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활하지 못한 마녀에게-5화 (5/18)

#4

둘시네아 피는 밤

뚝. 뚜욱.

괴괴한 사위에 핏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면면히 울렸다. 디아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건너편을 흘깃거렸다. 달빛이 미처 닿지 못하는 객실의 구석 자리. 핏방울 튀기는 소리는 바로 거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도 요란하던 총성은커녕 발소리조차 잠잠한 객실은 자못 적막했다. 다른 승객들은 전부 탈출했는지 인기척도 없었다. 심지어는 마법사마저 자리를 비운 까닭에, 디아나는 간혹 제 숨소리에도 놀라며 불안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귀에 거슬리던 소음을 그저 천장에서 물새는 소리로 착각한 것이 실수였다. 유난스레 달빛이 훤한 창밖을 하릴없이 내다보던 디아나는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가 그만 졸도할 뻔했다. 어느샌가 그녀의 발치까지 진득한 물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핏물이었다.

이후로는 건너편을 살피느라 여념 없었다. 비록 너무 어두워서 형상조차 제대로 분간되지 않았으나, 어쩐지 위태로운 신음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디아나는 잔뜩 울상을 지었다. 운신이라도 자유롭다면 좋으련만, 그녀의 팔목은 의자 팔걸이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디아나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요…….”

최대한 소리를 죽인 속닥임이 꼭 천둥처럼 커다랗게 들렸다. 디아나는 제풀에 놀라 황급히 양옆으로 닫힌 문을 살폈다. 다행히 문가는 고요했다. 그에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은 디아나가 재차 운을 떼려던 순간.

“……그러니까 그건 당신이…….”

별안간 낯선 목소리가 윙윙거리며 들려왔다. 엇갈리는 발소리와 생경한 목소리가 가까워지자, 그녀는 자연히 공포에 질렸다.

객실 문이 벌컥 열렸다. 먼저 들어온 사람은 로브를 둘러쓴 마법사요, 서둘러 뒤따르는 자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괴한이었다.

“이젠 남은 인원도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달아나야 한단 말입니다!”

마치 쇠로 쇠를 갈아 내듯 선득한 목소리였다. 디아나는 직감적으로 저 괴한이 일전에 잉그람 무장 혁명군 운운하던 자임을 알아챘다.

“모건. 대체 언제까지 애처럼 징징거릴 건가? 일단 두고 보자니까.”

“당신은 아까부터 그 소리뿐이잖습니까! 대체 언제까지 두고 볼 건지 정확히 설명해 보십시오!”

괴한이 분개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디아나 쪽으로 다가왔다.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사렸지만, 마법사가 향한 곳은 그녀의 맞은편이었다. 그곳에 앉은 누군가를 살펴보는 듯했다.

“젠장. 무시하지 말고 대답을 하란…….”

괴한의 말이 뚝 끊겼다. 디아나는 불현듯이 고개를 들었다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괴한이 부릅뜬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여자애는 뭡니까?”

마법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 마녀야.”

“마녀요? 마녀가 왜 여기에…….”

“쓸데없이 걱정하지 마. 별거 아니니까.”

“마녀가 어떻게 별게 아닙니까! 군인은 죄다 깡그리 죽여 버리더니 어째서 이 마녀는 살려 둔 거냔 말입니다!”

“글쎄, 정말로 별거 아니라니까. 쟨 마력을 다 소진해서 한동안은 마법도 못 써. 그냥 평범한 계집애야.”

마법사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괴한은 더는 왈가왈부하진 않았으나, 디아나를 노려보는 눈초리만은 여전히 살벌했다. 디아나는 식은땀만 줄줄 흘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마법사는 의자에 축 늘어진 군인을 계속해서 발로 툭툭 쳤다. 군인이 곧 앓는 소리를 내며 흐리멍덩하게 눈을 떴다.

“정신이 드나?”

“으…….”

“뭐야, 아직도 졸려?”

마법사는 그리 말하며 군인의 어깨를 꽉 쥐었다. 흐릿하던 군인의 눈이 대번에 확장되었다. 살가죽이 벗겨져 너덜너덜해진 어깨가 무자비하게 뒤틀리자, 목청에서 고래고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직 말짱하네. 이젠 정신이 좀 드나?”

마법사는 마침내 군인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 냈다. 군인이 그제야 숨을 격하게 몰아쉬었다.

“다른…… 다른 사람들은…….”

“다 죽고 너 혼자 남았다.”

“나도 죽여라…….”

군인이 비장하게 말했다. 마법사가 이죽거렸다.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곧 동료들을 만날 수 있을 게다. 다만, 내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마법사는 군인의 눈앞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검은 로브 아래로 위험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드러났다.

“도대체 누굴 데려온 거냐?”

“무, 무슨 소리를…….”

“다 알고 있으니까 모르는 척은 하지 마라. 휴고 알피어스 말고 또 누굴 데려왔느냔 말이야.”

그러자 괴한이 깜짝 놀랐다.

“휴고 알피어스 외에 다른 마법사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 원거리에서 마법을 조작하는 실력을 보면 여간내기가 아니야.”

마법사가 무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고통에 겨워 얼굴을 잔뜩 구겼던 군인이 불현듯 웃기 시작했다. 거친 웃음소리 사이로 드문드문 말소리가 이어졌다.

“너희는…… 이제 끝이다. 절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거다…….”

“그리도 유명한 녀석이야? 도대체 이름이 뭔데?”

“너넨 끝이야…….”

“이봐, 아직 귀는 안 멀었지? 이름이 뭐냐고 묻잖아.”

하지만 군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꼿꼿하게 마법사를 노려보는 눈빛에 독기가 그득했다. 그러자 마법사는 말없이 괴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괴한은 못미더운 기색으로 권총을 건네주었다.

마법사는 권총으로 군인의 이마를 겨눴다. 군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법사는 예상했다는 듯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총구를 군인의 어깨로 내려뜨렸다. 단단한 총구가 삽시간에 어깨의 상처를 파고들었다.

“끄아아아악!”

군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디아나는 등을 둥글게 만 채로 덜덜 떨었다. 처절한 비명 소리와 질척거리며 무자비하게 상처를 헤집는 소음이 귓전을 때렸다. 그 소음이 점차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헤스터! 헤스터 솔!”

끝내 군인의 입에서 이름이 튀어나왔다. 마법사는 미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커다란 총성이 기차에 눌어붙은 정적을 처참하게 깨트렸다. 군인은 즉사했다.

마법사가 물었다.

“헤스터 솔이 누구지?”

“모릅니까? 헤스터 솔을?”

괴한이 황망히 되물었다.

“내가 모르는 걸 보면 꽤 젊은 마녀인 듯한데.”

“젊지요. 젊고말고요. 요새 잉그람에서 가장 유명한 마녀일 겁니다. 성좌의 마녀라면 적어도 잉그람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정말로 모릅니까?”

“설마 아는 걸 모른다고 할까. 대체 누구길래 그리도 요란을 떠는 거냐?”

마법사는 무심히 권총을 돌려주었다. 괴한이 멀거니 중얼댔다.

“하지만 그 유명한 그리젤다 솔의 딸이잖습니까.”

“뭐? 그리젤다 솔에게 딸이 있었어?”

“듣기로는 어머니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그리젤다 솔은 죽었지만 헤스터 솔이 있으니, 흔히들 잉그람에는 영원한 영광이 있으리라 말하더군요.”

“죽어? 누가? 그리젤다 솔이 죽었어?”

마법사가 멍하니 물었다. 괴한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리젤다 솔이 죽은 줄도 몰랐습니까?”

그러자 마법사는 적잖이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불곰처럼 거대한 몸이 시무룩하게 늘어졌다.

“탈옥하거든 꼭 그 여자에게 대결을 청하려고 했는데…….”

“그, 그래도 그리젤다 솔의 딸이 있지 않습니까. 헤스터 솔과는 곧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풀 죽어 앉아 있던 마법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괴한에게는 다행으로 마법사는 곧 활기를 되찾았다.

“좋아. 그럼 지금 해야 할 일부터 하자고.”

마법사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디아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래서 꼬마 아가씨 이름이 뭐라고?”

