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91화
카온은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 멀리서 이상함을 눈치챈 병사들이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기사단을 생각해 주세요. 당신의 가치를 폄하하지 마세요. 우리를 믿고, 구해달라 말해주세요.
무엇 하나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카온은 병사들이 괴한이라며 자신을 체포하려 하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끌려갔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바제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바제트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카온의 퇴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고, 억울하여 허망하게 물러나고 말았다.
‘고마워.’
바제트의 입술의 움직임만이 그의 시야에 오랫동안 남았다.
카온이 바제트를 말리지 못했던 그 날 밤.
바제트는 예정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수많은 귀족 앞에서, 독주를 마시고 외롭게 죽어간다.
치안 기사단의 감옥에 수감된 카온은 주군이 죽음을 맞이했음을 직감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죽고서 거리에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 * *
“……도와야 합니다.”
“우린 제국을 지켜야 한다.”
“제국이 먼저입니까, 가주님이 먼저입니까!”
“……가주는 제니트 님이시다.”
카온은 이를 갈며 부족장을 노려보았다.
제국의 수도에 수많은 게이트가 생성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용인을 비롯한 드라노이드 기사단원들이 수도로 모였다.
바제트의 죽음으로 탈주한 단원을 제외한 모두가 황실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분은 가주님, 바제트 로드십니다.”
“그게 뭐가 어쨌단 거냐?”
미카일의 수복인 기사 한 명이 카온의 말에 반기를 들었다.
“그분은 이미 타계하셨다. 저 악마가 그분의 환생이라 한들 변하는 건 없어. ‘바제트’는 죽었고, 우린 ‘제니트 가주님’의 부하란 걸 명심해라.”
카온은 기사의 모멸을 무시하고, 부족장을 향해 말했다.
“용인은 주군을 섬겨야 합니다. 여기서 누구 하나 제니트 도련님을 섬기는 용인이 있습니까? 다들 바제트 로드를 섬기던 것 아니었습니까?”
도련님이란 호칭에 기사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카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제트가 죽은 후, 드라노이드의 용인들은 모두 주군을 잃은 충격에 빠졌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바제트가 남긴 ‘제국을 지켜라’는 명령에 사력을 다할 뿐이었다.
주군이 죽었으니, 주군이 남긴 명령을 지킨다.
명령이라면 따라야 한다. 용인은 그런 종족이니까.
“제국이, 명령이 주군보다 먼저입니까? 주군의 복수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
족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용인이 카온의 주장에 침묵했다.
카온은 답답함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들의 침묵이 의미하는 건 뻔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셈입니까?”
“우린 그분을 배신할 수 없다.”
“제국을 치는 건 명령에 어긋나서 안 되고, 그렇다고 제국을 지키기 위해 로드와 싸우는 것도 안 된다고? 그럼 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부족장은 한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이 우리의 죽음을 원한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이-”
카온이 분노에 찬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잡아끌었다. 연대장 중 유일하게 가문에 남아있던 인물, 홉킨스였다.
“그만해라. 원래 이런 녀석들이란 거, 너도 알잖아.”
누구보다 강인하고 고집스러운 종족은, 주군의 앞에선 한없이 무력한 부하나 다름없었다.
주군의 명령을 거역하지도, 그녀의 뜻을 거부하지도 못한다.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들의 목숨을 가져가길 바란다면, 기꺼이 내줄 의향이 있다.
“그런 태도가…….”
이런 일방적인 충성과 기대가, 바제트를 얼마나 망가뜨려 왔는가.
누군가가 그녀의 곁에서 당신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주장할 수 있었다면, 당신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방패가 되어주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용인처럼 그저 충성만 맹세하는 머저리들 덕분에, 바제트는 홀로 죽고 말았다.
그건 자신도 다르지 않다. 카온은 바제트를 말리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섰다.
“어디 가냐?”
“로드를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다 죽어. 가주님은 지금 제정신 아니야.”
“……연대장님은 아직 가주님이라 부르는군요.”
“그야 물론이지.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또다시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홉킨스를 보고 카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홉킨스는 곧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다.
“만약 말이야.”
카온이 황실을 나가려 할 때, 홉킨스가 그의 뒷모습을 보고 말했다.
“가주님의 환생을 믿는다면, 3번가로 달려가. 아직 죽기 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권유였다. 하지만 이 마지막 권유를 기억해 둔 카온은, 3번가에 있는 게이트에 들어가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게이트의 입구는 다름 아닌 지구, 한국의 서울로 이어져 있었다.
* * *
“로드.”
카온은 부상을 입은 채, 바제트를 바라보았다. 갑옷을 입은 바제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술은 분명 바제트의 것이 맞았지만,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언데드, 혹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인형.
수많은 동료가 바제트의 검에 쓰러지는 걸 본 카온은, 이 모든 상황이 우연이 아님을 눈치챘다.
누군가가 바제트의 죽음을 욕보이고 있었다.
“로드가 이런 방식의 복수를 원하지는 않았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중앙 귀족의 죽음은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바제트를 믿고 따르던 전우들이 용서를 빙자한 자살을 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결코 카온이 원하던 광경이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던 바제트라면, 분명 히 끔찍한 상황을 멈추려 할 것이다.
