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89화
“신입.”
“…….”
곁에서 같이 순찰을 돌고 있던 동료 기사가 카온을 불렀다.
카온이 투구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 어딜 보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전방을 주시하고 있지 않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예.”
카온이 뒤늦게 대답하자 기사가 한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로서 그분의 모습을 찾는 거야 이해는 하지만, 너무 티를 내진 마라.”
“……죄송합니다.”
귀족의 온갖 음해에 시달린다고 해도, 바제트는 여전히 기사들에게 전설적인 존재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이 거리가 그녀에게 검 한 수 가르침 받기 위해 인산인해가 되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것도 귀족들의 눈치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지만.
“어?”
그때, 마침 건너편 길에서 바제트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항상 보아오던 기사단 제복이나 갑옷 차림이 아닌, 귀족들이 의례 입는 튜닉을 걸치고 있던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충성.”
“그래.”
기사와 카온은 자리에 멈춰서 경례를 올렸다. 정중하게 경례를 받은 바제트는 둘을 지나쳐, 저택으로 들어갔다.
“와, 실물은 나도 처음 본다. 정말 아름다우시구먼.”
바제트의 모습이 사라진 후, 기사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색빛 머리카락의 바제트는 마치 극단의 배우를 보는 것처럼 묘한 아름다움이 풍겼다.
기사는 근무한 지 1년째지만 바제트를 본 게 처음이라며 카온에게 오늘의 운수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카온은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마르셨어.’
튜닉에 가려지긴 했지만, 바제트의 얼굴엔 피곤한 안색이 엿보였다.
본래도 근육이 돋보이는 체격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바제트는 가문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연약해 보였다.
“아니, 근데 왜 혼자 계시지? 사용인이 없나?”
동료 기사는 이상한 듯 중얼거렸다. 카온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볼일 때문에 외출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바제트 정도의 신분을 가진 이가 사용인도 없이 돌아다니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눈썰미가 좋았던 카온에게 걸리는 점은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튜닉과 어울리지 않던 해진 군화와 밑단이 뜯긴 바지, 병사들에게 보급되는 싸구려 검까지.
화려하진 않아도 정갈한 복장을 하고 있던 바제트의 모습이라곤 볼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순찰을 끝내며 카온이 이를 악물었다. 누구에게도 이유를 물을 수 없으니, 그가 직접 알아내야만 했다.
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 * *
“향락의 끝이지.”
선임 기사는 현재 수도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일축했다.
“전쟁이 끝나고 너무 많은 돈이 들어왔어. 백성들은 체감이 안 되겠지만, 지금 수도 귀족들은 돈이 썩어 넘쳐. 괜히 수도 안에서 수십 개의 상단이 만들어지고 있겠어? 다 귀족들이 돈 쓰려고 만드는 거지.”
“전쟁의 전리품 때문입니까?”
“그래. 더불어 수도 귀족들의 힘이 강해지기도 했고.”
몰락 귀족 출신인 선임 기사는 초췌한 안색으로 술을 병째로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그는 홉킨스의 후임이었다. 카온을 받아준 것 외엔 아무런 참견도 하지 않았지만, 귀족에 대해선 할 말이 많았는지 카온이 질문해 오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황제가 힘이 너무 약해. 황태자와 2황자 간의 싸움도 슬슬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데, 그게 오로지 황궁의 힘이 아니란 점이 아이러니하지. 전쟁을 벌인 건 황태자고, 승리한 것도 황태자인데, 정작 실리는 황태자를 후원하는 중앙 귀족이 다 챙겨가고 있거든.”
“황태자가 무능한 탓입니까?”
“그것도 있지만, 중앙 귀족들이 줄을 잘 갈아탄 것도 있어. 그거 알아? 지금은 전쟁의 후유증이 남았다고 씹어대던 중앙 귀족이, 전쟁 중에 황태자를 가장 많이 지원해 준 자들이란 거?”
아무리 바제트가 대단한 장수라고 한들,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전쟁의 사이즈가 생각보다 커지기 시작하자, 황태자는 보급을 위해 귀족들에게 손을 벌려야만 했고, 그때를 노린 부유한 중앙 귀족은 황태자의 줄을 손에 넣었다.
“골수 황태자파는 이제 힘이 없어. 중앙 귀족들이 2황자를 포기하고 황태자를 선택하면서, 수도의 권력 구조는 재편성되었다고 봐야지. 그나마 황태자파에서 강한 힘을 가졌던 게 드라노이드지만…….”
드라노이드가 내부에서 분열되고 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전쟁 영웅이자 당대 가주로 여겨지고 있는 바제트와, 능력은 볼품없지만 발이 넓고 귀족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제니트의 대결 구도는 귀족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바제트가 수도에 갇히고, 제니트가 가주인 양 활동하기 시작하자 드라노이드의 힘은 반으로 줄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드라노이드의 힘은 기사단의 힘이다. 기사단의 추종을 받는 바제트와 기사단을 제외한 가신을 모두 장악한 제니트의 충돌은 드라노이드 가문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그걸 놓칠 중앙 귀족이 아니었다.