디아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녀도 여기서 본명을 밝히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세간에는 위대한 마녀 그리젤다 솔에겐 외동딸 헤스터뿐이라고 알려졌으나,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본명을 밝히는 건 아주 우둔한 짓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디아나는 거짓말을 제법 잘했다.

“내 이름은 디아나 탤벗이에요.”

살 에일 듯 고요한 침묵 속으로 여린 음성이 새어 들었다. 마법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탤벗?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가문인데.”

당연한 일이다. 탤벗이란 비안카 골드워디의 『탤벗 부인』 시리즈에서 따온 성씨였으므로. 디아나는 제목부터 괴이쩍은 소설을 알려 준 올리버에게 마음 깊이 감사했다. 물론 언니가 통속소설을 즐긴다던 올리버의 주장에는 여전히 공감할 수 없었지만.

“부모님이 마법사가 아니셨어요.”

“뭐야. 너 칠삭둥이였나?”

“네. 잉그람에선 돌연변이라는 고상한 단어로 칭하지만요.”

디아나는 애써 긴장한 티를 감추었다. 다행히 마법사는 별다른 의심 없이 수긍했다.

“그럼 스승은 누구지?”

마법 사회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스승의 이름이었다. 본인의 이름은 어찌어찌 넘어갔어도 스승의 이름은 조금 달랐다. 애당초 도제를 들이는 것도 어느 정도 명망이 있어야 가한 일. 여기서 괜한 이름을 댔다간 순식간에 거짓이 들통나는 수가 있었다.

디아나는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손을 말아 쥐며 슬그머니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로브에 가려 잘은 보이지 않았으나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만은 뻔히 느껴졌다. 결국 디아나는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바바라 자일스요.”

“뭐?”

“바바라 자일스라고요. 우리 스승님.”

한없이 심드렁하던 마법사가 처음으로 낯빛을 바꾸었다.

“바바라 자일스? 지금 여명의 마녀를 말하는 거냐?”

“네. 자일스 가문의 수장이요. 내 분수에 맞지 않는 고명하신 스승님이죠.”

디아나가 맥없이 말했다.

“바바라 자일스가 왜 너 같은 칠삭둥이를 도제로 들인 거지?”

“글쎄요. 그건 스승님만이 아시겠죠.”

“너도 이유를 몰라?”

“아무렴, 거지에게 적선하는 마음이셨겠죠. 아니면 불가능에 도전하던 젊은 날의 치기라거나.”

디아나는 울적하게 대꾸했다.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던 마법사가 크게 웃었다.

“꼬마가 꽤나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그런데 지금 네 꼴을 보아하니 어째 스승인 여명의 마녀의 위명도 제법 빛이 바랜 것 같은데.”

“불가능이 괜히 불가능이겠어요? 스승님이 아무리 뛰어나셔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게 어찌 그렇게 쉽겠어요.”

마법사는 물끄러미 디아나를 쳐다보았다. 유난히 집요한 눈빛에 디아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바바라 자일스가 칠삭둥이를 제자로 두었다고……. 꼬마 아가씨. 탄생성에 맹세할 수 있겠어?”

탄생성에게 올리는 맹세란, 마법사가 흔히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언약이다. 마법을 선사한 별에게는 언제나 신실해야 하므로, 별에게 올리는 맹세로 얼마간의 진실성을 판가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칼리스토의 광명에 대고 맹세해요.”

그러나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다.

디아나는 별에게 맹세하며 내심으로 별에게 용서를 구했다. 비록 칼리스토가 다른 거성(巨星)처럼 그녀에게 탁월한 힘을 내려 주진 않았으나, 그조차 없었다면 마법 사회에는 평생 발도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디아나는 부디 하늘의 별이 그녀의 진심을, 거짓을 맹세할 수밖에 없는 작금의 위태로운 현실을 굽어보길 바랐다.

“탄생성이 암흑의 별 칼리스토야?”

마법사가 경악했다. 슬프게도 디아나는 이런 질문이 몹시 익숙했다.

“참 불운하게도요.”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동족 중에서 가장 박복하군. 어쩌다가 그런 별의 축복을 받아서는…….”

마법사가 진심으로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뜻밖에 적에게서 동정을 받은 디아나는 그저 속없이 웃었다. 그녀의 탄생성은 잔인무도한 살인마의 마음에도 연민의 씨앗을 뿌리는 대단한 별이었다.

멀찍이서 둘을 지켜보던 괴한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저 마녀. 안 죽일 겁니까?”

디아나는 일순 어깨를 움찔했다. 마법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왜?”

“왜라니요. 마녀잖습니까?”

“어차피 지금은 마법도 못쓰는데 굳이 죽여야 하나?”

“언제 마력을 되찾을지 알고요?”

괴한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마법사는 피식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서라. 탄생성이 암흑의 별이라잖냐.”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쨌든 마녀라는 게 중요하죠.”

“네가 뭘 몰라서 그래. 이 꼬마는 피라미 중에서도 제일 하찮은 피라미야. 더구나 나는 이런 일로 동족을 죽이기는 싫다.”

그에 괴한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낯을 구겼다.

“지금까지 대결 운운하며 죽인 동족만도 열 손가락을 넘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 그리 죽이고 나니 이제야 동족 귀한 줄을 알겠습니까?”

“……적당히 해라, 모건. 내가 지금 이 꼬마를 죽이지 않는 건 죽일 가치도 없어서야. 나는 싸울 가치가 있는 자와 싸우고, 죽일 가치가 있는 자만 죽인다.”

마법사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러고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꼬마도 괜히 날 거스르지 않는 게 좋아. 나는 원래 죽일 가치가 있는 자만 죽이지만, 가끔은 개미 새끼 밟아 죽이는 것도 재미있거든.”

조금 전 불운한 마녀를 동정하던 마법사는 온데간데없다. 소름끼치는 붉은 눈이 어느새 살기로 충만했다. 디아나는 공포로 물든 표정을 어찌할 길 없이 황급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      *      *

겨울의 별 발디비아가 도로 잠들며 때아닌 북풍이 잦아드는 한밤. 그러나 군영의 지휘 막사만은 홀로 차디찬 겨울에 머무르고 있었다.

“니올로 팔리아치라니요?”

헤스터가 얼어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적측의 마법사가 니올로 팔리아치일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누가 그런 소리를……. 그 남자가 그러던가요?”

그녀답지 않게 예민한 반응이었다. 휴고는 변함없이 차분하게 응대했다.

“마법사의 신체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무제타를 탄생성으로 타고난 마법사 중에서 십자가를 몸에 새긴 자가 그리 흔하겠습니까? 경도 알다시피 니올로 팔리아치는 역천의 별 무제타의 은혜를 입었으며, 괄티에로 벨리에 수감된 강대한 마법사입니다. 몸에 십자가 문신이 있는 것도, 단신으로 수십의 군사에 맞선 것도 납득할 만합니다.”

“하지만 괄티에로 벨리입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천혜의 감옥이에요. 아무리 강대한 마법사라 한들, 마력을 운영할 수조차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삼엄한 경비를 뚫을까요? 더구나 괄티에로 벨리의 죄인이 탈옥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붉은 눈을 보았다더군요.”

그에 철옹성처럼 단단하던 헤스터의 얼굴이 망연히 일그러졌다.

“……일단 괄티에로 벨리에 연락을 넣겠습니다.”

잠긴 목을 억지로 긁어내듯 힘겨운 목소리였다. 헤스터가 의자에 앉아 정신없이 편지를 휘갈기는 사이, 옥슬리 대령이 의아한 기색으로 휴고에게 물었다.

“적측 마법사의 정체를 아셨습니까? 도대체 니올로 팔리아치가 누구입니까?”

“참, 대령은 모르겠군요.”

휴고가 선선히 대답했다.

“15년 전 결투를 핑계로 무고한 동족 열댓 명을 살해한 자입니다. 팔리아치의 직계라 꽤나 충격이 컸지요. 종신형을 받았을 텐데 어떻게 괄티에로 벨리에서 탈출했는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위험한 자입니까?”

“파괴마법을 유난히 즐겼다고 들었습니다만, 니올로 팔리아치가 그토록 악명이 자자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이제 헤스터는 생경한 남부의 지도를 훑으며 괄티에로 벨리의 좌표를 찾고 있었다. 타인의 생활 반경을 침범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아는 마법 사회의 관습으로 마법사는 늘 전서구나 우편 체계를 통해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지금 헤스터는 그런 예의를 차릴 겨를이 없었다.

