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봄의 끝자락에서
노란 장미 만개한 초여름의 오킹엄.
올 들어 유난히 잠잠했던 왕도에 오래간만의 대어가 밀려들었다. 아크라이트 왕가에 반기를 들었던 잉그람 무장 혁명군의 부활과 기차 점거, 정체불명 마법사의 손에 죽어 간 23명의 군인, 겨울의 마법사 휴고 알피어스가 늦봄에 겨울을 불러온 것으로 모자라 성좌의 마녀 헤스터 솔이 피워 낸 기적…….
하지만 대중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었다. 위대한 마녀 그리젤다 솔의 숨겨진 딸이요, 인질로 잡혔다가 끝내 잔악한 마법사를 저지한 어린 마녀. 바로 디아나 솔이었다.
그에 특종을 노리는 황색 신문들이 그녀의 정체를 캐기 시작했다. 마법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녀로 손꼽히는 그리젤다 솔은 수많은 기행으로 몹시 유명했다. 기실 헤스터 솔이 어린 나이에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도 팔 할은 어머니의 명성 덕분이니, 지금까지 감춰졌던 그리젤다 솔의 차녀에게로 대중의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제 막 도제 신분을 벗어난 어린 마녀를 캐내기가 쉬울 리 없었다. 기자들은 디아나 솔이 여명의 마녀, 바바라 자일스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알아냈으나,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바바라 자일스의 거취를 찾아내서 제자에 대해 묻는 것은 더욱 지난한 일이었다.
따라서 기자들의 조사 방향은 디아나 솔의 감춰진 배경에서 현재 거취로 틀어졌다. 헤스터 솔이 왕도 오킹엄에 머물고 있으니, 동생인 디아나 솔도 함께 지내리라는 썩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그리해 모든 일간지가 추측성 기사만 무수히 쏟아 내던 때, 어느 일보에 디아나 솔의 사진이 처음으로 실렸다. 비록 먼 곳에서 찍은 흑백사진이라 이목구비를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사진 기사는 디아나 솔이 현재 어디에 머무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기자들은 인쇄 상태가 조악하여 흐릿하기 짝이 없는 사진에 매달렸다. 3일 밤낮으로 오킹엄을 수소문한 끝에 디아나 솔이 모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나, 풍비박산 난 소규모 신문사에 대한 풍문도 거의 동시에 돌았다.
누구는 사무실이 무너졌다고도 하고, 누구는 신문사 사장이 목숨을 내걸고 빌었다고도 전해지는 무시무시한 소문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헤스터 솔이었다. 평소 차분하기 그지없는 성좌의 마녀가 감히 자매를 도촬한 죄를 아주 엄중히 물었다는 것이다.
결국 기자들은 깔끔하게 디아나 솔을 포기했다.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기자답지 않은 태도였으나, 그들도 명줄 아까운 줄은 알았다.
국적을 막론하고 모든 언론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규칙이 하나 있으니.
마녀는 건들지 마라.
인간의 빛나는 이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마녀의 힘을 경계한 까닭이었다.
“……이게 나란 말이야?”
왕립 세인트 아가사 병원. 그중에서 가장 넓고 훌륭한 병실을 차지한 디아나가 눈썹을 찡그렸다.
“어딜 봐서? 하나도 안 닮았잖아.”
“뭐어, 나름대로 닮은 것 같지 않니?”
채스터티가 초콜릿을 집어먹던 손으로 사진 속 소녀의 머리를 가리켰다.
“여기. 머리가 산발이란 점이.”
“내, 내가 언제 산발이었다고!”
디아나가 다급히 대꾸하며 괜스레 머리를 매만졌다. 채스터티는 턱을 괸 채 소리 죽여 웃었다.
“세드릭이 그리도 오고 싶어 하는 걸 어머니께서 겨우 말리셨는데. 그 애가 지금 네 꼴을 봤으면 아주 볼만했겠어.”
“……세드릭? 걔가 여길 왜 오는데?”
디아나의 표정이 금세 불편해졌다. 채스터티가 혀를 차며 종알댔다.
“불쌍한 우리 막내. 이걸 어쩌면 좋담.”
“불쌍해? 너 지금 내 앞에서 그 뱀 새끼 불쌍하다는 소리가 나와?”
“아유, 귀여운 디아나. 이 언니가 다친 너를 헤아려 주지 않아서 삐졌니?”
“뭐, 뭐라고?”
디아나가 기겁하며 채스터티의 손길을 피했다.
“내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란 건 너도 잘 알잖……. 아니, 그보다 너 오늘 왜 이래? 뭐 이상한 약이라도 마신 거 아냐?”
“내가 이상해?”
채스터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태를 부리는 몸짓이지만, 디아나에겐 어림도 없었다.
“난데없이 병문안을 오질 않나, 웬일로 말짱한 선물을 사 오지를 않나. 아무래도 수상쩍어.”
“초콜릿이라면 옛날에도 자주 선물로 보내 줬는걸.”
“그건 위스키 봉봉이었잖아! 내가 그걸 먹고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알기나 해?”
재작년, 디아나는 채스터티가 선물로 보낸 초콜릿을 먹고 취한 적이 있었다. 난생처음 술에 취하여 어떤 추태를 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튿날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을 피해 다니던 세드릭의 모습을 상기하면 대강 짐작할 만했다.
“초콜릿은 맛있으면 되는 거지, 뭐.”
채스터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초콜릿을 하나 더 집어먹었다. 그런 채스터티를 못마땅하게 흘겨본 디아나가 재빨리 초콜릿 상자를 제 편으로 끌어왔다.
“이제 그만 먹어. 그러다간 우리 언니 먹을 건 하나도 안 남겠다.”
“치사하긴.”
채스터티가 입을 비쭉였다. 하지만 심통이 난 것도 잠시, 병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너의 각별하신 언니는 어디 계시니? 통 보이질 않네.”
“경찰이 와서 잠시 조사받으러 나갔어.”
“경찰이?”
채스터티가 눈을 빛냈다. 늘 가십에 목마른 그녀에게 이보다 더 재미난 일은 없을 터. 그러나 디아나는 초콜릿 상자의 리본을 예쁘게 묶으며 지극히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이른바 ‘펜잔스 참극’을 조사하러 왔다나 뭐라나. 범인이나 조사할 것이지 왜 생사람 잡는지 몰라.”
하여간 맘에 안 들어. 디아나가 불만스럽게 덧붙였다.
“그나저나 너는 왜 왔어? 혹시 이번에도 이상한 말 하려고 온 거면 썩 나가.”
디아나는 새삼 경계하듯 채스터티를 훑어보았다. 채스터티는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꼬며 공연히 시선을 피했다.
“이상한 말이라니. 무슨 소린지 당최 모르겠네.”
“네 예언 말이야. 저번에도 이상한 예언을 했잖아.”
“그게 왜 이상해? 어쨌든 내 말이 맞았잖아.”
“맞든 틀리든! 네 예언은 어쩜 그렇게 죄다 불길할 수가 있어? 혹시 나한테 악감정이라도 품었니?”
불신 가득한 목소리에 채스터티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바보야. 내가 정말 너한테 악감정이 있다면 그렇게 귀띔해 주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렴. 내 예언이 불길한 게 아니라, 그냥 네 앞날이 불길한 거 아닐까?”
“야!”
곧장 베개가 날아들었다. 채스터티는 마법으로 가볍게 베개를 튕겨 내며 깔깔 웃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진 너와 관련된 예지몽은 꾸지 않았단다. 그래서 내가 어젯밤에 점을 쳐 보았는데…….”
“그만, 그만 말해!”
디아나가 질겁하며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예언은 벌써 귓전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네 올해는 굉장히 다사다난할 거야. 지금부터라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려무나.”
나쁜 계집애. 못된 계집애. 아는 욕이란 욕은 죄 구시렁대던 찰나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헤스터가 돌아온 줄로 짐작한 디아나가 반색하며 고개를 틀었다.
“네. 들어오세요.”
하지만 문을 열고 등장한 사람은 헤스터가 아니었다. 디아나는 아연한 표정으로 문가를 보았다. 족히 오십 송이는 될 법한 장미 꽃다발이 간신히 문가를 통과하고 있었다.
“아가씨?”
꽃다발 옆으로 불쑥 고개를 내민 사람은 다름 아닌 올리버였다. 멍하니 앉아 있던 디아나가 다급히 그를 가리키며 외쳤다.
“올리버 펜리!”
“…….”
“……씨.”
디아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올리버는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장미 꽃다발을 한 아름 품에 안겨 주었다.
“바깥은 벌써 장미가 한창이야. 아직 못 봤지?”
“네에. 그렇죠.”
디아나는 어느새 풀어진 얼굴로 장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살면서 꽃을 각별하게 좋아한 적은 없지만, 병실에서 맞이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좀 쑤시기는 해도 그럭저럭 참을 만해요.”
“실밥은 아직 안 풀었지?”
“다다음주에 푼다는데 또 모르죠.”
슬그머니 문가의 기척을 살펴본 디아나가 올리버에게로 바짝 얼굴을 붙이며 속삭였다.
“사실 나는 여기 의사라는 사람을 전혀 못 믿겠어요.”
“어째서?”
“눈 밑에 시커멓게 그늘이 진 데다 빼빼 말라서 도리어 의사가 환자로 보인다니까요? 상처를 꿰맬 때 아프다고 발버둥 치다가 실수로 의사의 코를 아주 살짝 건드렸는데 코피가 줄줄 나더라고요. 내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요?”
“정말 살짝 건드린 게 맞아?”
“이봐요, 펜리 씨.”
디아나의 눈빛이 금세 싸늘해졌다. 올리버가 곧바로 수긍했다.
“물론 살짝이었겠지. 믿을 테니까 나는 건드리지 말아 줘.”
“이왕 건드리는 거 마법으로 해 줄까요?”
올리버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나는 당신이 제일 먼저 병문안 올 줄 알았는데.”
“뭐야. 내가 처음이 아니었어?”
그러자 디아나는 왠지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 사람이. 나를 뭐로 보고.”
“하지만 아가씨는 왕도에 아는 사람이 없잖아,”
“어, 언니가 있잖아요!”
“에이. 누가 봐도 헤스터는 간병인이지.”
디아나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차마 반박할 수 없는 올바른 지적이었다.
“실은 당신이 오기 전에 채스터티가 다녀갔어요. 아, 채스터티는 스승님의 딸이에요.”
“그래? 사이가 좋은 모양이네.”
“그냥 그렇죠, 뭐…….”
디아나가 머쓱하게 대꾸했다. 단순히 친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이였지만, 사실을 실토하자니 어쩐지 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까지 뭐 했어요? 사고가 난 지는 꽤 오래됐잖아요.”
기차 사건이 종결난 지도 벌써 3주가 지났다. 그사이 달력은 6월로 넘어가서 이제 세상은 완연한 여름이었다.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서 정신없이 살았지.”
“뭐 그렇게 할 일이 많대요.”
마치 너 같은 한량이 뭐가 그리 바쁘냐는 듯한 투였다. 올리버가 민망한 듯이 한 손으로 뺨을 쓸었다.
“아가씨. 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나는 무척이나 바쁜 사업가야.”
“도대체가 믿을 수가 있어야죠. 무슨 사업인지 일언반구도 없었으면서.”
“이래 봬도 방직공장을 운영하고 있어.”
“……방직공장? 정말요?”
아무래도 저런 한량과는 어울리지 않는 건실한 사업이었다. 디아나의 눈이 대번에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올리버가 슬며시 디아나의 시선을 피했다.
“취미로 다른 사업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방금 되게 수상하게 들린 거 알죠?”
디아나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올리버는 그저 웃음으로 무마할 뿐이었다.
“어쨌든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야. 행여나 아직도 죽을상이면 어쩌나 했는데.”
“벌써 가게요?”
올리버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자, 디아나도 뒤따라 윗몸을 일으켰다. 올리버는 일어나지 말라는 듯 손짓했다.
“아직 밀린 업무가 많아서 그래. 다음에 또 올게.”
올리버는 그리 말하며 명함을 건넸다.
“혹시라도 용건이 있으면 거기 적힌 번호로 연락해. 내가 자리에 없으면 비서가 대신 받을 거야.”
“세상에, 비서도 있어요?”
올리버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멀뚱히 명함을 살펴보던 디아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펜리 씨가 언니를 도와줬다면서요. 정확히는 날 도와준 거겠지만.”
“……헤스터가 그렇게 말해?”
“어머나, 그 말투는 뭐예요? 아무리 헤어진 사이라지만, 우리 언니가 감사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디아나는 뚱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난 아직도 죽을상이었을지 몰라요. 혹시 마법이 필요한 일이 있거든 한 번쯤은 싸게 도와줄게요.”
“그래도 무상으로 도와주긴 싫은가 보네.”
올리버가 피식거리며 악수했다.
“나야말로 고마워. 덕분에 지루하지 않은 여행이었으니까.”
“그거, 칭찬으로 들어도 되죠?”
디아나가 새침하게 물었다. 올리버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헤스터는 저녁나절에야 돌아왔다. 불그스름한 노을이 하늘을 진창 뒤덮은 때, 해 지는 정경을 감상하던 디아나가 기쁘게 헤스터를 맞이했다.
“언니. 왜 이렇게 늦었어?”
헤스터는 파리한 낯빛으로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녀의 손에는 나갈 적엔 없었던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어제 포도가 먹고 싶다고 그랬지?”
디아나는 멍하니 눈만 끔벅였다. 확실히, 어제 잡지를 뒤지며 지나가듯 그런 말을 하기는 했었다.
“으응. 그랬지……?”
하지만 포도는 8월에나 나오는 과일이다. 막 6월에 진입한 초여름의 오킹엄에서 포도를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언니, 혹시 어디 다녀왔어?”
디아나가 추궁하듯 물었다. 그러자 헤스터는 바구니에서 포도를 꺼내며 행동으로 답을 보여 주었다.
“세상에나…….”
얼떨결에 포도를 받아 든 디아나가 입을 떡 벌렸다. 헤스터는 그제야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별거 아니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어디에 다녀온 거야? 지금 오킹엄에서 포도를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설마 벤네비스까지 다녀온 거야?”
무심코 바구니에 달린 라벨을 스쳐본 디아나가 경악했다.
“벤네비스가 어디라고!”
“이동마법을 썼어. 그리 힘들지도 않았고.”
“벤네비스까지 다녀와 놓고 힘들지 않았다니! 어쩐지 이상하게 늦는다 싶었어.”
