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악당을 조심하세요
크럼프턴 왕립 도서관.
잉그람의 왕도 오킹엄에 자리한 세계 최대(最大)의 도서관으로, 수백 년간 신축에 신축을 거듭한 끝에 역사상 가장 기괴하다는 오명을 얻었기로 유명하다. 실제 300년 전 건축된 본관은 2층 높이의 아담한 낡은 건물이되 20년 간격으로 신축된 별관들은 제각기 높이를 달리하는 마천루이니, 종국에는 꼬리가 개를 흔드는 아주 요상한 형국이 된 것이다.
이렇듯 무분별한 신축이 이루어진 덕에 크럼프턴 왕립 도서관은 당최 길을 찾을 수 없는 미로로도 악명 높았다. 계획적으로 도서관을 확장한 것이 아니라 늘 당면한 문제에 급급하여 신축했으므로, 어느 정도는 사세부득이했다. 하지만 그런 실정을 감안하더라도 이 도서관의 경우는 조금 심했다. 본관은 본관대로, 별관은 별관 나름대로 각각의 시대와 건축가의 특성을 반영한 까닭에 이편에서 적용되는 원리가 저쪽 별관에선 적용되지 않는 일이 빈번했다.
가장 비근한 예로, 더모트 왕조 말기에 신축된 별관에선 지도가 고정된 반면, 현 아크라이트 왕조 시대에 건축된 별관은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 기술과 마법이 접목되어서 계단과 책장이 시시각각 움직였다. 자연히 책을 분류하는 방식이나 관을 나누는 기준도 별관마다 상이했다. 심지어는 사서조차 자신이 담당하는 별관이 아니라면 길을 잃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별관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별관이 있었다. 바로 잉그람에 소속된 마녀와 마법사들이 전용하는 천년장미관이다. 200년 전 마법 사회와 산티그마 교단 사이의 천년전쟁이 종식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된 별관으로, 마녀를 위한 도서관답게 범인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원리가 적용된 기상천외한 곳이었다.
단적으로, 천년장미관은 단순히 책장이 움직이고 계단이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곳에 보관된 서적은 그 자체로 마력을 담은 그릇이나 다름없어서, 마법을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은 자칫 잘못하다간 그대로 책에 먹히는 수가 있었다. 천년장미관의 모든 사서들이 마법 사회의 일원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중 루퍼트 월시는 반년 전에 사서로 채용된 젊은 마법사였다. 스무 살을 넘겨 간신히 승급 시험을 통과했을 만큼 재능 없는 마법사였기에 도서관의 사서 노릇이나 하고 있지만,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마법 사회에선 천대받기 일쑤여도, 다른 직장에 비하면 봉급도 넉넉하며 업무량도 적었다. 관람객이 턱없이 적은 천년장미관의 특성상 그의 주된 업무는 책장을 벗어나려는 서적을 감시하거나, 특별히 취급하는 서적을 따로 관리하는 것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루퍼트 월시는 오늘도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혹자는 그의 게으름을 탓할지 모르지만, 애당초 천년장미관을 드나드는 마녀들은 일개 도서관 사서가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자연히 카운터 업무는 대출을 원하는 마녀에게 날인을 찍어 주는 정도에 불과했으므로, 루퍼트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똑똑.
그런데 불현듯 선잠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곧 사라질 줄 알았던 소음은 좀체 그치지 않았다. 결국 루퍼트는 잠에서 깨어나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똑똑.
소음의 진원지를 찾아 한창 카운터 주변을 뒤지던 루퍼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웬 자그마한 새가 부리로 유리 천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넌 왜 하필 거기 있는 거니…….”
루퍼트는 난처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낮의 햇살을 투영하는 유리 천장은 무지하게 높아서 그의 키로는 어림도 없었다. 마음 같아선 새가 제풀에 지쳐 날아가 버릴 때까지 가만 놔두고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천년장미관에는 소음에 민감한 책이 몇 있었다.
‘설마 이 정도 소음으로 책이 깨어나겠어?’
내심 루퍼트는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천년장미관의 관장인 빈센트 로치데일 경의 생각은 십분 다를 터였다. 그리고 루퍼트는 그의 상사이자 마법 사회에서도 엄격하기로 이름 높은 로치데일 경을 몹시 어려워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루퍼트는 하는 수 없이 비행마법을 써 보기로 했다. 써 본 지 하도 오래되어서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중을 위해서는 변명거리라도 만들어 두어야 했다.
루퍼트는 하얀 분필로 바닥에 약식 마법진을 그린 뒤 어정쩡한 자세로 그 위에 섰다.
성공률은 정식 마법진이 더욱 높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아바도어(語)에 그리 능하지 못했다. 마법을 실현하는 언령이나 의지의 재능을 이어받지 못한 마법사는 응당 마법진으로 마법을 발현해야 했고, 마법진을 그리는 데 필수적인 것이 바로 아바도어다. 그렇기에 아바도어 학습을 게을리한 루퍼트는 복잡한 정식 마법진을 그리지 못했다. 그가 낙제점을 간신히 면한 마법사인 것도 팔 할이 그런 연유였다.
혹시 마법진이 작동하지 않으면 어쩌지, 근심했던 것이 무색하게 루퍼트는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법진의 빛이 흐릿한 것으로 보아 오래지 않아 그칠 성싶었지만, 그는 마법을 성공한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어차피 새만 쫓으면 그만이다. 오래 비행할 이유가 없었다.
루퍼트는 물살을 가르듯 요상한 자세로 열심히 유리 천장으로 올라가 창문을 두들겼다. 그런데 새는 겁이 없는 것인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움직이긴커녕 여전히 부리로 창문을 똑똑 쪼기만 했다.
아무래도 수상쩍은 기분이 든 루퍼트가 창문 쪽으로 몸을 수그렸다. 곧 그의 낯에 난감한 기색이 서렸다.
저건 새가 아니다. 새의 형상을 본뜬 기계였다.
기계에 문외한인 그로서는 저 새가 기계장치로 움직이는지, 아니면 마법을 동력 삼아 움직이는지 알 길 없었다. 과학을 경시하는 마법 사회의 특성상 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높겠으나, 그렇다고 후자의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신문에서 괴짜로 이름 높은 알피어스 가문의 도련님이 과학과 마법을 접목하는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었다. 만에 하나 저 기계 새가 그런 종류라면 처치하기 한결 까다로워지는 셈이다.
루퍼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태로는 저 기계 녀석을 처리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일단 새를 붙잡아 둘 요량으로 창문을 열었다. 그러나 루퍼트 월시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기계 새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는 점이었다.
“어?”
창문을 열기 무섭게 기계 새가 도서관 안으로 쌩하니 날아들었다. 깜짝 놀라 휘청한 루퍼트가 허공에서 사지를 마구 휘저었다. 다행히 3층 높이에서 굴러떨어지는 참사는 면했으나, 어쩌면 더한 참사를 일으킨 것인지도 몰랐다. 가까스로 바닥에 착지한 루퍼트는 잔뜩 울상이 되어 기계 새가 날아간 방향으로 달음박질했다. 정체불명의 기계가 도대체 천년장미관에서 무슨 사고를 벌일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루퍼트는 무턱대고 서고로 뛰어들어 오랫동안 책장 사이사이를 헤맸다. 하필, 정말 하필이면 새가 날아간 방향이 서고였다. 서고에는 열람이 적은 책을 보관하기에 깊게 잠든 책들이 많았다. 그 말인 즉, 초보 사서인 루퍼트가 아직 대처 방법을 알지 못하는 희귀한 서적이 많다는 소리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마구 잡아 뜯었다. 만약 로치데일 경이 아신다면 당장에 도서관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그렇게 해괴한 망상을 떠올리던 중, 어느덧 루퍼트는 서고에는 드문 양지에 이르렀다. 흐릿한 볕이 조용히 내리쬐는 창가.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창가를 향해 선 뒷모습이 역광을 받아 짙게 그림자 졌다. 하지만 루퍼트는 그녀의 정체를 쉬이 알아챘다. 한 번 보면 쉽사리 잊기 힘든 미인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도 마법 사회에 발 담근 자로서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헤스터 솔.
