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활하지 못한 마녀에게-2화 (2/18)

#1

수상한 신사

잉그람(Ingram).

대륙의 중부를 차지한 국가이자, 요사이 문화적 경제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한 왕국. 잉그람인은 자국을 그리 평하며 자긍심을 드높이지만 기실 왕국의 위상 따위 마녀에겐 철저하게 관심 밖의 문제였다. 본디 마녀란 자신을 둘러싼 아주 협소한 세상만을 아끼는 족속이기에, 그들이 일말의 애국심도 지니지 않은 것은 일견 자명해 보였다.

그러니 마법 사회에서 평범하게 자라난 마녀 디아나가 잉그람을 별 볼 일 없는 나라로 치부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른 마녀들이 으레 그러하듯 디아나는 지금까지 잉그람이란 나라에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스승 탓으로 여태 수많은 도시를 전전했으나, 새로이 이사한 도시에 주의를 기울인 적도 거의 없었다.

어차피 도시란 크든 작든 대체로 엇비슷하지 않던가. 이러한 무관심은 작금 툭스베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나…….”

그리하여 툭스베리 기차역. 디아나는 성급한 일반화의 대가로 통렬한 자기반성을 하고 있었다.

한낮의 볕이 내리쬐는 기차역이 하얗게 바스라졌다. 반질반질한 대리석을 곱게 쌓아 올린 벽면으로 햇살이 투명하게 반사되고, 꼭대기에 걸린 시계가 황금빛 위용을 과시했다. 심지어는 기둥마다 잉그람이 자랑하는 아홉 성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이렇듯 분에 맞지 않게 으리으리한 기차역을 세운 여파로 도시가 처참히 파산하여 시장이 내쫓겼다는 내막을 물론 디아나는 알지 못했다.

‘기차역이란 원래 이렇게 웅장한 곳인가?’

디아나는 유달리 눈길을 끄는 금빛 시곗바늘을 관찰하며 시시한 고민을 했다. 실은 기차역에 와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은 바바라 자일스가 손수 이동마법을 부려 준 덕분에, 기차로 꼬박 닷새가 걸리는 거리도 눈 깜짝할 새 도착했었다. 애당초 어지간한 마녀들은 굳이 기차를 탈 이유도 없었다.

“예쁜 아가씨. 꽃 한 송이 사세요.”

그때, 꽃바구니를 든 어린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꽃이요?”

“예. 오늘 아침에 딴 꽃이어요. 어여쁘지 않나요?”

소녀는 그리 말하며 샛노란 튤립을 내밀었다. 가만히 꽃을 살펴보던 디아나가 홀린 듯이 지갑을 꺼냈다.

“두 송이만 줘요.”

늘 디아나를 수전노라고 야유하던 채스터티가 듣거든 아주 대경할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토록 바라던 독립의 날. 디아나는 절로 씰룩거리는 입가를 간신히 잠재우며 값을 지불했다. 물론 거스름돈을 꼼꼼히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디아나는 신문지로 엉성하게 싼 꽃송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채스터티 덕분에 일찍 도착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여유 부릴 상황도 아니었다. 기차표를 구입하고, 오킹엄행 기차를 찾아 올바른 좌석에 앉고, 기차표를 검표받고…….

앞으로 할 일을 찬찬히 꼽아 보던 중, 디아나는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보니 역내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부인과 신사로 가득했다. 사내들은 하나같이 정장에 실크해트를 착용했고, 여인들은 팔랑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굽이 족히 한 뼘은 될 법한 구두를 신었다. 저마다 부유함을 자랑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디아나는 새삼 자신의 차림을 살펴보았다. 스스로 여기기에도 참으로 초라한 행색이다. 철 지난 외투에 무릎 아래로 껑충 내려오는 잿빛 원피스. 심지어 굽 낮은 단화는 앞코가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언제 적 옷이길래…….”

“……유모가 입는 옷이 딱 저러했는데…….”

문득 어디선가 조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또래 여자애들이 디아나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수수하다 못해 궁상맞은 차림을 비웃는 것이 틀림없었다.

물끄러미 그편을 쳐다보던 디아나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고인 물처럼 침잠된 마법 사회에서 나고 자란 디아나는 인간 사회의 유행을 이해하지 못했다. 철 따라 달라지는 무늬나 장신구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니 볼품없는 차림새로 화려한 공작새 무리에 둘러싸인 지금도 그녀의 마음을 휘감은 것은 수치심이 아니라, 겉가죽만 그럴듯한 치에게 보내는 멸시였다.

도대체 누가 누굴 깔본단 말인가.

디아나는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가볍게 손짓했다.

그즈음 창틈으로 새어 든 봄바람이 별안간 짓궂은 마녀의 손길을 받아 흉포하게 화했다. 딱하게도 조롱할 상대를 잘못 찾은 이들은 갑작스러운 돌풍을 맞아 고래고래 비명을 내질렀다. 치맛자락이 죄 말려 올라가 흉한 꼴을 보인 것은 덤이었다.

디아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뒤편에서 훌쩍이는 소리며 웅성거리는 소란이 차츰 멀어졌다.

