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활하지 못한 마녀에게-6화 (6/18)

#5

마녀의 비밀

“흐윽……. 미안하다. 루카스, 알비, 에드가, 세실, 폴…….”

촛불이 간신히 시야를 밝히는 어두운 객실. 쇠를 갈아 내듯 선득한 울음소리가 드문드문 이어진다.

“너희들의 복수는 내가 반드시…….”

그러나 흐느끼는 남자, 모건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한데 모아 놓은 동지들의 시신을 망연자실 보던 그가 불현듯 어느 시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굳어 가는 핏자국과 차가운 송장의 온도가 지치러진 마음을 더욱 난도질했다.

모건 코트니.

그는 잉그람 북부의 투텔 지방 출신으로 본디 의과대학에 재학하는 학생이었다. 고작 50년 전 잉그람의 영토로 편입되어 갖은 차별을 받아 온 투텔의 사람들이 분리 독립을 외치는 동안, 모건은 그저 학업에만 매진할 뿐이었다. 하지만 으레 그러하듯 반전의 계기는 느닷없이 찾아왔다.

모건에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우애 깊은 남동생이 있었다. 마을에서 손꼽히는 수재였던 형과 달리 크게 명민했던 것은 아니나, 천성이 소탈하고 상냥하여 누구든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타고나길 불의를 참지 못하던 동생은 모건이 집을 비운 새 투텔 독립군에 입대했다. 학기를 끝마치고 고향으로 내려온 모건을 반긴 것은 싸늘하게 식은 동생의 시체였다.

자기 자신보다 동생을 아꼈던 모건은 그 길로 독립군에 자원입대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번영하는 잉그람과 달리 투텔은 해를 거듭하며 쇠퇴하고 있었다. 독립군의 씨를 말려 죽이려는 잉그람 정부의 차별 정책과 인근의 공업화가 맞물려 투텔의 경제가 매해 급락했기 때문이다.

독립군은 무너지는 투텔을 떠받칠 수 없었다. 낙담한 모건은 뜻이 맞는 소수의 동지와 함께 독립군을 빠져나와, 한때 국경에서 악명을 떨쳤던 잉그람 무장 혁명군으로 들어갔다. 작금 투텔을 옥죄는 사슬은 전부 잉그람에서 기인하므로, 투텔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반드시 잉그람이 무너져야 했다.

잉그람 무장 혁명군은 와해되기 직전의 조직. 모건이 수뇌부에 오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기회였다. 아크라이트 왕조의 통치 아래 잉그람은 이제 막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산세 험한 국경에서 게릴라 작전을 펴는 것은 아직 가능했으나, 그러자니 투텔 독립군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보다 과격하게 잉그람에 맞서고자 독립군을 나온 것이었다.

때마침 모건은 우연히 정체불명의 마법사를 만났다. 워낙에 여러 외국어의 억양이 뒤섞인 탓에 쉽사리 출신을 가늠하기 어려운 자였다.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군요.’

모건의 어려운 사정을 들은 마법사는 아주 흔쾌히 말했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마치 신께서 보살피시는 듯 계획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진행되었다. 기차를 탈취하기로 예정된 거사의 전날, 검은 로브를 둘러쓴 마법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니올로. 당신 혼자서 하겠다는 말입니까?’ ‘나는 마음껏 날뛸 곳이 필요해. 10년 넘게 강제로 마력을 봉인당한 심정을 네가 아나?’

느닷없이 등장한 마법사, 니올로 팔리아치는 마법에 문외한인 모건이 보기에도 자못 기세가 흉흉했다. 함께 계획을 수립했던 마법사는 하릴없이 물러났다.

‘좋습니다. 당신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마법사가 충고했다.

‘그렇다면 목적지는 펜잔스로 하십시오. 그곳에 겨울을 불러오는 마법사가 있습니다. 이즈리얼 알피어스의 진정한 후계로 칭송받는 천재지만, 때마침 늦봄이고 당신과는 상성이 좋지 않으니 여러모로 상대하기 적당할 겁니다. 광인 니올로의 화려한 부활을 선전하기도 좋은 상대고요.’

정체 모를 마법사는 그리 홀홀히 떠나고 니올로 팔리아치만이 남았다. 하지만 모건은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잉그람 사령부는 30년 전 국경에서나 강성했던 무장 혁명군에 마법사가 합류한 줄은 꿈에도 모를 터였다. 당시 모건의 머릿속에는 불타는 잉그람의 시가지만이 광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건은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투텔 독립군에서부터 함께였던 동지들이 전부 죽고 혼자만 살아남은 현실을. 동지들로 가득한 객실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고향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죄 싸늘한 송장이 되어 버렸다.