위대한 마녀 그리젤다 솔의 딸이자, 별들의 왕이 축복하는 세기의 천재.
루퍼트는 그녀에게 혹 기계 새를 보았느냐 물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조용히 돌아가야 할지 고민했다. 다른 마녀였다면 눈 딱 감고 물었겠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현명한 헤스터’였다. 성년이 되기도 전에 정식 마녀로 발돋움했으며 스물다섯의 나이로 백색전당에 이름을 올린 전도유망한 마녀. 간신히 승급 시험을 통과한 루퍼트가 함부로 굴기엔 지나치게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헤스터 솔을 배로 어려워하는 연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빼어난 외양만큼이나 기묘한 분위기를 지녔다. 차분하고 우아하되 어딘지 건조한 분위기가 돌면서, 나이에 걸맞은 발랄함 대신 오래된 초상화 같은 처연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홀로 별세상에 있는 듯 요요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루퍼트는 결국 오늘도 헤스터 솔에게 말을 걸기를 포기했다. 매일 다짐하고 매일 포기하길 벌써 반년째지만, 내일도 이 짓을 똑같이 반복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쩌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렇듯 멍청한 짓도 서슴없이 저지른다는 것을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한데 그리 몸을 돌리려던 찰나, 루퍼트는 우연히 보았다. 헤스터 솔의 어깨에 가만히 앉아 있는 기계 새를.
“어라?”
루퍼트가 무심코 말문을 열었다. 뒤늦게 양손으로 입을 막았으나, 흘린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 말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창가에 동상처럼 멈춰 있던 뒷모습이 느릿하게 돌아갔다. 안개처럼 흐릿한 잿빛 눈이 이윽고 루퍼트를 향했다.
루퍼트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떠듬거리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그 새는…….”
“휴고 알피어스 경이 보낸 서신입니다.”
“서신이라니요?”
어디에도 서신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헤스터는 루퍼트의 의문을 풀어 주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실례지만 지도를 잠시 빌릴 수 있을까요?”
“이거 참. 휴고 경이 함께해 주시니 참으로 든든합니다.”
잉그람 북방 사령부 소속 옥슬리 대령은 기분이 몹시 좋았다. 오킹엄으로 향하던 기차가 난데없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에 혼비백산한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건만, 그때의 우환은 이미 사라진 듯했다.
이 모두, 눈앞의 젊은 마법사 덕분이다.
“저 혁명군이란 잡것들도 참으로 아둔하지 않습니까. 일을 벌이려면 장소부터 신중히 골랐어야지, 하필이면 휴고 경이 계신 펜잔스에서 기차를 납치할 것은 또 무어란 말입니까.”
옥슬리 대령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정작 상대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괜스레 민망해진 대령이 겸연쩍은 기색으로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휴고 경. 혹시 어디라도 불편하십니까?”
“……예? 방금 무어라 하셨지요?”
멍하니 찻잔만 내려다보던 마법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흐리멍덩한 눈빛이었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으십니다.”
“별일 아닙니다. 지난 사흘 꼬박 지새워서 그런지 조금 피곤하군요.”
“사흘씩이나요?”
옥슬리 대령이 떠름하게 물었다. 아무리 승리가 확실해도 거사를 앞둔 마당에 저리 상태가 좋지 않으면 아니 될 일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마도 마법을 쓰셔야 할 텐데…….”
“어차피 괴멸 직전의 조직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무기라 봤자 낡은 총기뿐이고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대령이 어물거렸다. 마법사는 소파에 깊이 몸을 묻으며 단조롭게 대꾸했다.
“그래서 언제쯤 출발합니까?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급한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국왕 전하의 명을 받고 급하게 나오느라 미처 뱀버의 식사를 챙겨 주지 못했습니다.”
“휴고 경은 미혼이라 알고 있었는데 자녀가 있으셨군요.”
“뱀버는 도마뱀입니다.”
“예?”
옥슬리 대령이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마법사는 연신 하품만 흘려 댔다. 자연히 대령의 시선에 불안감이 서렸다.
쉰을 훌쩍 넘긴 옥슬리 대령과 이렇듯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젊은 마법사의 이름은 휴고 알피어스다. 알피어스 가문 특유의 빛바랜 은발과 선명한 벽안을 지닌 덕분에 어디서고 눈에 띄는 인물이나, 마법사들이 으레 그러하듯 휴고 알피어스 역시도 타인의 시선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괴짜로 이름 높은 것치고는 사뭇 얌전하기에 시름을 놓았던 옥슬리 대령은 다시금 긴장의 끈을 조였다. 무릇 마법사란 협력이나 공익에는 당최 관심이 없는 족속이었다. 이번 사건을 잘 매듭짓기 위해선 어떻게든 저 무기력한 휴고 알피어스를 잘 구슬려야 했다.
“현장으로는 곧 출발할 겁니다. 그다지 멀지 않으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굳이 그럴 것까지야……. 좌표만 확인하면 지금도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휴고가 외알 안경을 매만지며 말했다. 옥슬리 대령은 애써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올렸다.
“물론 휴고 경은 출중한 마법사니 이동마법에도 능숙하시겠지요. 하지만 저뿐만 아니라 부관도 함께 움직일 예정입니다. 경은 부디 힘을 아껴 두셨다가 후일 기차를 되찾을 때 쏟아주십시오.”
이렇듯 귀에 단 말에도 휴고는 시큰둥했다. 대령의 극진한 대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인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맥락 없는 말이나 늘어놓을 뿐이었다.
“나는 마차만 탑니다.”
“예?”
옥슬리 대령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휴고가 쐐기를 박듯 재차 말했다.
“나는 생명체 위에는 안 탑니다.”
“생명체라 하심은…….”
“군인은 대개 말을 타지 않습니까? 나는 말을 타지 않으니 마차를 준비해 주십시오.”
무려 못 타는 것도 아니고 안 탄단다. 대령은 주먹을 꽉 쥐었다. 벌써부터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즉시, 최고급 마차로 준비하겠습니다.”
옥슬리 대령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마법사와는 상종도 하면 안 된다. 이들과 합동작전을 펼 때마다 늘 다짐하는 바였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그들의 비위나 맞추고 있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다 한들, 마법은 여전히 범인으로서는 닿지 못하는 경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참아야 한다. 잉그람 무장 혁명군은 30년 전 변방에서나 강성했던 조직이지 지금은 거의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찌어찌 운이 좋아서 기차란 대어를 낚긴 했어도 정작 기차에서 인질범 노릇하는 조직원은 고작해야 20명 남짓할 터였다. 그조차 이편에 강대한 마법사가 있음을 안다면, 기차를 납치했을 때 등등했던 사기는 일순간 가라앉을 것이었다.
