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킹엄의 여름
유난히 별 밝은 밤.
촛불조차 켜지 않은 새카만 방이 유독 소란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아 안으로 무수한 별빛을 들이고는 있으나, 아무래도 활자를 읽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둠 속에서 30분이 넘도록 글씨와 사투를 벌이던 디아나는 결국 짜증스럽게 설명서를 던져 버렸다.
“불을 켤 수도 없고…….”
디아나가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길고 붉은 머리채가 금세 엉망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디아나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창가에 세워 둔 축성경(築星鏡)을 쏘아보았다. 도무지 작동할 생각을 안 하는 우둔한 기계. 바로 저것이 문제렷다.
오늘은 유독 맑은 날이었다. 구름이 모조리 물러가서, 한낮엔 그늘에서도 눈이 부시는 그런 날. 본디 습관적으로 커튼을 치고 살던 디아나는 늦은 오후에 장을 보러 나갔다가, 조금 과장을 섞자면 정말로 눈이 머는 줄만 알았다.
이렇듯 맑은 하늘이 밤이라고 흐려질 리 없다. 디아나는 직감적으로 오늘이 ‘그날’임을 알았다. 그래서 느지막이 귀가한 헤스터를 붙들어 창고에 처박혀 있던 축성경을 빌리고, 대강이지만 설명도 들었다. 나머지는 설명서를 참고하면 되겠다 싶어서 얼른 언니를 재웠건만, 대관절 저 멍청한 기계가 작동할 생각을 안 했다. 이러다간 별빛은 모으지도 못하고 날이 밝게 생겼다.
“하아.”
한숨이 절로 새 나왔다. 디아나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창문에 박힌 네모난 하늘을 응시했다.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몰랐다. 그녀의 탄생성인 칼리스토는 별들의 왕 둘시네아처럼 드물게 떠오르는 별도, 사계의 별처럼 일정한 기간에만 떠오르는 별도 아니었다. 칼리스토는 밤이면 밤마다 매일같이 떠오르는 아주 참한 별이었다. 다만 암흑의 별이라는 별칭답게 육안으로 분간할 수 있는 날이 매우 적을 뿐.
그러니 오늘이 기회였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밤. 별빛이 이리 쏟아질 듯 휘황한 날에는 분명 칼리스토도 조금이나마 빛을 발할 것이었다. 비록 다른 거성(巨星)에 가려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더라도, 별빛 모으는 기계인 축성경이라면 야무지게 별빛을 모아 주리라 의심치 않았는데…….
으득. 디아나는 이를 갈며 축성경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에 괘종시계가 울리기로 벌써 새벽 3시가 지났다. 억울해서라도 이대로는 물러날 수 없었다. 이젠 오기로라도 밀어붙여야 했다.
디아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축성경 이곳저곳을 열심히도 만져 댔다. 분명 언니가 말해 준 대로, 설명서를 읽은 대로. 하지만 축성경은 여전히 잠잠했다. 어딘가 잘못된 게 분명한데 이제는 달리 조언을 구할 곳도 없었다.
저녁 먹으면서도 졸던 언니를 야밤에 깨우겠나, 아니면 미친 척하고 불을 켜서 설명서를 재독하겠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요망한 별빛은 어둠이 오래 머문 곳에만 고개를 기웃거렸다. 오늘 밤을 위해 저녁나절부터 불도 켜지 않았으니, 만약 갑갑함을 못 이겨 불을 켠다면 지금 요사스럽게 방을 살랑대고 있을 별빛이 죄 달아나고 말 것이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가장 최악의 수였다.
결국 디아나는 제자리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호흡에 집중했다. 노기로 들썩이던 어깨가 잦아들고, 짜증과 피로도 차차 가라앉았다. 흥분해서는 될 일도 아니 되는 법. 디아나는 유리병에 거의 바닥난 칼리스토의 별빛을 차분히 상기했다.
“다시 처음부터 해 보는 거야. 다시 처음부터.”
디아나는 그리 종알대며 축성경으로 다가갔다. 이제는 꼴도 보기 싫은 기계. 문득 샘솟는 역정을 다시금 베어 내며 디아나는 두 개의 렌즈부터 확인했다. 역시나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다음은 경통. 헤스터의 축성경은 워낙에 오래된 모델이라 혹시나 경통에 갈라진 틈이 있을지도 몰랐다. 렌즈를 통과한 별빛이 지나는 통로니만큼 자그마한 틈이라도 큰 문제였다.
“어?”
경통을 샅샅이 훑던 눈에 불현듯 흐릿한 빛이 스쳤다. 디아나는 눈을 최대한 가늘게 떴다. 경통의 아랫부분, 삼각대와 만나는 지점이 유난히 헐거웠다. 조심스레 그 부분을 만지작대던 디아나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책상을 뒤져 찾아낸 것은 검은색 두꺼운 종이였다.
만일 정말로 경통이 갈라졌다면, 이런 종이로는 응급처치도 불가했다. 하지만 오밤중에 수리점을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디아나는 긴가민가 검은 종이로 헐거운 접합부를 감싸 보았다.
그 순간, 아래쪽 렌즈가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홀린 듯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렌즈 주변을 밝히던 희끄무레한 빛 무리가 차츰차츰 부풀어 올랐다. 마치 생동하듯 꼬리치는 그것은 렌즈를 통과하여 간신히 모인 칼리스토의 별빛이다.
디아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비로소 성공이었다.
* * *
“디아나, 좋은 아침……. 어제 늦게 잤니?”
여느 때처럼 상냥히 인사하던 헤스터가 자매의 처참한 몰골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디아나는 짙은 그늘을 눈 밑에 주렁주렁 매단 채 고개를 더디 끄덕였다.
“안색이 안 좋아. 더 자지 그러니.”
“아침만 먹고 다시 잘게.”
디아나가 퀭한 얼굴로 말했다. 헤스터는 베이컨과 달걀 프라이가 담긴 접시를 맞은편으로 밀어 주었다.
“별빛은 잘 모았고?”
“으응. 그럭저럭.”
“그래도 다행이다. 축성경이 워낙 오래되어서 잘 작동할지 몰랐는데.”
헤스터가 환히 웃었다. 그녀의 탄생성인 둘시네아는 고작해야 1년에 한두 번 뜨는 귀한 별이었다. 어제 토로하기로 축성경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것이 벌써 3년 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수리해야 할 것 같더라. 경통에 틈새가 있어.”
“뭐? 경통이 망가졌는데 작동할 리가…….”
디아나가 메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불현듯 밤중의 고생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작동은 하더라고.”
디아나는 그리 말하며 달걀 프라이를 전투적으로 해체했다. 얼마나 포크로 열심히 찔러 댔는지, 노른자가 다 터져서 베이컨을 축축하게 젖을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눈앞의 음식이 잠결에 축성경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역시 내가 봐줘야 했나.”
“무슨 소리야. 언니 어제 저녁 먹다 졸던 거 잊었어? 요새 바빠서 며칠은 제대로 자지도 못했으면서. 자고로 사람은 잠을 잘 자야 해. 잠이 부족해지면 말짱하던 사람도 정신이 회까닥 돈다니까?”
“음……. 그래. 어서 먹고 들어가 자는 게 좋겠다.”
디아나는 지금 무어라 주절거리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얼마나 피곤하면 저럴까. 헤스터는 쓰게 웃으면서도 디아나가 지난밤 무리했던 것을 탓하지 않았다.
탄생성의 별빛은 여러모로 요긴하게 쓰였다. 기도문을 작성하거나 약을 제조하거나, 혹은 원기를 회복하는 데도 좋았다. 마법을 부릴 때도 탄생성의 별빛을 사용하는 것이 별이 보시기에 기꺼울 터였다.
물론 가난한 치들이 여러 별빛을 모아 판매하긴 했으나, 그리 거래되는 별빛은 아무래도 직접 모은 것보단 가치가 떨어졌다. 마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성이고, 직접 모은 별빛에는 당연히 정성이 그득 담기기 때문이었다.
그때, 주방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헤스터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가져올게. 마시고 자렴.”
디아나는 입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잘게 찢어진 베이컨 조각을 벌써 50번째로 질겅이고 있었다. 이제는 맛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베이컨을 꿀꺽 삼킨 뒤 도저히 입맛이 없어 포크를 내려놓던 찰나, 문득 건너편에 놓인 오늘 자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 사회에는 신문이 없었다. 대개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두문불출하는 대부분의 마녀들은 그조차 접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이나 각국 마법공회의 소집은 그나마 어떻게든 전달되었지만, 나머지 소식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래서 마녀들은 오래간만에 지인을 만날 때면 이렇게 안부를 묻곤 했다.
‘나는 잘 지냈습니다.’
그동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왔다는 표시였다.
그런데 인간 사회에는 신문이란 것이 있어, 세상의 중요한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디아나는 길가에서 신문 읽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다. 뭐가 그리 재미난지 모두들 한결같이 신문에 코를 박고 있었다.
어쩐지 궁금해진 디아나가 곤한 눈으로 신문을 훑어보았다. 한데 장수가 넘어갈수록 점차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도대체 이런 걸 왜 읽는 거야?”
관세 인하나 식민지 정책처럼 당최 알아먹을 수 없는 소리는 제외하더라도, 도대체가 신문 기사란 것들은 하나같이 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관절 모니카 도머가 누구기에 이 여자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온 세상 사람이 알아야 하는 것이며, 루도비코 코렐리 씨는 생전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건조한 문체로 자살이 알려져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과연 자신의 사생활이 널리 퍼지는 것이 기꺼울까? 심지어 루도비코 코렐리 씨는 이미 죽어서 자신이 신문에 실린 줄도 모를 터였다. 디아나가 여기기에 일련의 모든 짓은 심각한 결례였다.
그리고 이건 대체…….
“용?”
디아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용과 동행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이름을 떠올리는 것조차 끔찍한 그 뱀 새끼는 국왕과 계약을 맺어서 지금쯤 국경에서 열심히 구르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계약이 언제까지였지?’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디아나가 손가락을 접으며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1년? 아니다. 그랬거든 진즉 자일스 저택으로 돌아왔겠지. 그럼 2년인가? 아니면 3년? 만약 2년이라면 지금쯤 계약이 끝났을 것이고, 3년이면 아직 멀었다.
그리 2년과 3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디아나는 결국 포기했다. 세드릭 자일스라면 치를 떨던 그녀가 그의 계약 기간을 기억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디아나는 신문기사에서 한참 눈을 떼지 못했다.
《앰브로즈 광장에 용이 나타났다?》
제목만 그럴싸하지, 실상은 한밤중에 용을 봤다고 주장하는 노인의 인터뷰를 실은 것뿐이었다. 디아나는 혀를 차며 신문을 덮었다. 어느 노망난 노인네인지 몰라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어디 용이 그렇게 흔한 생물이던가. 만약 계약이 끝났어도 세드릭 자일스가 오킹엄으로 올라올 이유는 없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거나, 잉그람에 수두룩한 저택 중 하나를 골라 질펀하게 쉬고 있을 게 빤했다.
만에 하나 오킹엄에 왔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디아나는 더 이상 바바라 자일스의 도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 * *
“오늘도 오셨네요.”
카페로 들어서기 무섭게 종업원의 인사말이 들려왔다. 디아나는 그것이 자신을 향하는 말임을 뒤늦게 알아챘다.
“오늘은 안 오시는 줄 알았는데. 언니분이 늦게 귀가하시나 봐요.”
디아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았다. 메뉴판만 주고 조용히 사라지면 참 좋으련만, 지나치게 상냥한 종업원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날이 무덥죠? 올해는 유독 더운 것 같아요. 8월엔 더위가 꺾이면 좋을 텐데요.”
“예에…….”