바야흐로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

과거에는 부유한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기차도 이제는 민중의 손을 타고 있었다. 매끈한 선로가 어느덧 잉그람의 드넓은 국토를 동서남북으로 가로질렀고, 거대한 비행선은 상용화를 꿈꾸며 매일같이 공장에서 발전을 거듭했다. 과학의 산물이 비로소 만인에게로 퍼져 가고 있었다.

그리 인간의 이성이 날로 솟아오르는 시대건만, 그럼에도 여전히 맨손으로 불을 피워 내고 주문으로 비를 내리는 전능한 자들이 있다. 빛나는 이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드높게 발전한 과학으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지고의 재능.

예부터 사람들은 두렵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우러렀다.

때로는 신으로, 때로는 귀신으로 불린 그들은 마녀(魔女)였다.

*      *      *

기차란 것은, 흉측하고 시끄러운 데다 냄새까지 심했다.

코를 틀어쥐고 기차에 오른 디아나가 질색하며 도리질했다. 검은 연기가 굴뚝에서 피어오를 때부터 의심해야 했건만, 기차에서 흘러나는 악취가 어찌나 매캐한지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객실로 진입할수록 악취가 잦아드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지금 디아나는 일등석 객실로 향하고 있었다. 평소 수전노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인색한 디아나가 값비싼 일등석 티켓을 끊은 것은 모두 그녀의 언니인 헤스터 때문이다.

평범한 동생과 달리 어머니로부터 대단한 재능을 이어받은 헤스터 솔은 스물다섯이란 젊은 나이에 벌써 백색전당에 오른 비범한 마녀였다. 하지만 그래 봤자 산더미 같은 빚만 물려받은 고아 인생. 디아나는 어머니의 빚을 갚느라 등골이 휘었을 언니를 생각해, 그동안 받았던 용돈을 전부 저축해 왔다. 그녀마저 독립하거든 언니 입장에선 군식구가 하나 늘어나는 셈이니, 일찍부터 돈을 모아야 한다는 기특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언니 된 헤스터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부디 기차에서만이라도 편안하라며 일등석 티켓값을 우편으로 부쳐 준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후일 티켓을 검사하겠다는 편지도 동봉한 터라 부득불 값비싼 일등석 티켓을 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열아홉 해를 바득바득 아끼며 살아온 디아나로선 차마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디아나는 조금 전 매표원에게 54갤런을 지불했던 것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54갤런이라니! 그 돈이면 무려 요물 고양이의 석 달 치 사료값이었다. 언니가 피땀 흘려 가며 번 돈일 텐데 고작 하루 편하자고 홀라당 털어 버린 셈이었다, 무려 54갤런을!

“언니. 분명 후회할 거야…….”

디아나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그녀는 일등석은 바라지도 않았다. 오킹엄으로 갈 수만 있다면 냄새나는 짐칸도 마다하지 않았을 터다. 그럼에도 일등석을 고집한 것은 언니고 저는 언니의 말을 따랐을 뿐이니 54갤런어치의 죄책감은 언니가 가져야 마땅하건만, 늘 그렇듯 만사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디아나는 한숨을 쉬었다. 언니처럼 지도의 좌표만 있으면 세상 어디고 갈 수 있는 마녀라면 참으로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디아나는 지극히 평범한 마녀였다. 그렇기에 이처럼 흉측하고 시끄러운 데다 악취까지 심한 기차를 타는 것이고, 그렇기에 언니가 이토록 걱정하는 것이다.

‘나야 지금까지 훌륭한 스승님의 보호를 받아 온 햇병아리나 마찬가지겠지.’

디아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객실 문을 밀었다. 일찍 도착한 편인지 좌석의 절반이 비어 있었다.

그녀의 좌석은 창가였다. 창밖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지만, 오른편에 다른 좌석이 붙어 있는 점이 못마땅했다. 으레 마녀들이 그러하듯 디아나는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했다. 자연히 낯모르는 사람과 온종일 붙어 지내야 하는 것이 영 마뜩잖았다.

하지만 기차에 탑승한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디아나는 애써 근심을 지워 내며 차근차근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등석답게 자리는 넓었으나 문제는 가방이었다. 작은 가방은 발밑에 둔다고 쳐도, 옷가지가 든 커다란 가방은 아무래도 곁에 끼고 있기 힘들었다.

난감한 기색으로 두리번거리던 디아나가 답을 구한 것은 근처의 노신사 덕분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신사는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 짐을 좌석 위쪽에 올려 두고 있었다. 멀뚱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디아나는 마찬가지로 제 좌석의 위쪽을 살펴보았다. 안이 텅 빈 것을 보면 짐칸이 분명했다.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난제는 끝나지 않았다.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도무지 짐칸으로 밀어 넣지 못하는 것이었다.

디아나는 난생처음 자신의 키를 원망했다. 장대처럼 큰 설리번 자일스와 늘씬한 채스터티 자일스, 그리고 순식간에 자신을 초월한 세드릭 자일스 사이에서 자랄 때도 꿋꿋했건만, 고작 짐칸 따위에 그간 공들여 쌓은 자존심이 무너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디아나는 이를 악물고 까치발을 들었다. 하지만 가방의 무게에 자꾸만 팔이 접혔다. 10cm만, 아니 5cm만 더 컸어도 이쯤은 쉽게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디아나는 내심으로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를 원망했다. 마법적인 재능으로도 모자라 키까지 언니에게 몰아준 아주 야속한 어머니였다.