벤네비스는 500년 전 성(聖) 마테오가 세운 종교도시로, 오킹엄에서는 기차를 타고도 밤낮 없이 사흘을 달려야 겨우 도착하는 남쪽 국경에 위치했다. 제아무리 헤스터가 뛰어난 마녀라고 한들, 고작 포도 몇 송이를 사기 위해 이동마법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믿기 힘들었다.
“언니.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응?”
디아나가 간절하게 말했다.
“그렇잖아도 여기 병원비만도 어마어마할 텐데, 언니에게 그런 짐까지 더해 주고 싶지는 않아. 내가 마음이 불편해.”
“디아나.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야. 네가 부담 가질 이유는 없어.”
헤스터는 그새 시무룩해진 디아나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런 날을 꿈꿨어. 네가 힘들면 도와주고, 네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고. 이제야 함께하게 되었는데 그런 소소한 행복이라도 있어야지.”
“하지만…….”
디아나가 힘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늘 언니에게 빚이 있었다. 그녀가 스승의 밑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동안, 헤스터는 홀로 세상과 맞서며 자매와 함께할 날만을 꿈꾸며 고군분투했다. 그간 어머니가 남긴 빚을 혼자서 전부 갚았고, 잉그람의 마법 역사상 최연소로 백색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렇기에 디아나는 더는 언니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언니와 손 붙잡고 함께 걷고 싶었다. 언니의 등 뒤에 마냥 숨어 지내는 것은 더 이상 원치 않았다.
“돈 걱정은 하지 마. 너는 하루빨리 나을 생각만 하렴.”
헤스터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여전히 자애롭고 강인한 언니. 그녀의 눈에 디아나는 여전히 어린 동생이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걸 탓하지 못했다. 도제 신분을 벗어난 지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데다, 헤스터가 없었다면 기차에서 개죽음이나 당했을 것이므로. 그러니 동등한 마녀로 인정해 줄 리 없고, 그러길 바라는 것조차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디아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언니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그녀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스승의 밑에서 열심히 수학했듯, 끈질기게 덤비면 적어도 지금처럼 폐만 끼치는 동생은 아닐 것이다.
그때, 헤스터가 외투를 벗으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손님이 다녀갔다고 그러던데. 누가 왔다 갔니?”
“채스터티가 잠시 다녀갔어.”
헤스터가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채스터티? 채스터티 자일스?”
“응. 스승님 딸.”
“편지에 별로 언급이 없어서, 사이가 그렇게나 좋은 줄은 미처 몰랐네.”
왜냐하면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니까. 디아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굴렸다.
“아, 그리고 펜리 씨가 왔어.”
“……올리버 펜리?”
외투를 벽에 걸어 놓던 헤스터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미처 알아채지 못한 디아나가 포도를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꽃다발도 펜리 씨가 주고 간 거야. 바쁘다면서 일찍 가기는 했는데 언젠가 또 볼 날이 있겠지.”
헤스터는 가만히 침묵했다. 그제야 헤스터와 올리버의 불편한 관계를 떠올린 디아나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 무, 물론 나는 다시 만날 생각이 전혀 없지만 말야.”
어쩐지 분위기는 더욱 썰렁해졌다. 조용히 헤스터의 눈치를 살피던 디아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언니. 포도 먹을래?”
이튿날 아침.
헤스터는 일찌감치 병원을 나섰다. 본디 늦게 잠들어 일찍 일어나기를 미덕으로 알던 디아나는 근래 아주 게으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오늘도 10시는 되어야 겨우 깨어날 테니, 헤스터는 그나마 편안한 마음으로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
왕립 세인트 아가사 병원이 위치한 웨스트테더를 벗어나 향한 곳은 언젠가 그녀가 거주했던 구 시가지였다. 도보로 40분가량 걸리는 거리였지만, 헤스터는 굳이 마차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절약하는 습관은 이미 몸에 뱄다. 헤스터는 디아나를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살림이 나아진 지금도 스스로를 위해 지불하는 돈은 몹시 적었다.
헤스터는 어느덧 익숙한 거리로 접어들었다. 늘 싱그러운 제철 꽃을 판매하는 꽃집,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메시나의 전통 요릿집, 온갖 희귀한 책이 숨어 있는 헌책방, 사나운 개가 손님을 죄 쫓아내어 사시사철 파리만 날리는 철물점……. 헤스터는 오픈 준비에 한창인 가게들을 차례로 훑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구석자리의 조용한 카페였다.
문을 열자,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주인의 인사말이 그녀를 반겼다. 헤스터는 문가에서 잠시 내부를 둘러보았다.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카페는 여전히 한적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자리를 지키는 손님은 고작해야 서너 명뿐이었다.
헤스터는 창가 자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으나, 허락 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곧바로 급사를 불렀다.
“커피 한 잔. 설탕은 빼 주세요.”
주문을 받던 급사가 문득 헤스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 옛날에 자주 오시던 분이죠?”
헤스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급사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안 보이시기에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어요. 앞으로는 종종 들러 주세요.”
급사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곤 자리로 돌아갔다. 맞은편에서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던 올리버가 뒤늦게 말문을 열었다.
“설탕 안 넣은 커피는 입에도 안 댔잖아.”
“……별걸 다 기억하네요.”
헤스터는 흘끗 올리버를 쳐다보았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병실에 다녀갔다고 들었어요.”
“아가씨가 그러던가?”
“……디아나는 당신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에요. 그리 쉽게 마음을 여는 아이가 아닌데.”
헤스터는 잿빛 눈을 내리깔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어쩐지 조금 적적해 보이는 모습에 올리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불편하다면 다시는 아가씨를 찾지 않을게.”
“그런 생각은 없어요.”
헤스터가 슬며시 눈썹을 찌푸렸다. 올리버가 머쓱하게 시선을 피하던 찰나, 때마침 급사가 커피를 대령했다. 설탕을 넣지 않아 쓴 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헤스터가 느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당신을 용서하지 못해요.”
“……알아.”
올리버는 서글프게 웃었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니까.”
“당신이 헤아릴 가치가 있는 이유는 아니야.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내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고.”
“알아요.”
빙산처럼 단단하던 마음의 벽을 허물어 가까스로 쌓은 신뢰의 탑은 고작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제 헤스터에게 남은 것이라곤 탑이 무너진 흔적뿐. 어디도 하늘에 닿을 듯 드높던 탑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헤스터는 화창한 거리를 내다보며 천천히 그 시절을 되감았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뒤로 고독한 삶을 간신히 이어 가던 무렵. 디아나와 때때로 주고받는 편지만이 삶의 낙이었고, 조금씩 가벼워지는 빚만이 삶의 보람이었다.
그렇게 헤스터는 아주 천천히 화석처럼 굳어 가고 있었다. 미소도, 눈물도, 기쁨도, 슬픔도 차차 잊어 가던 때, 갑작스레 등장한 올리버는 그녀를 다시금 햇볕으로 이끌었다. 만인이 누리는 평범한 삶의 조각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헤스터는 그와 함께하며 행복했다. 그것은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때, 이유는 물었어야 했다고.”
행복했기에, 너무나도 행복했기에 더욱 배신감에 치를 떨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느 때와 같았던 날, 배반한 연인에게서 돌아선 헤스터는 이제야 그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나는 아직 당신을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헤스터는 더디게 올리버를 마주 보았다. 그 시절과 변치 않은 남자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요?”
올리버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없이 입술만 달싹거렸다. 하지만 끝내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늘 여유롭던 어른의 얼굴이 꼭 소년처럼 붉게 물들었다. 미처 감추지 못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을 마주하며, 헤스터는 조금 웃고 말았다.
맑은 웃음소리가 카페에 잔잔히 퍼지는 가운데, 따스한 여름 햇살이 창가를 환하게 내리비추었다.
막간극
별빛 닿지 못하는 지하 세계.
여신이 버린 땅이라는 전설처럼 암암한 어둠이 짙지만, 실상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지독한 악취가 풍기거나 발 닿는 곳이면 어디고 끔찍한 비명 소리로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지하란 그저 한기가 몰아치는 혹한의 땅이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계일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드넓은 지하의 동방. 드물게 얼어붙지 않은 그라피우스 강이 흐르는 기슭에는 동방을 지배하는 군주의 성이 외로이 서 있었다. 시뻘건 돌을 살벌하게 쌓아 올려 참극성이라 불리는 성채에는 평소 자비롭기 그지없는 군주가 군림했다.
[군주. 혹 지상에 다녀오셨습니까?]
불곰의 신체에 말의 머리를 붙인 악마 톨레두스크 군드라흐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는 동방군주의 휘하에서 오래도록 서기관으로 복무한 악마였다.
[내가? 어찌 그리 여기느냐?]
[지상의 썩은 내가 진동을 합니다.]
[음. 아마도 이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동방군주는 서기관에게 원형의 물체를 던졌다. 톨레두스크 군드라흐는 유심히 그것을 살펴보았다.
[이게 무업니까?]
[인간의 머리니라. 신기하지 않으냐?]
[글쎄요. 인간은 참으로 이상하게 생겼군요.]
그러자 군주가 어쩐지 시무룩해졌다. 눈치 빠른 서기관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그렇잖아도 41군단이 회한의 숲에서 사냥을 끝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인간의 머리라면 족히 훌륭한 포상이 되겠지요.]
[그렇겠지?]
군주가 흐뭇하게 물었다. 톨레두스크 군드라흐는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군주는 금세 본래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왔다.
[실은 아주 오래간만에 지상에 다녀왔느니라. 여전히 소란스러운 곳이더구나.]
[지상이라면, 계약자의 부름을 받으신 겁니까?]
[그래. 꽤 많이 자랐더구나. 무어, 어미를 빼닮아 쉬이 알아볼 수는 있었다만.]
군주는 그리 말하며 옥좌에서 내려왔다. 충실한 각료 톨레두스크 군드라흐는 지체 없이 군주의 어깨에 모피를 둘러 주었다.
현재 군주가 차지한 신체는 본디 강변에 서식하던 악마로, 지하의 추위를 못 견뎌 죽어 가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일족이었다. 각료들은 두꺼운 모피를 걸쳐야만 겨우 한기를 버틸 수 있는 허약한 신체를 극구 반대했으나, 이상한 데서 고집스러운 군주는 오랫동안 신체를 바꾸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서기관. 괜찮은 몸이 남았는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톨레두스크 군드라흐는 잠시 침묵했다. 어쩌면 군주께서 드디어 육신을 바꿀 생각이신지도 몰랐다. 충직한 서기관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용맹한 군사들도 군주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제 몸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구태여 군사를 잃을 까닭은 없지. 이번에 잡아들인 포로 중에서 괜찮은 것을 바쳐라.]
[존명 받들겠습니다.]
톨레두스크 군드라흐는 깍듯하게 고개 숙였다.
군주는 서기관을 뒤에 남겨 두고 홀로 나아갔다. 드높은 기둥이 차례로 이어지는 엄숙한 복도. 그 끝에 자리한 거대한 문이 주인을 맞아 차츰 열리기 시작했다. 그곳은 군주가 허락한 자만 들 수 있는 내밀한 곳이자, 동방의 온갖 금은보화가 가득하다고 전해지는 귀물의 방. 하지만 정작 소문의 실체를 확인한 자 없으니, 군주가 거기에 무얼 숨겨 놓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동방군주. 이른바 참극공이라 불리는 악마는 그리 비밀스러운 자였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여 동방에 난립하던 열한 명의 군주와 예순여섯의 군단을 징벌한 인물.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생각보다 소탈한 성정과 지상에 어린 계약자를 두었다는 것뿐이다.
참극공이 계약자를 만난 것은 지상의 시간으로 1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권태롭기 그지없던 동방군주는 어느 날 불현듯이 지상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한 소리기에 곧 그치리라 여겼건만, 그렇지가 않았다. 결국 참극공은 짜증과 호기심을 품어 지상으로 올랐다.
지상에서 감히 참극공을 부르짖던 마녀는 고작 아홉 살 난 계집아이였다. 더군다나 악마학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지 그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강제로 지상에 소환되지 않은 까닭은 그처럼 불완전한 절차 덕분이었다.
[어린 마녀여. 어찌하여 나를 부른 것이냐?] ‘엄마가 당신의 이름을 알려 줬어요. 혹시라도 견디지 못하겠는 시련이 있다면 당신을 부르라고 했어요.’ [엄마라고?]
무서워 떨던 마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참극공은 순식간에 아이가 누군지 알았다.
[너는 그리젤다의 딸이구나.] ‘우리 엄마를 알아요?’ [그래.] ‘나는 엄마를 몰라요. 금방 죽어 버렸거든요.’
어린 마녀는 금세 울적해졌다. 물끄러미 아이를 살펴보던 참극공이 물었다.
[어린 마녀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물어볼 때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예의예요.’ [너는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질 않느냐.] ‘내가 부른 이름이 맞았어요? 아닐 텐데. 엄마가 알려 준 글자는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고요.’
아이는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악마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다.
참극공이 크게 웃었다.
[내 이름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느냐?] ‘악마랑 계약하는 거잖아요. 누굴 바보로 알아요?’ [그런데도 내 이름을 알고 싶다고?] ‘당신과 계약하면 언제든 당신을 부를 수 있잖아요. 그거면 충분해요.’
어린 마녀가 결연히 말했다.
[대가가 무섭지는 않고?] ‘나한테서 뭘 원하는데요?’
참극공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예전에 그러했듯 곧 원하는 답을 찾아냈다.
[네가 죽으면 너의 육신을 가져가겠다.] ‘마음대로 해요. 죽고 나서 어찌 되든 알 게 뭐야.’
어린 마녀는 코를 훌쩍이며 중얼댔다. 참극공이 피식거리며 팔짱을 꼈다.
[당돌한 마녀구나.] ‘고난을 겪으며 당돌해진 마녀죠. 원래는 착한 아이였어요.’ [나쁜 아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당신은 좋은 악마네요.’
참극공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내 이름은 마르고트다. 정확히는 내 이름의 일부이지.] ‘나머지는요?’ [나머지 이름은 지금의 네가 감당하지 못한다. 내 일부만으로도 나를 부르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너의 소환에 응할 터이니.]
어린 마녀는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악마의 짓궂은 거짓말에 얽힌 이야기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이지만, 종내는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참극공이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젤다의 아이야.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어린 마녀가 대답했다.
‘나는 디아나 솔이에요.’
外.
올리버 펜리
오래전 우베 강기슭에는 고파도라는 도시가 있었다.
지금처럼 도시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기에, 고파도는 인근의 물자와 사람이 모이는 교차로였다. 다른 지방으로 건너가는 여행객도, 물건을 도매가로 대량 구매하려는 중간상인도 고파도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다. 단단한 성벽이 안전을 보장했으므로, 고파도가 서북지대의 중심지로 성장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마녀가 성문을 넘었다.
