 새벽녘. 어느덧 악몽은 그녀의 일상으로 자리매김했다.
디아나는 눈 밑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 채 나갈 채비를 했다. 혼자서라도 꼭 아침을 챙겨 먹으라던 언니의 말이 생각나 부엌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집에서 외롭게 식사하기는 싫었다. 차라리 카페 종업원의 수다를 견디는 편이 나았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 카페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디아나는 곧장 마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도시의 중심부로 근접할수록 출근하는 인파에 밀려 마차의 속도가 차츰 줄어들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꿉꿉한 날씨에도 무더위는 여전해서, 거리에 나다니는 사람들 모두 손부채질에 여념 없었다.
헤스터는 그저께 펜잔스로 떠났다. 돌아오거든 그때 다시 얘기하자는 말뿐이었고, 디아나는 차마 그런 언니를 붙잡지 못했다. 그저 눈 깜짝할 새 사라진 언니를 마음속으로만 그릴 따름이었다. 혼자 남겨진 집은 지극히 고요했다. 디아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고독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냥 헤어지기 전에 점심이나 같이 먹을걸. 왜 언니에게 괜한 말을 해서 마음만 심란하게 했을까.
아무리 후회한들 펜잔스로 떠난 헤스터는 열흘 뒤에나 돌아올 것이었다. 그때까지 디아나는 언니가 걱정하지 않도록 잘 지내야 했다. 매일 끼니도 거르지 말고, 며칠 전 받아 놓은 의뢰도 완수해야 했다. 그래서 돌아온 언니가 한시름 놓을 수 있도록 착한 동생이 되어야 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미끄러지듯 멈췄다. 디아나는 마부에게 값을 지불한 뒤 인도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비 내리기 직전이 으레 그러하듯 축축한 공기를 단숨에 들이켜며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근위대가 삼엄하게 지키고 선 드높은 담장. 그 뒤로 보이는 중구난방의 건물은 오늘 자 디아나의 목적지였다.
크럼프턴 왕립 도서관.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자, 수백 년간 신축에 신축을 거듭한 끝에 역사상 가장 기괴하다는 오명을 얻은 도서관. 이곳은 장르를 불문하고 온갖 서적이 잠들어 있는 책의 성지요, 무계획적으로 별관을 확장해서 지난 300년 잉그람의 건축 양식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요지였다. 디아나도 크럼프턴 왕립 도서관의 명성을 익히 들어 왔지만, 이렇듯 직접 방문하기로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잠시간 도서관 전경을 바라보던 디아나는 이내 모자를 고쳐 쓰고 당당히 걸었다. 정문을 지나치자 잘 가꾸어진 정원이 융단처럼 펼쳐졌으나, 수많은 자일스 저택을 전전하며 갖은 종류의 정원을 보아 왔던 그녀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디아나는 하늘을 향해 치솟는 분수를 무감하게 지나치며 정면의 아담한 건물로 향했다.
본관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낯선 장소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안내 데스크로 걸어갔다. 남색 제복을 입은 초로의 남자가 그녀를 반겼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천년장미관을 찾아왔어요.”
남자는 상냥하게 손짓했다.
“2층으로 올라가 좌측으로 꺾은 뒤 세 번째 문을 여시면 천년장미관입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디아나는 남자가 알려 준 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좌측, 우측, 정면으로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개중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잡으니, 곧 마호가니 목으로 제작된 첫 번째 문이 나왔다.
<음악관>
잘은 몰라도 음악과 관련된 서적을 모아 둔 별관인 듯했다. 디아나는 그대로 첫 번째 문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으니 이번에는 하얗게 변색된 두 번째 문이 나왔다.