“꼬마 아가씨가 고생이 많네.”

불현듯 지척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 바람에 지탱하는 힘을 잃고 떨어지는 가방을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낯선 손이 붙잡았다. 퍼런 핏줄이 도드라지는 성인 남자의 억센 손이었다.

“어이구, 조심해야지.”

남자는 그리 말하며 가방을 대신 올려 주었다. 디아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생경한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조그만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고는 좌석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가방을 대신 올려 준 것은 고맙지만 거기까지다. 디아나는 사람을 잘못 사귀어 패가망신하는 동족을 참으로 많이 보아 왔다. 귀한 연구 재료를 빼앗기거나, 합법적으로 재산을 강탈당하거나, 심지어는 일평생 연구한 성과를 도둑맞은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소중한 가족에게, 때로는 신뢰하는 벗에게, 때로는 사랑하는 반려에게.

그것이 바로 마법 사회가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고, 거기서 나고 자란 디아나가 사람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디아나는 빤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꿋꿋하게 창밖만 내다보았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였으나, 인간 사회에 면역이 없는 디아나로선 외면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누군가 옆 좌석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숨을 집어삼키며 슬쩍 고개를 돌리니 금방 가방을 올려 주었던 남자가 있었다.

“뭐, 뭐예요?”

디아나가 황망하게 물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부끄럽게도 목소리가 까뒤집혔다. 남자는 그런 디아나를 외려 이상하다는 듯이 보았다.

“내 좌석에 내가 앉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남자는 심지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디아나가 질색하며 몸을 뒤로 뺐다.

“여기가 확실해요? 티켓 다시 확인해 봐요.”

“응. 맞아.”

“정말요? 진짜로?”

“어.”

“티켓 이리 줘 봐요. 내가 확인해 볼게요.”

“글쎄, 맞다니…….”

엉겁결에 눈이 마주친 남자가 마치 번개라도 맞은 듯이 굳어 버렸다.

“……헤스터?”

그리고 뒤이어 흘러나오는 이름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디아나에게 언니 헤스터는 일생일대의 자랑이었다.

뛰어난 딸자식을 거느린 부모나 할 법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러했다. 열 살을 겨우 넘긴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남은 것은 철부지 여동생과 어마어마한 빚뿐인 상황에서 탁월한 재능만으로 지고의 자리에 오른 마녀. 건조한 어조로 일러 주는 신문으로 접했어도 혀를 내둘렀을 극적인 이야기건만, 그런 대단한 마녀가 무려 유일한 자매였다. 자랑스럽지 않고 어찌 배기겠나. 자연스레 디아나는 언니 헤스터를 심히 숭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낯선 남자가 언니를 말한 것에 지나치게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리 언니를 알아요?”

디아나는 곱지 않은 눈초리로 남자를 흘겨보았다.

“뭐?”

“우리 언니를 아느냐고요. 당신 대체 누구예요?”

“언니?”

얼이 빠졌던 남자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긴 헤스터일 리가 없지.”

남자가 헛기침하며 중얼거렸다.

“헤스터를 언니라 칭하는 걸 보니 아가씨가 디아나인가 보네.”

“뭐, 뭐요?”

목소리가 재차 뒤집혔다. 디아나는 철렁한 심장을 다독이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 도대체 뭐야? 누구길래 날 알아요?”

낯모르는 사람이 헤스터를 알아볼 수는 있었다. 비록 본인이 주목받길 꺼려 하는 탓에 이제껏 흔한 신문 인터뷰 하나 없었지만, 그토록 유명한 인사니 알음알음 알아보는 것이 경악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상황이 달랐다. 애당초 사람들은 위대한 마녀 그리젤다 솔에게 둘째 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세상에 알려지길, 헤스터 솔은 그리젤다 솔의 외동딸이었다.

“혹시 스승님을 알아요?”

그러니 남자가 그녀를 알 경로는 스승인 바바라 자일스뿐이었다. 바바라는 다른 마녀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팔 할을 은둔하며 지냈지만, <교활한 자일스>의 수장이며 잉그람을 대표하는 마녀로서 부득불 세상으로 나갈 때가 있었다. 물론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던 디아나가 바깥에서 스승을 보필하진 않았으나, 자일스답지 않게 순박한 구석이 있는 스승이 연고 없는 제자에 대해 괜한 이야기를 흘렸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어느덧 여유를 되찾은 남자가 비딱하게 턱을 괴며 대꾸했다.

“아가씨의 스승이 바바라 자일스였나? 미안하지만 그 마녀는 본 적도 없어.”

“세상에, 내 스승님이 바바라 자일스라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예요?”

“아가씨에 대해 어떻게 알았느냐면……. 실은 헤스터가 말해 줬어.”

“뭐라고요?”

디아나가 눈을 홉뜨며 남자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거짓을 확신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자는 겸연쩍은 듯이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어? 내가 그리도 못미덥게 생겼나?”

“당신이라면 믿겠어요? 우리 언니가 댁 같은 한량과 아는 사이라는데.”