“손님은 원래 어디 사셨어요? 잉그람 분은 맞으시죠? 요즘 외국인이 하도 많아서 당최 구분할 수가 없다니까요. 요 앞에 새로 연 요릿집 주인도 원래는 메시나 사람이래요.”
종업원은 질문에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는 내리 자기 할 말만 쏟아 냈다. 디아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때마침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언니가 돌아올 때까지 종업원의 수다를 들어 줄 뻔했다.
종업원이 바삐 사라진 뒤에야 디아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카페를 처음 방문했던 날, 꼬치꼬치 캐묻는 말에 무심코 이 건물 꼭대기에 산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녀를 이웃으로 생각하는지 몰라도, 종업원은 디아나가 카페에 들를 때마다 갖은 수다를 쏟아 냈다. 오죽하면 더위를 피하러 내려왔다가 10분도 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카페를 바꿀까.’
디아나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웬만해선 집 밖으로 나다니지 않는 마녀답게 그녀는 낯을 몹시 가렸다. 큰맘 먹고 새로운 카페를 개척하느니, 종업원의 수다를 견디는 편이 심적으로 편안할 터였다. 게다가 이 카페는 멀리 나갈 필요 없이 한낮의 무더위를 피하기도, 외출하는 언니를 기다리기도 용이했다.
머잖아 주문했던 오렌지 주스가 나왔다. 디아나는 주스를 홀짝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붉은 물감을 엎지른 듯 노을이 퍼져 가는 저녁 하늘과, 하루 일과를 끝내고 속속들이 귀가하는 사람들.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삶을 꾸려 나가는 터전이었다. 오킹엄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구역은 절대 아니지만, 디아나는 나름대로 이 거리의 풍경에 마음에 들었다.
간혹 소란하고, 간혹 성가셔도 쾌활한 마을. 어느 도시건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자일스 저택과는 정반대였다.
자일스. 불현듯 떠오르는 이름에 거북함이 목 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디아나는 얼음을 어금니로 와작와작 깨부수며 오늘 아침을 떠올렸다. 흐리멍덩하던 잿빛 눈이 금세 분기로 가득했다.
‘세드릭 경이 편지를 보냈구나.’
오늘도 10시가 다 되어 일어난 디아나가 뒤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무렵, 오늘 자 우편물을 확인하던 헤스터가 놀라운 기색으로 말했다.
‘누가?’ ‘세드릭 자일스 경. 국경 수비대 계약은 다 끝난 건지 모르겠네.’
헤스터는 그리 말하며 조심스레 편지 봉투를 갈랐다. 그때까지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디아나는 포크를 입에 문 채 멍하니 언니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엊그제 오킹엄으로 올라왔대. 용이 도시에 머무르면 위험할 텐데 무슨 방도가 있는 건지…….’ ‘누가 왔어?’ ‘세드릭 경. 편지 읽어 보겠니?’ ‘세드릭? 내가 아는 그 세드릭 자일스?’ ‘응.’ ‘그 뱀 새끼가 왜?’
헤스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제야 자신이 무심코 ‘세드릭 자일스를 칭하기에 이름보다 적당한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디아나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아, 아니. 언니 그게…….’ ‘뱀이라면 세드릭 경을 말하는 거니?’ ‘으응. 언니, 다른 게 아니라……. 자일스 가문의 상징이 용이잖아! 그런데 용은 너무 무서우니까 귀엽게 뱀이라고 말하는 거야!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채스터티도 종종 그렇게 말하는걸!’
디아나는 간신히 변명을 조합해 냈다. 다행히 헤스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러니?’
안심한 디아나가 그럭저럭 괜찮은 변명을 생각해 낸 자신의 순발력을 자찬하려던 순간, 조그맣게 ‘뱀 새끼’라고 중얼거리는 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디아나는 당장에 혀 깨물고 죽고 싶어졌다.
‘내가 여태 얼마나 열심히 바른 여동생이 되려고 노력했는데!’
실제로는 내숭에 가까웠지만, 디아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바바라 자일스에게 ‘재능은 없지만 착하고 성실한 도제’로 예쁨받았던 것처럼, 디아나는 언니에게도 선하고 어여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10년 넘게 쌓아 온 인상이 한순간의 실수로 무너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디아나는 금방의 실언이 무척이나 뼈아팠다. 그 실언이 세드릭 자일스와 관련되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망할 자일스. 망할 뱀 새끼.
하여간에 인생에 하등의 도움이 안 되는 놈팡이였다.
‘그래서 세드릭이 뭐래?’
디아나는 당황을 감추려고 부러 환하게 웃었다. 헤스터는 여느 때처럼 상냥하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디아나는 부디 편지를 받는 손끝이 떨리지만 않기를 바랐다.
‘디아나?’
헤스터는 한참이나 침묵하는 동생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제야 퍼뜩 고개를 든 디아나가 부산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언니 바쁘니까 답장은 내가 할까?’
‘그러렴.’
오래지 않아 헤스터는 곱게 차려입고 외출했다. 듣기로는 오늘 점심 약속도 있고, 오후에는 단기 계약을 마무리하러 마법협회에도 들러야 한다고 했다. 저녁은 함께 먹을 수 있으리라는 말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지만, 대체적으로 디아나는 온종일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디아나는 남은 오렌지 주스를 입 안으로 털어 내며 신경질적으로 편지를 펼쳤다. 그러자 아침에도 보았고 점심에도 보았던 정갈한 필체가 짜증스럽게 눈에 박혔다.
「존경하는 솔 자매,
편지로는 오래간만에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저는 국경 수비대의 임무를 끝마쳤고, 며칠 전 오킹엄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지인에게 듣기로 두 분께서도 오킹엄에 계신다더군요. 혹 근시일 내에 두 분을 뵐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편지인 줄은 압니다만, 직접 뵙고 안부를 여쭙고 싶습니다. 편하신 날짜와 시간을 알려 주십시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세드릭 자일스.」
디아나는 형식으로나 필체로나 흠잡을 데 없는 편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뭐? 존경? 안부를 여쭈어? 존경하는 솔 자매가 여기 산다는 걸 알려 준 지인은 누구며, 뜬금없이 오킹엄엔 웬 행차란 말인가. 도대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무엇보다도 격식을 갖춘 어투가 가장 수상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면 세드릭 자일스와 디아나 솔은 이리 점잖은 편지가 오고 갈 만한 사이가 못 되었다. 더구나 편지의 수신인은 ‘디아나 솔’이 아니라 무려 ‘솔 자매’였다. 오래간만에 인사드린다는 말을 볼 때 세드릭은 이미 언니를 알고 있는 듯했다. 세드릭의 편지를 자연스레 읽던 언니의 태도를 봐도 그러했다.
대체 두 사람은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걸까. 디아나가 알기로 헤스터의 인간관계는 협소했고, 세드릭도 잘은 몰라도 비슷할 것이었다. 애당초 마법 사회에선 대책 없이 넓은 친분을 경계했다. 워낙에 비밀이 많은 마녀의 특성상 타인에 대한 호감보다 의심을 먼저 펼치기 때문이었다.
디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꼴에 젠체하는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이젠 우아한 필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디아나는 언니인 헤스터조차 옹호하지 못하는 악필 중의 악필이었다. 덕분에 먼 옛날, 당최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는 스승의 난감한 말을 듣고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세드릭 자일스에게 글씨를 예쁘게 쓰는 방법에 대해 물었던 부끄러운 과거까지 생각나 버렸다.
“저기 언니분 아니세요?”
문득 종업원이 말을 걸어왔다. 디아나는 종업원의 손가락을 따라 무심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그스름한 황혼이 짙게 내려온 거리. 제각기 집으로 향하는 인파 사이로 황혼처럼 붉은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디아나는 황급히 종업원에게 값을 지불하고 카페를 나왔다.
“언니!”
디아나는 사람들을 헤쳐 걸으며 마구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헤스터가 활짝 웃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거리 한가운데서 마주친 자매는 꼭 10년 만에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시름에 잠겼던 디아나의 얼굴에도, 피로에 젖었던 헤스터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미안해. 많이 늦었지?”
“아냐. 아직 해도 안 졌는걸. 일은 잘 마치고 왔어?”
“그럼.”
디아나는 헤스터의 오른팔에 팔짱을 꼈다. 못내 사랑스럽다는 듯 동생을 보던 헤스터가 종이 봉지를 내밀었다.
“오는 길에 브라우니를 좀 사 왔어. 간식으로 먹으렴.”
봉지에는 제법 큼지막한 초콜릿 브라우니가 두 덩이나 들어 있었다. 디아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가 밤에 같이 먹자.”
사실 달콤한 간식은 헤스터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디아나는 단맛을 그리 즐기지 않았지만, 언니가 좋아하는 음식이기에 내색 않고 함께 즐겨 왔다.
“오늘은 뭐 했니? 지루하진 않았고?”
“괜찮았어. 책도 좀 읽고, 미라벨이랑 놀기도 하고…….”
“다행이다. 내일은 나도 별일 없는데 같이 미라벨 목욕이나 해 줄까?”
“걔 목욕하는 거 되게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둘이서 해야지.”
미라벨은 헤스터가 기르는 하얀 고양이로 지독하게 목욕을 싫어했다. 한 달 전 미라벨을 씻기려다 집 안에 물난리가 났던 것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 참, 그리고 이번 토요일은 어떠니?”
헤스터가 물었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디아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토요일이라니?”
“아침에 세드릭 경이 편지 보냈잖아. 나는 이번 토요일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때쯤이면 급한 의뢰도 다 끝날 거고.”
디아나가 멈칫하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날짜를 헤아리기 바쁜 헤스터는 갑작스러운 침묵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새 디아나는 말끄러미 언니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해야 할 답변 대신, 묻고 싶은 말만 자꾸 혀끝으로 치달았다.
언니가 세드릭 자일스를 어찌 알아?
언니는 무얼 숨기고 있어?
혹시, 언니도 내게 비밀이 있을까?
“응. 내가 알아서 답장할게.”
하지만 디아나는 그런 말일랑 죄 삼켰다. 대신 백치처럼 말갛게 웃으며 주머니 속 편지를 구겨 버릴 뿐이었다.
디아나에게 자일스란 과거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제 바바라 자일스의 도제가 아니고, 더 이상 자일스 저택에 살지도 않았다. 더는 자일스와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그 음울한 저택도, 자일스란 이름의 미친 가문도, 잔혹하기 그지없는 괴물도 이젠 끝이었다. 디아나는 그 모두를 잘라 낼 작정이었다.
그러니 세드릭 자일스든 용이든 이제는 상관없다. 디아나는 이만 언니와 행복해지고 싶었다.
* * *
여름의 별 프라가는 오킹엄을 아주 말려 죽이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여태 자일스 저택에서 편안하게 여름을 보냈던 디아나는 고작 두 달 사이 오킹엄의 혹서에 일찌감치 손들었다. 오죽하면 낮에 잠들어 밤에 활동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늦게 시작하는 하루일수록 짧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디아나는 발간 노을을 감상하며 내일은 바른생활을 하겠노라 다짐했지만, 계절이 끝나도록 지켜지지 않을 다짐인 듯싶었다.
‘내가 원래는 이러지 않았는데.’
근자의 게으른 생활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디아나는 때때로 그런 생각을 했다. 기실 디아나는 바바라 자일스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바지런한 제자였다. 아무래도 생각지도 못하게 입원했던 것이 부지런한 습관에 악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변화였다.
헤스터는 디아나의 나태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구두로 도제 과정을 마쳤을 뿐 아직 국왕과 정식으로 서약을 맺지 않은 디아나가 달리 생계를 도울 일이 없다고 여기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디아나는 언니의 자비로운 태도가 내심 불안했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대양보다 넓은 두 사람이지만, 지금까지 살 부딪치며 동거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언니가 그녀를 구제불능의 게으름뱅이로 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종종 피어올랐다.