과다출혈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황에서, 카온은 저도 모르게 홉킨스가 이야기했던 3번가로 향했다.
바제트는 그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다른 ‘명령’이 있던 건지, 알 방법은 없었다.
3번가엔 작은 게이트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걱정 마라.’
왠지 귓가에 홉킨스의 목소리가 들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카온은 게이트로 몸을 던졌다.
* * *
“형님, 여기 웬 이주민 녀석이 있는데요?”
“챙겨봐라, 돈이 될지도 모르니까.”
무례한 이들의 목소리를 끝으로, 카온은 눈을 감았다.
모진 고문의 시간이 지나고,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로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잘 따라와. 난 불평하거나 뒤떨어지는 애들은 내 사람으로 안 두니까.’
찬란한 그의 주군이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 * *
기나긴 회상이 끝나고, 카온은 가만히 진희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의도적으로 진희에게 밝히지 않은 과거도 제법 있었지만, 대략적인 그의 성장 과정은 모두 설명했다.
홉킨스의 관한 이야기나, 제니트의 원한에 대해선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없어 어물쩍 넘어갔다.
카온의 이야기가 끝나자 진희는 턱을 괴며 쓰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왜 네가 날 좋아하는지 그 이야기만으론 감이 안 잡힌다. 결국 카온은 바제트와 대화 나눈 게 딱 한 번이잖아? 게다가 홀대당했잖아.”
“상관없습니다.”
“용인은 참 알 수 없어.”
바제트는 어지간히 대단한 충성심을 가진 부하들도 학을 뗄 주군이었다.
무력과 기사도 하나는 본받을 만했지만, 자살이나 다름없는 죽음이라니, 진희가 생각해도 기가 찼다.
“용인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카온의 미약한 반항이었다. 다른 용인과 같이 생각하지 말란 뜻이다.
다른 용인이 바제트에게 죄의 책임을 넘길 때, 카온만은 바제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마지막 선택지가 무너진 건 카온의 탓이 아니라, 바제트의 탓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진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카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잘 알았어.”
“……마스터?”
“잠깐만 있어봐.”
진희는 의자 위로 무릎을 올리고, 카온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카온은 성인식을 못했다고 했지?”
드라고노이드의 성인식은 가주의 아래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드라노이드 가문은 멸망했으니, 그 역할을 진희가 대신해 줘야 했다.
진희는 그대로 팔을 벌려 카온을 껴안았다.
“……이건 성인식이 아닙니다.”
“가만있어 봐. 원래는 망토를 둘러줘야 하는데, 그게 없잖아. 이걸로 만족해.”
“…….”
진희의 온기를 느끼며, 카온은 숨을 참았다. 만족이고 자시고, 진희의 체취가 코앞에서 느껴져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왔다.
“용의 피를 이어받은 전사의 후예여.”
기사의 취임식처럼, 용인의 성인식 또한 기도문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진희는 드라고노이드의 기도문이 아닌, 자신만의 기도문을 읊었다.
“수많은 역경을 거쳐, 주군의 곁으로 돌아온 기사여.”
지금은 끔찍한 기억으로 남은 바제트의 인생에서, 어쩌면 카온을 만난 그 순간이 가장 뜻깊은 만남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바제트의 처지를 동정하고, 복수를 원하는 부하는 있었지만, 카온처럼 바제트에게 짐을 떠넘기고 싶지 않아 선택을 강요한 이는 없었다.
어찌 보면 하극상일지 모르지. 진희는 생각했다.
“네 귀환을 환영하노라.”
카온이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진희를 알아보았을 때, 얼마나 큰 감격에 휩싸였을까.
모습이 바뀌었다 한들, 자신의 주군을 다시 섬기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처음으로 신께 감사드렸다.
“네 충성을 의심하지 않노라.”
진희는 바제트가 아님에도, 그의 충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영혼과 기억이 온전히 남아있는 한, 카온은 진희가 타락하더라도 충성을 바칠 생각이었다.
“네 애정을 부정하지 않노라.”
그 충성 속에, 자그마한 애정이 꽃피어나고 있다는 걸.
진희가 모를 리 없다.
진희는 카온의 머리를 꽉 껴안았다.
거친 적발 사이에 턱을 기대고, 마치 성인식에서 바제트가 그랬던 것처럼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예여, 그대를 나의 전사로 인정하노라.”
“……따릅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쪽, 진희가 카온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팔을 풀었다.
어느새 붉어진 카온의 양 뺨을 장난스럽게 꼬집으며, 진희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죽을 때까지 날 섬겨야 해. 배신은 용서하지 않아. 파란 기사단의 규칙이야.”
“물론입니다.”
‘마찬가지야. 당신을 구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니까.’
‘우연이라도, 제겐 운명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운명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나도 너를 운명이라고 생각하겠다.
그렇기에 더 이상 운명을 거부해선 안 된다.
“넌 내 거니까.”
“예, 전 당신의 것입니다.”
진희는 카온에게 성인식을 내려주었고, 카온은 진희에게 운명을 받아들었다.
카온이 진정한 의미로 성인이 된 날의 일이었다.
외전- 카온의 성인식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