고파도의 시민들은 손가락 끝까지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산티그마 교단과 마법 사회의 천년전쟁이 격렬한 시절이었으나, 교단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고파도의 시민들은 마녀를 의심할 줄 몰랐으며 풍문으로만 들어온 마녀가 이리도 당당하게 도시에 들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러한 무지가 도시에 참극을 불러올 줄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그날 밤, 늙은 마녀는 금지된 문양을 새기고, 금지된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리하여 모두가 잠든 시각, 지옥에서 끓어 넘치는 유황 냄새가 도시를 집어삼키며 이형의 악마가 지상에 발을 디뎠다.
고파도는 다시는 새벽을 보지 못했다.
*
이른 새벽녘.
평화로운 도시 쇼이블레에 아침보다 일찍 찾아든 손님이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일주하는 우편집배원이나 수레를 끌고 다니는 우유 배달부, 혹은 석탄 장수도 아니다. 여독이 가득한 얼굴로 힘겹게 가방을 들고 가는 이는 아직 애 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이었다. 키는 헌칠하니 성인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으나, 앳된 얼굴로 미루어 보아 고작해야 열여섯 열일곱 되었을 법했다.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길에 앞코가 채이기를 벌써 수십 차례. 고난 끝에 소년이 도착한 곳은 어느 찬 바람 부는 저택이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쇼이블레시(市)에선 보기 드문 3층짜리 대저택이었지만, 저택을 칭칭 감싼 담쟁이 넝쿨 때문인지 자못 음산한 기운이 흘렀다. 대문 앞에서 물끄러미 저택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표정도 좀체 밝아지질 않았다.
“어머, 올리버 도련님이세요?”
때마침 졸린 눈을 비비며 마당으로 나오던 유모가 화들짝 놀랐다. 소년, 올리버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남몰래 내쉬는 한숨은 덤이었다.
조피가 조심스럽게 문짝에 귀를 붙였다.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칼이 조급하게 물었다.
“어때. 들려?”
“조용히 해 봐. 너 때문에 안 들리잖아.”
조피가 와락 인상을 쓰며 쏘아붙였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도무지 알아듣질 못하겠어. 할아버지가 여기 계신 건 맞지?”
“형이 들어가는 걸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 할아버지가 부르시니까 들어갔겠지, 평소에 형이 제 발로 서재에 들어간 적이나 있어?”
“하긴. 그건 그래.”
그런데 왜 들리지가 않는 거냐고. 조피가 자그맣게 투덜거렸다.
“할아버지도 참. 우리한텐 만날 윽박지르시면서 오빠한텐 왜 저렇게 상냥하신 거야?”
“나한테도 상냥하신데…….”
“너 조용히 하랬지?”
조피가 눈을 매섭게 치켜뜨자, 칼이 곧장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부터 제 쌍둥이를 핍박하던 조피의 강퍅한 성정은 세상에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조피, 칼! 너네 거기서 뭐 하니!”
그때 층계참을 내려오던 앤이 어린 동생들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조피와 칼이 허둥지둥 변명거리를 떠올리는 사이, 앤은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며 남매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일어났으면 가서 세수부터 해야지, 여기서 장난이나 치고 말이야. 응?”
“자, 장난 안 쳤어!”
“또, 또 이렇게 말대꾸나 하고! 대체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니?”
앤이 한숨을 푹 내쉬며 조피와 칼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어린 쌍둥이 입에서는 궁색한 변명 대신 신음만 흘러나왔다.
“자. 어서 세수하고 예쁘게 단장해서 내려오렴. 올리버가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단정한 모습을 보여 줘야지.”
“돌아온 게 아니라 학교에서 쫓겨난 거잖……. 아야!”
구태여 한마디 덧붙이다가 꿀밤을 맞은 조피가 울상으로 앤을 올려다보았다. 앤은 엄격한 표정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세수.”
성인이 된 지 고작 반년 지난 앳된 처녀이나, 작고한 어머니를 대신하여 오래도록 집안의 안주인 노릇을 해 온 앤에게 동생들의 서투른 반항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쇼이블레에서 제일가는 말썽꾸러기들은 시무룩하게 욕실로 직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언제쯤 철이 들려는지…….”
어린 쌍둥이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앤이 심란한 얼굴로 서재를 돌아보았다. 올리버가 새벽녘에 돌아왔다는 소식은 유모에게 전해 들었지만, 아침이 지나도록 할아버지께 붙잡혀 있는 통에 그녀는 아직도 동생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앤은 동생이 보고픈 마음보다 근심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지난주, 론로베르트 신학교에서 부친 편지는 저택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 이러나저러나 동생이 제 앞가림은 할 줄 아는 아이라 믿는 앤은 그나마 나았지만, 어린 손자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하늘을 찌르던 할아버지는 조금 다를 터였다.
부디 오늘의 폭풍이 하루빨리 잦아들기를. 앤은 벽에 걸린 십자가를 향해 경건히 기도를 올렸다.
숨소리마저 겸손해지는 서재.
말없이 손끝만 내려다보던 올리버가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탁상시계는 아직도 7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부터 온몸에 좀이 쑤시는데, 서재에 든 지 아직 30분도 채 흐르지 않았다. 참담함을 한숨처럼 집어삼킨 올리버가 이번에는 창가 쪽으로 뒤돌아선 조부의 뒷모습을 힐끗거렸다.
올리버, 올해로 열일곱 된 소년은 오래도록 신학에 몸담은 펜리가(家)의 장남이었다. 굳이 먼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그의 고조부는 퓌센베르크의 대주교였으며, 눈앞의 조부는 쇼이블레의 존경받는 주교였다.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교단 명부에 직접 이름을 올리진 않았으나 인근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자였으니, 장자인 올리버가 어린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올리버가 신학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들판에서 뛰놀기를 좋아했던 소년에게 엄격한 신학교 생활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규율을 어기고 말썽을 부렸다. 처음에는 문제 학생을 타이르고 다그치고 처벌하던 신학교 교사들도 두 손 두 발 들고 말았다. 졸업을 1년 앞둔 해, 론로베르트 신학교는 끝내 올리버 펜리를 제적시켰다. 느닷없이 날아온 제적 통지서에 저택이 발칵 뒤집힌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올리버는 신학교에서 퇴학당한 것에 아무런 후회도 없었다. 그는 조부의 손에 억지로 신학교에 입학했던 첫날부터 이곳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오히려 더 일찍 나오지 못한 것이 통탄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장손에게 큰 기대를 걸고 계셨던 조부는 몹시 낙담하셨을 터. 무섭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인사 한 마디 제대로 올리지 못한 올리버는 그저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아침이 늦은 북국(北國)에도 차츰 날이 밝아왔다. 문득 노인이 조용히 물었다.
“앞으로 무얼 할 게냐.”
삭은 낙엽처럼 침통한 소리였다. 올리버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네가 신학에 뜻이 남았다면 다른 신학교를 찾아 주마.”
올리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불편한 침묵이 계속해서 초침을 밀어 냈다. 정적 속에서 답을 찾은 노인이 쓰디쓴 한숨을 뱉어 냈다.
“……그만 나가 봐라.”
그제야 올리버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를 나가려던 찰나, 불현듯 돌아본 조부는 여전히 메마른 뒷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올리버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가지 않겠다 발악하던 손자를 신학교로 끌고 갔던 강건한 주교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오래도록 신을 섬겨 온 경건한 가문에는 그저 덧없이 세월에 져 버린 노인만이 남았을 뿐이다.
*
올리버가 고향에 돌아온 지도 벌써 나흘이 지났다. 그간 어린 동생들보다 게으르게 생활하던 올리버는 날카로운 유모의 눈총을 못 견디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래 봤자 어린 시절의 친구들은 전부 학교나 공장으로 자리를 비운 한낮이니, 잔디밭에 누워 무료하게 시간이나 죽일 뿐이었다.
더없이 맑은 날.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설탕처럼 하얗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올리버는 문득 먼 데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 오빠가…….”
“……사과는 그럼…….”
언덕 아랫길에서 또래 소녀들이 재잘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달리 할 일이 없어 멍하니 소녀들을 지켜보던 올리버는 문득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올리버는 예의상 손을 들어 인사했다. 갑자기 소녀들이 뜻 모를 눈빛으로 그를 흘깃거리며 쑥덕거렸지만 말이다.
“올리버. 여기서 뭐 하니?”
때마침 앤이 다가왔다. 올리버는 고개만 뒤로 젖혀 누이를 보았다.
“시장 다녀왔어?”
“응.”
양손 가득 바구니를 들고 온 앤이 올리버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바구니가 무거웠는지 목덜미에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다음에는 나도 데려가.”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너도 좀 쉬어야지.”
“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이러다간 몸이 녹슬겠어.”
올리버의 투덜거림에 앤이 살포시 웃었다.
“알았어. 다음에는 같이 가자.”
따스한 미풍이 잔디를 쓸고 지나간다. 올리버는 말없이 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난 3년 사이 앤은 어느새 성인이 되었다. 얼굴선은 미려해졌고, 눈은 조금 더 깊어졌다. 10년 전 쌍둥이를 낳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오랫동안 가사를 돌보았던 손은 더 거칠어졌다.
“왜 그렇게 보니? 오랜만에 보는 누나가 너무 예뻐서 그래?”
앤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올리버가 피식 웃으며 맞장구쳤다.
“응. 너무 예뻐서 누가 채 갈까 겁나네.”
“채 가긴 누가 채 간다고 그러니?”
“누가 채 가긴. 누나도 이제 어른인데 언젠가는 결혼하겠지. 혹시 지금도 누구 있는데 모르는 척 의뭉 떠는 거 아냐?”
“얘는.”
앤이 부끄러운 듯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올리버가 잔디밭에 벌렁 누우며 탄식했다.
“아. 갑자기 신학교 나온 게 조금 후회되네.”
“왜?”
“만약 내가 신부가 되었으면 누나가 결혼할 때 주례를 봐 줄 수도 있었잖아.”
“할아버지께서 해 주실 텐데 무얼.”
“할아버지 주례사는 쓸데없이 길어. 재미도 없고.”
하객의 절반은 졸걸. 올리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나는 정말로 재미있게 할 수 있는데. 아쉽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올리버를 흘겨보던 앤이 실소를 흘렸다. 앤은 동생의 못된 입을 사과로 막으며, 금방 시장에서 들었던 소식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는 시간 비워 놔. 슈미트 씨가 생일 파티를 꽤나 성대하게 여실 건가 봐.”
“슈미트 씨?”
“우체국장 있잖니. 옛날에 널 얼마나 귀여워하셨는데. 기억 안 나?”
“음……. 별로.”
올리버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프랑크가 너 돌아왔다니까 굉장히 보고 싶어 하던걸. 한번 연락해 보는 게 어떠니?”
“나 걔랑 안 친한데. 그냥 누나한테 말 걸어 보고 싶었던 거 아냐?”
“얘가 아까부터 정말.”
앤이 짐짓 쥐어박으려는 듯 주먹을 들어 올리자, 잽싸게 피한 올리버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누나. 툭하면 손드는 버릇 아직도 못 고쳤어?”
“너희들이 만날 말썽만 피우는데 어떻게 고치겠니?”
“난 그동안 학교에 처박혀 있었는데 왜 내 핑계를 대! 조피랑 칼이 문제지. 특히 조피 고 계집애는 도대체 누굴 닮았는지, 원.”
올리버는 망아지처럼 날뛰는 여동생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늘 아침에도 조피는 집에 돌아온 지 고작 사흘 된 오라비를 백수 취급하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심지어는 유모가 그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칠면조 요리를 홀랑 먹어 버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잖아. 네가 참으렴.”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넌 더 심했어. 너 말썽 피울 때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어린 시절 쇼이블레에서 제일가는 말썽꾸러기였던 올리버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앤이 혀를 차며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렇잖아도 요즘 쌍둥이가 더 말썽을 피워서 고민이야. 시장에서 웬 이상한 소문을 주워듣고 와서는…….”
“이상한 소문?”
올리버가 귀를 쫑긋거렸다.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쇼이블레는 한적한 도시였다. ‘이상한 소문’이란 참으로 보기 드문 손님이었다.
“실은 마녀가 이 근처를 지나간다나 봐.”
“마녀가 여길?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아무튼 그 소문 때문에 할아버지도 신경이 곤두서 계셔. 너도 조심해.”
조부의 불같은 성정을 잘 아는 올리버가 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녀라니. 정말로 꿈같은 소리였다.
이튿날 아침.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조피아 펜리! 어디서 삿된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게야!”
조부의 카랑한 고함이 내리꽂혔다.
“하, 하지만 선생님이 그랬단 말예요. 정말 마녀가 온다고…….”
“선생님? 누가! 어떤 선생이 그딴 망언을 해!”
깜짝 놀란 조피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너무 놀라 제대로 울음도 터트리지 못하는 듯했다. 앤이 안절부절못하며 동생을 두둔했다.
“조피가 잘 몰라서 그랬을 거예요. 너무 다그치지 마세요.”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모를 게 따로 있지! 네가 항상 싸고도니까 애들이 아직도 철이 안 든 게 아니냐!”
“죄송해요, 할아버지. 부디 용서하세요.”
하지만 조부는 쉽사리 노기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는 산티그마 교단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론로베르트 수도회 출신으로, 절대로 이단을 용납하지 않는 원리주의자였다. 천년전쟁은 이미 200여 전에 종식했음에도 마법을 향한 뿌리 깊은 증오는 대를 이어 전해졌다.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올리버가 천천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세상이 말세네요. 천벌받을 것들이 당당히 기어 나온다니. 할아버지께서 늘 쇼이블레가 악에 물들까 노심초사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식탁 위의 시선이 일제히 올리버를 향했다. 올리버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무 괘념치 마세요. 조피랑 칼도 이제는 마녀란 족속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지 잘 알 테니까요. 그렇지?”
조피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올리버의 모습에 조부도 더는 격분하지 못했다. 신학교에서 귓등으로 들었던 교장의 연설이 조금이나마 쓸모 있는 순간이었다.
식당은 다시금 평안을 되찾았다. 모두가 식사를 재개하는 사이, 칼이 올리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형. 우리한테 마녀 보여 준다며…….”
올리버가 말없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었다. 울상이던 칼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오빠, 저기 온다! 저기!”
쓸쓸한 강가. 오래간만에 인파 몰린 기슭이 어수선했다. 올리버가 친히 목마를 태워 준 조피도 이번만큼은 그 나이 때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모습이었다.
