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겨울을 그대에게
야속한 아침이 밝아 왔다.
철로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임시로 마련된 군영은 침울하기만 했다. 군영의 사령관인 옥슬리 대령이 잉그람 무장 혁명군을 얕보았듯, 대다수의 군인들도 이번 괴변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잉그람 무장 혁명군은 오래전 이름만 앙상하게 남은 조직이었던 데다가 저명한 마법사도 합류했으므로, 손쉽게 무장 혁명군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밤, 정찰을 나갔던 군인은 한 명도 생환하지 못했다. 날이 밝을 즈음 아군의 시신을 수습하러 나갔던 이들이 말하길, 지독히도 참혹한 광경이라 하였다. 옥슬리 대령은 내내 침묵을 고수했으나, 적측에 마법사가 있다는 소문은 이미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간신히 수습한 아군의 시신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으므로.
사람의 육신을 그리 갈기갈기 찢어 놓은 것은 평범한 인간의 솜씨가 아니었다. 그건 오직 마법만이 가능했다.
혹자는 옥슬리 대령이 군사를 증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도 어느 부관이 중앙 사령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지만, 대령은 묵묵히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기실 적측에 마법사가 존재하는 이상, 아군의 머릿수를 늘리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마법사를 상대로 인산인해 전술을 펼치는 것만큼 미련스러운 일도 없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다간 외려 아군의 피해만 무지막지하게 키우는 한편, 마법사는 쓰러트리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애당초 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치밀하게 작전을 짜거나, 이편에서도 마법사를 내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군영에는 뛰어난 마법사가 둘이나 있었지만, 기차에 수많은 인질이 잡혀 있어서 함부로 마법을 부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자정이 넘은 시각, 옥슬리 대령은 모든 부관을 소집하여 작전을 재검토했다. 상대 마법사에 대한 정보가 극히 드물기에 작전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지만, 마법사 하나가 실려 나간 상황에선 그들이 달리 할 수 있는 바가 없었다.
마법사, 휴고 알피어스는 어젯밤 작전을 끝내자마자 혼절했다.
어제의 작전이 그에게 큰 무리였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휴고 알피어스가 쓰러진 가장 큰 이유는 지난 사흘 밤낮을 지새우며 켜켜이 쌓인 피로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피곤한 상황에서 지속적인 집중을 요하는 원거리 조작 마법을 사용한 데다, 마법으로 신경을 연결했던 왼쪽 눈알마저 파괴되었으니 그 충격만도 상당했을 터다.
게다가 어젯밤은 그의 탄생성인 발디비아와 상성이 좋지 않은 무제타가 강성한 날이었다. 여러모로 마법을 부리기 좋지 않은 시기였다.
혼절했던 휴고 알피어스가 정신을 차린 것은 새벽이 채 밝기도 전이었다. 그는 졸음에 잠긴 채로 자택에 가 봐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군의관이 지금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며 사정했으나, 쉬어도 집에서 쉬겠다는 것이 휴고의 요지였다. 결국 새벽부터 옥신각신하는 꼴을 보다 못한 옥슬리 대령이 그를 마차에 태워 자택으로 보냈다. 부관에게 어떻게든 정오 내로 데리고 오라 을렀으나, 그것이 부관의 능력 밖임을 대령은 모르지 않았다.
“마법사는 잠도 자택에서 자야 한답니까.”
옥슬리 대령이 한탄했다. 헤스터 솔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기르는 도마뱀이 저어되나 봅니다.”
대여섯 시간 혼절했던 휴고 알피어스와 달리, 헤스터 솔은 날 밝을 때까지 한숨도 자지 않았다. 그녀는 옥슬리 대령이 부관과 함께 작전을 세우느라 골머리를 앓을 때도 지휘 막사에 동석했으며, 이후로는 조용히 기차를 지켜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인지 당최 알 수 없으나, 자꾸만 시선이 기차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래도 가족이라고 인질로 잡혀 있는 자매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여태 마녀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본 적 없던 옥슬리 대령에겐 사뭇 생경한 모습이었다. 마법 사회에서는 마법 연구가 영순위라더니, 그래도 같은 핏줄 귀한 줄은 아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휴고 알피어스가 쓰러진 마당에 헤스터 솔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옥슬리 대령은 초췌한 낯빛으로 아침 해를 맞이한 헤스터에게 말을 걸었다.
“자매를 근심하는 마음이 매우 크시겠지만,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셔야 합니다. 그러다가 휴고 경처럼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정작 중요할 때에 도움을 주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헤스터는 순순히 막사로 들어갔다. 고집을 피우리라 짐작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휴고 알피어스가 다시 군영으로 돌아온 것은 정오를 넘긴 오후 2시경이었다. 부관에게 일러 그를 정오까지 데리고 오라 말하긴 했어도, 내심 저녁에나 돌아오리라 여겼던 옥슬리 대령은 놀란 기색으로 휴고를 맞이했다
다행히도 휴고는 한결 활력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래 봤자 눈 밑 그늘이 다소 옅어지고, 휑하니 뚫려 있던 왼쪽 눈두덩에 새로운 의안이 자리했을 뿐이지만 말이다.
“나는 별일 없었습니다.”
상대의 안부를 묻기 전에 자신의 안부를 먼저 밝히는 것은 마법 사회의 관습이었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마법사다웠다. 옥슬리 대령이 이제는 익숙해진 그네들의 화법을 넘기며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멀찍이서 부관이 문짝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대체…….”
대령이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뒤를 돌아본 휴고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 짐입니다.”
“짐이요? 문짝이 짐입니까?”
“예.”
옥슬리 대령은 떫은 표정을 감추며, 휴고를 지휘 막사로 안내했다.
막사에는 헤스터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휴고와 헤스터가 간단하게 목례를 나누는 사이, 옥슬리 대령은 자리에 착석하여 지도를 펼쳤다.
“일단 현재 상황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난밤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고, 혁명군으로부터 받은 연락도 전무합니다. 어제 교전 이후로는 사실상 대치 상태입니다.”
“적측 마법사도 조용합니까?”
“예. 날이 밝기 전에 아군의 시신을 수습하러 철로 근방에 접근했을 때도 조용했습니다.”
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마법사를 상대할 때 급선무는 상대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름만 알면 이명도감을 통해 탄생성을 찾을 수 있기에, 전투의 유불리와 작전의 방향을 쉬이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작금의 상황은 아군에게 그리 좋지 못했다. 상대는 휴고 알피어스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이쪽은 상대 마법사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더욱이 여유로웠던 마법사의 태도를 상기하면 휴고가 있는 펜잔스를 일부러 노린 것도 같았다.
“……일단 헤스터 경은 당분간 조용히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마법사가 알지 못하는 것. 바로 헤스터 솔이 있었다.
“이곳에 마법사가 나뿐이라는 생각을 굳이 시정해 줄 필요는 없겠지요.”
“그건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물론 동생이 걱정되시겠지만, 헤스터 경은 당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편이 낫습니다. 적의 오만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승리의 지름길이니까요.”
옥슬리 대령까지 휴고를 거들고 나섰다. 그러자 가만히 지도를 내려다보던 헤스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실은 그와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헤스터가 말했다.
“내게 작전이 있습니다.”
“예?”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전에 말씀하신 점에 대해서는 찬성하니까요.”
헤스터는 휴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신 휴고 경의 힘이 필요합니다.”
옥슬리 대령은 몹시 심란했다.
“진정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휴고 경이 가능하다고 했으니 가하겠지요.”
“하지만…….”
대령이 말을 흐리며 도로 정면을 보았다. 지휘 막사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서 사병들이 휴고의 명령대로 땅을 평평하게 다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병이 삽을 거둬들이며 물었다. 가만히 땅을 내려다보던 휴고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뒤편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문짝이 스르르 땅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갑작스러운 마법에 놀란 사병들이 반사적으로 물러나자, 휴고는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문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제야 틈이 벌어지지 않는군요.”
헤스터의 작전을 들은 뒤, 휴고가 요구한 것은 다름 아닌 벽이었다. 그것도 아주 단단하고 판판한 벽.
‘하지만 근방에는 벽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군영에는 천막으로 지어 놓은 임시 막사뿐이고, 도시는 멀리 떨어져 있어요.’ ‘그렇잖아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이동마법을 쓰느라 마력을 낭비하고 싶진 않군요. 벽이 없다면 판판한 땅도 괜찮습니다.’
그리하여 휴식을 취하던 사병 서넛이 동원되었다. 문과 땅이 맞닿을 때 틈이 벌어지면 안 된다는 것을 어찌나 강조했던지, 사병들은 심지어 각도기까지 동원해서 땅을 고르게 만들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대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휴고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저, 저게 대체 뭡니까!”
문 안쪽을 기웃거리던 옥슬리 대령이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그러나 휴고는 대령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태연하게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문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마치 계단을 걷듯 휴고의 모습이 차츰차츰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판판한 땅바닥이던 곳에 다른 공간이 연결된 광경을 목도한 대령과 사병들은 황망하게 입만 쩍 벌렸다.
옥슬리 대령이 공연히 헛기침하며 헤스터를 돌아보았다.
“대체 저게 무업니까?”
“……보다시피 문입니다.”
너무도 지당한 대답이었다. 어쩐지 자존심이 상한 대령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걸 저라고 모르겠습니까? 다만 문짝이 놓인 곳은 판판한 땅이되, 휴고 경이 문을 여니 웬 어두운 방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문과 창고를 연결한 모양이군요.”
“문과 창고를요? 어차피 자택이 지척인데 굳이 저러실 것까지야…….”
옥슬리 대령이 말을 흐렸다. 헤스터가 차분히 설명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휴고 경의 창고는 외딴곳에 있을 겁니다. 경이 생각하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겠지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사방이 막힌 창고를 만든 뒤 마법으로 창고와 연결한 문을 안전히 보관하는 것은 마법 사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대령은 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로 은행의 금고도 믿지 못하는 것이 마법사일지니, 참으로 그들다운 용의주도함이었다.
“그런데 휴고 경은 무얼 가지러 가신 겁니까?”
헤스터의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선 휴고의 마법이 절실했다. 그러나 휴고는 작전을 듣자마자 웬 이상한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여태 마법사가 의지로 목소리로 마법진으로 마법을 발현하는 광경만 보아 왔던 대령은 도대체 그 대단한 마법을 부리려면 어떤 장치가 필요한지 몹시 궁금해졌다.
하지만 헤스터는 정확한 답을 내 주지 않았다. 미동 없는 문을 잠시간 내려다보더니 그저 말 한마디 남길 뿐이었다.
“……무언가 필요한 게 있으시겠지요.”
헤스터의 작전은 이러했다.
‘휴고 경. 지금 겨울을 불러올 수 있습니까?’ ‘불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겨울을 불러내야 하는 장소가 문제겠지요.’ ‘기차로 겨울을 불러와야 합니다. 가능한가요?’ ‘……저기 두 분, 기차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지요?’
대저 날씨나 계절을 바꾸는 거대한 마법은 적용 범위가 넓어질수록 필요한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장 혁명군이 기차를 점령한 상황에선 총기의 사정거리 이상으로 기차에 접근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일전에 헤스터가 그러했듯 좌표에 의존한 채 마법을 부릴 수도 없었다. 겨울을 불러오는 마법은 단순한 일회성 폭파와는 사정이 달랐다. 마법을 발현하는 데만도 서너 시간이 걸리는 데다, 휴고 본인도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닌 만큼 좌표의 오차가 크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총의 사정거리 가까이 다가가서 마법을 부리는 수밖에 없었다.
‘기차가 800m고 총기의 사정거리가 100m 정도이니, 마법의 적용 범위만도 대략 80,000㎡군요. 게다가 여긴 야외고요.’ ‘가능하겠습니까?’ ‘글쎄요. 그만한 마법은 부려 본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 없군요. 그런데 어째서 겨울이 필요한 겁니까?’ ‘아군의 시신을 조금 살펴보니 마력의 잔량이 선명하게 남아 있더군요. 마치 자신의 정체를 떠벌리듯이.’ ‘그럼 적측 마법사가 누군지 아시는 겁니까?’ ‘아직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다만 탄생성을 알았으니 범위를 좁힐 수는 있었죠.’
별의 마력을 빌려 마법을 구현하는 마법사의 특성상 마법사의 마력은 곧 그들의 탄생성으로 귀결된다. 그러니 시신에 남은 마력을 바탕으로 정체 모를 마법사의 탄생성을 유추하는 것쯤은 헤스터에겐 일도 아니었다.
‘적의 탄생성은 역천의 별 무제타입니다. 흔히 흉조로 여겨지는 별인 만큼 무제타를 탄생성으로 삼아 태어나는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아요. 실제 이명도감에서도 무제타를 탄생성으로 삼은 마법사는 고작 29명이었습니다.’ ‘탄생성이 무제타라. 좋지 않군요. 지금은 무제타가 가장 강성한 역천의 날인데.’ ‘그래서 겨울이 필요합니다.’
헤스터는 그리 말하며 두꺼운 지도를 펼쳤다. 옥슬리 대령은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선과 수식으로 빼곡한 그것은 별의 자취를 좇는 지도, 즉 성도(星圖)였다.
‘작금은 무제타가 강성한 시기입니다. 어젯밤 사흘째 역천의 날을 넘겼으니, 이틀 뒤에는 무제타의 힘이 가장 강력한 엿새째 역천의 날이 도래하겠지요.’
헤스터는 지도 서편에서 유난히 붉게 빛나는 별을 가리켰다.
‘무제타가 뜨는 여섯 날은 1년 중에서 성도가 가장 교란되는 시기입니다. 별들의 왕 둘시네아가 빛을 잃고 그 권속의 별도 함께 빛이 잦아들지요. 그래서 별들 간의 세력 다툼이 가장 격렬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하늘 정중앙에 자리한 둘시네아와 그를 호위하듯 둘러싼 대표적인 권속이 유난히 시들어 있었다. 별들의 왕이 힘을 쓰지 못함에 무제타를 비롯한 변방의 별이 난립하는 형국이었다.
‘역천의 날이 도래하는 시기는 늘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격언도 있지요. 역천의 별이 뜨는 날에는 원수와 맞서지 마라.’ ‘하지만 금방 적의 탄생성이 무제타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은 적의 힘이 가장 강성한 시기니 역으로 아군에겐 가장 좋지 않은 시기가 아닙니까?’ ‘예. 가장 나쁜 시기지요. 하지만 역천의 날을 미리 예측해서 대비할 수는 없어도 다소간 잠재울 수는 있습니다.’
묵묵히 성도를 보던 휴고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겨울이 필요하군요.’
별안간 성도에 냉랭한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근래 강성했던 봄별과 여름별이 얼어붙고, 오래전 힘을 잃었던 겨울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혼란하던 성도가 더욱 혼란해졌다.