휴고도 굳이 헤스터를 말리진 않았다. 대신 일렁이는 촛불을 가만히 응시하며 낮게 읊조릴 뿐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악마를 소환했다더군요.”

악마.

어쩐지 스산하게 들리는 단어에 옥슬리 대령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악마라면 롭기서(書)에 등장하는 신을 배반한 천사를 이르십니까?”

“그건 경전의 이야기잖습니까. 나는 실존하는 생명체를 말하는 겁니다.”

“아니, 그럼 악마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말씀입니까?”

휴고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힘을 두려워한 인간이 제멋대로 악마란 삿된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요.”

“그럼 그것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혹시 여기에도 있는 겁니까?”

“설마 그렇게 쉬이 발견되겠습니까? 악마학은 워낙에 오래전부터 금기시되는 영역이라 나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다만 전해지는 이야기로 악마는 별빛 닿지 않는 암암한 세상에 존재한다더군요.”

악마는 산티그마 교단이 마법 사회와 오래간 반목한 이유 중에 하나였다. 대개 바깥세상에 지극히 무관심한 마법사와 달리, 악마는 손짓 하나로 인간을 해하는 악심을 지녔다고 한다. 어느 마녀가 뭣 모르고 소환한 악마가 재미로 도시를 멸망시킨 옛이야기는 각 나라마다 전해지고 있었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존재이니, 천년전쟁이 종식한 이후로 악마학에 대한 연구가 일절 금지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악마를 그저 경전의 괴물로 치부하는 인간과 달리, 마녀?마법사들은 어릴 적부터 악마에 대한 경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그렇다고 악마에 대해 상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다. 스승이 도제에게 가르치는 것은 악마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악마에 대한 공포였기 때문이다.

“악마와 계약한 사람은 눈이 붉어진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실제로도 괄티에로 벨리로 호송될 당시 니올로 팔리아치의 눈이 붉었다고 하지만, 직접 보지 못했으니 더 드릴 말씀은 없군요.”

옥슬리 대령은 창백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하게 살아온 대령에게 휴고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나치게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그즈음 헤스터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괄티에로 벨리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니올로 팔리아치가 정말로 탈옥했다면…….”

헤스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고단한 듯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얼굴에 절망이 괴였다.

“니올로 팔리아치는 안 됩니다. 그자만은 안 돼요. 내 자매는, 디아나는 평범한 마녀예요. 감히 니올로 팔리아치에 대적하지 못합니다.”

무턱대고 기차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반, 다시금 차근하게 작전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한편으로는 니올로 팔리아치에게 동생만은 무사히 보내 달라 간청하고픈 일념이 솟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 디아나를 데리러 가지 않았던 스스로를 탓하는 원망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헤스터는 그리 무너지는 억장을 다잡는 데만도 힘겨웠다.

휴고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자매가 죽었다고 여깁니까?”

헤스터의 낯이 일순 새파랗게 질렸다. 휴고는 변함없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죽었을 수도 있죠. 이미 동족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적이 있으니, 어린 마녀에게 무슨 동정심이 들겠습니까. 하지만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휴고는 어지럽게 펼쳐진 지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차츰 정돈되는 책상처럼 그의 말소리도 점차 명료해졌다.

“공연한 희망을 품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만 혹시나 자매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경이 먼저 무너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알다시피 나는 당분간 마법을 부리지 못하고, 다른 마법사를 불러오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소요될 테지요. 그러니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사람도, 니올로 팔리아치에게 맞서 자매를 구할 수 있는 사람도 오직 경뿐입니다.”

휴고가 무감하게 헤스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경은 지금 굉장히 엉망입니다. 제발 정신 차려요. 내게 이런 소리나 듣고 싶습니까?”

마법사란 본디 앞뜰에서 사람이 죽어 가도 모른 체하는 족속이다. 다른 마법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휴고 알피어스가 굳이 저런 말을 늘어놓는 것은 몹시 이례적이었다.

헤스터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몰골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으나, 적어도 한없이 비감에 젖어 있던 눈에 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휴고는 한숨을 내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도학에 그리 밝지 못한 그도 족히 헤아릴 수 있는 하늘의 무질서. 본능적으로 자신의 탄생성을 찾아 헤매던 벽안이 불현듯 정지했다.

“……겨울이 끝났군요.”

여름잠에서 잠시 깨어났던 겨울의 별 발디비아도, 난데없이 늦봄을 얼렸던 겨울도 모조리 물러갔다.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오는 열기 속에서 군영을 휘감은 불안감은 차츰 짙어져만 갔다.

*      *      *

기차의 어느 객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문득 자그마한 불씨가 피어올랐다. 손톱만 하던 불씨는 어느새 갓난아기 머리만큼 자라났다. 스산한 불빛이 객실을 조망하는 가운데, 마법사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드디어 망할 겨울이 끝난 모양이군.”

싸늘한 북풍이 가시자, 세상은 어느덧 늦봄의 훈훈한 열기로 만연했다. 디아나는 창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어붙었던 봄의 별 오르페델라가 다시금 찬란하니, 모르긴 몰라도 저이의 탄생성도 녹았음이 분명했다. 자력으로 탈출하는 일말의 가능성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사이, 마법사와 괴한은 한가롭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제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까?”

“그래. 이제야 녹은 모양이다. 겨울이 생각보다 짧아서 망정이었지, 자칫하다간 정말 눈 뜨고 코 베일 뻔했어.”

“어쨌든 다행입니다. 문제는 지도인데……. 지금 제 수중에는 잉그람 전도(全圖)와 반제의 국경 지도뿐입니다. 아시다시피 타국의 지도를 구하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서요.”

“지도? 난데없이 무슨 소리지?”

분주한 손길로 짐을 헤치던 괴한이 멈칫하며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후퇴 안 합니까?”

“아까도 그런 헛소리를 하더니.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거냐?”

마법사가 코웃음을 쳤다. 순간 괴한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동지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당신이 잉그람 측 마법사의 술수에 걸려 꼼짝도 못 하는 동안요! 분명 적군을 몰살하리라 단언하지 않았습니까! 한데 이게 몰살입니까? 몰살당한 건 우리란 말입니다!”

“나는 잉그람 군대를 몰살하리라 말했지, 너희의 목숨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마법사가 차갑게 말했다.

“더군다나 모건, 네가 진정으로 동지들을 아낀다면 그들의 복수를 다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지금 네 꼴을 봐라. 차마 혼자 도망칠 용기는 없어서 나한테 빌붙는 거 아냐.”

“복수라고요? 지금 복수라 했습니까? 나와 동지들의 뜻은 한낱 복수가 아닙니다. 우리의 뜻은 잉그람의 전복이며 투텔의 분리 독립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복수란 명목으로 여기서 군인 몇의 목숨을 거둔들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오늘 죽은 동지들을 위한다면, 후퇴하여 나중을 기약하는 것이 맞습니다. 고작 복수란 이름으로 동지들의 숭고한 희생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괴한이 피 토하듯 경고했다. 마법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외면했다.

“그럼 나는 좀 더 즐겨야겠다. 이런 치욕을 준 휴고 알피어스나 헤스터 솔, 그중 하나의 목숨이라도 끊어 놔야 마음이 편하지.”

“뭐, 뭐라고요?”

“도망치려면 가라. 붙잡지 않아.”

“이보십시오!”

괴한이 황급히 마법사의 어깨를 잡아챘다. 마법사는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모건. 너는 평범한 인간치고는 꽤 괜찮은 녀석이다. 그러니 좋게 말할 때 눈앞에서 사라져라.”

금방이라도 숨통을 끊을 만치 살벌한 음성이었다. 기백에 압도당한 괴한은 대답할 여력조차 없었다. 잉그람 군대와 맞설 때도 느끼지 못했던 공포가 전신을 기어올랐다.

그때, 여린 목소리가 흉흉한 적막을 파고들었다.

“헤스터 솔은 당신 생각보다 훨씬 강한 마녀예요.”