그래서 디아나는 목이 빠지도록 8월 1일을 기다렸다. 매월 초일은 잉그람의 국왕이 마녀를 접견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굳이 오킹엄까지 올라와서 국왕을 만나려는 마녀는 거의 없었으므로, 매월 초일은 대체로 도제 생활을 끝마친 수습 마녀가 정식으로 국왕과 서약을 맺는 하루였다.
국왕과 서약을 맺지 않으면, 잉그람의 마법 명부에도 이름이 올라가지 않는 법. 다시 말해, 마녀로서 돈벌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왕과 서약을 맺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7월 1일을 넘겨 퇴원한 디아나는 한 달을 거의 유유자적 놀기만 했다. 돌이켜 보건대 아주 지루하고 덥고 짜증 나는 시간이었다. 이토록 여유로운 적이 없었던 디아나는 넘쳐나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했다. 헤스터가 바쁜 날엔 그저 멍하니 집을 지킬 뿐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근자에는 세드릭 자일스가 폭탄 같은 편지를 보내 준 덕분에 그 지루한 시간을 고민으로 채울 수 있었다.
세드릭 자일스. 이름만 떠올려도 디아나는 골이 아파졌다. 대관절 만나자는 까닭을 모르겠으나, 그 시커먼 속내를 순순히 따라 줄 수는 없었다. 아무렴, 교활하기 짝이 없는 그 뱀 새끼가 언니에게 무슨 망언을 할지 알고.
“언니. 세드릭이 이번 주 토요일은 안 된다고 그러네. 요새 갑자기 바빠졌나 봐. 다시 편지하겠대.”
“그렇구나.”
디아나는 세드릭에게 답장하지 않았고, 헤스터는 사랑스러운 동생이 거짓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디아나는 깜찍한 얼굴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내심으로 세드릭에게 마구 욕을 퍼부었다. 헤스터에게 거짓을 고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세드릭 때문에 언니를 속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쩐지 디아나 솔에게 있어 세드릭 자일스의 존재가 아주 큰 의미를 지닌 것처럼 느껴져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어쨌든 시간은 덧없이 흘러갔다. 무료했던 7월은 느닷없는 세드릭의 편지로 그나마 역동적으로 끝났고, 이제는 그토록 고대하던 8월이었다.
새벽 나절 내린 이슬비로 촉촉하게 젖은 오킹엄.
디아나는 난생처음 로엔그렌 궁전으로 발을 내디뎠다.
“디아나. 접견실까지 잘 찾아갈 수 있겠니? 내가 데려다줄까?”
“언니는 공회당으로 가야지. 늦으면 어떡해.”
때마침 오늘은 마법공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마법공회의 일원으로 초청받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므로, 웬만하면 참석하여 명예를 드높이는 편이 좋았다.
“시간이 빠듯하긴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에이. 나 정말로 잘 찾아갈 수 있어! 혹시 모르겠으면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면 되지.”
디아나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헤스터는 여전히 근심하는 기색을 지우지 못했지만, 디아나가 등을 미는 바람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갈림길 나올 때마다 사람들한테 물어봐.”
“응.”
“접견실은 외궁에 있으니까 혹시 길을 잘못 들어서 내궁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유념하고. 내궁은 접근이 제한되어 있어서 조심해야 해.”
“알았다니까. 내가 애도 아니고.”
설교가 길어질수록 이편으로 모이는 시선이 늘어났다. 디아나는 얼굴을 붉히며 소곤거렸다.
“서약 끝나면 바로 공회당으로 갈게. 너무 내 걱정만 하지 말고 언니 걱정도 좀 해.”
마법공회에는 잉그람을 대표하는 마녀?마법사들이 모였다. 자연히 잉그람을 대표하는 세 가문 출신이 많을 터. 디아나로선 홀로 고립될 언니가 우려될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스스로를 걱정하긴커녕, 그저 서약만 맺으러 온 동생을 걱정하기 바빠 더욱 그러했다.
“가만 보면 언니도 참 순진해.”
디아나는 멀어지는 헤스터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투덜거렸다. 디아나는 하나뿐인 언니를 몹시 사랑했지만, 도무지 자신을 위할 줄 모른다는 것이 조금은 불만이었다. 개인주의를 미덕으로 삼는 마법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혹시 나한테만 그러는 건가?’
불현듯 기분이 좋아진 디아나가 샐샐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란 것이 있었다. 언니가 그녀를 위하는 정도는 객관적으로도 심히 과했으므로, 그녀라도 대신 언니를 돌보아야 했다.
헤스터는 단순히 디아나 솔의 언니가 아니었다. 어머니인 그리젤다 솔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은 천재이자, 무려 별들의 왕 둘시네아의 사랑을 담뿍 받는 마녀였다. 그런 위대한 마녀가 자칫 잘못되면 마법 사회의 입장에서도 크나큰 손실이었다. 그리고 디아나는 한 명의 어엿한 마녀로서 그런 일이 없도록 충실하게 언니를 보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꼬장꼬장한 원로 마녀들이 들으면 흡족해할 다짐을 거듭하며 디아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둥근 아치와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로엔그렌 궁전은 한눈에도 시선을 잡아끌 만큼 화려한 곳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다간 국왕과 서약을 맺지 못하는 수가 있었다.
그렇게 디아나는 연청색 찬란한 궁전도,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도 애써 외면하며 바삐 발을 놀렸다. 정문이 제법 북적이던 것과 달리, 접견실로 향하는 복도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에 디아나는 헤스터가 알려 준 방향으로 의심 없이 나아갔지만, 머잖아 휑뎅그렁한 복도를 마주하니 자연스레 불안감이 싹텄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디아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뚫린 벽면으로 따사로운 햇볕이 쏟아지는 복도는 무척이나 밝고 고즈넉했다. 향기로운 꽃이 만발한 정원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 복도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으나, 그 또한 한없이 적막했다.
한동안 디아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했다. 스스로 길눈이 어둡다는 것을 잘 알기에 발 가는 대로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다 왔던 길을 되짚어 보자는 생각으로 뒤돌았을 무렵, 자그마한 새 한 마리가 별안간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디아나가 황급히 고개 숙여 피했지만, 새는 개의치 않고 그녀의 붉은 머리 위에 가지런히 내려앉았다.
“이건 또 뭐야!”
디아나는 낯선 감촉에 진저리 치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그럼에도 새는 디아나의 머리가 그리도 편안한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견디다 못한 디아나가 손을 뻗어 새를 잡아챘다. 그리고 당장에 하늘로 날려 보내려던 찰나, 문득 손으로 퍼지는 써늘함이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새는 생물이다. 고로 따뜻하다.
그런데 왜 차갑지?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디아나는 조심스레 주먹 쥔 손을 폈다. 새를 꽉 부여잡은 손가락이 느슨해지자 차츰 새의 형상이 드러났다. 그녀의 작은 손으로도 족히 덮이는 몸집에 영묘한 파란 눈. 하지만 디아나는 새를 놓지도 쥐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놀란 가슴이 콩닥콩닥 두방망이질했다.
그녀가 손에 쥔 것은 당연하게도 새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걸 새라고 말하진 않을 터였다.
왜냐하면…….
“카나번.”
불현듯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계 새가 쏜살같이 손아귀를 빠져나가자, 디아나의 시선이 멍하니 새를 따랐다. 새는 멀찍이 어느 사내에게 이르러서야 날갯짓을 멈추었다.
디아나는 사내가 새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작은 속삭임까지 들릴 거리는 아니지만 사내의 생김새는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색이 옅은 은발에 선명한 벽안.
알피어스 가문의 마법사였다.
“카나번이 실례를 범했군요.”
마법사가 천천히 다가왔다. 마법사가 먼저 말을 건넬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디아나는 멀거니 고개를 젓기만 했다.
“아, 아니요…….”
어느덧 지척으로 다가온 마법사가 물끄러미 디아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디아나는 마법사의 머리 위를 빙빙 도는 기계 새에 매료되어 그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저기, 그런데 저 새는 뭐예요?”
디아나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법사란 여간해서 마법과 관련하여 입을 잠그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량 넓은 마법사는 순순히 답을 주었다.
“기계입니다. 마력을 동력으로 하지요.”
“그럼 마법과 인간의 기술을 접목한 건가요?”
디아나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마법과 기계라니, 이제껏 들어 보지 못한 조합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마법 실력을 보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지도 몰랐다.
“관심 있습니까?”
“네!”
“이스트테더구(區) 해링턴가(街) 186B.”
마법사가 말했다.
“그곳으로 가 보십시오.”
“예에…….”
디아나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그새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둘러본 마법사가 여상하게 물었다.
“그런데 공회당이 어딘지 압니까?”
공회당. 아무래도 이 마법사는 언니와 마찬가지로 마법공회에 참석하러 온 듯했다. 꽤 젊어 보이는데 대단한 실적이라도 쌓은 모양이었다.
디아나는 입을 비쭉거리며 등 뒤를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접견실은 이쪽입니다.”
“네?”
깜짝 놀란 디아나가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기계 새가 마법사의 뒤를 포르르 쫓았다. 그 기묘한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디아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내 걸음을 옮겼다.
디아나는 심란한 눈빛으로 껑충 키가 큰 문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잉그람 전역을 다스리는 국왕의 집답게 로엔그렌 궁전은 대단히 넓고 거대했다. 심지어는 고작 접견실의 문 주제에 이만치 컸다.
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디아나가 재차 문패를 확인했다. 하지만 문패에 적힌 고상한 필체는 변함없이 접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궁전의 문패가 틀릴 리 없으니 이만 들어가서 국왕과 서약을 맺어야 하건만, 어쩐지 이제야 긴장감이 조금씩 올라왔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갈 수도 없다. 끝내 결심한 디아나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고요한 복도에 노크 소리가 두어 번 울리기 무섭게, 육중한 문이 차츰차츰 열리기 시작했다.
접견실은 몹시 어두웠다. 문틈으로 햇볕 들이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디아나는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지 않고 뭐 합니까?”
창문마다 꼼꼼히 커튼을 친 접견실은 어디고 어두웠지만, 유일하게 구석만 조금 밝았다. 디아나는 주춤거리며 접견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닫혔다.
“저어…….”
“가까이 오세요.”
“혹시 마녀세요?”
디아나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책상에 코를 박고 있던 마녀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궁정마녀 그레이시 밀너입니다. 그나저나 서약하러 온 거 아니에요?”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디아나는 얼른 책상 앞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서약서 잘 읽고…… 여기랑 여기. 사인하세요.”
마녀는 서약서를 디아나에게 넘겼다. 디아나가 의아하게 물었다.
“국왕과 서약하는 게 아닌가요?”
“내가 국왕을 대리하여 서약을 체결합니다. 며칠 내로 국왕이 서약서에 사인을 하면 저절로 서약은 성립해요. 정 미덥지 못하다면 다음 주중으로 마법협회에 들러 잉그람의 마법 명부를 확인해 보세요. 만일 이름이 등재되지 않았으면 다음 달에 다시 오면 됩니다.”
“아…….”
디아나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과 서약해야 정식 마녀로 인정받는다더니, 서약하는 자리에 국왕은 얼굴도 비치지 않는 것이 잉그람의 전통인 모양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우편으로 처리하지, 무엇 하러 왕궁으로 오라고 한담. 디아나는 속으로 불평하며 서약서를 보았다.
서약의 내용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귀하는 앞으로 잉그람의 마녀로서 이하의 내용을 권리로 지닐 것이며 등등……. 도서관과 기록보관소, 그리고 천체관측소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을 제하면 당최 무엇이 권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디아나는 무심하게 종이를 넘겼다.