“한량이라니. 나처럼 믿음직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남자의 항변에도 디아나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세상사 어두운 디아나의 눈에도 놀기 좋아하는 한량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단단한 체구에 번듯한 생김새. 조금 그을리긴 했어도 혈색 좋은 피부나 세심히 가꾼 다갈색 머리칼은 특별히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많이 쳐 봐야 이십 대 후반임에도 값비싼 일등석에 앉질 않나, 유행에 어두운 눈에도 제법 화려해 뵈는 옷차림이질 않나. 아무리 봐도 부모 잘 만나 일평생 놀고먹는 한량이 분명했다.

“나 참, 너무 잘생기면 이런 오해도 받는다니까.”

남자가 한탄했다.

“잘 들어, 아가씨. 나는 이래 봬도 잉그람에서 잘나가는 사업가야.”

“무슨 사업이요? 여자? 유흥? 아니면 도박?”

“……어린 아가씨가 못 하는 말이 없어.”

남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디아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 꼬마니 어린 아가씨니 하는데 난 진즉 성인이라고요. 올해로 벌써 열아홉이란 말이에요.”

“열아홉처럼은 안 보이는데.”

“신분증이라도 꺼낼까요?”

디아나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자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열아홉이라고 치자고.”

“열아홉이라고 치는 게 아니라 열아홉이 맞다고요!”

“그래, 그래. 그렇다고 칠게.”

“아, 진짜!”

분통이 터지는 듯 디아나가 양손으로 손잡이를 두드렸다. 남자는 그런 과격한 반응일랑 아랑곳하지 않으며 뜬금없이 중절모를 살짝 들어 올렸다.

“나는 올리버 펜리야.”

“누가 물어봤어요?”

디아나가 질색했다. 남자, 올리버는 야릇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궁금할 텐데. 내가 헤스터와 무슨 사이인지.”

그에 디아나는 침묵했다. 하늘같은 언니가 저런 한량과 무슨 사이인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마녀로서의 예리한 직감이 말하기를, 저 남자는 위험했다. 그렇잖아도 채스터티의 예언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와중에 저런 수상한 남자와 엮일 수는 없었다.

디아나는 끝내 남자를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안 궁금해요.”

“진짜?”

“네. 그러니까 더는 말 걸지 마요.”

디아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외면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지 않으면 후회할 텐데.”

“궁금하지 않다니……. 말 걸지 말라고 했잖아요!”

저도 모르게 대꾸하던 디아나가 바락 성을 냈다. 그러나 올리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헤스터의 연인이야. 그렇잖아도 아가씨와는 한번 만나고 싶었어.”

올리버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가워, 디아나.”

디아나는 도무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표정한 얼굴로 올리버의 손을 바라보다가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거짓말.”

“갑자기 웬 수상한 남자가 나타나서 언니의 연인이라 밝힌다면 나라도 굉장히 혼란스러울 거야. 그러니 당장 내 말을 믿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올리버가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와 꼭 한번 만나고 싶었던 건 사실이야. 헤스터가 늘 아가씨에 대해 얘기해 줬거든. 어린 나이에도 의젓하고 몹시 영특하다고. 자매가 이렇게까지 닮은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올리버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넋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던 디아나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언니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아, 그건 내가 말렸어. 아가씨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데서 외롭게 공부하고 있을 텐데, 갑자기 언니가 연애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심란할까 싶어서. 지금 보니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디아나의 눈빛이 점차 흐려졌다.

“언니는 정말 아무런 말도…….”

“아가씨?”

올리버는 그제야 이상함을 알아챘다. 손등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팔걸이를 움켜쥐던 디아나가 갑자기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올리버를 쏘아보는 눈빛이 자못 형형했다.

“거짓말! 언니는 나한테 그런 말 안 했단 말예요!”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이거, 이제 보니 완전 사기꾼이잖아? 앞으로 나한테 절대 말 걸지 마요! 말해도 대답해 주지 않을 테니, 혼자 떠들고 싶음 계속 말하시든가!”

속사포처럼 쏘아붙인 디아나가 대차게 고개를 돌렸다. 올리버가 당황하여 대꾸하려던 찰나, 느닷없이 요란스러운 굉음이 울려 퍼졌다. 기차가 힘차게 증기를 뿜어내는 소리였다.

부우우―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일과 레일 사이를 건너는 바퀴 소리가 쩔커덩거리며 속도를 더해 갔다. 그새 디아나는 올리버에게서 완전히 돌아앉았다. 도무지 대화할 틈이 보이지 않는 강건한 뒷모습에, 올리버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불편하게 몸을 기댈 수밖에 없었다.

*      *      *

요란스러운 식기 소리가 식당 칸에 쨍쨍하게 울려 퍼졌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승객들이 거북한 기색으로 창가 쪽에 자리한 테이블을 흘깃거렸다. 보다 못한 어느 신사가 대놓고 헛기침했으나, 안타깝게도 몰상식하게 식기를 놀리는 소녀는 주변의 불편한 분위기를 미처 감지하지 못한 듯싶었다.

물론 그 소녀는 디아나였다. 디아나는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달아나듯 객실에서 벗어났는데, 기차에서 달리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식당 칸밖에 없었다. 마침 허기도 지겠다, 팔랑거리며 식당 칸에 온 것까진 좋았으나, 상상도 못 하던 값을 식대로 지불하고 또한 금방의 일을 상기하며 자연스레 기분이 뾰족해졌다. 저명한 마법 가문에서 자라 상류층의 예절을 고스란히 체득한 디아나가 자각 없이 식기를 시끄럽게 놀려 댄 것은 바로 그런 연유였다.