마법사와 괴한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이제껏 쥐 죽은 듯 조용하던 디아나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헤스터 솔은 나 같은 잔챙이도 알 정도로 유명한 마녀거든요. 그녀의 탄생성이 별들의 왕 둘시네아라는 건 알아요? 백색전당에 최연소로 이름을 올렸고, 잉그람 마법공회의 차기 의장감으로 공공연히 이름이 오르내리는 마녀가 바로 헤스터 솔이에요. 그런 마녀와 겨루어 무사하려면 적어도 계획은 철저해야 하지 않겠어요? 당신들은 펜잔스에 휴고 알피어스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어도, 헤스터 솔은 예상하지 못했을 거 아녜요.”

펜잔스에 휴고 알피어스가 있음은 비밀이 아니다. 평범한 사업가인 올리버 펜리도 알던 사실이니, 무려 기차를 납치하려던 저들이 몰랐을 리 없다. 그러므로 기차를 납치할 장소로 ‘휴고 알피어스가 있는 펜잔스’를 택한 것은 순전히 저들의 계획이었다. 지금은 겨울의 별 발디비아의 힘이 잦아드는 늦봄. 완전히 그릇된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헤스터 솔은? 오킹엄에 머무는 마녀가 펜잔스에 있으리라곤, 혹은 펜잔스까지 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국왕의 친서가 있어야 마지못해 움직이는 마법사의 생리를 상기하면, 더더욱 믿기 힘들었다.

그러니 저들의 계획은 헤스터 솔로 인해 완전히 틀어졌다. 마치 디아나가, 올리버가, 잉그람의 군대가 정체 모를 마법사의 존재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듯이.

“달아나요. 여기서 가장 가까운 천문대는 아마 오킹엄에나 있을 테니, 당신의 이동마법을 추적해서 어디로 달아났는지 알아내려면 제법 시간이 소요될 거예요. 그사이 이동마법을 여러 번 사용해서 국경 너머로 달아나면 짐작건대 잉그람은 당신을 찾아내지 못할걸요. 지금은 이만 후퇴해서 훗날을 기약하는 편이, 나중에 헤스터 솔이나 휴고 알피어스를 죽이는 데도 유리하지 않겠어요?”

디아나가 명쾌하게 말을 끝맺었다. 불안감일랑 찾아볼 수 없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이었으나, 좌석에 가려진 양손은 가여우리만치 덜덜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짓눌릴 듯 끔찍한 적막 속에서 디아나는 하염없이 마법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달아나라고?”

오래지 않아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로 도망친 건데, 또 어디로 달아나라는 거지?”

디아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법사가 히죽 웃었다.

“그러고 보니 꼬마 아가씨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군.”

마법사가 차츰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뚜벅뚜벅. 바닥을 울리던 경쾌한 발소리는 금세 피 웅덩이 뒤흔드는 질척한 소리로 일변했다.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마법사가 섬뜩하게 웃었다.

“내 이름은 니올로 팔리아치다. 세상에 나온 지 워낙 오래되어 꼬마 아가씨가 나를 알려나 모르겠군.”

니올로 팔리아치.

메시나의 신성귀족이자, 숭고한 팔리아치의 직계. 그러나 역천의 별 무제타의 힘을 타고나 마법 사회에서 배척받았고, 나이가 들수록 흉포해지는 성정을 가문조차 다스리기 힘겨웠다고 한다. 결국 그의 악행을 심판하기 위하여 중앙삼국의 위대한 마녀?마법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만장일치로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리해 니올로 팔리아치가 괄티에로 벨리에 수감된 지 어언 10년.

디아나는 경악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희미하게 잔재하던 불안감이 그제야 실체를 갖추었다. 손목에 새겨진 십자가. 유달리 광폭한 성정. 이상하게 쟁투에 익숙한 듯 보였던 몸놀림.

무엇보다도 불길하게 빛나던 붉은 눈.

“화염의 마법사…….”

디아나가 침음을 흘렸다. 니올로 팔리아치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 이명도 오래간만에 들어 보는군. 아마 이명도감에서 지워진 이름일 텐데. 바바라 자일스가 일러 주던가?”

니올로는 그리 말하며 디아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한 손에 잡히는 조막만 한 머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니올로는 피식거리며 디아나의 붉은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나는 너처럼 어린 동족을 죽이는 게 영 기껍지가 않다. 동족에 한해 나는 오로지 맞수만 죽이거든. 혹시 꼬마가 나중에 대단한 마녀가 될지 누가 알겠어. 나는 그런 가능성까지 뿌리 뽑기는 싫다. 그건 미래의 내 기쁨을 위해서 남겨 놔야지. 그렇지 않나?”

니올로는 이내 흥미가 가신 얼굴로 손을 뗐다. 그의 관심은 오직 ‘죽일 만한 상대’에만 머물렀다.

“목숨이나마 부지하고 싶으면 앞으로는 조용히 있어라. 지금처럼 괜한 짓 하지―”

“정말 악마를 소환했어요?”

성마른 음성이 별안간 니올로의 말을 잘라 냈다. 니올로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물었다.

“뭐?”

“악마를 정말로 소환했냐고요.”

디아나가 더디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공포에 잠식된 잿빛 눈이 불빛에 드러났다.

니올로는 무심히 대꾸했다.

“그래. 악마를 보고 나니 눈이 붉어지더군.”

일순 디아나의 낯이 허옇게 질렸다. 막심한 공포와 불안, 이외에도 차마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자그만 얼굴에서 소용돌이쳤다.

니올로는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렸다. 산티그마 교단과 화해한 이래, 수많은 스승은 도제에게 악마에 대한 공포를 단단히 심어 왔다. 금지된 악마학이 다시는 부활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다시는 악마가 이 세상에 발 들일 수 없도록. 하지만 어린 마녀의 교육받은 공포심 따위 그의 알 바 아니었다.

니올로는 차츰 멀어져 갔다. 불빛이 그를 순종하여 뒤따르니, 디아나는 홀로 암암한 어둠 속에 남겨졌다.

어두컴컴한 막사.

문득 촛불이 한둘 켜지기 시작했다. 시계방향으로 하나씩 늘어나는 불빛은 어둠을 일제히 가장자리로 몰아냈다. 아직 물러가지 않은 밤이 호시탐탐 불빛을 노리며 흉하게 아가리를 벌렸으나, 마법으로 피워 올린 불씨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스물의 촛불은 어느덧 둥근 원을 그리며 흉포한 밤으로부터 중심을 지켰다.

헤스터는 촛불로 그린 원의 한가운데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곤하게 가라앉은 시선은 간소한 제단에 머물렀고, 굳게 다물린 입매에는 가눌 수 없는 슬픔의 추가 힘겹게 매달려 있었다. 가히 석상처럼 미동하지 않는 형상이었다. 가지런히 펼쳐진 성도만이 근면하게 별들의 자취를 좇으며 별빛을 발할 뿐이었다.

지금 헤스터는 고심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디아나를 무사히 구출할까. 어떻게 해야 잔악한 니올로 팔리아치를 무력화할까. 안타깝게도 그녀는 결투에 무지했다. 으레 책상물림인 동족과 마찬가지로 헤스터도 일평생 마법 연구에만 매진한 마녀였다. 그녀의 특기인 성도학은 가장 난도 높은 학문으로 손꼽혔지만, 결투에 어울리는 분야는 아니었다. 벌새 한 마리를 죽이는 것보단 벌새를 악어로 둔갑시키는 편이 그녀에겐 차라리 쉬웠다.

하지만 니올로 팔리아치는 달랐다. 그는 결투를 핑계로 명성 높은 동족을 살해했던 악한이다. 게다가 마력을 운용할 수 없는 괄티에로 벨리에서 10년이 넘도록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탈옥에도 성공했다. 선천적으로 남을 해하는 파괴마법에 특출했던 이가 괄티에로 벨리에서 교단의 광신도와 맞서며 생사를 수없이 넘나들었다면, 결투에 대한 감각 자체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헤스터는 쉽사리 기차로 뛰어들 수 없었다. 니올로 팔리아치에게 성급히 맞서다간 비명횡사할 것이 빤했다. 만약 그리해 디아나라도 구출된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으나, 그녀는 죽고 디아나는 구하지 못한다면? 디아나가 아무리 그리젤다 솔의 딸인들, 냉정한 국왕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마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리 없었다. 헤스터마저 없으면 디아나는 십중팔구 잉그람 군대에게 외면받을 것이었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니올로 팔리아치의 위치를 시시각각 전해 주던 새도 이제는 연락이 끊겼다. 짐작건대 마력을 되찾은 니올로 팔리아치가 수상쩍게 기차 주변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응징했을 터다.