전장에서 마법사의 존재란 본디 그러했다. 더구나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무려 <공정한 알피어스>의 직계다. 휴고 알피어스는 갓 서른을 넘긴 젊은 마법사지만, 마법 사회와 동떨어진 대중도 이름을 들어 보았을 법한 저명한 인사였다. 그러므로 잉그람 무장 혁명군의 마지막 발악은 아주 덧없이 끝날 것이었다. 마지막 무대로 펜잔스를 삼은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옥슬리 대령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는 벌써 다음 주 주말의 휴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무장 혁명군의 검거는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성공한 작전이나 다름없었다.
“음?”
별안간 새 한 마리가 집무실 안으로 날아들었다. 새는 붙잡을 새도 없이 포르르 날아가 곧장 휴고의 어깨에 안착했다.
“휴고 경?”
대령이 반쯤 몸을 일으켰다. 휴고는 한 손으로 새를 받쳐 들었다. 꼭 쥐면 부서지기라도 하듯 새를 매만지는 손길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휴고는 무언의 교신이라도 주고받는 것처럼 한참 새와 시선을 마주했다.
“손님이 오실 모양입니다.”
“예?”
그러나 옥슬리 대령은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휴고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느닷없이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대령이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 앞을 지키던 부관이 몹시 황망한 표정으로 상관을 돌아보았다. 부관의 머리 위에는 그의 것이 분명한 권총이 둥둥 떠 있었다.
그런 소란에도 휴고는 한가롭게 커피나 마셔댔다.
“벌써 도착했나 보군요.”
또각또각. 단정한 굽 소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옥슬리 대령은 바짝 굳은 얼굴로 문가를 지켜보았다.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게끔 왼손은 슬며시 등 뒤의 권총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부관을 제치고 문턱을 넘은 사람은 웬 낯선 여자였다. 그것도 몹시 아름다운.
“휴고 경.”
여자가 모자를 벗어 휴고에게 인사했다. 휴고도 머리를 까딱하며 예의를 차렸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헤스터 경.”
옥슬리 대령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휴고 경. 저 여자는 대체…….”
하지만 휴고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대령은 더욱 불안해진 눈빛으로 여자를 힐끗거렸다. 차분하게 틀어 올린 적발에 조막만 한 얼굴이 참으로 어여쁘긴 했으나, 아직도 부관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권총을 상기하면 당최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얀 장갑 낀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던 여자가 문득 대령에게로 다가왔다. 대령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그것이 무색하게끔 여자는 너덧 걸음 남겨 두고 멈춰 섰다.
여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헤스터 솔이라고 합니다. 잉그람의 국왕 전하께 작위를 하사받은 마녀이니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헤, 헤스터 솔이라면…….”
“휴고 경이 기차 승객 중 여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셔서 부득이하게 연락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세요.”
헤스터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옥슬리 대령은 넋을 놓은 얼굴로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여동생이라 하심은…….”
“동생 역시 마녀입니다만, 아직 경험이 일천하여 혹 무슨 고초라도 겪을까 심려되는군요. 혹 저도 작전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무리라니, 외려 이쪽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왕명이 아닌 이상에야 앞마당에서 사람이 죽어 가도 외면하는 것이 마법사일지니, 이렇듯 대단한 마녀가 자청하여 협조를 구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더군다나 헤스터 솔이라면 잉그람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천재적인 마녀가 아닌가.
“오히려 제가 감사드릴 일입니다. 참, 저는 찰스 옥슬리 대령입니다.”
대령은 재빨리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얼마 전의 휴고 알피어스가 그러했듯 헤스터 솔도 그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대령의 얼굴이 일그러지려던 찰나, 헤스터가 변함없이 건조한 얼굴로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옥슬리 대령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마법사란 족속은 겉이 반지르르할수록 되먹지 못한 모양이라고.
* * *
느닷없는 총성에 까무러쳤던 것도 잠시, 사위는 어느새 쥐 죽은 듯 가라앉았다. 승객들은 일제히 자리에 착석한 채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하염없이 정면만 응시했다. 총을 든 괴한이 이따금 복도를 거니는 소리만이 객실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디아나는 슬그머니 창밖으로 눈을 굴렸다. 여름을 향해 달음박질치는 5월 늦봄. 하루가 다르게 저녁이 늦어진대도 곧 해 저물 시간이다. 주변에 마을은커녕 인적조차 드문 풍경을 보아하니, 조금만 날이 어두워져도 금세 시야가 차단될 성싶었다.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던 디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이건만, 여기에는 복면을 쓴 괴한이 설치는 반면 바깥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 괴리감이 사무치게 통탄스러웠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기꾼이니, 언니의 전 연인이니 하는 시답잖은 고민에 시달렸다는 것이 당최 믿기질 않았다.
“아가씨, 너무 걱정하지 마.”
올리버가 속삭였다. 디아나는 깜짝 놀라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조, 조용히 해요. 난 총 맞아 죽긴 싫단 말예요.”
“동감이야. 그런데 저 녀석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지 않아?”
올리버는 그리 말하며 앞쪽을 눈짓했다. 그러고 보니 객실을 감시하는 두 명의 괴한이 머리를 맞댄 채 쑥덕거리고 있었다. 한눈에도 제법 심각해 뵈는 분위기였다.
“……그러게요. 아무래도 이상한데요.”
곧이어 괴한 하나가 황급히 건너편 객실로 건너갔다. 아직 총으로 무장한 괴한이 단신으로 남아 여길 감시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은 기운이 역력했다.
“저렇게 긴장한 걸 보면 그다지 좋은 소식인 것 같진 않은데.”
“쟤네한테 나쁜 일이면 반대로 우리에겐 좋은 일이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올리버는 태평하게 대꾸했다. 유심히 괴한을 관찰하던 디아나가 영 못마땅한 기색으로 그를 흘깃거렸다.
“그런데 왜 그렇게 태연해요?”
“뭐가?”
“그렇잖아요. 아까 저 혁명군인지 뭔지가 갑자기 객실로 난입했을 때도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잖아요.”
“아가씨가 나한테 그리 관심이 많은 줄 몰랐는걸.”
“계속 그럴래요?”
디아나가 짜증스럽게 그를 째려보았다.
“글쎄. 나라고 지금 상황이 기꺼울 리 있겠어? 난 그저 아가씨가 모르는 사실을 몇 가지 더 알고 있을 뿐이야.”
“……혹시 쟤네랑 공범이에요?”
디아나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올리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갑자기 웬 뜬금없는 의심이야?”
“수상하잖아요. 추리 소설을 보면 항상 댁 같은 사람이 흑막이라고요.”
“그건 소설이고.”
추리 소설은 디아나가 유일하게 즐기는 인간 사회의 문화였다. 자일스 남매의 면박에도 꿋꿋하게 취미를 포기하지 않았던 디아나는 평소 추리 소설에는 독자를 매료하는 마법이 담긴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수상하단 말이에요, 당신.”
디아나가 입을 삐죽였다. 때마침 괴한이 복도를 스쳐 지나가자, 무어라 대꾸하려던 올리버가 천연덕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괴한이 충분히 멀어졌을 즈음에야 도로 말문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 수상한지는 일단 차치하고. 내가 아는 사실을 말해 주면 조금이나마 의심이 풀리겠어?”
디아나는 의심의 칼날을 세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버는 막힘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우선 잉그람 무장 혁명군은 망하기 일보 직전의 조직이야. 옛날엔 서쪽 국경에서 꽤 유명했는데, 오늘 직접 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야.”
“왜요?”
“머릿수가 적잖아. 여기만 보더라도 감시하는 인원이 고작 한 명뿐이고. 물론 승객이 많은 칸에는 더 많은 인원이 배치되었겠지만 그래도 너무 적은 것 같지 않아?”