오래도록 동지의 가슴팍에서 울던 모건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얼른 기차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대로 동지들을 남기고 떠나자니 좀체 발걸음이 떼어지질 않았으나, 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선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불현듯 어떤 영감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동지들의 시신을 잉그람에 순순히 넘길 수 없다는 일념과, 잉그람의 자산인 기차를 멀쩡하게 돌려줄 수 없다는 일념.

비감에 젖어 있던 모건의 눈이 다시금 형형하게 빛났다. 행여나 이런 일이 발생할까 싶어 화물칸에 들여놓은 것이 있었다. 니올로 팔리아치는 공연한 짓이라며 비웃었지만, 결국은 이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모건은 비틀거리며 기차의 후미로 향했다. 미약한 촛불이 그의 앞길을 위태로이 밝혔다.

*      *      *

암암한 객실.

황금의 꽃 둘시네아가 속살대는 아름다운 곡조가 흘러드는 와중에도 숨 막히는 긴장감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덜어지긴커녕 칼날처럼 아슬아슬한 감각을 시시각각 좁히고 있다.

디아나는 바싹 얼어붙은 채 니올로를 주시했다. 그녀에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니올로가 서 있는 창가로 달빛이 내리비친다는 것이다. 비록 역광을 받아 표정은 가늠할 수 없지만,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기엔 족했다. 게다가 디아나가 엉거주춤 앉아 있는 구석까진 달빛이 닿지 않으니, 짐작건대 니올로 팔리아치는 뵈지 않은 목전을 훑으며 승냥이처럼 그녀의 기척을 살피고 있을 터였다.

디아나는 신속하게 판단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별들의 왕 둘시네아가 뜬 것은 분명했다. 스스로 질서를 상징하는 왕이 도래했으니, 혼란을 틈타 세를 넓히던 역천의 별 무제타는 이제 몸을 사릴 것이었다. 더욱이 화구가 사라진 걸 보면 니올로는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듯하니, 지금이 바로 디아나에겐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짧게 숨을 들이쉰 디아나가 결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접질린 왼쪽 발목이 몹시 시큰거렸지만, 용케 신음 한 번 내지 않으며 문가로 한 걸음 내디뎠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마법을 사용할 준비도 마쳤다. 그녀의 탄생성인 암흑의 별 칼리스토는 하늘의 질서가 닿지 않는 변방에 위치했다. 둘시네아와 무제타가 패권을 다투는 하늘의 혼란은 그녀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어?’

그런데 문득 디아나는 니올로와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보지 못하는 어둠 속이라며 안심하던 것도 잠시, 느닷없이 니올로가 짐승처럼 사납게 달려들었다. 미처 마법을 부릴 겨를조차 없었다.

디아나는 부지불식간 억세게 어깨를 붙잡혀 바닥을 굴렀다. 접질린 발목이 니올로의 육중한 몸에 짓눌리자 절로 우는 소리가 샜다. 경악한 디아나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괄티에로 벨리에서 살아남은 마법사를 상대하기엔 지극히 미약했다.

니올로는 한 손으로 그녀를 제압했다. 그르렁대는 섬뜩한 소리와 낯선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디아나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저도 모르게 마법을 부렸다.

별안간 온갖 잡동사니가 니올로에게로 떨어졌다. 승객들의 가방, 옷가지, 말라비틀어진 과일, 심지어는 기차의 철근 조각까지 소나기처럼 내리쏟아졌다. 디아나는 니올로가 휘청대는 틈을 타 엉금엉금 기었다. 하지만 그조차 나약한 발악이었다.

“아악!”

접질린 발목이 붙잡혔다. 디아나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뒤이어 비명조차 불가한 고통이 벼락처럼 그녀의 복부를 관통했다.

“네가, 감히…….”

니올로가 야수처럼 중얼댔다. 하지만 디아나는 듣지 못했다. 마치 인두에 지지듯 끔찍한 고통이었다. 막심한 고통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디아나는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조금이라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금이라도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사지를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불현듯 손끝에 무른 것이 닿았다. 디아나는 판단할 겨를도 없이 그것을 짓이겼다. 파낼 것처럼 힘을 짜냈다. 그러자 치 떨리듯 거대한 비명이 터지며, 온몸을 짓누르던 손길이 삽시에 사라졌다. 디아나는 헐떡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차마 돌아볼 수 없는 뒤편에선 끔찍하고 끔찍한 비명이 길게 울려 퍼졌다.

디아나는 기고 또 기었다. 접질린 발목은 아리지도 않을 만큼 복부가 너무 아팠다. 식은땀이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멈추지 못했다. 아직도 그의 가혹한 손길이 발치에 머무는 것만 같았다. 디아나는 울며 흐느끼며 기었다.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울음소리가 뱃속에서만 마구 들끓었다.

“아흑…….”