결국 헤스터에겐 성도밖에 남지 않은 셈이었다. 어떻게든 니올로 팔리아치를 무력화해서, 옥슬리 대령이 마음 놓고 군대를 기차로 들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많은 군사를 잃은 대령은 고작 마녀 한 명을 위해 수십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조금 전 국경을 지키는 마법사를 호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물은 것으로 보아, 옥슬리 대령은 니올로 팔리아치의 마법이 성한 이상 군대를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국경을 지키는 마법사. 헤스터는 가만히 그들의 이름을 뇌까렸다. 대개 반제와 국경을 접한 북부에 몰려 있는 그네들은 마법사로는 드물게 전투에 익숙한 이들이었다. 대령의 말처럼, 그들이라면 어쩌면 니올로 팔리아치를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헤스터에겐 여유가 없었다. 백색전당에 이름을 올린 마녀와 마법사가 이미 둘씩이나 있는 마당에 국왕이 다른 마법사를 보내 줄지도 의심스러울뿐더러, 지금은 지원이 오기만을 기다릴 정도로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고초를 겪고 있을 디아나를 떠올리면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종국에는 그 수밖에 없다.

헤스터는 단정히 고개를 들었다. 요르그 규석을 깎아 만든 기반에 신선한 물을 올린 제단. 별들의 왕 둘시네아에게 기도를 올리는 단(壇)이자, 왕의 도래를 헤아리는 표지였다.

‘아가. 네게 동생이 있단다.’

십수 년 전 작고하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를 쟁쟁히 울렸다.

‘어미를 모르는 아이에게 네가 가족이 되어 주렴.’

헤스터는 죽어 가는 어머니께 올렸던 약속을 기억했다. 그것은 망자에게 건넨 마지막 서약이요, 죽어서도 지켜야 하는 맹세. 어쩌면 지금까지 삶을 지탱해 온 단 하나의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얌전하게 양초를 갉아먹던 촛불이 별안간 거세게 몰아쳤다. 스물의 태양이 찬란히 빛을 발하자, 막사에 잔존하던 어둠이 순식간에 바깥으로 밀려났다. 마치 왕이 도래할 길을 미리 밝혀 내듯 영광스러운 빛이었다.

오래지 않아 촛불이 차츰차츰 잦아들었다. 헤스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정하게 가라앉은 잿빛 눈이 냉정히 현재를 판단했다.

그때,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헤스터는 돌아보지 않은 채 마법으로 천을 들어 올렸다.

“무슨 용무입니까?”

사병이 머뭇거렸다. 헤스터가 뒤늦게 뒤돌아보자, 사병은 조심스레 쪽지를 내밀었다.

“어느 신사분께서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헤스터는 한동안 말없이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그 신사분은 어디 계십니까?”

사병이 일러 준 방향으로 빠르게 걷자 곧 익숙한 뒷모습이 나타났다. 잠시 고민하던 헤스터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올리버.”

올리버가 대번에 걸음을 멈추었다. 헤스터는 그에게로 다가가 차분히 쪽지를 내밀었다.

“당신이 이걸 보냈죠?”

심란하게 쪽지를 보던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날 보기 싫어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메모에 적힌 글귀는 올리버의 필체지만 결국에는 디아나의 말이었다. 조금 늦는다고 언니에게 전해 달라는.

헤스터는 생각했다. 왜 하필 너일까. 기차에는 수많은 승객들이 있었고 그들은 무사히 탈출했건만, 왜 하필 늦는 사람이 너인 걸까.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악인이 있는데, 어째서 착한 너만이 아직도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

“당신은 여기 있는데……. 디아나는 왜 아직도 거기 있는 거예요?”

헤스터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      *

“뭐, 뭐라고요?”

디아나가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니올로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모로 까딱거렸다.

“왜 그리 놀라? 내가 그렇게 무리한 부탁을 한 거냐?”

“그게, 그러니까…….”

“아무리 뜨내기여도 마녀는 마녀이니 설마 깃펜이나 잉크가 없을 리는 없고. 혹시 내가 돌려주지 않을까 봐 그래? 걱정하지 마라. 세간에서 내 소문이 어찌 돌고 있는지는 대강 짐작한다만, 아무리 그래도 남의 것을 함부로 강탈하는 사람은 아니다.”

함부로 동족 열댓 명의 귀한 목숨을 앗아간 악한이 하는 말로는 좀체 믿기지가 않았다. 디아나가 쭈뼛거리며 눈치만 보자, 니올로는 한숨을 내쉬며 즉시 말을 바꾸었다.

“좋아. 믿지 못한대도 별수 없지. 하지만 그 조그만 머리를 요령껏 굴려서라도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계속 내 ‘부탁’을 거절한다면, 나는 몹시 짜증이 난 나머지 널 죽이고 네 유품을 찾으러 온 객실을 뒤지고 다닐지도 몰라. 그러면 너나 나나 굉장한 손해겠지. 안 그래?”

니올로가 과장스럽게 양팔을 뻗었다.

“물론 네가 순순히 깃펜과 잉크를 빌려준다면, 나는 잘 사용한 뒤에 고스란히 돌려줄 거다. 만에 하나 망가진다면 열 배의 값을 쳐주마. 어느 편이 네게 더 이로운지는 아무리 모자란 칠삭둥이여도 잘 알겠지.”

디아나는 죽상을 지었다. 자애로운 척하지만, 실상은 숨통을 틀어쥔 겁박임을 모르지 않았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녀로선 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빌려줄게요…….”

니올로는 흐뭇하게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디아나의 빨간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래. 어서 줘.”

“지금 당장이요?”

“그럼 언제 주려고 했는데? 한 10년 뒤에?”

니올로의 말끝이 하늘로 치솟았다. 디아나는 작은 새처럼 파드득 놀랐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없단 말이에요. 가방에 있는데…….”

“가방은 어디 있는데?”

“객실에 있겠죠.”

그렇게 두 사람은 때아닌 밤 산책에 나섰다. 비록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객실이요, 심지어 어떤 객실에는 군인들의 시체가 너부러져 있었지만 말이다. 디아나는 시체를 볼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고, 그럴 때마다 니올로는 성가시다는 듯이 디아나의 팔뚝을 잡고 질질 끌었다.

둘은 오래지 않아 일등석 객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디아나는 문가에서 한참 우물쭈물했다.

“너무 어두워서 가방이 안 보여요.”

“가지가지로 피곤하게 하는군.”

니올로가 투덜대며 마법으로 공중에 화구(火球)를 띄웠다. 깜깜했던 객실은 금세 밝아졌다. 그럼에도 디아나가 선뜻 나서지 못하자, 불편한 기색 다분한 니올로의 목소리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다리도 내가 움직여 줘야 하나?”

디아나는 고분고분하게 객실로 들어섰다.

객실은 마치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어수선했다. 지저분하게 널린 잡동사니를 뛰어넘어 간신히 제자리에 도착했지만, 다른 좌석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좌석도 주인을 알 수 없는 짐으로 가득했다. 디아나는 한숨을 삼키며 신문이나 남사스러운 잠옷, 말라비틀어진 사과 등을 치워 냈다. 그러자 좌석 밑에 가지런히 놓인 손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편으로 손을 뻗으려던 순간 디아나의 손끝이 멈칫했다.

왜 하필 깃펜과 잉크일까.

깃펜과 잉크는 본디 의지나 언어로 마법을 발현하지 못하는,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이들이 마법을 부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다. 수식과 도형, 아바도어가 포함된 복잡한 마법진을 직접 그려서 마법을 구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니올로 팔리아치는 아니다. 의지로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마법사가 깃펜과 잉크에 의지할 이유는 대체로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마법사도 깃펜과 잉크를 사용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단순히 의지만으로는 완벽하게 마법을 행할 수 없는 경우. 다시 말해, 마법을 구현하기 위해 더한 정성이 필요한 경우였다. 그리고 디아나는 니올로 팔리아치가 더한 정성으로 구현할 마법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언니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이제 니올로 팔리아치는 헤스터 솔이 잉그람군에 합류했음을 안다. 디아나는 자신이 빌려주는 도구로 행여나 언니가 화를 입진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갈팡질팡했다.