생각해 보면 그랬다. 상대적으로 인원이 적은 일등석 객실이라지만, 당장 여기 있는 승객만 합쳐도 족히 스물은 넘었다. 그럼에도 괴한 한 명이서 객실을 통제할 수 있는 까닭은 오직 무시무시한 총 때문이었다.
“저 총만 해도 그래. 저거 굉장히 구식이거든.”
“낡았다고요? 얼마나?”
“어림잡아 30년 전에나 유행했던 모델일걸. 혹시나 괜한 의심할까 해서 덧붙이지만 나는 사업상 총을 접할 기회가 많았을 뿐이야. 이상한 상상 하지 마.”
막 펼쳐지려던 상상의 나래가 금세 꺼져 버렸다. 디아나는 눈을 홉뜨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지금 누굴 뭐로 보는 거예요? 그리고 대체 무슨 사업을 하길래 총에 대해 그리 박학해요? 막 암흑의 조직한테 물자를 보급하거나, 그런 수상한 일 아녜요?”
“그것도 추리 소설에서 읽은 거지?”
그러자 디아나는 부어터진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뭐, 실제로 잉그람 무장 혁명군의 내부 상태가 어떤지는 나도 모르지. 이건 어디까지나 내 짐작일 뿐이니까.”
“그렇게나 자신 있게 말하더니…….”
“아가씨.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봐.”
올리버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혹시 펜잔스 하면 떠오르는 사람 없어?”
“펜잔스? 그게 뭔데요?”
“지금 기차가 정차한 이 도시 말이야.”
“여기가 도시였어요?”
디아나는 경악하여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황량한 목장에 불과하건만, 도대체 어디에 도시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여긴 근교야. 서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펜잔스란 도시가 있어. 아주 작은 도시지.”
“아주 작은 도시를 내가 어찌 알겠어요?”
“어라. 아가씨는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올리버가 놀리듯이 말했다. 디아나는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댁의 기대를 무너뜨려서 정말로 미안하네요. 그런데 정말로 모르는 걸 어떡해요?”
“그럼 휴고 알피어스라는 이름은 들어 봤어?”
“그 사람, 되게 유명한 마법사잖아요.”
휴고 알피어스는 마법 사회에 속한 자치고 모를 리가 없는 이름이다. 올리버가 그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반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마법사가 펜잔스에 살아.”
“……휴고 알피어스가 여기 산다고요?”
디아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기차가 점거된 상황이면 분명 근방의 마법사에게 사태를 진압하라는 왕명이 내려왔을 거야. 앞마당에서 사람이 죽어 가도 모른 척하는 게 마법사라지만, 본인의 이름을 걸고 서약한 이상 왕명을 무시하긴 힘들겠지.”
“그럼 휴고 알피어스가 우릴 구하러 온다는 거네요?”
“그는 그저 서약을 이행하기 위해 오는 거겠지만, 결론적으로는 우릴 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
아마도 우린 안중에도 없지 않을까. 올리버가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멀거니 그를 쳐다보던 디아나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당신, 혹시 마법사예요?”
엉뚱한 질문에 올리버는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이야. 혁명군의 공범에서 마법사라니, 추리가 너무 역동적인 거 아냐?”
“하지만 마녀인 나도 몰랐던 사실을 당신이 어떻게 알았는데요?”
“아가씨가 관심이 없었던 거겠지. 휴고 알피어스 정도 되는 마법사가 어디 사는지는 신문만 꾸준히 읽어도 알 수 있어.”
“그래도…….”
디아나는 찝찝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올리버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업상 휴고 알피어스와는 안면이 있어서 그래.”
이쯤 되면 저 남자가 무슨 사업을 벌이는지 묻기도 꺼림칙했다. 총을 자주 접하는 데다가 휴고 알피어스와는 안면이 있고, 더욱이―남자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2년 전까진 언니와 연인이었다는 남자.
어째 갈수록 아리송했다.
디아나는 객실 앞쪽에 서 있는 괴한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다는 짐작이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아까 전에 객실을 떠났던 괴한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고, 연락책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몸집의 사내만 바삐 객실을 들락거렸다. 연락책이 전하는 소식이 무언지는 알 길 없으나, 혼자서 객실을 감시하는 괴한은 눈에 띄게 초조한 기색이었다.
디아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현재 객실을 감시하는 괴한은 하나다. 총이 있지만 늘 그녀를 겨누지도 않았다. 외려 괴한은 겉보기에 조그만 소녀인 디아나에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얼굴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마녀라는 점이 이럴 때는 참으로 편리했다.
한마디로, 디아나에겐 거의 매 순간이 기회인 셈이었다. 어찌어찌 마법을 쓰면 그를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객실에 승객만 스물이 넘으니 괴한에게 총만 없다면 제압하기란 손쉬웠다.
문제는 마법이다.
다행히 디아나는 어머니로부터 의지만으로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재능을 물려받았으나, 위대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은 그게 전부였다. 모든 방면에서 어머니를 닮았다는 헤스터와 달리, 디아나는 마법을 발현하는 방법을 제하면 모든 면에서 어머니와 달랐다. 암흑의 별 칼리스토를 탄생성으로 삼았기에 심지어는 운용할 수 있는 마력도 적었다. 창조마법은 아예 손도 못 대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괴한에게서 총을 뺏는 것쯤이야 머리만 잘 굴리면 가능하다 쳐도 안타깝게도 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디아나는 기차에 혁명군 일당이 정확히 몇이나 있는지도 몰랐다. 하나는 문제가 아니로되, 뒤에 우글거리는 다른 일당이 문제였다. 그리고 디아나는 그들 전부를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일단 그럴 능력이 안 되었고, 자신을 죽이려 드는 상대와 마법으로 맞선 경험도 없었다.
그때, 불현듯 손등에 낯선 온기가 닿았다. 디아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올리버가 진지한 눈으로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고민을 꿰뚫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디아나는 도로 정면을 보았다. 괴한은 여전히 초조하게 연락책과 속닥거리고 있었다. 저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인질에겐 좋은 소식일 터. 더구나 펜잔스에는 무려 휴고 알피어스가 있었다. 굳이 그녀가 나서지 않더라도 대단한 마법사가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 디아나가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대었다.
무사할 것이다. 무사히 살아남아서 언니와 재회할 것이다.
* * *
“저 기차만 처리하면 되는 겁니까?”
휴고가 멀찍이 떨어진 기차를 가리키며 물었다. 옥슬리 대령이 그의 말을 친절하게 고쳐 주었다.
“기차가 아니라, 기차를 점거한 혁명군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그게 어떻게 같……. 둘은 엄연히 다릅니다.”
옥슬리 대령은 언성을 높이려다 말았다. 그에겐 당연한 상식이 마법사에겐 당연하지 않았다.
“작전의 목표는 기차를 점거한 혁명군을 처리한 뒤 승객들은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겁니다. ‘안전하게’요. 가장 중요한 건 승객들의 안전이다, 이 말입니다.”
“번거롭게 그럴 것까지야…….”
대령은 치솟는 역정을 가까스로 갈무리했다. 마법사란 본디 저런 족속이다. 수백의 목숨보다 자신의 안위가 훨씬 중한 이기주의가 뼛속에 아주 깊게 새겨져 있었다.
“승객들이 다쳐선 안 됩니다.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서라도 승객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예요. 더구나 기차에는 헤스터 경의 자매도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휴고는 그제야 납득했다.