‘별은 계절에 따라 성쇠를 거듭합니다. 지금은 늦봄이니만큼 봄별과 여름별이 강성한 시기지만, 만일 휴고 경이 겨울을 불러온다면 그만큼 하늘의 질서가 어지러워지겠지요.’ ‘그렇잖아도 역천의 날로 어지러운 하늘에 더한 혼란을 심으려는 계책입니까?’ ‘그리해 무제타를 잠재울 수만 있다면요.’
헤스터가 사늘한 눈으로 성도를 굽어보았다.
흉포하게 주변의 별빛을 갉아먹던 무제타가 차츰 힘을 잃기 시작했다. 때아닌 겨울바람이 역천의 별 무제타마저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무릇 독을 제거할 때는 더 지독한 독을 쓰라 하였습니다. 저들이 혼란을 원한다면, 더한 혼란으로 맞서면 그만입니다.’
휴고가 문을 열고 나온 것은 그로부터 40분가량 지나서였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군요.”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한 아름 품에 안은 채 회중시계를 열어 본 휴고가 혀를 찼다. 그새 옥슬리 대령이 다가와 물었다.
“어찌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창고를 정리한 지 하도 오래되어서 당최 제자리에 있는 물건이 없더군요.”
휴고가 단조롭게 대꾸했다.
“그래도 필요한 물건은 모두 찾아왔습니다. 이만 가시죠.”
마법사 한 명과 마녀 한 명, 그리고 서른 명 남짓한 군인은 철로로 향했다. 아직 대낮이기에 대놓고 다가오는 군인들이 기차에선 훤히 내다보일 터였다. 그러나 황급히 이편으로 총구를 드미는 적군의 모습에도 내딛는 걸음걸이에는 한 점 망설임이 없었다.
느닷없는 군인의 등장에 당황한 무장 혁명군이 슬슬 방아쇠에 손가락을 거는 순간이었다. 서른여 명의 불청객은 총기의 사정거리를 애매하게 남기고 멈춰 섰다. 혁명군이 긴가민가하여 몇 차례 총을 쏘았으나, 애꿎은 총알만 낭비한 꼴이었다.
“대령님. 저희 총기는 사정거리가 더 길지 않습니까? 여기에서라면 걱정 없이 사격할 수 있습니다.”
사병이 활기차게 말했다. 옥슬리 대령은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기차에 인질이 있다는 사실은 벌써 잊었나? 우리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인질들의 안전임을 잊지 말게. 혁명군을 생포하는 건 그 다음이야.”
휴고는 걸음을 멈추자마자 바닥에 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법에는 전혀 문외한인 사병들이 보기에도, 또한 경지에 이른 자만이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백색전당에 든 위대한 마녀가 보기에도 도무지 쓰임새를 알기 어려운 잡동사니였다. 깃펜과 잉크통, 그 뒤로 나열된 괴이쩍은 기계 장치들을 물끄러미 살피던 헤스터가 물었다.
“이게 다 무업니까?”
휴고는 바삐 깃펜의 촉을 다듬으며 대꾸했다.
“무제타의 힘이 강성한 시기에 심지어 늦봄이니, 이만큼 겨울을 불러오기 어려운 때도 없지요. 모두 마법을 도와줄 장치입니다.”
적잖이 오래간 방치했던지 휴고는 깃펜을 손질하는 데만도 꽤나 애를 먹었다. 하지만 마법은 어디까지나 마법사의 고유 영역. 마법을 구현하는 세세한 방법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공연히 휴고를 재촉하는 이는 없었다.
“저 기계들을 각각 동서남북으로 놓아 주십시오.”
휴고가 비로소 깃펜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사병들이 기계의 위치를 나침반과 견주는 사이, 펜촉을 잉크에 담그던 휴고가 불현듯 헤스터를 돌아보았다.
“여기 있을 겁니까?”
세상에는 마법을 부리는 모습조차 타인에게 보이길 꺼려 하는 마법사가 제법 많았다. 제각기 마법을 부릴 때 사용하는 기도문이 다르고 수식이 다르니, 어찌 보면 자신만의 비기를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불편하다면 물러나겠습니다.”
“……아니요. 경이라면 상관없겠지요.”
“예?”
휴고는 변함없이 냉담한 얼굴로 대꾸했다.
“경은 굳이 내 방식을 차용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휴고가 기계 장치들 사이로 들어가자, 옥슬리 대령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마법을 완성하시는 동안 휴고 경은 움직이실 수 없으니, 그동안 혹시 있을지 모르는 적침은 저희가 방어하겠습니다.”
“적측 마법사는 어찌 대처하시겠습니까?”
“부관을 시켜 남은 군사를 이끌고 기차의 후미를 공격하라 일렀습니다. 되도록 해를 입지 않게끔 멀리 떨어져서 사격만 하도록 지시했으나, 일전에 짐칸이 폭발한 전적이 있는 만큼 마법사도 쉬이 눈길을 돌리긴 어려울 겁니다.”
기차와의 거리는 100m 남짓. 마침 이편에 누가 있는지, 무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거리였다. 더군다나 휴고의 앞으로 서른 명의 건장한 군인들이 장총을 든 채로 도열했기에, 기차에서 육안으로 휴고 알피어스를 발견하기는 무리였다.
휴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동시에 그의 몸이 풀밭 위로 살짝 떠올랐다. 흐린 빛을 띤 잉크가 펜촉 끝에서 반짝였다. 따뜻한 볕이 쏟아지는 봄날의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휴고가 이윽고 허공에 글씨를 새기기 시작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마법사가 손에 쥔 것은 깃펜이고 펜촉에 묻힌 것은 잉크이건만, 허공에 각인되는 유려한 필체는 마치 별빛처럼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범인은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그것은 마법의 언어였다. 마법사에게 탄생과 동시에 특별한 힘을 선사한 별을 찬미하는 시요, 그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하여 하늘에 전하는 기도문이다.
“저건 대체…….”
옥슬리 대령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헤스터가 차분히 설명했다.
“별빛을 담은 잉크입니다. 아마도 휴고 경의 탄생성인 발디비아의 별빛이겠지요.”
“지금까지 숱한 마법사들을 보아 왔지만, 저런 광경은 난생처음입니다.”
“대개 마법사들은 약식으로 마법을 행하니까요. 휴고 경을 비롯하여 몇몇 특별한 마법사들은 의지만으로도 마법을 부릴 수 있다지만, 계절을 바꾸는 거대한 마법은 단순히 그 정도로는 불가합니다.”
거대한 마법일수록 거대한 마력이 필요하다. 마법사는 별의 힘을 빌려 마법을 부리는 만큼, 거대한 마법을 부리려면 응당 보통의 방법과는 다른 수단으로 별에게 성의를 표해야 했다.
별에게 더한 정성을.
별에게 더한 감사를.
“그러니 단순히 기도문을 읊는 것보다는 손수 새기는 것이, 평범한 잉크를 사용하기보다는 기도드리는 별의 빛을 사용하는 것이 별이 보시기에 더욱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에 옥슬리 대령은 질린 낯빛으로 휴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그의 손이, 그의 손을 따라 이어지는 글자가 새삼 선득하게 다가왔다.
허공에 새기는 글씨가 끝없이 이어지고, 이따금 바람 따라 들리던 총성은 갈수록 격해졌다. 옥슬리 대령이 조바심을 감추지 못하고 기차의 후미를 기웃거리는 와중에도, 헤스터는 오로지 휴고가 적는 글씨에만 집중했다.
휴고가 발디비아에게 전하는 기도문은 형식으로 보아 일리카 아스톨포가 정립한 일리카 기도문을 다소 변형한 것이었다. 중간중간 사용하는 수식도 별달리 특별한 점은 없었다. 기도문이든 수식이든 마법사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식이다. 종종 모르는 약자나 기호가 등장했지만, 앞뒤 문맥을 감안하면 충분히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났다.
기차 후미에서 마법사와 교전하던 부관이 더는 견디지 못하겠던지, 사병을 보내 언제쯤이면 마법이 발현되는지 다급하게 물어 왔다. 하지만 대령은 전할 말이 없었다. 휴고는 벌써 사병 세 명에 걸친 기도문을 작성하고 있었으나, 마법에 문외한으로서 그의 손이 언제 멈출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1시간이 더 지났다.
어느덧 해가 서편으로 기울고, 사병들의 그림자가 곱절은 더 길어졌다. 3시간째 총을 들고 부동하는 사병들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후미에서 마법사를 상대로 분투하던 부관이 견디다 못해 퇴각한 것인지, 끊임없이 들려오던 총성도 어느샌가 잠잠해졌다. 철로를 타고 흐르는 정적이 사뭇 섬뜩했다.
옥슬리 대령은 초조하게 기차 후미를 힐끗거렸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언제 적측 마법사에게 발각될지 모르는 형편이지만, 한창 마법을 구현하는 휴고를 불러 이제 와 후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별안간 휴고의 손에서 깃펜이 떨어져 내렸다. 풀밭에 나뒹구는 깃펜을 보고 식겁한 대령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휴고는 더 이상 깃펜에는 관심 없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멍하니 허공의 별빛을 바라보던 휴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끝났습니다.”
그 순간, 허공에 뜬 휴고의 발밑으로 마법진이 그려졌다. 가장 먼저 둥근 원이 나타나고 그 안에서 오망성과 모래시계, 그리고 <공정한 알피어스>를 상징하는 파란 영양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타난 시곗바늘이 이미 지나간 겨울을, 혹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야 닥칠 겨울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원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선과 무수한 글씨가 넘실대며 빛을 발하자, 비로소 마법진에 걸친 기계장치들이 덜덜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해가 뉘엿뉘엿 서편으로 넘어가며 날이 어두워지는 가운데, 마법진과 별에게 올리는 기도문은 점차 밝아져만 갔다.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챈 적군이 사격을 재개했다.
그리 어수선한 와중에도 헤스터는 점점 빛을 더해 가는 마법진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정확히는 마법진에 걸친 기계 장치들을 보고 있었다. 제아무리 정확한 수식도 완벽한 마법을 이루지는 못하므로, 자꾸만 수식 바깥으로 튀어 나가려는 마법을, 자꾸만 원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마법을 기계 장치들이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마법진의 진동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덜덜거리는 모습이 못내 아슬아슬했으나, 예상외로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일순 지상의 별빛이 꺼졌다. 갑자기 사라진 마법진에 사병들이 어리둥절한 사이, 휴고가 힘없이 풀밭으로 쓰러졌다. 옥슬리 대령이 서둘러 휴고의 상태를 살폈다.
“헤스터 경! 휴고 경께서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대령이 소리쳤다. 하지만 헤스터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머나먼 북쪽, 이제는 어둠에 물든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내 좌절한 대령이 물었다.
“마법은 실패한 겁니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옥슬리 대령은 쓰디쓴 절망을 삼키며 고개를 떨구었다. 적군이 기차에서 나올 기미가 보인다며 사병들이 자꾸만 대령을 독촉했다. 계속 여기에 머물다가는 교전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헤스터는 하염없이 북쪽 하늘만 주시했다. 잿빛 눈이 어두운 하늘 곳곳을 헤집으며 마땅히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을, 마땅히 드러나야 할 것을 찾았다.
그리고 불현듯 눈을 스치는 차가운 빛.
헤스터의 입가에 여트막한 미소가 어렸다.
“……성공했습니다.”
봄과 여름에 밀려 사라졌던 별이 이윽고 나타났다. 아직 시기가 아님에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간곡하게 올리는 기도를 들어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겨울의 별 발디비아.
때아닌 찬 바람이 풀밭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령은 귓가에 닿는 써늘한 기운에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사병들이 갑작스러운 찬 기운을 느껴 기겁하고, 까닭 모르는 날씨 변화에 놀란 적군이 돌연 총질을 멈추었다. 한기를 느낄 새도 없이 숨결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겨우 싹틔운 봄꽃과 여름꽃이 차례로 얼어붙으며, 잡풀은 추위에 떨며 옹송그리는 계절.
바야흐로 겨울이 도래했다.
* *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법사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세상으로 나와 하고 싶었던 일 중에는 물론 살육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목숨을 건 결투가 더욱 시급했다. 거의 10년 만에 사용하는 마법인 만큼 당분간 단련하는 것이 맞았으나, 그럼에도 잉그람 무장 혁명군이라는 시답잖은 무리에 굳이 합류한 이유는 결투의 짜릿함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는 그토록 동족과의 결투를 갈망했고, 생사를 넘나드는 자극에 목말랐다.
하지만 도무지 결투를 벌일 기회가 없었다. 무릇 마법사란 엉덩이 무겁기로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족속이라지만, 아무런 방비도 없이 평범한 군사만 내보낼 줄은 또 몰랐다. 지난밤 열댓 명을 학살하며 중대한 경고를 주었다고 여겼는데, 아무래도 휴고 알피어스는 생각보다 더한 겁쟁이였던 모양이다. 그만한 재능을 지니고도 뒤에 숨어 뒤꽁무니 빼는 모습이라니. 일평생 누군가를 죽여본 적 없는 애송이에 불과하다지만, 가히 저세상에서 이즈리얼 알피어스가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래서 마법사는 평소보다 의욕이 없었다. 멀리서 총만 깔짝대는 적군이 거슬렸으나, 짜증스럽게도 마법사에게 총이란 제법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기였다.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는 만큼 사격수를 포함하여 단번에 해치우는 편이 깔끔했지만, 그러자니 간단한 마법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는 휴고 알피어스를 상대할 때까지 되도록 마법을 자제하고 싶었으므로, 적군의 총질에 대강 응대만 해 주며 하릴없이 시간을 죽였다. 지루하고 지루했지만, 그렇다고 10m 앞의 와인 병도 제대로 맞히지 못하는 오합지졸에게 여길 맡겼다간 눈 깜짝할 새에 기차를 빼앗길 것이었다.
문제는 마법사가 그리 인내심이 깊지 않다는 점이다. 1시간이 흐르고 2시간이 흐르자, 마법사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그리고 3시간째에 달했을 때는 아까의 다짐도 잊고 기차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적군은 마법사가 나타나기 무섭게 서둘러 퇴각했다. 마법사는 혁명군의 만류도 뿌리치고 적군을 뒤쫓았다. 마구잡이로 마법을 사용하여 한두 명 죽이긴 했으나, 그로는 성이 차질 않았다. 지난밤 무리했어도 다행히 요즈음은 그의 탄생성인 무제타가 가장 강성한 시기였다. 위대하신 그의 별께서 당신의 가엾은 아들을 굽어 살피시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삽시에 잦아드는 불길을 멀거니 쳐다보던 마법사가 천천히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직 별 뜨지 않는 초저녁임에도 마법사의 기민한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역천의 별 무제타가 얼어붙었다.