본디 마녀는 국적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다. 국가가 마녀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지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이었다.
‘쥐똥만큼 베풀면서 바라는 건 왜 이리 많아?’
디아나는 심드렁히 <잉그람 마녀의 의무>를 읽기 시작했다. 갖은 미사여구와 의무랍시고 적어 놓은 별별 쓸데없는 내용을 제하니, 남은 알맹이는 고작 이 정도였다.
마녀는 잉그람 법전의 심판을 받는다. 다만 징역형 이상에 처하는 경우에는 발푸르기스 평의회로 신병을 이송한다 마녀는 1687년 체결된 발롬피에 협약의 심판을 받는다.
마녀는 왕명을 즉시 따른다. 다만 잉그람 국왕은 천재지변이나 전쟁, 극심한 인명 피해가 우려되는 경우에만 마녀를 동원할 수 있다. 이때 국왕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마녀를 일차적으로 동원해야 하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른 때에만 다른 지역의 마녀를 동원할 수 있다. 동원에 따른 보수는 양자의 협의로서 결정한다.
마녀는 계약을 통해 국가 사무를 관장할 수 있다. 이때 보수는 양자의 협의로서 결정한다.
마녀는 다음 장소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로엔그렌 내궁(內宮), 산티그마 교단에 공식적으로 귀속된 교회당, 괄티에로 벨리.
딱 예상한 정도였다. 선조들이 잉그람 국왕과 치열하게 협상한 결과일 테니, 공연한 의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언니와 스승님도 서약한 내용이 아닌가.
디아나는 펜을 들어 종이에 사인했다. 이로써 그녀는 그토록 소망하던 정식 마녀가 되었다. 10년 넘게 이 순간만을 꿈꾸었지만, 생각만큼 감흥은 크지 않았다.
“다 했어요?”
“네.”
궁정마녀는 두말없이 서약서를 받아 갔다. 꼼꼼히 서약서를 살피던 마녀의 시선이 뚝 멈추었다.
“……당신이 그리젤다 솔의 둘째 딸이에요?”
디아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마냥 기껍지만은 않은 관심이나, 이제는 익숙해진 참이었다. 지극히 배타적인 마녀가 낯모르는 사람에게 이리 캐물을 정도로, 솔이라는 이름에 담긴 무게는 상상 이상이었다.
잠시간 디아나를 살펴보던 궁정마녀는 오래지 않아 시선을 거두었다. 위대한 마녀 그리젤다 솔과 별에게 축복받은 헤스터 솔. 두 명의 위대한 마녀는 디아나의 자랑이자 평생을 옥죌 족쇄였다. 그나마 타인에게 무관심하기를 미덕으로 아는 마녀들이라 이 정도였다.
“이만 가세요.”
“……그게 끝이에요?”
궁정마녀의 축객에 디아나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양옆으로 무려 세 개의 깃펜을 마법으로 바삐 놀리던 마녀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럼 무얼 더 하죠?”
“고작 사인으로 끝내는 서약이라니……. 효과가 너무 약하지 않나요? 적어도 이젤론의 서약이나 호레이샤 맹세 7단계 정도는 거칠 줄 알았는데…….”
“이건 가계약이에요.”
궁정마녀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나머지는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제대로 행할 겁니다. 올 가을에 열린다니 꼭 참석하세요.”
하긴 제대로 된 서약을 맺으려면 하루로는 부족할 터였다. 그래도 마법 명부에 이름을 올려야 하니, 일단 가계약을 맺은 다음에 정식으로 서약의 절차를 밟으려는 것 같았다. 간단하면서도 효과가 대단한 술라의 맹약이 있지만, 그것은 서약자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몹시 위험한 술법이었다. 당장 디아나만 하더라도 저번 기차에서 강제로 맹약을 맺었다가 목이 졸려 죽을 뻔하지 않았나.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정마녀 그레이시 밀너는 이젠 네 개의 깃펜을 마법으로 놀리면서 한시도 손을 쉬지 않고 있었다. 저토록 바쁜 마녀에게 공연스레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디아나는 적어도 나갈 때만큼은 조용히 나가자는 생각으로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걸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기 무섭게 들이친 햇볕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금 어둑해진 접견실에는 오직 깃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이 흐를 뿐이었다.
메시나, 잉그람, 반제.
제각기 다른 문화적 토대 위에서 건립된 세 나라는 시작점이 달랐듯 작금에도 판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왕도 돌카마라보다 성도 산티그마를 더욱 존숭하는 메시나는 교단의 힘이 막강하여 세속 군주가 기세를 펼치지 못했고, 산티그마 교단을 가장 늦게 받아들인 반제는 그들이 왕이라 추종하는 지배자 휘하로 모든 권력과 재화를 결집했다. 반면 잉그람은 국왕을 존중하되 무조건적으로 지배받지 않기 위하여 세상에서 가장 철저한 법전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국왕과 교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잉그람은 오로지 법전에 의해서만 통치되는 사뭇 독특한 국가였다.
이러한 특징은 각국의 마법 사회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메시나의 마법 사회는 일찍이 교황에게 무릎 꿇었던 팔리아치 가문이 주도했고, 반제의 마법 사회는 그들의 목줄을 쥔 강고한 국왕의 뜻에 좌지우지되었다. 하지만 잉그람은 달랐다. 교활한 자일스, 고결한 베가, 공정한 알피어스. 이렇듯 세력 강대한 세 가문이 존재하지만, 유별나게 특출한 가문 없이 공고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법공회.
1년에 한 번. 잉그람의 내로라하는 예순여섯의 마녀?마법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 회합이야말로, 잉그람 마법 사회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헤스터 경. 굉장히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그리고 장장 3년 만에 마법공회에 참석한 헤스터는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근래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나만 보지 못한 것이 아니군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헤스터는 국왕과 장기 계약을 체결하여 국경도시 스노든에서 천체 연구에 몰두했었다. 그럼에도 매년 마법공회 소집장이 날아왔으므로, 만일 참석할 뜻이 있었다면 무리 없이 오킹엄으로 내려올 수 있었을 테지만 헤스터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당시 올리버의 배신에 큰 충격을 받아 도망치듯 떠나왔으니, 병적으로 오킹엄을 피할 만했다.
헤스터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를 반추하며 쓰게 웃었다. 스노든에서 별만 보고 살 적에는 절대 오킹엄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지레짐작했으므로, 작금 심적으로 평안한 생활이 새삼 우습기도 했다.
무릇 지독하게 아팠던 상처도 점차 아물기 마련이었다.
헤스터는 담담하게 공회당 전경을 훑어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물론 공회당은 건립된 지 200년은 족히 넘었으므로 고작 3년 사이에 변할 리 만무했지만, 참석자들의 면면조차 그대로라는 점은 아마 마법 사회의 폐쇄성이 크게 작용했을 터다. 실제로 요사이 학계에서 반향을 이끌어냈던 신진들은 이번 공회에 거의 초청받지 못했다.
그녀의 자리는 맨 뒤쪽이었다. 원형의 공회당에서는 오히려 뒤편에 앉는 것이 전반적인 상황을 조망하기 쉬웠으므로, 헤스터는 마련된 자리에 기꺼이 착석했다. 주변의 다른 이들도 점차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때, 늙은 왕관독수리가 푸드덕거리며 옆자리로 날아들었다. 왕관독수리는 맹금류 사이에서도 체구가 남다른 종이지만, 유독 꼿꼿한 자태에선 무시하지 못할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헤스터는 느리게 시선을 내려 옆자리의 명패를 보았다.
“……귄프린 두들버그 경?”
“레오나드 자일스다.”
왕관독수리의 부리에서 걸걸한 노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귄프린 두들버그는 술독에 빠져 사느라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를 게야.”
“저런.”
헤스터가 여상하게 대꾸했다. 독수리의 날카로운 시선이 슬쩍 그녀를 향했다.
“3년 만이로군. 나는 그간 잘 지냈다.”
“저도 잘 지냈습니다.”
“잘 지내? 듣기로는 영 별로던데.”
“예?”
“니올로 팔리아치 말이다. 그리젤다의 둘째 딸이 뮈티레의 오점을 지워 버렸다고 한동안 난리가 아니더구나.”
헤스터는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야 곧 잦아들겠지요.”
“그건 너의 바람이겠지. 무려 그리젤다의 둘째 딸이 광인 니올로를 죽였다질 않아. 게다가 바바라 자일스의 밑에서 수학했다지? 이번엔 얼마나 대단한 마녀가 등장할지 다들 기대가 커.”
불편함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헤스터는 흘끗 주변을 둘러보았다. 참석자의 태반이 레오나드 자일스처럼 동물을 보내긴 했으나, 그렇다고 그녀를 향한 형형한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질문이 불편한가?”
“……오늘따라 말이 많으십니다.”
헤스터가 조용히 말했다.
“레오나드 경이 아니었다면 다른 이가 옆자리를 채웠겠지요. 그리고 더욱 노골적으로 질문했을 테고요. 경이 곁으로 와 주신 데 감사드려야 할까요?”
독수리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허를 찔린 듯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제 너도 그리젤다를 닮아 가는구나. 아니면 아멜리아를 닮은 건가?”
“어느 쪽이든 그저 영광스러울 뿐입니다.”
“흥.”
독수리가 고개를 팩 돌렸다. 헤스터는 삐친 기색 다분한 독수리를 힐끔대며 남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레오나드 자일스. 일명 규율의 마법사라 불리는 노인은 자일스 가문의 원로 격인 고명한 마법사였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일선에서 제법 명성을 떨쳤으나, 나이를 먹은 뒤로는 거처에서 은거하며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이렇게 마법공회에 나타난 것도 의외였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녀의 옆자리까지 꿰어 찼는진 모르겠으나, 헤스터는 진심으로 레오나드 자일스에게 감사했다.
레오나드의 괄괄한 성정은 마법 사회에서도 익히 유명했다. 오래전 관 속으로 들어간 잉그람 선왕과 대거리를 벌인 직후 로엔그렌 궁전 담벼락에 소변을 갈겼다는 일화는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적어도 마법공회의 참석자들은 레오나드 자일스의 괴팍함을 잘 알 테니, 쉽사리 헤스터에게 다가와 질문 공세를 가하진 않을 터였다.
타인에게 무심하기를 미덕으로 섬기되, 일단 관심을 가진 분야에는 미친 듯 몰두하는 것이 바로 마법사란 족속이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몰라도, 마법공회에 소집될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면 ‘비밀스러운 그리젤다 솔의 둘째 딸’과 ‘광인 니올로의 죽음’에 관련하여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헤스터는 그네들의 호기심을 해갈해 줄 의향이 전혀 없었다.
휑뎅그렁하던 공회당에도 어느덧 사람이 찼다. 새가 주류였지만, 이따금 다른 동물이 보이기도 했다. 특히 누가 봐도 알피어스 소속이 분명한 파란 영양은 공회당 구석에서 마치 여왕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헤스터는 저이가 바로 <공정한 알피어스>의 수장인 수리 알피어스라고 추측했다.
“어린것이 아주 시끄럽게 노는구나.”
레오나드 자일스가 독수리의 입을 빌려 투덜거렸다. 헤스터는 파란 영양 근처에서 따분한 얼굴로 서 있는 휴고 알피어스와 눈짓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래지 않아 반대편이 소란스러워졌다. 파란 영양은 도착했으니 이제는 둘이 남았다. 석문이 활짝 열린 입구. 눈부신 햇빛을 등지고 자그마한 까마귀가 공회당으로 입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바라 자일스 경이군요. 가 보지 않으셔도 됩니까?”