“아, 그랬죠. 그럼 헤스터 경의 자매만 무사히 기차에서 나오면―”
“휴고 경. 헤스터 경의 자매를 포함한 모든 승객들의 안전입니다.”
옥슬리 대령은 눈을 감으며 강경하게 말했다. 그러자 휴고가 사뭇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곤란하군요. 뱀버의 식사를 챙겨 줘야 하는데.”
“경은 여기 계셔야 합니다. 대신 제 부관을 경의 사가로 보내겠습니다.”
“나는 아무나 집에 들이지 않습니다.”
그즈음 말없이 기차를 바라보던 헤스터가 이편으로 다가왔다. 대령이 머뭇거리며 그녀를 마주했다. 그는 아직도 저 기묘하게 아리따운 마녀가 몹시 어려웠다.
“대령은 저들이 기차를 점거한 이유를 압니까?”
“아니요. 혁명군은 기차를 점거했다는 소식을 전한 이후로 줄곧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실 듣지 않아도 빤하긴 합니다. 고작해야 잉그람에 혼란을 주는 것 정도겠지요.”
“하지만 저들의 의도를 정확히 모르면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울 텐데요.”
옥슬리 대령이 호탕하게 웃었다.
“여기 두 분의 마법사가 계신데 무어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혁명군은 거사를 벌일 곳으로 펜잔스를 택한 것과, 하필 헤스터 경의 자매가 탄 기차를 점거한 것을 죽도록 후회할 겁니다.”
그러나 커다란 웃음소리가 무색하도록 두 명의 마법사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멋쩍어진 대령이 괜스레 헛기침하며 체면을 차렸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무얼 하면 됩니까?”
문득 휴고가 물었다.
“당연히 승객을 구출하고 혁명군 일당을 잡아들이셔야지요.”
“그걸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거야 당연히 휴고 경이 마법으로 하셔야죠. 그걸 어찌 제게 물으십니까?”
옥슬리 대령이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더듬었다. 대리석처럼 매끈하던 휴고의 낯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나는 그런 건 못 합니다.”
“예?”
대령이 반문했다. 휴고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대령은 마법을 전능하게 여기는군요. 예. 마법은 전능할지 모르나 마법사는 전능하지 않습니다. 나는 대령이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지만 경은 이름 높은 마법사가 아니십니까? 분명 한여름의 백색전당으로 겨울을 불러오신 적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에 비한다면 훨씬 쉬운 일이 아닙니까? 저기 기차에 있는 혁명군이라 봤자 고작해야 스물 남짓 될 것인데……. 경도 손쉬운 일이라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때야 승객들의 안전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몰랐으니까요.”
휴고가 건조하게 말했다.
“나는 한여름에도 겨울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돌풍을 일으켜서 기차를 산산조각 낼 수도 있지요. 마법사로서는 드물게 대규모 마법을 다루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혁명군이 누군지 식별조차 되지 않는 원거리에서 누구는 공격하고, 누구는 보호하는 마법은 못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 기차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마법사는 흔히 전능한 존재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들이 부리는 마법이란 대체로 물건의 자리를 뒤바꾸거나, 마른 장작더미에서 부싯돌 없이 마찰을 일으켜 불을 피우는 등 아주 사소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겨울을 불러오는 휴고 알피어스처럼 대규모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는 극히 드물었다. 그조차 마법이 거대할수록 오차 범위가 커지기에 섬세한 조종은 무리였다. 게다가 책상에서 연구하느라 일생을 바치는 마법사의 특성상 일반인보다 허약한 신체로는 전장에서 앞장설 수도 없었다. 범인은 꿈도 못 꾸는 대단한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마법 사회가 산티그마 교단과 장장 천 년 동안 승패를 가리지 못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비로소 휴고의 말을 이해한 옥슬리 대령이 퍼렇게 질린 낯으로 헤스터를 돌아보았다. ‘현명한 헤스터’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싹텄다.
“헤스터 경은 어떠십니까? 가능하시겠습니까?”
헤스터는 침묵했다. 수심에 잠긴 눈으로 기차를 바라보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 혁명군의 연락을 기다리죠. 우리가 도착한 것을 보았을 테니 곧 기차를 점거한 목적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어느덧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불그스름한 빛이 목장으로 드리워지는 모습이 제법 절경이었으나, 창밖을 내다보는 디아나의 표정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객실은 어수선했다. 심각한 문제라도 벌어졌는지, 괴한은 객실을 감시하는 것보다 연락책과 소식을 주고받는 것이 더욱 급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리 수선을 떠는지 궁금했지만, 자고로 적의 어려움은 나의 기쁨이라 하였다. 그녀까지 불안에 떨 필요는 없었다.
디아나는 슬며시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였다.
“저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올리버가 말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디아나는 괴한을 계속 주시하며 속닥였다.
“어째서 날 알은척한 거예요? 언니랑 헤어진 지는 벌써 2년이나 지났다면서요. 굳이 나를 속여서까지 뭘 하려던 건데요?”
“헤스터와 사귀었다는 건 이제 믿어 주네.”
“와, 완전히 믿는 건 아니거든요? 착각하지 마요.”
디아나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올리버는 짧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냥. 아가씨랑은 언젠가 한번 만나 보고 싶었어. 헤스터가 아가씨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거든.”
“언니가요?”
디아나는 귀가 솔깃했다. 서로를 끔찍이 여기긴 했어도 실상 오래 함께하지는 못했던 자매다. 자연스레 언니가 자신을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듣고 싶어?”
그리고 그런 디아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올리버가 슬그머니 미끼를 던졌다. 디아나가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칭찬을 굉장히 자주 했어. 몰랐겠지만, 헤스터는 아가씨의 스승인 바바라 자일스와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거든. 아가씨의 일상을 시시콜콜 알고 싶었던 헤스터의 바람과는 달리, 바바라 자일스는 대개 아가씨가 최근 배우는 마법을 알려 주는 것에 그쳤지만 말이야.”
“스승님 성격을 생각하면 그 정도라도 알려 주신 게 신기하네요.”
마녀는 대체로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짙었다. 제자에게 무심한 것이 숫제 바바라 자일스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그래도 편지 내용은 꽤 괜찮았어. 대부분 ‘오늘은 이런 마법을 가르쳤는데 디아나가 열심히 배웠다.’ 정도였으니까.”
“설마 당신도 스승님의 편지를 읽은 거예요?”
“정확히는 헤스터가 보여 준 거지.”
디아나가 질겁했다. 올리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나 아가씨 스승의 편지가 도착한 날엔 헤스터의 표정이 유난히 밝았어. 그래서 은근히 이유를 물어보면 항상 아가씨의 칭찬으로 이야기가 흘러갔지. 아가씨가 이번에 어떤 마법을 성공했다든지, 아니면 스승에게 어떤 칭찬을 들었다든지.”
점차 디아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스승에게 칭찬을 받았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물론 걱정도 많았고. 아무래도 어린 동생과 떨어져 지내는 게 많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야. 듣자 하니 자일스 가문이 원체 특이하다며.”
“좋게 말해 특이한 거죠.”
“나쁘게 말하면?”
“성격파탄자 집단.”
디아나가 굳은 표정으로 단언했다.
“그래도 스승님은 나름대로 괜찮았어요. 나머지가 문제여서 그렇지.”
“헤스터도 그걸 걱정했어.”