결국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눈물부터 터졌다. 디아나는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며 간신히 객실의 의자 사이로 기어들어 갔다. 시커먼 어둠이 눌어붙은 구석자리에 등을 기대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참았던 고통도 함께 밀려들었다.

디아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 냈다. 신음이 새 나갈라치면 입술을 짓씹으며 가까스로 삼켜 냈다. 그리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복부를 짚어 보았다.

“이, 이게 뭐야…….”

판판한 복부에 웬 얇고 날카로운 것이 꽂혀 있었다. 디아나는 기겁하며 손을 뗐다. 사위가 어두워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형상이 있었다. 질겁한 디아나는 질끈 눈을 감으며 양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턱이 달달 떨리고 입을 막은 손이 자꾸만 식은땀에 미끄러졌다.

“언니, 도와줘…….”

디아나가 흐느끼며 웅얼거렸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구석자리. 숨통을 죄어 오는 공포에 몸서리치며 디아나는 아이처럼 울었다. 불러도 듣지 못할 이름과, 차마 부르지 못하는 이름 사이에서 망설이며.

*      *      *

‘네가 디아나니?’

디아나는 낯모르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헤스터를 처음 만났다. 자신과 꼭 닮은 붉은 머리에 잿빛 눈. 가족을 모르고 자란 디아나는 한눈에 헤스터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매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헤스터는 도제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어린 마녀였고, 디아나는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쳐 줄 고명한 스승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그녀의 딱한 사정을 접한 여명의 마녀, 바바라 자일스가 어미 잃은 아이를 맡겠노라 흔쾌히 약속했다.

그리해 디아나는 어머니의 장례를 끝내자마자, 아직은 낯선 스승과 함께 묘지를 떠나야 했다. 언니가 보고픈 마음에 자꾸만 마차의 창문을 흘깃거렸으나, 무심한 스승은 계속해서 말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렇게 디아나는 나이 일곱에 자일스의 도제가 되었다. 그녀의 스승인 바바라 자일스는 제법 상냥한 마녀였지만, 으레 그러하듯 타인에게 관심이 많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배 아파 낳은 자식과도 사이가 데면데면할 정도니, 한때의 연민으로 거둔 계집아이는 오죽할까.

디아나는 스승이 어려웠다. 그녀의 서투른 마법을 볼 때마다 곤혹스러워하는 스승을 마주하는 날이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린 디아나가 여기기에 스승은 언제고 부족한 제자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디아나는 한 번 버려진 도제에겐 다음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알 만큼은 조숙했다.

어린 디아나를 절벽으로 내몬 것은 또 있었다.

인적이라곤 당최 찾아볼 수 없는 음산한 저택. 그곳에는 스승에게 미리 전해 듣지 못한 세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또래보다 키가 한 뼘은 큰 설리번 자일스가 첫째고, 심술보가 가득한 채스터티 자일스가 둘째며, 디아나보다 한 살 적은 나이에도 감사납기 그지없던 세드릭 자일스가 막내였다. 바바라는 그들에게 디아나를 소개하며 지나가는 말로 잘 지내라 일렀으나, 디아나를 향한 삼 남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특히 세드릭 자일스가 그러했다.

세드릭 자일스는 바바라의 유일한 친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잠정적인 후계로 지목되고 있었다. 문제는 마법 사회가 모계를 따르는 점이었다.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는 인간 사회와 달리, 마법 사회에선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고 어머니의 가문을 따랐다. 비록 세드릭이 바바라 자일스의 유일무이한 친자라고는 하나 그는 엄연한 남자였다. 더욱이 세드릭에게는 <교활한 자일스>가 차마 용납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고리타분하기로는 잉그람에서 제일가는 자일스의 마녀?마법사들이 그를 두고 볼 리 없었다.

자일스의 친족들은 틈만 나면 수장의 후계자로 채스터티를 권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심지어는 남편과 별거하던 바바라에게 새로운 혼처를 권하기도 했다. 그리 후계 자리가 불안할수록 세드릭의 불안감도 나날이 커져만 갔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어머니가 데려온 도제가 세드릭의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설리번이 냉소적으로 웃고 채스터티가 새로운 장난감을 놀릴 생각에 신이 난 동안, 세드릭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디아나를 쏘아볼 뿐이었다. 낯선 환경에 겁먹은 디아나가 위축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후로 자일스 저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옥이 되었다. 남을 곯리기를 삶의 낙으로 아는 채스터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디아나를 괴롭혀 댔다. 도대체가 단순한 애교로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수프에 몰래 도마뱀을 집어넣는 것은 예사였고, 추운 겨울날에 느닷없이 얼음물을 쏟아붓거나 일부러 옷에 불씨를 튀긴 적도 있었다.