<교회관>
문의 색깔만 보더라도 여긴 백색을 광신하는 산티그마 교단의 별관이 틀림없었다. 교단과는 친하지 못한 디아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오래지 않아 세 번째 문이 나왔다. 디아나는 얼른 그편으로 달려갔다. 검붉은 빛이 감도는 문짝에는 장미를 휘감은 넝쿨과 함께 별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천년장미관>
디아나는 거리낌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오래된 책 냄새와 환한 볕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곧바로 문턱을 넘진 못했다. 주섬주섬 손차양하며 안쪽을 살피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도무지 복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오전의 밝은 햇살을 모조리 쏟아 내는 유리 천장과 가짓수가 적은 책장. 주체할 수 없이 밝은 실내의 정경은 아무래도 어두컴컴한 곳을 반기는 마법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실내가 원형인 것으로 보아 천년장미관은 탑이 분명한데, 바깥에서 확인했기로 본관은 그저 3층짜리 아담한 건물이었다. 이런 탑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디아나는 다행히 곧 해답을 찾았다. 멀리 떨어진 본관과 천년장미관을 마법으로 연결한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마녀를 위한 별관인들, 인간의 건축물에 이렇듯 마법이 적용되었을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이제 디아나는 가벼워진 걸음으로 천년장미관에 들어섰다.
이곳이야말로 잉그람의 마녀?마법사라면 누구나 입장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마법 도서관. 가문마다, 개인마다 책을 수집하고 여간해선 남과 교류하지 않는 마법 사회의 폐쇄적인 관습을 떠올리면 그 존재를 쉬이 믿기 힘든 곳이었다.
잉그람에 이렇듯 특별한 도서관이 들어선 계기는 지극히 단순했다. 천년장미관은 200년 전 마법 사회와 산티그마 교단 사이의 천년전쟁이 종식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된 별관이지만, 마녀들이 보물이나 다름없는 서적을 기증할 리 없으니 기실 오래간 이름뿐인 도서관에 불과했다. 그리 텅텅 비었던 천년장미관에 책이 가득 들어찬 것은 모두 트리샤 녹브릿지 덕분이었다.
트리샤 녹브릿지는 120년 전 별세한 마녀로, 마법 사회에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미한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녀는 아흔여덟 해의 생애 동안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책에 대한 집착이 어마어마하여 일평생 9000여 권에 달하는 마법 서적을 수집했다. 문제는 그녀에게 상속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잉그람 법전에 따르면, 누구에게도 상속되지 못한 재산은 일제히 국고로 귀속되었다. 그리고 트리샤 녹브릿지는 잉그람의 국왕과 서약한 마녀였기에 <잉그람 마녀의 의무> 제1조항에 따라 잉그람 법전을 따를 의무가 있었다.
자식도 제자도 심지어는 친척조차 찾지 못한 트리샤 녹브릿지는 결국 보물을 국가에 넘겨줘야 하는 처지였다. 평생을 들여 모은 서적을 순순히 국가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는 심정으로 서약을 파기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찾아 헤맸지만,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공증한 서약을 개인이 파기하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트리샤 녹브릿지 개인에게는 참으로 안된 일이나, 덕분에 작금 가난한 잉그람의 마녀?마법사들은 손쉽게 마법 서적을 접할 수 있으니, 결과적으로는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요즈음 천년장미관은 상속자 없는 마녀?마법사들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갈취하여 나날이 배를 불리고 있다고 들었다. 가문의 도서관은커녕 웬만한 마법 서적을 구입할 돈도 없는 디아나에게는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디아나는 들뜬 마음으로 안내 데스크를 향했다. 바로 사서에게 책의 위치를 물을 요량이었는데.
“저기요.”
“…….”
“저기요?”
연이은 부름에도 깊게 수그린 갈색 고수머리는 꿈쩍하지 않았다. 디아나는 사서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제 보니 그는 졸고 있었다.
“저기요. 좀 일어나 봐요.”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사서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한두 번 찌를 때는 미동도 않던 사서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관장님!”
깜짝 놀란 디아나가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아직 졸음에 취한 듯 흐리멍덩한 사서의 눈이 슬금슬금 내려와 비로소 디아나의 붉은 머리칼에 닿았다. 사서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어, 관장님이 아니네.”
“이봐요. 나는 그냥―”
“헤스터 경?”
이건 또 뭐람. 디아나의 눈매가 금세 날카로워졌다.
“뭐라고요?”
“아, 아니. 헤스터 경이 아니라……. 그런데 되게 닮으셨네요.”
사서가 그렇잖아도 순한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언니도 도서관을 자주 찾는다더니, 아무래도 언니를 아는 사서인 듯싶었다.
디아나는 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책을 좀 찾고 싶은데요.”
“네? 아, 책이요.”
“저기, 사서 맞죠?”
“그럼요. 여기 신분증도 있잖아요.”
사서는 그리 말하며 목에 걸린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루퍼트 월시. 사서의 이름이었다.