“망할 자식.”

디아나는 포크에 분노를 담아 감자를 푹 찔렀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뭐? 언니의 연인? 어디서 그리그 프롬이 되살아날 소리나 하고 있어.”

간신히 가라앉았던 화가 다시 샘솟는다. 디아나는 마치 눈앞의 감자가 올리버 펜리인 것처럼 집요하게 감자를 짓이겼다. 정갈하게 마련된 요리는 분노한 마녀의 손에 금세 산산조각 났다.

“내가 우리 언니랑 얼마나 친한데. 만에 하나 연인이 생겼으면 맨 먼저 나한테 알려 줬을 텐데. 그런 중요한 소식을 내가 모를 리 없는데 어디서 거짓말이야. 본데없이 나쁜 자식. 못된 사기꾼. 자다가 가위나 눌려라.”

그리 화를 쏟아부으니 나름대로 속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디아나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불안하게 그녀를 지켜보던 급사가 얼른 엉망이 된 접시를 가져가고 대신 후식으로 커피를 내놓았다.

‘이게 다 채스터티의 불길한 예언 때문이야.’

디아나는 뜨거운 커피를 삼키며 속으로 불평했다.

채스터티 자일스가 정확히 어떤 꿈을 꾸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채스터티의 예언을 들어 좋을 것이 없음을 체득했기에 이번만큼은 예언을 듣지 않으려 무진장 애를 썼기 때문이다. 방심한 사이 ‘기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란 말은 듣고 말았지만, 기차에서 정확히 무슨 사건이 닥칠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 디아나는 부디 웬 사기꾼을 만난 것으로 오늘의 불운이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어차피 툭스베리에서 오킹엄까지는 기차로 꼬박 하루인 거리였다. 하루 사이에 벌어질 일이라 봤자 심각해야 얼마나 심각하겠느냐는 것이 그녀의 속내다.

손을 벌벌 떨며 지불한 값을 하는지, 후식으로 나온 커피는 자일스 저택에서 마셨던 것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맛이었다. 이윽고 디아나의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돌았다. 지금의 평온이 부디 내일까지 이어지길 간절히 소원했으나, 고급 커피가 겨우 진정시킨 마음에 재차 폭풍이 휘몰아치기까진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가씨?”

때마침 식당 칸으로 들어오던 올리버 펜리와 눈이 마주쳤다. 디아나의 얼굴이 즉시 시커멓게 일그러졌다. 올리버는 양해도 없이 맞은편에 앉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다시는 저이와 말을 섞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디아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올리버는 지극히 여유로운 태도로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할 뿐이었다.

“뭐 하긴. 커피 주문하잖아.”

“내 말은, 왜 하필 내 앞에 앉느냔 말이에요.”

“음. 아가씨랑 대화하고 싶어서?”

디아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서기 무섭게 올리버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이거 안 놔요?”

디아나가 눈을 부라렸다. 올리버는 미안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잡아서 미안해.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날 피할 수는 없잖아. 어쨌든 좌석이 붙어 있으니까.”

“좌석이 붙어 있건 말건 나는 사기꾼과 대화할 생각 전혀 없어요.”

“그게 문제야. 대체 아가씨가 왜 날 사기꾼으로 여기는지 정말 모르겠다니까.”

올리버가 열심히 항변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여전히 겨울바람처럼 냉랭했다.

“당신을 왜 사기꾼이라 여기냐고요? 자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나 늘어놓으니까 그렇잖아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니? 내가 헤스터의 연인이라는 걸 그렇게나 못 믿겠어?”

“한 번만 더 그런 헛소리 해 봐요.”

디아나가 으르렁거렸다. 올리버가 난처한 기색으로 턱을 쓸었다.

“헛소리가 아니면 어쩌려고 그래?”

“헛소리가 분명하니 이러죠.”

“도대체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건지 모르겠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디아나는 팔짱을 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제 보니 끈질기기로는 사흘 굶은 요물 고양이와 엇비슷했다. 그녀는 여기서 확실하게 매듭짓자는 생각으로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 나는 언니한테 그런 말을 들은 적 한 번도 없어요.”

“아까 말했다시피 내가 헤스터에게 알리지 말자고 한 거야. 아가씨는 외롭게 타지를 전전하며 공부하는데, 갑자기 언니가 연애한다는 소식을 전하면 마음이 심란해질까 봐.”

“지금 내가 질투라도 한다는 거예요?”

“딱히 그런 말은 안 했는데…….”

현명하게도, 올리버는 지금 디아나가 질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언니가 댁 같은 한량과 어울릴 리 없어요.”

“글쎄, 난 한량이 아니라 사업가라니까.”

“난 지금 당신의 직업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본성을 말하는 거죠. 당신이 사업가든 교회의 사제든 당신의 본성은 한량과 마찬가지예요. 내 마녀로서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요.”

디아나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자, 그러니까 한번 말해 봐요. 지금까지 만난 여자가 몇 명이에요?”

“오해야. 내겐 헤스터밖에 없었다고.”