“숨어서 대체 뭘 하나 했더니…….”
뒤늦게 찾아드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마법사가 사납게 웃었다. 무제타를 잠재우기 위해 하늘의 질서를 교란할 줄 누가 알았겠나. 이만하면 휴고 알피어스에 대한 판단을 필히 재고해야 했다.
휴고 알피어스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막무가내인지도 몰랐다.
마법사는 기차로 되돌아오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기차 부근은 어느덧 완연한 겨울이었다. 늦봄에 겨울을 불러오다니, 과연 겨울의 마법사란 이명에 걸맞은 대단한 재능이었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 보면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이만한 마법을 부렸으니 휴고 알피어스가 말짱할 리 없었다. 그렇잖아도 여름에 다다른 늦봄에, 탄생성인 발디비아와는 상성이 맞지 않은 무제타가 강성한 시기였다. 어림잡아 열흘쯤은 간단한 마법조차 힘겨울 터였다.
수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핏 보면 앞뒤 가리지 않은 미련한 작전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제법 일리가 있었다. 혹자는 역천의 별 무제타가 강성한 시기에 이리 거대한 마법을 감행한 것을 우둔하다고 평하겠으나, 달리 보면 무제타가 강성한 시기이기에 가능한 마법인지도 몰랐다.
늦봄에 겨울을 불러오는 것은 하늘의 질서를 어지르는 것이다. 일전에 휴고 알피어스가 한여름의 백색전당에 겨울을 불러온 적 있다지만, 사방이 막힌 실내와 허허벌판인 실외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니 이번 마법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제타로 인하여 이미 하늘의 질서가 어그러진 덕분이었다.
상성이 맞지 않는 무제타로 말미암은 제약이 더 클 것인가, 아니면 이미 흐트러진 하늘의 질서로 얻는 이득이 더 클 것인가. 누구도 쉬이 장담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미리 조사했기로, 휴고 알피어스는 성도학(星度學)에 능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모든 별의 주기를 암기하고, 운행의 궤도와 각도를 계산하여 하늘의 질서를 꿰뚫는 성도학은 마법학에서도 가장 어려운 학문으로 통했다. 휴고 알피어스는 이론보다는 본연의 재능과 감각으로 마법을 부리는 부류이므로, 진정 그만한 계산으로 겨울을 불러온 것인지 자못 의심스러웠다.
더군다나 발디비아를 깨워 겨울을 불러왔다 한들, 어차피 오래 지속될 마법은 아니었다. 고작 몇 시간이면 다시 잦아들 마법이건만, 그 찰나를 위해 무려 열흘이란 대가를 지불했단 말인가. 십중팔구 기절했을 휴고 알피어스와 달리, 그는 마법을 부리는 데 애를 먹을 뿐 아주 말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마법사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되뇌며 기차에 올랐다. 그러자 구석에서 안절부절못하던 혁명군 하나가 달려왔다.
“마법사님, 무사하셨군요! 적군은 처리하셨습니까?”
“아니.”
마법사는 발길을 재촉했다. 쓸데없이 긴 기차에는 화물칸만도 열 칸이 넘었다. 기관실과 후미를 오가느라 허비한 시간만도 상당했다.
그런데 네 번째 화물칸을 지나갈 무렵, 마법사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뒤따르던 혁명군이 의아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법사는 말을 아꼈다. 서늘하게 식은 눈이 좌우를 바삐 오가던 중, 느닷없이 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이 삽시에 벽면과 천장으로 번지며 숫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화물칸 전체가 무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진동에 넘어진 혁명군이 엉망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간신히 화물을 붙잡고 진동을 견디는 마법사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겨우 입술을 떼어 주문 몇 마디를 내뱉었지만, 얼어붙은 별은 아무런 호응도 없었다.
진동이 잦아든 것은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서였다. 그동안 바닥을 구르며 온갖 화물에 치인 혁명군이 구석에서 속을 게워 내는 사이, 마법사는 비척거리며 출구로 향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예감대로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법사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혁명군이 힘겹게 물었다. 짐칸에는 창문이 없기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말없이 철문을 노려보던 마법사가 이내 몸을 틀었다. 그의 손이 철문을 지나 벽을 한차례 훑었다. 매끈하기 그지없던 벽이 어느새 울퉁불퉁하게 죄어 있었다.
“……마법이군.”
괴괴한 사위에 스산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처음에는 울음인 줄 알았으나 차츰 소리를 더해 가길, 웃음이었다. 혁명군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그리도 신명 난지, 고개를 뒤로 꺾으며 한바탕 대소하는 모습이 참으로 기괴했다.
“쥐새끼 같으니. 이렇게 나를 물 먹였다 이건가?”
마법사는 불현듯 웃음을 뚝 멈추며 중얼댔다.
저편에는 마법사가 한 명이 아니었다. 일찍이 예상했던 대로 휴고 알피어스도 있지만 하나가 더 있었다. 그래,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이제야 휴고 알피어스가 맘 편히 겨울을 불러온 것이 이해되었다. 뒤를 받쳐 줄 동지가 있으니, 그런 배짱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으득. 이를 간 마법사가 뒤돌아섰다. 감춰 둔 패라면 이쪽에도 있었다. 10년 만에 가까스로 돌아온 세상.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 *
옥슬리 대령은 막사에서 펼쳐지는 경이로운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았다. 동물과 소통하는 마법사가 있다고 들었지만, 이렇듯 두 눈으로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막사로 쪼르르 날아 들어온 두견새가 책상 끄트머리에 앉아 날개를 접었다. 헤스터는 새가 우짖는 소리를 경청하며 반짝이는 보석 가루를 내 주었다. 새는 기쁘게 가루를 받아먹었다.
“마법사가 화물칸으로 들어갔다는군요.”
헤스터는 지도의 좌표를 확인했다. 마법이 발현되기까진 찰나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지금 무슨 마법을 부리신 겁니까?”
“나무로 짐칸 전체를 에워쌌습니다. 적측 마법사는 휴고 경 덕분에 마력을 운용하기 힘들 테니, 당분간은 짐칸에서 나오지 못할 겁니다.”
그녀가 부린 마법은 자연을 십분 활용한 것이었다. 철로 아래에 숨은, 수십 년 전 인간의 손에 잔인하게 잘려 나간 나무뿌리를 위로하며 성장을 유도한 것이다. 이렇듯 생명을 다루는 마법은 까다롭기로 손꼽혔으나, 태생적으로 자연과 가까운 헤스터는 비교적 손쉽게 마법을 완수할 수 있었다.
헤스터는 가라앉은 눈으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얼기설기 덩굴처럼 자라난 나무줄기가 짐칸을 마구잡이로 옥죄었으니, 마법사는 얼마간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제한 시간은 휴고가 불러온 겨울이 물러가기까지의 너덧 시간 정도. 나머지는 마법사가 부재한 사이, 무장 혁명군을 제압하고 인질을 무사히 구출해야 하는 잉그람 군대의 몫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캄캄한 바깥을 내다보았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초조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낮처럼 밝히고 싶었으나, 날이 어두워야만 기습 작전을 펼치는 아군에게 유리하니 하릴없이 이곳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진실로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기차로 뛰어들고 싶었다.
그래, 마음 같아서는.
헤스터는 다시금 솟아오르는 생각을 애써 참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디아나의 안전이었다. 총은커녕 실제로 결투를 벌여 본 적도 없는 그녀로선 후방에서 마법이나 부리며 아군을 보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제멋대로 기차로 뛰어들었다가 행여나 누군가 상처를 입는다면. 행여나 디아나가 다친다면. 상상만으로도 손이 차갑게 식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헤스터는 군대에 무지했지만, 적어도 국왕이 이런 중차대한 사건에 오합지졸 부대를 보내지는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군대의 능력은 몰라도 잉그람의 정예부대라는 이름은 믿었다. 더구나 마법사도 부재한 상황이다. 작전을 완수하지 못할 리 없었다.
헤스터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밀려드는 어둠 속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디아나가 무사하길. 하나뿐인 자매가 무사히 품으로 돌아오기를.
디아나는 그녀의 하나 남은 가족이자, 덧없는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모진 스승 아래서 마법을 익힐 때도, 어머니가 남긴 빚을 악착같이 갚아 갈 때도,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이에게 배신당했을 때도, 헤스터는 오로지 디아나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모두가 그녀를 축복받았다고 치켜세우지만, 사실상 그녀의 삶에서 축복이란 오직 디아나뿐이었다. 디아나야말로 그녀의 유일무이한 별빛이었다.
그러니 너만은 살아야 한다.
헤스터는 끊임없이 기도를 올렸다. 아는 기도문이란 기도문은 전부 끌어냈다. 그리해 어지러운 하늘에 닿을 수 있도록, 그녀에게 마법을 선사한 별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하지만 기도에 답한 것은 별이 아니었다.
쾅!
별안간 폭발음이 들려왔다. 퍼뜩 일어서려던 찰나, 난데없이 새 여러 마리가 막사로 몰려들었다. 제각기 우짖는 소리에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헤스터는 휘청거리며 간신히 책상을 짚었다. 그제야 새가 이르는 소리가 마디마디 귀에 들어왔다.
화물칸. 폭발.
당최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겨울의 별 발디비아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상성이 맞지 않는 무제타는 힘이 쇠하기 마련이었다. 갑작스레 하늘의 질서가 어지러워져서 적측 마법사가 얼마간 마법을 부리지 못할 것은 자명한데, 어떻게 폭발이 일어났는지 짐작조차 불가했다.
헤스터는 산란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화물칸의 좌표를 떠올렸다. 화물칸이 폭발했다면 다시금 동여매면 그만이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아직은 괜찮았다, 아직은.
그때, 사병이 막사로 들이닥쳤다.
“경, 인질들이 무사히 기차를 빠져나와 군영으로 오고 있답니다!”
헤스터는 당장에 막사를 뛰쳐나갔다. 얇디얇은 옷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쳤지만, 추위를 느낄 새도 없었다. 그저 숨이 턱에 받치도록 달릴 뿐이었다.
철로 쪽으로 트인 곳이 유난히 시끄러웠다. 횃불로 사방을 밝힌 들판이 꾀죄죄한 승객들로 한가득이었다. 울고 웃는 소리가 귓가에 그득하여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헤스터는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모르는 사람들을 헤집으며 익숙한 얼굴을 찾아 헤맸다.
“헤스터 경. 오셨군요!”
멀리서 옥슬리 대령이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헤스터가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떼었다.
“동생은 어디에…….”
“디아나 양이라면 지금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령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헤스터는 입술을 짓씹었다.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자꾸만 일렁이는 불안감을 그리 내리눌렀다.
그런데 근처에 서 있던 여자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혹시 키가 이만한 마녀 아가씨를 찾으셔요?”
여자는 갓난아기를 품에 꼭 껴안고 있었다. 헤스터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나, 어쩌면 좋아! 그 아가씨 기차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어요. 마법사에게 붙잡혔거든요.”
충분히 기차를 탈출할 수 있었는데, 우리 아기를 구해 주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어요. 그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우리 아기는 무사하지 못했을 텐데. 혹시 그 아가씨의 가족이세요?
여자의 호들갑이 계속 이어졌으나, 헤스터는 듣지 못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시끄럽던 소음이 일순 멎어 버렸다.
헤스터는 멍하니 여자를 바라보았다.
뚝. 뚜욱.
어디선가 핏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쟁쟁하게 울렸다.
* * *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서, 아직 늦봄이 완연하던 오후 4시경.
온화한 날씨가 무색하게도 기차에는 스산한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무장 혁명군이 기차를 점령한 지도 하루가 지났지만 기차는 어제와 똑같았다. 승객들은 여전히 좌석에 앉아 부동했으며, 총을 든 괴한이 객실마다 적어도 하나씩은 배치되어 있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총성에도 승객들은 이제 비명을 지르거나 헛구역질하진 않았다.
문제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디아나는 주린 배를 붙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짱한 식사를 한 지도 벌써 하루가 지났다. 괴한은 물이라도 마실 수 있는 걸 감지덕지 여기라고 했으니, 앞으로도 인질의 식사를 챙겨 줄 용의는 손톱만큼도 없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온종일 굶기다니, 너무해.’
배고파 늘어졌던 디아나가 다시금 분연히 고개를 쳐들었다. 어쩌면 저들은 인질을 죄 아사시키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잔인할 수가 없다. 인류 역사상 이토록 풍요로운 때가 없었다고 여겨지는 시대에 먹지 못해서 죽는다니. 세상에 그보다 처참한 죽음이 또 어디 있을까.
디아나는 움푹 들어간 뱃가죽을 쓸쓸하게 매만지며 흘끗 올리버를 보았다. 정오경부터 꾸벅거리던 올리버는 벌써 4시간이 지나도록 숙면에 빠져 있었다. 디아나는 지난밤 곤하게 잤던 것은 까맣게 잊은 채 올리버를 한심하게 보았다. 그러나 어젯밤 마법사에게 맞아 흉하게 부어오른 오른쪽 턱을 보자니 한편으로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디아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괴한은 아까부터 창가에 달라붙어 바깥으로 총을 겨누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저 난리인지 궁금했지만, 안타깝게도 괴한이 총을 겨누는 곳은 반대쪽 창가였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디아나가 몸을 조금씩 들썩거리며 반대편을 흘깃거렸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즈음 뒤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도무지 소리가 끊이지 않는 걸로 보아 무슨 문제라도 생긴 듯싶었다.
디아나가 불안한 기색으로 뒤쪽을 흘깃거렸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꺽꺽거리는 소리에 이제는 여인의 흐느낌마저 더해졌다. 다른 승객들도 조마조마한 표정이었다.
객실이 술렁거리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괴한이 황급히 총을 이편으로 겨누며 소리쳤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어느 노부인이 간신히 울음을 참아 내며 대답했다.
“남편이 이상해요. 아까부터 숨을 제대로 못 쉬어요.”
괴한이 성가시다는 듯 바닥을 쾅쾅 밟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슬그머니 돌아앉은 디아나가 의자 위로 눈만 살짝 올려 상황을 엿보았다.
“젠장, 가지가지하는군.”
괴한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승객의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봐, 할멈. 당신은 조용히 좀 해. 어차피 곧 죽을 텐데 뭘 그렇게 질질 짜?”
“무, 물만 좀 주세요. 이 사람, 점심때부터 계속 목이 마르다고 했어요. 물만 마시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제발…….”
노부인이 울며 간청했다. 하지만 괴한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괴한이 상스러운 욕을 뇌까리며 제자리로 돌아가려 하자, 노부인이 얼른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제발요. 물만 주세요. 영감과 함께 딸아이를 보러 왕도로 올라가는 길이었어요. 딸아이가 곧 결혼하는데, 결혼식장에서 손 붙들어 줄 아버지는 있어야지요. 이렇게 매정하게 굴지 말아요.”