“뭘 그렇게 꼼지락거려?”

디아나가 황급히 뒤돌아보았다. 니올로가 어느새 지척에 있었다.

“거기 들어 있어?”

“아, 네. 맞아요.”

디아나는 얼른 손가방을 집었다. 주저하던 것도 잠시, 디아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가방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지금은 누굴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언니는 누구처럼 모자란 뜨내기가 아니었다.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한 상황에서 잉그람에서 제일가는 마녀를 걱정하는 것은 분수에도 맞지 않는 짓이었다.

잉크는 쉽게 찾았다. 디아나는 이제 깃펜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길고 얇은 깃펜은 생각처럼 손끝에 잘 걸리지가 않았다. 짜증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가방을 뒤집어엎고 싶었으나, 그러다간 니올로 팔리아치에게 골로 가는 수가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이대로 망각의 강을 건널 터였다.

그때, 니올로가 불현듯 말문을 열었다.

“디아나.”

“…….”

“디아나 솔.”

일순 디아나의 호흡이 정지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 목을 가까스로 틀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정적 속, 니올로 팔리아치는 바닥 어드메를 유심히 굽어보고 있었다.

승객들의 가방이며 소지품이 어지러이 펼쳐진 가운데, 눈에 익은 가방이 쓰러져 있다. 분명 짐칸에 넣어두었던 짐 가방이었다. 달리 특별하지 않은 가방이나, 손잡이에 새겨진 글씨만은 또렷했다.

《 Diana Sol 》

니올로 팔리아치가 무감히 읊조렸다.

“디아나 탤벗이 아니었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래도록 가방에 머물던 시선이 가시덩굴처럼 디아나를 옭매었다. 마치 뱀이 기어 올라오듯 음산한 감각이었다.

“꼬마 아가씨. 내게 거짓을 고했구나.”

니올로가 대번에 다가왔다. 당황한 디아나가 몸을 빼기도 전에 두꺼운 손이 얼굴을 덮쳐 왔다.

“……그러고 보니 그리젤다 솔도 머리가 붉었는데.”

디아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니올로 팔리아치의 손바닥이 코앞에 정지해 있었다. 죽음의 악취가 턱 끝까지 치달았다. 명망 높은 동족 열댓 명을 살해한 괄티에로 벨리의 죄수라면, 단번에 그녀의 목숨을 앗아 갈 것이었다.

니올로가 엄숙하게 물었다.

“그리젤다 솔과 무슨 관계지?”

“아, 아무런 관계도…….”

“됐다.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더는 못 믿겠군.”

니올로는 짧게 응수하며 손을 거두었다. 동시에 화구가 사그라졌다. 여태껏 사위를 밝히던 불빛이 일제히 꺼지자, 객실은 어둠으로 침잠했다. 이제 버려진 기차를 비추는 것은 창백한 달빛뿐이었다.

디아나는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니올로를 흘깃거렸다. 광인 니올로를 속인 것치고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기는 했으나, 아까부터 깃펜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아무래도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이려는 걸까? 단순히 숨을 끊는 것으로는 분기가 풀리지 않아서?

디아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달래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니올로가 예고 없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일말의 과장을 보태어 정말로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만 알았다.

“뭘 그렇게 놀라?”

니올로는 깃펜을 던지며 핀잔했다. 디아나가 무심코 깃펜을 받자, 금방 니올로가 기록했던 검은 글씨들이 그녀 쪽으로 모여들었다.

“마지막에 서명해.”

니올로가 낮게 읊조렸다. 디아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빠르게 글자를 읽어 내렸다. 곧 그녀의 낯에 경악이 스며들었다.

“……술라의 맹약?”

그에 니올로가 픽 웃었다.

“어린 마녀가 별걸 다 아는군.”

술라의 맹약이란, 고대 남쪽의 마법사들이 약속의 이행을 담보하기 위해 행하던 주술마법이다. 워낙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기에 여러 형태로 전해져 내려왔지만, 원형을 직접 보기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때였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진귀한 마법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상황이 좋지 못했다. 술라의 맹약은 약속의 채권자와 채무자가 모두 서명해야 발현되는 마법. 약속과 관계된 모든 사람이 동의한 만큼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을 시 돌아오는 타격은 어마어마했다.

디아나는 눈물을 머금고 공중에 그녀의 이름을 새겼다. 한 글자, 한 글자 검게 새겨질 때마다 심장이 바늘로 찔리듯 따끔거렸다.

채권자    《 Niolo Pagliacci 》 채무자    《    Diana Sol     》

이름이 새겨지기 무섭게 가지런하던 검은 글씨들이 유연하게 춤추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휘갈겨 알아보기 힘든 글씨들이 해체되고 한데 합쳐지기를 무섭게 반복한 끝에 남은 것은 실처럼 길고 가느다란 잉크였다.

잠잠할 새도 없이, 검은 잉크는 곧장 디아나의 목으로 달려들었다. 디아나가 깜짝 놀라 목을 긁어 댔지만, 검은 잉크는 어느덧 문신처럼 목을 휘감은 뒤였다.

“가만히 있어라. 네가 약속만 지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 물론 약속을 어기면 그만한 대가가 따르겠다만.”

니올로는 손톱을 매만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디아나의 안색이 금세 창백해졌다.

“무슨 약속이요?”

“진실만을 말하는 약속.”

니올로가 차분하게 물었다.

“네 이름은 뭐지?”

“……디아나 솔이요.”

디아나는 눈물을 참아 내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쉴 틈 없이 질문이 이어졌다.

“탄생성은?”

“암흑의 별 칼리스토.”

“뭐야. 그건 진짜였어?”

니올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자존심이 상할 겨를조차 없었다. 꼭 목에 칼을 건 기분이었다.

“그리젤다 솔과는 무슨 관계지?”

“따, 딸이에요.”

“딸? 네가?”

니올로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아무래도 위대한 그리젤다 솔과 눈앞의 초라한 마녀가 혈연이란 사실을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럼 헤스터 솔과는 자매지간이고?”

“……네.”

“헤스터 솔은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아나?”

디아나는 침울하게 고개만 수그렸다. 니올로의 입가가 씰룩였다.

“질문에 답해. 침묵은 결코 진실이 되지 못한다. 계속 그렇게 묵묵부답이면 너도 알다시피 대가가……. 그러고 보니 대가가 무언지 말해 주지 않았군.”

니올로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약속을 어기면, 그러니까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지금 네 목에 걸린 잉크가 천천히 죄어들 거다. 결국에 너는 아주 천천히 목이 졸려 죽겠지. 교살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나도 직접 겪어 보지 못해서 설명해 주지 못하겠군.”

디아나는 파들거리며 눈을 내리감았다. 어쩐지 잉크가 천천히 목을 옥죄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겨웠다.

“……알 거예요. 내가 여기 있는 거.”

“추측이군. 어째서 그리 여기지?”

“그렇지 않으면 언니가 굳이 펜잔스까지 올 이유가 없으니까요.”

“의좋은 자매였나 보군.”

니올로가 흡족하게 말했다.

“그렇게나 사이가 좋다면, 헤스터 솔은 쉽사리 널 포기하지 못하겠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행운의 별이 내게 은총을 주었다는 말이다.”

니올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잖아도 거대한 체구가 이제는 우뚝한 산처럼 아득해졌다. 디아나는 얼어붙은 얼굴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걱정하지 마라. 당분간은 널 죽이지 않을 테니.”

니올로가 흔쾌히 말했다.

“다만 장담컨대, 네 언니를 보는 때가 네 마지막 순간일 거다.”

??

이튿날 새벽.

애완용 도마뱀 뱀버의 먹이를 말리다 밤을 꼬박 새운 휴고 알피어스는 유난히 부산스러운 소리에 막사를 나섰다. 길가에서 사병들이 제각기 커다란 물동이를 이고 있었다.

“대체 이 시간부터 무슨 일입니까?”

“헤스터 경이 새벽에 처음 뜬 물을 가져와 달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지나가는 사병을 붙들던 휴고가 짐짓 이상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녀가 새벽에 처음 뜬 물을 필요로 하는 경우는 고작해야 별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 정도였다. 평소라면 무던히 넘길 일이지만, 니올로 팔리아치를 물리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작금의 상황을 헤아리면 다소 의아한 행보였다.