“한데 무슨 책을 찾으세요?”
“그리그 프롬에 대한 책이요. 여기 외국 책도 있죠?”
디아나는 일전에 번역 의뢰를 받은 『그리그 프롬의 유산에 대하여; 불사를 꿈꾼 마법사와 불멸하는 유산, 그리고 전해지지 않은 여생을 고찰하다』를 읽다가 중간에 잘 이해되지 않는 챕터를 발견했다. 물론 언어적으로는 충분히 해석할 수 있었지만, 책의 함의를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선 챕터의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그 프롬이라면 반제의 서적이겠네요. 정확히 그리그 프롬의 어떤 책을 찾으시는데요?”
“동화책이요. 듣자 하니 그리그 프롬이 말년에 동화를 썼다던데…….”
“아,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를 찾으시나 봐요.”
사서 루퍼트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사서란 직함이 무늬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건 워낙 판본이 다양해서 어떤 책을 고를지가 더 고민되실 거예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디아나는 루퍼트가 손짓하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마주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드릭 자일스 경!”
등 뒤에서 루퍼트가 반갑게 맞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세드릭이 가볍게 고갯짓했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고개를 돌려 디아나를 보았다.
“안녕.”
디아나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쟤가 여긴 웬일이지?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
루퍼트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세드릭은 그에게 책을 건네주었다.
“와, 이걸 벌써 다 읽으셨어요? 얇아서 그렇지 되게 어려운 책인데 역시 대단하시네요. 달리 찾으시는 책은 없고요?”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란 동화를 찾고 있습니다.”
“요즘 그 동화를 찾는 분들이 이상하게 많네요. 그렇지요?”
루퍼트는 동의를 구하듯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디아나는 대꾸할 겨를이 없었다. 너무나 황당하여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네가 그걸 왜 찾아?’
물론 그런 생각을 알 길 없는 세드릭은 그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두 사람 나란히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층계.
엇갈리는 발소리가 사위에 윙윙거리는 가운데, 세 사람은 꾸준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제법 많이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앞길 밝히는 촛불이 켜지고 뒷길 밝히던 촛불은 꺼지니 당최 어디까지 왔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디아나는 앞선 루퍼트의 등짝만 고집스레 쳐다보며 걸었다. 처음 지하 계단으로 안내할 적만 하더라도 유쾌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던 루퍼트는 몇 번 발을 헛디딜 뻔한 뒤로는 오로지 걷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말짱한 남자가 넘어져서 돌계단 구르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적막을 견디는 편이 나았지만, 묵묵히 뒤를 따라오고 있을 세드릭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심중에서 불편함이 피어오르기 마련이었다.
‘아버지가 요즘 그리그 프롬을 연구하시는 것 같아서.’
도대체 네가 왜 그 동화책을 찾느냐 물었을 때 세드릭은 그리 대답했다. 세드릭이 어릴 때 헤어진 아버지를 얼마나 각별히 여기는지 잘 아는 디아나는 더 캐묻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거북한 동행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가능한 한 빨리 책을 찾아내서 이만 헤어지는 것이 최선이었다.
문제는 그리그 프롬의 동화책이 깊디깊은 지하에 잠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자주 보는 책일수록 가까운 층에 보관되어 있어요. 그리그 프롬은 외국인인 데다 그리 인기 있는 연구 대상도 아니니 당연히 지하에 보관되어 있죠. 그나마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는 반제에서 꽤 유명한 동화책이라 천년장미관에도 구비되어 있는 거예요. 아직 들어오지 않은 외국 서적도 많은데 그 책은 서로 다른 판본만 무려 열 권이 넘는다니까요?’
어쨌든 무료로 책을 대출할 수 있다니, 디아나로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지하면 어떻고, 세드릭이 함께라면 또 어떤가. 구두쇠 디아나는 공짜에 지나치게 약했다.
“앞으로 다섯 층만 더 내려가면 되겠네요! 다들 아직은 괜찮으시……. 디, 디아나 씨! 거기 만지면 안 돼요!”
환하게 웃으며 뒤돌아본 루퍼트가 황급히 외쳤다. 촛불이 흐릿하여 돌계단이 잘 보이지 않았던지 더듬거리며 옆면을 짚으려던 디아나가 깜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왜요?”