노부인에게 붙잡힌 팔을 신경질적으로 털어 내던 괴한의 눈빛이 돌연 사나워졌다. 그는 거리낌 없이 장총을 휘둘렀다. 단단한 개머리판이 노부인을 강타하는 소리와 함께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악!”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괴한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노인네가 시끄럽다는 둥, 성가시다는 둥 후련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엿보던 것을 들키기 전에 재빨리 바로 앉은 디아나는 얼음처럼 바짝 굳어 버렸다. 방금 들었던 노부인의 비명이 자꾸만 귓가에서 쟁쟁하게 울렸다. 노부인은 어떻게 된 걸까? 여전히 꺽꺽거리는 그 남편은 어떻고? 디아나가 차갑게 식은 손을 부여잡으며 불안에 몸서리치는 중에도 괴한의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괴한이 곁을 지나치는 순간이었다. 슬쩍 눈을 뜬 올리버가 때맞춰 발을 걸었다.
“으악!”
괴한이 볼썽사납게 복도를 굴렀다. 올리버는 지체 없이 괴한의 위로 올라탔다. 그는 괴한의 얼굴을 주먹으로 마구 후려갈겼으나, 괴한도 사지를 바동거리며 힘껏 저항했다. 주먹과 욕설이 줄곧 오갔다.
디아나는 서둘러 옆자리로 건너가 몸싸움을 지켜보았다. 체격은 올리버가 나았지만, 종일 굶었으니 아무래도 말짱하진 않을 터였다. 실제로 싸움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초조하게 상황을 관망하던 중이었다. 디아나는 불현듯 애타게 바닥을 헤집는 괴한의 오른손을 발견했다. 괴한이 넘어지며 떨어트린 장총이 지척에 있었다. 식겁한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마법을 부렸다. 장총이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나자, 멈칫한 올리버가 신속하게 장총을 들어 괴한을 겨누었다.
“일어나.”
괴한이 이를 갈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도움을 청하려는 듯 입을 벌리기 무섭게, 올리버가 장총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괴한은 종이 인형처럼 스르르 쓰러졌다.
승객들이 쓰러진 괴한을 멍하니 지켜보는 가운데, 올리버는 노부부가 있는 좌석으로 급히 달려갔다. 우선은 아까부터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는 남편 쪽이 급했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꺽꺽대는 노인을 잠시 살펴본 올리버가 즉시 노인의 넥타이와 단추 두어 개를 풀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승객에게 물었다.
“혹시 종이봉투 있습니까?”
승객이 손을 벌벌 떨며 봉투를 건넸다. 올리버는 종이봉투로 노인의 코와 입가를 가리며 호흡을 독려했다. 노인의 호흡이 조금 잦아들자, 이제 올리버는 노부인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얻어맞은 옆통수가 찢어졌는지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앞쪽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어쩔 겁니까?”
“붕대와 소독약이 필요합니다. 얼음도 있으면 좋겠군요.”
“그게 아니라, 이를 어쩔 거냐는 말이오!”
바삐 노부인을 살피던 올리버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늘 장난기로 반짝이던 다갈색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사내는 흠칫하며 말을 이었다.
“저, 저자를 저렇게 만들면 어쩌자는 겁니까? 다른 놈들이 오면 어쩌려고요?”
“그럼 이 사람들은 그냥 죽게 놔둡니까?”
“지금 그게 아니라.”
“방금 그리 말하셨습니다.”
사내는 말을 잃었다. 올리버는 고개 돌려 승객들에게 말했다.
“마법사는 1시간 전에 객실을 통과했습니다. 그때부터 혁명군도 창밖을 겨누느라 여념 없었고요. 이제 보니 저쪽에 군인이 있었군요.”
“군인이요?”
승객들이 반색하며 왼쪽 창가로 몰려가자, 올리버가 황급히 가로막았다.
“다들 가만히 앉아 계세요. 소란스럽게 구시면 다른 일당들이 이상함을 알아챌 겁니다.”
그러자 승객들은 전처럼 뻣뻣하게 자리에 앉았다. 올리버가 나직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제 말은, 여기 조용히만 있으면 당분간은 안전하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마법사나 혁명군은 군인과 대치하느라 바쁜 듯하니까요.”
“당분간이요? 그럼 당장 대책을 세워야지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선은 두 분을 치료해야죠. 혹시 여기에 의사 계십니까?”
동그란 안경을 쓴 중년 여성이 망설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소아과 의사지만 일단은…….”
“괜찮습니다. 의료 기기는 갖고 계십니까?”
“아니요. 휴가를 떠나던 참이라 미처 챙겨 오질 않았어요.”
난처한 상황이었다. 고심하던 올리버가 말했다.
“식당에 상비약이 있을 겁니다. 여기서 멀지 않으니 가져오겠습니다.”
“혼자서요?”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승객들의 시선이 삽시에 그녀에게로 모였다. 조금 놀란 듯 말끄러미 디아나를 보던 올리버가 이내 선선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지. 혹시 여기에 군에서 복무하셨던 분 계십니까?”
객실은 잠잠했다. 서로 눈치만 보는 승객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올리버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실제 전선에서 복무했던 기간은 고작 1년 정도입니다. 그것도 벌써 10년 전이고요.”
그러자 올리버보다 너덧 살가량 많아 보이는 남자가 손을 들었다.
“예전에 해병대에서 잠시 복무했소.”
“좋습니다. 혹시 다른 분 더 안 계십니까?”
“군에 입대했던 경험은 없지만, 사냥을 좋아해서 총은 제법 다룰 줄 압니다. 저런 장총쯤이야 눈 감고도 해체할 수 있어요.”
올리버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 칸으로 출발하기 직전, 올리버는 제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열었다. 그의 손에 멋들어진 은색 권총이 딸려 나왔다.
“그거 총이잖아요.”
디아나가 핼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걸 왜 들고 다녀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지. 지금처럼.”
올리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못내 불안해진 디아나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진짜 괜찮겠어요?”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는지 디아나는 알지 못했다. 올리버는 무장 혁명군을 오합지졸로 여겼으나, 과연 권총 한 자루로 그네들과 맞설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아가씨는 여기 있어. 곧 돌아올 테니까.”
커다란 손이 디아나의 붉은 머리를 헤집고 지나갔다. 평소라면 온갖 짜증을 부렸을 테지만, 어째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디아나는 그저 시무룩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로부터 20분 뒤, 세 사람은 상비약을 비롯하여 물통과 비상식량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식당 칸에는 아무도 없더군요. 생각보다 인력이 많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한껏 긴장했던 승객들이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올리버가 웃으며 말했다.
“식당 칸에서부터 차례로 문을 잠가 놓았으니, 누구든 침입하려는 자가 있으면 쉽게 알아챌 겁니다. 그러니 일단 가볍게 요기라도 하죠. 배가 든든해야 움직이든 앞으로의 계획을 짜든 할 테니까요.”
승객들은 제자리에 앉아 조용하지만 서둘러 식사를 시작했다. 모두 일등석 객실에 앉을 만한 재력과 교양을 지닌 덕분에 각별히 요란스럽지는 않았으나, 장장 하루 만의 식사인 만큼 음식이 들어가는 속도가 남달랐다.
빵을 허겁지겁 입으로 쑤셔 넣는 것은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배가 얼마간 차오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물을 마시는 척 올리버를 힐끔대자, 기민하게 시선을 알아챈 올리버가 눈을 맞춰 왔다.
“왜?”
흠칫한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앞으로 어떡할 거예요?”
“뭘?”
“뭐라니요. 감시하던 사람을 저렇게 때려눕혔는데, 여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마법사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디아나는 자신 없이 우물거렸다. 올리버가 흥미롭게 눈을 빛내며 몸을 기울였다.
“아가씨. 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
순식간에 디아나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웬 헛소리야. 나 말이에요, 나! 내가 걱정된다고요! 여길 지키던 혁명군이 저 꼴이 되었는데, 다른 놈들이 알면 괜히 나까지 위험해질 거 아녜요!”
“걱정하지 마. 아가씨는 신경도 안 쓸걸.”
“……어째 좋게는 안 들리는데요.”
디아나가 올리버를 째려보았다. 그는 칭찬과 비난을 섞어 말하는 아주 기막힌 재주가 있었다.
“오해하지 마, 아가씨.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 그렇잖아도 위급한 상황에서 성년도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애를 신경이나 쓰겠어?”
“누가 성년도 안 되었다는 거예요? 나 열아홉이라는 거 잊었어요?”
“어쨌든 눈에 보이기로는 그렇단 거야.”
올리버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뭐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소리야.”
디아나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올리버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웬만하면 아까 같은 짓은 하지 마.”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디아나는 모르는 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니나 스승님이 아닌 사람에게 보호받는 상황이 썩 낯설었다.
오래지 않아 승객들은 한자리에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였다.
“군대가 올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마법사가 언제 돌아올지 알고요. 당장 여길 지키던 혁명군이 저 꼴인데…….”
“그러고 보니 노부부의 상태는 어떤가요?”
“우리야 모르죠. 의사가 계속 돌보고는 있는데 한눈에도 평범한 증상은 아니잖아요. 아무쪼록 두 분 모두 구출될 때까지 무사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사실 나는 그 구출이란 것도 참 회의적입니다. 여러분도 다 보지 않았습니까? 여기엔 흉악한 마법사가 있다고요. 중대가 몰려와도 대적하긴 무리일 겁니다.”
“설마. 군에도 마법사가 한둘은 있겠죠.”
“마법사가 우리를 구하러 와 줄까요? 그들은 우리처럼 평범한 인간을 멸시한다고 들었는데요.”
계획을 세우려면 최소한의 정보라도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껏 혁명군의 감시를 받으며 객실에 갇혀 있던 승객들은 현 상황에 무지했다. 당장에 그들을 구출하러 온 군대가 어떤 규모인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올리버가 문득 입을 열었다.
“마법사는 그럴지 몰라도 국왕은 아닐 겁니다. 국왕이 이 소식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근방에 머무는 마법사를 소환했겠죠.”
승객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펜잔스엔 저명한 마법사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그 사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법사가 있다고요?”
“그럼 우리를 구하러 오는 겁니까? 아니, 그보다 마법사가 있는데 왜 아직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겁니까?”
질문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올리버는 난처한 기색으로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일단 조용히 합시다. 이렇게 시끄럽다간 다른 객실에까지 들리겠습니다.”
“그럼 당신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조금 전에 올리버와 대거리를 벌였던 중년 사내가 곱지 않은 기색으로 물었다.
“올리버 펜리입니다. 적당히 펜리 씨라고 부르세요.”
뜬금없는 소리에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올리버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글쎄요. 한 가지 길밖에는 없잖습니까?”
“한 가지라면…….”
“다들 아시다시피 뒤로는 갈 수 없습니다. 승객 대부분이 모인 이등석과 삼등석 객실에 혁명군이 몰려 있음은 보지 않아도 빤하니까요. 더군다나 뒤쪽으로 향했던 마법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요.”
“그럼 여기에 계속 머물자는 겁니까?”
올리버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나 다른 혁명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객실에 가만히 머무는 것도 그리 좋은 선택지는 아니겠죠. 뒤는 안 되고 여기 머무는 것도 힘들다면, 앞으로 전진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객실은 잠잠했다. 정확히는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승객들은 저마다 대경하거나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웬 미친 소리냐는 말은 없어서 좋군요.”
올리버가 느긋하게 웃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일등석 객실은 다른 객실들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본래는 서민과 가까이 있을 수 없다는 귀족 나리들의 요구로 이렇게 설계된 것이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선 좋은 조건입니다.”
대부분의 기차는 운전실을 포함한 차체와 보일러가 전면에 위치하고, 그 뒤로 객실과 화물칸이 연결되어 있다. 그중 일등석 객실은 객실 중에서도 가장 앞에 위치했다.
“앞쪽에는 보일러와 운전실뿐입니다. 그조차 기차가 멈췄으니, 보일러실을 감시하는 인원은 몹시 적을 겁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을지도 모르고, 있어 봤자 한두 명이겠지요. 문제는 운전실입니다.”
“아니, 우리가 왜 앞으로 가야 해요? 어째서 운전실까지 가야 하는지 설명은 해 줘야죠.”
중년 여성이 황망히 물었다. 올리버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무사히 탈출하기 위해선 외부의 도움이 절실하니까요. 지금 우리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 모르잖습니까. 운전실에는 통신기기가 있을 테고, 그것만 손에 넣으면 군부대와 연락할 수 있을 겁니다. 내 짐작으로 군부대는 지난밤 그러했듯 날이 어두워져서야 기차로 접근할 겁니다. 창밖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긴 사방이 훤하게 뚫려서 한낮에는 쉽사리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군만 기다리기도 요원하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일단 군과 연락하여 작전을 맞춘 이후에 움직이는 것이 아무래도 탈출 가능성은 더 높겠지요.”
몇몇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보일러실이나 식당과는 달리 운전실엔 십중팔구 무장 괴한이 있을 것이었다. 많은 승객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서로 눈치만 보았다.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 운전실로 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비효율적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어느 정도 자신 있는 분들만 가도록 합니다. 그동안 다른 분들은 문가에 짐을 쌓아서 다른 혁명군이 객실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자, 누가 가시겠습니까?”
올리버와 함께 식당을 다녀왔던 두 명이 먼저 손을 들었다. 뒤이어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손을 들었다. 올리버가 빤히 쳐다보자 여자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말했다.
“이래 봬도 여군 예비역이에요.”
“아까는 왜 밝히지 않으셨습니까?”
“아이가 있거든요.”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사내아이가 여자의 치맛자락을 꼭 붙들었다. 여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틋하게 말했다.
“아이아버지는 없어요. 가까운 친척도 없고요. 나까지 죽으면 천애고아가 될 테니 쉽게 손을 들 수가 없더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아이가 무사히 구출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어요.”
여자가 결연히 대답했다.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승객들을 돌아보았다. 더 이상 자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갈래요.”
그때, 여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승객들의 시선이 그간 올리버의 곁에 조용히 앉아 있던 디아나를 향했다. 붉은 머리칼과 이제껏 볕을 멀리한 듯 유독 새하얀 얼굴, 그리고 자그마한 몸집. 건너편에 앉은 승객이 머뭇거리며 디아나를 말리려는 순간, 올리버가 놀랍도록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돼.”
늘 서글서글하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시니, 어쩐지 생판 모르는 사람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그러나 디아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추켜올리며 당당히 대답했다.
“왜요. 당신이 내 보호자라도 돼요?”
“아가씨.”
“내가 왜 함께 가려는 줄은 알아요? 당신들이 영 못 미더워서 그래요. 나는 절대로 여기서 죽지 않을 건데, 괜히 당신들이 일을 망칠까 봐 염려된다고요.”