웬만큼 재능 있는 마법사라면 채스터티의 장난에 짜증을 낼지언정 크게 다치지는 않겠다. 그러나 디아나는 채스터티처럼 탁월한 마녀가 아니었다. 그저 안색이 시퍼렇게 질리거나, 속상한 마음에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채스터티는 신선한 반응에 깔깔 웃기만 했다. 어느 날 우연히 그녀의 장난을 목격한 바바라 자일스가 아니었다면, 디아나는 오래도록 못된 장난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세드릭 자일스였다. 디아나는 채스터티가 몹시 성가시긴 해도 악의가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세드릭은 아니었다. 그는 선명한 악의를 품고 있었다. 지나가는 말소리에도, 스치는 시선에도 칼날처럼 차가운 독기가 스며 있었다. 디아나는 그것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세상에 너처럼 쓸모없는 마녀는 처음 본다.’

그것이 세드릭 자일스가 디아나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고,

‘디아나 솔. 너는 양심도 없구나. 어머니께서 동정으로 널 거두셨음을 안다면 적어도 한 사람 몫은 해야지. 지금 너는 오히려 자일스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어?’

대범하게도 바바라 자일스가 동석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꺼냈으며,

‘그리젤다 솔은 1년간 헛짓한 모양이야. 어쩌다 그런 위대한 마녀가 너 같은 실수를 낳은 거지?’

경멸이 들끓는 얼굴로 매일같이 그런 말을 건네고는 했다.

세드릭은 채스터티처럼 그녀에게 물리적인 해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녀를 동등하게 여기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동등한 존재가 아니기에 손댈 가치도 없다고 여긴 것이었다.

아무리 심지 굳더라도 자신을 멸시하는 사람과 매일을 함께하면 자연스레 자존감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세드릭의 독설은 끊임없이 디아나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처음에는 부인하다가도 그것이 하루가 되고,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자 진정 그의 말이 맞나 싶은 것이었다.

어린 디아나는 나날이 의기소침해졌다. 그러나 무심한 바바라는 제자의 불안을 헤아리지 못했다. 스승이 돌보지 않는 음산한 저택에서 디아나는 조금씩 메말라 갔다. 가족을 모르고 자라 본능적으로 사랑받길 간절히 원하던 아이는 사랑 대신으로 악의와 무관심에 허덕였다. 그녀에게 무한한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은 오로지 헤스터뿐이었으나, 그녀는 언제나 멀리 있었다. 언니가 보내오는 편지만 기다리며 살기에 자일스의 저택은 지독히도 무참한 곳이었다.

결국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디아나는 금기에 손을 대고 말았다.

서재에서 그 책을 발견한 것은 지극히 우연이었다. 서재에는 가문의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온갖 희귀한 책이 많았으므로, 금서 한두 권쯤은 족히 있음직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억지로 생을 연명하던 어린 소녀에게 금서란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금서를 탐닉했고, 그예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디아나는 언제나 후회했다. 금기가 괜히 금기가 아님을 그때는 왜 인지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사람은 늘 저지르고 후회한다는 격언처럼, 디아나는 매일매일 그 일을 곱씹으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후회로 그날을 지울 수는 없다지만, 적어도 다시는 저지르지 않으리라 다짐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디아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살고 싶을 뿐이었다.

디아나는 힘없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이상하게 눈앞이 흐릿했다. 가물가물한 시야를 바로 하고자 연신 눈을 깜박였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결국 디아나는 열없이 눈꺼풀을 내렸다.

그즈음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먼 데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상하게 규칙적이었다. 디아나는 낯선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차츰차츰 가까워지는 소리. 기차에 핏물처럼 눌어붙은 정적을 부단히 깨트리는 소리는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었다.

이제는 마치 천둥치듯 바닥을 쾅쾅 짓밟던 소리가 문득 지척에서 멈추었다. 다시금 고요해진 사위에서 그녀의 호흡과 엇갈리는 낯선 숨소리가 다가왔다. 디아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맞은편 창가를 내리비추던 조요한 달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달빛을 가린 거대한 남자가 예리한 살기를 내비치며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고작 여기로 도망친 건가?”

니올로가 이죽거렸다. 흐릿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디아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가요.”

“뭐?”

“도망가요.”

디아나가 힘없이 속살거렸다.

“도망가라고? 내가 어째서?”

니올로는 디아나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며 허리를 낮게 굽혔다. 시커먼 밤이 눈앞을 가렸으나, 그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어렵지 않게 그의 윤곽선을 그려냈다.

니올로는 더 이상 로브를 쓰고 있지 않았다. 비로소 세상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모진 고문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특히 한쪽 눈알이 기괴하게 부풀었다. 디아나는 그에게서 흘러나는 피 냄새를 쉬이 맡을 수 있었다.