“어머나, 그래요?”

디아나가 빙긋 웃었다. 어여쁜 미소와 달리 그녀가 쥔 찻잔에선 커피가 소용돌이치며 떠오르고 있었다. 마치 자그마한 태풍을 보는 듯했다.

올리버는 결국 꼬리를 내렸다.

“진정한 사랑은 헤스터뿐이었어.”

“사족은 필요 없고요. 도박도 해 봤죠?”

“젊은 혈기에 그만.”

“술은 언제부터 마셨어요?”

“열여덟 살 생일 때였나……. 잠깐, 잠깐만! 이건 진짜야! 이래 봬도 독실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다시 찻잔으로 손을 가져가는 모습에 올리버가 기겁했다. 디아나는 올리버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호감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우리 언니는 천성이 바른 사람이에요. 어릴 적부터 열심히 마법만 공부해서 세상에 어둡다고요. 그런 언니가 당신처럼 속세에 물든 사람과 왜 사귀겠어요?”

“뭐, 헤스터가 분에 넘치는 사람이라는 건 나도 동감하는데…….”

올리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디아나는 그를 째려보며 마디마디 힘을 주어 새기듯 말했다.

“만에 하나, 정말로 만에 하나 우리 언니가 댁 같은 한량과 사귄다면…….”

까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막을 거예요. 칼리스토의 광명에 걸고 맹세해요.”

흉흉한 기운이 보지 않아도 선명했다. 올리버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는 일찍이 분노한 마녀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임을 경험으로 알았다.

마침 급사가 커피와 디저트를 가져왔다. 덕분에 올리버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할 수 있었다.

“자, 아가씨. 이것 좀 먹어 봐.”

얼결에 접시를 건네받은 디아나가 의심스럽게 디저트를 살펴보았다.

“이거 푸딩 아녜요?”

“정확히는 판나 코타(Panna Cotta)야. 남쪽의 메시나 사람들이 즐겨 먹는 디저트지.”

“그런데 이걸 왜 날 줘요?”

“단 음식 좋아하지 않아? 헤스터는 굉장히 좋아하던데.”

디아나는 조금 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또 어찌 알았대요?”

“설마 연인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모를까 봐.”

어깨를 으쓱거리던 올리버가 별안간 동작을 멈췄다. 곧 그의 입가에 여트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런 방법이 있었네.”

올리버는 턱을 괴며 즐겁게 말했다.

“아가씨가 헤스터에 대해 질문하면 내가 대답할게. 만약 질문에 하나라도 답하지 못하면 앞으로는 말 걸지 않을 테니까. 대신 전부 맞히면 아가씨도 날 그만 피하는 거야. 어때?”

디아나는 시무룩하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마침 지나치는 들판도 푸르건만, 어째 그녀의 마음은 심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가씨. 주스라도 한 잔 마실래?”

바로 저 남자 때문에.

싱글거리는 올리버를 힐끗 쳐다본 디아나가 무기력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올리버는 예의상이어도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나지막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문을 읽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얄밉고도 고까웠다.

하지만 어쩌랴. 필승을 예견했던 내기에서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으니. 디아나는 이제 하릴없이 그와 붙어 지내야 했다. 오킹엄으로 가는 내내 이렇듯 불편할 것을 생각하면 그저 끔찍하기만 했다.

‘내가 멍청했지.’

디아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마녀는 함부로 호언장담하면 안 된다. 마녀의 말에는 기묘한 힘이 담겨 있어서 감히 마녀와의 약속을 어기는 자에겐 저주가 내린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 말을 지키지 않는 마녀에게도 통용되는 아주 삿된 법칙이었다.

“아가씨. 혹시 어디 안 좋아? 아까부터 안색이 별로인걸.”

“멀쩡하다 못해 미칠 지경이니 걱정 놓으시죠.”

디아나는 매정하게 쏘아붙이며 조금 전 식당에서 벌어졌던 일을 천천히 상기했다.

처음 헤스터에 대한 문답을 제의받았을 때, 디아나는 아주 자신만만했었다. 올리버 펜리가 사기꾼임을 굳게 확신했을뿐더러, 그녀가 언니를 생각하는 만큼 언니도 그녀를 소중히 여긴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기는 그녀의 예상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언니가 기르는 고양이의 이름이 뭐예요?’ ‘하얀 털북숭이 고양이를 말하는 거지? 이름은 미라벨이야.’ ‘그럼 언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요?’ ‘노란 히아신스. 선물할 때마다 좋아했지.’ ‘언니의 탄생성(誕生星)!’ ‘그건 너무 쉬운 거 아냐? 둘시네아잖아.’ ‘둘시네아가 뭔데요.’ ‘일명 별들의 왕. 하늘에서 가장 밝고 가장 강대한 별이지만 정작 뜨는 날은 1년에 하루 이틀밖에 안 되지.’ ‘그럼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책 장르는요?’ ‘소설. 원래는 리비우스 아우구스토의 『성화』를 가장 좋아했는데, 요즘엔 비안카 골드워디의 『탤벗 부인』 시리즈를 가장 좋아해.’ ‘어, 언니의 스승님!’ ‘황혼의 마녀, 아멜리아 베가잖아. 그건 신문만 조금 읽어도 알겠다.’ ‘그럼 언니가 할 줄 아는 언어는 알아요?’ ‘중앙어랑 아바도어는 능숙하고 북방어는 그럭저럭 의사소통은 가능한 정도.’ ‘언니가 가장 존경하는 마녀!’ ‘성(聖) 발렌티나 보르사.’ ‘……언니가 가장 잘하는 요리는 뭐예요?’ ‘아가씨. 헤스터는 요리를 못하잖아.’

