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활하지 못한 마녀에게-1화 (1/18)

제1권

불길한 예언

디아나 솔은 마녀다. 정확히는 엊그제 막 수습 딱지를 뗀 열아홉의 어린 마녀다. 제법 자질이 있다면 열여덟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하는 것이 마법 사회의 관습이나 그렇다고 열아홉 되어 자립했음이 큰 누가 되지는 않는 법. 디아나 솔은 크게 재능 있는 마녀는 아니지만, 다행스럽게도 크게 못난 마녀도 아니었다.

“오, 디아나. 나는 네가 여기서 조금 더 머물 줄 알았단다.”

디아나의 스승인 바바라 자일스가 시름에 잠겨 말했다. 그녀는 저명한 마녀이며, 잉그람의 대표적인 마법 가문인 <교활한 자일스>의 수장. 고아인 디아나가 지금까지 바바라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큰 행운이었다.

“죄송해요. 실은 이달 내에 언니와 오킹엄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거든요.”

짐짓 아쉽다는 듯이 디아나가 유순하게 눈썹을 내려뜨렸다. 바바라는 디아나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미련이 가득한 투로 물었다.

“모레 세드릭이 오기로 했잖니. 널 배웅하겠다고 억지로 시간을 내서 온다는데, 그 애 얼굴도 보지 않고 가려고?”

“제가 언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잘 아시잖아요.”

“하긴……. 하나뿐인 가족이니 당연히 보고 싶겠지.”

바바라가 못내 섭섭한 기색으로 덧붙였다.

“네 고집을 잘 안다. 더는 말해도 듣지 않겠지.”

“스승님의 위명에 걸맞지 않은 부족한 제자였지만 부디 배은망덕하다고 여기지는 말아주세요. 이제껏 절 돌보아 주신 은혜는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디아나가 간절하게 말했다. 바바라는 쓰게 웃었다.

“알다마다. 네가 누구보다도 착한 아이라는 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단다. 나는 괘념치 말고 어서 출발하렴. 기차 시간에 늦겠구나.”

“오킹엄에 도착하면 꼭 편지할게요.”

“그래.”

바바라는 마지막으로 야윈 손을 디아나의 머리에 얹었다.

“칼리스토의 광명이 앞으로도 너와 함께하기를.”

디아나는 그리 순탄하게 바바라 자일스의 품을 떠났다. 일곱 살에 자일스의 도제로 들어왔으니 장장 12년 만의 독립이다. 비록 소질이 부족하여 1년 늦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올해 가까스로나마 정식 마녀로 발돋움했으니 되었다. 이제는 그토록 바랐듯 언니와 함께할 수 있었다.

마음이 들뜨면 자연스레 걸음도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숫제 날듯이 걷는 디아나의 뒤로 바바라가 기르는 요물 고양이 데이지가 따라붙었다.

“진저(ginger. 붉은 머리). 어디 가?”

고양이가 길게 하품하며 물었다. 디아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언니한테 갈 거야.”

“언제 돌아오는데?”

“안 돌아와.”

그에 고양이가 충격받은 모습으로 우두커니 멈춰 섰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바바라 자일스의 성정으로 고작 두어 달 머물렀던 툭스베리의 저택에는 아무런 추억도 없었다. 디아나는 옷가지를 넣은 큰 가방을 들고, 나머지 잡동사니를 넣은 작은 가방을 어깨에 둘렀다. 10년 넘게 연고 없는 어린애를 그럭저럭 잘 보살펴 주었던 스승에게 작별 인사도 했으니 더는 마음에 걸릴 것도 없었다. 고약하기 짝이 없는 자일스 삼 남매와 앞으로 마주칠 일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날아갈 듯 기분이 좋기만 했다.

잉그람 동북부에 위치한 툭스베리는 적당히 소란스러운 도시다. 밤낮 가리지 않고 길거리 악사들이 현을 켜는 벤네비스보단 조용했지만, 적어도 이웃집이 2시간 간격으로 떨어진 네틀턴보단 북적였다. 문제는 적당한 소란스러움에 걸맞게 당최 보행자를 배려할 줄 모르는 무질서가 판을 친다는 점이다.

“깜짝이야!”

디아나는 길가로 접어들자마자 자전거를 탄 신문 배달부와 부딪힐 뻔했다. 가까스로 몸을 틀어 피한 디아나가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멀어지는 배달부를 흘겨보았다. 사과 한마디 없이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이 참으로 불쾌했으나, 스승의 앞마당에서 쓸데없이 마법을 부렸다간 대번에 들킬 것이었다.