야박한 말에 승객들의 시선이 뾰족해졌다. 하지만 디아나는 개의치 않았다.
“솔직히 말해 봐요. 아까 내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만일 마법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괴한이 무사히 총을 쥐었더라면.
디아나가 아무리 재능 없는 마녀여도, 언니나 휴고 알피어스, 혹은 적측의 마법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보잘것없는 마녀여도 그녀는 범인이 상상조차 불가한 것을 실현하는 마녀였다. 계절이나 날씨를 바꾸진 못해도, 총을 천장으로 떠오르게 하거나 손대지 않고 문을 여는 것쯤은 가능했다.
“그러니까 나를 좀 잘 써먹어 보라고요.”
디아나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시답잖은 마법이나 다루는 이상, 마법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따라 작전의 성패가 극명하게 갈릴 터였다. 그러나 잘만 쓰면 손쉽게 운전실을 탈환할 수도 있었다.
얼마간 그녀를 응시하던 올리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내 뒤에 꼭 붙어 있어야 해.”
“잠깐! 저 여자애를 진짜 데려간다는 말이오?”
괴한의 장총을 쥔 중년 사내가 황당한 기색으로 물었다.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이자, 객실이 차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대놓고 말하진 못해도 디아나를 못 미더워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기가 차 주변을 둘러보던 디아나가 사내를 째려보았다.
“내가 댁보다는 훨씬 쓸모 있을걸요?”
디아나는 사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쌀쌀맞게 지나가 버렸다. 사내가 터무니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올리버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가. 울지 말고 용감히 있으렴.”
여자가 어린 사내아이에게 조곤조곤 말했다. 아이는 울상으로 기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갓난아기를 안은 젊은 부인이 사내아이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 안았다.
운전실로 가기로 자원한 다섯 명이 준비를 끝마치고 한 줄로 도열했다. 올리버가 선두고, 디아나가 후미였다.
“오래지 않아 돌아올 겁니다. 부디 조용히 계십시오.”
마지막으로 올리버가 승객들을 돌아보며 경고했다.
문을 열자 어둑어둑한 복도가 드러났다. 올리버를 시작으로 세 사람이 발소리를 죽여 복도로 나아갔다. 그들을 뒤따라 복도로 한 걸음 내디딘 디아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문가는 긴장으로 뻣뻣해진 승객들로 가득했다. 잠시 그들을 마주 보던 디아나가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다행스럽게도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이편에는 총기가 고작 두 자루뿐이었으므로, 운전실에 달할 때까진 되도록 괴한과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들은 신중히 걸음을 내디뎠다. 음산하게 흐르는 긴장감에 어느덧 감화된 디아나도 침을 꿀꺽 삼키며 발소리를 죽였다.
“보일러실부터 지나야 할 거예요. 화실(火室)은 특히 뜨거울 테니 조심해요.”
앞에서 걷던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디아나는 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보일러실이었다. 문틈으로 보일러실의 동태를 확인한 올리버가 조용히 손짓했다. 뒤따르던 네 사람은 제각기 몸 숨길 곳을 찾았다. 올리버는 벽에 등을 붙인 채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끼익 끼익. 문이 점차 열렸다. 희미한 불빛이 복도를 가르듯 길게 드리워졌으나, 우려하던 총성이나 괴한의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올리버가 먼저 총을 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나머지 세 명이 뒤따랐다. 멀뚱히 복도에 서 있던 디아나는 여자의 나지막한 부름이 있고서야 쫄래쫄래 발걸음을 옮겼다.
과연, 여자의 말대로 보일러실은 무척이나 더웠다. 디아나는 금세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건 뭐 찜통도 아니고.”
더위도 더위지만, 매캐한 냄새가 지독했다. 디아나는 코를 틀어막은 채 비좁은 기차 칸을 둘러보았다. 긴 파이프가 사방에 거미줄처럼 펼쳐졌고, 겨우 한 사람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을 제하고는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장치가 곳곳에 자리했다. 꼭 기계로 만들어진 생물의 체내에 들어온 듯한 야릇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가씨.”
디아나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올리버가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갈수록 매연이 심해질 거야.”
디아나는 무심결에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그녀가 멀거니 손수건을 내려다보는 새, 올리버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디아나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가를 틀어막으며 한발 늦게 일행을 따라갔다.
자꾸만 기침을 부르는 매연과 후덥지근한 연기를 거쳐 마침내 문가에 다다랐다. 문틈으로 빛이 새는 걸 보면 운전실이 틀림없었다. 앞선 네 사람이 문과 가까운 벽면에 등을 붙이는 동안, 디아나는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기계장치 뒤에 숨었다. 고개만 들지 않는다면 쉬이 발견하지 못할 위치다.
총을 문가로 겨눈 올리버가 디아나에게 눈짓했다. 자연히 객실에서 들었던 올리버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신호를 보내면 마법으로 문을 열어.’
디아나는 유심히 철문을 살펴보았다. 철문은 미닫이문이라 문손잡이가 따로 없었다. 마법에 특별한 재능이 없는 디아나가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강점은 의지만으로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능력과 섬세한 마력 운영이었다. 그렇기에 디아나는 저리 무거운 철문을 미는 것보단, 문손잡이를 돌려서 문을 여는 편이 더욱 손쉬웠다.
하지만 이제 와 못 하겠다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디아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문이 어찌나 무거운지 처음에는 꿈쩍도 안 했다.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힐 무렵, 비로소 첫발을 떼자 문이 수월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쇠로 쇠를 긁는 듯한 소음이 연이었다. 오래지 않아 둔중한 소음과 함께 철문이 완전히 열렸다. 신경을 갉아먹던 소음도, 디아나의 집중도 끝났다. 끔찍할 정도로 적요한 보일러실. 팽팽한 긴장감만이 감도는 가운데, 별안간 누군가 바닥을 세게 박찼다. 디아나는 몸을 꼭꼭 숨기라던 올리버의 경고도 잊고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운전실을 지키던 괴한이 문가로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문턱을 넘기 무섭게 올리버에게 왼팔이 잡혔다. 괴한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자, 뒤에서 대기하던 여자가 나무토막을 휘둘러 괴한의 뒤통수를 정확히 가격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막을 찢는 총성이 돌연 무자비하게 울렸다. 깜짝 놀란 디아나가 황급히 기계장치 아래로 고개를 수그렸다.
총성과 주인 모를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난생처음 겪는 전투의 복판에서 디아나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애벌레처럼 움츠렸다. 대체 내가 왜 따라나선 걸까. 불과 20분 전의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띄엄띄엄 들려오던 총성이 이윽고 멎었다. 강한 타격, 누군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 끙끙거리는 신음이 뒤섞였다. 디아나는 주저하며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보인 사람은 문가에 우뚝 서 있는 올리버였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디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조금 다친 것 같지만, 괴한들은 다들 신음하며 쓰러져 있었다. 대강 세어 보니 세 명이었다.
“이제 끝난 거예요?”
디아나가 조심스레 복도로 나왔다. 올리버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종종거리며 얼른 그를 뒤따랐다. 그리고 운전실로 들어서려는 찰나, 어두운 구석자리 엉망으로 쓰러진 의자 뒤에 몸을 숨긴 괴한과 눈이 마주쳤다.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본능처럼 마법이 이루어졌다.
“이, 이게 뭐야…….”
괴한이 황망하게 중얼댔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장총이 부지불식간에 공중으로 떠오른 것이다. 장총은 그를 희롱하듯 뒤로 물러나며 빙그르르 유려하게 몸을 돌렸다. 어느덧 써늘한 총구가 그를 향했다.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 올리버가 잽싸게 움직였다. 그는 권총으로 괴한을 겨누며 다른 사람들을 눈짓했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세 사람이 괴한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팔다리를 묶었다. 장총은 그제야 볼품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벽을 짚은 채 간신히 서 있던 디아나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괴한과 눈이 마주쳤던 광경이 자꾸만 눈앞에서 반복되었다.
“아가씨, 괜찮아?”
올리버가 서둘러 다가왔다. 내내 금속처럼 단단하던 얼굴이 염려하는 기색으로 가득했다. 디아나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온몸을 휘감던 숨 막히는 긴장감이 아직도 가시질 않고 있었다.
불현듯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았다. 디아나는 그제야 한결 평온하게 호흡했다. 하지만 그조차 잠시, 어떤 예감이 벼락처럼 뇌리에 꽂혔다. 너부러져 있던 디아나가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지금은 늦봄인데…….”
창문으로 찬 바람이 술술 밀려들었다. 디아나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착각이 아니다. 착각일 수가 없었다.
납작 엎드린 들풀을 굽어보던 디아나가 더디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질서가 어그러진 저녁하늘. 짙은 남빛으로 물들어 가는 황량한 들판에 외따로 빛나는 별이 눈에 들어왔다.
먼 옛날, 형제에게 배반당한 여신이 세상에 내린 혹독한 단죄이자, 별들의 왕을 지키는 무자비한 칼날. 세상을 얼리는 혹한의 계절.
겨울의 별 발디비아.
“……휴고 알피어스군.”
창가로 다가온 올리버가 낮게 읊조렸다. 디아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동의를 표했다.
세상천지 이런 마법을 부리는 자가 또 있을 리 없었다. 파란 영양을 모시는 마녀와 마법사들이 수십 년을 기다려온 이즈리얼 알피어스의 진정한 후계. 한여름 백색전당에 겨울을 불러온 겨울의 마법사.
때아닌 계절이 도래한 하늘 아래서 디아나는 거대한 마법에 압도되었다. 그녀는 차마 꿈꿀 수 없는 경지, 마치 기적과도 같은 광경을 그저 경외하는 수밖에 없었다.
“젠장. 전선을 끊어 놨군.”
올리버가 혀를 찼다. 그의 곁을 기웃거리던 디아나가 물었다.
“끊어지면 안 돼요?”
“유선전신이니까. 전선이 끊어지면 통신이 안 되지.”
올리버는 씁쓸한 얼굴로 잘린 전선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또래의 남자가 넌지시 말을 흘렸다.
“혹시…… 가능할지도 모르잖습니까.”
“무엇이요?”
남자는 디아나 부근을 힐끔거렸다.
조금 전 그녀가 마법을 쓰는 것을 목격한 이후로, 올리버를 제한 나머지 세 명은 꼭 저렇게 디아나를 어려워했다. 디아나는 그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으나, 못 볼 것을 봤다는 양 멀리하는 태도는 못내 짜증스러웠다.
“내가 마법으로 저걸 붙일 수 있냐고요?”
대뜸 묻는 소리에 남자는 어깨를 흠칫했다. 곱지 않은 눈으로 그를 흘겨본 디아나가 팔꿈치로 올리버를 밀어 냈다.
“어디 봐요. 내가 할 수 있는지 좀 보게.”
올리버는 순순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대신 그의 자리를 차지한 디아나가 조심스레 전선을 쥐었다. 원리는 모르겠다만, 이걸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두 차례 마법을 성공한 데다 눈앞에서 마법의 위대함을 목격한 디아나는 제법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마법을 부리려던 순간, 기초적인 마법법칙이 불현듯 떠올랐다.
유(有)에서 유(有)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본시 어려운 것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다.
끊어진 전선을 붙이려면 그 사이의 ‘없는 것’을 만들어 내야 했다. 그것이 단순한 접착력이든 고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올리버가 어깨를 토닥였다. 디아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디아나는 창조마법에 지독히도 재능이 없었다. 암흑의 별 칼리스토를 탄생성으로 삼은 까닭에, 선천적으로 타고난 마력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어떻든 마법의 꽃이라 불리는 창조 영역에는 손도 대지 못하므로 자연히 마녀로서의 평가가 낮았다.
디아나는 뒤틀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자괴감과 질투로 속이 문드러지던 것도 옛날이지, 이제는 어찌어찌 순응하며 살고 있었다. 죽어도 못 하는 일에 구태여 마음 쓸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편이 나았다.
“그럼 이제 어떡…….”
별안간 바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굉음이 뒤이었다.
콰르릉!
기차를 뒤흔드는 진동이 점점 심해지며 온갖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견디다 못한 다른 사람들이 벽을 붙들고 가까스로 균형을 잡는 사이, 디아나가 돌연 창가로 달음박질했다.
“아가씨, 위험해!”
올리버가 소리쳤다. 그러나 디아나는 듣지 않았다. 휘청거리면서도 용케 창가에 달라붙은 디아나가 창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땅거미가 꺼뭇하게 기어가는 저녁, 기차의 후미에서 몹시 기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평탄하던 땅이 마치 쿠키 쪼개지듯 갈라졌다. 지표면이 위태롭게 짜개지는 틈새로 굵고 얇은 나무줄기가 수도 없이 하늘로 치솟았다. 철로를 매끈하게 깔기 위해 잔인하게 베어 넘긴 나무가, 이제껏 캄캄한 지하에서 상처 입은 몸 뉘었던 뿌리가 한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 만에 자신을 깨운 마력의 인도를 받아 차츰차츰 휘어졌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나던 나무줄기는 어느새 화물칸을 휘감기 시작했다. 개미 한 마리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휘감고 조여 댔다.
멀거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디아나의 입가에 점점이 미소가 맺혔다. 굉음이 가라앉기 무섭게 후닥닥 뒤돌아보며 외쳤다.
“우리 언니가 왔나 봐요!”
디아나의 가족 관계를 알지 못하는 세 사람은 그저 멀뚱멀뚱했다. 하지만 올리버는 달랐다. 영문을 모르던 그의 얼굴이 숫제 바위처럼 굳었다.
“……뭐?”
“어떡해! 설마하니 진짜 왔나 봐! 그렇잖아도 많이 바쁠 텐데 미안해서 어쩐담!”
디아나는 발갛게 상기된 뺨을 감싸며 발을 동동 굴렀다. 망연히 상황을 지켜보던 여자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잠깐. 저거 무선전신 아니오?”
중년 사내가 구석에 놓여 있는 기계를 가리켰다. 어질러졌던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제야 모습이 드러난 모양이었다. 올리버가 서둘러 그편으로 건너갔다.
“맞군요. 꽤 오래된 모델이긴 하지만.”
“작동할 것 같소?”
“일단 시도해 봐야죠.”
올리버는 운전대에 앉아 네모난 기계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미심쩍게 살피던 디아나가 슬그머니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무선전신을 사용하고 있어요. 모델이 오래되었다니 적어도 전파가 군부대까지는 닿길 바라야죠.”
“세상에, 그럼 저걸로 군이랑 연락할 수 있는 거예요?”
디아나가 입을 떡 벌렸다.
“직접 대화하는 건 아니고 모스 부호를 사용해요. 시간은 좀 걸려도 편지를 주고받는 것보단 훨씬 빠르고 간편하죠.”