“덕분에 아주 오래간만에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괄티에로 벨리에서 교단의 광신도들이 그런 짓을 했었지. 다신 기억하기 싫었던 추억을 새삼 떠올리게 해 주었으니, 마땅히 네게도 같은 고통을 선사해야 하지 않겠나.”

니올로가 히죽 웃었다. 벽에 늘어져 있던 디아나가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날 죽이려고요?”

“그래.”

“나는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디아나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무리 나쁜 마법사여도, 죽어 마땅한 마법사여도 나는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도망가요.”

디아나는 숫제 흐느끼기 시작했다. 니올로는 그저 멍하니 디아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떠름한 표정을 짓던 찰나, 불현듯 이상한 광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새벽이 밝기 직전이다. 하루 중에서 가장 어두울 시간이건만, 그럼에도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있었다.

밤보다 어둡고, 암흑보다 짙은 그림자.

니올로는 홀린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언지간 그곳에는 이형(異形)의 생명체가 있었다.

숫양의 머리에 사람과 유사한 육신. 그리고 등뼈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파충류의 꼬리가 허공을 마구 헤집었다. ‘그것’은 니올로보다 족히 다섯 뼘은 거대하며, 산전수전 겪어 온 그조차 난생처음 목격하는 괴이한 형상이었다.

디아나가 목메어 소리쳤다.

“난 분명 경고했어요. 도망가라고, 죽이고 싶지 않다고 그리 말했는데……. 왜 듣지 않은 거예요, 왜…….”

그러나 니올로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마법사의 본능으로 당장 달아나야 함을 알았지만, 그의 시선은 신상(神像)처럼 우뚝 선 이형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저게 무언지 알았다.

[너는 내 계약자가 아니구나.]

이형의 존재가 물었다.

[너는 뭐지?]

그것은, 악마(惡魔)였다.

*      *      *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예전부터 니올로 팔리아치를 지칭하는 이름은 많았다. 화염의 마법사, 팔리아치의 수치, 광인 니올로, 뮈티레의 오점……. 모두가 미쳤다며 손가락질했으나, 아무도 그가 명성 높은 동족들을 무참히 살해한 범인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니올로가 속한 팔리아치의 이름은 너무나도 숭고했다.

따라서 그가 의심받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붉어진 눈. 마녀와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광인 니올로가 악마를 소환했다며 떠들어 댔다. 니올로는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으나, 결국 엄숙한 재판장에서 진실을 토로하고 말았다.

그는 악마를 소환한 적이 있었다.

사실 니올로는 어릴 적부터 악마학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소환된 악마가 심심풀이로 도시 하나를 멸망시킨 일화, 악마의 손이 닿아 불임이 된 마녀의 이야기, 악마에 홀려 동족을 배반한 마법사의 전설. 어린 니올로가 즐겨 듣던 이야기란 죄 그런 것이었다. 아들의 모난 성정을 저어한 모친이 금서를 전부 불태웠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 악마를 소환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모친의 바람대로 니올로는 악마학에 무지한 채 자랐다. 하지만 성년이 되어 방문한 반제에서 그는 우연히 금서를 접하고 말았다. 반제는 산티그마 교단을 국교로 삼은 어엿한 중앙삼국이지만, 교국(敎國)이 자리하여 성직자의 권세가 높은 메시나에 비해서는 교단의 감시가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니올로는 그곳에서 악마학을 습득했다. 악마를 소환한 곳도 바로 반제였다.

기실 성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미 이전에 수없이 소환에 실패했던 터라, 은연중에는 이번에도 실패하리라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환진은 처음으로 빛을 발했고, 코뿔소와 뱀을 합친 듯한 기괴한 생명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니올로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악마임을 알아챘다.

[인간. 너는 어떻게 나를 즐겁게 해 줄 테냐?]

그러나 악마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니올로는 감언이설로 악마를 계약을 맺으려 부단히 노력했으나, 악마는 지루해진 기색으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너는 안 되겠군.]

그 순간 타는 듯한 고통이 안구를 침범했다. 느닷없는 고통에 니올로가 바닥을 구르는 사이 악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악마의 흔적은 방 안을 그득 채운 유황 냄새가 전부였다. 더하자면 금색이었던 니올로의 눈이 붉어진 것도 악마가 그에게 남긴 영원한 상흔일 터였다.

이후로 니올로는 다시는 악마 소환에 성공하지 못했다. 갑자기 붉어진 눈에 의심을 사 그간의 범행이 발각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니, 이제 여생에 악마를 볼 날은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저 의문스러울 따름이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눈 감았다가 뜨는 새, 천장과 바닥이 뒤바뀌길 수백 번. 갑작스레 회전이 멈추자, 목이 잘린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시체를 응시하던 니올로는 뒤늦게 깨달았다.

저건 내 몸이구나.