“어, 어디? 나는 안 보여.”
칼이 초조하게 올리버의 옷을 잡아당겼다. 올리버는 하는 수 없이 칼을 안아 올렸다.
“이제 보여?”
“응! 잘 보여!”
그래, 네가 잘 보이면 됐다. 앞뒤로 무거운 짐을 진 올리버가 무념무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조차 머리카락을 꽉 잡아당기는 조피의 손짓에 깨지고 말았지만.
“야! 아파!”
“저기! 마녀야, 마녀! 오빠, 저기!”
“머리카락 잡아당기지 말라니까!”
하지만 올리버의 목소리는 맥없이 묻히고 말았다. 잔뜩 흥분한 조피는 오라비의 고통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나마 말이 통했던 칼도 낯선 광경에 정신을 빼앗겼다. 올리버는 두피가 잡아 뜯기는 생경한 고통을 가까스로 견뎌 내며 눈앞을 지나가는 행렬을 바라보았다.
듣기로는 국경에 새로이 투입되는 군대라 하였다. 평소라면 기병과 보병으로만 구성되었을 행렬일 테지만, 이번 행렬에 구태여 마녀를 동참시킨 것은 국왕의 뜻이었다.
올리버는 작게 혀를 찼다. 그는 마녀와 마법사란 족속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인간은 감히 다룰 수 없는 이능을 펼치는 작자임은 알았다. 그런 전능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개처럼 국왕에게 복종하는 그네들을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독하게 욕심이 없거나, 세상에서 으뜸가는 천치가 분명했다.
올리버는 그저 행렬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쌍둥이가 마녀가 보고 싶다며 애걸복걸하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강변까지 나올 일은 없었다.
“마녀다…….”
조피가 자그맣게 중얼댔다. 올리버는 무심코 조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반제의 상징인 검독수리가 깊게 음각된 쌍두마차. 그 위에 백발의 여인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루이자 볼크하르트. 일명 징벌의 마녀.
반제인치고 모를 리가 없는 인물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마다 거론되니, 엄격한 신학교에서 10년 가까이 지내 온 올리버도 그녀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았다.
“진짜 무섭게 생겼다. 그렇지, 형?”
그새 겁먹은 칼이 올리버의 품을 파고들었다. 올리버는 눈앞을 스치는 루이자 볼크하르트를 흘끗 쳐다보았다. 확실히 인상이 강하긴 했으나.
“……도서관 사서 할머니랑 닮았네.”
“뭐어?”
“그렇잖아. 사서 할머니가 20년만 젊었어도 딱 저랬을걸.”
칼이 죽상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사서 할머니가 얼마나 친절하신데! 저 마녀는 너무 무섭잖아! 전혀 다르다고!”
“아님 말고.”
올리버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면서 칼과 조피를 억지로 떼어 냈다.
“자. 봤으니까 됐지? 이제 그만 돌아가자.”
반년 뒤, 앤은 가을 신부가 되었다. 상대는 근처 대학교의 의대생이었다. 가족 누구도 앤이 연애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기에 자못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앤이 꼭 자기 자신처럼 선량한 남자를 데리고 온 덕에 조부도 쉬이 결혼을 허락했다.
앤은 그 해 가장 아름다운 신부였다. 예상대로 쇼이블레의 모든 사람들이 인망 높은 앤의 결혼을 축하하러 왔으며, 예상대로 조부는 길고 지루한 주례사를 늘어놓았다. 다만 예상과 달리, 조부는 앤을 떠나보내며 귀하디귀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조피와 칼은 이제 옛날처럼 말썽꾸러기는 아니었다. 앤이 결혼하며 분가하자 그제야 책임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유모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아이였지만, 적어도 나이에 맞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올리버는 겨울이 끝나도록 고향에 머물렀다. 조피가 매일같이 백수 한량이라 놀릴 만큼 게으른 생활의 연속이었다. 조부는 말은 하지 않아도 장손이 걱정스러운 눈치였고, 종종 저택을 찾아오는 앤도 대학이며 공장의 이야기를 넌지시 흘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올리버는 그저 애매한 웃음으로 눙칠 뿐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열여덟 성인이 된 올리버는 홀연히 군대에 입대했다.
*
울마르크 고산 지대.
임시 막사에는 바늘 같은 긴장감이 첨예하게 내려앉았다. 대낮에 벼락이 떨어지고, 커다란 굉음이 울린 것이 벌써 1시간도 더 전이었다. 그럼에도 전해지는 소식이 없자, 슬슬 아군의 생사를 걱정하는 소리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때였다.
“군의관! 군의관 어디 있어!”
부상병을 부축하며 나타난 군사가 별안간 고성을 내질렀다. 놀란 군의관이 속속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혼절한 채 피거품을 토해 내는 부상병은 배가 갈라져 장기가 죄다 쏟아질 지경이었다. 군의관들은 지체 없이 수술을 준비했다.
이후로 군인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막사로 돌아왔다. 아침에 떠날 적엔 백 명에 다다르던 인원이 고작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제 몸 건사하기조차 힘든 실정이니,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구하러 가거나 시신을 수습하기는 무리였다. 지금 귀환하지 못한 이들은 아마도 영영 돌아오지 못할 터였다.
다행히 파울 리버만은 가까스로 생환한 군사였다. 그때 ‘적’과 한 발자국만 더 가까웠다면 지금쯤 오딜을 영접하고 있을 테지만, 어찌어찌 죽음의 위기를 넘겨 오늘도 살아 돌아왔다. 팔에 적당한 부상도 입었으니, 당분간 수색대에 차출될 위험도 없었다.
“파울. 괜찮아?”
상처를 소독하던 중 멀리서 약병을 옮기던 올리버가 슬쩍 다가왔다.
“많이 다쳤네. 한 열흘은 팔을 못 쓰겠는데.”
“헛소리. 3주는 못 쓸 거다.”
파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상처를 소독하던 군의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 꼴이야? 마법사는 어디 있어?”
“안 보이는 거 보면 모르냐. 죽었어.”
“뭐? 죽었다고?”
올리버가 황당한 기색으로 얼른 곁에 앉았다. 파울이 귀찮다는 듯 성한 팔로 그를 밀쳤지만 올리버는 심히 끈질겼다.
“토비아스 프롬이 죽었어? 어쩌다가?”
“어쩌긴 어쩌다가야. 거인이 팔 한 번 휘두르니까 매가리 없이 날아가더라.”
“세상에.”
올리버는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토비아스 프롬이 죽었으니 당분간은 우리도 대기인가?”
“꿈 깨셔. 후방 부대에서 내일 다른 마녀를 보낸다더라.”
“젠장. 보내려면 좀 괜찮은 사람으로 보내든가. 만날 전방으로 쭉정이만 보내니까 우리만 이 고생이잖아.”
올리버가 머리를 헤집으며 투덜거렸다. 파울이 끌끌 혀를 찼다.
“그럼 진짜 보석을 이런 데로 보내겠냐? 여기로 차출되는 마법사나 우리나 웃전이 보기엔 발에 차이는 자갈보다 못한 법이다, 원래.”
“그래도 처음부터 괜찮은 마법사들로 뽑았으면 토벌이 이렇게 길어지진 않았겠지. 도대체 이게 몇 년째야?”
예부터 울마르크 고산 지대에는 거인들이 살고 있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외진 곳이기에 가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예전에는 감히 넘보지 못했던 곳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저 순응하던 자연에 맞서고, 무서워 피하던 괴물을 내쫓았다. 그리 인간의 영역을 넓히고 넓히다가 종국에 이르러 맞닥뜨린 것이 바로 거인이었다.
거인. 지상 최고의 병사이자, 지상 최악의 포식자. 그들은 성인 남성보다 족히 네 배는 컸고, 강철보다 단단한 껍질을 피부 삼은 종족이었다. 힘으로는 당해 낼 자 없으며 지능조차 인간과 엇비슷하니, 이제껏 인간들이 상대해 온 괴물과는 급이 다른 존재였다. 인어와 요정을 물리칠 때 혁혁한 공을 세웠던 총기류도 거인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0년 전, 반제는 거인을 토벌하기 위해 잉그람과 손을 잡았다. 거인의 서식지인 울마르크 고산 지대는 반제와 잉그람이 동시에 접한 국경 지대였다. 양국 모두 국경의 거인들이 눈에 거슬리던 참이었다.
문제는 마녀와 마법사였다. 작금 발전한 기술로도 거인에 대적할 수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토벌전의 핵심은 그들이어야 했다. 하지만 맹약으로 속박된 반제의 마녀와 달리, 국왕의 구속력이 약한 잉그람의 마녀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다른 종족을 살해하는 것을 극렬하게 거부했다. 집을 떠나 먼 국경으로 떠나는 것 역시도 도무지 수긍할 수 없는 처사였다.
결국 잉그람이 울마르크로 보내는 치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실력도 보잘것없었다. 금번 토벌로 공연한 희생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던 반제도 그와 엇비슷한 마법사만 줄곧 내보내니, 자연히 전쟁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 잉그람에서 아주 대단한 인물을 보냈더라. 아까도 토비아스 프롬이 그렇게 어이없게 죽고서 이제 우리도 다 죽었구나 싶었거든.”
“그러고 보니 마법사도 없이 어떻게 살아 돌아왔대?”
“운 좋게 잉그람 측 마법사랑 마주쳤어. 아주 그냥…… 말이 필요 없더라.”
파울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냥 말이 필요 없어. 너도 보면 알 거야. 베가 가문 출신이라던데, 그런 고명하신 분께서 이런 외진 곳까지 무슨 행차신지 모르겠다.”
베가라면 잉그람에서도 손꼽는 마법 가문이었다. 잉그람 국왕이 무슨 수로 그런 대단한 마법사를 보냈는지 알 길 없지만, 같은 배를 탄 입장에선 제법 달가운 소식이었다.
올리버가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제발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도 그 마법사가 나타나면 좋겠네.”
“너 부상은 어떤데? 다음 수색에 차출될 것 같냐?”
3주 전 올리버는 꽤나 큰 부상을 입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막사에서 안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이번 수색대에서만 무려 절반을 잃었으므로, 새로운 마녀가 도착하는 즉시 차출되어 거인과 맞설 것이었다.
“아마. 이젠 움직이는 데 별 지장도 없고.”
“……조심해라.”
“됐다. 조심한다고 조심해지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되겠지.”
올리버는 짐짓 쾌활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료 잘해. 난 뭐 도울 거 없나 가 볼게.”
막사는 여전히 부상병들의 신음 소리로 그득했다. 벌어진 상처에서 장기를 쏟아 내거나 팔다리를 잘라 내는 군사들이 양옆으로 널렸으나, 올리버는 무던하게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입대한 지 어언 1년. 수술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속을 죄 게워 내던 신병이 죽음에 무감해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후방에서 급히 보낸 마녀는 일평생 이름을 들어 본 적 없는 인물이었다. 무명의 마법사들이 전방으로 차출되어 개죽음당하는 것은 이제껏 보아 왔던 일이기에 달리 특별하진 않았으나, 다만 이번 마녀는 앞으로의 가시밭길을 예견하듯 출발하기 전부터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마녀의 창백한 안색을 흘겨본 상병이 침을 퉤 뱉었다.
“젠장. 어디서 되먹지도 못할 걸 보내와서는.”
“좀 미덥지가 못하긴 합니다.”
올리버가 헛헛하게 웃었다. 달리 할 말이 없으니 웃기밖에 더하겠느냐만, 기실 올리버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군사들은 거인에게 직접 대적할 수 없으므로, 대동하는 마법사에게 생명을 맡기는 셈이었다. 툭 치면 졸도할 것 같은 마녀가 믿음직할 리 없었다.
“토비아스 프롬은 그래도 이름난 가문 출신이기라도 했지. 이번엔 진짜 심하다, 심해.”
상병은 불평을 늘어놓으며 입담배를 모두 토해 냈다.
“오늘은 그냥 별일 없기만을 바라는 게 낫겠다. 저년 상판을 보아하니 거인을 보면 숨넘어가겠어.”
그리고 정말 불운하게도, 상병의 말은 전적으로 옳았다.
초반의 수색은 조금 지루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어제 잉그람의 마법사가 거인을 둘씩이나 죽였다는 낭보가 전해졌으니, 수색대는 그저 거인들이 겁먹어 숨은 모양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느닷없이 거인과 마주쳤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다.
올리버는 힘없는 웃음을 흘리며 바위에 몸을 기댔다. 상병의 말이 맞았다. 마녀는 거인을 보자마자,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군사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사이, 분노한 거인은 그들을 짓밟고 던지고 후려쳤다.
마녀가 어찌 되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혼잡한 와중에 거인에게 밟혔는지, 공포에 눈이 먼 군사들이 마구잡이로 쏘아 댄 총에 맞아 죽었는지. 어쨌든 죽었을 것이고, 설령 죽지 않았더라도 곧 죽을 것이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올리버는 땅을 쿵쿵 울리는 거인의 발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나머지는 전부 죽었다. 만일 운 좋은 놈이 있다면 무사히 달아났겠으나, 다리를 다친 올리버는 그러지도 못했다. 큰 바위 더미에 몸을 숨긴 것이 최선이었다.
목전으로 다가온 죽음이 무섭기도 어처구니없기도 했다. 올리버는 피식거리며 새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지금이 너무도 우스웠다. 고향에 있는 가족이, 친구들이, 또한 창창하리라 여겼던 자신의 미래가 숨결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결국은 이렇게 끝날 거였으면서…….”
허무하게 흩어지는 날숨을 주시하던 올리버가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거인이 멀찍이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뒤이어 흉포하게 일그러지는 얼굴도, 이리로 다가오는 거대한 형상도 꿈처럼 몽롱하게만 비쳤다.
그때, 희미한 섬광이 하늘을 스쳤다. 모두가 영문 모를 사이, 천지를 진동하는 우렛소리와 함께 새하얀 낙뢰가 내리쳤다.
“끄아아아악!”
벼락 맞은 거인의 비명 소리가 길고 길게 이어졌다. 남은 생명을 모조리 토해 내듯 처절한 소리였다.
올리버는 황망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떨어진 벼락이며, 귀를 찢는 비명 소리로 어안이 벙벙했다. 새까맣게 타 죽은 거인이 뒤로 넘어가면서 어언지간 벼락이 그쳤으나, 올리버는 멍하니 제자리만을 지켰다. 움직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문득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올리버는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가까스로 숨만 내쉬는 사이, 낯선 사내가 불현듯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긴장으로 파르르 떨리는 시선이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따랐다. 잉그람을 상징하는 파란 군복과 색조 옅은 백금발. 사내의 차림을 빠르게 훑어 내리던 올리버의 눈이 그의 허리춤에서 우뚝 멈추었다.