여자의 친절한 설명에 디아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당연했던 차에, 저리 괴상망측한 기계로 원거리에서 쉽게 연락이 오갈 수 있다는 사실이 영 믿기지 않았다. 잉그람에서 최고 가는 마법 가문 자일스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탓에 자연스레 인간 사회를 무시하는 경향이 짙었던 디아나는 마법처럼 신기로운 물건이 인간 사회에도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올리버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30분가량 지나서였다.
“군과 연락했습니다.”
“뭐라고 하덥니까?”
중년 사내가 소리를 높였다. 올리버는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속닥거렸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마법사는 지금 움직일 수 없다고 합니다. 마법사 없는 혁명군은 오합지졸이죠. 군대가 뒤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다니 혁명군은 곧 진압될 겁니다.”
“어차피 앞쪽을 지키는 괴한은 이제 없잖아요. 그냥 도망가도 되지 않나요? 마침 밤이라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맞습니다. 혁명군은 우리를 신경 쓸 틈도 없겠죠.”
올리버가 권총을 꺼내 들며 말했다.
“일단 돌아갑시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군요.”
객실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올리버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상황을 파악했다. 짐 가방을 가득 쌓아 올린 뒤쪽에 열 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모여 힘겹게 문을 막고 있었다.
“혁명군입니까?”
“예.”
올리버는 권총을 장전한 뒤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을 사이에 둔 대치가 벌써 오래되었는지,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아가씨. 짐을 치울 수 있겠어?”
“한번 해 볼게요.”
멀찍이 뒤에 서 있던 디아나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버는 장총을 든 세 사람을 손짓으로 부르는 한편, 문을 막는 사람들에게 일렀다.
“셋 하면 비켜서십시오.”
소란스럽던 객실이 이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올리버의 왼손이 숫자 1을 그렸다. 뒤이어 중지가 펴지고, 약지가 펴졌다. 문을 막던 사람들이 단번에 문가에서 벗어나자 때맞춰 디아나가 마법을 부렸다. 저렇게나 많은 물건을 한 번에 옮겨 본 적은 없으나 해야만 했다. 디아나가 눈을 꽉 내리감는 순간, 동산처럼 쌓여 문을 틀어막던 짐 가방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혁명군이 체중을 실어 힘껏 들이민 문이 활짝 열렸다.
총성이 거듭 울렸다. 갑자기 문이 열리며 바닥을 구른 혁명군은 반격할 새도 없이 총에 맞았다. 몇몇은 디아나의 마법에 하릴없이 총을 빼앗기기도 했다. 부지불식간에 올리버도 이곳저곳 생채기를 입었고, 격전 중에 총상을 입은 승객도 있었다. 귀를 찢는 총성과 피 튀기는 끔찍한 소리, 신음과 비명 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이윽고 총성이 잦아들 무렵, 식당 칸에서 헐레벌떡 이쪽으로 달려오는 괴한이 있었다. 올리버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총알을 장전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이미 총알이 바닥난 상태였다. 객실의 참상을 확인한 괴한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려는 찰나, 뒤편에서 별안간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괴한이 분수처럼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뒤이어 절도 있는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금장 입힌 파란 제복에 매끈한 총신. 잉그람의 군인이었다.
“펜리 씨, 맞습니까?”
군인이 객실을 대강 둘러보며 올리버에게로 다가왔다. 올리버는 시근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은 잘 받았습니다. 일단 빨리 기차를 벗어나죠.”
군인은 총 12명이었다. 그중 절반이 의식 잃은 노부부와 총상 입은 승객을 업은 채 먼저 기차를 나섰고, 나머지 승객들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비로소 기차에서 탈출하는 듯했다.
한데 갑작스레 폭발음이 울렸다.
쾅!
기차가 뒤흔들릴 만치 거대한 진동이었다. 기차를 빠져나가던 승객들이 모두 넘어지고, 오롯이 객실을 밝히던 전구마저 꺼졌다. 느닷없이 찾아든 어둠 속에서 승객들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군인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쪽을 확인해야겠습니다! 앞선 사람을 잘 따라가십시오!”
승객들이 두려움에 떨며 가지 말라 외쳤으나, 군인들은 황급히 총을 챙겨 달려갔다. 아까보다 잦아든 폭발음이 산란하게 터진 뒤엔 군인들의 발소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 승객들은 서로를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일념만이 그들의 뇌리를 지배했다.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을 밟고 밀치고 뛰어 넘었다. 생에 대한 집착에 눈이 멀어 뒤에 남겨질 사람은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러지 못했다. 두 번째 폭발음이 들렸을 때, 그녀는 진동을 버티지 못하고 재차 넘어졌다. 누구도 잡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외려 사람들은 그녀의 작은 몸뚱어리를 무참히 밟고 지나갈 뿐이었다. 디아나는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객실은 수많은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가히 형언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어느덧 사위가 조용해졌다. 디아나는 훌쩍거리며 간신히 윗몸을 세웠다. 온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숨을 내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리 고통에 신음하며 일어서려는데, 누군가 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사이로 눈물겹게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아?”
올리버가 근심 어린 얼굴로 굽어보았다. 디아나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울 수는 없었다. 디아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거리며 올리버의 등을 밀었다. 수없이 밟히고 차인 몸이 정말로 욱신거렸지만, 기차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거, 거기 누구 계세요?”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여린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사방이 어두워 제대로 보이진 않아도, 지척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뒤쪽을 확인하고 오겠다던 군인들은 돌아올 기미조차 없었고, 자잘하게 들리던 총성은 어느 순간 멎어 있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질 않았다. 조금 전에 기차를 뒤흔들던 폭발음은 무엇이고, 갑자기 이렇게 조용해진 연유는 또 무엇인가. 게다가 올리버도 묵묵히 제 갈 길 가고 있었다.
“제발요! 우리 아이가 사라졌어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요!”
디아나는 두 눈을 꼭 감으며 끊임없이 들려오는 호소를 애써 무시했다. 저런 소리는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돕지도 못하는데. 제 몸 간수하기조차 힘겨운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어째서 널 도와야 하는데? 설마하니 어머니께 가르침 좀 받았다고 날 동기로 여기는 건 아니지? 만약에 그렇다면 넌 정말 분수도 모르는 거야.’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던 때, 그럼에도 차마 언니에겐 알리지 못해서 그나마 가까운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다. 언제는 첫째고, 언제는 둘째고, 언제는 셋째였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늘 매몰차게 거절당했고, 언제나 마지막엔 조롱과 멸시가 뒤따랐다.
그것이 너무나 끔찍해서, 언제부턴가 부탁하길 그만두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혼자 버티고, 혼자 이겨 냈다. 유일한 혈육인 언니와 동정으로 거두어 준 스승을 제한다면, 생판 남에게서 호의를 받아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우리 아기, 제발 같이 찾아 줘요.”
엉금엉금 기어 온 여자가 디아나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디아나는 멀거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도 흐느끼는 여자의 모습만은 쉬이 가늠할 수 있었다.
“펜리 씨. 혹시 성냥 있어요?”
디아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올리버는 말없이 뒷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냈다. 성냥개비가 서너 번 헛돌고서야 자그마한 불빛이 겨우 피어올랐다. 지독히도 암암한 밤을 밝히는 경이로운 불꽃이었다.
디아나는 천천히 마법을 발현했다. 이미 많은 마력을 소진한 탓에 금세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나 디아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탄생성인 암흑의 별 칼리스토는 참으로 다행히도 하늘의 질서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별이었다. 돌연 겨울이 찾아와 하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와중에도 디아나는 평소처럼 마법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손톱만 하던 불꽃이 마법을 양분 삼아 차츰 부풀어 올랐다. 삽시간에 성냥개비를 모두 불태운 불꽃은 디아나의 마력을 갉아먹으며 사위를 밝혔다. 넋 놓고 불꽃을 지켜보던 여자가 불현듯 정신을 차리며 두리번거렸다. 아기는 구석에서 숨만 색색 내쉬고 있었다. 이젠 울 기운도 없는지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기고도 몇 번 칭얼거리지도 못했다.
여자가 연신 감사를 표하며 지나갔다. 복도를 밝히던 불꽃은 일순 한숨처럼 꺼졌다. 다시금 도래한 어둠 속에서 올리버가 디아나의 팔을 잡으며 채근했다.
“이만 가자.”
출구는 가까웠다.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은 듯 열린 문틈으로 차가운 바람이 쏟아졌다. 올리버는 시커먼 어둠과 살갗 에는 겨울바람을 헤쳐 계단을 내려갔다. 장장 하루 만에 밟아 보는 땅이었다.
“아가씨. 계단 조심해.”
은은한 달빛이 이편을 내리비추었다. 뒤돌아선 올리버가 디아나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그를 쳐다보던 디아나도 더디게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입가에 절로 안도의 미소가 맺혔다. 이젠 정말로 끝이었다. 지긋지긋한 기차와는 영영 이별이었다.
그때, 억센 손길이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부지불식간에 어깨를 잡힌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올리버의 안색이 삽시에 창백해졌다.
“어딜 가려고?”
무심코 돌아보려던 디아나가 얼음처럼 굳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아주 최근에, 기차에서.
“꼬마 아가씨, 대답을 해야지? 응?”
어깨를 쥔 악력이 차츰 강해졌다. 그가, 마법사가 훑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디아나는 입술을 달달 떨며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마법사는 강했다. 적어도 그녀 같은 조무래기는 단번에 숨을 끊어 놓을 수 있는 강자였다. 그의 탄생성을 모르니, 하늘의 질서가 어지러워진 지금 얼마만큼 마력을 운영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단순히 천운을 믿어 대적하기엔 지나치게 강대한 적이었다.
디아나는 가까스로 올리버와 시선을 맞추었다. 불현듯 이상을 깨달은 올리버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참으로 필사적인 모습이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디아나는 흐리게 미소 지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언니한테 조금 늦는다고 전해 줘요.”
그 말을 끝으로 디아나는 올리버의 손을 놓았다. 떠나간 온기를 그리워하기도 전에 남은 마력을 긁어모아 문을 닫았다. 문을 잠갔다. 문이 쉽게 열리지 않도록 겨울바람이 거세게 불기만을 기도했다.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마력을 모두 소진한 디아나가 제자리에서 휘청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나운 손길이 디아나의 멱살을 틀어쥐어 벽면으로 몰아붙였다.
“……너.”
죽도록 아팠다. 벽에 거칠게 부딪힌 어깨며 등이 눈물 나게 아팠다. 하지만 디아나는 울지 않았다. 울지 못했다. 진저리 나는 낯선 숨결과 흉흉한 기운, 그리고 살벌하게 빛나는 적안이 목전이었다.
마법사가 낮게 읊조렸다.
“너, 마녀구나.”
승객 중 디아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에 헤스터는 그길로 임시 막사를 찾았다. 난민 수용소를 연상케 하는 북새통을 거쳐 그녀가 안내받은 곳은 군영의 외딴 귀퉁이였다.
“오셨군요.”
난데없이 막사에서 그녀를 맞이한 사람은 휴고 알피어스였다.
“경이 어찌 여기에…….”
“나도 나름대로 안면이 있는 사람입니다. 일단은 자매의 일이 급할 테니 이쪽으로 오시죠.”
휴고는 영문 모르는 헤스터를 안으로 이끌었다. 휴고의 건너편으로 간이침대에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얼핏 보였다.
“괜찮습니까?”
휴고가 간이침대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남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휴고는 옆으로 비켜서며 헤스터에게 남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올리버 펜리 씨입니다. 기차에서 디아나 양을 만났다고―”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돌연 휴고의 말을 잘라 냈다. 휴고가 조금 놀란 기색으로 헤스터를 돌아보았다. 늘 심해처럼 가라앉았던 얼굴에 흉흉하게 금이 가 있었다. 충격받은 듯 확장된 두 눈이 올리버에게 못 박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왜…….”
헤스터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핏기 가신 얼굴이 흡사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제야 이상을 깨달은 휴고가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올리버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헤스터.”
마녀가 폭발하기엔 그 한마디로 족했다. 협탁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의료 기기들이 갑작스레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가라앉았던 겨울바람이 다시금 거세지며 돌풍으로 화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심경을 드러낸 적 없던 견고한 마녀가 처음으로 감정을 토해 냈다. 그것은 지극히 선명한 분노였다.
“헤스터 경!”
휴고가 기겁했다. 그러나 불과 3시간 전 겨울을 불러왔던 그에겐 헤스터의 마법을 잠재울 만한 마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뭐 하는 겁니까! 당장 마력을 거둬요!”
다행히도 휴고의 외침이 닿았는지 막사를 휘젓던 돌풍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찰나에 의료 기기며 온갖 잡동사니가 추하게 바닥을 뒹굴었고, 심지어는 천막마저 흉하게 찢어져 버렸다.
누구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가운데, 격양된 눈빛으로 올리버를 쏘아보던 헤스터가 이내 몸을 돌렸다. 감히 그녀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헤스터는 넝마가 된 막사를 나와 혼잡하기 그지없는 군영을 정처 없이 헤맸다. 담아 두었던 기억과, 잊었다고 여겼던 감정이 용솟음치며 그녀를 마구 난도질했다.
무작정 걷던 헤스터는 막사에서 멀리 떨어진 목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걸음을 멈추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만 간간히 들려오는 밤중의 초원. 어느 별 하나 중심을 잡지 못하는 어지러운 하늘 아래, 헤스터는 홀로 우두커니 섰다. 갈기갈기 조각난 마음을 접붙일 생각도 못하고 당장 눈앞에 펼쳐진 과업은 죄 미루어 둔 채, 그저 하염없이 하염없이 빛바랜 기억 속으로 침잠할 뿐이었다.
생의 가장 큰 상실을 겪었던 시절.
기억 속의 헤스터는 어느덧 열두 살 어린아이였다.
* * *
헤스터 솔은 열둘에 어머니를 잃었다. 수많은 마녀?마법사들이 위대한 마녀의 죽음을 기렸지만, 그중에서 진심으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공동묘지에서 치른 초라한 장례식도, 잉그람 국왕이 하사한 친서도 어린 헤스터의 허한 마음을 달래 주진 못했다. 헤스터에게 위안이 되어 준 것은 오직 자그마한 여동생뿐이었다.
헤스터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디아나를 처음 만났다. 언젠가 어머니에게서 이야기를 듣긴 했어도 직접 얼굴을 마주하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절반이나마 같은 피를 타고났기 때문일까. 세상사 무감했던 헤스터는 놀랍도록 빠르게 디아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머니를 그대로 빼닮은 아이였다.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매는 오래도록 함께할 수 없었다. 헤스터는 조숙한 천재였으나 아직 도제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고, 디아나는 몸을 의탁할 스승조차 마땅치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자비로운 바바라 자일스가 옛 벗의 아이를 거두었다. 바바라 자일스의 손 붙잡고 멀어지는 디아나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헤스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온갖 비정상적인 악한이 들끓는 마법 사회에서 바바라 자일스는 드물게 정상적인 마녀였다. 비록 자식에게조차 무심한 부모였지만, 적어도 디아나를 무사히 성년까지 길러 줄 스승 노릇에는 충실할 터였다.