올리버는 흘끗 디아나를 보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한 것도, 눈치가 빠른 것도 다 남의 집에 얹혀살아서 그런 것은 아닌지. 말을 아낄 뿐 정말 힘들게 지내는 것은 아닌지. 아가씨가 자기를 믿지 못해서 말해 주지 않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아가씨의 괴로움을 자신이 알아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걱정들.”
말이 이어질수록 디아나는 절로 시무룩해졌다. 올리버는 부드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헤스터는 평소에도 아가씨를 굉장히 많이 생각했어. 그래서 성인이 되기도 전에 승급 시험에 합격해선 닥치는 대로 일을 구했지. 듣자 하니 그 대단하신 어머니께서 물려준 빚이 상당했다며. 가능한 한 빨리 빚을 갚고, 아가씨가 도제 생활을 마칠 때까지 어떻게든 기반을 마련하는 게 헤스터의 목표였어. 종국에는 아가씨와 함께 사는 것이 헤스터의 꿈이었지.”
“…….”
“그러니까 아가씨는 생각보다 많이 사랑받고 있던 거야.”
디아나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올리버는 느긋이 그녀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디아나가 오래도록 말이 없자, 어쩐지 불안해진 올리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혹시 울어?”
별안간 디아나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눈가가 유난히 발갛긴 해도 눈물 자국은 없었다. 크게 숨을 들이쉰 디아나가 가까스로 소리를 죽여 말했다.
“안 울거든요!”
“그래. 지금은 안 우네.”
“아까도 안 울었다고요!”
“쉿. 조용히 해야지, 아가씨.”
올리버가 눈웃음치며 말했다. 디아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잠재웠다. 사람 약 올리는 재주가 어쩜 저리도 탁월한지, 금방의 감동이 벌써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네요?”
“뭐가?”
“방금 해 줬던 말이요. 언니랑은 2년 전에 헤어졌다면서 그걸 다 기억하는 게 신기해서요.”
디아나가 꽁하게 웅얼거렸다.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보다 아가씨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진짜,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는 법이 없어.”
“알았어. 장난은 그만할게.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올리버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글쎄. 난 헤스터가 한 말이라면 모두 기억하고 있거든.”
* * *
이슥한 밤.
멀리서 올빼미 우는 소리만 들려오는 황량한 철로에 수상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밤을 벗 삼아 나아가는 그들은 잉그람의 군인이었다. 사방이 훤히 내다보이는 기차의 위치상 한낮에는 진군할 수 없기에 야음을 틈타 혁명군을 제압하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어둡군요.”
그리고 휴고 알피어스는 기차에서 수백 미터 가량 떨어진 지휘 막사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늘 날씨가 흐리진 않았는데……. 그나마 객실의 불빛이 밝아서 다행입니다.”
맞은편에 앉은 헤스터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오늘부터 역천의 날이니까요.”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서쪽 하늘에 무제타가 떴습니다.”
“무제타는 나와 상성이 좋지 않은 별입니다. 시간을 오래 끌면 불리하겠군요.”
대화를 엿듣던 옥슬리 대령이 초조하게 물었다.
“혹시 위험한 상황입니까?”
“지금 기차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아직 들키진 않았군요.”
현재, 휴고 알피어스는 그의 왼쪽 눈으로 작전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헤스터에게 편지를 전달했던 기계 새의 부리에 왼쪽 눈을 물린 뒤 군인과 동행할 수 있도록 마력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사실 옥슬리 대령은 조금 전 휴고가 아무렇지도 않게 왼쪽 눈을 빼내는 것을 보고 기함했었다. 본디 왼쪽 눈은 의안이라지만, 오로지 연구를 위해 말짱한 왼쪽 눈을 잡아 뜯고 의안을 집어넣었다는 말에 대령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마법사에 대한 대령의 인식이 한층 더 나빠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기차 뒷문에 보초가 서 있군요.”
휴고가 말했다. 옥슬리 대령이 노심초사하며 재차 물었다.
“몇 명입니까?”
“글쎄요.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는군요. 아, 방금 죽었습니다.”
“예?”
“콧수염 달린 군인이 적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원래 총성이란 것이 꽤 크지 않던가요?”
옥슬리 대령은 허옇게 질렸다.
“곤란하군요. 이래서 총을 쏘기 전에 내게 신호를 보내 달라 말했었는데……. 역시 총성이 들린 모양입니다. 다른 일당들이 달려 나오는군요.”
“몇이나…….”
“너덧쯤 되어 보입니다만, 방금 한 명이 더 나왔습니다.”
대령의 낯이 숫제 시체처럼 해쓱해졌다.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헤스터가 입을 열었다.
“휴고 경. 적의 좌표를 알려 줄 수 있습니까?”
“계속 움직이고 있어서 정확한 좌표는 무리입니다.”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오로지 좌표만을 의존하여 마법을 전달하는 것은 대단한 고등 마법이다. 하지만 그조차 좌표가 정확하지 않다면 무용했다.
신속하게 생각을 정리한 헤스터가 이번엔 대령에게 물었다.
“옥슬리 대령. 마지막 칸은 화물칸이라고 했죠?”
“예? 그렇습니다만…….”
“휴고 경. 지금 상황이 정확히 어떻습니까?”
휴고가 단조롭게 대꾸했다.
“그리 좋진 않습니다. 적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어요. 수적으로는 아군이 우위를 점했습니다만, 적들이 짐칸을 방패 삼은 탓에 아군의 피해가 더욱 큽니다. 이런, 방금도 아군이 한 명 쓰러졌습니다. 자칫하다간 카나번도 위험하겠는데요.”
“카나번이요?”
“내 눈알을 가져간 새 말입니다.”
그렇게 휴고와 대령이 문답을 주고받는 사이, 골똘히 고심하던 헤스터가 말했다.
“휴고 경, 새를 마지막 칸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세요. 지금부터 마지막 화물칸을 폭파하겠습니다.”
책상 위로 지도가 펼쳐졌다. 지도를 위아래로 양분하는 철로 한가운데, 대령이 미리 그려 놓은 기차가 있었다.
“마지막 칸의 좌표가 I16PZ892 : 3846이 맞습니까?”
“헤스터 경. 안 됩니다.”
스산한 경고에 헤스터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껏 멀리 떨어진 왼쪽 눈에만 집중하던 휴고가 오른쪽 눈을 뜨고 엄중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은 역천의 날이지 않습니까. 무제타는 둘시네아와도 상성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좌표에만 의존하여 짐칸을 폭파하겠다니요. 마법이 불발한다면 역으로 경의 몸이 상할 것이고, 성공하더라도 좌표의 오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큽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아군이 폭발할 수도 있어요.”
역천의 날이란, 1년 중 역천의 별 무제타가 뜨는 여섯 날을 뜻한다.
무제타는 그 별칭처럼 별들의 왕 둘시네아에 반하는 별로, 세간에선 흔히 흉조로 여겨졌다. 평상시에는 쉬이 관측되지 않지만, 일단 역천의 날이 도래하면 무제타가 세력을 넓히며 별들의 왕 둘시네아는 물론이요, 둘시네아 권속의 다른 별들도 빛이 잦아들기 마련이었다. 아직 무제타의 힘이 가장 강성한 엿새째 역천의 날에는 이르지 않았어도, 별의 힘을 빌려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의 힘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아군이 폭발할 수도 있다는 말에 기겁한 옥슬리 대령이 헤스터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건 절대로 아니 될 일입니다. 일단 철수하지요. 다음에, 다음번에 다시 작전을 실행하면 되잖습니까.”
“철수가 가능한가요?”