“하여간, 지금 수도는 향락에 빠져 있다. 드라노이드의 바제트라는 공공의 적을 만들어 놓고, 승전 보상을 누리고 있거든.”
“……가주님이 복수할 수는 없습니까?”
“본인의 의지가 있다면야, 어떻게 기사 가문들을 섭외해서 반등의 기회라도 마련하겠지만…… 그 사람이 그럴 성격이 아니지.”
바제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토록 답답한 상황에서 지내는 걸 선택했는지, 카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카온의 표정을 살핀 선임 기사는 한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친 거야.”
“…….”
“뻔해. 전쟁터에서 그토록 구른 양반인데, 돌아와 보니 아군이란 작자들이 저 꼴이니까, 지쳐버린 거지. 전쟁 전에도 권력욕이나 재물욕이 없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그저 쉬길 바라고 있을걸?”
“좀 더 편안한 휴식을 바랄 수 있잖습니까?”
“그걸 위해 희생될…… 아니, 아니다. 네가 직접 보면 되겠다.”
선임 기사는 혀를 차며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카온에게 던졌다.
“바제트 경이 왜 그 꼴이 됐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봐라.”
“이게 뭡니까?”
“감옥 열쇠. 가봐. 지하 3층이다. 내가 보냈다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선임 기사는 다시 술병을 들었다. 카온은 손에 쥔 열쇠 꾸러미를 내려다보다, 이내 경례를 하고 방을 나섰다.
수도의 감옥은 총 세 개가 존재한다. 귀족들을 수감하는 황궁의 감옥과 평민을 가두는 경비초소의 감옥, 그리고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기사단의 감옥.
규모는 가장 작지만, 이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들은 하나같이 특별한 사정을 지닌 이들이었다.
카온은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지하로 내려갔다.
감옥을 지키는 기사에게 열쇠 꾸러미를 보여주며 안으로 들어선 카온은, 이윽고 지하 3층 가장 깊은 곳에 갇힌 한 무리를 발견했다.
세 개의 방에 각각 나눠진 상태였는데, 다른 죄수들과 달리 수갑도 차지 않고 평상복 그대로 갇혀 있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첫 번째 방에 있던 중년의 부부가 카온을 발견했다. 투구를 썼기에 카온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체격을 보고 기사라고 생각한 것인지 사내의 목소리엔 정중함이 담겨 있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카온은 이들이 왜 이곳에 갇혔는지 물었다. 선임 기사가 카온을 이곳에 내려보낸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사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카온을 바라보았다. 복장을 보아하니 기사단 소속인데, 굳이 죄명을 묻기 위해 자신을 찾아왔단 사실이 의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수인 그가 기사의 질문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자신의 죄목을 밝혔다.
“바제트 님께 폭언을 했습니다.”
“……예?”
예상치 못한 대답에 카온이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제 죄는 귀족 능멸입니다만, 사실이 아닙니다. 전 합당한 책임을 물은 것뿐입니다.”
“책임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카온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되묻자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전쟁의 책임입니다. 저희 아들은 바제트 님 휘하 사단의 병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무리한 전략으로 인해 사망한 전사자죠.”
사내의 사연은 이러했다.
앞선 전쟁 때 부부의 아들은 병사로 징집당해, 바제트의 아래서 최전방을 담당하게 되었다.
바제트의 부대는 언제나 승리하며 적군에게 공포를 안겨주었지만, 휘하의 병사들 또한 공포에 시달린 건 마찬가지였다.
바제트의 기사단이 너무나 강력하자, 적군은 바제트가 아니라 후방을 노리는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기사단이 지키지 않고 있던 후방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그중엔 부부의 아들도 있었다.
“패전의 책임을 묻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저, 왜 거기까지 진격을 해야 했느냐, 이 말입니다.”
바제트는 너무 광범위한 영역을 점령했다. 소수의 인원으로 적군을 몰아낸 건 대단한 성과였으나, 제아무리 바제트라고 한들 점령한 영역을 전부 지킬 수는 없었다.
결국 진영에 구멍이 뚫리고만 것이다.
“……그건 바제트 님의 탓이 아닙니다.”
카온이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부적인 전략은 바제트가 짜는 거지만, 전투의 작전과 점령 범위는 바제트가 정하는 게 아니라, 총사령관인 황태자의 몫이었다.
“물론 전체적인 작전을 짠 사령관의 탓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불합리한 명령에 따라, 부하들을 사지에 몬 것은 바제트 님입니다. 그녀가 좀 더 소신 있게 행동했다면 이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어요. 병사와 기사 사망률을 본 적 있습니까?”
“지금껏 전쟁에서 사망한 비율 중, 이번 전쟁처럼 병사가 많이 죽었던 적은 없습니다. 반대로 기사들은 아주 많은 이가 살아남았죠. 이게 말이 됩니까?”
“기사들이 제 명예를 위해 병사를 제물로 바친 것과 뭐가 다릅니까?”
근거 없는 헛소리였다.
장군에게 패배의 책임을 물을 순 있어도, 승리의 뒷감당을 묻다니.
카온이 할 말을 잃어 멍하니 입을 벌렸다.