그러나 사이 멀어진 벗의 아이를 거둘 만큼은 자애로운 바바라 자일스와 달리, 헤스터의 스승인 아멜리아 베가는 몹시도 모진 스승이었다. 그녀는 헤스터가 상상을 뛰어넘는 천재임을 깨닫고는 완전히 손을 놓아 버렸다. 이름만 사제지간이지 실상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한 저택에서 살며 얼굴 마주하는 날이 1년에 고작 하루 이틀이었다.
스승의 무관심 속에서 헤스터는 홀로 잡풀처럼 자라났다. 스승이 자리 비운 틈을 타 매일같이 서재를 넘나들었고, 밤마다 하늘을 바라보며 성좌(星座)를 익혔다. 아멜리아 베가는 그녀에게 허울뿐인 스승이었지만, 책과 하늘은 그녀에게 진실한 스승이 되어 주었다. 다만 책과 하늘이 채워 주지 못하는 외로움은 들짐승을 벗 삼아 이겨 내야 했다. 간간히 저택으로 찾아드는 디아나의 편지만이 헤스터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헤스터가 열다섯이 되었을 무렵, 스승은 아주 오래간만에 그녀를 불렀다. 혹시나 싶었던 기대는 무참히 꺾였다. 변함없이 아리따운 스승은 여전히 모질고 모진 사람이었다.
‘네 성도학을 익혔음을 아니, 그만 승급 시험을 보려무나.’
승급 시험에서 합격하면 정식 마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더는 스승의 저택에 머물 수도, 스승의 이름으로 보호받을 수도 없었다. 독립할 때까지 어머니가 물려준 빚을 유예받은 헤스터에겐 가히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성년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쥐 죽은 듯이 살아갈게요. 저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요. 부디 성년까지만 저를 거두어 주세요.’
헤스터는 울며 애원했다. 스승의 치맛자락 아래 낮게 읍하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몇 방울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려 냈다. 하지만 아멜리아 베가는 혹한보다 모진 마녀였다. 여태 그러했듯 그녀는 어린 제자를 돌보지 않았다.
이튿날 헤스터는 스승의 저택을 나왔다. 배웅하는 사람 하나 없이, 오직 저택의 들짐승만이 울어 주던 추운 겨울날이었다.
세상에 무지한 상태로 덩그러니 낯선 세상에 떨어진 헤스터는 꿈에도 몰랐지만, 당시에도 그리젤다 솔이 남긴 어린 딸의 거취를 주목하는 시선은 제법 많았다. 몇몇은 위대한 마녀가 물려준 재능을 탐내는 야심가였고, 몇몇은 위대한 마녀의 이름만을 믿고 거액을 빌려준 채권자였다. 독립할 때까지 유예되었던 빚이 다시금 하루하루 이자를 더해 간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처음 채권자로부터 독촉 서한을 받았을 때 헤스터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어떻게든 빚을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구했지만, 이제 막 정식 마녀로 발돋움한 신참내기에게 중요한 의뢰를 맡기는 사람은 없었다. 헤스터는 차츰 초조해졌다. 간간히 들어오는 의뢰를 수행하여 사례금을 받았으나, 그런 푼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죽은 어머니가 물려준 것은 휘황한 명성뿐만이 아니었다. 족히 도시 하나를 부흥시킬 어마어마한 빚도 있었다.
그즈음 어린 헤스터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겁먹은 소녀를 위로하며 거금을 약속한 의뢰를 제안했다. 대개가 정체를 밝히지 않은 개인이 제의하는 사적이고 내밀한 의뢰였다. 헤스터는 순진하게 의뢰에 응했다.
의뢰인은 남부의 늙은 귀족이었다. 백여 년 전에는 꽤 강성했으나, 이후로는 천천히 쇠퇴하여 작금엔 시골 영지만을 간신히 남겨 둔 몰락 귀족이었다. 헤스터가 의뢰인에게 무관심했던 것처럼 의뢰인도 헤스터에게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약속한 의뢰만은 반드시 완수할 것을 종용했다.
약속한 거금에 비하면 의뢰는 크게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다. 헤스터는 의뢰에 만족하며 남는 시간엔 오로지 마법에만 몰두했다. 의뢰인과 약속한 3년 동안 최대한 실력을 쌓아서 어떻게든 이름을 알리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야만 보다 어려운 의뢰를 맡을 수 있고, 그래야만 더욱 큰돈을 벌 수 있었다. 디아나가 독립할 때까지 어머니의 빚을 모두 청산하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궁극적인 바람이었다.
그러므로 헤스터가 의뢰의 ‘진정한 목적’을 알게 된 것은 지극한 우연이었다. 헤스터는 그저 저택에서 길을 잃었으며, 어쩌다가 방향을 잘못 잡아 지하실로 내려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하실에서 목격한 것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았다. 의뢰인은 저택의 지하실에서 생체 실험을 하고 있었다. 늙은 목숨 조금이나마 더 부지하기 위하여, 근방의 어린아이를 납치해 고문이나 다름없는 가혹한 처사를 행했던 것이다.
헤스터는 그제야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알았다. 그녀는 이 추악한 짓에 동조하고 있었다. 의뢰의 목적을 알았든 알지 못했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헤스터는 당장 경찰에 신고했다. 비록 의뢰의 진짜 목적을 몰랐던 점과 직접 신고한 점이 참작되어 형을 받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더구나 비밀 유지를 가장 중시하는 개인 의뢰의 특성상, 그리젤다 솔의 딸을 찾던 의뢰도 하루아침에 뚝 끊기고 말았다.
헤스터는 이제 갈림길에 섰다.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며 하루빨리 빚을 갚을 것인지, 아니면 빚에 허덕이면서도 마음만은 정결할 것인지. 헤스터는 후자를 택했다. 그녀가 유달리 도덕적으로 깨끗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헤스터는 죽은 어머니와 어린 자매를 헤아렸다. 어머니의 휘황한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어린 동생에겐 떳떳한 언니로 남고 싶었다. 헤스터에게 어머니가 그러했듯, 디아나에겐 자신이 그런 존재여야 했다.
이후로 헤스터는 의뢰의 내용을 꼼꼼히 살폈다. 몇 차례 개인 의뢰를 받기는 했지만, 수상쩍은 의뢰 내용과 그녀를 이성으로 대하려는 의뢰인의 태도에 질색하며 손을 뗐다. 심지어 개중에는 빚을 대신 갚아 줄 테니 후실로 들어오라는 권유도 있었다. 헤스터는 그런 제안일랑 더 듣지 않고 단칼에 물렸다. 그런 걸 생각하기에 그녀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줄어들긴커녕 매일같이 이자를 더해 가는 빚만 해도 골칫거리였다.
결국 헤스터가 택할 수 있는 의뢰인은 오로지 국가뿐이었다. 국가의 의뢰는 내용부터 사례금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거금의 사례금을 약속하는 의뢰도 간혹 있지만, 그런 의뢰는 대개 명망 높은 마녀들에게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백색전당을 목표했다. 위대한 마녀와 위대한 마법사만이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백색전당은 그 자체로 최고의 명예였다. 만일 그곳에 든다면, 거금이 걸린 의뢰를 맡는 것은 물론이요, 빚을 갚기도 훨씬 수월할 터였다.
기실 평범한 이들은 일생 동안 우러러보기만 하는 백색전당이다. 하지만 헤스터는 해냈다. 고작 나이 스물, 잉그람의 역사상 백색전당에 이름을 올린 최연소 마녀이자, 만장일치로 찬성을 이끌어 낸 최초의 마녀였다.
모두가 헤스터의 이름을 축복했다. 그러나 헤스터는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백색전당에 이름을 올리기 무섭게 쏟아지는 의뢰를 선별하여 완수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즈음 디아나가 언니를 몹시 그리워한다는 바바라 자일스의 전언이 있었지만, 고작 반나절 시간을 내는 것조차 당시 헤스터에겐 어려웠다.
사랑하는 자매를 위해, 자매를 외롭게 해야 했다. 그리움으로 젖은 디아나의 편지가 여러 날 헤스터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리 2년이 지났다.
헤스터는 여전히 의뢰를 수행하고, 사례금을 받고, 빚을 갚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어머니가 가장 많은 빚을 졌던 고리대금업자에게 채무를 모두 상환한 날이었다. 헤스터는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아직 빚을 완전히 갚은 것은 아니지만, 지난 7년의 고초에 조금이나마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답지 않게 기분이 들떠서 평소 거들떠도 보지 않던 술집이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헤스터는 ‘마시면 시름이 죄 잊힌다’는 술을 마셔 보고 싶을 뿐이었다. 오늘만큼은 내일의 빚과 내일의 의뢰를 잊고 편안하게 잠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올리버를 만났다.
‘혼자 왔어요. 아가씨?’
가장 잊고픈 추억이자, 가장 간직하고픈 추억.
헤스터가 스물두 살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올리버 펜리는 반제인이었다. 나이는 그녀보다 서너 살 많았고, 잉그람에서 방직공장 여러 채를 운영하는 사업가라 하였다.
헤스터는 그에게 별반 관심이 없었지만 워낙에 화술이 훌륭했던 터라, 또한 당시에 술을 마시고 있었던 터라 가만히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러다가 자정이 되기 전에 자리에서 떴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우연히 만난 올리버 펜리라는 남자를 훌훌 털어 냈다. 이튿날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지끈거리는 숙취와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은 의뢰뿐이었다.
본디 칼처럼 규칙적인 헤스터는 아침 7시부터 하루를 시작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두통이 밀려왔지만, 일이 밀린 마당에 늦장을 피울 수는 없었다. 헤스터는 늘 그렇듯 단정하게 차려입고, 매일 아침 방문하던 카페를 찾았다. 그녀는 요리를 전혀 할 줄 몰랐다. 근처 카페에서 간단한 식사를 주문한 뒤 요리를 기다리는 10분이 하루의 유일한 공백기였다.
그날따라 유독 주문이 늦었다. 턱을 괸 채 한참을 기다리던 헤스터가 주방으로 고개를 돌리던 순간, 불현듯 건너편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과히 반갑게 웃으며 헤스터에게로 다가왔다. 심지어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누구신가요?’ ‘어제 술집에서 만났잖아요. 벌써 잊은 거예요?’
헤스터는 그제야 어제 술집에서 만났던 올리버 펜리를 떠올렸다. 그는 허락 없이 맞은편 의자에 않았지만, 헤스터는 구태여 핀잔주지 않았다.
애당초 마녀들은 외부 세계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뿐이므로, 곁에 부랑자가 앉든 귀족이 앉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러니 헤스터가 아침 식사를 위해 찾는 카페를 옮기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비록 이튿날도 모레도 아침마다 카페에서 올리버 펜리를 만났지만 말이다.
그런 이상한 만남은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하지만 헤스터는 여전히 올리버 펜리란 남자에게 별반 관심이 없었다. 술집에서 올리버가 일러 준 신상은 잊힌 지 오래였으므로, 그녀가 올리버 펜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성인 남자라는 점과 말소리에서 은근히 배어 나오는 북방어 억양으로 보아 반제인이 아닐까 하는 추측뿐이었다.
헤스터의 하루는 변함없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분 단위로 맞추어진 하루 일과는 한 달 전이나 한 달 후나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헤스터가 올리버 펜리란 남자의 존재를 제대로 인지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석 달 뒤인 8월 3일경으로 보는 것이 옳았다. 그즈음 헤스터는 이상한 의뢰를 제의받았다. 정확한 내용을 밝히지 않은 수상쩍은 의뢰였으나, 소요되는 시간이 하루뿐이며 기간에 비하면 거금을 약속한 의뢰였다.
본래라면 거절했을 테지만, 당시 헤스터는 잉그람 정부와 체결한 연구 의뢰까지 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아서 썩 적당한 의뢰를 찾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의뢰를 수락했다. 일단 내용을 들어 본 뒤 판가름해도 늦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나타난 의뢰인은 다름 아닌 올리버 펜리였다. 기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헤스터는 정말 올리버가 의뢰할 일이 있다고만 여겼다. 그러나 올리버는 도무지 의뢰의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느지막한 아침에 만나 이른 점심을 먹고 함께 앰브로즈 광장을 거닐더니, 심지어는 몬강(江)에서 배를 타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헤스터가 무슨 의도로 의뢰를 넣었느냐고 묻자, 올리버는 이렇게 대꾸했다.
‘오늘 생일이잖아.’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신문에서 봤지. 유명인사잖아.’
헤스터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어쨌든 사례금은 준다기에 함께 온종일 도시를 돌아다니긴 했어도, 하루아침에 난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 헤스터는 의문만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저 올리버 펜리란 이름으로 희미하게 남았던 남자가 비로소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헤스터에게 올리버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후로도 만남은 지속되었다. 헤스터는 여전히 아침마다 같은 카페를 찾았고, 올리버는 맞은편에서 식사를 함께했다. 다만 바뀐 점이 있다면 올리버가 꽃을 건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언제는 장미고, 언제는 들꽃이었다. 헤스터는 순순히 꽃을 받았다. 한 송이, 한 송이 받은 꽃이 어느새 화병을 가득 채웠다. 헤스터는 하루하루 시든 꽃을 버리고, 싱그러운 꽃을 꽂아 넣었다.
그리 화병을 네 번 정도 갈았을 즈음 그녀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건 이상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왜 내게 꽃을 주는 건가요?’ ‘주고 싶으니까.’ ‘왜 주고 싶은데요?’ ‘네게 잘해 주고 싶어서.’ ‘어째서요?’ ‘널 좋아해.’
헤스터는 그 대답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있어 사랑이란, 태내에서 싹트는 지극히 선천적인 감정이었다. 낳아 준 어머니를 사랑하고, 같은 피를 이어받은 자매를 사랑하듯 그리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나는 당신의 가족이 아니에요.’ ‘알아.’
그래서 혈육 아닌 사람을 사랑한다는 올리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나를 좋아해요?’ ‘글쎄. 딱히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그가 모르는 이유를 그녀라고 알 리 없었다. 헤스터는 이해를 포기했다. 의문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으나, 그걸 파고들 정도로 헤스터는 여유롭지 못했다.
올리버와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헤스터는 카페를 옮겨야 한다는, 혹은 올리버를 피해야 한다는 어떤 당위성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상한 아침 식사를 계속했다. 종종 어쩌다 저이와 아침을 함께하게 되었을까 하는 물음이 솟았지만, 곧 빚이나 의뢰 같은 다른 문제들로 덮이고 말았다.