사내는 비무장이었다. 총기도, 검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런 전장에서 혈혈단신 비무장으로 다닐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마법사.
올리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돌아가지 않을 겁니까?”
문득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올리버가 소리의 진원지를 두리번거리자, 거인의 시체를 살피던 마법사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군복을 보아하니 반제의 군인인 듯한데.”
올리버는 일순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마법사는 민담으로만 들었던 인어처럼 아름다웠다. 그토록 미려한 모습이지만, 어쩐지 올리버는 등골이 서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접해 왔던 마법사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기괴한 공포가 깊게 풍겨 나고 있었다.
마법사가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십시오. 지금 이 근방에 거인은 더 이상 없으니.”
그에 올리버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상당한 다리가 끔찍이도 고통스러웠지만, 근방에 거인이 없다는 마법사의 말대로 그는 무사히 막사로 생환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은 그뿐이었다. 정말로 마법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튿날, 올리버는 잉그람의 마법사가 근방의 거인을 모조리 학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에드윈 베가?”
올리버가 영 익숙지 않은 이름을 발음했다. 그럭저럭 괜찮았던지 파울이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법사의 이름이야.”
“베가라면 그거 아냐? 교활한 베가?”
“그건 자일스잖아. 교활한 자일스.”
파울이 혀를 차며 말했다.
“교활한 자일스. 공정한 알피어스. 고결한 베가. 잉그람에서 유명한 마법 가문이야.”
“그런 대단한 가문의 마법사가 여기까진 웬일이래? 잉그람의 국왕은 마법사를 강제할 수 없다며.”
모든 마법사들은 으레 국왕에게 충성을 서약한다. 그러나 반제와 잉그람의 서약은 사뭇 달랐다. 잉그람의 서약이 실제로는 동등한 계약에 가깝다면, 반제의 서약은 애초부터 국왕의 우월성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국왕에게 개처럼 기는 반제의 마법사와 달리, 잉그람의 마법사는 국왕의 친서에도 데면데면하기 마련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마법사들 원래 이상한 거 너도 알잖아.”
파울이 야멸치게 대꾸했다. 하지만 올리버는 아직도 잘 납득하지 못했다. 마법에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에드윈 베가는 다른 얼치기 마법사와는 격이 달랐다. 마법으로 벼락을 부린다? 이제껏 거인에게 제대로 공격조차 하지 못했던 어중이떠중이들을 상기하면 좀체 같은 족속이라 치부하기 힘들었다.
“이유야 어쨌든 거기서 에드윈 베가를 만났다니 너도 참 운 좋다. 그 사람 아니었으면 진즉 죽었을 거 아냐.”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올리버가 실실 웃으며 부목을 댄 다리를 힘겹게 침대로 올렸다. 그 반동으로 한창 작성하던 편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상당한 올리버를 대신하여 파울이 친히 편지를 주워 주었다.
“가족한테 보내냐?”
“어. 누나가 편지 좀 보내라고 성화야.”
올리버는 때때로 주먹을 휘두르던 앤을 떠올리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곧 볼 건데 왜 그리 편지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니까.”
“곧 얼굴을 보다니? 너 설마…….”
파울이 금세 얼굴을 굳혔다. 올리버는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나 전역한다.”
“뭐?”
“뭘 그렇게 놀라냐…….”
“왜! 갑자기 왜!”
올리버가 뺨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냥. 이쯤이면 된 것 같아서.”
“뭐가 됐는데?”
“음…… 글쎄다.”
결국 멀쩡한 대답을 듣지 못한 파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만 토해 냈다. 올리버는 피식 웃으며 파울의 머리를 헤집었다.
“너도 그만 전역해라. 넌 나보다 먼저 입대했잖아. 언제까지 여기 처박혀 있을래?”
“전역은 무슨 전역이야. 돈을 벌어야 전역을 하든 말든 하지.”
파울은 평범한 인간으로는 특이하게도 마법사 슬하에서 자랐다. 다른 사람보다 마법 사회에 대해 잘 아는 것도 바로 그러한 경험 때문이었다. 물론 마법사에게 이유 없는 선행은 없는 법. 성년을 넘긴 지금은 길러 준 대가를 치르기 위해 입대까지 감행하며 돈을 모으고 있었다.
“망할 마법사. 이제는 편지로 이자 밀렸다고 독촉까지 하잖아. 내가 돈만 다 갚으면 그 새끼 얼굴 다시는 안 본다.”
파울이 이를 갈았다. 올리버는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그는 부상만 웬만큼 회복되면 바로 군대를 떠날 작정이었다. 상관에게도 미리 언질 주었으니 머잖아 전역할 터였다.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올리버가 문득 물었다.
“파울. 신은 무슨 생각으로 마법사를 창조하신 걸까?”
“헛소리할 거면 자라.”
*
군에서 제대한 직후, 올리버는 친구와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여전히 꼬장꼬장한 그의 조부는 신을 모시는 펜리가의 장손이 장사치가 된다는 소식을 못내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올리버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1년 남짓한 동안 전선에서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 제법 많은 돈을 모았다. 조부에게 도움을 청할 일도, 손을 벌릴 일도 없었다.
“요즘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문제야.”
왕도 바텐바흐에서 공부했던 친구는 그리 말하며 거금을 주고 잉그람의 최신 방직기를 사들였다. 주변의 공장주들이 그들을 멋모르는 천둥벌거숭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올리버는 두말 않고 친구의 뜻을 따랐다. 변경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몸소 체험한 올리버는 인간의 노동력이 능사가 아님을 알았다. 고인 물처럼 쇼이블레에만 머무르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세상을 쫓아 나아갈 것이었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처음에는 쇼이블레의 작은 단칸방에서 시작했던 사업이 어느새 바텐바흐의 턱 끝까지 치달았다. 그 무렵 사업에 완전히 몰두한 올리버는 친구와 함께 바텐바흐로 상경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올리버는 바텐바흐에서 환골탈태했다. 지방에서 막 상경하여 왕도가 마냥 신기하던 시골 도련님도, 술만 마시면 군에서의 무용담을 늘어놓던 치기 어린 제대군인도, 때때로 장사치의 말에 속아 넘어가던 어수룩한 청년의 모습도 진즉 벗어던졌다. 이제 올리버는 누가 보아도 세련되고 간사한 바텐바흐의 신사였다.
그는 다른 사업가들과 마찬가지로 파티를 전전하며 유흥을 즐겼고, 아름다운 여성과 교제했으며 늘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 말했다. 술과 담배와 사치가 항상 그의 주변에 머물렀다. 바텐바흐는 숭고한 도시였지만, 상류층의 삶이란 어디든 향락에 젖어 있기 마련이었다.
그즈음 고향에서 전보가 날아왔다. 조부가 편찮으시니 어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는 전보를 물끄러미 보던 올리버는 사환을 시켜 가장 빠른 기차표를 예매했다. 함께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이 그를 붙잡았지만, 올리버는 그저 웃음으로 눙칠 뿐이었다.
쇼이블레는 기차를 타고도 무려 나흘을 가야 하는 도시였다. 올리버는 기차에서 죽은 듯 고요하게 지냈다. 늘 요란하던 바텐바흐가 차차 멀어졌다. 독한 술내와 담배 연기, 귓가에 머무르던 화려한 소리가 멀어졌다. 지난 3년간 호화롭던 생활이 꿈처럼 혼몽하게 느껴졌다.
― 다음은 쇼이블레, 쇼이블레 역입니다.
고향은 변함없이 조용했다. 들꽃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소 우는 소리가 어디고 들려왔다. 올리버는 오래간만에 달한 고향이 자못 당혹스러웠다.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그를 곁눈질했다. 그림처럼 평화로운 시골 풍경과 바텐바흐의 세련된 신사는 좀체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덧 그는 이방인이었다.
저택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앤이 올리버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의사가 오늘 밤이 고비래.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사이 앤은 많이 늙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풋풋한 처녀였다면, 지금은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늙어 보였다.
“난 애들한테 젖 좀 물려 주고 올게. 안에 들어가 봐. 조피가 있을 거야.”
앤이 바삐 사라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올리버가 조용히 조부의 침실로 들어섰다. 조부는 가맣게 죽은 얼굴로 힘겹게 숨만 내뱉고 있었다. 의사는 오늘 밤이 고비라고 했지만, 올리버가 보기엔 지금이 고비였다.
“방금 잠드셨어.”
가만히 조부의 곁을 지키던 소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무심코 그녀를 돌아본 올리버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조피?”
“오랜만이네. 늦을 줄 알았더니.”
조피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올리버는 그저 망연히 어린 동생을 응시했다. 그가 기억하는 조피는 늘 쌍둥이를 괴롭히던 천방지축 여동생이었다. 이처럼 조용하다 못해 음침한 소녀는 낯설기만 했다.
“칼은 아침에 도착했어. 아래층에 있을 텐데 못 봤어?”
“칼? ……아, 기숙학교에 들어갔다고 했지.”
올리버는 망연자실 의자에 앉았다. 조피도 더는 묻지 않았다. 고요한 침실에는 죽어 가는 노인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날 밤, 조부는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조부는 임종 직전에 별안간 눈을 떴지만, 그의 눈은 더 이상 가족을 비추지 않았다. 평생을 신에게 헌신했던 노인은 죽음을 앞두고도 신을 부르짖었다.
‘세상이 말세다.’
조부의 마지막 말은 그러했다.
‘신께서 벌하실 게야.’
그것은 조부가 늘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말이었다. 올리버는 쓰게 웃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소리기에 유언이라고 특별하게 들리진 않았다.
조부의 장례식은 조용하게 치러졌다. 슬픔에 허덕이는 앤과 어린 동생들을 대신하여 올리버가 장례를 주관했다. 오래도록 쇼이블레의 주교를 역임했던 노인의 마지막을 찾는 조문객은 생각보다 많았다. 낯이 익은 사람도, 아무래도 모르겠는 사람도 있었다. 올리버는 성심껏 그들을 맞이했다.
장례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묘지에 시신을 안치하는 것으로 끝났다. 주교의 죽음을 추모하러 모인 조문객은 썰물처럼 저택을 빠져나갔다. 커다란 저택에는 적막만이 맴돌았다. 정적이 달가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올리버와 앤, 어린 쌍둥이는 저택을 나와 강가를 거닐었다. 강가의 찬 바람을 맞으니 곤했던 정신이 점차 맑아졌다.
“……할아버지께서 네게는 저택과 라인무트의 땅을 남기셨어.”
앤이 말했다. 오래도록 신을 섬겨 온 펜리 가문은 그리 부유하지 않았지만, 걱정 없이 살 만큼은 되었다. 그중 가장 큰 재산이 라인무트의 금싸라기 토지였다.
“누나는?”
“나는 그림 몇 점이랑 어머니가 쓰시던 귀물. 칼은 은행 금고에 있는 현금과 금괴를 받을 거고, 조피는 은 식기랑 귀금속을 받을 거야.”
“너무 차이 나잖아.”
“그래도 어떡해. 네가 장손인걸.”
올리버가 쓰게 웃었다. 보수적인 조부는 예전부터 손자와 손녀를 눈에 띄게 차별했다. 개중에서도 장손인 올리버를 특히 귀애했다.
“칼은 신학교를 마쳐야 하고……. 조피는?”
“글쎄. 그 애, 근 몇 년간 할아버지를 간호하느라 학교도 오래 쉬었어.”
올리버는 뒤돌아 조피를 보았다.
“조피. 넌 앞으로 뭘 하고 싶니?”
조용히 뒤따르던 조피가 눈을 들어 올렸다. 올리버가 재차 물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갈래?”
“응.”
조피는 잠시간 고민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고 싶어.”
반제는 보수적인 나라였다. 왕권이 강력하고 귀족이 드센 나라에서 귀한 댁 여식은 학업보다 결혼을 우선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올리버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
조부는 평생을 낮잡아 본 어린 손녀의 간호를 받으며 여생을 마감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올리버는 조부가 평소 조피를 얼마나 박대했는지 잘 알았다. 그럼에도 묵묵히 조부를 간호하고 임종을 지킨 어린 여동생이 안쓰러웠다. 또한 조용히 꿈을 지켜 온 조피가 대견스럽기도 했다.
“저택에선 누나가 지내는 게 어때? 비워 두는 것보단 낫겠지.”
“그럼 너는?”
올리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덧 그는 강 건너 폐허를 바라보고 있었다.
쇼이블레에는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반제라는 나라가 건국되기도 전, 제법 번성했던 도시의 갑작스러운 파멸에 대하여. 성벽의 부실함을 탓할 수도, 도시민들의 부주의를 탓할 수도 없는 까닭은 그것이 인간은 차마 범접할 수 없는 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마법.
마른하늘에 낙뢰를 내리고, 거인을 태워 죽이는 전능한 힘.
“올리버. 바텐바흐로 돌아갈 거니?”
“아니.”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그토록 배척받던 마법이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섰고, 그에 탄력받은 인간은 경쟁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냈다. 밤낮 가림 없이 조용하던 쇼이블레에 철로가 들어선 것이 고작 10년 전이었다. 조부는 하루아침에 변한 세상을 욕하고 손가락질했지만, 바텐바흐에서 새로운 세상을 접한 올리버는 지금의 변화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반제는 이제야 변화의 물길에 발을 내디뎠다. 아직도 반제의 대부분은 구시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난 잉그람으로 갈 거야.”
올리버는 이제 바텐바흐로 만족하지 못했다. 늘 변화를 갈망하는 그의 마음은 이제 잉그람을 향했다.
새로운 세상이 싹튼 그곳. 변화의 소용돌이가 치는 그곳으로.
*
“파울?”
어느 날, 동향 모임에 초대받은 올리버는 우연히 낯익은 인물을 조우했다.
“파울. 파울 리버만. 맞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올리버?”
올리버와 파울. 두 사람은 멀거니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각자 여기길, 타향에서 만나리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펜리 씨. 이분을 아시오?”
“예전에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습니다.”
“같은 부대라면 설마…….”
다른 이의 눈에도 예기치 못한 친분이었던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왔다. 올리버는 난처하게 웃으며 파울의 어깨를 잡고 구석으로 이끌었다.
“너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야말로 묻고 싶다.”
파울이 어물쩍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올리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옷차림을 살폈다.
“돈 번다고 악을 쓰던 사람이 행색은 또 왜 이래? 나름대로 파티잖아.”
“내가 뭘 입든 무슨 상관이야.”
“별 상관은 없는데 궁금하잖아. 그렇잖아도 요즘 좀 지루하던 참인데.”