[마법사는 머리를 파괴해야 죽는다더니, 정말이로구나.]

악마가 흐뭇하게 말했다. 피 묻은 손으로 니올로의 잘린 머리통을 들어 올리자, 자연스레 니올로의 시선이 악마를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디아나. 이건 내가 가져가도 되겠느냐? 아랫것들에게 하사하면 꽤 즐거워할 것 같구나.]

디아나는 침묵했다. 악마가 나타난 이래, 그녀는 줄곧 벽에 달라붙어 흐느끼기만 했다. 그조차 기력이 쇠하여 야트막한 숨소리로만 들릴 지경이었다.

조용한 그녀를 의아하게 살피던 악마가 돌연 탄성을 터트렸다.

[디아나, 디아나 솔. 아직도 내 모습이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냐? 하지만 너도 이해를 해 주어야 한다. 너도 잘 알다시피 지하에는 인간이 없어. 이 몸을 발견하기까지도 수십 년이 걸렸다.]

악마의 눈매가 시무룩하게 쳐졌다.

[다만 내 얼굴이 싫은 것이라면 나도 어찌할 수 없구나. 산양은 내 본체이기에 바꿀 수가 없다. 이 얼굴이 그리도 싫은 것이냐?]

그러자 디아나가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잔뜩 쉰 목소리가 갈라진 입술 사이로 드문드문 흘러나왔다.

“……꺼져.”

[뭐?]

악마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조차 진저리 난다는 듯 디아나는 사납게 눈을 치떴다.

“그 머리를 갖든 말든,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 안 하니까 꺼지라고.”

[네가 날 부른 것이 장장 50년 만이다. 물론 지하의 시간이 여기보다 훨씬 빠르게 흐른다만, 그래도 그렇지. 벌써 헤어지자니…….]

“상관없다고 했잖아! 제발 꺼지라고! 내 눈앞에서 당장 사라지란 말야!”

견디다 못한 디아나가 머리를 뒤흔들며 일갈했다. 느닷없는 고함에 당황한 악마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악마는 어느새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혹시 어디 다쳤느냐?]

디아나는 힘겹게 숨만 색색 내쉬었다. 악마가 산양의 머리를 들이밀며 호들갑을 떨었다.

[여기 상처가 깊지 않느냐! 어서 치료해야지!]

“내가…… 분명 사라지라고…….”

[일단 상처를 치료하고 보자꾸나. 이렇게나 피를 많이 흘렸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어.]

악마는 디아나를 책망하며 거대한 손을 내밀었다. 기겁한 디아나가 곧장 그 손을 쳐 냈다. 악마가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자, 디아나는 몹시 혐오하는 표정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꺼지라고 했잖아! 이번에도 네 이름을 불러야 꺼질 테야?”

[디, 디아나. 잠시만 진정해라.]

“꺼져! 마르고트! 꺼지란 말야!”

디아나는 성치 않은 몸으로 악을 써 댔다. 낯빛은 아까부터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피는 멈출 생각을 안 했다. 악마는 근심스러운 기색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언제 정신을 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몸으로 연이어 무리를 해 대니 염려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별안간 먼 데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쾅!

폭발은 한 번이 아니었다. 귀를 찢는 날카로운 굉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심지어는 갈수록 소리의 진원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악마가 디아나에게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악마의 고개가 왼편으로 돌아갔다. 낮게 가라앉은 눈이 어둠에 휩싸인 복도를 유심히 살폈다.

[……오늘은 이만 헤어져야겠구나.]

악마가 아쉽다는 듯이 속삭였다.

[그리젤다의 딸아. 나를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마려무나.]

악마는 자취 없이 사라졌다. 짙은 유황 냄새만이 객실을 맴돌며 악마의 존재를 알리는 가운데, 폭발음은 점차 가까워졌다. 귀를 찢다 못해 골을 울리는 굉음이었지만, 디아나는 그저 느릿하게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이미 시야가 어두웠다. 기차가 폭발하는 소리마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디아나는 끝내 진득한 수마에 이끌려 눈을 감고야 말았다. 정신을 놓기 직전, 어디선가 그리운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야심한 시각.

풀밭에 피어난 황금의 꽃 둘시네아가 끊임없이 노래하는 가운데, 군인들이 철로를 따라 기차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의 상대는 마법을 잃어버린 마법사뿐이지만, 그의 손에 참혹하게 죽어 간 동료만도 수십이니 내딛는 걸음마다 신중이 깃들 수밖에 없었다.