헤스터가 조용히 물었다. 다시금 오른쪽 눈을 감은 휴고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장담은 못 하겠습니다. 이런 전투에는 처음 임하는 터라 감이 잘 잡히질 않는군요.”
기실 헤스터나 휴고나 전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일평생 책상물림으로 연구만 거듭해 온 이들이 처음 접하는 인간의 전투에 능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헤스터는 강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뭐라도 하지 않으면 더한 화를 당하리라는, 마녀 특유의 직감.
끝내 결심한 헤스터가 입을 열었다.
“휴고 경. 마지막 칸의 좌표를 확인해 주세요. I16PZ892 : 3846이 맞습니까?”
“헤스터 경!”
“옥슬리 대령, 침착하세요. 적들이 이렇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곳에 몰려 있는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성공한다면, 적의 머릿수를 단번에 줄일 수 있을뿐더러 아군이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 거예요.”
“하지만 실패하면요!”
“성공합니다.”
헤스터는 강경한 자세로 휴고를 돌아보았다. 결국 휴고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Rex stellas caeli…….”
헤스터의 입술 사이로 아바도어가 드문드문 흘러나왔다. 조금이라도 좌표의 오차를 줄이기 위해 주문을 외는 것이었다.
그리 주문이 이어질수록 막사에는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가지런하던 등불이 연신 일렁거리며 불안한 기운을 자아내고, 막사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시시각각 크기를 넓혀 갔다. 그리고 머잖아 헤스터의 반쯤 감긴 두 눈이 일순 황금빛으로 물들 무렵.
쾅!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뭐야! 뭡니까! 뭐가 폭발한 겁니까!”
멀리서 피어오르는 불길이 여기서도 훤했다. 당황한 옥슬리 대령이 휴고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그리 흔들면 어지러워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그에 대령은 휴고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얼른 놓았다. 다시 집중하여 수백 미터 떨어진 철로의 동태를 살피던 휴고가 감탄했다.
“화물칸이 폭발했습니다. 대단하군요.”
“적은요! 적은 어떠합니까?”
“전부 폭발에 휘말린 모양입니다. 추가적인 공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저들도 많이 놀란 듯싶습니다. 일단 카나번에게 철수를 지시했으니 아군은 곧 귀환할 겁니다.”
옥슬리 대령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사상자가 얼마인지 가늠하시겠습니까?”
“물론입…….”
대수롭지 않게 말을 잇던 휴고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내내 무료하던 벽안에 처음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적침입니다.”
“예? 방금 추가적인 공격은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기다리십시오. 나도 지금 제대로 상황이 파악되지 않습니다.”
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집중했다. 카나번이 어딘가에 처박히기라도 했는지, 왼쪽 눈에 비치는 시계(視界)가 캄캄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마력에서 기인하는 카나번과의 연계가 갑자기 약해져서 도무지 마음대로 카나번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질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시야가 반전되었다. 어두운 밤. 화염이 이리저리 솟아오르는 가운데, 바닥에는 잔인하게 짓이겨진 시체와 선혈이 낭자했다. 그리고 홀로 우뚝 선 인영(人影).
거대한 체구로 보아 사내로 추측되지만,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써서 정확한 생김새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불그스름한 불빛을 받은 입가만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 어디서 수상쩍은 기운이 느껴지더라니.
그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검지가 지나는 곳마다 섬뜩한 붉은빛이 깊게 새겨졌다.
― 발디비아의 마력으로 보아하니, 네가 그 유명한 휴고 알피어스구나. 직접 대면하길 고대했건만, 이런 시답잖은 장난감이나 보낼 줄은 몰랐다.
그는 허공에 새긴 글씨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이내 바람을 후 불어 모두 날려 보냈다. 그러고는 깨끗해진 허공에 다시금 붉은 글씨를 새겼다.
― 그런데 아까 화물칸을 폭파한 건 네 솜씨인가? 아주 훌륭하던걸. 휴고 알피어스는 겨울과만 친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난데없이 그의 주변을 감싼 불꽃이 화려하게 솟아올랐다. 새카만 밤하늘로 치솟는 불티를 맞으며 사내는 더욱 진하게 웃었다. 흡사 광기에 물든 미소였다.
― 다음번에는 직접 보길 고대하지.
허공에 마침표가 새겨지게 무섭게 시야가 끊겼다. 휴고는 갑작스레 찾아든 어둠에 현기증을 느꼈다. 옥슬리 대령이 황급히 휴고를 부축했다. 창백한 얼굴에 외로이 뜨인 푸른 눈이 잘게 흔들렸다.
“……모두 전멸했습니다.”
휴고가 힘겹게 말했다.
“저편에도 마법사가 있군요.”
* * *
음산한 한밤.
창문에 기대어 졸던 디아나는 느닷없는 굉음에 혼비백산하여 깨어났다. 올리버를 비롯한 다른 승객들도 경악한 표정으로 일제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째 뒤편에서 불길하게 불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때, 객실 문이 거세게 열렸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낯선 사내가 빠르게 복도를 스쳐 지나갔다. 검은 복면을 쓴 괴한이 성난 기색으로 그를 뒤따랐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쇠를 갈아 내듯 절로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였다. 괴한이 재차 소리쳤다.
“이보십시오!”
“거 되게 시끄럽군.”
앞서가던 사내가 갑자기 멈춰 섰다. 괴한이 씨근덕거리며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거기서 당신이 나가면 어쩌느냔 말입니다. 원래는 적의 본대가 오기까지 가만있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저 녀석들이 기차를 폭파했잖아.”
“그 정도 피해는 예상했습니다. 저기엔 휴고 알피어스가 있잖습니까. 적이 최대한 방심하도록 유도할 계획이었는데, 당신이 튀어 나가는 바람에 다 망쳤습니다. 이걸 대체 어쩔 겁니까!”
“그렇다고 도망가는 적들을 그냥 둬?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휴고 알피어스는 계속 후방에 죽치고 앉았을 거다. 내가 마법사라 잘 아는데, 원래 마법사란 족속은 엉덩이가 바위보다 무거운 법이야.”
“그러니까, 그게 원래 계획이었단 말입니다!”
괴한이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에겐 관심 없었다. 경악한 잿빛 눈이 오로지 사내에게 못 박혔다.
세상에, 마법사라니.
너무도 급작스러운 사실에 심장이 덜컹거릴 지경이었다.
“거 들은 말도 있고 해서 웬만하면 져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마법사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모건. 지금 대체 누구한테 그런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마법사의 분위기가 갑작스레 돌변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몰려들자, 괴한의 분노도 조금 주춤했다.
“너희 목표는 저 잡것들을 쓸어버리는 게 아니었나?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잉그람의 군대며 휴고 알피어스는 내가 다 처리할 거야. 그리 약속했으니까.”
“……우리 측의 피해를 최대한 막고 싶은 겁니다, 저는.”
“그래서 네가 그리도 아끼던 부하들을 죽인 놈들을 내가 친히 도륙 내 주었잖아.”
그러자 괴한도 더는 할 말이 없는 듯했다. 조금 전 살벌하던 분위기를 지워 낸 마법사가 짐짓 유쾌하게 물었다.
“그래서 반제인은 어디 있다는 거야? 일등석 객실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디아나가 화들짝 올리버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그녀의 유난스러운 반응을 발견한 마법사가 씩 웃었다.
“새파랗게 어린 계집과 사내놈이라. 생김새로 봐선 네놈이 반제 출신인 것 같은데. 맞지?”