올리버 펜리는 문제를 전부 맞혔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함정까지 골라냈다. 하지만 지금 디아나의 속을 쓰리게 하는 것은 달리 있었다. 언니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주제에 감히 그녀도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탤벗 부인』 시리즈는 뭐람?’

디아나가 아는 헤스터는 오로지 마법 서적만을 즐겨 읽는 고상한 마녀였다. 제목만 들어도 속세의 구린내가 풀풀 풍기는 그런 소설을 언니가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럴 리 없건만, 그럼에도 디아나가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은 까닭은 행여나 자신이 모르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음이 확실시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말로 언니가 저런 한량과 사귀는 걸까 봐.

디아나는 울적해졌다. 그저 많이 아는 것이 사랑의 깊이를 대변할 수 없음은 안다. 실상 지금까지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날이 드물었던 자매지간이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은 게 당연했다. 게다가 편지에 담을 수 있는 말보단 담을 수 없는 말이 더욱 많지 않나. 실제 디아나만 하더라도 스승의 무관심이나 채스터티의 괴팍함, 혹은 세드릭의 냉대 따위는 편지에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 수상한 남자가 언니에 대해 더 많이 알더라도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가 진정으로 언니의 연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디아나는 마지막 남은 일말의 희망을 붙들고 싶었다. 저이는 그저 허풍만 늘어놓는 사기꾼이고, 언니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그녀가 언니를 끔찍하게 생각하듯 언니도 자신만을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

그즈음 남색 제복을 입은 승무원이 다가왔다. 신분증과 표를 보여 달라는 말에 올리버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그리 승무원과 뻔한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조차 디아나에겐 곱지 않게 비쳤다. 진정한 사랑 운운할 때는 언제고 또 저렇게 다른 여자한테 눈이 팔려서 헬렐레한다. 디아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이를 언니의 연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어머, 반제 출신이시네요?”

“네. 멀리서 왔죠.”

반제(Wanse). 대륙 서북부에 위치한 왕국으로 잉그람과는 80년 전 수교를 맺은 나라.

디아나는 가방에서 신분증을 꺼내다 말고 멈칫하며 올리버를 올려다보았다.

“반제 출신이었어요?”

“응. 눈치 못 챘지?”

올리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뒤이어 북방어 억양을 지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한 일장 연설이 이어졌지만 디아나는 크게 귀담아듣지 않았다. 승무원에게 신분증과 표를 검사받는 내내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수상한 남자. 반제.

어쩐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이봐요. 아까 독실한 집안 출신이랬죠?”

디아나가 올리버의 말을 잘라 냈다. 올리버는 순순히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주교셨고 아버지는 신학자셨어. 나도 어릴 때는 신학교를 다녔고.”

반제 출신의 수상한 남자. 거기에 독실한 집안까지.

그제야 사방에 흩어져 있던 퍼즐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디아나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고향이 어딘지는 내가 맞혀 볼게요. 반제의 쇼이블레. 맞죠?”

“……내가 고향을 말한 기억은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올리버가 멈칫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디아나가 소리 내어 웃었다.

“왜요? 무서워요?”

“아가씨.”

“조금이라도 무서워하는 게 좋을걸요. 나는 당신처럼 언변만 좋은 사기꾼이 아니라 진짜 마녀니까.”

디아나의 얼굴에서 차츰 표정이 사라졌다. 올리버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느덧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일전에 언니가 말한 적 있어요. 반제의 쇼이블레 출신으로, 독실한 집안에서 자랐되 사제나 신학자가 아닌 남자와는 절대 상종도 하지 말라고.”

“…….”

“이번에는 또 무슨 궤변을 늘어놓을 건가요? 올리버 펜리 씨.”

얼마간 침묵이 이어졌다. 디아나가 기세등등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별안간 올리버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이마를 짚은 채로 한참을 낮게 웃더니 겨우 말문을 열었다.

“……세상에, 자매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올리버가 고개를 틀어 디아나를 보았다. 변함없이 짙은 갈색 눈이 유독 건조하게 느껴졌다.

“설마 헤스터가 그렇게까지 말했을 줄은 몰랐네. 물론 마지막이 좋지 않긴 했지만.”

“마지막이요?”

“그래. 마지막. 확실히 나는 헤스터와 사귀었던 적이 있어. 제법 깊은 관계였지.”

다만 2년 전에 헤어졌을 뿐. 올리버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디아나는 충격받은 얼굴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한때 연인이었다는 건 정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아가씨의 질문을 어떻게 다 맞혔겠어.”

“그건 그렇지만…….”

디아나는 여전히 혼란을 가누지 못했다.

“헤어졌다고요? 2년 전에?”

“그래.”

“그럼 지금 사귀는 건 아니죠?”

“그렇지.”

“하지만 한때는 연인이었던 거고.”