“마녀는 세 번 용서한다지.”

디아나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리며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매사 비딱하게 바라보는 디아나지만 오늘은 일평생 꿈꾸었던 자유의 날이다. 조그만 불쾌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이 맑았다. 실은 요 근래 쾌청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웬만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마녀의 특성상 아주 오래간만에 볕을 즐기는 참이었다. 디아나는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제자리에서 기지개를 폈다. 고양이처럼 느른한 얼굴에 만족감이 그득 서렸다.

그때, 수상한 마차가 눈앞에서 멈추었다. 화려하게 양각된 문이 스르르 열렸다.

“오래간만이야, 디아나. 빨간 머리는 여전하구나.”

마차 안에서 꿀처럼 농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계하듯 한 발자국 물러섰던 디아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두운 마차 안을 노려보았다.

“채스터티?”

“알면 타지 그러니? 짐이 무거워 보이는걸.”

디아나는 미간을 좁혔다. 스승의 수양딸이자, 지독하기 짝이 없는 자일스 삼 남매 중 둘째인 채스터티 자일스는 그녀가 질색하는 인물이었다. 평소라면 채스터티의 제안 따윈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어려웠다. 채스터티의 말대로 가방이 무거운 데다 기차역은 여기서 한참 멀었다. 게다가 툭스베리의 지리에도 익숙지 않으니 자칫하다간 기차를 아예 놓치는 수가 있었다. 남은 시간을 가늠하던 디아나가 머뭇거리며 마차에 올랐다.

두꺼운 커튼으로 창을 모조리 막아 버린 마차는 꼭 한밤처럼 어둑했다. 디아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주 앉은 채스터티를 흘겨보았다.

“네가 여기까진 웬일이야?”

“새침한 것도 여전하네.”

채스터티는 손짓으로 문을 닫았다. 이내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가 드디어 승급 시험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말야. 당연히 축하해 주려고 왔지.”

“스승님께서 알려 주시디?”

“설마. 어머니가 그리 세심하신 분이 아니라는 건 너도 익히 잘 알잖니.”

“그럼 누구한테 소식을 들은 건데?”

“누구긴 누구겠어. 우리 귀여운 세드릭이지.”

채스터티가 소리 죽여 웃었다. 디아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헛소리. 그 뱀 새끼가 왜?”

“믿든 말든 네 자유야. 어쨌든 나는 네 독립을 축하하러 온 거니까.”

“그 말도 도저히 못 믿겠어.”

디아나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네가 아무런 꿍꿍이도 없이 움직일 사람이야? 더구나 이런 친절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어.”

“느지막하게 독립하는 자매에게 베푸는 성의를 너무 비하하진 말아 줘.”

“자매 좋아하시네. 난 <교활한 자일스>를 자매로 둔 적 없어.”

못마땅한 투로 중얼대는 소리에 채스터티가 빙긋 웃었다.

“그래. 네 자매는 오로지 ‘현명한 헤스터’뿐이겠지.”

“……용건이나 말해.”

디아나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자 채스터티가 파이프를 빨아들이며 권태롭게 본론을 이야기했다.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최근에 이상한 꿈을 꿨거든.”

순간 디아나의 얼굴이 구겨졌다. 채스터티는 의심스러운 출신이나 괴팍한 성정으로도 유명했지만, 다른 방면으로 더욱 이름 높았다.

채스터티 자일스는 미래를 본다. 그래서 붙여진 이명(異名)이 예언의 마녀였다.

“자, 잠시만. 됐어. 난 안 들을래.”

“그래도 여기까지 와준 성의가 있는데 좀 듣지 그러니?”

“네 예언을 들어서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어. 이번에도 저주하는 말이나 하러 온 거지?”

“저주라니. 말이 심하잖아.”

채스터티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디아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웃음소리를 따라 퍼지는 담배 연기를 손짓으로 흩뜨렸다.

“다른 사람들은 억만금을 주고 듣고 싶어 하는 미래야. 혹시 알아? 이번에는 도움이 될지.”

“예언을 들어 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네가 본 미래는 불변한다며.”

“흐음,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내가 보는 미래는 아주 단편적일 뿐이야. 네 앞날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몰라.”

채스터티는 짧은 귀밑머리를 쓸어 올리며 묘한 눈빛을 했다.

“……예를 들어 네가 탑승할 기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는 전혀 모른단다.”

“야!”

무심코 예언을 들어 버린 디아나가 왈칵 성을 냈다. 채스터티는 음충맞게 웃으며 파이프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희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기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이번 여행은 조금 길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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