헤스터가 물었다. 하지만 왕관독수리는 심드렁하게 입구를 지켜볼 뿐이었다.
“귀찮다. 그렇잖아도 요새 시끄러운데 가서 무슨 헛소리를 들으려고.”
“예?”
반문하던 헤스터는 곧 레오나드가 친족을 꺼리는 이유를 깨달았다. 근래 자일스가 시끄러운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세드릭 경이 돌아왔다지요.”
2년 전, 용을 교련하러 국경으로 떠났던 세드릭 자일스가 돌아왔다. 이는 즉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자일스의 차기 수장 자리를 둘러싼 논쟁에 다시금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 용을 데리고 아주 당당히 귀환했다지.”
역시나, 보수적인 자일스 가문의 원로답게 레오나드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세드릭 경이 어릴 때 스치듯 한 번 보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 핏덩이야 한 번 보는 걸로 족해.”
왕관독수리가 거북한 낯빛으로 날개를 뒤틀었다.
“그 녀석은 제 아비의 피를 너무 짙게 이어받았어. 아주 아비와 똑 닮았더군.”
“……세드릭 경은 훌륭한 마법사예요.”
헤스터가 세드릭을 옹호했다. 그러나 늙은 마법사는 완고했다.
“하지만 훌륭한 자일스는 아니지.”
* * *
“마법공회요? 타종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진행 중이지 않겠습니까. 저도 잘은 모르겠군요.”
서약은 예상보다 빨리 끝났지만, 접견실에서 공회당을 찾아가는 길이 녹록지 않았다. 행여나 헤스터와 길이 엇갈릴까 싶어 마음이 급해진 디아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았으나, 척 보기에도 귀한 신분은 아닌 디아나에게 돌아오는 답변이란 지극히 무심했다.
왕가의 사람이 기거하는 내궁과 달리, 수많은 중앙관청이 들어선 로엔그렌 외궁은 수많은 각료와 시종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자연히 수수한 차림의 여자아이가 처한 곤란한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디아나는 서류 더미를 안은 사람들이 바삐 길을 재촉하는 복도에서 한참을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다잡고는 꾸역꾸역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어렵사리 길을 물어 간신히 공회당에 달했을 무렵, 디아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일생의 태반을 고즈넉한 자일스 저택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이토록 바글거리는 곳은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언니와 손 붙잡고 집으로 돌아가거든, 당장 침대에 뻗어서 저녁까지 눈을 못 뜨리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디아나는 눈부신 볕에 미간을 좁히며 공회당을 기어코 올려다보았다. 화사하게 치장한 다른 건물과 달리, 공회당은 우중충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아한 선을 그리는 둥근 아치도, 경전 속 헐벗은 인물을 세심하게 조각한 장식도 없었다. 대신 커다란 바위를 차근차근 쌓아 올린 투박한 원형 건물은 신전처럼 거대한 석문과 한낮의 햇살을 반사시키는 유리 천장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공회당은 난생처음이었다. 자격이 못 되어 입장할 수는 없으니 외관으로나마 구조를 짐작하고 싶었지만, 이제 막 정오를 지난 한여름의 볕은 지나치게 밝았다. 디아나는 우둔하게 눈을 혹사시키느니, 나중에 언니에게 내부를 묘사해 달라 청할 요량이었다.
그리 뙤약볕을 피해 그늘로 걸음을 옮기던 참이었다. 때마침 육중한 석문이 느릿느릿 열리기 시작했다. 디아나가 반색하며 계단을 열심히 뛰어올랐다. 쓸데없게 많은 계단에 대한 불평도, 혹서에 대한 짜증도 곧 언니와 재회할 기쁨에 가려졌다.
“어?”
그런데 계단을 반쯤 올랐을 무렵, 디아나가 갑자기 멈추었다. 석문이 열리는 모습을 부단히 좇던 눈길마저 얼마간 떨어진 사람에게 못 박혔다.
그는 한눈에도 시선이 몰리는 사람이었다. 20년 만의 무더위라는 이 한여름에 새카만 로브를 뒤집어쓴 모습이라면 누구라도 경악하여 돌아볼 것이었다. 디아나도 처음에는 그 유별난 차림에 시선이 갔지만, 오래지 않아 그뿐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깊게 눌러쓴 로브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으레 마법사가 그러하듯 창백했다. 하지만 얼핏 보이는 까만 머리나 내려뜬 녹안은 부정할 수 없는 자일스의 상징이었다. 또한 정체를 감추려 꽁꽁 싸맸음에도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짐작건대 제 아비를 빼닮아 보기 드물게 미려한 얼굴선 때문이었다.
세드릭 자일스.
디아나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졌다.
세드릭은 오킹엄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잖아도 계약이 끝나기 무섭게 바바라 자일스가 머무는 페어퍼드로 쉼 없이 비행했는데, 그 페어퍼드에서도 거의 쫓겨나듯 출발한 터라 다시 오킹엄까지 기나긴 비행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사흘은 하늘에서 보내는 시간이 땅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곱절은 많았으므로, 반송장으로 왕도에 달한 세드릭이 온종일 잠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튿날, 세드릭은 우선적으로 저택을 손보기 시작했다. 시내에 위치한 저택은 가문의 명성만큼이나 웅장했지만,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되어 녹슨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주인에게 유독 집착하는 용 때문에 아직 시종도 들이지 못한 세드릭은 하는 수없이 스스로 저택을 수리하고 청소했다.
물론 빗자루며 걸레며 전부 마법으로 움직이긴 했으나, 오랜 비행으로 몸이 축난 세드릭에겐 그조차 거치적거리는 일이었다. 결국 위층은 열어 보지도 못하고 청소는 끝났다.
다음 날은 미완성의 스노우볼을 마저 제작해야 했다. 본디 용이란 사납고 탐욕스러운 종족이기에, 아무리 주인에게 메였다 한들 늘 탈주를 일삼는 아주 제멋대로인 짐승이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지난 2년 국경에서 구르며 용을 교련했던 세드릭은 용의 변덕을 좌시할 의사가 조금도 없었다. 더구나 인적 드문 국경이라면 몰라도 오킹엄에서 용을 기르기란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서 고안한 묘안이 바로 스노우볼이었다.
흔히 스노우볼이란 유리구슬에 자그마한 마을이나 나무가 삽입된 미니어처 장식품을 말했다. 하지만 세드릭은 유리구슬에 미니어처 마을을 집어넣는 대신, 유리구슬 내부의 소세계(小世界)와 동부의 무인도를 연결할 셈이었다. 자일스 가문이 소유한 동부의 무인도는 야생동물과 열대과실이 많은 곳으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으니 물을 유난히 무서워하는 용을 안전히 가두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세드릭은 그렇게 꼬박 하루를 걸려 스노우볼을 완성한 이후에야 채스터티가 건넨 쪽지를 펼쳐 볼 여유가 생겼다.
「오킹엄시(市) 노스비어스구(區) 리치먼드가(街) 94―4」
물끄러미 주소를 쳐다보던 세드릭은 종이를 펼쳐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펜은 거침없을 때도, 한참 머뭇거릴 때도 있었다. 완성된 편지는 고작 서너 줄에 불과했지만, 그 하나를 위해 희생된 종이는 무려 수십 장이었다.
남은 나날은 답장을 기다리며 조용하게 지냈다. 으레 마법사가 그러하듯 세드릭은 요란스러운 것을 질색했으므로, 친족에게 자신의 귀환을 애써 알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알리지 않아도 자연스레 퍼져 나갈 소식이었다. 그리고 소식이 웬만큼 퍼지면 가문이 다시금 소란해질 터.
세드릭은 자신의 이름이 친족과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반기지 않았고, 그렇잖아도 심신 미령한 어머니에게 더한 부담을 안겨 주고 싶지도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은 의외로 빠르게 흘러갔다. 고목처럼 오랜 시간 제자리를 지켜 온 저택은 시끄럽고 활기찬 거리와는 사뭇 단절된 듯했다. 세드릭은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별을 관측하며 지루하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간간히 소식 없는 정문을 쳐다보기도 했으나, 주인이 오래 버려두었던 저택은 이미 손님의 발걸음이 끊긴 지 오래였다.
오킹엄에 도착한 지 열흘째 되던 날. 세드릭은 마침내 답장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2년 전, 국왕과 장기 계약을 맺고 국경으로 떠나기 직전 그리 대차게 다투었으니, 답장이 오지 않을 만도 했다. 그럼에도 세드릭이 편지를 보낸 것은 행여나 헤스터가 편지를 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의 발로였다. 다행히 그는 헤스터 솔과 제법 괜찮은 사이였다. 일주일이 되도록 감감무소식인 걸 보면, 편지는 일찌감치 디아나의 손아귀에서 흔적 없이 태워졌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세드릭은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답장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을뿐더러, 답장이 온들 욕설로 가득하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솔 자매의 주소를 알고 있었다. 바로 찾아가지 않고 편지를 보내 양해를 구한 것은 그저 마법 사회에서 집이 가지는 함의를 고려하여 내린 판단이었을 뿐이다.
세드릭은 느른하게 몸을 일으켰다. 오킹엄에 도착한 이후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으니, 장장 열흘 만의 외출이었다. 사시사철 서늘한 저택과 달리 오킹엄의 여름은 무덥고 뜨거웠다. 모두가 팔을 드러내고 부채를 부치는 동안, 세드릭은 긴 옷에 검은 로브까지 걸치고서 거리를 걸었다. 행인들이 뜨악하는 것과 달리 세드릭은 변함없이 창백한 안색이었다. 심지어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세드릭이 향한 곳은 로엔그렌 궁전이었다. 오늘은 마법공회가 열리는 날로, 2년여 만에 오킹엄으로 돌아온 헤스터 솔은 분명 마법공회에 참석할 것이었다. 또한 8월 초일인 만큼 디아나는 접견실에서 정식 마녀가 되기 위한 서약서를 작성하고 있을 터.
정오쯤 공회당에 도착한 세드릭은 로브를 더욱 깊게 눌러쓴 채 석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디아나를 만나야 했다. 다만 그녀와 ‘정상적으로’ 대화하기 위해선 잠시나마 헤스터가 함께해야 했기에 일단 헤스터와 이야기를 나누어 볼 작정이었다. 그러다가 디아나와 마주쳐도 좋았고 설사 마주치지 않더라도 좋았다. 어차피 세드릭의 목표는 저녁 약속을 잡는 것뿐이었다.
오래지 않아 석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세드릭은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헤스터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불운하게도 마법공회에는 자일스 가문의 많은 원로가 참석하는 만큼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세드릭은 자기만 보면 아비의 핏줄을 운운하는 친족을 몹시 싫어했다. 여기 왔다는 걸 들켰다간 거의 결정된 후계 자리를 두고 또다시 공방이 벌어질 테고, 야속한 그의 어머니는 늘 그래 왔듯 친아들을 감싸 주지 않을 터였다.
수십 마리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파란 영양을 비롯한 짐승들이 빠르게 석문을 빠져나갔다. 뒤이어 느긋하게 나오는 이들은 드물게도 직접 공회당에 나타난 마녀?마법사들이었다. 세드릭은 그들을 눈으로 훑으며 헤스터를 찾아 헤맸다.
그런데 불현듯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세드릭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쏟아지는 불볕 아래, 빛 받아 하얗게 바스러지는 붉은 머리가 별안간 시야로 밀려들었다.
세드릭은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길게 기른 붉은 머리, 으레 마녀들이 그러하듯 창백한 얼굴, 자그마한 키에 찌푸려진 잿빛 눈. 디아나는 2년 전과 비교해 별반 달라진 점이 없었다. 작별할 때와 마찬가지로 일그러진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
세드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디아나, 디아나 솔. 무려 2년간 부르지 못했던 이름이다. 그는 입 안에서만 굴려 왔던 이름에게 소리를 찾아 주어야 했다.