헤스터는 철로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불안하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족히 반나절 넘게 기원을 올린 까닭에 안색이 심히 창백했으나, 군영을 박차고 나서는 감히 그녀를 만류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 밤, 헤스터는 기적을 이루어 냈다. 모두가 불가하다고 여겼던 둘시네아 꽃을 피워 냈고, 별들의 왕 둘시네아를 모셔 와 하늘의 혼란을 잠재웠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신의 몫을 온전히 완수했으므로 이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디아나가 아직 살아 있기를, 군인들이 흉악한 마법사의 손에서 디아나를 무사히 구출해 내길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막 기차에 탑승하려는 순간, 난데없이 화물칸이 폭발했다. 폭발은 그에 멈추지 않았다. 첫 번째 굉음이 잦아들기 무섭게 이웃한 화물칸이 연달아 폭발하기 시작했다. 마치 꼬리에 꼬리를 잇듯 기차의 후미에서 시작된 폭발이 빠르게 전진하자, 모두가 아연하여 그편을 쳐다볼 뿐이었다.

“나와! 나오라고 해! 후퇴하라고! 당장!”

옥슬리 대령이 기겁하여 외쳤다. 막 기차에 들어서려던 군인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헤스터가 물었다.

“후퇴라니요?”

“저거, 저 폭발, 저건 마법으로 어찌 안 됩니까?”

“예?”

“기차를 좀 보십시오! 하나씩 폭발하고 있잖습니까! 저러다간 객실까지 폭발할 텐데 어떻게 저런 사지로 들여보내겠습니까! 디아나 양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요!”

점차 커져가는 굉음에 대령의 목소리도 묻혔다. 넋 나간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던 헤스터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차마 말릴 새도 없이 그녀의 걸음은 곧장 기차를 향했다. 횃불을 든 군인을 지나치고, 거센 바람 맞으며 일어나는 들풀을 지르밟으며.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 그녀를 강하게 돌려세웠다.

“어디 가?”

올리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헤스터의 어깨를 붙잡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놔요.”

“어딜, 어디에 가려는 건데.”

“알잖아요.”

“……설마 기차에 들어가려고?”

헤스터는 침묵했다. 올리버가 아연한 표정으로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가면 안 돼. 못 가.”

“가야 해요.”

“기차가 폭발하고 있잖아! 가면 죽는다고!”

올리버가 일갈했다. 그럼에도 헤스터는 꿋꿋했다. 올리버는 비통하게 낯을 일그러트리며 간청했다.

“제발……. 당신이 죽는 꼴은 못 봐.”

헤스터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차례로 폭발하는 기차의 열기와 쉼 없이 머리를 후려치는 굉음의 복판에서, 일렁이는 횃불에 비치는 남자의 얼굴이 참으로 아프게 다가왔다. 혹은 처음으로 듣는 그의 진심에 가슴 저민지도 모르겠다.

헤스터가 슬프게 웃었다.

“난 가지 않아도 죽어요.”

올리버는 애달피 그녀를 응시했다. 헤스터의 어깨를 붙들던 손길이 점차 거두어졌다.

헤스터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멈추지 않는 폭발과, 새카만 하늘로 치솟는 흉포한 불길. 그 처참한 광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자취 없이 사라졌다.

올리버는 망연자실 헤스터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화물칸 하나가 요란한 굉음을 터트리며 주저앉던 때,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차는 거뭇한 연기로 자욱했다. 헤스터는 사위를 둘러보며 연신 기침을 뱉어 냈다. 그리고 이미 폭발한 뒤편에는 디아나가 없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앞쪽으로 내달렸다.

전투의 흔적인지, 승객들의 피난 흔적인지, 객실은 하나같이 난장판이었다. 헤스터는 짐 가방에, 혹은 송장에 걸려 몇 번이나 고꾸라질 뻔했다. 그러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폭발음은 시시각각 가까워지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디아나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리 정신없이 헤매던 와중, 헤스터는 불현듯 선득한 예감을 받았다. 이토록 위급한 상황에서도 선뜻 전진할 수 없는 야릇한 감각이었다. 헤스터는 다음 객실로 이어지는 문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마녀의 직감으로 그녀는 저편에 무언가 있음을 알았다.

마침내 헤스터가 문을 열었다. 불안한 감이 들어맞았다.

“디아나!”

연기에 휩싸여 희끄무레한 창가, 디아나가 힘없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황급히 그편으로 달려간 헤스터가 일순 허옇게 질렸다. 디아나의 복부에 얇은 철근 조각이 박혀 있었다. 질겁한 헤스터가 무심코 한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았으나, 그조차 소스라치게 놀라며 떼어 내고 말았다.

방금 바닥을 짚었던 손이 핏물로 축축했다.

“……디아나?”

헤스터는 떨리는 손으로 디아나의 어깨를 슬슬 흔들었다.

“디아나, 제발 정신 차려. 제발…….”

목소리에 흐느낌이 서렸다. 눈물 몇 방울 떨어트린 헤스터가 서둘러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하지만 여전히 미동 없는 디아나의 모습에 다시금 눈가가 젖어 들었다.