문득 헤스터는 올리버가 편하다고 여겼다. 별생각 없이 그런 말을 건넸을 때, 올리버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헤스터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구태여 그런 말까지 꺼내지는 않았다.
올리버와 함께하는 시간은 점점 더 늘어갔다. 이제는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서, 근처 공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저녁이면 이따금 올리버가 헤스터의 집 앞까지 찾아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거나 술집에 들르기도 했다. 헤스터는 그런 시간이 좋았다. 급한 빚은 거의 다 상환했기에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도 몰랐다.
이제 헤스터는 주말마다 올리버와 교외로 나가기도, 간간히 날아오는 디아나의 편지를 읽어 주기도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털어놓은 적 없는 어머니의 이야기도, 스승의 이야기도, 심지어는 기르는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도 술술 흘러나왔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깊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헤스터는 올리버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다. 그녀는 평생토록 경험한 적 없는 여유와 안락함, 그리고 아주 어릴 적 어머니 품에서나 느꼈던 온기가 올리버의 곁을 맴돌았다.
그제야 헤스터는 깨달았다. 그녀는 올리버를 좋아했다. 일전에 올리버가 말했듯 그것은 아무런 이유 없는 감정이었다. 조건 없는 감정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마치 그녀가 어머니를 사랑하고, 자매를 사랑하듯 마음 한구석에서 당연하게 싹튼 감정이었다.
10년이 넘도록 가물었던 땅이 비로소 옥토로 일변한 순간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뒤로 헤스터는 아주 천천히 메말라 갔다. 모진 스승에게 내쳐지고, 어린 나이에 세상의 풍파를 맞으며 응당 경험하고 알아야 하는 많은 것들을 잃었다. 마법사란 족속은 본디 타인과 관계하지 않는 개인주의자라곤 하나, 그들에게도 가족은 있었다.
하지만 헤스터의 유일한 가족은 머나먼 곳에 있었다. 자매와 만날 때마다 헤스터의 메마른 내면에도 단비가 내렸지만, 그녀의 가뭄은 고작 1년에 하루 이틀로 해결되지 못했다. 본디 지녔던 감정조차 흔적 없이 사라지고, 태생적으로 타고난 따뜻한 마음씨마저 말라비틀어졌다.
그녀는 만인에게 칭송받는 마녀요, 별들의 왕이 축복하는 딸. 그러나 정작 그 모든 것을 느끼지 못했다. 너무도 메말랐기에. 고독한 시간이 너무도 길어 그런 것일랑 전부 잊었기에.
그러므로 올리버는 아주 오래간만에 찾아온 이슬비였다. 처음에는 오는 줄도 몰랐던 가는 빗줄이었건만, 어느샌가 그리 젖어 버렸다. 어느샌가 올리버는 그리 당연한 사람이 되었다.
헤스터는 비로소 행복했다. 아주 어렸을 적에나 느꼈던 감정이 다시금 깨어났다. 올리버가 그녀를 아끼듯 그녀도 올리버를 아꼈다.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고, 신뢰에 신뢰로 보답하며 행복을 이어 갔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행복이 불현듯 찾아왔듯 불행이 깃드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그날은 헤스터가 처음으로 집에 올리버를 초대한 날이었다. 별생각 없이 건넨 초대에 올리버가 그리도 기뻐할 줄은 몰랐기에, 헤스터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마침 선선한 가을날. 집에서 차를 즐긴 뒤 함께 책이나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올리버는 서재에 있었다. 서재의 문이 반쯤 열린 것을 보았을 때도 헤스터는 별달리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가 책상 앞에서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차가 식겠다는 생각이나 했을 뿐이다.
그러나 올리버가 읽고 있는 것이 그녀의 미완성 논문임을 깨달았을 때, 그때는 조금 달랐다.
헤스터가 들고 있던 쟁반이 떨어졌다. 찻주전자와 찻잔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바닥을 울렸다. 헤스터는 올리버가 당황하는 모습과 찻물 위로 점점이 낙하하는 종이를 무심히 지켜보았다. 팽팽한 정적 속에서 헤스터는 그저 한마디 내뱉었을 뿐이다.
‘나가.’ ‘헤스터. 잠시만 내 말 좀…….’ ‘다신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
대저 마녀는 주변을 잘 내어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번 틈을 보인 상대에겐 한없이 맹목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사랑에 눈이 먼 마녀와 마법사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연인을 품고, 개중 속이 검은 연인은 밀어를 속삭이며 그네들의 가장 귀중한 것을 훔쳐 달아나곤 했다. 때로는 구하기 힘든 연구 재료이고, 때로는 아직 발표하지 않은 미완성 논문이다. 그것은 연구 성과로 위상이 달라지는 마법 사회에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죄였다. 일평생 연구한 성과를 연인에게 빼앗긴 마법사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이야기는 많은 스승이 제자에게 일러 주는 훈계이기도 했다.
마녀는 세 번 용서한다는 격언이 있다. 하지만 이건 예외였다. 헤스터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올리버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떠나갔다.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던 올리버와 달리, 헤스터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깨진 조각을 치우고, 바닥의 찻물을 닦고, 젖은 종이를 분쇄했다.
이튿날 아침, 헤스터는 다른 카페를 찾아 홀로 아침 식사를 했다. 늘 함께하던 남자는 이제 없었다. 지난 10년 그러했듯 다시금 혼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놀랍도록 잘 적응했다. 돌아보면 헤스터는 누군가와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토록 괜찮다고 여겼다.
하지만 충격은 느리게 찾아왔다. 어느샌가 밤잠 설치는 날이 늘어났고, 어느샌가 무심코 곁을 돌아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연구를 하다가도 불현듯 멍한 스스로를 발견했으며, 아침 식사를 하며 당연하다는 듯 맞은편을 바라보는 자신을 느꼈다.
헤스터는 이제 외로움이 무언지, 고독이 무언지 아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서 겪었던 그 끔찍한 고통을 이제서 다시금 겪어야 한다는 사실에 몸서리쳤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녀는 올리버를 용서할 수 없었으므로. 애당초 헤스터는 누군가에게 배반당한 적도, 그리해 누군가를 용서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헤스터는 매일같이 날아드는 올리버의 편지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올리버가 밤마다 그녀의 집 앞을 서성이는 것도, 때로는 문을 두드리려 고심하는 것도 알았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다. 매일매일 혼란이 가중되었다. 올리버가 간절히 보고 싶지만 그만큼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만큼 그가 미웠다.
결국 헤스터는 도시를 떠났다. 잉그람의 정부가 계속해서 권하던 장기 의뢰를 수락하여 머나먼 북쪽 도시로 떠나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일했다. 그리 올리버를 잊으려 애썼다. 그를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려고, 고통에도 행복에도 무감했던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려고 허덕였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헤스터는 이제 예전처럼 깊게 가라앉은 마녀였다. 모두가 그것을 위대한 마녀의 자질로 평했으나, 헤스터는 그런 칭송조차 개의치 않았다. 이제 그녀는 바깥세상에 둔감했다. 마치 올리버와 만나기 전처럼 메마르고 건조했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
하지만 올리버와 마주친 지금, 헤스터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를 잊었는가.
정말로 이젠 무감한가.
헤스터는 확신할 수 없었다.
“헤스터 경과 아는 사이였군요. 미리 언질을 주지 그랬습니까.”
휴고가 손수 차를 따라 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맞은편에서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올리버가 불쑥 입을 열었다.
“마법은 왜 안 쓰시고.”
“겨울을 불러온 지 고작 3시간 지났습니다. 적어도 사나흘은 마법을 멀리하는 편이 좋아요.”
마법사는 별의 힘을 빌려 마법을 부린다. 그들의 마력은 전부 별에서 기인하므로, 자신의 육신을 그릇 삼아 마력을 담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따라서 거대한 마법을 부렸다면, 한동안은 마법을 자제하여 육신에 남은 마력을 배출하는 것이 옳았다. 과도하게 마법을 부리는 것은 육신을 소모하는 짓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무리하셨군요.”
“적측에도 상당한 마법사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요. 도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성공하셨습니다.”
“절반의 성공이라고 하지요. 아직 헤스터 경의 자매가 기차에 남아 있지 않습니까.”
올리버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나는 펜리 씨와 헤스터 경의 관계에 아무런 흥미도 없습니다. 나는 펜리 씨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헤스터 경과는 조금 안면 있는 사이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굳이 지금 그런 말을 하는 연유가 있으시겠죠.”
올리버가 지친 듯이 웃었다. 휴고가 단조롭게 대꾸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번 작전이 끝날 때까지는 부디 처신을 조심하세요.”
“조심히 처신하라는 의미는?”
“헤스터 경과 괜한 마찰을 빚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휴고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의 반응으로 보아 헤스터 경이 펜리 씨에게 품은 감정이 제법 격한 듯합니다만, 어쨌든 유일한 자매가 아직 구명되지 못했으니 최대한 협조할 겁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헤스터 경을 건드려서 공연한 일을 자초하지는 마십시오.”
“헤스터는 아마 제 얼굴만 보아도 진저리를 칠 겁니다.”
“그럼 가능한 한 피하면 되겠군요.”
올리버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흘끗 그를 쳐다본 휴고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펜리 씨. 나는 그저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집에 혼자 남은 뱀버도 걱정되고, 수리의 의뢰도 속히 해결해야 해요. 내 누이의 성정은 펜리 씨도 익히 잘 알 겁니다.”
휴고의 누이인 수리 알피어스는 <공정한 알피어스>의 수장으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몹시 엄격한 마녀였다. 한번 의뢰를 어긴 자에게는 미리 경고했듯 사례금도 건네지 않을뿐더러, 다시는 거래를 트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것은 혈육 간에도 적용되는 엄정한 원칙이었다.
“설마하니 고작 기차 한 대가 납치된 것으로 이렇게 발이 묶일 줄은 몰랐습니다. 늦봄에 겨울을 불러오게 될 줄은 당연히 꿈에도 몰랐고요. 그런데 보십시오. 간신히 겨울을 불러와 하늘의 질서를 어지럽혔건만, 적측 마법사는 아직도 활개를 치고 심지어는 헤스터 경의 자매까지 붙잡히지 않았습니까? 이 작전은 이미 어그러질 대로 어그러졌어요.”
휴고가 그답지 않게 투덜댔다.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매만지던 올리버가 문득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 마법사 말입니다. 팔목에 십자가 문신이 있더군요. 마법사 몸에 십자가라면, 제가 짐작하기로는 한 군데뿐입니다만.”
십자가는 산티그마 교단의 상징이다. 비록 지금은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지만, 지난 천 년 동안 지겹게 마찰을 빚어 온 상대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마법사의 육신이란 별의 마력을 담을 신성한 그릇이므로, 자신의 몸에 십자가를 새기는 마법사가 있다면 누구든 미치광이라 여길 터였다.
그러나 만일 강제로 새겨진 것이라면.
“혹 괄티에로 벨리를 말합니까?”
올리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 신중하게 골몰하던 휴고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괄티에로 벨리라면 마법사에게 십자가 문신을 새기고도 남을 곳입니다. 그 감옥을 운영하는 이들이 바로 산티그마 교단의 광신도들이니까요.”
“하지만 괄티에로 벨리의 죄인은 대개 무기징역이 아닙니까? 살아 나올 수 있는 곳이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시체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곳이 괄티에로 벨리입니다. 괜히 나락이라 불리겠습니까.”
살아도 감옥에서 살고, 죽어도 감옥에서 죽으리라. 지상 유일한 마법사의 감옥인 괄티에로 벨리는 마법 사회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탄생성은 무제타에 괄티에로 벨리 출신이라…….”
휴고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심했다.
“괄티에로 벨리에서 살아 나왔을 정도면 마법 사회에서도 꽤나 이름 높을 텐데요. 혹시 모르십니까?”
“내가 온전히 외우고 있는 마법사의 이름은 열 손가락을 넘지 않습니다. 기실 마법사는 인간처럼 남 일에 그리 관심이 많지 않아요.”
심지어 마법 사회에는 신문조차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중요한 소식이 있어도 협소하기 짝이 없는 네트워크를 통해 알음알음 퍼져 나갈 뿐이었다. 격년제로 열리는 발푸르기스의 밤에 이르러서야 어느 정도 원만한 소통이 가능할 지경이었다.
“무제타에 괄티에로 벨리라면 굉장히 특이한 조합이기는 합니다. 이명도감을 뒤져 보면 정체를 알 수 있을 듯한데 불행히도 나는 지금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군요. 일단 헤스터 경이 돌아와야 어떻게든 결단이 날 텐데 말입니다.”
휴고가 차분히 물었다.
“혹 다른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까?”
“억양으로 보아 남쪽 출신 같더군요. 예를 들어 메시나라거나.”
“그렇습니까.”
달리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머쓱해진 올리버가 재차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북방어로 쓰인 편지를 번역해 달라고 하더군요.”
“편지요?”
“예. 아무도 당신을 도울 수 없으니 혼자서 임무를 완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동료라기엔 미묘하군요.”
휴고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사는 ‘의뢰’를 받으면 받았지 ‘임무’를 받진 않았다. 맹약으로서 왕가에 속박된 반제의 마법사라면 몰라도, 잉그람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운신이 자유로운 메시나의 마법사가 임무 운운할 리 없었다.
올리버가 퍼뜩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마법사 눈이 붉었습니다.”
“……예?”
휴고가 멀거니 올리버를 쳐다보았다.
“원래는 두건을 깊숙이 눌러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마지막에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얼굴 윤곽이 조금 보이더군요. 워낙에 주변이 어두워서 생김새를 제대로 확인하진 못했지만, 눈이 붉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확실합니까?”
휴고가 다그치듯 물었다. 올리버는 조금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문제라도…….”
휴고는 고개를 수그리며 한참을 신음했다. 불안해진 올리버가 그를 재촉했다.
“휴고 경.”
“좋지 않습니다, 좋지 않아요.”
휴고가 드물게 초조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적안을 가진 괄티에로 벨리의 죄수라……. 마법사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
“그자의 이름은 니올로 팔리아치. <숭고한 팔리아치>의 수장인 칼롯타 팔리아치의 이복형제입니다.”
올리버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고명한 가문의 마법사가 어찌…….”
“가문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마법사는 위험해요. 미치광이입니다.”
휴고가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눈언저리로 공포가 스며들고 있었다.
“니올로 팔리아치는 대결을 핑계로 동족을 숱하게 살해하고 다녔습니다. 메시나, 잉그람, 반제……. 그의 악행은 국적을 가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가 괄티에로 벨리에 수감된 가장 큰 이유는 달리 있습니다.”
미지의 존재를 두려워하듯 휴고는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자는 ‘악마’를 소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