그때, 디아나의 입가에 일순 미소가 감돌았다. 세드릭은 착각인 줄만 알고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새 디아나는 환히 낯꽃 피운 채 열렬히 이편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차츰차츰 가까워지는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만연했다.
그리고 스쳐 지나갔다.
“언니!”
들어 본 적 없는 환희가 파도처럼 그를 쓸고 지나갔다.
그제야 세드릭은 아주 느리게 숨을 뱉어 냈다.
공회당을 빠져나오던 헤스터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눈가를 침범하는 불볕에 잠시간 찡그리긴 했어도, 사랑하는 동생의 부름이니 미소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디아나.”
헤스터는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디아나를 반겼다.
“서약은 잘 마쳤니?”
“그럼. 별거 아니던데, 뭐.”
디아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이번 서약은 약식이고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정식 절차를 밟을 거라던데, 정말이야?”
“응. 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발푸르기스의 밤 주최자들이 모두 마련해 놓을 테니까.”
“뭐, 그렇다면야.”
쉬이 납득한 디아나가 얼른 헤스터의 손을 잡아끌었다.
“너무 덥지? 빨리 집에 가자.”
유난히 서두르는 디아나의 모습에도 헤스터는 그저 동생이 더위에 약하구나 하고 여길 뿐이었다. 그래서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헤스터는 문득 한여름에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발견했다. 그를 한눈에 알아보진 못했지만, 세드릭이 때마침 얼굴 가리던 후드를 벗어서 반갑게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세드릭 자일스 경.”
헤스터가 엷게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세드릭 역시 차분한 미소를 뗬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세상에, 왕궁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바바라 자일스 경을 만나러 왔나요?”
“아니요. 그렇다기 보단…….”
세드릭의 시선이 느릿하게 사선으로 미끄러졌다. 멀찍이서 머뭇거리던 디아나는 일순 세드릭과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움찔거렸다.
어울리지 않게 말을 흐리는 세드릭을 조금 의아하게 쳐다보던 헤스터가 그의 시선을 깨닫고는 환하게 웃었다.
“디아나. 너도 세드릭 경은 오래간만에 보겠구나. 어서 인사하렴.”
“으응…….”
애써 웃어 보인 디아나는 곧장 표정을 굳히며 세드릭을 쏘아보았다. 언니가 곁에서 듣고 있음을 잘 알면서도 어쩐지 입 밖으로 나오는 음성은 꽤나 날카로웠다.
“여기까진 웬일이야?”
말소리에 돋친 가시를 기민한 그가 놓쳤을 리 없건만, 세드릭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질 때쯤, 세드릭은 아주 자연스럽게 헤스터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일주일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지요?”
편지.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화제로 오르자 디아나는 내심 심장이 덜컹거리는 줄만 알았다. 며칠 전 디아나는 언니에게 답장했노라, 세드릭이 최근 바빠졌다며 일방적으로 약속을 미루었노라 아주 뻔뻔한 거짓말을 했었다.
“요새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요?”
헤스터는 동생이 거짓을 고한 줄 꿈에도 모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세드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반문했다.
“제가요?”
“분명 디아나가 그런 답장을 받았다고…….”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히 디아나에게로 모였다. 디아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뒷목을 적시는 것이 뙤약볕에서 비롯된 땀인지, 아니면 긴장에서 비롯된 식은땀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때, 세드릭이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예. 요즘 용에게 둥지를 만들어 주느라 조금 바빴습니다.”
응? 디아나는 시선을 내리깐 채 혼란에 휩싸였다.
“참, 저도 그게 궁금했습니다. 오킹엄 같은 대도시에서 용을 기를 수는 없을 테니, 무슨 방안을 고안했나 해서요.”
“다음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집에 두고 나와서.”
세드릭은 이젠 차분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 편하신 시간을 다시 여쭈어도 될까요? 저는 당분간 쉴 예정이라 한가합니다.”
“그럼 저는…….”
잠시 고민하던 헤스터가 말했다.
“이번 주말도 괜찮아요.”
“토요일 저녁으로 할까요?”
“디아나, 너도 이번 토요일 괜찮지?”
갑자기 대화의 화살이 디아나를 향했다. 오가는 말을 멍하니 주워듣던 디아나가 퍼뜩 놀랐다.
“뭐? 토요일?”
“응. 토요일 저녁에.”
디아나는 가까스로 입술을 끌어 올렸다. 마음속으로는 절대로 싫다고, 언제든 싫다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럼. 나야 남는 게 시간인걸.”
하지만 입으로는 그리 종알거릴 수밖에 없었다. 디아나는 오늘 막 잉그람 마법 명부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 마녀였다. 근래 구제할 길 없이 한가로운 백수였다는 사실은 헤스터가 가장 잘 알기에 바쁘다는 핑계조차 댈 수 없었다.
하지만 저 뱀 새끼와 마주 앉아 식사해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디아나가 그리 고여 드는 자괴감에 허우적대는 동안, 헤스터와 세드릭은 화기애애한 작별 인사를 주고받았다.
“토요일 저녁 6시에 앰브로즈 광장에서 뵙겠습니다.”
“예.”
세드릭의 시선이 이번엔 디아나를 향했다. 예기치 않게 눈이 마주친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것은 세드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헤스터와 대화하는 내내 입가에 걸려 있던 가증스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남은 것은 디아나도 익히 잘 아는 기묘한 무표정이었다.
“다음에 보자.”
물끄러미 디아나를 보던 세드릭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별스럽지 않은 인사였지만, 디아나는 못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흘겨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수상쩍어.
그늘을 골라 걸으며 디아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다른 마법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녀가 아는 세드릭 자일스는 이유 없이 남에게 선행을 베푸는 이가 아니었다. 세드릭이 그녀의 거짓말에 동조해 준 덕분에 순탄히 넘어갔으나 디아나로선 영 꺼림칙한 기분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람.’
디아나는 열심히 불평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당최 헤아릴 수 없는 시커먼 속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참, 디아나. 아침에 보니까 계란이 다 떨어졌더라. 잠깐 가게에 들를까?”
디아나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란은 의심할 여지없는 필수품이었다. 도무지 요리에는 재능이 없는 자매가 다양하게 요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식재료였기 때문이다.
“그럼 식료품 가게에 가서―”
“언니. 우리 그러지 말고 시장으로 가자.”
별안간 디아나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시장?”
“며칠 전에 카페 종업원한테 들었는데 동네 가게는 덤터기를 많이 씌운대. 시장에서 사는 게 훨씬 싸다고 했어.”
아파트 1층 카페. 디아나가 새로운 카페를 개척하기 꺼려 하여 부득불 종업원의 수다를 견뎌 낸 보람이 있었다. 수다쟁이 종업원은 이렇듯 아주 가끔씩 괜찮은 정보를 건네곤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시장으로 향했다. 두어 번 길을 잃긴 했어도 무더위에 완전히 지치기 전에 겨우 당도했다. 자매는 안도하며 바글바글한 한낮의 시장으로 들어섰다.
“예쁜 아가씨! 오늘 저녁에 생선 어때요, 여기 신선한 연어가 나왔는데!”
“연어는 무슨. 자고로 여름에는 닭이지!”
“얼씨구. 칼도 제대로 못 잡게 생긴 아가씨들이 닭을 어떻게 손질하려고? 자자, 과일이나 사 가요. 사과 색깔 좀 봐, 탐스러운 게 아가씨들이랑 딱 어울리겠어.”
하지만 시장이 이렇게 시끄러울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계란만 사면 돼요.”
“계란만 뭐. 설마 계란만 먹으려고? 에이, 여기 베이컨은 어때?”
“베이컨은 있어요.”
“그래? 그래도 사 봐. 우리 베이컨은 다른 데랑 질이 다르다니까.”
“질이 다른 건 우리 사과겠지. 아가씨들, 사과 어때? 응?”
“아니, 그러니까 우리는…….”
호객 행위에 면역 없는 자매는 금세 노련한 시장 상인들의 표적이 되었다. 디아나는 숫제 싸울 것처럼 달려드는 상인에게 식겁하여 얼른 헤스터의 등 뒤로 숨었다. 덕분에 홀로 맞서게 된 헤스터는 눈이 팽팽 돌 지경이었다.
결국 상인들의 손에 한바탕 휘둘리고서 겨우 빠져나온 자매의 양손에는 종이봉투가 가득 들려 있었다. 물론 계란만 든 것은 아니었다.
“……디아나. 우리 앞으로는 그냥 가게에서 사자.”
“……그러자.”
디아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계란에 과일에 고기에 야채에, 아주 가관이었다. 감언이설에 넘어가서는 돈을 아주 많이 써 버리고 말았다. 본디 채스터티로부터 수전노란 말을 들을 정도로 돈을 귀히 여겼던 디아나는 예상외의 지출이 몹시 뼈아팠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써 버리고 만 것을. 그리 포기하려던 디아나의 낯빛이 삽시에 돌변했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이 돈이 어떤 돈인데. 언니의 피땀으로 간신히 긁어모은 돈인데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쓸 수는 없다. 그럼 어쩌지. 돌아가서 환불해 달라고 할까? 한데 그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과연 순순히 환불을 해 주려고?
불현듯 머리에서 낯선 손길이 느껴졌다. 디아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니?”
헤스터가 수줍게 웃고 있었다. 디아나가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헤스터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가리켰다. 디아나는 봉투를 바닥에 잠시 내려놓곤 헤스터의 손짓을 따라 머리를 매만졌다.
“어?”
손끝에서 느껴지는 자그마한 금속. 영 서투른 손길로 빼내 눈앞으로 가져오니,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디아나의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머리핀이잖아.”
“선물이야.”
“선물? 내 선물?”
디아나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거듭 물었다. 헤스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오늘 서약했잖아. 일생에 하루뿐인 날인데 이렇게나마 축하받아야지.”
“하지만…….”
이런 데 영 익숙하지 못한 디아나가 당황을 채 갈무리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자 헤스터가 걱정스럽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니? 다른 걸로 사 줄까?”
“……아냐. 전혀 아냐. 마음에 들고말고.”
디아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혼란스럽고 벅차오르는 감정이 가슴을 간질일 뿐이었다.
“고마워, 언니.”
헤스터는 지금까지 디아나에게 우편으로 많은 선물을 보내왔다. 때로는 귀한 서적이고, 때로는 먼 지방의 특산물이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 어떤 선물보다도 이번에 받은 자그마한 핀이 소중했다. 이것이야말로 언니로부터 직접 건네받은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고마워.”
진심 어린 감사에 헤스터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꽃피었다. 디아나마저 전염되어 웃을 수밖에 없는, 순수하게 기쁨으로 충만한 미소였다.
디아나는 생각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언니와 함께하고 싶다고. 그걸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다고.
* * *
이튿날.
느지막이 일어나 유령처럼 집을 배회하던 디아나는 우연히 바닥에서 명함을 발견했다.
“이건 뭐야.”
아직 졸음기 채 가시지 않은 뇌가 천천히 어제의 기억을 되감았다. 시장에 다녀왔고, 망할 뱀 새끼를 만났고, 궁정마녀와 서약했고, 길을 잃었고, 알피어스 가문의 마법사를 만났고…….
아 참. 외알 안경을 쓴 알피어스 가문의 마법사와 당최 동력을 알 수 없는 기계 새. 그 마법사는 기계 새에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디아나에게 명함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뒤로 뱀 새끼와 마주치고 언니에게서 선물을 받는 등 정신없이 하루를 보낸 덕에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심지어는 명함을 떨어트린 줄도 모르고 있었다.