“아까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고 그랬잖아요. 전 아직 정식 사서가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지하 계단에 어떤 마법 장치가 숨어 있는지 잘 몰라요. 여기까지 내려와 본 적도 얼마 없는데…….”
루퍼트가 속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디아나는 어쩐지 속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슬그머니 벽면에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여기가 그렇게 위험해요?”
“그럼요. 외부의 침입자도 막고, 내부의 수감자도 막아야 하거든요.”
“내부의 수감자라니요?”
“책이요, 책.”
루퍼트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자칫 잘못하다가 위험한 책이 도서관을 빠져나가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에요. 요 앞이 바로 번화가잖아요.”
“위험한 책이라면…….”
“글쎄요. 워낙에 종류가 다양해서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산 사람 피를 빨아 먹는 책이라거나, 식인을 저지르는 책이라거나. 그런 괴담 많잖아요.”
디아나의 낯이 금세 핼쑥해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루퍼트는 천진하게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전 숙련된 사서가 아니라서, 항상 안내 데스크에만 붙어 있거든요. 이렇게 깊은 지하 서고까지 내려온 것도 오랜만이라서 조금 설레요.”
당신이 설레면 안 되지. 디아나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세드릭 경이 함께 계신데 무슨 큰일이라도 있겠어요?”
루퍼트가 그리 덧붙이며 밝게 웃었다. 디아나는 그 낙천적인 자세가 부럽다가도, 어쩐지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오래지 않아 세 사람은 그리그 프롬의 책이 보관된 층에 다다랐다. 디아나는 지겹디지겨운 계단을 벗어난 것에 소소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나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서고에 들어서자마자 그런 만족감일랑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루퍼트는 본격적으로 책을 찾아다니기 전에 촛대를 나누어 주었다. 촛불로 지하의 어둠을 몰아내기는 역부족이었으나, 지금 그들이 의존할 만한 것은 그리 미약한 불빛이 전부였다.
루퍼트가 소리 죽여 속삭였다.
“지하에는 위험한 책들이 많아요. 그러니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제 뒤만 잘 쫓아오셔야 합니다.”
디아나와 세드릭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곧 한 몸처럼 책장 사이사이를 지나다니기 시작했다.
깊은 지하란 말이 마냥 허황되지는 않은 듯 서고는 오래된 책 특유의 꿉꿉한 냄새로 가득했다. 스치는 책장에는 아바도어나 중앙어뿐만 아니라 북방어나 남방어, 혹은 읽을 수조차 없는 낯선 글자가 가득했다.
여기 꽂힌 뒤로는 단 한 번도 펼쳐진 적 없을지도 모르는 위험하고 오래된 책. 책이 견뎌 온 수백여 년의 세월이 새삼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다행스럽게도 루퍼트는 오래 헤매지 않았다.
“이 책장이 요세피네 프롬의 저서니까……. 다음 책장에 그리그 프롬의 책이 있겠네요.”
바삐 다음 책장으로 건너가려던 루퍼트가 별안간 기우뚱했다. 디아나와 세드릭이 황급히 붙잡아서 망정이지, 둘이 조금만 굼떴으면 정말로 큰일이 벌어질 뻔했다.
“이봐요. 제발 조심 좀……!”
“이게 왜 여기에 있지?”
루퍼트가 갑자기 좌측 책장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답지 않게 날카로워진 갈색 눈이 책장을 샅샅이 살폈다.
“도로시 프롬은 700년대의 마녀인데 왜 여기 꽂혀 있는 거야. 심지어 이건 밀프리 그윈티르의 저서잖아?”
“저기,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네. 아주 큰 문제고말고요. 책장이 완전히 엉망이에요. 지난주에 패트리샤가 수습 사서를 데리고 지하 서고에서 실습을 했다더니, 제대로 정리하지도 않고 올라온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사서 입장에선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일인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순하디순한 루퍼트가 저렇게나 짜증을 부릴 리 없었다.
“죄송하지만 다음 책장에서 그리그 프롬의 책을 찾아보시겠어요? 전 대충이나마 여길 정리하고 있을게요.”
루퍼트가 정중하게 부탁했다. 세드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걸어갔다. 디아나도 울상으로 그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사방은 어둡고 고요했다.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을 흘끗 쳐다본 디아나가 진저리 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먼저 도착한 세드릭이 책장에 촛불을 비추며 제목을 훑고 있었다.