이렇게 잃는 걸까. 그리 허망하게 어머니를 보냈듯 이번에도…….

헤스터는 양손으로 눈두덩을 짚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아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그리 허무하게 잃지 않을 것이다. 죽어 가는 어머니에게 고했던 맹세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건만, 이리 덧없이 놓칠 수는 없었다. 이토록 쉬이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제가 디아나를 지킬게요.’

헤스터는 어머니를 떠나보내던 열둘의 어린아이처럼 맹세했다.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내거는 약속이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리해 다시는 홀로 외롭게 남지 않도록.

어느덧 폭발음이 가까웠다. 헤스터는 기침을 토해 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연기가 너무 자욱해서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시야가 닿지 않으면 좌표에 의존하여 이동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겐 지도가 없었다.

헤스터는 신속하게 판단했다. 마녀가 이동마법을 행할 때 지도에 의존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좌표가 정확하지 않으면 그대로 목숨이 다하는 수가 있으므로. 자칫 잘못하다가는 드높은 하늘로, 깊은 심해로, 심지어는 땅 속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문틈으로 새어 드는 불길을 조용히 노려보던 헤스터가 이내 디아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좌표 없는 마법을 발현했다.

숨통을 틀어막던 매캐한 연기가 삽시에 사라졌다. 대신 살갗에 닿는 차가운 밤공기에 퍼뜩 정신이 들 무렵, 헤스터는 디아나를 품에 안고 강하게 바닥을 굴렀다. 어깨와 등에 돌덩이가 아프게 박혔다. 허공으로 이동한 모양인지 한참이나 바닥을 구르고서 겨우 멈췄다.

헤스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윗몸을 일으켰다. 온몸에서 격통이 밀려들었으나, 지금은 그런 고통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헤스터는 다급히 품속의 디아나부터 살폈다.

아스라한 별빛이 내려와 자매를 고요히 비추었다. 헤스터는 울 듯한 표정으로 디아나의 얼굴을 조심스레 쓸었다. 핏기 없는 안색에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약한 맥. 복부에서 진득한 선혈이 흘렀지만, 헤스터는 당최 손쓸 방도를 몰랐다. 그녀는 치유에 특화된 마녀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얼 우선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스터?”

저 멀리 타오르는 기차를 등지고, 한 남자가 이편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폭발하는 기차의 불길보다도 남자에게 들린 횃불이 더욱 눈부시게 이지러졌다.

“아가씨는 왜 이래? 어디 다쳤어?”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올리버가 물었다. 헤스터는 입술을 떨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를 바닥에 눕혀 횃불로 상처를 비추어 본 올리버가 미간을 찌푸렸다. 복부에 박힌 철근은 그리 두껍진 않았으나,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올리버는 횃불을 헤스터에게 넘긴 뒤 곧장 디아나를 안아 들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스터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리버가 굳은 얼굴로 헤스터를 돌아보았다.

“일단 군의관에게 보이자. 아가씨는 아마―”

“디아나는 괜찮을 거예요.”

헤스터가 확고히 대답했다. 그새 불안감을 지워 낸 얼굴에선 결연한 다짐만이 엿보였다.

헤스터는 지체 없이 앞장섰다. 높이 든 횃불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벽을 이끌듯 어둠을 몰아냈다. 한 발, 두 발. 땅을 박차는 걸음걸이가 차츰 힘을 더해 갔다.

아직 동트지 않은 한밤.

세상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으나, 분명 새벽은 밝아 올 것이었다. 늘 그렇듯이.

*      *      *

첫 일광이 가느다랗게 어둠을 가로지르는 동녘에서 여명의 별 페베가 따스한 빛을 뿜어냈다. 가장 밤늦은 시간까지 뜨는 별이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별. 전설 속 괴물을 몰아내던 하늘의 목동처럼 여명의 별은 아직 잔존하는 밤의 장막을 거둬 내며 새벽을 밝히고 있었다.

여명은 그리 처참한 언덕에도 찾아들었다. 폭발하여 뼈대만 남은 기차와, 불에 그슬린 철로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군영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승객들이 아연한 표정으로 그 부근에 몰려 있고, 군인들은 생존자를 찾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아직 물러가지 않은 밤에 몸을 숨긴 올빼미 한 마리. 기차가 차례차례 무너져 내리던 모습을, 어찌할 줄 모르던 군대를, 행방이 묘연해진 마법사를, 다급하던 붉은 머리 자매를 전부 지켜본 올빼미가 이윽고 연옥색 눈을 빛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새가 향하는 곳은 북녘이었다. 아직 여명이 닿지 못하는 북쪽으로, 아직 어둠에 잠든 북쪽으로, 주인이 부르는 북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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