디아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명함을 읽었다. 마법과 기계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조합이었다. 어쩌면 한계가 명확한 그녀의 마법에 돌파구가 되어 줄지도 몰랐다.
“오킹엄시 이스트테더구 해링턴가 186B……. 올리버 펜리? 응?”
터무니없이 익숙한 이름에 디아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올리버 펜리였다. 만일 명함의 주인이 그녀가 아는 올리버 펜리가 맞다면,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기차에서 보았기로 올리버는 괴이할 만치 마법 사회를 잘 알았으나, 그 자신은 절대로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마법사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마법 연구를 진행한단 말인가.
디아나는 찌푸린 얼굴로 명함을 노려보았다. 일단 명함에 적힌 주소를 찾아가 봐야겠다. 만일 그녀가 아는 올리버 펜리가 맞다면 경위를 캐물으면 될 것이고, 동명이인이라면 별문제 없었다.
명함을 건넨 알피어스 가문의 마법사는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디아나는 제법 감이 좋은 편이었다.
빵 몇 조각으로 급히 식사하고 나왔을 무렵엔 이미 해가 중천에 오른 정오였다. 지난 경험으로 오킹엄의 뙤약볕을 맨눈으로 상대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디아나는 특별히 챙이 넓은 모자를 준비해 왔다. 더위는 여전했지만, 눈부심은 한결 나았다.
명함에 적힌 주소는 걸어가기에는 꽤나 먼 거리였다. 하지만 마차를 타기에는 주머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디아나는 난생처음으로 전차란 것을 타 보기로 했다.
“출발합니다! 출발!”
구석구석 골목길로 이어진 동네 어귀로 나와 대로를 걷다 보면, 무섭게 질주하는 마차들과 그런 무질서한 마차조차 접근하지 못하는 철로가 있었다. 일찍이 오그, 벤네비스, 럼블던 등 이름난 대도시에서 거주한 적 있는 디아나는 저게 전차가 다니는 철로임은 익히 알았다. 하지만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아가씨, 탈 거예요? 탈 거면 빨리 타요!”
시끄러운 종소리와 승무원의 고함이 연이어 고막을 쨍쨍하게 울렸다. 사람으로 가득 들어찬 전차를 멀거니 쳐다보던 디아나는 자신을 지목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나요?”
“그래. 아가씨! 안 탈 거예요?”
승무원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도중에도 전차는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디아나가 식겁하여 전차에 올라탔다. 승무원에게 비용을 지불한 뒤 전차 안쪽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승객이 너무 많아서 자리에 앉긴커녕 입구에 달라붙어 있기만도 용했다.
덜컹덜컹. 차츰 속도를 더해 갈수록 전차는 무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광경도, 귓가를 스치는 바람도 디아나의 예민한 간을 데우기엔 족했다. 어찌어찌 기둥을 잡아 전차에서 굴러떨어지는 참사는 면했으나, 들썩이는 속을 가라앉히기엔 무리였다.
결국 목적지에 당도할 즈음엔 귀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낯빛이 핼쑥해졌다. 간신히 전차에서 내려 더는 흔들리지 않는 대지에 발을 디뎠을 때는, 3일 밤낮을 꼬박 새서 알레그로 정리를 이해했을 때만큼 환희가 몰려들었다.
그리도 빠르게 달리는 전차에 제대로 된 안전장치도 없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되었다. 디아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명함을 꺼내 들었다.
이스트테더구 해링턴가 186B. 일단 이스트테더구에 도착했으니 해링턴가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데 주변을 살펴보는 디아나의 낯에 금이 갔다.
내리쬐는 볕 아래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건물도, 사람도, 길도.
디아나는 멀거니 잿빛 도시를 바라보았다. 무거운 철근을 어깨에 이고 가는 노동자와, 무어라 고함치는 감독관. 기계 돌아가는 소음이 멀리서 전해지고, 매캐한 매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청명한 하늘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잿빛 연기에 가려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여기는 공업지구였다.
“누구 찾소?”
문득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품은 디아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검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사내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멀찍이 서 있었다.
“그리 긴장할 필요는 없수다. 웬 어린 아가씨가 가만히 있어서 물어본 것뿐이니.”
“……해링턴가를 찾고 있는데요.”
디아나는 망설이며 말문을 열었다.
“해링턴가? 이쪽으로 두 블록만 더 가면 나올 거요. 그런데 거긴 왜?”
“그냥……. 혹시 위험한 곳이에요?”
“위험할 게 뭐 있겠소. 다만 거기 공장주는 외국인이 많아서 물어본 거요. 아가씨 생김새가 그네들이랑은 좀 다르지 않소.”
말을 마친 사내는 감사 인사도 듣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제자리서 머뭇거리던 디아나도 오래지 않아 걸음을 옮겼다.
사내의 말대로 두 블록을 더 가니 해링턴 거리가 나왔다. 하지만 외국인 공장주 운운했던 것과 달리, 여기나 거기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여전히 시끄럽고 매캐한 잿빛 도시일 뿐이었다.
디아나는 거기서 길을 물어 명함의 주소지를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위압적일 만치 커다란 공장.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계와 사람들을 흘깃거리던 디아나는 마침 곁을 지나가는 일꾼을 붙잡았다.
“저. 올리버 펜리 씨를 찾아왔는데요.”
“사장님을요?”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디아나를 공장으로 이끌었다. 디아나는 공연히 모자를 눌러썼다. 주변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며 쑥덕이는 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디아나가 안내받은 곳은 공장 내부의 사무실이었다. 책상이나 의자가 깔끔하게 배치된 그곳은 마냥 어지럽던 공장과는 사뭇 단절된 느낌이었다.
“사장님을 찾아오셨다고요.”
커다란 안경을 쓴 여자가 구두를 또각거리며 다가왔다. 디아나는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잡으셨나요?”
“아뇨. 다른 사람에게 소개받아서 왔어요.”
디아나는 그리 말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하지만 여자는 명함을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누가 소개해 주셨죠?”
“그게…….”
디아나가 말을 흐렸다. 그녀는 마법사의 이름을 몰랐다. 그저 외모적인 특징으로 알피어스 가문의 마법사려니 짐작했을 뿐이다.
“약속을 잡으신 것도 아니고, 소개해 주신 분의 이름도 알려 주지 않으시고. 그럼 당장 사장님을 뵈실 수는 없겠어요.”
“자, 잠시만요!”
다급하게 외친 디아나가 지갑을 뒤지기 시작했다. 두어 달 전, 병원에 입원했을 때 올리버가 병문안을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 명함을 주었는데. 만일 여기 사장이라는 사람이 그녀가 아는 올리버 펜리라면 이보다 좋은 패가 없었다.
마침내 디아나는 꼬깃꼬깃한 명함을 찾아냈다.
“펜리 씨가 직접 건네준 명함인데……. 여기 사장님이 이 사람 맞죠?”
눈을 찌푸리고 명함을 들여다보던 여자가 조금 놀란 눈치로 디아나를 보았다.
“사장님의 지인이셨군요. 미리 언질을 주시지 그러셨어요.”
“예에…….”
디아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디아나는 올리버와 자신이 과연 지인이란 관계로 엮일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기차에서 함께 생사를 넘나들긴 했어도 어쨌든 올리버는 언니의 전 연인이었다. 근 한 달이 넘도록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니, 기차에서 품었던 동질감이 옅어질 만도 했다.
그사이 여자는 아까와 판이하게 달라진 공손한 태도로 커피까지 대접했다.
“죄송하지만 사장님께선 출타 중이세요. 어쩐 일로 오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그대로 전해 드릴게요.”
“그게, 실은 제가 마녀거든요.”
디아나는 괜스레 손가락을 얽었다. 지금까지 평범한 인간은 대체로 마녀란 소리에 질겁했는데, 눈앞의 여자는 지극히 차분했다.
마치 마녀를 많이 만나 본 것처럼.
“그럼 그 일로 오셨겠군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펠튼 씨! 그분 귀국하셨나요?”
“네? 그분이라니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인 책상에 코를 박고 있던 남자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파울 리버만 씨요.”
“아, 그분. 아마 저번 주에 돌아오셨을걸요?”
여자는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받고 보니 낯선 주소였다.
“전차를 타시면 여기서 30분 정도 걸릴 거예요. 찾아가 보세요.”
“예?”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또 낯선 동네로 찾아가라니. 디아나가 당황한 사이, 여자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저는 평범한 인간이에요. 물으셔도 대답해 드릴 수 없답니다. 대신 거기에 살고 계신 파울 리버만 씨가 잘 설명해 주실 테니 가까운 시일 내로 방문하세요. 초인종을 10번 정도 누르면 문을 열어 주실 겁니다.”
딩동. 딩동.
“저기요! 문 좀 열어 봐요!”
디아나는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문을 노려보았다.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초인종을 누르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 댔으나 전부 허사였다.
뭐? 초인종을 10번 정도 누르면 문을 열어 줄 거라고? 미처 세지는 못했지만, 초인종을 연달아 누른 횟수만도 족히 30번이 넘으리라 확신했다. 그럼에도 고요하기 짝이 없는 문짝이, 얼굴도 모르는 파울 리버만 씨가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디아나는 힘없이 벽에 기댔다. 초인종을 여러 번 눌러 보라는 여자의 말이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 아무도 없겠거니 싶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자의 충고를 새겨들은 탓에 벌써 20분이 넘도록 집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고, 이쯤 되니 여기까지 온 수고를 생각해서라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내가 무려 전차까지 타고 왔는데!’
디아나는 다시는 전차를 타지 않겠노라 결심한 지 고작 40분 만에 전차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만석인 전차에서 장장 30분을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도 전차를 타야 한다는 사실이 뼈저릴 뿐이었다.
그러니 오늘 어떻게든 끝장을 봐야 했다. 디아나는 이왕 나온 김에 모든 볼일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오늘 이후로 다시는 전차에 오르지 않겠다는 굳건한 다짐도 얼마간 영향을 끼쳤다.
분기를 되찾은 디아나가 드센 눈빛으로 문을 쏘아보았다. 안에 아무도 없다면 기다리면 되지만, 만에 하나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든 끌어내야 했다.
어떻게? 당연히 시끄러워서 못살게 해 줘야지.
디아나가 분연히 초인종을 난타하려던 찰나, 별안간 문이 홱 열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대체 누구야!”
간발에 차이로 문짝을 피한 디아나가 황망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에 삐죽삐죽 솟아난 턱수염. 아무래도 지금 일어난 듯 보이는 추레한 차림에 디아나의 눈이 금세 가늘어졌다.
“……파울 리버만 씨?”
“난데. 왜.”
“올리버 펜리 씨 소개로 왔는데요.”
파울은 그제야 잡상인 취급하던 시선을 내려 디아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적나라한 시선에 어쩐지 기분이 나빠진 디아나가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지금 아침 아니거든요?”
“해 떠 있으면 아침이지, 그럼 밤이냐.”
“하루에 아침과 밤만 있는 줄 알아요? 그리고 왜 다짜고짜 반말인데요?”
파울을 뒤따라 집으로 들어온 디아나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물론 파울은 그리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럼 아가씨도 나한테 반말하든가.”
디아나는 입을 비쭉였다. 그녀는 낯선 사람이 어려웠다. 낯선 이와 편안히 어울리는 것보단 차라리 가시를 세우는 편이 쉬웠다.
“으, 냄새.”
파울 리버만의 집은 몹시 더러웠다. 어느 정도냐면, 파울이 이 집에 들어온 이래 청소란 것을 단 한 번도 행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일단 이거라도 마시고 있어 봐. 물건 가지고 나올 테니까.”