상대에 대한 예의보다 자신의 호기심을 우선하는 마법사답게 휴고는 곧장 헤스터의 막사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선 더더욱 이상한 꼴을 보았다. 사병 여러 명이 달라붙어 막사에 검은 천을 두르고 있던 것이다.

“휴고 경?”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 막사에서 나오던 헤스터가 마침 휴고를 발견했다. 휴고는 거침없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간밤에 잘 지냈습니다. 경은 한숨도 못 주무신 얼굴입니다만.”

“그건 서로가 피차일반인 듯한데요.”

남이 듣기엔 사뭇 괴이쩍은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설마 기도를 올리려는 건 아니겠고.”

“그 비슷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헤스터는 그리 말하며 얇은 편지를 건넸다.

“실은 조금 전에 괄티에로 벨리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니올로 팔리아치가 탈옥한 것이 맞더군요.”

휴고는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렸다. 달리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그저 니올로 팔리아치가 탈옥했음을 시인하는 몇 마디와, 행여나 그를 체포한다면 괄티에로 벨리로 이송해 달라는 정중한 부탁이었다.

“……마법을 부리지도 못하는 마법사를 놓치다니. 참으로 무능력한 작자들입니다.”

휴고가 혀를 찼다. 헤스터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괄티에로 벨리의 도움은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괄티에로 벨리의 간수들은 그저 감옥에서나 폭군으로 군림할 뿐, 감옥을 벗어나면 마법사에게 전혀 대항할 수 없는 존재니까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휴고는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헤스터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설핏 웃었다.

“그래도 적측 마법사의 신원이 확실해졌으니 되었습니다.”

휴고는 흘끗 헤스터를 보았다. 하나뿐인 자매가 니올로 팔리아치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래, 그녀가 이토록 차분했던 적이 없었다.

“지난밤, 답을 찾은 모양입니다.”

이제 헤스터는 당분간 마력을 운용하지 못하는 휴고를 대신하여 홀로 니올로 팔리아치를 상대해야 했다. 단순한 마법 실력이라면 세상천지 그녀를 의심할 사람이 없겠으나, 불행히도 이곳은 누구의 마법이 더 훌륭한지를 가르는 경연장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디아나 솔을 안전히 구출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 명의 마법사로서, 휴고는 헤스터가 내놓을 답이 기대되었다. 위대한 그리젤다 솔의 딸이 가장 소중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그처럼 겨울을 불러와 하늘의 질서를 어지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성도학과 마력 운용에 능통한 마녀가 상성이 좋지 않은 니올로 팔리아치를 어떻게 제압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지난밤은 실패했습니다.”

헤스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무얼 했기에.”

“무제타를 잠재울 방안을 찾았습니다. 하갈의 정리와 실비아 드루실라의 미완성 이론을 접목하려고 했습니다만, 계절십자가의 각도와 쌍둥이별의 위치가 어긋나더군요.”

“……그걸 지난밤에 전부 계산한 겁니까?”

휴고가 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계절십자가의 각도는 그렇다 쳐도, 쌍둥이별의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주변 별과의 각도를 일일이 측정하며 수학적으로 추론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봄과 여름에 걸친 어중간한 계절인 데다, 무제타가 강성해서 하늘의 질서가 어지러워졌기에 평소보다 계산이 까다롭긴 했습니다.”

일평생 성도학과 친하지 못했던 휴고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결국 찾아낸 방안이 저겁니까? 도대체 무슨 의도입니까?”

휴고는 검은 천 둘러쓴 막사를 눈짓했다. 헤스터는 양손으로 찻잔을 감싸며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둘시네아를 불러올 겁니다.”

“예?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둘시네아는 만인에게 자비로운 별들의 왕이다. 만인에게 자비롭다는 것은 달리 말해 만인에게 차별 없이 공평하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둘시네아의 축복을 받았다 한들, 별들의 왕이 특정한 마녀의 기도를 들어 때아닌 하늘에 나타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별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은 아니니, 정확히 말하자면 직접 둘시네아를 불러오는 것은 아닙니다.”

헤스터가 차분히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둘시네아 꽃을 만들 생각입니다.”

별들의 왕 둘시네아는 고작해야 1년에 하루 이틀 뜨는 귀한 별이다. 그리하여 하늘에 둘시네아가 뜨는 날, 왕의 도래를 맞이하여 땅에서는 둘시네아 꽃이 피어났다. 둘시네아 별을 닮아 황홀한 황금빛으로 물든 둘시네아 꽃은 그 자태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룻밤을 노래한 뒤, 이튿날 새벽을 보지 못하고 져버렸다. 그렇기에 둘시네아 별만큼이나 귀한 것이 바로 둘시네아 꽃이었다.

그리고 지금 헤스터는 그 귀한 꽃을 피우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기도를 듣지 않는 별에게 청원하느니, 차라리 꽃을 피우는 편이 낫겠지요.”

“잠깐, 둘시네아 꽃을 피우다니요? 그것이 가한지는 일단 미루어 놓겠습니다만, 둘시네아 꽃이 핀다고 둘시네아가 하늘에 뜬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설마하니 그런 보장도 없는 일에 무턱대고 뛰어들겠습니까. 예전에 둘시네아 꽃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꽃이 피어나니 하늘에서도 둘시네아가 뜨더군요.”

휴고는 얼마간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둘시네아 꽃은 별들의 왕 둘시네아의 도래를 경배하기 위해 피어나는 꽃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늘에 둘시네아가 뜨면 땅에서도 둘시네아가 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므로 만일 헤스터의 말이 진실이라면 기존 학설의 인과관계가 완전히 붕괴되는 것이었다.

둘시네아 별이 떠야만 둘시네아 꽃이 피어나는가.

둘시네아 꽃이 피어야만 둘시네아 별이 뜨는가.

뜻하지 않은 새로운 발견에 휴고가 경탄하는 사이, 사병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이걸 좀 보셔야겠습니다.”

군인은 하얀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헤스터는 선선히 봉투를 받았다. 그러나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삽시에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봉투에는 빨간 머리칼 한 줌이 들어 있었다.

“기차에서 백 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겁니다. 아무래도 적측 마법사가 보낸 것 같습니다만…….”

군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주절댔다. 헤스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도무지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잿빛 눈이 휴고를 향했다.

“경. 옥슬리 대령에게 오늘 밤 군대를 준비해 달라 전해 주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휴고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직도 둘시네아 꽃에 대한 기존 학설을 고치느라 여념 없었다.

오래지 않아 사병이 명령을 완수했다고 보고했다. 헤스터는 막사로 들어가려다 말고 불현듯 휴고를 돌아보았다. 불을 밝히지 않은 실내의 어둠과 밝아 오는 아침이 공존하는 어중간한 경계. 그곳에 가만히 선 헤스터의 말간 얼굴에 기이한 그늘이 졌다.

헤스터가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

“……혹시라도 내가 실패한다면, 그때는 국경에 있는 세드릭 자일스 경에게 연락을 넣어 주세요.”

*      *      *

둘시네아(Dulcinea).

이제는 오래된 곡조로만 남은 목동의 전설에 따르면, 자비로운 별들의 왕 둘시네아는 본디 여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용맹한 영웅도,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학자도 끝내 외면했던 여신이 한결같은 순정으로 아꼈다고 하나 실상 겉모습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타고난 천성이 그토록 아름다웠기에. 다친 동물을 보살피고, 빈자를 외면하지 못하는 따스한 천성으로 볼품없는 외면조차 가없이 아름답게 비쳤다는 여인이다.

하지만 태어나길 수명이 정해진 인간이라, 어느덧 여인이 눈감을 날이 목전으로 닥쳐왔다. 여신은 사랑하는 여인이 망각의 강을 건너 지금의 아름다운 천성을 잃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둘시네아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때, 여신은 그녀를 하늘로 올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왕관을 씌워 주었다. 황홀한 별빛이 그녀를 감싸자, 하늘에서 끝없이 다투던 별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고개 숙였다.

이제 둘시네아는 평범한 목동의 딸이 아니었다. 하늘의 혼란을 바로잡을 질서요, 여신의 권위를 이어받아 하늘과 땅을 보살필 왕이었다.