올리버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잉그람으로 건너온 지 벌써 2년. 쇼이블레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와 달리 기본금이 넉넉했던 덕분에 그는 수월하게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낯설던 중앙어도 이젠 제법 익숙해졌으나, 반대급부로 지루함을 못 참는 고약한 성정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 좀 해 봐.”
“그러니까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냐고.”
“섭섭한걸. 우리 꽤 친했잖아.”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파울이 질색하며 몸을 뒤로 뺐다. 올리버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옛날에도 파울은 유독 쌀쌀맞고 예민했지만, 적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자꾸만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눈알을 굴리는 모양새가, 아무리 보아도 무언가를 숨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때마침 동향 모임을 주최한 마누엘 신부가 다가왔다.
“오, 펜리 씨. 오셨군요. 듣기로는 리버만 경과 아는 사이시라고요.”
“리버만 경이요?”
“예. 조국의 자랑스러운 마법사시지요. 그런데 리버만 경, 군에 입대한 적이 있으십니까? 조금 전에 톨크 씨가 이상한 말을 하시더군요.”
신부의 물음에 파울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올리버가 느릿하게 파울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마법사?”
“뭘 원해.”
당장에 올리버를 뒷골목 선술집으로 끌고 온 파울이 대뜸 물었다. 올리버는 무척이나 어처구니없었지만, 일단 차분히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저기, 내가 지금 좀 헷갈리거든. 몇 가지 물어도 될까?”
“원하는 게 있으면 지금 말하라고!”
파울이 분을 못 참고 외쳤다. 주변 사람들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흘깃거렸다.
“애당초 거기 간 게 문제였어. 신부가 독촉만 안 했어도……. 도대체 넌 거기 왜 있었던 건데, 어?”
“나야 초대장이 왔으니 갔지.”
“그러니까 네가 왜 잉그람에 있는 거냐고! 제기랄, 너 때문에 다 망했잖아!”
파울은 그리 말하며 지갑을 내동댕이쳤다.
“그게 내 전부야. 그걸로 만족하든, 아니면 경찰에 신고하든 네 맘대로 해!”
“내가 묻고 싶은 게 바로 그거야. 어째서 내가 널 신고해야 하는데?”
슬쩍 파울의 지갑을 열어 본 올리버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그는 지갑을 고이 접어 파울에게 돌려주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기에 빈털터리야? 갚을 돈이 있다며. 그건 다 갚았어?”
“당연히 다 갚았……. 잠깐, 너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건데?”
“거듭 말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게 바로 그거야.”
올리버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마누엘 신부님이 널 마법사로 알고 계신 거지? 내가 아는 파울 리버만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인데. 마법사 사칭은 엄연히 중죄야.”
파울이 고집스레 시선을 피했다. 얼마간 그를 쳐다보던 올리버가 하릴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명함을 꺼냈다.
“돈은 필요 없고. 당분간 신고하지 않을 테니, 털어놓을 생각 있으면 여기로 연락해.”
“……난 내가 마법사라고 말한 적 없어.”
“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올리버가 멈칫하며 파울을 돌아보았다. 파울은 여전히 고개를 수그린 채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난 내가 마법사라고 밝힌 적 없다고. 신부가 먼저 오해하더니 그새 사람들한테 퍼트렸단 말야.”
“신부님이 왜 그런 오해를 하신 건데?”
파울은 한동안 침묵했다. 어느 나라나 마법사 사칭은 중죄였다. 만약 발각된다면 파울 본인은 물론이요, 올리버도 사실 은닉죄로 처벌받는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닳고 닳은 사업가인 올리버는 단순히 동정하는 마음으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하는 일 때문에.”
오래지 않아 파울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나는 마법사랑 오래 살아서 마법에 대해서는 꽤 안단 말야. 그래서 마법이 불완전한 마법사들을 도와줄 기계를 만들었는데, 문제는 반제에서는 이걸 팔 수가 없었어.”
“그래서 잉그람으로 왔군.”
반제의 마법사는 왕가의 통제를 받았다. 귀족조차 마법사와 함부로 대면할 수 없는 형편이니, 일반인이 마법사와 거래하기는 당연히 무리였다. 그에 반해 잉그람에서는 때때로 실력이 변변찮은 마법사들이 부유한 일반인과 계약을 맺었다.
“그래. 그런데 나는 잉그람이 처음이라 어디서 마법사를 찾아야 하는지 전혀 몰랐어. 또 내 기계가 모든 마법사에게 통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교회를 찾았는데, 신부가 내 말을 곡해해선 내가 국명을 받고 잉그람으로 건너온 마법사인 줄 착각하잖아.”
“아…….”
올리버가 낮은 침음을 흘렸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순진한 신부가 괜한 오지랖을 부려 한 청년을 고난에 빠트린 것이었다.
“불쌍한 녀석.”
“나도 알아.”
파울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괴로워했다. 올리버는 적선하는 마음으로 맥주를 주문했다.
“그럼 신부님이 마법사를 연결해 준 거야?”
“어. 웬 꼴통 하나 소개해 줬지.”
“그런데 왜 그렇게 가난해. 지갑에 든 게 없더만.”
올리버가 텅텅 빈 파울의 지갑을 턱짓했다. 파울이 눈을 홉떴다.
“왜긴 왜야. 마법사라고 다 부자인 줄 아냐? 그리고 기계를 만들 재료비는 어떻고. 뭐가 있어야 만들어 팔든 할 거 아냐.”
“마법 기계라…….”
올리버는 잠시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정확히 무슨 기계인데? 그게 있으면 나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
“헛소리하냐. 내가 만든 기계는 원활한 마법을 도와줄 뿐이야. 일반인도 마법을 가능케 하는 기계였다면 내가 지금 이 꼴일 리 없지.”
“마법을 원활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마법사가 많나 봐.”
“당연하지. 너도 예전에 군대에서 많이 봤잖아. 마법이 실패해서 폭발하거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
파울의 말에 올리버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가 군대에서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맞이한 것은 대부분 수준 이하의 마법사 때문이었다.
“그런데 네 기계를 이용하면 원활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이건가…….”
올리버가 가볍게 물었다.
“내가 도와줄까?”
마치 소풍이라도 가자는 듯한 어조였다. 파울은 맥주를 삼키는 것도 잊고 멀거니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
“아니……. 네가 왜 날 도와?”
“글쎄다. 옛정?”
“소름 끼치는 소리하지 마라.”
파울이 질겁했다. 올리버는 낄낄거리며 맥주를 들이켰다.
“별다른 목적은 없어. 그냥 나는 돈이 넘쳐 나고, 너는 돈이 필요하니까.”
사업은 번창하고 있었다. 반제에선 여전했고, 잉그람에선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가만 앉아만 있어도 재산이 곱절이 되는 지경이었다. 바텐바흐에 머물 때처럼 마구잡이로 돈을 쓰지도 않으니 쌓이는 것이 이자요, 모이는 것이 돈이었다.
“다른 졸부처럼 후원 놀이라도 하겠다는 셈이야?”
“네 맘대로 생각해. 어차피 너한테 해될 건 없잖아.”
“하지만 내게 바라는 것이 있겠지.”
“걱정하지 마. 재료비나 연구비, 혹시 필요하다면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보조해 줄 테니까. 원한다면 다른 마법사나 마녀를 연결해 줄 수도 있어. 이래 봬도 연줄이 꽤 많거든.”
“그러니까 네가 왜―”
“대신.”
올리버가 파울의 말을 끊어 냈다.
“나는 그저 너와의 ‘새로운 사업’이 재미있으면 돼. 사실 요즘 조금 지루하던 참이거든.”
파울의 얼굴이 차차 일그러졌다. 마치 길가의 광인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지만, 올리버는 그저 샐쭉하니 웃기만 했다.
철저한 지원을 약속했던 것이 빈말은 아니었다. 올리버는 정말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것처럼 의욕적으로 임했다. 보다 못한 파울이 말릴 정도였다.
“너 일은 안 하냐?”
“지금 하잖아.”
“장난하지 말고. 너 공장 운영한다면서.”
“공장주가 자리 비웠다고 멈추면 그건 공장이 아니지.”
올리버의 사업은 이미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신식 사업이 막 태동한 반제와 달리 잉그람에는 이미 그와 같은 사업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았으므로, 구태여 무리해서 사업을 확장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사업의 중심은 반제였다. 함께 사업을 시작한 친구를 설득하여 잉그람까지 진출한 것은 애당초 올리버의 도전 의식 때문이었다.
“도대체가 넌 옛날부터……. 아니, 됐다.”
어차피 말해 봤자 듣지 않을 것을 알기에 파울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파울이 기계를 제작하고 연구하는 사이, 올리버는 그간 사업하며 다져 둔 인맥을 십분 활용하여 마녀와 마법사를 주선했다. 그의 목표는 젊고 가난한 이들이었다. 보수적인 마법 사회의 특성상 부유한 마녀는 인간의 기술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고, 나이 든 치는 관성에 젖어 변화를 거부할 것이었다.
기계장치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많았으나, 예상했듯 인간의 기술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정기적으로 찾는 고객은 얼마 없었다. 하지만 올리버는 느긋했다. 적자가 나는 달에도 오직 파울만 전전긍긍했다. 올리버는 그저 출장을 겸하여 다른 도시에 들를 때마다, 그곳에 거주하는 마법사를 파울에게 주선하길 반복했다.
그렇게 올리버와 파울은 저도 모르는 사이 마법 사회의 심층부를 파고들었다. 그러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가 바로 휴고 알피어스였다.
“당신의 기계가 마법을 돕는다고 들었습니다만.”
휴고 알피어스는 젊지만 아주 부유한 마법사였다. 또한 백색전당에 이름을 올린 고명한 마법사로서, 올리버가 목표하기엔 지나치게 저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올리버와 파울은 처음부터 휴고 알피어스는 안중에도 없었으나, 도리어 그편에서 관심을 보였다.
“기계가 마법진을 보조하다니……. 생전 처음 보는 기술입니다.”
휴고 알피어스는 훌륭한 마법사지만, 자신의 마력을 세심하게 통제하지는 못했다. 넘치는 마력을 제어하는 것이 늘 그의 숙제였다. 그 해답을 인간의 기술에서 찾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즈음 파울은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여태까지는 마법진을 보조함으로써 외면적으로 마법의 작동을 도왔다면, 이제는 보다 마법의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그 근원적인 부분을 도통 모르겠다는 거야…….”
어느 날, 올리버를 술집으로 불러낸 파울이 반쯤 취하여 주정을 늘어놓았다. 올리버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벗의 술주정을 들어 주었다.
“거지 같은 마법사들……. 지네만 알면 다야? 아니, 그런 기본적인 사항은 당연히 기록으로 남겨야 할 거 아냐.”
“마법에는 기본서도 없나 보지?”
“기본서만 없냐? 젠장,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다.”
파울은 마법사의 이기심과 게으름에 대하여 일장 연설을 벌였다. 요약건대, 마법사는 본능적으로 마법을 깨우치기에 제대로 된 서적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마법 교육이 구술에만 의존하는 것도 문제였다.
“비유하자면 적분은 잘하면서 정작 수학이 무언지 정확히 정의 내리지 못한다는 건가?”
“뭐, 그런 거지.”
곰곰이 생각하던 올리버가 물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뭘?”
“마법진에 대해서. 혹은 마력에 대해서.”
파울이 마법사의 슬하에서 자랐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본디 마법 사회는 폐쇄적이다. 인간을 하인으로 들일 바에야 차라리 동물을 애지중지 길러 시종으로 부리는 치들이다. 그런데도 마법사가 구태여 인간 아이를 시종으로 부렸다는 것이나, 선심을 베풀어 마법의 일부분을 가르쳤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힘들었다.
파울은 그제야 말문이 막혔다. 잠시간 그를 쳐다보던 올리버가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 굳이 들어야 할 이유도 없고. 말해 봤자 이해도 못 할 텐데.”
올리버는 일생토록 마법을 증오했던 조부와 달리, 마법의 전능한 힘에 매일같이 감탄하는 부류였다. 하지만 마법 자체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았다. 그에게 마법이란 어디까지나 흥미로운 사업에 불과했다.
그때, 손님을 맞이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술을 엎지르고 말았다.
“야, 너 뭐 해!”
깜짝 놀라 올리버를 타박하던 파울도 시선을 빼앗기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실 모두가 그러했다. 경이로울 만치 아름다운 여인의 등장에 맞물려 내려앉은 적막 속에서, 불현듯 파울이 신음처럼 속삭였다.
“……헤스터 솔이잖아.”
“누구라고?”
“헤스터 솔. 성좌의 마녀.”
그제야 올리버가 파울을 돌아보았다.
“그리젤다 솔의 딸? 저 여자가?”
“어.”
올리버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젤다 솔의 외동딸, 성좌의 마녀, 희대의 천재, 현명한 헤스터……. 다양한 별칭으로 불리는 여인은 아무래도 이런 술집과 어울리지 않는 곧은 자세로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만 따로 떼어 놓으면 여기가 도서관이라 착각할 법도 했다.
“정말 대단한 마녀야. 이런 데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겨우 정신을 차린 파울이 더듬더듬 말했다.
“성년을 막 넘긴 나이로 백색전당에 이름을 올리지를 않나, 벌써부터 국왕의 작위를 받질 않나. 심지어는 그리젤다 솔을 뛰어넘을 재능이라고도 하던걸.”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마법의 기본을 꿰뚫고 있어.”
파울이 심각하게 대꾸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보통 마법사들은 마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몰라. 그냥 본능적으로 하지.”
“그런데 저 마녀는 그걸 아는 건가?”
파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버가 재차 물었다.
“그럼 네가 알고 싶은 걸 저 마녀는 알고 있다는 거지?”
“알고 있다 뿐이야? 세상천지 마법의 기본을 연구하는 사람은 헤스터 솔뿐일 거다.”
대부분의 마녀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급급했다. 연구 성과야말로 마법 사회에서 그들의 위상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장 활용할 수 없는 마법의 근본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자가 많을 리 없었다.
“저 마녀한테 가르쳐 달라고 하면 안 되나?”
“뭐?”
파울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올리버는 즉시 질문을 바꾸었다.
“사례금을 준다면?”
“천하의 헤스터 솔이 돈이 부족하겠냐? 아니, 그걸 떠나서 마녀가 왜 인간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겠어.”
파울은 그러면서 너는 그게 문제라는 둥, 제발 부탁이니 마녀를 인간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둥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올리버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만취한 파울은 평소보다 말이 길었다. 올리버가 생각을 정리하기엔 충분했다.