파울은 그리 말하며 컵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긴 했으나, 디아나는 컵에 입을 댈 생각일랑 전혀 없었다. 육안으로는 그럭저럭 깨끗한 듯싶다가도, 이리 더럽고 퀴퀴한 집에 굴러다녔을 것을 생각하면 넙죽넙죽 주는 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파울이 잠시 사라진 동안, 디아나는 찬찬히 실내를 살펴보았다. 커튼으로 모조리 창을 가려 어두침침한 실내는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장치로 가득했다. 크기도 제각각, 모양도 제각각. 유일한 공통점은 죄다 먼지가 두텁게 쌓였다는 것이다.
근방의 기계를 손으로 쓸어 본 디아나는 그새 손가락에 달라붙은 먼지를 후 불어 내며 낯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여기 오래 머물다간 폐병으로 객사할 듯싶었다.
“비싼 기계니까 함부로 만지지 마.”
때마침 파울이 창고에서 나왔다. 디아나가 툴툴거리며 그편으로 다가갔다.
“그런 건 미리 말해야죠.”
“뭐 건드렸어?”
“아뇨.”
“그럼 다행이고.”
파울은 여러 기계장치를 탁자에서 분류하기 시작했다.
“어떤 게 필요한데?”
“……뭘 줄 수 있는데요?”
기계장치를 하나하나 설명해 주려는 듯 말문을 열던 파울이 멈칫하며 디아나를 보았다.
“그런데 돈은 있어?”
“돈…….”
디아나가 눈을 대록대록 굴렸다.
“얼마나 필요한데요?”
“그거야 아가씨가 뭘 원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가장 싼 게 얼마예요?”
“120갤런.”
“뭐, 뭐라고요? 120갤런?”
디아나가 대경하여 소리쳤다. 120갤런이면 자그마치 한 달 월세였다.
“왜 그렇게 비싸요?”
“세상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장치니까. 그보다 돈 없어?”
“……집에 있어요. 일단 오늘은 설명만 듣고 갈게요.”
파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디아나를 보았다. 디아나는 두꺼운 낯짝으로 시선을 모두 튕겨 내며 어서 설명하라는 듯 그를 재촉했다. 파울이 못내 미심쩍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일종의 마력 제어기(制御機)야. 커다란 마법을 다룰수록 마력이 불안정해지는 건 아가씨도 잘 알 테고. 그때마다 마력을 제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인데 그렇다고 너무 의지하다간 망가지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건 마법진 유지기(維持機). 과도하게 방출된 마력이 마법을 파괴하지 않도록 마법진 내에서만 마력이 순환하게끔 마법진을 붙잡아 주는 기계야. 그리고 여기 이거는 동물 형상으로 만든 기계인데 마력을 동력 삼아서 움직일 수 있어. 애완동물이나 집배원을 기르기 귀찮으면 나름대로 쓸모 있을 거다…….”
열없는 설명이 줄줄 이어졌다. 열심히 설명을 경청하던 디아나가 조금 망설이며 물었다.
“저기, 다른 건 없어요? 마력을 증가시키는 기계라거나.”
고저 없이 이어지던 파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불편한 정적이 잠시 흘렀다.
“……아가씨. 여기 좀 봐.”
오래지 않아 파울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기 컵이 두 개 있어. 내가 여기에 물을 가득 따라 볼게.”
파울이 기계장치를 한쪽으로 치우고 가져온 것은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컵이었다. 컵에는 곧 물이 가득 담겼다.
“어느 컵에 물이 더 많아?”
“당연히 여기죠.”
디아나는 커다란 컵을 가리켰다.
“마법사도 똑같아.”
“네?”
“애당초 컵의 크기가 작으면 많은 물을 담을 수 없어. 깨트리고 다시 만드는 수밖에 없지. 마법사도 매한가지란 건 아가씨도 이미 알고 있잖아.”
디아나가 그저 가만히 컵만 쳐다보았다. 파울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가리켰다.
“마법사의 신체는 그릇이야. 별의 축복을 받고 태어나 별의 마력을 담는 그릇이지. 마력을 얼마나 담을 수 있는가는, 여기 있는 컵처럼 날 때부터 정해진 한계에 달렸어. 그리고 본연의 한계는 아무리 현명한 마법사도, 아무리 뛰어난 인간의 기술로도 바꿀 수 없어.”
“바꿀 수 없다고요?”
“그래.”
“무슨 수로도?”
“안 돼.”
디아나가 입술을 짓씹으며 속삭였다.
“그럼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예요?”
파울이 어둡게 침잠한 눈으로 디아나를 보았다. 그는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컵을 디아나에게로 밀며 작은 컵에 입술을 붙였다.
“죽도록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게 있지.”
마치 자조하듯 쓸쓸한 목소리였다.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돌연 파울이 마구잡이로 뒷머리를 헤집었다.
“이봐, 아가씨.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아냐? 내가 뭐 조물주도 아니고 도대체 뭘 기대하고 온 거야? 올리버가 허황된 바람을 넣었을 리는 없는데.”
그럼에도 디아나는 미동조차 없었다. 푹 수그린 얼굴이 보이지는 않아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대강 짐작이 되었다. 그래서 파울은 좀처럼 디아나를 외면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떡하냐. 주어진 대로 살아야지. 노력으로도 안 되는 일은 그냥 포기하는 게 맘 편해.”
“…….”
“아, 진짜. 올리버 그 새끼는 왜 이런 애를 보낸 거야.”
파울이 심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가 작게 혀를 차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디아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이만 가 볼게요.”
“잠깐만! 아가씨!”
파울이 빠르게 지나가는 디아나를 황급히 붙들었다.
“그렇게 가면 내가 찝찝하잖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어떻게 그렇게 되냐……. 일단 앉아 봐. 어차피 아는 얘기면서 왜 그리 죽상이야. 일단 얼굴 좀 펴고, 응? 내가 진짜 웬만해선 남한테 이런 말 안 하는데, 아가씨는 그래도 마녀잖아. 마녀로 태어난 것만도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데. 아가씨가 아직 어려서 그렇지 조금 더 살다 보면 적성에 맞는 일도 찾을 거야. 마력이 적으면 어때. 마법의 성패가 마력의 총량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닌―”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디아나가 일갈했다. 파울이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흐트러진 붉은 머리채 사이로 여린 목소리가 드문드문 흘러나왔다.
“당신이 대체 뭘 안다고…….”
어느샌가 디아나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파울은 망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한참 머뭇거린 뒤로 씁쓰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안하다. 내가 괜한 말을 해선. 나는 그저……. 젠장, 오랜만에 길게 말하려니까 영 이상하네.”
파울이 멋쩍게 말했다.
“내 아버지는 마법사야.”
그에 디아나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당신은.”
“오, 알아차렸네. 마력에 예민한가 봐.”
파울이 가볍게 웃었다.
“그래. 나는 마법사가 아니지. 반제에선 나 같은 사람을 속된 말로 튀기라고 하는데 잉그람에선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마법사의 자질은 대개 혈통으로 이어졌다. 유명한 마법 가문에서 특출한 마법사를 많이 배출하는 것도 바로 그런 연유였다. 훌륭한 혈통에 잠재된 재능이 그대로 자식에게 전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녀?마법사를 부모로 두고서도 별의 축복을 받지 못한 불운한 아이들이 있었다. 평범한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마법사가 있는 것과는 반대로.
“하룻밤에 생긴 아이었지. 어머니는 갓난애였던 나를 아버지 집 앞에 버리고 갔다고 해. 아버지는 당연히 내가 마법사인 줄 알고 길렀던 모양이야. 우리 아버지는 아가씨처럼 마력에 예민하지 못했거든. 그런데 애가 아무리 자라도 마법을 못 쓰니, 그제야 아 내가 병신을 길렀구나 싶었던 거지.”
파울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냥불이 방을 화르륵 밝히다가 금세 꺼졌다.
“아버지라고도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 내가 튀기인 걸 알고서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으니까. 나는 아들이기보다 시종에 가까웠지만, 뭐 그렇다고 이제 와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아. 그래도 그 집에서 마법에 대해 꽤 깊게 공부했거든. 물론 이론적으로만. 그러니까 완전히는 몰라도 대강은 알아. 마법사란 작자들이 어떤지. 마법 사회가 어떤 곳인지. 지금 아가씨의 심정이 어떤지도. 나도 마법사가 아니란 걸 알았을 때 굉장히 좌절했으니까.”
한숨처럼 뱉은 담배 연기가 몽글몽글 퍼져 나갔다. 파울은 디아나에게로 향하던 연기를 손짓으로 흩트렸다.
“아깐 내가 너무 서툴게 위로했지. 이해해라. 내가 마법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법사처럼 자란 사람이야. 살면서 몇 번이나 남을 위로했겠어. 다만 아가씨를 위로해 주고 싶었던 마음만은 진짜야. 나도 위로받고 싶을 때가 있었고 아버지에게서 위로를 바란 적이 있었지만, 야속하게도 서툰 위로조차 받지 못했으니까.”
디아나는 멀거니 파울을 쳐다보았다. 파울이 열없이 웃어 보였다.
“그저 마녀로 태어났단 사실에 감사하란 말은 안 할게. 그건 아가씨에게 너무 잔인할 테니까. 하지만 아가씨가 손쓸 수 없는 일에 너무 목메지는 마. 노력으로도 안 되는데 어쩔 거야. 이렇게 낳아 준 부모한테 따질 거야, 아니면 조금만 축복해 준 별을 욕할 거야. 잘난 놈은 잘난 대로 살게 놔두고 아가씨는 아가씨의 길을 가야지. 튀기인 나도 이렇게나마 주워들은 지식으로 먹고 사는데, 아가씨라고 괜찮은 재능 하나 없을까 봐.”
파울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디아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물론 하루 이틀 우울할 수는 있어. 하지만 너무 빠지지는 마. 그러다간 헤어나지 못할 테니.”
디아나는 멍하니 거리를 걸었다. 먹구름이 빠르게 밀려오는 바람에 거리에 나다니는 사람들이 죄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디아나만은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좀 전의 대화를 되짚고 있었다.
‘잘난 놈은 잘난 대로 살게 놔두고, 아가씨는 아가씨의 길을 가야지.’
디아나도 그게 정답임을 알았다. 다룰 수 있는 마력이 날 때부터 정해진다는 것도, 그건 죽어야만 바뀌는 섭리란 것도, 그게 바로 재능의 차이란 것도. 행여나 인간의 기술로 조금이나마 한계치를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기대는 한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인간의 하찮은 기술로 무얼 할 수 있겠냐며 도닥이던 것이 무색할 만치. 디아나는 그제야 이번 방문을 내심 기대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옛날에 포기한 줄 알았는데.
디아나는 쓰게 웃었다. 새삼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못났다.
“좋겠다, 다들.”
언니도, 세드릭도, 채스터티도.
남부럽지 않은 재능을 타고 나서. 남부럽지 않게 멋있는 미래를 꿈꿀 수 있어서.
디아나는 어릴 적부터 특출한 마녀?마법사 틈바구니에서 자라났다. 세드릭은 가르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마법을 행하는 천재였고, 채스터티는 미래를 보는 꿈을 꾸었다. 하물며 하나뿐인 언니는 위대한 마녀 그리젤다 솔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은 강고한 마녀였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게 문제인지도 몰랐다. 다들 잘났는데 혼자만 못난 것이.
뚝. 뚝뚝.
어느덧 어두워진 거리에 빗방울이 한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로 솟은 얼굴에 빗방울이 점점이 번져 갔다. 부지불식간에 굵어진 빗줄이 모든 잡념을 씻어 버리듯 깨끗이 쓸고 지나갔다.
디아나는 오래도록 비 오는 거리에 서 있었다. 다시금 헛된 희망을 포기할 수 있도록. 그리해 오늘 하루만 우울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