“여기가 그리그 프롬이야.”
세드릭이 책장 한구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디아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책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녀가 알아볼 수 없는 북방어보다는 마법 언어인 아바도어로 기록된 책이 많았다.
마법역학 제3법칙, 기름과 별빛, 축성경의 작동 원리에 대하여, 갈라트리아 기도문의 약점……. 줏대 없이 다방면에 걸친 책의 제목을 끈질기게 읽던 디아나의 눈에 비로소 얇은 동화책이 걸렸다.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
때마침 동화를 발견한 세드릭이 열 권이 넘는 판본 중 하나를 꺼내 좌르르 펼쳐 보았다.
“맞네.”
세드릭이 간단하게 내용을 훑는 동안, 디아나는 주의 깊게 판본을 살폈다. 판본별로 조금씩 제목이 달랐다.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 잘로모와 용사와 마법사, 잘로모와 어둠의 마법사. 그럼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잘로모’와 ‘마법사’였다. 짐작건대 두 명이 중심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동화였다. 짧고 단순한 이야기니 판본별로 큰 차이가 있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디아나는 그리그 프롬을 자세히 연구하려는 게 아니었다. 어떤 판본을 고르든 상관없었다.
그래서 아무 판본이나 꺼내려던 찰나, 불현듯 기묘한 느낌이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마냥 심드렁하던 디아나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가장 좌측 판본 앞에서 어느새 손끝이 멈추었다.
“왜?”
그리그 프롬의 다른 저서를 살펴보던 세드릭이 물었다. 디아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판본을 꺼내 들었다. 간밤 악몽을 꿔서 신경이 예민해졌나 보다, 찝찝하지만 그리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세드릭.”
디아나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떨어져 있던 세드릭이 곁으로 다가왔다. 디아나의 어깨 너머로 판본을 들여다보던 세드릭의 표정이 금세 싸하게 굳었다.
“잘로모와 늪지의 마법사야?”
“응.”
디아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전부 백지였다. 삽화도 글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한데.”
단순히 출판 오류라고 여기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표지만 그럴듯하지 알맹이가 빈 책을 천년장미관이 받아들인 것도 수상하고, 무엇보다도 육감이 그러했다. 마녀의 감은 함부로 경시할 것이 못 되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백지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세드릭이 고개 들어 루퍼트를 불렀다.
“월시 씨.”
루퍼트는 아직도 멀찍이서 책장을 정리하기 바빴다. 대답은 느지막이 돌아왔다.
“저 부르셨어요?”
“여기 책이 좀 이상한데요.”
“왜요?”
“전부 백지입니다.”
머지않아 루퍼트가 책장을 정리하던 손길이 멎었다. 기이하게 가라앉은 침묵 속, 루퍼트의 대답이 뒤늦게 들려왔다.
“……백지라고요?”
돌연 멀리서 책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디아나와 세드릭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퍼트가 하얗게 질린 낯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사, 사서님?”
당황한 디아나가 중얼거렸다. 바로 그 순간, 디아나를 중심으로 원형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당장 그 책 덮으세요!”
루퍼트가 다급히 소리쳤다. 디아나가 얼결에 덮으려 했지만, 책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펼쳐진 그대로 굳어 버린 것만 같았다.
“이, 이거 왜 이래! 왜 안 덮여!”
보다 못한 세드릭까지 힘을 보탰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사이 희미하던 마법진은 시시각각 빛을 더해 갔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고어와 사어가 춤추듯 허공으로 떠오르고, 북방의 명망 높은 프롬 가문을 상징하는 검은 엘크가 등등하게 낯을 드러냈다. 마법진은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누군가 황망히 외쳤다.
“마법진을 중단해야―”
곧이어 책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다. 책을 덮으려 안간힘을 쓰던 디아나와 세드릭도, 다급하게 달려오던 루퍼트도 전부 광명에 묻혔다. 수백 년 묵은 어둠이 지배하던 지하에 비로소 빛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파도처럼 서고를 쓸고 지나간 광명은 자취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세 개의 촛대와, 용과 이어지는 스노우볼,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동화책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둠이 다시금 밀려들어 금방의 소란을 잠재웠다.
인적 없는 지하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