마법사는 올리버를 턱짓하며 물었다. 북방의 대국인 반제의 사람들은 대개 키가 크고 체구가 건장했다. 잉그람식으로 세련되게 꾸미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국적인 특색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올리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는 흡족하게 웃으며 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모국어는 기억하겠지?”
“Sie m?ssen die Aufgabe erf?llen, und f?r sich zur?ckkommen. Niemand kann Sie helfen. Ich habe Sie vor einer Gefahr wohl gewarnt.”
낯선 이국의 언어가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마법사가 재촉하듯 종이를 흔들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뜻인데?”
하지만 올리버는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왜 이걸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무슨 헛소리야. 네가 반제 출신이니까 묻는 거지.”
“기차에 반제 출신이 나뿐인가?”
마법사는 조용히 올리버를 내려다보았다. 올리버가 여유롭게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누가 보낸 건지는 몰라도 꽤 급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빨리 알아야 하지 않겠나?”
살얼음을 밟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이어졌다. 잠시간 침묵하던 마법사가 시선은 여전히 올리버에게 고정한 채로 뒤편의 괴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법사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쳐다본 괴한이 머뭇거리며 권총을 넘겨주었다.
“난 사실 너처럼 배짱 있는 녀석들을 좋아한다. 곁에 두고 부리면 심심할 새가 없지. 하지만 말이야, 배짱도 상대를 보아 가면서 부려야지.”
총구가 서서히 올리버를 향해 올라왔다. 여전히 담담한 올리버를 유심히 살펴보던 마법사가 피식 웃었다.
“나는 너 같은 놈들을 잘 알아. 지금쯤 내가 절대 널 쏘지 못하리라 생각하겠지. 기차에 다른 반제인이 있다면, 이리 귀찮게 널 붙들고 있느니 차라리 다른 반제인을 불러올 테니까. 자신의 가치를 안다는 건 훌륭한 일이야. 그걸 잘 이용하는 건 더욱 훌륭하지. 네가 지금 거래할 수 있는 상황인지 날 떠본 것은 제법 괜찮은 도박이었다만, 말했듯 나는 너 같은 놈들을 아주 잘 알아.”
마법사가 팔을 틀었다. 올리버를 비껴간 총구가 서서히 옆으로 움직였다. 끝내 총구가 겨누는 이는 디아나였다.
마법사는 딱딱하게 굳어 버린 올리버를 마주하며 이죽이듯 말했다.
“이젠 어찌할 텐가? 영리한 장사치 양반.”
디아나는 극심한 공황에 빠졌다. 눈앞에서 부동하는 총구가 꿈인지 생시인지 당최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여태 스승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살아왔던 디아나가 난생처음 겪는 생명의 위협이었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저 자그마한 동그라미가, 그 안의 새카만 어둠이,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이 마치 곧 다가올 자신의 끝을 예견하는 듯했다. 승급 시험을 통과한 지 고작 하루 만에, 언니는 미처 만나지도 못하고 이렇게 볼품없이 죽는 건가 싶었다.
그러면서 슬슬 내려오는 동아줄 하나.
부를까, 말까.
평소라면 썩은 동아줄이라며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테지만, 정작 눈앞에 죽음이 닥치니 물불 가릴 겨를이 없었다. 눈앞의 마법사가 자신은 견줄 수도 없이 강대하다는 것은 한눈에도 알겠으니, 진정 그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 돌아올 파란을 떠올리면 쉬이 결단할 수가 없었다. 디아나는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양손을 말아 쥐며 떨리는 숨을 간신히 뱉어 냈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때, 불현듯 곁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할 테니, 총은 그만 거둬.”
디아나는 화들짝 올리버를 돌아보았다. 올리버는 날카로운 눈으로 마법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법사는 그제야 히죽 웃으며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이제 됐나?”
“……반드시 임무를 끝마치고 혼자 돌아오라더군. 누구도 당신을 도울 수 없다면서. 당신한테 경고도 했다는 걸 보니,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진 않는 모양이야.”
진지하게 경청하던 마법사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급한 일이라며?”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나?”
올리버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멀거니 그를 보던 마법사가 갑자기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기 시작했다. 괴한을 비롯한 다른 승객들이 질린 눈으로 마법사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돌연 웃음을 뚝 멈춘 마법사가 권총으로 올리버의 뺨을 휘갈겼다. 붉은 선혈이 창가에 튀었다.
마법사는 섬뜩할 만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리고 괴한에게 총을 돌려주며 경고했다.
“저 새끼, 잘 감시해.”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듯, 마법사가 지나간 객실에는 괴괴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기차가 무장 혁명군에게 점령되었을 당시 기차를 지배하던 것이 당혹이었다면, 지금에 이르러 기차를 지배하는 것은 공포였다. 마법사가 혁명군과 한편이란 것만도 놀라 까무러칠 지경인데, 그 성정조차 맹수처럼 사나웠다. 오래지 않아 구출되리란 근거 없는 희망이 차츰 희미해지고 있었다.
디아나는 울상으로 올리버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그녀에겐 관심도 없던 괴한이 이쪽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피 흘리는 올리버를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저기요. 괜찮아요?”
몸을 잔뜩 수그리고 있는 올리버를 보다 못한 디아나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올리버가 오른쪽 턱을 감싸 쥔 채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
“괜찮아. 별거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
올리버는 그리 말하며 어설프게나마 웃어 보였다. 기가 찬 디아나가 핀잔을 주었다.
“피까지 흘리면서 뭐가 별게 아녜요?”
“그냥 입 안쪽이 터진 거야.”
“하여간 말은 잘해요.”
디아나가 구시렁거렸다.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해요? 나까지 주, 죽을 뻔했잖아요.”
“그건 정말 미안해. 설마 아가씨한테까지 그럴 줄은 몰랐어.”
“……미안하다면 다인가?”
디아나는 적잖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올리버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영 쓸데없진 않았어. 몇 가지 수확이 있었으니까.”
“수확이라니요?”
“그 마법사. 아마도 괄티에로 벨리 출신일 거야.”
“에이, 설마요.”
괄티에로 벨리란,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악명 높은 감옥이다. 웬만한 흉악 범죄로는 발도 들이지 못하는 지상 최악의 교도소. 괄티에로 벨리로 후송되는 범죄자는 반종교적 행위를 범한 이단자나, 서약을 어긴 마법사뿐이었다.
“생각해 봐.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엔간해선 몸을 사용하지 않잖아. 조금 전 같은 상황이면 더더욱 마법으로 상대하려 들겠지. 그런데 그 마법사는 몸을 사용하는 게 굉장히 익숙했어. 그리고 아가씨도 알다시피 괄티에로 벨리에선 마법을 사용할 수 없지.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여도 육신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져야 하는 곳이 바로 괄티에로 벨리야.”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게다가 내가 아까 얼핏 봤거든.”
올리버는 자신의 손목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그 마법사의 손목에 십자가 문신이 있었어. 이 날씨에 뭘 그렇게 꽁꽁 싸맸나 싶더니 말야.”
비록 마법 사회와 산티그마 교단 간의 천년전쟁은 200년 전에 종식했으나, 두 집단의 앙금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올리버는 마법사의 십자가 문신을 괄티에로 벨리의 상부기관인 교단의 짓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디아나는 일생을 마법 사회에 몸담은 자로서, 육신에 교단의 상징을 새기는 미친 마법사는 듣도 보도 못했다는 것만은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괄티에로 벨리라니.
디아나는 진정 흉악한 범죄자인지도 모르는 마법사를 떠올리며 극렬하게 몸서리쳤다. 긴 여행이 되리라던 채스터티의 예언이 비로소 실감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