생전에 그러했듯 둘시네아는 더없이 자비로운 별들의 왕이었다. 차별 없이 공정한 별빛은 만인을 어루만졌으며, 별빛 닿는 곳이면 어느 데고 그녀의 시선이 향했다. 만인이 왕을 축복했고 만인이 왕을 칭송했다.

자비로운 성군의 명성은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도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왕이 도래하는 날에는 땅에서도 기적이 일어났다. 감히 꽃봉오리가 피어날 수 없는 곳. 수정처럼 맑은 물에서 씨앗 없이 피어나는 꽃을 목동들은 자애로운 왕의 이름을 빌려 둘시네아라고 불렀다. 오직 왕이 도래하는 길을 경배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전설은 그저 전설일 뿐이다.

헤스터는 목동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오랜 전설이 거짓임을 알았다.

그러니까 10여 년 전, 그녀의 어머니이자 마법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녀로 손꼽히던 그리젤다 솔이 영영 망각의 강을 건너간 날. 헤스터는 죽은 어머니의 곁에서 둘시네아 꽃을 피워 냈다. 어린 마녀가 다루기엔 지극히 난도 높은 마법이었으나, 헤스터는 종내 황홀하게 노래하는 황금의 꽃을 손에 넣었다.

그날 밤, 하늘에는 별들의 왕 둘시네아가 장장 3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시의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축제를 벌였지만, 결국에 소원을 이루지 못한 헤스터만은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만인에게 공정한 별들의 왕은 당신의 귀하디귀한 딸에게도 평등한 애정을 주었다. 평생에 가장 힘겨웠던 날조차 그녀를 외면했던 별이기에, 헤스터는 더 이상 둘시네아에게 소원을 말하지 않았다. 들어도 듣지 않을 별에게 간청하느니, 제 손으로 이루어 내는 편이 나으리라 여겼다.

흘러 흘러 헤스터는 어느덧 스물다섯의 봄을 맞이했다. 마치 어머니를 떠나보냈던 그날처럼 오늘도 암암한 어둠 속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어쩌면 하나 남은 혈육마저 영영 잃어버릴 날이고,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날이다.

헤스터는 차츰차츰 상념을 지워 냈다. 자매에 대한 걱정, 올리버에 대한 미련,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 흘러가는 시간이 점차 무뎌지고, 바깥에서 새어 드는 소음이 서서히 멀어졌다. 헤스터는 그렇게 모두를 비워 냈다. 그러자 비로소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원만이 남았다.

마법은 간절한 기원에서 비롯할지니.

바야흐로, 새벽의 첫 물에서 황금의 꽃이 피어났다.

발 디딜 데 없는 데서 꽃봉오리가 자라나고 꽃잎이 한둘 모습을 드러냈다. 마녀의 기원을 씨앗 삼아, 양분 삼아 피어난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꽃 둘시네아.

오래도록 무릎 꿇고 기도하던 헤스터가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새카만 암굴에서 오직 황금의 꽃만이 고고하게 빛을 발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편으로 다가간 헤스터가 이윽고 물그릇 앞에서 멈추었다.

물이 그득 담긴 쟁반. 검게 가라앉았던 물이 어언지간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잔잔하던 수면이 짙푸른 밤하늘로 변모하자, 군데군데 소금처럼 하얗게 빛나는 별빛이 차츰 떠올랐다.

헤스터는 천천히 수면을 굽어보았다. 중앙에 화사하게 피어난 둘시네아와 그 주변을 호위하듯 지키는 사계(四季)의 십자가. 서편으로 이어지는 순수의 별 아담과 겔록의 사다리를 건너자, 흉포하게 세를 넓히는 불길한 별이 눈에 들어왔다.

역천의 별 무제타.

일순 헤스터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부르튼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노한 음성이 벼락처럼 밤하늘을 울렸다.

“네 어미는 굉장한 마녀였다.”

니올로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열셋인가, 열넷인가 그쯤에 그리젤다 솔을 만났지. 뛰어난 마녀라고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워낙에 수더분한 마녀라 당최 그 명성을 믿기 힘들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네 어미의 위대함을 직접 체감했지만 말야.”

말끝마다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과거를 회상하는 눈빛에 추억이 진하게 묻어났다.

“네 자매가 대단한 마녀라고 들었다. 하지만 어미의 위명에는 감히 비하지 못할 거다. 그리젤다 솔은 비할 데 없이 위대했어. 내가 난생처음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네 어미가 처음이다.”

“웃기지 마요. 지금 우리 엄마 때문에 미쳤다는 거예요?”

여태 침묵하던 디아나가 유난히 파리한 안색으로 속닥댔다. 니올로가 왼 발목을 부러 접질리게 만든 뒤로 그녀는 몇 시간째 신산한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아서라. 다른 쪽 발목도 다치기 싫으면.”

“내가 왜요? 어차피 죽을 건데.”

디아나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꼬마가 생각보다 사납구나. 하지만 그런 배짱을 내세우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의 능력은 갖춰야지. 고갈됐던 마력은 엊저녁에 다 회복되었을 텐데, 내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는 걸 보면 이보다 더 하찮을 수가 없어. 도대체가 그리젤다 솔이 어쩌다 너처럼 보잘것없는 딸을 낳았는지 모르겠다.”

니올로가 조그만 화구 여러 개를 허공을 띄우며 이죽거렸다. 디아나를 희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하찮다고요?”

그러나 독기 서린 눈으로 니올로를 노려보던 디아나가 별안간 조소했다.

“이걸 어째. 나는 당신이 너무나 하찮은데.”

니올로는 우뚝 손을 멈추었다. 찌를 듯한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입을 다물긴커녕 더없이 화사하게 웃을 뿐이었다.

“당신, 거짓말쟁이잖아.”

“……너 지금 무슨 소리를.”

니올로가 음산하게 뇌까렸다.

그 순간, 창틈으로 흘러드는 매혹적인 곡조가 그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 세상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와 소름 끼치도록 요요한 선율. 등골이 쭈뼛 서는 날카로운 예감에 니올로는 황급히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청아한 노랫소리가 삽시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니올로는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그만 말을 잊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밤안개가 짙게 깔려 있던 웅덩이에서 황홀한 빛 흩뿌리는 꽃이 완염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황금의 꽃 둘시네아.

그 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퍼뜩 정신 차린 니올로가 서둘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하늘은 이미 새롭게 개화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 하늘을 지배하던 무질서와 혼돈은 빠르게 사그라지고, 온전한 질서를 되찾기 위해 요동치는 별들이 그의 눈에 아프게 박혔다.

왕이 부재하는 시간, 왕을 대신하여 하늘에 군림하던 달이 차츰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자 도태에 빠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하늘에 오른 자비로운 별들의 왕 둘시네아.

“안 돼…….”

니올로의 입술 사이로 침음이 흘렀다. 역천의 여파가 한창인 중에 별안간 둘시네아가 떴다는 것을 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왕이 도래한 시점에서, 과연 역천의 별 무제타가 얼마나 존속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때, 객실을 환히 비추던 화구가 급작스레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괴하게 몸을 뒤트는 화구를 멍하니 바라보던 니올로가 불현듯 다급하게 새로운 화구를 띄워 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불을 지피지 못했다. 왕의 부재를 틈타 세력을 넓히던 무제타가 비로소 혼란에 빠진 것이다.

니올로의 낯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휴고 알피어스가 겨울을 불러왔던 것은 차라리 나았다. 겨울은 얼마 가지도 못하는 데다, 겨울이 물러간 직후 하늘에는 무제타를 위시한 혼란이 돌아왔으므로.

하지만 둘시네아는 달랐다. 그 자체로 하늘의 질서를 상징하는 별들의 왕 둘시네아는 하늘의 혼란을 두고 보지 않을 터였다. 혼란은 이제 끝이다. 역천의 날은 이렇게 끝이었다. 혼란을 틈타 강성하는 역천의 별 무제타는 당분간 몸을 사릴 것이었다.

기괴하게 뒤틀리던 화구가 예고 없이 사라졌다. 객실은 순식간에 암흑으로 뒤덮였다. 황금의 꽃 둘시네아가 부르는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드는 가운데, 어둠 속에서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점차 엇갈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