“잠시 실례.”
“뭐? 야, 너 어디 가!”
올라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헤스터 솔에게로 다가갔다. 등 뒤에서 파울이 무어라 소리쳤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본디 올리버는 결정이 빠르고, 행동은 더욱 빨랐다.
“혼자 왔어요, 아가씨?”
맞은편에 앉으며 그리 물으니, 헤스터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아름다운 잿빛 눈에 의심이 어렸다. 올리버는 그저 느긋하게 웃었다.
“이름이 뭐예요?”
“…….”
“아가씨?”
“……나한테 물은 거예요?”
그럼 맞은편에 앉아서 누구한테 물어볼까. 하지만 능란한 사업가답게 올리버는 흔들림 없이 미소를 유지했다.
“네. 아가씨 이름.”
“내 이름은 왜요?”
여자가 의아하게 물었다. 낯선 사내를 특별히 경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올리버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계속 아가씨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아.”
여자는 그제야 스스로를 헤스터 솔이라 밝혔다. 올리버는 친근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소개했지만, 마녀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짐작건대 당장 술집만 벗어나면, 그의 이름을 까맣게 잊을 것이 분명했다.
올리버는 점점 초조해졌다. 헤스터 솔 정도의 유명한 마녀라면 뒤를 캐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지만, 무릇 마녀란 타인의 간섭을 극도로 싫어하는 족속이었다.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지 않는 한 대번에 내쳐질 것이 빤했다.
“내일 주말인데 뭐 해요?”
“내일이 주말인가요?”
하지만 대화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눈앞의 마녀는 도대체 어디에 정신이 팔린 것인지 계속 어긋나는 대화에도,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는 올리버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화술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올리버조차 종종 침묵하는 틈이 생겼다. 파울을 돕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꽤 많은 마녀와 마법사를 만났지만, 이런 마녀는 생전 처음이었다.
결국 그날 올리버가 얻은 수확이란, 헤스터가 아침마다 들르는 카페가 전부였다. 올리버는 겨우 술 한 잔을 비우고 돌아가는 마녀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았다. 조마조마하게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파울도 그제야 슬금슬금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별로……. 너는 뭐 아는 거 없어?”
“헤스터 솔에 대해서? 아서라. 그러다가 잘못 걸리면 너 뼈도 못 추려. 괜히 마녀겠냐?”
술에 취한 파울은 마녀의 잔인함에 대해서 또다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올리버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어떻게든 헤스터 솔과 가까워지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어릴 적부터 올리버에게는 아주 못된 버릇이 하나 있었다. 어려울수록 당최 포기를 모르는 습관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튿날, 올리버는 헤스터가 흘리듯 말해 주었던 카페로 향했다. 다행히 헤스터는 그곳에 있었다. 예상대로 그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낯선 남자가 동석하는 데도 별다른 제지조차 없었다.
“항상 여기서 아침을 먹어요?”
“네.”
“왜요?”
“어제도 여기서 먹었으니까요.”
헤스터는 늘 예상에서 벗어난 답변을 주었다. 그나마 질문에는 꼬박꼬박 대답하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올리버는 이외에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헤스터를 몰아세우거나 다그치지는 않았다. 그가 한 달 넘게 아침마다 동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 철저하게 선을 지켰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마녀랑 만난다고?”
아침의 짧은 만남을 우연히 알게 된 파울이 대경하여 소리쳤다.
“만남이 죄는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래서 뭐 알아는 냈냐?”
“헤스터가 양손잡이라는 점? 아니면 하얀 고양이를 기른다는 거?”
그러자 파울이 탄식하듯 말했다.
“옛날부터 생각했지만, 넌 가끔 미친 것 같아.”
파울이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올리버는 아침마다 헤스터와 만나기를 그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장 내일 아침에 올리버가 카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헤스터는 전혀 괘념치 않을 것을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즈음 어느 황색신문에 헤스터의 이름이 실렸다. 정확히는 그리젤다 솔이 물려주었다는 억만금의 유산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물론 지난 한 달 헤스터가 얼마나 일에 파묻혀 사는지 지켜보았던 올리버는 그 기사가 거짓임을 금세 알아챘다. 그래서 올리버가 집중한 것은 기사의 다른 부분이었다.
헤스터 솔 (1765.08.03.)
8월 3일이라면 당장 다음 주 주말이었다. 오늘이 몇 월인지, 주말인지 주일인지조차 헷갈려 하던 평소의 헤스터를 생각하면 자신의 생일도 챙기지 않을 것이 빤했다.
잠시 고민하던 올리버는 그녀의 생일을 주제로 계획을 짰다. 물론 직접적으로 데이트를 청하지는 않았다. 내가 어째서 당신과 주말에 만나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듣지 않아도 선했기 때문이다.
결국에 올리버가 택한 것은 계약이었다. 그는 헤스터를 지목한 개인 의뢰서를 마법협회로 송부했다. 헤스터 솔은 원래 개인 의뢰를 잘 받지 않는다는 답신이 왔지만, 상당한 액수를 약속했으니 머지않아 연락이 올 것이라 확신했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펜리 씨?”
올리버를 알아본 헤스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올리버는 그보다 드디어 헤스터가 자신의 이름을 외웠다는 것이 기뻤다.
“의뢰를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맞아. 날씨도 좋은데,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
올리버는 영문 모르는 헤스터를 데리고 오킹엄 곳곳을 쏘다녔다. 앰브로즈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교외의 몬강으로 나가서 배를 타기도 했다. 헤스터는 잊을 만하면 의뢰의 내용이 무어냐고 물었지만, 올리버는 그저 두루뭉술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내심을 실토한 것은 발간 노을이 지는 저녁나절에 이르러서였다.
“오늘 생일이잖아.”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신문에서 봤지. 개인적인 얘기는 입에도 담지 않으니 내가 직접 찾아볼 수밖에.”
그에 헤스터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습관적으로 미쳤다는 소리를 늘어놓던 파울의 표정과 유사했다. 하지만 올리버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헤스터가 대번에 알아주리란 기대는 품지도 않았다.
이후로도 카페에서의 아침 식사는 계속되었다. 달라진 점은 올리버가 매일같이 꽃을 건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언제는 장미고 언제는 들꽃이었다. 헤스터는 순순히 꽃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꽃을 주는 이유를 묻지 않으니, 올리버가 대답할 거리도 없었다.
그렇게 한 달가량이 흘렀다. 어느 날, 헤스터가 물었다.
“왜 내게 꽃을 주는 건가요?”
“주고 싶으니까.”
“왜 주고 싶은데요?”
“네게 잘해 주고 싶어서.”
“어째서요?”
“널 좋아해.”
올리버는 간단히 대답했다. 헤스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나는 당신의 가족이 아니에요.”
“알아.”
“왜 나를 좋아해요?”
“글쎄. 딱히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올리버의 대답이 당최 이해되질 않는 듯 헤스터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올리버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빵을 잘랐다. 고백을 듣고서 저리 반응하는 사람은 난생처음이었다. 보통은 고백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를 고민할 텐데, 헤스터는 저 사람이 어째서 날 좋아하는지를 탐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닐까. 올리버는 막연히 생각했다.
올리버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바텐바흐의 탕아처럼 난잡하게 산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여자들을 만났고 나름대로 뼈아픈 사랑도 겪어 보았다. 사랑이 무언지도, 세상에 사랑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깊은 관계를 맺는 데 보수적이게 된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올리버는 헤스터 솔을 사랑했다. 헤스터는 이유를 물었지만, 그것은 그가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언제부터 저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올리버 역시 스스로에게 되묻고 싶은 문제였다.
삼삼한 고백을 하고서도 둘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아침마다 카페에서 만나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가끔씩은 주말마다 만나서 앰브로즈 광장이나 강가를 산책하기도 했다. 헤스터가 이 관계를 어떻게 여기는지 종종 궁금했지만, 올리버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는 헤스터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다. 성급하게 둘의 관계를 단정 짓고 이름을 붙이고 싶진 않았다. 올리버는 헤스터가 자각할 때까지 언제고 기다릴 작정이었다.
헤스터는 이제 올리버에게 많은 것을 털어놓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모질고 야속한 스승님, 안쓰러운 여동생……. 헤스터의 세상은 예상외로 좁았다. 그녀에겐 마법과 하나 남은 여동생이 전부였다. 그녀는 스물셋의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 막 나온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헤스터가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마법 사회에서 ‘집’이 갖는 함의를 생각하면 깜짝 놀랄 만한 초대였다. 물론 올리버는 기쁘게 초대에 응했다.
헤스터의 집은 오킹엄의 변두리 아파트였다. 허름하지만 깔끔하고 아늑한 공간에 하얀 페르시안 고양이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올리버가 신기한 눈으로 집을 둘러보는 사이, 헤스터는 차를 대접하겠다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여긴 서재인가.”
문이 반쯤 열린 서재. 올리버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서재에 들어섰다. 기실 서재라기엔 지나치게 협소한 공간이었지만, 그 작은 방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으로 가득했다. 그조차 마법에 관심 없는 올리버는 제목을 읽을 수조차 없는 책이 대다수였다. 파울이 여길 보면 참 좋아할 텐데. 올리버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친구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헤스터에게 책 몇 권만 빌리겠다는 말을 해 보기로 결심도 했다.
그즈음 어지러운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곳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기에 더욱 눈에 띄기도 했다. 올리버는 의아한 표정으로 책상 앞에 섰다.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마법 언어와 중앙어로 번갈아 기록된 종이. 중앙어로 기록된 부분조차 이해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지만, 올리버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헤스터의 논문임을 알았다.
언젠가 파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세상천지 마법의 기본을 연구하는 사람은 헤스터 솔뿐일 거다.’
올리버는 논문을 넘기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근래 파울과의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마법의 작동을 돕는 기계는 분명 효과가 있었으나, 보수적이고 의심 많은 마법사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파울이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음에도 애당초 마법사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 마법과 관련된 연구를 제대로 진행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기계를 제작하려면 마법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었으나, 마법의 기본과 관련한 책은 몹시 드물었다.
기본. 올리버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논문의 제목을 읽었다. 마법의 현상학적 이해. 이게 파울에게 도움이 될지 그는 가늠할 수 없었다. 마법은 그에게 너무나도 먼 학문이었다.
그때, 유리 깨지는 처참한 소리가 들려왔다. 올리버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문가에서 헤스터가 차디찬 얼굴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가.”
“헤스터. 잠시만 내 말 좀…….”
“다신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
헤스터는 그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쳐 내는 손길이 몹시 매몰찼다. 올리버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며 일단 물러섰지만 과연 다음이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본 헤스터의 꼿꼿한 뒷모습은 그만치 견고했다.
올리버는 그길로 파울을 찾아갔다. 주변에서 마법 사회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논문을 봤어.”
대뜸 하는 소리에 파울이 미간을 좁혔다.
“뭔 헛소리야.”
“헤스터의 논문을 봤다고.”
“뭐?”
올리버는 그답지 않게 굳은 얼굴이었다. 그제야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파울이 물었다.
“들켰냐?”
“…….”
“들켰네. 너 다시는 그 마녀 주변에 알짱거리지 마라. 명심해.”
“왜?”
“왜라니! 넌 방금 말짱하게 살아 돌아온 걸 감사히 여겨야 해!”
파울이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연구 성과야. 매년 10월 말마다 논문 제출 기한에 맞추려고 내로라하는 마녀?마법사들이 죽어 가는 게 바로 그 성과 때문이라고!”
“난 그냥 읽어 본 것뿐이야. 그마저 이해도 못 했어.”
“그럼 가서 그렇게 말하든가.”
올리버가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헤스터를 찾아갈 기세였다.
“아냐, 아니야. 그러지 마. 일단 좀 앉아 봐.”
간신히 올리버를 도로 앉힌 파울이 초조하게 방 안을 오가기 시작했다.
“나는 헤스터 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마녀들이 자기 논문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는 잘 알아. 하룻밤 불장난 상대랑 비할 바가 안 돼.”
“그런 거 아냐.”
“뭐?”
“하룻밤 불장난 상대가 아니라고.”
올리버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파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도대체 뭐라는 거야……. 너 그냥 당분간 다른 데 가 있어라. 그래, 반제는 어때? 오랜만에 고향도 다녀오고.”
파울이 은근하게 권했다. 헤스터 솔은 견줄 데 없이 강고한 마녀였다. 10여 년 가까이 마법사를 보필하며 그네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몸소 겪었던 파울은 그런 대단한 마녀에게 잘못 걸려서 가시밭길을 걸을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다.
올리버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뭘 알았다는 건데.”
“당분간 헤스터의 눈에 띄지 말라는 거잖아.”
파울은 제멋대로인 친구가 과연 충고를 착실히 이행할지 의문스러웠으나, 다행히도 올리버는 헤스터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했다. 다만 직접 마주하는 것을 피했을 뿐이지, 하루에도 몇 통씩 편지를 보내 용서를 구하고 만나서 얘기하자는 말을 전달했다. 헤스터가 읽는 것 같진 않았지만 말이다.
올리버는 그렇게 헤스터가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헤스터에게 가진 마음이, 또한 헤스터가 그에게 가진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았다. 다만 헤스터에게는 이 모든 것이 낯설리라는 것을 잘 알아서, 적어도 그의 변명이라도 들어 볼 여유를 되찾도록 기다릴 뿐이었다.
변명에 대한 판단은 헤스터의 몫이었다. 헤스터가 그를 용서하든, 용서하지 않든 올리버는 죄인으로서 마땅히 그녀의 결정에 따를 것이었다.
그렇게 편지를 보내고, 보고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새벽 나절에 헤스터의 집 앞을 서성거리길 열흘째 되던 날.
헤스터가 오킹엄을 떠났다.
*
부우우우―
시끄러운 기적 소리 가득한 기차역. 올리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등석 티켓을 끊던 도중 자신을 알아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머, 어제 툭스베리에 오셨던 분 아니세요? 벌써 떠나시나 봐요.”
역무원이 유리창 너머로 그를 반겼다. 올리버는 반듯하게 웃어 보였다.
“예. 급한 일이 생겨서.”
“어디로 가시나요?”
“오킹엄으로 갑니다.”
역무원의 말대로 올리버는 어제 막 툭스베리에 도착한 참이었다. 새로운 공장 부지를 찾던 중 마땅한 곳이 없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데, 그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면 비서가 당장 반제에 있는 친구에게로 연락할 게 분명했지만, 그리고 제발 네 멋대로 하지 좀 말라는 친구의 하소연을 들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올리버도 어찌할 수 없었다.