“맞아.”

예전에는 연인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디아나는 사실관계를 헤아리며 겨우 상황을 정리했다.

남자는 사기꾼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언니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한때나마―남자의 말대로라면― 깊은 관계를 맺었던 사람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던 언니에게 섭섭한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저리 수상한 남자와 일찌감치 연을 끊었다는 사실에 그저 다행스러운 마음만 들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디아나는 마음이 편치가 못했다. 어쨌든 언니가 저런 남자와 사귀었다는 데서 비롯한 불편함이라 치부하기엔 이유 모를 찝찝함이 계속 마음 언저리에 걸려 있었다.

“저기요. 하나만 물어도 되요?”

디아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랑은 왜 헤어진 거예요?”

혹시 대답하기 싫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돼요. 디아나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올리버는 신문을 반으로 접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답해 주지 않으면 헤스터한테 물어볼 거지?”

“……댁이랑은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헤어졌다면서.”

디아나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올리버가 쓰게 웃으며 속삭였다.

“아가씨. 진정으로 언니를 생각한다면 모른 척해 줘. 헤스터에겐 아마도 굉장히 끔찍한 기억일 테니.”

“네?”

“내가 헤스터에게 아주 커다란 죄를 지었거든.”

디아나가 의아한 기색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올리버의 표정이 참으로 서글퍼 보여서 결국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객실은 몹시 고요했다. 동행과 대화를 나누거나 시시때때로 식당 칸을 드나들던 다른 승객들은 대부분 선잠에 빠져 있었다. 오로지 철륜 굴러가는 소리만 사위를 울리는 가운데, 간간이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곁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저 사람은 잠도 없나.’

디아나는 푸릇푸릇한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집어삼켰다. 1시간이 넘도록 책에 빠져 있는 올리버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이럴 거였으면 저 남자가 사기를 치든, 거짓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을 걸 그랬다. 디아나는 불과 몇 시간 전 식당에서 올리버와 대거리를 벌였을 때가 그리워졌다.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로 있느니 차라리 그때처럼 의심하던 것이 나았다. 특히 올리버 펜리의 정체가 탄로 난 이후로 이유 모를 찜찜함이 눌어붙은 탓에 더욱 그러했다.

저이는 그녀가 바랐듯 악한 사기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은 언니와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다. 좋지 않게 헤어진 언니의 전 연인과 헤어진 연인의 자매. 세상에 그렇게 어중간한 관계도 없었다.

“저기…….”

디아나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이토록 불편한 분위기는 그녀도 사양이었다. 어차피 다시는 볼 일 없는 사람. 오킹엄으로 가는 내내 불편하게 함께하느니 빈자리로 옮겨서 조금이나마 편히 지내는 것이 나았다.

그런데 순간, 기차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기차가 돌연 앞쪽으로 급격하게 쏠렸다. 균형을 잃은 디아나가 기우뚱 앞으로 기우는 것을 올리버가 급히 낚아챘다. 곯아떨어졌던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좌석에서 굴러떨어졌고, 짐칸에 놓여 있던 가방들도 승객들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비명이 한데 섞여 불협화음을 냈다. 실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금방이라도 탈선할 것처럼 꿈틀거리던 기차가 안정된 것은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서였다. 올리버의 팔을 지지대 삼아 간신히 좌석에서 버티던 디아나가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객실은 고작 몇 분 만에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사방에서 신음과 울음이 빗발쳤다. 의사와 승무원을 찾는 소리도 끝없이 이어졌다. 디아나는 양손으로 입을 막은 채 몸을 잔뜩 웅크렸다. 감이 좋지 않았다. 등골 저미는 섬뜩한 기분에 불안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도중, 불현듯 시선이 창밖에 못 박혔다.

풍경이 움직이지 않았다.

기차가.

“……멈췄잖아.”

별안간 객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갑작스레 객실 전면에 등장한 세 사람은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심지어 그중 두 사람은 길고 까만 쇠붙이를 곧장 이편으로 겨누었다. 세상사 지극히 어두운 디아나도 저게 무언지는 알았다.

살인의 새 지평을 연 신식 무기.

총이었다.

신음도 울음도 어느덧 멈추었다. 쥐 죽은 듯 괴괴한 사위. 이윽고 괴한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잉그람 무장 혁명군이다.”

쇠를 갈아 내듯 선뜩한 목소리였다. 그는 승객들의 얼굴을 눈에 새기듯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로 이 기차는 우리의 손에 들어왔다. 우리는 혁명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크라이트 왕가와 대적할 것이며, 너희는 왕가의 부패를 알리는 첫 번째 횃불이 될 것이다.”

뒤편에 서 있던 괴한이 머리 위로 총을 쏘았다. 끔찍한 총성이 울리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빗발쳤다.

돌처럼 얼어붙은 디아나가 간신히 손만 움직여 올리버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잠긴 목에서 목소리를 끌어내기도 한참이 걸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저 사람들, 지금 총 쏜 거죠? 그렇죠?”

“나도 봤어, 아가씨.”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뭐예요? 저 사람들은 누구고?”

“글쎄. 아무래도 납치된 것 같은데.”

“납치라고요?”

올리버가 느긋하게 대꾸했다.

“기차가 납치된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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