어젯밤 올리버는 낯선 편지를 받았다. 국왕의 밀명을 받아 스노든으로 떠났던 마녀 헤스터 솔이 얼마 전 오킹엄으로 귀환했다는 소식이다.
헤스터가 오킹엄을 떠난 지도 벌써 2년이었다. 마법협회는 그녀가 국왕의 밀명을 받았다며 어디로 갔는지조차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사적으로 사람을 풀어 헤스터가 북쪽의 국경도시 스노든에 있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곳으로 몰래 사람을 들여보내려다가 잡혀 옥고를 치를 뻔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대책 없는 짓이나, 당시에는 그토록 마음이 급했다.
기실 올리버는 2년이나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시는 그런 짓 말라며 경찰에게 경고를 받았을 때도 길어야 반년이겠거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반년이 1년이 되고, 1년이 2년이 되기는 금방이었다.
그는 심란한 얼굴로 기차역 전경을 돌아보았다. 헤스터가 돌아왔다기에 오킹엄으로 올라가지만, 올리버는 아직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당연히 보고 싶으면서도, 겨우 아문 상처를 건드리는 것은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어쩌면 만나서 용서를 구하는 것조차 사치인지도 몰랐다.
올리버는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채로 객실에 도착했다. 아직은 한산한 일등석 객실. 그는 그곳에서 키가 작아 짐을 올리는 데 애를 먹는 소녀를 발견했다.
“꼬마 아가씨가 고생이 많네.”
올리버는 별생각 없이 짐을 올려 주었다. 그런데 소녀는 감사 인사도 없이 창가 자리로 쏙 들어가 버렸다. 굳이 인사를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지만, 해괴한 일이기는 했다.
올리버는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좌석을 확인했다. 어떻게든 시선을 피하려 애쓰는 소녀에겐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바로 옆 좌석이 그의 자리였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소녀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뭐, 뭐예요?”
“내 좌석에 내가 앉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올리버는 그리 말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소녀가 질색하며 몸을 뒤로 뺐다.
“여기가 확실해요? 티켓 다시 확인해 봐요.”
“응. 맞아.”
“정말요? 진짜로?”
“어.”
“티켓 이리 줘 봐요. 내가 확인해 볼게요.”
“글쎄, 맞다니…….”
거듭 되묻는 소리에 올리버가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돌리던 참이었다. 엉겁결에 소녀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별안간 번개라도 맞은 듯이 굳어 버렸다.
“……헤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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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not cunning witch
제2권
교활한 자일스
이른 새벽녘.
언제나 그렇듯 무덤처럼 적막한 자일스 저택으로 별안간 거대한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나뭇가지가 흉하게 꺾이며, 졸던 새들이 놀라 깍깍 울어 대는 소리가 물밀 듯 번져 갔다. 하지만 그조차 저택의 괴괴한 기세에 짓눌려 금세 가라앉고 말았다. 그리하여 다시금 고요해진 정원에 총총거리는 발소리가 들린 것은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였다.
“도련님?”
요물 고양이가 조심스럽게 후원을 기웃거렸다. 조금 전의 굉음이 착각은 아니었던지, 수풀로 무성하던 후원이 아주 엉망이 되어 버렸다. 누가 보면 폭풍이 지나간 줄 착각할 법했다.
“도, 도련님? 도련님이세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요물 고양이가 머뭇대며 후원으로 발을 내디뎠다. 천성이 용감하든 용감하지 않든 간에, 고양이는 마녀의 시종으로서 용감히 후원을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땅에서 올라오는 새벽의 찬 기운을 느끼기도 전, 토실토실한 몸뚱이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졌다.
젠장. 제기랄. 위기를 직감한 요물 고양이가 수없는 욕을 뇌까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검고 거대한 짐승이 기척도 없이 코앞에 있었다. 세로로 쭉 찢어진 파충류의 눈알이 먹이를 발견한 포식자처럼 번들거렸다.
“끄, 끄아아악!”
요물 고양이는 거의 졸도할 지경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생을 이렇듯 비참하게 마감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어둠에 쌓인 후원에서 검은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조용히 해.”
“도, 도련님? 세드릭 도련님이셔요?”
요물 고양이가 반색하며 얼른 그편으로 달려갔다. 탐욕스러운 파충류의 시선도 출렁거리는 살을 좇아 이동했다.
“도련님. 저걸 여기로 데려오시면 어떡해요!”
“그럼 어디로 가.”
“야산에 두고 오셔도 되고, 아니면 그냥 국경에 두고 오셔도……. 여기 좀 보세요. 저게 후원도 다 망가트렸잖아요.”
“어차피 후원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나지막한 목소리엔 피로가 겹겹이 배어 있었다. 고양이는 세드릭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저택으로 발을 놀렸다. 물론 그래 봤자 단번에 잡힐 걸음이었다.
“어머니를 뵙고 올 테니까 보살피고 있어.”
“네에? 제가요?”
요물 고양이는 깜짝 놀랐다.
“안 돼요! 도련님, 절대 안 돼요! 저게 저를 잡아먹으면 어쩌시려고!”
“안 그래.”
“그렇다니까요! 좀 보세요! 저거 저거, 도련님 가시면 냉큼 절 잡아먹을 거예요!”
요물 고양이의 거듭되는 간청에 세드릭이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는 저택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렸다. 토실토실한 요물 고양이를 좇던 파충류의 눈이 그제야 세드릭에게로 돌아왔다.
“윈터. 먹지 마.”
세드릭이 단호하게 말했다. 검은 파충류가 애원하듯 몸을 뒤척거렸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골난 파충류가 꼬리를 뒤틀며 후원의 수풀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요물 고양이와 파충류를 단둘이 남겨 둔 채 세드릭은 저택으로 향했다. 평생을 한집에서 은거하는 보통의 마녀와 달리 도무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바바라 자일스의 습성으로, 그녀의 보금자리는 잉그람 전역에 퍼져 있었다. 세드릭도 이번 페어퍼드의 저택은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다.
“어머나. 오래간만이야, 세드릭.”
저택의 뒷문, 아직 어스름한 시간임에도 자일스 가문의 어린 도련님을 맞이하러 나온 이가 있었다.
“채스터티.”
“거의 1년 만에 보는 거지? 국경에서 용의 뒤치다꺼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 막내.”
채스터티는 말릴 틈도 없이 세드릭의 얼굴을 가리던 검은 후드를 벗겨 냈다. 흐린 달빛 아래 장시간 비행으로 지친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흐음……. 살이 좀 빠진 것도 같고.”
채스터티가 얼굴을 바짝 드밀며 종알댔다. 세드릭이 짜증스럽게 그녀를 밀어 냈다.
“어머니는.”
“안에 계시지. 네 귀여운 애완동물이 하도 난리를 쳐서 진즉 깨셨단다.”
세드릭은 노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으로 들어섰다. 자욱한 어둠에 가려진 복도.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양옆으로 촛불이 한둘 켜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밝아진 복도 끄트머리에 낯선 사내가 엉거주춤 서 있었다. 세드릭을 뒤따르던 채스터티가 왈칵 표정을 구겼다.
“세드릭 자일스 경?”
사내가 영 어색한 얼굴로 다가왔다. 세드릭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제자리에서 가만히 사내를 응시했다. 멋쩍게 웃던 사내는 채스터티의 흉흉한 시선을 알아채곤 바짝 굳어 버렸다.
세드릭이 의외로 선선하게 손을 내밀었다.
“세드릭 자일스입니다.”
“예?”
멍하니 세드릭의 손을 쳐다보던 사내가 황급히 손을 맞잡았다.
“성함이?”
“아, 해리 듀어든입니다.”
“듀어든이라면, 혹 에지워스 듀어든 경의 친족인가요?”
“백부 되십니다. 아시는군요!”
해리 듀어든은 과히 반색했다.
“일전에 뵌 적이 있습니다. 훌륭한 마법사셨지요.”
“그, 그렇죠! 나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특히 백부님께서 집필하신 『마법과 당근의 상관관계』라는 책이 일품이에요. 혹시 읽어 보셨습니까?”
둘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채스터티가 불쑥 끼어들었다.
“마법과 당근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니? 정말 미안하지만 해리 듀어든 씨, 우리 막내는 취향이 워낙 고상하셔서 그런 잡서는 손에도 대지 않는답니다.”
조롱하는 목소리에 해리의 안색이 도로 푸르죽죽해졌다. 세드릭은 엷은 한숨을 지었다.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고요한 응접실.
세드릭은 뜨거운 커피로 몸을 녹이고, 채스터티는 마법으로 불을 지핀 벽난로에서 가벼운 장난을 부려댔다. 오래간만에 재회한 남매라기엔 지나치게 삭막했지만, 애당초 둘은 그리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 만나자마자 서로 으르렁대지 않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오래지 않아 해리 듀어든이 휠체어를 끌고 나타났다. 휠체어에는 바바라 자일스가 힘없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매만지던 세드릭이 벌떡 일어났다. 바바라는 가까이 다가오려는 아들을 눈짓으로 제지하며 벽난로를 손짓했다. 해리가 눈치껏 휠체어를 벽난로 가까이로 밀었다.
“올 거면 연락부터 해야지. 새벽부터 이게 웬 소란이니.”
“……죄송합니다.”
세드릭이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답했다. 바바라가 곤한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여하간 완전히 돌아온 모양이구나. 국왕과의 계약은 끝난 거니?”
“예.”
2년 전, 세드릭은 국왕과 장기 계약을 맺었다. 그는 계약에 따라 지난 2년간 국경에서 성실하게 복무하며 용을 교련했다. 덩치가 커질수록 포악함도 불어나던 용이 그나마 자제력을 지니게 된 것은 모두 피나는 교련 덕분이었다.
“그래. 수고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니?”
“오래간만에 돌아왔는데 여기에 며칠은 머물러야죠.”
채스터티가 냉큼 답변을 채 갔다. 그러자 바바라가 그녀답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너희는 엄연히 수습 과정을 끝마친 정식 마녀, 마법사잖니. 이제 너희의 길을 가야지.”
“그래도 어머니께서 이렇게 아프신데에…….”
“됐다. 채스터티, 너도 날이 밝으면 이만 돌아가렴. 도대체가 시끄러워서 못 살겠구나.”
바바라가 매정하게 말했다. 채스터티가 울상을 짓는 반면에, 해리 듀어든의 안색은 심히 밝아졌다.
“나는 돌아가서 다시 자야겠다. 이만 조용히들 가고……. 한데 세드릭은 어디로 간다고 했지?”
문가를 가리키던 바바라가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세드릭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오킹엄으로 가려고 합니다.”
“왕도에?”
바바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 오랫동안 국경에 있었으니 당분간 왕도에 머무는 것도 괜찮겠지. 그러고 보니 디아나가 오킹엄에 있다지 않았니?”
“그럼요. 사랑하는 언니가 거기 계시잖아요.”
채스터티가 입을 비쭉였다. 잠시 고민하던 바바라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디아나를 보거든 안부 전해 주렴.”
“예.”
그 말을 끝으로 바바라를 태운 휠체어는 바람처럼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휠체어를 끄는 해리 듀어든의 발걸음이 마치 사자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유달리 날쌨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채스터티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종알거렸다.
“정말이지, 어머니는 어째서 저런 얼뜨기를 들이신 거람? 생긴 게 반반하니 봐 줄 만하긴 해도 하는 짓이 영 어설프잖아.”
“마음에 드셨나 보지.”
“그러니까 왜 저런 얼뜨기가 마음에 드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바바라 자일스는 10년 넘게 남편과 별거 중이었다. 그간 숱한 마법사들과 연애하며 때때로 마음에 드는 연인을 집으로 들이기도 했다. 해리 듀어든은 정확히 바바라 자일스가 네 번째로 집에 들인 연인이었다.
“꽤 어려 보이던데.”
세드릭은 해리 듀어든의 어수룩한 행동거지를 떠올렸다. 여드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얼굴이나, 주눅 든 태도를 생각하면 아무리 높게 쳐줘도 20대 중반을 넘지 못할 것이었다.
“올해로 스물셋인가 넷인가. 세상에, 나보다 서너 살 정도 더 많네? 도대체 나이는 어디로 먹었다니?”
“네가 물어보든지.”
“세드릭, 우리 막내. 네 아버지는 어머니랑 재결합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셔? 혹시 나 모르는 사이에 이혼장 제출하신 건 아니지? 응?”
채스터티가 제법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가로이 찻잔을 매만지던 세드릭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제발 그 헛된 바람 좀 버려. 벌써 10년이야.”
“왜! 어째서!”
채스터티가 손바닥으로 소파를 마구 때리며 외쳤다. 상당히 정신 사나운 몸짓이었지만, 세드릭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채스터티는 어릴 적부터 유난히 어머니의 애인을 싫어했다. 수프에 도마뱀을 넣고, 물에 술을 타는 악독한 장난도 어머니의 애인을 괴롭히며 성장한 습관이었다.
“채스터티.”
그래서 세드릭은 채스터티를 말리는 대신 자그마한 주머니를 던졌다. 채스터티가 의아한 얼굴로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이게 뭐야?”
“기셀베링거의 열매. 어머니께 전해 드려.”
“뭐어? 너 이거 어디서 구했어?”
기셀베링거의 열매는 오직 반제의 얼음산맥에서만 열리는 귀한 열매다. 원기를 회복하는 약재로는 최고로 치기에 부르는 대로 값이 매겨졌다.
“국경에서 운 좋게.”
세드릭은 다시 출발할 채비를 했다. 후원이 시끄러운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윈터의 인내심이 끝나 가는 듯싶었다. 세상천지 용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용과 최초로 동조한 주인뿐이었다.
그때, 채스터티가 서둘러 쪽지를 내밀었다.
“헤스터 솔의 주소야. 디아나도 아마 거기서 지낼걸.”
세드릭이 멈칫하며 쪽지를 받아 들었다. 잠시간 쪽지를 내려다보던 그가 짧게 말했다.
“고마워.”
“말로만?”
채스터티가 으스대듯 한 손을 내밀었다. 세드릭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시필레의 별빛.”
“그건 나도 있단다. 기셀베링거의 열매는 또 없니?”
“더 있어도 너는 안 줘. 『멜리산드로』 초판은 어때.”
“이왕 하는 김에 선심 더 써 보렴.”
“너는 욕심을 좀 버려야 해. 귄터 볼크하르트의 유해.”
“콜.”
거래에 만족한 채스터티가 배부른 고양이처럼 손을 내저었다.
“잘 가렴, 세드릭. 부디 올해는 더 이상 만나지 말자.”
“그럼 내년에는 만날 생각이었어?”
남매는 그렇게 서로에게 가장 익숙한 방법으로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